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성화론의 오류
이 글은 과거 십자가 마을 게시판을 통하여서 성화론 자들과의 논쟁이 한창 일 때 이준이라는 분이 개혁주의 성화론의 허구성을 반각하는 내용입니다.
너무 귀한 글이라서 올려놓습니다.
<참고로 이 글을 쓰신 이준이라는 분은 전 알지 못하는 분으로서 아마도 목사는 아닌 평신도라는 것으로 압니다.>
참으로 대단한 증거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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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검사와 이변호사님
이준 2006-10-03 14:31:52, 조회 : 24, 추천 : 0
‘황검사’와 ‘이변호사님’
부제 : 개혁주의 성화론에서 말하는 점진적 성화의 목적 재고하기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율법과 상충된 삶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는 삶이다. 성령을 따라 살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며, 이것이 곧 율법의 요구 즉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삶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롬8:4)...”
-박영돈(2004. 4.). 성화의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목회와 신학.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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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우리에게는 또한 이 문제에서 한 가지 책임 있다. 즉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름으로써 더욱 그리스도처럼 되도록 애써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된다는 것은 서술적인 사실만이 아니라 명령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안토니 후크마. 김원주 역(1992). 성화에 대한 다섯 가지 견해. IVP. pp.85-86.
“...율법과 은혜를 날카롭게 대조시키는 사람으로 종종 언급되는 바울도 율법을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칼빈의 세 번째 용도).
로마서 8:3-4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은 자기 백성들이 율법을 완수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안토니 후크마. 같은 책.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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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율법의 제 3용도의 목표 : 그러면 율법의 제 3용도가 중생인에게 역사하여 어떤 목표에 도달하게 만들까?...칼빈...그는 율법 전체의 목적이 의를 실현해서 하나님의 순결을 본받아 인간 생활을 이루어 나가는 것...그는 “하나님은 율법에서 자기의 성격을 충분히 윤곽으로 그리셨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들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활에서 이를테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율법의 셋째 용도는 믿음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닮아가게 하는 도구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들은 율법을 통해 그들이 종말론적으로 되어야 할 그런 존재가 된다...”
-권호덕. 율법의 세 가지 용법.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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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성화론의 두 가지 구성물인 ‘칭의(결정적 또는 즉각적 성화)’와 ‘성화(점진적 성화) ’중, 후자와 관련하여 언급된 위의 진술문들 가운데 눈에 띄는 인용 구절은 다름 아닌 롬 8:3-4절이다.
나는 이 구절의 의미가 과연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이 성도로 하여금 (중생 또는 칭의 이전과는 달리) 율법(의 요구)을 ‘제대로’ 행하게 하려는데 있었는가라는 의문점을 가지고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말이사 저마다 “성령께서 자기 능력으로 직접 역사하신다”라고 떠벌린다. 그러나, 성령께서 무엇을 (적용)하시는가, 성령께서 어떤 식으로 하시는가 등이 정작 중요하지 않을까?
롬 8:(3~)4를 인용한 위의 일부 저자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은 율법의 요구가 성도의 삶 속의 율법 실천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율법의 실천이 곧 사랑의 실천이므로(롬 13:8) 예수님은 성도의 실제적 삶 속에서 율법의 실천을 가능케 하시려고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게 과연 맞는 말인가? 이러한 개혁주의자들의 본 구절들에 대한 이해는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데, 롬 8:3-4은 반드시 롬 7:1,4과 병행하여 이해되어질 필요가 있다.
