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십자가반복 18112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2. 3. 18:17
2018-11-21 02:11:47조회 : 328         
십자가 반복 181120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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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125.♡.152.223)18-12-03 14:04 
강남-요한복음 19장 3절(십자가 반복)181120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9장 3절부터 하겠습니다. 1절부터 보면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 했고 군병들이 가시면류관 엮어서 머리에 씌우고 자색옷을 입히고 이렇게 했지요. 이 빌라도 예수님한테 무슨 감정이 있습니까? 무슨 사적인 감정이 있어요? 감정이 없지요. 


누구를 의식하느냐 하면은 빌라도가 총독이죠. 총독인데 총독의 통치 받는 그 지역이 민중들이 분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책임이 자기의 중앙정부로터 로마의 중앙정부로부터 자기가 책임추궁을 당해요. 평화롭게 돼야 되거든요 평화롭게. 


평화롭게 돼야 되는데 자유를 얻으려면요 평화를 포기해야 돼요. 그리고 평화를 얻으려면 자유를 포기해야 됩니다. 자유를 얻겠다하면 평화를 포기한다는 말은 곧 무슨 상태에 들어가느냐 하면 전쟁 투쟁 상태에 들어가는 거에요. 자유 또는 자유권을 얻으려면. 


교회에서 교인이 자유를 표망한다면 그것은 교회 당국과 싸움 전쟁에 들어가야 됩니다. 싸워야 돼요. 그런데 평화를 얻는다. 조용한게 좋고 은혜로운게 좋지 이러면 뭘 포기해야 돼요? 자유를 야금야금 자유를 이걸 갉아먹게 되어 있어요. 자유의 여지를 꽉꽉 조이게 만든다니까요. 


이것을 실험해보려면 결혼해보면 됩니다. 가정의 평화를 원한다면 남편은 자기의 자유를 포기해야 돼요. 남편하면 안되고 남성성을 가진 쪽이 포기해야 돼요. 남성성입니다. 여자 남자  규정 안 했어요. 남자 성격이 많은 쪽에 주도권이 있게 되면 가정의 한쪽은 자기의 자유권을 완전히 내팽개쳐야 됩니다. 


그걸 일반화시키면 뭐냐 하면 ‘일반화’시키는거에요. 다 그렇게 일반화 시키게 되면 수입이 부부가 수입이 많은 쪽이 주도권을 쥐게 되어 있고 수입이 적은 쪽은 음메 기죽어하고 이렇게 살아야 가정이 다복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이상해. 열등의식 같은게 있어가지고 돈도 못 버는 주제에 무시하겠지 라는 자기 생각 때문에 오바하는 수가 있어요. 오바한다고. 그러면 가정 평화는 날아가 버립니다. 


문제가 부부 문제 같으면 가정 평화 깨져도 괜찮아요. 문제는 여파가 자식의 어릴 때 트라우마까지 작용한다는 것. 제3자인 자식이 우리 당사자에 의해서 제3자에 불과한 자식이 그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게 있어요. 가정은 뭐와 같으냐 하면 마치 비닐하우스 온실 같아야 하거든요. 모든 것을 용납하는 공간. 모든 것을 용납하는 공간. 


저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타조알 속이라 이렇게 봅니다. 타조알이 두껍잖아요. 바깥에서 뭐 태풍 미세먼지 온다 하더라도 가정에 들어서면 동그랗게 타원형으로 동그랗게 되어가지고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있는 공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걸 편히 안식이 보장되는 공간, 그게 가정입니다. 


그게 가정인데 문제는 가정이 혼자 사는게 아니고 둘이 가정이 살기 때문에 내 뜻대로 내 원대로 되지를 않지요. 그게 이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제 다 오셨으니까 본격적으로 해 봅시다. 


자, 요한복음 19장인데 왜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때렸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안 때리면 자기가 맞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얻어맞습니다 정신적으로 권력적으로. 자기 권력에 손상이 가기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것 지키기 위해서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희생물이 필요한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양쪽 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양쪽 다 희생물의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유대사회는 좀 약간 어렵게 난해하게 하겠습니다. 유대사회라 하는 것은 율법을 거론하는 사회거든요 율법을. 율법을 거론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모든 각자 각자가 율법의 지시에 따르면 된다고 본겁니다. 율법 구약 성경에 의하면. 


자, 각자가 법에 따르게 되면 논리적으로 뭐가 필요 없느냐 하면은 통치자가 필요가 없어요. 통치자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말씀대로 살면 되지 누가 건방지게 나한테 간섭해? 누가 건방지게. 


가정에 애 컷다 머리 크고 키 컷다. 간섭 못하거든요. “엄마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뭐 알아서 한다고!” “그러니까 엄마 말 안 듣는거야.” 이렇게 된단 말이죠. 법이 있는데 그 법대로 살면 되지 이제는 뭐 엄마도 자기보다 키가 작으니까 힘도 약하고. 


통치자가 스스로 내 통치자 나를 관리하는 통치자라고 나서버리면 바로 뭐가 좋은 점이냐 하면 바로 간섭쟁이가 나한테 더는 필요가 없이 돼요. 그러한 본성을 사람은 자율 또는 자유라고 하는데 자유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것 때문에 아담이 악마한테 유혹받아가지고 선악과를 없애버린겁니다. 무슨 따먹지 말라고?! 그 하나님의 간섭에서 탈출하는 겁니다. 독립하는 거죠. 독단적으로 내 인생 하겠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간단합니다. 그러면 너는 인간다움이 없어 ‘인간다움’. 오늘 첫 번째로 나오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겠지요. 인간다움. 인간다움이란게 과연 뭐냐? 인간다움이. 인간이 인간다움을 설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이 인간다움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논하고 인격에 대해서 논하고 평등에 대해서 논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인권을 갖고 있고 ‘천부 인권설’이라고 하는데 존 로크의 천부 인권설 거기에서 따와서 그걸 참고로 한게 바로 미국의 ‘독립 선언문’입니다. 독립 선언문 종이로 헌법 한 장 밖에 안돼요. 


한 장 밖에 안 되는데 미국 시민이 거기에 2억 4천, 5천이 거기에 동의한다는게 희한하죠. 이상하죠. 참 이상하죠. 전부다 인간은 뭔가 공통적인 것이 흐르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인간의 모든 권리는 인기와 품위와 영광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인간들이 그 신을 안 믿는 무신론자부터 시작해서 유시민같이 신을 안 믿는 자부터 시작해가지고 이슬람이고 뭐고 불교 모든 거기는 이의를 안 달겠다는 거에요. 


무슨 말을 하는지 취지를 아시겠습니까? 무신론자가 무슨 뜻이에요? 신을 안 믿잖아요. 신을 안 믿는데 하나님이 부여한 이 ‘인권’은 누구도 훼손 못 한다는 이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는 싫다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 없다며?! 신이 없는데 ‘신마저 나를 후원해준다면 나는 더 신나지’ 라는 그런 의식은 어디서 발생된겁니까? 


결국은 이것은 모든 것의 독립이 아니에요. 말을 제대로 해야 돼요. 모든 것을 자기 발 아래 통치하겠다는 겁니다. 신마저도. 나 하나 잘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은 존재해야 나는 마땅하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이거는 자기 본심을 말로 표현하면 그렇게 되는거에요. 모든 것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잘했다고 박수치고 후원해주는 그것이 내가 갖고 있는 내 본질에 가장 합한 상황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사적인 악한 감정을 갖고 있는게 아닙니다. 언제 봤다고 그러겠어요. 때린 이유는 내가 예수를 때려줘야 이 빌라도가 예수를 때려줘야 나의 나됨, 나의 인간다움이 더 빛을 발하고 그 가치가 계속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본디오 빌라도에게만 일어날 일이에요? 


아까 내가 ‘보편성’이라고 했지요.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고요. 모든 인간에 그런 요소가 다 있는거에요.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게 뭐에요? 본디오 빌라도라는 껍질을 째고 거기서 튀어 나왔다는 이야기잖아요. 예수 믿는다는게.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게 그거잖아요. 나 본디오 빌라도 안 될래 그런 뜻이란 말이죠. 


그게 인간의 힘으로 가당한 이야기 입니까? 그게 가능해요 그게? 누가 여러분 한번 무시해 볼까요? 기분 안 나쁜가? 기분 나쁘잖아요. 그건 본디오 빌라도잖아요 본디오 빌라도죠. 사람이 가만히 있다고 즐거운게 아니에요. 남을 미워하는 사람을 미운소리 해줘야 즐겁다니까요. 누가 김아무개가 걸려서 쏘아대야 그게 기분 좋아요. 남을 괴롭혀야 내가 즐겁다 이 말입니다. 그게 인간다움이에요. 


인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내가 의도적으로 내가 박살냄이 있기 때문에 나 이정도야 라는 것이 계속 지속된다는 그 감정이 그 감정위에 인간의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정립이 된다 이 말이죠. 전에 제가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교사가 학교에 있는 선생님이 365일 늘 같을 수가 없어요. 어떤 때는 첫째시간부터 기분 좋아 싱글벙글 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첫시간 들어오면서부터 기분나빠가지고 애들을 막 조져놓는 그런 날도 있거든요. 


부부싸움했을 때는 별로 기분 안 좋을 때는 초반부터 걸리기만 해라 이런 식이고 뭐 집안에 좋은 일 있고 이러면 그 다음부터는 공부 못해도 “수학 나와 풀어 못 풀어? 못 푸니까 학생이지.” 그냥 다 넘어가요.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어 다 좋아요. 사람은 니체가 그런 이야기 했지요. “사람은 기분따라 산다”. 그 고매한 진리가 뭐냐? 딱 이겁니다. 사람은 기분따라 살아요. 


이게 니체 전에 누가 이야기 했느냐 하면은 스피노자가 이야기 했어요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윤리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기분 좋은 일하면 선 되고 기분 나쁜 일하면 악 된다” 이게 스피노자 윤리입니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이런 이야기 하면서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시비 걸지요. 내 말이 틀렸거든 나와봐라. 내 말이 틀렸거든 나와봐라. 


하나님이고 뭐고 성경 그런 이야기 하지마 그건 너하고 상관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실제로 이것 제끼고 저것 벗어놓고 딱 놓고 인간 그 자체만 놓고 보자 이 말이죠. 아무리 착한 일도 억지로하면 기분 나쁘죠. 그러면 그거는 선이 아니죠. 그런데 스피노자가 뭘 놓쳤느냐 하면은 가장 인간이 기분좋을 때가 뭐냐를 놓친거에요. 가장 인간이 좋을 때가 뭡니까? 내 원수가 내 눈 앞에서 망하는 것을 내가 목격할 때 가장 기분 좋아요. 


여러분들 솔로몬 왕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기도에 응답했지요. 응답하면서 하나님께서 안 해도 되는 말씀을 하셨어요. 뭐라고 했냐 하면은 네가 기도할 때 남들처럼 부자 되거나 잘 들어야돼요. 오늘날 한국교회 기도하고 비교해보세요. 부자 되거나 잘 살거나 네 원수가 망하는 것을 기도하지 아니하고, 기도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어요. “기도하지 아니하고”. 


그러면 여러분들이 교회갔을 때 이 세가지 다 빼고 합시다. 빼고 한번 기도해보죠. 기도할게 아무것도 없어요. 기도할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내 자식 수능 잘 치고 전부 다 나 잘 되는 거잖아요. 없어요. 그러면 솔로몬의 기도의 응답이 주님한테 합했다면 자기는 그냥 빈 파이프 그냥 통로로만 써주시옵소서 통로로만. 위에서 물을 보내면 저수지 위에 쪽에서 아래쪽으로 보낼 때 무슨 파이프가 있어야 될게 아닙니까. 물고있지요. 그걸로만 사용해 달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오류없이 누락없이 왜곡없이 탈없이 그냥 백성들에게 그대로 내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해 달라고 이렇게 한거에요. 이거는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겁니다. 수면내시경할 때 다 물도 안마시고 아침식사도 안 해요 다 비우듯이. 자기 위를 다 비우듯이 자기 인생을 다 비우는거에요. 


