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9장 10절(나와 너)181204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9장 10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
예수님께서 빌라도와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상대해 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오늘날 주님이 우리를 상대해 주는 것과 똑같은 취지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만날 때 빌라도는 예수님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은 빌라도 하고 예수님이 만납니다. 만날 필요도 없는데 만나요.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은 유대인들이잖아요. 거기에 제 3자인 이방인인 여기 빌라도가 끼어들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빌라도가 끼어듭니다.
줄곧 예수님께서 공생애 가운데 누구한테 비난받고 누구한테 배척을 당합니까? 어떻게 이방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이죠. 그러면 이 문제를 유대인과 예수님 사이로 이렇게 마감이 되어야 되는데 거기에 이방인 빌라도가 여기에 끼어들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빌라도는 그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은 세상 권세적입니다. 세상 권세적이니까 이거는 뭐 그냥 세속, 정치성 또는 정치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대할 때에 메시아도 아닌 자가 왜 메시아로 자칭하느냐 때문에 화가 난겁니다. 메시아는 두 가지 기능이 있지요. 메시아는 하나는 구원자 기능이 있고 구원자로서 구원할 사람 빼놓고 나머지는 뭘 하느냐 하면 나머지는 심판자 역할을 하는겁니다. 이 구원자, 심판, 이 기능을 하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이 메시아를 유대인들이 고대한거에요.
그럼 유대인들이 고대할 때 그 메시아가 자신들에게는 심판주가 되겠습니까? 구원주가 되겠습니까? 구원자가 되겠지요. 자기는 구원자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본인이 구원될 수 있다는 그 확신 때문에 본인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그런 구원자를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하는 것이 평소에 자기들이 하는 생각한 그 구원자에 부합되지 않는다는거에요. 일치되지 않는 겁니다.
구원자에 일치되지 않는다는 말은 곧 무엇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말이냐 하면 심판주에게도 일치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갇혀있기 때문에. 당신은 우리의 구원자 될 수 없어요 라는 말이나 당신은 이방민족을 심판할 수 있는 자격자가 못 됩니다 라고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에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구원자 심판자로 할 때에 세속, 정치성 또는 정치력으로 하는게 아니죠. 이들의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율법’이 되는 겁니다.
율법으로 구원자 심판주를 찾고 있었는데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제거 못하니까 이 율법에다가 뭐를 가져갔느냐 하면은 세속 정치력을 결합을 시켰습니다. 자기들이 돌로 치면 안 될까요? 그 유대인들이 사도바울 돌로 치듯이 왜 이거는 예수님을 돌로 쳐서 자기 율법 있잖아요 율법에. 율법에 율법을 어긴 자는 돌로 치라면 돌로 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을 돌로 안 쳤을까요? 너무 귀찮은 코스를 왜 밟는가 이 말입니다.
오늘 뒤에 나옵니다만 자기들은 그만한 형편이 못 되고 있다는 거에요. 사람을 자기가 죽이고 싶지요. 누가 없으면? 빌라도 로마의 통치가 없으면 세속 정치성이 없으면 자기들끼리 자체라면 돌로 칠 수가 있지요. 그런데 만약에 돌로 치고 난 뒤에 자기는 누구한테 추궁 당하느냐 하면은 세속 정치권력에 추궁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통치하에 있기 때문에 완전히 로마법을 개무시했다는 평을 받아버리면 그들의 하는 조치가 로마법에 의해서 자기들 민족이 위태로울 수가 있어요. 그래서 결과는 동일한 결과를 얻되 이왕 그렇게 자기가 로마의 통치를 받을 것 같으면 로마 통치자의 그걸 매체로 해서 자기가 원하고자 하는 결과를 얻어내면 로마한테도 별 하자가 없는 것이 되고 로마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것도 되고 그 다음에 자기 소위의 목적도 이룰 수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몰아간겁니다. 예수님이 또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또 그렇게 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만날 때는 그런 차원에서 만난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만날 때는 오늘 읽었던 본문의 취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11절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네가 거기 11절에 보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지금 빌라도에게 무슨 권세가 없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네게 넘겨둘 권세가 있다? 없다? 권세가 없는거에요. 빌라도는 자기 뜻대로 나를 유대인에게 넘겨줄 권세는 없는거에요. 권세가 없는데 빌라도는 뭐라고 주장했느냐 하면은 나한테는 그 앞에 10절에 보면 나한테는 뭐가 있다? 권세가 있다는거에요. 권세가 있다. 나에게는 권세가 있다는 겁니다.