롬 7:1,4에 의하면 율법은 죽은 사람(성도를 가리킴)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율법 앞에서 성도는 더 이상 산 사람 취급당하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롬 8:3-4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바로 이와 동일한 의미를 재천명한 것으로 봐야 한다. 나아가, 갈 2:19에서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성도)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로마서 7:4, 롬 8:3-4에서 언급한 것과 똑같이) 재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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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항(갈 2:19 parsing)**
1)원문 : εγω γαρ δια νομου νομω απεθανον ινα θεω ζησω χριστω συνεσταυρωμαι
2)어휘 분석 :
εγω 내가(I)/1인칭-주격-단수-남성-대명사
γαρ 왜냐하면(for)/종속접속사
δια ~로써(~를 통하여, through)/바로 뒤에 오는 단어를 소유격 형태로 취하는 전치사
νομου 율법(the law)/소유격-단수-남성-명사
νομω 율법에게(율법에 대하여, 율법을 향하여, to the law)/여격-단수-남성-명사
απεθανον 죽었노라(죽어 있노라, am dead)/1인칭-단수-직설법-(부정)과거-능동태-동사
ινα ~하기 위함이다(that~, in order that~, so that~)/종속접속사
θεω 하나님께(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unto God)/여격-단수-남성-명사
ζησω 살도록(I might live)/1인칭-단수-가정법-(부정)과거-능동태-동사
χριστω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with Christ)/여격-단수-남성-명사
συνεσταυρωμαι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져 있다(I am crucified)/1인칭-단수-직설법-완료-수동태-동사
3)문장(영문) 배열 : I / for / through the law / to the law / am dead / that / I might live / unto God / with Christ / I am crucified
4)문장(한글) 배열 : 나는 / 왜냐하면 / 율법으로써 / 율법에게 / 죽어 있다 / ~하도록 하기 위하여 / 내가 살도록 / 하나님께 /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더불어) / 십자가에 못 박혀져 있다
5)우리말 직역 : 왜냐하면 나는 율법으로써 율법에게 죽어 있다. 내가 하나님께(하나님께 대하여) 살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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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상하지 않는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 당한 성도라는 존재들은 곧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들인데,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 다시 말해, 율법에 대하여 죽임 당하여 더 이상 지배당하지 않는 - 자들이 다시금 율법을 온전히 지키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위에 인용된 로마서 구절들에서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즉 굳이 율법을 의인화하여 율법 입장에서 표현하자면, 율법의 눈에 비춰진 성도들은, “저 인간들 - 성도들을 가리킴 - 은 ‘죽은’ 것들이군.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것들이야...”라는 말이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라는 말은, 더 이상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써 구원받는 것과는 거리가 먼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다시금 율법을 지켜야 할 이유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상식적으로도 납득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됨으로써 - 율법에 대하여 죽임 당한 존재, 즉 죽어버린 존재가 되었지만, 율법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점이다. 성도가 율법에 대하여 죽어버린 존재가 되었다고 해서 율법도 죽어버린 게 아니라는 말이다.
율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말은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여전히 율법이 자신의 고유의 기능 - 인간으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 인식시킴과 더불어 인간을 정죄하는 것 : 굳이 성도들에게 대하여 표현하자면 루터란들이 강조하는 '율법의 제 2용법' - 으로써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그리스도 안에 놓인 성도들에게도 말이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어째서 앞에서는 율법이 성도들을 보고서 “저 인간들(성도들을 가리킴)은 죽은 것들이군.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것들이야...”라고 말한다고 해놓고, 방금에는 신불신을 막론하고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작용한다고 말하는 지 말이다. 왜 이렇게 말하느냐 하면, 다음 사항을 간과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즉, 율법이 성도들을 보고서 “저 인간들(성도들을 가리킴)은 죽은 것들이군.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것들이야...”라고 여기는 것은 성도가 율법에 대하여 몸소(직접) 죽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됨으로써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성도를 보고서 “죽은 존재네...”라고 여기며 비켜 가는 이유는 십자가(예수님 시체) 때문이다.
성도가 바로 그 예수님 시체에 동참되었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율법이 더 이상 성도를 못살게 굴지 못하는 것이다. 좀 더 유치하게(?) 말하면, 율법이 성도에게 다가서서 찌르려고 할 때마다 그의 눈앞에 피로 범벅이 된 나사렛 출신의 한 남자의 사체가 ‘좀비’처럼 끼어든다. 그 사체를 보고서 율법은 더 이상 성도를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롬 7:1,4과 롬 8:3-4, 갈 2:19은 바로 이런 뜻이다. 그럼에도 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성령께서 역사하여 능력 부어주심으로써 성도로 하여금 삶 속에서 율법을 온전히 지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것이 과연 이 성경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인가? 아니면 개혁주의자들끼리 짜 맞춘 논리인가? 이것이 소위 멜란히톤, 칼빈 등이 주장한 율법의 제 3용법이며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근간이라고 한다.
이들의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따르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됨으로써 - 칭의 또는 중생 - 율법에 대하여 죽은 존재로 인식되게 되었지만,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다시금 사랑의 성취라는 미명하에 율법의 요구들을 실천해 가야 할 존재, 즉 율법 앞에서 다시금 살게 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도 다름 아닌 율법에 대하여 죽어버렸던 그 예수와 성령이 합작하여 “할 수 있어!”라며 능력을 북돋워주기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과연 성령이 중생 이전에 못다 지킨(혹은 온전히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을 제대로 지키도록 능력을 부어주시는 분이라고 보는가?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하여 죽어버리신 이유가, 다름 아닌, 예수님을 죽게 만든 바로 그 장본인(원수)인 율법을 지키도록 - 율법 앞에서, 또는 율법 아래에서, 또는 율법의 각종 조항들을 실천하면서 살도록 - 하심에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율법을 사랑하라”는 뜻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이게 성경적인 논리인가?
