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나와 너 1812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2. 14. 17:41
2018-12-04 23:54:38조회 : 266         
나와 너 181204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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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175.♡.96.96)18-12-14 15:40 
강남-요한복음 19장 10절(나와 너)181204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9장 10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 


예수님께서 빌라도와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상대해 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오늘날 주님이 우리를 상대해 주는 것과 똑같은 취지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만날 때 빌라도는 예수님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은 빌라도 하고 예수님이 만납니다. 만날 필요도 없는데 만나요.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은 유대인들이잖아요. 거기에 제 3자인 이방인인 여기 빌라도가 끼어들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빌라도가 끼어듭니다. 


줄곧 예수님께서 공생애 가운데 누구한테 비난받고 누구한테 배척을 당합니까? 어떻게 이방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이죠. 그러면 이 문제를 유대인과 예수님 사이로 이렇게 마감이 되어야 되는데 거기에 이방인 빌라도가 여기에 끼어들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빌라도는 그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은 세상 권세적입니다. 세상 권세적이니까 이거는 뭐 그냥 세속, 정치성 또는 정치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대할 때에 메시아도 아닌 자가 왜 메시아로 자칭하느냐 때문에 화가 난겁니다. 메시아는 두 가지 기능이 있지요. 메시아는 하나는 구원자 기능이 있고 구원자로서 구원할 사람 빼놓고 나머지는 뭘 하느냐 하면 나머지는 심판자 역할을 하는겁니다. 이 구원자, 심판, 이 기능을 하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이 메시아를 유대인들이 고대한거에요.  


그럼 유대인들이 고대할 때 그 메시아가 자신들에게는 심판주가 되겠습니까? 구원주가 되겠습니까? 구원자가 되겠지요. 자기는 구원자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본인이 구원될 수 있다는 그 확신 때문에 본인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그런 구원자를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하는 것이 평소에 자기들이 하는 생각한 그 구원자에 부합되지 않는다는거에요. 일치되지 않는 겁니다. 


구원자에 일치되지 않는다는 말은 곧 무엇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말이냐 하면 심판주에게도 일치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갇혀있기 때문에. 당신은 우리의 구원자 될 수 없어요 라는 말이나 당신은 이방민족을 심판할 수 있는 자격자가 못 됩니다 라고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에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구원자 심판자로 할 때에 세속, 정치성 또는 정치력으로 하는게 아니죠. 이들의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율법’이 되는 겁니다. 


율법으로 구원자 심판주를 찾고 있었는데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제거 못하니까 이 율법에다가 뭐를 가져갔느냐 하면은 세속 정치력을 결합을 시켰습니다. 자기들이 돌로 치면 안 될까요? 그 유대인들이 사도바울 돌로 치듯이 왜 이거는 예수님을 돌로 쳐서 자기 율법 있잖아요 율법에. 율법에 율법을 어긴 자는 돌로 치라면 돌로 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을 돌로 안 쳤을까요? 너무 귀찮은 코스를 왜 밟는가 이 말입니다. 


오늘 뒤에 나옵니다만 자기들은 그만한 형편이 못 되고 있다는 거에요. 사람을 자기가 죽이고 싶지요. 누가 없으면? 빌라도 로마의 통치가 없으면 세속 정치성이 없으면 자기들끼리 자체라면 돌로 칠 수가 있지요. 그런데 만약에 돌로 치고 난 뒤에 자기는 누구한테 추궁 당하느냐 하면은 세속 정치권력에 추궁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통치하에 있기 때문에 완전히 로마법을 개무시했다는 평을 받아버리면 그들의 하는 조치가 로마법에 의해서 자기들 민족이 위태로울 수가 있어요. 그래서 결과는 동일한 결과를 얻되 이왕 그렇게 자기가 로마의 통치를 받을 것 같으면 로마 통치자의 그걸 매체로 해서 자기가 원하고자 하는 결과를 얻어내면 로마한테도 별 하자가 없는 것이 되고 로마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것도 되고 그 다음에 자기 소위의 목적도 이룰 수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몰아간겁니다. 예수님이 또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또 그렇게 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만날 때는 그런 차원에서 만난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만날 때는 오늘 읽었던 본문의 취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11절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네가 거기 11절에 보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지금 빌라도에게 무슨 권세가 없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네게 넘겨둘 권세가 있다? 없다? 권세가 없는거에요. 빌라도는 자기 뜻대로 나를 유대인에게 넘겨줄 권세는 없는거에요. 권세가 없는데 빌라도는 뭐라고 주장했느냐 하면은 나한테는 그 앞에 10절에 보면 나한테는 뭐가 있다? 권세가 있다는거에요. 권세가 있다. 나에게는 권세가 있다는 겁니다. 


권세가 없는데 권세가 있다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그 죄라는 것은 어디서 발생되느냐 하면은 바로 이 권세에서 발생되는거에요. 권세에서. 죄라는게. 개인적으로 도덕적으로 그게 죄가 아니고 권세에서 네가 소속감에서 오는거에요. 특정한 권세 자체가 죄가 된다면 거기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은 전부다 자동적으로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바보가 그런 권세에 매여 있는걸 좋아하겠느냐 하는데 어느 바보가 아닙니다 이게 지금. 


19장 15절에 보면 누가 한번 읽어 볼까요.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됐습니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다시 말해서 그런 권세를 개인적으로 자유를 누리면서 나는 어떤 권세도 메이지 않아. 나는 자유로워 라고 외치고 싶지만 이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나 빌라도가 권세를 없이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소속감에 있는 것을 도리어 안정적으로 원하고 있는 겁니다. 소속감 있는 것을. 


그래서 이 군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군중이라는 개념이 달리 말하면 공동체가 되겠지요. 공동체, 군중. 이 군중이 뭐냐 하면은 뭐를 노리느냐 하면은 권세에요. 군중 자체가 권세지요. 이걸 저는 ‘초법’이라고 합니다. 법을 초월하는거예요. 어젠가 우리나라 로켓트 올라갔지요? 로켓트 쏘아 올리면 로켓트가 뭘 뚫고 갑니까? 대기를 뚫고 올라가지요. 대기라는 것을 초월하지요. 


이 군중들의 속성들이 뭐냐 하면은 각자 제각기 각자 초법적인 속력을 갖고 있어요. 거기 구성인들이. 저와 여러분들 말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이상하게 법을 언급하고 뭐 세상을 언급하지만 솔직하게 따져서 이야기 하자면 초법적인 존재이고 싶어합니다. 그런 성향을 갖고 있어요. 초법적인 존재. 인간이 근원적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외침은 뭐냐? 인간이 외칠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또 솔직보다 솔직 제곱 곱하기 솔직 가장 솔직한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은 “저리 가”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은 이거에요. 저리 가. 혼자 있고 싶다. 창세기 3장 이야기입니다. 혼자있고 싶은 거에요. 유치원에 가면 유치원 선생들 있지요. 애들을 잘 돌봅니다. 어린이집하고 유치원은 약간 급이 달라요. 유치원은 4년 나왔고 어린이집은 연수원 나왔거든. 학원 다녔거든요. 배우는게 달라요. 다른데. 그 애들은 배울 때 얼마나 철저하게 몬테소리부터 해서 얼마나 많이 배우느냐 하면은 애들을 천사처럼 다루는걸 배울거에요. 


그런데 퇴근 시간 됐는데 애가 안가고 있다. 칭얼댄다. 뭐라고 합니까? 낮에 태도하고 다르죠. 저리 가. 빨리 너희 엄마한테 가. 귀찮아죽겠어. 연세 많은 부모한테 자식들이 효도한답시고 손녀 손자 데리고 옵니다. 반가워하지요. 보고싶었네 뭐 하지요. 저녁 설거지하고 이제 부모 마음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빨리 너희 집 가라. 올 때 반갑고 갈 때는 더 반갑잖아요. 곱배기로. 나도 밤에는 숨 좀 쉬자. 


자식에 대해서 홀로 있는 시아버지나 시어머니 홀로 돌보는 것은 하지요. 그러나 부부 사이에 시아버지나 시어머니 이름으로 또는 장인 장모 이름으로 누가 끼어들게 되면 정말 내 인생 아닌거 같아요. 이거는 늘 긴장된 모습으로 지낸다는 것이 너무 견디기 힘든 겁니다. 언제까지 견뎌야 되는가? 돌아가실 때까지 견뎌야지요. 그러면 대책은 있어요. 뭐냐 하면 요양원 알아보는 겁니다. 핑계대고 대충 보내지요. 좋게 좋게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하는 것도 없이 효도 소리만 들으려하는 바깥에 일하는 남편은 “너 우리 어머니 모시기 그렇게 싫어?” 이렇게 나와요. 그리고 그 이야기 나오면서 곧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은 이집 살 때 엄마가 얼마 보태줬냐? 대출 누구 이름으로 했냐 그 이야기 반드시 나옵니다. 형제들이 엄마 모신다는 조건하에 2억 대출 그냥 2억 대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받았잖아. 2억값을 해야지. 1년 모시고 요양원 보내면 형제들이 돈 개워내라고 얼마나 닦달내겠느냐. 


