33강-엡 4장 7절(선물과 복음)1907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7절입니다. 신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셨다고 이야기해도 되고요, 복음만 주시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지식으로 탐구하고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분명히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니까 율법이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로 여기고 그걸 열심히 연구하고, 탐구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멸망이었고 예수님에게 ‘너희 아비는 악마’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율법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랐어요. 자기 딴엔 순진하려고 애를 썼는데 순진은 순결이 아닙니다. 자기 보기에 자기는 솔직하다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완전한 순결을 요구하거든요.
인간이 순진하다 하는 것은 지금 마귀에게 속아 넘어갔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순진하게 살자. 순진하게 산다는 그것이 자기의 악마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시킨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복음을 이미 준 마당에서 십자가 복음이 복음답게, 유익하게 주어지는 사람은 따로 뭘 받아야 되느냐?
7절에 보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되어 있어요. 선물을 줬다는 거예요. 선물을 줬다는 것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투입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네 것 안 받겠다는 이야기거든요. 사도가 이렇게 선물을 언급하는 것은 사실은 순진한 체 하는 인간에 대한 모욕입니다. 이런 모욕이 없어요.
열심히 하세요. 그것은 모욕이 아니지요. 그런데 선물로 말미암아 구원된다. 이것은 모욕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도 이미 보셨잖아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는 이것이 인간모욕입니다. 모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 교인들 보니까 선물 받은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안 받은 것 아니에요? 받은 척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선거철이 되면, 물론 요새는 없어졌다 하는데요, 요새도 농협조합장 선거할 때는 더러 있기도 하지요. 요새는 거의 없어졌다고 하는데 선거철이 되면 후보자들이 선물을 줘요. 자기선거구 주민들에게 막 선물을 안겨준다고요.
그럴 때 제일 기분 나쁜 것은 뭐냐 하면, 후보자가 내 친구한테는 선물을 줬는데 나한테는 선물을 안줬다. 이 말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네 한 표는 나는 신경도 안 쓴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내 친구한테 향응제공하고, 봉투에 돈 넣어주고, 그런데 그 후보자가 나에게는 코빼기도 보이지도 않고, 집에 찾아오지도 않고 선물도 안줬다는 말이지요. 전세버스타고 놀러가라고 한 적도 없고. 너는 투표 하나 마나 나는 신경도 안 쓴다는 그런 뜻이잖아요.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무시당했지요. 그래서 선물을 안 받게 되면 오기가 나는 겁니다. 선물이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선물은 뭐냐 하면, 선물을 딱 받게 되면 ‘역시 하나님은 날 알아줘’ 그것이 아니라 진짜 선물 받은 사람, 복음도 들었지만 성령이라는 선물, 믿음이라는 선물을,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은 사람 같으면, 내가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는 것을 비로소 개털 털리듯이 다 털리는 거예요.
선물을 안 받게 되면, 나는 나에게 가능성 있고 나는 훌륭해요. ‘아,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는구나. 알아주니 이 말씀을 나에게 주셨구나. 말씀을 지켜야지.’ 선물을 안 받은 상태에서 십자가복음 소식을 듣게 되면, 십자가 복음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거예요. 그것 가지고 모자라면 신학교 가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 귀한 정보를 내가 많이 확보하게 되면 내가 구원받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선물 안 받은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선물을 언급하는 것은 선물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복음만 덜렁 아는 인간들이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는가를 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했잖아요. 사도바울의 선물 언급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고. 십자가 복음을 알았다. 연구하자.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그런데 사도바울은 완전히 그런 것을 주께서 다 아시는 것처럼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또 다시 읽습니다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반드시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는 것을 경유해야 돼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너희에게서 나올 것이 없다. 복음을, 십자가를 연구하고 백날 신학교 가서 신학박사가 되어도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선물이 되면 신학박사가 되든, 뭐가 되든, 목사가 되든, 나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지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가. 내가 날 지킬 것이 없음을 알아야 돼요.