이해를 돕기 위하여 비유 하나를 들어볼까 한다. ‘성도’는 마치 이종격투기 대회에 출전한 가운데, 율법이라는 상대를 맞이하여 두 명의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는 트레이너들 사이에서 어느 장단에 맞춰 처신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는 어리둥절한 선수와도 같아 보인다.
율법에 대하여 죽어버린 ‘예수’라는 트레이너는 “나만 믿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성령이라는 트레이너는 “그래, 예수 말이 맞아. 예수 말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직접 치고 박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이 해야 할 일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입장에 따르면 처음부터 ‘인간(분명히 말하지만 성도도 포함됨)’이라는 선수는 율법이라는 선수의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을 상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율법을 상대할 수 있었다면 굳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필요가 없지 않았겠는가!
실상이 이러하다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떤 식으로 상대하셨더란 말인가! 맞아 죽어버리신 방식으로 상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살아서 링 밖으로 내려오지 못하셨다.
마치 ‘무인 곽원갑’처럼. 그냥 율법에 대하여 죽어버리셨던 것이다. 처음부터 이기려는 싸움이 아니었다. 죽어버린 싸움이었다. 율법은 자기가 죽여 버린 상대방을 보고서 더 이상 공격을 감행하지 못한다. 상대방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이러한 묘사가 전달하는 뉘앙스와는 조금 다르게, 성경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의해 억지로 죽임 당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하셨다고 하셨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 10:17-18)
개혁주의자들은 위의 성경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를 유추하거나 확대 해석해선 안 된다. 그 성경 구절들 자체든, 전후 문맥이든 아무리 살펴봐도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근거로 삼아 성도로 하여금 실제 삶 속에서 율법의 요구들 - 사랑의 실현 - 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취지는 발견할 수 없다.
칼빈은 자신의 점진적 성화 교리(이른바, “중생의 점진적 성취”)를 강요(!)하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사용하였는데, 경주자, 결코 퇴학해서는 안 되는 학교, 식물의 성장 과정이 그것들이다. 이에 대하여 나도 위에서 언급한 격투기 대회 외에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고자 한다.
성경은, 그 본문을 의식하는 인간의 의식과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절대적인 일관성 - 일단,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 을 견지하는 텍스트일진대, 특정 구절 A를 다른 특정 구절 B와 연관시켜 양자를 각자의 의미에 비추어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구절들 - 롬 7:1,4, 롬 8:3-4, 갈 2:19 - 을 요일 2:1과 연관시켜보고자 한다. 아무리 ‘황검사’가 ‘곽한구’를 여러 가지 빌미를 들어 구속시키고자 해도 ‘이 변호사님’의 변호로 인해 ‘곽한구’를 구속시킬래야 구속시킬 수가 없다.
요일 2:1에 따르면, ‘곽한구’에게 아무런 혐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 변호사님’ 자체의 독특성(?) -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이 변호사님’의 독특한 변호 방식 - 때문이다.
‘이 변호사님’의 변호 방식은 증거나 목격자, 알리바이 증명 등의 보편적인 방편들에 의존하여 곽한구의 무죄를 입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변호사님’ 자신이 범죄자인양 행세(자처)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셨다는 말이 아니라,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죄인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말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참으로 ‘이 변호사님’의 변호 방식은 독특하다. ‘곽한구’에게 죄가 없다거나, ‘곽한구’의 죄를 감형시켜달라고 선처를 부탁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는 죄가 없으면서 죄인의 죄를 자신이 뒤짚어 쓰고, 죄인의 죄값을 ‘이 변호사님’ 자신이 받은 것이다. 즉, ‘이변호사님’ 왈, “황검사! 내가 바로 진범이요, 내가!” 이것이 ‘이 변호사님’의 독특한 변호 방식이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아담에게 속한 모든 변호사들과 차별화된다(물론, 자신들이 제 정신이라 착각하는 불신자들의 경우 이런 황당한 ‘이변호사님’의 변호 방식 때문에 오히려 예수 안 믿지만 말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내가 살면서 지은 죄를 설마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예수를 믿는다고 용서 받겠어? 예수나 나나 매한가지 인간인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황검사(율법)’는 우리의 선입관과는 달리 ‘나쁜 사람’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 ‘황검사’를 두고서 ‘선한 것’이라고 소개하였다(롬 7:12). 짓지도 않은 죄를 들춰내겠다고 생떼를 쓰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에 반해 ‘곽한구’는 아무런 이유 없이 누명을 쓴 자가 아니다. 말 그대로 ‘조사하면 다 나오게 되어 있는’ 엄연한 ‘범죄자(죄인)’이다. 물샐 틈 없이 완벽한 수사망을 갖춘 ‘황검사’가 이런 범죄자를 놓칠 리가 없다.