권세가 없는데 권세가 있다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그 죄라는 것은 어디서 발생되느냐 하면은 바로 이 권세에서 발생되는거에요. 권세에서. 죄라는게. 개인적으로 도덕적으로 그게 죄가 아니고 권세에서 네가 소속감에서 오는거에요. 특정한 권세 자체가 죄가 된다면 거기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은 전부다 자동적으로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바보가 그런 권세에 매여 있는걸 좋아하겠느냐 하는데 어느 바보가 아닙니다 이게 지금.
19장 15절에 보면 누가 한번 읽어 볼까요.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됐습니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다시 말해서 그런 권세를 개인적으로 자유를 누리면서 나는 어떤 권세도 메이지 않아. 나는 자유로워 라고 외치고 싶지만 이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나 빌라도가 권세를 없이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소속감에 있는 것을 도리어 안정적으로 원하고 있는 겁니다. 소속감 있는 것을.
그래서 이 군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군중이라는 개념이 달리 말하면 공동체가 되겠지요. 공동체, 군중. 이 군중이 뭐냐 하면은 뭐를 노리느냐 하면은 권세에요. 군중 자체가 권세지요. 이걸 저는 ‘초법’이라고 합니다. 법을 초월하는거예요. 어젠가 우리나라 로켓트 올라갔지요? 로켓트 쏘아 올리면 로켓트가 뭘 뚫고 갑니까? 대기를 뚫고 올라가지요. 대기라는 것을 초월하지요.
이 군중들의 속성들이 뭐냐 하면은 각자 제각기 각자 초법적인 속력을 갖고 있어요. 거기 구성인들이. 저와 여러분들 말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이상하게 법을 언급하고 뭐 세상을 언급하지만 솔직하게 따져서 이야기 하자면 초법적인 존재이고 싶어합니다. 그런 성향을 갖고 있어요. 초법적인 존재. 인간이 근원적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외침은 뭐냐? 인간이 외칠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또 솔직보다 솔직 제곱 곱하기 솔직 가장 솔직한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은 “저리 가”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은 이거에요. 저리 가. 혼자 있고 싶다. 창세기 3장 이야기입니다. 혼자있고 싶은 거에요. 유치원에 가면 유치원 선생들 있지요. 애들을 잘 돌봅니다. 어린이집하고 유치원은 약간 급이 달라요. 유치원은 4년 나왔고 어린이집은 연수원 나왔거든. 학원 다녔거든요. 배우는게 달라요. 다른데. 그 애들은 배울 때 얼마나 철저하게 몬테소리부터 해서 얼마나 많이 배우느냐 하면은 애들을 천사처럼 다루는걸 배울거에요.
그런데 퇴근 시간 됐는데 애가 안가고 있다. 칭얼댄다. 뭐라고 합니까? 낮에 태도하고 다르죠. 저리 가. 빨리 너희 엄마한테 가. 귀찮아죽겠어. 연세 많은 부모한테 자식들이 효도한답시고 손녀 손자 데리고 옵니다. 반가워하지요. 보고싶었네 뭐 하지요. 저녁 설거지하고 이제 부모 마음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빨리 너희 집 가라. 올 때 반갑고 갈 때는 더 반갑잖아요. 곱배기로. 나도 밤에는 숨 좀 쉬자.
자식에 대해서 홀로 있는 시아버지나 시어머니 홀로 돌보는 것은 하지요. 그러나 부부 사이에 시아버지나 시어머니 이름으로 또는 장인 장모 이름으로 누가 끼어들게 되면 정말 내 인생 아닌거 같아요. 이거는 늘 긴장된 모습으로 지낸다는 것이 너무 견디기 힘든 겁니다. 언제까지 견뎌야 되는가? 돌아가실 때까지 견뎌야지요. 그러면 대책은 있어요. 뭐냐 하면 요양원 알아보는 겁니다. 핑계대고 대충 보내지요. 좋게 좋게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하는 것도 없이 효도 소리만 들으려하는 바깥에 일하는 남편은 “너 우리 어머니 모시기 그렇게 싫어?” 이렇게 나와요. 그리고 그 이야기 나오면서 곧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은 이집 살 때 엄마가 얼마 보태줬냐? 대출 누구 이름으로 했냐 그 이야기 반드시 나옵니다. 형제들이 엄마 모신다는 조건하에 2억 대출 그냥 2억 대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받았잖아. 2억값을 해야지. 1년 모시고 요양원 보내면 형제들이 돈 개워내라고 얼마나 닦달내겠느냐.
