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9장 25절(순수 슬픔)181218b-이근호 목사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뭐든지 잘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잘하게 되면 내 존재가 부각이 되거든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존재를 원하는게 아닙니다. 이걸 이 세상을 사람들이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은 존재가 집결되는 것은 존재의 있음, 있는 것들, 눈에 띄는 것들 다 모여라. 존재의 집결을 이 세상의 현존성이라고 합니다. ‘현존성’. 현재 존재하는 성이라고 하거든요. 이 세상의 사람들은 뭐냐 존재하는 눈에 띄는 존재하는 집결성을 현존성이라고 하는데 주님은 십자가에서는 뭐냐? 존재하는게 아니고 ‘슬픔의 현존성’이에요.
이 세상은 ‘슬픔의 바다’에요. 슬픔의 바다에요. 그럼 목사님 언제까지 슬퍼야 됩니까?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슬퍼하는 자만이 기뻐할 수가 있어요. 슬퍼하는 자만이 기뻐할 수 있어요. 슬픔에 진입도 안한 사람은 기쁨에 도달할 수 없어요. 반드시 슬픔에 가서 도달해야 돼요. 우리는 마리아 아니지만 마리아의 자격으로 십자가의 앞에, 밑에 있어야 되고 마리아한테 한 이야기가 곧 우리한테 이야기한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보호할 생각하지 마세요. 아까 그랬잖아요. 뭐든지 잘 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예수님을 지키려고 하지마세요. 세살 먹은 애한테 집 부도난 책임을 물을 필요는 없어요. 그렇지요? 까불면 안돼요 또. 호주에서 까불다가 아버지 사기치고 호주에 왔는데 자기는 랩한다고 한국에 와가지고 우리집 100평짜리다 까불다가 자기 아버지 사기꾼인거 들통났잖아요. 까불면 안되지만 자기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우리 인생이 우리가 책임지지 마세요. 책임지겠다는 그 자체가 이거는 불신앙입니다.
이거는 왜 책임을 지려고 하느냐 하면 존재의, ‘나’라는 내 중심 존재의 세상을 생각해서 거기에 나도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자꾸 느끼고 싶어서 하는거에요. 한편으로 나를 인정해달라 이 말이에요. 한편으로. 같은 나하고 좀 놀아죠 이렇게 하는 거에요. 존재의 집결성이니까. 그러나 교회는 슬퍼하는 자의 집결성이에요. 슬퍼하는 자만이 십자가만을 가지고 기뻐하는 겁니다. 이 말은 사실 예수님 이런 말할 때 다른 사람 보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할 때 곧 자기 돌아가시면서 이런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 이루었다 죽어가면서 다 이루었다 했지요 여기에 29절입니까? 30절 “다 이루었다”하지요. 다른 사람보면 미친거죠.
그러나 같이 미치지 아니하면 안돼요 우리가. 예수님 미친만큼 미쳐야돼요. 같이 미치지않으면 이 십자가를 이해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미쳐도 괜찮아요. 왜? 안 미쳐도 미친놈이니까 우리는. 이래도 미치고 저래도 미치고 좋게 미칩시다. 멀쩡해도 미친 인간이고 환자거든요 병자니까.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다 미친건 마찬가지니까 뭐든지 잘 할 필요는 없어요. 주님을 지키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슬픔의 현존성’, 이 말은 주님께서는 슬픔을 우리에게 극대화시켜서 십자가만이 영원한 기쁨이 되게 하는겁니다. 지난 금요일입니까? 의존강의에서 했지요. 예수님의 기쁨이 있기에 희생하는 것도 기쁨이 된다고요. 희생에 주저주저하는 것은 지금, 나로 인하여 기쁨을 자기가 스스로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으로 기뻐하게 되면 주님으로 기뻐해서 골프 치는 것도 순교거든요. 자꾸 희생을 고생고생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기쁨의 원천을 어디에 두고있는지 보란 말이죠.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고린도후서 5장에서 내가 미쳤다고 했거든요. 나는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고 했거든요.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는 이것이 정말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사도 바울은 편지에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이 기쁨을 묘사하기 위해서 이게 얼마나 기쁨인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술 취할 때의 기쁨을 묘사했어요. 술 취할 때의 기쁨을 기준으로 삼는 겁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그런데 성도도 같이 이렇게 취해야 되는데 어디에 취하느냐?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그런데 취하게 되면 결과는 미치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술에 취해도 개 되고 성령에 취해도 개 되는 것은 마찬가지거든요. 정상이 아닙니다. 이왕이면 성령에 기쁨에 도취되자는 말이죠. ‘안녕 바다’라는 남자 3인조가 부른 노래가 있어요. 노래 제목 알아요? 혹시? 몰라요? 이거에요. 별빛이 쏟아진다 샤바샤바 그 노래라니까. 별빛이 쏟아진다 인가? 그런 노래. 아 별빛이 내린다 샤랄랄라라 그 노래에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복음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목자들의 벌판에 천사들의 영광이 별빛 내리듯이 화사하게 그냥 하늘에서부터 출발한 조명발이 화사하게 그냥 별빛이 막 쏟아지는거에요. 사랑이죠 사랑이. 용서가 막 쏟아지는거에요. 그 얼마주면 그걸 얻을 수 있습니까? 돈 얼마를 내면. 주님의 주특기는 덮치는 겁니다. 저는 강간이라고 하는데 그걸. 주님의 주특기가 강간이에요. 왜냐하면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기 때문에.
