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강-갈 6장 1절(시험 받다)1809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6장 1절입니다. 신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범죄라는 것이 개인적인 범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 어디에, 어느 장소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장소에 놓여 있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시험이 만들어지는, 하나님 보시기에 반발이 일어나는 그 영역에 인간은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범죄 할 때는 사적으로 범죄 한 것이 아니고 세상이 어떠한 세상인지 들춰주는 하나의 징후, 하나의 징표, 싸인으로서, 시그널로서 범죄가 일어나는 겁니다. 범죄를 통해서 내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속한 세상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그 말이에요.
이 말은, 인간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범죄를 늘 저지를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고치거나 변경할 수 없어요. 그냥 세상이 흔들리는 대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젤리 안에 과자가 들어 있다면 그 과자는 젤리 안에 포위되어 있지요.
그러면 젤리가 움직이면 덩달아서 그 안에 있는 과자, 땅콩이라든지 코코넛도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세상을 볼 때 주님께서는 개인보고 “똑바로 해. 잘 살란 말이야. 바르게 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지진이 일어나면 흔들리듯 세상이 흔들리면 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네가 그런 세계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보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네가 빠져나올 수 없는 세상에서 이미 너는 ‘다른 사람화’ 되었다, 천국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네가 성도다’라고 인식시키는 방법은 우리 자신과 세상을 통해서 범죄를 계속 유발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잘못한 것을 내가 고치면 그만 아니냐, 하는 그것이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고쳐서 될 것 같으면 알아서 이미 고쳤을 거예요. 고쳐도 고쳐지지 않는 것은 내 탓이 아니고 결국 세상 탓이 되는 겁니다. 세상이 문제가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우리보고 똑바로 살아라, 바르게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빠져나올 수 없는 세상, 시험밖에 없는 그 세상에서, 반발과 반항밖에 없는 그 세상에서 어떻게 해서 너는 빠져나왔는지, 누구공로로, 누구덕분에 네가 거기서 새사람 되었고, 천국가게 되었고, 천국백성 되었는지를 본문을 통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훌륭하다, 잘났다가 아니라 주님이 이렇게 대단한 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도 세상 떠나지 않고 머물게 하는 겁니다. 우리를 통해서 우리 주변 세계가 나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 주님과 이 세상 전체가 통째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네가 파악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살면서 내 잘남 자랑하지 말고 주님이 이렇게 잘났고, 주님이 이렇게 소중하다는 것을 인생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 이게 주의 증인, 그런 취지에서 사도바울이 이 본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6장을 하기 전에 우리가 5장을 했잖아요. 5장에서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나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았습니다.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우리가 파악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해당되느냐?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그 본문 다시 읽어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주체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아니거든 너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파악 못한다 그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한테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명절이 되면 오랜만에 친척 봤다고 전도하는데 제가 부탁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 건드리지 마세요. 전도하지 마세요.
먹잇감 노리듯이 달려들어서 전도해 대는데, 사람은 어린애나 어른이나 건드리면 짜증나요. 너는 네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사는 거예요. 자식들에게, 특히 결혼한 자식들에게 간절한, 피눈물 날 정도의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제발 부모들은 좀 자립하라 그 말이지요. 정신적으로도. 자식 찾지 말고. 돈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자립해서, 당신들은 당신들대로 살고 자식은 자식대로 살 테니까 좀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겁니다. 안 찾아오나, 전화 안하나, 이런 쓸데없는 소리들은 좀 하지 말고.
자식들이 부모한테 차마 못하는 소리 제가 대신해주고 있는 겁니다. 정말 그거 피눈물 나는 소원이에요. 명절 되면 김치니 뭐니 보내는데 왜 보내겠어요? 내가 이만큼 너 사랑하니 너도 나 사랑하라는 그런 뜻 아닙니까? 그 자체가 귀찮다니까요, 그 자체가. 그 자체가 심적인 엄청난 부담을 줘요.
그러니 자식이든 부모든 제일 중요한 것은 자립하는 겁니다. 정신적으로 자립하고, 돈으로 자립하고. 다만 자식들이 바라는 것은 어려울 때 좀 돌보고. 좀 돌봐줬다고 어떤 기대 좀 하지 말고.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취지를 알아야 돼요. 사도바울의 취지는 뭐냐 하면,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을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좀 과격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미리 자기가 화장터에 가서 자기가 자기를 화장(火葬)해요.
그러면 가루가 나오지요. 가루 나온 것을 낙동강이나 금호강에 뿌리는 겁니다. 자기가루를 세상 온갖 구석에 다 뿌리는 거예요. 중국에 놀러 가면 거기서 자기 뼈가루 뿌리고, 라오스에 가면 거기서 또 뿌리고, 미국에 가면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뿌리고. 이미 자기는 이 세상에서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가 죽은 자로 안하게 되면 주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너는 시험에 빠졌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시험이라는 말은 영어로 하면 test인데 그냥 테스트라고 해서는 잘 의미가 와 닿지를 않아요. 그래서 쉽게 하면 시험이라는 것은 뭐냐? 함정에 빠졌다. 다른 말하면 덫에 걸렸다는 그런 뜻입니다.
