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90322a 마가복음13장 24-25절(안정성)-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3장 24-25절
24절,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절,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일이 환란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했어요. 그럼 그 환란을 십자가로 봅시다. 십자가로 보게 되면 이 지구상에 일어나는 현상이, 환란 그 이후죠. 그 이후에 세상 전체가 붕괴됩니다. 천체가 붕괴된다면, 이 환란을 십자가로 보게 되면 예수님이 부활승천하고 난 뒤에 남은 자들이 누구겠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성도들이 여기서 생산되겠죠. 그렇죠.
그럼 성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는 경우를, 그런 케이스case,사례를 성도들도 공히 동일하게 그들이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통해서 이 세상이 진행되는 그런 구조가 아주 굉장히 간편하게 깔끔하게 정리가 돼요. 이 세상은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은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 예수님에 대해서 공격을 해야 되고, 환란을 해야 되고, 거기에 대해서 이 세상은 환란 뒤에는 천체가 붕괴되어야 한다는 그런 확정된 순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확정된 순서가.
근데 이 천체가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그동안 이 천체를 통해서 뭘 도모했느냐 하면은 안정성을 도모한 거예요. 안정성. 사람이 산다는 것은 안정적일 때, 세상이 안정적이라고 생각하고 그 구석 한 모퉁이의 안정된 가운데서 자기만의 소박한 자기세계, 자기영역을 이렇게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보통 여고졸업하면 여고동창생들이 있죠. 만약에 여고동창생들을 20년 후에 오랜만에 만난다면 일단 카페가 문을 안 닫아야 되고, 버스가 파업을 안 해야 되고, 그리고 거기 동창생들 전부 다 몸이 안 아파야 되고, 그리고 나이 40에 치매에 안 걸려야 되고, 그리고 모이는 그날에 북한군이 전쟁을 선포하지 않아야 해요. 이북에서.
그러면 어떤 한 장소에서 오랜만에 수다를 떨려고 친구에게 전화해서 카페에 모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안정성들이 보장이 되어야 하겠어요? 버스 파업하게 되면 안 되잖아요. 또 주유소가 파업해서 기름을 못 넣게 되면 차타고 못 오잖아요. 이런 거. 그리고 각각 자기 가정에 우환이나 자기 몸이 아파서는 안 되고. 자기가 갑자기 위암이 걸리면 못 온다 이 말이죠.
사람들이 하나의 계획을 잡는다는 것은 그 전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내 계획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이 세상은 굳건하고 안정적이라는 사실을 경험에 비춰서 자기는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 이 천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 해, 달, 별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그동안 뭘 제공했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은 대단히 안정적이다, 라는 그러한 의미를 인간에게 제공한 거예요.
그 안정적인 세계 속에서 역시 자기가 안정적으로, 안정적이니까 거기서 한 부분을 이렇게 딱 두게 되면 자기는 자기 계획의 소박한 소망이라든지 꿈을 안정적으로 펼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안산에 취직을 했는데 안산에 갑자기 유성을 맞아서 안산시내 자체가 없어진다면 취직 못한 거죠. 그렇잖아요.
이 안정성이, 이 안정적이라는 이것이 인간에게 이게 죄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옛날 젊었을 때 들었던 그 팝송이라든지,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 옛날 7080노래, 통기타 노래, 옛날 흘러간 노래를 들을 때에, 그 노래를 들으면서 그 노래를 들었던 그 때 그 시절의 상황을 이렇게 비춰보면 그거는 안정성이에요. 안정성입니다.
‘그때 내가 참 젊었었지.’ 이게 전부 다 여러 가지 말을 하지만 이 안정성이라는 말 하나에 다 담겨있는 겁니다. 다 담겨있어요. ‘그때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이뻤었었는데..,’ 지금도 이쁘지만. 말을 조심해야 돼요. 그때 이뻤지,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나의 안정성을 도모하는데 이 세상이 든든했었다는 뜻이에요.
이런 안정성을 연상하는 것, 이게 뭐라고요?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뭘 누락시켰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그 사실을 누락시킨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죠. 누가복음 23장 44절에 보면,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제 구시까지 깜깜했다. 이 말이죠.
