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기뻐서 수련회 요약문을 쓴다. 아가의 사랑 안에서 도저히 갈 수 없는 창세기 2장을 회상했고,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아준 요한계시록의 완성도 보았다. 그 안에 끼어있는 예레미야의 예언도 부추기는데 한몫했다. 너무나도 딱딱 들어맞는 사랑의 증표들이 사랑을 다시금 확인해 준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사랑이 시공간으로 남녀를 끌고 다니듯이 얼마나 끌려 다녔는지, 차마 아가서에서 대해서 들었던 말씀을 한마디도 할 수 없이 벙어리가 되었다. “야! 너 어디 갔다 왔어? 잘 왔다!”라고, 기다리고 있으면서 반기고 있는, 지가 자칭 현실이라고 우기고 있으면서 현관문을 열어줄 때, 그때서야 말문을 열어주셨다. 그래서다.
처음부터 벌어져 있고 갈라져 있는 틈, 간격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면 메울 수 없다. 여기에 사랑이라는 것이 투입이 될 때, 어떻게 메워질 수 있는가? 사랑의 반대말은 힘이다. 모조리 힘을 빼는 것이 사랑이다. 주님은 솔로몬에게 완성된 계시를 주심으로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시는 것이다. 혈육이 아니다. 혈육공동체의 마지막은 결국 혼자 죽는다는 것이다.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사람은 죽는 이유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은 비극이다. 창세기 3장의 금지명령을 넘어설 수 없다. 창세기 2장으로 넘어가려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남자와 여자가 나와야 한다.
창세기 3장 이후에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만 있다. 사람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떡을 위해서 일하고 그 떡은 곧 내 목숨을 지켜주는 사유재산의 축적이 되고 그 사유재산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고 그 법을 행사하는 국가권력에 복속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음으로 개별적 존재가 되어 남 탓을 하는 인간은 악마의 밥이요 똥개다. 착해야만 우리는 생존할 가치가 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는 악마에게 탈탈 털리는 선악체계사상에서 나온 인과응보에 발목 잡혀 항상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못 빠져나온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힘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언약계시를 가진 왕이다. 왕이라는 힘으로 통치하는 그 힘을 내다버림으로 생산되는 것은 바로 여자다. 왕이 왕답지 못하고 왕의 권력을 내놓은 결과로 등장하는 여인이다. 사랑은 이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 자기의식에서 타인의 의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밀쳐버린 예수 안에서 새롭게 생산되는 예수 안의 나인 것이다.
말로 글로 다가설 수 없는 실체, 메울 수 없는 간격을,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피에로처럼 인간은 내가 필요로 해서 타인을 만든다. 나를 버리고 건너 갈 수 없는 나다. 사랑은 없다. 왜? 인간의 태생이라는 게 힘을 원하지 사랑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름의 확장을 위한 본능 외에는 없다. 확장하고 또 확장하기 위해 문어발 새끼 치듯.. 이 욕망으로서의 사랑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성령님이다.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온 앗수르 군대를 물리쳐 주시는 것, 그 증거물로서 185,000의 시체다(사37:36). 이 강력한 힘을 원한다.
남자도 여자도 없다. 있다면 인물 되고 인격 되고 돈 되는, 남자와 여자만 있을 뿐이다. 곧 사람만 있다. 왜? 솔로몬처럼 사랑을 원하지 않는가? 돈만 있으면 남자와 여자의 사랑으로 언제든지 되돌아 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기존의 노선에서 벗어난 사랑은 위반이요 파괴요 전위적이다. 미친 것이다. 그대 있음에 나는 없어도 좋다. 차라리 내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눈에는 당신만 보인다. 완전히 미쳤다.
아가서는 계시다. 다윗언약을 받은 솔로몬 왕의 계시다. 계시를 받은 왕, 곧 메시야가 탄생하면 천국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계시의 활동력에 의해 없는 나라가 새롭게 펼쳐지고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물러가고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창세기 2장에서 벌거벗음조차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그 낙원, 잃어버린 낙원은 잃어버린 남자와 여자의 탄생에 의해서 새롭게 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향기가 난다. 어떻게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향기가 날 수 있을까? 마치 공포영화처럼 사람을 없애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더니 이 남자와 여자마저 없애 버린다. 그리고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자와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자로, 피 있는 자와 피 없는 자로 끝을 보셨다. 사랑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이 과정 속에서 나온다. 힘의 실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솜사탕 기계에 설탕을 넣으면 실처럼 뿜어져 나온다. 마치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달콤하고 부드러움이 지상에 깔리는 것이다. 죄 덩어리는 반드시 박살이 나서 사랑받는 죄인이 되어야 한다. 사랑받는 죄인이 된다는 것만큼 최고의 사랑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갑이다. 그리고 우린 을이다. 이 네트워크에 말려든 을은, 을을 위한 세상이 없다는 게 감사다.
내 목숨을 바칠 사람을 만나야 한다. 여자를 만나는 과정으로 솔로몬은 왕이 아니라 남자가 된다. 여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등장한다. 충동으로서의 사랑이다. 전도서에서는 인간이 우선이 아니라 타이밍이 우선이라 말하고 있다. 때다. 타이밍으로서의 사랑, 지금 이 순간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과거 재편이다. 모든 것이 주관적이 되고 내가 만든 조건은 무용지물이 된다. 내가 미처 몰랐던 새로움이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조건이 있다면 나 같은 것은 없어져도 괜찮다.
아가1장 6절,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솔로몬 왕이 사랑한 대상은 거무티티한 여자다. 그 여자가 처한 환경은 포도원이라는 공간에서 오빠들이 시킨 일을 시간적으로 하는 것이다. 혈육이 원하는 것은 놀지 말고 산업역군이 되라는 것이다. 여자는 이미 혈육적 공동체에서 떠났다. 자기의 환경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빨리 이런 환경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것이다. 아기서를 보면 누이, 오빠들, 어머니는 나오는데 아버지는 나오지 않는다. 이 땅에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의 부재다. 예수님은 너희들은 아버지를 모른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오셔야만 아버지를 안다. 아버지를 알려면 육적인 연대성이 끊어져야 한다. 혈육의 공동체에 갇혀 자기의 욕망을 충족해줄 때나 비로소 가족이다. 사랑의 연대가 아니라 힘과 힘의 연대다.