선물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해 보면, 굉장히 고민하면서 심사숙고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장착해서 철저한 대응책을 마련해요. 천당 가기 위해서. 한평생 자기가 교회 다니면서 분투노력한 장한 투쟁의 역사가 되고, 그것이 자기연민으로 작용되고 자기정당성으로 확보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전화라도 할라치면 꼭 사드방어체제를 갖춘 것 같아요. 지대공 미사일을 막 쏠 것 같아요. 저 복음 압니다, 하고. 나도 알만큼 안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복음을 알수록 점점 더 복음과 멀어지는 현상이 일어나요. 아주 희한한 현상이에요. 우리 십자가 마을이나 우리교회 보면, 복음은 아는데 점점 더 멀어져가요. 복음 아는데.
선물을 안 받았거든요. 선물을 안 받은 상태에서 십자가 복음소식, 십자가니 언약이니 들어버리니까 그것 가지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주 갖은 노력을 다 합니다. 노력을 하다 보니까 자기방어체제가 점점 더 공고히 되는 거예요. 자기 변명할 거리가 점점 더 많은 거예요. 다 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라는 것이 있지요. 농부가 씨를 뿌릴 쌔, 하고 나오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천국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렇게 바로 들어가지 않고 왜 앞에 열매 없는 쪽을 세 번씩이나 나열합니까? 씨를 뿌렸는데 악마가 가져갔다. 씨를 뿌렸는데 난관이 닥치니까 삐져서 복음 ‘빠이빠이’ 했다. 복음의 씨를 뿌렸는데 ‘빠이빠이’하지는 않았지만 세상 돈벌이에 정신 빠져서, 세상재리의 유혹에 빠져서 ‘이게 좋다’ 하면서 열매가 없다.
왜 그런 이야기를 주님께서 세 차례나 하시는가 하면, 반드시 천국은 인간을 경유해서 나타나야 되는 거예요. 인간에게 핍박받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천국이에요. 예수님이 천국이잖아요. 예수님은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핍박받는 모습으로 오시는 거예요. 왜 핍박해야 됩니까? 인간이 왜 핍박해야 되지요? 자기 딴에는 순진한대요. 그게 순진한 것이 아니었어요.
용쓰면서 점점 더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을 믿고자 용을 쓰는데 용을 쓰면 쓸수록 악마가 되어갑니다. 악마를 닮았어요. 바둑에서 그걸 가지고 장고 끝에 악수 든다고. 장고 끝에 떡수 두지요. 엉터리 수를 놓은 거예요. 오랜 시간 동안에. 선물을 받아보지 않았다는 현상을 사도바울, 또 주님은 보고 싶은 겁니다.
십자가라는 소식은 들었는데 성령을 안 받았을 때 인간은 어떤 투로 행동하느냐, 처신하느냐? 그것을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왜,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이나, 선물이나 내 소유용이 아닙니다. 내 소유용이 아니고 내가 있는 내 자리를 거덜 내는 용이에요. 그걸 삽질해서 파버리는 거예요. 이것은 내 기초다, 내 터전이라고 여겼던 것을 파버리는 거예요. 왜? 인생은 캠핑이니까. 어차피 떠나야 되잖아요.
이걸 파버리는 겁니다. “네 자리 없다.”에요. 네 자리는 없다. 에베소서 2장 8절, 지금 세 번째 읽습니다마는 늦게 오신 분들 위해서 다시 읽는 겁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이걸 한 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위세척 들어가자 그 말이에요.
다 들어내자. 네 믿음 세척. 네가 ‘하나님을 믿어서 나한테 유리한 것이니까, 저 십자가는 좋은 것이니까 믿어볼까?’라는 나의 시도를 위세척을 통해서 다 걷어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에게서 꿈틀거리고 있던 나를 위한 나의 믿음이었습니다. 이거 나에게서 나온 믿음이에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뽑아놓고 동행할 때 외부 인들은 한결같이 ‘열두 제자와 예수님은 전부 다 같이 천국 간다. 좋겠다, 열 두 제자로 뽑혀서 감사하겠다.’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문제는 열두 제자도 그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그 열두제자와 다닐 때 위세척용으로 다녔다는 것,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라는 생각자체를 파내기 위해서 제자 되게 했다는 사실을 열 두 제자가 상상도 못한 겁니다.
