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토필요

성화론의 허구성(2)-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1. 30. 10:20

성화론의 허구성(2)

 

 

 

 

언어 배후에는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선입견 배후에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과시하고 그 존재의 정당함에 가치를 두고, 그것으로 자신의 의로움과 윤리성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언어란 바로 겹겹이 접혀있는 이런 욕망이 내부적으로 편집되고 타협되고, 조심스럽게 조립되고, 그래서 정돈되어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살아있으니 나는 기어이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옳고, 정당하고, 마땅하다’라는 욕망의 목소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옳은 소리를 해서, 옳은 생각을 해서 옳은 것이 아니라, 남이 아닌, 나 자신이 발언했고, 나 자신의 욕망이 그것을 원하고 있으니 무조건으로 옳은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나의 욕망이 욕망대로 발산하겠다는 그 현상 자체가 욕망의 화신인 나에게는 이유 없이 옳은 일 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차후에 나의 말이 과연 옳았느냐 아니면 잘못되었느냐 하는 것은 결국 그런 검토와 반성을 하는 나 자신의 대견스러운 겸손만큼은 이미 옳은 행위라는 것을 기정 사실로 하여 실시되는 일일 뿐이다. 쉬운 예로, 신이 나보고 죄인이라고 했을때, 신의 그 계시에 순종하여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그 행위만큼은 참으로 정당한 짓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당한 짓은 나 자신에게서 도출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나 자신 자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즉 무조건으로 옳을 수 밖에 없는 나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이 세상에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석하고 심판하고 규정짓는 당연한 자격자가 된다는 말이 된다. 내가 판단하기에 나의 판단을 옳을 수 밖에 없으며, 만약에 나의 판단이 틀리고, 옳지 않고, 죄악된 것이라면, 그런 잘못을 외부에서 제대로 지적해주는 판단자가 과연 나 밖에 따로 있음의 여부를 수용을 위해 판단에 필요해서 발휘되는 사전의 나의 판단력 자체는 늘 옳을 수 밖에 없는 법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외부에서 우리 자신을 보고 죄인이요, 판단에 오류가 있다고 해도, 이미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이상, “나는 항상 옳다”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노릇이다. 옳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존재 자체가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바탕을 이미 장만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언어구조 이전에 존재 자체로 옳음이 성립되어 있는 형편이라면 차후에 인간 사회에서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동원되는 언어구조는 결국 그 ‘존재에서 나오는 옳음’을 변명해주는 구실거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모든 언어는 ‘은유’이다는 원칙이 수립된다.

 

 

 

즉 진리와 언어가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의 쓰임새와 활용에 의해서 얼마든지 다시 ‘나는 항상 옳다. 왜?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까’라는 쪽으로 귀착되는 의미일 뿐이다. 그렇다면 언어란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비호하는 은유로서 그 인간에게 쓰여질 것은 뻔하다. 도대체 어느 인간이 자신의 죄인됨과 오류와 마땅히 저주받아야 됨을 말하기 위해 언어를 쓰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희한한 사람일 것이다. 스스로 자기 존재를 없애겠다는 사실일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진리와 언어의 의미와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언어는 규칙과 구조에 의존한다. 그런데 은유를 말하고 있는 자는 자기만의 언어 규칙을 따로 실행하고 있는게 된다. 과연 자기만의 의미규칙이 일반적인 언어 규칙에 통합될 수 있는가? 결국 규칙이란 궁극적으로 환상에 불과하며 은유야말로 다른 언어까지 포용해서 해석해버리는 언어 자체가 숨길 수 없는 현상이 되는 것이다.

 

 

 

은유는 언어 규칙을 진정으로 초월한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옳고 그름의 보편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언어도 역시 은유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거짓된 표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된다. 기호가 지칭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예를 들면, 남자로 구성된 착한 여군 女軍) 그 기호는 거짓이라기 보다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언어 사용이란 참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효용성과 관련있을 뿐이다. 즉 효용성이 높은 것이 더 진리답다고 말할 뿐인 것이다. 효용성이 곧 진리라는 말은, 인간의 자기 활동을 긍정하는 것이 곧 진리요 이런 자기 활동을 표현하는데 동원되는 언어들이 ‘진리적이다’이라고 정립하는 것이 된다.