충동으로서의 사랑은 미흡함에 매료되어 새로움이 나오는 구멍이다. 미흡함마저 사랑으로 보인다. 그래서 충동이라고 할 때는 비이성적, 비합리적 개념이 떠오른다. 그러나 욕망은 현실에서 나온다. 욕망의 집결체로서의 현실, 욕망+욕망+욕망...욕망의 바다다. 욕망의 세계에서는 현실이 전부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헤엄칠 때, 그토록 현실에 충실했는데 또 다른 현실이 있다는 생각이 이상하게 드는 이유는 뭘까? 욕망으로서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현실을 조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거야, 사랑은 이거다, 라고 말을 하면 할수록 진실과 멀어진다.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마음을 왜 몰라주는지? 화장이 떠서 따로 노는 것처럼 붕 떠 있다. 자기 존재를 사랑하는 것, 자기가 자기 사랑을 사랑하는 것, 간음이고 음행이다.
아가1장 2절,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키스다. 입으로 입을 닫아버린다. 사랑하는 데는 말이 필요 없다. 입맞춤 하나로 정지가 된다. 서로 입맞춤을 한 것이 아니라 입맞춤에 서로 놀아나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서에서 말하는 타이밍이다. 그래서 사랑의 입맞춤은 타이밍이다. 두 번 다시 입맞춤이 없다. 왜냐하면 그 타이밍은 내 권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가1장 4절,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그리고 사랑은 공간에서 불꽃이 튄다. 대자연, 거친 들판, 어머니의 집, 왕궁으로의 침실, 도시, 장소에서 장소로의 계속 이동은 사랑의 요건을 다 낮춘다. 사랑이 두 남녀를 끌고 다니는 것이다. 혈육적인 오빠들에게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빼돌려야 한다. 왕의궁전 침실까지 데리고 와야 한다.
사랑은 우려먹는 것이 아니라 뿜어져 나와야 한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내 인생에 일어난 모든 것은 예수님을 사랑한 순간 당연함이요 마땅함이요 그랬어야만 했다. 조건은 우리가 그 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메시아가 처벌하고 심판하는 힘을 사랑으로 집어넣는다. 새로운 아기가 여자이름으로 태어난 것이다. 마구간의 환경은 죄의 환경이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죄된 환경과 아기 예수의 태어남으로 새로운 혜택을 입는, 피로 말미암은 용서의 혜택을 누리는, 이것을 인정함이, 내용이 사랑의 아들의 나라다. 남자도 없다. 여자도 없다. 그래서 솔로몬과 우리는 형제지간이요, 우리 어머니는 자유자요 새 예루살렘이다. 우리를 생산할 때 알게 되는 아버지다. 예수님의 아버지다. 그래서 비밀이요 신비다.
아가1장 7절,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솔로몬과 여자는 서로 너, 나로 반말을 쓴다. 이것은 솔로몬이 자기를 점점 낮추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게 어떻게 되는가? 묻지 마라. 타이밍에 의해서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어떠한 방해도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만이 실제적인 타이밍이다. 조건이 아니라 통보다. 우리는 때에 맞춰 놀아날 뿐이다. 최고의 사랑은 왕이 자기 여자를 만들기 위해 왕 됨을 포기하고 시커먼 여자를 사랑한 것이다. 이 왕은 목동으로 자기 자신을 낮춘다. 여인은 양떼를, 염소 떼를 따라 간다.
아가1장 11절,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남자친구의 격에 맞도록 친구들이 옆에서 도와준다. 왕실에서 살았던 왕에 맞게 여자도 참여하게 된다.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둘인데 한 몸이었던 창세기 2장의 시절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아가서의 사랑은 일체성을 만들기 위한 환경은 거친 들이라 할지라도 여기에 여자 하나가 꽂히면 낙원이 된다. 이 역할을 솔로몬이 하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힘으로 스스로 서겠다. 나 혼자 살겠다고 한다. 인간의 만남은 힘과 힘의 만남이다. 창세기 3장 이후 사람들은 사람으로 살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만의 세계, 독자적인 사람으로 사는 것이 화근이다. 그 사람으로서의 나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남녀로 되찾아져 하나로 새롭게 창조된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들어져야 되는 것이다. 천국은 끼리 끼리를 파괴시킨다. 십자가는 나만이 있는 세계, 나를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부부였다가 사람이 혼자 살면 자기 이름을 다시 찾는다. 그러나 구원은 주님의 이름으로 된다. 혼자 살겠다는 그 자체가 남에게 사기 치는 것이다.
아가2장 6절,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하나가 될 때는 독자적으로 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것도 깨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 이후가 어떻게 될 것도 생각지 말라. 지금 이순간이다. 나를 아주 죽여 버리는 것이 좋은 것이다. 내 쪽에서 뭘 할 게 아무것도 없다. 욕망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충동은 좋아할 마음이 없는데 생기는 것이다. 충동이 나를 관리한다. 이성적이 아니다. 앞뒤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놀자는 것이다. 낙원에서는 일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일한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일한다는 것은 떡으로 산다는 것이다. 마귀가 예수님을 만나서조차도 떡을 주겠다고 했다. 이 세상의 보편적인 진리에, 떡을 주는 악마에 세상은 미쳤으니까. 그래서 복음을 알았다면 현실분석을 해야 된다. 이 세상이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를 말이다.
