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안정성 1903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3. 24. 21:34
2019-03-23 00:02:17조회 : 146         
안정성 190322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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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9-03-24 20:07 
광주강의20190322a 마가복음13장 24-25절(안정성)-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3장 24-25절 

  

24절,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절,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일이 환란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했어요. 그럼 그 환란을 십자가로 봅시다. 십자가로 보게 되면 이 지구상에 일어나는 현상이, 환란 그 이후죠. 그 이후에 세상 전체가 붕괴됩니다. 천체가 붕괴된다면, 이 환란을 십자가로 보게 되면 예수님이 부활승천하고 난 뒤에 남은 자들이 누구겠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성도들이 여기서 생산되겠죠. 그렇죠. 

  

그럼 성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는 경우를, 그런 케이스case,사례를 성도들도 공히 동일하게 그들이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통해서 이 세상이 진행되는 그런 구조가 아주 굉장히 간편하게 깔끔하게 정리가 돼요. 이 세상은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은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 예수님에 대해서 공격을 해야 되고, 환란을 해야 되고, 거기에 대해서 이 세상은 환란 뒤에는 천체가 붕괴되어야 한다는 그런 확정된 순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확정된 순서가. 

  

근데 이 천체가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그동안 이 천체를 통해서 뭘 도모했느냐 하면은 안정성을 도모한 거예요. 안정성. 사람이 산다는 것은 안정적일 때, 세상이 안정적이라고 생각하고 그 구석 한 모퉁이의 안정된 가운데서 자기만의 소박한 자기세계, 자기영역을 이렇게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보통 여고졸업하면 여고동창생들이 있죠. 만약에 여고동창생들을 20년 후에 오랜만에 만난다면 일단 카페가 문을 안 닫아야 되고, 버스가 파업을 안 해야 되고, 그리고 거기 동창생들 전부 다 몸이 안 아파야 되고, 그리고 나이 40에 치매에 안 걸려야 되고, 그리고 모이는 그날에 북한군이 전쟁을 선포하지 않아야 해요. 이북에서. 

  

그러면 어떤 한 장소에서 오랜만에 수다를 떨려고 친구에게 전화해서 카페에 모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안정성들이 보장이 되어야 하겠어요? 버스 파업하게 되면 안 되잖아요. 또 주유소가 파업해서 기름을 못 넣게 되면 차타고 못 오잖아요. 이런 거. 그리고 각각 자기 가정에 우환이나 자기 몸이 아파서는 안 되고. 자기가 갑자기 위암이 걸리면 못 온다 이 말이죠. 

  

사람들이 하나의 계획을 잡는다는 것은 그 전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내 계획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이 세상은 굳건하고 안정적이라는 사실을 경험에 비춰서 자기는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 이 천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 해, 달, 별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그동안 뭘 제공했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은 대단히 안정적이다, 라는 그러한 의미를 인간에게 제공한 거예요. 

  

그 안정적인 세계 속에서 역시 자기가 안정적으로, 안정적이니까 거기서 한 부분을 이렇게 딱 두게 되면 자기는 자기 계획의 소박한 소망이라든지 꿈을 안정적으로 펼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안산에 취직을 했는데 안산에 갑자기 유성을 맞아서 안산시내 자체가 없어진다면 취직 못한 거죠. 그렇잖아요. 

  

이 안정성이, 이 안정적이라는 이것이 인간에게 이게 죄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옛날 젊었을 때 들었던 그 팝송이라든지,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 옛날 7080노래, 통기타 노래, 옛날 흘러간 노래를 들을 때에, 그 노래를 들으면서 그 노래를 들었던 그 때 그 시절의 상황을 이렇게 비춰보면 그거는 안정성이에요. 안정성입니다. 

  

‘그때 내가 참 젊었었지.’ 이게 전부 다 여러 가지 말을 하지만 이 안정성이라는 말 하나에 다 담겨있는 겁니다. 다 담겨있어요. ‘그때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이뻤었었는데..,’ 지금도 이쁘지만. 말을 조심해야 돼요. 그때 이뻤지,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나의 안정성을 도모하는데 이 세상이 든든했었다는 뜻이에요. 

  

이런 안정성을 연상하는 것, 이게 뭐라고요?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뭘 누락시켰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그 사실을 누락시킨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죠. 누가복음 23장 44절에 보면,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제 구시까지 깜깜했다. 이 말이죠. 

  

방금 누가복음 23장 44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천체의 반응입니다. 대자연의 반응이에요. 반응 또는 호응하는 거예요. 해와 달과 별이 주님이 하신 일에 호응해주는 겁니다. 인간은 달에 가고자 했죠. 인간은 별을 관찰하고자 했고. 화성이나 목성을 그냥 탐색하려고 했죠. 그 말은 뭐냐 하면 해와 달과 별은 인간주체에게 하나의 대상, 객체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이 천체가 슬픔에 호응을 해줬다는 이 말은, 탄식을 하듯이 뭔가 반응을 나타냈다는 이 말은 단순히 천체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적인 눈으로 보듯이 보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시는 업적, 그 사역, 언약완성, 같이 이렇게 연관성이 있는 걸로 등장하는 거예요. 연관성이 있어요. 

  

하나님의 십자가를 새 언약이라고 했죠. 마지막 때에 다락방에서 떡을 뗐잖아요(눅22장). 그래서 이게 새 언약이잖아요. 거기서 내 살과 내 피로 새 언약을 이루리라. 그 새 언약 안에 누구도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이 대자연, 천체도 같이 엮어져 있는 관계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대자연은 어떤 중심을 갖고 있어요. 중심인물이 있어요. 

  

세상의 과학은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공간에서 어떤 특정지점의, 중앙지점을 가지고 중심이라고 하지만, 여러 가지 사물들이 있으면 그것을 중앙에 놓고 전부 다 같은 거리에 있을 때 중심이라고 하지만, 이 세상은 중심 되는 지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심 되는 인물이 있어요. 강남강의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거기서 예수님의 인물을 가지고 탈자연화라는 이야기를 했죠. 탈자연화. 

  

자연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계신 분. 유일하게 자연과 벗어난 분. 갈릴리바다의 태풍과 바람과 파도도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니까 잠잠해야 되는 그러한 긴밀한 관계에 있어요. 대자연도. 탈자연화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거는 자연에 대한 초월이죠. 초월 또는 더 어려운 말로 초재적, 초월적인 존재로 계신다, 라는 이런 말. 초재적, 초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초월, 벗어난 것이 아니고 간섭하고 휘젓고 있고 다루시고 있는 거예요. 누가요? 주님께서. 

  

그러면 이 세상이 안정성이 있다는 것은 그냥 안정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에 조건이 있어요. 안정될만한 조건이 그동안 있어왔던 겁니다. 언제까지 안정화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지기 전까지 안정적이었어요. 이 대자연이. 십자가지기 전까지는. 언약에 호응하는, 예수님의 새 언약 완수에 대자연이 같이 합세해서 호응해주는 겁니다. 조연급들로. 해와 달이 마치, 예수님께 시켜만 주이소~ 라는 식으로 운행하고 있었던 거예요. 

  

십자가 질 때까지 호응했다는 말은, 십자가 지는 이 사건이 뭘 유발하느냐 하면은, 십자가 지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무슨 모드mode,방식에 접어드느냐 하면은 종말모드에 들어가는 겁니다. 왜? 다 이루었으니까. 다 이루었잖아요. 보통 연극할 때, 연극하기 전까지는 온갖 것, 옷들도 준비하고, 시나리오도 준비하고, 연극연습도 하고 했는데, 이제 학예회 다 끝났어요. 연극 다 끝났어요. 

  

그러면 배우들이 변장할 때 화장하고 탈 쓴 것, 옷 입은 것, 전부 다 파장분위기에 들어가거든요. 걷어내야 되죠. “빨리 정리하고 짐 싸자!” 짐 싸자! 끝났어! 이게 뭐냐 하면 종말모드다 이 말이죠. 종말모드. 종말모드인거예요. 이게. 마치 장날 아침에 분산을 떨어요. 저도 장날 아침에 많이 가봤는데, 온갖 것 소문 듣고, 온 천지의 장사꾼들이 다 모이고, 평소에 안 모이던 가축 키운 것, 나물 뜯은 것, 다 가지고 와서 팔다가 오후 다섯 시쯤에 하나둘 천막 걷고 집에 가요. 

  

집에 가게 될 때, 왜 그렇게 장날 끝에는 바람이 부는지. 아주 황야의 무법자 마지막 대목같이. 바람이 확 불면서 또 검불 있잖아요. 메마른, 마른 풀들이 어수선하게 엉켜서 굴러가죠. 또 노을이 지고. 허전하게. 모든 게 허전하고 허무해져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파장분위기인데. 주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이런 예언, 예고를 한다는 말은 초점을 두고 관심 두어야 할 것이 우리 자신의 사적인 일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왜? 우리의 모든 일들은 종말을 기조로 해서 한 게 아니고, 그라운드로,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바탕으로 한 겁니까? 안정성을 바탕으로 한 겁니다. 이 세상은 계속해서 줄곧 갈 것이다. 안정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식을 구입한다든지, 어음을 미리 땡겨서 한다든지, 안 그러면 미국의 국채라든지, 그런 것들을 사놓는 이유가, 미국이 내일 망할 것 같으면 미국 채권을 왜 사놓습니까? 살 이유가 없잖아요. 휴지인데. 지금 베네수엘라 국채 사는 것 봤습니까? 베네수엘라. 군인들도 탈영하는 판인데, 그거 왜 사겠어요. 믿을 것도 못 되는데. 그리스, 스페인 이런 국채 못 사죠. 또 몰라, 투기자본하려고 사는지 모르지만. 