다 비우게 되면 뭐도 비워야 되느냐 하면은 바로 평화도 없애야 되고 특히 뭐도 포기해야 되요. 나의 자율과 나의 자유도 포기해야 되요. 자기를 부인하니까 자기를 부인하는게 말만 부인하면 안 되잖아요. 뭐를 포기하는거에요. 나의 자유를 포기하옵소서 이거잖아요. 나의 자유를 포기하옵소서.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걸 인정하는 거에요. 


마태복음 8장에 백부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예수님이 놀래가지고 세상에 이만한 믿음 못 봤다고 했지요? 제가 이런 성경 이야기를 볼 때 그냥 보지 마시고 나의 본성 빌라도 있잖아요 아까 빌라도. 나의 본성을 가지고 그 말씀과 대면해 보시라 이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훌륭하다고 여기지 말고. 


말씀만 하옵소서 뭐든지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지 말고. 나의 본성이 뭔가를 분명히 알고 말씀 한번 보라 이 말이죠. 과연 내가 정말 내가 기적의 사람인지 아니면 흉내 내는 사람인지 한번 보라 이 말이죠. 내가 정말 기적 받았는지. 이건 내가 생각한 내가 아니야 라고 하든지 아니면 이건 원래 내가 기대했던 기획했던 내가 원래 의도했던 그래 그 인간 맞아 라고 나오던지. 


여러분 생각하기에 그거야 기적이죠 하지요. 그러면 그게 기적이라면 일억오천 날려도 입 다물어야 되요. 일억오천 날려도 입 다물어야 된다고요. 왜? 그거는 그 기적에 비하면 이거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푼돈이지 돈 10원 잃어버린거에요. 돈 10원 잃어버렸다고 그렇게 울고불고 달려들면 안 되잖아요. 


진짜 기적이라면 제 말은 기적을 따내기 위해서 애쓴거 말고 기적은 저기 있는데 아직은 미흡하니까 아직은 결핍되어 있으니까 마저 챙기자 이거 말고. 그거는 시도하는 거고요. 어떤 현자가 이런 소리 현자라 하는 것은 지혜로운 자, 현자가 이런 인생의 결론을 내렸어요. 뭐냐 하면은 그래도 미움보다는 사랑이 낫고 비록 불안정하지만 인생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낫다라고 어떤 현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세네카 스토아 에피쿠로스 학파에 있는 그런 유명한 요새말로는 인생을 단순하게 살아서 행복에 이르는 길 그런거 하는 사람 있어요 로마에. 로마에 있는 변호사입니다. AD 1세기경인가 그 사람이에요. 정치와 관련되어서 일찍 죽어 별로 끝이 분명치 않은 사람인데. 어떤 현자가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내가 봤을 때 현자가 아니고 어느 환자가 이야기했어요. 


도인이거든요 도인. 도인의 특징이 있어요. 자기 때문에 피해보는 사람이 생각이 안 난대요. 이게 도인들의 특징이에요. 자기 때문에 피해 보는 사람을 생각 못해요. 빌라도가 빌라도 답게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희생물 됐다는 것을 빌라도는 도저히 생각을 못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물으면서 자기는 진리를 자기 코 앞에서 진리를 밟고 있어요. 진리를 채찍질 진리 이리와! 진리를 줘패고 있어요. 진리를 죽으라고. 


빌라도가 그냥 채찍으로 끝내려고 했어요 이 사태를. 봐 나 너희들 편이잖아 너희들 내 말 들어. 난 네가 싫어하는 예수를 내가 이렇게 팼잖아. 이정도 신용 보여줬으면 우리 이선에서 정치적 협상 보자 이렇게 하는데 그 뒤에 19장 쭉 보면 유대인들이 발악을 해 미쳤어 이 인간들이. 기어이 죽여달라는거에요 기어이. 기어이 죽여달라는거에요. 


빌라도가 네가 죽여라 하니까 우리는 죽일 권한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빌라도와 이 유대인 사이의 대화는요 과연 죽일 죄가 있느냐 그걸 왔다갔다 하는게 아닙니다. 이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당신도 여기에 합세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린 당신 중앙정보부에 고발하겠다 이렇게 나온겁니다. 


빌라도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야 이것들 미쳤지. 고집도 이런 고집이 있느냐. 빌라도가 답답해서 물었어요. 도대체 그렇게 너희들이 못 죽여서 환장한 이 인간이 그래 너희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 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그런건 묻지 말고 그런건 묻지 말래요. 그건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고 결정은 우리가 결정하고 너는 그냥 싸인만 죽이라는 싸인만 하라는거에요. 


너무 이건 터무니없는 주장이죠 논리죠. 그렇게 논리 주장하면서 유대인들이. 오늘 우리가 본문을 보면서 그 이유를 밝혀내야 돼요. 십자가는 인간의 한계를 만들어요 십자가는 인간의 한계를. 인간이 행동은 자기의 본질을 그대로 노출하는데 그 본질이 어떤 제한된 영역 안에서만 그렇게 멈추고 있어요. 뭐가 안 되느냐 하면은 이게 안돼요 이게. 초월이 안돼요 초월이. 


어떤 대화를 한다든지 대화도 행동이니까 대화를 한다든지 행위를 할 때에 초월의 요소를 못 보이면서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인간에서 인간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나아가거든요. 그러니까 어떤걸 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만 계속 내뱉고 있고 행동하게 되어있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인간에게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어떤 의미에서 오늘 강의에 가장 중요한 건데요. 제일 중요한데 해봅시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에서 인식이 두 가지 인식이 있어요. 하나는 인간적인 인식이 있고 두번째는 성령의 인식이 있는데 인간적인 인식에서는 뭐냐 하면은 죽었다가 깨어났다는 겁니다. 죽었다가 깨어난거에요. 죽었다가 깨어났으니까 죽었을 때 몸하고 깨어났을 때 몸하고 어떤 몸이에요? 동일한 몸이겠죠? 왜? 죽었다가 깨어났기 때문에. 


그런데 성령 입장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산거에요. 다시 산거 맞지요? 깨어난게 아니잖아. 그렇죠? 갑자기 반말해서 미안합니다. 깨어난게 아니고 다시 살아났잖아요 다시. 다시 살아나가지고 누구도 못 알아봐요. 제자들도 못 알아봐요. 그 몸을 못 알아본다니까요. 못 알아보고 그리고 만지려니까 만지지말라는 거에요. 왜 이유가 뭐냐 하면 몸이 다르다는거에요 몸이. 무슨 몸하고? 너희들 몸하고 내 몸이 다르다는 거에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단순히 몸과 몸으로 이어지는게 아니고 이쪽 인간에 속한 인간의 몸에 속한 이 몸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전한겁니다. 이동한거에요. 그러니까 베드로도 제자도 못 따라오는 거에요. 길이 어딥니까? 길을 모르지요. 그냥 지평선 이동 같으면 가지요. 강남에서 잠실로 이거는 언제든 따라갑니다. 지금 도마가 물었어요. 지금 어디로 갑니까 묻는 것은 지금 잠실로 갑니까? 어디 수서로 갑니까? 그거 묻는거에요. 잠실 수서 같으면 왜 못갑니까 딱 붙어가지고 팔짱끼고 가면 가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가는 곳은 인간이 없는 영역이에요. 인간이 없는 영역. 인간이 예상을 못하는 영역이에요. 왜 예상을 못하느냐 하면은 인간은 한계에 갇혀 있거든요. 주님께서 인간이 있으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휘발유통 요새 휘발유가 좀 싸다고 하니까 우리 동네는 1459원. 휘발유통 하나 붓고 인간이 있잖아요. 인간 영역에다가 여기에 골을 파요. 파가지고  여기에 휘발유를 뿌려 놓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불 질러버려요. 주님께서.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인간은 이 불 밖으로 못나오죠? 여기 안에 갇히게 되지요. 이게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두루 도는 화염검’ 아닙니까. 이게 십자가의 의미 속에 이게 담겨있는거에요. 창세기 전체 다 담겨있는거에요.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그 안에 쪼개보면 뭐가 들어있느냐? 창세기부터 예수님 죽을 때 까지 모든 성경의 내용이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몸이에요. 말씀으로 꽉꽉 채워진 몸이라고요. 속이 찬 만두. 


말씀으로 꽉꽉 채워진 그 몸이 그 몸이에요. 그런데 인간의 몸은 어떤 몸이냐 하면 이미 선악과로 인하여 말씀에서 끊어져서 악마의 손에 맡겨진 몸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몸은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게 말씀에 위배되는 정도가 아니고 말씀을 대적하고 말씀을 곡해하고 말씀에 도전하는 그 힘이 작용하는 그 사고와 행위와 언어가 인간의 몸에서 다 나옵니다. 


특히 이번 수련회 아가 하잖아요. 아가의 인간의 아가 준비하면서 제가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사랑을 받지 않는다는 거에요. 인간의 사랑을 받지 않아요. 뭐 때문에 내가 ‘거짓말’이라는 조항조의 가사를 뒤에다가 교재에다가 갖다 붙였겠어요.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 돌아온다는 말도 거짓말. 


인간의 사랑을 받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오늘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인간 자기 내부에 ‘우상’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상이. 내가 누굴 사랑하잖아요. 그 전에 이야기했던 다말 있지요? 암논 배다른 씨가 다른 이복형제간의 이복오빠가 누이동생 다말을 너무 사랑했지요? 아가에 보면 여러분 읽어 봤지요? 아가 짧으니까 읽어 보게 되면 사랑이 뭐가 됐다? 사랑이 병이 됐다 라고 나와요. 얼마나 사랑하면 병이 되어 아파 누울 정도 되겠어요. 암논도 그랬던 모양이라. 


그래서 다말을 사랑했는데 둘이 옛날에는 근친결혼이 많이 때문에 좋게 행복하게 살면 되는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동침을 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사랑한 것보다 더욱더 그걸 갑자기 미워진거에요. 맥주병 따니까 거품 없는 콜라병 그렇게 느껴지던가요? 왜 그렇게 됐지요? 에게~이거였었어? 그런 뜻인가요? 


암논이죠. 암논은 다말을 사랑한게 아니에요. 뭘 사랑했느냐 하면 다말을 통한 존재하지 않는 여성성을 여기서 끄집어낸겁니다. 존재하지 않는 여성성을 사랑하게 된거에요. 그래서 자기는 다말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요. 하고 나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그리워하는 그 여성이 이 여성이 아니였어. 아니였던거에요. 


그럼 뭘 사랑한거에요?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그게 우상이라니까. 인간은 자기를 빼닮은 사람을 사랑해요.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요. 악마죠 악마. 여자로 나타난 악마죠. 암논이 안 죽었으니 말이지 아마 압살롬 오빠가 안 말렸으면 죽일수도 있는 문제에요. 만약에 누이동생이 이렇게 해놓고 내 인생 책임져야지 붙들었으면 왜 질척대냐 할거에요. 왜 이렇게 질척대느냐 할거에요. 


그러면 사랑은 어디 있느냐? 사랑은 내가 갖고 싶은 것과 그 사이에 사랑이 있어요. 항상 실체는 없어요. 없고 자신의 욕망의 미흡함과 결핍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랑의 이름으로 그걸 대신 때우는 겁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엄마가 자식보고 뭐라고 합니까? 자식 이름도 안 불러요. 학교 갔다 오면 뭐라고 합니까? 아들! 이런다고요. 아들아 아 자 붙이지도 않아요. 아들! 자긴 딴에 친근하게 대화한다고. 자식이 엄마를 이용하는 줄도 모르고. 엄마는 좋아가지고 아들! 갔다 왔어? 아들 맛있는거 해줄까? 그 엄마는 지금 아들이 우상이라니까요. 


아들 사랑하는게 아니에요. 자기가 원하는 아들 되주기를 간곡하게 아들에게 지금 부탁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자식이 이 자식인데 너 그 레벨 그 수준 좀 맞춰줘. 이거 요구하고 있는거에요. 내가 이렇게 겸손하게 비노니. 인간의 한계라고 하는 것은 바로 믿을 수 없는 같은 인간을 붙들고 사는게 한계 아닙니까. 인간이 인간을 붙들고 살아가는거에요. 