자기가 신이기에, 서로 언어로 주고받는 하나님이 다르다. 왜? 언어자체는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접근하지만 멀어진다. 말과 실제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 떡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떡은 사유재산을 결속시키고 부르주아를 생산해낸다. 이들은 자유민이다. 내 생명, 내 안전은 내가 관리할 자격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근대국가를 이룬다. 국가는 법을 만들어내고 법을 수호하기 위한 수호자로 경찰이나 군인이 나선다. 이것을 정상이라고 여긴다. 내 목숨 내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시위와 투쟁을 하는 것이다. 홉스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고 했다. 우리의 죽음이 비극이 아니라 정해진 수순으로 당연함을 받아들이게 된다. 내 환경을 못 벗어나기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생물학적으로 적응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령이 오면 적응할 필요도 없다. 보석처럼 집어넣는 것이다. 아가 2장 6절, 8장 6절, 팔에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도장처럼 박혀있다. 남자가 압박을 가해서 팍 안아주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이 멈추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새로운 피조물의 자리, 여자라는 이름으로 박혀있는 것이다. 아가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 세상 남자라는, 여자라는 것은 다 없어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랑이 펼쳐지는 것이다.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31:22). 그냥 포옹이다. 일체성이다. 사람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다 없어진다. 오직 남자와 여자만 등장한다. 새 창조의 개시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대목을 보면 여성성이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했다. “미칠 수 없는 것,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형언할 수 없는 것, 여기에서 성취되었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왕이라는 입장에서 사랑을 시작했기에 기존에 지상생활의 모든 환경은 강탈당한다. 왕을 영접하기 위한 새로운 환경에 여자가 같이 가담하는 것이다. 왕의 궁전은 여자가 들어옴으로 하나의 식물원(낙원)이 된다. 하나님과 인간과 벌어진 틈을 메우기 위한 사랑이다. 주님의 희생이다. “당신 희생덕분에 하늘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울려 퍼지는 이 최종성이 지상에서 펼쳐질 때는 혼란이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계12:1). 해, 달, 열 두별의 면류관, 이 여자는 왕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를 장착하게 된다. 전쟁이 벌어진다.
공식 1) 대자연+왕의 문화=아가
대자연에 왕의 문화를 준다는 말은 의미를 주는 것이다. 의미는 왕의 의미다. 왕이 왕답다는 것이다. 사랑함으로 왕의 면면을 보여줄 때, 이 확정된 의미가 영원히 천국에 고정된다는 것이다. 여자는 그냥 대자연에 속했을 뿐이다. 왕이 의미를 줌으로 말미암아 사랑함으로 완성이 된다. 사랑은 희생으로 주어지게 된다. 여자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여자로 만들어주는 환경자체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거주하는 환경에 걸맞도록 한 것이다.
아가8장 8절,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누이가 아직 여자구실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 기존의 공동체, 혈육적 공동체에 있어서 적용되는 자연스러운 역할을 말한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하는 것을 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균형적인 여자의 젖가슴(쌍태한 노루새끼, 포도송이, 야자수열매로 표현), 이것은 여자와 남자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 만나면 악마를 만났다고 보라고 했다. 우리는 악마의 밥이다. 악마는 대자연을 누리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의 등장을 가장 싫어한다. 선악체제 속에서 나오는 인과응보를 가지고 우리를 탈탈 털어버린다. 나는 너의 과거를 알고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네 건강, 사유재산, 네 목숨을 빼앗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작 치워버릴 좋은 사람이었다. 선악에 눌려서 짜부라진 착한 사람은. 이것 못 치우면 평생 비극적인 인생을 살 뿐이다.
다시 정리하면 광야에 살던 평범한 여인을 왕실의 깊은 곳 침실까지 끌어들여 일체성을 생산하는 주변의 환경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대자연도 같이 반응을 한다. 더 이상 지옥이 아니다. 슬픔과 눈물이 아닌 향기로 가득 찬 사랑으로 인해 재편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사람은 창세기 3장이기에 이 느낌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왕이 그 잃어버린 낙원의 기억을 회상시켜 주는 것이다. 죽음! 죽음에도 끄덕하지 않아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사랑을 위한 필수요건이다.
지옥에서 있는데 향기가 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1-3).
사실은 예수님이 먼저고 인간이 있는데, 시간의 흐름으로는 여자가 먼저 있고 아기 예수가 나셨다(렘31:22). 이것은 이 세상 자체가 완전히 하늘나라와 정반대로 파멸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시작과 끝을 보는 안목이다.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이 다 죽었다. 세상 끝에 등장하는 여자(새 이스라엘, 교회, 성도)를 미리 보여준다. 예수님이 초라한 것처럼 초라하다. 세상은 초라함으로 개무시 하지만 대자연을 함께 공유할 자격을 가진 존재다. 본질은 우리가 놓치고 있다. 십자가사건이다. 그러면서 당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말인가? 결국 존재가 아니고 본질로서 뭘 하고 있으며, 십자가사건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인간의 눈에 거슬리는 것이다. 악마는 우리 속에 이미 본질을 집어넣었다. 예수님을 밀쳐야 될 대상으로, 그래서 십자가사건을 벌어지게 한 것이다. 우리가 악마로부터 받은 본질은 하나 되자고 존재가 끼는 것조차도 귀찮다. 혼자 있고 싶다. 한 집에 둘이 살면 본질도 둘이고 존재도 둘이다. 하나님이 자기 본질에 우리 존재를 집어넣었다는 것이 기적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가5장 8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나는 혼자 있어도 살맛이 났었는데 이제는 그이가 없으면 병이 난다. 병이 난다는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고 타이밍이고 충동이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정당하다. 본질과 함께 있어야.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수동적인, 아낌없이 종속되는 어떤 분이 있어야 된다. 이 세상에서 찾을 때 희생에서 찾아야 된다. 살과 피가 아니면 생명이 없는, 십자가로 객관화시킨 그것에 상사병에 걸렸다면 그것은 새롭게 등장한 본질이고 전부가 되는 존재가 된다. Im missing you! 나는 너가 그리워! 그리운 사람이 없다면 비극적 결말이다. 영원히 함께 할 그리운 분이 있다면 나 같은 것은 죽어도 괜찮다.