얼마나 손자 손녀 잘 보느냐 이렇게 남편들이 이제 뭣도 모르고 여자의 마음도 모르고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여자가 하는 말이 당신 말 다 맞는데 내가 숨을 못 쉬겠다 숨을 도대체. 사람 숨 좀 쉬자 숨 좀. 그럼 남편이 하는 이야기가 어머님이 너 사랑하고 너 어머니 좋아한다며 마음껏 숨 쉬어라. 공기 없냐? 하거든요. 공기 있다고 숨 쉬는게 아니에요. 


이번에 아가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은 천국은 여성의 세계다. 천국은 여성들만 사는 세계. 천국은. 오늘도 비슷한 이야기 나올거에요. 남성은 못갑니다. 한명도 못가요. 왜? 모두가 신부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부가 되거든요. 여성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가는게 아니고 여성처럼 치인 사람, 당한 사람, 여성이란 이름으로 몹쓸 일을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 그래서 이거는 생물학적으로 남성 여성이 아니라 남성성 여성성, 천국은 여성성의 세계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관심있는 것은 죄에요. 죄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초법적으로 만들어지느냐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여기서 이제 강의 내용이 어려워지는 이유가 딴게 어려워지는게 아니고 빌라도 있지요. 빌라도하고 누구하고 만났다 했습니까? 예수님 만났지요. 거기서 죄를 끄집어낸다 하지요. 죄의 성질을. 죄의 초법적인 성질을 이야기할건데. 


여기서 이것 자체는 쉬워 보이지만 이게 문제가 어려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나’의 위치가 어디 있느냐 하는 거에요. 나의 위치. 여기에 뭐 중계방송 한번 할까요? 우리는 여기에 따로 이렇게 관람석에 앉아서 이걸 생각할까요? 아니지요. 우리가 어딘가 섞여야 된다 이 말이죠. 우리가 섞이는 장소가 뭐냐 하면 군중이죠. 그럼 군중과 빌라도의 관계가 뭐냐 하면은 군중의 대변자가 빌라도에요. 우리의 군중들의 의사를 너는 대변만 하면 돼. 


쉽게 말해서 군중들의 입장에서 빌라도는 시시하게 보는거에요. 네가 우리의 총독이나 총독자가 아니라 너보고 부탁하는 내가 사실은 초월적 존재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빌라도에게 자꾸 강요하는거에요. 죽이라고. 예수님을 빨리 사형시키라고 요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굴 보고 죄라고 했습니까? 빌라도 보고 죄라고 이야기 했지요. 빌라도 보고. 그러면 예수님과 빌라도 둘을 축약해서 둘 사이에 왜 의사가 서로 의사가 교환이 안 맞게 되는가? 서로 의견 타진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뭐냐를 조사해봐야 되겠지요.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자기의 피고 또는 죄인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영어로 ‘I’ 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뭐가 되겠어요? ‘you’가 되겠지요. 빌라도가 나라면 예수님은 너가 되는 겁니다. 10절을 한번 봅시다. 10절을 보게 되면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내가 뭐를 “놓을 권세가 있다.” 내가 그다음에 나와 너의 관계로 빌라도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와 너의 관계로.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 보고 죄가 크다고 했어요. 예수님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하고 빌라도는 뭐냐 하면은 ‘it’이 되요. ‘그것’이 되요. 인칭 대명사를 빠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인칭이라고 하는 것은 초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초법이 되지 않은 상태가 무슨 상태냐 하면은 이 질서상태거든요. 인간의 질서는 인간 대 인간의 질서는 형식적으로나 언어로 되어 있고 언어를 응축시키면 뭐가 되느냐 하면 법이 되요. 


예를 들어서 회사 직원이 대리가 부장 앞에서 이거 따옴 오렌지 참 맛있어요. 이렇게 하는 이거는 아부하는 거죠. 과장님 주신거 참 맛있어요. 이거는 아부하는 거에요. 법적인 지시가 아니에요. 그런데 부장이 들고 와서 대리 앞에서 아이고 쥬스 맛있는데 이 말은 뭐냐 또 사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그 지위, 그 위치가 거기서 새로운 법을 양상시킵니다. 법적 관계로서 법적 관계를 새롭게 재정립해나가지요. 


시어머니가 전화해서 며느리보고 우리집 김치 잘됐다. 전화를 했어요. ‘아 어머니 김치 하셨는데 김치가 맛있게 되었구나.’ 이렇게 알아들으면 그 며느리 바보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그런 뜻이 아니고 김치 가지러오라 이 말이에요. 너희들 두집 세집 너희들 형제 김치 다 해놨으니까 빨리 김장 하지말고 우리집 김치 가져가라 이 말이에요. 


그러면 가져가면 되지. 가지러갈 때 그냥 가면 안되지요. 봉투에 돈 넣어서 간만에 가는데 눈치가 그렇게 없어 눈치가. 그런 기회 아니면 언제 며느리 보겠습니까? 어디 보고싶어서 보는게 아니에요. 나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한시도 잊지 말라는거에요. 너희들끼리 재미있게 하하호호 살지 말고 늙은 부모 이렇게 김장하면서 손 시려워가면서 기껏 하면서 김장하면 손 얼마나 시려운지 장갑 껴도 시려워. 


이게 무슨 뜻이에요? 안방에 보일러 넣으라 이 말입니다. 안방에 보일러 넣어달라 이 말이지 그냥 와서 김치 달랑 먹지 말고 그거는 정말 철딱서니 없는 신세대 며느리 같으면 “어머니 김치 맛있어요.” 또 김치 말고 또 가져갈거 없는가 고대 유물같은거 없는가 또 찾아가지고 명품진품 나오는거 있잖아요. 부모꺼는 다 내꺼니까 무조건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참 친정갈 때 그러는데 시댁가서는 그러지 못하죠. 


인간의 관계는 빌라도가 죄라고 언급을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모든 중심을 ‘나’로 보고 나머지 모든 인간을 ‘너’로 보는 이 구조가 죄의 구조입니다. 내가 너에게 꽃이라 했을 때 비로소 너는 나에게 나를 위한 너는 하나의 의미가 되는거에요. 나에 대해서. 


예수님이 빌라도 입장에서 볼 때는 빌라도는 ‘나’가 되고 예수님은 ‘너’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은 인간 세상에 질서라는 현실체제입니다. 현실체제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질서체제.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지상에서의 나와 너의 관계에서 배재된 상태, 거기에 섞이지 않은 상태로 예수님 계셨지요. 그때는 예수님 아니고 성자에요 성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기에 계셨잖아요. 너 나의 체제에 속하지 아니하셨을 때. 


그때 봤을 때 그거는 뭐냐 하면은 하나의 ‘it’이 되요. 그냥 그것이에요. ‘멸망의 대상’이다 말이죠. 이미 심판주로서 행세한거에요 하늘나라에서.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구원될 대상이 있을 때는 구원자가 되는 겁니다. 그냥 심판주에요. 이게 창세기 3장에 보면 두루 도는 화염검에서 아무도 그것을 돌파 못하도록. 그걸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는 역류하지 못하도록 했지요. 주일 낮 설교에서 역류되지 않도록. 


아무도 돌파 못하도록 이렇게. 여러분들 생각에는 생명나무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불로서 빙빙 둘러놨다 했지요. 여러분 발상을 바꿔서 해보세요. 생명나무를 보호하려고 생각할 수도 맞는 말이지만 세상을 완전히 불로서 포위해가지고 작살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이잖아요. 완전히 포위된거에요. 이 세상은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밖에 나가면 불 밖으로 못나가지요. 그게 지옥이라고 보면 되요 지옥이라고. 지옥은 누굴 조질라고 지옥 만들어 놨느냐 하면은 악마를 조질려고 한거에요. 


여기 인간에게는 악마라고 하는 것은 없는 존재입니다. 악마는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질서 있는 세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나와 눈에 보이는 너, 나 너, 눈에 보이는 나와 너의 관계로서만 질서 세계가 움직이기 때문에 그래요. 눈에 보이는. 그래도 이 세상에서는 그래도 마귀 이야기하고 하나님 이야기하잖아요 하지만 그 이 세상 질서있는 세상에서 말하는 보이지않는 세계, 그 초월적인 세계는 전부다 뭐냐 하면은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고안된거에요. 방안으로써.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인간세상에서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 인간세상에서 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죠. 하나님을 신이라고 하잖아요. 신인데 신이라는 것은 이미 뭐로 주어졌습니까? 신이라는 그 자체가 신의 이름 또는 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언어가 동원됐잖아요. 하나님 할 때 어! 이렇게 합니까? 그냥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라고 불러줌으로써 이미 언어를 사용했다 이 말이죠. 


그 언어는 무슨 관계? 질서관계를 유지하면서 언어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질서관계는 뭡니까? ‘나’가 있어야 되고 나 외에 ‘너’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 그런 용도로서 단어와 개념과 언어와 법들이 통용된 겁니다. 그럼 하나님은 인간세계에서 뭐합니까? 내가 나라면 하나님은 뭐가 되요? ‘you’가 되는거에요. ‘너’가 되는거에요. 