 

 

 

사람이 법을 제정하고 규칙을 제정할 때에, 모든 자신의 행위 방식을 다 담아낼 수는 없다. 즉 인간의 어떠한 행위 방식도 규칙에 의해서 옳고, 그름이 결정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 방식이 그 규칙과 일치하는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방금 강도짓 한 사람도 횡단보도에서는 교통 규칙을 지킨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교통 법규를 준수한 의로운 사람임이 확인된다.

 

 

 

결국, 법이라든지, 규칙 같은 것은, 인간이 평소에 자신이 얼마나 옳은 존재인가를 차후적으로 증빙하는 필요에 따라 차용하는 방식으로 준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경험적으로 봐서 많은 관습과 풍습들이 편재되어 있다. 이것은 행동 패턴이다. 결코 규칙이나 법규를 준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규칙이나 법규가 그 관습을 정당화 시켜줄 뿐이다.

 

 

 

만약 그 관습이나 풍습에 서툰 자가 있다면 그 사회 안에서 그 인간은 죄인으로 규정되어서 그 사람이 본디 느끼고 있는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대놓고 주장할 수가 없게 된다. 나그네나 이방인이기에 당하는 서러움이다. 따라서 그는 순응하든지 아니면 반대로 순교하든지 해서 자신의 존재의 옳음을 새롭게 증거하려고 한다.

 

 

 

남자가 넥타이를 매고, 여자가 치마를 입는 것은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건 없건 관심이나 실행 또는 규칙을 구현하는 행위가 된다. 언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언어들은 그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하여 필연적으로 동원되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닫혀진 사회 안에서는 원활한 의사 소통을 위해 동일한 의미 체제로 굳혀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한 사회체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작용해서 자신의 사회는 이유없이 무조건 존재해야만 하고 번성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욕망들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 언어는 자체적인 법규를 제정하고 사회구성원들은 그 법규에 합의된 동의를 보내게 된다. 법규의 등장은, 바로 옳고 그름은 나름대로 차후적으로 규정짓기 위해 언어행위에 속한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하는 것은, 대조성과 차이성을 통해서 실시된다. 선택되지 않는 것은 배제될 것들이다. 배제된 죄악들(?)은 사회체의 존속에 방해가 된 것들이라는 인식을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를 보았기 때문에 배제된다. 대자연 세계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바가 아니다. 인간들이 어떤 욕망을 발산하느냐 따라 언어는 은유적으로만 의미를 함유하게 된다.

 

 

 

모든 개념은 대상에 대해서 참과 거짓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개념들이 범주적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 영역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배제될 대상이 되어버린다. 이런 점에서 언어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권력이 긁고 지나간 흔적을 남긴다.

 

 

 

문법도 법이다. 법이 있는 곳에는 권력이 발생된다. 문법을 규칙이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욕망에 대해 자아가 규칙적으로 대응한다는 말이 된다. 즉 맹목적인 충동을 반복적인 질서로 바꾸어놓는 식으로 자아가 대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주체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무질서에 체제를 잡아 질서로 바꾸어놓는가?

 

 

 

주체는 언제나 자신의 상실을 회복하고 자기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토대를 주체 외부에서 찾게 된다. 그 외부란 바로 대상이다. 이로서 대상이 없이는 주체가 자기 모습을 갖출 수가 없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연류되어 있다.

 

 

 

주체 안에 외부 대상이 놓이게 된다. 이것은 주체가 자아를 온전히 소유하거나 장악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쉽게 해서 본인의 안구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일부, 즉 안구만은 볼 수 없다. 안구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우리 외부에 투사시키는 거울을 보는 것이다. 주체는 바로 이와 같은 안구와 같다. 주체는 그 자체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으며, 오직 현실의 거울 속에서만 보이는 주체이다. 여기서 비유로 말한 거울이란 곧 현실 세계를 의미한다. 즉 주체는 현실을 통해서 파악된다.

