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토필요

JSA공동경비구역

아빠와 함께 2013. 1. 17. 18:40

JSA 공동경비구역 
정낙원   2006-11-15 04:01:36, 조회 : 147, 추천 : 0

사실과 진실


판문점에 가면 남한과 북한을 경계를 구분하는 선이 있다.
(실제로 선이 그어져 있는지는 가보지 않아서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편의상 글을 쓰기 위하여 있다고 하겠다.)

이 선은 남한과 북한 사람의 입장에선 생명선과 같다.
남한 국민과 북한 국민은 이 선을 감상적으로 여기기 않고 죽고 사는 문제로 다루게 된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초병들에겐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다.

그러나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의 눈에는 구경거리로 보일 뿐이다.
이방인에게 경계선은 내가 여기 왔노라 라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사진 찍는 기념물에 불과하다.

동일한 선을 가지고도 감상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사 문제로 보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도" 도 이와 같다.

 

지금 20년 동안이나 교제를 하던 두 사람이 십자가 만이냐? 아니냐? 라는 문제로 싸우고 있다.

한 사람은 오직 예수만 이어야 하고,
또 한사람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예수 믿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만 귀한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도 귀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예수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를 믿는 성도도 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은 예수만 남기고자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를 믿는 신자도 남기겠다고 한다.

예수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근호 신학이고,
예수를 믿는 성도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손무성 신학이다.
(이근호 신학과 비교하기 위하여 편의상 손무성 신학이라고 하겠다.)

이근호 신학은 예수에게 모든 시선을 고정시키는 작업을 하고,
손무성 신학은 시선을 구원 그 이후 성도의 착한 행실까지 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믿음 믿음 말로만 하지말고 실천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이런 실천적 믿음을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한다.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은 예수를 주로 믿는 믿음이지만,
야고보서가 말하는 믿음은 믿는 자에게 나타나야할 행함을 동반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 행함을 성경의 명령법들을 지켜는 행함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 내용은 실제로 손무성 목사가 본인과 약 두시간 정도의 전화를 통하여서 주장한 내용이다.

손무성 목사가 이근호 신학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이 주변에 이근호에게 배운 사람들이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다. (손 목사님은 주변에 이런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함)

이렇게 싸가지가 없는 것은 이근호 신학이 성도의 행함을 전부 죄라고 돌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 주관적인 느낌인지 몰라도 손 목사님이 이근호 신학에 의문을 품게 된 계기가 이러한 방종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가 느낀 부분임)


손 목사님이 들려준 실제적인 예

어떤 사람이 이근호 목사가 시무하는 우리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러 간 적이 있는데,
그 때에 우리교회에 출석하는 어떤 분과 대화를 하는데 그 분이 하는 말이,
사람이 꼭 교회에 와야 은혜를 받느냐?
나이트에 가서도 은혜를 받을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에 오고 안 오고 에 대하여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손 목사 역시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손 목사님은 이 말을 듣고 이는 그냥 가벼이 넘길 문제가 아니고 뭔가 근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잘못의 키워드를 이근호의 십자가 신학에서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근호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의 삶에 변화를 몰고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엇을 해도 죄라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 손무성 목사가 화가 나는 것은 이근호 당신이 기도하는 것도 죄이고, 헌금하는 것도 죄이고, 봉사하는 것도 죄라고 가르치니 교인들이 아무 것도 안 하더라는 것이다.

즉 (속에 담아둔 말로하면) 교인들이 헌금도 안하고, 기도도 안하고, 봉사도 안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에 수없이 말하고 있는 하라 하지말라 라는 명령법들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근호의 십자가  신학에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 라는 고백이 나올 수 없다고 한다.
(왜? 이근호 신학에선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안나오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됨)


손무성 목사는 성도다움을 성경의 명령법들을 지키는 성도의 행실에서 찾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도다운 삶이 없는 것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즈음 말로 "성도가~ 성도다워야~ 성도지"


손무성 목사가 들려준 또 다른 예

사건 하나 : 이근호 목사가 열차를 타고 오는데 어떤 사람이 담배를 피우기에 이근호 목사가 그 사람에게 찾아가 왜? 기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느냐? 피우지 말라고 했는데도 그 사람이 세 번씩이나 말을 듣지 않아서 피우던 담배를 빼앗아 버렸다고 한다.