주님 이거 헌금 가져왔으니까 이렇게 하면 헌금 액수도 안보고 그냥 덮쳐버려요. 그럼 깔리지요. 그냥 깔리는데 그 깔아뭉개는 사람이 현빈이라면 세상에 이런 행복. 기다렸던 강간이잖아요. 그만한 인물같으면 인간성 후져도 괜찮잖아요. 그만한 인물같으면. 주님은 인간성 엉망이에요. 그냥 덮치는거에요 그냥. 별빛이 내린다 샤랄라라라 그냥 뿌리는거에요. 그냥 막 뿌리는거에요 막 사랑을. 헌금 내나 안내나 막 뿌려요. 기도 하나 안하나 막 뿌려버려요.
하늘에서 색종이 내려오듯이. 은하수가 빗물처럼 쏟아지듯이 그냥 오는거에요 용서가. 그걸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했느냐하면 너 취했나? 너 취했나? 너 제정신 아니지? 그런 뜻이거든요. 취하면 제정신 아니잖아요. 인간정신이겠습니까? 성령에 취해버리면 별빛이 내린다 그렇게 되어버려요. 그 노래 지은 사람이 성령에 취해서 노래지었나.
아까 마태복음 9장 다시 봅니다. 슬픔의 시작은 신랑을 잃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이걸 조심해야 돼요. 이건 엉터리거든요. 그 예수님의 고난가지고 멜깁슨이 만든 영화있지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의 고난, 아픔이잖아요. 그 영화는 정말 그거는 마귀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그러냐 하면, 짜내, 아예 동정심을 짜내요. 별빛이 쏟아지는게 아니고 짜낸다고요. 네가 세상 편하다고 하지말고 주님의 아픔을 보면서 눈물 좀 짜내라는거에요.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 흘리는 눈물은 뭐냐 하면은 교만입니다. 이게 교만이에요.
‘나’에서 나오는 것은 그게 눈물인지 콧물인지 전부다 교만이에요. 울기는 미쳤다고 울어 왜 우냐고요 왜? 아직도 나는 남을 동정할 수 있는 뭐 여력이 있다는 것을 자랑질하는거에요? 아까 그 말씀 제게 되게 은혜 되네요. 뭐든지 잘할 필요 없다는 그 말. 울 필요가 없어요. 물론 잘하겠다는 그 자체가 상당히 악마적입니다. 교만이란 나에서부터 나오는건 다 교만입니다. 그리고 교만 아닌 것은 주님께서 내려온 샤랄라라라 내려온 것은 교만 아니에요.
주님께서 내려온 것은 우연입니다. 우연의 특징은 내가 그걸 소지할 수 없다는 거에요. 소유할 수 없다는 거에요. 우리는 소유하면 내빼기 바쁘거든요. “고맙습니다 주님”하고 내빼기 바빠요. 또 옛날처럼 독자적으로 살려고 해요. 제가 여기 강의에도 했고 여러번 강의에도 했는데 대구강의에도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성도가 삶이 유령같은 삶을 살아야 된다. 안양강의에도 그런 이야기했지요? 관 뚫고 심심해가지고 죽은 자가 장례식에서 아이고 바람 좀 쐬러 나오지요. 그 유령같은 존재의 특징은 소유개념이 없어요. 왜? 유령이니까. 왜? 포켓이 없어. 넣으면 다 새 주머니가 없어가지고 아이고 뭘 가질 필요가 없어요. 유령이니까.
소유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유령됨을 가지고 그 자유함을 가지고 기뻐하지요. 얽매이지 않는걸 가지고 기뻐하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들 그 이야기를 딴사람에게 하게 되면 뭐라고 하겠어요? 이상하게 된게 아닌가 하겠지요. 원래 우리 술 취했어요 지금. 원래 미쳤어요 지금. 술 취한겁니다 지금. 우리는 지금 십자가 밑에 지금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요. 본문 19장 본문 자체가 그러니까.
