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부활의 공격성 1901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2. 1. 15:52
2019-01-22 23:52:27조회 : 307         
부활의 공격성 190122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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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175.♡.96.96)19-02-01 14:13 
강남-요한복음 20장 11절(부활의 공격성)190122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0장 11절부터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렇게 되어 있지요. 


천사하고의 대화가 가능한가요? 라고 물을 때 과학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존재하지 않아요. 천사는 인간이 상상해서 만들어낸거고 천사는 없습니다. 예수 믿고 복음 알고 성경세계사 인정하는 우리 앞에서 왜 천사가 없다고 이야기하느냐라고 한다면 천사 인정하고 하나님 인정하고 삼위일체 인정하고 다 인정해도 우리의 평소의 삶 자체는 천사를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평소의 생활은 천사 없이 살면서 성경에 나오니까 성경에 옹호해줄려고 아양 떨려고 하나님께 아양, 이쁨 보이려고 천사 인정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천사 대한 것 내가 인정합니다. 그거 인정하면 뭐합니까? 생활이 달라져야지. 우리 평소의 생활이 달라져야 되지요. 천사와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 천사와 대화 했다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대화를 했더라도 그 천사만난 티가 나야 되고 그 천사 만나서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대화됐다고 어울림이 있는게 아니고. 이게 대화되려면 평소에 천사가 없이 살아가는 우리 생활구조에 도대체 어떤 논리 체계가 형성되었기에 천사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다는 사고방식으로 우리 스스로를 위장하면서 스스로를 그렇게 정당화하면서 살아왔는가를 알아야 돼요. 


도대체 우리가 어떤 사고구조를 가졌기에 그까이꺼 천사 없어도 우리는 별 아쉬움이 없는 식으로 그렇게 버틸 수 있느냐 이 말이죠. 그게 지난시간에 했잖아요. 그게 인과응보에요. ‘인과응보’ 너무 어려우면 그럼 쉽게 가겠습니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너무 어려우면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고 원인은 인간이 관여할 수 있다 이 사고방식이거든요. 이 과학적 논리 아닙니까. 


원인을 우리가 조종하게 되면 결과도 우리가 달라진다. 결과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 원인과 결과 이 과정 전부 다 우리가 다 알 수 있기 때문에. 파악이 다 가능하기 때문에. 이게 과학적이고 합리적 논리에요. 과학적, 합리적 논리입니다. 인간의 행함에는. 추워서 입었어요. 오늘 아침에 병원에 갔는데 병명이 나왔어요. ‘알레르기성 천식’. 앞에 뭐 붙어요 ‘심각한’. 


알레르기 천식 같으면 분명히 원인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병원에서 한 이야기에요. 원인이 있으니까 천식 걸렸으니까 천식을 고치려면 원인을 수정하게 되면 천식은 낫게 됩니다. 이래서 한의원이든 병원이든 모든걸 하잖아요. 학원이든 전부다. 원인과 결과를 우리가 파악하고 있으니까 원인조정해서 결과 우리가 원하는 결과 만들어냅시다. 그렇게 나간다 이 말이죠. 여기에 무슨 천사가 필요합니까? 천사가 찾아와 사바 사바사바~여기 왜 천사가 왜 천사가 들어가요? 평소에 우리의 삶에는 천사가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우리 삶이 정당한데 우리 삶도 정당하지만 천사 하나 더 들어가면 더 정당하다 그거 아니에요. 천사가 들어갔다면 우리 삶, 천사를 고려해야 된다면 이 원인 결과든 이 사고방식 전체가 파탄 나야 됩니다. 파탄나야됩니다. 여기 원인 결과를 할 때 여기 반드시 들어가는게 있어요. ‘나’. ‘내가’ 천식걸렸다. ‘내가’ 병들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기침이 나고 기침이 나니까 밤잠을 못 잤지요. 기침이 나면 모든게 귀찮지요? 모든게 귀찮고 짜증나고 힘들어요. 몸이 아프니까. 치통도 마찬가지고. 그렇지요? 그러면 귀찮고 짜증 안 나려면 내가 기침 안하는 쪽으로 또는 이빨이 안 아픈 쪽으로 고치면 된다 이 말이에요. 그렇지요? 여기 지금 이 논리가 뭐가 문제냐 하면 ‘내가’ 편하려면 이 원인을 고쳐야한다 이렇게 하잖아요. ‘내가’ 편하려면. 


그런데 부활의 세계에서는요. 부활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이미 죽은 자신의 죽음에서 자기가 못 벗어나는 입장에서 부활이 신기한 거예요. 부활이 흔하디 흔한게 부활 같으면요 죽은 이순신 살아나서 돌아다니고 세종대왕 한글 말모이하고 있고 이러면 별로 부활이 신기하지 않아요. ‘말모이’라 하는 요새 새로 나온 영화를 이야기 합니다. 죽었던 강감찬하고 또 나오고 을지문덕 나와서 설치고 이러면 이거는 박물관이 살아 있어요. 이거는 박물관이 살아있다 영화하고 똑같은 거에요. 죽은 인디언하고 바로 왕이 나와서 인디언하고 서로 타협해서 데모하고 그런 영화거든요. 


부활의 세계가 우리가 가지 못한다는 것은 부활은 우리에게 생소한 겁니다. 생소하기 때문에 이거는 생소하다는 말은 인간이 원인을 제공해서 부활이라는 결과를 낳는, 우리 나와바리 우리 세계하고는 안 맞는 세계가 되는 거에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부활은 있겠다? 없겠다? 부활은 없는 거에요. 죽으면 그냥 끝나는 거에요. 


과학은 반복되는 결과를 나을 때 그걸 진리로 간주합니다. 누구 할아버지 돌아가셨는데 나흘 되도 사흘 되도 무덤에 그대로 있더라. 무덤에 있을 수가 없지요. 요새는 80% 화장하는데 화장을 해버리니까 매장했으면 혹시 꿈틀꿈틀 하겠는데 화장을 해버리니까 자기 날라간 뼈다귀 다 찾으려고 하면 연못에도 뛰어 들어가야 되고 바다까지 다 쫓아가야 되요. 이거 안되거든요. 인간의 과학적 구조 내에서는 부활은 없는겁니다. 


부활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은요 여기에 11절 봅시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마리아가 부활을 믿은게 아닙니다. 마리아가 부활을 믿은게 아니고 예수님이 시신이 없다는 점이 아쉬워서 울고 있어요. 왜냐하면 시신이 있어야 자기가 계속 찾아가서 좋았던 시절의 회상이 가능하거든요.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아프면 기침나고 아프면 모든게 귀찮다라는 이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이게 왜 잘못됐느냐 하면은 누가 귀찮아요? ‘내가’ 귀찮은거에요 ‘내가’. 그런데 이것이 우리는 이 땅에서 맞다고 여깁니다. 이게 옳다고 생각해요. 이거 그르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한번 보자 이 말입니다. 


부활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우리는 없다고 이야기하고 부활의 세계에서 보면 인간들은 결국은 인간의 마지막은 뭐예요? 부활이 아니고 인간의 마지막은 살다? 살다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잖아요. 살다 죽으면 그만이에요. 죽은 자에요. 어차피 백년을 사나 오십년을 사나 지금 살아있다 하지만 지금 살아있겠죠 지금. 내일되면 또 내일이 지금 되거든요. 모레 되면 모레도 지금 돼요. 


지금 지금 지금 하다가 알레르기 천식으로 호흡기 꽂고 헥헥 거리다가 숨 못 쉬어서 죽었다. 어느 누가. 강남에서 강의하다가. 결국은 일시적인 것을 가지고 거기에다가 최종적인 의미를 인간은 담을 수가 없어요. 죽었다가 정답이에요. 한때 살았다는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한때 살았다. 서른 살 때 나는 힘이 최고조로 달했다. 서른 살. 서른 살 이상 되도 지금 힘 되 가지고 지금 권투 강사하는 사람도 있는데. 서른 살 때 무술로 보나 뭘로 보나 서른 살 때 힘이 절정에 이른다는 거에요. 축구선수 서른 살 때. 


그러나 김광석 이야기에 의하면 지가 작곡한건 아니지만 김광석의 입장에서는 서른이 절정인데 갈수록 서른 살 + 하루 서른 살 플러스 이렇게 해가지고 점점 더 서른 살에서 멀어져 가는 거에요. 서른 살에 단명했잖아요. 점점 더 서른 살에서 점점 더 멀어져가요. 그래서 서른세 살에 자살했잖아요. 서른세 살 때. 자기가 예수님도 아니고. 죽었어요. 왜 죽었느냐? 서른 살하고 멀어진다고. 최고의 시절하고 멀어진다고. 사실은 서른 살과 멀어진게 아니고 죽음에 가까웠죠. 사실은 죽은거에요 죽은거. 


그러면 살아있을 때 기침 나서 짜증난다 하지만 그러다가 죽어버렸잖아요. 그러면 죽음은 짜증난다 귀찮다 속상한다가 아닙니다. 죽음은 뭐냐 하면은 무의미에요. ‘무의미’. 있으나 마나에요 죽음이란게.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에요. 이 무의미를 학교에서 당하게 되면 그걸 왕따라고 이야기합니다 ‘왕따’. 왕따라고 이야기해요. 


고등학교 때 제가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학생이 하나 있었어요. 있는데 참 답답해요. 전부다 이렇게 툭툭 치고가고 놀리고 이래요. 몸이 좀 외소하긴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고 뭔가 성격상 가정문제인가? 성격상 말을 안 하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누가 와서 시비걸어도 그 반발이 없어요. 왕따의 표적이 된다고요. 그래서 그 애를 왕따하는 사람들이 학급에 몇 명 있었어요. 한 10명 정도 있었어요. 10명 많아요. 


그리고 학급에 한 50명 좀 넘었으니까 옛날에는. 한 40명은 무관심해요. 저는 무관심하는 편에 속하는데 하도 당하니까 걔 편을 들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편을 들어봐야 소용없어요. 본인이 변해야 되는데 본인이 안 변하는거에요. 내가 결론내린 것은 왕따당할만하다. 왕따 시킨 사람을 옹호하는게 아닙니다. 가만있는 애를 왜 건드려 그건 미워요. 당해도 항상 이유가 있어요. 당할만한 이유가 있어요. 당할만해요. 왜 학교에 왔으면 공부도 못했어요. 


