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겨울수련회 아가서 제 8강(순결과 사랑-이 근호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아가가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거든요. 제목도 완전한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완전한 사랑이 와서 이야기를 할 때에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실생활 중에 전부가 아니고 실생활의 하나라고 보기 때문에 그래요. 실생활 중에 하나.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이 없어도 나는 살 수가 있는데.
근본적으로 이겁니다. 사랑이 없어도 나는 살 수 있다. 사랑이 없어도 살 수 있고 심지어 돈이 없어도 나는 살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나라는 의식만 있으면. 나라는 의식만 있으면. 돈 떨어지고 사랑 떨어지면 그냥 자살하면 되잖아요. 내가 자살한다는 것은 끝까지 나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죽을 때까지 내가 있을 거니까, 나라는 것만 있어도 나는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나가 이만큼 크고 사랑은 그 중에 일부가 된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아가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걸 뒤집는 거예요. 사랑이 전부고 그 중에 일부가 너라는 거예요. 사랑이 전부고. 사랑의 노예, 사랑의 종이 되는 관계가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관계라는 겁니다. 나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다가 사랑을 집어넣는 거예요. 우리는 나를 밀어내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은 너가 와서 나를 밀어낼 때만 우리는 밀렸다고 생각하듯이, 사랑이 지배할 때는 너무나 이거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관념,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의 그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사랑을 외부에서 많이 받기 때문에, 사랑이 너무 흔하기 때문에 사랑이 귀한 줄 몰라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사랑을 잃는 순간 자기 목숨도 이렇게 잃어버리죠.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프레디머큐리 라는 사람이 있죠. 그 사람이 불렀던 노래 중에 내 평생의 여인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이건 내 마음대로 번역한 건데,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에요. 내 사랑, 내 생의 사랑 당신은 나를 아프게 했어요. 당신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이제는 나를 떠나고 있어요. 내 인생의 사랑, 내 평생의 사랑 당신은 보이지 않나요? 다시 가져와요. 다시 가져와요. 저에게서 빼앗아가지 마세요. 이게 제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은 모르잖아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가서에 보면 이거 비슷한 구절이 나와요. 'Bring it back, bring it back 브링 잇 백, 브링 잇 백' 이 구절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아가서 6장 13절에 나옵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네 번이나 이야기하죠. ‘Bring it back, bring it back 브링 잇 백, 브링 잇 백’ 돌리 도! 돌리 도! 하고 똑같은 이야기에요.
‘내 인생의 사랑이여 나를 떠나지 말아요. 당신은 내 사랑을 가져갔고 이제 저를 떠나가요. 다시 가져와요. Bring it back. 제게서 빼앗지 마세요. 그게 제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잖아요. 당신은 기억하게 될 겁니다. 끝나면 말이죠. 모든 게 지나가면.’ 모든 게 지나가면 가수한 것도 소용이 없고, 인기 있었던 것도 소용이 없고, 동성애 한 것도 소용이 없고. “오직 내게 필요한 것은 이제 알았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필요한 사랑의 전부고 나는 그 사랑에서 평생 사랑받고 있습니다.”
퀸이 그렇게 고백하는 것은 바로 에베소서에 나오는 부부이야기 관한 것과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부모를 떠나라는 거예요. 자, 그 부모를 떠나가는 장면이 아가에도 나옵니다. 혈육적인 공동체죠. 혈육적인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자기 집안을 떠나라. 자기 집안을. 그 집안에서 뭘 요구하기 때문에 떠나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 집안에서는 사랑을 최고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집안에서는 뭘 요구하느냐 하면은, 특히 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순결이에요. 순결. 그 대목이 아가 8장 8절에 나옵니다. 8절을 보기 전에 7절 먼저 보게 되면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재산, 가정,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의 오빠들은 뭐냐, 이 오빠들이 어릴 때 누이를 작은 누이라고 불렀던 모양이에요. 8절,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9절, “그가 성벽일진대” 성벽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일체 밤 9시 이후에 자기 동생을 바깥에 안 보여주는 철벽을 한 거예요. 철벽을. 우리 가문의 명예를 걸고 우리 가문의 여인들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킨다는 그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우리는 은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오빠들이 문이 뚫리게 된다면 그 문에 백향목 판자를 덧댈 것이라고 해요.
이거 오빠들이 자기 누이동생을 위하는 겁니까? 자기 집안을 위하는 것입니까? 자기 집안의 명예를 위하는 거예요. 사우디아라비아 18세 먹은 소녀가 왜 캐나다로 망명을 했겠습니까? 그 집안의 전통은 뭐냐 하면 빨리 결혼하는 거예요. 여자는 빨리 결혼해서 애를 낳는 거예요. 여자는 애 낳는 기계에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여자의 선택권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하고 사랑을 못하거든요. 그러나 집안이 사랑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이슬람권에서는 집안이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에베소서 5장 31절에 보면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부모를 떠나라고 했죠. 혈육적인 노선에서 벗어나야 돼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나야 돼요. 여자는 두 번 태어나야 해요. 하나는 육에서 엄마를 통해서 태어나야 하고 하나는 결혼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하나는 딸이고 하나는 아내가 되는 겁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절, “이 비밀이 크도다” 이게 무슨 비밀입니까? 결혼식이 날마다 있는데 무슨 비밀이겠어요.
