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순수 슬픔 1812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2. 29. 21:34
2018-12-18 23:49:20조회 : 341         
순수 슬픔 181218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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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125.♡.152.223)18-12-29 20:18 
강남-요한복음 19장 25절(순수 슬픔)181218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9장 25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데” 네 사람이죠. 네 사람인데 전부 다 이름이 한결같이 마리아에요.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이야기를 그렇게 답답하게 십자가 위에 올라가셔서 불편한 자세에서 그렇게 힘들게 말씀하실까요. 평소에 식사 중에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달릴 거 아시잖아요. 그럼 식사 중에 편하게 식사하시면서 ‘사도 요한아 너의 어머니다’ 이렇게 하시면 되는데 이게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시는거에요. 


그럼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일으킨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그럼 그 다 이룬 내용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위탁하는 그 일도 다 이루심 안에 꼭 필수적으로 들어있어야 할 내용이기 때문에 십자가 달린 채 이야기 하신거에요. 


그렇다면 십자가 이것은 신의 이야기냐 아니면 인간 예수의 이야기냐 하는 것을 살펴봐야 되요. 이 십자가라는 것은 신의 이야기냐 하나님 이야기냐 아니면 하나님 아닌 인간 예수에 관한 이야기냐를 이렇게 의도적으로 제가 이렇게 구분을 했습니다. 구분한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 이야기가 인간 예수 여기에 결합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끊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예수님의 자신의 하나님 됨을 의도적으로 인간이 알고 있는 신의 이야기를 피해서 인간 예수님으로서의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바로 신의 이야기와 이렇게 연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인간 예수라고 했으니까 지금 여기 누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있지요. 어머니 마리아가 있지요. 천주교에서는 상당히 중요시 하는 대목입니다. 십자가에서 마리아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의 파트너로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구원의 파트너로서 반드시 들어가야 된다고 천주교는 우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부탁했다. 누구한테? 사도요한에게 부탁한거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이야기와 인간 예수의 이야기가 이렇게 저는 끊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만약에 이어졌다고 한다면 이어질 수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예수님은 효심이 깊었다 이렇게 되요. 효심이 깊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하나님으로써 자기 일을 다 하면서까지 인간의 역할도 하나님께서 소홀히 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으로서 어머니한테 효도를 해야 하는 그것까지 다 기억하시고 그걸 배려하셔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나 떠나고 난 뒤에 자기 어머니를 사도 요한에게,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했다는 겁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나는 어머니 아들로서 자식을 자기보다 먼저 목숨을 빼앗긴 아들을 보면서 어머니의 심정이 얼마나 큰 슬픔에 잠기겠는가. 그것을 아시고 그 어머니에게 자식으로서 할 도리를 끝까지 다 해줬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거는 하나님 이야기가 곧 사람 이야기가 되고 효심 이야기가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되어 버려요. 그럼 이렇게 연결이 되어 버립니다. 역시 하나님도 효도하라고 했구나. 아니 하나님 자신이 효도했구나. 따라서 우리가 효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의 일부다 그렇게 생각되는거에요. 세상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걸 끊어버렸다. 이걸 끊는다는게 좀 억지가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실텐데 여러분들 가나안 혼인잔치 때 마리아하고 예수님하고 대화의 호칭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자기 어머니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여자여.” ‘여자여’라고 했지요 어머니라고 안하고 여자여 라고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어머니라고 이야기한거죠. 여기에 호칭을 그렇게 한게 아니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고 호칭은 하지 않지만 사도 요한이 새로운 아들이라고 이야기해서 자기가 아들인 것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볼 수 있는데, 그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은 요한복음 2장에서 나오거든요. 


이게 어머니와 아들관계는 어떤 관계냐 하면 이게 ‘육적 관계’입니다. 육적 관계. 육의 관계에요. 요한복음 4장에서 분명히 육으로 난 것은 육이거든요. 육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으로 바뀌지는 않아요. 바뀔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효심을 다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될 수는 없다 이 말이죠. 효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육의 관계를 곤고히 하는겁니다. 그걸 계속 안끊고 이어가게 하는게 효심이잖아요. 효도잖아요. 그러나 그 육의 관계가 영의 관계로 전환될 수 있는 어떤 여지는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과 그 마리아의 관계는 뭐냐 하면은 반대로 생각을 해야됩니다. 어머니가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이고 아들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마리아에요. 왜냐하면 어머니가 아들을 보호하니까요. 보호자의 관계입니다. 부모 자식과의 관계가 아니고 보호자의 관계에요. 마리아가 울어야 될 것은 육적인 인식에서 귀한 내 아들 잃었다고 울으면 안되고 자신의 보호자를 상실한거에요. 자신의 보호자를. 그 보호자를 상실한 것에 대해서 그 보호를 자기가 했던 보호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한겁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한거에요. 


그러면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렇게 신의 관계, 인간의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신의 관계와 끊어졌다고 그렇게 강변할 필요까지 뭐가 있겠느냐 무리한 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요한복음 내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라는 그 개념 자체가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의 개념 자체를 철저하게 예수님은 지금 거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 하나님은 맞는데 너희들이 문제다 정도가 아니에요. 너희들이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과 내 아버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이고 더 심하게 주님이 더 심하게 요한복음 8장에서 이야기했듯이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했습니다. 악마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관계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관계는 이것은 하나님을 너희들이 인정 안한다가 아니라 너희들이 하나님을 굳게 잡고 그걸 인정하는 이유는 그 출발선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혈육관계에서 나왔어요 ‘혈육관계’. 혈육관계. 로마서 1장 21절인가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좀 어렵지요? 좀 어려워도 여러분 참아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라고 되어 있지요. 제가 질문 던져 보겠어요. 하나님을 아는데 몇 살부터 알아요? 하나님을. 하나님을 몇 살부터 아는 겁니까? 아이고 하나님한테 기도해요. 그걸 몇 살부터 그렇게 하나님한테 기도하고 하나님을 인지를 갖고 그렇게 하나님의 표상을 가지고 그렇게 하느냐 말이죠. 갓난아이가 젖 먹을 때부터 젖 먹으라고 하면 맘마맘마. 맘마가 잠깐만. 기도하고 이렇게 기도하고 젖을 먹습니까?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안다고 했잖아요.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에요. 인간의 혈육관계에서 형성된 유사 이미지인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자기를 지켜주는 보호자로 보는데 그 보호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부모에요.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라는 울타리 속에 태어났고 점차 부모라는 울타리 속에서 자아가 형성되면서 그 부모의 울타리를 자아가 스스로 독립을 느끼면서 부모의 울타리를 대체하는 이미지로서 신의 이미지를 드디어 형성하게 되는겁니다. 


그러면 왜 계속 부모로 가지 왜 부모라는 울타리를 독립하느냐. 그것은 아이가 점점 크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부모의 부재를 느껴요. 부재. 부모가 없을 때를 느낀다고요. 처음부터는 부모 없으면 난리나지요. 이미 그 인간이라는 것은 태어나면서 짐승처럼 곧바로 독립되는게 아니에요. 지금 자궁 안에 있는 그 느낌이 오랫동안 계속 가고 있는겁니다. 적어도 1년 이상은 자궁인지 아닌지 구분 안 될 정도로 계속 갑니다. 여기는 엄마의 몸이 곧 자기 몸이에요. 자기 몸이 따로 있는게 아니에요. 


그러다가 엄마가 없으면 자기도 없는 존재가 되고 그러나 엄마 따로 나 따로가 되는 것은 시각적으로 어떻게 이게 돼요. ‘본다’가 형성될 때 무엇을 본다가 형성될 때 보게 되면 여기 뭐가 떠오릅니까? 영상이 떠오르겠지요 영상. 보통 아이는 어릴 때 보는 것은 엄마를 보고 아빠를 봐요. 처음에는 아빠보다 엄마를 먼저 보지요. 엄마 태에서 나왔으니까 엄마를 보지요. 엄마 보니까 보이는게 엄마잖아요. 엄마하고 자기하고 한 몸이에요. 엄마 시장가면 난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본다’에서 거울을 본다고 합시다. 거울을 보게 되면 거기에 엄마 모습이 아니고 자기 모습이 보이겠지요. 자기 모습이 보이면서 자아가 여기서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는겁니다. 자아가 형성됩니다. 쟤 누구지? 거울 앞에. 쟤 누구야? 그러면서 어떤 오해가 있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저것이 내 모습이라고 보는거에요. 내 모습이라고. 


그런데 내 모습이라고 보는 순간 거울에 비친 그 자기 모습과 자기를 일치화시키는 이런 오인을 범해요 오인. 이런 실수를 범해버려요.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을 ‘라캉의 상상’이라고 하는데 거울 단계에서 보는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인간이 어떻게 신의 형상을 어릴 때부터 유아 때부터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 이야기 제가 해드리는겁니다. 