좀 이렇게 목적을 두고 뭘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냥 말도 없이 하루종일 있어요. 유심히 봤거든요. 나 같으면 가만 안 있는데 왜 저러지? 마치 나를 왕따 당해라. 나는 나 스스로 내가 보기에도 나는 의미 없다 하는거 같애요. 숨이 막힐 지경이에요. 내가 그 애라면 숨이 막힐 지경이에요. 학교 다니지 말지.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이 아픈거 귀찮은거 기침나는거 힘든 것은 뭐냐 하면 있으나 남들 앞에 투명인간처럼 되는거 있으나마나 한거. 


가족이 한 네 식구 되도 만약에 한명한테 아무도 말 안 걸어주면 그거는 있으나 마나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부부가 그렇다면 그건 갈라서는게 좋지요. 서로가 서로를 있으나마나 하는걸. 요새는 부부보다 개가 더 좋고 강아지가 더 좋고. 대화상대가 되니까. 고양이 같으면 “나비야~” 이러면서 안아주고 먹여주고 강아지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은 자진해서 왕따가 되신 분이에요. 그 예수님을 유대인의 통일된 의견은 유대사회에서 예수님 빼놓고 가자 우리끼리. 왜? 그럴 때 우리 사회는 의미가 있다는 거에요. 사람 사는 의미. 그 의미가 뭐냐 하면 바로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원인을 손대면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이 의미, 이 의미에서 예수님은 빼돌리자. 제외시켜버리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알다시피 예수 믿는다는 것, 참 예수 믿는다는게 예수 믿는 순간 우리는 자진해서 똑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어요. 왕따당하는 겁니다. 


우리 십자가 마을에도 이번에는 참석 못했지만 늘 한번인가 참석하신 어떤 여자, 어제 목사님 되셨대요. 목사안수 받은 목사님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저한테 고맙다고 저한테 전화를 했는데 그 전화가 고맙다고 전화한게 아니고 나중에 보니까 복음 때문에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게 자기 신세가 한탄스러워서 전화한거 같아요. 복음을 알았다는 것 때문에 교회에서 자기를 빼고 가자는 거에요. 왕따시키고 가자. 


그 교회 이야기가 뭐냐 하면은 십자가를 알면 그게 완성이 아니라는 거에요. 십자가 다음에 그 다음 순서, 나가가지고 실적을 원해야 되는데 왜 그때는 전도사니까 왜 전도사님은 왜 제자리뛰기 하느냐 왜 광야에 머물러 있느냐, 약속의 땅에 가야지. 왜 광야에 그대로 머물러 있느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언급하는거에요. 


그렇게 공격하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성경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죄 용서 해주고 그다음부터는 뭘 보장해주느냐 하면은 우리가 평소에 원했던 행복 있잖아요 행복. 내가 원하는 나의 세계. 그걸 그동안 내 힘으로는 못했는데 성령의 힘으로 주님 은혜의 힘으로 마음껏 나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보장을 해주는 그 쪽에다가 승부를 걸어줘야 사람들이 모인다는 거에요. 


성공적인 삶을 보장해줘야 되는데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이미지가 뭐냐 하면 실패작이에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실패의 그냥 제자리뛰기 해가지고는 손님이 오겠느냐 하는거에요. 교회라는 것을 세우기 위해서 교회라는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원인을 우리 쪽에서 조정을 해주면 교회 부흥이란 그게 오게 되고 자기는 이제 인권비가 빠진다는거에요. 그게 되는데 결과를 십자가로 스톱시켜버리면 맨날 십자가만 자랑해버리면 안되지 않느냐. 


십자가만 자랑하면 안 된다 이거에요. 교회는 결국 웃어야 되고 행복이 넘쳐야 되고 교회는 보람이 있어야 되고 내 뜻대로 안됐는데 하나님께 기도해서 만사형통됐다는 그런 결과들이 나올 때에 소문 듣고 왔어요 해가지고 자꾸 사람들이 더 온다 소문 듣고. 맛집도 입으로 입으로 통하잖아요. 맛집도. 맛집 잘 되면 주차장 넓히고 주차장 넓히면 건물 넓히고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건물 짓고 주차장 넓히고. 그럼 많은 사람 쪽이 진리에 가까우니까 그쪽에 갈거고. 왜 제자리뛰기 해가지고 손님 안 오게 하느냐? 그래서 이래서는 못하겠다고 이제 거의 나가라는 식으로 이렇게 했는데 나가라고 한 모양이에요. 


근본적으로요 그럼 십자가 전하면 사람들이 모입니까? 이런 사고방식이 더 미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복음 전하면 교회 부흥된다. 이게 더 미워. 예수님의 부활의 입장에서는 뭐냐? 기침 나고 알레르기성 천식 이게 모든 것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생겨버렸다는 거에요.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네가 천식을 걸린게 아니고 천식이 네 안에 들어온거에요. 이런 의식이 있다 이런 발상 이런 생각이 부활의 생각과 현재 인간들의 죽음의 대한 생각의 차이점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했다 그걸로 당장 끝나는게 아니에요. 두 개의 현실층의 충돌입니다. 


자, 이 두 상자 종이상자의 차이점을 보세요. 종이상자에 스카치테잎 딱 붙여가지고 단단히 붙였어. 붙이고 또 붙이고 이 안에 곶감 들었는지 온 곳에 다 붙이고 뜯는데 힘들어 죽겠어  이런거 하고. 그냥 박스인데 안에 내용물도 없어 이거는 그냥 종이 빈 박스인데 빈 박스를 활짝 열어놨어요. 그러면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이 (테잎 많이 붙인)박스 안에는 안 들어가겠지요. 그런데 이(아무것도 안 붙인)박스는 어떻습니까? 사방팔방 완전히 노출됐어요. 어느 놈이 오든 뭐가 오든 이거는 자기 차지다. 


마치 재개발 지역에 이사 가고 나와있는 허름한 귀신 나오는 그런 빈집같이 애들 담배피러 갈 때만 가고 거기에 조폭들 싸움하는 세트장 할라하면 적당한 그거 있잖아요. 빈 창고. 그것처럼 아무나 들어오면 주인되는 데. 재개발했다가 부도 나가지고 철거물 툭툭 튀어나온 그거 있잖아요 건물. 영화보면 그런데 가가지고 뛰어내려 자살하고. 자살하고 난 뒤에 뒤늦에 경찰차 삐~하고 나타나고. 꼭 경찰이 뒤늦게와요. 


아무것도 없어 그냥 벽면만 있어요. 이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내가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고 누가 들어오면 들어온 그것이 그 인간의 주인 차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내 천식 또는 내 성공 내 아파트 전부다 앞에 ‘나’를 다 붙여요. 내 자식. 아들 놓고 딸 놓고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못 하는데 아들 낳으면 내 아들이다. 딸 낳으면 내 딸이라는 거에요. 딸이 내 영역에 그냥 쑥~흐르듯 들어와 날 차지했는데. 


성경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악령이 들어오면 못 말린다는 거에요. 성령이 들어오면 못 말린다는 겁니다. 악령은 말리겠죠. 성령이 악령보다 이기죠.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악령을 이기고 거기서 탈출한 능력이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을 비난해도 구원받지만 성령을 비난하면 성령을 거부하면 이 세대와 오는 세대까지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나오는 이야기에요. 32절인가 나오는 이야기죠. 


우리 생각에는 내가 인생의 내 주인공인데 영적세계, 악마와 주님세계 하늘나라 세계 보면 이거는 주인이 전혀 없어요. 주인이 없어. 누가 차지하기 나름이에요. 누가 들어와서 차지하느냐. 차지하기 나름이에요. 횡단보도 건널 때 횡단보도 건너는 그 덩치는 누구냐? ‘나’라는  거에요.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는 거에요. 나는 횡단보도 건널 때 횡단보도 파란불 끝나면 저쪽에 무사히 도착된다는 이런 원인과 결과를 미리 생각하고 차분차분 건너고 있습니다. 


차가 와요. 저 차는 어떤 차냐 하면 일체의 음주운전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음주운전 차가 받아버리는데? 나라는 이 빈 봉투 비어있는 텅텅 비어있는 다 헤어진 이 종이상자, 이 종이상자에 음주운전 들어와버리면 나는 그냥 죽게 되어있어요. 심석희 선수가 코치한테 4년동안 성폭행 당했잖아요. 왜 당했습니까? 만약에 코치가 성폭행한게 아니고 비리비리한 농땡이 동네 오빠가 건드렸다 하면 대번에 신고했을거에요. 왜 동네오빠 그것도 비리비리, 비리비리 오빠 공부도 못하는 비리비리 오빠가 건드리면 신고 손가락으로 욕만 하고 따라와도 신고할 감인데 왜 코치가 성폭행까지 해도 왜 신고 못했습니까? 처음에. 


왜 못했을까요? 미투가 뭡니까? 옛날 그때는 미투도 없었어요. 10년, 20년 전에는 미투도 없었는데 미투고 빚투고 뭐고간에. 요새는 빚투도 있고. 왜 미투가 최근에 최근이 아니고 왜 지난걸 왜 합니까? 그때는 뭐냐 하면은 인과응보, 원인과 결과를 자기가 예상했다는 것. 저 코치 말 안 들으면 이 가난한 내 집안은 누가 살리나. 내가 열심히 스케이트 타고 달려야 우리 집안이 산다. 내 희망과 내 구원은 이것밖에 없다. 끝까지 참아야지 이랬단 이 말이에요. 