 

 

 

이 주체가 말을 하고 말을 건다는 것은, 거울이 대한 세상에 대해서 건네는 것이다. 그렇게하는 이유는, 그 행위를 통해서 주체가 정립되기 때문이다. 주체는 그런 방식이 아니면 자신을 정립할 수 없다. 말을 하는 가운데서 주체는 자기 존재를 외부에 걸어놓는다. 말하자만 나 외부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나는 나 자신이 바깥, 나를 대신 표현해주는 기호로서 나의 단일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처럼 만약 내가 나의 외부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면, 나는 더 이상 자기 동일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기호가 곧 나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나를 표현해줄 방법이 없이 임시적으로 표현하는 것 뿐이기에 언제든지 다른 세상, 다른 시절, 다른 사회 속에 놓이게 되면 나는 지금의 나를 표현할 다른 기호를 동원시키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시대나 주변 환경이 바뀌어도 나 자신이 죽어야만 함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기호를 선택하여 ‘나’라고 규정하는 그 주체는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는 계속 상실되는 경우를 강요받아도 계속해서 그 어떤 기호를 동원시켜서 회복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자아의 쉴새없는 반복적인 노력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끝없이 춤추는 충동적 리듬은 자아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다. 아무리 자아를 열린 마음으로 외부로 개방해도 주체는 번번히 폐쇄적으로 돌아선다. 이것은 수축을 의미한다. 하나의 적절한 기호 안에서 강하게 응축되고 싶어한다. 이로서 주체는 내란을 경험한다. 주체를 표현해주는 기호는 기껏 비유와 상징에 머문다. 따라서 나의 존재를 계속 충족시켜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적합성을 가진 기호로 반성하며 대체하려고 한다. “나는 적어도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돼”라든지, “나는 적어도 지금쯤 이런 인간이 되어야 돼”라는 욕망의 목소리를 내부에서 들려온다. ‘자기’는 끊임없이 갱신되는 것이다. 이것을 ‘분열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열된 주체’에서 소위 ‘윤리’가 피어난다. 선과 악이란 이런 분열된 주체를 봉합하는데 과연 기여 할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구분 지어진다. 즉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는데 도움이 되는 쪽은 선이고 방해가 되어 더욱 분열의 폭을 넓히면 악이 된다. 바리새인들과 사도개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기호)을 놓고 그 상징과 자아를 일체시키려고 노력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악마의 자식=독사의 새끼’라고 하셨다.

 

 

 

따라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악의 화신으로 간주해서 처형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노출시킨 윤리성의 본질이다. 그들은 내부적으로 내란이 없이 행복해지고 싶었다. 통일된 주체성이고 싶었다. 피곤한 신체가 건강을 욕망하게 되면 주체는 ‘건강한 신체’가 곧 자아 자체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불행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기간만큼은 행복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연유로 이런 자유스러움조차 악으로 분류했을까? 그 이유는, 그런 신체로부터 다른 거룩, 다른 의로움, 다른 사랑, 다른 진리, 다른 메시야, 다른 하나님관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즉 절대성에 대한 왜곡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절대성 왜곡 현상은 인간들이 무제한적인 자유를 담보하고자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즉 ‘나에게는 무제한적인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자유의지에서 이성적인 실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실천이란, 악을 통제하고 선을 실행시키는 실천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실천을 통해서 결국 맺어지는 것은, 무한한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 하에서만 무한하게 넘치는 선행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귀결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곧 죄악이 되는데 왜냐하면 선을 행할 기회들을 방해하고 박탈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선이 문제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없는 절대 자유가 인간에게 먼저 주어져야 한다. 절대 자유만 주어지면 미흡한 것은 되풀이해서 수정 들어가면 언젠가는 바라던 선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가 늘 열려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악이 발생된 원인은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조차 없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쏟아지는 장마비에 차가 미끌어져 사람을 치게 했다면, 사람을 치게 한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 장마비에 있다고 원인을 따로 소급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단한 훈련과 좋은 장비를 갖추고 그 다음에는 아무리 많은 비가 쏟아져도 사람을 치는 일을 방비할 수 있는 기회가 그 사람에게 무한히 주어지는 한 그 사람은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이 부당한 짓을 저질렀다해도 그 벌에 대한 상응한 형벌을 받고서도 그에게 여전히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또다시 그 같은 부당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참으로 인간에게 선을 원한다면 ‘인간에게는 무제한적인 자유가 주어졌음’이 선결조건으로 주어져 있음을 확인하면 그만인 것이다.