떨쳐내기 위해서, 떨쳐내기 위해서 제자로 뽑았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한 거예요. 그런데 기어이 주께서는 떨쳐냅니다. 떨쳐내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고백한 것이 있어요. 마가복음 14장 31절이요. 30절에 예수님께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니까 31절에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힘 있게 말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모든 제자도 베드로의 그 말에 동의했어요. 다시 읽습니다.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게 뭐냐 하면,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생각했던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베드로가 대변해서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를 정말 믿는 자라면 이 정도는 돼야 예수 믿는 것이라는 그 최고의 레벨을 베드로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믿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내가 죽기까지 주를 따라야 믿는 것이다. 이게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순진함의 극치입니다. 선물 없는 인간들의 극치에요.
선물은 안 받았고, 주님을 알기는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연구했고, 인간이 내놓을 것은 뭐냐? “이 정도로 귀한 분이니 제가 어찌 목숨을 안 바치겠습니까? 목숨까지 바치겠습니다.”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누구 맘대로? 그게 다야? 더 이상 내놓을 것 없지. 그지? 그게 한계야.” 그게 인간의 한계에요. 선물 없는, 지옥 가는 인간의 한계에요. 그게 악마의 모습이에요. 우리는 악마를 닮았습니다. 아예 애를 써요. 용을 쓴다고요. 천당 가기 위해서.
왜 우리는 집 문 앞에 피 바르고 다리 꼴 줄 몰라요? 집 바깥 문설주에 피 발라놓고 안에서는 신문 펼쳐놓고 음악 듣든지, 다리 꼬고 향긋한 에스프레소 커피 향기 피우면서 느긋하게 왜 이렇게 못삽니까? 피가 있는데 왜 그런 넉넉함이 없어요? 왜 그리 초조한 거예요? 왜 그리 불안불안 합니까? 선물을 안 받아서 그래요. 선물을 안 받아서. 아주 용을 쓴다니까요, 용을 써요.
이것은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열심히 선지자노릇을 했다는 말이지요. 자기 말발이 괜찮은 말발이거든요. 하늘에서 주신 거니까. 엘리야가 보통사람 아닙니다. 죽을 때 시체도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에요. 아니 시체도 없지요. 그냥 산채로.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면 그 말발을 좀 먹어줘야지요. 사람들이! 백날 이야기를 했는데 엘리야가 보니 몇 명 남았느냐 하면, 달랑 한 명 남았어요. 자기 혼자 남았어요. 자기 혼자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게 로마서 11장 3절에 나왔어요. “주여, 나만 남았습니다.” 나만 남은 그것마저도 주께서 지금 나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심정을 보니까 무슨 심정 같으냐 하면, 꼭 tv조선 방송국 심정 같아요. 이제 KBS, MBC등 다 넘어가고 나만 남았다고. 이제 보수 측, 태극기 측 방송국은 나만 남았나이다, 이런 식 같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시는 말씀이 로마서 11장 4절에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7천명이나 남겨 두었다. 그런데 그것은 뒤에 나오는데, 그들의 행함이 똘똘하고 정신 바짝 차려서가 아니라, 그들의 행함이 아니라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7천명이다.
