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20장 1절(무산된 꿈)190108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있다면 그거였습니다. 빈 무덤을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보였다는 사실. 빈 무덤을. 빈 무덤을 의도적으로 보였다는 말은 인간이 자기가 한계를 모르고서는 자기 자신을 몰라요. 얼추 주님 정도는 따라갈 수 있다 싶어서 시키는대로 다 할 수 있어요 인간은. 시키는대로 다 할 수 있어요.
심지어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내가 죽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자식이 죽는데 자식 대신 몸 던지는 부모들 많잖아요. 그러나 주님의 죽음은 인간이 수천만명 죽고 수억명이 죽어도 그 죽음에 예수님의 죽음에 합체가 안돼요. 왜? 죽음을 보여주려면 언약이 장착된 분의 죽음이여야 이게 죽음이고 언약에서 배제된 인간의 죽음은 천날 백날 죽어도 그거는 진정한 죽음을 못 보여주는 거에요.
하나님의 뜻은 너 죽으면 살려줄께가 아니라 죽음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거에요. 죽음이 뭔가를 보여줄 때. “나 죽으면 살려줄거죠?” 이렇게 계산치지 말고 계산하지 말고 죽음이란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가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 다 떨어져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다 떨어져야 돼요. 이게 빈 무덤이에요.
그리고 예수님 죽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장담했던 그 인간도 베드로도 딱 눈으로 두 눈으로 빈 무덤을 보는 순간, 순간 주님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비로소 내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내가 여기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내가 탈출할 수 없는 내 스스로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새로운 영역 안에서 오해한거죠. 예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한겁니다. 잘못 생각한거에요.
나 잘되기 위한 가상적인 예수를 믿은겁니다. 제자들이.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제자들도. 서구에서는 방탈출 게임이라는게 벌써 8년전부터인가 있었답니다. 방탈출. 뭐냐? 하도 얼마나 자극적으로 게임을 하고 싶었으면 일부러 어떤 방에다가 밀폐된 방에다가 집어넣어놓고 어떤 암호같은 것 어떤 단서를 잡아가지고 무사히 방에서 탈출 나오게 되면 뭔가 어떤 승리감에 도취되는 것. 하는데 폴란드에서 10대 소녀 5명이 방탈출 게임을 하다가 불 나가지고 방탈출 못해서 다 죽었어요. 어제. 게임에 탈출을 못했어요.
탈출했냐 못했냐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유일하게 탈출한 분 딱 한 분만 있으면 다 드러납니다. 유일하게 주님께서 죽음에서 벗어났으면 나머지는 탈출이 안 된 채 갇혀있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장 한번 봅시다. 20장 9절에 보면 제가 천천히 읽어보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요한게 있어요.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습니까 아니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어요. 예수님과 그 외의 모든 사람을 대비시키는 겁니다. 인간들이 죽음에 대한 모든 아이디어 있잖아요. 그 아이디어는 왜 엉터리냐 하면 살아있으면서 끄집어낸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그게 엉터리가 되는거에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착오를 일으키면서 죽음은 이런 것이라고 이렇게 설명하고 철학적으로 설명하는거 이거 전부다 죽음 아니에요.
부활의 세계가 어떤 세계냐 라고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면 죽은 선지자들이 살아서 춤추는 세계라고 보시면 되요. 죽은 선지자들이 나와서 살아서 춤추는 세계. 이게 변화산에서 그런게 있지요. 모세와 엘리야가 모세와 엘리야 그들이 살았어요? 죽었어요? 이쪽 인간 세계에서는 죽은 분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는 살았지요.
그럼 제대로 한번 정리해봅시다. 부활 또는 죽음인데 부활. 부활이란 또는 죽음이란 인간들은 내가 죽는 것을 죽음, 내가 다시 사는 것을 부활로 보잖아요. 그러나 이 선지자들은 ‘내가’로 출발하지 않고 상황이 그 환경이 부활의 환경이면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죽든 살든 살아있는 사람이고 내 환경이 죽은 환경이라면 죽든 살든 그 사람은 죽은 자가 된다는 이것이 바로 성경을 통해서 정리할 수 있어요.
환경이 선지자들이 살아난 것은 그들이 우리처럼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주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서가 아니에요. 그들을 감싸고 있는 환경이 하나님의 신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그 신안에 누가 작용하느냐? 예수님이 작용하거든요. 그럼 환경개선을 누가 하느냐? 선지자가 하는게 아니에요. 선지자와 예수님이 협조해서 하는게 아니고 그냥 예수님이 그 환경 자체를 언약 안에 있는 조건하에 언약 자체 환경을 뭐로 완성시키느냐 하면 십자가 부활로 완성을 시켜버리면 그게 성령인데 성령으로 완성을 시켜버리면 그 안에 잠자는 죽은 자는 다 주 안에서 산 자가 되어버려요.