그러면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그런 관계 형성되어 있으니까 그다음에 내가 주는 것 나가 주는 것 너 하나님 너가 먹고 나한테 뭘 줘라? 너는 나에게 받아먹었으니까 나한테 내가 필요한 것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제사냐? 가인의 제사잖아요. 그게 가인의 제사 맞지요? 가인이 드릴 때 마음가짐이 취지가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 제사했습니까?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제사드렸습니까? 말씀해보세요.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했지요. 자기가 죽을려고 한게 아니에요. 자기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하는겁니다. 자기 가치를 보존하는 것은 나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고 나의 가치가 보존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계속 나에게 ‘너’의 존재로만 계속 있어야 돼요. 내가 이름 부를 때 신은 나에게 의미가 되어야 된다고요. 하나님 여호와 예수 부를 때 예수는 내가 불러줌으로서 예수는 비로소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그 자리에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죄입니다. 그게 죄에요 그게. 


왜? 주님께서는 혼돈에서 혼돈세계에서 질서세계로 들어왔기 때문에. 질서세계에서 질서세계 아닙니다. 혼돈세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로 포착될 수 없고 포획할 수 없고 다룰 수 없는 세계에 계시다가 질서세계에 들어온거에요. 인간은 ‘질서세계 있음’ 이 자체 죄라는 생각을 감히 못하는거에요. 상상도 못한 겁니다. 우째 그럴 수가 있어? 


예수님께서 인간세계에서 이 질서세계에서 배제되었지요? 배제된다는 것은 배제될 때 그냥 배제된게 아닙니다. 여름철에 찐득찐득한 아주 더운 여름철에 찐득한 물엿을 한 개 있는데 그걸 형제간 둘이 있는데 그걸 나눠준다고 해봅시다. 엄마가 아주 용을 쓰지요. 여름철에 겨울철 아니고 딱딱한 겨울철 아니고 여름철에. 물엿 하나가 이게 인절미처럼 이게 잘 안 떨어지지요. 끈적끈적하니 잘 안 떨어지잖아요. 


배제란 기존의 규칙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자, 무슨 뜻이냐 하면은 예수님은 인간세계에서 배제되었지요? 배제되었는데 물엿과 같아요. 기존의 규칙 어떤 규칙? 인간의 질서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뽑아낸거에요. 유지하면서. 따로따로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요한복음 몇 장인가? 15장인가 15장 22절에 보면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 오지 아니하면 그들은 죄라는 것을 그들이 전체가 죄라는 것을 몰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나와 너의 중심이기 때문에 죄를 누가 판정하느냐 하면은 죄는 누가 판정합니까? 판사가 판정합니까? 양승태 대법원장 그 사람이 판정해요? 죄는 누가 판정해요? 죄는 아무도 판정하지 않고 본인만이 판정합니다. 모든 인간이. 


시어머니가 김장한다는데 며느리가 연락받고도 어떻게 설악산 놀러 가느냐 친구하고. 김장 하는거 힘든줄 알면서도 라고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시어머니가 내리는 거에요. 전화해가지고 “야야 너 김장한다는 소리 듣고 너 지금 어딘데?” “어머니 설악산입니다.” “설악산 가서 김장하나? 왜 거기 가있니?” “친구한고 놀러왔습니다.” “너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할래?” “이거는 뭐 3년 전부터 곗돈 모아가지고 설악산 가는게 3년전부터 곗돈 모을 일은 없겠습니다만은 이거는 못 빠집니다.” 


자, 보세요. 둘의 죄의 판정 기준이 다르지요? “어머니는 내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그렇게 판단하지 마세요.” 이렇게 나온다고요. “아 세대차이” 이러고 있다고요. 다시 묻습니다. 죄의 판정은 누가 합니까? 본인이 최종결론은 본인이 내리는거에요 본인이. 최종 판단은 자기가 한다니까요. 그 술 먹고 와서 자기 아내 때리고 자식들 애먹인 남자가 폭행하다가 이혼한 아내를 죽였어요. 그래서 기자가 뭐 할 말 없습니까? 하니까 국민들에게 죄송합니다. 그럼 죽은 가족에게는? 말 안 해요. 국민들에게는 죄송하지만 피해자 당사자에게는 사과의 말 없어요. 왜 그래요? 내 마음이다 그래. 그건 내 마음이거든요. 저거는 쓰레기야 인간도 아니야. 그럼 저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남의 말이라고 함부로 하지 말아라. 내 사정 내가 알고 있다는 겁니다. 


도대체 나는 교회에서 소위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성화론 이야기하면서 예수 믿고 이제는 죄 용서 받았으니까 죄 짓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할 때에 그 죄가 기준이 뭔지를 모르겠어요 도대체. 그 죄냐 아니냐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이 전두환이가 내린다니까 전두환이가. “본인은~~~~~” 맨날 본인이래 “본인은~~~~.” “본인은 오늘 착합니다. 본인은 오늘 성화되었습니다. 본인은 오늘 성령으로 했습니다. 본인은~~~.” 


‘I’ 가 있고 ‘you’ 가 있다는 자체가 죄인줄 모르고 내가 했데 내가. 대부분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봐요. 관람석에 앉아서 이렇게 쳐다봅니다. 자세가 이래요. 건방진 자세로 이렇게. 아이구 유대인들 우리를 구원하신 좋으신 메시아를 저렇게 무지몽매해가지고 성령도 못 받아서 저렇게 모질게 십자가 지라고 저렇게 악독하니까 너희들은 유럽 역사를 통해서 죽어야 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0만 죽어도 싸! 예수님을 죽이다니. 이러고 있다고요. 관람석에 앉아 가지고. 관람석 이 세상에 관람석이 어디 있어요. 주의 일에 어디 있습니까? 


지금 빌라도가 누가 만났어요? 빌라도가 예수님 만났지요. 예수님 지금 우리를 빌라도라 여기고 있어요 지금. 빌라도는 우리의 대변자요 대표자에요. 얼마나 우리는 예수님을 ‘you’ 당신이라고 불렀습니까? 당신이라는 것은 극존칭이라고. 극존칭이고 뭐고 간에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 질서차원에서 보는게 아니에요. 


혼돈 입장에서 혼돈의 관점, 질서체제 오기전의 관점과 이미 빠져나와서 질서체제에서 빠져나와서 배제당했잖아요. 배제당했을 때에 주님께서 질서체제한테 버림받은거에요. 버림받은 안목에서 우리를 볼 때 우리는 뭐냐? ‘죄’ 그 자체에요 ‘죄’ 그 자체. 악마는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악마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it’. 악마는 그것일 뿐이에요 악마는. 바로 우리가 ‘it’이에요. 우리가 악마라니까. 우리가 악마에요. 


지금 주님은 죄를 끄집어낸다는 말은 인간 속에 있으면서도 인간들은 파악하지 못한 그 ‘it’, 그것, 그것을 악마를, 어떻게 빌라도를 만나가지고 얼마나 악마가 실제적인 존재인가를 실제적으로 활동하는 존재인가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 악마가 다루는 방법은 뭐냐 하면 군중 또는 군중심리에요. 촛불집회다. 군중심리에요 군중심리. 더불어 살기죠 더불어 살기. 


14절에 보면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빌라도가 너희 왕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빌라도가 소위 그 당시의 총독으로서 관용을 베풀려고 하는거에요. 관용. 그런데 관용을 베푼다고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되게 선해보이는 느낌들지 않습니까? 실컷 집어넣고 크리스마스나 부처님 왔다갔던 날 그런날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줄줄이 전부다 뭐합니까? 사면 많이 하지요? 특히 대선 앞두고 사면 많이 하잖아요. 


음주운전 단속한다고 그렇게 쭉 들어 가놓고 음주운전 전부 다 벌점 다 감해주고 졸지에 다 또 전과기록 음주운전기록 없어지지요. 왜 그런 짓을 하는거에요? 그게 뭐냐? 권력자가 스스로 유도리라고 해요. 스스로 순발력을 해가지고 법 말고 초법적인 행세를 하는거에요. 초법적인 관용이라는 것. 그렇게 해서 오히려 법에서 벗어나는게 아니고 본인만큼은 나니까 본인만큼은 법 위에 법이 그 위치에 있음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알려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떤 모임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게 좋다고 하잖아요. 좋은게 좋지 그래. 좋은게 좋다 또는 노예같은거 하면 노예 참 오랜만에 한다만은 노예 같으면 ‘은혜’라고 합시다. 은혜로 합시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관용을 베풀어주소서’ 이런 뜻이에요. 관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공통적인 것에 있어서 협상되지 않고 다툼이 일어날 소지가 있을 때에 관용자가  갑자기 초법적인 존재가 되요. 관용하는 사람은 법에 저촉을 안 받는 뛰어넘는 사람이 되어서 관용을 베풀어 줘버리면 관용을 받은 자가 생기고 그러면 관용한 자와 관용 받은 사람의 주종 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렇게해서 통치하는거에요. 