은혜 되는 공정, 은혜의 공정, 은혜의 메커니즘을 주께서 포기한 적이 없고 중간에 그만둔 적도 없습니다. 피 바르고 다리 꼬고 앉아서 신문 보면서, 커피 마시면서 인생 끝내자. 이게 선물의 효력입니다. 이게 선물의 효력이에요. 어느 교회 가야 구원받나, 어느 교회 가야 복 받나, 찾아다니고 싸돌아다니고.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해요. 보는 사람이. 얼마나 선물을 못 받았으면 본인이 하나님이 성경을 펼쳐서 원어 따져가면서 연구를 해야 돼요? 참……, 에베소서 4장 오늘 본문 다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선물과 은혜를 연결시키지요. 선물을 주셨다. 은혜를 주셨다.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나는 네 것은 안 받는다는 뜻이에요.
자, 그렇다면 이 본문 내용, 나는 너에게 선물을 줬다는 말을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선물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고요, 선물이 나를 필요로 해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요. 문밖에 피 바르고 다리 꼬고 있으라고. 너는 그만한 여유를 누릴 자격이 된다고. 그 피 때문에, 유월절 그 피 때문에, 그 어린양의 피 안에서 너는 그만한 것을 누릴 입장이 된다 그 말이지요.
우리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겁니다. 신학 책 백 권 쓴다고 나올 것이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여유 부려도 되나?’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에요. 베드로는 지금 목숨 바치고 주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는 느긋해도 너무 느긋해. ‘뭘 믿고 저래? 믿는 구석이 뭔데? 뭘 믿고 저렇게 넉넉해?’
동생이 교회 안 나오고, 자식이 교회 안 나오고……. 몰라 나는. 나는 내 다리 꼬기 바쁜데 뭐 그것까지 신경 쓰나. 남편이 교회도 안 나오고, 뭐가 어쩌고, 나는 모르겠어요. 모르겠는데 다만 주께서 나를 필요로 했다는 거예요. 왜? 쓸모없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 믿고 10년 지나도 쓸모없고 20년 지나도 쓸모없어요. 복음 알고 50년 지나도 쓸모없어요.
지금 우리 교회에 복음 알고 50년 지난 분도 계십니다. 아무 쓸모없어요. “제발 끝까지 쓸모 없어라, 인간아. 끝까지!” 그걸 가지고 갈라디아서 6장에,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거예요.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러니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개털 만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기존의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는, 선물이 선물되기 위해서는,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내가 세상 적으로 자랑하고 싶은 것을 다 털어내요.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
“나도 너 못지않아. 나도 너처럼 살만큼 살았어. 나도 배울 만큼 배웠어. 나도 신앙생활 할 만큼 했어. 나도 성경 볼만큼 봤어. 기도할 만큼 했어.” 이거 다 털어내요. 쓸모없는 귀신이 뭐가 이렇게 말이 많아. 나는 순진하기는 한데 순진 그것이 악마의 모습이다. 나는 순진해. 그런데 그게 악마의 모습이에요. 전혀 순진에서 순결로 못 넘어갑니다. 왜? 순진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이기 때문에.
그러면 선물이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에게 왜 오느냐? 그것은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의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하나님, 그 하나님은 그냥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고 언약을 가지고 왔어요. 그 언약을 깨보니 그 안에 세 가지 들어 있습니다. 땅과 씨와 하나님의 의. 이것이 들어 있었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여기 땅이 있는데 왜 땅이 필요하지? 지금 이 땅이 내 땅인데 왜 또 땅이 필요하지? 자식이 왜 필요하지? 지금 이스마엘 자식이 있는데. 의가 왜 필요하지? 나는 하나님 잘 믿기로 작심을 하고 있는데 의가 왜 필요하지?’ 그걸 몰랐어요.
‘이미 땅이 있고, 이미 내게 자식이 있고 이미 의가 있는데 왜 필요하지? 참 하나님 희한하다. 알았어요, 하나님. 하나님 잘 믿을 테니까, 열심히 믿을 테니까 우리 이걸로 끝냅시다.’ 이러고 싶은데 하나님의 땅이 있는 땅에서 후손들을 쫓아내버려요. 애굽에 가서 430년 만에 돌아오게 합니다.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노예로 돌아와요.
