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토필요

성화론의 허구성(3)-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1. 30. 10:19

성화론의 허구성(3)

 

 

 

 

기호학적으로 봐서 인간의 문장 기술 형식은 모순과 대립과 대치를 통해 의미를 양산한다. 변별적 대치가 없는 상태에서는 아예 의미라는 것이 발생되지 않게 되어 있다. '만약 -와 같은 제 서술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제 문장의 의미로부터 차단되어 있습니다'라는 식의 의사전달이 모든 문장에 다 개입되어 있다.

 

 

 

이런 명령자와 명령받는 자 관계 속에서 의미를 발췌하려고 한다면 필히 신의 계시에서 그 최종적 명령자를 확정지으려고 시도하게 된다. 즉 이 우주의 최고 명령자를 ‘신’이라고 규정지어 놓고 의미 발굴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명령받는 자에 해당되는 피조물은 신으로부터 명령을 받기 이전부터 명령자인 신의 심정을 이미 확보해 있다는 전제 하에 의미 발굴에 나서는 셈이 된다.

 

 

 

쉽게 말해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신께서 성경을 통해서 뭐라고 새로운 비밀을 열어주시려나 어디 한 번 슬슬 그 뜻을 찾아 볼까나”하는 자세로 성경을 대하게 된다. 이처럼 명령자와 명령 받는 자가 아무런 의사소통에 제약도 없이 서로 통할 수 있다고 다짐하는 그 의식 속에는 이미 피조물인 인간 속에 신과 교류가 가능한 장치가 존재론적으로 담겨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무엇인가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인식 한다는 것, 그 모든 것은 존재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신을 생각하고 의식하고 본다는 것도 이미 인간이라는 존재의 속성상 그것이 가능하도록 미리 장치가 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대하면서도 인간 의식에 떠오르는 정신적 사고가 인간 신체라는 물질을 능가하는 실체로서 곧 신이 심어준 실체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신적인 실체를 연결 고리로 삼고 신에 대해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자와 불신자와 구분되지 않고, 한 아담의 후손이라면 이런 보편적 속성은 예외없이 지니고 있는 셈이다.

 

 

 

 

신에 대해서 감각이 없는 것이 누군가 자신 속에 있는 신의 속성에 관심을 가져라고 심하게 추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다같이 인간이라면 각 개체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보편적 기반을 이미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신앙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낯선 속성으로 추가적으로 도입할 큰 의의는 사라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이 성도 안에서 도입된 들 하나님을 아는데 큰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신앙이라는 추가적 속성이 없더라도 기존의 아담의 속성만으로도 충분히 신과의 연결이 이미 성립되어 있는 형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신의 속성을 발췌해서 인간의 것과 신의 것을 따로 분류하고 정돈하기만 하면 될 판이다. 인간에게 있어 신의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알게 한 신의 특별한 능력이 이미 임한 것이 된다. 이 신의 능력은 신의 속성을 감지한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있어 죽어지내거나 소실될 성질의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의 능력은 인간을 계속 인간으로 남게 하는 능력이기에 인간의 타락이나 범죄로 인해 그 잠재력마저 무능하게 굳어져 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굳어져 버린다면 인간은 신의 존재를 아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 뻔하다.

 

 

 

 

좀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떠오르는 신에 대한 사고는 사고자, 즉 정신으로서의 실체인 내가 존재함으로써 주체가 되어 일으킨 사고가 아니다. 오히려 사고는 나를 넘어서는 유일자의 속성이며 그런 사고를 받아들이는 정신으로서의 나는 유일자의 실체에 근거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한자인 신은 유한자를 자신과 분리된 것으로서 자기 밖에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유한자를 그 자신 안에 포괄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무한자가 되고자 한다. 그러므로 무한 실체는 실체가 아닌 개체들과 구분되면서도 전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들 개체 존재의 ‘내재적 원인’이 되어 모든 인간은 신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는 것이다.

 

 

 

 

이러한 상관관계성 속에서 신의 계시인 성경을 대하게 되면 그 계시가 말하고자 하는 명령도 거뜬히 실천에 옮길 만한 명령들이 되는 것이다.