얼마나 손자 손녀 잘 보느냐 이렇게 남편들이 이제 뭣도 모르고 여자의 마음도 모르고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여자가 하는 말이 당신 말 다 맞는데 내가 숨을 못 쉬겠다 숨을 도대체. 사람 숨 좀 쉬자 숨 좀. 그럼 남편이 하는 이야기가 어머님이 너 사랑하고 너 어머니 좋아한다며 마음껏 숨 쉬어라. 공기 없냐? 하거든요. 공기 있다고 숨 쉬는게 아니에요.
이번에 아가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은 천국은 여성의 세계다. 천국은 여성들만 사는 세계. 천국은. 오늘도 비슷한 이야기 나올거에요. 남성은 못갑니다. 한명도 못가요. 왜? 모두가 신부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부가 되거든요. 여성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가는게 아니고 여성처럼 치인 사람, 당한 사람, 여성이란 이름으로 몹쓸 일을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 그래서 이거는 생물학적으로 남성 여성이 아니라 남성성 여성성, 천국은 여성성의 세계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관심있는 것은 죄에요. 죄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초법적으로 만들어지느냐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여기서 이제 강의 내용이 어려워지는 이유가 딴게 어려워지는게 아니고 빌라도 있지요. 빌라도하고 누구하고 만났다 했습니까? 예수님 만났지요. 거기서 죄를 끄집어낸다 하지요. 죄의 성질을. 죄의 초법적인 성질을 이야기할건데.
여기서 이것 자체는 쉬워 보이지만 이게 문제가 어려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나’의 위치가 어디 있느냐 하는 거에요. 나의 위치. 여기에 뭐 중계방송 한번 할까요? 우리는 여기에 따로 이렇게 관람석에 앉아서 이걸 생각할까요? 아니지요. 우리가 어딘가 섞여야 된다 이 말이죠. 우리가 섞이는 장소가 뭐냐 하면 군중이죠. 그럼 군중과 빌라도의 관계가 뭐냐 하면은 군중의 대변자가 빌라도에요. 우리의 군중들의 의사를 너는 대변만 하면 돼.
쉽게 말해서 군중들의 입장에서 빌라도는 시시하게 보는거에요. 네가 우리의 총독이나 총독자가 아니라 너보고 부탁하는 내가 사실은 초월적 존재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빌라도에게 자꾸 강요하는거에요. 죽이라고. 예수님을 빨리 사형시키라고 요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굴 보고 죄라고 했습니까? 빌라도 보고 죄라고 이야기 했지요. 빌라도 보고. 그러면 예수님과 빌라도 둘을 축약해서 둘 사이에 왜 의사가 서로 의사가 교환이 안 맞게 되는가? 서로 의견 타진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뭐냐를 조사해봐야 되겠지요.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자기의 피고 또는 죄인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영어로 ‘I’ 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뭐가 되겠어요? ‘you’가 되겠지요. 빌라도가 나라면 예수님은 너가 되는 겁니다. 10절을 한번 봅시다. 10절을 보게 되면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내가 뭐를 “놓을 권세가 있다.” 내가 그다음에 나와 너의 관계로 빌라도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와 너의 관계로.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 보고 죄가 크다고 했어요. 예수님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하고 빌라도는 뭐냐 하면은 ‘it’이 되요. ‘그것’이 되요. 인칭 대명사를 빠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인칭이라고 하는 것은 초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초법이 되지 않은 상태가 무슨 상태냐 하면은 이 질서상태거든요. 인간의 질서는 인간 대 인간의 질서는 형식적으로나 언어로 되어 있고 언어를 응축시키면 뭐가 되느냐 하면 법이 되요.
예를 들어서 회사 직원이 대리가 부장 앞에서 이거 따옴 오렌지 참 맛있어요. 이렇게 하는 이거는 아부하는 거죠. 과장님 주신거 참 맛있어요. 이거는 아부하는 거에요. 법적인 지시가 아니에요. 그런데 부장이 들고 와서 대리 앞에서 아이고 쥬스 맛있는데 이 말은 뭐냐 또 사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그 지위, 그 위치가 거기서 새로운 법을 양상시킵니다. 법적 관계로서 법적 관계를 새롭게 재정립해나가지요.
시어머니가 전화해서 며느리보고 우리집 김치 잘됐다. 전화를 했어요. ‘아 어머니 김치 하셨는데 김치가 맛있게 되었구나.’ 이렇게 알아들으면 그 며느리 바보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그런 뜻이 아니고 김치 가지러오라 이 말이에요. 너희들 두집 세집 너희들 형제 김치 다 해놨으니까 빨리 김장 하지말고 우리집 김치 가져가라 이 말이에요.