노예라는 것은 뭐냐? 땅이 없는 사람을 노예라고 합니다. 땅이 없으면 신분보장이 안돼요. 자유인이 아닙니다. 땅 주인의 노리개가 돼요. 땅 주인의 노리개가 되는 겁니다. 6, 7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할 때에 촌에 있는 순이, 옥자, 전부 다 자기 고향 버리고 서울에 다 왔잖아요. 오게 되면 서울 역에서 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는 봉고는 없었지만 하여튼 대기하고 있어요.
식모할 사람, 안내양 할 사람. 그 때는 ‘오라이 할 사람’이지요. 그러면 땅이 없는 사람은 그 쪽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에요. 주인이 없으면 못 살아요.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너희들은 뭐냐? 너희들은 죄의 노예였다. 430년 후에 율법을 추가해서 줌으로 말미암아 땅이 너의 땅이 아니라 너는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 왜? 너는 죄의 노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너는 죄에 갇혀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옥이라 하는 것은 감옥중의 감옥입니다. 예수님은 'King of the King' 왕 중의 왕이지만 지옥은 감옥중의 감옥이에요.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보면 거기서 이 세상을 감옥으로 봐요. 지옥이나 같은 말로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너는 죄 안에 갇혀 있다. 감옥이에요. 죄라는 감옥소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에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는 종이에요. 노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언약이 오게 되면 노예 된 신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바꿔요. 그것은 선물이 와야 돼요.
선물이 올 때, 성령이 선물로 오게 되면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관계가 아버지의 아들로, 종의 관계가 아니라 아들의 관계가 되게 되면 어떤 혜택이 주어지느냐 하면, 진짜 아들이신 예수님의 성과로 얻은 그 천국의 나라를 같이 공유하는 혜택을 주십니다. 아들의 나라, 종의 신분에서 아들로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현재 우리의 육신의 모습은 뭐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노예생활 하고 있는 거예요. 법에 의해서. 그러니까 우리 마음을 바꿔야 돼요. 죄의 노예생활에서, 죄를 의식하는 생활에서, 법을 의식하는 생활에서 피 바르고 다리 꼬고 있는 자유인으로 바꿔져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여러분, 선물 받았으면 제 말이 이해 될 거예요. 선물 받았으면! 단서 붙입니다.
이해되는지 한 번 이야기해 볼까요?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아담은 범죄하고 난 뒤에 옷을 입음으로서 육체를 덮는 그것을 옷이라고 봤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에서는 이 옷을 가지고 옷이라 하지 않아요. 사도바울은 자기 육신을 옷으로 본 겁니다.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하면, 이 옷을 벗는 것이 아니고 이 옷(육신)을 벗는 거예요.
그러면 간음은 뭐냐? 옷 벗는 것이 간음이 아니에요. 무엇이 간음죄냐 하면, 내가 안 죽으려고 하는 것이 간음죄에요. 주님께서 약속했습니다. “아들은 내가 죽여줄게. 십자가로.” 이게 성령을 통해서, 선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이제는 간음죄, 살인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마라. 네가 거기에 신경을 쓰면 그만큼 노예가 되기 때문에.
왜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느냐 하면, 계속 살려고, 이 몸, 벗어야 될 몸을 가지고 이걸 붙들고 있는 거예요. 뭐 어쩌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이 몸 가지고. 사람의 몸은요, 내 맘대로 안돼요. 피곤하면 수련회도 못 옵니다. 피곤하면 아무데도 못가요. 심지어 70 넘으면 찬송도 못 불러요. 힘들어가지고. 1절 부르다가 쉬고, 3절 부를까 말까 하다가 쉬고. 힘들어서 찬송가 못 불러요. 소리도 안 나올 정도에요.
어떻게 내 몸을 내가 관리합니까? 관리도 안 되는데. 몰라. 피 바르고 다리 꼬는 그것도 나중에 나이 들면 안 될지 싶어요. 다리 꼬기도 힘들면 다리 펴세요. 피 바르고 다리 펴고 쉬세요, 그냥.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뭐든 되겠지요 뭐. 주님의 일관된 자기 공정이니까. 선물 안에 있는 사람들의 넉넉함이고 혜택이에요.