처음에는 부모가 만약에 신이라면 부모가 신이에요. 보호자니까. 그런데 어느날 자기가 자기 자신이 따로 존재한다는걸 알지요. 그러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제가 설명하면서도 하여튼 되는대로 해봅시다. 나와 부모 특히 어머니죠 어머니. 부모 하지말고 어머니라고 씁시다. 나와 어머니의 사이가 무슨 관계냐 하면은 ‘이자관계’에요. 이자관계. 두 사람 관계거든요. 이걸 이자관계라고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머니가 자기를 대신하는 거에요. 그런데 어느날 나를 아는 순간 저 분이 나의 어머니라고 느끼는 순간 이미 자기는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겁니다. 두자관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 어머니라는 것도 필요없어요. 그 어머니가 나의 전부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독립되어 있으면 자기가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어머니를 보는 입장이 되는 겁니다. 전에는 엄마 안에서 엄마를 느꼈는데 이제는 내가 엄마를 보는 입장이 되요. 


보는 입장이 된다면 여기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나와 이자관계, 나와 엄마 사이에 중간 매개체를 집어넣는데 매개체가 뭐냐? 본인이 나를 집어넣어서 나를 중심으로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엄마가 시장갔다하면 엄마 시장갔어? 엄마 시장가면 곧 오겠네. 이렇게 된다니까요. 지금 여기 매개라는 말 또 나왔는데 이게 무슨 취지냐 하면은 엄마가 시장갔는데 엄마가 시장간게 그게 뭐가 오인이고 잘못된 것이냐 이야기할건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엄마가 시장갔어? 그러면 나는 컴퓨터게임 좀 해볼까? 잔소리 안 할 찬스인데. 


이거는 어떤 관계냐 하면은요 이것은 적어도 중학교 정도 되어야 되는 관계거든요. 엄마가 시장갔는데 엄마 시장갔으니까 곧 오겠네 하는 것은 아직 저항력 시대에요. 아주 독립을 해도 덜 독립을 한거에요.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네. 시장갔으니까 좀 기다리면 오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계속해서 ‘엄마 시장갔네’ 에다가 그걸 기다리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엄마 시장갔다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자기의 소망을 중간에 매개로 중간 매개체로 집어 넣는거에요. 


그런데 엄마 시장갔다 찬스다 컴퓨터 게임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 중간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컴퓨터 좋아하는 나를 따로 집어넣어요. 이게 무슨 관계냐? 이게 삼자 관계에요 삼자 관계. 나와 엄마사이에 ‘나’라는게 있는데 이제는 엄마는 빠이빠이 이제는 나 하고싶은 대로 가는 겁니다. 왜 이렇게 되느냐 하면은 엄마의 부재가 이게 부재가 당연스러운 것이란걸 아는 순간 부재를 대체할만한 것을 집어넣은 것이 바로 신의 개념이에요. 부재를 대체하는 신 개념. 부재를 대체하려면 부재는 없음이거든요. 없음은 미흡이거든요. 미흡인데 여기 미흡을 대체할만한 완전체 절대체 절대적인 것 완벽한 것. 그러면 내가 어릴 때 엄마와 함께 있을 때 절대적인 그 개념을 이미지를 신으로 대체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집 나가면서 곶감 선반위에 올려놨는데 그거 손님 줄거니까 먹지마라 하는거에요. 먹지마라. 미흡이죠. 먹고 싶은데 내가 싫어하는걸 저 선반 위에 오리고기 있으니까 먹지마라 하면 나는 오리고기 아예 싫어하니까 그건 미흡의 대상이 안돼요. 그런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곶감을 얹어 놨으니까 미흡한거죠. 그러면 엄마가 시장간 틈을 타서 내가 곶감을 손댄다는 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은 곶감을 먹고 만족스러운 내 모습을 그리죠. 


이게 뭐냐? 절대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 이게 ‘신’의 개념이에요. 왜? 내가 원하는 욕망을 내가 충분히 보호해주고 지켜주니까 이래서 신 개념이 생성되는거에요. 그런데 시장갔다와가지고 엄마가 패버리는거에요. 이게 어릴 때부터 말 안듣고 누구 닮아서 말 안듣나 줘패지요. 패면 엄마는 뭐가 됩니까? 엄마는 뭐가 돼요? 엄마는 악마가 되는거에요. 왜? 악마와 신과는 같은 계열에 속하죠. 같은 동네 존재에요. 나의 만족을 방해하는 악마가 되고 나의 어릴 때 그 있는 그대로 만족을 유지하면 신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 되는겁니다. 


악마같은 엄마가 갑자기 성질을 내고 회초리를 들 때에 애들은 ‘엄마 나 실망했어’ 이렇게 나오지요. 실망하면서 여기서 뭘 하느냐 아까 이야기했던 결핍을 느낍니다. 결핍을 느끼면서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은 결핍에서 신이 되었기 때문에 결핍에서 신이 되려면 뭔가 충족되어야 되지요. 충족되는데 여기 동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영웅’ 다른 말로 하면 ‘초인’. 초인, 영웅. 이게 바로 매개가 되는 겁니다. 이게 누구냐 바로 ‘나’입니다. 이게 나에요. 


신을 믿는 내가 신이 되는 거에요. 어떤 식으로? 나는 영웅이고 나는 나에게 초인이 되고. 이게 무슨 세계냐 하면 애들이 많이 보는 동화의 세계. 동화의 세계입니다. 백설공주. 아무리 가난하지만 밤 12시되기 전에 왔어. 신발을 잃어버렸어. 그런데 진짜 못생긴 왕자가 아니에요. 못생긴 왕자가 아니고 박보검 왕자. 박보검 왕자가 와가지고 왕자가 신발 들고 이 신발 들고왔을 때 자기는 누가 되느냐 하면은 송혜교가 돼요. 졸지에. 


신데렐라 동화가 그거잖아요. 백설공주가 그거잖아요. 역시 왕자 등장하잖아요. 백설공주한테. 초인 자기가 어떤 여자보다 이쁜 여자가 될 것이다 또는 남자는 내가 어떤 남자보다 힘세고 제일 돈 많고 부자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남자가 되가지고 내가 남자가 될거야. 이게 바로 남성이 꿈꾸는 이게 바로 ‘신’이에요. 인간이 신을 믿는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분명히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하나님 된 나’에서 나를 닮은 하나님이 나오는 거에요. 인간이 신을 제거하고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 관계가 어디서 나왔어요? 부모와 자식 관계. 어머니와 아들 관계에서 나온거에요. 그걸 잃어버렸을 때 어머니가 그 아들보고 얼마나 슬프겠어요.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 아들 있음으로서 자기가 어릴 때 동화의 세계에서 엄마가 되도 어떤 엄마가 되겠어요? 초인적인 엄마, 영웅적인 엄마가 되는거에요. 아빠 같으면 영웅적인 아빠 초인적인 아빠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올 때 신은 어떤 개념의 신입니까? 초인적인 신, 나를 초인되게 하는 신, 나를 영웅되게 하는 신. 내가 원한 신이지요? 라고 노크하면서 교회 들어온다니까요. 내가 원하는 신. 어릴 때 내가 꿈꾸던 그 하나님이 하나님 맞지요? 라고 들어오는 거에요. 


그 하나님에게는 뭐가 없습니까? 슬픔이라는게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완벽한 분이기 때문에 하자라든지 패배라든지 죽음이라든지 실패라든지 좌절이라든지 잃어버림, 상실 이런 요소는 하나님에게는 이거는 해당될 수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신들로 쫙 깔려 있는 이 세상에 완전히 그 신을 작살내는, 박살내는, ‘슬픔을 아는 신’으로 와버려요. 연결 안돼요. 신의 개념과 인간 예수의 개념은 전혀 연결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모든 말씀을 이루는 그 십자가 상에서 누가 보호자입니까? 누가 어머니 역할해요? 마리아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마리아의 어머니 역할을 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아들같은 존재지요. 진정으로 우리가 슬퍼해야 될 것은 내가 원하는 신이 못 되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보호자가 이 못나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이 보호자가 떠나보내는 그 슬픔 뿐이여야 된다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한테는. 그래서 지금 내 말 이해했는지 모르겠어 하여튼 그냥 해 봅시다. 


마태복음 9장 15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라고 했습니다.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럼 인간은 슬픔을 추구합니까? 아니면 완전을 추구합니까? 완전을 추구하지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그러니까 네가 얼마나 오인이고 너 자신을 잘못알고 네가 잘못된걸 네가 모르고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다녀가야 처음부터 우리는 슬퍼해야만 마땅한 존재인 것을 너희가 안다는 겁니다. 잃어버린 슬픔을 우리에게 오히려 채워주시는 분이 주님이에요. 모든 인간의 시작은 기쁨이 아니고 무엇부터 출발한다? 슬픔부터 출발해야돼요. 그게 인간의 인간다움이에요. 진정한 인간은 슬픔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벌써 우리는 아담부터 우리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잃어버린거에요. 뭘 잃어버린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무조건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있어요. 우리는 그 태어날때부터 혈육적 관계에 매여있기 때문에 내가 잃어버린 것을 무슨 식으로 얻으려고 하느냐 하면은 옛날 혈육적인 방법으로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자, 어릴 때부터 부모가 자기를 소홀히 하고 바빠서 자기를 돌보지 않으면 그 어린아이는 부모를 대신해서 누구를 찾습니까? 친구를 찾지요. 어릴 때부터 담배피우고 까불다가 옥상에서 밀려서 죽잖아요. 친구 찾잖아요. 친구를 왜 찾습니까? 정 붙일 곳이 없어서 또는 대화 상대가 없어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라캉이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신은 어디서 나오는가? ‘언어’. 진정한 언어에 있습니다. 진정한 ‘대타자’, 대타자는 말이 어려운 말인데요. 소타자 대타자 나누는데 소타자는 그냥 인간을 이야기하고 대타자는 뭔가 인간과 사귀어도 미흡한 그 영역을 대타자라고 해요. 대타자. 큰 ‘남’ 작은 ‘남’. 타자는 ‘남’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신을 대타자다 큰타자라고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은 대타자 소타자를 무엇에 대느냐 하면 ‘말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어린아이는 부모로부터 계속 지시와 명령을 받고 있어요. 지시와 명령. 지시와 명령 안에 뭐가 담겨있느냐 하면은 그 타자 남의 부모도 남이잖아요. 육체죠. 남의 욕망이 담겨있는 겁니다. 부모의 욕망에 맞춰주려고 하면서 드디어 주체가 형성되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겁니다. 자아가 형성되면서 그 자아에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라는 것이 어떠한 분일 때 하나님이라는 것이 자체적으로 형성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특징은 초인적이고 영웅적이고 내 미흡함을 다 채워주고 내가 어떤 경우에도 나를 보호해주고 그게 바로 인간개념이 형성되는 신의 개념, 신의 개념이에요. 신을 얻기 위해서는 그 타인의 부모죠. 타인의 명령을 들어야 되니까 명령을 따라서 부모 말 잘 들었다고 했을 때 아이스크림 받고 케익 빵 받던 좋은 경험이 있겠지요. 좋은 경험을 두자로 ‘양심’이라고 하는겁니다. 