  

베드로후서 한 번 봅시다. 베드로후서 3장 3절에 보면 “말세에”, 말세라는 말은 종말입니다. “말세에 기롱(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여기서는 정욕을 좇아, 라고 하지만 그냥 자기의 솔직한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는 정욕이지만 인간들이 평소에 살던 삶의 방식대로 말하기를, 4절,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그냥 그대로 있는, 스스로 있는 거예요. 

  

자연이라는 말 자체가 한자로 스스로 그냥 있다는 뜻이에요. 내추럴한,natural,자연적인. 자기스스로. 셀프self죠. 본래대로 그냥 있는 거예요. 본래대로. 근데 본래대로 있다, 또는 아니야! 우리는 이제 파장이야! 라는 이 결정을 누가 해야 됩니까? 같은 인간들끼리는 결정을 할 수 없죠. 왜? 드론 띄우듯이 전체를 다 조망을 한 사람만이 그걸 할 수 있어요. 그냥 본다고 해서 장래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어떤 중심인물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자기 몸을 통해서 계속 풀어낸 거예요. 

  

여러분, 스카치테이프가 있잖아요. 스카치테이프 양이 굉장히 많은 것 같지만 자꾸 그 붙어있는 스카치테이프를 자꾸 뽑아내고 써버리면 이게 나중에는 돌돌 감겨있는 양이 얼마 되지 않죠. 두루마리 화장지처럼요. 이 세상은 예수님의 몸에 붙어있는 두루마리 화장지에요. ‘잘 풀리는 집’이라는 화장지 있잖아요. 자기 몸을 풀게 되면 자기 본색이 나오죠. 그리고 예수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은 똑같이 우리 성도에게 일어납니다. 

  

그동안 우리 성도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평소에 자기가 안정적으로 인생을 꾸려온 것에다가 예수님에게까지 도움 받아서 안정성을 더욱더 단단하게 더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거는 다른 가짜예수죠.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계속 뭔가 풀려나가는 것, 소멸되는 것이 있어야 해요. 내 안정성에서 구축된 이 모든 것을, 아, 이게 불안정한 세계의 방식에 우리가 대처해야 된다는 것을 감 잡아야 됩니다. 

  

안정성에서 살아왔다면, 이거는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와장창 깨져야 해요. 차라리 불안정한 세계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방법은, 우리가 대처하는 방법은 새로운 발상이 필요한 거예요. 어느 것도 믿을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의지할 것도 없고, 믿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믿을 게 없다고 하니까 생각이 났는데, 부부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부부되기 전에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연애하겠죠. 그럼 연애부터 생각해봅시다. 남자가 이래 있고 여자가 이래 있다면, 남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자를 보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럼 여자가 하는 말이 “사랑하는 조건으로 내 남은 인생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물론 노골적으로 책임질래? 하면 너무 여자로서 노골적이다, 속보인다, 이렇게 하겠죠. 그런 소리를 노골적으로 하는 여자들도 있겠지만. 

  

그렇게는 안 하고 사랑한다고 하니까, 그 사랑한다는 것에는 뭐가 필수적으로 담겨있다? 나는 놀 테니까 알아서 옷 입혀주고, 밥 먹여주고, 따뜻한 좋은 아파트해주고, 식사비하고 내 취미생활비까지 다 해내라는 그게 다 담겨있어요. 어떤 여자 분은 남자하고 결혼해서는 할 일이 뭐였는가 하면 전에는 그림으로 취미를 하다가 이제는 음악으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애는 중학교 들어갔는가, 둘이 있는데 대충 키워놓고. 그 tv를 보고 있는 다른 여자 분들이 얼마나 부러워할까요? 돈 버는 주부가 아니에요. 매일이 그냥 취미활동이에요. 미술 하다가 피아노 배우기, 또 무슨 취미로 바뀔지 모르겠지만. 

  

그게 여자의 로망이 아닐까요? 노는데 이상하게 맛있는 거 먹을 수 있고. 취미생활하면서 누구 탓하는 사람 없고. 거기다가 시아버지, 시어머니 일찍 다 돌아가시고. 시동생, 시누이 다 너무 성공해서 손 벌리는 사람 한명도 없고. 애는 공부하라고 안 했는데, 공부가 제일 쉬워요, 하면서 지가 알아서 공부하고. 가서 트로피하고 상장이나 보조해서 받아오면 되고. 무슨 토론대회 나가서 해도 되고. 남자는 뭐 저녁 7시면 따박따박 들어와서 알아서 앞치마 두르고 요리 다 해주고. 애들 숙제 다 돌봐주고. 여자는 그냥 ‘다리 꼬지 마’라고 했는데 다리 꼬고 앉아서 리모컨 돌리면서 tv드라마나 보고. 

  

그 모든 미래상이 어디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사랑 안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사랑 안에. 근데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이 개체가 다르죠. 신체가 다르죠. 신체라고 하는 것은, 이 개체라고 하는 것은 개별자라고 하거든요. 개별자. 몸이 따로따로다. 같은 꿈을 꿀 수가 없어요. 남의 꿈을 훔치는 것은 그건 다니엘이나 하는 짓이지 보통 사람은 하지를 못합니다. 요셉이나 남의 꿈이나 해몽해주지. 보통 사람은 못하잖아요. 따로따로에요. 

  

따로따로인데, 과연 사랑일까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건 사랑이 아니거든요. 사랑도 아닌데 그 사랑에다가 여자는 뭐라고 요구하느냐 하면 “당신이 날 책임질 수 있습니까?” 라고 요구할 때, 그 요구가 이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어요? 결혼 자체가 이게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결혼이라는 게. 속이고 속는 세상이라는 노래가 있죠. 둘 다 속은 거예요. 둘 다. 둘 다 상대방한테 ‘잘 걸렸다. 이용해먹자.’ 둘 다. 한쪽만 이용한 게 아니고 저쪽도 이용한 거예요. 

  

나 외로운데 당신이 덜 외롭게 해달라고, 이렇게 남한테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내 신체가 아니고 저쪽 신체인데. 그쪽 신체는 어디 뭐 돌멩이입니까? 기계에요? 세탁기입니까? 누르면 되는 세탁기가 아니잖아요.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자기고집이 있고 자기개성이 있고 자존감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라고 할 때 “예”라고 하면 거기에 뭔가 자기 실리를 계산해서 “예”라고 할 거고. 둘 다 다 실익이 있는 거예요.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외부적으로 안정성을 기대하는 것, 그러니까 아내는 남편을 통해서 안정성을 얻고, 남편은 아내를 통해서 내 자식을 보고 싶은 것과 내가 너무 어릴 때 외롭게 살아가지고, 뭐든지 다 나한테 밥도 해주고 애교도 부려주고, 특히 남자한테는 여자의 애교를 제일 그리워하거든요. 애교는 결혼한 순간 다 깨집니다. 제가 볼 때는 애교는 없어요. 애교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걸 해요. 돈이나 계속 주면 애교가 나오지. 안 그러면 여자는 돈 집어넣을 때만 애교가 나와요. 뭔가 기대한 것을 해줄 때 애교가 나오지. “오빠앙~” 하는 그런 거 있잖아요. 뭔가 기대한 게 있으니까 애교가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개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신체가 달라요. 결혼하는 관습과 제도, 이건 속임수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뭔가 인간은 실익, 어떤 이익이 있어요. 서로를 통해서 어떤 안정감을 극대화시키겠다는 겁니다. 안정감을. 남자 나이 서른다섯, 여자나이 서른둘이 되어가지고. 어떤 것을 보니까 여자 나이 서른셋이면 끝인가? 뭐 이런 게 나와요. 더 이상 남자들이 원하지 않는 여자 나이라고 이렇게 하는데. 

  

이게 실제 끝을 돌파하고 싶어서 결혼이라는 어떤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려고 몸부림 같은 것일 수가 있어요. 이 결혼이라는 게. 인간이 어떻게 자기 실익을 포기합니까? 미친 거 아니에요? 말로는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한다고 하지, 어떻게 자기 이익을 포기해요? 인간이. 서로가 다 자기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서 서로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희생 하겠다? 희생해서 뭘 얻으려고 하는데? 

  

희생한다는 말과 희생하면 뭘 얻을 수 있는데? 이게 사실은 앞뒤가 안 맞는 개념이거든요. 근데 이상하게 잘 맞아 들어가요. 희생이 아니었어요. 투자였죠. 그리고 난 뒤에 둘 다 속았다는 거예요. 본인한테 속은 거예요. 본인의 안정성한테 본인이 속은 거예요. 나는 저 여자를 만나서, 나는 저 남자를 만나서 내가 이 땅에서 안정성 있게 내 미래를 개척하겠다. 둘 다 없는 안정성을, 있지도 않는 안정성을 있다고 우기면서 계속해서 대인관계를 시도한 거예요. 대인관계를. 