그걸 가지고 히브리서 2장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죽기를 무서워해서 마귀한테 종노릇한다. 죽기가 무서워서 마귀에게 종노릇해요. 시집가기 전에는 교회 성가대 주일학교 좋은데 시집 가려고 온데 충성을 다 해놓고 막상 시집가니까 남자가 너무 멋져. 그만한 인물되면 인성 후져도 괜찮다는 그렇게 해서 시집갔더니만 불도의 불도의 온갖 점치는것부터 해가지고 미신은 다해. 교회 못 다니는 것은 기본이 되어 버렸고 제사는 필수가 되고 1년에 제사 8번은 필수가 되었다. 그 아주머니는 제사 음식하는게 취미였어요?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 했어요? 죽기를 무서워해서 히브리서에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죽기를 무서워한다고 되어 있지요. 말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말씀을 할 때에 살아볼라고 살고자했기 때문에가 아닙니다.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살고자 하면은 아이고 좀 못 살면 어때 이렇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어느 인간도 살고자 하는 인간이 아니고 죽기를 그다음에 무슨 말했어요? “죽기를 무서워해” ‘공포의 울림’. 이 세상은 공포의 울림으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빈 종이 박스에 귀신이 그냥 들어온거에요. 우리가 내 것이란게 없어요. 귀신이 만들어내도 어떤 식으로 스케이트를 타든지 제사 지내는 집에 시집을 가든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 안에는 공포의 울림 거대한 공포의 울림으로 출렁이고 있는 그런 종이박스라는 것을 재벌집이든 못사는 집이든 서민이든 상관 없이 지금도 계속됩니다. 두려움, 두려움 두려움, 두려움이에요. 


우는 것도 두려움 때문에 웃는 것도 두려움 때문에. 두려움 없이 안되지요. 그럼 두려움 없다는 그만두는게 아니에요. 어쨌든간에 두려움을 없애보려고 대번에 내일 또 병원에 갑니다. 다 찍어본답니다. 내 주치의께서 다 찍어본데요. 심각하니까. 호흡기 들고 침대 누워있을 날이 오니까 다 찍어본답니다. 뭔가 조치를 하겠지요. 


그 조치가 바로 뭐냐 하면 ‘행함’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행함. 안 행하라는 말은 제가 하지 마세요 하는 것도 행함이에요. 하지 마세요가 아니라 목적이 있어요. 두려움을 내 식대로 원인에 손대서 내가 원하는 두려움 없는 결과를 낳기 위해서 내가 가미되는 것. 개입하는 거에요. 이미 교인들이 두려움을 갖고 와요. 그럼 목사의 할 일은 십자가 그런 그딴 소리 쓸데없는 소리 그런 우울하고 비극적이고 그레이색 그런 회색적인 소리할게 아니라 밝은 색을 줘야지요 밝은 색을. 


행함만큼 복 받습니다. 그러한 보통 무당집은 대나무 있지만 교회는 대나무 대신 십자가 꽂아놓고 무당짓하고 있는거에요. 이렇게 행하시면 여러분 원하는 소원 됩니다. 왜? 주님 살아계시잖아요. “난 잘 안되는데.” “그건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저 믿음 있는데...” “어린애 같은 믿음이 없어서. 어린애같은.” 어린애 같은 믿음은 이미 어른됐는데 어린애 같은 믿음 어떻게 되돌아갑니까? 말이 돼요? 어린애 같은 믿음이 없다는 거에요. 


어린애 같은 믿음은 뭐냐하면 다 바치라는 거에요. 다 바치면 그게 인천의 어느 교회의 젊은 전도사가 애 건드리는거하고 똑같이 되는 거지. 다 바치고 몸 바치고, 논개도 아니고 다 바치고. 그루밍 성폭행이라고 하잖아요. 점점 자라나면서. 그거 다 바치나 안 그러면 IS가 처녀들이 지금 순교하면 그 이슬람에서는 순교하면 하늘나라 좋은 자리 준다고 하거든요. 하늘나라 VIP는 비어 있어요. 순교자 순대로 차지하니까. 로얄석을 차지하자는 거에요. 어떻게? 


늙어 빠진거 오지 말고. 늙은 것은 와바야 못가고 젊을 때 어릴수록 좋다는 거에요. 처녀는 더 좋고. 그래서 유럽 아가씨들 빠져가지고 IS들어간다고 개죽음 당하고. 거기 탈출나왔다고 자랑질하고 들어가길 왜 들어가. 뭘 탈출한게 자랑이라고. 범세계으로 공통적인 것은 바로 그겁니다. 공포의 울림이에요. 쾅쾅 공포의 메아리. 하나의 공포가 저쪽 공포까지 쫙 퍼지는거에요. 미국 중국의 무역경쟁으로 말미암아 중동의 기름값 떨어지면 멕시코 정유 능력 없는 멕시코가 기름값 더 비싸지고 멕시코 산유국이 더 비싸져요. 베네수엘라는 더 비싸고. 


공장 석유 빼내는 기사들 월급 더 줘도 가버리고 있어도 빼낼 사람이 없는데. 이게 뭐냐? 경제의 모든 움직임은 그 공포심을 해소해서 어디에 투자하느냐에 따라서 이게 전부다 요동치고 있는거에요 이게. 경제라는게. 대출내서 주식투자 왜 합니까? 무서워서 하는 거에요 무서워서. 장사 이렇게 하다가 이거는 백종원이 와도 안되겠다 싶어요. 맨날 골목식당만 하면 안되잖아. 뭐가 미래의 대책이 없어. 인테리어 바꾸면 또 바꾸고 앞집이 바꾸면 또 바꾸고 둘 다 망하고. 전부다 이래. 모든게 경쟁 아닌게 없고요. 


자,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부활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하나 죽었다가 살아나는게 이게 부활사건이 아니고 부활을 포착해내지 말고 부활이라는 결과와 연결되는 원인이 인간세계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이게 근원적인 우리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해야돼요. 그래서 뭐냐? 부활을 오늘 제목입니다. “부활은 공격용”입니다. 부활은 공격용이에요. 인간을 공격해요. 따라오려면 따라와봐라. 어느 놈이 따라오냐? 이 부활까지.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는 울고 있어요. 못 따라가서 울고 있어요. 부활했다고 생각 안 해요. 시신이 없다고 하는 거에요. 


자, 시신이 없는 것과 부활의 차이점은? 야 이거 어렵다. 시신이 없는 것과 시체가 없는것과 부활의 차이점은? 시신이 없는 것은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나는 여기 있는데 나는 여기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나는 여기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죽어야 될 시신,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시신은 물량의 법칙에 의해서 외부에서 밀어주지 에너지 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의하면 운동이란 것은 뒤에서 힘을 가해야 운동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게 아리스토텔레스의 B.C 4세기경의 물리학이었어요. 그게 16세기 17세기에 뉴턴에 의해서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과학이 드디어 종교화되고 신비화되어가는 거에요. 


원래 과학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설명했는데 보이지 않는 개념을 가지고 보이는 것을 설명하면서 과학이 진리를 대체하고 종교화되가는 겁니다. 나는 여기 있는데 시신이 없다고 하잖아요. 부활은 뭐냐 하면 나, 너를 없애버리고 뭐냐 하면 환경으로써 승부하자. 부활이라는 환경과 부활이 없는 환경, 다른 말로 부활이라는 새로운 영역과 부활이 빠져있는 이 영역 어느 것이 참된 현실이냐는 것을 묻는겁니다. 


부활의 현실이 기존의 현실을 부수는거에요. 너희들은 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중심이 아니고 현실 안에 있는 내 중심으로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내가 죽어버리면 내 현실도 같이 그 순간 홀연히 뭉개져버려요. 내가 없는데 내 환경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억지를 부리는거에요. 


무의미한데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게 답답하기 때문에 무의미한데 어디 둘러쌓여 있다? 그러니까 내가 의미가 있는데 무엇에 둘러쌓인거에요? 알 수 없는 공포에 둘러쌓인거에요. 그래서 이 의미를 나는 여기 살아있다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그 공포를 물리칠 수 있는 온갖 몸부림이란 몸부림은 다 치는거에요. 온갖 몸부림을 다 쳐보는거에요. 그게 문명인데 그 문명을 백날 키워봐야 그게 과학 문명이고 현실이라는데 그게 돈 경제 자본주의인데 백날해도 거기는 뭐가 빠져있어요? 부활이란 요소를 포착을 포획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어요. 포착이. 


제가 지난 화요일날한 강의인데 질문한번 해보겠습니다. 마릴린 먼로 조그만 인형가게 거기 마릴린 먼로 인형들이 있잖아요. 미국에. 전 몇 번 안 가봤지만 가보면 있을거에요. 여러분 마릴린 먼로 인형이 보고 싶습니까? 마릴린 먼로가 보고싶습니까? 만약에 팬이라면. 오드리 햅번 팬이라면 오드리 햅번 인형 갖고 싶어요? 오드리 햅번이랑 살고 싶어요? 알랑 드롱 인형보다도 알랑 드롱 세계에서 제일 잘생겼다는 알랑 드롱하고 한번쯤 이렇게 식사라도 하고 싶어 어느 쪽이에요? 남자가 이정도로 잘생겼구나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신성일은 좀 늙어도 신성일이에요. 역시 잘 생겼어요. 죽음직전까지 멋있어. 젊은 사람 취향은 아니지만. 


여러분 부활절 지킬래요? 부활하신 주님 만날래요? 어느 쪽입니까? 주님이 부활을 안했기 때문에 생긴게 뭐냐? 부활절입니다. 주님이 안계시기 때문에 제삿날이 필요한거에요. 제삿날이 있다는 말은 주님이 여기 없다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주님을 없이 해야 교회가 장사가 돼요. 주님이 부활 안 해야돼요. 주님이 없어야 구라가 되요 구라. 사기를 칠 수가 있다니까. 


왜냐하면 주님이 없어야 그 다음부터 뭐냐? 내 의미가 계속 유지가 될 수 있으니까. 교인들이 “목사님 나 이런 인간, 이런 가정되고 싶어요.” “행함하세요. 시키는대로 하시면 성경에 나오는, 시키는대로 하시면 복 받습니다.” 그래줘야 그 사람의 목표는 자기한테 무의미한 내가 의미가 되고 부자가 되면, 부자가 되면 어떤 조건에 있다고 좋아하느냐 하면 부자가 되면 뭐하고 멀어지냐 하면 죽음과 멀어지고 병이든 그리고 모든 불행이든 돈이 있으면 그게 해결된다는 그러한 풍문, 신화가 그런 소문들이 자본주의에 쫙 깔렸거든요. 