방금 누가복음 23장 44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천체의 반응입니다. 대자연의 반응이에요. 반응 또는 호응하는 거예요. 해와 달과 별이 주님이 하신 일에 호응해주는 겁니다. 인간은 달에 가고자 했죠. 인간은 별을 관찰하고자 했고. 화성이나 목성을 그냥 탐색하려고 했죠. 그 말은 뭐냐 하면 해와 달과 별은 인간주체에게 하나의 대상, 객체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이 천체가 슬픔에 호응을 해줬다는 이 말은, 탄식을 하듯이 뭔가 반응을 나타냈다는 이 말은 단순히 천체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적인 눈으로 보듯이 보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시는 업적, 그 사역, 언약완성, 같이 이렇게 연관성이 있는 걸로 등장하는 거예요. 연관성이 있어요.
하나님의 십자가를 새 언약이라고 했죠. 마지막 때에 다락방에서 떡을 뗐잖아요(눅22장). 그래서 이게 새 언약이잖아요. 거기서 내 살과 내 피로 새 언약을 이루리라. 그 새 언약 안에 누구도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이 대자연, 천체도 같이 엮어져 있는 관계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대자연은 어떤 중심을 갖고 있어요. 중심인물이 있어요.
세상의 과학은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공간에서 어떤 특정지점의, 중앙지점을 가지고 중심이라고 하지만, 여러 가지 사물들이 있으면 그것을 중앙에 놓고 전부 다 같은 거리에 있을 때 중심이라고 하지만, 이 세상은 중심 되는 지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심 되는 인물이 있어요. 강남강의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거기서 예수님의 인물을 가지고 탈자연화라는 이야기를 했죠. 탈자연화.
자연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계신 분. 유일하게 자연과 벗어난 분. 갈릴리바다의 태풍과 바람과 파도도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니까 잠잠해야 되는 그러한 긴밀한 관계에 있어요. 대자연도. 탈자연화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거는 자연에 대한 초월이죠. 초월 또는 더 어려운 말로 초재적, 초월적인 존재로 계신다, 라는 이런 말. 초재적, 초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초월, 벗어난 것이 아니고 간섭하고 휘젓고 있고 다루시고 있는 거예요. 누가요? 주님께서.
그러면 이 세상이 안정성이 있다는 것은 그냥 안정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에 조건이 있어요. 안정될만한 조건이 그동안 있어왔던 겁니다. 언제까지 안정화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지기 전까지 안정적이었어요. 이 대자연이. 십자가지기 전까지는. 언약에 호응하는, 예수님의 새 언약 완수에 대자연이 같이 합세해서 호응해주는 겁니다. 조연급들로. 해와 달이 마치, 예수님께 시켜만 주이소~ 라는 식으로 운행하고 있었던 거예요.
십자가 질 때까지 호응했다는 말은, 십자가 지는 이 사건이 뭘 유발하느냐 하면은, 십자가 지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무슨 모드mode,방식에 접어드느냐 하면은 종말모드에 들어가는 겁니다. 왜? 다 이루었으니까. 다 이루었잖아요. 보통 연극할 때, 연극하기 전까지는 온갖 것, 옷들도 준비하고, 시나리오도 준비하고, 연극연습도 하고 했는데, 이제 학예회 다 끝났어요. 연극 다 끝났어요.
그러면 배우들이 변장할 때 화장하고 탈 쓴 것, 옷 입은 것, 전부 다 파장분위기에 들어가거든요. 걷어내야 되죠. “빨리 정리하고 짐 싸자!” 짐 싸자! 끝났어! 이게 뭐냐 하면 종말모드다 이 말이죠. 종말모드. 종말모드인거예요. 이게. 마치 장날 아침에 분산을 떨어요. 저도 장날 아침에 많이 가봤는데, 온갖 것 소문 듣고, 온 천지의 장사꾼들이 다 모이고, 평소에 안 모이던 가축 키운 것, 나물 뜯은 것, 다 가지고 와서 팔다가 오후 다섯 시쯤에 하나둘 천막 걷고 집에 가요.