이게 인간은 법대로 정치한다고 하는데 정치는 법대로 정치하는게 아니에요. 법 플러스 관용으로 하는 겁니다. 법 자체가 이미 뭐가 안에 들어있느냐 하면 초법적인 요소가 들어 있어요. 법 자체가. 그런데 법이라는 것은 결국은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 하면은 사회 정의를 위해서 있는 거거든요. 그러면 사회 정의보다 더 뛰어난 정의감. 사회 정의보다 더 뛰어난 정의감을 쥐고 있는 초법적인 존재의 발생. 그것이 인류가 끝날 때 까지 계속됩니다. 인간 역사가 끝날 때 까지 그게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나옵니다. 


2장 3절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되어 있지요? 


자,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마지막 때에 여러분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데 이렇게 자칭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했잖아요. 이렇게 하나님이라고 행세할 때에 그것을 누가 그것을 시인하고 누가 그것을 동조를 하겠어요? 어떻게 동조합니까? 어떤 정치가가 나는 신이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그걸 호응해줘요? 호응 안해줘요? 호응  안해주지요. 


그럼 이 사람은 결국 이렇게 한다는 말은 그 밑받침에 누가 호응해줬다? 군중들이 호응해준거에요. 인간의 군중들이 바로 초법이에요. 지금 성경에서는 하나님처럼 행세한다고 하지만 군중들이 원하는 바는 바로 이런 영웅이 등장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등장해도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데살로니가후서에 있는 적그리스도인 것을 인간의 힘으로 파악될까요? 안될까요? 파악할 수가 없어요. 왜? 본인들이 원했던 바이기 때문에. 본인들이 원했던거에요. 


이런 예가 어디 있느냐 교회 한번 보세요 교회. 그 교회에 작은 교회 큰 교회 관계없어요. 그 교회에 어떤 자기가 은혜 주장하고 아까 관용 이야기 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를 주장할 때에 그게 적그리스도 악마의 모습이라는 것을 누가 감히 상상하겠습니까. 마치 메시아 같지요. 주의 종 같지요. 어떤 사람이 저보고 그래요. 목사님 보면 사도 바울 같다고. 아이고 참 사람 몰라도 너무...천국 가서 사도 바울 만나면 뺨 맞을지도. 


모든 힘은 군중에 있어요. 빌라도도 마찬가지고. 군중 한 사람 한 사람은 전부 다 자기가 악마에요. 악마의 최고의 상태입니다. 왜? ‘나’이기 때문에. ‘나’, 나, 자기 빼놓고 전부 ‘너’에요. 지금 형편상 그냥 오냐오냐 가족이나 형제니 하고 있지. 마지막 외마디 딱 외치고싶은 것은 “저리 가”에요. 귀찮아. 사람이 나이 좀 들어 결혼 생활 한 옛날처럼 20년 30년 하면요 각 방 씁니다. 각 방 쓸 때 뭐라고 합니까? “저리 가.” 


그런데 그 숫자가 점점 더 줄어들어요. 결혼한지 2년 만에 “저리 가” 돼요. 왜 가구 수 아파트 수가 왜 그리 늘어납니까? 방 많은걸 원해서. 왜? 각 방 써야되니까. 이게 개인적 사견일까요? ‘저리 가라’에요 “저리가! 귀찮아 죽겠어.” 옛날에는 여름에만 그랬는데 지금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저리 가’에요. 


데살로니가후서 2장 6절에 적그리스도 이거 찾는다고 소위 세대주의니 그쪽에 3년 환란 후 환란 그쪽에서 이걸 찾을려고 지명수배를 내렸어. 지명수배를. 김정은인가? 교황입니까? 너야 너!!!너!!너! 네 교회에서 네가 바로 이 짓하고 있어 네 교회에서. 아까 동영상 유투브 할 때 두 번째 동영상 제목이 목사의 실수였죠. ‘목사의 실수’. 


내용이 뭐냐 하면 목사가 목회하면서 뭘 기대하느냐 하면은 성과를 기대해요. 성과를. 계속 성과를 기대하는 거에요. 마치 헬스클럽 트레이너 그 사람이 고객들 1회 3만원 10회에 30만원 아까 계단 올 때 못 봤어요? 종아리살 빼는데 30만원 포스터 못 봤습니까? 밤이 어두워서 못 봤는가. 계속 관찰하는거에요. 당신 돈낸거 공짜 아니라고. 성과 있다고. 농사짓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전부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들 SKY에 보내려고 하면  연세대 고대 서울대 보내려고 하면 계속해서 성과 성과 하잖아요. 코디한테 붙여가지고 돈 있는 사람 이야기지만. 


모든 하나의 인간은요 자기 하는 일이 제대로 보람있는지를 계속 주시하는 거에요. 아마 그거 주시하다가 평생을 다 보낼걸요. 아내는 남편을 쥐고 자기 원대로 되는지를 성과 볼려고 하고 남편은 도망치기만 바쁘고. 그래서 아내는 남편의 위치추적까지 다 조사를 하고 세상에 부부 완벽한 타인입니다. 완벽한 타인이에요. 타인도 그런 타인이 없어요. 가장 가까운 이웃이 아니고 가까운 타인이 부부에요. 그럼 왜 사느냐?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서로의 약점을. 이거는 냉전상태 서로의 핵폭탄을 다 갖고 있으면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하다가 전처럼 시간 넘어가는데 또. 인간은 ‘저리 가’입니다. 강아지 귀엽지요? 그러나 똥 싸면 ‘저리 가’ 되잖아요. 똑같은거에요. 


악마의 집합적인 군중이고 군중은 자기 손으로 군중 자체가 초법적인 존재인데 그 초법적인 존재는 스스로 이미 그들은 자기를 구원될 자라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유대인뿐만 아니고 모든 민족이 누가 뭐래도 나만큼은 천국갈거야. 나만큼은 천국갈거야 라고 자부합니다. 따라서 이 ‘나’, 나를 천국에 넣어줄 메시아 너가 나의 눈에 띄게 되는 나, 내가 판단할 때 죄냐 의냐 내가 판단하니까. 내가 판단할 때에 필요한 메시아라고 본다면 아낌없이 나는 당신을 메시아로 존경할 마음이 되어있다가 마음에 사전 준비되어 있어요. 


그게 무슨 체제라고 했습니까? 그게 나름대로의 무슨 체제? ‘질서체제’에요. 질서가 문제입니다. 질서가 문제에요. 질서가 있으니까 거기는 법으로 묶어놨고 그 법이 악마는 그 법에서 스물스물 빠져나가요. 마치 향수처럼. 스물스물 자꾸 빠져나가요. 빠져나와서 오히려 빠져나오는 죄 다시 말해서 악마가 우리의 질서를 충분히 이용해먹습니다. 


내가 악마가 인간에게 다루는 방법은 뭐냐 하면 나라고 주장하는 나를 내가 인정해줄게. 그리고 네가 너라고 하는 너를 인정해줄게. 철저하게 너는 나답게 살아가고 너 외에 사람들은 철저하게 너와 나를 위한 너 자신을 위한 ‘you’라고 그렇게 철저하게 살도록 격려해줄게. 그렇게 되는 조건하에 계속해서 악마는 인간에게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구원자가 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인간의 말을 사용하지요. 인간의 말을 사용하면서 이상해 같은 아랍말인데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요 이게. 분명히 예수님 본인 입장에서는 그게 맞는 말인데 그 예수님 본인 예수님 ‘I’ 속에 어떤 인간도 ‘you’가 되지를 않아요. 주님 앞에 ‘you’가 돼야 되는데 ‘you’가 안되고 전부다 ‘it’이 돼요. 죄가 돼요 인간에게 죄. 


‘you’가 된 사람 있지요. 그건 강도. 여기 나오는 강도나 세리와 창기 그 사람들이 자기를 ’you’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you’라고 하지 않고 자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개라고 해요 개. 맞습니다 내가 개입니다 개. 멍멍멍. 제가 주님 앞에 개입니다. 나는 인간이 아니올시다. 개의 특징은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했는가 어디 대구강의에서 했는가? 아 대구 강의에서 했구나. 


개의 특징은 개인 자기 나름대로의 과거나 추억이나 역사를 만들 자격이 없다고 했지요. 대구 강의에서. 사이트 고장나가지고 잘 되지도 않겠지만. 이 뭐냐 하면 그동안 사료를 누가 줬어요? 주인이 줬잖아요. 그러면 개 이만큼 크게 된 건 누구 역사입니까? 주인의 역사지 개 나름대로의 아 그때 사료 먹는다고 애먹었어. 오늘은 맑은 날 오늘도 주인이 준 사료를 먹는데 이빨이 아파서. 이걸 쓸 의미가 없다니까 이 의미가. 주인이 개를 키웠지 개가 주인을 이용해서 자기가 살아남은게 아니잖아요. 그 개가 우리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 (IP:175.♡.96.96)18-12-14 15:41 
강남-요한복음 19장 10절(나와 너)181204b-이근호 목사 



두 번째 합시다. 빌라도가 이제부터 약간 어렵습니다 빌라도가 관용했지요. 관용을 다른 말로 하면 포용이란 뜻으로 설명하는데 빌라도가 여유를 부리는 거에요. 법적으로서 당신 죽어도 되는데 법 말고 또 다른게 있다. 그 권한은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거기에 따라서 뭐냐 하면은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 못 박을 권세도 있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스스로 뭐를 인정했느냐 하면은 스스로 초법을 인정한거죠. 초법을. 