그러면 가져가면 되지. 가지러갈 때 그냥 가면 안되지요. 봉투에 돈 넣어서 간만에 가는데 눈치가 그렇게 없어 눈치가. 그런 기회 아니면 언제 며느리 보겠습니까? 어디 보고싶어서 보는게 아니에요. 나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한시도 잊지 말라는거에요. 너희들끼리 재미있게 하하호호 살지 말고 늙은 부모 이렇게 김장하면서 손 시려워가면서 기껏 하면서 김장하면 손 얼마나 시려운지 장갑 껴도 시려워.
이게 무슨 뜻이에요? 안방에 보일러 넣으라 이 말입니다. 안방에 보일러 넣어달라 이 말이지 그냥 와서 김치 달랑 먹지 말고 그거는 정말 철딱서니 없는 신세대 며느리 같으면 “어머니 김치 맛있어요.” 또 김치 말고 또 가져갈거 없는가 고대 유물같은거 없는가 또 찾아가지고 명품진품 나오는거 있잖아요. 부모꺼는 다 내꺼니까 무조건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참 친정갈 때 그러는데 시댁가서는 그러지 못하죠.
인간의 관계는 빌라도가 죄라고 언급을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모든 중심을 ‘나’로 보고 나머지 모든 인간을 ‘너’로 보는 이 구조가 죄의 구조입니다. 내가 너에게 꽃이라 했을 때 비로소 너는 나에게 나를 위한 너는 하나의 의미가 되는거에요. 나에 대해서.
예수님이 빌라도 입장에서 볼 때는 빌라도는 ‘나’가 되고 예수님은 ‘너’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은 인간 세상에 질서라는 현실체제입니다. 현실체제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질서체제.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지상에서의 나와 너의 관계에서 배재된 상태, 거기에 섞이지 않은 상태로 예수님 계셨지요. 그때는 예수님 아니고 성자에요 성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기에 계셨잖아요. 너 나의 체제에 속하지 아니하셨을 때.
그때 봤을 때 그거는 뭐냐 하면은 하나의 ‘it’이 되요. 그냥 그것이에요. ‘멸망의 대상’이다 말이죠. 이미 심판주로서 행세한거에요 하늘나라에서.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구원될 대상이 있을 때는 구원자가 되는 겁니다. 그냥 심판주에요. 이게 창세기 3장에 보면 두루 도는 화염검에서 아무도 그것을 돌파 못하도록. 그걸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는 역류하지 못하도록 했지요. 주일 낮 설교에서 역류되지 않도록.
아무도 돌파 못하도록 이렇게. 여러분들 생각에는 생명나무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불로서 빙빙 둘러놨다 했지요. 여러분 발상을 바꿔서 해보세요. 생명나무를 보호하려고 생각할 수도 맞는 말이지만 세상을 완전히 불로서 포위해가지고 작살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이잖아요. 완전히 포위된거에요. 이 세상은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밖에 나가면 불 밖으로 못나가지요. 그게 지옥이라고 보면 되요 지옥이라고. 지옥은 누굴 조질라고 지옥 만들어 놨느냐 하면은 악마를 조질려고 한거에요.
여기 인간에게는 악마라고 하는 것은 없는 존재입니다. 악마는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질서 있는 세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나와 눈에 보이는 너, 나 너, 눈에 보이는 나와 너의 관계로서만 질서 세계가 움직이기 때문에 그래요. 눈에 보이는. 그래도 이 세상에서는 그래도 마귀 이야기하고 하나님 이야기하잖아요 하지만 그 이 세상 질서있는 세상에서 말하는 보이지않는 세계, 그 초월적인 세계는 전부다 뭐냐 하면은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고안된거에요. 방안으로써.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인간세상에서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 인간세상에서 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죠. 하나님을 신이라고 하잖아요. 신인데 신이라는 것은 이미 뭐로 주어졌습니까? 신이라는 그 자체가 신의 이름 또는 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언어가 동원됐잖아요. 하나님 할 때 어! 이렇게 합니까? 그냥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라고 불러줌으로써 이미 언어를 사용했다 이 말이죠.
그 언어는 무슨 관계? 질서관계를 유지하면서 언어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질서관계는 뭡니까? ‘나’가 있어야 되고 나 외에 ‘너’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 그런 용도로서 단어와 개념과 언어와 법들이 통용된 겁니다. 그럼 하나님은 인간세계에서 뭐합니까? 내가 나라면 하나님은 뭐가 되요? ‘you’가 되는거에요. ‘너’가 되는거에요.