잘못된 체계에 빠졌고, 진실을 가리고 진리를 가리는 그런 체제에 빠졌다는 겁니다. 이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시험에 빠진 거예요. 시험에 빠졌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살려준 것만 기억하면 돼요.
교회 좀 다닌 사람은 시험이라는 말을 어디서 많이 듣게 되느냐 하면, 주기도문에서 많이 듣게 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시험에 들지 않는 그 방법이 주기도문 안에 들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루만 살게 하옵소서. 내일을 남겨두지 않는 채로 살게 하옵소서. 내일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지 않는 채로 하루하루 살게 하옵소서. 이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라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죽게 된 것은 조상 탓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조상에게 뭐가 문제였느냐 하면, 제 3자가 개입해서 우리가 함정에 빠진 거예요. 에덴동산에 하나님이 있고 인간이 있는데 그것으로 족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뱀이 들어온 거예요. 악마가 들어온 겁니다.
제 3자가 개입해서 뭘 건드렸느냐 하면,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자꾸 제 3자가 개입한 겁니다. 보상이 있지요. 네가 따먹는 날에는 더 이상 신이라는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악마가 우리에게 준 보상이에요.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신에게 매여 살래? 너 신의 쫄다구 아니잖아. 너는 너야. 네 인생은 네가 사는 거야. 신이고 종교가 다 치워버려. 네 인생은 네가 하기 나름이야. 따라서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율권, 자유가 있는데 그것을 썩힐 거야? 그거 활용해. 그거 마음대로 발휘해. 그리고 신은 그 다음이야. 네가 신을 부르면 신이 너를 쫒아오게 되어 있고 신에게 뇌물을 주면 신은 뇌물에 엎어져서 너의 소원대로 이루어줄 거야. 신은 그렇게 다루는 거야. 네가 신에게 돈을 주고 신에게 잘 보이면 신은 너에게 복을 주게 되어있어. 신은 네가 필요한 구석에만 신이 필요하지 신이 네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그런 것을 네가 용납하지 마.”라는 것이 악마가 준 보상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그렇게 신기하게 들리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신이기 때문에. 각자 신이에요. 각자 신이기 때문에, 각자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악마의 시험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고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관습화 되어있어요.
교회라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교회 왜 옵니까? 신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다루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이만한 뇌물 바쳤으니까 30배, 60배 내놓으라는 그 말이에요. 교회 찾아오는 수고를 했기 때문에 다음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성사 잘 되게 해달라는 겁니다.
신이 있는 이유는 나 잘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신 자체를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 있지 않다는 것이 사탄이 반란을 일으킨 겁니다. 반란을 일으킨 그 반란의 정신이 그대로 인간 속에 분배되어 있는 겁니다. 각자 속에 다 집어넣은 거예요.
붕어빵 구울 때 어떻게 굽습니까? 제가 구워봐서 알지만 밀가루 집어넣고 앙꼬 좍좍 넣잖아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거기에 악마의, 뱀의 심성을 다 집어넣은 겁니다.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부 다 인간의 육신을 뱀의 정신이 지배하게 된 거예요.
자식 키울 때 보세요. 부모가 자식 키우게 되면 자식들이 부모 말 듣는다고 생각하지요. 자식들이 어린 애니까 부모를 이용할 생각이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24개월만 지나버리면 자식은 부모를 이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부터는 감당이 안돼요. 자식이 감당이 안 됩니다.
감당이 안 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인데 이것을 억지로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하니까 우환이 생기는 겁니다. 왜 자식이 내 말을 안 듣는가, 그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지 마세요. 나도 부모 말 안 들었잖아요. 자기생각을 해보세요. 자기는 부모 말 안 들어놓고 자식은 내 말 들어야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이야기했지만 자식을 키우는데 내가 한 것이 없어요. 한 것이 없다면 자식이 내 말 들을 필요도 없는 겁니다. 내가 자식을 키우지도 않았는데 자식은 왜 내 말을 들어야 됩니까?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키웠지 내가 키운 것이 아니거든요.
악마는 인간에게 전부 다 완장 차게 했고 전부 다 제복을 입혀놓았습니다. ‘이게 네 자리야. 네가 갖고 있는 영역이야.’ 하지만 그것은 노예에요. 이미 우리의 정신은 우리 임의로 바꿀 입장이 못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우리가 시작한 거지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이미 갈라디아서 1장에서 한 거예요.
2장 할 때 1장 잊어버리고, 3장 할 때 1, 2장 다 잊어버리고, 4장 할 때 1, 2, 3장 다 잊어버리고, 지금 6장인데 1, 2, 3, 4, 5장 다 잊어버렸잖아요. 1장에서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리스도와 사람은 대척관계에 있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교회 오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왜 왔느냐? 너희들 기쁨 얻기 위해서 교회 나왔잖아. 재수 좋으라고. 행운을 얻기 위해서 나왔잖아.” 그렇다면 교회 자체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에게 웬수가 되는 거예요. 교회자체가.
