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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글과 형상 정낙원 목사님 글(펌글)

아빠와 함께 2012. 10. 26. 12:02

'글과 형상' 정낙원 목사님 글 - 십자가마을에서 펌

 

글이란? 사람의 감정을 담아 내는 그릇과 같다.

그래서 어떠한 글을 읽으면 그 글 속에는 어떤 기운이 감지되기 마련이다.
이는 글을 쓰는 사람의 감정이 글에 그대로 녹아져서 이입되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으로 글을 보게 되면 글을 쓴 사람의 감정 상태를 읽을 수가 있다.

나는 작금에 일어난 십자가 마을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느끼는 소회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근호라는 사람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로는 이근호 신학을 공격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근호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은 단지 이근호를 공격하기 위한 빌미용일 뿐이다.

난 많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이근호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성경을 보면 지옥에 간 사람들의 특징을 묘사하기를 '슬피 울며 이를 간다' 라고 한다.

이를 간다는 것은 분하고 억울해서이다.
즉 이를 가는 것은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다거나, 어떤 불이익을 당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본능적인 현상이다.
적개심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이근호라는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은 적개심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근호와 밀접한 관계를 갖다가 불이익을 보았다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적개심이 들게 마련이다.

그럼 도대체 이들이 어떤 불이익을 당하였길래 이렇게 부관참시 할 정도로 섬뜩한 표현으로 독설을 퍼붓고 잇는 것인가?
독설의 강도가 강할수록 많은 미움이 잇다는 말이다.

난 이근호 목사에게 적개심을 품은 사람은 일반 성도님들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모두가 이근호 목사에게 길든 짧든 함께 배우며 교제하던 목회자들이라 생각한다.

나는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대충 누구인줄 짐작을 한다.
아무리 가명을 쓴다고 하여도 그 사람의 성품은 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참엔 점잖게 위장을 하여도 본성을 자극하면 본질은 노출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 속에는 실제로 성도님들은 육두문자를 쓰지 않는다.
육두문자를 쓰고 이성을 잃고 악악대는 사람은 모두가 목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목사들이 악악대는가?
한마디로 이근호하고 놀다가 손해 봤기 때문이다.

이근호 목사를 욕하는 사람들은 처음 이근호 목사와 교제를 할 때는 다 좋아서 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아무런 이유 없이 교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다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하여 교제를 한다.

나 역시 이근호 목사와 교제를 하는 것도 내게 유익한 것을 제공하기 때문에 한다.

내게 유익 될 것이 없다면 아까운 시간을 할애하며 교제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목사들이 황금 같은 시간을 내어서 교제를 한다는 것은 어떤 유익을 위해서이다.
그것도 신학을 위하여 교제를 한다는 것은 그 신학을 통하여 목회에 어떤 유익을 얻고자 함에서이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상 지금 이근호 목사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고 욕을 하는 분들이 이근호 신학을 통하여서 목회를 성공하고 있다면 과연 이렇게 까지 할까? 난 아니라고 본다.

만약 20년 동안 이근호 목사와 주의 이름 안에서 호형호제하면서 지내던 사람이 속된 말로
지금 큰 교회를 하고 한마디로 먹고 살만 하였다면 이렇게 하였을까?

즉 이근호 신학이 목회에 큰 도움이 되어 교회가 부흥 성장하여 남부럽지 않게 사례비도 많이 받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등 따시고 배부른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았어도 이렇게 하였을까?
난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손 목사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거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십자가를 외치고 성화를 부르짖는다 하여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길 장사는 없다.

지금 한국 교회는 세미나 홍수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세미나가 홍수처럼 행해지는가? 오직 하나 목회성공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제가 과거에 수많은 세미나를 참석하였지만 목사님들이 세미나에 참석하는 이유는 단 하나 목회성공을 위해서이다.
목사들은 목회만 성공된다면 못할 것이 없는 자들이다.
지금도 목회 성공을 위해 40일을 금식하며 산에서 이슬을 맞아가면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도 오직 목회 성공을 위해서이다.
왜? 목사가 목회 성공을 목숨 걸고 하려고 하는가?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다.

하나님께 대한 사명은 허울이고 오로지 떡을 위해서이다.

교인이 불어나고 교회만 커진다면 목사들에겐 못 할 짓이 없다.