그러면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그런 관계 형성되어 있으니까 그다음에 내가 주는 것 나가 주는 것 너 하나님 너가 먹고 나한테 뭘 줘라? 너는 나에게 받아먹었으니까 나한테 내가 필요한 것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제사냐? 가인의 제사잖아요. 그게 가인의 제사 맞지요? 가인이 드릴 때 마음가짐이 취지가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 제사했습니까?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제사드렸습니까? 말씀해보세요.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했지요. 자기가 죽을려고 한게 아니에요. 자기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하는겁니다. 자기 가치를 보존하는 것은 나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고 나의 가치가 보존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계속 나에게 ‘너’의 존재로만 계속 있어야 돼요. 내가 이름 부를 때 신은 나에게 의미가 되어야 된다고요. 하나님 여호와 예수 부를 때 예수는 내가 불러줌으로서 예수는 비로소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그 자리에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죄입니다. 그게 죄에요 그게.
왜? 주님께서는 혼돈에서 혼돈세계에서 질서세계로 들어왔기 때문에. 질서세계에서 질서세계 아닙니다. 혼돈세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로 포착될 수 없고 포획할 수 없고 다룰 수 없는 세계에 계시다가 질서세계에 들어온거에요. 인간은 ‘질서세계 있음’ 이 자체 죄라는 생각을 감히 못하는거에요. 상상도 못한 겁니다. 우째 그럴 수가 있어?
예수님께서 인간세계에서 이 질서세계에서 배제되었지요? 배제된다는 것은 배제될 때 그냥 배제된게 아닙니다. 여름철에 찐득찐득한 아주 더운 여름철에 찐득한 물엿을 한 개 있는데 그걸 형제간 둘이 있는데 그걸 나눠준다고 해봅시다. 엄마가 아주 용을 쓰지요. 여름철에 겨울철 아니고 딱딱한 겨울철 아니고 여름철에. 물엿 하나가 이게 인절미처럼 이게 잘 안 떨어지지요. 끈적끈적하니 잘 안 떨어지잖아요.
배제란 기존의 규칙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자, 무슨 뜻이냐 하면은 예수님은 인간세계에서 배제되었지요? 배제되었는데 물엿과 같아요. 기존의 규칙 어떤 규칙? 인간의 질서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뽑아낸거에요. 유지하면서. 따로따로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요한복음 몇 장인가? 15장인가 15장 22절에 보면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 오지 아니하면 그들은 죄라는 것을 그들이 전체가 죄라는 것을 몰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나와 너의 중심이기 때문에 죄를 누가 판정하느냐 하면은 죄는 누가 판정합니까? 판사가 판정합니까? 양승태 대법원장 그 사람이 판정해요? 죄는 누가 판정해요? 죄는 아무도 판정하지 않고 본인만이 판정합니다. 모든 인간이.
시어머니가 김장한다는데 며느리가 연락받고도 어떻게 설악산 놀러 가느냐 친구하고. 김장 하는거 힘든줄 알면서도 라고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시어머니가 내리는 거에요. 전화해가지고 “야야 너 김장한다는 소리 듣고 너 지금 어딘데?” “어머니 설악산입니다.” “설악산 가서 김장하나? 왜 거기 가있니?” “친구한고 놀러왔습니다.” “너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할래?” “이거는 뭐 3년 전부터 곗돈 모아가지고 설악산 가는게 3년전부터 곗돈 모을 일은 없겠습니다만은 이거는 못 빠집니다.”
자, 보세요. 둘의 죄의 판정 기준이 다르지요? “어머니는 내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그렇게 판단하지 마세요.” 이렇게 나온다고요. “아 세대차이” 이러고 있다고요. 다시 묻습니다. 죄의 판정은 누가 합니까? 본인이 최종결론은 본인이 내리는거에요 본인이. 최종 판단은 자기가 한다니까요. 그 술 먹고 와서 자기 아내 때리고 자식들 애먹인 남자가 폭행하다가 이혼한 아내를 죽였어요. 그래서 기자가 뭐 할 말 없습니까? 하니까 국민들에게 죄송합니다. 그럼 죽은 가족에게는? 말 안 해요. 국민들에게는 죄송하지만 피해자 당사자에게는 사과의 말 없어요. 왜 그래요? 내 마음이다 그래. 그건 내 마음이거든요. 저거는 쓰레기야 인간도 아니야. 그럼 저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남의 말이라고 함부로 하지 말아라. 내 사정 내가 알고 있다는 겁니다.