그리고 말 안 들었을때 맞았던 경험 있잖아요. 막 울었던 경험. 그것은 뭐냐 내 속에 악마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창세기 3장에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선도 알고 악을 알았다는 거에요. 그런데 선과 악을 아는데 혼자서 태어날 때부터 천재적으로 아는게 아니고 이미 있기에 아는 분이 누구냐 하면 부모가 알고있어요. 부모가 일방적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선과 악을 이미 규정을 해놨어요. 그럼 그 부모는 누가 규정했겠어요? 부모의 부모가 규정하겠지요. 어릴 때 고아는 고아원 원장 하겠지 뭐. 


누군가 계속해서 지시하고 명령하고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거에요. 그 잔소리로 인하여 본인 나름대로 형성된 그 최종적 개념이 하나님 개념이다 이 말이죠. 하나님 개념. 하나님 개념은 다 어디서 나오느냐? 육에서 나오는데 그 하나님 개념은 뭐냐 하면은 한번 정리합시다. 하나님 개념이란 ‘나의 만족성’입니다. 나의 만족성. 나의 만족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만족이 아니고 육체 안에 들어 있는 남의 욕망의 만족성이 바로 하나님 개념이에요. ‘남의 욕망의 만족성’. 


왜냐하면 나는 없으니까. 남들이 이야기할 때 나니까. 우리 눈치보면서 살아가잖아요. 그러니까 ‘눈치 최종 상태’ 그게 하나님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말 안 들으면 나쁜 아이 되잖아요. 나쁜 아이 어디가요? 교회에서 나쁜 아이 어디갑니까? 지옥가죠. 그래서 지옥 안 가려고 하나님 믿는거에요. 그리고 꼭 죽어서 지옥 안가더라도 살아 있으면서 자기의 뜻대로 안되지요. 그거는 뭐냐? 하나님 앞에 나쁜 짓해서 벌 받아서 그래요. 십일조 안 해서 벌 받는 거에요. 기도 안 해서 벌 받는 거에요. 선교 안 해서 벌 받는 거에요. 


바로 이러한 신의 개념이 총동원되어서 누굴 살해했습니까? 예수님을 살해하게 되는겁니다. 어렵게 이야기 하게 되면 인간은 중간 이미지를 앞장세워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신인데 나의 신의 개념에 합당한 중간 매개체를 설정하고 내가 나를 중간 매개체로. 그러니까 반칙이죠. 내가 남을 만날 때 그냥 만나지 않고 나라는 인간이 안고 있는 생각을 나라는 것을 또 이미지로 투영해서 만들어낸 나를 타인과의 관계에 중간 매개체로 사용한다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관계는 무슨 관계가 되느냐 하면 이왕 어렵게한거 어렵게 갑시다. ‘필연적 관계’. 왜? 내가 나에게 필연적 관계이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이유도 없이 무조건 신 해야됩니다. 나는 무조건 최고가 되야 되니까.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최고가 되는 거에요. 선과 악이 인간이 아는 전부입니다. 선과 악이. 선과 악이 최고니까 인간은 아무리 알아도 뭐에  발목 잡힙니까? 선과 악에 발목 잡혀요. 


여러분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구원받았다고 자꾸 우기지말고 뭐 벗어놓은 옷 같은게 있어야돼요. 벗어놓은 옷을 보고서 그 선악이라는 옷을 보고서 거기서 발목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 때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선악 짊어지고 구원받았다 그게 무슨 구원이에요. 창세기 3장에 2장에 어긋났는데요?! 거짓의 옷을 벗어놓고 “도대체 누가 옷을 벗어놨네. 선악의 옷을 벗어놨는데. 이거 누구 누가 입던거야? 이거 내가 입던거네.” 거기서 벗어난거. 거기서 벗어난게 뭐냐 하면은 나는 하나님과 관계없었다. 


다시 말해서 왜 없었는가? 선악을 안 그 이유 때문에 창세기 2장의 원리원칙에 의해서 선악을 아는 자는 정녕 어떻게 되리라? 죽으리라. 따라서 나는 정말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였구나 라는 것을 알 때 더 이상 내가 제시한 ‘나’ 라는 매개체가 매개체에서 더 이상 발목 잡히면 안되지요. “당신 나쁜 짓했다.” 하면 “했다 왜! 헌옷 가지고 되게 뭐라고 하네.” 내가 실컷 벗어 놓은 옷에 불과한데. 내가 나한테 헌옷이여야 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나의 필연 나는 꼭 천당가야 되고 나는 꼭 구원되야 된다는 그 필연을 거기서부터 그 필연에서부터 발목에서 벗어나야 돼요. 내가 어떻게 되어야 된다는 필연에서부터 벗어나게 되면 뭐가 되냐? 우리는 ‘우연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우연적 존재라는 것은 제가 지난 낮 설교때 했는데 우연적 존재라 하는 것은 원인이 나에게서 출발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우연적 존재라고 합니다. 나한테 원인이 없는데 창세전에 이미 사랑받기로 정해졌기 때문에 나에게 이러한 희한한 우연적 현실이 벌어지는 거에요. 


만약에 내가 구원받는 것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면 그 속에 누가 섞여 있습니까? 나는 반드시 구원되야 될 초인이 되어야 하고 나는 영웅이 되어야 되고 나는 천당 백성이 되야 된다는 그 신적인 것을 아직도 그 위선의 옷을 못 벗은 사람이에요. 아주 껍데기를 벗겨도 안되지. 껍데기 벗긴다고 벗겨집니까. 아직 육에서 못 벗어나서 그래요. 육의 절대성 필연성을 못 벗어나서 그런겁니다. 


자, 육의 필연성이란 것은 뭐냐 하면은 부모와 그리고 나 사이에 엮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사람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태어난 것은 부모 때문에 태어났다고 하잖아요. 이 관계가 필연적 관계에요. 그런데 우연적 관계는 뭡니까? 내가 태어난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부모를 통해서 태어난거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났지 부모의 있음에 내가 태어난게 아니에요. 하나님에게서 태어난거에요. 


따라서 부모에게서 태어난 필연적에서 나온 뭐가 있겠어요? 신이 있겠지요. 이 신을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신을 십자가에서 깨뜨린겁니다. 하나님이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내 이름으로 내가 그걸 깨뜨려버린거에요. 그 하나님은 사실은 악마였다. 너희 아비는 악마다. 요한복음 8장의 말씀처럼. 악마를 벗어버려야 돼요. 악마한테 발목 잡히면 안되고 악마의 발목을 툭 치고 나와야 된다고요. 선과 악.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았을 때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신 일이 뭐에요? 구원이잖아요. 자유잖아요. 어떻게 했습니까? 네가 어떻게 했기에 구원받는다가 없어요. 그냥 우연히에요. 내가 너를 일방적으로 용서하리니. 용서한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맞지요? 내가 너를 사하노라 했잖아요. 너에게 어떤 행동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갑자기 하나님 되는 겁니까? 아니면 반대로 하나님 되는 그것조차도 그게 악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거죠. 내가 스스로 나답게 되려는 그 자체를 완전히 포기 못하게 하는거에요.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동안 안 해도 되는 짓을 해온거에요. 악마한테 속아서. 


자, 여기에 요한복음 19장 34절 봅시다. 목 쉬겠다. 이게 하도 어려우니까 열심히 하려고 하니까. 요한복음 19장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34절 읽어보세요.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피와 물이 나왔지요. 그다음에 36절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자,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이 말씀은 시편 34편에 나옵니다. 시편 34편에 19절부터 나오는데 한번 읽어볼께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제가 지금 시편 34편을 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십자가 이야기를 모른다 치고요. 우리는 전혀 거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치고 시편 우리가 구약성도 또는 유대인이 되가지고 시편 34편 19절 22절 딱 그대로 보잔 말이죠. 