아가1장 3절,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대자연에, 모든 세계에 향기가 넘치는 세계, 낙원이다. 어떤 남자가 나를 사랑해서 찾아올 때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창조 때 만들었던 그 환경, 잃어버린 낙원도 더불어서 가지고 온다. 지금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돈으로 객관화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악마의 돌려막기다. 평생 보이스피싱한테 당한다. 교회나 교회권력,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증거로 보는 하나의 프랜차이즈다.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계12:2) 마리아가 해산할 때 아팠다. 대자연도 메시아에 맞춰 변동되었다. 움직이고 있었다. 악마는 이 세상의 신이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악마의 일은 필연성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필연성을 뚫고 나온 것이 뭐냐 하면 우연성이다. 우연성은 사건이다. 태어남이다. 성도되게 하심이다. 사건은 사건답게 살아야 한다. 사건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 사건을 그리워하지 마라. 지금도 잡히지 않는 그 분 손에 놀아남을 그리워하자. 헤롯의 학살은 욕망의 바다에서 나온 것이다. 죽은 아이들은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이라 붙여준다. 라헬의 자식들이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2:18) “(렘31:15)
공식2) 보편성+특수성=보편성
앞의 보편성은 아담의 몸에 속한 보편성이다. 이 보편성으로 인해 특수성이 죽음을 당한다. 이 죽음에서 보편성이 나온다. 즉 특수성에서 확장된 보편성이다. 직업, 성별, 나이, 개성,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주님의 행하심만을 자랑한다. 공통적으로 십자가만 자랑한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교회라고 했다. 교회는 예수님의 본질로 인해 확장된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계12:13) 여자가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이 먼저 천국에 갔다. 주님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코스대로 우리도 착한사람인 악마에게 실컷 휘둘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과 하나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없는 나의 안일함은 적이 된다. 우린 너무 수월하게 살았다. 내게 일어난 모든 상황이 가장 적절하다. 주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모습은 모든 것이 예스yes가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향기롭다.
아가2장 15절, “우리를 위하여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포도원은 사랑을 나누었던 곳이다. 그 사랑의 공간을 엉망진창 만드는 자가 있었다. 여우다. 하나님의 적은 사랑할 경우에만 나타난다. 인간은 뉴턴의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멈추지 않으면 그대로 간다. 복음이 아니면 그냥 편하게 사는 것이다. 친구가 된다. 이 관성의 법칙대로 사회혁명이 없으면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이 대자연의 사랑 속에 불길한, 위험한 요소가 있다. 사랑은 행함과 대척관계에 있다. 사랑은 둘이 만나 늘 대화한다. 본질이 같아서. 아름답다. 향기롭다. 그러나 행함은 감사가 아니라 미움이 된다. 사랑은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난다.
아가3장 1절,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2절,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이미 일방적으로 파라다이스가 된 입장에서 밤의 역할은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헤어지는 기회가 된다. 여자가 도시의 밤거리를 헤매는 것이다.
아가 5장 2절,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사랑은 영원히 함께 있고 싶은 것이다. 사랑은 돈도 남의 시선도 환경도 아니다. 함께 있느냐, 헤어졌느냐, 이것으로 결정이 된다.
아가5장 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갑작스러움, 자기의 장벽을 갖추고 있음이 사전 통보 없이 들이닥칠 때, 갑작스럽게 그 사랑으로 노출되는 것이다. 나 지키는데 급급했다는 것이 사랑에 실패하게 하는 방해요소였다. 그러나 사랑은 실패를 경유해서 나온다. 한쪽이 깨어져야 한다. 몰약은 유동성이다. 고체가 액체로 떨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집념은 어떤 장애도 극복해낸다. 혼자서 있을 밤, 이 밤마저 주님의 사랑을 헤어지게 하지 못한다. 사랑은 밤을 이기고 죽음을 이긴 영역이 들어있어야 성사가 되는 것이다. 성도의 모습은 위태위태하지만, 초라하지만 감사하면서 놀듯이 살아간다. 악마는 가만두지 않는다. 하지만 충동은 부정할 수 없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상대가 있을 때 혼자서 사는 것을 벗어날 수 있다. 내가 예상 못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아가4장 11절에 나옵니다.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몸을 접촉하고 입술을 접촉하면서 침, 액체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 간절함. 밀도 있는 접촉. 우리 사랑 말고 어떤 다른 것도 거기에 끼어들지 않게 일체성을 갖고자 하는 것, 이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주님이 주신 사랑,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아가5장 5절,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액체는 어떻게든 내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 떨어지게 한다. 욕망, 이성 필요 없다. 사랑은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구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없는 데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 플러스알파(+α)다. 반듯한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상 못한 잉여의 것이 나온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를 계속 물고, 물어뜯고 한다. 재현된 사랑은 사랑을 도로 가져가지만 구현된 사랑은 있는 것도 갖다 바칠 뿐이다. 사랑을 깨어지게 하는 요소는 순수한 사랑에 부합되지 않는 자의식이다. 사랑은 자의식이 타의식으로 전환되어 나오는 여분의 것이다. “주님은 나의 어딜 봐서 아름다울까?”