인간들의 내 개인으로부터 나온 출발한 모든 논리와 모든 철학적 논리와 모든 과학적 논리는요 전혀 성경을 근처도 성경을 이해도 못하게 만들어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한계시록 20장 한번 읽어보세요. 요한계시록 20장 4절부터 6절까지 좀 긴데 한번 읽어보세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첫째 부활 나오지요?! 첫째 부활이 있다는 말은 무슨 부활이 있다는 말입니까? 세컨드 둘째부활이 있지요. 첫째 부활하고 둘째 부활이 있는거에요. 첫째 부활이 있어서 그들은 목 베었지만 주님보시기에는 뭡니까? 목 베어도 그들은 산 것이 돼요. 언제? 완성된 나라. 그걸 숫자로 천년이라고 표시한거에요. 완성된 나라에서는 천년이라는 말은 언약적으로 완성된 그 완성된 상태를 숫자로 표시하면 천년이에요. 또는 1000, 천년이란 말이죠.
언약이 완성이 되어 버리면 모세와 엘리야는 죽어도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유령들이 춤춘다는 말을 그렇게 한거에요. 지금 선지자들이 모여 부활의 세계는 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모여서 지금 춤추고 있는거에요. 이쪽에서 보면 죽은 자잖아요.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는 그들이 함께 이미 변화산에서 함께 잠시 잠깐 맛보기로 보여준거에요.
그래서 제자들은 분명히 한사람 만나기 위해서 다볼산 그 변화산 올라갔는데 막상 산 정상에 가보니까 한사람이 아니고 몇사람이 왔었습니까? 세사람이에요. 이거는 다니엘 세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들어갈 때 세명 들어갔는데 들어간 불속에 몇 명입니까? 네명이에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해놓은 겁니다.
지금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우리 성도보고 사나 죽으나 너는 내것이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는 너 육체적으로 죽고 사는 문제는 그딴거 신경쓰지 마라. 지금 나로 하여금 믿지 못할 사실을 믿게 하게 한 그 성령의 세계, 성령이 작용하는 성령이 역사하는 그 새로운 영역 새로운 공간에 들어온 것으로 기뻐하라 이 말이죠. 왜? 이미 부활되었기 때문에. 그게 첫째 부활이에요. 첫째 부활.
육체가 살 때 그게 둘째 부활. 육체는 이 육체 말하는게 아닙니다. 성형수술했는데 나옵니까? 그러는데 부활의 세계는 남자로 태어났는데 뭐 여자로 바꿔지나 그거 필요없어요. 부활의 나라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어요. 남자 여자 있을 때 살아생전에 남자 여자 역할 잘하세요. 이걸로 마감합니다. 곧 마감 죽으면 남자 여자 없어요. 호르몬 작용해가지고 나중에 나이들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 안된다. 남자는 여자되고 여자는 남자되고. 결혼생활 오래하면 남자 여자 막 바뀌지 않습니까? 부부가 사는게 아니고 두 사람이 살지요. 남녀 구분이 없어요.
둘째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형상. 첫째 몸은 아담에서 나왔거든요. 둘째 몸은 부활에 먼저 가 계신 예수님의 원형입니다. 예수님의 영광된 몸으로 우리가 그 몸을 받아요. 왜? 주님이 아담이기 때문에. 아담은 인간들은 아담은 새끼를 까잖아요. 주님도 아담이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까요. 그 아들을 낳을 때는 그 원형을 그래도 본 받아서 깝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몸이 된 지체가 되고 몸이 된다. 그게 전부다 성령으로 인하여 연관성을 가져요. 연결고리 거미줄처럼 성령으로 짜임새 있는 겁니다.
그럼 성령은 뭐냐? 성령은 뭐라고 표현 못하고 뭐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가 접근을 합체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라고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성령은 뭐냐? 인과응보로 사람을 따지지 않습니다. 인과응보로. 그 지긋지긋한 인과응보. 나쁜 짓하면 벌 받고 착한 짓하면 복 받는다는 그 지긋지긋한 인과응보에요.
시편 1편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 받아서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되어 있어요. 그거는 굉장히 역량을 두고 이야기하는 역량으로 솜씨를 발휘하는 말이 아니고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완성태’, 완성 상태가 된 그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present, 선물로 주어지게 되는 거에요. 성령은 선물로 주어지거든요. 믿음은 선물로 주어지는 거에요. “내 믿음 버려”라는 뜻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믿음을 버려야 돼요. 우리는 불신자가 되어야 됩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일어난 모든 것은 이거는 어떤 의미나 가치를 줘서는 안돼요.
이번 아가서 수련회를 하는데 그 아가서 여러분 한번씩 읽어 보셨지요. 또 참석 안한다고 안 읽어보고 하지마세요. 거기 보면 나와요. 거기 보면 어떤 가사냐 하면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여 내 궁전으로 오라” 하는게 나와요. ‘내 궁전으로’. 이걸 보면서 요근래 내가 좋아하는 노래 이 비슷한 노래가 있어요.
뭐냐 하면은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바람불면~어디론가~떠나가는~나의 조각배야”. 이게 누가 불렀느냐 하면은 카더가든이 불렀던 명동콜링이란 노래에 있어요. 들어봤어요? 카더 옛날 미국대통령 카더. 카더가든이 불렀던 명동콜링. 명동콜링의 그 가사 내용. “오 달링”부터 시작해요. 아까 잠깐 들어봤지요? “떠나가는” 이렇게 하거든요. 명동에 눈 오는데 커플이 누구 약 올리는 있는데 여기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나의 궁전으로.