사건 둘 : 어느 날 새벽에 산책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나무 가지를 붙들고 흔들길래 왜? 나무를 흔드느냐? 라는 식으로 말하였다는 것이다.

이근호 목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서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손 목사님은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자신도 저 양반이 성격이 그래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이근호 목사의 가르침을 받는 주변의 사람들의 행동도 이근호 목사와 같은 행동들을 하는 것을 보고, 아! 이건 이근호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이근호 신학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근호의 신학이 이근호의 행동을 낳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근호에게 배운 사람들이 비상식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연히 성경의 명령법들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성도다움의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이근호 신학의 한계이고, 잘못이라는 것이다.

손무성 목사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냥 입술로만 믿는다 하지말고 삶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에 걸맞은 삶이 나와야 한다고 한다.
이를 일컬어 성령의 열매라고 한다.

(지면상 더 언급하지는 않으나 그 이외에 과거 이근호 목사를 추종하던 부산의 어떤 싸가지 없는 김모 목사 이야기를 비롯하여, 생성론적 교회이야기와 또 다른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대화의 핵심은 한마디로 성도의 행함과 결부된 이야기로 구결 된 대화였다. )


서로간의 대화는 어떤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서로의 의중만 교환하고 말았다.

마치 결코 용납될 수도 하나 될 수도 없는 JSA 공동경비구역과 같이,,,,

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서 성도 됨을 확인 받고자 할까?

도대체 이들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뭘 믿을까?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이 답답한 이유는 왜 일까?

이 글은 제가 손 목사님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제가 느낀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만약에 손 목사님이 나는 그런 의도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다만 내가 느낀 것을 술회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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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JSA 공동경비구역 
손무성  (Homepage)  2006-11-15 09:22:22, 조회 : 129, 추천 : 4

정목사님께

저와의 전화를 통해 대화한 내용을 본인의 느낌이라고 하셨는데... 그 느낌을 저의 주장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목사님의 글 중에 >(왜? 이근호 신학에선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안나오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됨)이라는 의문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은 

아직도 이근호목사님의 신학을 잘 못 파악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와 대화 중에 '정목사님께서나 저나 -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라는 질문과 답변에 서로 '네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정목사님께서 이근호목사님도 당연히 '믿습니다'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화 통화후 이근호목사님께서는 자유게시판을 통해 답변하기를 '(이근호목사님) 십자가신학에서는 믿습니다'가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충격적이지 않았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은 생각해 보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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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JSA 공동경비구역 
정낙원   2006-11-15 12:48:01, 조회 : 87, 추천 : 2

손 목사님

이 문제는 전화상으로 수없이 반복한 내용입니다.

이 목사님이 말씀하신 진위를 그렇게도 모르겠습니까?

행간을 좀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목사님이 안 된다고 하니

봐라! 이근호 신학에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고백이 안 된다고 하잖아 라고 하지 말고,

그럼 손 목사님은 20년 동안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지도 않으면서 이근호 신학을 배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왜? 20년 동안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던 것이 갑자가 안된다고 할까요?

그리고 왜? 이근호 신학을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까?

예수님께서 땅에 있는자를 선생이라 하지 말라 너의 선생은 그리스도니라 고 한 것은
이 땅에 완벽한 자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세상엔 그 어느 누구의 신학도 헛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칼빈신학이 무오합니까?
루터 신학이 완벽합니까?

그렇다고 루터와 칼빈을 이단이라고 합니까?

저 역시 손목사님을 이단이라 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이근호 신학에서의 엄청난 헛점을 찾아 내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손 목사님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봐라! 난공불락 같던 이근호 신학을 내가 박살내었노라 라는 공명심입니까?
새로운 영웅시대를 열고자 하십니까?

저는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어떻게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말씀을 동일한 사람에게 들었음에도 이렇게 달리 해석을 하느냐 입니다.
손 목사님께서 지금 시비를 거는 것은 스스로는 아주 심오한 진리라고 생각을 하지만 함께 교제해 오던 형제 입장에선 일고에 가치도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왜? 손 목사님만이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 의아합니다.

전화상으로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은 소모적인 논쟁만 한 것 같군요.