그러나 이게 외면적으로 보기에는 일상의 일로 보이지만, 근데 왜 일상의 일로 보이냐면 그게 사랑을 위해서 결혼한 일로 안 보이고 그 집안을 위해서 결혼한 걸로 보이는 거예요. 그 집안을 위해서. 만약에 우리 아버지가 대선에 출마한다. 그런데 나는 전에 어떤 집안하고 결혼했다가 이혼을 당했다. 근데 그 집안에서 계속해서 제삿날이라고 오라고 한다. 만약 그 재벌집안에서 건드리면 우리 아버지 대선에 제약이 된다. 그러면 딸의 입장에서는 이미 이혼해서 남남이라도 그 집안의 제사에 가서 얼굴을 보여야 할까요? 아니면 새로 생긴 남자친구 집에 가야 될까요? 박보검이한테 가야 될까요? 어떻게 할까요? 안가잖아요. 그걸 보면서 마치 현대그룹 제사지내는 것하고 똑같이 느껴져요. 현대그룹이 제사지낸다고 자기 집안 다 모아놨어요.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삼성그룹은 이혼한 사람이 수두룩한데 현대그룹은 이혼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이건 뭐 천국시험에서 나오지도 않는 이야기에요.
그만큼 제사라는 게 강렬해요. “교회가도 좋고 예수 믿든 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네가 우리 집안며느리로서 네 할 도리는 다해야지.” 이거거든요. 이거 부모 떠난 겁니까? 아니면 박혀있는 거예요. 단순히 부모를 떠나 독립한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 아니에요. 부모를 떠나는 이러한 조치는 이미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성도에게 주께서 지시한 거예요. 부모를 떠나는 것. 부모를 떠나라고 해가지고 부모집이 있는데 저 멀리로 이사해서 떠나가는 그런 지리적인 떠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 지시를 받다가 주님의 지시를 받는다는 그 말입니다.
이걸 아가서로 하면 순결의 문제가 아니고 사랑의 문제에요. 근데 집안에서는 순결 이퀄(=) 뭐로 보느냐, 이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야 대외적으로 여자가 값을 높이 받으면서 팔려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높은 값을 받고서 팔려나갈 수 있어요. 다시 근본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제가 물어볼게요. 성경에서 아가를 하지만 근본적인 것을 잊어버리면 찝찝해요. 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 그냥 사람을 만들든지, 사람 둘을 만들면 되는데, 왜 남자와 여자, 성적 차이가 있는 사람을 왜 의도적으로 창조했는가?
이 점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왜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느냐 이거에요. 그 이유는 간단해요. 네 눈에는 둘로 보이느냐? 그건 둘이 아니고 하나야! 라는 그 공식을 성립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럼 왜 그 공식을 성립해야 하느냐 하면은 그 돕는 배필과 그 도움을 받아야 될 사람이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반드시 역할이 둘로 나누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은 아담은 오실 그 분의 임시적 모델이기 때문에 그래요. 로마서 5장 14절에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짜 아담은 뒤에 오는 겁니다. 두 번째 아담으로.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두 번째 오신 예수님과 결부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기능 자체가 혼자 하신 일이 아니고 두 번 하는 일이 그 안에서 종합되어 있어요. 한쪽은 도와줘야 하고 한쪽은 돕는 자이어야 하고 그 역할을 둘 다 내면적으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돕는 자가 제대로 돕지 아니하면 인간은 그리스도의 천국에 올 수 없는 거예요. 따라서 돕는 자의 역할을 주님이 충실히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보혜사라고 하고, 성령을 가지고 다른 보혜사 또는 후에 오시는 보혜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 번째 오는 보혜사는 누구겠습니까? 뭐 이만희죠. 신천지에서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뭔가 모자라다는 거예요. 모자라서 자기가 또 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만큼 세 번째 보혜사로 이만희를 믿는다는 것은 첫 번째 두 번째를 안 믿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주장했을까? 그 사람도 할 말이 있어요. 왜냐하면 기존교회 목사가 다 보혜사 역할을 하고 있는데, 나는 노골적으로 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쪽은 입 안 다물고 보혜사 역할을 다 했거든요. 주의 종인 나를 믿겠는가? 갑자기 목소리 변조해서 목사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그러니까 이만희 이전에 이미 그걸 다 해온 거예요. 약간은 좀 튀게 했죠. 튀어야 그쪽 교인을 빼내니까.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잖아요. 제발 성령 안에서 당당 하라고요. 목사 누구의 말도 믿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듣기는 듣고 참고는 하되 주님과 교류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너를 가르치기 때문에 아무도 너를 가르칠 필요도 없어요(요일2:27). 참고로 하시고. 골프 치는데 저한테 와서 골프 어떻게 치느냐고 해요. 저는 골프 친 적이 없거든요. 그걸 왜 배워요? 마찬가지잖아요. 여러분 일상생활에서 잡채를 하는데 간을 맞느냐고 저한테 물을 필요가 없듯이, 모든 것, 잡채를 하던 골프를 치든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으니까 저한테 물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저 나름대로의 땅콩 볶고 맛있는 만두사서 먹고 하는 내 일을 나름대로 하면서 영광 돌릴 일이 또 있어요. 아침에 운동하고 그런 게 있단 말이죠.