이 가사가 우리에게 딱 맞는데 이 아가서의 내용은 특징이 뭐냐 하면 계속 사랑하는 장소가 옮겨다닙니다. 계속 옮겨요. 이게 뭐냐? 공간이 사랑을 유발한다는 뜻이에요. 공간이. 우리 둘만 있으면 되는게 아니에요. 이 공간이 새로운 사랑을 일으켜주는 거에요. 나의 궁전으로. 궁전이 뭐냐? 솔로몬 왕의 궁전이에요. 솔로몬은 누구의 소산물이냐 하면은 다윗 언약의 소산물입니다.
다윗 언약은 누구하고 누구하고 체결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 체결한 것이 다윗 언약이에요. 그 흔적이 다윗이라는 인물입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이에요. 그 인물을 가지고 언약의 흔적이 있는 인물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자’라고 이야기해요 인자. 사람의 아들이에요. 다윗 이야기에 최초로 나왔던 인자를 예수님께서는 자기 호칭으로 정해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영원한 왕국의 왕의 왕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거에요. 그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모든 새로운 부활의 첫째 부활의 공간에서는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 겁니다. 다윗처럼.
내 솜씨가 아니라 어떤 특정 공간의 변화로 인하여 또는 언약의 완성으로 인하여 나는 그 공간의 일원으로써 하나의 요원으로써 지금 파견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사도행전 8장 1절에 나오는 “성령이 네게 임하면 네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 이야기에요. 내 것을 이야기하면 안돼요. 나에게 찾아와서 나를 거덜냈던 그분의 작업을 증거해야 돼요. 나를 거덜냈던 것.
그래서 제가 여기서 보는게 뭐냐 하면은 보고 싶다 예쁜 그대, 예쁜 그대 있잖아요. 예쁜 그대를 한번 보면, 수련회를 미리 하면 안 되는데. 예쁜 그대. 예쁜 그대니까 어떤 사람이 예쁜 그대 할 때는 어떤 표준이 있어요. 예쁘다 안 예쁜다 하는 것은 그 표준이 뭐냐 하면 인간은 그냥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부터 어른이 되잖아요. 어릴 때 예쁘다는 것은 외부에서 누가 부모로부터 예쁜 것을 제공했지요.
자, 여자아이에게 부모가 준 크리스마스에 주는 예쁜게 뭡니까? 예쁜 인형이겠지요? 예쁜 인형. 예쁜 인형이라면 어른이 되서라도 예쁘다 안 예쁘다 기준이 뭐겠어요? 어릴 때 봤던 그런 바비인형이 하나의 표준이 되는 겁니다. 표준이 돼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비인형이 전혀 없는 북한 아이들에게 예쁘다는 의미가 뭐냐? 그들은 북한영화에 나오는 통통한 또는 늙은 여자 아나운서 있잖아요. 요즘 죽었는지 어쨌는지 그렇게 통통한 김정은 부인같이 얼굴 통통한 그게 북한의 미인이라면 미인형이라면 걔들에게 만약에 바비인형을 쫙 줘보세요. 애들이 미의 기준이 바뀌겠어요? 안 바뀌겠어요? 다 바뀝니다. 다 바뀌어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본다? 추하게 본다? 예쁘게 본다? 예쁘게 보지요. 그런데 여러분들 그런 경험 있습니까? 특히 여자분들 같은 경우 어릴 때 인형 갖고 노는데 집안에 개 한마리쯤 있지요. 개가 와서 잠자고 나오니까 개가 인형 다 쥐어뜯었다. 그때 인형 속에 내장이 다 튀어나오지요. 그때 인형 속은 뭐였던가요? 심각하죠. 다시 말해서 삭막하지요. 겉은 이쁜데 속은 다 뜯긴거에요. 그게 인간이에요. 그게 인간이라고. 성령께서 우릴 다 쥐어뜯는거에요. 성령이 ‘개’ 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외형적으로 굉장히 이쁘게 봐요. 굉장히 이쁘게 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간을 보내지요. 전에 여러번 했지만 아가서의 여자가 특징이 뭐냐 하면 시간이 멈췄다는 거에요. 시간이 멈춘거에요. 이거는 현실적 여인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시간이 멈췄기 때문에. 아무리 이쁜 사람도 고소영이 어떻고 뭐 이렇게 고소영이라 달콤한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이쁜 사람도 이영애도 마찬가지 산소같은 여자하는데 산소인지 일산화탄소인지 모르겠지만. 산소같은 여자라도 세월이 덮쳐버리면 세월이 가버리면 물론 나름대로의 원숙미가 있느니 위로는 되겠지만 원숙미 할래? 젊은 여자 할래? 딱 까놓고 원숙미 할래? 젊은 여자 할래? 하면 젊은 여자지요. 철 없어도 젊은 여자에요.
그 대사에 그런 대사 나온다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박보검이 나오니까 대사에 그런게 있어요. 직장에 여자 동료가 하는 말이 박보검 신입사원 박보검이 인물이 너무 이쁘니까 놀래가지고 저 정도 인물 같으면 인성이 개판 되도 괜찮지 않느냐? 자기들끼리. 나는 저 정도 인물 되면 인성 아예 안보겠다는 거에요. 그 정도로 이쁘면 우리 이성적인 판단 자체를 완전히 흐리게 만들어요. 흐린게 아니고 그걸 완전 무시하게 만들어요.
