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6 23:44:03 조회 : 291
무능성 181106 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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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민희
(IP:121.♡.203.222) 18-11-19 14:07
강남-요한복음 18장 39절(무능성)181106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8장 38절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라고 되어 있지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의 심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심정’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성령만이 하나님의 가장 깊은 뜻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성령이 온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깊은 뜻에 우리가 받는게 돼요. 알게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게 되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이 말은 성령이 안 오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른다가 되겠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아니까 성령이 안 온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는게 되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2장 앞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안 왔을 때 성령이 안 왔을 때 그들의 하는 그 내어놓은 결과물이 뭐냐 그게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을 안 받았을 때 그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은 십자가에 대한 몰이해, 십자가에 대한 이해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을 안 받게 되게 되면.
그럼 성령을 안 받게 된다는 말은 인간이 성령을 요구하지는 않잖아요. 성령은 하나님이 주시고 싶은 사람에게 주시기 때문에 결국 성령은 여기 계시다면 성령을 모르는 사람이 십자가에 대해 이해를 못 한다 몰이해라면 모든 인간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자신의 지혜로서는 이해를 못하는 형편에 있지요. 자신의 지혜로서는. 모든 인간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거에요.
그러면 내가 무식하다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본인이 아무리 공부해도 그걸 알 길이 없어요. 하나님 쪽에서 뭐를 들이대야 됩니까? 십자가 사건을 들이댈 때 ‘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한 지각이에요. 자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게 되는 겁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인간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이해하지를 못해요. 몰이해니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의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라는 것을 성령이 옴으로써 비로소 이게 자각하게 되요. 성령이 옴으로써.
왜냐하면 성령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마음은 뭐냐? 하나님의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뭐냐 하면은 너희들은 너희 자신 조차도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역시 모르고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상 보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마음이에요.
이단교회의 특징은 이단교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인간 자체를 안 건드린다는 겁니다. 이단교회의 특징이에요. 인간 자체를 건드리지 않아요. ‘이 무식한 자들아’ 라고 건드리지를 않아요. 무식자들을 건드리려면 뭐 여러분들이 공부를 했습니까? 이렇게 건드리는게 아니고 여러분 성경을 알아? 이렇게 건드리는게 아니고 십자가만 전하면 십자가만 증거되면 곧 십자가 증거하는 그 목적과 이유가 뭐냐 하면은 ‘우리들은 무식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십자가가 증거되는 거에요. 이거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입니다.
기존 교회가 인간을 안 건드린다는 말은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 있는거에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다른 구절에 보면 이걸 ‘걸림돌’, 십자가는 걸림돌이다. 걸림돌이라고 하는 것은 걸려서 털썩 자빠지는 거에요. 자빠진다는 말은 그 사람의 품위, 위신, 직업, 학력, 재산 상관없이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서는 다 넘어지게 만드는 십자가에요. 직분 이런거 관계없이.
십자가 앞에서 나는 몰이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무식하다. 다른 말로하면 더 크게 노골적으로 하면 나는 무능자다 무능자다. 십자가 앞에서 나는 무능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증거하라고 자기 자신이 십자가로 인하여 그냥 나 무능하다 하면 또 나 무능하다는 것을 자랑질하니까 무엇에 근거해서 나는 잘하고 싶어도 나는 무능자고 알고 싶어도 무식자고 그럴 수밖에 없는가를 십자가를 증거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거죠.
그러면 내가 십자가 알기 전까지 우리가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교육받고 예배드리고 뭐 하는 여러 자기 바겐세일하고 바자회 열고 선교한다고 나대고 하는 그 모든 것도 뭐냐 하면은 이게 유능한 것이 아니고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는 거에요. 무식의 극치를. 아 우리 교회 부흥됐다 헌금 얼마고 교인 수 얼마고 이게 뭐냐? 무식과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 가족 화목하고 이런거 전부다.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무능하고 무식한 인간이 가정의 화평할 권한이 없어요. 내 인생이 편하게 될 자격이 자격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그 행동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그 행동 하나에 뭐가 포함되었느냐 하면은 성령을 받지 않는 상태에 대해서 인간의 행동 속에는 복수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 복수심이라고 하는 것은 내 인생이 이렇게 사는 것은 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인간은.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은.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내가 보기에 내 인생은 이런 식으로 전개되면 안돼라는 강한 고집같은게 있습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죠. 그래서 자기 인생이 자기 욕망에 영 충족되지를 못하니까 빨리 그걸 보완을 하고 빨리 보상을 얻어내려고 하는 거에요.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이상하게 자기 자신을 피해자라고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억울할만하다는 거에요 자기 자신은. 무슨 근거로 자기 자신을 그렇게 너는 인생을 살면서 분통 터뜨리고 억울하다고 느끼느냐 무엇에 잘나서 그걸 제시하냐 하면은 나는 내가 알고 내가 유능한걸 어떤 가능성이 있는걸 내가 알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바리새인 생각하면 쉽게 나오지요. 유대인들 생각하게 되면.
그런데 십자가는 뭘 의미 합니까? 십자가를 전하는 사도 바울 보세요. 과거에 그 사람이 뭐냐 하면 사울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사울일 때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뭐였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일을 했지요? 자기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걸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 본인을 핍박했다고 하는 거에요. 본인을 핍박했다.
그러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놓친게 있어요. 뭘 놓쳤느냐 하면 관계망을 놓친거에요. 예수님과 예수님의 백성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망에 대해서 본인이 그걸 몰랐던 겁니다. 자기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지 예수 핍박하지 않았아요. 왜냐하면 예수는 이미 죽었으니까 뭐 존재하지 않으니까 핍박 안 되고 다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라고 본거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가지고 사울에게는 안 보이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망이 있는데 그것은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니까 마음 놓고 핍박한거에요. 그 보이지 않는 관계망을 거론해서 사울에게 찾아왔다면 사울에게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관계망이 있어요? 없어요?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망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실제로 알았지요.
그러면 사울이 사도가 되고 난 뒤에 뭘 안거에요?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망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런데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 존재하는 것을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사울 나름대로의 하나님 섬긴다고 예수 믿는 사람 핍박했잖아요.
그럼 사울이 왜 그런 이야기 했느냐 하면 자기와 관련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니까 자기와 관련된 인간들의 관계망이 있을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걸 논리적으로 하면 전개를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인간들의 관계망이 주님의 관계망을 방해하고 도전하고 공격하는 것, 그게 이 현실세계입니다. 이 현실세계. 사도를 통해서.
내가 나 된 것은 그동안 나에게 가르쳤던 많은 사람들의 아는 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한테 교육하고 세뇌하고 잔소리했던 그것이 그냥 날라가지 않고 그것이 나라는 관계망을 형성한거에요. 저 분은 나한테 돈 준 사람, 저 사람은 나한테 쓸데없는 사람 관계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혼자 살아가는데 혼자 살아가는게 아니에요. 눈에 밟힌다는 뜻이 무시해도 되는 그런 사람들이 무시해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은 나 혼자다 이렇게 하지만 사람이 행동할 때 그냥 행동 못하잖아요. 무시 못 하는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부모가 암에 걸렸다. 무시되던가요? 아니죠. 부모는 부모인생 나는 내 인생인데 아프다하면 뭔가 돌봐야 된다는 관계망이 이미 형성되어 있지요. 그 관계망을 놓고서 부모가 암에 걸리고 누가 이렇게 힘들다 하면 괜히 부화가 나는 겁니다. 화가나는 거에요. 뭔가 내 인생이 긁혔던 상처가 난 느낌이 든다니까요 내 인생에. 억울하고 싶은거에요. 억울한 느낌 든다 이 말이죠.
다른 부모 멀쩡한데 왜 내 부모 아픕니까? 이렇게 억울한 느낌 든단 말이죠. 자식들도 마찬가지고. 그게 뭐냐 하면은 인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관계망 속에 자아가 놓여 있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가 자기가 잘난체 하는 것은 주변에 관계망에 있는 사람들이 아이고 효녀 났다 아이고 착하다 붕붕붕붕 마구 띄운거에요. 그리고 거기에 걸맞게 나는 행동해야 된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촉구했고 재촉해온겁니다.
방금 길게 이야기한 것을 오늘 본문 주제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것을 쉽게 용어를 한다면 누가 나를 착복하고 있는 거에요. 착복이라는 말은 뭡니까? 딱 이렇게 내 것 만들기에 오므라드는 것 착복. 저 사람은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다 이건 내 자식이다 딱 착복하는 거에요 인간은. 착복하면서 그만한 착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런 자격이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 너 하나 책임질 수 있는 여력은 있어. 이런 식으로 말이죠. 너는 내 사람이야 이런거 말이죠.