그럼 여러분 나름대로 영광 돌리면 되지, 십자가 지지도 않는 인간을 왜 믿습니까? 그만큼 믿음이 없는 거예요. 믿음이 없으니까 대타로 집어넣는 겁니다. 주의 종에게 잘했으니까 천당 보내달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거는요, 사랑이 아닙니다. 그거는 자체순결. 제목 괜찮네요. 자체순결구조로 나가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성화죠. 자체거룩, 자체성화구조로 자기가 체제를 잡는 거예요. “나 건드리지 마라 나 착하다.” 그런 식으로 버티는 거예요. 그게 뭐 교주지 딴 게 교주겠어요. 교인수 많다고 교주겠어요. 본인이 교인이고 본인이 교주인데.
오빠들은 뭐냐 하면 자기 누이동생을 여전히 자기 집안의 굴레 속에 붙잡아두려고 해요. 신약에 나오는 ‘부모를 떠나’라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혈육적 공동체내에서. 그런데 아가서 8장 10절에서 12절을 보게 되면 솔로몬의 포도원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솔로몬에게 포도원을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12절,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11절에 보면 여기 일꾼으로 되어 있는데요.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라고 했는데, 지키는 자가 오빠냐 아니냐는 너무 심한 이야기고, 그냥 지키는 자에게 포도원을 관리해서 바치게 했다.
12절,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라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미 자기도 결혼할 솔로몬과의 격이 맞도록 독자적으로 내 포도원이 있다는 말이에요. 독립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순결이 아니고 독립이에요. 순결이 아니고 독립을 한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독립이 순결이에요. 독립하지 않으면 세상의 육에 예속된 겁니다. 이 말은 더 나아가서 사랑은 우리를 뭐하게 한다? 사랑은 독립하게 만드는 거예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에 너끈히 독립이 돼요.
그러면 사랑이 없는 사람은 어디서 독립을 못한다? 죽음이 무서워서 독립 못하죠. 그러면 죽고 사는 그 파워는 어디서 나왔는가? 어릴 때부터 양육 받은 그 집안에서 나오겠죠. 그 집안에서 독립을 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그 집안과 현재 내 위치와 연속성이 여기서 파괴되고 깨지는 것을 말합니다. 끊어진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부모가 자식에게 할 때에, 또는 자식이 부모한테 할 때에 반드시 조건이 붙습니다. 그냥 부모에게 효도하라 또는 자식에게 잘하라고 하면은 그거는 공자, 맹자이야기가 돼요. 반드시 그 공자, 맹자이야기를 끊어야 돼요. 끊기 위해서는 공자, 맹자가 부모한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한 그런 사고방식의 기초가 뭐냐 하면은 육적인 연대성입니다.
육의 연대성. 연대성 아시죠? 연결되어 있는 것. 가정의 연대성이고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에 충성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에 충성을 해야, 국가가 잘 돼야 내 가정도 잘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자, 맹자이야기 이거 맞아요? 삼강오륜이 맞습니까? 지금 맞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만, 이게 맞고 안 맞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딱 이것만을 현실로 간주합니다.
퀸이라는 밴드, 이슬람이죠. 파키스탄사람이니까. 이들이 가정을 떠나서 부모의 교육을 어기면서 돌아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이거는 하나님의 성령도 없이, 주님과 연관되지 않고, 다만 가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새로운 밴드를 사랑해서 거기에 의지해가지고 “나는 아버지하고 빠이빠이입니다.”하고 헤매는 거예요. 결국 헤매다가 다시 어디로 돌아옵니까? 다시 육으로 돌아오잖아요. 다시 육의 연대성으로 돌아오잖아요. 탈출이 불가합니다. 왜? 고무줄이 달려가지고. 실컷 갔는데 뒤에 고무줄이 달려가지고 어떤 위기순간에는 “그래도 믿을 것은 우리 가족뿐이다.”하고 탱하고 다시 원위치로 와요. 다시 원위치로 온다고요. “역시 제사 드려 줄 애는 역시 내 아들밖에 없다.”
평소에 아들이 개차반으로 살아가지고 호적파고 딸이 최고지 아들은 소용이 없다고 그렇게 길길이 하다가, 아파 누워 있을 때도 다 딸이 하고 아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며느리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남은 재산이 하이라이트 아닙니까? 자식들 모아놓고. 딸하고 사위들하고 아들하고 며느리하고 쭉 와가지고 있는데, 딸들이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공들였습니까? 근데 제일 큰 몫은 그래도 제사 드려 줄 큰아들이 가져가야 한다고 할 때 딸들은 환장하는 거예요. 대번에 나오죠. “오빠 법대로 합시다. N분의 1로!”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로서 금할 수 없는 게 제사가 중요하니까. 제사 속에서는 자기는 영원하거든요. 제사 속에서.