아가4장 12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잠근 동산에서 낙원은 여자의 신체다. 도대체 이 사랑이 어디를 봐서 사랑스럽고, 어디를 봐서 향기롭고, 어디를 봐서 아름다운지, 그 아름다움이 나오는 출처, 원천, 근원을 살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걸 다 받는 게 사랑이다. 죽음보다 강하다. 죽음으로 다 날아간다. 몽땅 다 없앤다. 딜리트delete, 모든 걸 삭제한다. “어딜 봐서?”라는 것은 사라지고 그 현장이 아름다운 것이다. 성령은 자의식을 삭제한다. 성령은 십자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죽음은 전부를 요구한다. 자의식이 있는 과정에서는 만날 수 없다. 자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사랑은 생산된다. 둘 다 실패한 욕망의 사랑, 둘 다 뭉개진 자의식에서 예상 못한 사랑은 새로 시작된다. 잉여(여분의 것), 예상 못한 새로운 창조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자의식에서 해방되어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아가서는 시다. 그래서 새로운 공간, 새로운 지역으로 이어가면서 거기서 사랑의 과정을 이리저리 표현하고 있다. 대자연, 왕의 침실, 어머니의 집, 거친들, 도시.. 사랑의 최절정은 십자가다. “마음대로 뛰놀아라!”
아가4장 1절,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신체 자체가 해방구다. 내가 마음대로 살라고 허락한 그 공간에서 참으로 마음대로 사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창조자체에서 즐거워한다. 그것이 사랑 속에 구현되는 것이다. 그 해방감이 여자의 눈동자 속에 있다는 것이다. 비둘기 눈 같다.
아가1장 5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시커먼데 어떻게 아름다운가? 남자가 여자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먼저 찾아옴, 그걸로 끝이다. 종말은 먼저 와버린다. 먼저 들이닥친다. 근사한 조건은 철회한다. 부질없다. 다 소용없다. 미리 마중 나온 천국! 그걸로 끝이다. 사랑은 한 순간, 확정적이고 훅 들어온다. 사건이고, 우발적이고 성령의 오심이다.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여자는 늙어도 좋다. 여성성은 늙지 않으니까. 어머니다. 해산의 고통으로 자의식이 깨진 어머니다. 남자는 흙이 되고, 여자는 악마를 상대로 해서 이길 수 없다. 새롭게 등장한 여자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일은 신념이 아니라 객관성이다. 죽으심과 부활, 이 복음이 중심점, 구심점을 확보한 것이다. 인간의 모든 보편성은 공통된 보편성으로 특수성,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은 현실의 안정성을 원하는 것은 자기의 사유재산이 있기 때문이다. 혈육의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내 누이여!” 새로운 왕 중심체제의 가족이 되었다. 남녀는 동등할 수 없다. 젖가슴에 주목한다는 것은 차이다. 남자에게 없는 것이다. 차이는 다 가져가라는 것이다. 소멸되는 것이다. 동등이라는 것은 보완의 관계다. 보완 관계의 결말은 본인을 위함이고 자의식의 강화고 가짜 사랑이다. 상대방에서 다 소멸돼야 된다. 젖가슴에 끌리는 것, 그것이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너만 있으면 돼!”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다. 젖가슴은 아이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여자가 된 증거는 젖가슴에 있다. 여자가 아기를 배어 해산한다(계12:2). 새로운 환경에 돌입한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싸우는 창세기 3장 15절의 전쟁이 아가서라는 노래를 통해서 전개된다. 다윗언약을 통해서, 솔로몬을 통해서 전개되는 것이다. 솔로몬이 시간 남아서 연애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이렇게 적힌 것이다. 왕이 벌이는 놀이에서 그 시간과 장소는 왕이 제공한다. 그래서 이미 주님의 놀이마당이다.
그렇다고 해서 솔로몬 자기위주가 아니다. 솔로몬은 한껏 낮아졌다. 네가 비록 검지만 아름답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솔로몬은 모든 자기 것을 줄 용의가 되어 있다. 아름답다는 것은 솔로몬 자신의 평가가 아니고 너와 나 사이에 있던 충동, 그 충동의 결말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다 줄 용의가 되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셨다. 악취는 썩고 있다는 것이다. 향기는 썩든 말든 사랑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가지 않는 완성의 찬미로 가득 차 있다. 안정감, 여유만만 함을 표현한다. 아가는 계시다. 주께서 필히 꾸려나가시겠다는 이 내용을 그대로 노래한 것이다.
아가5장 7절,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도시에서 사랑을 할 때 이런 위험성이 왔다. 공간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나 어떤 인물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 중심으로 공간이 창조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공간이 엉망이 된다. 사랑을 빼앗고 무시하는 세력이 침투한 것이다. 필히 거쳐야 할 내용은 상처다. 빼앗김에서 온다.
아가5장 8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왜 상처를 받았는가? 엉뚱한 공간을 자기 공간이라고 점유했다. 남자와 여자가 만든 둘만의 사랑의 공간인데, 나 혼자 있어도 수립되는 공간으로 여긴 것이다. 본래의 자리를 엉뚱한 곳에 적립한 것이다. 우리의 자리는 어디인가? 상처는 사랑하는 자와 있을 때, 최종적일 때는 없다. 미완료로 있을 때 상처다. 엉뚱한 곳을 찾았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를 사랑의 공간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공간이다. 문제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에게는 내 구심점에 구멍이 나있다. 없는 데서 창조함을 받았기에 나는 매일같이 새 창조 받는다.