그리고 나한테 잘못된게 아니고 내가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잘못되어있을 때는 내가 부화가 나는 이유는 관계망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게 좀 어려운데 예수님은 뭐를 증명하느냐 하면은 이걸 증명해요. 나는 여기 없다. 나는 여기 없음을 증명합니다. 나는 이 땅에서 없어지고 사라져야 될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죽음을 증명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자기 죽음을.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유일하게 있는 것이 나이고 느껴지는 나이고 나는 내가 여기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평생을 살아가죠. 내가 여기 있음을. 그래서 오늘 본문같은 경우에는 두 개의 관계망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빌라도 및 유대인들의 관계망.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착복하고 있어요. 우리는 우리 편이다 일종의 공동체라 하지요.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한 패 먹고 있습니다 한 패. 단결되었어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뭐냐 하면 자기들이 이렇게 여러 사람들 한 패 되어있으니까 예수님께서 뭐를 신문하느냐 하면 우리 편은 이만큼 되는데 당신 편은 몇 명이죠? 당신은 어느 정도 세력화 되어있고 당신이 얼마나 우리만큼 힘 쎄? 우리만큼 네 편 많아? 네 편 먹는 사람 많아? 라고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여기에 37절에 보면 네가 왕이냐?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묻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에요. 우리는 든든하게 유대인의 내가 총독이고 지금 이 땅에서 왕질하고 있는데 너는 그렇게 거스르고 잘난 척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 이스라엘 유대 땅에서 네 편은 얼마나 돼? 라고 묻는거에요. 사람이 어떤 질문을 할 때는 자기한테 신경쓰고 있는 그것을 타인한테 질문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 신경쓰는 것을.
아 참 벤츠 참 좋으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도 저런 차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그게. 자기가 관심있는 것에 대해서 그쪽에 질문하는 거에요. 너 남자친구 멋있어? 이건 뭐냐 하면은 나도 좀 멋있는 남자친구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관심있는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아까 그 동영상할 때 레이싱한다 경주하는 것.
나는 이런 것 갖고 있는데 나보다 혹시 더 좋은 옷 나보다 더 좋은 옷을 걸친 사람 없을까 라고 하는 것은 타인을 우회해가지고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 옷이 내 존재의 보상을 충분히 해주고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그런데 옷 입고 있는데 옷이 뒤에 찢어졌다. 여기에 대해서 복수심을 발휘하죠. 나는 이정도 옷을 입는데 긁어놨으니까. 나는 이것을 복수할만한 권한이 있고 자격이 있다고 보는 거에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내가 하루하루 살고 평생을 살아도 항상 머릿속에 있는 것은 나 여기 존재하고 있음 그만한 자격 있음 그거 증명하려고 인생을 살아가는 거에요. 아까 그 이단교회 이야기 했는데 이단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집합하는 곳입니다. 자기가 살 자격 있다고 그러니까 그만한 자격 있으니까 신이시여 더 잘 살게 해주되 더 살게 해주되 이왕이면 행복하고 더 오래 풍족하고 안 다치고 건강하게 살게해주옵소서. 우리 가정 화목하고 그거 바라고 교회오는거에요. 교회와서 비는데 무당집하고 같은겁니다. 보이스피싱에 돈 뺏기는 거에요 그런거. 그걸 교회 탓하고 목사 탓하면 안돼요.
지난 그 낮 설교했잖아요. 교인이 나빠요. 교인이 나쁜거에요 교인이. 너는 무식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어 라는 십자가의 이야기를 왜 목사들이 안합니까. 오는 고객들이 내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 달라고 오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뭐냐 나 죽었잖아 자기 죽음을 증명하는 거에요.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증명하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나 여기 없어야 될 존재라고 나 없다고. 너희들 관계망에 의하면 나는 전혀 이 땅에서 엮어진 관계망이 형성되지 않는 없는 사람이에요. 그 두 견해의 충돌입니다. 오늘 본문이. 두 견해의 충돌이고 하나의 하나님 그렇게 되는 과정이고.
자, 그걸 어떻게 실시하느냐 하면 이제 예수의 심정을 알았으니까 예수님께서 은근히 즐기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없애버릴 것인지를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너희 속내를 다 펼쳐보라. 속내가 뭐냐 하면 우리들은 여기에 이 땅에 건재해야 된다는 그 속마음 그것이 내 앞에서 어떻게 숨겨지지 못하고 노출되는지를 한번 시작해봐라 이 말이죠. 그래서 빌라도부터 먼저 시작했지요. 너 편 몇 명이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겁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자, 왕은 백성을 그다음에 뭐다? 백성을 뭐한다? 아까 했잖아요. 착복하고 있잖아요. 내가 책임질께 인생. 그러니까 너는 나를 왕이라고 생각해라. 서로가 서로를 착복하고 있는거에요. 이 착복이라고 하는 것은 있음을 확인하는 거에요. 있고 또 있고 오늘 또 있고 있음을 계속 꼭 찍어서 확인하는 겁니다. 나 여기 있지. 내일 아침 되면 또 아 나 여기 있구나 자기 여기 있다는 것을 되게 좋아하는 거에요.
모든 CF나 드라마 모든 영화 뉴스나 이런거 한번 보세요. 그 모든 드라마나 CF나 전부다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은 나 여기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있어야 된다는 울부짖음이에요. 나 없어지면 안된다는 울부짖음이라니까요. 그게 시든 그게 예술이든 문학이든. 뭐 알쓸신잡인가 뭐 나와가지고 그런 것도 전부다 하나의 문학 인문학 과학 교양 전부다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은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우리는 여기 있어야 돼 그겁니다.
종교라는 것은 문화활동이죠. 종교는 문화활동이에요. 나 여기 있음을 제대로 확인받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떠납니다. 떠나요. 그래서 있음 쪽에서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 쪽에서 기대하느냐 하면은 너희들이 나를 떠밀 것이라는 거에요. 제발 어울리지 않거든 사라져라 하는 식으로 있음이 그냥 있음이 아니고 떠미는 거에요.
CF에 그런거 있잖아요. 이 그레이색 하는데 욕인지 뭔지 모르지만 제발 좀 나와! 변비약. 제발 좀 나와! 이 그레이색 욕하면 안 된다 참. 그거 지금 주님보고 하는 거에요 그게. 내 편 아니거든 좀 나가라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39절입니다. 그레이색 나와요.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놓아준다는 말은 살려준다는 말이에요.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이 이 사람을 왕으로 섬기고 이 사람의 백성이 되고 싶으냐고 묻는거에요. 그러니까 뭡니까?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다. 저 사람 좀 이렇게 우리 코앞에서 우리 눈앞에서 좀 없애주세요 라고 하는 거에요. 없애주세요. 누가요? 내가 꼭 있어야 될 우리 관계망 내가 아니죠. 내가 있는게 아니고 우리 관계망 우리 좋게 형성된 관계망은 계속 유지 되어야 됩니다 라고 하다 보니까 저 사람은 우리의 관계망을 훼손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 사람은 제발 꺼져줘야 됩니다. 제발 사라져야합니다 라고 요구하고 있는 거에요.
이 사람들의 이주장이 바로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 전하지 못하는 오늘날 교회입니다. 제발 예수님 좀 꺼져달라는 거에요. 교회만 남고 예수님 나가라. 예수님 좀 우리 교회에서 나가달라는 겁니다. 당신이 오게 되면 우리는 무능한 사람이 되고 무식한 사람이 되니까 이거는 내가 살고싶어하는 내 심보에 복수심을 유발할 뿐이죠. 내가 왜 죽어야 되는데? 나는 더 살고 싶은데.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요즘 오늘 아침에 뉴스에도 대구에 앞산 가까운 산인데 사람들이 올라가는 산인데 거기에 멧돼지가 나왔어요. 멧돼지가 나와가지고 사살되고 이랬는데 그 멧돼지가 요새 발정기가 되어가지고 멧돼지를 대처하는 법이라고 뉴스에 나왔어요. 그 눈 마주치지 말고 등 뒤로 그냥 숨고 도망가고 그래야 된다고. 싸울려고 하지말고 도망쳐야 된다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발정기가 되어 가지고 정신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그걸 보면서 멧돼지가 곧 인간이에요. 인간하고 싸울 필요도 없고 경쟁 할 필요도 없어요. 뭐가 약이냐 하면은 사살하는게 약이에요. 멧돼지는. 인간은 지옥에 보내는게 약입니다. 지옥 가서도 인간 안되고 지옥 가기 전에도 인간 안돼요. 인간 안되는걸 자꾸 인간 만들려고 하지마세요. 마주치지 말고 도망치면 돼요. 고집스럽게 굴거든 그냥 도망치면 된다고 아버지고 어머니건 간에. 그럼 자식이 뭐에요? 그거 멧돼지입니다. 특히 발정기에는 더 독이 올라와 있어요.
교인들하고 이야기 안돼요. 멧돼지 집합소인데 무슨 거기에 복음을 이야기해요. 개 돼지 한테 진주 던지는거하고 똑같지요. 눈 뻘개가지고 앞으로 슉슉 땅 파면서 날 건들지마 이런 식으로 전부 다. 날 부정하지마라 전부 다 이런 식이라니까요. 남편이 술 먹고 들어온 것도 멧돼지가 술 먹고 들어온거에요. 날 건드리지 마 무시하지마라 이거에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수협에서 옮기라고 했거든요. 옮길 때 옮기면 월세가 47만원이고 옮기기 전에는 17만원인데 공사비 내야 되고 다 해야 되는데 이거는 재판해서 졌어요. 졌는데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물을 끊고 전기 끊었는데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 멧돼지들입니다. 깡패들이에요.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 요한복음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상종할 가치가 없는 인간들 상종할 가치가 없는 인간들. 성령 안 받은 인간들은. 항상 복수심에 활활 타고 있어요. 발정기. 항상 복수심에 활활 타고 있어요. 복수심에. 세상 모든 잘못은 세상 탓이고 내 인생은 이렇게 살 인생이 아니고. 그러니까 성령받기 전에 사울 모습이에요 사울 모습. 나는 착한 일만 했으며 복을 받아도 나 먼저 0순위로 내가 받아야 마땅하고 우리 아파트 산거 올라야 되고 주식 산거 올라가야 되고 뭐든지 펀드는 이익 남겨야 되고.