풍문으로 들었소. 뭐? 돈으로 안 되는게 없기 때문에. 돈으로 남자도 사고 돈으로 여자도 사고. 돈으로 뭐 돈만 있으면 다 되는거에요. 돈이 없어서 궁색해서 어디 가느냐? 꼭 교회가요. 돈만 있으면 될 일을 교회 갔다가 교회 예배드리는데 스마트폰 하잖아요. ‘오늘 가게 문 안열어요?’ ‘아! 갑니다!’ 교회 예배시간에 축도할 때 아무도 안 볼 때 홀딱 뛰어나가가지고 문 쫙 열어가지고 장사해야지 뭐. 교회 가는 것이 이를 위함이 아닌가 이렇게 하면서. 


고3이 중요합니까? 교회가 중요합니까? 고3이 중요한거죠. 친구 죽는게 중요합니까? 고3이 중요합니까? 고3이 중요해요. 누가 우주 누명을 씌우든 말든 고3이 중요해요. 우주 모르죠 우주? 우주 있어요(스카이캐슬 드라마 배우). 코스모스 있어요. 인간의 착함이란 것은 일단 천식이 되지 않아야 되고 치통이 없어야 돼요. 일단 배가 불러야 돼요. 배가 부르고 난 뒤에 인간의 인감 됨. 나는 짐승이 아니야. 나는 짐승이 아니야 동물이 아니야 개돼지가 아니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중산층쯤 될 때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쪽에 의하면 개가되도 좋으니까 돈만 생긴다면 그렇게 되는 거에요. 


돈이 왜 있어야 되는가? 그 공포로부터 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이 신화에요. 돈이 신화고 신비고 그게 모든 복음의 대체물이고 결국 교회라는 것은 교회 다녀서 부자됐습니다 라는 사례들이 꽉 있을 때 그 교회는 소문 듣고 왔어요 이래요. 입소문 듣고 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가 제일 재미있어요. 기도해서 행복을 얻고자하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성경공부가 제일 재미있어요. 성경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그건 각자 자기 취향대로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현재 울고 있습니다. 울고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 울고 있을 때 여기 누가 왔습니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먼저 막달라 마리아한테 말을 겁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운다는 것은 공포스럽지요. 예수님 없는 세계를 생각해볼 때 기존의 내 행복이라는 조건에 뭔가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으니까 우는 겁니다. 장례식에 우는 것도 그 이유고요. 왜 정상적으로 그냥 있지 않고 왜 빠졌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장례식 기도할 때 죽음이라는 말하지 않고 ‘실종’이라는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죽었다하면 이건 이 세상에서는 뭐 어쩔 수 없는 이 세상 구조가 아무 문제 없고 제대로인데 다만 이 세상 구조에 의하면 죽는다는 불상사가 일어났구나 해서 죽음이라고 하지만 실종이다 하는 말은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 따로 있는데 다른 세상에서 내 남편을 빼갔다는 것이 실종이에요. 없지 아니하다 없지 아니하다. 다만 사라졌을 뿐이다. 내가 있는 이 세상에서 눈에 안 보일 뿐이에요. 


그래서 제가 언젠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고 죽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저주스러워요 인간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린다니까요. 본격적으로. 이 세상사는 것은 일종의 예고편이에요. 5분 예고편 보여주는 것, 약간 보여주는거에요. 본격적인 것은 본격적인 그 줄거리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고 대우했던가? 그게 본 줄거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줄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돼요. 예수님의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예수님 이야기”. 


그 예수님의 부활 측면에서 보면 인간들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내가 추진한 그 일에 내가 농락당하고 낭패를 보는 식으로 뭘 해도 실패자의 모습을 보인다 이게 이 세상의 현황이다. 내가 추진한 그 일에.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어떻게 주식투자 해놓고 고민고민 하잖아요. 그 고민할 때 그 고민을 왜 합니까? 먼저 추진한 게 있잖아요. 뭐했습니까? 주식 괜찮은 친구 따라서 주식 괜찮은거 사놓으면 되는데 그 주식을 사놓는 일을 추진을 했잖아요. 내가 추진한 이유 때문에 내가 밤잠을 못 잔다니까요. 나는 기침 때문에 밤잠을 못 잤지만. 그건 내가 추진한거 아니에요. 


천사가 대화를 가능할 때에 인간 쪽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금 막달라 마리아 복이 돈으로 살수 있는게 아니에요. 돈으로 이런 것 가지고 인간의 행함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초대받은거에요 남의 파티에. 어떤 세계냐? 울 필요 없는 세계에 초대받은 거에요. 그래서 묻는겁니다. 우리 세계는 어떤 세계인줄 아느냐? 사람 죽었다고 우는 세계가 아니야. 너 그  세계 아냐? 그런 식으로 천사 둘이 마리아에게 대화를 거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아 목사님 저희도 천사 나타나가지고요 좀 그런 말 좀 걸었으면 좋겠어요 하잖아요. 지금 제가 걸잖아요 지금. 비록 천사는 아니지만 천씨 집안은 아니지만. 제가 걸잖아요. 울 필요가 없는 세계가 있다고요. 우리는 그 세계로 실종당해야 돼요. 빼앗겨야 돼요 그 세계로. 이쪽세계 고집스럽게 원인과 결과 따지는 세계에서. 그렇게 해서 공포심을 모면해 보려고 하는 그런 인과응보, 착하게 하면 복 받겠지 나쁘게 하면 벌 받겠지 그런 세계에서 내가 얼마나 나쁜 짓 했으면 천식 걸리고 내가 얼마나 못 됐으면 뭐했나 그런 세계에서 나는 빈 봉투, 바람 부는 빈 봉투에요. 


그동안 내가 착실하게 했다는 그 생각도 내 생각이 아니고 이미 악령이, 악마가 꾸준히 나를 농락했지요. 그야말로 심석희 선수처럼 성폭행한거에요. 악마는 나를 성폭행했고 심석희는 나는 안 죽으려고 따라왔고. 나중에 복음듣고 난 뒤에 미투하세요. 속았어 속았어 속았어. 그때는 고소할 필요도 없지. 왜냐하면 찾아온 자체가 고생했다고 주어진 복이 아니기 때문에. 고생한 것과 관계없이 나쁜 짓한 거 관계없이 원인은 주님의 나라의 초대에요. 그 파티의 초대입니다. 그 파티에는 립스틱 바를 필요도 없고 눈꼬리 까맣게 할 필요도 없고 드레스 입고 갈 필요도 없고 그냥 기침 콜록콜록 하면서 가면 돼요. 


성도의 할 일은 그때부터 자기 집에서 방을 빼주는 겁니다. 이거 의자 다 빼주세요. 이제 거의 끝났어. 여기 들어올 학원 망하기 전까지 다 빼주세요. 빼주는 거에요. 나에게서 나의 행함을 빼기 하는거에요. 더하기 하지 말고. 행함 가지고 더하기 하지 말고. 뺄셈을 하세요. 내 기도 빼기. 안 하기가 아니고 기도하면서도 기도 빼기, 헌금하면서도 헌금 빼기. 모든 예배 빼기. 뻬기를 하는겁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신다면 우리 선배들이 있어요. 우리 인간세계의 선배들 유대사회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는 어릴 때 어떻게 살아왔는가? 백년 후에 나오는 유대인 미드라쉬라는 책이 있어요. 거기 책에 보면 백년전부터 전통 그대로 애들을 교육법이 나와있습니다. 옛날 시대 때는 빨리 변화 안됐으니까. 산업 에너지가 개발 안되면 산업이 변화 안되게 되어 있어요. 모든 3차 산업은 에너지가 새로운 에너지원을 발달할 때 획기적으로 발달하거든요. 전기에너지 석유에너지 발전하면서 원자력에너지 하는데 그전에는 농경시대이기 때문에  거의 발달을 안했어요. 전통 그대로 가요. 


5살 때 토라 읽습니다. 10살 때 미쉬바해서 이거는 구전 토라. 어른들이 읽는 토라라 하는 것은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 모세의 율법을 토라라고 합니다. 그 주석하는게 있어요 그 주석을 10살 때 배우고 13살 때 계명에 대해서 복종하겠다는 종교적인 선언을 해요. 15살 때 탈무드를 배우는데 탈무드가 뭐냐 하면 율법에도 레위기도 많이 나오지만 이런 경우에 있을 때 시비거리가 있을 때는 재판을 이렇게 하는 것이 솔로몬의 현명한 판결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다하는 판결을 배우는 거에요. 


판결을 왜 배우느냐? 판결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 양쪽을 옳다 그르다를 배우면서 양쪽에 대립되는 것을 조정도 할 수 있고 그리고 악과 선의 구분도 하는 인식론 그런 도덕적 인식론도 같이 발달을 할 수 있는거에요. 이게 15살 때 탈무드를 배우는 겁니다. 어른들이 어느 일이 일어났을 때 이거는 옳고 이거는 옳지 않다고 판결을 하는 그 과정들을 배우는 거에요. 일종의 전국민의 판사에요. 전국민의 재판관이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18살 때 결혼을 해요. 20살 때 생계를 위하여 일하고 30살 때 힘이 최고조에 달하고 40살 때 지혜를 남한테 언급할 수 있고 60이 되면 비로소 노인이라는 소리를 들어요. 노인들은 존경받는 노인. 흰머리 나는 노인소리 들어요. 올해 60된 사람 있습니다. 흰머리 난. 70에는 힘이 다해서 빠졌어요. 그때는 힘 이렇게 멋진 체 안하고 꼿꼿하게 안살아도 누가 욕을 안 해요. 70되게 되면. 아 저 사람이 저렇게 실수해도 봐주는 거에요. 80되면 허리가 힘이 소진되가고 70에서 힘이 슬슬 빠지고 80에는 힘이 다 빠져 버리고 90되면 몸이 구부러지고 100세 되면 떠난다는거에요. 유대인들이. 되게 오래 살라 해요. 