그대로 보게 되면 그 주어가 누구냐 하면 그 주어가 바로 16절에 나오는 하나님이에요. 여호와. 우리가 지금 유대인이라고 치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안다고 치고 보게 되면 시편 34편 16절에 여호와의 얼굴은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거에요. 여호와께서. 그래서 지금 예수님 십자가도 모르고 유대인이라면 여호와께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은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누구 뼈를 보호하신다? 여호와 믿는 우리 뼈 그걸 우리의 관절을 보호하신다 이 말입니다 관절. 운동하다가 삐끗하는 관절. 눈길에 미끄러지는 뼈를 보호하심이여. 넘어졌는데 뭐 안 다쳤다 그런 말 아닙니까.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한다. 걸을 때 보니까 뼈는 금 안가고 근육이 좀 늘어났어 이런거에요. 뼈는 괜찮아요.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22절에 그렇게 하심으로서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뭐를 받지 아니한다? 죄를 받지 아니한다. 죄가 없다가 되는 거에요. 지금 유대인 해석 있잖아요. 문자 그대로 문자적 해석 있잖아요. 아 이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지금 교회에서 성경 문자대로 봅시다 하는 사람들 이 대목 읽거든요. 저기 어떤 섬에 가면 한센병이라고 하지요. 문둥병 한센병 거기 보면 그 사람들 할 일 없어서 성경만 달달 외운답니다. 그래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나는 안 믿습니다만은 어떤 사람은 성경을 다 외운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도 많이 읽어서 한 40년 읽으면 다 외워지는 모양이에요. 


자, 그렇게 외웠다 칩시다. 그렇다면 시편 34편 그 외운 그 분한테 이 본문은 무슨 뜻인지 물으면 뭡니까? 하나님께서 보호하사 우리 뼈를 보호하시고 우리 신체를 보호하시는 그 사람은 결국 그 사람은 죄를 용서 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해석이 이 본문 그대로 나오겠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전제가 뭡니까?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에 대해서 안다 모른다? 안다고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성경이 엉터리로 나온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걸 완전히 전복시켜 버리는 거꾸로 뒤집는 겁니다. 알기 때문에 모른다는 거에요. 너희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깨는걸 상상도 못했지? 이렇게 나오는겁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깨는거에요. 그 하나님이 인간의 자아고 자기 스스로 자기 하나 지키기 위한 이미지에 불과하니까요. 왜냐 그건 필연적 관계니까. 부모와 자식 관계가 필연적 관계라고 생각 안 들겠어요? 자식 어디서 나왔어요? 부모. 부모 있어야 자식이 나오지. 필연적 코스네.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다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 잃을 때 엄마 입장에서 얼마나 슬프겠느냐 세상에 귀한 아들 잃어버려서. 아니요 그게 아니에요. 누가 엄마고 누가 아들이에요? 예수님이 엄마고 마리아가 아들이라니까요. 왜? 시작을 예수님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마리아보고 뭐라고 합니까? “여자여” 라고 하잖아요. 여자여. 그리고 그 어머니 역할을 누구한테 맡겼다? 복음을 알게 된 사도 요한한테 맡겨버리는거에요. 효도를 한다고요? 무슨 소리. 무슨 효도를 해요. 효도하는 사람이 엄마 버리고 3년동안 돌아다닙니까 그래. 효도라고 하는 것은 부모 모셔가지고 같이 대패질하고 목수질해야 효도지. 무슨 효도가 부모 버리고 돌아다니는게 무슨 효도입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마태복음 9장에서 신랑이 신랑을 잃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슬퍼해야 돼요. 신랑을 잃어버릴 때 슬퍼한다는 말은 처음부터 우리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 여호와 잘 알고 하나님 믿는다고요? 하나님 보시기에 대단히 불량한 존재에요 우리가. 하나님 믿고 여호와 믿는게 대단히 불량한 존재에요. 왜냐 그게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에게 신은 없습니다.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신은 없어요. 신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신을 믿는 거에요. 신이 없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겁니다. 


왜? 미흡함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전지전능이란 이름으로 그걸 땜빵을 했거든요. 그게 바로 신조라는 거고 그게 바로 신앙이라는 그게 교리라는 겁니다 교리. 교리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조 있잖아요. 하이델베르크 신조 그거 마귀가 만든거에요. 삼위일체 마귀가 만든거라니까 삼위일체가. 삼위일체 알고 십자가 버리잖아요. 희한하죠. 삼위일체는요. 삼위일체는 너희 알아라고 가르치는거거든요. 


자, 아까 배웠습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타자가 있고 타자가 우리를 지시와 명령으로 가르치는 거죠. 이 말은 뭐냐? 가르친다는 것은 뭘 알아야 되요? 알면 괜찮게 된다는 대상이 있다는 거거든요. 몰라서 그렇게 알게만 되면 정말 멋진 신의 백성이 되는 대상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고 본인이 우기는 거에요. 미흡해서 그렇지 근원적으로 아주 망가지지는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가르쳐도 안 된다 이건 뭐냐? 근원적으로 망가진거죠. 주님께서는 가르친게 아니에요. 제자들을 3년동안 가르친게 아니에요. 네가 가르쳐도 안 되는 존재인 것을 그걸 이야기하신거에요. 네가 3년동안 나 따라다니고 배워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걸 알게 하신거에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아무도 거기에 합세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뜻이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은 그 나는 자랑거리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거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나는 슬픔이라는 것이 이게 내 운명에 딱 맞다는 겁니다. 슬픔이라는게. 나는 늘 슬퍼해야돼요. 시작을 슬픔부터 시작해야돼요. 끊어졌으니까 슬퍼해야 마땅하죠. 그래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제자들 도우라고 준 십자가가 아니라 기존에 전혀 없는 기존 세계에 주님이 끼어든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는 그 주님의 십자가 나름대로의 새로운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내는게 십자가입니다. 어떤 누구도 거기에 예상치 못한 새로운 세계가 십자가에서 나왔어요 십자가에서. 


그 십자가에서 내용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 마리아를 네가 보호해라는 것 . 십자가 안에 보호한다는 기능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책 제목이 뭐 낮게? 뭐라고 하는지 잊어버렸다. 더 낮게인가? 몽골에 선교사인데 책 제목이 낮게라고 하는거 아! 내려놓기(내려놓음). 내려놓기 내려놓기 그 다음 책이 더 내려놓기 있는 모양인데. 빌립보서 2장 그 말씀 그것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정답이 아니에요. 우리가 마음을 내려놓는게 아니고 십자가가 올라오는 거죠. 십자가가 올라오는 겁니다. 


동남아 순회공연하는 가수가 무대에 어떻게 올라옵니까? 무대가 중앙에 올라오잖아요. 동남아 순회공연할 때. 무대가 올라오듯이 우리가 내려갈 수가 없어요. 우리가 신인데 신이 절대자인데 뭘 내려가요. 우리는 양보 못합니다. 내가 절대자 되는 것이 그게 우리의 나의 이상체가 되었어요 ‘이상체’. 우리가 그걸 ‘상징적 존재’라고 하거든요. 이상체에요. 가장 이상적이 되었어요. 나에게 잔소리 했던 그 잔소리의 완성체. 그게 우리 신이고 바로 그게 못되어서 오늘도 계속해서 추구하고 있어요. 그걸 이번 주일 낮 설교에 ‘자아 돌려막기’라고 했잖아요. 자아 돌려막기. 


진정한 완벽한 존재되기 위해서 이것도 해보다가 저것도 해보다가 치킨집하다가 망하고 홍탁집하다가 망하고 그것도 해보고 딴 사업해가지고 또 무슨 사업? 콩나물사업해서 사기 당하고 또 이거는 친구니까 너한테만 알려준다. 뭐 이 사업하려고 빚내가지고 또 망하고 왜 그렇게 사기를 당하느냐 하면은 완전한 나, 신같은 내가 정말 만족스러운 나 정말 신다워 하는 그 만족이 미흡이 없이 계속해서 추구하고 시도하고 있는거에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미 정체는 탄로났잖아요 이미 우리는. 우리는 슬픔의 아들이에요. 베노니라니까 베노니. 베냐민 아니고 베노니에요. 베냐민은 우리 외손녀 이름이고.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에요. 라헬이 야곱의 본처 아닙니까. 그 베들레헴에서 애들 2살 죽을 때 통곡하는 사람 이름이 뭡니까? 라헬이죠. 라헬이 통곡할 때 예수님과 같은 공동체 이스라엘이 되는 거에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태어난 그 십자가 사건 때문에 동참할 때만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 (IP:125.♡.152.223)18-12-29 20:19 
강남-요한복음 19장 25절(순수 슬픔)181218b-이근호 목사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뭐든지 잘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잘하게 되면 내 존재가 부각이 되거든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존재를 원하는게 아닙니다. 이걸 이 세상을 사람들이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은 존재가 집결되는 것은 존재의 있음, 있는 것들, 눈에 띄는 것들 다 모여라. 존재의 집결을 이 세상의 현존성이라고 합니다. ‘현존성’. 현재 존재하는 성이라고 하거든요. 이 세상의 사람들은 뭐냐 존재하는 눈에 띄는 존재하는 집결성을 현존성이라고 하는데 주님은 십자가에서는 뭐냐? 존재하는게 아니고 ‘슬픔의 현존성’이에요. 