성경에 그게 나옵니다. 에스더. 에스더에 보면 유대인 종교의 문제가 아니에요.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 이런거 묻지도 않아요. 그냥 미스 바사 대회 해가지고 거기서 진선미 뽑았는데 최고의 미인이 바로 에스더였습니다. 이름도 얼마나 이쁩니까? 이름도 별이에요 별. 에스더, 별. 자기 사촌이 이야기합니다. 절대로 어디 가도 인물만 내세워라. 저 남자 너의 남편 되는 왕 아하수에르 왕은 네 인물에 뻑갔다. 따라서 쓸데없는 종교 그건 말할 필요없다. 끝까지 인물로 밀어붙여라. 끝까지 인물로 밀어붙여라.
끝까지 인물로 밀어붙여가지고 하만 작살났잖아요. 결국은 인물로 하만을 이긴겁니다. 인물이 권력을 이긴거에요. 충동을 이성을 이겨요. 이성을. 남자가 반해버렸어요. 그 인물에 반해가지고 나라의 반을 준다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부동산 반을 주는 겁니다. 나라의 반을 나라의 반을 주겠다. 너무 이뻐서. 충동은 창세기적입니다. 충동은 인간의 통제 대상이 아니에요. 왜 좋으냐? 그걸 왜 물어요? 그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인과응보가 아닌데요.
우리가 지금 해야 될 일이 지금 산더미 같이 많은데 그게 뭐냐 하면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는 저주에서 못 벗어납니다. 갇혀있으니까 탈출이 안돼요.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3년 동안 배워도 다 소용없어요. 탈출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은 되는가?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덮어씌우면 되죠.
자,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죄로 인하여 저주받았잖아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그냥 죽으면 ‘단독 죽음’이 되요. 그런데 아까 요한복음 20장 9절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어디서 살아서 어디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았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죠.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러면 죽은 자들 가운데 택한 백성 있다면 주님의 절차 가운데서 절차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났다면 죽은 가운데서 살아났음을 그대로 우리에게 덮어씌우면 비록 우리가 죽은 자라도 괜찮아요. 왜? 그게 절차에 꼭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은 자가 된다는 그 자체가 주의 일에 그게 재료가 된다니까. 주의 일에 근거가 되요. 자꾸 우리의 힘으로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안돼요. 그러면 주의 일이 주의 일과 다른 노선이 되어버려요.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나쁜 짓을 해서 죄 지은게 아니에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아담의 죄 안에서 태어난거에요. 여러분 이거 위로가 안됩니까? 그동안 여러분들이 악마한테 속아가지고 “아이고 내가 그거 나쁜 짓을 안 할건데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자꾸 악마한테 속아가지고 자기 탓, 천주교처럼 맨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천주교인들 퍼렇게 멍 다 들어서 차 뒤에 붙여가지고 내 탓이요 하는데 네 탓 아니야! 어떻게 자기 탓이에요? 자기 탓 아니에요. 주께서 죄인으로 태어나게 한 것은 주님 탓이지 어떻게 자기 탓이에요. 후회하지 마세요. 우리는 후회할 자격 없습니다. 후회한다고 달라질게 없어요. 후회해서 달라질게 있으면 후회하라고 하겠는데 후회할 수도 없고요 반성한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부모님 아프니까 아 또 뭐 잘해주겠다. 아이고 잘해줄 거 없어요. 아프게 한 것도 주님이고 농땡이 부린 것도 주님의 뜻인데. 어떻게 자꾸 자기한테 의미를 주려고 하지마세요. 우리는 중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별 개기일식 뭐 개기일식 이런데 책임 없어요. 주께서 하시는 것이지 “누구야! 나 보는 해를 네가 가렸어?!” 말이 안 되거든요.
옛날에 조선시대 때 나라에 가뭄이 들었어요. 가뭄이 들었을 때 나라의 임금이 했던게 뭐냐 하면 전국에 있는 결혼할 연령이 됐는데 안 한 사람 총각 처녀를 강제로 다 혼인시키는 일을 했어요. 왜냐 하면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음양의 조화가 결합이 안됐다고 보는 거에요. 그러면 음양의 조합이 결합 안됐으면 땅에서 음양의 조화가 결합되게 되면 그게 촉발이 되가지고 하늘에서 아이고 인간들도 음양됐으면 우리도 가만있으면 안되지 우리도 결혼하자 해가지고 하늘에서 비가 온다는 거에요.
지금 이 이야기가 조선시대서는 진리고 과학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들으면 어떻게 많이 불편하지요? 이 이야기가 백일의 낭군에 보면 나오는 대사에 나와요. “불편한가? 나만 불편한가?” 도경수가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보세요. 인간들이 왜 강제로 나랏님이 강제로 왜 혼인을 시키는 겁니까? 요새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갑자기 명령 내려가지고 전부다 운동장에 모여가지고 전부다 짝 안 맞추면 징역살게 만든다. 한사람씩 다 짝 맞춰서 하도록 그러면 절로 뭐예요? 절로 인구의 인구문제는 해결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나를 대통령으로 안 뽑지.