왜? 그만한 자격 있다는 거에요. 무슨 근거에 있어서? 그거는 내 관계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는거에요. 오늘 제목을 ‘멧돼지’로 해버릴까. 인간이 있으면 인간은 거울보면 인간이 있지요. 있습니다만은 예수님이 어려운 점은 있어도 나를 없는 존재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된다. 이 땅에서 예수님은 없는 분이에요. 떠나는 분이에요.
여러분 어떤 여자분이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이렇게 보니까 노란색이에요 노란색. 5분 뒤에도 노란색이에요. 10뒤에도 노란색이다. 당신의 옷은 노란색입니다. 누구나 이야기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마술하는 여자가 있는데 옷을 7개나 껴입어서 한바퀴 돌때마다 옷 하나하나 날라가는거에요. 빨간색, 오렌지색, 초록색, 파랑색. 마술이 다 끝나고 이제는 안 바꿀 때 그때 노랑색이다. 차이점이 뭡니까?
물론 결과적으로 노란색 같지만 여기서 뭔가 파란색인줄 알았는데 노란색 됐지요? 그렇지요? 사람들의 관계망은 사람들은 보이지만 사람들의 관계망은 안 보이잖아요. 사람들의 관계망 속에 그들은 말합니다. 뭐라고? 예수님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왕이라고 했지요? 당신 백성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묻는거에요.
왕은 아까 뭘 착복한다? 뭘 착복한다? 백성들을 품고있는거에요 왕은. 이게 하나의 관계망이 되는 겁니다. 물론 안 보이지요. 사람은 개체이기 때문에 관계망은 안 보여요. 그러나 눈에 보이는데 실제로 행동할 때는 그냥 자기만 행동하지 않고 자기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관계망에 의해서 행동하게 되어 있지요. 관계망은 눈에 안보여도 엄연히 존재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빌라도가 물어요. 바라바라는 강도를 놓을래? 아니면 예수를 놓을래? 이걸 왜 물어요? 그 사람 말의 그 백성들의 말에 삐지게 되면 자기가 통치하는데 지장이 되거든요. 그게 보이지않는 소위 왕질하는 관계망이란 말이죠 관계망. 당신의 백성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할 때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있는 관계망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관계망은 있어요? 없어요? 없는 관계망이 되는거에요. 의도적이에요 의도적.
너희들의 관계망에 포착이 안되는거에요. 파악이 안되는겁니다 주님의 관계망이.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없는 존재라면 예수님과 같은 관계망이 형성된 모든 자기 백성과 이 땅에서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증명하는 인생을 살게 돼요. 자기 죽음이 아니고 독특한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효과 그것을 확인하고 증명하라고 우리의 인생이 아직도 짧은 인생이지만 점점 소멸하고 있지만 그 인생을 살게하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령이 임하면 네가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라 하는 그 의미에요. 그래서 성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망 속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망은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사라져야 될 관계망이라면 우리는 뭘 볼 수 있느냐 하면 이 세상에 인간들의 관계망이라고 하는 것은 무식하고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를 부리면서 계속 살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 모습들이 눈앞에 확 다 들어오는거에요. 멧돼지 집단이라는 것.
멧돼지 집단이란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충동의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충동에 의해서. 충동 다른 말로 하면 욕망이죠. 욕망에 의해서 욕망을 주체 못해서 살아가는 사람. 그 이번에 서경석 목사님 올려놓은 것처럼 2019 겨울 수련회 교재가 십자가마을, 우리교회에 올려놨거든요. 한번 읽어보셨어요? ‘완전한 사랑’. 제목을 처음에 ‘실패한 사랑’으로 하려고 하다가 너무 비비꼰다는 느낌 들어서 완전한 사랑이라고 했는데 한번 읽어 보셨어요? 마지막에 남자라는 이유로 보셨어요?
교재 올려놨어요. 거기 제일 처음에 나오는게 충동으로서의 사랑이에요 ‘충동으로서의 사랑’. 사랑은 말릴 수 없어요. 그냥 충동이에요. 이유도 없어요. 돌발적이고 그냥 터져나오는 것. 그 다음에 두 번째 제목이 뭐냐 하면 놀이로서의 사랑. 충동이 표면적으로 나타나면 놀이가 돼요. 노동이 아니라는 거에요. 어떤 이득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득을 위해서. 실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지 않는다.
실이익을 얻기 위한다면 실이익을 얻기 위한 본부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 본부가 뭐냐 하면 내가 더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아지트가 돼요. 그러면 내가 더 살겠다는 아지트를 가지고 만약에 어떤 사람에게 사랑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욕망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놀이가 아니고 노동이 되는거죠.
사랑을 해주되 이익을 탐하면서 사랑을 하는 것은 놀이가 아니고 노동이 되는 겁니다. 그 노동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가지고 부부라고 하지요. 결혼이 이거잖아요 결혼. 자기포기하려고 결혼합니까? 미쳤어요? 남 살고 나 죽으려고 결혼합니까? 미쳤어요? 나 살기 위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결혼하잖아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결혼 안하는 이유가 결혼 안할 때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 20대를 보내고 있잖아요. 그러면 주위에서 뭐라고 합니까? 주위 관계망이 뭐라고 합니까? 해야 된다 늙으면 애 못 낳는다 뭐 이렇게 하잖아요. 그때 20대 아가씨들의 생각이 뭡니까? 결혼하면 어떤 이익이 있는데요? 이거거든요. 결혼하면 어떤 이익이 있는데 하고 묻는 것은 이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갈라서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조금 더 생각이 깊은 사람은 갈라설 준비를 하고 결혼해요. 나중에 골치 아프면 안 되니까. 통장을 따로 한다든지 혼인신고를 안 하고 미룬다든지 이런 식으로. 한번 5년 살아보고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한 몇 년 살아보고 나의 실이익을 제공한다 같으면 내가 조금 더 양보할 조건이 있다든지 이런 것. 한꺼번에 다 내놓는게 아니고 한꺼번에 자기 패를 다 까놓는게 아니라 한 1년 살아보고 한 패 꺼내놓고 2년 살아보고 패 꺼내놓고 살아보고 하는 거에요.
원래 둘 다 안 맞는 사람이거든요. 처음할 때는 대충 맞다고 하지만 나중에 살 때에는 이빨 가는거 어떻게 알겠어요? 모르잖아요. 이빨 가는 거 코 고는거 모르지요. 그리고 남자가 째째한거 몰랐잖아요. 여자가 손 큰 것도 몰랐고. 남자가 양발 신고 집어 던지고 서랍 열고 안 닫고 반만 닫고 그런거 안 살아보고 어떻게 알겠어요. 양치질하고 난 뒤에 칫솔 아무데나 놓는거 어떻게 알겠어요? 화장실에서 서서 오줌누는거 어떻게 알겠어요? 앉아서 오줌누는지.
그걸 계속 잔소리 하게 되면 남자는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잔소리 받을 존재인지를 몰랐다고 또 삐진다고요. 그럼 여자는 똑바로 해봐라 잔소리 안하지 하는데 그것은 일방적으로 그쪽은 맞춰라 하는데 맞추면 나의 본질은 어디서 찾아요? 다 내줘버리면 나의 본질은. 처음부터 내가 너 되면 되지요. 그러니까 몸은 하나인데 영혼은 두 개 이렇게 하든지 그럴 수는 없는거 아닙니까.
거기에 대해서 서로 이렇게 합니다. 아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들지? 이렇게 하거든요. 네 인생이 어떤데? 내 인생은 행복 행복 행복이 넘쳐나는 존재여야 한다는 거에요. 누구 맘대로? 자기도 모르고 결혼한거에요. 자기가 과연 그런 권리가 있는지. 없어요. 그냥 충동이라니까요 충동. 충동은요 충동은 부정적이에요. 충동의 질은 좋지 않아요.
자기가 어느 정도로 못되먹었는가를 몰라요 인간은. 결혼한거 무를 수도 없고. 계속 그렇게 결혼하고 교회가는 이유는 빨리 신이시여 보상해내라는거에요. 내가 손해본만큼 그걸 너끈하게 다른 행복이나 다른 기쁨으로 이렇게 채워달라는거에요. 짜증내면서. 거기에다가 만약에 목사가 눈치도 없이 십자가 전해보세요. 그 교회 두 번 다시 가나. 안 가지.
그러니까 인간 자체가 예수의 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전부 다 본디오빌라도 편이에요. 그걸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걸 발견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아 강도보다 못하다니 이러지 말고 예수님이 그걸 유도했다니까요. 예수님이 인간들이 으레히 그럴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예수님 앞에서 그걸 마음껏 노출시키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들끼리 패를 먹는 겁니다. 왜? 의도는 똑같아요. 우리 죽지말고 살자는 거에요.