이 세상은 ‘슬픔의 바다’에요. 슬픔의 바다에요. 그럼 목사님 언제까지 슬퍼야 됩니까?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슬퍼하는 자만이 기뻐할 수가 있어요. 슬퍼하는 자만이 기뻐할 수 있어요. 슬픔에 진입도 안한 사람은 기쁨에 도달할 수 없어요. 반드시 슬픔에 가서 도달해야 돼요. 우리는 마리아 아니지만 마리아의 자격으로 십자가의 앞에, 밑에 있어야 되고 마리아한테 한 이야기가 곧 우리한테 이야기한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보호할 생각하지 마세요. 아까 그랬잖아요. 뭐든지 잘 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예수님을 지키려고 하지마세요. 세살 먹은 애한테 집 부도난 책임을 물을 필요는 없어요. 그렇지요? 까불면 안돼요 또. 호주에서 까불다가 아버지 사기치고 호주에 왔는데 자기는 랩한다고 한국에 와가지고 우리집 100평짜리다 까불다가 자기 아버지 사기꾼인거 들통났잖아요. 까불면 안되지만 자기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우리 인생이 우리가 책임지지 마세요. 책임지겠다는 그 자체가 이거는 불신앙입니다. 


이거는 왜 책임을 지려고 하느냐 하면 존재의, ‘나’라는 내 중심 존재의 세상을 생각해서 거기에 나도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자꾸 느끼고 싶어서 하는거에요. 한편으로 나를 인정해달라 이 말이에요. 한편으로. 같은 나하고 좀 놀아죠 이렇게 하는 거에요. 존재의 집결성이니까. 그러나 교회는 슬퍼하는 자의 집결성이에요. 슬퍼하는 자만이 십자가만을 가지고 기뻐하는 겁니다. 이 말은 사실 예수님 이런 말할 때 다른 사람 보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할 때 곧 자기 돌아가시면서 이런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 이루었다 죽어가면서 다 이루었다 했지요 여기에 29절입니까? 30절 “다 이루었다”하지요. 다른 사람보면 미친거죠. 


그러나 같이 미치지 아니하면 안돼요 우리가. 예수님 미친만큼 미쳐야돼요. 같이 미치지않으면 이 십자가를 이해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미쳐도 괜찮아요. 왜? 안 미쳐도 미친놈이니까 우리는. 이래도 미치고 저래도 미치고 좋게 미칩시다. 멀쩡해도 미친 인간이고 환자거든요 병자니까.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다 미친건 마찬가지니까 뭐든지 잘 할 필요는 없어요. 주님을 지키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슬픔의 현존성’, 이 말은 주님께서는 슬픔을 우리에게 극대화시켜서 십자가만이 영원한 기쁨이 되게 하는겁니다. 지난 금요일입니까? 의존강의에서 했지요. 예수님의 기쁨이 있기에 희생하는 것도 기쁨이 된다고요. 희생에 주저주저하는 것은 지금, 나로 인하여 기쁨을 자기가 스스로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으로 기뻐하게 되면 주님으로 기뻐해서 골프 치는 것도 순교거든요. 자꾸 희생을 고생고생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기쁨의 원천을 어디에 두고있는지 보란 말이죠.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고린도후서 5장에서 내가 미쳤다고 했거든요. 나는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고 했거든요.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는 이것이 정말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사도 바울은 편지에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이 기쁨을 묘사하기 위해서 이게 얼마나 기쁨인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술 취할 때의 기쁨을 묘사했어요. 술 취할 때의 기쁨을 기준으로 삼는 겁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그런데 성도도 같이 이렇게 취해야 되는데 어디에 취하느냐?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그런데 취하게 되면 결과는 미치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술에 취해도 개 되고 성령에 취해도 개 되는 것은 마찬가지거든요. 정상이 아닙니다. 이왕이면 성령에 기쁨에 도취되자는 말이죠. ‘안녕 바다’라는 남자 3인조가 부른 노래가 있어요. 노래 제목 알아요? 혹시? 몰라요? 이거에요. 별빛이 쏟아진다 샤바샤바 그 노래라니까. 별빛이 쏟아진다 인가? 그런 노래. 아 별빛이 내린다 샤랄랄라라 그 노래에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복음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목자들의 벌판에 천사들의 영광이 별빛 내리듯이 화사하게 그냥 하늘에서부터 출발한 조명발이 화사하게 그냥 별빛이 막  쏟아지는거에요. 사랑이죠 사랑이. 용서가 막 쏟아지는거에요. 그 얼마주면 그걸 얻을 수 있습니까? 돈 얼마를 내면. 주님의 주특기는 덮치는 겁니다. 저는 강간이라고 하는데 그걸. 주님의 주특기가 강간이에요. 왜냐하면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기 때문에. 


주님 이거 헌금 가져왔으니까 이렇게 하면 헌금 액수도 안보고 그냥 덮쳐버려요. 그럼 깔리지요. 그냥 깔리는데 그 깔아뭉개는 사람이 현빈이라면 세상에 이런 행복. 기다렸던 강간이잖아요. 그만한 인물같으면 인간성 후져도 괜찮잖아요. 그만한 인물같으면. 주님은 인간성 엉망이에요. 그냥 덮치는거에요 그냥. 별빛이 내린다 샤랄라라라 그냥 뿌리는거에요. 그냥 막 뿌리는거에요 막 사랑을. 헌금 내나 안내나 막 뿌려요. 기도 하나 안하나 막 뿌려버려요. 


하늘에서 색종이 내려오듯이. 은하수가 빗물처럼 쏟아지듯이 그냥 오는거에요 용서가. 그걸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했느냐하면 너 취했나? 너 취했나? 너 제정신 아니지? 그런 뜻이거든요. 취하면 제정신 아니잖아요. 인간정신이겠습니까? 성령에 취해버리면 별빛이 내린다 그렇게 되어버려요. 그 노래 지은 사람이 성령에 취해서 노래지었나. 


아까 마태복음 9장 다시 봅니다. 슬픔의 시작은 신랑을 잃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이걸 조심해야 돼요. 이건 엉터리거든요. 그 예수님의 고난가지고 멜깁슨이 만든 영화있지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의 고난, 아픔이잖아요. 그 영화는 정말 그거는 마귀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그러냐 하면, 짜내, 아예 동정심을 짜내요. 별빛이 쏟아지는게 아니고 짜낸다고요. 네가 세상 편하다고 하지말고 주님의 아픔을 보면서 눈물 좀 짜내라는거에요.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 흘리는 눈물은 뭐냐 하면은 교만입니다. 이게 교만이에요. 


‘나’에서 나오는 것은 그게 눈물인지 콧물인지 전부다 교만이에요. 울기는 미쳤다고 울어 왜 우냐고요 왜? 아직도 나는 남을 동정할 수 있는 뭐 여력이 있다는 것을 자랑질하는거에요? 아까 그 말씀 제게 되게 은혜 되네요. 뭐든지 잘할 필요 없다는 그 말. 울 필요가 없어요. 물론 잘하겠다는 그 자체가 상당히 악마적입니다. 교만이란 나에서부터 나오는건 다 교만입니다. 그리고 교만 아닌 것은 주님께서 내려온 샤랄라라라 내려온 것은 교만 아니에요. 


주님께서 내려온 것은 우연입니다. 우연의 특징은 내가 그걸 소지할 수 없다는 거에요. 소유할 수 없다는 거에요. 우리는 소유하면 내빼기 바쁘거든요. “고맙습니다 주님”하고 내빼기 바빠요. 또 옛날처럼 독자적으로 살려고 해요. 제가 여기 강의에도 했고 여러번 강의에도 했는데 대구강의에도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성도가 삶이 유령같은 삶을 살아야 된다. 안양강의에도 그런 이야기했지요? 관 뚫고 심심해가지고 죽은 자가 장례식에서 아이고 바람 좀 쐬러 나오지요. 그 유령같은 존재의 특징은 소유개념이 없어요. 왜? 유령이니까. 왜? 포켓이 없어. 넣으면 다 새 주머니가 없어가지고 아이고 뭘 가질 필요가 없어요. 유령이니까. 


소유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유령됨을 가지고 그 자유함을 가지고 기뻐하지요. 얽매이지 않는걸 가지고 기뻐하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들 그 이야기를 딴사람에게 하게 되면 뭐라고 하겠어요? 이상하게 된게 아닌가 하겠지요. 원래 우리 술 취했어요 지금. 원래 미쳤어요 지금. 술 취한겁니다 지금. 우리는 지금 십자가 밑에 지금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요. 본문 19장 본문 자체가 그러니까. 


슬픔의 시작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이 세상이 성도에게 어떤 변화를 줬느냐 하면 그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슬픔을 체험케 하는겁니다. 왜? 들어오셨다가 잃어버렸기 때문에. 왔다가 빠졌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제목은 “추가된 슬픔”이에요. 추가된 슬픔. 우리가 짜낸 슬픔이 아니고 우연한 슬픔이에요. 이건 내가 예수님 채찍 맞으면 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 보면 진짜 놋 있는 채찍으로 막 등짝을 때려요. 그러면 살점이 툭툭 튀어나오지요. 군중 속에 마귀가 있는데 마귀가 씨익 웃고 있고 뭐 그런 대목이 나와요. 얼마나 아프겠느냐. 그러나 아파서 매 맞아서 구원 못받습니다. 똥배 나왔다고 지옥 보내시는 분이 아니에요. 똥배 줄인다고 애를 먹지만 하여튼 똥배 나왔다고 지옥가는게 아니에요. 