 

 

 

인간에게 죄책감이 들었다고해서 그 사람에게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국 무제한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이 그 무제한적인 자유를 외부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되면 그 자유는 진정한 자신의 것으로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주어진 자유는, 주신 그 주체자 되는 분의 자유스러운 주체적 본질이 함유된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자유의 행사는 주체자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를 제공한 자의 자유를 대리적으로 행사하는 셈이 된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 무엇이 죄였던가? 바로 주체자의 주체적 행사를 마음껏 하기 위한 무제한적 자유를 방해하거나 훼방하는 것이 죄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외부에서 주어진 자유는 인간에게 계속 죄로서 느껴질 뿐이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에 종속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무제한적인 자유는 인간 자체 내에서 무제한적으로 인간 본유의 것으로서만 생산되어야 한다. 그렇게 자생한 자유만이 그 실천을 행사한 주체를 행복하게 만든다.

 

 

 

행복이란 그 모든 원인과 결과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주체자 본인이 원인이고 또한 결과가 될 때, 그래서 자체적으로 자존하고 자립할 때, 주체는 통일된 일체성을 경험한다. 즉 더 이상 분열을 모른다는 말이다. 이 때만 행복하다.

 

 

 

그런데 주체는 행복하고 싶어도 인간의 신체는 욕망적으로 이 행복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린다. 예를 들면, 누가 단꿈을 꾸고 있는 자신을 화들짝 깨우면 얼마나 신경질 나겠는가! 잠자고 싶은 자유를 사용하고 싶어도 소음이 가득 찬 공장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비록 나쁜 짓이나 양심에 위배되지 않는 일을 했음에도 충분한 행복감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이 현실세계 안에서 주체는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것은 타인에게, 혹은 자연에게, 혹은 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근본악’ 혹은 ‘원죄’라는 개념을 형성시켜 주체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게 하여 죄책감을 줄여나가는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원죄에 대해서 신 쪽에서 책임지고 처리해주시고, 자범죄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성적 자유 발휘로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모든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묻게 되면, 인간이 자유를 발휘하면 할수록 그 책임성이 생각나서 죄책감만 자꾸만 증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인간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주체가 자유롭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이 감당치 못하는 죄에 대해서는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해서는 본인에게는 책임이 면제되기 때문이다.

 

 

 

즉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계속 선한 존재이고 싶어 한다. 자아는 자아 통일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서 주체는 자유와 부자유 모두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악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자유가 없는 주체는 없다고 믿는다. 이것이 ‘주체의 추상화’이다. 초월적 주체관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행동에 나설 때는 초월적 주체관을 지니고 나선다.

 

 

 

이러한 경향은 성경을 대할 때도 변함이 없다. 성경은 언어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에 접근한다는 것은 언어 뭉치에 접근하는 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를 볼 때에 거기서 명령을 듣게 된다.

 

 

 

언어활동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이나 의사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도록 시키고 명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말하는 법을 배울 때, 어린 아이는 원초적 형식을 사용한다. 어른이 어린 아이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훈육이다.

 

 

 

어린 아이들은 이러한 활동들을 하고 그와 동시에 이러한 낱말들은 이렇게 사용하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낱말에는 이렇게 반응하도록 교육받는다. 언어가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사소통할 수 없을 것이 아니라’이 아니라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이러이러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도로와 기계들을 건설 할 수 없는 것이다.

 

 

 

언어활동은 특정한 행동을 요구하거나 명령한다는 점에서 명령이야말로 바로 낱말 그 자체를 언표행위로 만드는 변수이다. 이로서 모든 말에는 명령어가 ‘잉여적’으로 부가되어 있고 모든 언어활동은 ‘잉여성’을 갖는다. 언표와 행동의 관계는 동일성이 아니라 잉여성의 관계이다.

 

 

 

정보와 소통, 혹은 음성의 주파수와 공명의 차별성도 모두 특정한 사회적 질서 안에서의 명령어의 전달과 그에 대한 동조를 야기하려는 점에서 ‘잉여성에 종속’된다. 이 명령어의 의미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http://www.woorich.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