자의식은 판단이다. 내 스타일이 안 될 때는 배척대상이 되고 즉 너는 내 공간에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내 스타일일 때는 수용대상이 되고, 곧 너는 내 공간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공동공간은 내 스타일과 상관이 없이 수용당한 사람들의 만남이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키지 못한다는 마음의 상처가 있다. 내 것이 있을 경우에만 살 맛 난다. 한 번도 내가 없어져도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이 소용이 없는 이유는 사전에 의논하지 않고 나의 어머니가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자유한 자에게서 태어난 자만이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 원천을 만나야 한다. 창조주를 만나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 상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내세우는 아름다움은 오류다. 불행의 아름다움이다. 이 상처가 있는 이유는, 남자를 만들고 여자를 만들고 다시 하나로 만드시는 과정에서 생긴다. 우리가 다시 2로 가야 1이 된다. 주님도 하나지만 스스로 둘이 되셨다. 남자의 역할, 여자의 역할을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것이다. 주님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얻게 되면 우리는 상처를 주는 공간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이 난 것은 내가 상처받을만해서 상처받았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모든 인간에 대해서 성냥팔이 소녀다. 왜냐하면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행복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아가는 천국의 노래, 천사들의 노래다. 노래라고 하는 것은 마감된 상태를 말한다. 완료된 상태의 아름다움, 하나님이 천지 창조하실 때의 아름다움의 완성상태가 인간에게 씌워져있다. “아가의 완성으로 다가갈게. 너는 도시 같은 세상에서 상처 받아라” 이럴 때 나오는 소리, “내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 있나이까?” 나는 죽어도, 나는 상처받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상처받는 그것조차도 아름답다. 자유함이다.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상처는 주님의 공간을 내 공간으로 점유했다는 것이다. 내 판단은 의미 없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고백은 축복에서 나온 고백이다. “나의 원천자가 점유할 공간입니다.” 비교한다는 것은 둘 다 잘못된 것이다. 주께서 일방적인 선언, 의외의 조치에 의한 것이기에 주님께만 영광과 공로를 돌리기 때문이다.
아3장 6-8절,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황과 자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인이 옹위하였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수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혼인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광야에서 오면서 마음껏 향기를 품어내는 것이다. 향기는 썩어짐이 중지되고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다. 이유는 여자가 아니고 여성성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잉여, 여분의 것이 계속 작용되기 때문이다. 유황, 가마, 위용과 위엄이 있기에 나설만한 자가 시커먼 여자 하나로 인해 집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장15절,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이정도의 남편 같으면 상처받아도 괜찮다. 칼이 등장한다는 것은 왕은 법대로 처벌하는 통치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호하고 냉혹하다. 낭만적인 것을 깨트린다. 그럼에도 세상이 내 남자를 보는 것과 내가 내 남자를 보는 것하고는 다르다. “네가 왕이든 간에 그냥 넌 내 남편일 뿐이다.”
아가4장 4절,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술람미 여인의 당당함이다. 여자의 스타일은 당당함이다. 남편의 용감함 이상으로 여자도 꿇리지 않는 당당함이다. 조건으로서의 사랑은 변하면 다 깨진다. 그러나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나오는 여성성은 영원하다. 자의식을 빼앗기면서도 즐겁고 고맙다. “그대 있으매 나는 없어도 좋아요!” 그 고백이 우리에게 전달됐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솔로몬은 여자가 아름답다고 자꾸 이야기한다. 그 아름다움이란 여호와 관련되어 있고 하늘나라에서 아름답다고 칭찬한 것이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움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31장 30절) 아름다움은 여자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해당이 된다. 시간과 세월을 어떻게 이기는가?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인간에게 담길 때 아름다움이다. 자연에 부합되는 인간을 하나님이 아름답다 한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자연과 부합되지 못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이 자연도 후패해가고 있다.
노래 중의 노래 아가는 모든 것이 완료가 된 것이다. 사52장 7절,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 말씀이 신약에서는 십자가 복음으로 바뀐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인간은 죄인이다. 썩어간다. 아름답지 않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왕에게 덮어씌우면 왕의 의미는 아름다움이다. 이처럼 특정인, 죄인에게 아름다움을 뒤집어씌우면 복음을 운반하는 운반체로서 아름답게 보인다.
아가8장 8절,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여자가 남자의 눈을 뜨게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생산하고, 죄인에게 등록하면 새로운 아름다움이 나온다. 생산(주체)-등록(객체)=작용(운반체), 복음이 생산되고 복음으로 보내심을 받고 복음의 운반체가 된다. 완료된 여분이 아름다움이다. 단 보내심을 받은 자에 한해서.
공식3) 생산-등록-작용
자연에서 생산이 되면 어떤 특정인, 죄인에게 등록이 되고 하나님과 더불어 작용한다.
충동으로서의 사랑은 원인을 내 쪽에서 찾을 수 없는 옛날 기억, 상실된 기억, 범죄 함으로 잃어버린 낙원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서 나오는 힘이 있다. 첫 번째 아담(보편성)은 죄도 없으신 분이 죄인으로 성육신하신 예수님(특수성)을 배척한다. 여기서 사랑을 배척한 저쪽을 이기는 새로운 힘(보편성)이 나온다. 이미 죽음을 이긴 부활의 힘이다. 사랑은 어떤 의무감도 가질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고 우리는 종이 되는 즐거움을 누린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잘잘못을 따질 관계가 아니다. 주님의 지시에 의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게으른 게 얼마나 힘든지,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게 고생은 아니지만 고난이다. 생산된 것이 일방적으로 등록이 되면 거기서 작용이 나온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눅7:8) 사랑의 힘은 잉여분이다. 여분의 것을 자꾸 만들어 낸다.
아가6장 10절,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이 여자를 사랑한 것은 의무도 아니고 하나님이 벌이신 충동에 말려들었다. 주도권을 여자에게 둔다.
여담이지만 잃어버린 낙원을 회상하고 찾아가는 천국의 노래인 아가서를 잃어버릴 뻔 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아가서8장6절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남녀의 사랑이야기라고 치부해버렸다가 여호와가 나왔다고 해서 성경에 넣었다고 한다. 우리는 내가 배고프기에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배가고프기에 내가 밥을 먹는다. 내가 잠이 와서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잠이 오기에 내가 잠을 자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주체가 될 수 없다. 객체로 돌려놓아야 한다. 나는 전부이고 사랑은 일부로서 실생활 중의 하나라 여긴다. 사랑이 없어도 나는 살 수 있고 심지어 돈이 없어도 나는 살 수 있다. 나라는 의식만 있으면. 그러나 사랑이 전부고 너는 일부다. 너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사랑을 집어넣는다. 부모를 떠나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5:31).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 엄마에게서 딸로 태어났다가 결혼해서는 아내로 태어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적 차이가 있는 사람을 왜 만들었느냐? “네 눈에는 둘로 보이느냐? 하나야!” 이 공식을 성립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둘로 태어나야 했다. 예수님은 혼자서 죄인으로 성육신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보혜사이신 예수님은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보내주셨다. 첫 번째 아담의 표상으로 오신 두 번째 아담이시다(롬5:14)(고전15:45).