일체 우리에 대해서는 안 받습니다. 우리는 안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미치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광인이 되는 것은, 아주 나의 고상한 어릴 때 있던 신적 부모의 그 은사 가르침에 의하면 절대로 우리 가문과 가정을 생각하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미치면 안돼요. 사람이 안 미치고자 하는 짓이 바로 자살 아닙니까. 안 미치려고 하는 것이 자살이거든요. 미치면 되는데 안 미치려고 하는게 자살이에요. 자살 안해도 미치는건 마찬가지인데. 자기는 어릴 때 오인, 잘못 생각한 것이 꽉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점잖으면 인간다운 줄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없어요. 거기 전부다 마귀한테 미친 인간들밖에 없어요. 자기 선악에 미친 자기자랑, 십자가 아니고 자기 자랑에 미친 인간들밖에 없어요. 교회 한번 가보세요 전부 자기 자랑하지요. 


부부싸움의 원인은 뭐냐? 각자 자기 자랑한다고 싸워요. 자기 정당성 자랑하기 때문에 부부싸움하는겁니다. 뭐 어쨌다고 그래?! 이러거든요. 뭐 어쨌다고 그래?!! 부부싸움의 원인은 안 슬퍼하려고 하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한쪽이라도 한사람만 슬퍼하면 돼요. 그래 나 이상해. 나 이상한거 같애. 슬퍼하면 되는데 기어이 안 슬퍼하려고 안 미치려고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건 사단나는 겁니다. 


자,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그냥 환상이에요. 환상에서 이 세상 현실이라 할 때는 반드시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바로 슬픔이 주어지는데 이게 슬픔이 우리가 아는 슬픔이 아니고 우리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슬픔, ‘예수님의 슬픔’이죠. 예수님이 자기 보호자를 잠시나마 떼어놓을 때 오는 그 ‘단절의 슬픔’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내가 지켜야 될 보호자를 내가 지키지 못하고 지금 돌아가시게 될 처지에서 자기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는 그 주님.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사도 요한의 가르침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고 마리아도 성령받아야 구원받지 누구 가르침 받는다고 구원되는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성령 올 때까지는 아직 텀이 있어요. 아직 기한이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오는 단절의 슬픔 그것을 이야기하는거에요. 너희들이 잠시 슬퍼하지만 다시 내가 성령을 주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거는 만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놀라운 기쁨이 오지요. 그러면 추가된 슬픔에게만 추가된 천국의 기쁨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전에 했는데요. 


요한복음 16장 21절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다음에 뭡니까? 뭐를 다시 기억치 아니한다?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 고통을. 그러니까 이 말씀대로 하게 되면 상당히 이러한 역설의 구조에 놓이게 됩니다. 계속해서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을 상실하는 슬픔이 반복되어야 되지요. 슬펐다가 기뻤다가 슬펐다가 기뻤다가 되풀이되야 되는거에요. 그러면 목사님 진짜 미치는거 아닙니까? 진짜 미치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에 보내느냐 하면 세상에 보냅니다. 세상에 보내면 우리가 아무리 성령 받았다 하지만 어디에 친숙해왔었습니까 그동안. 세상 자랑질 대회하는데 자랑질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어 네 집안이 잘났어 내 집안이 잘났어 부부싸움하는지 모르겠지만 자기 정당화와 자기 뽐내는데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외부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도 있겠지만 우리가 뭘 갖고 있느냐 아직 육신은 가지고 있잖아요. 


육신이 육신의 본색을 다 뜯어내려면 우리는 아직도 90까지 살아야 됩니다. 내 육신때문에 내가 까불다가 엎어지고 자빠지고 해야 돼요. 육신적으로 우리가 갖고있던 우상숭배죠. 내가 신이니까. 나 건드리지마 나는 신이야 까불다가 성령에 의해서 작살날 때 우리는 갑자기 슬퍼하다가 동시에 별빛이 내린다 갑자기 세상에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그 사랑이 막 쏟아질 때 이거 어떻게 말로 형용합니까. 하나하나가 용서고 사랑인데요. 


사랑받아가지고 좋다 너무 좋다 하는데 엄마 나 또 성적 내려갔어 이러면 이게!! 갑자기 샤랄라 하다가 갑자기 저래가지고 서울 어디라도 가겠나? 걱정 되가지고 코디 부르고 또 sky캐슬 그것처럼 과외시키고 또 난리를 친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친거 맞아요. 뜨신 물 됐다가 찬물됐다가 온탕 냉탕 온탕 냉탕 목욕탕 주인 보면 저게 미쳤나? 요금 오천원내고 온탕 냉탕 왔다갔다 하고 있어요. 온탕 냉탕을. 그래도 시원한 냉탕에 있는 것만 해도 샤랄라라입니다 정말. 그거 없는 사람 지옥갑니다. 


내안에 나의 세상적이고 육적인 본성을 이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원인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만 그걸 알 수 있어요. 에베소서 잠깐 한번 볼까요? 에베소서 이거 보고 어려운거 한번 해봅시다. 에베소서 1장 8절에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지요? 자, 알리는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누굽니까? 주님이 알려주죠. 뭘 알려준다고 했습니까. 7절에 보니까 뭐로 알려줍니까? 그의 피로 말미암아 뭐를 얻는거? 죄 사함에 관한 내용은 우리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게 아니에요. 


이거는 그다음에 18절 봅시다.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정신이라고 되어 있는데 영이거든요. 지혜와 계시의 영 그러니까 성령을 우리에게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의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알려주지요. 아까 이야기한 그 죄 사함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그 일을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주님이 하시지요. 그러면 그걸 하려면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어야 돼요? 우리가 알아서 알면 안되지요. 그렇지요? 우리가 알아서 알면 안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서 모르고 있는 상태여야 되잖아요. 이게 망나니에요 망나니. 막사는 것. 망나니 풀어놓으면 어떻습니까? 이건 뭐 지 마음대로 살지요. 우리는 망나니 같애. 하고싶은대로 뭐 다하고 그렇게 살아요. 그렇게 사는데 그렇게 사는 우리에게 주께서 성령을 주게되서 보게 되면 아 내 맘대로 산다는 이것이 결국은 어떻습니까? 이게 바로 육이었다는 것. 그래서 찬물 뜨신물 찬물 뜨신물 늘 이렇게 바꾸어서 하는거에요. 내가 내 마음대로 살 때는 우리가 주님 자랑합니까? 내 자랑 합니까? 누구 자랑하지요? 나 혼자 살 때는. 마음대로  산다는건 뭡니까? 우리 본성대로 산다는 것은 나 잘났다 하기 위해서 사는거잖아요. 나 잘났다. 그렇게 사는거에요. 


자, 그러면 다시 오늘 본문에 들어가게 되는데 자 예레미야 32장 한번 봅시다. 이건 좀 어려워요. 예레미야 32장 폈지요? 피고 난 뒤에 요한복음 19장,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엄마한테 부탁하기를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에게 이제 부탁하면 이제부터는 저분이 이번엔 저분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당신을 보호해줄겁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 마리아가 구원이 완료된 상태에요? 완료되지 않은 상태입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지요? 십자가 지지 아니하면 뭐가 안 옵니까? 십자가 지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뭐가 안와요? 성령이 오지 않지요. 이점이 성령의 내용의 핵심 부분입니다. 성령의 내용의 핵심부분. 성령을 이렇게 동그라미 쳐봅시다. 성령을 동그라미 치게 되면 이게 성령입니다. 이게 도넛 비슷한데 성령이라고 치고 성령 안에 성령의 내용을 한번 기재해보세요 적어보세요 한다면 이렇게 적어요. ‘십자가 지지 아니하면 오시지 않을 분’.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100점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100점이에요. 


성령을 설명하면서 성령을 이야기하면 안돼요. 성령을 성령으로 이야기해버리면 십자가 다음에 성령이 온다는 이 순서의 핵심부분을 놓치게 돼요. 제일 중요한 것이 누락되어 버려요. 그러면 하나의 성령이 아니고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가 되어버립니다. 강력한 에너지가 되어 버려요. 인간은 힘을 원하고 있잖아요. 성령하니까 주여 성령께서 오셔서 불같이 오셔서 뜨겁게 하옵소서. 뜨겁게 하는 것은 난로 이렇게 붙들고 있으면 뜨겁게 돼요. 성령까지 갈 것도 없어요. 우리교회 난로 앞에 한 1분만 서있으면 뜨겁게 돼요. 


성령은 나 에너지를 주기 위해서 에너지 있어야 구원받는, 구원받는 에너지 능력주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럴거 같으면 십자가 관계없이 미리 와도 괜찮아요. 십자가 지기 전에 제자들에게 미리 와도 괜찮아요. 그러나 제자들은 물세례 받았어요. 그렇지요? 제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은 언제냐? 오순절날 예수님 부활하고 난 40일 이후에 개인적으로 받는 것은 소용없어요. 개인적으로 성령이 임하다 뭐 그런 대목 있는데 하여튼 성령은 개인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와야 돼요. 집단적으로. 