슬픔의 시작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이 세상이 성도에게 어떤 변화를 줬느냐 하면 그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슬픔을 체험케 하는겁니다. 왜? 들어오셨다가 잃어버렸기 때문에. 왔다가 빠졌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제목은 “추가된 슬픔”이에요. 추가된 슬픔. 우리가 짜낸 슬픔이 아니고 우연한 슬픔이에요. 이건 내가 예수님 채찍 맞으면 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 보면 진짜 놋 있는 채찍으로 막 등짝을 때려요. 그러면 살점이 툭툭 튀어나오지요. 군중 속에 마귀가 있는데 마귀가 씨익 웃고 있고 뭐 그런 대목이 나와요. 얼마나 아프겠느냐. 그러나 아파서 매 맞아서 구원 못받습니다. 똥배 나왔다고 지옥 보내시는 분이 아니에요. 똥배 줄인다고 애를 먹지만 하여튼 똥배 나왔다고 지옥가는게 아니에요.
일체 우리에 대해서는 안 받습니다. 우리는 안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미치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광인이 되는 것은, 아주 나의 고상한 어릴 때 있던 신적 부모의 그 은사 가르침에 의하면 절대로 우리 가문과 가정을 생각하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미치면 안돼요. 사람이 안 미치고자 하는 짓이 바로 자살 아닙니까. 안 미치려고 하는 것이 자살이거든요. 미치면 되는데 안 미치려고 하는게 자살이에요. 자살 안해도 미치는건 마찬가지인데. 자기는 어릴 때 오인, 잘못 생각한 것이 꽉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점잖으면 인간다운 줄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없어요. 거기 전부다 마귀한테 미친 인간들밖에 없어요. 자기 선악에 미친 자기자랑, 십자가 아니고 자기 자랑에 미친 인간들밖에 없어요. 교회 한번 가보세요 전부 자기 자랑하지요.
부부싸움의 원인은 뭐냐? 각자 자기 자랑한다고 싸워요. 자기 정당성 자랑하기 때문에 부부싸움하는겁니다. 뭐 어쨌다고 그래?! 이러거든요. 뭐 어쨌다고 그래?!! 부부싸움의 원인은 안 슬퍼하려고 하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한쪽이라도 한사람만 슬퍼하면 돼요. 그래 나 이상해. 나 이상한거 같애. 슬퍼하면 되는데 기어이 안 슬퍼하려고 안 미치려고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건 사단나는 겁니다.
자,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그냥 환상이에요. 환상에서 이 세상 현실이라 할 때는 반드시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바로 슬픔이 주어지는데 이게 슬픔이 우리가 아는 슬픔이 아니고 우리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슬픔, ‘예수님의 슬픔’이죠. 예수님이 자기 보호자를 잠시나마 떼어놓을 때 오는 그 ‘단절의 슬픔’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내가 지켜야 될 보호자를 내가 지키지 못하고 지금 돌아가시게 될 처지에서 자기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는 그 주님.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사도 요한의 가르침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고 마리아도 성령받아야 구원받지 누구 가르침 받는다고 구원되는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성령 올 때까지는 아직 텀이 있어요. 아직 기한이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오는 단절의 슬픔 그것을 이야기하는거에요. 너희들이 잠시 슬퍼하지만 다시 내가 성령을 주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거는 만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놀라운 기쁨이 오지요. 그러면 추가된 슬픔에게만 추가된 천국의 기쁨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전에 했는데요.
요한복음 16장 21절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다음에 뭡니까? 뭐를 다시 기억치 아니한다?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 고통을. 그러니까 이 말씀대로 하게 되면 상당히 이러한 역설의 구조에 놓이게 됩니다. 계속해서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을 상실하는 슬픔이 반복되어야 되지요. 슬펐다가 기뻤다가 슬펐다가 기뻤다가 되풀이되야 되는거에요. 그러면 목사님 진짜 미치는거 아닙니까? 진짜 미치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에 보내느냐 하면 세상에 보냅니다. 세상에 보내면 우리가 아무리 성령 받았다 하지만 어디에 친숙해왔었습니까 그동안. 세상 자랑질 대회하는데 자랑질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어 네 집안이 잘났어 내 집안이 잘났어 부부싸움하는지 모르겠지만 자기 정당화와 자기 뽐내는데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외부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도 있겠지만 우리가 뭘 갖고 있느냐 아직 육신은 가지고 있잖아요.
육신이 육신의 본색을 다 뜯어내려면 우리는 아직도 90까지 살아야 됩니다. 내 육신때문에 내가 까불다가 엎어지고 자빠지고 해야 돼요. 육신적으로 우리가 갖고있던 우상숭배죠. 내가 신이니까. 나 건드리지마 나는 신이야 까불다가 성령에 의해서 작살날 때 우리는 갑자기 슬퍼하다가 동시에 별빛이 내린다 갑자기 세상에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그 사랑이 막 쏟아질 때 이거 어떻게 말로 형용합니까. 하나하나가 용서고 사랑인데요.