혈육은 자체순결을 원한다. 오빠들은 누이를 여전히 자기 집안에 붙잡아두려고 한다. 사랑은 독립이다. 독립은 순결이다. 세상에 예속됨으로부터 사랑은 독립하게 만든다. 사랑이 없으면 죽음이 두려워 독립 못하는 것이다. 육의 연대성, 국가에 충성해야 내 가정이 잘 된다는 이것만이 현실로 간주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친숙한 곳이 있다면 내 어머니의 집이다.
집 떠나 개고생 할 때 내 어머니집이 그립고, 집 떠나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갈 때 내 어머니의 집이 그립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혈육에서 못 떠난다. 고무줄이 팽팽하면 할수록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가속력을 막을 수 없다. 만약 그걸 막기 위해서 손을 뻗는다면 반드시 피가 나와야 한다.
아가8장 12절,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는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처럼 포도원이 따로 있었다. 나는 여자지만 내 포도원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혈육의 지시를 받아서 포도원에서 일하는 포도원지기가 아니라 더 높은 자리에서 지시를 받는다. 사랑이다. 혈육을 디딤돌 삼아 올라가듯이, 뜀틀을 딛고 더 멀리 뛰듯이, 육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다. 부모를 떠나 둘이 하나가 되는 이것이 비밀이다. 비밀은 잉여다. 여분의 것이다. 두 사람이 부부라는 만남을 통해서 새롭게 변해가는 것이다. 육에서 늘 새로운 세계가 도출된다.
순결이라고 할 때는 혈통이 순수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른 혈통이 섞이지 않아야 된다. 아브라함을 생각하게 된다. 할례를 행한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언약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17장 10절,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서 지킬 내 언약이니라” 순수는 전체를 말한다. 그렇다면 전체1이 있을 때 전체2가 나온다면 전체2를 포함한 전체여야 순수가 된다. 또 전체2가 있는데 전체3이 나오면 그 전체3을 포함해야 순수가 된다. 우리가 아는 전체는 고정되어 있고 한계성에 있다. 하지만 전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완료 속에서 날마다 새롭게 창출된다. 잉여를 만들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간다. 전체에서 배제된 이방 여인 4명이 족보에 끼어있다는 것이다(마1장). 육에서부터 천국 쪽으로 조금씩 노선을 틀어버리신다. 땅의 여인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이것을 놓치는 것이 육이다.
주님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위험과 두려운 일을 하게 함으로 다가오는 위기는 곧 기회가 된다. 우리 자신이 항상 해체되어야 하고 우리 자신이 날마다 새로워야 한다. 주시는 분이 있는데, 주신 분의 은혜를 자신에게 돌리지 말자. 누구로부터 받았느냐? 우리가 누굴 욕할 입장에 있지 않다. 남자로부터 시작했지만 주인공은 여자였다. 남자가 항상 여자에게 다가갔지만 남자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여자였다.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되는 예수님의 말씀의 원리가 곧 아가서의 원리다. 사랑은 붙잡히지 않고 사슴처럼 뛰노는 것이기에 완결이 아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늘 실패자가 되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하자. 나의 가치, 나의 의미, 나의 자존심을 위한 대자연은 없다. 다 허물어져야 하나다. 나에게 손을 떼도 괜찮은 것, 사랑이다.
좋은 영화였다. 영화 한 편 잘 봤다. 스크린이 꺼지고 영화관 밖을 나오면 팝콘 냄새가 진동한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현실이었다. 배고픔의 현실.. 영화는 영화일 뿐.. 영화가 실생활에 적용되지 않는다. 아가라는 한편의 영화를 합숙해가며 공부했는데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환상,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환상이라고 하고, 성경만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가능할까?
욥은 다 빼앗아갔어도 주신자도 주님이시고 가져가신 자도 주님이시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자기 몸을 기왓장으로 벅벅 긁을 때, 그것만이 전부였고 현실이었다. 그때에 주님은 말씀하신다. 좁디좁은 너의 의미로 제한된 현실은 환상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전체를 생각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나에게 다가올 때 내가 생각한 현실은 와해가 되고 주님의 현실만이 전부가 된다. 그래서 묻는다.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에 비를 내린 이유를 네가 아느냐?”(욥38:26-27) “염소가 새끼를 낳는 때를, 암사슴이 새끼 낳는 기한을 네가 아느냐”(욥39:1)
아가4장 16절,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동산에 바람이 분다. 금지가 과거 일로 여겨지는, 규제와 명령이 전혀 없는, 합일(合一), 일체성(一體性)을 갖게 된 것이다.
아가서의 내용이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성취가 된다. 1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절,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여기에 강 있고 실과가 맺힌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에 강 있고 각종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맺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9절)
아가 2장 1절,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여기 이 세상에서, 그 요한계시록에 이르기 위해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등장한 여자가 모든 마르지 않는 샘의 역할, 예수님의 의미가 담기는 것이다. 나는 샘이다. 나는 그 샘에서 피어나는 하나의 백합화다.
아가 2장 3절,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이거는 선악과나무를 대체한 나무다. 모든 따먹을 수 있는 과실의 대표인, 그게 남자. 먹으라! 먹지 마라가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이라면, 지금에 와서는 먹으라!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생명나무는 따먹으라고 있는 것이다. 따 먹으라! 여자가 남자를 따먹는 것이다. 먹으라! 그게 합일이다. 남자는 여자한테 따먹혀야 되고 여자는 따먹고.