뭐라도 해봐야 인간은 뭐라도 해봐요. 답답하니까. 결핍되니까 해보는데 그게 인간이 뭐라도 해보게 하셔요 주께서. 해보면서 그것과 주님이 남기신 흔적과는 전혀 안 맞다는 것 연결이 안 된다는 것. 코드가 맞지를 않아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영원한 불신자입니다. 내가 믿는다는 것은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아요. 안 믿어도 돼요. 믿어봤자 죄인 되기 때문에. 믿으나 안 믿으나 죄가 됩니다.
그런데 지난 낮설교 시간에 했지요. 제가 이런 말했어요. 안 믿으려고 노력을 해야한다고 했잖아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우리가 불신자 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돼요. 왜냐하면 기도를 해야 기도가 소용이 없다는걸 알잖아요. 기도가 노력 아닙니까. 헌금을 해 봐야, 헌금을 해 봐야 헌금이 죄라는 것을 헌금하는 것도 노력인데 이 노력은 자기 딴에 인과응보의 정신에 의해서, 설마.. “성령에 의해서” 꼭 들어와야 돼. “성령에 의해서 감동으로 한 헌금은 주께서 받으시겠지”. 이런 멘트를 날리면서 해봤자 소용없어요. 이거는 내 기도 아니야 성령의 의한 기도라고 해봤자 소용없어요.
그냥 너 죄 짓는 것도 성령의 일이에요. 가만히 있어도 죄 짓는 것도 성령의 일이에요. 성도한테는 모든게 성령의 일이 되는 이유가 우리가 원래 그래서가 아니라 환경이 성령이 주어진 그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개념을 부활 이후의 안목으로 안목에 맞춤에서 나오는 환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뭘 해도 주의 일이 되게 하셔요. 주의 일이.
그걸 대구강의에서 했는데 대구강의 제목이 뭐였던가요? 과거재편이에요. 과거재편입니다. 어떤 이 순간 A라는 순간에서 B라는 현재까지 왔을 때 A라는 순간이 B라는 순간으로 왔을 때 우리는 인과응보로 봐요. 내가 그 때 좀 잘했을걸 또는 그 때 잘했으니까 내가 열심히 일했으니까 오늘날 이렇게 잘 먹고 잘 살지. 인과응보로 보는데 여기 십자가 와버리면 지나간 내가 해석했던 과거해석이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야만 되는 이유에 의해서 연결이 이런 일들이 꼭 일어났어야 되는 거에요. 내가 그때 태어나야 됐고 그 집안에서 이씨 집안에서 태어나야 했고 결혼할 때 누구를 만났어야 했고 그래야 이 복음이 복음답게 주께서 일방적으로 하는 주님의 환경, 새로운 부활에 첫째 부활의 환경이 부합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창세전부터 예정해서 이끌어왔다는 거죠. 그럼 이끌어왔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구원받은 거죠? 이게 B입니다. 그런데 죽 당겨서 C로 가지요. 그러면 나는 구원받았다 이런 것이 C의 관점에서 어떻게 됩니까? 재편되지요. 재편되지요.
왜냐하면 나는 그때 구원받았다 하는 순간 그 순간이 나의 중심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중심은 없어야 돼요. 없어야 되는데 야 그때 주여 기도할 때 영감님 오셔가지고 나는 예수다. 막 바이브레이션 나는 예수다아아아~~ 너는 나의 종이 되어야 된다. 아멘! 했던 그 순간이 나의 획기적인 계기의 순간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완전히 유병언하고 똑같은 거에요. 구원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하고 묻는거랑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그 사건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 중심사건은 뭐냐? 십자가 사건이 중심이에요. 우리는 사적인 단선적인 인생 이 자체가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환경이란 어떤 나 개인의 단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들은 전부다 주께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모이는 선이지 나 잘났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이는 나의 인생의 단선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러면 아직까지 계속 제가 미루고 있는 이야기 있지요. 그러면 어떻게 부활에 갈 수 있느냐? 누가복음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에 보면 거기에 탁구대 상품이름이 하나 나올거에요. 누가복음 24장 18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여기 글로바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하지요. 글로바 외에 한명, 두명이 지금 어디로 갑니까? 예수님이 죽었다는 소식 듣고 엠마오라는 촌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엠마오가 어디쯤 되는지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예루살렘 자체가 고산지대니까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이 말이죠. 내려가는데 물론 지역적으로 내려간다는 것도 있지만 수도이기 때문에 제일 높다고 보지만 하여튼 약간 지역적으로 내려가 있어요. 엠마오로 내려가는데 그때 16절에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지요?
자, 이것을 설명 이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몇 년 전인가 몇 년 전에 대전 강의 하면서 요한계시록 하면서 했던 단어가 있어요. ‘중복현실’. ‘중첩현실’. 이제 여러분들은 그 단어 쓴 것을 이해되십니까? 중복현실이에요. 예수님은 살아 멀쩡히 살아계십니다. 모세 살아있지요? 아브라함 살아있고 다 살아있어요. 귀신인가요 그럼? 중복현실이에요 중복현실.