  

제가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모든 인간은, 아담 속에 있는 인간의 특징은 두 가지라고 했어요. 아담의 후손은 첫째는 죄를 짓는다. 두 번째는 죄를 감춘다. 죄를 짓는다, 분명히 창세기 3장의 아담은요, 이 땅에서 불안정하게 살게 되어 있어요.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불안정하게 살게 되어 있어요. 근데 사람들은 땅을 개간하면서 안정성을 위하는데, 그 안정성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여기서 나왔어요. 자아내부의 안정성. 

  

인간 내부에 악마의 안정성이 인간의 안정성으로 표현된 거예요. 발산된 겁니다. 나의 안정성이라는 것은 내 안에 들어있는 괴물, 악마가 안정성을 원하기 때문에 내가 안정성을 원하는 겁니다. 원래 해답은 세상은 안정성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아벨이 정상적으로 살았습니까? 일찍 죽었습니까? 아벨이 일찍 죽었잖아요. 아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이 안정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세계인 것을 알았어요. 이게 믿음이라니까요. 믿음으로. 

  

이 땅이 내가 아는 안정성을 보장 못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천체는 누가 쥐고 있어요? 주님이 쥐고 있어요. 그러면 나의 안정성은, 내 안에 누가 있어요? 마귀가 있죠. 그러면 아벨이 드린 제사는 뭡니까? 내 속에 있는 안정성의 기대를 아예 무산시키는 내용물이 아벨이 드리는 제물 안에 삽입되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피라는 거예요. 피. 제물의 피 흘림이고. 기름부음이라는 모티브를 쪼개는 거예요. 나누는 거예요. 

  

마치 내 몸이 쪼개져서 내 안의 마귀가 드러나는 순간, 나는 수술에 성공한 거예요. 악마와 나의 몸체를 분리시키는 그 수술. 그 수술이 성공한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 모든 이스라엘은 공히 개성이나 인물, 지문, 얼굴 모습, 취미 다 묵살하고 오직 하나의 원리가 뭡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의 원리가? 문설주에 뭘 바른다? 양의 피를 바르죠. 양의 피. 양의 피를 발라요. 자기 피를 바르는 게 아니에요. Rh+형 바르고, 뭐 A형, 그런 거 없어요. 어린양의 피를 바른 거예요. 

  

어린양의 피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장차오실 예수님이 세상의 원리, 이 세상은 불안정하다는 사실, 다만 이 세상이 안정되게 보이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안정적인 보장을 위해서 그 천체가 주님의 일에 같이 동반해서 호응해준 거예요. “주님이여, 어서 하신 일에 성공하옵소서.” 이런 거. “십자가에 제대로 돌아가시옵소서.” “주님이 세상 죄를 지시는 어린양이 되시는데 지장이 없게 하옵소서.” 그렇게 호응해준 거예요.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을 때에 우리가 놓치는 저 구석에, 여러분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의 시험 아시죠? 마귀한테 세 번 시험받는데, 그때 그 그림의 한구석에서 눈에 잘 안 띄는 대목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천사가 그걸 지켜보고 있다는 거예요. 세 가지 테스트가 끝나고 난 뒤에 후딱 와서, 그거 뭐 오메가3부터 해가지고 기를 돋우는 그것을 막 주시는 거예요. “잘했어요! 주님!” 천사가 막 힘을 주는 거예요. 천사는 일단 지켜보는 거예요. 팔짱끼고 지켜보자는 식이에요. 뭐 천사가 팔짱끼는 일은 없겠지만. 날개를 끼겠죠. 날개를 끼고 지켜보죠. 

  

우리 주님이 일단 악마를 이겨줘야 해요.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속에 있는 악마하고 상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하고 상대할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하고 상대할 가치가 없어요. 나는 누구 말에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데, 복음을 아는 사람은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말 자체가 주제 넘는 일입니다. 아! 본인이 상처받은 게 아니겠죠. 본인 속에 있는 악마가 상처받았지. 

  

성도는 깨어져야 해요. 수술, 개복해서 감추었던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깨어지는 경우를 계속 당해야 되는 겁니다. 자꾸 이걸 감싸 안으면 안 돼요. 감싸가지고, 내 안정성이 얼마나 귀한데 니가 뭔데 독한말로 쑤셔서 내 안정성을 다 깨지게 하느냐? 이렇게 달려들면 그거는 속에 뭐가 있다는 말이에요? 속에 나의 자존심을 꼭 지켜줄게, 라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그 원초적 동물, 괴물, 짐승이죠. 악마가 그대로, 지금 짐승 말에 종속되고, 지금 그 말이 지배하고 있다는 말밖에는 안 되잖아요. 

  

성도한테 상처는 사치입니다. 사치에요. 그 상처라는 말은 없어도 되는 거예요. 지킬 게 없는데 무슨 상처가 있어요. “아이고, 집사님 못생겼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나도 뭔가 착각하고 있었는데 그 착각을 깨줘서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못생겨도 천국 간다가 아니라 못생기게 해줘서 천국 가게 해주셨으니까. 만약에 이거보다 더 잘생겼으면 지옥 갔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 뒤돌아보면 이것도 마지막 자존감의 반항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은 세상을 의지하고 있어요. 인간은 이 천체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깨어지기 싫다는 거예요. 나 이대로 좀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나 이대로. 내 자존감이니까. 마지막 남은 자존감을 깨버리면 나는 못 산다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니까 살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니가 불안정한, 종말이죠. 종말에도 살아남는 사람이 되려면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십자가를 감당해야 돼요. 괴물이 있던 자리에 십자가가 들어오는 것을, 주님이 들어오는 것을 우리가 감당해야 됩니다.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환란입니다. 환란. 예수님이 받았던 그 환란이 성도에게 그대로 개입되어야 합니다. 들어와야 돼요. 

  

사람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자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죄의 왕노릇이니까. 죄의 자식이면서도 그 죄가 있는 자체를 안 다치려고 안정성을 자꾸 취하니까 결국 우리는 안정성의 자식이에요. 안정성의 자녀들. 아까 베드로후서 봤죠. 이 세상은 그대로 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그대로 있으면 참 좋겠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세상이 완전히 파탄난다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주의 십자가 하는 일과 대치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는 부수겠다는 것인데 우리는 못 부수게 붙들고 있는 거예요. “주님 저리가! 내가 것 못 건드려요. 제가 얼마나 공들인 인생인데, 이 가치를, 이 의미를 왜 부숴요?”하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방송에 나오는 인문학 강의를 들어보세요. 다 그이야기에요. 인문학강좌. 그리고 정치인들, 유시민이나 정치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세요. 도올 김용옥 교수가 하는 이야기 전부 다 들어보세요. 이게 뭐냐 하면 붙들고 못 놓겠다는 거예요. 

  

니체는 뭐라고 했습니까? 신이 죽었다고 했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신인데, 내가 신 됨을 감히 누가 지적질을 하느냐? 저리가! 라는 뜻이에요. 이걸 통해서 역으로 뭘 아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그 유대사회에서 평소에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가를 알 수가 있어요. 짐작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사역들은 전부 다 그 의미가 어디에 집결되느냐 하면은 바로 십자가에 집결되죠. 십자가가 모호한 게 아니잖아요. 

  

모든 대자연도 마찬가지고, 예수님 본인의 모든 행적이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내뱉었던 그 말 한마디, 기적 하나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다? 십자가 내용이 들어있다. 이래보시면 되는 거예요. 그 예가 뭐냐, 문둥병자, 소경된 자, 세리, 창기, 강도, 이 사람들에게 의외로 우호적이죠. 그들이 뭐 착하고 훌륭해가지고, 막달라 마리아가 훌륭해서 우호적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진짜 진위, 진짜 말씀의 내용이 그런 사람들을 소집해서, 자기 일에 엮이게 함으로써, 십자가의 의의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그 사회에서 뭐하는 사람들이냐 하면 이미 저주받은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이미 개인적으로 본인들이 종말에 도달한 사람들이에요. 더 이상 세상에 대해서 기대할 거나 자기의 안정성을 취할 수 있는 어떤 대책이 전혀 없는 사람들. 이미 주위에서 저주받았다고 낙인찍힌 사람들이거든요. 

  

소경이나 문둥병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죄를 안 지어도 조상의 죄 때문에 그런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소경이나 귀머거리나 절름발이가 어떻습니까? 굉장히 불편해보이죠. 실제로 불편할거고. 우리가 눈감고 체험해보세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3절, “오실 분이 당신이니이까?”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5절, “소경이 보며”, 순서가 뭡니까? 소경이 보죠. 소경이 볼 때는 누가 개입했다? 예수님께서 개입했으니까 소경이 보죠. “앉은뱅이가 걸으며” 누가 개입했습니까? 예수님이 개입했죠. “문둥병이가 깨끗함을 입으며” 누가 개입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개입해서 깨끗함을 입었죠. “귀머거리가 들으며” 예수님이 개입하니까 듣게 됐죠. “죽은 자가 살아나며” 예수님이 개입하니까 살아났죠. 