그런데 우상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교류가 없어요. 이게 특징이에요. 우상의 특징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왜 죽였느냐 하면은 자기가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에요. 결핍이죠. 아~~나는 당신같은 메시아 원한적 없다. 어디서 이 가짜가!!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빌라도의 우상은 자기가 통치하는 유대 나라가 자기의 우상이 되지요. 자기의 원하는 데로 제대로 평안이 되기를. 로마 평화를 ‘팍스 로마나’라고 이야기 하는데 로마 특유의 평화라고 하는데 그걸 두자로 하면 이거에요. 두자로 하면 ‘황폐’, 세자로 하면 ‘황폐함’. 다 작살내는 겁니다. 로마의 평화는 완전히 싸그리 조지는거에요. 이게 평화에요. 


동양에 훈노족이라고 하는게 있지요. 훈노족 있고 그게 나중에 뭐냐 훈족이 되고 그게 나라 세운게 헝가리라는 나라인데 기마민족 유목민족 쳐들어 와가지고 유럽의 반달족인가 이런거 같이 덩달아 쫓겨 가가지고 로마제국이 밑에 압박해가지고 로마제국이 망하거든요. 로마제국이 망할 때 그렇게 말했어요. 밀리고 밀리고 밀려서 떠밀려 온거에요. 마치 중국 미국 무역전쟁에 시달리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에 있어서 그 모든 사람들에 있어서 자신들의 그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결핍에서부터 인간은 행동에 나서게 된다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대구 강의 때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어떤 명랑하고 쾌활하게 보이잖아요. 분명히 마음의 상처 있습니다. 지금 남 앞에 지금 연극하고있는 거에요. 너무 과도하게 친절하고 과도하게 명랑하고 과도하게 웃는 사람 주의해야 됩니다. 주여~~이런 사람 있잖아요. 남의 지갑을 주워도 주여! 엎어져도 주여! 아주 자기가 스스로 훈련이 잘되어 있어요. 자기 우상에. 


인간은 우상 외에는 믿을 마음이 없습니다. 오직 우상이 우상다울 때 가장 인간은 믿게 되요. 자기 결핍 이미 자기가 결핍이 있다는걸 자기가 만들고 신은 그 결핍만 채워주면 되니까. 결핍은 내가 만든 우상이거든요. 내가 만든 우상은 우상적인 방식에 와서야 내가 채울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은 어떤 상상에 그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합체되지 않은 빈칸은 인간은 우상다운 방법을 통해서 자꾸 접근해가죠. 어프로치라고 접근해가죠 접근. 


모든 학문도 과학도 어프로치라고 해요. 진리라 하는 것은 가까이 더 가까이 근접하게 가까이 더 가까이. 그게 이제 미분 적분인데 계속해서 가까이 100%는 아니지만 99.9999% 순도를 높이는거에요 계속해서. 순도 높이는건 좋은데 순도 높이다 늙어 죽거든요. 그럼 죽으면 어디 가는데 그건 생각도 못했지. 일단 자기가 살았다 치고 시작하니까 이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이사야 44장에 보면 우상에 대해 나와 있어요. 44장 9절에 보면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 하면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셔요 이사야를 통해서. 그럼 이사야 없다고 칩시다. 이사야 없으면 누가 없겠어요? 이 세상에 누구 말이 안 들리겠습니까? 선지자가 없으니까. 하나님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 없으면 뭐도 없어져요? 우상이라는 용어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그냥 신이죠. 그냥 신이에요. 여호와 이름만 외우면 될 거 같으면 우리는 이름만 외우면 돼요. 여호와 여호와 여호와 믿습니다. 여화께서 이름만 하시는 분이 아니고 이름에 그 여호와에 이름에 품고 있는 내용이 이스라엘 역사라는 실제 역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변화를 주고 사건을 일으켰잖아요. 


그렇다면 주의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뭡니까? 이제는 주님이 갖고 있는 고유한 그 사건, 그 사건이 나를 덮친다는 이야기예요. 내 인생은 조져놨다. 그 와중에 뭐가 등장해야 하느냐 나의 원하고 내가 믿고자 했던 신은 실제로 나의 인생을 이끄시고 만들어가시는 그 하나님의 손 앞에서는 하나님의 사건 앞에서는 그게 뭐가 된다? 우상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에요. 내가 얻고자 하는 인생 자체가 이거는 우상이라는 나라를 우상에서 만들어 낸 시나리오고 하나의 가상 소설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초월적인 영적인 내용이 안 나오거든 그 사람 만날 이유도 없고 전화할 필요도 없어요. 왜? 우상이 우상끼리 만나서 뭐하는데? 카페 커피값만 날라가지 뭐 뭐가 있어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부활이라는 몸은 말씀이 합류되고 그게 완성된 그 결실물 또는 완성품이 바로 부활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부활되려면 예수 이름 믿으면 안 되고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말씀의 사건이 공히 똑같이 우리 몸을 상대로 이게 벌어져야 됩니다. 몸이 벌어지게 되면 우리가 예상한 부활 예상한 천국이 아닌 완전히 다른 천국과 다른 부활의 몸이 말씀에 의해서 이게 구성되게 되어있어요. 완전히 다른거에요. 


우리의 예상이 되면 우상이 되고 우상이 아니라면 우리의 예상과 빗나가는 길로 우리의 인생은 인도 받아야 돼요. 내가 예상하지 않는 길로. 내가 나의 원대로 되지 마옵시고 하는 그 길로 가야 돼요 정말. 내가 뜻대로 안 되는거에요. 그럼 내 뜻대로 안 될 때 그냥 반발할까요? 곱게 가만히 순한 양처럼 가만 있을까요? 반발할까요? 반발하지요. 그러니까 날마다 죽여버리는 거에요 우리를. 살려놓으면 방해하니까 죽여버리는 겁니다.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 날마다 죽는다 했잖아요. 날마다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거에요. 


그럼 죽은 자로 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이렇게 살아 있을 때 그 전체 덩어리가 뭐 되냐? 그 전체 덩어리가 감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고마움의 대상이 돼죠. 그래서 여기 하나의 공식 하나 만들어냅니다. 사람을 만날 때 감사할 줄 아는 사람 만나세요. 어떤 일을 해도 우리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고 주의 뜻이다 라는 식으로 만나는거. 주님의 뜻이다. 


물론 그런 식으로 멘트를 날려주는 사람은 전세계 수억 명은 될거에요. 이슬람하는 사람도 다 용어가 있어요. 알라 뜻이요 하고 다 사기쳐놓고 이것도 신의 뜻이라고. 뭐 압살라 기억이 안 난다. 상투적으로 내뱉는 아멘 비슷한 말 있어요. 갑자기 잊어버렸는데 쉬는 시간에 찾아봐야 되겠다. 그런 이야기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께 일어난 사건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존재가 덧입혀지는 것은 이것은 우상이에요. 주님이 일어난 사건 무슨 사건입니까? 오늘 본문에 있잖아요.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님 단독으로 일으킨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려면 여기저기 도와줘야 돼요. 빌라도가 도와주고 그리고 누가 도와주고? 그리고 유대인들이 도와주고. 누구는 또 도와줘요. 제자들도 도와주는데 어떻게 도와줘요? 도망치는 비겁함 자체를 보여주면서 도와줘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요소냐 하면 빌라도 요소 도망치는 비겁한 제자 요소 그리고 자기는 누구한테 간섭받을 필요없고 자기 잘났다고 자기는 택한 백성이라고 우기는 이 모든 요소, 이 모든 요소가 우리 자신임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사건이 우리에게 덮치는 겁니다. 왜?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 그 자체의 반복이 중요하니까. 


십자가 사건을 일으킨다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기여한 바는 없고 도리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우리 우상성이 그대로 노출되었다는 것. 발각 당했다는 사건으로 현장화 돼요. 그렇게 된다고.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3절을 한번 봅시다. “앞에서 와서 자색옷을 입히고 머리에 씌우고” 자색옷을 입히고 이거 지금 예수님이 요구한겁니까? 아니죠. 그들이 그렇게 했지요. 그럼 제가 여러분들한테 물어봅니다. 왜 이 사람들이 자색옷을 입히고 유대인 시키고 유대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이런 모욕적인 것을 하고 속박을 왜 때립니까 하고 물으면 그 답이 19장에 보면 가득 나와 있어요. 


이렇게 된 것은 28절 봅시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성경에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말씀의 지배에서 예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도. 그리고 그 어떤 말씀도 29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오죠.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되어 있고 30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오는데 저한테만 유명한거에요 저한테만.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그 다음에 뭐라고 나옵니까? “다 이루었다”. 


주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꽂혀 있습니까? 관심사가?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말씀 있잖아요. 그 말씀대로 ‘다 이룸’이 아들의 본분이고 해야 될 업무였던거에요. 거기에 인간들은 보조로  말려든거에요. 그 소용돌이에. 모든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함이라고 요한복음 5장에 그대로 맞아요. 


자, 그러면 여러분들이 여기에 동의하신다면 일단은 성령에 의해서 나쁜 의미 좋은 의미, 성령에 의해서 여러분들을 ‘미친 사람’으로 보겠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악령이 아니고. 악령에 미친 사람은 바깥에 많이 돌아다니니까. 아이들 여기 학원에 많이 다니잖아요. 여기 악령이 얼마나 많이 돌아다닙니까. 여러분 일단 성령에 의해서 미친 사람으로 보겠습니다. 그리고 제 논리에 뭔가 문제 있거든 여러분 문제 있다고 이야기 하세요. 


여러분 성령에 의하게 되면 여러분 뭐가 되느냐 하면 일종의 마법사가 되요. 마법사는 누구하고 싸우냐하면 인간계와 싸웁니다 인간계. 해리포터. 마법사가 인간계와 싸웁니다. 그런데 인간계가 마법사를 뭐하냐 하면 핍박을 해요. 지금 성경 이야기가 갑자기 쉬워졌죠? 그런데 나는 마법사 되기 싫어. 그런데 마법사 된 어떤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결국은 이것이 기생충처럼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이게 자생이 돼서 결국 우리를 죽음에 넘깁니다. 우리 자신을. 


이런 이야기를 인간계는 하나도 몰라요.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래서 제가 성령 미쳤다고 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저보고 계룡산 도사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김영한 이라고 숭실대 교수하다가 지금은 은퇴했는데. 성경에서는 주님이 마법사로 오신거에요. 마법사로 와가지고 인간계를 박살내려고 하는 겁니다. 멸망시키려고. 


그걸 아는 인간계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 단합해요. 단합해서 그때는 적이 없어요 서로가 하나가 되어서 이 재수 없는 마법사, 인간을 박살내려는 이 불의한 마법사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해서 결국 마법사를 죽음에 이르게 해버려요. 죽음으로 쫓아내버려요. 


죽음으로 쫓아내니까 이 마법계가 일단은 물러가자 해서 일단은 물러가놓고 그 다음에 자기들끼리 세력화해가지고 자기들끼리 어떤 최초의 마법사가 되는 예수님의 그 정신과 영이 그걸 이들에게 뭘 하느냐 하면 이걸 배당을 해요. 분배를 해줘요. 분배를 해주니까 원래 인간계에 속한 인간들인데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기억이 납니다. 뭐가 기억이 나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기억이 나버린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억이 나는 겁니다. 


기억나서 적은 것이 뭐냐? 요한복음이에요. 마태복음 누가복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결정해야 되요. 여러분들 인간계에 속할겁니까? 마법사 될렵니까? 이런 이야기 하고 있는거에요 지금. 이 성경 자체가. 그냥 교양 쌓기 위해서 도 닦는 식으로 보고 있는게 아니에요 지금. 교양 쌓기 위해서 보는게 아닙니다. 네 본질이 뭐야? 누구야 너?! 하고 똑같은 거에요. 너 누구야 하는 것 하고 똑같은 이야기에요 이게. 


이 성경에 요한복음 그대로거든요. 그런데 이걸 그대로 만약에 그대로 교회에서 해보면 교회 가게가 안돼요. 왜냐하면 목사의 우상은 뭐냐 하면 교회입니다. 교회라는 가게에요. 사업체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의 우상은 뭐냐 하면은 집구석이에요. 각자 우상이 있습니다. 자기 가정이라니까요. 가정이니까 목사는 뭐냐 하면 자기 우상 잘되기 위해서 교인들에게 닦달하고 있는겁니다. 시간 바치고 돈 바치고 몸 바치고 자꾸 닦달내고 있어요. 봉사라는 이름으로. 