대구강의에서 그랬는가? 자이언티의 노래 있잖아요. 자이언티의 노래의 주제가 뭡니까? 무슨 다리가 있는데 양화대교의 택시드라이버가 자기 아버지 아닙니까? 양화대교 택시드라이버 노래 가사에 있어요. 거기 가사에 보면 뭐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나오지요.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무슨 근거로서 행복해야 되고 어느 근거로서 안 아파야 되는데요? 이렇게 주장할 근거 있습니까? 그럴 권리 있어요?
바로 성경말씀은 이걸 문제 삼는 겁니다. 아프지말고 행복하자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게 이거거든요. 이게 식솔. 식솔이 뭐냐 하면은 밥을 먹여주는데 같이 밥을 먹여주는 가정에서 책임지는 그 집단을 식솔이라고 해요. 식솔은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 사람도 포함되어 있지만 애완견 개 고양이 포함되어 있고 집에 있는 가족들 포함되어 있어요. 식솔.
자, 이제 교양 들어갑니다 교양. 옛날 고대사회와 현대사회를 가지고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하죠. 옛날 조선시대 고려시대보고 참 세상 지금세상 바뀌었다 하지요. 세상 바뀌었다 뭐가 바뀌었다는거에요? 바뀌었다. 어떻게 바뀌고 무엇이 바뀌었다는 뭘 가지고 세상 바뀌었다 합니까? 그림으로 단촐하게 말씀드릴께요.
옛날에는 공적이 위주였어요 공적. 공적이 위주고 사적은 공적의 부분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조선시대 때 옛날에는. 예수님 때 단군시대 때 로마시대도 마찬가지고. 공적은 뭐냐 하면 땅을 기초로 해서 땅을 기초로한 이 질서가 공적이에요. 쉽게 말하면 공동체라고 합니다 공동체. 그래서 개인적으로 장사를 한다든지 농사를 하든간에 개인이 따로 이익을 남겨서는 안돼요. 뭐냐 하면 이 공적 공동체 전체 이익으로 돌아가는 행위를 해줘야 되는 겁니다. 옛날에는. 이걸 계급사회라고 하거든요. 양반은 양반자리에 상놈은 상놈자리에. 왜 자기 자리가 왜 있느냐 하면은 그래야 둥굴하게 전체 공동체가 유지가 돼요.
구약에 나오지만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땅위에서 하나의 전체 집단을 이루는 겁니다. 그리고 이 공적인 것을 정신적으로 하나로 묶는 것은 뭐냐 하면은 신의 나라에요 신의 나라.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보호한다는 겁니다. 모든 국가의 신화가 누가 개입되어 있어요? 신이 개입되어 있지요? 우리 한국도 단군이라는 무당이 개입되어 있잖아요. 백두산에 단군이 와가지고 옛날에 고조시대 때는 모든 국가는 전부다 무당한테 제사 지내는 것이 국가에서 제일 중요한 의식이었어요. 의례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공적이 사적보다 위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현대는 뭐냐 하면 이 공적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개개인의 것을 전부 다 플러스해요. 개개인이 중요하고 개인부터 출발해서 개인이 뭉쳐진 것을 가지고 공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개인의 사유 재산이 공적 재산보다 더 귀하다는 거에요. 이게 현대는 개인의 가치부터 출발해서 개인가치를 지켜주기 위해서 법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현대인의 사고방식이고 옛날에는 왕을 위해서 이 민족을 위해서 조상님을 위해서 한반도 국가를 위해서 이 몸 하나 바치겠습니다 이게 바로 옛날 사고방식이라니까요.
둘 중 어느 것이 행복하겠어요? 둘 중 어느 것이 행복하겠습니까? 마땅히 옛날이 행복하지요. 왜냐하면 본인이 본인의 인생에 대해서 책임질 필요 없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뭐는 건재하다? 이 민족과 이 나라 건재하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지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누가 이야기한거에요? 이순신 장군이 했지요. 이순신 장군이 나를 위해서 죽었습니까? 왕을 위해서 죽었습니까?
왕을 위해서 죽은거에요. 왕을 위해서 죽은겁니다. 이게 신하된 도리기 때문에. 큰 칼 옆에 찼다고 백성 위해서 큰 칼 옆에 찬게 아니에요. 백성은 죽어도 왕만 있으면 왕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왕의 신하이기 때문에 공적인 부요함, 공적인 부요한 공적 요소가 나 라는 개인의 사적 요소를 월등하게 뛰어넘는거에요. 죽어도 좋은거에요.
안중근 의사 이런 것처럼. 나라위해 몸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던겁니다. 몸 바친다니까 진주성에 뛰어내린 사람 있지요? 논개. 성이 ‘주’ 인가봐요. 주논개. 논개라는 그 여자가 뛰어 내렸잖아요. 국가주의 아닙니까?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노래 나오지요 몸 바쳐서. 지금 엄마가 딸보고 “야야 너도 국가 위해서 몸 바쳐라” 하면 미쳤어요? 애들 사고방식은 국가가 아니고 자기 몸이 우선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자기 같은 또래가 있기 때문에 같은 또래가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어요. 너 엄마한테 휴대폰 바꿔달라고 얘기했어? 맨날 이런 소리 하니까 엄마는 자기 실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에요. 엄마 다른 집은 유학 보내주는데 왜 우리집은. 딸이 유학가면 뭐해 시집가라. 싫어 싫어 시집 안 갈거야. 왜? 시집 가면 어떤 실이익이 있어야 시집 가지. 여자는 가는게 운명이야. 여자는 가는게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가족의 공적인 이야기에요.
그러나 개인은 인간은 가족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아니고 나의 행복이 위해서 가족이 있는 거에요. 나의 행복을 위해서. 아버지는 노끈해야 되고. 엄마는 운전면허 따야 되고 뭐 이런거 광산 김씨처럼. 전부다 나 자신을 위해서 있는 거에요.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동성애를 하든 말든 여호와 증인으로 군대 가든 말든 그건 내 양심이고 내 마음대로라는거에요.
옛날은 뭐냐 하면 국가를 위해서 안 가면 징역살이 해야 된다 이것은 시대에 떨어진 사고방식이라는 거에요. 마약을 하든 담배를 피우든 음주운전을 하든 내 맘대로다. 내 행복이 우선이 되야지. 내가 음주해서 운전하는데 나라 네가 뭔데. 나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거에요. 세월호 그 가족도 마찬가지고. 대통령도 최순실 둘이 합작해가지고 관계명 엮어가지고 촛불만 있으면 다 없어지는데 도대체 누가 노량진 수산시장 수협 안가겠다는데 물 끊고 버티면 된다는거에요. 점점 더 심해져요. 여러분 자식들이 그런 시대를 통과해야 돼요.
우리는 10분 쉬면 되고.
홍민희
(IP:121.♡.203.222) 18-11-19 14:08
강남-요한복음 18장 39절(무능성)181106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이 무능성에 뭐가 나오느냐? 복수심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일종의 예수님에 대한 복수에요. 우리는 한 사람의 우리는 당신같은 왕을 원하지 않았다. 당신같은 메시아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빌라도를 통해 그대로 자기의 속마음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겁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지금은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이렇게 풀어줄려고 하나의 제안을 했지요.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했는데 이것은 빌라도가 굉장히 유한 책을 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왜냐 하면 그냥 풀어줘도 돼요.
28절에 한번 봅시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했지요? 재판장이 누구에요? 본디오 빌라도 본인이잖아요. 그럼 그걸 선언하고 방면해야지. FREE 해서 방면해야 될텐데 주춤주춤하는 이유가 이게 뭐냐 하면은 관계망이라니까. 관계망은 서로가 서로를 속박하고 있는 입장에 있어요. 너 없이 나 없고 나 없이 너 없다는 겁니다.
부부가 둘이 싸우다 하나 죽으면 또 울기는 또 얼마나 운다구요. 아이구 이 무심한 당신 이러면서 운다고요. 무심하면 좀 잘해주지. 인간은 뭐든지 관계망 때문에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판사조차도 매수합니다. 판사조차도. 판사는 심판하는 사람이죠. 그럼 뭡니까? 인간들은 심판주 메시아 또는 하나님을 뭐하고 싶다? 매수하고 싶은거에요. 내 편으로 돌리고 싶은 거에요. 뭘 해서?
찬양하고 선교하고 기도하고 교회 세우고 부흥시키고 이렇게해서 다른 사람은 심판하되 괜찮은 나한테는 심판하지 마세요 라고 지금 협박 다 하고 있는 겁니다. 신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게 인간의 본심이에요. 왜그러냐 하면은 인간은 복수심에 자기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서 또는 자기의 미흡된 인생 자기가 스스로 만족하는 인생에 대해서 그 책임을 다른 쪽으로 찾으려고 그 책임 추궁을 하고 싶어서 외부쪽 하나님이든 누구든 간에 그걸 자꾸 찾아서 시비걸려고 하는겁니다 인간은.
남자가 사업하다가 망하면 그만두는게 아니고 또 사업하고 또 사업하고 도박하는 사람이 도박 그만두는 것이 아니고 또 도박하는 것은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갖고있는 욕망의 구조를 욕망의 그 속성을 그냥 잘 보여주지요. 도박이 재미있어서 하는게 아니에요. 깎아진 내 자존심을 빨리 원상회복시키기 위해서 무리한 사업을 벌리고 무리수에 나서는 겁니다.