이 초법을 행사하려면 빌라도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법에 효력을 정지시켜야 되는 겁니다.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려면 정지시키는 당사자가 뭐냐? 초법적인 존재가 아니면 법을 효력을 정지시킬 수가 없어요.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관용과 포용을 예수님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관용과 포용을 만약에 접수해 버리고 수용해 버리면 어떻습니까? 빌라도가 예수님 위에 존재하는 초법이 되지요. 빌라도는 영원히 ‘I’ 내가 되고 예수님은 영원히 뭐냐면 그 ‘I’ 를 빛내기 위한 그 관용과 포용하심을 더 높이기 위한 ‘you’ 너 you가 되는 거에요. 


바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빌라도를 누가 만났다? 예수님이 만나셨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만났다는 말은 빌라도가 예수님 만났다는 이 말은 지금 이쪽 세계에 누가 들어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지금 들어와 계신거거든요. 이쪽 세계 무슨 세계? ‘질서세계’. 그 질서세계가 뿜어내는 초법적인 현상을 우리들보고 주목해 보라는 거에요. 


인간공동체가 법으로 운영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겁니다. 법으로 정의로움 그건 눈으로 보이는거고 그게 아니고 초법적인 요소가 이렇게 어떤 음기처럼 음슴한 기운처럼 이렇게 흐르고 있는 거에요. 사람이 자기한테 유리할 때는 법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거기에 뭔가 불리하다 싶으면 왜 용서 좀 해주면 안되느냐 내가 율법에서 죄인인데 죄인이니까 율법 준 것은 죄인되기 위해서 죄인되게 하셨으면 하나님 용서하는 몫은 특권은 사면특권은 누가 가지고 있다? 그런 포용력과 관용은 주님 몫이니까 주님 나를 구원해 달라는거에요. 


이게 바로 악마가 만든 기독교 아닙니까? 기독교 신앙이라고요. 악마가 만든 기독교 신앙이라고. 이게 교리 아닙니까 교리. 이천년 교리가 이런거에요. 어쨌든 나 앞에서 예수님다운 면모를 나한테 재롱을 부려봐라 재롱을. 내가 판단할테니까 딱 이러고 있을테니까.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삼위일체든 총동원해서 춤을 추던지 무용을 하든지 재롱을 부리든지 이쁜짓 해봐라. 이쁜짓 할 때 내가 아 이거 괜찮네 믿어줄 용의가 되어 있다는 거에요. 


아주 건방을 떨어요 건방을 떨어. 아 그게 교회 상품 미끼 아닙니까. 그게 교회 미끼 상품이거든요 미끼 상품. 값없이 준다고요. 원래 백화점에 미끼 상품하지만 사실은 본상품 따로 있다고 하니까. 값없이 구원받지만 십일조 안하면 망한다 뭐 이런거. 본상품 있듯이. 저주 받는다. 자꾸 미끼 상품에 걸려드는거에요. 그런데 걸려든 당사자가 나빠요. 당사자가. 나빠도 나쁜 줄을 몰라요. 왜냐하면 다들 그러니까. 군중이거든요. 다들 똑같은 한통속이니까. 


이 한통속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한통속이란 말은 아까 권세 이야기했지만 한통속이란 말은 동일한 권세 아래 있다는 뜻이에요 한통속이란 말은 동일한 권세. 동일한 권세라는 말은 인간에게 뭘 주느냐 하면 소속감을 줘요. 소속감. 그런데 예수님이 이걸 가지고 죄라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권세 이야기가 나와버리면 예수님은 결국 두 종류의 힘을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존의 소속된 소속 인간세계, 군중 그 소속과 거기서부터 배제당한 거기서부터 그냥 배척당한게 아니고 배제당했거든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여러분 머리 좋은 사람은 알겠지만 배제당했다는 말은 빠이빠이라는 말이 아니고 결별이라는 말이 아니고 이쪽에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한 배제한 그 죄를 내가 필히 묻고야 말겠다는 관계가 유지되면서 배제당한거에요. 


지난시간에 여러분 강의한거 기억납니까? 성경내용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에 의한 인간에 대한 복수에요. ‘복수극’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인간들에 대한 복수극. 아 참 치사하다 인간들  갈라고하나. 인간을 가는게 아니고 인간배후에 인간에게 소속감으로 준게 있어요 소속감. 초법적으로 소속감을 준게 있다고요. ‘권세’ 다른 말로 ‘주권’인데 주권은 이런거에요. 주권은 자신이 내부화시킬 수 있는 조건에 만족하는 겁니다. 


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이 안에 들어있는 전부다 자기의 내부화시킬 수 있다는 그러한 자신감 또는 통치성을 말하는거에요 주권이라는게. 그게 로마서 5장 보면 죄의 무슨 노릇이라고 했습니까? 5장 10절 죄의 왕노릇이죠. 이걸 말하는 거에요 죄의 왕노릇. 왕노릇이라고 하는 것은 힘에 누수가 있으면 그건 어설픈 왕이에요. 왕은 죄가 왕으로 통치한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그 죄에서 빠져나갔다? 못 빠져나갔다? 빠져나오고싶은 것도 아니고 하나의 소속감이라니까. 어떤 행복감을 느낀다니까요 죄안에 살면서. 


우리가 생각한 악마가 노린 것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라 이게 악마가 주는 소속감 상품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서 천국가라 그런 행복감을 주잖아요. 주님은 이 행복감은 배제가 아니에요. 지금 배척받는게 아니거든요. We are the world 우리는 한 세계고 하나다 하다. 죽은 마이클 잭슨이 생각난다. 우리는 하나에요 우리는 하나. 마이클 잭슨이 어린아이들 애들 성학대 했다는 소리 있는데 어린애들 아프리카 애들 많이 도와줬잖아요. 


도와주면서 마이클 잭슨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은 바로 이것이 주기도문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주기도문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뜻은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온 세계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이웃사랑, 주님의 이웃사랑을 펼침으로서 이것이 이 뜻이 우리를 통해서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그 뜻이다 라고 지금 마이클 잭슨은 노래를 통해서 이야기 한거에요. 빌리진 이런 것만 듣지 말고. 뒤로 쫙쫙 걷는 것만 보지마시고요. 빌리진 노래 가사는 이런 거에요. 춤추는데 그 여자가 애를 낳았데. 그 애 내 애 아니야 그 내용이잖아요. 가사가 굉장히 음침해요. 퇴폐적이고. 맞을걸? 


악마란 공동체의식을 말합니다. ‘공동체주의’. 우리서로 하나의 소속감 속에 심리적인 안정감을 누리자. 그러나 주님은 반대로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고 불화를 주려 함이라. 그런 구절은 안보이고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서로 할 수 있거든 화평하라 화평하라 하나님의 화목이 어떻고 화목제사가 어떻고 서로 화목하라 그런 것만 하거든요. 


그걸 여러분 그렇게 모순돼 보이고 서로 뜻이 충돌돼 보이는 것은 무엇과 무엇을 구별 못해서 나오느냐 하면은 재생산과 창조를 구분 못해서 그래요. 예수님이 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은 창조입니다. 예수님은 창조고 마귀는 뭡니까? 재생산이에요. 재생산은 진보 발전 성화 진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어요. 재생산이 되려면 찌그러기 모아서 더 버리는게 아니고 죽이는게 아니에요. 계속해서 질 좋은 걸로 되살리는 것이 재생산입니다. 쓰레기 재생산하잖아요 재생산. 


창조란 것은 뭐냐 하면 버려라는 거에요. 세상의 소속감을 버리고 어떤 군중이라는 그 힘, 군중의 힘 그 초법적인 것을 포기하라. 너는 뼈다귀란 말이죠. 너는 개이고 뼈고 흙이고 주제파악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재생산은 우리가 뭔가 힘을 보탤 수가 있어요. 우리의 행함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대로 성경말씀은 뭐 폼으로 있나 이렇게 하면서 셩경말씀 주신 것은 우리보고 이제 성령받은 우리가 성령받은 우리 성령받은 자답게 거기에 성령에 합당한 의의 열매와 행함을 얻을 가능성과 잠재력을 획득했다는 겁니다. ‘획득’, ‘소유’죠. 


여러분 획득 소유가 되어 버리면 절대로 소유자를 떠나지 못합니다. 자기 부인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소유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악마가 노리는 것은 뭐냐? 혼자 홀로 살아라. 홀로. 너 혼자 있는거 좋아하잖아. 좋아하지요. 저리 가. 그렇지. 잘해잘해. 홀로 살아라. 뭐든지 혼자해라 혼자 힘으로. 왜 혼자 힘으로 해야하냐 하면은 어떤 성과가 왔을 때 자기 혼자 했다는 것이 좋습니까? 동업자 끼어서 같이 했다는게 좋습니까? 역시 혼자 먹는게 최고에요. 