주님께서는 이 노예를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 오셔서 “너 나하고 같이 죽자.” 그렇게 된 거예요. 선물이 오게 되면 내 자리를 파는 겁니다. 파헤치는 거예요. 더 쉬운 예를 들면 주님께서 우리를 시신으로 보고 주님은 시신을 부검하는 부검의가 되는 거예요. 하얀 가운 입고 의사가 되는 거예요. 잠시 묵념하고 이제 회 뜹니다.
사시미 칼 들고, ‘보자’ 해가지고 파헤칩니다. ‘도대체 이 인간은 이 세상에 살 명분도 없으면서 왜 살려고 그렇게 애를 썼지? 도대체 네가 이 땅에 더 살 명분이 있는가를 한 번 들춰볼까?’ 하고 사시미 칼을 들고 회를 뜨면서 우리의 모든 인생을 다 회 뜹니다. 회를 뜨는 그것이 우리의 평생이고 매일 매일 회를 뜹니다. 네가 꼭 이 땅에 살 이유가 있는지?
들춰보니까 없어요. 명분이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 왜 삽니까? 아무 명분이 없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살아요, 그냥. 자기 몸 즐기는 대로 그냥 살 뿐이에요. 몸 땡기는 대로 그냥 살 뿐이에요. 아무 이유 없어요. 여성 해방가들은 다 아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수잔브라이슨이라는 철학자인데 철학 중에서도 분석철학자거든요.
사람이 지은 책이 있어요. <이야기 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원제, Aftermath : Violence and the Remaking of a Self Violence and the Remaking of a Self) 그 책이 2003년도 10월에 출간했는데 그쪽에서는 유명한 책이에요. 그 여자가 철학자거든요. 이론가입니다. 세상을 분석하고 세상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고 그런데, 1990년 7월 4일 아침 10 30분 프랑스 그르노블 외곽에서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길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남자가 덮쳐서 그 여자 철학자는 네 번이나 강간당하고 죽을 뻔 했어요. 겨우 살아났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영어로 된 책 < Aftermath : Violence and the Remaking of a Self Violence and the Remaking of a Self(폭력과 자아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지금껏 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냥 학자로서 공부만 했던 사람입니다. 죽음까지 갔어요. 수치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사건을 통해서, 나는 누구이며 이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재고할 필요가 있고 내 인생을 다시 고쳐 쓸 필요가 있다. ‘나는 세상 다시 보기 하겠다’고 글을 써서 그쪽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글을 보면서 ‘인생 다시 고쳐 쓰기’ 그 대목에 주목했어요. 뭐냐 하면, “당신은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사회에 대한 복수지요. 보복. ‘괜찮은 나, 우수한 나를 왜 건드렸어? 네가 그렇게 함부로 건드릴 인간인 줄 알았어? 나는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이 철학자로서 공부할 때는 세상을 보편적으로 봤어요.
상처가 없을 때는 세상을 보편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상처가 있을 때는 아무리 보편성을 외치는 사람도 개인으로 돌아가요. 나를 위한 세상. 예수? 삼위일체? 하나님? 상처가 있게 되면 나를 위한 하나님이어야 되고, 나를 위한 예수여야 되고, 나를 위한 십자가이어야 돼요. 이게 악마의 얼굴이에요. 그동안 숨겨놓은 악마의 얼굴이었어요. 자기는 그걸 순진하다고 봤습니다.
교회 왜 나옵니까? 보이지 않는 악마에게 복수하려고 나오거든요.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교회 나온 거예요, 나를 위해서. ‘가만있는 나를 왜 건드렸어? 이제 하나님의 힘으로 나는 복수할거야. 너 나 잘못 봤어.’ 그런 거거든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니들이 내가 힘든 것을 알아?’ 이거거든요.