그러할진대 이근호 목사가 외치는 오직 십자가뿐이다 라는 것이 교인들에게 먹혀 들어가서
헌금이라도 풍성하게 내고 교인들이 목사를 존경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없이 산다면 아마도 이근호 목사를 초청해서 부흥회를 하고 이근호 신학이야말로 최고의 신학이라고 추켜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근호 신학대로 하니 교회가 부흥되기는 커녕 잇는 교회도 쪼그라 들어가니 화딱지가 나는 것이다.
교인들은 말을 안 듣고, 빤질거리지, 그렇다고 헌금을 하나, 예배에 참석을 잘하나, 거기다가 자기 마음대로 살지, 이 정도 되면 목사는 자동으로 열 받게 되어 있다.

애초부터 죽어야지 하는 자세로 이근호 신학을 접근했으면 이런 적개심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말로는 오직 십자가뿐이다 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죽기 싫고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서 따라 다녔는데 돌아오는 건 참담한 현실뿐이니 화가 나는 것이다.

이런 사고로 이근호 신학을 접하였기 때문에 닮아야 할 것은 닮지 않고 닮지 말아야 할 것은 닮고 마는 아이러니컬한 현상이 나타나고 만 것이다.

제가 왜? 닮아야 할 것은 닮지 않고 닮지 말아야 할 것은 닮았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난 처음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는 책을 통하여서 이근호 목사를 알았다.
난 그 당시 철저하게 율법 아래서 성화 신앙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근호 목사가 쓴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는 책은 가히 나에겐 핵폭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였다.
내 신앙 자체를 깡그리 부서지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난 그 책을 보면서 엄청 많이 울었다.

너무도 행복한 울음이었다. 마치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 버렸다가 다시 만났을 때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의 울음이었다.
안도감과, 고마움과, 서러움의 눈물이었다.
그래서 이근호 목사를 만나 보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책으로 만족하지 못하여서 이근호 목사 세미나에 참석을 하였다.
참석하기 전에는 야! 이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고 인정도 철철 넘치는 줄 알았다.
그런 기대감으로 참석을 하였는데, 나타난 현실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솔직히 율법 아래서 성화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목회를 하면 속으로는 싫더라도 겉으론 겸손한 척 하는게 정상이다.
그래서 성화주의 목사들은 대부분 겉보기엔 부처님을 닮아 잇다. 속은 위선 투성이지만,,,,
그런데 이곳은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성화주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랬다는 것이다)

위아래도 없고, 윗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것은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난 그 때 그 심정을 여기서 그대로 표현을 한다면 뭐 이런 인간들이 있어! 였다.

책을 보고 테이프를 듣다가 처음 찾아갈 때는 온갖 기대감을 갖고 갔는데
그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의 행동과 말투를 보면서 적잖이 놀랐다.

그런데 세미나를 마치고 나서 난 그래도 처음 왔으니 이근호 목사와 서로 인사라도 할 줄 알고 서성이고 잇는데 소 닭 보듯이 하곤 횡하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기분이 상하여 속으론 뭐 저런 사람이 있어!

성화주의 행함을 주장하는 목사들은 이런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자기 세미나에 참석해 주었으면 감사하는 마음에서도 아주 겸손하게 통 성명 하는게 관례처럼 되어 있는데, 여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이근호 목사 주변에 잇는 여러 사람들이 이근호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투며, 행동이며,,,
(나 중에 보니 개 중에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오히려 좋은 목사님들이 더 많았다.)

왜? 그럴까? 아니 그 좋은 복음을 듣는데 왜? 인간들은 이런 개판인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젊은 친구들이 그런 사람이 많았다.

내 나름대로 관찰하고 낸 결론은 이 사람들이 이근호 신학의 본질은 붙잡고 잇지 않고 이근호 껍데기만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이근호 신학은 절대로 사람을 무례하고 건방지게 하지 않는다. 다만 이근호 목사 개인적인 성격이 무례하고 건방져 보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편견일 수 있지만,,,)

