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박윤진 성도님의 글이 탁월한 이유
1.
자기 삶의 바탕을 들추어낸다는 점에 있습니다. 직업이나 사생활을 공개한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깔고 앉아 있을 그 방석을 구조적으로 파헤쳐 보인다는 점입니다. 보통 사람은 숨어 지내기를 원합니다. 본의 아니게 신비주의 전략을 쓰게 마련인데 이는 동굴 속에 몸통을 숨기고 얼굴 부위만 동굴 밖으로 쏙 내밀면서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한 소리씩 하는 가운데 자신의 불만스러운 인생의 화풀이 식으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이준, 박윤진 성도님은 자신의 몸통을 감싸고 있는 이 삶의 구조를 더 이상 숨긴 채 살 수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것을 너그럽게 용납해주는 세상에서는, 임금님이 아무 옷도 입지 않고 있더라도 신하들은 “최고의 옷을 입으신 임금님”이라고 아부의 극치를 보내는 것도 용납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두 분에게는 그것이 스스로에게 용서가 되지 않기에 자진해서 열심히 파헤쳐 보인다는 점에서 글들마다 감동적이고 탁월합니다.
쉽게 말해서 보통 사람들은 은밀한 자기만의 삶의 움틀 안으로 자꾸만 무장하고, 자꾸만 더 깊숙이 기어들어가서 몸을 숨기는 식으로 산다면, 이 두 분의 글은 그 움틀의 구조를 파헤쳐서 아예 늘 폭파 시키면서 사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사생활 공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생 구조틀을 파악해서 공개한다는 겁니다. 차제에 자신을 고이 모시려는 그 움틀 자체를 늘 소실시켜 버리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아니면 그런 글들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이 두 분이 왜 일반인들과 다른가 하면, 일반인들은 복음을 외치다가 주위에 안 먹혀 들어가면 차제에 자기만의 삶의 움틀 속으로 언제든지 도피해서, 자기를 안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을 원망하면서, 자기 위로의 공간을 따로 갖추고 살아갈 계산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은 그런 뒤 공간을 끊임없이 자진해서 폭파해버리겠다는 겁니다. 행여 자신도 언제든지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반인들은 이런 생각을 꼭꼭 숨기고 있는 반면에 이 두 분은 대외적으로 공개한다는 겁니다. 일반인들은 이 ‘대외적 공개’를 주저하는 이유는 주위에 아무도 못 믿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두 분의 태도는 탁월합니다. 이 두 분은 말합니다. “나는 처음부터 나도 안 믿습니다. 남 탓 할 것 없습니다. 나를 망칠 자는 바로 나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더 이상 숭배할 수가 없어 끊임없이 나를 폭파시키려 합니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웃음거리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내 사정을 지금 공개하지 아니하면 행여 나중에 본전 찾고자 나설 위인이 바로 납니다.”
2.
두 분의 글은, 아담의 자손들이라면 누구나 생각해 두는 지상 삶의 구조틀에 관심이 있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 하며는, 복음을 전파하는데 신학 구조로서는 위선자만 양산한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부터 알게 된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개혁주의신학을 표방하는 목사나 신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이 신학 지식을 자신의 생계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이 분들을 벌써 알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왜 목사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지 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밝히는데 있어 일반인들과 탁월하게 차이 납니다. 그들이 무슨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진리들이 한 인물에 집중 되어 있고, 그 인물은 성경을 대하는 인간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요구한다는 사실을 이 분들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학이나 말씀이나 결코 대상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 전부를 점령을 하게 되면, 현재 아담의 자손들 전체가 부지런히, 정신없이 몰두하고 있는 ‘나만의 삶의 터전 꾸미기 작업’이 예수님을 넘어뜨리고 짓이겨 버리는 세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구조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분은, 두 개의 구조, 즉 성경 안의 신학적 구조와 삶의 구조를 십자가 피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합체시켜 버립니다. 그래야 자신의 모든 것이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합체 과정이 치밀합니다. 치밀해 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남들 보라고 글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미워 못 견디면서 ‘나 죽어라!’고 고래고래 고함치면서 글을 쓰기 때문에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글과 논리가 치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행여 내가 돌아올 수 없는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싶어 다지고 또 다져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 두 분을 괴롭히는 사항인데, 끊임없이 뒤로 당기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너 이런 소리해 놓고서 나중에 네가 딴 소리하면 그 때 얼마나 만인의 놀림거리가 되겠는가. 따라서 그 때를 대비해서 다시 뻔뻔하게 돌아 설 변명거리를 밑에 깔아놓고 글을 쓰라”라는 식의 내부지침을 감안하다보니 글이 복잡해지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건방지게 글 쓰다가 나중 감당을 어떻게 하려고.”라는 의식이 발생되기 마련인데 이 힘든 의식은 계속 끊어지지 않는 사적인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어 글 쓰는 이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고마운 것은 자신들의 글쓰기가 결코 자신의 욕구가 아님을 두 분이 느끼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하지만 해야만 할 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남들보고 “왜 당신들은 글 안 쓰냐?”고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누드촌도 아닌데 두 분만 옷을 벗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분이 띠 띠고 원치 않는 코스로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3
두 분 글을 보면 차이가 다소 있습니다. 달력에 찍힌 자연풍광 사진을 보면서, 현지인들이 겪어야 하는 삶의 불편함을 찾아내는 이준 성도님의 안목을 참으로 탁월합니다. 이처럼 두 분은 늘 주변에서 작렬하는 하나님의 계시적 활동을 찾고자 하는데 이는 성령님이 돕고 계신 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을 시키는 차원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마치 주민 센터에서 노인네들 희망 근로를 현장 작업 시키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준 성도님의 글은, 세상을 늘 학문적으로 체계를 잡아가면서 학문과 세상을 일치시켜서 정답을 도출하기 방식으로 드러나는 세상 구조틀이라면, 박 윤진 성도님의 글은 의도적으로 책 읽은 것을 접어버리고 거기서 알게 된 그 지식이 실제 생활에 써먹으려고 덤벼들다가 된 통으로 추상적인 지식으로, 혹은 자랑거리로, 혹은 자신의 의로움을 정당화하는 무기로 써먹으려고 시도하려는 자신의 무서운 욕망적 괴물 얼굴이 튀어나는 것을 “악!” 소리치면서 발견하고서는 그것이 바로 세상 구조틀이 구조 잡히는 원인처라고 파악해서 분석하면서 나오는 글을 쓰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개혁주의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복음을 부인하고자가 아니라 (결코 아니라!) 복음을 복음대로 남들에게 설득시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위대성과 고귀함을 전파하고자 모든 개혁주의 신학 용어들을 총동원하여 십자가 복음 해설을 시도하는 방식이 이준 성도님의 시도하는 방식이라면, 박윤진 성도님의 방식은, 그런 개혁주의 신학으로 복음을 증명하는 것이 왜 진짜 살아계신 복음을 훼방하는 악마의 짓인가를 까 보이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체가 설명하는 주체관이 믿을 만한 것인가 (쉽게 말해서 세상을 설명하겠다고 내놓은 세상의 탁월한 학문들이 과연 믿을 만한 정당한 진리 탐구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런 식으로 세상을 분석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늘 상 하는 짓이고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어쨌든 그 주체관 작업조차도 십자가 앞에서 죄악된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 박윤진 성도님의 글쓰기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