  

그 예수님의 개입이 뭐냐 하면 그냥 예수님의 존재, 계심으로의 개입이 아니고, 무슨 사건이라고 했습니까? 모든 것이 파장되는, 실제로 사건이 개입하니까, 소경이 보게 된 거예요. 귀머거리가 듣게 된 겁니다. 그러면 소경, 귀머거리, 절름발이, 그 시대의 무슨 사람들이었습니까? 저주받은 사람들이죠. 그 시대에서.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 사람들은 그 시대가 저주받은 시대라는 것을 대변해주는 저주받은 대표자들이 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저주 안 받은 것이 아니고 저주받아서 된 거 맞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만약에 병이 나았다, 나는 소경이었는데 눈 떴다, 이래돼버리면 이 사람은 어디로 귀환하느냐 하면은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망해야 될, 기존의 멀쩡한 인간들의 공동체에 합류한 셈이 되어가지고 이거는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 그대로 가는 셈이 돼버려요. 

  

십자가라는 것은 기존의 안정성의 세계에서 니가 인간답게 사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고, 그거는 오늘날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고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아이고 꼬시다. 잘됐다. 차라리 망해버려라. 니 망하고 내 망하자. 다 같이 망합시다.” 이거거든요.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같이 망하자는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그러나 소경이나 절름발이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는 뭐냐, 이 불안정한 세상에서 대처하는 방식은 십자가뿐이라는 겁니다. 십자가뿐이잖아요. 왜냐하면 자기들은 이 땅에서 이미 버림받았잖아요. 버림받았기 때문에. 

  

마가복음 13장 23절부터 이렇게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 이후에 대한 일에 대해서 언급을 한 겁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근데 이 십자가사건 이후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말이에요. 왜냐하면 십자가사건 자체가 시간이 흐른다는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요. 베드로후서 3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상은 창세전부터 그대로 쭉 간다. 아무 변동이 없다.”라고. 그걸 아까 안정성이라고 했죠. 이 세상은 안정적이라고 했죠. 안정적으로 간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의 삶은 어떤 전제하에 살아가느냐 하면은, 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탈이 없을 것이다. 안정적으로.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처럼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사고잖아요. 그런데 베드후서 3장 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말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은 너희들의 시간계산하고 하나님의 이 마지막 때의 시간계산하고 일치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있음에 의미를 둬요. 인간은 시간이 있다는 데에 의미를 둔다고요. 왜냐하면 시간이 있다는 말은 시간이 그만큼 안정적인 그 템포를 유지한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뭡니까? 하루 같죠. 하루 같으면 또 계산한다고요. 사흘이면 삼천년이 됐네. 그게 아니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이 말은 이런 계산 자체를 하겠다는 의도가 바로 이 세상을 계속 붙잡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입니다. 이게. 

  

경건한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세상이 전부 다 완전히 물로서 주저앉았다, 다 파괴되었다, 모든 게 다 파장이다, 라고 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겠느냐 라는 것을 베드로후서가 이야기합니다. 아까 장날을 이야기했는데, 5일장 끝나고 난 뒤에 꼭 바람이 휭~ 하고 불고 가게들 문 닫죠. 다 갔는데, 이제 해지고 어두운데, 꼭 세 살 먹은 애가 코 찔찔 흘리면서 울고 있다고요. 엄마 찾아서 또 할머니 찾아서 울고 있다면 얘는 지금 어떤 분위기에요? 주위에 어른이 하나도 없어요. 자기만 남았어요. 왜 남았는지 몰라요. 숨바꼭질을 하다가 남았는지. 

  

아르헨티나에서 애하고 엄마하고 숨바꼭질을 했는데 애가 몇 킬로를 숨었는가 하면 21킬로를 숨었습니다. 그래가지고 하루 종일 굶고 풀 뜯어먹고 하다가 하루 만에 다시 엄마 품으로 드디어 회복이 됐답니다. 21킬로. 여기서 21킬로는 어느 정도입니까? 모든 게 파장했을 때 걔는 엄마, 아빠를 찾게 된다 이 말이죠. 엄마, 아빠를 찾는다면 걔는 뭘 기대하느냐 하면은 옛날에 엄마, 아빠랑 같이 있었던 안정성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어떤 안정적인 삶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해와 달과 별, 이 모든 것은 무엇에 호응을 맞춰서 같이 무너져 내리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빰빠빠~하고 다 이루었을 때에, 아까 누가복음 23장 44절 말씀처럼 해도 어두워지고, 달빛도 흐릿해지고. 마태복음에서는 죽은 자가 부활하고. 이게 뭐냐 하면 십자가사건의 효과들을, 사례들을, 케이스들을 맛보기로 조금씩 보여준 거예요. 휘장이 찢어지고. 

  

자,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마태복음에서, 성경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해와 달이 무너졌다, 라고 했을 때는 이 말이 뭐냐 하면 해와 달이 그동안 누구 덕분에 견지했느냐 하는 거예요. 견지, 그냥 제자리를 지킨 거예요? 모든 자연중심은 누구 인물 중심으로 응집되었다고 했어요? 예수님 중심으로 응집되었죠. 예수님의 하신 일에 호응하도록 되어 있죠.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면 해와 달도 같이 보조현상을 보여줘야 하는 거예요. 

  

보조현상을 보여준다는 것은 세상중심은 누구 중심이다? 예수님이 하신 일의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해와 달과 이런 별들이 호응해서 보여줘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새 언약이라고 하면 옛날 모세언약 같은 경우에는, 율법은 무슨 언약이냐 하면은, 여기에 언약 중심으로 일한다는 그 사실을, 구약에서는 뭐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은 언약궤가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언약궤를 생각하지만, 제일 언약궤의 가치에 있어서 괜찮은 것이 시내산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천둥번개치고, 불빛이 막 일어나죠. 시내산 꼭대기에서. 그렇잖아요. 모세가 이 안으로 들어가요. 이 무서운 안으로. 얼마나 무서운지 짐승도 올라오면 죽어요. 모세가 하나님이 부르시니까 가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니까, 십자가 피로 용서를 받으니까, 시내산에 올라갈 수 있는 겁니다. 덜렁덜렁 교회 다닌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감당 못할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감당 할 수 없는 그런 요소에 우리가 휘둘려야 돼요. 이게 보쌈 싸이듯이 싸여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함은 쏙 빠지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열심을 내고 그 열심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저주받을 요소, 천벌을 받을 요소를 휘감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걸 인정 안 하잖아요. 

  

우리의 관심사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뭐 밖에 없어요? 내 삶의 안정성밖에 없어요. 내 삶의 안정성. 그래서 내 것 건드리면 화내잖아요. 그동안 이 안정성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내 삶의 안정성밖에 없는데, 이거는 주님이 보시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이 땅에 죄지어놓고는 안정성을 원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소리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실제 진위의, 본뜻을 시내산에서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그럼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를 올라갔거든요. 올라갔을 때 빈손으로 내려왔습니까? 뭘 들고 왔습니까? 돌판을 들고 왔죠. 결국 돌판을 들고 왔다는 것은 이 돌판은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은 언약궤로 이어져요. 돌판이 뭐냐 하면 언약이거든요. 그 언약 판을 안치하는 금고가 뭐냐 하면 언약궤가 되는 겁니다. 이 곳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이에요? 언약궤가 있는 곳이 무시무시한 곳이 돼요. 그냥 아카시아 나무 있고, 뭐 이상현 목사님하고 제 아내는 겁도 없이 거기 들어가서 카메라 찍고 다 했지만. 

  

이 무시한 곳에 천둥번개가 주어진다면, 이 언약궤를 완성시키고, 완성시켰기 때문에 대체할 그 무엇은 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19-03-24 20:08 
광주강의20190322b 마가복음13장 24-25절(안정성)-이 근호 목사 

첫 번째 끝 시간에 언약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내산 위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번개가 치고 화산에 불이 붙는 것은 거기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래 언약은 인간이 상대할 수 없어요. 언약은 주님만 상대하지 다른 사람은 상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언약을 상대하면서 예수님의 자기 인간, 자기가 구원할 백성들까지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언약 앞에서는 뭐냐 하면 죽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살과 피, 예수님이 대신했던 살과 피는 곧 인간이라는 것은 언약 앞에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는 인간은 감당하지 못하고 버텨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버텨내지 못한다는 말은 곧 뭐냐, 인간은 늘 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늘 깨어져야 한다. 자기 자신이 깨어져야 되겠죠. 그러면 인간이 그동안 이 대자연, 해와 달과 별, 그러한 것들의 안정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이 해, 달, 별이 이뻐서가 아니라 내 안에 내가 깨어지기 싫어하는 괴물이 들어있거든요. “절대로 나는 깨지면 안 돼! 나는 무너지면 안 돼!” 이런 게 들어있다 이 말이죠. 

주님 보시기에 천하에 죄인이면서도 그런 것은 생각 안 하고, 무조건 나는 근사하게 유지되어야 하고 손톱만큼도 망가지면 안 된다는 이게 버티고 있는 겁니다. 이 요소가. 그래서 대자연이 무너진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와야 되죠. “그래 무너지자!” 이게 들어와야 해요. “이게 약속이야! 내가 죽는 것이 주님이 원하는 바야.” 이 마음이 들어와야 해요. 이 마음이.  