외로움을 누가 달래줍니까? 외로움을. 친숙한 자가 달래줘요.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친숙합니까? 어릴 때부터 내가 태어난 내 어머니의 집이 가장 친숙해요. 내 어머니, 내 아버지의 집이 가장 친숙하다고요. 그 연대성을 어떻게 깰 수가 없어요. 교회 백년 다녀보세요. 백년까지는 못 다니지만. 한 오십년 다니고 아무리 직분을 해도 결국은 탱하고 고무줄 땡기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내 집구석이 최고에요. 내 집구석이 최고입니다.
제가 만약에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들은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주님의 백성으로서 사시기 바랍니다.”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를 믿지 마시고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한다면, 교회를 믿지 말고 주님 믿으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교회를 믿지 말고 주님을 믿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교인들은 절대로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교회 버리고 집구석 챙깁니다. 교회 버리고 집구석 챙겨요. 절대로 주님을 안 믿습니다. 자기 집 믿어요. ‘전에는 두 집 살림하다가 이제는 내 집만 챙기면 되겠네. 아이, 참 좋은 교회다. 헌금도 안 해도 된다고 하니까.’ 이 모든 것은 집구석 닮아가는 거예요.
어떻게 혈육에서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네가 아무리 내 옆을 떠나도 네 뿌리는 우리집안이다. 우리 집안이 네 뿌리다.” 그렇다면 이 복음, 이 모든 말씀, 다 거짓이고 다 소용이 없는 것인가? 부모가 아프면 자식이 미국에 있더라도 와야죠. 부모니까. 자식이 돼가지고 부모를 돌보지 않으면 이거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죠. 나중에 유산은 돈 한 푼도 없을 것이 당연한 거고. 특히 아들이 되었으면.
포도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이게 내 포도원이라는 자체는 이미 나는 여자지만 내 포도원은 따로 있다. 마치 누구처럼? 솔로몬 왕처럼 따로 있는 거예요. 독립한 겁니다. 순결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가치에 의해서 나는 지시를 받고 그 안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랑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뭐를 디딤돌로 딛고 거기서 솟구쳐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혈육이라는 것에서 오는 그 압박감과 그 예속감을 뜀틀처럼 그것을 딛고 뛰어야 되는 거예요. 뛰면 9.2나옵니다. 두 바퀴 돕니다. 뜀틀을 잡고 뛰면. 그냥 뛰는 법은 없어요. 반드시 디뎌야 돼요.
그리고 육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이미 영적사람입니다. 끝 시간이 다 돼서 갑자기 복음이 막 나오죠. 어떻게 내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으려면 육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게 영이라고 하는 것은 영의 세계를 따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육의 세계를 바탕으로 해서 플러스알파(+α), 여분의 것으로 영의 세계가 소개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의 세계는 끌어당기는 것이 있어요. 그러나 영이 세계는 딛고 벗어나는 게 있습니다. 새로운 창조죠. 새로운 창조. 육의 세계에서의 뿌리가 끊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육의 세계에서의 뿌리가 끊어져야 돼요. 다시 태어나야 돼요.
다시 태어나는 것을 아까 에베소서 5장을 봤죠. 부모를 떠나서 혼자 살아요? 아니죠. 부모를 떠나면 누굴 만납니까? 부모를 떠나서 신랑과 신부가 서로 만나죠. 이게 비밀이에요. 비밀. 성경은 이상하죠. 얼마 전에 예식장 참석해서 부조금내고 했는데 그게 비밀이 아니던데요. 사람들이 예식장 참석해서 “우와! 비밀!”하면서 이렇게 놀라는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봤어요. ‘빨리 식 끝내지. 지루해죽겠다. 목사 왜 이리 주례를 길게 하노. 내가 할 때는 주례 없이 해야지’ 뭐 이런 식으로. 그걸 상투적인 일상으로 보지 그게 비밀이 아니에요.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잉여입니다. 여분의 것이에요. 이 땅에서 제조하고 만들어낼 수도 없고 우리가 생각도 못한 그 비밀이, 바로 두 부부가 만남을 통해서 그게 새롭게, 새롭게 계속해서 번져 나오는 겁니다. 아름답게, 전보다 더욱 더 아름답게,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아름답게. 팝송에 날이 갈수록 더욱더 아름답다는 노래가사가 있습니다. 아이 러브 유 모얼 앤 모얼 에브리 데이I love you more and more every day(날이 갈수록 사랑해요). 그 가사내용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근데 어쩐 일인지 우리의 사랑은 갈수록 더 그리워지고 깊어지니.. 가사가 이래 되어 있어요. 그 노래는 죽었던 이종환이 라디오방송 나레이션 하면서 많이 나왔어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생각할 것은, 디뎌야 되니까 이걸 몰라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왜 육적인 순결이 지금 육적인 세계에서 최고의 가치로 있어야 되는가? 이 순결이라는 것이. 순결을 다른 말로 하면 순수, 어떤 순수? 혈통의 순수에요. 혈통의 순수라는 말은 다른 혈통이 섞이지 않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게 과연 인간의 육으로서는 가능하냐 이 말입니다. 자, 순수한 혈통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이 생각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할례를 행해서 그들만이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그러한 공식, 창세기 15장, 또는 17장에 나오거든요.