이런거 잘하는 사람들 있어요. 수녀들. 수녀 신부들 잘해요. 우리나라 통계에 보면 수입이 적은 하위 50등에 보면 수녀, 전도사, 신부들 쭉 있어요. 하위 50등에. 50등이라도 괜찮아 왜냐하면 그 사람들 성당 부동산 있으니까. 부동산이 더 쎄거든요. 월급보다 부동산이 있으니까. 자기 우상을 키우기 위해서 제발 닦달하면서 악령을 가합니다. 


교인들 어떻게 압력을 가하느냐 하면은 내 우상 봉사 안하면 네 우상 조진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협박과 급박을 받지요. 협박과 급박을 받고 이정도 낼 수 있는데 어떻습니까? 라고 제가 주일날 이야기 했던 용어 뭡니까? 이정도는 해냅니다 하고 주고받는걸 뭐라고 했어요? 제가. 교역을 하고 있는거에요. 


내 우상 지키기 그러니까 더러워서 가는거에요. 왜냐하면 내 우상 지키기 위해서. 내 자식이 더 중요하고 내 가정이 더 중요하고 내 남편 이 가정평화가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교회 갔다가 후딱 집으로 가잖아요. 후딱 빨리 가서 할게 있으니까 김장 담아야 되니까. 날씨 추운데 빨리 김장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목사님은 또 후딱 갔다고 짜증내는 거에요. 


하나님 집을 팽개치고 자기 집 챙기다 망한 학개 이야기 또 구약에 학개 이야기 또 끄집어내요. 교회 집보다 주의 집보다 자기 집 화려하게 짓는 자 저주가 있을지어다 뭐 이런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쪽에서는 적당선에서 중간선에서 타협봅시다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러면 교회 쪽으로 좋다! 그냥 평신도 십일조 안 하는건 봐줄게. 그런데 집사되려면 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나와요. 집사되려면 십일조 해야 된다고. 서리집사는 집사도 아니니까 집사 될 때 엘리트 코스에 엘리트 해야 그다음에 장로 되니까. 


우상의 놀이들 평생을 ‘우상의 놀이’였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그동안 여러분들이 몰랐기 때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래도 우리 목사님은 도인입니다 그러거든요. 우리 목사님은 도인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점잖다고 하는거에요 점잖다고. 점잖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가게 운영의 밑천이에요. 


왜냐하면 교인들의 한계를 알거든요. 인물 잘생기고 서울대 나오고 점잖으면 되는거에요.  서울대라고 하면 안돼. S대. 농대라도 괜찮아요. 농대 사회학과도 굉장히 괜찮아요. 그게 무슨 그게 마법사의 길입니까? 그건 뭐냐? 안 죽겠다는 거에요. 내가 우상이기 때문에 내가 우상이라 하는 그 질책 그 소리가 심히 부담된다는 겁니다. 내 자신을 제대로 알려주는 자체가 내가 심히 힘들다는 거에요. 


나는 이제 성인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지만 누가 나보고 너 이렇다는 말 그건 하지말고 내가 뭘 해주면 어떤 실이득을 얻을까만 나한테 참고, 참조하는 정도만 해야 되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나한테 맡겨놔야 되지 남들이 뭐라고 하는 것은 싫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나 유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결같이 예수님을 없애버릴려고 한거에요. 없애버릴려고. 


그러면 이게 과연 좋은 의미에서 실제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비난했습니다. 귀신의 대장이라고 했고 이단들의 괴수라고 했거든요. 요새말로 마법사라 이 말이죠. 재수 더럽게 없는 마법사라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이 마법사라고 이렇게 자꾸 밀어내는 그 속성이 모든 인간에게는 타고 났어요 이게. 누구는 없고 누구는 있고가 아니라 태어나면서 전부다 마법사 되는걸 미리 싫어하고 미워하는 예수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그것이 타고난거에요. 


이 말은 타고 났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예수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이 말이에요. 비자연스럽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비자연스러워요. 제가 왜 이렇게 이걸 강조하느냐 하면은 이걸 해야 19장에 있는 그 예수님 때리고 매 때리고 예수님 죽일려고 하는 그들의 마음에 우리가 흔쾌히 동조가 되는 것이 정상이라 이 말입니다. 


아이고 불쌍한 예수님 맞았구나 라고 이렇게 쓸데없는 동정, 동정하지 마세요. 동정할 쨉도 못되요. 동정을 왜 합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최순실이라면 어떻게 할래요? 죽이고 다 뺏어버리고 애까지 말까지 뺏어버려야지. 대번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하나같이 격분해가지고 성토 할겁니다. 성토하잖아요. 예수님이니까 봐준다고요? 아이고 자기 분수도 모르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십자가 못 박으라고 외치는 그 대중들이 한두사람 같으면 말을 안합니다. 심지어 베드로도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배반했어요. 뒤에서 하는것도 아니고 예수님 보는데서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는 거에요. 물론 말은 좀 더듬었을거에요. 나나나나는 저 사라...람을...모른다...말은 좀 더듬었을건데 그 베드로의 가는 길, 이들의 가는 길 이걸 겪지 아니하면 우리는 예수님 못 만납니다. 예수님 없습니다. 


충분하게 우리는 우리는 우리 죄에 아주 충실해야 되요. 그리고 우리가 죄 뒤집어썼고 죄는 우리 힘으로 못 빠져나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절감해야 됩니다. 그게 우리가 동의해야 돼요. 예수님을 핍박하고 미워한다고 해서 그걸 마치 비난하지 마세요. 우리도 그 현장에 가게 되면 우리는 같이 동조하는데서 뭘 얻느냐? 


누구 하나 이렇게 죽이고 밟는데서 상대적으로 우리는 아까 제가 스피노자 이야기 했잖아요. 쾌감을 느낍니다. 누구하나 밟히고 작살날 때 우리는 상대적으로 많은 즐거움을 우리가 즐거움을 더 부과되는 즐거움을 얻을 수가 있어요. 연예인 부부가 잘사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아요. 누구 이혼했잖아요. 아휴 하루 종일 행복합니다. 하루 종일. 아주 명칭도 격식있는 명칭을 붙여줘요. 돌싱남. 화려한 귀환 이래가지고. 이제는 불타는 청춘에만 나오면 되는데. 이야기 모르니까. 불타는 청춘 지옥 아닙니다. 그런게 있어요. 한번 가본 사람들 한번도 안 가본 사람들 전부 모이는데 있어요. 


그처럼 우리가 십자가라는 사건을 주께서는 반복해서 구성하는데 있어서 우상숭배자의 자격으로 우리는 이미 끌려들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19장의 내용에는 이게 나하고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딱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에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다.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다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고상함과 우리의 어떤 경건함 가지고 도저히 주어진 나의 우상성을 내가 독파 또는 돌파할 수가 없습니다.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 했듯이 십자가 19장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했지요. 인간의 한계, 아까 예를 든 것 다시 해볼까요? 


기름 휘발유통 들고 인간세계 있는데 뭘 친다? 땅을 파서 거기에 기름을 붓고 중국산 라이터, 라이터 켜버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우리는 온전히 어디에 갇혀 있어요? 불속에 갇혀 있지요. 이게 바로 창세기 3장에 두루 도는 화염검입니다. ‘두루 도는 화염검’. 십자가의 기능에 이게 바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가두어 두는거에요. 우상성 안에 가두어 두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거기서 빠져나온 적도 없었고 빠져나올 수도 없고 그걸 분명히 하는 거에요. 십자가에서. 


그래서 이 부활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은 부활의 세계는 주님이 죽었다가 깨어나는 세계가 아니고 생각지도 못한 다른 몸의 세계거든요. 다른 세계에요. 죽었던 예수님과 그 같은 예수님인데 몸이 달라요. 완전히 그 몸이 아니라 다른 몸이라고요. 그게 고린도후서 5장에도 나와요. 우리가 죽어버리면 이 몸을 벗어버리고 다른 옷으로 장막옷으로 입는다 했잖아요. 


이 몸을 왜 벗느냐? 이 몸이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흙에 속했거든요. 흙에 속한 몸을 버리고 그 다음에 뭐와 같다? 천사와 같은 몸을 입게 돼요. 천사와 같은 몸을 입게 돼요. 그러면 나한테 그 몸이 입혀지는게 아니고 그 천사의 몸에 가치에 부합되는 자아가 거기에 결합이 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자아가 천국 가려면 우리의 자아가 그동안에는 육의 썩어질 몸과 결합된 자아가 이제는 천사와 같은 영광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죠. 예수의 부활에 하늘에 형상에 합한 몸과 거기에 새로운 자아로 달라져야 돼요. 그 달라지지 않고서는 우리는 천국에 못 갑니다. 주여 예수여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말씀을 다 행해야 돼. 말씀을 행하는게 아니고 말씀을 행하는 이 주체가 되는 이 자아가 달라져야 된다니까요. 


그럼 목사님 어떻게 달라져야 됩니까?! 고함치지 말고 어떤 식에서 어떤 식으로 달라져야 되느냐 하면 이것은 악이다 이것은 선이다 라고 이렇게 판단하는 몸에서 뭘 해도 상관없는 몸이다 라고 달라져야 되겠지요. 선악체제에서 이게 뭘 해도 이게 감사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그런 자아로 달라져야 되겠지요. 


그러면 달라지려면 처음에는 이것은 악이니까 하지말고 이것은 선이니까 해야 돼 하면 이 자아가 몇 개에요? 달랑 부모가 준 자아 몸 달랑 하나지요? 하나인데 성령이 와버리면 대구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무슨 인생이라고 했습니까? 복합인생이라고 했지요. 중복인생. 나 있고 또 뭐가 있고? 그리스도가 함께 있고. 이중인간으로서 우리는 뭘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감사가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 할까요? 저것 할까요? 할 필요도 없이 하게 된 그 자체가 중복된 인생, 주님의 행하심에 의한 결과물로써 오늘도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행하심에 의해서.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면 뭐라고 합니까? 그게 바로 마법사의 사고방식이다. 그게 마법사에요. 


바르게 살아라가 마법사가 아니라 우리의 몸이 전혀 쓰잘데기 없다는 것, 아무 쓸모없다는 것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배운게 아무 쓸모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지요. 왜? 휘발유 속에 있으니까. 이 몸은. 우리 몸으로 못 빠져 나오지요. 아까 그 동영상 유투브할 때 첫 번째 강의가 뭐라고 했습니까? 제목을 뭐라고 했어요? 막힘과 뚫림이죠. 뚫림과 막힘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 본문이야기하면서 제가 출애굽이야기 했거든요. 출애굽 보게되면 그 바로왕이 자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못 빠져나오게 하지요? 그렇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빠져나올 생각입니까? 빠져나올 생각 없어요 없지요. 둘 다 죽이 맞는거에요. 바로왕도 내보낼 생각없고 히브리인들도 나갈 생각없고. 둘 다 애굽이라는 나라에 적합한 몸으로 살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합시다. 애굽 나라에 적응된 자아로 살거든요 나. 살기 때문에 둘 다 다른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불편해요. 그 생각 자체가. 


다시 말해서 마법사 되기 싫다 이 말이죠. 그 마법사라고 하지 말고 그냥 내가 살던대로 그냥 조용하게 살게 내버려두라 이렇게 하고 싶은거에요. 그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뭐라고 했어요? 평화라고 했지요 평화. 뭘 포기한 평화? 자유를 포기한 평화. 구원을 포기한 댓가가 평화에요. 


그런데 여기 제3의 요소가 끼어들어요. 제3의 요소가 어디서 툭 튀어나옵니까? 애굽에서 살다간 사람이에요 애굽에서. 그냥 모세가 아니고 애굽에서 살다간 그 모세가 모세 그냥 조용하게 살지 갑자기 지팡이 하나 들고 달랑 애굽으로 뛰어들어온 거에요. 제3의 요소지요. 