평소의 모든 대화가 밑에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네가 나 힘든 것을 알아?’ 그러니까 전화 거는 것도 무섭지요.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알아?’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그걸 내가 왜 알아야 되는데? 이 쓰레기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야. 왜 갑자기 악마가 되어서 난리치고, 설치고, 화로위에서 펄펄 뛰고 있어? 너 왜 그런데?”
복음을 연구하는 사람이 복음을 피하기 바빠요. 도망치기 바빠요. 변명거리 만들면서. 복음은 안다고 우기면서 선물은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면, 선물 받은 사람한테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도둑놈입니다.
그게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나와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주님은 도둑입니다. 나를 강탈해요. 그런데 악마의 세계에서의 교회는 뭐냐 하면, 천국 갈 사람 지원하라 하는 거예요. 어디 입사원서 냅니까? 하늘나라는 스카웃이에요. 지원하는 것이 아니고 스카웃해 가는 거예요. 주님이 성령 줘서 스카웃 하는데 스카웃 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옆에 죽 있을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선물 주지도 않았는데 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와 있어? 나머지는 가짜 아니야.” 나머지는 가짜지요.
주님께서 왜 그렇게 강탈하듯이 스카웃해서 갈 수 밖에 없느냐 하면, 인간이 예수님을 쫓아냈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들이 주님한테 쫓겨날 차례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안다고 우기면서도 성령을 선물로 받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를 뭘 로 느끼느냐? 협박과 공갈로 듣깁니다. 왜?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기 때문에.
자기는 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귀신한테 쫓기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 요새 공포영화 얼마나 많이 개봉됩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내 다리 내놔라” 하고 쫓아오는데, 부슬부슬 비 오는데 무덤가에서 나와 가지고, “너 효도 한다고 내 다리는 왜 파가냐?” 해가지고, 그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내 다리 내 놓으라’고 나올 때 이게 협박과 공갈로 들려가지고 “오지 마라. 복음 이야기 하지 마라.” 복음 없는 곳으로 도망치기 바빠요. 개털 안 되려고. 안 털리려고.
협박과 공갈로 들릴 때 이게 뭐냐 하면, 감사가 없는 거예요. 제가 어떤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가 복음에 대해서 안다고 죽 이야기를 해요. 복음은 이렇고, 성경은 이런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죽 이야기를 해요. 불쑥 제가 이야기를 끄집어냈지요. “달을 만드신 분에게 감사합니까?” 제가 ‘감사’라는 말을 끄집어냈어요.
그 사람은 철두철미하게 준비했어요. 철두철미하게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데 빈틈이 없도록 모든 강구를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하다 보니까 달을 만드신 분에게 감사가 없어요. 그 사람에게는 달 있거나 해 있거나 관계가 없어요. 참새가 짹짹거리거나 들풀이 있거나 관계 없어요. 내가 내 당도리하기 바빠서 정신이 없어요.
나 지키고 내 변명거리 만들기에 분주합니다. 달을 만드신 이에게 감사하라. 감사가 없어요. 고마움이 없어요. 내가 물어볼까요? 여러분들은 감사를 어떤 식으로 표현합니까? 주님께 감사를. 선물 없는 사람은 피하기 바빠요. 감사 안하려고 작심을 했어. 자기 정당성 내세우려고 마음을 잡았기 때문에 감사 같은 것은 나올 리가 없어요. 최선의 노력을 하는 나인데 무슨 감사가 나옵니까? 나에게 감사해야지. 현실도피적이에요. 코빼기도 안보이려고 해요.