창세기 17장에 할례언약이 나오죠. 14절,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라고 되어있거든요. 문자적으로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거예요. 할례 없으면 천국 못 간다는 조로 그 당시에 주어진 거예요. 그리고 이 할례가 영원한 언약이라고 되어 있어요. 창세기 17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언약을 지키라는 그 표면화된 확실한 증거가 뭐냐, 몸의 증거가 뭐냐, 문신 같이 새겨지는 것이 뭐냐 할례에요.
따라서 구원이라는 것은 그 가정에서 여성의 담당이 아니고 남자의 담당이에요. 할례를 당했던 것은 여성이 아니고 남자가 할례를 받기 때문에 남자가 똑바로 그 가문의 혈통을 지키면 그 가정은 그 남자의 덕분으로 구원을 받는 조건이 아브라함의 언약입니다. 이걸 다윗시대에 모를 리가 있겠어요. 할례를 다 행했는데.
그래서 순수라고 하는 것은 혈통의 순수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혈통의 순수성. 거기에 대한 이야기가 잠언서에 많이 나와요. 이방여인, 애굽여인하고 가까이 하지 마라. 혈통의 순수성해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저주하신다. 잠언도 솔로몬의 잠언이죠. 아가도 솔로몬이 지었고 전도서도 마찬가지고. 같은 저자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하게 여기서 뭘 놓치고 있어요? 우리가 그렇게 순수를 이야기할 때. 자, 어렵게 해봅시다. 순수를 가지고 이게 거룩의 전체가 되죠. 영어로 올all, 전체가 되죠. 그런데 이렇게 구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되느냐, 전체보다 더한 것이 있어야 돼요. 그럼 앞에 전체보다 더한 것 같으면, 이게 얼마나 말이 어렵고 모순되었는지. 전체에 속하지 않으면서, 전체보다 벗어나 있으면서 추가되는 그 무엇이거든요. 그러면 전체라는 개념이 이동해야 돼요. 뭐냐 하면은 이것까지 포함해야 전체가 되죠. 전체라는 것은 전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용납을 하지 못하니까. 여기까지 합해야 전체가 되겠죠. 그러면 앞에 있는 전체를 전체1이라고 하고, 전체보다 더 빠져나온 것을 후딱 알고 포함시켜서 이걸 전체2라고 합시다.
그러면 전체2가 순수가 돼요.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어긴 게 되잖아요. 왜냐하면 율법의 전체를 못 지키면 순수를 못 지키고 순결이 안 되는 셈이 돼요. 그러면 전체2가 있는데, 여기 전체2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다고 여겼는데, 여기서 갑자기 전체2보다 더한 것이 나온다면 또 이것을 허겁지겁 포함시켜야 되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순수라는 것, 거룩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잉여, 여분의 것을 만들기 위해서 계속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그 만들어가는 가운데서 전체보다 더 큰 것, 그리고 새롭게 전체라는 것이 재편되어야 될 요소를 발생시킨 그것은, 놀랍게도 전체에서 배제된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마태복음 족보에서 이방여인들이에요. 이방여인이 마태복음에 보면 네 명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장을 한번 볼까요? 마태복음 1장은 교회처음 나올 때 보는 장입니다. 3절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다말이 나오죠. 그 다음 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라합이 나오죠. 둘 다 이방여인이죠. “보아스는 룻에게서” 룻이 나오죠. 룻은 모압의 이방여인입니다.
네 번째의 이방여인이 마리아죠. 왜? 주님보시기에 땅의 여인이기 때문에. 마리아가 이방여인은 아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이방여인이잖아요. 땅의 사람이니까. 임신을 했는데 하나님을 임신했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여인은 아니지만 6절에 보면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이방여인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게 또 하나의 이방여인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구태여 마리아를 넣지 않아도 이방여인이 역시 네 명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육에서부터 어디 영의 나라로 벗어날 수 있느냐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이게 방향을 트는 거예요. 강릉열차가 철도노선이 고장이 나서 선로가 바뀌게 되어 철도가 뒤집어졌잖아요. 철도노선을 천국 쪽으로 조금씩 바뀌게 하고 결정적인 것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는 거예요.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역사 속에서 비-역사가, 역사가 있고 그 역사를 부정하고 틀어지게 하기 위해서 역사에서 초역사가 오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너는 내 백성이 아니야.”하고 발길로 차는, “너는 나의 순수성과 이스라엘 순결성을 훼손할 나쁜 여자야!”라고 배척했던 그 배척받은 자가 도리어 전체를 영적으로 인도하는, 전체보다 더한 것이 돼요.