그러니까 제3의 요소에서 제1의 요소가 바로왕이고 제 2의 요소가 히브리인인데 1과 2는 지금 단짝이라. 둘 다 지금 꿈쩍도 하기 싫어요. 지금 찜질방 뜨듯하게 잘 데워놨는데. 사람이 자기 정착지 떠나면 나그네되면 못 살아요. 자기가 도와줄 사람이 없잖아요. 외지사람들은 힘들어요. 타고난 고향이 뭐냐 하면은 애굽이란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가고 싶지 않은데 굳이 고집을 누가 세우느냐 하면은 굳이 고집을 모세가 세운다고요. 모세 아무개가 와가지고 자꾸 가자하니까 누가 누굴 비난하느냐 하면은 의외로 히브리인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빌어요. 제발 저 놈 좀 혼내 달라고. 모세 아론 좀 혼내달라고 빌어요. 그들의 본모습이에요 그게. 


그리고 가는 곳 마다 불평합니다. 뭐 나가자 해서 좋은데 가는줄 알았더니 뒤에서 막 소리 나거든요. 애굽 군대가 앞에는 홍해고 따라오니까. 또 원망해요. 우리가 죽을 때가 없어서 공동묘지 잘 만들어놨다 하여튼. 현대묘원. 현대 공원묘지. 잘 만들어놨다 전부다. 이것은 자기가 살아온 경험에 의해서는 이거는 있을 수 없는거에요. 죽었다. 100% 죽은거에요. 


그 다음에 여러분 아시다시피 지팡이 가지고 열리니까 들어갔지요. 찬양했지만 찬양은 잠깐이요 불평은 영원함이라. 계속해서 계속해서 합니다. 양식 달라고요. 양식 없는 백성 만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안식일에 뭐가 없어요? 안식일에는 하늘에서 만나가 안 내려와요. 다시 네가 가는 곳은 양식이 필요치 않는 세계로 가는 겁니다. 뭐만 있으면 되느냐? 주님의 희생만 있으면 그게 생명이 되는 세계. 이것은 애굽에서 살던 사람은 상상도 못할 세계. 


자, 그러면 모세가 히브리인들에게 왔을 때 그러면 모세가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모세가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은 본향으로 가자거든요 본향. 본향이 뭐냐? 태어난 고향으로 가자 모세가 이야기 한다고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냥 히브리인 아니고 언약백성입니다. 


본향이 뭐냐 하면 언약이 출발했던 언약이 나왔던 그 언약의 자리로 가자는 겁니다. 내가 살기 좋은 세계는 아닙니다. 그런 천국은 없어요. 그건 지옥이에요. 내가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고 주님만 좋은 세계에 가자는 겁니다. 예수님만 좋은 세계. 나 아니고 예수님 좋은 세계. 사람은 모든 행동을 자기 좋아라 하지 자기 말고 남 좋아라고 하는 일을 나서는 인간이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아 목사님 그래도 우리 좋으면 예수님도 좋잖아요 라고 얘기 하고 싶어 지금 막 간지럽지요? 문제는 내가 좋아하는 세계는 아예 없다니까요. 주님이 좋아하는 세계에 맞는 지금 나 말고 다른 나, 주님이 좋아하는 것이 그것이 OK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새로운 나로 변화시키는 나는 그 나라에 합당함이라. 


지금이 내가 좋아 상상한 세계가 아니고 그건 우상이라고 했잖아요 아까. 우상이고. 주님만 좋으면 돼요 라는 완전히 달라진 내가 가는 세계가 그게 천국이에요. 아들의 나라에요. 그러니까 교회 와도 자기를 부인해야지요. 자기 부인하면 교회 걸림돌 무너뜨려야지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기 좋아라고 하니까 행함 자체가 넘어뜨리는 십자가를 깔아줘야지요. 입구부터 해가지고 자빠지도록 십자가. 


자기 오래살고 건강하고 죽는거 안 좋아하는 그런 기도 나오도록 해야지요. 넓은 길로 가지말고 좁은 길로 가는 것을 휘파람 불어야되지 않습니까? 어찌 이런 좁은 길로...아이고 고마워라 해야될게 아닙니까. 인상 쓰지말고. 짜증 툭툭하지 말고. 이게 왠 횡재냐 이런 길도 다 있었네. 이런 좁은 길이 있는줄 모르고 괜히 넓은 길을 찾았잖아. 넓은 길을 간 것을 후회 막심하는 그런 다른 인간이 되어야 될게 아닙니까? 오랜만에 한다고 불평하지 말고. 


세상자체가 우리한테는 참 좋은 세상이에요 이 세상은.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전부거든요. 우리가 아는 기대하고 희망하고 지금 내가 천국갈 수 없는 이 자아가 고대하고 기대하고 희망하는 모든 것을 다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나올 이유도 없고 나오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일찍 죽는 것은 한탄스럽고 내가 이렇게 죽는다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고 정말 아깝고 오래 더 살고 영천 내려가가지고 운동하고 운동해서 나이 70,80 넘어도 이 근육봐라. 이러다가 사흘만에 죽었잖아 신성일이가. 


이 세상은요 내가 원하는 미끼는 다 제공했고 우리의 삶의 목적, Boys, be ambitious. 소망을 가지는 그 후보감들은 이미 쫙 나열되어 있어요. 마치 쇼윈도같이 진열되어 있어서 공부만 잘하면 저거 얻을 수 있고 노력만 하면 저걸 얻을 수 있다는 그런 모든 것이 세상 자체가 유혹이에요. 그 유혹 없이 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니체는 말하기를 천국을 이야기 하니까 니체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은 어?! 그 심심한 천국? 그 무미건조한 천국? 줘도 안 간다. 자아가 안 달라졌잖아요. 자아가 안 달라지니까 맨날 거기서 찬양만 한다고 하니까 교회 가서 찬송가 목사가 되어서도 예배드리면서 늘 걱정이 되요. 찬송가를 물론 제가 정하지만 요령껏 정하지만 또 실수해가지고 4절 긴 거 나오면 아..걱정된다. 


아휴 교인들 찬송가 때문에 진 다 빼가지고 설교들을 때 조는거 아닌가. 이런 걱정이 돼요. 어쩔 때 보면 3절해야 될 걸 성질 급해서 4절까지 하는 그 심보가 뭡니까? 빨리 좀 끝내라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4절까지 하는데 그렇게 지겹고 빨리 지겨운데 영원토록 찬송만 한다고? 목 다 쉬게?! 어디 합창단 모집하려고 갔습니까? 


천국에는 축구도 없지요. 코리안시즌 야구도 없지요. 골프도 없지요. 드라마도 없지요. 특히 결정적인 것은 천국은 TV가 없어요. 예능프로도 없지요. 아침 드라마도 없어요. 여러분 무슨 마음 준비로 가실렵니까? 재미 무료한 생활하시려고 천국 가십니까? 바로 이러한 우리의 감추어놓은 욕망, 그 욕망으로 인하여 지금도 주님은 우리한테 학대받는 줄 아셔야 합니다. 


실컷 먹여줬더니만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는 우리의 모습 이게 주께서 은혜주시는 시발점이 돼요. 은혜주시는 이유가. 네가 은혜값을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는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입니다. 


첫째시간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절부터 보게 되면 거기 뭐가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뭘 봤지요? 삼층천을 봤습니다. 삼층천을 보고 난 뒤에 사도바울은 알았어요. 나, ‘나’라고 언급을 집어넣을 자아조차도 천국에서는 나를 거론할 가치조차 없는 I'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 


불평, 불만은 물론이고 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말 조차도 이건 아주 더 추잡하고 더러운 짓이 된다는. 그냥 그가 누군지도 몰랐다는 거에요. 그냥 나는 있는데 있으나 생각 안 해도 되는 그래도 되는 그런 족한 그래도 만족한 세계 천국입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 (IP:125.♡.152.223)18-12-03 14:05 
강남-요한복음 19장 3절(십자가 반복)181120b-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성령이 오게되면 기억나게 해요 성령은. 성령은 뭘 기억나게 하느냐 하면은 시시콜콜한 뭐 유치원때 초등학교때 그걸 생각나게 하는게 아니고 그건 마법사가 아니지요. 세상에 살다가 세상에 가는거 같으면 자기 꿈속에 이야기나 그런걸 기억하죠.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십자가 사건을 기억나게 하는 그것은 성령이 와야 가능해요. 십자가 사건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뭐냐 하면 생뚱맞게 사도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다고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원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 같아서 현장에 아무것도 안 남아 있어요. 아무것도 안 남아 있다고.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몇 년전에 지나간 일이거든요. 지금 십자가 사건 어디있는데? 아마 사도바울에게 그렇게 대들었을 거에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이상해 네 눈에만 보이나? 왜 다른 사람 보편적이지 않아? 왜 너만 보고 다른 사람은 왜 못 보지? 이상한 소리하고 있네 라고 했을때는 바로 사도바울은 성령을 언급하는 겁니다. 


십자가 눈앞에 보이거늘 해 놓고 그 뒤에 나오는게 뭐냐 하면 네 몸 주장할래? 성령 앞세울래? 이렇게 나온다고요. 너의 행함이 네 몸 율법 지켜서 하는것이냐 아니면 성령께서 네 몸을 활용했던 결과냐고 라고 묻는 거에요. 성령은 제가 아까 이야기 했듯이 모세처럼 제 3의 요소에요. 그럼 여기에서 저는 성령 안 받았는데요 하면 그건 시험칠 때 수험표 없이 온겁니다. 그럼 자격도 없지요. 말씀들을 자격도 없는 거에요. 


성경은 무엇의 감동으로 되었다 했습니까? 성령의 감동이죠. 그럼 성령 받은 사람에게 준 편지가 성경이에요. 네가 뭘 한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렇게 지금 하고 계시다를 알려주는 겁니다. 주님이 하는데 일관성이 있고 거기 핵심이 있다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로 하여금 꼬시더냐? 지옥가도록 꼬시더냐 하는 식으로 누가 너를 꾀더냐 이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그러면 아까 첫째 시간 잠깐 복습하면 십자가는 뭐냐?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 빼놓고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다른 사람은 뭐냐? 다른 사람은 왜 그러냐?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에 보면 십자가 자체가 다 이루었다 아닙니까 다 이루었다. 성경에 앞에는 뭐라 되어 있어요? 성경에 뭐 함이라?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그러면 구약 성경의 핵심은 뭐냐 하면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거 우상이거든요. 그런데 그 신이 무슨 신이냐 하면 이사야 45장 8절인가 보게 되면은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거기 보게 되면 아마 맞을거에요. 나는 숨어 있는 하나님이다 라고 했거든요. ‘숨어계신 하나님’. 이사야 45장 15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숨어 계시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게 이방신하고 다른 점. 


이방신은 이미 인간인 이상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신과 인간은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거에요. 이방신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숨어 계신다고 되있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먼저 존재한 신이 나중에 존재한 우리를 만들었다 그걸로서 하나님과 인간관계는 얼추 연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이방신인 반면에 하나님은 뭐냐 하면 네가 언약을 알아? 이렇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너희들이 생각지도 못한 그런 일들을 계속 사건들을 만들어 나가시고 이걸 유발해 나가는 거에요. 사건들을 자꾸 일으키는 거에요. 그 사건을 일으킨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친 백성되기 위함이라”. 친 백성의 조건이 뭐냐 하면 언약의 조건에 부합되야 돼요. 언약 조건에 부합될 때. 


그럼 언약 조건에 부합되면 방주하나 만들고 성전 지을까요? 그건 옛날 언약이고 옛날 언약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너는 네쪽에서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언약에 부합되지 않는다를 통보하기 위해서 옛 언약을 준겁니다. 율법이 그 기능이에요.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게을러서 못 지키는게 아니에요. ‘정신일도 하사불성’ 정신을 바짝 안 차려서 못 지키는게 아니고 하는 것 하는 것 족족 자신의 우상성만 드러내는 그런 것을 유발하기 위해서 말씀을 줬다 이 말이죠. 하는 족족. 뭘 하든 안하든 그게 죄가 된다는. 