집에 가게 될 때, 왜 그렇게 장날 끝에는 바람이 부는지. 아주 황야의 무법자 마지막 대목같이. 바람이 확 불면서 또 검불 있잖아요. 메마른, 마른 풀들이 어수선하게 엉켜서 굴러가죠. 또 노을이 지고. 허전하게. 모든 게 허전하고 허무해져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파장분위기인데. 주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이런 예언, 예고를 한다는 말은 초점을 두고 관심 두어야 할 것이 우리 자신의 사적인 일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왜? 우리의 모든 일들은 종말을 기조로 해서 한 게 아니고, 그라운드로,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바탕으로 한 겁니까? 안정성을 바탕으로 한 겁니다. 이 세상은 계속해서 줄곧 갈 것이다. 안정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식을 구입한다든지, 어음을 미리 땡겨서 한다든지, 안 그러면 미국의 국채라든지, 그런 것들을 사놓는 이유가, 미국이 내일 망할 것 같으면 미국 채권을 왜 사놓습니까? 살 이유가 없잖아요. 휴지인데. 지금 베네수엘라 국채 사는 것 봤습니까? 베네수엘라. 군인들도 탈영하는 판인데, 그거 왜 사겠어요. 믿을 것도 못 되는데. 그리스, 스페인 이런 국채 못 사죠. 또 몰라, 투기자본하려고 사는지 모르지만.
베드로후서 한 번 봅시다. 베드로후서 3장 3절에 보면 “말세에”, 말세라는 말은 종말입니다. “말세에 기롱(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여기서는 정욕을 좇아, 라고 하지만 그냥 자기의 솔직한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는 정욕이지만 인간들이 평소에 살던 삶의 방식대로 말하기를, 4절,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그냥 그대로 있는, 스스로 있는 거예요.
자연이라는 말 자체가 한자로 스스로 그냥 있다는 뜻이에요. 내추럴한,natural,자연적인. 자기스스로. 셀프self죠. 본래대로 그냥 있는 거예요. 본래대로. 근데 본래대로 있다, 또는 아니야! 우리는 이제 파장이야! 라는 이 결정을 누가 해야 됩니까? 같은 인간들끼리는 결정을 할 수 없죠. 왜? 드론 띄우듯이 전체를 다 조망을 한 사람만이 그걸 할 수 있어요. 그냥 본다고 해서 장래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어떤 중심인물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자기 몸을 통해서 계속 풀어낸 거예요.
여러분, 스카치테이프가 있잖아요. 스카치테이프 양이 굉장히 많은 것 같지만 자꾸 그 붙어있는 스카치테이프를 자꾸 뽑아내고 써버리면 이게 나중에는 돌돌 감겨있는 양이 얼마 되지 않죠. 두루마리 화장지처럼요. 이 세상은 예수님의 몸에 붙어있는 두루마리 화장지에요. ‘잘 풀리는 집’이라는 화장지 있잖아요. 자기 몸을 풀게 되면 자기 본색이 나오죠. 그리고 예수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은 똑같이 우리 성도에게 일어납니다.
그동안 우리 성도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평소에 자기가 안정적으로 인생을 꾸려온 것에다가 예수님에게까지 도움 받아서 안정성을 더욱더 단단하게 더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거는 다른 가짜예수죠.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계속 뭔가 풀려나가는 것, 소멸되는 것이 있어야 해요. 내 안정성에서 구축된 이 모든 것을, 아, 이게 불안정한 세계의 방식에 우리가 대처해야 된다는 것을 감 잡아야 됩니다.
안정성에서 살아왔다면, 이거는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와장창 깨져야 해요. 차라리 불안정한 세계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방법은, 우리가 대처하는 방법은 새로운 발상이 필요한 거예요. 어느 것도 믿을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의지할 것도 없고, 믿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믿을 게 없다고 하니까 생각이 났는데, 부부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부부되기 전에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연애하겠죠. 그럼 연애부터 생각해봅시다. 남자가 이래 있고 여자가 이래 있다면, 남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자를 보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럼 여자가 하는 말이 “사랑하는 조건으로 내 남은 인생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물론 노골적으로 책임질래? 하면 너무 여자로서 노골적이다, 속보인다, 이렇게 하겠죠. 그런 소리를 노골적으로 하는 여자들도 있겠지만.
그렇게는 안 하고 사랑한다고 하니까, 그 사랑한다는 것에는 뭐가 필수적으로 담겨있다? 나는 놀 테니까 알아서 옷 입혀주고, 밥 먹여주고, 따뜻한 좋은 아파트해주고, 식사비하고 내 취미생활비까지 다 해내라는 그게 다 담겨있어요. 어떤 여자 분은 남자하고 결혼해서는 할 일이 뭐였는가 하면 전에는 그림으로 취미를 하다가 이제는 음악으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애는 중학교 들어갔는가, 둘이 있는데 대충 키워놓고. 그 tv를 보고 있는 다른 여자 분들이 얼마나 부러워할까요? 돈 버는 주부가 아니에요. 매일이 그냥 취미활동이에요. 미술 하다가 피아노 배우기, 또 무슨 취미로 바뀔지 모르겠지만.