도박 이렇게 할 때에 도박 할 때 도박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뭡니까? 다 전부다 다 하고 단 한사람만 가져가는 거에요. 최종 결정전. 딱 한사람만 가져가는 거에요. 그 짜릿한 그 기분 때문에 도박하는 겁니다. 이 도박성향은 어떤 회사나 어떤 국가나 조직이나 교회에서 항상 궁금한게 항상 최고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가가 궁금해요. 너희 교회 목사 누군데? 너희 집에서 최고 어른이 누군데? 


그걸 묻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묻는건 ‘I’ 내가 묻지요. 누구한테? 너한테 묻지요. 나 ‘I’에서 나온 질문자체가 다소 뭐로 해석되느냐 하면은 그 최고의 자리에 앉은 ‘I’와 나 ‘I’와 ‘you’와 나 누구 더 괜찮은 존재냐? 누가 더 쎄냐를 비교하고 싶어서 그런 질문을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지난 주일날 설교하면서 성도의 질문은 다른 질문이 나와야 된다고 했지요. 내가 나를 나무라는 질문이 나와야 돼요. 너 언제까지 네가 주님을 핍박할거냐? 질문을 우리 속에서 형성되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빌라도이기 때문에. 빌라도가 우리가 대표자고 빌라도는 그 당시의 군중들의 대표자고. 군중들이 해야될 일을 자꾸 군중들은 누구한테 밀어넣습니까? 빌라도에게 계속 부추기고 계속 뒤에서 밀고 우리 시키는대로 하란 말이죠. 시키는대로 안하면 당신은 진짜 가이샤의 신하가 아닙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15절에.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거 지금 군중들이 진심으로 하는 소리 아니에요. 가이사가 그들의 왕이 아닙니다. 본인이 이미 왕 되었어요 본인들이. 인간이 누가 왕 돼요. 본인이 왕 되었다고요. 본인은 왕이기 때문에 왕은 늘 재생산 하고싶어요. 스스로 내가 되고 싶은 그런 목표가 있어요 인간은. 누굴 이용하던 간에 그게 왕이 되었든 빌라도가 되었든 누굴 이용하든 간에 그게 청와대에 있는 사람이든 어쨌든 간에 ‘I’는 계속 빛나는 영광스런 ‘I’가 ‘나’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성경에 사도바울이 소개하는 복음은 뭐냐? 고린도후서 4장에서 사도바울은 복음을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복음이란 ‘주님의 광채’ 이렇게 했어요. 이 광채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곧 태양과 같아요. 밤에는 달 낮에는 태양. 태양 특징이 뭐냐 하면은 모든 우주를 태양 하나가 다 골고루 비취지요. 이게 광채 아닙니까. 세상 모든 것은 무엇의 광채다? 주님의 광채라고 여기는 그게 바로 복음을 아는 거에요. 복음을. 꼬라지는 이래도 주님의 광채를 받고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제가 이야기한 주님과의 관계성. 혼자 홀로 사는게 아닙니다. 


이것을 그림을 그리자면 주님 여기 계시고 그 하프라는 악기 있지요? 하프라는 악기의 줄 탱탱한 줄처럼 온 천지에 그 탱탱한 줄을 쫙 설치해가지고 그중에 우리가 하나씩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의 광채가 없는 곳이 없는거죠.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이고 긍정적인 마인드 입니까? 세상 복입니까. 이게 복음이에요. 그런데 악마는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광채를 꺾어버리고 주님의 자리에 뭘 집어넣어요? 바로 우리를 격려하는거에요. 우리를 도와주는거에요. 


나라는 너 존재가 너 존재를 위해서 온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네가 거기에 믿어라. 이게 최고의 행복이라는 거에요. 말이 맞지요. 이게 행복 맞지요 우리 죄인에게는. 내가 초법적인 존재 내가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게 어디 있습니까? 아까 그 데살로니가후서 2장 마저 해봅시다.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소위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해도 그걸 적그리스도라고 알아챌 사람이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왜? 군중들이 원해서 오야오야해서 받들어 모셨는데 제가 교회 생각하라고 했지요? 우리의 목사님 같은 목사는 없어. 최고야. 그게 적그리스도. 주님의 광채가 있을 자리에 교회 담임목사가 앉아있단 말이죠 거기에. 


만약에 어떤 목사가 앉아 있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아무리 목사를 존경해도 목사보다 더 존경스러운게 누구냐 하면 본인이에요. 본인이 목사를 존경한다는 말은 본인이 더 목사보더 더 존경스럽다는 내심을 그렇게 표현한겁니다. 계속해서 뭡니까? ‘나와 너’. 제목은 ‘나와 너’다. 나와 너 관계가 유지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 목사님 최고 우리 목사님 최고 하는 것은 사실은 누구 최고라고 하는겁니까? 나의 광채가 최고 나의 광채가 최고라는 뜻이에요. 


전부다 소위 하나님되겠다는 사람이나 그 받들어모시는 인간이나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전부다. 한 덩어리 된 인간들이에요. 그게 바로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를 만났던 그 구조 있잖아요. 그 구조를 세상 끝날까지 계속 확장시키기 때문에 데살로니가후서 2장 같은 것이 나오는겁니다. 그렇다면 이 구조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되는가? 이 구조에서 벗어나려면 빌라도가 예수님 만났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배척받은 식으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가 없지요. 


예수님은 빌라도를 가지고 뭐냐 하면은 이렇게 봅니다. 빌라도야 네가 지옥 간다 겸손한게 아니고 네가 바로 ‘죄’다. 죄라는 것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너같은 존재가 하나님 보시기에 꼭 필수조건이었다는 겁니다. 군중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하나의 ‘it’ 그것으로 본다면 결국 예수님 보기에 누가 최종적인 초법적 존재요 ‘나’가 되겠습니까? 바로 예수님 본인이죠. 그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이건 정말 논리를 좀 제가 뛰어 넘었는데 일단 논리를 뛰어 넘지 말고 해봅시다. 


일단은 예수님 앞에서 빌라도 또는 가이사 왕 군중은 전부 한패된 건 인정하시죠?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우리는 관찰자 입장이 되는게 아니고 우리는 그냥 우리는 벌벌 떨고 있는 입장이죠. 그 당시 12제자가. 자 12제자가 재미있다 보자 이런 입장이 아니에요 지금. 지금 도망치고 있는 입장이라고요. 결국 예수님 편 아니에요. 예수님 배반할거고. 어느 누구도 예수님 앞에서 대표자가 죄를 키우는 죄를 죄되게 하는 대표자는 빌라도와 군중들이란 말이죠. 


그러면 군중들과 빌라도가 이들이 합쳐서 이들을 합체하게 되면 그들의 예수님 처리하는 방식을 한번 보자 이 말입니다. 처리하는 방식은 바로 대체폭력이라는 건데. ‘대체폭력’이라는게 뭐냐 하면은 빌라도가 어떤 정치적인 판단을 내릴 때에 어떤 소란이 일어나고 질서가 문란해지게 되면 누구하나 희생타가 필요해요. 희생타를 때림으로서 저쪽을 때리는걸 대신할 때 대체폭력이 되는 겁니다. 이게 유대인의 지도자에서도 나왔어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11장 50절에 보면 이건 좀 기니까 그냥 읽어볼께요.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 이게 대체폭력이에요. 하나의 공동체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썽꾸러기 하나를 잡아다가 희생양으로 처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 말을 스스로 함이 아니라 그때 52절에 보면 “온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지금 직접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그 유대사회에서 로마한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희생타로 예수님을 하나의 죽여버리자 하는 그 작당과 그 모의와 그 실행을 실행의 그 모습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없는데서 창조니까 없는 백성 새로 만들 때 그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했다는거에요. 희생양을 주어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방식을 따랐다면 그러면 새롭게 된 혼돈에서 질서에서, 질서에서 다시 혼돈으로 가는게 아니고 기존 질서를 배격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기존 질서를 배격하는 조건하에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필요한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죄 많은 세상에 태어나야 되는겁니다. 우리가 겪었던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 때문에 주님이 겪은거에요. 구원되야 될 우리가 오해해서 주님을 곡해해가지고 우리가 주님을 핍박한거에요. 그 핍박했던 그 형편과 상황을 그대로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겁니다. 되돌려줘버리면 내 식이 초법이 아니고 주님 방식이 초법이 되어 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의인이 되요. 죄가 만들어진 우리가 죄의 재료가 될 우리가 주님의 소속됨으로 말미암아 의가 되어버렸어요 의가. 


무슨 이런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까. 여러분 의인되는데 뭐했어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세상에 나갔을 때 성도들아 세상에 나갔을 때 제발 어리석음으로 살아라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이 구원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네가 어리석다고 자인하라 이 말입니다. 누가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었습니까? 악마가 어리석게 만들었죠. 악마가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악마 말은 OK. 