사랑받아가지고 좋다 너무 좋다 하는데 엄마 나 또 성적 내려갔어 이러면 이게!! 갑자기 샤랄라 하다가 갑자기 저래가지고 서울 어디라도 가겠나? 걱정 되가지고 코디 부르고 또 sky캐슬 그것처럼 과외시키고 또 난리를 친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친거 맞아요. 뜨신 물 됐다가 찬물됐다가 온탕 냉탕 온탕 냉탕 목욕탕 주인 보면 저게 미쳤나? 요금 오천원내고 온탕 냉탕 왔다갔다 하고 있어요. 온탕 냉탕을. 그래도 시원한 냉탕에 있는 것만 해도 샤랄라라입니다 정말. 그거 없는 사람 지옥갑니다.
내안에 나의 세상적이고 육적인 본성을 이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원인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만 그걸 알 수 있어요. 에베소서 잠깐 한번 볼까요? 에베소서 이거 보고 어려운거 한번 해봅시다. 에베소서 1장 8절에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지요? 자, 알리는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누굽니까? 주님이 알려주죠. 뭘 알려준다고 했습니까. 7절에 보니까 뭐로 알려줍니까? 그의 피로 말미암아 뭐를 얻는거? 죄 사함에 관한 내용은 우리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게 아니에요.
이거는 그다음에 18절 봅시다.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정신이라고 되어 있는데 영이거든요. 지혜와 계시의 영 그러니까 성령을 우리에게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의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알려주지요. 아까 이야기한 그 죄 사함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그 일을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주님이 하시지요. 그러면 그걸 하려면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어야 돼요? 우리가 알아서 알면 안되지요. 그렇지요? 우리가 알아서 알면 안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서 모르고 있는 상태여야 되잖아요. 이게 망나니에요 망나니. 막사는 것. 망나니 풀어놓으면 어떻습니까? 이건 뭐 지 마음대로 살지요. 우리는 망나니 같애. 하고싶은대로 뭐 다하고 그렇게 살아요. 그렇게 사는데 그렇게 사는 우리에게 주께서 성령을 주게되서 보게 되면 아 내 맘대로 산다는 이것이 결국은 어떻습니까? 이게 바로 육이었다는 것. 그래서 찬물 뜨신물 찬물 뜨신물 늘 이렇게 바꾸어서 하는거에요. 내가 내 마음대로 살 때는 우리가 주님 자랑합니까? 내 자랑 합니까? 누구 자랑하지요? 나 혼자 살 때는. 마음대로 산다는건 뭡니까? 우리 본성대로 산다는 것은 나 잘났다 하기 위해서 사는거잖아요. 나 잘났다. 그렇게 사는거에요.
자, 그러면 다시 오늘 본문에 들어가게 되는데 자 예레미야 32장 한번 봅시다. 이건 좀 어려워요. 예레미야 32장 폈지요? 피고 난 뒤에 요한복음 19장,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엄마한테 부탁하기를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에게 이제 부탁하면 이제부터는 저분이 이번엔 저분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당신을 보호해줄겁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 마리아가 구원이 완료된 상태에요? 완료되지 않은 상태입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지요? 십자가 지지 아니하면 뭐가 안 옵니까? 십자가 지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뭐가 안와요? 성령이 오지 않지요. 이점이 성령의 내용의 핵심 부분입니다. 성령의 내용의 핵심부분. 성령을 이렇게 동그라미 쳐봅시다. 성령을 동그라미 치게 되면 이게 성령입니다. 이게 도넛 비슷한데 성령이라고 치고 성령 안에 성령의 내용을 한번 기재해보세요 적어보세요 한다면 이렇게 적어요. ‘십자가 지지 아니하면 오시지 않을 분’.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100점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100점이에요.
성령을 설명하면서 성령을 이야기하면 안돼요. 성령을 성령으로 이야기해버리면 십자가 다음에 성령이 온다는 이 순서의 핵심부분을 놓치게 돼요. 제일 중요한 것이 누락되어 버려요. 그러면 하나의 성령이 아니고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가 되어버립니다. 강력한 에너지가 되어 버려요. 인간은 힘을 원하고 있잖아요. 성령하니까 주여 성령께서 오셔서 불같이 오셔서 뜨겁게 하옵소서. 뜨겁게 하는 것은 난로 이렇게 붙들고 있으면 뜨겁게 돼요. 성령까지 갈 것도 없어요. 우리교회 난로 앞에 한 1분만 서있으면 뜨겁게 돼요.