누구 누구에게 배울 때 그 사람의 주장이 다 옳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도는 한 성령을 마신 자들이기 때문에 누가 어떤 주장을 펼치더라도 자기 안에 계신 성령께서 예면 예, 아니면 아니요, 라고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걸러서 듣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누가 이단적인 말을 한다고 하여도 들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라는 참 스승이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손 목사님께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생성론적 교회라는 것도 이근호 목사가 아무리 옳다고 주장을 하더라도 손 목사님 안에 계신 성령이 아니라고 하면 안 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제가 손목사님과 장시간 전화로 대화화면서 느낀 것은 이근호 목사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이근호 목사님을 사랑하는 것은 눈물겹도록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그리스도만 증거하고 높이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잇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온 세상이 다 예수 십자가를 이용하여 좋은 교회 만들고 인간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그 십자가를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이근호 목사님이 하시니 그것이 고맙고 감사하여서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형제의 허물이 보이면 감싸안고 덮어 주어야 옳지 않습니까?

물론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아서 손 목사님은 이 말에 단순한 허물일것 같으면 덮어주는데 중대한 진리 문제이기 때문에 아니라고 하시겠지요.

설령 그렇지 않지만 손 목사님의 주장대로 이근호 목사님의 생성론적 교회론이 틀렸다고 합시다.

그게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이설입니까?

무엇이 그토록 손 목사님을 분개하게 하였는지 모르지만,,,,

지금 십자가 마을을 넘어뜨리고자 하는 자들의 작태를 보십시요.

옳거니 그러지 않아도 이근호를 씹을려고 꺼리를 찾던 중인데
20년 동안이나 추종하던 십자가 마을의 촌장이 이근호 신학에 반기를 들었지 않느냐?  기회는 이 때다 싶어
벌 떼같이 융단 폭격을 가하고 잇지 않습니까?

저에겐는 마치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두 증인이 죽으니 그들이 못 마땅하다고 여기던 자들이 서로 선물을 주고 받으면서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오버랩이 되는 군요.


이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이근호만 박살 내면 십자가 마을은 문을 닫는다 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 나서겠지요.

그런데 이근호를 공격하는 자들의 특징이 모두가 말씀을 지켜야 되지 않느냐 라는 무리들 아닙니까?

한국교회의 모토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어 구원받고,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 받자가 아닙니까?

초록은 동색이라 이근호를 공격하는 무리들과 한국교회와 무엇이 다릅니까?

오직 하나 이근호의 십자가 신학이 교회 편을 들어주지 않고 한국교회를 이단이라고 비판하기 때문이지요.

십자가 마을을 여신 분도 주님이시고 닫을 분도 주님이시겠지요.

지금까지 서로의 주장들을 다 내어 놓았으니 더 이상 나올게 없다고 사료됩니다.

해 보아야 소모적인 말장난에 불과한 것 뿐이라 생각되어서 이만 절필합니다.

다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읅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는 주님의 말씀만 남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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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명하신 명령법에 대한 몰이해 
김영길   2006-11-15 08:51:17, 조회 : 128, 추천 : 10

십자가 마을의 이근호 목사와 수뇌당한 하수인들은

주님께서 명하신 명령법에 대한 의미를 인간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데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명령, 곧 하나님의 말씀은 한마디도 결코 땅에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릅니다.

그래서 외눈박이 신자라고 해야 할까?

그들이 말하는 명령법에 대한 몰이해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 것을 지키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이 모순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때문에 저들은 주님께서 명하신 명령들에 대하여는 아예 눈감아 버리고 포기한지 오랩니다.

그래서 저들은 주님의 말씀을 경홀히 하면서 주님의 은혜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명령들은 주님께서 부르신,

신자들의 각기 다른 은사와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사명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답변은 잠깐 동안의 설명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사랑하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오른 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돌려대라"등등

의 말씀들은 정말 지키라고 주신것인지, 아니면 십자가마을의 주장처럼 우리의 죄성을 지적하기 위한

단순한 의도로 주신 것인지 그 것은 온라인상 간단한 설명으로는 이해 시키기가 좀 어렵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주님의 명령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포털 싸이트 다음의 검색 창에서 "이효종"이라는 이름을 써 놓고 검색을 하시면

과거에 이근호 목사님과 이효종씨가 토론한 글들이 올라와 있습니다.