처음부터 ‘성도’라는 선수는 ‘율법’이라는 선수에게 상대가 안 되었던 것처럼, ‘곽한구’도 ‘황검사’의 완벽한 수사망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슬슬 좁혀 오는 ‘황검사’의 수사망을 벗어날 수 없는 ‘곽한구’는 오직 ‘이변호사님’의 희생어린(!) 기지로 인해 ‘황검사’의 손아귀를 빠져나올 따름이다.
다음으로 또 다른(세 번째) 비유를 들어보고자 한다. 이웃 집 아저씨의 자동차 앞유리창을 깨뜨린 어느 꼬마를 누가 감싸고 편들어(?) 줄 것 같은가? 꼬마의 아빠이다. 아빠가 그를 감싸주는 이유는 잘못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 비유의 ‘전제’로서 말해두는 바, 그리스도(의 희생 공로)와 성도(의 자체적인 행함)의 관계는 늘 아빠-꼬마(자식)의 관계를 탈피하지 못한다. 고정 불변의 관계이다.
앞서 언급한 바, 한번 입학한 다음에 다시는 퇴학할 수 없는 그 이상한 ‘칼빈의 학교’만 고정 불변의 관계가 아니다. 성도가 아무리 장성(?)했더라도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도(의 실천 수준)의 관계는 아빠-자식의 관계로서 늘 고정되어 있다.
꼬마에 대한 이웃집 아저씨의 나무람 내지는 훈계와 더불어 보호자인 (꼬마의) 아빠에 대한 변상 요구는 ‘정당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 아빠의 자기 아들에 대한 감싸주기와 더불어 아빠의 변상 - 아빠가 흘린 땀으로 번 돈이기에 아빠의 일부나 다름없다.
아빠의 일부가 물리적으로 변환된 것인 셈이다. 이 점에서 이 아빠는 ‘곽한구’를 위해 온몸을 던진 ‘이변호사님’의 규모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던져주지만 어쨌든 취지는 동일하다 - 조치 등을 볼 때, 꼬마가 아빠의 자식이라는 신분으로 스스로 뭔가를 행한 것이라곤 없음을 알 수 있다.
꼬마가 아빠의 자녀이기에 갈수록 장성해 가면서 아빠의 힘을 빌려야만 하는 상황을 점진적으로 벗어날 것 같은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아빠, 이웃집 아저씨의 꾸지람, 그리고 아빠의 감싸주심, 엄마의 잔소리 등으로 말미암아 앞으로는 자동차 유리창을 깨는 짓 같은 건 안할게요...보세요. 다시는 제가 그런 짓 한 적이 없죠? 저 착하죠?...”
위의 말을 바꿔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 예수 믿기 전에는 제가 이러저러 했지만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것을 근거로 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러저러했던 짓은 점점 안 하게 되었고 요런조런 착한 짓만 해나가고 있죠? 그쵸?”
그런데, 위와 같이 말하는 아이가 오늘은 학교에서 치고 박고 싸운 채 얼굴이 엉망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어렸을 때는 이웃집 아저씨 자가용의 앞유리창을 깬 수준이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문제는 더 크고 더 복잡한 쪽으로 늘어만 간다. 친구 관계, 학업 문제, 휴대전화 요금 대납, 학자금 조달, 결혼 비용 지원...갈수록 아빠의 허리는 더욱 휘어진다.
자식이라고 해서 키만 커가지(물리적인 변화) 스스로의 힘만으로 해내었던 것이 얼마나 되던가? 나아가, 그(녀)가 장성하여 예순을 넘겼어도 여전히 노부(모)는 그가 신작로를 건널 때에도 조심하라는 당부를 할 정도로 여전히 누군가의 정신적 그늘 속에 놓여 있음도 엄연한 현실이다.
(‘부모’의 위상과 관련해서도 아담 세계의 그것과 하나님의 그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제 먹고 사는 데까지만 도와주면 되지 노후는 내 자신만을 위해 살 거야...라는 게 이 세상 부모의 의식일진 몰라도,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된 하나님, 동전 몇 닢에 참새 두 마리가 팔리는 것까지도 간섭하시는 하나님은 아담 세계의 부모상과는 사뭇 다르다.)
따라서, 장성해 가는 자의 모습은 장성해 가는 당사자 자신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작 그의 모습 속에 투영된 ‘다른 이’의 희생이 투영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따름이다.