그럼 이러한 취지는 어디에 고스란히 담기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께 담깁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지만 사람들에게 배척당했잖아요. 배척당해서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그분이 도리어 새로운 이스라엘을 완성시켜버리죠. 새로운 이스라엘을.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고, 목사님 그런 논리는 옛날 구약의 논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지기 전까지고, 오늘날 21세기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지 않습니까?”라고 이렇게 또 무심하게 할 건데. 이 원리를 할 때에 “이스라엘은 나쁘다. 나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 네 명 보내가지고, 틀어지게 해가지고 그들 가운데서 남은 자 가운데서 구원이 있게 했다.”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은 나쁘다, 그래도 주께서 도와줬다고 생각한다면 마치 이스라엘은 나쁘고 우리는 지금 안 나쁘다고 착각하고 있는 중이에요.
이스라엘이 자기 민족의 순결성을 주장했다면 우리는 단군의 자손을, 단군의 자손을 거창하게 이데올로기로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 광산김씨, 광산김씨는 무조건 광산김씨의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저는 경주이씨니까 경주이씨는 무조건 경주이씨 집안을 주장하는 겁니다. 물론 저한테 직접 족보 사라고 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소단위, 하위계급에서, 뭐 경주이씨 전체까지 거기에 정치적으로 개입하지 않더라도, 동생생일인데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뭐 이런 것. 진짜 1월달 생일이에요.
제 아내가 동생생일인데 가만히 있어도 되냐고 합니다. 내가 동생생일을 왜 챙겨요? 내 생일도 안 챙기는데. 그래도 그게 아니지 않느냐? 자, 그래도 그게 아니라고 하는데, 왜? 기본은 되어야 예수 믿는 형 욕은 안 할 거 아니냐는 겁니다. 이런 계산이 서죠. 뜀틀을 딛고 뛰어넘어야 하는데 뜀틀 위에 주저앉아서 도마 9점이 나올 것을 2.0나와요. 그렇게 하면 사이는 좋게 지내죠.
그러나 그 사이좋음이 어떤 조건하에 사이좋음이냐 하면은 복음을 이야기하지 않는 조건하에 사이좋음이에요. 저는 말 안 합니다. 개한테 귀한 것을 던져줄까 싶어서 입을 다물고 있어요. 우리 집하고 가깝게 이사 온지 십 몇 년을 사는데, 교회 나오라는 소리를 한번 안 했습니다. 근데 그 사람은 우리 집이 목사집안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써먹어요. 목사인데 그럴 리가 있나? 목사님은 무조건 착하다고 하면서 해먹는데, 나는 그 사람에게 절대로 복음전하지 않습니다. 왜? 주의 지시가 그런 것 같아요. 안 전하는 게 전도고 선교기 때문에.
전체 플러스알파(+α), 전체보다 더한 것이 있을 때, 반드시 우리 자신을 전체에다가, 여기에다가 집어넣어야 합니다. 절대로 여기에 전체보다 더한 것에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이쪽 몫은 누가 하느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몫이에요. 우리는 늘 알파(α)를 놓치고 눈에 보이는 전체를 스스로 우상시하는 실패자입니다. 우리는 실패자죠. 아무리 여기서 육에서 해도, 육에서 이긴 사람들끼리 모이자! 거듭난 사람들이 모이자! 그게 바로 육이에요. 육이라고요.
제가 아는 경상도 와촌에 있는 교회는요, 교회 등록을 할 때 그냥 하지 않습니다. 아주 화백제도(신라 씨족공동회의제에서 발전한 만장일치제 회의제도로서, 진골이상의 귀족과 중신들이 모여, 국왕 선거를 비롯한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결정하였다.), 신라시대 때 화백제도를 활용합니다. 기존에 있는 사람들이 투표를 해가지고 만장일치로 넣기로 확정하면 그때 교인으로 등록되는 거예요.
신라시대 화백제도하고 똑같아요. 말썽의 소지를 없앤다는 거예요. 오직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만 우리는 판단해서 뽑겠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그 교회가 오직 교회의 순수성만을 이야기하는 것 같죠. 그 순수성이 사랑을 조진다니까요. 그 순수성 때문에 사랑을 핍박한다고요. 그럼 결국 그 교회의 본색이 뭐냐, 역시 돈이었습니다. 결국 돈이었어요. 교회 옮기면서 목사가 우리 장로님한테 보상금 달라고 얼마나 생떼를 부리는지. 뭐 화백제도 필요 없어요. 역시 정답은 돈이었습니다.
우리가 배척한, 우리가 꼴 보기 싫은, 우리가 차버리고 싶은 그 요소를 주께서 집어넣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도록. 먼저 된 자, 우리가 꼴찌가 되도록. 그리고 꼴찌라고 배척했던 자가 먼저 되도록. 이게 한번만 그러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돼서 문제가 생겨요. 이게 반복해서, 계속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게 여호와의 불의 열정이에요. 주님은 쉬지 않고 일하는데, 우리는 안일함과 편안함 거기에 곧장 녹아들어갑니다. 여름에 덥다고 그렇게 설치다가 겨울에 추우면, 옛날 같으면 두꺼운 홑이불 속에 푹 들어가서 만화책만 보고 있잖아요. 바깥에도 안 나가고 꼼짝도 하지 않잖아요. 우리가 뭔가 편안하면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요. 위험요소를 줄인다고.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존과 우리의 가치, 우리의 순결한 가치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잉여, 항상 넘실거리고 충실한,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려는 그 주인공, 그 주체에 호응해서 우리로 하여금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럼 그 가만히 두지 않을 때, 바깥에 나갈 때 우리는 뭘 하느냐 하면 우리가 배척하고 싫어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뭔가 위험과 두려움을 갖게 돼요.