우선 그러한 토론글을 읽어 보시면 많은 참고가 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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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성경에는 명령법이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이근호   2006-11-15 09:15:38, 조회 : 129, 추천 : 0

인간이 하는 모든 언어가 자신의 뜻 안으로 상대를 복속시키는 명령으로 작용합니다.

심지어 '비가 내린다'라는 혼잣말도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을 상대로해서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여망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미 '명령법'이라는 개념을 언어적으로 뽑아내었다면 인간들의 언어 전체에 대한 개념 설정과 그 중의 일부가 되는 '이라는 개념과의 관계 규명을 비켜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과연 귀하께서

언어학 전체 개념 정리와 그 개념들 상호간의 연관성에 대해서 어떤 지식을 갖고 있는지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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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습니다..... 
김형희   2006-11-15 10:32:00, 조회 : 115, 추천 : 2


주님을 사랑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시렵니까?..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 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성화된 삶을 살아 가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 하십니까?..

정녕 당신은 주님이 구세주임을 믿습니까?..


그 믿음으로 인해 당신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위를 걷고 산을 옮길만한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됩니까?..

주님을 믿는다는 그 믿음이 당신을 어떻게 변화 시켰습니까?..

성경의 가르침중, 단 한가지라도 온전히 지켜내지 못하면 모든 것을 범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 하시며,
철저하게 완벽하게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누구보다 잘 알것입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과연 인간이 믿음을 소유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의지로 얻어진 믿음이 과연 값어치가 있을까요?.. 믿음은 내가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믿게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믿습니다" 라는 말이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일맥상통함을 알겠지요..

  " 당신은 정녕 주님을 사랑합니까?.... "  대답해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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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 
정낙원   2006-11-15 14:10:08, 조회 : 163, 추천 : 10

동상이몽

동일한 것을 보고서 각기 다른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동일하게 예수라는 말을 하고, 십자가를 말하는데도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우째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라고 안타까워 할 일이 아니라
주께서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아 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자.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인간만이 겉과 속이 다르다.
즉 속에도 없는 것을 겉으로 있는 척 한다.

믿음이 없으면서 믿는 척 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척 하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인간이란? 속이는데 있어서 천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아니면서도 성도인 척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서도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나님께선 포도나무에선 포도열매가 맺히고, 무화과나무에선 무화과열매가 맺히게 하셨다.
즉 본질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본질을 십자가로 가려내신다.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 세우면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즉 십자가를 들이대면 하나님께로 난자와 나지 않은 자를 가려진다는 말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기계와 같다.

그 어떤 인간도 십자가를 들이대면 두더쥐처럼 숨어 있던 것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마치 구정물 통 속에는 고기 대가리도 들어 잇고, 콩나물도 들어 있고, 섞은 두부도 들어 있지만 윗 국물은 너무도 깨끗하다.
그래서 국물을 보면 그게 돼지가 먹을 구정물이라고 생각 할 수가 없다.

주인은 작대기를 통 속에 넣고 밑바닥에 깔린 것들을 휘 휘 저어서 들추어지게 한다.

예수님은 이런 상태를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겉으로는 잔디를 덮어서 아름답게 치장을 하였지만 그 속엔 해골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가장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킨다고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에게 하셨다.

지금도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 속에는 갖가지 탐욕과 자기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예수를 사랑한다고 한다.

하나님은 이들의 속성을 고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가지고 속을 뒤집어 놓게 하신다.
속을 뒤집어 놓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 인간의 존재를 공격하면 금방 반응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왜? 날 공격하느냐 라고 항의한다.
십자가에서 자기가 죽지 않은 자들은 자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은 참지를 못한다.

성도를 일컬어 예수 안에서 산 자라고 한다.

바울은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면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고 하였다.

성도는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있는 자이다.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자는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어 있다.
우직할 정도로 그리스도만 말하게 된다.
무엇을 해도 그리스도가 다 하셨다고 증거 할 뿐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란? 옆구리를 찌르면 본능적으로 예수가 튀어나온다.