그게 여자의 로망이 아닐까요? 노는데 이상하게 맛있는 거 먹을 수 있고. 취미생활하면서 누구 탓하는 사람 없고. 거기다가 시아버지, 시어머니 일찍 다 돌아가시고. 시동생, 시누이 다 너무 성공해서 손 벌리는 사람 한명도 없고. 애는 공부하라고 안 했는데, 공부가 제일 쉬워요, 하면서 지가 알아서 공부하고. 가서 트로피하고 상장이나 보조해서 받아오면 되고. 무슨 토론대회 나가서 해도 되고. 남자는 뭐 저녁 7시면 따박따박 들어와서 알아서 앞치마 두르고 요리 다 해주고. 애들 숙제 다 돌봐주고. 여자는 그냥 ‘다리 꼬지 마’라고 했는데 다리 꼬고 앉아서 리모컨 돌리면서 tv드라마나 보고.
그 모든 미래상이 어디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사랑 안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사랑 안에. 근데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이 개체가 다르죠. 신체가 다르죠. 신체라고 하는 것은, 이 개체라고 하는 것은 개별자라고 하거든요. 개별자. 몸이 따로따로다. 같은 꿈을 꿀 수가 없어요. 남의 꿈을 훔치는 것은 그건 다니엘이나 하는 짓이지 보통 사람은 하지를 못합니다. 요셉이나 남의 꿈이나 해몽해주지. 보통 사람은 못하잖아요. 따로따로에요.
따로따로인데, 과연 사랑일까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건 사랑이 아니거든요. 사랑도 아닌데 그 사랑에다가 여자는 뭐라고 요구하느냐 하면 “당신이 날 책임질 수 있습니까?” 라고 요구할 때, 그 요구가 이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어요? 결혼 자체가 이게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결혼이라는 게. 속이고 속는 세상이라는 노래가 있죠. 둘 다 속은 거예요. 둘 다. 둘 다 상대방한테 ‘잘 걸렸다. 이용해먹자.’ 둘 다. 한쪽만 이용한 게 아니고 저쪽도 이용한 거예요.
나 외로운데 당신이 덜 외롭게 해달라고, 이렇게 남한테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내 신체가 아니고 저쪽 신체인데. 그쪽 신체는 어디 뭐 돌멩이입니까? 기계에요? 세탁기입니까? 누르면 되는 세탁기가 아니잖아요.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자기고집이 있고 자기개성이 있고 자존감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라고 할 때 “예”라고 하면 거기에 뭔가 자기 실리를 계산해서 “예”라고 할 거고. 둘 다 다 실익이 있는 거예요.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외부적으로 안정성을 기대하는 것, 그러니까 아내는 남편을 통해서 안정성을 얻고, 남편은 아내를 통해서 내 자식을 보고 싶은 것과 내가 너무 어릴 때 외롭게 살아가지고, 뭐든지 다 나한테 밥도 해주고 애교도 부려주고, 특히 남자한테는 여자의 애교를 제일 그리워하거든요. 애교는 결혼한 순간 다 깨집니다. 제가 볼 때는 애교는 없어요. 애교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걸 해요. 돈이나 계속 주면 애교가 나오지. 안 그러면 여자는 돈 집어넣을 때만 애교가 나와요. 뭔가 기대한 것을 해줄 때 애교가 나오지. “오빠앙~” 하는 그런 거 있잖아요. 뭔가 기대한 게 있으니까 애교가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개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신체가 달라요. 결혼하는 관습과 제도, 이건 속임수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뭔가 인간은 실익, 어떤 이익이 있어요. 서로를 통해서 어떤 안정감을 극대화시키겠다는 겁니다. 안정감을. 남자 나이 서른다섯, 여자나이 서른둘이 되어가지고. 어떤 것을 보니까 여자 나이 서른셋이면 끝인가? 뭐 이런 게 나와요. 더 이상 남자들이 원하지 않는 여자 나이라고 이렇게 하는데.
이게 실제 끝을 돌파하고 싶어서 결혼이라는 어떤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려고 몸부림 같은 것일 수가 있어요. 이 결혼이라는 게. 인간이 어떻게 자기 실익을 포기합니까? 미친 거 아니에요? 말로는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한다고 하지, 어떻게 자기 이익을 포기해요? 인간이. 서로가 다 자기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서 서로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희생 하겠다? 희생해서 뭘 얻으려고 하는데?