성령은 나 에너지를 주기 위해서 에너지 있어야 구원받는, 구원받는 에너지 능력주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럴거 같으면 십자가 관계없이 미리 와도 괜찮아요. 십자가 지기 전에 제자들에게 미리 와도 괜찮아요. 그러나 제자들은 물세례 받았어요. 그렇지요? 제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은 언제냐? 오순절날 예수님 부활하고 난 40일 이후에 개인적으로 받는 것은 소용없어요. 개인적으로 성령이 임하다 뭐 그런 대목 있는데 하여튼 성령은 개인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와야 돼요. 집단적으로.
집단적으로 온 것은 하나의 이스라엘로 하나의 열두제자들을 집단화시킬 때 그때 성령이 오는거에요. 그럼 성령이 오실 때 왜 순서를 순서가 왜 중요하냐 하면은 성령의 내용 자체가 성령이 성령 이야기하려고 오신게 아니에요. 요한복음 16장 나오지요. 나를 이야기하려고 하는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내 뒤에 오신 보혜사가 오시는 거에요. 성령님은 보혜사가 아니고 다른 보혜사예요. 첫 번째 보혜사 보호자가 누구냐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의 기능을 연속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종속적이에요. 성령은 주님에 종속적이어서 ‘예수의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의 영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나와요. 그걸 그리스도의 영이라도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영이라고 하거든요. 자, 그렇다면 십자가 지지 아니하면 오시지 않는 분이라면 그러면 성령오기 전까지는 지금 마리아는 마리아뿐만 아니라 마리아+3, 4인의 마리아는 어떤 상태에서? 구원되지 않는 상태가 되있지요. 유보된 상태에 있어요. 막간이지만 ‘막간’. 막간상태가 되지요. 이거하고 그렇다면 아까 찾으라고 하신 예레미야 32장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거기 예레미야 32장에 보면 그 예레미야가 부동산 구입을 해요. 일종의 투기를 하는 겁니다. 투기를 하는데 왜 투기를 하느냐? 땅값이 오른다는 거에요. 선지자가 이런 돈벌이를 할 줄 몰랐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슬픔은 우리가 예상 못한 슬픔이라고 했고 기쁨은 우리가 예상 못한 기쁨이죠.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바룩의 땅을 사라라고 그것도 증서를 하라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예상 못한 땅값상승입니다. 왜 예상을 못하느냐 하면은 지금 예레미야가 줄곧 외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이스라엘은 망한다는 겁니다. 망해요. 바벨론에 완전 포로 잡혀가요. 그러면 이들은 어디 가느냐? 전부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기 때문에 고향은 이제 더 이상 고향이 아니에요. 어디가 고향이냐 하면은 거기에 바벨론 그 땅이 고향이 되는 겁니다.
거기까지 여러분 잘 이해되시겠지요? 이해되신다 치고 이것을 이렇게 선지자 이야기를 이렇게 제가 공식화시켜보겠습니다. 새로운 체험에 의해서 나온 질문이 기존 언약을 변동시킨다. 기존 언약을 변동시킨다. 기존 언약이라고 해도 되고 기존 계시라고 해도 되고 기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되고 다 괜찮아요. 새로운 체험. 누구에게 새로운 체험? 선지자에게 주어진 새로운 체험에 의해서 나온 질문이 기존 새로운 언약을 변동 또는 변화시키는 거에요. 더 정답에 가까이 보여주게 만들어요.
만약에 우리 둘이 이야기를 한다고 합시다. 나는 안다고 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목사님 그거 잘못됐습니다. 그거 아니고 이겁니다” 라고 했을 때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은 본인의 체험이죠. 나는 내 체험 밖에 모르잖아요. 새로운 내가 모르는 새로운 체험이 어떤 형식으로? 질문형식으로 주어질 때 질문을 해대고 또는 반응 또는 응답현상이 주어질 때 기존에 내가 알고있던 것과 결합이 되면서 새로운 내용이 형성되는 거에요. 구약 이스라엘은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는 겁니다. 마리아의 네명의 마리아 4인조 마리아, 마리아 밴드 만들겠다. 베이스 보컬...이 네명 마리아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새로운 체험이 필요해요.
어떤 인간이든 간에 주어지게 되면 그걸 정당화하는 버릇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인간은. 왜 인간은 정당화하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존재의 합일이 현존이라고 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나’하고, ‘나’하고 뭉쳐서 보기 때문에. 따라서 내가 있는 한 진리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흔들어버려요. 그들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아는 것도 그 정도도 정답으로 여겼는데 아 그게 영 미흡하고 영 어설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신약 때가 아니고 구약 때예요. 구약은 아직 언약에 도달을 안했습니다. 십자가에 도달 안했어요. 계속해서 주고받고 새로운 체험 새로운 체험 계속 있어야 되는 겁니다. 제가 그 성지순례 성지답사를 하기 전에 그게 그냥 역사적 산물이고 가봐야 장사치고 볼 거 뭐 있겠느냐 돈 주고 가라하니 또 가야지 또 여행가면 신나잖아요. 수학여행같이 신나서 뭐 내 아는거 가봤거든요. 어디서 내가 깨졌느냐 하면은 내가 여러번 여러분한테 사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목자들의 들판. 웅성웅성하던 그 예루살렘이 아니고 한가한, 눈에 펼쳐진 목자들의 들판을 보는 순간 이거는 필연이 아니고 우연입니다. 다음에 가도 그리 안해요.