중복현실인데 현실 따로 그것 따로 있는게 아니고 현실에 같이 들어있어 엮어져 있으니까 중복현실에서 더 정확하게 말해서 ‘증강현실’. 증강현실. 알함브라 궁전에 보면 나오지요 증강현실. 지금 알함브라 궁전 스페인 가가지고 그라나다에 가가지고 칼싸움하는 드라마 있거든요. 다른 사람 뭐하고 있는데 주인공 혼자 이러고 있다고요. 왜? 또 다른 현실에 속하기 때문에. 진우씨는 405번째 입장했습니다 그런거 나와요. 드라마 보면 나온다니까. 채널 17번 아예 안 보는구나.
증강현실. 증강현실 얼마전에 스마트폰에 뭐 떠가지고 왔다갔다 찾아다닌다고 게임하는거 있잖아요. 이름 뭡니까? 포켓몬이라는거 그게 증강현실이거든요. 현실인데 현실은 그대로 있고 현실에다가 또 하나 현실을 얹어버린거에요. 진짜 인간들 생각하는 인공지능에 의해서 생긴 증강현실이 벌써 지금 예수님 당시에 부활세계로서 증강현실 되어버린거에요.
눈을 가리니까 못 봤는데 지금 그러니까 현빈하고 같이 다니는거에요. 그 주인공 드라마 주인공하고 같이 있는거에요. 어느 것이 우세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어주는 겁니까? 아니면 제자들이 피동적이에요? 눈을 떠있을 경우에는 눈 뜨고 눈을 못 뜨면 못 뜨는거에요. 완전히 종속적 존재에요. 동등된 현실이 아니고. 이쪽은 이쪽에 따로 노는게 아니고 이쪽에서 이쪽에 종속된 하위현실, 하위현실.
중첩현실인데 그걸 참 중복현실이라고 했지만 다중현실인데 한쪽 현실이 한쪽 현실을 누르고 있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지금. 신학교에서는 이렇게 인공지능 안 가르쳐주지요. 증강현실 안 가르쳐 주지요. 그러면 신학교에서는 뭘 가르치느냐 이걸 가르쳐요. 이거 이거 윤리와 도덕. 이거 이야기하잖아요. 성령 받았으면 말씀 지켜서 착하게 살아 이거 가르친다고요. 착하게 살면 뭐 받는다? 인과응보에 의해서 뭐 받습니까? 착하게 살면 뭘 받고? 복 받고 좋은 일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자, 이걸 왜 가르치느냐 하면 지금 이걸 신학교에 있는 학생들이 졸업해서 목사가 되가지고 나가게 되면 자본주의 사회에 고객들이 있지요. 종교 고객들이 진리를 원합니까? 아니면 이미 자기들이 진리라고 여깁니까? 자기가 진리지요. 그러면 교회가 고객이 왕이니까 고객맞춤 설교를 해줘야 되는거에요. 이 인간들이 이 고객들이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아까 무슨 이게 제목인데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삭막한 존재라고 이름 붙였잖아요. 인형 다 찢어놓은거.
인간도 아닌게 인간으로 버티고 있는 인간들이에요. 이 세상에 인간이란 없어요. 인간 같아야 인간이지. 인간 아니거든요 이거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잖아요. 악마에 속해가지고.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감추기 위해서 기어이 우리도 존엄성이 있다 인격이 있다 인권이 어떻고 맨날 인간성을 주장하거든요. 그 인간성 사람들이 뭐냐? 교회 돈 내는 고객들이라고요 고객들. 고객들이 원하는 것은 인과응보거든요. 이왕 착한거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 쉐마 쉐마 해가지고 들으라 들으라 해가지고 이 말씀대로 지키게 되면 뭐가 주어진다? 30배 60배 100배 주어진다고 간증했던 목사들이 번갈아 가면서 강단 서가지고 헌신예배했다 이 말이죠.
감사헌금 안 했더니만 이렇게 집안 이 꼴 났는데 감사하고 난 뒤에 진짜 나는 안 믿었는데 60배 딱 계산해보니까 빠진게 6000만원 빠졌는데 들어온게 정말 그때부터 하나님 말씀이 진짜인줄 알았다 이런 식으로 간증을 막 해댔다 이 말이죠. 인과응보에요. 고객들이 그걸 원한다고요. 그러면 신학교에서 맞춤 신학교가 프랜차이즈 아닙니까? 처갓집치킨. BBQ아닙니까 BBQ. 교단이다 교단. 교단에 상납금주고 건물 세우죠. 이게 하나의 기업이거든요. 고객을 만족케 해주면 기업이 된다. 장사되거든요.
선교 못하거든 간접적으로 선교하는 방법이 뭡니까? 선교헌금 내는 거죠. 헌금 내게 되면 30배 60배 100배 갚아준다고 하는거에요. 왜? 하나님의 소원은 뭐냐? 이 땅 끝까지 하늘나라 확장되는데 이거 확장되는데 기여했기 때문에 기여한 만큼 기여 더 하라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는 것이 이 논리상 맞다는거에요 그게. 지금 인간이 달라졌습니까? 안 달라졌습니까? 전혀 안 달라졌지요. 산 채로 천당 가겠다는거에요.