 

 

 

 

계시란 신 쪽에서 뭔가 인간 쪽으로 표현했다는 말이다. 아무리 신께서 은밀하게 감추어놓은 정보라 할지라도 일단 인간을 향하여 표현했다는 것은 그 정보를 포착할 수 있는 신호를 인간에게 보인 것이라고 인간들은 믿게 된다. 즉 해석 불가능한 계시는 없고, 일단 그 뜻을 알았다면 실천 불가능한 명령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긍정했다는 말은 곧 피조물 안에 있는 신의 능력도 긍정했다는 말이고, 이는 더나아가 피조물 자체의 능력과 수완과 지혜도 이미 선한 것으로 긍정한다는 의미로 인간들은 받아들여지게 된다. 단지 이제 남은 사실은 인간 안에서 얼마나 크고 깊게 신적인 속성을 양산해 내는가 하는 정도의 차이 뿐이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처럼 모른다, 모자란다, 실수가 빈번하다, 오류가 많다”라는 이 모든 부정성들은 실은 더 높은 긍정으로 나아가고 지양되는 과정 위에 놓여 있기에 어디까지 자기 긍정의 또 다른 과시적 표현에 불과하다. 아무리 인간들이 신보다 지혜가 뒤떨어진다 해도 신을 향한 야심을 도리어 격려되고 긍정으로 추진될 뿐이다.

 

 

 

 

현재의 죄악들과 옳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결코 악하지 않다. 왜냐하면 적극적으로 절대선으로 질주하고 상승하는 그 와중에 놓여 있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즉 방향이 선하다면 모든 것이 선하고 존재의 기반마저 선하다. 이런 선함 속에서 인간은 죄를 저지르고 넘어지고 다시 고개를 위로 쳐드는 것이다. 바로 이런 피조물 속에서 역량을 발휘하는 신적 속성을 돕고자 성경이 있다는 것이 성화론자들의 외침이다.

 

 

 

 

그들은 그들 속에 있는 신적 속성의 역동성을 찬양한다. 그 속성은 신의 형상으로서 역동성이라고 말한다. 그 역동성으로 계속해서 자기 안에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려 든다. 자기 안에 다음과 같은 신의 속성이 발휘되고 있다고 증명하려 한다.

 

 

 

 

선, 본질, 이성, 생명, 예지, 지혜, 덕, 축복, 진리, 영원성 혹은 위대함(권세). 사랑, 평화, 통일성, 완전성 등등. 사람들은 이 속성들이 신의 본질에서 나왔다고 외부로 알리고 자아 스스로 다짐하려 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내리신 금지의 의미를 모른다. 하나님에 의한 차단도 모른다.

 

 

 

 

이들은 참으로 자기 안에 피어오르는 무한한 자기 긍정이 곧 자기 안에 신적인 요소가 자리잡고 있음을 무한하게 활용하기 위한 작업을 멈출 생각이 없다. 이들이 말하는 무한이란 결국 신의 속성이 아니라 ‘무한한 자기 긍정성’에 해당된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 성경을 펼치고 연구하고 실습하고 실험해보는 것이다.

 

 

 

속성들은 실체를 표현한다.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실은 ‘자기 형상’이고 곧 자기 속성이요 자기 본질에 해당된다. 자기 본질의 전개를 이들은 성령의 활동으로 자부한다. 실존은 필연적으로 형상에 따른 본질을 펼치게 되어있다. 즉 인간은 자기 표현을 멈추지 않고 끝없이 실시한다.

 

 

 

표현은 인간 삶의 전부이다. 표현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그것이 생각이 되었던, 믿음이 되었던, 행위가 되었던, 실천이 되었던 모든 것은 자기 표현의 전개된 증거들이다. 인간들의 자기 표현에는 금지도 없고 중단도 모른다. 죽음만이 이런 전개를 멈추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죽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도 십자가에 함께 죽게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 능력으로 멈추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합세하여 그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자기 표현의 무의미성과 죄악성을 공개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요 표현이요 곧 능력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오신다. 하나님의 이름이 작렬하여 인간의 이름을 부정해버리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지니 창조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아담이 이미 부활로 등장된 이상, 이 지상에 기존의 아담의 자식들은 소용없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2-24)

 

 

 