순간 내가 뭐가 되느냐 하면 갑자기 목자가 되고 들판이 뭐냐? 들판이 뭐냐? 천사가 별빛이 내린다 샤랄라라라라. 천사들의 은총이 그 벌판에 가득 차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럼 이건 뭘 뜻하느냐 하면 내가 알던 모든 예수님의 탄생의 이 모든 것이 팩트라는 사실이에요. 팩트라는 사실은 뭐냐 하면 목숨 걸어도 괜찮은거다 이 말이에요 내가. 내가 그만 살고 가스에 취해가지고 죽던지 내가 그만 산다할지라도 여한이 없는거에요. 죽어도 상관없어 또는 죽어도 좋아가 되는 거에요 그 순간.
죽으면 안돼라는 그러한 내 체험이 그 순간 섰을 때 여기서 내 목을 따시옵소서. 코카콜라 따듯이 여기서 내 목숨을 따도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자발적 죽음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자발적 죽음이. 모든 수고한 짐은 다 끊어놨기 때문에. 내 목숨과 충분히 바꿀만한걸 알게됐다 이 말입니다. 아~~내가 목자들의 입장이 되가지고 천사들이 왔을 때 그 예수님 태어난 곳에 안 가보겠습니까? 달려가 가보겠지요. 우리는 차타고 갔어요. 거기 한 2km 되는데요. 2km쯤 되는데 거기 예수탄생 교회에요. 30분 줄섰는데 도저히 못갔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예수탄생 도는데 두시간 걸린답니다. 잘 안갔다 싶었어요. 두시간 어떻게 허비하겠어요.
노르웨이 핀란드 저쪽 북쪽에서 온 그 80넘은 사람들 줄 쫙 서서 가는데 그거 어떻게 그거 두시간 기다립니까. 아기예수 있는데 들어가면 겸손하라고 마음을 낮추라고 고개 숙이고 들어가요 이렇게 일부러. 중세때 그렇게 만들어 놨답니다. 그 베들레헴에 거기서 목자가 달려와서 내리막길이거든요. 달려와가지고 내려와서 아기 예수 태어난걸 그걸 본거에요. 그렇다면 거기 있는 줄줄이 이어지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 이것도 사실이거든요. 세상에 사실 진리를 알게되면요 인생 누구 말대로 진짜 노숙자해도 괜찮아요. 인생 노숙자되고 진짜 걸레되어도 괜찮아요. 애 이산화탄소 때문에 펜션 가서 죽었다고요? 괜찮아요. 주께서 죽였는데 뭐.
저는 이것을 오늘 제목을 이걸로 바꿀까 합니다. 순수슬픔. 순수슬픔. 어지간한 슬픔도 슬픔이 아니다. 어지간한 슬픔도 슬픔이 아니여야 해요. 아직도 슬퍼할게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순수하지 않습니다. 샤랄라라 아니에요 지금. 자기가 짜낸 자기가 두려움 공포에서 나온 슬픔이에요. 아 안됩니다 아니되옵나이다 이런거 있잖아요. 그거 가지고 마귀가 벌벌 떠는 거죠. 예레미야가 부동산 투기를 해놓고 땅 사놓고 딱 등기 자기 앞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 바벨론에 가요. 사람들은 망했다고 할거에요. 하지만 ‘예레미야야 땅 샀지?’, ‘네’, ‘그거 네 땅 도로 찾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자, 여기서 어려운게 있어요. 지금 부탁을 했잖아요. 마리아한테. 그렇다면 마리아의 부탁이 뭐냐 하면 아까 했던거 다시 해봅시다. 예수님은 세상에 들어오신 분이 아니고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서 집어넣은 분이죠. 그럼 만들 때 뭐로 만들었습니까? 십자가 안에 있는 외친 내용을 가지고 이 원리 원칙을 그대로 키우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요. 그러면 이 안에 뭐가 들어 있겠어요? “마리아야 네 아들이다” 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겠지요? 이게 제가 보기엔 예레미야가 망하는 나라에 그 땅 남의 땅인데 부동산 투기한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 말입니다. 왜? 언젠가 약속은 약속대로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 때에 예레미야는 어떤 체험을 하느냐 하면은 바로 ‘망하는 체험’을 해요. 그게 예레미야 애가에 나옵니다. 애가가 무슨 뜻이에요? 애가가? 슬픈데 너무나 슬퍼서 허리가 슬퍼서 허리하고 몸통하고 떨어질 정도로 슬프다는 겁니다. 이 슬픔은 예레미야가 어디 뭐 죄 지어서 슬픕니까? 아니면 예레미야가 선지자니까 예레미야에게 짊어진 자기 인생의 몸 안에 하나님의 예언이 들어있거든요. 모태로부터 예정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여튼 신의 표상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의 표상이 아니고 시대 표상은 항상 십자가가 들어 있어요.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지요. 1장 18절인가 나오지요? 선지자에게 뭐가 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그 고난과 그 다음에 뭡니까? 고난과 그 다음에 올 영광을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거에요.