바깥에서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화를 집사람한테 풀고 가족들 자식들한테 푸는 이유가 뭔가 자기 내부에 어느 정도의 레벨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 때문에 그래요. 제가 좋게 이야기해서 그렇지 사람은 멧돼지라니까. 그냥 욕망에 쫓기고 충동에 쫓기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안은 뭐냐 하면 안정적인 죽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굉장히 간단해요. 안정적인 죽음을 내가 보장해줄게.
주께서 보장해주는 것은 뭐냐 하면 살게 해줄께가 아니라 지금 사람은 살게 해줘봐야 내가 요구하는 레벨만큼 살게 해 달라고 또 닦달할게 분명하기 때문에 아예 안정적인 죽음을 보장해 주겠다는 겁니다. 안정적인 죽음이 왜 이게 복되고 감사하냐 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죽음이 아니고 안정적인 죽음, 단 하나의 죽음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설명이 되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설명하게 되면 그만큼 안정적인게 없어요. 최고에요.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살려고 애 안 써도 돼요. 모든걸 알아 버렸으니까.
그게 제가 첫 번째 강의 시간에 제일 먼저 이야기한거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취지를 알게 되고 그 취지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 모든걸 알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은 예수님 본인이 죽음, 본인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은 천지는 창조되었다. 십자가를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의 하늘과 땅과 하늘의 별과 모든 것은 다 만들어진거에요. 십자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십자가 지신 분이 주가 되신다는 것. 십자가지지 않으면 주가 아니에요. 십자가 그 죽음을 지셨기 때문에 비로소 그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심판주가 되고 구원주가 되는 겁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 예수님의 주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다 제조되고 만들어지고 창조된 겁니다 모든 것은.
자,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이제 약간은 어려운데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숨 안 쉬고 가만히 있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안정적인 죽음은 시체가 되어있는 그야말로 뻗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죽음은 행동하는 죽음이에요. 행동하는 죽음.
다른 말로 하면 죽음만이 진정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기세가 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이 말이에요. 죽음의 기세가. 어느 모두 일어나는 것은 저주의 흔적이고 저주를 증명하기 위해서 벌어져야 될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오직 유일하게 행동하시는 주님의 행동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보통 우리가 움직이는 것을 행동한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하시는 것은 이 땅에 행동하시는 것은 멧돼지도 아니고 코끼리도 아니에요. 오직 누구만 행동하느냐 하면 예수님만 행동해요. 예수님의 지시와 명령에 의해서 참새도 죽을 때 죽고 그리고 들풀도 자라날 때 자라나고 우리의 키도 한 자가 자랄 것이냐 아니면 자라지 말아야 될 것이냐 그것도 주님의 행동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 뜻대로 우리 마음대로 우리 생각대로 우리의 처지가 이렇게 가고 있는게 아니에요. 주님의 뜻에 의해서 우리가 이렇게 행동을 하고 우리의 처지가 이렇게 상관이 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냐 하면 예수님과의 ‘관계망’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관계망. 그러면 그걸 왜 살아있다고 하지 않고 왜 죽어있다고 하느냐?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음에 적셨거든요. 이 말은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말과 동시에 내가 죽은게 아니고 네가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명시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살았다는 동네에 와서 이렇게 적시는거에요.
뭔가 퐁듀라고 해서 이렇게 적시는 것처럼. 아이스크림에 커피 얹으면 뭐 돼요? 아포가또 되지요. 주님의 죽음이 살아있는 우리 아이스크림에 적셔버리면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 있는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죽음이 와서 적시고 주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함으로서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고 살아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행동하시는 자격자고 혼자 움직이시는 분도 예수님만 홀로 움직이시는 거에요.
예수님이 살아있는 예수님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금 죽은 입장에서 오늘도 숨을 쉬고 있고 죽은 입장에서 그림 그리고 죽은 입장에서 놀러가고 그러는 겁니다. 피렌체나 괌도 사이판 죽은 자로 가는거에요. 비행기 탈 때부터 이미 죽었어. 내릴 때도 죽어있고. 애 키울 때도 죽어 있고 애 키우겠다는 개도 죽어 있고 모든 인간들은 주님이 와서 그 가치를 죽음이라는 그 가치를 완전히 도배를 해버린거에요. 덮어버린거에요.
먹물 가지고 이 세상에 확 뿌렸다고 보면 돼요. 살아있는 모든 거기에다가 죽음의 두께가 덮어버렸으니까 이미 우리는 모든 인간은 죽음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겁니다. 죽음 속에서. 제가 낮설교 할 때 율법의 세가지 이야기한게 있는데 하나는 율법이 와서 율법이 우리를 가둬둔다. 둘째는 뭐였던가요? 가두리 양식장 안에서 미꾸라지가 막 꿈틀거리죠.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은 왜 몸부림칩니까? 살려고 몸부림치잖아요.
살았으면 살려고 할 필요 없잖아요. 지금 죽음이 뒤에서 쫓아오는 거에요. 죽음이. 인간은 쫓기고 있는 중입니다. 어디에? 죽음에. 병원가서 조사 해가지고 더 살아야 할텐데. 말로는 아이고 나는 죽으면 그만이다. 말로만 그래. 연세가 많으면 점점 죽음에 발자국 소리가 크게 들리고 동생들이나 20대는 까불까불 몰라. 한창 몰라.
지금 SK가 이기는가 두산이 이기는가 거기에 정신 팔렸어. 한국시리즈 거기에 있어. 지금 1:1인데 빨리 누가 지금 4게임 이겨서 우승하느냐 우승 해봤자 죽은 놈이 트로피 올리고 있는데. 호날두가 몇 골 넣었고 메시가 몇 골 넣었고 죽은 놈이 축구 하고 있는데 죽은 놈이. 그래 봤자 82 돼가지고 신성일처럼 죽고. 그렇게 죽잖아요 결국은.
왜 나중에 와서 알 필요 있어요? 미리 당겨서 알면 탈납니까? ‘나’라는 이 존재가 어떤 누구의 손길에 의해서 누구의 일관적인 일관성있는 행위에 의해서 나는 언제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10대라서 몰라야 됩니까? 유치원생이라서 몰라야 돼요? 미리 알아야 돼요. 우리 울산에 계신 황권사님은 손자를 키울 때 3살 때 4살 때부터 키웠어요. “너는 죄인이다. 우리는 다 죄인이다. 죽을 수밖에 없다.” 시편 51편 이렇게 해가지고 애한테 그렇게 했어요. 좀 무시무시한 이야기지만.
방금 제가 인간은 죽었다 하는데 이걸 달리 이야기 하면 뭐냐 하면 무능성입니다 ‘무능성’. 무능함이에요. 인간은 무능하기 위해서 태어난거에요. 그래서 무능해도 괜찮아요. 아니 무능해야만해요. 마땅한 무능함이 마땅함입니다. 무능함이 당연함이에요. 우리의 기도 우리의 헌금 우리의 전도 안 받습니다.
왜? 무능한걸 왜 받아요? 무능함을 왜 받습니까? 무능한게. 다만 우리는 이렇게 움직이고 하는 이유가 무능함이 무능함이라는 것을 계속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반응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본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반응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극되는 사건들이 사태가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겁니다. 울기도 하고 좀 잘 되면 웃기도 하고.
자, 그렇게 되면 어떤 분이 이렇게 물을거에요. 이렇게 무능하고 무식한데 주님께서 그러면 알아서 다 하면 될텐데 왜 우리를 이렇게 사용하십니까? 관계망으로 우리를 가지고 사용하십니까? 이렇게 하는게 그것은 우리 인간을 위함이 아니에요. 무엇을 위함이냐 하면은 도대체 천국은 어떤 나라냐 하는겁니다. 천국이 어떤 나라냐?
이 땅을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려면 이 땅을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려고 해요 지금 주님께서. 왜 이 땅을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려고 하느냐 하면 이 땅은 지옥으로 가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우리가 살아서 눈에 보이니까 한국 땅에 있으니까 오래가는 줄 알겠지요.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성경은 예언의 책이에요. 예언이 뭡니까?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안다는게 예언 아닙니까? 그렇지요? 적어볼까요?
너는 뭐하지만? 모르지만. 우리는 어디에 해당 돼요? 모르는 쪽에 해당 돼요. 너는 모르지만 누구는 안다? 주님은 알지요. 믿음은 뭐에요? “나는 모른다”가 믿음의 시작이 돼야지요. 나는 무식하고 무능해서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압니다. 따라서 나는 무식하고 무능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주님께 일임하고 맡기겠습니다. 이 맡기는게 신뢰 아닙니까? 맡기는게 믿음 아닙니까?
부부 주례 같은거 보게 되면 이런게 나와요. 부부는 서로 신뢰하라 이렇게 하는데 그게 말이 안돼요. 신뢰하면요 신뢰는 신뢰를 받는 쪽과 신뢰를 맡긴 쪽 둘 중에 그렇게 나뉘지 서로 신뢰하는 법은 없어요. 서로 신뢰하는 법은 없습니다. 나는 목사님을 신뢰하고 싶은데 목사님이 저는 목사님 신뢰합니다. 하면 갑자기 책임감 오잖아요. 그렇잖아요. 나한테 덤탱이를 씌우나? 너 고생하고 나 편하자. 머리 들이밀면서 일단 맡길게. 아휴 나한테 맡기지 마세요. 내 머리 맡아주세요. 이렇게 나오면 티격태격 싸울뿐인거에요.