그러나 성도 비슷한 흉내를 내는 자는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고 자기가 살아 있다.
그러니 무엇을 해도 자아 중심으로 자기를 자랑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런 자들의 특징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동상이몽의 현상이 나타난다.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전혀 다른 해석을 낳게되는 것이다.
동일한 언어의 성령을 말하여도 전혀 다른 성령의 활동을 말하게 된다.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은 성령이 지키도록 역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한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마치 인간은 말씀을 지키는데 고장이 나서 스스로는 안되는데
성령이 오셔서 이제는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직도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또 하나님의 말씀에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히브리서 4:12-16절을 보면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특성을 인간을 해부한다고 한다.
무엇을 찔러 조깨는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해서 하나님 앞에 발가벗김 당하도록 하신다고 한다.
벌거벗겨서 무엇하려고 하는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은혜를 얻기 위하여 나아가도록 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이구 난 죽었구나를 만들어서 예수님 앞에 나가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이실직고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게 말씀의 능력이라고 한다.

성경은 이런 상태의 마음을 상한 심령이라고 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하였다.

갈라디아서 3장 21-25절에서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夢學)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바울의 주장은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야 율법을 바로 지킨 자가 된다는 말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아직도 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왜?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가?
예수님만이 말씀을 온전하게 다 지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온 자들은 이제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는다고 한다.
즉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님이 지켜주신 것을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갈라디아 지역에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이상한 무리들이 나타나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를 가리는 다른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그러자 바울은 너희 앞에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께서 밝히 보이거늘
왜?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왜? 다시 종에 멍에를 매려고 하느냐 라고 책망하였다.
왜냐하면! 너희가 말씀을 지킬 수 있으면 예수는 헛 죽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자기를 보지 말고 믿어야 할 분을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자는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지켜야 할 모든 말씀을 예수님께서 대신 다 이루었다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새 언약 안에서의 신앙이다.
새 언약 속에는 인간이 끼어 들 틈이 없다.
오직 아버지와 아들간에 맞은 언약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사실을 알리는 증거자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새 언약 하에 있는 성도들에게 갖가지 명령법들을 주었다.

성령께서 성도에게 너희가 한번 지켜보라고 한다.
그런데 해 보면 안 되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 성령께서 왜? 안 되는지 아느냐 라고 한다.
우리는 왜? 안됩니까? 라고 하면 네 몸이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말씀을 지키라고 합니까? 라고 물으면
그건 네가 항복을 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결국 새 언약 하에서 명령법들을 주신 목적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가 다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삶을 일컬어 성령 안에서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성령의 열매라고 한다.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성령은 말씀을 지키게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성령의 오심은 오직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히기 위함이다.
왜? 예수여만 하는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왜? 예수여만 되는지를 알리기 위해 말씀을 가지고 일을 하신다.

해 봐라? 왜? 안 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당신만이 유일한 해답입니다. 라고 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말씀을 수술하는 칼이라고 하기 전에 안식 이야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히 4장 7-11절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안식이란? 무엇을 하는 상태가 아니고 모든 일을 마치고 쉬는 상태를 말한다.
말씀을 지켜야 하는 자들은 아직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 자이다.
예수를 만난 자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안식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자기가 지켜야 할 말씀을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아직도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자는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 종이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쉰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든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하신다.

모든 말씀들이 명령법으로 주어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들과 종을 구분하기 위함이다.

믿는 자와, 믿고자 하는 자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믿는 자는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고,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말씀을 지켜서 영광을 돌린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디서 어디까지가 아니고 온 말씀을 다 지키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말씀을 지키고자 한다면 모든 말씀을 다 지켜야 한다고 한다.

야고보서 2장 8-11절을 보면 "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만약에 단 하나라도 못 지키면 몽땅 못 지킨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한다.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안 지켜도 되는 예외 조항이 없다.


그럼 대충 신약에서 명령하는 말씀들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말씀은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다.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오른 쪽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한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동행하라고 한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윗옷까지 벗어 주라고 하신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라고 하신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오직 그에 나라와 그에 의만 구하라고 하신다.
서로 사랑해라, 온유해라, 자비로워라, 죽도록 충성해라, 네 있는 것을 팔아 구제해라,
분내지 말라, 탐내지 말라, 쾌락을 좇지 말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이 모두를 한마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범주에 속한 것이다.

죄인이란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유전자가 들어가 있는 존재이다.
즉 본질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종자란 말이다.
그런 인간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
왜일까?

자 누구든지 하나라도 조금도 빠지지 말고 완전하게 지켜보라고 하신다.

죄인에게 이런 말씀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지키라는 것인가?
자기 꼬라지를 알게 하기 위함인가?
이는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라는 팥쥐 엄마의 말과 같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것인가?
포기하라는 것인가?