그 노골성이 바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고 제자들은 떠났고 결국은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은 예수님 홀로 남았는데 그게 ‘다 이루었다’는 말은 아무도 다 이루심에 거들 위인은 있었다? 없었다? 아무도 없었던거에요. 아무도 없는거에요. 그래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거기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있는 사람. 어느 정도로? 두시간 때우고 호감? 아니에요. 한 10년하고 지루하고 아니에요. 영원토록 호감을 갖고있는 사람. 


주님 홀로 하셨다는데서 영원토록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만 주의 나라에 들어갈수 있습니다. 목사님 그런 사람 있습니까? 있으면 말을 안 해. 없어요.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감사해.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 본인은? 나도 아니죠. 나도 아니니까 나 말고 다른 나를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어떻게? 관계로서. 어떤 관계로서? 창세 관계로서. 


‘창조’란 뭐냐 하면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거에요. 이걸 주일 낮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창세전과 창세후가 싸운다고 했지요. 왜 싸웁니까? 한쪽을 없애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한쪽을 부정하기 위해서 싸우는 거에요. 전쟁이란 이런거에요.. 창세전에는 그때는 야곱이 실체에 있는 몸에 있는 야곱도 없었고 뭐도 없었습니까? 예수도 없었어요. 야곱 없고 예수도 없고 뭐만 있었냐? 창세전엔 말씀만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로마서 9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어요?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말씀이 그렇게 결정했다는 겁니다. 결정된 말씀만 있으면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있으매” 모든 생명이 말씀에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와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생기가 없었으니. 생명은 생명 고유의 생명은 안나옵니다. 말씀이 말씀을 기인으로 하여 말씀을 바탕으로 설계도로 해서 도면으로 해서 그래서 그 말씀에 입각해서 생명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말씀이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 위하라고 새롭게 재편하는 겁니다 재편. 모든게 재편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바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냐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주님과 인간 앞에서는 자기 백성 앞에서는 어떤 힘이 주어지는가? 이 둘 다를 다 알아야 되겠지요. 인간대 인간에 있어서는 인간에 있어서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냐 하면 아무 힘도 작용하지 않아요. 인간은 전부 다 개별자이기 때문에. 부부는 남이라고 했지요. 


부부가 잠을 자되 같은 꿈이 나올수 가 있을까요? 확률상 굉장히 힘들어요. 확률상. 가능하기는 해요. 둘 다 오줌 눌 때. 둘 다 오줌 눌 때 꿈에 둘 다 홍수나요. 둘이 한 침대에 자는데 전기장판을 깔아가지고 온도를 너무 높였어. 둘 다 뜨거울 때 둘 다 꿈속에 불났어. 이럴 경우 말고는 같은 꿈을 꿀수가 없어요. 이게 뭐냐 각자 ‘개별자’라는 뜻입니다. 


서로가 다 연결되어 있어요. 심지어 내 몸에서 나온 자식도 이미 떨어져 있습니다. 결혼할때는 성경에 보면 뭡니까? 뭘 떠나라고 했어요? 부모를 떠나죠. 부모를 떠나야 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누굴 잡느냐 하면 이삭을 잡아 버리죠. 이삭을 잡습니다. 옆에 있는 숲속에 숫양이 없다고 한다면 이건 아버지가 누가 봐도 아버지가 자식을 죽인거에요. 


그러면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유일하게 연결되는 것은 인정 혈육 그딴거 가지고는 천국에 못가요. 안됩니다. 여기속에서는 뭘 집어 넣느냐?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습니다. 언약. 이게 무슨 언약이냐.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하는 거에요. 아버지가 자식을 죽일 때 이미 그 자식은 죽은 자식이에요. 이미 죽었어요. 이미 아버지 손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수풀에 있는 양이 왔다는 말은 양이 있다는 말은 이 자식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식으로서 자식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그 살아난 자식으로 인하여 혈육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 자식으로 인하여 영적인 언약성이 있는 연결성이 있는 새로운 아버지로 거듭나게 되어 있어요. 그걸 가지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이삭의 자리에 로마서 4장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이 들어가지요.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관계의 매치에 들어가는 겁니다 새로운 관계에. 모든 인간은 혈육적 관계라고 하는 것은 단독자로 태어났거든요. 왜냐하면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은 스스로 신처럼 되었기 때문에 신은 둘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둘 같으면 신이 아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대 인간에서는 어떤 연결 고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가 죽잖아요. 창세기 5장입니다. 죽으리라 죽으리라 죽으리라... 아들도 죽으리라 죽으리라... 


그렇다면 사실은 인간과 인간사이라고 하지만 이걸 하나로 묶어 버리면 이거는 오직 한 몸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죽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연결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건 바로 무슨 힘이냐 하면 죽음의 힘. 죽어야 될 힘 또는 죄의 힘 저주의 힘 심판의 힘 율법의 힘 이런것들이 인간 대 인간의 만남입니다. 


사람의 죄라는 것이 어디서 등장하느냐 하면 혼자 있을때도 물론 죄가 등장하겠지만 그걸 구체화할 때 남하고 대인관계에서 죄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지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거 성립안됩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게 되면 그걸로 종결되요. 마감이 된다고요. 


왜냐하면 내 사랑은 나로 귀환하게 되어 있거든요. 남에게 줄 내 사랑은 없어요. 내가 누굴 사랑하잖아요. 누굴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고무줄처럼 나에게 나온 사랑은 반드시 나의 어떤 업적으로 내가 사랑했다는 그 상태를 증거용으로 다시 회수하게 되어 있어요. 부모가 자식 사랑도 마찬가지 잖아요. 사랑해놓고 댓가를 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희생한다 말이죠. 


댓가가 없는 행동이 어디 있어요 인간에게는. 병신입니까 자기 손해보게. 인간은 그렇게 만만치 않단 말이죠. 손해보는 장사는 안할려고 하지요. 그러다가 손해보지만. 손해 안 볼려고 모인 시장이 무슨 시장? 주식시장이고 하는거에요. 손해만 봐요. 인공지능 동원해서 해도 손해만 봐요. 주님께서는 인간에 대해서는 너무 냉혹합니다. 


하루 밥 먹고 살거든 그걸로 남는 장사로 여겨라. 더는 이윤 바라지 말아라. 그저 잠 자고 먹고 마신걸로 족한줄로 여겨라 이러거든요. 그것에 더하는 것은 죄가 되리라. 아니 주님이 우리를 아주 거지로 떼거지로 만들어요. 거지로 간주해요. 지금 우리가 관심두는 것은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빨간걸로 할께요. 이 문제입니다. 


말씀이 어떻게 육신이 되느냐 그 문제거든요. 주님 말씀이 육신이 된다 한다면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15장 16장 말씀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아 됐겠지. 지금 이걸로 끝나잖아요. 지금 이것이 예수님에 국한된 이야기가 되면 안되요. 이게 누구한테 되야 돼요?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야 돼요. 


우리가 내가 여기 있는데 새로운 내가 있는데 새로운 나는 말씀에 의해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 이렇게 연결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봐야 그거는요 자기 육신을 자기가 훼손하기 위한 노력이고 몸부림에 지나지않아요. 그런 믿음은 지옥가지요. 나와 이 말씀 사이에 연결고리가 성립되야 된다 이 말입니다 연결고리가. 왜냐하면 그 원형을 누가 했습니까? 그 원형을? 예수님이 그 원형을 이야기했거든요. 


신기한 동물 사전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지요 지금 2편까지 나왔지요. 신기한 동물사전에 보게되면 그 도망친 동물들 모으는데 그 주인공이 뭘 사용하냐 하면 옛날 1920년대 트렁크 있잖아요. 트렁크를 열어요. 트렁크를 딱 열게되면 아무리 큰 등치도 이 안에 다 들어갈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새로운 피조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말씀을 예수님이라는 트렁크에 만들어 놓고 전부다 거기에다가 다 집어 넣는거에요. 집어넣으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역주행, 역주행이 일어나야 됩니다 역주행. 술먹는거 아닙니다. 술먹고 고속도로 달리는건 아닌데. 역주행이 일어나야 돼요. 


자, 역주행이란 뭐냐 정상적인 주행은 우리가 있음 있음 있음 계속 있음이 주행이라고 했잖아요. 계속 앞으로 가는 주행이죠. 내가 있다는 말은 곧 내가 움직인다 살아있다는 말이고 살아있으면 뭐가 나온다? 행함이 나오지요. 살아있는 내가 내 행함으로서 살아있는 나를 앞으로 더 내일까지 사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 노력하고 있다. 힘들지만 애쓰고 있다. 


이게 지금 우리가 말하는 정상적인 주행이잖아요. 40이다. 41살 내다보고 41살이다. 42살 내다보고 계속 그런 식으로 가는 거에요. 계속 가는겁니다. 어디까지? 우리가 목숨 다 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영천에서 근육관리, 이것하다가 사흘만에 죽은 신성일 가는 그 길 따라서 우리도 계속 가는겁니다. 효심 때문에 죽었다고요. 향 많이 피워가지고. 


전에 내가 이야기했는데. 신성일 죽은 이유. 술담배는 안하는데 향을 많이 피워 죽었다고 했잖아요. 어디서 했는데. 효심이 죽였다니까요 효심이. 왜 효심이야기 합니까? 왜 효심 부립니까? 왜냐하면 우리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이미 살았다는 것은 있음 아닙니까 있음. 이건 앞으로 주행하는거죠. 역주행은 뭡니까? 


죽음을 앞에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은 어디에 있다? 뒤에 있는거에요. 어디 뒤에? 나의 태어날 아니에요. 더더 뒤에 어디에?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바로 거기가 바로 트렁크입니다. 우리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어요. 십자가 사건에서 튀어 나온거에요. 십자가 사건으로 이걸 다시 가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이야기 한거에요. 


그리고 그거 하기 전에 바로 그 전에 구절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죠. 여러분 다 아시죠? 그 십자가의 현재의 기능이 뭐라고 했던가요? 나를 뭐하는 기능이다? 나를 날마다 죽이는 기능이에요. 그래서 제가 주일날 했잖아요. 예수님 살아있고 나는 죽고 내가 살아 있으면 뭐가 된다?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지요. 내가 살아있으면 예수님 존재하지 않아요. 내가 살아있는 한 기도를 하든 주여 믿습니다 주님 저기 살아계십니다 백날 해봐야 그렇게 외치는 누가 살아 있어요? 그렇게 외치는 내가 살아있잖아요. 내가. 


내가 안 살아있으려면 지금 살아있는 것이 살아계신 주님의 활동에 결과물로서 지금 내가 지금 물 마셔야지. 주님의 주신 은혜로서. 그래야 주님의 증인 되잖아요. 나의 증인이 아니고 주님의 증인된다고요. 주님의 증인은 나도 살고 주님도 살고 주님의 증인 되는 법은 그런 법은 없어요. 그렇게 되면 뭐가 빠지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죽어버려요. 그건 하나의 우상이 된다고요. 


주님 이렇게 주님 증거합니다. 아프가니스탄 가가지고 이슬람한테 몸값 뺏겨가면서도 나는 그 불쌍한 이슬람의 영혼들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찬양했습니다 그렇게 의료선교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죽어도 좋으니까 주님의 사랑이니까 십자가만 알게 해주옵소서 이렇게 했습니다 라고 누가 기억해요? 누가? 누가? 살아있는 본인이 기억하는 거에요. 


만약에 기억하는 그 본인을 누가 옆에 서서 에라 죽어라 이렇게 하면 대번 격분합니다. 내가 아프가니스탄 가서 괜찮은 일을 했는데 나보고 쓸모 없다고 죽으라고 하면 화는 누가 내야 됩니까? 누구 몫이 됩니까? 내가 화를 내가 내는 거에요. 남수단에 가가지고 울지마 톤즈, 울지마~~~해가지고 울지마 톤즈 해가지고 거기에 뭐 소아과 의사 입니까? 있지요. 이태석 신부. 이태석 신부가 가서 했다. 그거 죄입니다. 


그 사람도 죄고 그걸 떠벌리는 사람도 죄고 그걸 교과서에 실었던 남수단 당국자도 죄고. 무슨 사건이 빠졌어요? 없음에서 나왔다는 그 사실이 빠졌고요 이미 사람손에 죽었던 분이 살아계시다는 사건이 빠져있는거에요 그게. 봉사해서 구원받을거 같으면 저도 봉사합니다. 한 봉사 합니다. 봉사는 마약같은 거에요. 여러분 봉사 안 해봐서 그런데 봉사해보세요. 봉사보다 더 쾌감을 주는 취미가 없어요. 봉사는 그냥 취미같은 거다 취미같은거. 