맡기려면 둘 다 맡기면 안돼요. 한쪽이 한쪽을 그냥 받아줘야 돼요. 한쪽을 받아줘야 된다고요. 부부에서는 그걸 누가 하느냐 하면은 약한 자 여자 쪽에서 그걸 해요. 그래서 괴테의 파우스트가 있잖아요. 그 마지막 대목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은 비유니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여성성’. 여자가 아닙니다. 여성성.
여성성이 뭐냐? 창세기 3장 보니까 그냥 사모하는 겁니다. 맡기는 것. 맡길 때 무엇이 탈락되겠습니까? 무엇이 없어져야 되겠어요? 나는 내가 나는 나를 믿는다가 나는 나를 소망한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이 모든 것 믿음 소망 사랑이 나한테는 사라져야 되지요. 그래서 나의 믿음 나의 소망 나의 사랑은 이건 지옥갑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사건을 통해서 이걸 전부 다 뜯어내지요. 다 뜯어내는데 정작 주님이 있는 사람은 그걸 뜯어낼 때 비로소 진짜 십자가 지신 하나님이 나타날 것이고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그걸 뜯어내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뜯어내는 것을 가만있겠습니까? 강력하게 거부하겠습니까? 강력하게 거부하겠지요.
왜? 자기가 공들여서 믿음 소망 사랑 채웠으니까 거기에 필요한 신학이 뭐냐 하면 ‘개혁주의 신학’이 필요한거에요. 개혁주의 신학은 뭐냐 하면은 바로 개혁주의 신학은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제가 아까 식사하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로이드존스 목사님이라고 개혁주의 청교도에서 유명한 목사에요.
그 목사가 그 목사의 책 로마서 강해 에베소서 강해 산상설교 많이 나왔거든요. 많이 나왔는데 그 사람이 죽을 때 놀라운 고백을 했다는거에요. 확실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놀라운 고백이 뭐냐 하면은 바로 이 성화한다는 것 지금까지 개혁주의 신학은 전부다 사기다 사기. 사기고 오직 뭐밖에 없다? 십자가 뿐이라는 거에요.
꼭 허운석 선교사 같애. 실컷 다 해놓고 돌아갈 때 “주여 내가 헛짓했군요. 아마존 선교도 다 헛짓이고 내가 무슨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오직 아무쓸데 없는 인간을 십자가 피로 구원했는데 이 간단한 길을 놔두고 얼마나 돌아왔는지..” 저보고 직접한 이야기에요. 제가 증인입니다. “얼마나 돌아왔는지..”
얼마나 많이 돌아왔어요. 왜 이렇게 십자가를 거부하고 안 듣느냐 하면 살고 싶고 이왕 사는거 하나님 보시기에 근사하게 괜찮은 존재로 살고싶어 하는거에요. 다시 말해서 판사를 내 종교적인 스킬 테크닉으로 매수를 하는 겁니다. 이래도 날 지옥 보낼거에요? 라고 지금 도전하는 거에요. 이렇게 내가 참하게 살고 열심히 하는데 아마 양심 있으면 나를 천국 보낼거야 라고 도전하는 거에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뭐냐 하면 그게 하나님 나라가 아니에요. 지금 하나님 나라를 몰라요 사람들이. 그건 누구 나라냐 하면 자기 나라에요 자기 나라. 무능한 인간 그 무능성을 기념한, 인간인 자기가 무능하다는 생각을 안 하고 유능하고 천국 갈만한 그런 자격이 된다는 기념하는 나라는 지옥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사람을 어디 보내느냐 하면은 지옥 보내는 곳이에요. 지옥 보내는데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내가 천국 갈까 지옥 갈까 고민하지요. 그런데 교회 온 사람은 고민도 없어. 지옥가면서도 내가 천국 간다 착각하게 만들어요. 제발 나를 박살내달라고 교인들이 그렇게 요청하지 않는 한 그 교회는 지옥가는 교회입니다. 나는 밟아주고 나를 조져주세요. 나는 내가 자꾸 살고싶어 하고 내가 이왕 사는거 괜찮은 존재이고 싶어하는데 이건 내 힘으로 못 고치니까 목사님이 좀 말씀으로 잘근잘근 씹어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돼요.
예를 들면 우리 서머나 교회 우리 잘난 교회인데 좀 목사님 오셔가지고 이게 어디 이런 이단들이 있어 욕 좀 해달라고 아직도 저를 안 부르고 있는데. 잘근잘근 씹어달라고 그렇게 안 해요.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목사님 설교 듣고 훌륭한 교회 유일한 한국에서 희망적인 교회인데 이러고 있단 말이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천국을 소개하는데 지옥밖에 없는 곳에서 천국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천국은 나의 세계가 되면 안돼요. 예수님이 말씀대로 살았잖아요. 그럼 천국은 무슨 세계냐 하면 말씀의 세계입니다. 말씀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언약의 세계지요 언약. 언약의 담당자 언약을 이룰 때 두 사람이 이뤘습니까? 세 사람이 이뤘습니까? 세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이뤘습니까? 누가 이뤘습니까? 제자들 다 떠났지요?
십자가에서 올라가신 십자가 옆에 두 사람 있지만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혼자만의 공로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저는 예수님만이 뭐 한다? 예수님만이 행동하는 거에요.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예수님만이 살아나신거에요. 우리도 살아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만이 살아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는게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있을 때 우리는 그 관계망에 의해서 예수 안에서 살아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껍데기 있잖아 껍데기 껍질. 껍질은 벗어버려야 돼요. 암에 걸리든지 뭐에 걸리든지 빨리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을 유니폼으로 갈아입어야 돼요 우리는. 그래 또 성격 급하다고 자살하고 번개탄 피우지 말고. 그거는 우리가 지퍼 잠그고 지퍼 열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에요. 내가 스스로 빨리 천국에 가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아직도 내가 나를 위한 행위가 남아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에요.
죽이는 것도 주님의 행위가 와서 죽여야 되고 참새도 죽고 사는 것도 주님의 행동이듯이 살아가는 것도 주님 뜻대로 계속 살려줘야 사는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세요. 살아있는 우리가 이 땅에서 죽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좀 이상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상하다. 나같은 경우 더 살 이유가 없는데 살아있지? 오히려 의아해 해야 되고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고마움과 함께 어떤 책임감같은 것을 느껴야 돼요.
아이고 살아있으니 오늘도 보너스로 줬는데 살아있는 것 가지고 뭘 하지? 뭐해서 살아있는 값을 하지? 라고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뭐냐 하면 기본이 죽음이고 덤이 살아있음이니까 남하고 비교할 이유가 없지요. 남하고 경쟁할 이유가 없지요. 경쟁이라고 하는 것은 복수심에서 나왔잖아요. 너한테는 안 진다 이렇게 하는데 남하고 경쟁할 복수할 일이 없지요.
제가 아까 그랬잖아요. 멧돼지하고 싸우지 말라고. 그게 정신 있어요? 정신 없는 것하고 싸워서 뭐 할건데요? 멧돼지한테 유혹받을 필요도 없고요. 멧돼지하고 비교할 필요도 없고 멪돼지하고 경쟁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멧돼지거든요. 그런데 죽은 멧돼지에요. 죽어 있는 멧돼지이기 때문에 펄펄 뛰는 멧돼지하고 차이가 나요.
왜? 죽은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을 나타내기만 하면 되는거에요. “너 따라와봐.” “응 안 따라가.” “너 날 이겨봐.” “아니 안 이겨.” “왜? 비겁하구나.” “그래 나 비겁보다 더 심한거 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무능해.” 이런 식으로. 마귀는 자꾸 우리를 유혹해요. “네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I can do it”. 뭐 자꾸 유혹해서 우리고 하여금 붕 뜨게 만들어요.
물론 여러분들한테는 해당되지 않지만 여러분은 늘 인생을 실패해서 해당되지 않는데 혹시 여러분들 중에 성공했다. 내가 성공했다. 취직을 하다니 체육관 이런 것. 아 내가 이런걸 하다니. 이렇게 되면 결국 그건 뭡니까? 이왕 하는거 잘 해봐? 보란 듯이. 갑자기 죽은 사람이 행동을 하려고 해. 행동은 주님이 알아서 하면 되는데.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세요. 뭘 하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그 현장에서 주께서 그 순간에 뭘 시키느냐 그것만 생각하세요. 딴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저 사람을 만날까 안 만날까 생각하지 마세요. 만나게 한 것도 주님의 뜻이고 만나서 뭘 할건가 주님이 다 시켜줘요. 미리 프로젝트 짜지 말고 미리 계획하지 마세요.
오늘 애 성적표 오는 날인데 몽둥이 준비하고 들어오기만 해봐라. 내가 공부해라 학원가라 해도 안 가고 게임이나 하더니. 미리 예상하지 마세요. 실제 예상하더라도 성령을 입은 사람은 애 딱 들어오게 되면 때릴려고 예상했는데 애 보는 순간 저절로 내가 날라가버리고 “밥 뭇나?” 그 순간 내 예상과 다른 반응이 나한테 탁 튀어 나와요.