집단적으로 온 것은 하나의 이스라엘로 하나의 열두제자들을 집단화시킬 때 그때 성령이 오는거에요. 그럼 성령이 오실 때 왜 순서를 순서가 왜 중요하냐 하면은 성령의 내용 자체가 성령이 성령 이야기하려고 오신게 아니에요. 요한복음 16장 나오지요. 나를 이야기하려고  하는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내 뒤에 오신 보혜사가 오시는 거에요. 성령님은 보혜사가 아니고 다른 보혜사예요. 첫 번째 보혜사 보호자가 누구냐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의 기능을 연속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종속적이에요. 성령은 주님에 종속적이어서 ‘예수의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의 영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나와요. 그걸 그리스도의 영이라도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영이라고 하거든요. 자, 그렇다면 십자가 지지 아니하면 오시지 않는 분이라면 그러면 성령오기 전까지는 지금 마리아는 마리아뿐만 아니라 마리아+3, 4인의 마리아는 어떤 상태에서? 구원되지 않는 상태가 되있지요. 유보된 상태에 있어요. 막간이지만 ‘막간’. 막간상태가 되지요. 이거하고 그렇다면 아까 찾으라고 하신 예레미야 32장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거기 예레미야 32장에 보면 그 예레미야가 부동산 구입을 해요. 일종의 투기를 하는 겁니다. 투기를 하는데 왜 투기를 하느냐? 땅값이 오른다는 거에요. 선지자가 이런 돈벌이를 할 줄 몰랐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슬픔은 우리가 예상 못한 슬픔이라고 했고 기쁨은 우리가 예상 못한 기쁨이죠.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바룩의 땅을 사라라고 그것도 증서를 하라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예상 못한 땅값상승입니다. 왜 예상을 못하느냐 하면은 지금 예레미야가 줄곧 외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이스라엘은 망한다는 겁니다. 망해요. 바벨론에 완전 포로 잡혀가요. 그러면 이들은 어디 가느냐? 전부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기 때문에 고향은 이제 더 이상 고향이 아니에요. 어디가 고향이냐 하면은 거기에 바벨론 그 땅이 고향이 되는 겁니다. 


거기까지 여러분 잘 이해되시겠지요? 이해되신다 치고 이것을 이렇게 선지자 이야기를 이렇게 제가 공식화시켜보겠습니다. 새로운 체험에 의해서 나온 질문이 기존 언약을 변동시킨다. 기존 언약을 변동시킨다. 기존 언약이라고 해도 되고 기존 계시라고 해도 되고 기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되고 다 괜찮아요. 새로운 체험. 누구에게 새로운 체험? 선지자에게 주어진 새로운 체험에 의해서 나온 질문이 기존 새로운 언약을 변동 또는 변화시키는 거에요. 더 정답에 가까이 보여주게 만들어요. 


만약에 우리 둘이 이야기를 한다고 합시다. 나는 안다고 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목사님 그거 잘못됐습니다. 그거 아니고 이겁니다” 라고 했을 때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은 본인의 체험이죠. 나는 내 체험 밖에 모르잖아요. 새로운 내가 모르는 새로운 체험이 어떤 형식으로? 질문형식으로 주어질 때 질문을 해대고 또는 반응 또는 응답현상이 주어질 때 기존에 내가 알고있던 것과 결합이 되면서 새로운 내용이 형성되는 거에요. 구약 이스라엘은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는 겁니다. 마리아의 네명의 마리아 4인조 마리아, 마리아 밴드 만들겠다. 베이스 보컬...이 네명 마리아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새로운 체험이 필요해요. 


어떤 인간이든 간에 주어지게 되면 그걸 정당화하는 버릇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인간은. 왜 인간은 정당화하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존재의 합일이 현존이라고 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나’하고, ‘나’하고 뭉쳐서 보기 때문에. 따라서 내가 있는 한 진리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흔들어버려요. 그들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아는 것도 그 정도도 정답으로 여겼는데 아 그게 영 미흡하고 영 어설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신약 때가 아니고 구약 때예요. 구약은 아직 언약에 도달을 안했습니다. 십자가에 도달 안했어요. 계속해서 주고받고 새로운 체험 새로운 체험 계속 있어야 되는 겁니다. 제가 그 성지순례 성지답사를 하기 전에 그게 그냥 역사적 산물이고 가봐야 장사치고 볼 거 뭐 있겠느냐 돈 주고 가라하니 또 가야지 또 여행가면 신나잖아요. 수학여행같이 신나서 뭐 내 아는거 가봤거든요. 어디서 내가 깨졌느냐 하면은 내가 여러번 여러분한테 사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목자들의 들판. 웅성웅성하던 그 예루살렘이 아니고 한가한, 눈에 펼쳐진 목자들의 들판을 보는 순간 이거는 필연이 아니고 우연입니다. 다음에 가도 그리 안해요. 


순간 내가 뭐가 되느냐 하면 갑자기 목자가 되고 들판이 뭐냐? 들판이 뭐냐? 천사가 별빛이 내린다 샤랄라라라라. 천사들의 은총이 그 벌판에 가득 차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럼 이건 뭘 뜻하느냐 하면 내가 알던 모든 예수님의 탄생의 이 모든 것이 팩트라는 사실이에요. 팩트라는 사실은 뭐냐 하면 목숨 걸어도 괜찮은거다 이 말이에요 내가. 내가 그만 살고 가스에 취해가지고 죽던지 내가 그만 산다할지라도 여한이 없는거에요. 죽어도 상관없어 또는 죽어도 좋아가 되는 거에요 그 순간. 


죽으면 안돼라는 그러한 내 체험이 그 순간 섰을 때 여기서 내 목을 따시옵소서. 코카콜라 따듯이 여기서 내 목숨을 따도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자발적 죽음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자발적 죽음이. 모든 수고한 짐은 다 끊어놨기 때문에. 내 목숨과 충분히 바꿀만한걸 알게됐다 이 말입니다. 아~~내가 목자들의 입장이 되가지고 천사들이 왔을 때 그 예수님 태어난 곳에 안 가보겠습니까? 달려가 가보겠지요. 우리는 차타고 갔어요. 거기 한 2km 되는데요. 2km쯤 되는데 거기 예수탄생 교회에요. 30분 줄섰는데 도저히 못갔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예수탄생 도는데 두시간 걸린답니다. 잘 안갔다 싶었어요. 두시간 어떻게 허비하겠어요. 


노르웨이 핀란드 저쪽 북쪽에서 온 그 80넘은 사람들 줄 쫙 서서 가는데 그거 어떻게 그거 두시간 기다립니까. 아기예수 있는데 들어가면 겸손하라고 마음을 낮추라고 고개 숙이고 들어가요 이렇게 일부러. 중세때 그렇게 만들어 놨답니다. 그 베들레헴에 거기서 목자가 달려와서 내리막길이거든요. 달려와가지고 내려와서 아기 예수 태어난걸 그걸 본거에요. 그렇다면 거기 있는 줄줄이 이어지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 이것도 사실이거든요. 세상에 사실 진리를 알게되면요 인생 누구 말대로 진짜 노숙자해도 괜찮아요. 인생 노숙자되고 진짜 걸레되어도 괜찮아요. 애 이산화탄소 때문에 펜션 가서 죽었다고요? 괜찮아요. 주께서 죽였는데 뭐. 


저는 이것을 오늘 제목을 이걸로 바꿀까 합니다. 순수슬픔. 순수슬픔. 어지간한 슬픔도 슬픔이 아니다. 어지간한 슬픔도 슬픔이 아니여야 해요. 아직도 슬퍼할게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순수하지 않습니다. 샤랄라라 아니에요 지금. 자기가 짜낸 자기가 두려움 공포에서 나온 슬픔이에요. 아 안됩니다 아니되옵나이다 이런거 있잖아요. 그거 가지고 마귀가 벌벌 떠는 거죠. 예레미야가 부동산 투기를 해놓고 땅 사놓고 딱 등기 자기 앞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 바벨론에 가요. 사람들은 망했다고 할거에요. 하지만 ‘예레미야야 땅 샀지?’, ‘네’, ‘그거 네 땅 도로 찾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자, 여기서 어려운게 있어요. 지금 부탁을 했잖아요. 마리아한테. 그렇다면 마리아의 부탁이 뭐냐 하면 아까 했던거 다시 해봅시다. 예수님은 세상에 들어오신 분이 아니고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서 집어넣은 분이죠. 그럼 만들 때 뭐로 만들었습니까? 십자가 안에 있는 외친 내용을 가지고 이 원리 원칙을 그대로 키우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요. 그러면 이 안에 뭐가 들어 있겠어요? “마리아야 네 아들이다” 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겠지요? 이게 제가 보기엔 예레미야가 망하는 나라에 그 땅 남의 땅인데 부동산 투기한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 말입니다. 왜? 언젠가 약속은 약속대로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 때에 예레미야는 어떤 체험을 하느냐 하면은 바로 ‘망하는 체험’을 해요. 그게 예레미야 애가에 나옵니다. 애가가 무슨 뜻이에요? 애가가? 슬픈데 너무나 슬퍼서 허리가 슬퍼서 허리하고 몸통하고 떨어질 정도로 슬프다는 겁니다. 이 슬픔은 예레미야가 어디 뭐 죄 지어서 슬픕니까? 아니면 예레미야가 선지자니까 예레미야에게 짊어진 자기 인생의 몸 안에 하나님의 예언이 들어있거든요. 모태로부터 예정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여튼 신의 표상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의 표상이 아니고 시대 표상은 항상 십자가가 들어 있어요.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지요. 1장 18절인가 나오지요? 선지자에게 뭐가 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그 고난과 그 다음에 뭡니까? 고난과 그 다음에 올 영광을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거에요. 