도대체 나는 교회에서 소위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성화론 이야기하면서 예수 믿고 이제는 죄 용서 받았으니까 죄 짓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할 때에 그 죄가 기준이 뭔지를 모르겠어요 도대체. 그 죄냐 아니냐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이 전두환이가 내린다니까 전두환이가. “본인은~~~~~” 맨날 본인이래 “본인은~~~~.” “본인은 오늘 착합니다. 본인은 오늘 성화되었습니다. 본인은 오늘 성령으로 했습니다. 본인은~~~.”
‘I’ 가 있고 ‘you’ 가 있다는 자체가 죄인줄 모르고 내가 했데 내가. 대부분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봐요. 관람석에 앉아서 이렇게 쳐다봅니다. 자세가 이래요. 건방진 자세로 이렇게. 아이구 유대인들 우리를 구원하신 좋으신 메시아를 저렇게 무지몽매해가지고 성령도 못 받아서 저렇게 모질게 십자가 지라고 저렇게 악독하니까 너희들은 유럽 역사를 통해서 죽어야 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0만 죽어도 싸! 예수님을 죽이다니. 이러고 있다고요. 관람석에 앉아 가지고. 관람석 이 세상에 관람석이 어디 있어요. 주의 일에 어디 있습니까?
지금 빌라도가 누가 만났어요? 빌라도가 예수님 만났지요. 예수님 지금 우리를 빌라도라 여기고 있어요 지금. 빌라도는 우리의 대변자요 대표자에요. 얼마나 우리는 예수님을 ‘you’ 당신이라고 불렀습니까? 당신이라는 것은 극존칭이라고. 극존칭이고 뭐고 간에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 질서차원에서 보는게 아니에요.
혼돈 입장에서 혼돈의 관점, 질서체제 오기전의 관점과 이미 빠져나와서 질서체제에서 빠져나와서 배제당했잖아요. 배제당했을 때에 주님께서 질서체제한테 버림받은거에요. 버림받은 안목에서 우리를 볼 때 우리는 뭐냐? ‘죄’ 그 자체에요 ‘죄’ 그 자체. 악마는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악마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it’. 악마는 그것일 뿐이에요 악마는. 바로 우리가 ‘it’이에요. 우리가 악마라니까. 우리가 악마에요.
지금 주님은 죄를 끄집어낸다는 말은 인간 속에 있으면서도 인간들은 파악하지 못한 그 ‘it’, 그것, 그것을 악마를, 어떻게 빌라도를 만나가지고 얼마나 악마가 실제적인 존재인가를 실제적으로 활동하는 존재인가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 악마가 다루는 방법은 뭐냐 하면 군중 또는 군중심리에요. 촛불집회다. 군중심리에요 군중심리. 더불어 살기죠 더불어 살기.
14절에 보면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빌라도가 너희 왕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빌라도가 소위 그 당시의 총독으로서 관용을 베풀려고 하는거에요. 관용. 그런데 관용을 베푼다고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되게 선해보이는 느낌들지 않습니까? 실컷 집어넣고 크리스마스나 부처님 왔다갔던 날 그런날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줄줄이 전부다 뭐합니까? 사면 많이 하지요? 특히 대선 앞두고 사면 많이 하잖아요.
음주운전 단속한다고 그렇게 쭉 들어 가놓고 음주운전 전부 다 벌점 다 감해주고 졸지에 다 또 전과기록 음주운전기록 없어지지요. 왜 그런 짓을 하는거에요? 그게 뭐냐? 권력자가 스스로 유도리라고 해요. 스스로 순발력을 해가지고 법 말고 초법적인 행세를 하는거에요. 초법적인 관용이라는 것. 그렇게 해서 오히려 법에서 벗어나는게 아니고 본인만큼은 나니까 본인만큼은 법 위에 법이 그 위치에 있음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알려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떤 모임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게 좋다고 하잖아요. 좋은게 좋지 그래. 좋은게 좋다 또는 노예같은거 하면 노예 참 오랜만에 한다만은 노예 같으면 ‘은혜’라고 합시다. 은혜로 합시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관용을 베풀어주소서’ 이런 뜻이에요. 관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공통적인 것에 있어서 협상되지 않고 다툼이 일어날 소지가 있을 때에 관용자가 갑자기 초법적인 존재가 되요. 관용하는 사람은 법에 저촉을 안 받는 뛰어넘는 사람이 되어서 관용을 베풀어 줘버리면 관용을 받은 자가 생기고 그러면 관용한 자와 관용 받은 사람의 주종 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렇게해서 통치하는거에요.