희생한다는 말과 희생하면 뭘 얻을 수 있는데? 이게 사실은 앞뒤가 안 맞는 개념이거든요. 근데 이상하게 잘 맞아 들어가요. 희생이 아니었어요. 투자였죠. 그리고 난 뒤에 둘 다 속았다는 거예요. 본인한테 속은 거예요. 본인의 안정성한테 본인이 속은 거예요. 나는 저 여자를 만나서, 나는 저 남자를 만나서 내가 이 땅에서 안정성 있게 내 미래를 개척하겠다. 둘 다 없는 안정성을, 있지도 않는 안정성을 있다고 우기면서 계속해서 대인관계를 시도한 거예요. 대인관계를.
제가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모든 인간은, 아담 속에 있는 인간의 특징은 두 가지라고 했어요. 아담의 후손은 첫째는 죄를 짓는다. 두 번째는 죄를 감춘다. 죄를 짓는다, 분명히 창세기 3장의 아담은요, 이 땅에서 불안정하게 살게 되어 있어요.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불안정하게 살게 되어 있어요. 근데 사람들은 땅을 개간하면서 안정성을 위하는데, 그 안정성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여기서 나왔어요. 자아내부의 안정성.
인간 내부에 악마의 안정성이 인간의 안정성으로 표현된 거예요. 발산된 겁니다. 나의 안정성이라는 것은 내 안에 들어있는 괴물, 악마가 안정성을 원하기 때문에 내가 안정성을 원하는 겁니다. 원래 해답은 세상은 안정성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아벨이 정상적으로 살았습니까? 일찍 죽었습니까? 아벨이 일찍 죽었잖아요. 아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이 안정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세계인 것을 알았어요. 이게 믿음이라니까요. 믿음으로.
이 땅이 내가 아는 안정성을 보장 못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천체는 누가 쥐고 있어요? 주님이 쥐고 있어요. 그러면 나의 안정성은, 내 안에 누가 있어요? 마귀가 있죠. 그러면 아벨이 드린 제사는 뭡니까? 내 속에 있는 안정성의 기대를 아예 무산시키는 내용물이 아벨이 드리는 제물 안에 삽입되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피라는 거예요. 피. 제물의 피 흘림이고. 기름부음이라는 모티브를 쪼개는 거예요. 나누는 거예요.
마치 내 몸이 쪼개져서 내 안의 마귀가 드러나는 순간, 나는 수술에 성공한 거예요. 악마와 나의 몸체를 분리시키는 그 수술. 그 수술이 성공한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 모든 이스라엘은 공히 개성이나 인물, 지문, 얼굴 모습, 취미 다 묵살하고 오직 하나의 원리가 뭡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의 원리가? 문설주에 뭘 바른다? 양의 피를 바르죠. 양의 피. 양의 피를 발라요. 자기 피를 바르는 게 아니에요. Rh+형 바르고, 뭐 A형, 그런 거 없어요. 어린양의 피를 바른 거예요.
어린양의 피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장차오실 예수님이 세상의 원리, 이 세상은 불안정하다는 사실, 다만 이 세상이 안정되게 보이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안정적인 보장을 위해서 그 천체가 주님의 일에 같이 동반해서 호응해준 거예요. “주님이여, 어서 하신 일에 성공하옵소서.” 이런 거. “십자가에 제대로 돌아가시옵소서.” “주님이 세상 죄를 지시는 어린양이 되시는데 지장이 없게 하옵소서.” 그렇게 호응해준 거예요.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을 때에 우리가 놓치는 저 구석에, 여러분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의 시험 아시죠? 마귀한테 세 번 시험받는데, 그때 그 그림의 한구석에서 눈에 잘 안 띄는 대목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천사가 그걸 지켜보고 있다는 거예요. 세 가지 테스트가 끝나고 난 뒤에 후딱 와서, 그거 뭐 오메가3부터 해가지고 기를 돋우는 그것을 막 주시는 거예요. “잘했어요! 주님!” 천사가 막 힘을 주는 거예요. 천사는 일단 지켜보는 거예요. 팔짱끼고 지켜보자는 식이에요. 뭐 천사가 팔짱끼는 일은 없겠지만. 날개를 끼겠죠. 날개를 끼고 지켜보죠.