노아가 방주 만드는게 뭐 재미있어서 만든줄 압니까? 이거 고난입니다. 안 해도 될 일을 하고있다고 보잖아요. 지금 감히 이야기합니다만은 저기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왔다가 가신 분들도 포함한다고 해줘야되겠지요.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은 감히 안해도 될 일을 해요. 그런데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할 것만 하고 안할 건 안합니다. 들을 것만 듣고 안들을 것  안 듣습니다. 자기 자랑하고 자기 존재 가치를 높이는 것만 듣고 슬퍼지기 위해서 순수슬픔에 참여하는 그것은 사람들은 안하지요. 


그래서 제가 십자가 이렇게 전하고 있으니까 많은데서 공격을 하는데 그 공격 중에 하나가  이근호 목사의 설교는 너무 부정적이다. 너무 부정적이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모르는거에요. 부정적일때만 순수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 부정적이란 말은 자기 비판하는 말이 부정적이라면 자기는 긍정적으로 살겠다는 거에요. 그렇죠? 


그런데 반대로 긍정을 뭐하게 됩니까? 긍정을 소유하게 되지요. 누구한테 소유해요? 나를 못 버려. ‘나’라는게 있고 거기에다가 긍정을 소유하려고 하는거에요. 자기가 자기한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이거 진짜 악마들린 자에요. 복음을 전해야 본인이 악마 들린지 알게 아니겠습니까. 복음을 전해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못 알아들으라고 이야기하는거에요 지금 못 알아들으라고. 필연적 존재는 못 알아듣고 우연적 존재는 알아듣는 거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지시지 않으면 오시지 않을 분인데 지금은 십자가 안 졌어요. 십자가 지고있는 중이잖아요 지금. 성령은 아직까지 40일 남았어요 40일 남았다고.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고요. 그렇다면 이 기간이 무슨 기간이냐? 이 기간이 바로 오늘날 성도의 삶의 기간이 되는 겁니다. 성도의 삶. 왜냐하면 아직 재림이 안됐다는 것. 재림이 안됐지만 재림이라는 약속은 부동산 등기본은 갖고 있어요. 예레미야하고 똑같아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영광스럽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십자가는 등기부는 있어가지고 남들은 자기 돈자랑하지만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하는거에요. 천하의 보물처럼. 


그런데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뭘 이야기한다? 순수슬픔을 제공하고 순수기쁨을 또 제공합니다. 순수슬픔은 바로 내 소유를 일체 인정하지 않고 내 모든 것을 강탈하는 것이 슬픔이 돼지요. 왜? 보호자가 없으니까. 나보고 혼자 살으래. 이 험하고 험한 이 세상에서 일산화탄소가 난무하는 펜션에서 나 혼자 살으래. 아까 식사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세상이 얼마나 이게 세상이 얼마나 참 더러운 타이밍인지 어느 한 펜션에서 그런 사고가 일어났잖아요. 


그러면 아무 죄도 없고 성실하기 짝이 없고 인간극장에 나와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다른 펜션 업자들 지금 망하게 생겼어요. 왜? 시설점검 다 들어가야 돼요. 그러면 은행 대출해서 시설 다 맞춰줘야 돼. 그리고 예약된거 있잖아요. 다 취소해요 줄줄이. 부모가 안 보낼 참이야 부모가. 어지간하면 부모가 따라오겠는데 부모도 이산화탄소 걸리면 자기 죽으면 안되잖아요. 아예 안 보내는게 낫지. 왜 한 펜션이 그런 사고 났는데 다른 펜션 줄줄이 막 연말에 이 대목에 장사 안되면 대출은 누가 갚습니까? 오리에 나는 병 있지요? 오리나 닭이나. 그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돼지고기에 있는 전염병 있지요? 


세상은 그런 세상이에요. 내 뜻대로 되는게 없어요. 성실하고요 착실하면 된다고요? 천만의 말씀. 뒤에서 떠미는데요. 떠밀면 같이 떠밀려야 돼요. 자, 지금 3명 죽었고 7명 질식 상태인데. 그중에서 질식상태인데 예수 믿는 사람 손들어봐. 교회 다니는 사람 손들어봐라. 분명히 있을걸요. 예수 믿는거 관계없지요.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주께서 하신 일이에요. 세상이 내 존재를 지키기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게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너무 의롭게 되려고 하지 마시고요. 오늘 마지막에 복음 나오네. 너무 의롭게 되려고 하지 마시고 너무 착하게 살려고 하지 마시고 너무 악하게 살려고 하지 마시고 중간쯤도 되지 마세요. 중간쯤 되지 마시고 그냥 막 사세요 그냥. 어차피 우리는 내 뜻대로 아니고 내 안에 부동산 등기등본 가지고 움직이는 거에요. 약속이 들어가요. 십자가에서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다만 아직까지 이 세상이 물론 성령 오면 달라지겠지만 새로운 체험은 그 성령 몫이에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디로 몰아넣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거는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니지요. 왜? 우리는 우연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 오늘 19장 남은 시간에 19장 읽어 봅시다. 여기에 19장 39절 누가 읽어봅시다. 19장 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o.k. 예. 여기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요한복음 몇 장이죠? 3장이야기죠. 요한복음 3장 보게 되면 니고데모는 완전히 맛이 간사람 이거는 네가 천당 가면 손에 장을 지진다 할 정도로 도대체 유대인 선생이면서도 아는게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지요. 니고데모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만 알고 있기에 니고데모도 몰랐던 거에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빈 무덤에 넣었는데 뭔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천국에 초청받은거에요. 그러니까 내 쪽에서는 주님의 필연이 되지만 주님이 쥐고 있으면 이거는 주님이 쥐고 있으면 니고데모는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천국에 참여해야 돼요. 뭐 뜻대로? 육이 아니고 영으로 거듭나야 되는 작업을 주님의 작업을 니고데모를 대상으로 하여 그걸 실시를 해버립니다. 그냥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농담 한마디 한 거 아니에요. 너보고 내가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필히 그렇게 되게 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니고데모가 등장하는 거에요. 


이 니고데모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 치웠다고 해서 나 이것 가지고 구원받겠다는 그러한 자기 존재 중심으로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하고싶은 거에요. 그냥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이게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는 것이 막사는 겁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서 그냥 막 사는 거에요. 막 사는데 오늘날 식으로 하면 미친 거에요. 이건 그야말로 이거는 돈 되지도 않고 누구한테 칭찬받을 일도 아니에요. 그냥 하고 싶어. 그냥 막 사는 거잖아요. 


41절 봅시다. 38절 안했지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예수님은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를 치뤘지요. 치뤘는데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41절의 말씀을 강조합니다. 아직 사람을 장사한일이 없는 무슨 무덤? 새 무덤이죠 새 무덤. 오늘 강의 제목을 이걸로 해도 괜찮다 싶어요 ‘새 무덤’. 


새 무덤은 누구만 사용한 무덤이냐 하면은 예수님만 사용한 무덤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공동묘원에 가든지 뭐 공동묘지에 가든지 이렇게 들어가잖아요. 주님께서는 이 예수님의 새 무덤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미리 부동산처럼 미리 집어넣어요. 그럼 우리는 이미 안 죽어도 그리스도의 새 무덤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육의 무덤에서 주님의 무덤으로 이전이 되어야 뭐가 되느냐 하면 약속대로 뭐가 되냐 하면 부활되는 겁니다. 부활이 돼요. 


그러면 성령이 하시는 일이 뭡니까? 우리가 이 무덤을 찾아갈 수가 없잖아요. 찾아가서 본다고 같이 누워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성령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 지지 않고서는 성령 안 오시지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그에 관련된 모든 사항이 십자가에요. 달랑 이것만 십자가가 아니고 모든 사항이. 그렇다면 성령께서 이걸 적용시켰다 하는 말은 예수님이 있던 이 죽음 사건 속에 죽음 사건을 우리 성도를 미리 사건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게 되면 우리는 살아있는데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뭐를 자랑하면서 살아있느냐 하면 이 십자가 안에 매여있다 라는 것을 자랑하라고 하는게 십자가에 매여있다. 그걸 빌립보서에서는 우리의 이름이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다? 골로새서 3장에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 20절입니까? 우리의 이름은? 하늘에.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우리의 등기등본은) 하늘에 있는지라” 라고 안 죽었는데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안에 있게 하는거에요. 갈라디아서 6장처럼 우리가 십자가 안에 있거든요. 십자가 안에 있으면 십자가 약속된 것은 다 우리에게 일어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게 슬픔의 현존성 또는 기쁨의 현존성, 순수슬픔. 주님만 체험했던 그 체험이 옛날 체험만 있던 우리에게 융합이 되면서 우리가 내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움직이는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육의 사람이라는 것이 망해야 될 조건인 동시에 이게 구원의 조건이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감사합니다. 육이 있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육도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주님의 하신 팩트 그 사실을 자랑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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