신학과 성격은 구분하여 받아야 하는데 신학은 본 받지 못하고 성질만 받아 놓으니 무례함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이근호 목사의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의 영향을 흉내 내다가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한다,,,마치 조용기 목사를 흉내 내려고 그이 말투며 억약까지 닮는 사람들과 같이,,,,,)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손무성 목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제기하는 의문이 이근호 목사에게 배우는 사람들 중에 개판인 사람들이 많다고 하여서 이런 말을 한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손무성 목사님이 본 그 인간들이 바로 이근호 신학은 붙잡지 않고 이근호 성질머리만 배웠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국민학교에 처음 들어가 한글이나 아라비아 숫자를 배울 때 선생님이 칠판에 쓴 글자를 그대로 흉내를 내서 배우는 것과 같다.
그 때는 선생님이 쓴 글자와 조금이라도 틀리면 안되는 줄 알고 그대로 베겨 쓰곤 하였다.
(왕의 남자라는 영화를 보면 감우성이가 광대들을 모으는 방을 쓰는데 이준기의 글체 그대로 베껴서 쓴 것과 같다. 곁에서 형님 어떻게 글씨를 그렇게 잘 쓰냐고 물으니 자기는 글씨의 내용은 모르고 그 글씨만 따라서 베꼈을 뿐이라고 한 것과 같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 아! 앞으로 이근호 신학이 많은 오해를 받겠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왜냐하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이근호 흉내를 내기 때문에 이근호 신학 자체가 비판을 받기 때문이다.

아마도 손무성 목사님도 주변에 진짜 착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근호 신학의 행함의 부재 성을 느끼지 않았을 줄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손 목사님이 아는 자들 중에서 무례하고 방종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이근호 신학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 십자가 마을의 사태가 촉발되자 이근호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꼭 이근호 목사를 흉내내고 있음을 보고서 아! 이 사람들은 이근호 신학은 배우지 않고 이근호 성질머리만 배웠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근호 신학은 십자가 마을에서 공격하는 것처럼 절대로 그런 방종을 부추기는 신학이 아니다. 손 목사님이 제기하는 것같이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입니까' 라는 고백을 못하는 신학도 아니다.

손 목사님께서 그렇게 보셨다면 손 목사님이 잘못 보신 것이지 이근호 신학에 오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강의와, 수많은 설교를 통하여서 배출되어진 이근호 신학은 혹자들이 비평하는 것같이 값싼 신학이 아니다.

난 안타까운 것이 20년이라는 세월을 교제하면서 이근호 목사의 속을 너무 모르고 잇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만 외치는 그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근호 신학은 어디를 찔러도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흘러나온다.

피가 흘러나온다는 말은 죄가 고발되어진다는 말이고, 감사가 흘러나온다는 말이다.

이근호 신학을 안다면서 죄가 폭로되지 않고, 감사가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이근호 신학의 본질을 들어가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가르치는 선생을 탓해서는 안 된다.

이근호 신학을 탓한다는 것은 이근호 신학으로 무엇인가 노리고 있는 꼼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꼼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적개심이 분출하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은 누구에게 핑계를 델 수가 없는 것이다.

왜인 줄 아는가?
신앙의 깨달음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머리가 좋거나 나쁘거나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정신병자도 성령이 역사하면 깨달을 수가 잇고, 일자무식한 사람도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면 깨달아지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지식인 것이다.
반면에 아무리 머리가 똑똑한 천재라 할지라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이고 십자가이고 하나님이다.

그러니 내가 누구 누구의 신학 때문에 내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 안에 성령이 계신다면 마귀가 아무리 하나님같이 말을 해도 구별해 내신다.
즉 이근호가 어떤 말을 한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예면 예! 아니면 아니요! 라고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해서 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들의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가 깨달은 것을 학문적으로 풀어 낸 것이 신학 아닌가?
그러나 구원은 신학으로 받는게 아니다.

신학자가 만난 하나님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내게 찾아오산 하나님으로 구원을 받는다.
남에 하나님은 의미가 없다 오직 내 하나님어야만 한다,
내가 만난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

구원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떠나 하나님의 계시로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신학을 모른다 하여도 구원받는데는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많이 배운 자이든 못 배운 자이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에는 인간의 앎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케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므로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지 인간의 지적 능력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신학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깨닫게 해주신 신적 지식을 나누기 위함이다.
즉 내가 만난 하나님은 이런 분인데 당신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서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미쳐 알지 못햇던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서로 공요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신학의 본질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일자 무식한 할머니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 그리스도가 있다.
할머니께서 깨달은 그리스도를 말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앎 곧 신학이 되는 것이다.
다만 할머니의 언어 구사 능력의 한계로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논리 정연하게 말씀을 못 할 뿐이지, 그 할머니가 논리 정연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았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 구절을 가지고 틀렸다느니 전체를 매도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이근호 신학 때문에 망한 것 같이 말을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근호 신학이 망하게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망하게 하신 것이다.
주께서 깨닫지 못하도록 귀를 막으셨기 때문에 못 깨달았을 뿐이다.