언약궤라고 하는 것은, 언약에서 무엇이 결국 나오느냐 하면은 언약에서 나오는 것이 주님의 마음 또는 주님의 사랑의 마음,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 이것이 언약을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전달되느냐, 이게 언약의 관건입니다. 전달되지 못하면 언약은 실패로 끝나버리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이, 자기백성의 마음까지 그대로 하자가 없이, 손상이 없이 그대로 이어지고 전달되어져야 되겠죠.  

그 언약의 심정을 전하기 위해서 구약에서는 언약궤 주변에서 매일같이 무슨 작업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제사작업이 일어나야 해요. 제사작업이. 제사작업이라고 하는 것은 이 바깥에는 뭐냐 하면은 멀쩡하게 살아있지만 이 안에 들어올 때는 이 삶이 이 안에서는 뭐로 바뀌느냐 하면 죽음으로 바뀌어야 되겠죠. 이 죽음의 공간이 무슨 공간이냐 하면은 거룩한 공간이에요. 거룩한 공간에서는 어떤 인간도 여기 들어오면 죽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살아 있잖아요? 이 사람은 자기가 죽었음의 티를 바르죠. 오른쪽 엄지손가락, 발가락, 귀, 그리고 유니폼 자체가, 죽음 위에다가 장차 와서 언약을 완성했을 때의 그 위상을 옷이라는 이름으로, 제사장의 복장으로, 거기다가 유니폼을 더 입은 거예요. 갑옷을 더 입은 거예요. 쉽게 말해서 죽었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거예요. 속에는 죽고 겉에는 살아있고. 하나의 신체가운데서. 

그 제사장은 바로 예수님이 유일한 마지막 제사장이라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포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이 죽죠. 죽고 또 죽죠. 그 제사장 자체가 연약해서 할 수 없는 그것을 주님께서는 영원히 온전한 제사장이 되셨다는 그것이 히브리서에 나오는 말씀을 여러분이 생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7장부터 10장까지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어쨌든 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고 이래 보시면 되는 겁니다. 무시무시한 상황을. 제가 히브리서를 언급했는데,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거기에 땅이 진동한다고 이래 되어 있어요.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히12:26), 땅이 진동할 정도로 땅이 반응을 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이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땅도 천체에 속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호응해서 반응을 보여준 거예요. 

땅이 벌벌 떠는 거예요. 땅이 떤다는 말은 땅이 안정성이다? 불안정성이다? 안정하지 못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안정감을 위해서 이 세상이 안정화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그걸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은 이걸로 했어요. 집이라고 했어요. 집. 집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안정화에 대한 극치입니다. 집은. 아무리 바깥에서 힘들고 어려워도 집구석에 들어오면 간섭 안 받고 편하게 안정성을 누릴 수 있는,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집이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땅의 집에서 빨리 벗어나라! 그것은 안정성이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다른 집이 있는 거예요. 다른 집. 그러면 성도로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은, 다시 한 번 복습한다면 이 세상의 천체는 누구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하고 관련되어 있고, 그 예수님하고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그 예수님의 사역, 일과 관련되어 있고, 그 일이 완료, 완성이 되게 되면 더 이상 천체는 자기의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에 우두둑 그냥 떨어져야 되죠.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의 말씀처럼,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자기 할 역할을 다 한 거예요. 더 이상 이 세상은 안정적이다? 안정적이 아니다? 결코 안정적이지 못해요. 이 세상에서 채권사고 은행에 저금해놓고 이 세상에서 멋진 집 짓고 통장 만들고 자식한테 기대 걸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조건이 이 세상은 계속, 내일, 모레, 몇 십 년 후에까지 계속해서 든든할 것이다, 견고할 것이라는 예상 하에 그렇게 살아가거든요.  

그렇게 이 세상이 안정할 때, 인간은 심리적으로 자기도 이 세상의 안정감에 호응해서 본인도 안정감을 얻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왜 죄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궤에 담긴 언약의 취지와는 완전히 서로 배치되기 때문에.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일종의 파장인데, 인간은 파장되는 것을 싫어하는 거예요. 그동안의 버릇이 자기 안정감을 위해서, 안정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온 그 습관 때문에, 세상이 해와 달과 별이 무너지는 것을 굉장히 단호하게 거역합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서 이걸 누가 싫어한다고 했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마귀가, 괴물이 싫어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레미야 3장 16절을 잠깐 보겠습니다. 원래 3장 16절이 유명한 걸로 많다고 했죠. 예레미야 3장 16절도 유명합니다. 저 혼자 유명하지 다른 사람은 잘 모르지만요. 여기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의 언약궤에 대해서 다시는 말하지 않는다. 

이게 언약궤에 대해서 예레미야가 예언한 거예요. 언약궤가 완성을 봤다는 겁니다. 언약궤가. 완성을 봤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새로운 양상의 언약의 형식을 갖추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만들고, 언약궤가 있음으로서 이스라엘 자기들도 안정하다고 그런 이론으로, 신약에서도 그대로 유대사회를 유지했거든요. 언약궤가 있고 언약궤를 모신 성전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멸망시키지 아니할 것이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건 이스라엘의 안정성이죠. 그것마저 완전히 거덜 나야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언약이 모셔둔다고 해서 언약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은 인간의 안정성이 얻고자 하는 그것이, 사실은 악마의 뜻인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인간을 끝까지 파고들어가요. 끝까지. 

남학생들은 압니다. 우리 나이 많은 사람들은 학생 때 일본 학생들처럼 머리를 다 깎게 되어 있어요. 머리를 아주 짧게 깎게 되어 있어요. 중처럼 머리를 그렇게 했던 시절이거든요. 그런데 애들 중에 반항기가 있는 애들이 있잖아요. 그럼 머리를 많이 기르고 온다고요. 그럼 학생주임이 바리깡을 딱 들고 뭘 하느냐 하면은 보란 듯이 교무실 앞에서 시범조로 머리 중앙을 깎아버리죠. 그걸 고속도로 낸다고 했어요. 그때 한참 이명박이 고속도로 낼 때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 낼 때. 고속도로 내버리죠. 

그러면 머리카락에 그동안 감춰있던 맨머리가 나오겠죠. 맨머리. 그동안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우리 인간들을 사랑해서 지켜주고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자연을 안정성 있게 돌아가게 하셨다, 라고 오해를 한 거예요. 이거는 머리를 너무 많이 길렀어요. 그럼 언약은 뭡니까? 인간의 그 치부를, 약점을 완전히 바닥까지 완전히, 그걸 기저, 그라운드, 바탕, 바탕을 드러내는 데까지 언약이 침투해버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대표적으로 인간의 바닥까지 보여주는 그런 기능으로서 택한 백성이 된 거예요. 언약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그들은 완전히 거덜 나는 거예요. 바닥을 내놓는 거예요. 그게 뭐냐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마땅히 멸망당했었는데 그동안 언약궤 때문에 많이 봐주고 있었던 겁니다. 언약궤 때문에. 

중들이 머리를 왜 깎느냐 하면은 자기의 단호함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거든요. 세상과 나는 결별했다는 그 단호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머리를 깎아버린다고요. 남자야 머리를 깎아도 그렇지만, 특히 여성들이 머리를 홀라당 민다는 것은, 참, 독한 여자에요. 근데 지금은 물론 머리 깎는 것이 하나의 컨셉이라는 것을 알죠. 돈 벌기 위한 컨셉이다. 알지만, 여성들이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머리를 홀라당 깎는다든지 또는 천주교에서 처음, 신참 신부들이 사제 서품 받을 때에 그냥 앉아서 받는 것이 아니고 바닥에 엎드려요. 

십자가 모습으로 딱 펼쳐서 엎드립니다. 십자가를 가겠다는 그 비장한 각오죠. 그러면 부모가 자식이 신부된다고 자랑질도 하지만, 또 막 울어요. 대부분 웁니다. 우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 아들 대代가 끊겼다, 대가 끊겨서 그게 제일 아쉽죠. 그걸 역으로 보상하기 위해서 우리 아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감격스럽게도 주의 길을 가니까, 내가 못 가는 길을 아들이 대신해주니까, 그 장렬한 남자로서의 죽음에, 너무 장렬해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안타까움에서 너무 서러워서 우는 눈물이죠. 부모들이. 또 본인도 울고. 

울면 뭐합니까? 이단인데. 백날 울어봤자. 그런 것 좀, 종교적인 형식가지고 바닥을 드러내지 말고. 십자가의 영을 가지고 바닥을 드러내게 되면 내 자아의 안정성 자체가, 십자가가 이게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는 이 세상에서 살 가치도 없는데 주님의 주신 그 자비, 그 사랑, 그 은혜로 인하여 지금 버텨온 거예요. 지금 봐주기 식으로 이만큼 살아온 거예요. 그게.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주께서 머리 깎아서 고속도로 냈다 이 말입니다. 주께서 내 잘난척하는 그 풍성한 머리카락을, 나의 의, 나의 잘남, 나의 훌륭함, 나의 고상함, 나의 실수 없음, 나의 완벽함, 나의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인생, 남한테 해코지 않는 인생, 남을 배려하고 남을 사랑하고 남을 도와주는 그런 고상한 인생, 그걸 완전히 바리깡을 가지고 확 밀어버린 거예요. 그게. 고상한 것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걸 확 밀어버리는 거예요. 완전히 밀어버리는 거예요. 