양자 들여서 서명하는 것, 이거 무한한 이거는 엔돌핀을 제공해 줍니다. 엔돌핀을. 지금 형편이 안되서 못하지. 마약 이상의 즐거움을 줘요. 정기적으로 고아원 방문하고 정기적으로 소리없이 쌀가마를 동사무소에 갔다놓고 이런거 내는거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안해서 그런데 해보세요. 10년 20년 그냥 그 즐거움이 그냥 갑니다. 돈주고 못 바꿀 즐거움과 행복감을 줍니다. 100% 마귀가 한 짓이에요. 100%. 100% 마귀가 한 짓이에요. 


주의 증인은 뭐냐 하면 주여 죽여주시옵소서 하는거에요. 통촉하옵소서. 죽여주옵소서. 주님을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왕으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 사극에 보시면 왕의 위세가 앞에서 신하 앞에서 얼마나 존재감이 미흡하다는걸 아시죠. 죽여주옵소서 죽이면 그만이에요. 네로 황제는 신하의 아내같은건 그냥 뺏어버리고 많은 돈 많은 부자도 그냥 죽여버리고 돈 뺏어버려요. 


아합이라는 북이스라엘 왕은 여기에 요새 포도농사 얼마 받습니까? 그 포도원 탐을 내서 죽여버려요. 왕이란건 그런 위세입니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자기가 왕이에요. 왕인데 성경에 보면 주 예수를 믿게 되면 주님이 누가 돼요? 왕이 돼죠. 우리는 뭐가 되냐 하면은 왕이 되면 왕의 왕국이 있습니다. 왕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우리가 결국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백성들 중에 하나가 돼요. 


그것도 독자적 백성이 아니고 백성들 중에 하나가 되어버리면 이 백성은 맨날 뭐만 쳐다보느냐 하면은 왕국을 왕국답게 하게되는 그 모든 책임과 지시와 명령 지시사항이 전부다 예수님에 의해서 이게 하루하루 하루치가 제공이 돼요. 철저하게 예속되고 철저하게 종속되는 존재라니까요. 그러니까 이 사람의 삶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오는게 아니고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나와야 돼요. 이 차이가 중요하다. 


예수님이 나온다면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오지요. 십자가 사건이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오늘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다른말로 ‘나 못박혔다는 사실을 주께서 알리는 조로 이 세상을 운영해 나가나니’ 이런 뜻이에요. 내가 여기서 살아 있는게 아니고 죽었다는 사실을 살아계신 주님이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나를 지금도 활용하는 차원에서 나를 살리고 있다 이 말이에요. 


갈라디아서 20절 보다 더 길다. 해석이 더 긴데 할 수 없어요. 그 말씀 자체가 어려워가지고. 불평, 원망, 자기 인생에 대한 후회 그리고 이거는 내가 바르게 했다 내가 나쁜짓 했다 그렇게 언지를 할 언급할 그런 하등의 권리도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자랑질하는 것은 겸손하면 그만이지만 생각해보세요. 자랑질하는 것 겸손하면 그만이죠. “아이고 이거 큰일했는데.” “아~~이거 제가 한게 아니고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거는 누구나 쉽게 조금만 연습하면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자기가 잘못했을 때 후회가 안된다는게 이게 가능할까요? 후회가 안된다는게. 아~~무릎을 치면서 내가 선택을 잘못했다. 이렇게 후회 안된다는 그런 뻔뻔스러움이 과연 성사 될까요? 후회 안되는 사람 있으면 자랑도 본심으로 인정해줄께요. 자랑이 정말 자랑이 아니라면 뭐도 안해야 되냐 하면 후회도 안해야 돼요. 후회도 안해야 돼요. 


주께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었다 이렇게 나와야 되지요. 좀 뻔뻔스럽지만. 그리고 그때는 그때고 앞으로 또 내일 되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내가 예측할 필요도 없고 할 그런 이유도 없어요. 왜? 역주행이니까. 역주행이란 말은 가방을 예를 들었는데 봅시다. 가방이 포장이에요. 우리가 없었던 창세후에서 어디로 역주행한다? 창세전으로 역주행 하는거에요. 


창세후에서 창세전으로 왜냐하면 예수님과 야곱은 그 사람이 구원받고 안 받고는 이미 창세전에 이미 결정났기 때문에. 창세전에 결정나거든요. 그렇게 역주행을 한단 말이죠. 역주행을 하면서 무엇과 무엇을 교체를 해야돼요. 뭐냐 하면 주님이 창세전에 예비한 자아와 그리고 지금 내가 창세후에 내가 세상에 물들었던 세상에 의해서 구성된 내 자아와 이게 계속 바꿔치기를 해나가야 됩니다. 


이게 구약의 광야 40년이 이걸 아주 잘 묘사해서 제대로 바꿔치기 했지요. 홍해를 건너온 사람은 두 사람 빼놓고 다 바꿔치기 했으니까 사실은 두 사람 지워버려도 거의 100% 바꿔치기 한거죠. 40만에서 2두명이면 퍼센트가 얼마 안되잖아요. 99.9%는 다 바꿔치기 했지요. 홍해의 기적을 알고 있는 사람을 다 바꿔치기 한거에요. 다 죽여버린거에요. 


그래서 시간은 다 죽을 때까지 계속 지연되는겁니다. 40년간. 안 죽냐? 안 죽냐? 결국은 누가 죽었느냐? 모세까지 약속의 땅을 못 보고 보긴 보고 거기 무슨 느보산인가 그래요. 올라가서 보고서는 자기는 못 가고 거기서 죽어 버립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나의 천국의 자아는 살아있는 내가 걱정하거나 염려하거나 나하고 연결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본인이 감수하는거에요 감수. 그걸 인정하는 겁니다. 끊어진거에요. 


여기 있는 ‘흙에서 난 나’하고 ‘천국가는 나’는 끊어진 상태가 되는 거에요. 끊어진 상태가 뭐냐 하면은 여기서 내가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열심히 찬양한 것도 무용지물로 끊어져 버리는 거에요. 왜냐하면 나의 의미로서 못 가는 나라이기 때문에. 보통 도사를 교회가면 도사들 많으니까 현인, 현자들 앞 자리 쭉 앉아있거든요. 오래다닌 이무기들 있잖아요. ‘교회 이무기’들. 오래 다닌 사람들. 


주님 욕하면 가만있고 교회 욕하면 화딱지내는 사람들 있잖아요. 내가 여기 몫돈 낸게 얼만데 하면서 앉아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왜 도를 닦느냐 하면 이 몸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거에요. 그 사람들 특징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조심스럽게 살기. 조심스럽게 살기. 행동하더라도 한번 생각해보고 행동하는거. 발을 딛더라고 이게 내가 가야할 길인지 발을 빼야될 길인지 생각해보고 가는거에요. 


그런 사람에게 묻습니다. 한번 하지 말고 일곱 번씩 생각해보지. 일곱 번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일곱 번했다 하면 일흔번의 일곱을 생각해보지. 490번 생각해봐. 원래 살던곳은 예수님께서 부활되면 그때는 시집도 아니가고 천사도 그러니까 이땅에 살면서 부인에게 남편에게 이를 갈갈 갈았던 것, 나중에 천당가서 한번 보자 멱살 잡는다. 천당가서 멱살 쥘 일이 없어요. 천국가서 멱살 쥘 일은 없습니다. 분하면 지상에서 복수하든지 알아서 하세요. 


둘 다 지금 역주행하는 상황같으면 고소하지 말고 비난하지 마세요. 둘 다 수렴되잖아요 ‘수렴’. 수렴이란게 뭐냐 하면 이렇게 크다 여겼던 그것도 점점 작아지면 하나의 질적으로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대단한 남편이고 대단한 아내로 보이지만 둘 다 성령께서 그런 가정 거의 없습니다만의 예를 들면 둘 다 성령 받았다칩시다. 그런 가정 거의 없는데 받았다고 치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들이 보잘 것 없고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 사실로 뒤에 만나게 되겠지요.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면 갈수록 뭐만 남아요? 당신 나하고 살아줘서 고마우이. 당신 나하고 살아줘서 고마우이. 처음에 결혼해서 부부싸움할 때는 나니까 너하고 같이 살아주지 나 아니면 너 같은거 없다. 엄마 쇼파 버릴까요? 쇼파 버리지 말고 네 엄마나 갔다 버려라. 나니까 살아 줬지. 속으로 빠빠이다 인간아. 인간은 부부라도 개인이에요. 


자, 부부 관계를 하게되면 한몸이 되지요. 하나님이 짝지운걸 나누지 못한다. 하나지요. 그 말씀이 있잖아요. 오늘 배운걸 여기 실습해 봅시다. 부부가 두 몸이 하나가 됐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가 된걸 육으로 실험을 해보겠죠. 하나 될려고 애를 써보겠죠. 놀러갈 때 싸우더라도 같이 놀러가고 물론 놀러가다가 운전할 때 조수석 앉아 가지고 가면서 싸우고 올 때까지 싸우고 하지만 어쨌든간에 하나 될려고 애를 써본다 이 말이죠. 


야 다 풀고 풀고 우리 풀고 일본 온천 여행 갈까? 그래서 하나 되가지고 이렇게 해볼까 노력은 하는데 결국은 이게 실패로 끝나요. 왜? 말씀은 내 육 가지고 성취가 안되기 때문에. 그거 실습하라고 결혼하신거에요. 여기 앞에 둘. 그거 하라고 부부된거에요. 혹시 이중에 결혼 안 하신분 있습니까? 하세요. 내가 얼마나 내 단독자로 살아가는지를 확인해봐야 돼요. 


그래 애 없으니까 쓸쓸해서 안되겠다. 애 나오면 정 들겠지. 애 하나 낳아요. 애 하나 가지고 안된다. 적어도 둘 낳아야지 둘 낳으면 정이 오겠지. 둘 낳았다. 세 명 낳아야 된다. 아들 낳아야지. 세명. 안된다. 네명 되면 완전한 사랑되겠지. 퍼펙트 러브 되겠지 네명 낳았다. 완전합니까? 왜 5명 시도 안 하시고? 한 12명 낳으면 완전한 부부 되겠네요. 한 몸 되겠네요. 


인간의 모든 육은 실패로 끝납니다. 실패하라고 인간의 몸을 주신거에요. 교체하라고. 네 몸과 말씀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네 몸은 이미 조져놔버린 악마로 인하여 수상한 혐의가 있는 몸이에요 혐의가. 천국에 올수 없는 몸이에요. 인간의 우리의 몸은 이렇게 살아봐서 아는 것도 있지만 정확히 아는 것은 아무리 살아도 다 몰라요. 확실히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몸을 가지고 말씀과 결합이 될 때 그 끝은 뭐냐? 아버지한테 저주 받았다는 사실.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여기 오늘 본문에서 요한복음 19장에서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핍박받는 이야이가 19장 끝까지 가요. 읽어보시면 더 이야기할거 없어요. 쭉 그런 이야기에요. 그러나 마태복음에 보면 뭐냐 하면 여기는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는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하시는데 마태복음에서는 26장에서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이야기해요. 


마치 예상 못한 불평을 하는 예상못한 일이 벌어진 것처럼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해놓고 다 이루었다고 했거든요. 이거는 시편 22편에 그 다윗이 하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가 그게 ‘다윗 언약’입니다. 다윗 언약이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제는 반복이 되고 영원히 하나로 고정화 되는 겁니다. 모든 말씀이 ‘고정화’ 돼요. 


고정화 된다는 말은 우리하고 무관한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고정된 그 모든 말씀에 고정화 완성이 우리 현재의 자아, 육으로 실패로 끝난 자아하고 여기서 나온 이 자아 예수님에게 나온 자아와 바꿔치기하는 작업을 성령을 통해서 지금 열심히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열심히 하고 계신거에요. 