지금은 조금 윤리 도덕적으로 밑이지만 성화가 된다면 말씀대로 산다면 성령께서 더욱 더 거룩하라 거룩하라 해가지고 거룩하게 되면 나중에는 진짜 A등급 서울 의대 들어갈만큼 되는 거에요. 코디가 누구냐 하면 코디가 부흥사 코디 붙여가지고 요령 기도하는 요령 헌금하는 요령해가지고 붙여주면 이거는 진짜 전국 0.1%에 들어갈 수 있는 천국 가는데 그때 천국에 팬티바람으로 부끄러운 구원받는게 아니고 상급을 듬뿍이 받는 그런 천국에 간다는 거에요.
천국에도 계급이 있다는 단테의 신곡이라는 그 책에 나오는 르네상스의 첫째 작품에 보면 나와 있어요. 단테의 신곡. 기독교가 그렇게 나오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쟁이보다 내가 더 착하다 이 말이거든요. 너희들은 가난한 아프리카에 우물 물 안 나오는데 돈 줬느냐? 유니세프에 돈 줬어? 너희들은 교회 키우는데 돈 썼잖아. 우리는 기독교는 아니지만 내가 교회는 안 나가지만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소아마비 약 되라고 거기에 다 헌금 다 하고 보냈다는 거에요.
한평생 돈 가볍게 써야 된다 이래가지고 어려운 사람들 고아원 사람들 우리가 돈 줬으니까 나는 교회 안 나가도 내 뜻대로 헌금 이웃사랑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 계시면 반드시 나에게 설마 이렇게 착한 인간을 어느 종교에서 내가 지옥 간다고 할 종교는 없다고 보는 거에요. 왜? 종교는 똑같이 전부다 사업하는 동네이기 때문에. 그 밥에 그 나물이기 때문에 없어요.
교회가 고객들이 오고 교회에 돈 들고 오도록 만들면 교회라는 부동산은 반드시 크게 지어지게 되어 있어요. 콘크리트 말고 홀 말고 빨간 건물로 고딕체로 세워지게 되어 있어요. 주차장 넓히고. 왜 그렇게 하게 하십니까? 탈출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탈출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평생 너는 인과응보에 갇혀 죽어라. 네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평생을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요. 그래서 주님의 모든 말씀은 성령이 하신 말씀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 백성을 건지는 것과 그리고 자기 백성 아닌 사람을 지옥보내는 거에요.
둘 다 공통점은 뭐냐? 둘 다 기어이 신자 아님을 내가 평생 너를 두고 평생에 내가 다 까발릴거야. 네가 평생에 신자된 적이 없음을 말씀을 통해 탁탁 까발려주는 거에요. 신자 안 됐기 때문에 지옥 간다? 그거는 인과응보거든요. 나는 신자 되고 싶은데 주께서 신자 안 되게 해줬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께서 나를 사용한다는 뜻이에요. 누구처럼? 열한제자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저주한다고 했지요. 그 고백이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왜? 이게 덮치니까. ‘절차의 응결’이니까. 우리가 하나의 응결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에 어느 성경 나와 무관한 성경 없어야 돼요. 바리새인 이야기, 가룟 유다 이야기 그리고 저 사울왕 이야기 전부다 오늘날 욥의 이야기, 욥의 친구 이야기가 다 나에게 나의 현실로 작용되어서 주어지는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입니다.
제자들이 경험했던 그 경험은 지금 우리의 21세기 자본주의를 통해서 충분히 지금 체험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통해서 충분히 체험해요. 전에도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사람 나고 돈 난게 아니에요. 그거는 세상을 몰라서 그래요. 돈 나고 사람 났어요. 이 말은 돈 없으면 무슨 취급 못 받는다? 사람 취급 못 받아요. 십자가 마을에 뭐 좋은 글 올려도 소용없어요. 돈 없으면 세상을 명확히 봐요. 뭐 십자가 마을에 좋은 글 올려도요 그래가지고 한 달에 얼마 버는데?
많은 사람을 그렇게 복음 전하고 개척교회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수입이 지금 얼마래? 돈 나고 사람 났어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럼 혹시 그럴 사람 있지 않겠습니까? 이럴거에요. 그럼 주님께서 앞에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만약에 네 오른 눈을 잘못하거든 빼버려라”. 하는 그 대목 나오지요? 혹시 그런 사람 진짜 돈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애꾸되든지 손모가지 날라가든지 뭐 있어야 돼요. 멀쩡한데 그런 사람 없어요.
그리고 옷을 겉옷은 다 벗어줘서 내복으로 다니는 사람 되야 돼요. 왜? 겉옷은 다른 사람 다 줬으니까. 그리고 맨날 일과가 뭐냐 하면은 맨날 10리 뛰는 사람. 맨날 조깅하고 있어요. 왜? 5리를 가자하면 10리를 가야되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겨냥해서 이야기한거에요 주님께서. 네가 저주를 받아도 제대로 받아봐라는 말이죠. 어설프게 율법을 적용하니까 아직도 내안에 윤리 도덕이 쌩쌩하게 살아있잖아요. 제대로 한번 저주 받아봐요 제대로.