아주 겸손한 마음으로 사양하죠. “이거는 믿음 좋은 사람에게 하시고 저는 믿음 안 좋기 때문에 곤란합니다. 이러면 저 예수 안 믿을 거예요. 너무 심한 일을 하십니다.” 뭐 그런 것을 해요. 이게 교회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해요. 교회적으로 하게 되면 그건 교회 사업이 되고, 그러면 절대로 교회 말을 듣지 마시고, 개인적으로 각각 사연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개인적으로 이걸 전부 다 위험과 두려운 일들을 가만히 있는데 들이닥치게 해요.
그러나 그 위기가 곧 기회가 되는 겁니다. ‘아, 내가 잠시 안일에 빠졌었구나.’ 안일에 빠지면 그게 교만이거든요. ‘내가 교만했구나. 옛날에 복음 좀 안다고 천당 가려고 그걸 우려먹었구나.’ 복음도 사골도 아니고 자꾸 우려먹으면 맛이 떨어져요. 맛이 떨어지거든요. 우리 자신이 항상 해체되어야 하고 우리 자신이 날마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해요. 날마다 새로운 사람. 고정에 박혀 있으면 안 되거든요. 그때 주께서는 가만히 있지 않고 흔들기에 나섭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고요하지 않고 계속 일이 터지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요. 가정사를 이야기하면 또 위험하기 때문에 말은 못하겠습니다만, 예상 밖의 일이 터지니까. 행복이 좀 오래가면 좋겠는데 또 짜증나는 일이 발생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아이고, 요거 봐라 내가 준 은혜를 가지고 짜증은 네가 내나? 은혜가 네 거였어? 너 좋아라고 은혜를 준 줄 알아? 네가 은혜 값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혼 좀 나야 되겠어?” 이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우리는 주에게서 은혜를 받아놓고 그 값도 제대로 안 치르고 있고, 마치 그 은혜를 내 것인 것처럼 내 것으로 돌려놓았습니다.
특히 불신자들은 그게 심하죠. 실컷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놓고 영광은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잖아요. 이게 뭐 교인들도 마찬가지지만 불신자들은 더 심하죠. 예수 믿으라고 하면 나중에 믿을게, 죽을 때 믿을게, 이렇게 하고 있다고요. 그 받은 은혜는 어떻게 하고요. 주시는 분이 있는데 누가 준지 모르면서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거든요. 주시는 분이 있는데 그 주시는 분을 완전히 개무시하고 몰라도 나는 사는데 정상적으로 살 수 있다는 그 뻔뻔한 자신감은 도대체, 그거 마귀가 집어넣은 거죠.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더 크게 보이고, 예수님이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인 것을 그때마다 깨닫게 하는 그런 목적이, 목표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 자신의 육적인 혈육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고 교만한 것도 육적인 것이거든요. 내가 현재 이 전체로 만족하겠다는 이 만족을 깨부수고 플러스알파(+α)를 주시는 거예요. 그게 사랑인데, 처음에는 사랑인줄 몰라요. 그 사랑을 알려면 바로 그 사랑의 원천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시 내 쪽의 변화를 유발시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뭐냐, 네가 지금 많이 높아졌다는 것을 깨우치는, 여자가 남자의 눈을 깨우치듯이 우리 주님이 날마다 우리를 사랑으로 깨우치는 거예요. 깨우치게 되면 나의 순수함, 나의 완전함, 나의 깨끗함, 나의 거룩함, 나의 고상함, 이러한 테두리에서 내가 그동안 못 벗어난 것이 나의 죄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나 이만큼 착하다, 나 이만큼 말씀대로 산다, 그 교만이 깨쳐져야 돼요. 그것이 안 이루어지게 되면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에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름답지만 위험한 아름다움이에요. 정말 주님이 아름답다고 덜컥 쥐면 안 됩니다. 그 아름다움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순결보다 사랑, 거룩보다 사랑이 우선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근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싫어하는 것, 내가 이건 쓸데없다고 버린 이것이 오히려 나를 교훈하고 나를 새사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누굴 욕할 입장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 둘 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는데,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해서 그 은혜를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잖아요.
한 사람은 아프고 한 사람은 멀쩡하다. 누가 은혜를 받았어요? 누가 은혜 많이 받았다고 경쟁하지 마세요. 누구로부터 받았느냐 하는 거예요. 누구로부터. 그것이 아픈 것을 받았고 건강한 것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로 부터를 잊어버리면 그것은 건강해도 교만이 되고 아파도 이게 겸손이 되는 겁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거예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이 원리를 아가에서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아가를 정리해보면, 한 시간 남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하고요. 지금에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아가는 남자부터 시작했지만 주인공은 여자였다는 것. 주인공은 여자였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향하여 항상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가죠. 여자는 그 남자의 사랑에 대해서 중간 중간 실패한 경험도 있고 오해한 경험도 있고 하죠. 하지만 그 사랑에 대해서 여자가 보여준 것은 혈육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성공했다는 겁니다.