악마가 우리를 똑똑하고 괜찮은 나로 만들어주는 줄 알고 허허 하면서 악마 말 듣고 사는거에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행복합니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행복합니까? 미국 가면 미국 이민 가서 어떻게 행복합니까? 캐나다 가면 캐나다 가면 행복할까요? 캐나다 살다가 한국 오면 한국에서 어떻게 행복합니까? 행복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그냥 행복만 생각해요 행복만. 왜 행복해야 되는데요? ‘나’니까. ‘나’가 들어가거든요. ‘나’니까.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그 뒤에 보면 지금 너희들은 모른다. 그런데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니 불법의 비밀이 뭐냐 하면은 초법 때는 초법과 상대해요. 초법은 초법대로. 지금 적그리스도가 초법이잖아요. 이 초법을 꽉 억제하는 꼼짝마라 하는 그분이 있어가지고 그분이 초법이 초법으로 다룰거에요. 그럼 나중에는 이게 좀 풀리게 되게 되면 다시 그대로 원상복귀가 되어 가지고 위대한 메시아여 구원자로 설칠겁니다. 그때 마지막 멸망이 주어지는 거에요. 주님이 악마를 다룬다는 이야기입니다. 초법이 초법을 다루는 거에요. 


악마라는 것은 어디 있습니까? 물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묻는 것 자체가 나 여기 있고 악마 너는 어디쯤 있습니까? 하는데 이미 우리는 악마화되었어요 우리가. 우리가 악마화되었기 때문에 악마가 악마 찾는다는 것은 모순된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자기 놔두고 어디 찾습니까? 악마의 특징은 홀로 사는거에요. ‘저리 가’에요 ‘저리 가’. 제목을 바꿀까싶다 저리 가로.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구원 못 받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자체가 수상한 짓이에요. 그냥 주님 혼자 가시도록 붙잡지마세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초법이라고 하는 것을 요한복음 19장에서는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은 통 돼요 통. 제목을 ‘통’해도 될텐데. 통 하니까 통아저씨 생각난다. 통이란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19장 23절에 나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통이란 말은 뭡니까? 둘이 될 수 없고 하나가 계속 견지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가. 그런데 이 사실이 유일한 하나거든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입었던 옷이잖아요. 예수님의 몸에 가치를 표상해주는거에요. 이게 하나의 옷 같으면 이렇게 통이 예수님의 초법을 이야기한다 제가 그렇게 무리한 알레고리식으로 해석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거기 24절에 보면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이것은 시편 22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시편 22편에 있어서 인간들이 예수님의 고유한 그 가치와 위상을 모르고 옷을 나누자 하다가 이게 나누면 둘 다 안 된다 싶어서 그다음에 제비 뽑아서 이걸 하나로 가지자 하는 행동을 한다는거에요. 시편 22편을 한번 봅시다. 그 내용이 나오는지. 18절, 16절부터 보면 시편 22장이거든요 거기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다윗이 성령을 통해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지요.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 하시오며 하게 되면 이제 여기 나오는 ‘나’라는 분은 어디로 빠진거에요? 아버지 세계가 아니고 인간세계로 넘어오신 ‘나’죠. 그러면 인간세계에 넘어 왔으면 예수님은 뭐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배척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럼 배척을 누가 주도하느냐? 예수님의 배척을 주도하면서 비로소 그동안 몰랐던 이 세상의 속성이 낱낱이 다 노출돼요.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그래서 제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거에요. 그게 노아의 방주같은 겁니다. 노아야 방주 지어라. 방주가 안과 밖을 결정하는 것처럼 지금 마지막 시대에 결정하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는데 어디서 죽었어요?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죽었잖아요.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는 행복만 원하는 이 세계에서 하나님 오셔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 진짜 숨어있는 진짜 그 속내는 우리가 눈치 잡아야지 이거는 알아야됩니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 세상. 출세하고 애들 공부 잘 하고 남한테 칭찬받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고 희망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장소. 내가 태어난 이 곳.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뭐 이런거. 유일한 이곳이 그냥 꽃만 폈으면 아무 탈 없지요. 꽃만 피면 괜찮아요. 복숭아 꽃 살구꽃. 살구꽃 피면 우리는 아무 이야기도 안합니다. 


그런데 이 살구꽃 피는 이 동네에 누가 다녀갔습니까? 예수님 다녀갔다는 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거든요. 악마한테 속았다는 겁니다. 속고 속고 또 속았다는 거에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세상은 성질은 뭐냐? 하나님마저 내다버리고 무가치하게 처리하고 취급하는 그러한 지옥인걸 네가 왜 몰랐던가. 지옥에 살게됐다는걸 알게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경험이기 때문에 주님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입니까. 세상을 좋게 본 것을 제가 여러번 반복합니다 어려워서. 세상을 좋게 보는 것은 그게 세상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거기에 소속감을 두고 싶어서 세상이 좋은거에요. 나한테 잘해주기를 기대해서 세상이 좋은 겁니다. 내가 나한테 귀하기 때문에 세상이여 그냥 나를 버려두지 말고 나 좀 챙겨달라고 하소연 하고싶어서 세상한테 아부하고 있는 거에요. 아부하니까 생각나는데 이 시간에 참석 못하고 열심히 검토해야될 우리 사장님. 열심히 지금 검토하고 있을거에요. 삼가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이 마음대로 안 되거든요. 


그동안 자식들에게 얼마나 닦달했습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하라고 좋은 대학 가야 네가 인간대우 받는다고 얼마나 닦달 냈습니까. 네가 이렇게 성적 낮은 것은 기도 안해서 그렇다고. 기도 안하고 엄마가 아는 복음 안 받아들여 너는 망했다고. 복음 받아들여도 우리도 똑같이 망해요. 우리는 복음으로 기뻐하지 망한 것 때문에 기뻐하고 이러면 안됩니다. 망하게 해주심도 마저 기뻐해줘야 복음으로 기뻐하는거에요. 그게 어리석게 사는 모습입니다. 앞으로 이름 지을 때 김 어리석음 박 어리석음으로 지으세요. 


어리석음에서 오는 그 자유가 보통 자유가 아닙니다. 지금 왜 악마한테 시달리느냐 하면은 안 어리석으려고. 똑똑하려고 하는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무지한 것을 발굴해냅니다. 채굴해내요. 완전 비트코인이랑 똑같애. 완전히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암호화폐 만드는거에요. 끝까지 우리로 하여금 그야말로 희귀한 존재로 만들어 버려요. 우리 본인이 생각해도 내가 이상할 정도로 희귀한 존재. 그만한 자신감 자유감 있어야 되요. 그거 없으면 악마의 탁류에 우리는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를 버리시나이까 해 놓고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 뭐냐 하면 아주 짓밟히는 거에요계속해서. 여기 보면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여기 ‘나’라고 하는 것은 누굴 이야기해요. 시편 자체로 보면 누구 이야기 입니까? 다윗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다윗은 이런 현상이 없었어요. 언제 다윗이 옷 벗긴적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게 바로 ‘중복인생’입니다. 성도는 혼자 있는게 아닙니다. 성도의 몸은 주의 것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몸을 내 몸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맨날 거울 보면서.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한테 양보 안해요. “그 몸은 내 몸이다.” “아닙니다 내 몸입니다.” 서로 갈등을 유발시키죠. 중복현상이에요. 지금 다윗이 나라고 이야기 하면서 사실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예수님 몸을 지금 발현하고 있는거에요. 다윗 몸을 통해서. 


우리네 성도 인생도 꼭 그같은 길을 가는 것 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가신 공생애의 모습을 우리 인생을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하고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 욕 얻어먹는 것도 아니고요 남들한테. 행동 더 똑바로 못해서 욕 얻어먹는게 아니고 이상한 사고방식이 들어가지고 욕 얻어먹는거에요. 괴상한 사고방식. 천국 가려면 뭔가 해야 되지 않습니까? 교회를 가든지 뭘 하든지 선교를 하든지 뭘 해야 되는데 이미 창세전에 예정되었데. 그리고 태어난 것도 우리 엄마 깊으신 뜻이 아니고 주님 깊으신 뜻대로 하나님 깊으신 뜻대로 태어났대요 성도가. 


그러면 주변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증명하라는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증명하는 것은 내 소관 아니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증명인데 어떻게 더 살아가는 것에서 어떻게 따로 내어서 증명해 냅니까? 나머지는 증명 안되는거에요? 이런 고백이 나온다는 것. 이거는 어디서 배운게 아니잖아요. 나도 몰라.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으면 네 안에서 말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나온다. 주님에 대한 고백이 하신 일이 나온다는 자체가 우리도 깜놀이에요. 본인 자신도 깜짝 놀라지요. 내가 이러다 너무 미쳐가는게 아닌가. 좀 속도 조절해야되지 않나 이런 정도로. 