어떻습니까? 이렇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거에요? 이 안에 뭐가 빠졌지요? 예수님의 부활이 빠졌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집어넣고도 이런 식으로 산다? 그거는 잘못되어도 보통 잘못된게 아니지요.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무엇이 강조되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킬 수 없다가 분명해 지는 겁니다. 그거는 성령을 받아버리면 새로운 환경에 들어와서 내가 주님이 계속 나를 지키되 부활을 집어넣고 지키고 십자가 지켜놓고 지켜서 나로 하여금 이제는 내가 아니라 내안의 그리스도의 것으로 달라지는 그러한 인생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럼 병원가지 말까요? 아니요. 나 단단히 마음먹고 금식하고 가야 돼요. 가고 싶어. 왜냐? 그렇게 한 조치가 누구로부터 왔어요? 주님으로부터 왔잖아요. 그러면 그쪽 세계나 이쪽 세계나 변한게 없네. 변한게 없지만 나를 빼는, 너를 빼라는 상황으로 이런 상황이 일어난 거에요. 왜? 천국에 적합한 인간이 되려면 나를 빼야 돼요. 죽어지는 거에요. 내가 배고프다가 아니라 배부름 때문에 내가 먹는거라고 했잖아요. 10분 쉽시다.

 홍민희 (IP:175.♡.96.96)19-02-01 14:13 
강남-요한복음 20장 11절(부활의 공격성)190122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현재적 상황을 평할 수 있는데 있어서 인간은 그 어떠한 기준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현재적 상황. 인간상황을 핵심적으로 이건 이것 때문에 이렇다 할수 있는 그 기준에 인간이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현실상황 속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빠져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은 잘못 살아가고 엉뚱한 곳으로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천사를 호출할 수가 없어요. 불러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고 성령이고 인간은 그럴 자격도 안 되고 권한도 없어요. 인간은 자기 주제파악이 안됐기 때문에 엉뚱한 곳으로 방향이 하나님을 부르든 그게 우상숭배인데 예수 자체가 다 우상숭배에요. 그 왕따 당하는 여자 목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얼마 전에 안수 받았는데 하는 이야기가 언약을 알고부터는 하나님이 우상인걸 알았답니다. 세상에 그런 기적이 어디 있어요. 


목사인데 목사가 하나님이 우상이라는걸 이제 알았다 언약을 알고부터는. 문제는 그걸 같이 나눌 수 있는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제가 그럴줄 알고 20년, 30년전부터 요령들을 이야기했거든요. 교역자로 들어갔거든 거기서 복음을 알았거든 수단을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들을 빼내라. 어차피 갈라설 거. 내 양을 빼내야지 내 양을 맡기면 곤란하잖아. 그거는 직무유기에요. 


에스겔에 나오지요. 네가 외치지 않아서 그 사람이 지옥 간다면 책임을 에스겔 너한테 묻겠다 하잖아요. 그런데 네가 이야기 했는데 말을 안 들으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고 나는 너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에스겔에게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예수님보고 이야기한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편한 길로 못가요. 내 뜻대로 못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쪽으로 가야 돼요. 예수님 사는 원칙이 절대로 내 뜻대로 안되게 해주옵소서가 예수님의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왜? 나는 사적이니까. 주님은 공적인일을 해야되는데 자꾸 공적인 일에 누가 방해하느냐? 알 수 없는 공포, 내 개인적인 공포가 주의 일을 훼방하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상황을 그때그때 적절하게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뭐 기침을 하든 뭘 하든 주님 보시기에 모든 것이 NO가 아니요 NO가 아니요 뭐다? YES 전부다 모든 것이 그래야만 되는 거에요. 그래야만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는 하자 없고 실수가 아니고 필수적인, 필히 그래야만 하는겁니다. 해보고 말자 그런거 없어요. 해보고 잘되면 그런거 없어요. 필히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거에요. 사람들은 그걸 예정론을 가지고 설명을 해요. 하나님이 예정된 사람들 필히 그렇게 한다고. 예정론 하면서 뭘 빠트려버리면 예정론 자체가 뭉개집니다. 


예정론 하나도 사람들은 잘 몰라요. 제가 예정론에 대해서 제대로 정리해 드릴께요. 에스겔 35장 11절 한번 찾아보세요. 이거 아시면 여러분 예정론 다 아는 거에요. 진짜 예정론 알려면 동네 병원에 가지 마세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에스겔 35장 11절.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노하며 질투한 대로 내가 네게 행하여 너를 심판할 때에” 


예 됐습니다. 거기 읽고 그것 가지고 이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거든 여호수아 11장을 한번 봅시다. 지난 오후설교 때 한 본문인데요. 여호수아 11장 이거 알면 예정론 끝납니다. 하늘나라 예정론 시험이치면 이거 딱 나올거에요. 여호수아 11장 20절 예정론 아냐 모르냐를 이 본문 하나면 있으면 됩니다. 누가 한번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11장 20절. 시간 가는거 아까우니까 내가 읽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그래놓고 에스겔 다시 읽습니다. 35장 11절.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노하며 질투한 대로 내가 네게 행하여 너를 심판할 때에 그들이 나를 알게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어떤 사전에 하나님 원인을 집어넣느냐 하면 하나님의 미움이 적극적이고 소극적이고 하나님의 미움을 미워해서 너희들은 절대로 네 십자가 복음을 절대로 믿어서는 안된다가 예정론이에요. 그동안 예정론을 왜 거부하느냐 하면은 전부다 자기 사적인 구원을 위하여 예정론을 연결시키기 때문에 예정론이 전부다 엉터리 예정론이에요. 


칼빈도 그렇고 전부다 유대예정론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칼바르트도 마찬가지고. 예정론. 전부다 잘못되어 있는거에요. 미움과 연결되어야 돼요. 에스겔 35장 11절.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해도 복음을 아는 목사가 전해도 교인들이 삐지고 화나고 “엄마 이 교회 오지마”하고 엄마하고 딸하고 아들하고 와서 아들 삐져서 갔다면서 화내고. 


이명진 목사님이 복음을 전했다는 조건하에 그거 듣고 삐졌다는 말은 절대로 그들이 그들의 역량이 아닙니다. 그 화가 그들의 솜씨나 그들의 의지가 아니에요. 주님은 주님이 인간을 미워한다는 적극적으로 미워하게 하신거에요. “나 너 밉다 오지마” 라는 그 표시를 그 현장에서 드러낸거에요. 주님이 미워하는데 주님이 자기의 삶을 맹세해서 내가 너 미워한다는데 인간이 어떻게 달래가지고 그래도 얘는 봐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주님이 미운 개, 돼지 되는데 왜 되도 않는 인간이 나서서 봐주세요 이렇게 할 수 안 되지요 하지도 않지요. 


이스라엘 백성도 구원될 때는 반드시 뭘 거친다? 미움을 거쳐서 구원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다 죽여버린다고 하니까 모세가 뭐라고 했습니까? 저를 봐서라도 봐주세요 해서 돌판 하나 더 줬잖아요. 반드시 출발점은 우리는 미움 미운털이 박힌 그런 박스에 악령의 바람이 불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무슨 공부를 해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무슨 인간성이 좋아서 복음을 받아들입니까. 


복음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내쫓고 난 뒤에 찾아왔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력으로 자기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없다? 못 받아들여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성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내 이성 내 합리화 내 과학화 문제 있다 그걸 자인해야 되지요. 십자가에 대해서 내가 똑똑하다. 십자가에 대해서 무지하다 이게 아니고 십자가 말고 평소에 대인관계나 평소에 하는 모든 행세. 빨래할 때 샤워할 때 밥 먹을 때 하는 모든 일상에 나오는 성격 있잖아요. 그게 하자있고 문제 있다는 거에요. 인간에게 이런 질병이 있다. 


제가 오후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인간은 날 때부터 제한이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질환이 있는 사람을 부르러 왔다. 질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가라 이 말이죠. 의사는 누구한테 필요하다? 병자한테 필요한거에요. 그래서 나 내일까지 살아있으면 나 금식하고 병원갈거에요. 의사가 필요하다면 갈거에요. 또 무슨 바람이 불지 모르죠. 그건 내 소관 아니니까 주님 소관이니까. 


날마다 잃어버렸다가 날마다 살아온 것에 그것에 대해서 내가 몰랐던 새로움이 나와요. 성령이 주는 새로운 기쁨. 기존 것 감사하라고 하면 식상해요. 감사할 수가 없어요. 늘 감사 해야 돼요. 늘 감사. 참 그저 오스카 와일드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은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절대로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했거든요. 


왜냐하면 결혼은 사랑의 끝이니까. 지루함의 시작이 곧 사랑의 끝이거든요. 새로움이 안 나오잖아요. 따라서 늘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라면 절대로 인간은 결혼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 논리입니다. 논리는 맞는 이야기인데 가만 들어보면 이상해. 그래서 유명한 소설가에요. 남들이 상식적으로 아는 이야기를 안해야 되거든요. 


우리나라의 어떤 유명한 시인이 있잖아요. 어떤 여자가 아름다운가? 제가 여러번 이야기 했죠. 어떤 여자가 아름답다고 해요?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고은. 미투운동 고은이 지은 가사에 보면 가을편지 가사에 나와요.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기대감을 주니까. 가을되면 맨날 나오는 노래인데. 


환경은 기존 환경은 새롭지 않습니다. 기존의 두달전에 은혜 받은거 은혜 받았다고 자꾸 우기는데 그건 지금이 재미없다는 뜻밖에 안돼요. 재미없으니까 그런 희망을 거는데 환경은 기존환경이란 우리는 우리 생각이지 없습니다. 늘 새롭게 적절하게 만들어 집니다. 인간은 뭐냐 하면 자꾸 있는 것을 내 것으로 붙잡으려고 하고 정착하려하고 자꾸 그걸 고정화시키려고 해요. 이게 무서운 공포로부터 도피하는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프다. 아내가 혼이 나가지요. 왜 그렇습니까? 건강한 아내와 건강한 나 이게 고정화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자꾸만 고정화시키기 때문에. 고정화시키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우상성을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자꾸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도 그 환경도 내 우상에 적절하도록 환경을 고정화되라고 억지로 강요하는 경향이 있어요. 억지로. 그러다보니까 억지로 만들어낸 환경을 자기 기대사항인데 약간 좀 비뚤어지고 변화가 일어나면 질겁을 하고 혼이 나가지요. 이러고는 못산다 이러고는 못산다 이러지요. 