노아가 방주 만드는게 뭐 재미있어서 만든줄 압니까? 이거 고난입니다. 안 해도 될 일을 하고있다고 보잖아요. 지금 감히 이야기합니다만은 저기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왔다가 가신 분들도 포함한다고 해줘야되겠지요.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은 감히 안해도 될 일을 해요. 그런데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할 것만 하고 안할 건 안합니다. 들을 것만 듣고 안들을 것 안 듣습니다. 자기 자랑하고 자기 존재 가치를 높이는 것만 듣고 슬퍼지기 위해서 순수슬픔에 참여하는 그것은 사람들은 안하지요.
그래서 제가 십자가 이렇게 전하고 있으니까 많은데서 공격을 하는데 그 공격 중에 하나가 이근호 목사의 설교는 너무 부정적이다. 너무 부정적이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모르는거에요. 부정적일때만 순수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 부정적이란 말은 자기 비판하는 말이 부정적이라면 자기는 긍정적으로 살겠다는 거에요. 그렇죠?
그런데 반대로 긍정을 뭐하게 됩니까? 긍정을 소유하게 되지요. 누구한테 소유해요? 나를 못 버려. ‘나’라는게 있고 거기에다가 긍정을 소유하려고 하는거에요. 자기가 자기한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이거 진짜 악마들린 자에요. 복음을 전해야 본인이 악마 들린지 알게 아니겠습니까. 복음을 전해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못 알아들으라고 이야기하는거에요 지금 못 알아들으라고. 필연적 존재는 못 알아듣고 우연적 존재는 알아듣는 거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지시지 않으면 오시지 않을 분인데 지금은 십자가 안 졌어요. 십자가 지고있는 중이잖아요 지금. 성령은 아직까지 40일 남았어요 40일 남았다고.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고요. 그렇다면 이 기간이 무슨 기간이냐? 이 기간이 바로 오늘날 성도의 삶의 기간이 되는 겁니다. 성도의 삶. 왜냐하면 아직 재림이 안됐다는 것. 재림이 안됐지만 재림이라는 약속은 부동산 등기본은 갖고 있어요. 예레미야하고 똑같아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영광스럽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십자가는 등기부는 있어가지고 남들은 자기 돈자랑하지만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하는거에요. 천하의 보물처럼.
그런데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뭘 이야기한다? 순수슬픔을 제공하고 순수기쁨을 또 제공합니다. 순수슬픔은 바로 내 소유를 일체 인정하지 않고 내 모든 것을 강탈하는 것이 슬픔이 돼지요. 왜? 보호자가 없으니까. 나보고 혼자 살으래. 이 험하고 험한 이 세상에서 일산화탄소가 난무하는 펜션에서 나 혼자 살으래. 아까 식사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세상이 얼마나 이게 세상이 얼마나 참 더러운 타이밍인지 어느 한 펜션에서 그런 사고가 일어났잖아요.
그러면 아무 죄도 없고 성실하기 짝이 없고 인간극장에 나와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다른 펜션 업자들 지금 망하게 생겼어요. 왜? 시설점검 다 들어가야 돼요. 그러면 은행 대출해서 시설 다 맞춰줘야 돼. 그리고 예약된거 있잖아요. 다 취소해요 줄줄이. 부모가 안 보낼 참이야 부모가. 어지간하면 부모가 따라오겠는데 부모도 이산화탄소 걸리면 자기 죽으면 안되잖아요. 아예 안 보내는게 낫지. 왜 한 펜션이 그런 사고 났는데 다른 펜션 줄줄이 막 연말에 이 대목에 장사 안되면 대출은 누가 갚습니까? 오리에 나는 병 있지요? 오리나 닭이나. 그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돼지고기에 있는 전염병 있지요?