밀어버리니까, 내 자아가 있다는 자체가 바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아를 가지고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내 자아가 있다는 이 의식 자체가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점차 치매가 되어야 하고 자아가 소멸이 되어야 해요. 내 기억에서 내가 없어져야 해요. 내 기억에서. 내가 나한테 치매현상을 보여야 한다 이 말이죠. 내가 누군지를 물론 알기는 알지만, 내가 누군지를 고정화할 수 없는 이유가 뭘 아느냐 하면은 날마다 내가 주님의 손길에 의해서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늘 달라진다는 사실. 

주님이 그렇게 부단하게 변동을 시키는, 나라고 콕 집었다면 그것은 내일되면 성령이 와서 그걸 가만두지 않고 그걸 부숴버려요. 너의 너 됨은 주님의 손에 달렸지, 니가 어떤 이미지를, 형상을 니가 붙들고 있다고 해서 니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내가 누구냐를 질문해서는 안 되고 내가 어디에 있느냐를 질문해야 된다고 했죠. 내가 누구의 영향력을 입고 있느냐를 봐야 된다 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내가 나에게 집착을 하게 되면 우리는 필시 뭘 추구하게 되느냐 하면은 오늘 제목이 안정성인데, 자꾸 안정성을 추구하게 돼요. 내 안정성. 세상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나만 안정되면 된다는 겁니다. 나만 안정되면 된다. 세상에 있는 해와 달과 별도 다 떨어지는데 지가 뭔데 안정해야 돼요? 나도 떨어져야죠. 십자가 죽기까지 떨어져야죠. 이게. 왜냐하면 십자가라는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십자가에 합류해야 되고 십자가에 집결해야 돼요. 집결. 이 집결하는 장소가 뭐냐, 이게 바로 집이에요. 무슨 집? 없는 집. 천국입니다. 이게 집이에요. 우리가 가야 될 집은 십자가에 집결해야 돼요. 이게 수요설교 내용입니다. 십자가에 집결해야 돼요. 내가 생각나더라도 내일되면 다른 내가 생길 거니까 그거 뭐 꼭 붙들 일이 없어요. 내일되면 다른 내가 또 만들어져요. 내 자체에 대해서 계속해서 붙들고 있으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께서 말씀대로 이렇게 하시고. 자기를 부인하게 하시고. 그러면 성령이 오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야 돼요. 항상. 내 손에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고 나라는 것은 이미 내가 ‘세상속의 나’잖아요. 세상속의 나. 그러면 꾸준히 이 자아라는 것은 세상의 요소들이 모여서 지금의 자아가 된 거예요. 내 자아 속에는 세상 것이 가득 들어있는 거예요. 이 쓰레기들이. 

이 세상 것이 들어왔을 때, 제가 아까 제목으로 이야기했잖아요. 이게 뭐가 들어왔다고 했습니까? 세상에서 뭐가 들어왔습니까? 안정성이 들어왔어요. 왜냐하면 세상은 안정하다는 보장 하에 움직이고 있거든요. 자본주의든 모든 과학이든. 하늘에서 별 떨어진다고 할 때 세상 사람들은 “웃기네!”하고 놀립니다. 아까 베드로후서에서 기롱, 조롱한다고 했죠. 그게 놀리는 거예요. 마치 십자가 밑에서 강도가 그리고 로마 군병들이 누굴 놀렸습니까? 예수님을 놀렸잖아요. “남 구원할 생각 말고 니나 잘하세요. 니도 구원 못하면서 뭘 남을 구원해?”라고 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이 속해있는 세상의 원리가 그래요. 그 사람이 속해있는 원리가. 그들의 구원관으로서는 예수님이 절대로 구원자로 보이지도 않고 구원자로 믿기지도 않는 거예요. 기존의 세계에서의 구원은 그런 식의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죽은 자로 여겨서 구원되는 그런 것은 없어요. 살아있는 내가 안정성 있게 계속 사는 것을 구원이라고 해요. 그쪽 동네에서는. 그쪽 동네가 요새 교회동네지만. 

제가 수요일에 말씀드렸지만, 뭔가 중간에 끊어주는 것이 있어야 해요. 끊어주는 것. 끊어주는 것이 있어야 돼요. 화살표가 쭉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뭔가 바꾸어지는 어떤 순간이 와야 해요. 순간이. 이 노선이 다른 노선으로 바뀌어버리는 순간이 와야 된다고요. 

‘더 안정성 있게 더 잘 돼야지. 이걸 내가 붙들지 않으면 누가 붙들어줘?’ 내가 나를 붙드는 그 노선이 이제는 놔야 될 노선으로 이게 철로가 바뀌어야 돼요. 철로가. 매일같이 나를 놓도록 해주는 조치를 해주는 것에 대해서 주께 감사해야 돼요. 나에 대해서 기대를 안 하는 것. 내 자아를 내세울 자아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그런 환경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해와 달과 별이라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과학을 했던 사람들은 다 웃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은 든든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나를 움직였다는 것을 과학적 수식으로, 수학적으로 잘 이야기해준 사람이 뉴턴이라는 사람입니다. 뉴턴이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운동의 법칙이 있어요. 운동의 법칙에서 힘의 법칙으로 또는 개체의 법칙에서 관계의 법칙으로 과학을 새롭게 정립한 사람이에요. 

이 당시에 사람들은 뉴턴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어요. 너무 놀랍게 이야기를 해가지고. 그전에는 뭐냐, 뉴턴 그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사람이 운동하는 것은 힘을 계속 부여할 때만 운동이 된다. 이래 이야기했어요. 가만히 있는 지우개를 힘을 줄 때 지우개가 움직인다. 얼마나 상식적입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왔었던 거예요.  

근데 뉴턴은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힘이라고 하는 것은 운동을 더 운동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운동의 상태를 바뀌게 하는 것이다. 이래 이야기를 해버려요. 개체 하나가 있는데 힘이 오게 되면 힘으로 인해 개체가 움직이잖아요. 근데 뉴턴은 그렇게 보는 게 아니고 운동한다는 것은 나로 인하여 내가 움직인 게 아니고 누가 있어서 나를 땡겨 주기 때문에 내가 움직인다고 그렇게 인식이 바뀌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힘은, 이 힘을 중력이라고 하는데, 중력 또는 만유인력이라고 하는데, 이 중력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눈에 안 보이죠. 그러니까 뉴턴 이후의 과학은 뭐까지 흡수하느냐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사실로서 흡수시킨 최초의 과학입니다. 최초의 과학이에요. 이때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과학은 종교와 경쟁합니다. 성경과 경쟁해요. 지금은 뉴턴 시대가 아니고 아인슈타인 시대거든요. 뉴턴 다음에 이거 획기적으로 바꾼 사람은 아인슈타인밖에 없어요. 

이게 뉴턴 시대에 들어와서 인간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이제는 과학적인 설명만이 이게 인정할 수 있는 진리가 되는 거예요. 방금 제가 힘 이야기를 했죠. 운동이야기를 했죠. 여기에 뭐가 빠졌습니까? 성경대로 하면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빠졌죠. 이스라엘에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궤가 빠졌죠. 세상의 모든 천체는 누구 중심으로 움직인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 중심인데, 여기서는 그런 게 없어요. 너와 나의 사이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뉴턴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힘에 의해서 됐는가, 라는 처음부터 발상..,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래 봤어요. 가만히 있는 것에 힘을 주면 움직인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것을 기준으로 봤어요. 가만히 있는 것. 그러나 뉴턴은 움직이는 것을 출발점으로 본 거예요. 왜냐하면 태양과 해와 달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뺑뺑 돌거든요. 지구도. 뺑뺑 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 중심이 아니고, 시작이 되면 안 되고,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을 시발점으로 해야 된다는 말이죠. 계속 움직이는 것이. 

가만히 있는 것이 왜 움직이는가가 아니라 왜 움직이는 것이 멈추느냐? 오히려 멈추는 것에 의문점을 단 거예요. 움직이는 것이 왜 멈추느냐는 거예요. 그 움직이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관성이라고 합니다. 관성. 관성은 마찰력이 없으면, 공을 여기서 굴리면 같은 위치로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마찰력이 없다면. 그 다음에 이걸 좀 늘여보면 아무리 늘여 봐도 결국은 자기 위치를 찾아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움직이는 것은 막지 않는 한 계속 하던 행세대로 가는 것이 성질이기 때문에. 관성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공을 던지면 가던 대로 계속 가게 되어 있어요. 가게 되는데, 그런데 공을 던지면 이게 어디쯤 가다가 내려간다 이 말이죠. 내려간다. 내려갈 때 이 지점에 가다가 이 지점에 딱 도달하겠죠. 도달하지 말고 그걸 좀 한 단계 낮추는 거예요. 이쪽 공이 내려갈 때 쯤 돼서 쏙 들어가 버리면 계속 가던 공이 따라가요. 따라가네, 더 따라가지, 더 따라가지, 더 따라가지, 계속 이거는 달리려고 하고 이거는 내빼려고 하겠죠. 이게 뭐냐 하면 지구 위를 도는 달이에요. 달이 떨어지려고 해도, 모든 게 떨어지니까,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지려고 해도 못 떨어지고 계속 뺑뺑 도는 거예요. 