아가 제일 마지막을 보게 되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8장 14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이것은 뭐냐 하면 어떤 주석에서는 참 잘 묘사했어요. 사랑은 완결되지 않았다. 사랑이 완결되면 이거는 동결됩니다. 이거는 하나의 대상이 돼버려요. 대상이 돼버리면 내가 그 사랑을 소유를 하려고 할 거예요.
사랑은 완결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이 지상에서 쉬지 않고 사슴처럼, 노루처럼 달려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면 한발자국 달아나고 있고 내가 가면 또 한발자국 달아나고 있고. 내가 잡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무너지면 내가 한발자국 다가가면 되잖아.” 그러한 노래가 있어요. “당신이 가면 내가 또 다가가면 되잖아.” 백지영의 ‘그 여자’라는 노래가 있죠.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
그처럼 사랑이 완결이 돼버리면 그건 더 이상 사랑의 중지에요. 사랑행위의 종결이 되는 겁니다. 사랑이 천국 가서도 계속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사랑은 내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사랑에 붙잡힌바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여기에다가 집어넣으면 뭐가 되느냐, 우리는 한번이라도 성공자가 되면 안 돼요. 늘 실패자가 되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해야 돼요. 성공해버리면 성공 자체가 이게 우상이 되고 고정이 되고 응결이 돼가지고, 나는 이렇다고 그걸 가지고 대표속성으로 자랑질 하게 돼요. 자랑하려면 십자가를 자랑해야 될 텐데, 십자가를 믿는 나를 자랑하는 거기에 스톱이 돼버린다니까요.
전에도 어떤 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태권도 도장하고 오늘날 교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태권도 도장은 송판 하나 깨면 노란 띠를 줍니다. 이게 스웨덴 청년들이 와도 마찬가지에요. 송판 깨면 노란 띠를 줘요. 그러면 교회는 전도하고 십일조하면 집사 시켜줍니다. 소위 승진을 시켜주죠. 열심 내라고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독려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뭐냐 하면 노란 띠가 없는 나에게서 노란 띠가 있는 나로 목표를 잡을 거예요. 그렇죠. 나를 언제 잊어버립니까? 사랑이 오면 나를 잊어버려야 되는데, 오히려 나를 더 키워요. 십자가마을 가면 복음 들을 수 있다. 이래 돼버리면 십자가 오기 전까지의 나와 복음 아는 나를 이미 이렇게 예상하게 됩니다. 와보니 뭐 별거 없지요? 별거 없어야 돼요.
다만 아셔야 되는 것은 십자가마을에서 복음 듣겠다는 것도 욕심이라는 사실을 아시면 그것은 새로운 사랑을 체험하신 거예요. ‘아, 이 세상에 내 행함으로, 내 목표, 내 의도를 가지고 될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이게 너무나 당연한 조치구나.’ 다시 말해서 나와 결부된 어떤 사항도 이 대자연에서 주님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나의 의미, 나의 가치, 나의 자존심, 그런 것을 부추겨주고 충족시켜주는 어떤 일도, 어떤 기도응답도 주님께서 해주신 적이 없어요. 그건 마귀가 해주는 거예요. 날마다 우리 자신이 흐물흐물해져도 괜찮고, 다만 내가 속한 이 전체라는 것, 내가 속한 육적공동체에서 이제는 더 이상 나에 대한 어떤 의무감도 나에 대한 어떤 책임감도 안 져도 되는 그러한 존재가 된 것을 감사합시다.
이 시간 마지막으로, 노루이야기를 하니까 옛날 저 어릴 때 우리 할머니가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할 때마다 똑같은 문장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요. 새벽 4시에 하얀 소복을 입고 물 한 사발 떠서 놓고. 새벽 4시에 뭔가 시끄러워서 보면 부엌에서, 경상도 말로 정지에서 뭘 하는데 뭔가 물체가 떠올라요. 참 신기한데, 종이를 태우는데 종이가 가라앉는 것이 아니고 중력에 의해서 역반응, 중력에 거슬려서 막 올라가요. 마치 신에게, 삼신할머니에게 올라가는 것처럼 올라가요.
그 멘트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설과 추석, 제사 때마다 하는 똑같은 멘트에요. 그 멘트가 아가서 마지막 멘트였습니다. “그저 내 자식들 남산 위에 노루새끼처럼 잘 뛰게 하시고” 이게 뭡니까? 건강이죠. 건강. 잘 뛰게 하시고 하는 일이 잘 되게 하시고. 건강사업. 오늘날 교회가 이걸 못 뛰어넘었어요. 예수 이름으로 이거 달라고 합니다. 아닌 것처럼, 뭐 전능하시고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같지만, 그딴 것 입에 발린 소리하지 말고. 실제로는 그거 기도하면 보너스로 이거 준다고 하잖아요. 이거. 이거 포기하고 하늘나라 확장할 거예요? 아니거든요. 내가 나에 대한 의무를 이제는 손을 떼도 괜찮은 거, 그게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