세상은 그런 세상이에요. 내 뜻대로 되는게 없어요. 성실하고요 착실하면 된다고요? 천만의 말씀. 뒤에서 떠미는데요. 떠밀면 같이 떠밀려야 돼요. 자, 지금 3명 죽었고 7명 질식 상태인데. 그중에서 질식상태인데 예수 믿는 사람 손들어봐. 교회 다니는 사람 손들어봐라. 분명히 있을걸요. 예수 믿는거 관계없지요.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주께서 하신 일이에요. 세상이 내 존재를 지키기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게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너무 의롭게 되려고 하지 마시고요. 오늘 마지막에 복음 나오네. 너무 의롭게 되려고 하지 마시고 너무 착하게 살려고 하지 마시고 너무 악하게 살려고 하지 마시고 중간쯤도 되지 마세요. 중간쯤 되지 마시고 그냥 막 사세요 그냥. 어차피 우리는 내 뜻대로 아니고 내 안에 부동산 등기등본 가지고 움직이는 거에요. 약속이 들어가요. 십자가에서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다만 아직까지 이 세상이 물론 성령 오면 달라지겠지만 새로운 체험은 그 성령 몫이에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디로 몰아넣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거는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니지요. 왜? 우리는 우연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 오늘 19장 남은 시간에 19장 읽어 봅시다. 여기에 19장 39절 누가 읽어봅시다. 19장 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o.k. 예. 여기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요한복음 몇 장이죠? 3장이야기죠. 요한복음 3장 보게 되면 니고데모는 완전히 맛이 간사람 이거는 네가 천당 가면 손에 장을 지진다 할 정도로 도대체 유대인 선생이면서도 아는게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지요. 니고데모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만 알고 있기에 니고데모도 몰랐던 거에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빈 무덤에 넣었는데 뭔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천국에 초청받은거에요. 그러니까 내 쪽에서는 주님의 필연이 되지만 주님이 쥐고 있으면 이거는 주님이 쥐고 있으면 니고데모는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천국에 참여해야 돼요. 뭐 뜻대로? 육이 아니고 영으로 거듭나야 되는 작업을 주님의 작업을 니고데모를 대상으로 하여 그걸 실시를 해버립니다. 그냥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농담 한마디 한 거 아니에요. 너보고 내가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필히 그렇게 되게 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니고데모가 등장하는 거에요.
이 니고데모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 치웠다고 해서 나 이것 가지고 구원받겠다는 그러한 자기 존재 중심으로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하고싶은 거에요. 그냥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이게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는 것이 막사는 겁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서 그냥 막 사는 거에요. 막 사는데 오늘날 식으로 하면 미친 거에요. 이건 그야말로 이거는 돈 되지도 않고 누구한테 칭찬받을 일도 아니에요. 그냥 하고 싶어. 그냥 막 사는 거잖아요.
41절 봅시다. 38절 안했지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예수님은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를 치뤘지요. 치뤘는데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41절의 말씀을 강조합니다. 아직 사람을 장사한일이 없는 무슨 무덤? 새 무덤이죠 새 무덤. 오늘 강의 제목을 이걸로 해도 괜찮다 싶어요 ‘새 무덤’.
새 무덤은 누구만 사용한 무덤이냐 하면은 예수님만 사용한 무덤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공동묘원에 가든지 뭐 공동묘지에 가든지 이렇게 들어가잖아요. 주님께서는 이 예수님의 새 무덤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미리 부동산처럼 미리 집어넣어요. 그럼 우리는 이미 안 죽어도 그리스도의 새 무덤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육의 무덤에서 주님의 무덤으로 이전이 되어야 뭐가 되느냐 하면 약속대로 뭐가 되냐 하면 부활되는 겁니다. 부활이 돼요.
그러면 성령이 하시는 일이 뭡니까? 우리가 이 무덤을 찾아갈 수가 없잖아요. 찾아가서 본다고 같이 누워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성령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 지지 않고서는 성령 안 오시지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그에 관련된 모든 사항이 십자가에요. 달랑 이것만 십자가가 아니고 모든 사항이. 그렇다면 성령께서 이걸 적용시켰다 하는 말은 예수님이 있던 이 죽음 사건 속에 죽음 사건을 우리 성도를 미리 사건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게 되면 우리는 살아있는데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뭐를 자랑하면서 살아있느냐 하면 이 십자가 안에 매여있다 라는 것을 자랑하라고 하는게 십자가에 매여있다. 그걸 빌립보서에서는 우리의 이름이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다? 골로새서 3장에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 20절입니까? 우리의 이름은? 하늘에.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우리의 등기등본은) 하늘에 있는지라” 라고 안 죽었는데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안에 있게 하는거에요. 갈라디아서 6장처럼 우리가 십자가 안에 있거든요. 십자가 안에 있으면 십자가 약속된 것은 다 우리에게 일어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게 슬픔의 현존성 또는 기쁨의 현존성, 순수슬픔. 주님만 체험했던 그 체험이 옛날 체험만 있던 우리에게 융합이 되면서 우리가 내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움직이는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육의 사람이라는 것이 망해야 될 조건인 동시에 이게 구원의 조건이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감사합니다. 육이 있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육도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주님의 하신 팩트 그 사실을 자랑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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