우리 주님이 일단 악마를 이겨줘야 해요.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속에 있는 악마하고 상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하고 상대할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하고 상대할 가치가 없어요. 나는 누구 말에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데, 복음을 아는 사람은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말 자체가 주제 넘는 일입니다. 아! 본인이 상처받은 게 아니겠죠. 본인 속에 있는 악마가 상처받았지.
성도는 깨어져야 해요. 수술, 개복해서 감추었던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깨어지는 경우를 계속 당해야 되는 겁니다. 자꾸 이걸 감싸 안으면 안 돼요. 감싸가지고, 내 안정성이 얼마나 귀한데 니가 뭔데 독한말로 쑤셔서 내 안정성을 다 깨지게 하느냐? 이렇게 달려들면 그거는 속에 뭐가 있다는 말이에요? 속에 나의 자존심을 꼭 지켜줄게, 라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그 원초적 동물, 괴물, 짐승이죠. 악마가 그대로, 지금 짐승 말에 종속되고, 지금 그 말이 지배하고 있다는 말밖에는 안 되잖아요.
성도한테 상처는 사치입니다. 사치에요. 그 상처라는 말은 없어도 되는 거예요. 지킬 게 없는데 무슨 상처가 있어요. “아이고, 집사님 못생겼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나도 뭔가 착각하고 있었는데 그 착각을 깨줘서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못생겨도 천국 간다가 아니라 못생기게 해줘서 천국 가게 해주셨으니까. 만약에 이거보다 더 잘생겼으면 지옥 갔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 뒤돌아보면 이것도 마지막 자존감의 반항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은 세상을 의지하고 있어요. 인간은 이 천체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깨어지기 싫다는 거예요. 나 이대로 좀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나 이대로. 내 자존감이니까. 마지막 남은 자존감을 깨버리면 나는 못 산다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니까 살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니가 불안정한, 종말이죠. 종말에도 살아남는 사람이 되려면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십자가를 감당해야 돼요. 괴물이 있던 자리에 십자가가 들어오는 것을, 주님이 들어오는 것을 우리가 감당해야 됩니다.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환란입니다. 환란. 예수님이 받았던 그 환란이 성도에게 그대로 개입되어야 합니다. 들어와야 돼요.
사람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자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죄의 왕노릇이니까. 죄의 자식이면서도 그 죄가 있는 자체를 안 다치려고 안정성을 자꾸 취하니까 결국 우리는 안정성의 자식이에요. 안정성의 자녀들. 아까 베드로후서 봤죠. 이 세상은 그대로 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그대로 있으면 참 좋겠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세상이 완전히 파탄난다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주의 십자가 하는 일과 대치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는 부수겠다는 것인데 우리는 못 부수게 붙들고 있는 거예요. “주님 저리가! 내가 것 못 건드려요. 제가 얼마나 공들인 인생인데, 이 가치를, 이 의미를 왜 부숴요?”하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방송에 나오는 인문학 강의를 들어보세요. 다 그이야기에요. 인문학강좌. 그리고 정치인들, 유시민이나 정치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세요. 도올 김용옥 교수가 하는 이야기 전부 다 들어보세요. 이게 뭐냐 하면 붙들고 못 놓겠다는 거예요.
니체는 뭐라고 했습니까? 신이 죽었다고 했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신인데, 내가 신 됨을 감히 누가 지적질을 하느냐? 저리가! 라는 뜻이에요. 이걸 통해서 역으로 뭘 아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그 유대사회에서 평소에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가를 알 수가 있어요. 짐작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사역들은 전부 다 그 의미가 어디에 집결되느냐 하면은 바로 십자가에 집결되죠. 십자가가 모호한 게 아니잖아요.
모든 대자연도 마찬가지고, 예수님 본인의 모든 행적이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내뱉었던 그 말 한마디, 기적 하나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다? 십자가 내용이 들어있다. 이래보시면 되는 거예요. 그 예가 뭐냐, 문둥병자, 소경된 자, 세리, 창기, 강도, 이 사람들에게 의외로 우호적이죠. 그들이 뭐 착하고 훌륭해가지고, 막달라 마리아가 훌륭해서 우호적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진짜 진위, 진짜 말씀의 내용이 그런 사람들을 소집해서, 자기 일에 엮이게 함으로써, 십자가의 의의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그 사회에서 뭐하는 사람들이냐 하면 이미 저주받은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이미 개인적으로 본인들이 종말에 도달한 사람들이에요. 더 이상 세상에 대해서 기대할 거나 자기의 안정성을 취할 수 있는 어떤 대책이 전혀 없는 사람들. 이미 주위에서 저주받았다고 낙인찍힌 사람들이거든요.