그런데 때릴려고 공부 못하면 죽일려고 하는데 “엄마 나 다리 아파요.” 이렇게 하면 “아이고 내새끼 다리 아파?” 이렇게 갑자기 반전이 일어나요 반전이. 꿀물 타주고 뭐 난리도 아니야. 그때 한순간 한순간을 뭘로 돌리라? 말씀의 행함으로 돌리는 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이다 이 말이죠. 천국은 죽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벌써 여기서 이미 실시가 된거에요.
그게 무엇을 하라 하든지 가라하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것처럼 그때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주께서 주관하도록 하세요. 포도주가 떨어졌다. 포도주를 어디서 만드느냐? 주님의 지시가 물 길어오너라 여섯 동이. 여섯 동이 물 길어오너라. 제가 이스라엘 갔는데 가나안 지방에 갔거든요. 가자마자 골목에 그림을 이쁘게 여섯 동이 물동이를 딱 그려놨어요. 못 찾아올까 싶어서.
물동이 여섯 동이를 가져갔다 이 말이죠. 물동이 여섯 동이 가져갔다는 것은 제자들이나 그리고 마리아나 거기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손을 떼는거에요. 손을 떼라고 순간순간 우리보고 먼저 손을 떼는것부터 해야돼요. 손을 떼야돼요. 그다음에 물에서 포도주를 되든 말든 이것은 주님 소관인데 주님 소관인데요. 우리는 뭘 하느냐? 물 가지고 포도주 되기를 바라잖아요. 그거는 주님의 기적의 취지가 아닙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것은 그 순간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밖에 안돼요.
예수님은 물과 포도주를 통해서 뭘 이야기 하느냐 하면 자신의 존재가 포도주처럼 새언약을 이룬다는 것을 인간들이 요구하는 것에 겹쳐서 예수님 본인만의 의미를 거기다가 실은 거에요. 이게 괴테가 말한 “모든 것이 비유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실체가 아니고 꿈이고 꿈에 불과한데 이 꿈이 보통 꿈이 아니고 주님의 의미가 담겨있는 때에 우리가 ‘나’란 인간이 의미있는 인간으로 실체로 변한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우리가 비로소 관계, 보이지 않는 관계가 느껴지는 거에요. 내가 있으라고 내가 있는게 아니고 주님과 나 사이에 관계가 이미 이어져 있음을 드러내라고 우리로 하여금 계속 이 땅에 살게 하시는겁니다. 그 관계가 뭐냐? 천국에도 지속되는 천국에도 이어지는 관계가 되는 거에요.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제가 ‘안정적인 죽음’이라고 했지요. 안정적인 죽음은 이 죽음이 모든 일어난 일을 다 설명이 될 때에 비로소 안정적인 죽음이 돼요. 안정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면 이렇게 해석하고 저러면 저렇게 해석하는 것이 안정적이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어떤 성경 구절을 설명하고 어떤 설교를 강의하고 뭘 하더라도 항상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된다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 예수님이 어디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가 그토록 귀히 여기고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바로 이 세상에서 그 분이 오셨는데 갈 때는 떠날 때는 뭐로 됐다? 죽음으로 떠나신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없으신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노란색 파란색 있지만 예수님 나타났다가 사라졌을 때 그 노란색 원피스와 처음부터 노란색 원피스는 차이가 있어요. 뭔가 파란색이었고 녹색이었는데 결국은 변화되어서 노란색 되었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겠습니까? 그냥 우리가 사는 것 하고 다녀가신 것과 달라요. 다녀가심으로서 전에 오시기 전에 알던 내가 다녀가시고 난 뒤에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액션이고 예수님의 행동이고 예수님의 결과물이 되는거에요 우리가. 따라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되는 것은 무능한 것이고 무식한 것이고 예수님이 성령이 오셔주심으로써 나는 이제부터 나를 위해가 아니라 예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관계망으로 이어져 있음을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시켜주시고 살게 하시는 겁니다.
무능함과 무식함을 분명히 하고 거기에 근거해서 예수님이 지금 홀로 살아있음을 증거하라고요. 그리고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주께서 살아계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어난 일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주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영광 주께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이 그 뜻이에요. 내가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 뭘 먹어도 개고기를 먹든 뭘 먹어도 우리는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음식 먹게 하는 겁니다.
실제로 그런 것은 얼마든지 실습이 가능해요. 해외 놀러갔다. 해외 놀러가면서 다음부터 시작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의 관계망이 시작돼요. 올 때 올케한테 선물 뭐 사주지? 이렇게 되거든요. 또는 갔다 왔는데 갔다 오면서 사진을 얼마나 찍어야 되고 동영상은 얼마나 찍어야 되지? 갔다 오면서 또 태풍 불면 안 되는데. 돈도 없는데 태풍 오면 못 오면 안되는데. 가족들 걱정할텐데 이렇게 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미 그전에 형성된 나의 관계망을 신나는 해외 놀러가서 놀러가본 적 있어요? 가면서 벌써 예수님 생각은 없고 벌써 새로운 세계를 체험할 질적으로 멋있게 된 그런 내 모습을 괜찮게 변모된 내 모습을 자랑거리가 넘쳐나는 내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돌아오는 거에요. 그런데 태풍 불었다. 아 이거 초라하게 되어버렸어요 완전히. 사이판에 갔는데 태풍 불었는데 못 온다. 돈 다 떨어져간다.
그럴 때 그게 뭐냐 하면 살아계신 주님의 은혜죠. 뭘 하느냐 하면 바로 출감체험. 출감이 뭡니까? ‘출감’. 감옥에 갇혔다가 이제는 다 복역 끝나고 자유롭게 되는거잖아요.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 것을 체험케 되는거에요. 사이판에 가서. 아 죽을 수도 있구나 에다가 그다음에 뭐냐 하면 아 내가 죽어 있어야 내가 살 자격이 없어야 비로소 주님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구나.
하나님의 관계망을 인간이 관계망을 방해 놨거든 가렸잖아요.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인간들은 뭐냐 하면은 본디오 빌라도 여기 있고 그다음에 유대인들 있지요. 유대인들에 누가 섞여 있습니까? 피고로써. 예수님 섞여있지요. 인간들 보기에는 사람 있고 저쪽 유대인 사람 있고 사람 있다고 본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전부 다 있음 있음 있음이죠. 주님은 있다가 없어져버리는 거에요. 있다가 없어져 버린다 이 말이죠.
바로 그 역할을 그 기능을 주님께서 바로 살아계셔서 그 사명과 임무를 준거에요. 같이 있다고 해서 같이 갈 인간이 죽어서 같이 갈 사람들의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살게 하는거에요. 사이판에 갖다놔도 벌벌 떨면서 이제 죽었다 돈도 없고 왜 갑자기 태풍이 와서 신은 너무 하시다. 이러고 있는 사람과 사이판에 놀러갔는데 오랜만에 곗돈 모아서 놀러 갔는데 이거는 정말 태풍 불어가지고 죽다 살아났다.
죽다 살아난게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는 주님 생각하게 되면 죽여주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이고 왜? 출감이니까. 출감 뜻이 뭐에요? 우리가 여기 사는 것은 죄의 복역 때문에 살아간다 이 말이잖아요. 출감은 감옥소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죽는 것이 신나는 해방의 순간이라는 사실을 사이판에 가서 그 은혜를 듬뿍 받아오시라 이 말입니다.
보통 말할 때 뭐라고 합니까? 보통 좋을 때 뭐라고 합니까? 좋아 그 다음에 뭡니까? 죽겠다 하잖아요 좋아 죽겠다. 배부를 때 뭐라고 합니까? 배불러 죽겠다 하잖아요. 죽으세요 배불러서. 라면 무한리필해가지고. 배불러 죽으라고. 나는 맛이 없어서 못 먹겠다. 라면 냄새나서 나중에는. 오늘 지하 부대찌개 가서 라면 무한리필 거기 가서 먹었거든요. 라면 몇 개 먹었어요? 네 명이. 8개. 두 개 더 달라고 해서 욕 얻어먹었지만. 염치가 있어야지 이런 식으로. 실컷 살다 죽으세요.
주의 뜻은 이겁니다. “야 이 인간아 죽어라” 이게 주의 뜻이에요 이게. 교인들 교회 왔잖아요. “야 이 인간아 이 멧돼지야 죽어라”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으로 들려줘야 돼요 이게. 살려고 하니까 사단난거에요. 살려고 하니까 악마가 달려들어서 사는게 힘들어 죽어요. 이것도 죽는거구나. 마귀가 달려들어서 힘들어 죽어요.
우리가 행동할 때 자꾸 살려고 하는 것하고 또 괜찮게 이왕 사는 것 잘났다는 소리 들으려고 행동하고 멋있게 행동하려고 하니까 이게 계속해서 나한테 스트레스가 되는 거에요. 잘 들으세요.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좀 못 나라 이 말이죠. 이참에 내가 이렇게 무식하나. 이렇게 부모 효도도 못하는 무능한 자식이었나를 실감나게 하라고 그 기회 준거에요. 자꾸 욕심부리면 거기에 악마가 더욱 더 침범해요.
얼마나 믿음이 좋았으면 그래 기독교 영화를 제일 먼저 보나. 나는 믿음으로 살겠다는 티를 다 내고 있어. 말씀이 완성되는 현장이 하나님의 천국입니다. 그 말씀 완성에서는 누구만 살아있느냐? 예수님만 살아있고 참새 보고 물어보세요. 참새 너 살아있다 하면은 참새가 짹짹짹짹 하면서 나는 살아 있기는 살아있지만 나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있을거야 이런 어려운 이야기 할거에요.