이게 인간은 법대로 정치한다고 하는데 정치는 법대로 정치하는게 아니에요. 법 플러스 관용으로 하는 겁니다. 법 자체가 이미 뭐가 안에 들어있느냐 하면 초법적인 요소가 들어 있어요. 법 자체가. 그런데 법이라는 것은 결국은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 하면은 사회 정의를 위해서 있는 거거든요. 그러면 사회 정의보다 더 뛰어난 정의감. 사회 정의보다 더 뛰어난 정의감을 쥐고 있는 초법적인 존재의 발생. 그것이 인류가 끝날 때 까지 계속됩니다. 인간 역사가 끝날 때 까지 그게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나옵니다.
2장 3절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되어 있지요?
자,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마지막 때에 여러분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데 이렇게 자칭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했잖아요. 이렇게 하나님이라고 행세할 때에 그것을 누가 그것을 시인하고 누가 그것을 동조를 하겠어요? 어떻게 동조합니까? 어떤 정치가가 나는 신이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그걸 호응해줘요? 호응 안해줘요? 호응 안해주지요.
그럼 이 사람은 결국 이렇게 한다는 말은 그 밑받침에 누가 호응해줬다? 군중들이 호응해준거에요. 인간의 군중들이 바로 초법이에요. 지금 성경에서는 하나님처럼 행세한다고 하지만 군중들이 원하는 바는 바로 이런 영웅이 등장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등장해도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데살로니가후서에 있는 적그리스도인 것을 인간의 힘으로 파악될까요? 안될까요? 파악할 수가 없어요. 왜? 본인들이 원했던 바이기 때문에. 본인들이 원했던거에요.
이런 예가 어디 있느냐 교회 한번 보세요 교회. 그 교회에 작은 교회 큰 교회 관계없어요. 그 교회에 어떤 자기가 은혜 주장하고 아까 관용 이야기 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를 주장할 때에 그게 적그리스도 악마의 모습이라는 것을 누가 감히 상상하겠습니까. 마치 메시아 같지요. 주의 종 같지요. 어떤 사람이 저보고 그래요. 목사님 보면 사도 바울 같다고. 아이고 참 사람 몰라도 너무...천국 가서 사도 바울 만나면 뺨 맞을지도.
모든 힘은 군중에 있어요. 빌라도도 마찬가지고. 군중 한 사람 한 사람은 전부 다 자기가 악마에요. 악마의 최고의 상태입니다. 왜? ‘나’이기 때문에. ‘나’, 나, 자기 빼놓고 전부 ‘너’에요. 지금 형편상 그냥 오냐오냐 가족이나 형제니 하고 있지. 마지막 외마디 딱 외치고싶은 것은 “저리 가”에요. 귀찮아. 사람이 나이 좀 들어 결혼 생활 한 옛날처럼 20년 30년 하면요 각 방 씁니다. 각 방 쓸 때 뭐라고 합니까? “저리 가.”
그런데 그 숫자가 점점 더 줄어들어요. 결혼한지 2년 만에 “저리 가” 돼요. 왜 가구 수 아파트 수가 왜 그리 늘어납니까? 방 많은걸 원해서. 왜? 각 방 써야되니까. 이게 개인적 사견일까요? ‘저리 가라’에요 “저리가! 귀찮아 죽겠어.” 옛날에는 여름에만 그랬는데 지금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저리 가’에요.
데살로니가후서 2장 6절에 적그리스도 이거 찾는다고 소위 세대주의니 그쪽에 3년 환란 후 환란 그쪽에서 이걸 찾을려고 지명수배를 내렸어. 지명수배를. 김정은인가? 교황입니까? 너야 너!!!너!!너! 네 교회에서 네가 바로 이 짓하고 있어 네 교회에서. 아까 동영상 유투브 할 때 두 번째 동영상 제목이 목사의 실수였죠. ‘목사의 실수’.
내용이 뭐냐 하면 목사가 목회하면서 뭘 기대하느냐 하면은 성과를 기대해요. 성과를. 계속 성과를 기대하는 거에요. 마치 헬스클럽 트레이너 그 사람이 고객들 1회 3만원 10회에 30만원 아까 계단 올 때 못 봤어요? 종아리살 빼는데 30만원 포스터 못 봤습니까? 밤이 어두워서 못 봤는가. 계속 관찰하는거에요. 당신 돈낸거 공짜 아니라고. 성과 있다고. 농사짓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전부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들 SKY에 보내려고 하면 연세대 고대 서울대 보내려고 하면 계속해서 성과 성과 하잖아요. 코디한테 붙여가지고 돈 있는 사람 이야기지만.