소경이나 문둥병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죄를 안 지어도 조상의 죄 때문에 그런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소경이나 귀머거리나 절름발이가 어떻습니까? 굉장히 불편해보이죠. 실제로 불편할거고. 우리가 눈감고 체험해보세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3절, “오실 분이 당신이니이까?”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5절, “소경이 보며”, 순서가 뭡니까? 소경이 보죠. 소경이 볼 때는 누가 개입했다? 예수님께서 개입했으니까 소경이 보죠. “앉은뱅이가 걸으며” 누가 개입했습니까? 예수님이 개입했죠. “문둥병이가 깨끗함을 입으며” 누가 개입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개입해서 깨끗함을 입었죠. “귀머거리가 들으며” 예수님이 개입하니까 듣게 됐죠. “죽은 자가 살아나며” 예수님이 개입하니까 살아났죠.
그 예수님의 개입이 뭐냐 하면 그냥 예수님의 존재, 계심으로의 개입이 아니고, 무슨 사건이라고 했습니까? 모든 것이 파장되는, 실제로 사건이 개입하니까, 소경이 보게 된 거예요. 귀머거리가 듣게 된 겁니다. 그러면 소경, 귀머거리, 절름발이, 그 시대의 무슨 사람들이었습니까? 저주받은 사람들이죠. 그 시대에서.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 사람들은 그 시대가 저주받은 시대라는 것을 대변해주는 저주받은 대표자들이 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저주 안 받은 것이 아니고 저주받아서 된 거 맞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만약에 병이 나았다, 나는 소경이었는데 눈 떴다, 이래돼버리면 이 사람은 어디로 귀환하느냐 하면은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망해야 될, 기존의 멀쩡한 인간들의 공동체에 합류한 셈이 되어가지고 이거는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 그대로 가는 셈이 돼버려요.
십자가라는 것은 기존의 안정성의 세계에서 니가 인간답게 사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고, 그거는 오늘날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고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아이고 꼬시다. 잘됐다. 차라리 망해버려라. 니 망하고 내 망하자. 다 같이 망합시다.” 이거거든요.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같이 망하자는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그러나 소경이나 절름발이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는 뭐냐, 이 불안정한 세상에서 대처하는 방식은 십자가뿐이라는 겁니다. 십자가뿐이잖아요. 왜냐하면 자기들은 이 땅에서 이미 버림받았잖아요. 버림받았기 때문에.
마가복음 13장 23절부터 이렇게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 이후에 대한 일에 대해서 언급을 한 겁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근데 이 십자가사건 이후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말이에요. 왜냐하면 십자가사건 자체가 시간이 흐른다는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요. 베드로후서 3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상은 창세전부터 그대로 쭉 간다. 아무 변동이 없다.”라고. 그걸 아까 안정성이라고 했죠. 이 세상은 안정적이라고 했죠. 안정적으로 간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의 삶은 어떤 전제하에 살아가느냐 하면은, 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탈이 없을 것이다. 안정적으로.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처럼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사고잖아요. 그런데 베드후서 3장 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말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은 너희들의 시간계산하고 하나님의 이 마지막 때의 시간계산하고 일치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있음에 의미를 둬요. 인간은 시간이 있다는 데에 의미를 둔다고요. 왜냐하면 시간이 있다는 말은 시간이 그만큼 안정적인 그 템포를 유지한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뭡니까? 하루 같죠. 하루 같으면 또 계산한다고요. 사흘이면 삼천년이 됐네. 그게 아니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이 말은 이런 계산 자체를 하겠다는 의도가 바로 이 세상을 계속 붙잡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입니다. 이게.
경건한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세상이 전부 다 완전히 물로서 주저앉았다, 다 파괴되었다, 모든 게 다 파장이다, 라고 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겠느냐 라는 것을 베드로후서가 이야기합니다. 아까 장날을 이야기했는데, 5일장 끝나고 난 뒤에 꼭 바람이 휭~ 하고 불고 가게들 문 닫죠. 다 갔는데, 이제 해지고 어두운데, 꼭 세 살 먹은 애가 코 찔찔 흘리면서 울고 있다고요. 엄마 찾아서 또 할머니 찾아서 울고 있다면 얘는 지금 어떤 분위기에요? 주위에 어른이 하나도 없어요. 자기만 남았어요. 왜 남았는지 몰라요. 숨바꼭질을 하다가 남았는지.