에이 어떻게 인간이 이런 걸 다 지킵니까? 라고 하지 말라
하나님이 지금 농담 따먹기 하자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모든 말씀을 지키다가도 그 중에 한가지라도 못 지키면 모두 못 지킨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추상같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최선을 다하라는 신앙은 없다.
좋은 신앙 나쁜 신앙도 없다.
신앙은 오직 있느냐 없느냐 일 뿐이다.
믿느냐! 안 믿느냐 이지 넌 몇 퍼센트 믿느냐? 라고 묻지 않는다.
너 얼마큼 말씀을 지켰느냐를 묻지 않는다.

하나님은 완전을 요구하지 최선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자들은
성도라면 성도 다운 삶이 나와야 안되느냐 라고 한다.

도대체 그대들은 성도다운 삶을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최고로 아름다운 성도다운 삶이란? 날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꺾으신 뼈를 기쁨과 즐거움으로 믿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원하신다는 다윗의 고백을 음미해 보라.
다윗이 말씀을 못 지켜서 안타까워하는가?
아니면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악 중에 출생자라는 것을 알고 안타까워하는가?
다윗은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라고 한다.
즉 자기는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라는 고백이다.
왜? 안 되는가? 죄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선 왜? 구원하지 말자 곧장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세상에 두는가?
그리고 구원받았으면 죄를 이기는 몸을 주시던가 하지 않고,
죄를 이길 수 없는 몸인 줄 뻔히 알면서 말씀을 지키라고 하는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가?

멋지게 살아서 하나님을 기절시켜 보려고 하는가?
탕자는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탕자였지 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자신이 탕자였다는 것을 아는 자는 자기 행위로 온전함을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져 아버지의 은혜에 감복하며 스스로 아들이라 하지 않고 종처럼 살아간다.

왜? 그리 말씀을 지키겠다고 설쳐대는가?
왜? 그리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가?
믿음 없으면 믿음 없는데로 살고, 믿어지면 믿어지는 것으로 살으라.

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마치 이근호 신학을 배우면 방종한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말씀에 합당치 않는 부류들이 이근호의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죄이다 라는 말씀을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살기 위한 면죄부로 삼는 자도 있다.

그것은 이근호 신학의 잘못이 아니라 그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하여 이용하는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이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참과 거짓을 갈라내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하게 믿으라고 하여도 한 사람은 자기가 믿는 믿음을 내어놓고,
또 다른 사람은 믿어지게 하는 믿음을 내어놓게 된다.

전자는 자기가 믿었다는 것을 자랑하게 되고, 후자는 주께서 믿게 해 주셔서 믿습니다 라고 하여 주를 찬양한다.

"주께서 믿게 해 주심으로 믿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설쳐대지를 않는다.
그 때 그 때 자기 안에 계신 분이 지키게 해주는 것으로 지키며 살아갈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말씀 지켰습니다" 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가 지킨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계신 분이 지키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한다.

갈 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것은 자신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인간이 죽었다는 것이다.
율법을 향하여 죽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함이다.
즉 내가 말씀을 지켜야 된다는 것이 죽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 지켰습니다" 라는 것으로 살기 위함이다.
그래서 성도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이런 말씀을 주었어도 육에 속한 사람은 항상 자기가 지켜야 하는 쪽으로 끌어 당겨서 말씀을 지켜야 할 주체를 자기가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

인간은 절대로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다.
자기가 믿는 것으로 살아가야지 편하다.
종을 아들로 살라고 하면 불편해서 못산다 종처럼 살아야 편하다.
반대로 아들에게 종처럼 살으라고 하여도 못산다.

아들은 하루종일 빈둥거리며 놀아도 밥 달라고 큰소리친다.
그러나 종은 한 일이 없으면 밥 먹는 것도 미안해한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안 된다.
왜냐하면! 본성이 행동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들로 살고, 종은 어디서든지 종으로 살고자 한다.
그 속에 본질이 그 행세머리를 못 버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각자가 아는 것으로 믿고 사는 길 밖에 도리가 없다.


지금까지의 논쟁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서로 칼을 거두고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이 지혜로움이라 생각이 든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 가시게 친구" 라고 인사하자.
주의 뜻이면 다음에 또 만나겠지 그동안 참 고마웠네!
참 피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