지옥에서 지금 웃으면서 앉아있는 것도 참 복입니다.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이렇게 버틴것도 큰 은혜에요. 주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이것은 공격용입니다. 지금 교회 안 나오고 복음 거부하는 사람 있지요? 그 사람이 그렇게 기도하고 움직이고 살아가는 것 누구 힘입니까? 주님 주시는 힘, 은혜지요. 그거 뭐로 보상하겠습니까? 어떻게 보답했어요? 보답 안하고 있지요. 그들은 교회 안 나오고 예수 모르고 복음 모르는 것을 자기 자랑으로 여긴다니까요. 그런데 성도의 자랑은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의 자랑은 뭐지요? 십자가지요 갈라디아서 6장, 잘 이해하고 있네.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게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은혜는 받아놨는데 보답한 것은 있다 없다? 전혀 없게 된 것을 자랑하는거에요. 왜? 그걸 십자가 아니면 내가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누가 알게 하겠어요? 주께서 나를 인간 만들어 줬으니까 인간 됐지 내가 인간 될려고 노력한다고 인간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는 것을 내가 알게 됐다는 사실. 이거는 부활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결정된겁니다.
아까 누가복음에서 우리가 봤잖아요. 그들은 수동적이에요. 심지어 그들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23절에 나옵니다. 24장 30절.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 다음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봤거든요. 자, 한번 보세요. 봤거든요. 봤지요? 그 다음에 예수님 어디 갔습니까? 떠났지요? 과연 떠났을까요? 아 이게 보통 믿음 아닙니다. 증강현실 함께 있어요.
그러니까 신자가 뭐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거에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말은 보이는 나를 믿는다? 안 믿는다? 보이는 나를 쓰레기로 여기는 겁니다. 아까도 길에서 이야기 했는데 신호 기다리면서 이야기했잖아요. 쓰레기는 아무데다 버려도 괜찮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쓰레기인줄 모르고 꼭 은그릇 금그릇에 담겨야 나 답다고 여깁니다. 아파트 적어도 60평짜리 이상 되야 나 답다고 여기고 내 자식은 적어도 하버드 정도 다녀야 교육시켰다. 쓰레기라는 사실을 자꾸 생각 못하고 있는거에요.
그러면 내가 쓰레기라면 어떤 점이 좋냐 하면 모든 게 감사로 이어지죠.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아직도 목사 못되고 전도사로 빌빌 기어도 지옥 같은 이 세상 아직 살아남은게 어딥니까? 우리가 죽은 것이 두려워 아까워하지 마세요. 지금 살아있다는게 이게 신기할 정도로 기적입니다. 왜 살아있어야 되지요? 예?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가다가 왜 물에 안 빠졌습니까? 배 타고. 그때 배 안탔구나. 그 완도 근처에서 그 무슨 항이죠? 하도 유명하죠. 노란거 붙여서 세월호 있잖아요. 팽목항 근처에서 왜 안 죽었어요 그때? 여러분 그때 전라도 쪽에 놀러 안 갔습니까? 그때 죽어 오시지 왜 살아서 멀쩡하게 돌아옵니까?
이게 산다는 것이 우리의 솜씨가 아니고 우리가 착해서 사는게 아니에요. 인과응보로 사는게 아니고 주께서 은혜를 주신 겁니다. 살려줬는데 너 나한테 뭐했나? 공격용이에요. 한거 뭐 있어요? 없지요 뭐. 뭐 있습니까? 나 잘났다 외에는 없지요. 그러니 이 은혜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이 엄청난 은혜를.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는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잘났다를 증명하는게 아니라 지금 다른 현실에, 증강현실에 주님이 살아있으니까 날 좀 보지 말고 주님이 나를 날마다 죽이는 그 보이지 않는 그 손길을 너희들이 느껴라 이 말이거든요.
수련회 좀 참석했으면 좋겠는데 여러분 전부다 증강현실을 모르고 다 현실에 속하다 보니까 인과응보에 의해서 주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바라기는 수련회 때 그저 살아서 참석하고 돌아갈 때도 살아서 돌아가게 되길 여한이 없습니다. 갑자기 지붕 무너져서 집단으로 압사할 수도 있는 문제고 그뿐만 아니고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이 참새 뜻이 아니듯이 우리가 참새보다 더 나은거 없어요.
참새는 주께 영광이라도 돌리지 우리 인간은 그것보다 더 못해요. 우리가 개새끼 욕하면 개가 화를 내야 됩니다. 우리가 화 내는게 아니고. 어디 더러운 인간을 나한테 비유하냐 이렇게 되어야 돼요. 가장 낮은 죄인의 몸으로 오셔서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라는 새로운 현실로 덮쳐서 반드시 내 백성은 성령을 줘서라도 눈을 뜨게 한다는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 우리는 감사 외에는, 찬양 외에는 우리는 할 소리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와 고마움만 나와야 될 우리의 입에서 공포와 두려움과 벌벌 떰과 생존에 대한 염려, 걱정, 근심, 육의 열매가 왠 말입니까. 온유와 화평과 성령의 열매가 십자가를 자랑하면서 덩달아 자신만만하게 당당하게 지옥을 밟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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