아르헨티나에서 애하고 엄마하고 숨바꼭질을 했는데 애가 몇 킬로를 숨었는가 하면 21킬로를 숨었습니다. 그래가지고 하루 종일 굶고 풀 뜯어먹고 하다가 하루 만에 다시 엄마 품으로 드디어 회복이 됐답니다. 21킬로. 여기서 21킬로는 어느 정도입니까? 모든 게 파장했을 때 걔는 엄마, 아빠를 찾게 된다 이 말이죠. 엄마, 아빠를 찾는다면 걔는 뭘 기대하느냐 하면은 옛날에 엄마, 아빠랑 같이 있었던 안정성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어떤 안정적인 삶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해와 달과 별, 이 모든 것은 무엇에 호응을 맞춰서 같이 무너져 내리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빰빠빠~하고 다 이루었을 때에, 아까 누가복음 23장 44절 말씀처럼 해도 어두워지고, 달빛도 흐릿해지고. 마태복음에서는 죽은 자가 부활하고. 이게 뭐냐 하면 십자가사건의 효과들을, 사례들을, 케이스들을 맛보기로 조금씩 보여준 거예요. 휘장이 찢어지고.
자,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마태복음에서, 성경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해와 달이 무너졌다, 라고 했을 때는 이 말이 뭐냐 하면 해와 달이 그동안 누구 덕분에 견지했느냐 하는 거예요. 견지, 그냥 제자리를 지킨 거예요? 모든 자연중심은 누구 인물 중심으로 응집되었다고 했어요? 예수님 중심으로 응집되었죠. 예수님의 하신 일에 호응하도록 되어 있죠.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면 해와 달도 같이 보조현상을 보여줘야 하는 거예요.
보조현상을 보여준다는 것은 세상중심은 누구 중심이다? 예수님이 하신 일의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해와 달과 이런 별들이 호응해서 보여줘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새 언약이라고 하면 옛날 모세언약 같은 경우에는, 율법은 무슨 언약이냐 하면은, 여기에 언약 중심으로 일한다는 그 사실을, 구약에서는 뭐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은 언약궤가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언약궤를 생각하지만, 제일 언약궤의 가치에 있어서 괜찮은 것이 시내산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천둥번개치고, 불빛이 막 일어나죠. 시내산 꼭대기에서. 그렇잖아요. 모세가 이 안으로 들어가요. 이 무서운 안으로. 얼마나 무서운지 짐승도 올라오면 죽어요. 모세가 하나님이 부르시니까 가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니까, 십자가 피로 용서를 받으니까, 시내산에 올라갈 수 있는 겁니다. 덜렁덜렁 교회 다닌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감당 못할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감당 할 수 없는 그런 요소에 우리가 휘둘려야 돼요. 이게 보쌈 싸이듯이 싸여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함은 쏙 빠지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열심을 내고 그 열심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저주받을 요소, 천벌을 받을 요소를 휘감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걸 인정 안 하잖아요.
우리의 관심사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뭐 밖에 없어요? 내 삶의 안정성밖에 없어요. 내 삶의 안정성. 그래서 내 것 건드리면 화내잖아요. 그동안 이 안정성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내 삶의 안정성밖에 없는데, 이거는 주님이 보시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이 땅에 죄지어놓고는 안정성을 원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소리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실제 진위의, 본뜻을 시내산에서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그럼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를 올라갔거든요. 올라갔을 때 빈손으로 내려왔습니까? 뭘 들고 왔습니까? 돌판을 들고 왔죠. 결국 돌판을 들고 왔다는 것은 이 돌판은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은 언약궤로 이어져요. 돌판이 뭐냐 하면 언약이거든요. 그 언약 판을 안치하는 금고가 뭐냐 하면 언약궤가 되는 겁니다. 이 곳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이에요? 언약궤가 있는 곳이 무시무시한 곳이 돼요. 그냥 아카시아 나무 있고, 뭐 이상현 목사님하고 제 아내는 겁도 없이 거기 들어가서 카메라 찍고 다 했지만.
이 무시한 곳에 천둥번개가 주어진다면, 이 언약궤를 완성시키고, 완성시켰기 때문에 대체할 그 무엇은 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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