아이의 성장 과정은 부모의 죽음 과정이라 표현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아이가 살아가는 과정은 부모의 희생으로 점철되어 있는 셈이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다.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채워져 있지 성도 자신의 실천으로 채워져 있는 게 아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성도의 삶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점철시키는데 있지, 성도에게 율법을 실천할 수 있는 별도의 능력을 부어주는데 있는 게 아니다.
아빠-아들, 부모-자식 이라는 불변의 관계 속에서 후자는 전자의 죽음을 먹고 사는 것 - 희생으로 채워지는 것 - 또한 불변의 법칙이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바, 후자의 독자적인 삶의 영위는 그러한 희생이 투영되어 표출된 것일 따름이다. 아담 세계에서의 부자간에도 그러할진대, 그리스도-성도의 관계성은 더욱 그러하다.
아담의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실존하는 이는 없다. 모든 것은 구조의 산물이다. 아담들은 한순간도 독자적으로, 자유의 존재로 존재한 적이 없다. 인간은 사회(관계)적으로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들이며, 진리와 관련해서도 무엇인가의 지배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뭔가의 아래에 늘 놓여 있다. 그 ‘뭔가’가 율법이든 죄이든 진리이든 은혜이든 간에 말이다.
이 점에 착안해 볼 때, ‘죄인’의 신분에서 출발한 성도는 다른가? 그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희생)에 근거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참으로 장성한 자가 되어간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놓인 그에게 갈수록 그리스도의 희생이 여전히, 보다 더욱 적용되어지고,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더욱 채워져야 할 따름이다. 이 점에서 성도는 어디까지나 구조의 산물이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 희생이 띠는 효력만을 가지고 성도를 다루시는 성령의 주도하심’이라는 주체적 구조의 산물이란 말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3)
다시 말하지만,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을 두고서, 그 이전에 행하지 못했던 율법의 요구사항들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율법과 계명을 - 롬 7:12은 ‘율법’이라는 용어와 ‘계명’이라는 용어를 병용함으로써 둘을 같은 의미로 취급하고 있다 -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이요, 성령의 도우심 내지는 성도를 이끄심(주도하심)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낳는다.
즉, 애초에 성도가 율법의 상대자가 되지 못한다는 점을 간과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아예 율법에 대하여 죽어버리셨다는 점 -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적과 이유 - 을 간과한다.
나아가 성령의 역사하심이 율법을 행하게 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령의 행하심과 그리스도의 죽으심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결과만 초래하게 된다. 이것이 개혁주의 성화론(점진적 성화 교리 부분)의 실상이다.
그러면서 율법의 제 2용도 - 죄를 드러내는 경책적 용법 - 과 관련된 루터의 입장까지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루터의 기본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해서 더 깊은 내용은 루터에게서 기대하기가 힘든다. 그의 무게 중심은 제 2용도에 있기 때문이다...”
-권호덕. 같은 글. 인터넷 자료.
율법은 성도가 실천해야 할 항목들이 담긴 교과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 공로만이 왜 처음부터 끝까지(롬 1:17, “...믿음으로 믿음에...”) 중요한가를 일깨워주는 교재이다. 율법이라는 선수가 없었다면 예수(십자가)라는 선수의 고마움을 알지 못한다.
황 검사 없는 이변호사님의 존재 의미는 없다. 이웃집 아저씨가 없다면 아버지의 감싸주심은 무의미하다. 선악과의 체계, 곧 율법은 생명과, 곧 은혜라는 방편과 병존한다. 성도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앞서 언급해 온 바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더 이상 정죄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자유하는 것이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율법을 능히 지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자유는 율법과는 더 이상 상관없는, 다시 말해 율법에 대하여 죽은 까닭에서 비롯된 자유이다.
내가 이전에 썼었던 글 중에 야고보서에 언급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 곧 “자유의 율법(약 2:12)”에 대한 내용도 바로 이러한 맥락을 담고 있다.
칼빈은 이제 ‘점진적 성화론’이라는 학교 - 앞서 언급한 바, 그가 든 세 가지 비유 가운데 한 가지 표현으로서 - 문을 닫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칼빈을 간판으로 내 건 학교들 중 한 곳이 시끄러운데, 그 학교 교사들이 최근 해를 거듭하여 다툼을 벌여온 까닭이다.
출판비 유용 의혹, 신입생 선발 관련 잡음, 장학회 운영 잡음...
감히 ‘교회의 교사(?)’를 자처하는 그들이 7:1로 싸움판을 벌이는 그런 볼썽사나운 모습들도 점진적 성화 과정의 일부라고 해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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