그 어려운 이야기가 사도 바울 편지에 쫙 깔려있거든요. 우리가 의롭게 되고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어디 안에? ‘예수 안’에 ‘언약 안’에서만, 언약이 살아 있는 조건하에서만 우리는 그 안에서 영원히 산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언약이 현실화 되고 구체화 되는 것이 바로 천국의 영광이에요. 복락이에요. 보석같이 되고.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것도 우리 뜻이 아니고 언약의 안에 있는 내포되어 있는 내용물이고 내용이 그래요. 주는 신랑이고 너희는 신부다 이사야 62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거기에 보면 신랑이 신부를 찾아오듯이 아가 같은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지요. 아가는 여기서 제가 말 못합니다. 너무 야해요. 너무 야해서.
그래서 지금 점점 자신감이 위축되고 축소되고 있습니다. 그 야한 것을 그대로 이야기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고민 중에 있습니다만은 그건 그때 그 말씀의 현장에서 주께서 하라 하시면 해야지요. 나는 야하지않는 목사다 이것도 안되거든요. 내 행동을 내가 결정하면 안되거든요. 너는 실컷 야해라 하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할 수밖에 없어요.
자, 오늘 본문을 한번 정리하고 19장 넘어 가겠습니다. 뭐냐 하면 인간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밀쳤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본성이 작용한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은 그걸 의도했다는 거에요. 너는 나와 같이 살수 없어 나를 밀어내. 본디오 빌라도가 마지막 기회를 줬건만 그 기회마저 인간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차라리 강도를 살리는 한이 있더라도 저 사람은 우리한테 필요치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원하는 메시아는 저 스타일이 아니고 저 타입이 아니고 저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의 메시아는 우리의 가치를 알아주는 우리가 유식하며 유능한 사람 율법 지켰다는 가치를 알아주는 그런 메시아를 원합니다 라는 티를 팍팍 낸거에요. 이게 오늘날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래요. 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마지막에 자기가 회개했다는데. 십자가만 빼고 몽땅 모든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회개했지만 죽기 전에 미리 안하고 죽을 때 그런 소리 해가지고.
나의 가치와 나의 쓸모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면 안돼요. 이미 나는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라고 주께서는 홀로 살아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 우리를 이 땅에 어떤 곳이든 굴리는거에요. 이것도 할 수 있어? 이것도 할 수 있어? 아 저런 더러운 짓을... 까불지마 해! 계속해서 우리를 그러한 일을 하게 하시는거에요. 네가 복권해서 한 40억 얻을 수 있어? 그 더러운 짓을. 해! 부자 돼! 이런 식으로.
우리가 예상하든 예상하지 않든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주님의 왕되심에 착복된 백성이 왕과 더불어 똑같은 그러한 체험을 당해야 돼요 우리가. 똑같은 체험. 예수님이 당했던 것처럼 우리가 배척을 당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즐겨야 돼요. 감사해야 됩니다. 복이라는게 그게 복이에요.
자기의 무능성을 실감나게 고개 끄덕이면서 이제야 내가 자인합니다 웃으면서 그걸 받아들이는게 복이에요. 무능하고 살 가치도 없는데 계속 살려 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은 다 주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자, 19장 약간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9장.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이렇게 나오지요? 이걸 보고 또 감정이입이 되가지고 불쌍하다 우리 주님 채찍 맞으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Passion of the Christ’ 라는 영화 있지요? 폭력영화 같아요. 예수님을 아주 폭력적으로 해서 억지로 인간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그런 영화처럼 느껴졌어요. 제가 그 영화를 두 번 봤나 그런데.
예수님이 아팠을 때에 같이 안됐다고 울면 상당히 나는 수상한 신자이냐 의심될 수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 예수님 아픈 것이 가슴 아프다면 가슴 아프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 저리 비켜요! 예수님 맞는 채찍 제가 대신 맞겠습니다” 라고 의인으로 자처하면서 나설 가능성이 있어요. 이게 악마 아닙니까? 이게 악마거든요.
우리는 비겁자되길 싫어하는 거에요. 벌써 비겁한데. 우리는 비겁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인데 나의 본질을 의도적으로 아주 고상하게 아주 품위있게 바꾸려고 하는거에요. 마치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우리가 거둘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이 있는 것처럼 악마가 우리에게 그렇게 사주를 시키는거에요. 어떤 의미에서 ‘Passion of the Christ’ 는 마귀가 만든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 돼요.
주님의 고통에 체험하자고. 체험을 유도해서 이 땅에서 고통 받고 순교하는 신자 되자고. 아까 순교 나왔잖아요. 사도 바울 영화도 나는 기대를 안 하고싶어. 혹시 우리 동네에서 하면 내가 보기는 보겠는데. 저는 보면 또 숙제같은게 있어 가지고 또 요약을 해요 또. 요약을 해야되는데. 또 순교라는 말 나오니까 아이고 이 영화도 잘못됐구나 느끼는데 우리는 순교하면 안돼요. 순교는 한분의 행동으로 끝났어요. 왜 우리가 순교해야돼요? 우리는 밥 잘 먹고 라면 무한리필하는 그게 순교입니다.
왜냐?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못남과 무능함과 나의 욕심이 까발려 지는 것 그게 주님의 순교만 드러내는 주께 영광이 되는 순교에요. 나의 잘남을 드러내는 순교는 필요치않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우리는 지금 하늘나라 가야 돼요. 천국가야 돼요. 이 세상은 저희들끼리 레이싱하는 곳이 아닙니다. 누가 잘났는가. 천국은 천국의 원리가 있어요. 작동 원리가 있다고요.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에요. 그뿐이에요.
다 이루시고 행동하시는 것도 주님 혼자 행동하시는 거에요. 채찍맞고 가시면류관 썼다. 나도 채찍 맞겠어요. 어차피 안 죽을만큼 때리니까 죽겠다 싶으면 안 때릴거 아닙니까. 안 죽을만큼 맞고 가시 면류관 따끔하겠지요. 안티푸라민 왜 있습니까? 하고 안티푸라민 바르면 돼요. 간접 광고는 아닙니다.
인간은요 고통을 당하면 당할 의사가 있는 인간이에요. 이정도로 자기 의에 대해서는 한 의 하는 인간들입니다.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셔서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신거에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제가 뭘 하겠습니까’ 라는 말로서 영광을 돌려야지요. 그게 천국이잖아요 천국이.
“아이고 주님 고생했다.” 고생 맛도 못 봤구나. 자기가 아픈게 고생이겠어요? 자기 자식이 아픈게 고생이겠습니까? 사람이 죽는게 아파요? 남 죽는게 아파요? 남 죽는게 아파요. 지가 살아남는게 아파요. 왜냐하면 예를 들면 이런겁니다. 수능시험 치는 학생이 안타까워요. 밖에서 엿 갖다붙이고 기도하는 엄마가 안타까워요? 엄마가 더 안타까워요. 수능가면 정신없어요 지금. 6번 풀어야지 7번 풀어야지 정신없어요.
그러니까 괜히 감정이입을 상상해서 자기한테 감정이입 시키는거에요. 암환자가 걱정됩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더 걱정됩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더 걱정 돼요. 고통을 줘요. 죽은 사람이 울어요? 산 사람이 울어요? 산 사람이 울어요. 죽은 사람은 죽었다고 좋다고. 예수님의 고통을 내가 대신 가져가려고 생각하지마세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예수님께 보답할 생각하지마세요. 성령은 보답용으로 준게 아닙니다. 보답이 안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주신겁니다. 보답하는 순간 우리는 악마의 유혹에 빠졌어요. 빨리 빠져나와야 돼요.
주님한테 효도할 필요없어요. 주님 앞에 충성할 필요없습니다. 사랑 소망 믿음 우리는 할 필요없어요. 주께서 택배로 다 보낼거에요. 안 오면 어떡해요? 안 오면 지옥가야죠 뭐. 어차피 내가 못할 것을 가지고 날 구원할거 같으면 주님 주신 믿음 소망 사랑이 안 오면 지옥 가야돼요. 그럼 온다는걸 어떻게 압니까? 오게 되면 내가 내 믿음 소망 사랑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아주 신나게 믿지요. 신나게 감사하죠.
그럼 감사하면 어떻게 됩니까? 의탁하지요. 맡기지요. 의지하지요. 그냥 썩은 소나무가 건재한 소나무에 기대듯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냥 맡기는거에요. 내 주변에 나 아는 사람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주께서 알아서 일으킨 주님의 행동으로 일으켰기 때문에 나는 못합니다. 나는 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알아서 해주세요 하고 내 배 째라 하고 있는거에요. 뭐 할 수 있어요?
그래야 내가 못난 사람 되기 때문에. 그 딕 훼밀리 밴드가 한 노래 있잖아요. “해도 저문 밤하늘에” 그 노래 있지요? “나는 못난이” 캠프 가서 손뼉치면서 부르잖아요. 기타치면서. 주께서 못난이를 죄인을 탕자를 건져줬다는 이 사실을 이 사실에 늘 감사하면서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의미를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옵소서. 십자가 앞장 세워서 일하시는데 그 앞에서 우리가 무능한 자가 됨을 알게 됨을 주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또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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