그래서 열심히 하기 때문에 제가 낮에 주일낮에 이야기 한것처럼 여기 덤벨이라고 하면 여기 추를 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역기 봉이 중요하거든요. 관계가 중요하다고요. 관계가 중요하기 위해서는 여기는 누가 달리고? 예수님이 달리고 이쪽은 누가 달리고? 이쪽은 육적인 너무나 육적인 나밖에 모르는 나의 정의감으로 살아가는 내 잘남을 남한테 과시하는 그걸 보라고 살아가는 나 자신을 여기에 매다세요. 이걸 버리면 안 된다고요. 막 살아야돼요. 막 살고 주님 막 살고 두 개의 막 살면서 누가 이기나 보자 이 말이죠. 


이렇게 만약에 우리가 주님한테 갔다고 한다면 지금 약간 좀 어렵게 하겠습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성령께서 지금 제대로 교체가 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가 나오느냐 하면은 인간에게 매달리지 않아요. 인간에게 매달리지를 않습니다. “아...목사가 되가지고 교인이 또 빠졌다. 벌써 올해만 벌써 12명이 빠졌다. 이래가지고 나는 이러면 헌금 안 나오면 나는 못 산다.” 목사 머리에는 맨날 그것 밖에 없어요. 교인수와 헌금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자기 가게가 우상이니까요. ‘골목교회’에요. ‘골목식당’이 아니고. 백종원이. 골목교회거든요 교회들이. 그것만 따진다고요 그것만. ‘공리주의’에요. 어떤 힘이 될수 있는 그것만 따지지 뭐 어떻게 진실 그런건 생각도 안돼요. 말만 진실하지 말고 돈이라도 내면 인정해줄게 이런 식이라니까. 돈도 안내고 무슨 진실이에요. 목사님 복음 사랑합니다. 돈으로 이야기 해 돈으로 증명해 돈으로 증명해!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갑자기 표정들이 왜 그래요? 


목사는 우상이 그런겁니다. 교회는 자기 집이 또 우상이니까. 이렇게 할 때 결국은 매달리는 것이 사람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어요. 철없는 신학교 처음 나왔잖아요. 그럼 주의 뜻인줄 알고 복음 전한다고 처음에는. 주여 복음이 뭡니까? 내일 죽어도 좋으니까 아골 골짜기에도 복음 들고 가겠습니다. 진리만 전하다가 장렬하게 죽게 하옵소서 라고 하면서 이렇게 장렬하게 주의 뜻대로 했으니까 한 세명은 더 보태 주겠지. 오게 하겠지. 


네명 나갔는데? 그중에 네명 나가 버렸는데. 그것도 헌금 많이 하는 쪽이 나가 버렸는데. 큰일났는데. 결국 느끼는 것은 인간은 사람 없이 못 산다는 겁니다. 사람 없이는 못 산다. 이 복음도 모르는 마누라 나가!! 나는 주님 뜻에서 나는 혼자 살래. 이혼했다 합시다. 외로운데? 이제 슬슬 종로3가에 공원 있잖아요. 무슨 공원이에요? 탑골 공원에 나가는데. 거기서 장기 두는데. 박카스 아줌마 만났는데. 약 먹고 꽃뱀한테 걸렸는데. 몸이 말 안 듣는데 몸이. 


여러분들은 제 말이 어려운게 아니에요. 지금 내가 성경을 다 외웠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복음을 다 안다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진솔하고 진실한 것은 내 몸이 감당이 안돼요. 사람이 그리운걸. 사람이 그립다 보고싶다 아니야 이러면 안돼 백날해도 이 몸이 너무하다 싶을정도로 이 몸이 가만두지 않을 때 어떡합니까? 너무 과하다 할 정도로. 안돼 나 사람을 의지하면 안돼 주님을 의지해야 돼. 주님만 생각해야 되고 주님만 사랑해야돼. 몸이 있다가 놀고 있네. 누굴 귀신을 속여라. 


인간은 자기 몸을 못 속여요. 자기 몸을 못 속여요. 자식보고 나는 네가 공부 1등하는 것도 싫고 수능만점 받는것도 싫고 오직 잠언서 1장에 있는 말씀처럼 청년들아 오직 누구만?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게 사람된 본분이다 뭐 이런거 있잖아요. 오직 여호와만 경외하고 여호와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 나 아무것도 너 공부 잘하는 것 원하지 않아. 그랬는데 엄마 또 100점 받았어 할 때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내가 아는 것도 이 몸이 말하는 것과 달라요. 


아무리 끊고자 끊고자 하고 성경말씀을 아는 입장에서는 그래서는 아니된다 아니된다 백날 해도 몸은 누구 몸입니까? 우리 겁니까? 주님 것이죠. 이게 왜 이런 현상이 일어졌느냐 하면은요 주님이 직접 내 몸을 바꿔치기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어줍잖게 거드는 거에요. 뭐냐 하면 이왕 바꿀거 주님께서 좀 수고 덜 하라고 이왕 할거 착한 내가 되어 가지고 주께서 원하는 천사와 같은 몸을 바꿔주는데 일조하려고 애를 쓰는거에요. 


그렇게 되면 관심사가 누가 돼요?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나같으니까 구원한다는 생각이 강렬하겠지요. 나같으니까.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교회 앞에 어떻게 산다? 함부로 살지 않고 어떻게 삽니까? 조심스럽게 한번 더 생각하고. 내가 이래야 되겠느냐를. 과연 내가 이런 선택이 옳은 선택이였는가를 염두해두면서 해보는 거에요. 왜? 그렇게 하면 좀 위로가 돼요? 그렇게 하면 주께서 추가적인 보너스 복을 더 받을거 같아요? 백배는 아니지만 삼십배 정도는 기본으로 받을거 같습니까?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끝까지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하겠다는 악마적 심성을 본인의 몸에다가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옛날 사극에 나오잖아요. 과부가 은장도 하나 해가지고 저 바깥에 허연 보름달 떴는데 저 바깥에 오랜만에 175일만에 오랜만에 남정네 소리 난다. 이 집에서 한번 묵고 지나갈 수 있습니까? 한번 물어보러 왔을 때 은장도를 해가지고 이러면 안돼 이러면 안돼. 찌르는것처럼 찔러놓고 문은 열어준다. 몸 따로 마음 따로에요. 따로 국밥 따로 없어요. 몸 따로 마음 따로라니까요. 


자, 성경이 왜 있습니까? 성경이 네가 생각하는 몸, 몸에서 나온 그 자아가 그대로 우리에게 노출시키는 용도로 성경을 준거에요.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7장입니다. 로마서 7장이 뭡니까? 선을 행하라 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걸 어기는 욕망이 나오는데 그냥 그런 욕망이 있다로 끝나는게 아니에요. 경쟁을 붙여요. 누가 이깁니까? 악이 이깁니까? 악이 이기는 거에요. 그런 사도 바울을 누가 구원했어요? 주님이 구원했어요. 


그 사도 바울의 그 고백이 모든 성도의 기본 모델이 되는 겁니다, 샘플이 되는 거에요 샘플. 꼭 이런식으로 구원하겠다는 거에요. 신년 됐으니까 죄 지을거 없다고요? 아니요.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more and more, everyday.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에베소서 3장에 있는 사도 바울의 기도처럼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사랑의 깊이와 사랑이 높이와 사랑의 넓이와 사랑의 그 폭이 점점 더 커지기를 원하노라. 오직 사랑밖에 없어요. 


그 사랑이 사랑답게 될려면 이 몸이 죽을 때까지 이 몸이 누구를 괴롭혀야 됩니까? 나 자아를 괴롭혀야되죠. 그럼 누가 누구를 괴롭힌게 되죠? 내가 나를 괴롭히고 내가 성도를 괴롭히는 것은 누구를 괴롭히는 겁니까? 바로 주님을 괴롭히는 것이 되니까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되풀이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의 되풀이. ‘십자가의 되풀이’. 오늘 제목입니다. 십자가가 되풀이 되는 겁니다. 날마다 주님을 괴롭히는 거에요. 나는 성도이기 때문에 안 괴롭힌다? 자기 정말 주제파악 못해요. 


우리에게는 오늘 강의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우상이 있습니다. 그 우상은 십자가 사건이 빠진 우상이에요. 좀 약간 학문적으로 말해서 새 언약에 결과가 아닌 십자가에요. ‘새 언약’. 새 언약 좀 더 깊이 이야기 하면 내가 관여할 수 없었는데 주님 혼자 관여해서 일으킨데서 나온 그 사건. 거기서는 누가 빠집니까? 내가 빠져있는 사건이 나를 건드린다는 그 내용이 빠져버리면 그건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저를 왜 뺍니까? 하고 반드시 나와야 돼요. 저를 왜 뺍니까? 


내 구원에 아무 기여가 안되기 때문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에 빼는거에요. 내 뜻대로 마음껏하게 만들고 약올리게 만들고 나 설치게 만들고 가입해 놓는 거에요. 그래서 안 되는 거야.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성도는 뭡니까? 그걸 감사한다는 거에요.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오히려 유일한 자기가 평생 살아온 유일한 자랑이 뭐냐 하면은 내가 안 된다는 것을 자랑하는 거에요. 내가 안 된다는. 왜 안 되냐면 이미 죽은 몸과 다를바 없어서 죽은 몸이 이미 숨 죽어 죽었는데 무슨 살아있느냐. 내가 안 된다는 것을 자랑하는거에요. 


그러면 복음 모르는 친구들은 뭐라고 합니까? 너 마법사야?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갑자기 제목이 바뀔려고 한다. 네가 마법사야? 제목을 아까 뭐라고 정했습니까? 잊어버렸다. ‘십자가 반복’이죠. 사람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무리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해도 정신 똑바로 차리면 안될 일이 없다 하지만 되는 일이 없어요. 정신 차렸다고 내 몸이 내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충동과 욕망은 나의 이성보다 더 힘이 세요. 


엄마 이번 모의고사 수능 못 쳤어. 괜찮아 괜찮아. 아프니까 청춘이야. 무슨 아프니까 청춘입니까? 아프니까 청춘이야. 성공한 사람들은 다 이렇게 실패를 하는거야. 말은 그렇게 해요. 엄마는 그 날 저녁에 수저를 놓습니다. 아이고 주여 그리고 교회 갑니다. 나훈아처럼 땅을 칩니다. 청춘을 돌려다요. 주여 사십일 했습니다. 개근했어요. 개근해서 사십일 했고 또 성경 쓰라고 해서 성경까지 베껴 썻습니다. 결과가 이렇게 되면 앞으로 내가 무슨 의욕으로 주님을 더 충성하고 찬양하겠습니까? 앞으로 내 신앙 좀 놀더라도 책임은 당신이 지세요. 


그게 바로 빌라도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인간은 다 나름대로의 몸이 진짜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몸이 누구나 다 그리워하는게 있습니다. 그리워하는데 그 그리워하는 참고는 세상에서 가져온거에요. 하지만 막상 본인이 그리워하는 것은 이 세상에 현실에 없습니다. 


왜 없게 하느냐 하면 그래야 악마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감사 대신에 고마움 대신에 계속해서 결핍과 불만족에 시달리도록 그렇게 우리에게 독려해왔습니다. 계속해서 지금도 마귀가 그렇게 하고있어요. 그러나 마귀보다 누가 더 쎕니까? 주님이 더 쎄지요. 결핍되고 불만족 스럽고 짜증나는 것을 반드시 우리는 겪어요. 거칩시다. 역기 봉에다 이걸 걸쳐요. 걸치고 이것만 걸치면 안돼죠. 그럼 중복 인생이 안되잖아요. 


이걸 의도적으로 이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여기에다가 주님의 십자가를 걸쳐놓게 되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를 위한 일이 아니고 주님의 자신의 십자가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너같은 탕자도 구원했다는 그런 찬양을 온 우주에 자랑질하기 위해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우리를 데리고 이끄시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에서 이렇게 가담된 사람 많은 것은 지금도 이 십자가 사건 속에서 우리는 늘 놓여져 있으면서 이미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그 십자가 사건을 늘 현실화로 지금 현실로 기억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인생인줄 알았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주님을 위한 주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백성으로서 왕의 백성으로서 편입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날마다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들추어주시고 교체하는 그 감사와 그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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