감성과 형식의 충동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 사랑을 벌벌 떨게 하는 현실, 내 가정만을 지키기 위한 현실, 나만을 위한 현실로, 우린 가슴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묻어둔 그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라네요. 발상이 전환이 안 되면 말고요. 선악체계에 꽁꽁 묶여 이 눈치, 저 눈치나 살피며 행여나 손해 볼까 가슴 조마조마하면서 살얼음판을 기었던 그 시절은 이제 지났다. 약속대로 여자가 남자를 안았다. 거무티티한 여자도 아름답다고, 미쳐서 왕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사랑에 빠진 남자의 그 눈을 여자가 확 뜨게 만들었다. 푸른 대자연을 만끽하는 아름다움과 다함없이 풍성한 실과를 따먹으라고 하는 금지이후의 세계인 아가서에서 우린 살고 있다. 비록 검어도 아름답다고 하신 분이 계신다. 너무 검어서 게달의 장막 같아도 휘황찬란한 솔로몬의 휘장 같다고 하신 분이 계신다.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1:5)
예수님 앞에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모세는 율법으로 돌로 치라고 했는데 돌로 칠까요? 선생은 어떻게 하시겠소?”라고 하는, 선악의 법에 얽매인 그 자리가 아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다 떠나고 오직 예수님과 간음한 여자만이 덩그러니 남았을 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신 그 자리. 예수님마저 정죄하지 아니하는 죄인으로 산다는 것, 죄가 있어서 죄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있어서 죄인이 되어야만 하는 사랑의 원리로 사는 것이다.
우리의 주특기는 나만의 현실, 나만의 환상을 만드는 것이 주특기다. 그럴 때 우리에게 당부한다. “제발, 사랑을 하려고도 하지 말라. 사랑을 주려고도 하지 말라. 사랑은 받는 법만 하면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 진정 마음에 남는다.
이제 주눅 들지 않는다. 아가서 이거였어! 비켜갈 수 없는 고정된 사고방식이 아가서를 오해했다. 남녀의 사랑 노래, 그래 맞다. 솔로몬 왕이나 술람미 여인은 맡겨진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만 있는,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회상은 갑작스런 사랑의 타이밍으로 십자가와 부활로 새롭게 창조된 낙원에서의 하루를 보내게 한다.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된 아가의 주인공들의 사랑으로, 영원한 아들의 나라에서의 사랑을 사모하게 한다. 그리워하게 한다. 만끽하게 한다.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에 함몰되어 생긴 샘에서 맑디맑은 샘물이 넘쳐흐른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이스라엘이 되었다. 이방민족과 다른, 힘이 아닌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돌보심을 받고 지시를 받는 백성으로 살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보다 힘을 원했다. 독자적인 길을 가고자 이방민족과 행음하였다. 젖가슴에 탐닉하는 욕망의 사랑만 매몰차게 부는 욕망의 바다는 결국 얼었다. 아기 예수를 잉태한 그 충동의 사랑을 빨아 넘길 수 없어서이다. 간음한 자리에 있거나 간음한 자를 정죄하는 자리에 있거나 똑같은 애비를 소유하고 있는 마귀의 자식들에겐 판단의 자리 외에는 없는데, 간음한 자리에서 발견되었다면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용서받은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 용서해주신 분의 자리다. 주님 사랑받았다고 내 것 인양 챙기고 함께 하면 좋을 친구 같은 동등 됨을 가지고 대했던 착각은 스스로를 싸구려 취급할 수밖에 없다.
여자는 죽을 때까지 여자다. 처진 주름에 팩 붙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는 최면을 걸고 거울 앞에 서서 화장을 고친다. 평생 상관도 없는 송혜교도, 이영애도 늙음을 비켜가지 못한다고 깔 때, 나 속으로 기뻤다. 아무리 1:1.168의 황금비율을 가진 아프로디테라도 내 스타일이 아니라 했을 때, 참 다행이었다. 이게 나였다. 변조된 목소리로 주님! 주님! 잘도 찾는다. 그 목소리는 흉측한 살인자의 목소리다. 설마? 애교떨면 사랑받을 수 있는 목소리였을 것 같아?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차이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마치 젖가슴 있고 없고의 차이인 것처럼 훅하고 떠오른다. 시각적인 이미지에 젖어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생각되어졌다. 이스라엘은 야자수 나무에 달려있는 야자수열매처럼 있음을 내세워 흔들어대며 이방나라의 힘을 소유하고자 했고 이방나라는 없음에 대한 욕망에 불타올라 잠시 자기의 마음을 주는 척 했다. 어차피 서로가 주고받는 사랑은 깨지고 말 테니까. 단물 빠지면 씹다 뱉어버리는 껌 같다.
이처럼 세상에서의 사랑은 신분이 맞지 않는 사랑에 힘이 발생된다. 땅에서의 남녀의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다. 페이크러브다. ‘..널 위해서라면 난 슬퍼도 기쁜 척 할 수가 있었다. 널 위해서라면 난 아파도 강한 척 할 수가 있었다. 사랑이 사랑만으로 완벽하길.. 내 모든 약점들은 다 숨겨지길.. 이뤄지지 않는 꿈속에서 피울 수 없는 꽃을 키웠다. 널 위해 예쁜 거짓을 빚어내고 날 지워 너의 인형이 되려 했다. Fake Love..’ 지독한 자기 사랑이다. 남녀의 차이는 젖가슴에 있다 하지 않았던가? 욕망의 대상으로만 본다.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렘31:21) 여호와 하나님은 처녀 이스라엘의 순결을 지키기를 원했지만 처녀였던 이스라엘은 처녀성을 상실했고, 그럼에도 순결에서 멀어진 이스라엘을 통해서 새로운 이스라엘공동체를 만드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31:22). 결국 사랑은 멸망이었고 상처였고 안아주는 것이었다.
욕망이 충동이 되고, 충동이 욕망이 되는 지옥의 바다에서 사랑만 출렁이고, 출렁대고, 출렁거리고, 출렁댄다.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