제가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내가 남편이 먼저 죽으니까 아내가 나 놔두고 왜 죽느냐고 하잖아요. 나 놔두고 왜 죽느냐. 죽을 때도 얼마나 자기만 먼저 챙긴다는 것이 티가 나 버렸어. 엉엉 울어요. 왜 나 놔두고 왜 죽습니까? 그런데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천사가 그때 나타났다 칩시다. 그것도 두 명 나타났다 칩시다. 뭐라고 합니까? 여자여 왜 우느냐? 왜 우느냐? 이게 울 일이냐 라고 묻는거에요. 이게 울 일이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서 웁니다’ 하지요. 13절에 봅시다.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시체를 어디다 두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시신은 시신다워야 한다는거에요. 이거 마리아 생각입니다. 마리아 생각인데 17절을 봅시다. 1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초반부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됐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했지요. 이게 인간세계에서는 시체 아니면 살아있는거 딱 둘이에요. 살아있는 나를 만지던지 아니면 이미 죽었던 시신을 만지던지 둘 중에 하나에요. 내 거울에 내 모습이 보이던지 아니면 죽은 시체를 내가 주시하던지. 또 살아있는 남을 친구를 보던지. 딱 이 두가지에요. 살아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죽은 것을 보고. 딱 이 두가지인데. 


부활의 세계에는 뭐가 여기 첨가되었습니까? 보기는 보되 만져서는 안되는 것.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증강현실’이에요. 현실에 어떤 새로운 현실이 덮친 거에요. 보태진 거에요. ‘혹불’. 혹. 혹불이라고 하는 것이 표준말입니까? 그 옛날 전래동화에 있지요. 할아버진데 혹 난 할아버지. 욕심이 많아서 혹 붙이는거 있지요. 


부활은 이 세상에 하나의 말미잘처럼 불쑥 돌출되어 있어요. 붙어있어요. 그런데 붙어있으면 누가 세상의 모든 일어나는 변화나 모든 환경은 주어진 모든 그것은 그걸 실시하는 주최측이 어디입니까? 부활측이에요? 인간세상측입니까? 부활을 부활로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를 십자가로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변화가 그렇게 주님의 손에 의해서 조종하고 적절하게 재배치가 되고 재편되는 겁니다. 늘. 모든게. 


개인적으로 주의 뜻이다 하지말고 나뿐만 아니고 나와 무관한 김정은 이야기라든지 북한 이야기라든지 모든 일어난 변화도 십자가와 부활을 위해서 벌어지게 되는거에요. 제가 만약에 감독이나 시험 출제위원이라면 이렇게 낼거에요. ‘북한의 핵문제와 십자가의 관계를 논하라’. 아마도 못 알아맞출거에요. 북한의 핵문제와 십자가를 논하라. ‘여러분의 치통과 십자가를 논하라’. 이 문제 더 어려운 문제네. ‘당신이 연애하는 것과 십자가를 논하라’. 이러면 또 엉뚱한 답변이 너무 많이 나와서 안돼. ‘저 여자 얻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십자가 고생했는데’ 또 이렇게 되도 않는 사적인.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어떻게 사적인 것의 한계를 공적인 것이 제공했느냐가 나오면 정답이 되겠습니다. 부활이라는 공적인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구원 받겠다는 이 의도를 차단시키느냐 하는 것은 언급하게 되면 이게 정답이 되겠지요. 십자가는 사적이 아니고 공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이거든요. 우리가 죽었다 살아나도 뭐 된다? 내 몸 안되고 누구 몸 되요? 그리스도의 몸이 되잖아요. 


얼마나 우리가 공적입니까. 나 지금 공적으로 알레르기 걸렸다. 공적인 우리가 하나하나 공적인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것 때문에 형제를 무시하지 말라고 나와요. 서로 사랑하고 서로 교제하고 교통하라는 것은 앞에 조건을 붙여요. 예수 안에서. 같은 몸끼리 왜 싸우냐 이 말이죠. 어떻게 눈이 발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왜 하느냐 그런 이야기가 개인구원이 이거는 사기다 아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에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천당 가서 자기 집안식구 자기 성씨 집안 광산 김씨만 모아놓고 거기다 또 이 세상처럼 또 하게 되면 그럼 남자는 남자가 되고 여자는 여자가 되고 남편은 남편이 되고 아내는 아내가 되잖아요. 그거는 죽음의 세계의 살림살이지 천국 가서 또 그렇게  살라고요? 거기서는 시집도 아니가고 장가도 아니간다 했어요. 그 말에 삐져서 천국 안 가려는 유대인들 많을거에요. 시집가는 재미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가나. 천국 가서 뭐하나 당구 치나. 천국가면 당구 500치는 사람 얼마나 또 뽐내겠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가 추진한 모든 일이 내가 낭패로 끝나야 될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내가 추진한 일이 다 실패로 끝난다고 생각하지 말고 ‘무의미’로 무의미하다. 실패하고 무의미하고 달라요. 실패하게 되면 안타까워 어떡하나 조금만 이렇게 달리 했으면 성공했을텐데. 무의미한 것은 의미가 없어요. 성공해도 의미가 없고 실패해도. 건강해도 의미가 없고 아파도 의미가 없어요. 의미 없이 아파 죽어야 구원받습니다. 자기가 무의미하다는 것. 


왜냐하면 나를 의미 주려고 나에게 이런 조건 적절한 환경을 주는게 아니고 예수님이 살았있잖아 그거 알려주려고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 주신거에요. 어차피 이거 이 세상 사는거 잠깐이거든요. 제 말 아니잖아요.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데 어떻게 잠깐하고 성분 2cm하고 200km하고 비교가 됩니까. 천국은 2000km보다 더 길어요. 이거는 2cm보다 더 짧아요. 있으나마나한 그것 오죽했으면 ‘안개’라고 했겠어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저버리는 ‘끝’. 


그 안개하고 영원한 주님이 살아계시는 영원한 그 세계하고 그거는 비교가 안되지요. 현재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지금 고난 잠깐 필요 없어요. 지금 여기서 연습게임 잠깐 뛴다고 보면 됩니다. 그냥 연습게임했다고 보면 돼요. 연습게임. 연습게임 좀 그러면 친선게임. 친선게임. 같이 결혼한거 친선게임. 부부라는게 뭔줄 알아나보자 해가지고 친선게임 붙은거에요. 어차피 올라가지도 않고 상금도 없으니까. 


아 이렇구나 부부라는게 아 자식 놓는게 이런 기분이구나. 내가 추진한 이 자식놓기가 결국 나에게 낭패로 돌아서는구나. 개 키워보세요 마찬가지고. 하루에 7만 개가 돌아가신답니다. 우리나라의 통계에 보면. 7만명. 7만명이 아니고 7만 개. 처음에 개 키울 때 얼마나 좋아했어요. 갖다 버릴데 없어가지고. 


성경이 사적으로 끌어당길 문제는 아닙니다. 시편 16편10절 한번 봅시다. 시편 16편10절. 이왕 죽을거 고함지르고 죽자. 어차피 살아봐야 무의미하고 강의해도 다 무의미한건데 내가 강의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라고 했잖아요. 


이 시편 16편10절에 나온 본문을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사적으로 이용해댔습니까. 나에게 주어진 공포심을 내가 이거 해소해보려고 그 다음에 뭐냐? 나는 이 말씀을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뭐냐? “믿습니다” 거든요. 그 “믿습니다”가 ‘행함’이에요 그게. 믿음이 아니고. “나는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의인은 죄에서 나오듯이 믿음은 불신앙에서 나와요. 불신앙이 없는 곳에는 믿음이 안 나옵니다. 제가 주일낮에 했잖아요. ‘천국의 열쇠’. 천국의 열쇠는 어디서 나온다? 교회를 망하게 하는 그 힘에서 나와요. 교회가 망했을 때 그 현장에 보니까 천국의 열쇠가 있는거에요. 따라서 교회에 있을 때 교회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왜? “교회는 있으나마나 무의미합니다” 라는 말 해야 그게 ‘교회’에요. 그게 교회라고요. 


천국의 열쇠가 어디 있느냐 하는 그거 주일날 설교 생각하면서 잠깐 드라마를 보니까 알함브라 궁전에 보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혜미? 여자 주인공이 남자주인공 현빈을 칼로 찔러 죽여버려요. 그 칼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천국열쇠거든요. 천국열쇠 딱 열면 칼로 되어 있고 그 칼 가지고 컴퓨터게임 버그 지운다고 버그가 누구냐 바로 버그를 해결할 해결자가 버그였어요. 반전 좀 있어야 뭐 좀 있어보이거든요. 


꼭 십자가같애. 죽여버립니다. 기타 치고 따라라따라라 알함브라 궁전 한번 치고 죽여버려요. 유대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일종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버그에요. ‘적폐요소’, 적폐요소.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요소에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요소가 이스라엘한테 이스라엘 망하지 말라고 이스라엘을 죽였거든요. 이게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한사람을 죽여서 누가 살자? 이스라엘 살자. 