모든 하나의 인간은요 자기 하는 일이 제대로 보람있는지를 계속 주시하는 거에요. 아마 그거 주시하다가 평생을 다 보낼걸요. 아내는 남편을 쥐고 자기 원대로 되는지를 성과 볼려고 하고 남편은 도망치기만 바쁘고. 그래서 아내는 남편의 위치추적까지 다 조사를 하고 세상에 부부 완벽한 타인입니다. 완벽한 타인이에요. 타인도 그런 타인이 없어요. 가장 가까운 이웃이 아니고 가까운 타인이 부부에요. 그럼 왜 사느냐?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서로의 약점을. 이거는 냉전상태 서로의 핵폭탄을 다 갖고 있으면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하다가 전처럼 시간 넘어가는데 또. 인간은 ‘저리 가’입니다. 강아지 귀엽지요? 그러나 똥 싸면 ‘저리 가’ 되잖아요. 똑같은거에요.
악마의 집합적인 군중이고 군중은 자기 손으로 군중 자체가 초법적인 존재인데 그 초법적인 존재는 스스로 이미 그들은 자기를 구원될 자라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유대인뿐만 아니고 모든 민족이 누가 뭐래도 나만큼은 천국갈거야. 나만큼은 천국갈거야 라고 자부합니다. 따라서 이 ‘나’, 나를 천국에 넣어줄 메시아 너가 나의 눈에 띄게 되는 나, 내가 판단할 때 죄냐 의냐 내가 판단하니까. 내가 판단할 때에 필요한 메시아라고 본다면 아낌없이 나는 당신을 메시아로 존경할 마음이 되어있다가 마음에 사전 준비되어 있어요.
그게 무슨 체제라고 했습니까? 그게 나름대로의 무슨 체제? ‘질서체제’에요. 질서가 문제입니다. 질서가 문제에요. 질서가 있으니까 거기는 법으로 묶어놨고 그 법이 악마는 그 법에서 스물스물 빠져나가요. 마치 향수처럼. 스물스물 자꾸 빠져나가요. 빠져나와서 오히려 빠져나오는 죄 다시 말해서 악마가 우리의 질서를 충분히 이용해먹습니다.
내가 악마가 인간에게 다루는 방법은 뭐냐 하면 나라고 주장하는 나를 내가 인정해줄게. 그리고 네가 너라고 하는 너를 인정해줄게. 철저하게 너는 나답게 살아가고 너 외에 사람들은 철저하게 너와 나를 위한 너 자신을 위한 ‘you’라고 그렇게 철저하게 살도록 격려해줄게. 그렇게 되는 조건하에 계속해서 악마는 인간에게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구원자가 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인간의 말을 사용하지요. 인간의 말을 사용하면서 이상해 같은 아랍말인데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요 이게. 분명히 예수님 본인 입장에서는 그게 맞는 말인데 그 예수님 본인 예수님 ‘I’ 속에 어떤 인간도 ‘you’가 되지를 않아요. 주님 앞에 ‘you’가 돼야 되는데 ‘you’가 안되고 전부다 ‘it’이 돼요. 죄가 돼요 인간에게 죄.
‘you’가 된 사람 있지요. 그건 강도. 여기 나오는 강도나 세리와 창기 그 사람들이 자기를 ’you’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you’라고 하지 않고 자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개라고 해요 개. 맞습니다 내가 개입니다 개. 멍멍멍. 제가 주님 앞에 개입니다. 나는 인간이 아니올시다. 개의 특징은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했는가 어디 대구강의에서 했는가? 아 대구 강의에서 했구나.
개의 특징은 개인 자기 나름대로의 과거나 추억이나 역사를 만들 자격이 없다고 했지요. 대구 강의에서. 사이트 고장나가지고 잘 되지도 않겠지만. 이 뭐냐 하면 그동안 사료를 누가 줬어요? 주인이 줬잖아요. 그러면 개 이만큼 크게 된 건 누구 역사입니까? 주인의 역사지 개 나름대로의 아 그때 사료 먹는다고 애먹었어. 오늘은 맑은 날 오늘도 주인이 준 사료를 먹는데 이빨이 아파서. 이걸 쓸 의미가 없다니까 이 의미가. 주인이 개를 키웠지 개가 주인을 이용해서 자기가 살아남은게 아니잖아요. 그 개가 우리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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