만약 이근호 신학이 틀렸다고 한다면 이근호 신학으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높이는 신앙생활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이 이근호 신학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감사가 넘쳐흐른다.

성화하라 행하라 하지 않아도 진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일어났던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같은 감격스러운 모습들의 삶을 살아가고 잇다.

주변에 방종하며 사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이근호 신학이 방종을 유발시킨다느니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방종하는 사람은 복음에 합당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라 생각하라.

그리고 인간의 기준으로 방종이니 방탕이니 말하지 말라.
가장 나쁜 방탕과 방종은 그 속에 적개심이 가득하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성화를 운운하고 행함을 운운하는 그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서 누가 술을 먹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그가 방종한다느니, 방탕한다느니 정죄하지 말라.
인간은 근본적으로 방종의 요소와, 방탕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뿌리가 마음속에 살아 잇다.
미워하고 싶어하는 뿌리, 도적질하고 싶어하는 뿌리, 간음하고 싶어하는 뿌리, 살인하고 싶어하는 뿌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환경만 되면 살아나서 겉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수님께서 미움이 있으면 살인한 자요, 음욕이 있으면 간음한 자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깊이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 하나님 우리는 간음 할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라고 해야지! 난 간음 안 했습니다 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럼 간음하라는 말입니까 라고 오해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를 믿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 하나님 나는 살인 할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해야지!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면 난 원수를 용서 할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 항상 주의 긍휼에 기대게 된다.
만약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대지 않고 자기 자신이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 지려고 시도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이다.

그리고 당부하건데 이근호 목사를 공격하는 분들에게 정중히 부탁을 드린다.


제발 가말리엘의 지혜를 본 받으라.

유대인들이 예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염병같은 이단사설을 퍼뜨린다는 죄목으로 심판을 단행하려고 모였다.
적개심이 가득하여 죽여! 죽여! 저놈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단칼에 쳐 죽여야 돼!

모두가 예수의 제자들을 죽이려고 할 때 가말리엘 교법사가 한 말을 기억하라.

지금 식으로 의역하면

이 사람들아! 이근호 신학이 만약 인간에서 난 것이고 틀린 것이라고 한다면 제 풀에 넘어져 사라질 것이지만 만약에
이근호 신학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된 것이면 그대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손 목사님께서 20년 동안 잘못 배웠다고 하여 떠나가는 것이야 자유이지만,
제가 염려스러운 것은 지금 손 목사님께서 옳다고 여긴 그 신학이 5년 후가 될는지 아니면 20년 후가 되어서 또 틀렸다고 생각이 되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지 궁금하다.

처음 손 목사님께서 이근호 신학을 옳은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오류가 있다고 하여 20년 우정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는데, 앞으로 20년 후에 양무리 마을의 신학이 틀렸다고 한다면 그 땐 또 어찌 하려는가? 또 우물에 똥물 끼얹고 양무리 마을도 내것이다 라고 하겠는가?

단언컨대 하나님께서 어느 한 사람에게 완전한 신학을 주신 적이 없다.
만약 완전한 신학을 전한다고 하면 그는 문선명이 처럼 교주가 되고 말 것dl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참 스승으로 각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서로가 주장하는 내용들을 분별하여 받아들이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니 성령이 그 안에 스승으로 계신 성도는 염려 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의 참된 스승이 되셔서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사상과 다르다고 해서 원수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성질이 급하고 지혜롭지 못해서 나중을 생각하지 못하고 먹던 우물에 오줌을 싸다가 나중에 목이 말라서 그 우물 물을 다시 찾는 우를 범하는 일을 종종 한다.

그냥 떠나면 되는데 꼭 뒤집어 엎어 놓고 떠난다..
참으로 고약한 민족성이다.



아뭍튼 손 목사님 그동안 참으로 십자가 마을을 유지 보수하고 지켜 내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잘 지었던 집을 허물어 내시진 마시고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선처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목사님도 알다시피 십자가 마을을 사랑하는 목사님들이 교회들을 보면 전부 거지들 아닙니까?

부디 마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과 같은 처사를 하시길 바랍니다. 부디 지혜롭게 해결하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주 안에서 평안하십시오.


출처 : 문영호의 복음세계
글쓴이 : yedidia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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