그런데 그 죽어야 그렇게 해줘야 복음을 싫어하는 예수님을 싫어하는 자가 있어줘야 주님의 사랑이 미워하는 속에서 비로소 나와요. 너 주님 미워함 받을래? 사랑함 받을래? 전부다 주님 사랑 받고 싶죠. 아니요. 내가 바로 미워하는 자의 구성원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줘야 비로소 그걸 자인하는 것을 성령이라고 하거든요. 성령은 깨닫게 하는 것. 모든 결과를 깨닫게 하는 것. 비로소 이런 사태가 바로 성령이 임한거에요. 그게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어찌할꼬 하잖아요. 어찌할꼬 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 손으로 오신 메시아도 우리 손으로 되돌려 보내었습니다. 어찌할까요. 세상에 피자 배달시켜놓고 피자 온 사람을 도로 보냈어요. 도둑놈인줄 알고. 못 먹는 피자는 더 맛있어요. 주님을 돌려보냈으니까 어찌할꼬. 잘못했습니다 하고 그 다음에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면 거기서 바뀌는게 있어요. 내 쪽에서 했다 에서 내 이름으로 할거잖아요. 이제는 네 이름을 청산하고 이제는 모든걸 주께서 하셨다 해서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고백을 하란 말이죠. 사도들이 기적을 행해도 ‘주의 이름’으로 하잖아요. 귀신들도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사도들의 이름으로 하는게 아니라 내 자신의 견문과 능력으로 하는게 아니다 했어요. 


주님께서 그 사람들을 직접 구하시고 나는 목격자죠. 사람들 말하기를 주님께서 언제 그 앉은뱅이를 낮게 했느냐? 그러니까 ‘증강현실’이죠. 그냥 현실 속에서는 주님이 보이는데 다른 사람은 안보이는거에요. 성도가 느끼는걸 다른 사람은 못 느끼는 겁니다. 그럼 성도는 제자 사도는 왜 느끼느냐? 본인이 존재 자체도 나로 인하여 있지 않다는 것을 늘 느끼다보니까 누구 하나 나처럼 그렇게 구원받았으면 이거는 어떤 권사가 집사가 전도하는게 아니고 주님이 직접 전도한거에요. 


전도받은 사람은 처음에는 몰랐지요. 저 권사가 집사가 고구마 전도라고 해가지고 기도 많이 해서 내가 전도된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까 그게 아니고 주님이 직접 나를 건졌다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전도받은 사람이 누굴 전도하게 돼요? 자기 전도한 사람을 전도해야 돼요. “집사님 그렇게 하는게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해서 전도한게 아니고 중보기도한게 아니고 주님이 찾아올 때만 구원됩니다”. 


그럼 저 사람은 삐져가지고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없다. 너 전도한다고 투자한게 얼만데 올 때마다 밥 사주고 차비주고 택시 태워준거 돈이 얼만데 다 내놔라. 정성이 얼만데 너 때문에 새벽기도 중보기도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거 보세요 집사님 자기 공로 남아 있잖아요. 


그때그때 자기가 말렸다는 것을 깨닫고 ‘아 주의 은혜로 했지’ 뒤늦게 은혜 갖다붙여봐야 그게 어색하지요. 대화하다가 갑자기 복음 아니란게 들통났잖아요. 후딱 갖다 붙여요. 그것도 그냥 붙이는게 아니고 후딱 갖다 붙여요. 아 참 내가 주의 은혜로 은혜로 은혜로. 주의 은혜로 했지. 주의 은혜와 우리 행함이 어떻게 결부가 됩니까? 말이 안되지요. 


주의 은혜는요 주의 은혜는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죄인의 행함이죠. 주님이 죄인의 행함을 ‘의’로 바꾸신거에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뭐냐 하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럼 제가 만약에 예수 같으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십니다 이렇게 할거란 말이죠.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자꾸 염려하지 말고 주님이 직접 주십니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 이 말이죠. 우리가 만약에 고상한 점잖은 도 닦은 유대인이라면 그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되면 사적인게 돼요. 어쨌든 먹을거 입을거 있어야 내가 죽음을 이길수 있는 그 공포심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제는 내 힘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주신다는 그런 공식으로 구실을 갖다 붙인게 돼요. 얼마나 교회마다 다 그래요 교회마다 내가 보니까. 아이고 목사님 은혜롭다. 들어보니까 그 이야기야. 사적인 것을 못 벗어났어요. 옛날에는 내가 노력해서 얻었는데 주의 은혜로 얻었다. 굉장히 은혜스럽죠. 


그러나 결국 결론은 뭡니까? 은혜든 뭐든 내가 살아서 땡 잡았잖아 그쪽이에요. 개인적인 이득으로 그만 마감돼요.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 나라와 의를.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은 뭐다? 이방인들은 전체가 목적 자체가 죄가 됩니다. 먹을거 입을거 구하는것 자체가 죄안에서만 한계 지어서 그 안에서만 순환되는 종교적 논리구조입니다. 


그 나라와 의는 바로 내가 은혜로 먹고 살아보겠다고 노력했던 그것도 주의 은혜로. 주님께 감사하는 용도로 나 살았다하는 자들의 손에 의해서 누가 죽었어요? 메시아가 죽었잖아요. 이제 감이 오십니까? 교회가 어느 정도로 지금 엉망인지. 집단으로 얼마나 주님이 안 계시는 쪽으로 사람들을 얼마나 몰고 가는지 아시겠습니까? 인천 순복음교회가 불이 활활 타는 동영상을 보고 순간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좀 다 탔으면 좋겠다. 


그러다 아차 갑자기 성경구절 한두군데가 막 튀어나오는거 아니에요. “망대에서 18명 죽었다고 좋아하지 마라”. 원수가 나쁘다 할 때 좋아하다가 너도 당한다가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 막 나와요. 에돔이 왜 벌 받는지 알아요? ‘이스라엘이 형제인 이스라엘이 망할 때 너 기뻐했다’는 죄목으로 망해버려요. 


갑자기 좋아했다가 갑자기 우리 교회 누전이 안 되는가 싶어서. 그러니까 주께서 불나는 조건도 보세요. 얼마나 적절하십니까. 모든 인간은 사적으로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 자기 힘으로 자기 공포심을 이겨보려고 노력하는 원인을 수정해서 결과를 변화시키겠다는 그 노력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자, 그 변화를 초월해서 주어지는게 뭐냐? 하나님의 미워하심이에요. 그럼 복음전파의 목적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미워하심이 어디서 등장하는지 어떤 현장에 등장하는지 하나님의 미워하심 좀 보자 하는 식으로 복음을 전하면 되지요. 어차피 종은 자기 일이 아니고 주인 일이니까. 주님이 미워하신다니까. 누가 미워하는지 알 수가 없잖아. 그러나 복음을 전하면 아 주님이 미워하시는 사람이 등장하게 될거에요. 미워하심의 특징이 뭐냐 절대로 복음 쪽으로 안 온다는 거에요. 어떤 경우라도 기를 쓰고. 


이 테스트를 예수님이 어떤 여자한테 했어요. 나 너 미워한다. 아~참 인간을 모독한 참 심하게 모독한 테스트. “어디 개 같은 여자가 아들만 먹는 것을 먹느냐! 하늘 아들에게 준비된 양식을 네가 왜 천국의 떡을 네가 이방여자가 먹어!” 그 여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혜롭게 대답해요. 주님의 그 의도를 알아채고 답변을 한 거에요. “옳습니다. 저 이방여자입니다. 개입니다”. 개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유대사회에 이방인들을 개로 봤으니까. 


왜 개냐면 할례 없는 것은 개가 돼요. 할례 없는 족보는 인간으로 취급을 안했어요. 그래야 진멸이 정당화 돼요. ‘진멸’. 애 젖먹이부터 다 죽이는게 진멸인데 할례 없으면 다 죽여버리라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백성으로서 마땅한 도리입니다. 팔레스타인 다 조져야 돼요. 예루살렘 뭐 황금돔 내가 유대인의 대통령 같으면 벌써 해결했어요. 


그 핵폭탄 설치해가지고 핵기지 만들고. 어디 이 땅이 누구 땅인데 아브라함 약속의 땅인데 누구 땅인데. 가자 지구고 뭐고 전부다 가라 너희들 알아서 가라 난민하든지. 지중해 배타고 가든지 가라. 이 땅은 우리 땅이다. 주의 뜻이다. 왜 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못하느냐 하면 그들이 여호와를 안 믿어요. 그들이 믿는 것은 이스라엘을 믿지. 이스라엘을 믿지 여호와를 안 믿어요. 여호와 믿는 인구수가 15%도 안돼요. 나머지는 안 믿어요. 잘 사는 나라 믿어요. 


그래서 정치적 협상을 하고 있는 거에요. 계산이 이거 쫓아내면 얼마나 귀찮게 이거 군사무기 뽑는데 예산 얼마 들고 핵폭탄 200개 되는데 더 만들어야 되고 아 귀찮다 대충 나중에 힘 있을 때는 모르겠지만 봐주고 있는거에요 지금. 이 모습이 오늘날 어쩌면 우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잖아요. 우리 모습. 무슨 이야기하다가 이스라엘 이야기하고 있나. 


아까 그 개 같은 여인. 개 같은 여인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개 같은 이방여자가 하는 말이 ‘현재 이스라엘이 완결된 이스라엘 아니잖아요’ 하는 뜻이에요. 주님의 앞서 할 계획을 이방여자가 물론 성령을 통해서 알아챘겠죠. 그러니까 “네 믿음이 크도다” 이야기하지. 어떤 절차를 주께서 하는 절차를 보여주는 거에요. 


네 믿음이 크다는 말은 유대인 사회는 믿음이 있다 없다? 없다는 거에요. 내가 이방여자한테 믿음을 만들어서 그 믿음에 내용대로 착착 이제부터 현실화시켜 나갈거야 라는 거에요. 백부장도 마찬가지고. 기존의 아브라함 자손은 다 쫓겨날 것이고 천국은 이런 자들이 차지 할 것이다. 어디 남의 나라에 지옥 갈 인간이 찾아와 나가!! 나가라고 할 때 기준이 누구입니까? 


기준은 이방 백부장이 기준이지요. 기준은 누가 만드냐 하면 주님이 만들어요. 부활이 포함된 세계가 만들지 부활이 빠진 세계는 이 현실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이 못됩니다. 내 인생을 우리가 함부로 평하지 마세요. 우리는 부활을 계산 안하고 평해버리면 안돼요. 부활을 계산하고 평한다면 우리는 내 인생의 행함이 내 환경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저 주어진 그대로 찍으라고 하면 엑스레이 찍고 약 먹으라고 하면 약 먹고 그 일에 고분고분 순종하는  거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 보기에 목사님 믿음 없는 사람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똑같애요 똑같애요. 똑같지 뭐. 나 이거 찍고 나을래 나 죽을 때 안됐어. 왜? 나 죽기 싫어 이런 행동이나 말로만 죽겠다 죽겠다 해놓고 더 좋은 약 없습니까? 뭐 민간요법 없습니까? 똑같지. 예수님이 그래요 똑같애요. 예수님이 맨날 큰소리치는 것 같애.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다. 큰소리 쳤는데 맥없이 죽었어요. 