하나님은 아담에 속한 모든 자를 이미 모두 죽은 자로 보신다. 이제부터 ‘산 자’라고 불리우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 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만이 죄라는 죽음의 권세에서 살아나셨음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살았다’하는 규정은 자신의 피조성에다 더 이상 근거를 둘 수가 없는 노릇이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하심 안(in)’ 외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살았다’라고 규정지을 수가 없는 형편에 놓인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창조된 피조적 존재성을 기초로해서 신을 규명하겠다는 시도와 십자가를 기초로해서 이미 그 피조성은 죄로 인해 ‘죽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은 규명하는 시도와 첨예하게 대립되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은 본인이 인정하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죽은 세상이 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런데 만약에 십자가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아를 상정하면, 잠시 십자가 안에 자신을 담겼다가 다시 빠져나오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살았다’는 규정을 챙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도가 여전히 십자가 안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십자가만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쉬운 예로, 세상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로 바라본다. 십자가가 그 증거가 된다. 그런데 세상에 의해서 죽음의 자리에 놓여 있는 그 십자가 자리에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은 이미 죽음의 자리에 그대로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독자적인 자신의 안목으로 볼 수 있는 위치가 박탈당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세상을 바라 볼 때 십자가 바깥에서 바라볼 수 없게 되었고, 세상도 또한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을 규정하게 된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은 단호하게 이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피조적 존재성으로 자신과 세상과 그리스도와 신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환상이다. 왜냐하면 그런 죽은 자의 시선은 죄악으로만 바라보는 저주받을 시선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무시하고 신을 찾는 시선과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세상을 보는 시선의 대치가 영원까지 지속될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수시로 자신의 진노하심을 나타내었다. 하나님은 언약 밖에 존재에 대해서 언제든지 저주할 태세로서 ‘거룩한 전쟁’을 벌리셨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수 11;20)

 

 

 

이 본문에서 ‘모세의 명하신 대로’라는 말은 곧 ‘언약 대로’ 라는 말이다. 새언약 시대에 돌입하고 난 뒤에 세상의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준으로 하여 저주받게 될 자에게 돌아갈 저주가 제공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0-31)

 

 

 

인간이 자신의 존재함과 거기에 작렬한다고 여겨지는 신의 거룩한 속성을 찾아내어 발전시키고, 성장시키고, 고이 키워내기를 원하는 자들의 잘못은 ‘십자가’라는 경계선을 철폐시켜버린데 있다. 이들은 십자가라는 경계선 대신에 버리고 자신을 그 자리에 꽂았다. 십자가 앞에서도 감히 자기 영역을 따로 장만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다고 믿었던 것이다.

 

 

 

죽은 자가 감히 산 자 노릇을 하려고 했다. 기어이 부인할 수 없는 궁극적인 자기 자리를 확보했다. 신마저 침범할 수 없게 하는 자기를 위한 절대 영역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그 안에서 본인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다. 어느새 신이 된 채!

 

 

 

성화론, 이것은 인간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한 영원히 버리지 못하는 악마의 그림자이다. 이 사람은 실은 악마와 함께 있기에 그런 그림자를 내비치게 마련이다. 십자가에서 정말 예수님과 이미 죽어버린 자에게만 ‘성화론’이라는 그림자는 사라진다.

 

 

 

 

Ⅲ. 결론

 

 

성령님은 인간 편이 아니라 예수님 편이다. 인간의 영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이다. 따라서 성령님은 인간 편이 될 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예수님 편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어떤 식으로 살려내시는가? 로마서 8:26에 보면 나오는 기도와 관한 내용이 그 한 예가 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즉 성령님은 결코 우리의 기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오로지 예수님의 기도에만 복속되어 지시에 따라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2-34)

 

 

 

따라서 거룩 되심, 즉 성화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이토록 완벽하게 거룩하심을 증거로만 나타난다.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주님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거룩한 성도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

 

 

 

이 거룩이 개인적인 거룩으로 전환될 소지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리스도 안’와 무관한 ‘성도 안’이라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를 증거하기 위한 성화론이란 ‘그리스도 밖’에서만 인정받을 이론이다. 성도는 오로지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주님의 거룩케 하심을 증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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