관성과 그리고 관성으로 가는 것을 잡아 땡기는 또 다른 개체의 물질이 따로 있는 거예요. 있어가지고 이 둘 사이에 돌다보니까 뭐가 설명되느냐 하면은 왜 달이 지구를 도느냐가 설명이 되고 왜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도느냐가 비로소 천체의 운동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이 되는 거예요. 합리적인 설명이. 이거는 우주뿐만이 아니고 사과하고 호두도 마찬가지에요. 

자, 여기 컵이 있고 지우개가 있잖아요. 둘이 놓게 되면 둘이 붙게 되어 있어요? 안 붙게 되어 있어요? 붙게 되어 있어요. 근데 왜 안 붙느냐? 마찰력 때문에 안 붙어요. 그런데 만약에 진공상태 같으면 이게 둘이 붙어요? 안 붙어요? 둘이 붙어요. 서로 운동하는 그 마찰력이 없으니까 운동하고 싶은 대로, 중간에 누가 끊어주지 않으면, 누가 땡겨 주지 않으면 계속 가던 길을 가기 때문에.  

뉴턴의 이론을 듣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느 신학자든, 어느 목사든, 신부든 간에 왜 이 사실을 이게 진리라고 왜 우리에게 안 가르쳐줬느냐? 하여튼 누구한테 삐져가지고? 교회에 삐져가지고 어디로 갑니까? 전부 다 모조리 과학이 믿을만하다고 과학으로 다 가버린 거예요. 여기서 과학이 놓친 것이 있어요. 인간이 왜 저런 아이디어에 호응을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 저런 세상의 이론에 왜 호응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우리가 자아가 뭘 원하기 때문에? 안정성을 원하기 때문에. 새로운 집에 갈 생각이 없어요. 익히 아는 이 세상이라는 집을 붙잡고 여기서 대대손손, 자자손손 살고 싶은 겁니다. 이거는 내 자아의 안정성이고 내 자아라고 하는 것은 내 속에 이미 들어왔던 악마의 생각을 인간이 하수인이 되어가지고 이거는 자진해서 악마를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악마가 다치지 않도록 이 자아가 알아서 같이 한마음이 되어가지고 내 마음이 안정되게 지켜주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무서우냐 하면은 죽는 것이 두렵고. 깨지는 것이 두렵고. 시간이 하루가 천년 같이 천년이 하루 같이 없어지는 것이 두렵고. 해와 달과 별이 떨어지는 것이 뭐합니까? 두려운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항상 두려움에 쫓기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적인 인간일까요? 아니죠. 하나님께서 제시한 안정성은 예수님 하신 일에 완료성이고 안정성이에요. 

예수님 하신 일의 안정성은 구약에 뭐로 있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언약궤로 드러난 겁니다. 구약에서 언약궤 할 때 언약궤만 달랑 왔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분노,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처벌의사 이런 것과 같이 왔습니까? 같이 있었잖아요. 왜냐하면 시내산이 너무 무서워 짐승도 돌에 맞아 죽을 정도로 무서우니까.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건전할 수 있다? 없다? 건전하면 발포하죠. 완전히 미군부대라니까요. 죽여 버리죠. 들어가면 죽어요. 두루 도는 화염검을 가지고 못 오게 만들었다 이 말이죠. 

근데 그 무서운 하나님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가지고 인간세계에 들어온다? 이거는 보통 호위무사들이 아니고 엄청난 호위무사들을 대동하고 오겠죠. 왜? 그 정도로 무서운 분이기 때문에. 뭐 김정은이, 머리 깎고 김정은이 따라다니는 그 경호원들은 아무것도 아니죠. 에스겔 같은 경우를 한번 보세요.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일 때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주변이. 감히 근접 못합니다. 범접치도 못해요.  

여러분 이사야 6장 이야기를 알죠. 거기서 이사야가 선지자지만 뭐라고 했습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된통, 그 된통(아주 몹시), 그 된통 한번 당해봐야 세상이 전혀 무섭지를 않아요. 남들이 나한테 상처 준다, 나를 놀린다, 나를 비웃는다, 날 흠집 낸다, 그게 전혀 무섭지가 않다니까요. 그게. 왜? 된통 당했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수요일에 했잖아요.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만남, 그 자체가 구원이라고 했죠. 하나님과의 만남. 이사야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 같은 경우는 “주여 누구십니까?” 장님 되어서 엎드러지는 것. 

너무 무서워서 세상이 안 무서운 거예요. 심지어 자기가 죽는 것, 자기의 안정성이 깨지는 것조차도 안 무서울 정도에요. 왜냐하면 자기 코앞에 주님이 계시니까. 지난 수요일에 환도뼈 이야기를 하면서 야곱이 누굴 만났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죠. 천사인줄 모르고 밤새 싸웠습니다. 자기 힘을 끄집어내서. 

근데 자기 힘이 나오는 원천을 발로 차버렸죠. 욱하고 주저앉았습니다. 그 힘이 자기가 경험하고 알고 있던 인간의 힘이 아니에요. 그건 초월자의 힘입니다. 곧 하나님의 힘이었어요. 하나님 앞에 걷어차인 겁니다. 이거는 자기 힘이 빠진다는 것은 자기 안정성 깨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뭘 의미하느냐 하면 자기자아의 죽음이에요. 자아의 죽음. 자기의 죽음이에요. 

비로소 야곱은 내가 왜 늙어죽느냐를 알게 된 거예요. 내가 늙어죽는 것은 너무나 인간에게 마땅하고 당연하다는 사실. 까불다가 매 맞는 것은, 처벌받는 것은, 천벌 받은 것은 까부는 대가로서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우리는 까부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까부는 것 외에는. 오랜만에 왔다고 아이스크림 사들고 오는 이 까부는 것 있잖아요. 맛있는 계란 삶아오고. 우리는 이 까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매일같이 까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렇다고 까부는 것을 고칠 능력도 없어요. 하는 재주가 까부는 그 재주밖에 없어요. 

주께서 너무도 감사하게도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까불이를 불러다가 다른 집에, 다른 세계에, 현재 이 집을 버리고 다른 집에 살도록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 집은 요한계시록에 보게 되면 무슨 집이냐 하면은,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 보면,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하나님의 언약궤가 언제 하늘로 가버렸어요. 하나님의 언약궤는 바로 주님의 생명수가 흐르는 강입니다. 인간이, 뉴턴이 과학을 이렇게 설명했지만, 사실은 인간은 결론적으로 자기 자신밖에 몰라요. 아까 제가 부부이야기 했잖아요. 누굴 책임진다든지, 누굴 사랑한다는 말은 전부 다 빈말이라는 것. 

왜냐하면 하나의 개체는 다른 개체까지 책임질 수 있는 그런 권한도 없고 그런 능력도 없어요. 누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개체가 자기 개체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사랑은 내 사랑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여자가 남편보고 “당신 내 인생 책임질 수 있나?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조건이 있다. 당신이 내 인생 책임져야 된다.”라고 했지만, 세상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만든 적이 없습니다. 

전부 다 속고 속은 거예요. 다 속은 거예요. 남한테 속았다고 하지 말고 본인의 환상에 본인이 속아 넘어간 거예요. 본인이. 누가 누굴 책임져요? 우리는 남이 나를 책임져줄 만큼 내가 그렇게 고귀한 존재가 아니에요. 주님의 언약궤 앞에서 망한 존재인데, 죽은 존재인데, 죽은 인간이 왜 살아나야 돼요? 이게 말이 안 되죠. 또 죽은 거 같으면 주의 뜻대로 죽어줘야 되지, 기어이 까불락 거리면서 살 이유가 없잖아요. 

아까 뉴턴 이야기를 했지만, 뉴턴이 주장한 것은 이겁니다. 물체에서, 또 신체, 사물,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자기 힘, 자력이 나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사람이 주먹을 날렸다. 우리는 보통 뭡니까? 자기 근육의 힘에서 나왔다 하잖아요. 뉴턴은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과학은 그렇게 수준이 낮은 정도가 아니에요. 뉴턴 정도만 되도, 이거는 너에게서 힘이 나온 것이 아니고 내가 너의 힘을 유도했다고 해요. 왜? 만유인력이니까. 

개가 와서 누굴 문 것은 개의 힘으로 문 게 아니고 그 사람이 물어라! 해가지고 땡긴 거예요. 절대로 혼자 힘으로, 모든 물체는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에 컵이 있고 지우개가 있잖아요. 여기에다가 만약에 매직까지 있다면 이거는 세 개의 관계가 있어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원형이 아니고 타원형이 돼요. 이게 케플러법칙입니다. 다른 새로운 변수, 여러 가지 변수를 구체화시킨 것, 케플러는 원인을 몰랐는데 케플러의 가설을 뉴턴이 명확히 밝힌 거예요. 