고린도후서 14장에 나옵니다. 약해서 죽었어요. 약한 그것이 약할 수 있다는 그것이 곧 강함이라. 그래서 너도 약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라. 네가 망가져도 괜찮다는 믿음을 가져라. 있는가 스스로 자기를 증명해보라. 교회 부흥시킬 능력 있느냐? 그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약할 수 있는지. 망가질 수 있는지. 


너 복음알고 집구석 쫓겨나도 노숙자 되도 잘 살 자신 있는지. 복음 알고 노숙자 되신다면 멀쩡한 집안에서 행복하게 사시면서 본인을 노숙자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 그러면 애가 서울의대 안가도 건강해준 것만 해도 고마워요. 원피스 하나 입고 온 유리창에 낙서 이렇게 안 설쳐준 것만 해도 고마운줄 알아야 해요. 스카이캐슬 이야기입니다. 그냥 어머니 저를 다 믿으세요. 저를 믿으셔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평소에 제 믿음 이야기 아니고요. 예수님 평소에 얼마나 유대인 보고 이야기했어요. 나 믿어야 된다고. 김주영이가 보통 날 믿으셔야 됩니다. 그런데 갈수록 뭡니까? 믿을 수 있는 요건을 의도적으로 빼버려요. 제자들아 너 이게 믿으라고 했지? 일부러 빼요. 베드로가 화 안날 수 없고 베드로가 배신 안할 수가 없어요. 배신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믿는 것은 다 빼니까. 믿는다는 말은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간다? 내 쪽에서 주님 쪽으로 가는 그 코스를 주께서 절대로 안 받는 코스에요. 떡을 먹었다 쫓아온다 안 받는 코스입니다. 저런 코스라 하는 것은 나를 죽이고 죽고 난 뒤에 그 죽은 시체 속에서 내 살과 내 피를 그걸 뽑아서 먹어라 이 말이죠. 


내가 죽인 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내가 죽였다는 그 증거가 생생히 남아있는 그걸 입에 집어 털어 넣어라 이 말이죠. 그게 사는거다 이 말이죠. 나는 죄인이다 하고. 그게 사는 길이에요. 목회한답시고 교회 만들어서 천국 가려했지요. 기도한다고 새벽기도해서 주님의 기도 다 막아놨지요. 헌금한답시고 해가지고 아나니아 삽비라 헌금 다 했지요. 모든 성경에 나온 우리의 한 짓거리 할 것이 그것밖에 없는데 그것 하는것 조차도 주님 보시기에는 아주 적절한거에요. 왜? 미움 안에서 뭘 끄집어낸다? 미움 받아 마땅한걸 통해서 주님께서 사랑을 비로소 미움 속에서 사랑을 끄집어내는 거에요. 


오호라 나는 어떤 사람이다? 곤고한 사람이다. 이게 지금 연출하는 겁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연기 뭐라고 하면 구원받지? 지금 연기하는 거에요?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인상 이래가지고 “아아아~~~”이렇게 하는겁니까? 곤고한 사람으로 자기 존재는 끝났어요 거기서. 자기 존재로서의 할 역량은 곤고한 사람이라고 파악하는 그걸로 끝났어요. 나중은 성령에게 맡겨야 돼요. 


찬송하리로다 하지요. 그 찬송 비로소 찬송이 나옵니다. 찬송하리로다. 8장 1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함이 없나니”. 그래서 제가 로마서 책을 지으면서 제목을 그걸로 정했습니다.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 나는 너를 죄인이라고 누가 뭐래도 옆사람이 옆에서 누가 뭐래도 나는 너를 죄인이라 하지 않겠다. 현장에서 간통한 간음한 여자를 만나도 나는 너희들을 죄라고 하지 않겠다. 


왜? 왜 그런데요? 내가 그렇다하면 그런거야 내가.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거에요. 저 사람은 착한데요. 저가 나를 미워했으면 나는 저를 계속 미움의 대상으로 내가 미워하는 행위에 열매 실적으로 내가 내 쪽에서 밀어내겠다. “오지마! 천국으로, 너 지옥가!” 왜? 너의 의사와 관계없이 내 의사이기 때문에. 주님의 의사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 주님이 무서워요. 차가운 여자입니다. 정말 차가운 분입니다. 너무 차가워요. 


주님이 하는 일은 처벌하는 일이에요. 심판하는 일입니다. 심판한 그 일을 아가에 보면 시커먼 얼굴을 가진 술람미 여인한테는 내가 보기에는 이 세상에 너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가? 왕궁에 왕의 격에 맞는 이 모든 것을 너의 격에 맞는 것으로 내가 안아줄게. 자기 세계 안으로 확 안아버리죠. 어떤 균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아버려요. 그전에 그만큼 갈라졌다 갈라졌고 여자와 갈라져있고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그 속에 사랑이 꽂히니까 사랑의 둘이 하나가 되겠지요. 


결국에 남는 것은 솔로몬은 사랑의 왕이었다. 주님은 누구였다? 사랑의 왕이었다. 누구에게만? 천사가 말을 건낸 사람에게만. 성령이 말을 건낸. 막달라 마리아한테는 주님이 사랑이었고 미움이 아니고 그냥 사랑이 아니고 전혀 어떠해도 안 미워하는 사랑이고 저쪽은 어떤 이쁜 짓을 해도 미움이고. 내가 밉도록 작정했기 때문에. 그게 예정론입니다 예정론. 무섭지요. 내가 밉기로 확정했다는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15절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이거는 천사가 자기 역할 끝나고 그 뒤에 직접 누가 왔습니까? 마리아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지금 이 교회에 이 장소에 저희들이 가봤거든요. 떠들기만 하고 천사는 못 봤어요. 랍오니 이런거 예수님 못 봤습니다. 그런데 마리아한테는 나타났어요. 왜 우리는 못 보느냐?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기도로서 보여주옵소서 한다고 붙잡을 수 있는게 아니에요. 


우리 쪽에서 만약에 어떻게 나타났다면 기도해서 나타났다면 그 기도조차 주께서 유발하신거에요. 히스기아 왕처럼. 항상 출발을 성경해석을 신약, 구약 성경 해석은 오직 기준은 하나 인간은 끼어들지 마라. 오직 뭐로 해석한다? 십자가와 부활로만 모든 성경을 다 해석하라. 해석의 기준은 결정났어요.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 부활은 우리를 해석할 자격이 있다고 우리를 죽은 자로 봐요. 죽은 자의 해석은 산자만이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신학교 가서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몰라요. 신학교가서 신학이 나를 계속 살릴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공부하고 있는데 어떤 해석도 다 엉터리에요. 예수님 살아있다는 것도 엉터리고 부활도 엉터리고 재림도 엉터리에요. 주께서 인정 안하거든요. 


지금 이 상황보세요. 지금 막달라 마리아가 울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울고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지금 곗돈 깨져서 우는게 아니잖아요. 예수님 보고싶어서 울잖아요. 예수님 보고싶어서. 그 현장에 어디 갔는지 그냥 동산지기인줄 알았어요.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히브리는 유대인 때는 원래 아람어라 하는데 히브리 맞아요. 어떤 학자들은 하는데 하여튼 학자가 문제라. 히브리 맞습니다만은 히브리 중에 두 가지가 있어요. 이후에 보면 히브리도 두 종류가 있어요. 그 당시에 또 다른 히브리말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느니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강의 처음부터 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현재 우리 사는게 정상이고 정상인데 다만 우리가 놓친게 성경을 안 보니까 놓친게 부활을 놓치고 십자가를 놓쳤구나. 현재 이 사고방식에다가 이거 하나 갖다 붙이면 정상에다가 더 추가해서 온전화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사람들이.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왜 그리 민감하고 반대를 하느냐 하면 제발 내 것 좀 건드리지 말아라는 거에요. 


그동안 3,40년 신앙생활한 것 좀 건드리지 말라는거에요. 무슨 교회입니까? 김성수 목사 서머나교회에서 자기도 복음 안다는거에요 자꾸. 전면적으로 다 고쳐야 되는데 다만 그들은 바른 복음 찾으려고 하는 자기 자신은 문제가 없고 기존 교회는 찾을 수 없었는데 김성수 목사님께서 이렇게 돌아가시면서 순교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전해준 이 말씀을 첨가했기 때문에 기존에는 문제없고 첨가된게 괜찮기 때문에 우리는 괜찮다 이렇게 보는거에요. 


바른 복음을 찾으면 그 자신은 자기 자신은 손댈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근원적으로 다 뚫고가거든요. 복음은 여기 있는데 하나 첨가하는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우리의 사고방식 다 파헤쳐요, 다. 내가 뭔가 내가 추진을 했어 그동안. 내 구원에 천국 이런 식으로 추진을 한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계속 역으로 파들어옵니다. 


그래서 제가 대구강의에서 했지만 우리가 할 일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할 일은 아무도 안 들었구나. 죄 짓는거에요 그냥. 어떤 죄? 엑스레이 찍으면 이제 낫겠지 이거. 천식 낫겠지 주여 살려주시옵소서. 이런 죄 짓는거에요 이게. 예 시키는대로 다 하겠습니다 금식하고 사진찍고 다 하겠습니다. 양 맞춰 식사 후 30분 꼭 지키겠습니다. 다 해보는거에요. 적절한 주님이 주신 환경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너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적절한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비록 마리아가 부활을 몰랐지만 그런 적절한 환경조차도 의도하셔서 만들어 주셔서 자신의 부활의 현장에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을 끌어모으신 하나님의 절묘한 그 전략을 지금도 우리 가운데 실시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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