여러분, 주님께 감사를 어떤 식으로 표현합니까? 감사가 있어야 표현하지요. 머리는 아프지요. 갑상선도 아프지요. 집안에 우환이 있는데 무슨 감사가 됩니까? 평생을 ‘나하나 잘났다’ 이것 가지고 버티는데 무슨 감사가 나오겠어요. 선물은 우리의 있는 그 토대를 아예 도끼 가지고 찍어버리는 거예요. ‘복음 + 선물’
참 주님도 인간입장에서 너무 섭섭하게 이야기해요. 저는 성경에서 특히 목회하는 사람에게 가장 섭섭한 이야기를 뽑으라면 마태복음 18장 20절을 두서없이 듭니다. 목회하는 입장에서 가장 섭섭하게 들리는 것. 주님의 선물이 없는 상태에서 목회할 때 가장 섭섭한 말이 뭐냐 하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교인이 두 세 사람 이상 되면 문제 있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두세 사람도. 두 세 사람도 각자 선물 받으면 그게 어디냐, 그 뜻이에요. “인간아, 선물 그냥 주는 것 아니잖아. 선물이 너를 요청했어. 그게 두 사람이면 어떻고 세 사람이면 어떠냐. 옆에 있는 천 명 이천 명이 부럽다고?” 지옥 가는 것이 그렇게 부러워요?
“목사님, 복음은 없는데 2천명이 되었어요.” 복음 없는데 2천명 되든 말든 네가 왜 그걸 부러워하느냐 그 말이지요. 선물을 함부로 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제가 오늘 설교하고 싶은 내용은 딱 하나에요. 선물은 그냥 달라고 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카웃 된 사람에게 주는 거예요. 이걸 무슨 말로 달리 해야 될까요? 나는 너무 좋은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자입니다. 잃어버렸어요. 우리는 영문도 모르면서, 이유도 없으면서 그냥 남 뒤꽁무니 따라가면서, 이게 나이아가라 폭포로 빠지는지, 넓은 길인지 분간도 안가면서 그냥 살아요. 바쁘게. 스케줄이 계속 미니까. 스케줄이 계속 따라오니까. 피곤에 젖어서 잠 오면 엎어져서 자고 그 뿐이에요.
그런데 얼마 전에 뉴스 보니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어떤 아줌마가 적금을 한 10년 넣었다가 찾았어요. 바쁘다 보니 금요일 지나 토요일이 되어서 월요일에 은행에 1천 5백만 원을 입금하려고 그 돈을 남의 눈에 안 띄게 전기밥솥 안에 넣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이 아주머니도 정신이 없지. 평소에 안 쓰는 전기밥솥에 넣어둔 거예요.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는데 ‘이 쓰레기가 다 된 전기밥솥이 여기 왜 있지?’ 하면서 타이밍 맞춰서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 수거장소에 내놓은 겁니다. 그래놓고 잊어버렸지요. 그리고 적금 탄 천 오백만원이 그제야 생각이 난 거예요. ‘그걸 어디에 뒀지? 어디에 뒀더라?’ 가만 생각해 보니 전기밥솥에 넣어뒀거든요. 찾아보니까 이미 그 때는 전기밥솥 내놓은 지 벌써 11일째 지났어요.
그래서 경찰에 신고하니 경찰이 cctv를 까봤습니다. 보니까 하얀 1톤 용달차가 마을에서 10킬로쯤 떨어진 고물상으로 갔어요. 그 고물상이 다 분류를 했을 것인데 하필 그날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다고 고물을 그냥 처박아놓고 분류를 안했어요. 경찰이 가서 찾아보니까 그 빨강 전기밥솥이 거기 그냥 있고 그걸 열어보니 비닐에 싼 천오백만원이 그대로 거기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선물의 자기 귀환되는 자기공정이에요. 하나님의 은혜의 공정입니다. 주님의 자신의 은혜, 피 바른 은혜, 피의 효과, 주님께서는 절대로 그걸 중지시키지 않습니다. 그 피를 위해서 우리가 스카웃된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안다고 그 지식으로 무장한 참으로, 악마의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신앙인인척 얼마나 모방하고, 흉내를 냈고, 용을 썼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우리가 악마를 닮아간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는 피만 바라보고 편히 살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