18절에 보면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는다는 것은 옷 마저도 하나 남김없이 세상에 유린당했다. 철저히 유린당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손해봤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손해본거에요? 세상은 그동안 악마가 감추고 감췄거든요. 악마가 있다는걸. 그게 예수님 오심으로 말미암아 악마는 너 ‘you’, ‘I’가 아니라 ‘it’. 악마는 존재가치도 없어요 ‘it’이에요. 그냥 악마=죄에요. 죄로 취급당하는겁니다. 죄진 악마가 아니라 아예 죄 그 자체가 악마에요. 


그걸 가지로 로마서 5장에서는 죄의 왕노릇해서 죄를 인격화 시켜버립니다. 죄가 왕이래. 우리가 뭘 행동 잘못한게 죄가 아니고 죄라는 어떤 덩치가 있다는거에요. 그게 왕이래요. 왕이니까 세상은 왕국이죠. 무엇의 왕국? 죄의 왕국이 되는 거죠. 그 죄의 왕국이 가르치는 것은 홀로서기. 너는 너의 행복을 추구하라. 할 수 있는 행함을 다 동원해서. 스스로 돕는 자를 하나님은 도와준다. 아까 이야기했죠. 하나님이라는 자체가 이미 내가 있는 이상은 내가 장착되고난 뒤에는 하나님 ‘you’가 될 뿐이에요. 


다시 한번 정리합시다. 빌라도가 주장한 것은 뭐냐 하면 기존 세계에 자기가 지배하는 유다사회가 안정감을 얻는 것 질서를 회복하는거에요. 지금 예수님 때문에 문제가 일어났거든요. 의견도 분분하고 따라서 평정하기 위해서는 재생산, 사회의 질서를 재생산을 할 책임이 총독한테 있는겁니다. 그 책임을 하면서 빌라도 자체가 법에서부터 벗어나려고 했어요. 초법적인 행동으로 하려고 했지요. 내가 봐주께 봐주께. 내 권세가 법보다 더 세다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그런 고백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인간들이 아는 인간들이 지어낸 우리 법대로 하자는 그 법 말고 다른 음슴한 기운이 오히려 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노출되었죠. 


요한복음 다시 돌아가 봅시다. 요한복음 19장에서 “통으로 짠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아까 시편 22편하고 좀 다르지요? 시편에는 뭡니까? 겉옷은 나누고 속옷은 제비 뽑는다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냥 뭡니까? 그냥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약에 있는 문자대로 그 뒤에 뭡니까? 24절 마지막에 뭡니까?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되어 있잖아요. 인간들의 법적인 질서에서 응한다는 것은 똑같은 말이 돼야 되요. 그래야 응한다는 말이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옳다고 돼있어야 되요. 이런 예가 마태복음 1장에 나오지요. 천사가 와서 마리아가 임신했는데 이름을 짓게 합니다. 그 이름을 천사가 이름을 지어요 천사가. 이름이 뭐냐 하면 이름이 예수. 여호수아 또는 예수. 예수라 해놓고 거기에다 풀이를 해놨죠. 이거는 풀이가 무지무지하게 길어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 여호수아란 말은 그냥 간단하게 인간사회에서는 질서사회에서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자인데 뭐 붙는게 많아요. 자기 백성을 죄라는 말 거기 예수 안에는 없어요. 그런데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자기 백성이 현재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세상에 소속되어있다고 해도 되지만 예수님 입장에서는 뭐냐? 그냥 죄 속에 갇혀있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말은 그 갇혀있는 백성이 알아서 스스로 구원될 수 있다? 없다? 구원될 수 없는거에요. 그 원칙을 견지해야 돼요 우리가 성도가. 성도는 뭐냐? 그 원칙이 계속 유지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 행함으로 구원되지 않았습니다를 유지해야 돼요. 그 이유가 뭔데? 그 이유는 살아가면서 점점 더 느껴지는거에요. 복음알고 십자가를 아무리 해도 내 재산 내 자식이 최고고 내 가정이 최고고 먼저 나와 관련된 그것은 남한테 빼앗기기 싫어요. 왜? 내거니까. 


내 평생 노력하고 투자하고 참고 견디면서 눈물 흘리면서 얻었던 것 그거 미쳤다고 남한테 빼앗깁니까? 그 공로. 교회와서 엎드려서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그 기도를 못 잊어요. 그래서 어머니기도 못 잊어 하는 찬송가 있잖아요. 남의 어머니 아니라 우리 어머니기도. 내가 기도한 것 이 교회에서 땀 흘리고 일했던 것 잊지를 못합니다. 거기서 구원 못 된다 이 말입니다. 나의 명예와 나의 체면에서 나의 자존심에서 내가 벗어날 수가 없어요. 


‘너’라는 것은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빼놓고 다 ‘너’에요. 하나님이든 예수든 남이든 이웃이든 가족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 빼놓고 다 ‘너’에요. 완벽한 타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응했다” 이 말은 내가 ‘나’가 아니고 성경이 ‘나’가 되요. 성경 안에 계신 분이 ‘나’가 되고 그 ‘나’를 빛내기 위해서 주님의 복음의 광채를 빛내기 위해서 우리는 뭐가 된다? 우리는 ‘너’가 되는거에요. 우리는 설정해놓은 그 시나리오대로 그 군병들은 가위 바위 보 할 수밖에 없어요. 찢으면 안돼. 왜? 시편 22편에 이미 예언되었기 때문에. 꼼짝마라입니다. 


말씀에서 우리는 한발자국도 못 벗어나요. 감기 걸려가지고 지금 기침해도 그것도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기침하는거에요. 두 번 기침하고 한 번 쉬고 두번째하는 그것도 짜여진 각본대로 하는 겁니다. 발걸음도 마찬가지고요. 원스텝 투스텝 쉬고 올라가는 그것도 전부다 각본 짜여 진거에요. 그 각본의 결과는 뭐냐? 나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가 최고다. 나만 최고다. 나만 최고다. 나의 소원은 감기에서 낫는 것. 


북핵 핵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의 감기 낫는게 최고 문제에요. 판콜A 하나 먹든지 두 개 먹든지 세 개를 먹든지. 당장 코앞에 있는 것. 그게 나한테 중요하지 북한 핵문제 뭐가 중요합니까? 최저임금 그거 조절하는게 중요하지 김정은 오는게 뭐가 중요해요 서민들에게. 안중요하잖아요. 만약에 어떤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는 경험하고 싶다해서 나이지리아에 갔다. 나이지리아에 코이카 있어요. 군대 가기 싫어가지고 군에 가지 말고 해외봉사하는 그런거 있어요. 


애가 코이카 가가지고 나이지리아에 봉사하러 가게되면 엄마는 나이지리아라는 그런 나라가 있는지도 몰라요. 남편은 알지. 월드컵 맨날 본선 나오니까 알지만. 여자는 모르잖아요. 그때부터는 나이지리아를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왜? 그 안에 누가 있기 때문에. 자기 분신이 있잖아요. 이게 인간입니다. 계속 내가 어느 정도로 개판인 것을 주께서 발굴해줘요. 그게 우리네 분주하기 짝이 없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상하게 바빠요. 우리는 나 살기 위해서 바쁜데 주님께서는 죄 발굴하기 바빠요. 끊임없이. 오늘도 52m 들어갔다. 


그 발굴에 방법은 성경과 동반해서 병행해서 발굴합니다. 오늘 성경은 요한복음 19장이잖아요. 빌라도 그 빌라도 아니야. 너야. 새롭게 발굴합니다. 자기가 총독의 값을 한다고 건방 떨면서 내가 봐주면 내가 관용해주면 나한테 잘 보이면 너 풀려날건데. 우리는 이러한 얼마나 타인에게 얼마나 허세 떨었습니까? 허세 떤다는 것은 이미 어느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자부하는거에요. 꼭 대리가 신입사원한테 허세 떨지요. 그런데 뒤에 과장 오면 끽소리도 못하잖아요. 


모든 것은 주님의 통, 주님의 초법, 예수그리스도 위해서 세상의 모든 일은 부지런히 개미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거는 이런 고백이 성령이 있어야 나올 고백입니다. 모든게 성경에 응하게 함이거든요.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성경에 응한다’는 것은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필요 없다’는 겁니다.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대구강의에서 죄를 회개하되 내가 지은 죄가 아니고 내가 속한 세상이 지은 죄지요. 


세상이 지은 죄를 내가 책임질 수가 없어요. 앞으로 잘 하겠다고요? 세상 떠났습니까? 지금 죽었어요? 세상에 남겨있는 이상은 내가 처리하고 책임질 수 있는 죄는 없습니다. 다 그 이상이에요. 얼마나 이 자리에 오고 싶겠습니까. 그니까 권투해야돼요. 세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무슨 변수가 일어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교인들 좀 왔다고요? 다음주일날 하나도 안 보여도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입니다. 


모이고 다음에 모입시다. 희망사항이에요. 희망사항입니다. 내가 죽을지 이렇게 팔릴지.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내가 나올줄 알았어요.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주께서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말씀을 듣게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중요한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자기 주제파악하게 하옵소서. 주의 십자가 일이 세상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지금 벌어지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날 반복적인 사태인 것을 우리는 왜 미처 몰랐습니까? 죄에서 건져준 사람이기에 말씀만 우리 입에서 토해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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