한 둘의 서로의 힘, 만유인력의 인과관계가 엮여져 있다. 힘에 의해서, 힘의 관계망이다. 이게 뉴턴의 생각이고, 아인슈타인은 힘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공간이 구부려졌다. 공간이. 물질에 질량이 있으면 질량 때문에 이게 휘어지는 거예요. 큰 질량, 작은 질량이 있으면, 고무망 위에 공들이 있으면 큰 공은 푹 들어가고 조그만 공은 조금 들어가고, 어떤 것은 확 들어가서 블랙홀이 되고. 이런 식으로 공들이 흐르는 이 사이(질량으로 푹 들어가고 조금 들어가고 하는)에 중력이 성립이 되고 여기에 빛이 직선으로 가지 못하고 이 선(질량)따라 가다보니까 빛이 휘어져 보이는 거예요. 이게 아인슈타인이에요.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 말고, 뉴턴이나 아이슈타인에서 뭐가 빠집니까? 개인이 빠지죠. 개인은 빠지고 개인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물리적인 질점이 됩니다. 물리적인 질점은 수학의 대상이 돼요. 인간은 뭐에 불과하다? 숫자에 불과한 거예요. 히틀러는 유대인을 죽였죠. 이게 600만이든, 500만이든 상관이 없어요. 유대인을 죽인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개체라는 숫자에 불과하니까. 

그럼 오늘날 경제에서는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은 돈 버는 기계, 다른 말로 하면 돈 버는 기계에 속한 숫자, 개수에 불과한 거죠. 만약에 다섯 식구가 있는데 하나가 취직해서 돈 벌었다. 누구 가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이 숫자에 다른 숫자가 종속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라도 안정감을 얻었다면 우리는 다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내 자아의 안정성만 보장이 된다면. 

주님의 언약궤, 그리고 십자가는 내 힘의 정당성, 내 자아유지의 정당성을 뿌리채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계속 파고들어가요. 머리에다가 고속도로를 내버립니다. 민낯이 나오도록.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진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 본질의 모습은 뭐냐? 깎아버리면 우리는 예스겔 37장처럼 바짝 마른 뼈에 지나지 않습니다. 뼈. 이 용어를 하도 들어서 식상하면 용어를 바꾸겠습니다. 마네킹. 우리는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아가는 마네킹. 마귀가 안에 들어있는 마네킹.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공도 아니고, 우리는 내 주장도 없고, 내 의지도 없어요. 그저 마귀가 시키는 대로 마귀를 보호하고 마귀의 의견을 동조하고 마귀가 하라는 대로 시키는 마귀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아요. 이게 고린도후서 11장에 사도바울이 너희들은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말을 하죠. 4절에 보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하니까 마귀의 하수인이라는 대목이 나와요. 악마라는 주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너를 견지하라. 너의 안정성을 유지하라.” 그걸 시키는 대로 하면서 우리는 산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것을 산다고 해요.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가 배신한 것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싫어한 것과 강도 한 사람이 예수님을 포기한 것과 이 모든 원인이 다 밝혀졌다. 그럼 뭡니까?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 이유도 이제 아시겠죠. 뭐가 나오면 안 돼요? 우리 자신이 죽음을 못 이기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그 내막이 공개되면 안 되죠. 우리 자신이 죽음 안에 갇혀있다는 것이 공개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살고자 하는 의의를 좌절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모든 행동의 목적은 뭡니까? 밥 먹고 살고자 하는 것이잖아요. 밥 먹고 살고자 하는 이게 다 소용없고 헛짓이라는 것이 공개되면 안 돼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 다음에 하는 짓이 뭐냐, 마귀한테 배운 짓이 뭐냐 하면 착하면 풍족하게 살고 악하면 빌어먹고 산다. 이 논리를 악마한테 배운 거예요. 전부 다 뒤에 붙는 것이 뭐예요? ‘산다.’에요. 산다. 뒤에 산다가 붙어 있어요. 

산다는 누구한테만 붙여야 하느냐 하면은, 지금 살아있는 분은 예수님만 살아있어요.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우리를 지금 살려주고 있는 겁니다. 그야말로 살려주고 있는 거예요. 살려주고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죽는 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주님을 증거 하는 기능이 효과가 끝나고, 우리가 맡은 파견근무가 끝난 거예요. 끝나고 나서 천국에 가서 편히 쉬면되는 겁니다. 은퇴해가지고. 

마치 해와 달과 별들이 무너지는 이유는 자기 역할을 다 마감한 거예요. 마감해서 우르르 다 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 24절 한번 봅시다. 그때, 환란 후에 뭐가 온다고요? 해와 달이 떨어지죠. 환란 후에. 빛을 내지 않죠. 그리고 너희들이 죽이지 말아야 될 분을 죽였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26절에 보면 그때 인자가 구름타고 오죠. 이게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예언이 인자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온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니가 건드리지 말아야 될 자를 건드린 거예요. 인간들이. 근데 사람들이 건드렸습니까? 마귀가 건드린 거예요? 인간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에요. 왜냐하면 광야에서 이미 시험으로 알게 되었잖아요. 사람은 본인 의사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악마가 계속해서 우리한테 보장하는 것은 그래야 이 세상이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그거 하나 근거로 해서 계속해서 시키는 대로 해서 예수님을 죽였고, 그래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은 복수극의 결말이죠. 결말. 그럼 성도는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는가? 성도는 자신의 약점을 알고 복수의 결말을 미리 앞당겨서, 성령을 통해서 미리 결합시킨 사람이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럼 성도는 예수님을 자랑하면서 곁들여서 뭘 자랑합니까? 복수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게 예수님을 자랑하는 거잖아요. 예수님을 자랑할 때는 그냥 예수님 좋아합니다, 라고 하지 말고 뭐까지 해야 합니까? 자신의 약점이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몸이 아파서 세 번씩 기도하니까, 복수의 결말을 하시는 주의 응답이 뭐였습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12:9). 요즘 말로 하면 됐네. 이 사람아! 됐어. 됐어. 그만하면 됐어. 니가 꾸준히 악마의 말을 듣고 살아왔잖아. 이제 내 말 듣고 좀 아프면 어때? 이런 식이죠. 그동안 마귀 말 듣고 내 자아의 건재함, 내 자아의 잘남, 그런 식으로 니가 그거만 챙기고 산 것이다. 맨날 계산만 한 거예요. 이거 해서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을까? 이거 하면 남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그거만 계속 계산한 거예요. 남들이 이렇게 욕하면 내가 이렇게 대응하고, 이렇게 변호하고. 

그래서 인간은 끝까지 자기 약점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자꾸 장점인양, 인간이 이걸 감추는 거예요. 약점을. 치명적인 것인데. 그럼 복수하시는 분이 성도에게 뭘 계속 노출시키겠습니까? 성도의 약점을, 니는 이렇게 빌어먹어야 마땅함을 계속해서 추궁하는 거죠. 누가? 주님이. 빌어먹으라고 성도한테는, 한주에 손흥민한테는 계속 빌어먹으라고 1억씩, 1500만원 주는 거예요. 또 삼성그룹에서 임원들은 이만큼 받아요. 한 달에 1억씩 임원들은 월급 받잖아요. 그게 성도일 경우에만 그렇고. 성도 아니면 지가 잘나서 그런 거고. 

성도한테는 매일같이 양식주고 에라, 빌어먹어라! 양식 주고 빌어먹어라. 아이스크림 주고 빨아먹다 죽으라고 주고. 계속해서 살려주는 이유는 우리의 약점이 노출되면서 이제는 우리는 다른 인력관계에 있다는 거예요. 이제는. 누구하고 관계가 끊어졌다? 이제는 악마의 말을 안 들어도 괜찮은 관계에 속하는 거예요. 우리 속에. 우리가 뭐냐, 언약상자, 언약궤가 되어버렸어요. 주님의 약속이, 주님의 십자가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서, 마귀가 있던 자리에 주님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게 뭐냐 예수님의 그 취지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시는데 성공하신 거예요. 성공했기 때문에 이제는 뭐냐, 내 자아의 자리라는 것은 나의 약점을 노출시키는 자리인 동시에 그것을 이미 처리해주신, 이미 그것을 해결해주신 주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자리, 따라서 우리는 움직이는 언약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이기 때문에 언약궤를 건드리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죽죠. 성도를 건드리면 저주받습니다. 그게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5장 10절,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예수님하고 똑같아요. 예수님을 건드리면 심판받듯이 너희를 건드리면 심판받는다. 나는 뭘 해도 죄인이며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만 나는 성도되었다는 것을 건드린 사람, 그 사람은 저주받습니다. 

왜? 우리는 언약궤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이런 기능을 하려면 내가 나를 관리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약점을 드러내는데 무슨 관리가 돼요. 관리하면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것밖에는 안 되잖아요. 자기를 관리하지 마세요. 장점으로 내세울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게 약점뿐인데,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 증거 하라고 매일같이 우리를 살려내시는 겁니다. 매일같이. 

무슨 일이 있을 때에, ‘주여, 교만할까 두렵습니다. 애가 취직했는데 이것도 교만하지 않을까요?’라고 하는데, 교만한 것도 주의 일입니다. 교만한 것도. 왜? 그걸 안 감추면 돼요. ‘나는 너무 기분 좋다.’ 이것도 약점이에요. 약점 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게 즐거워요. 그동안 약점 감춘다고 마귀한테 얼마나 시달려왔습니까? 나 아니야, 나는 괜찮아, 나는 훌륭한 인간이야! 얼마나 손사래 치면서 가증 떨었습니까? 이제는 자유 하십시오. 그래, 니 못났나? 나는 더 못났다. 나는 못난이의 싸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남한테 장점 내세울 그런 피곤함은 이제는 끝났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령이 함께 함으로서 사도바울처럼 죄인의 괴수가 된 이것이, 복음의 기능으로서 합류된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의 어떤 면을 보면서도 주께 감사한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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