교회가 절이면서도 절 아닌 척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 이야기하면서 마치 교회인 것처럼 교회가 교회를 착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교회 자체가 악마에 시험든 겁니다. 마귀의 마음을 가지고 운집한 그 집합체가 교회라는 간판을 걸은 거예요.
대한예수교가 아니라 대한마귀교 ○○교회라는 말이지요. 거기서 무슨 천국을 가요? 본인이 천국에 관심이 없으면서 무슨 천국에 갑니까? 이 세상 복 받으려고 오는 거잖아요. 자기 기쁨을 천국을 이용하자는 것 아닙니까?
성경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내가 격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도 마찬가지에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라 하는 것도 격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실제상황입니다.
그러면 시험에 들었다는 말은 이 세상에 빠졌다는 말인데 다 빠진 것은 아니고 빠지지 않았지만 세상에 뭔가를 알리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리기 위해서 세상에서 이미 빠져나온 채로 세상에 살아야 될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만 왜 세상 자체가 하나님 앞에 함정이 되고 덫이 된다는 것을 알려줄 수가 있어요. 여기 ‘무슨 범죄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범죄라는 개념, 죄라는 개념조차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새롭게 규명합니다. 자기가 보기에 내가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범죄가 아니에요.
신명기 24장 14, 15절에 보면 “곤궁하고 빈한한 품군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방금 신명기를 읽었는데 신명기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법입니다. 쉽게 말씀드릴까요? 이 세상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자기를 만드는 법이 있어요. 그게 시험든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대처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생각해서 주어진 법이 바로 율법이에요.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 법,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을 의도적으로 충돌케 하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목사님, 저 죄를 지었어요.” 하는 것은 자기가 만든 기준에 의해서 죄를 지은 거예요. 내가 보기에 내가 만든 법을 어겼습니다, 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시험든 거예요.
세상 별게 아니거든요. 별게 아닌 세상에서 죄지었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좀 가치 있는 인간이고 싶은데 얼마 전에 죄를 지었어요. “나는 이 세상에서 괜찮은 인간으로 살고 싶은데 내가 죄를 지었으니 내가 너무 가슴 아파요. 목사님(신부님), 어떡하면 좋아요?”라고 했을 때 아직도 자기가치, 자기존재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미 자기명예와 자기영광을 위해서 ‘나는 이러이러한 법은 지키겠다’는 자기의로움의 체계를 자기가 갖고 있어요.
그게 시험든 거예요. 별게 아닌 세상에서 너도 별게 아닌 거예요. 별게 아닌 인간이 죄 지어도 별게 아닌 거예요. 왜 그걸 모릅니까? 인간이 죄 짓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정말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예수의 사람이 된다면 자기로 인해서 피해를 본 사람이라든지, 자기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찾아가서 뭐라고 해야 되느냐? 미안하다고 해야 돼요.
“친구야, 미안하다. 내가 그동안 몰랐어. 몰라서 내가 너에게 사과를 했는데 사과할 것도 아닌데 사과를 해서 미안해.” 이래야 돼요. “사과한 것 물어줘. 내가 한 십억 당겨서 날렸는데 전에는 굉장히 미안했었거든. 그런데 내가 또 찾아왔다. 사과할 거리도 아닌데 사과해서 미안해.”
왜냐하면 너라는 인간도 아무것도 아니고 사기를 친 나라는 인간도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사기 치는 것은 나쁜 짓이야. 도둑질 하는 것은 나쁜 짓이야.’라고 했던 그 자기에 대한 잘못된 인식, 그동안 세상에서 나에게 윤리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쏴대는 인식에서 나는 돋보이고,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훌륭하게 살겠다는 그 자체가 아직도 자기가 자기관리를 하겠다고 버티고 있는 그게 시험거리에요.
꿈틀거리고 있는 겁니다. 아직 지렁이 안 죽었다고. 주님께서 죽으라고 하는데 안 죽고 있어요. “나 같은 가치 있는 인간은 더 살아야 됩니다, 주여.” 이러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잘못된 세상, 잘못된 체계라는 것이 뭐냐 하면, 그 가운데 내가 잘났다, 가 핵심으로 담겨있어요.
남은 다 죽어도 나는 안 죽어야 된다는 것이 들어있다고요. 들어있으니까 완벽에 완벽, 철저에 철저를 기하는 내가 약간 실수를 했잖아요. 나는 지난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누가 이렇게 한다면? 제가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다 보내는 거예요. “나는 지난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그렇게 보내면 분명히 “목사님, 잘못했습니다.” 할 사람들 있어요. 뭔지는 모르지만. 남에게 그런 식으로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자기가치를 계속 유지하고 견지하게 위해서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바르게 산 것이 덫이었어요. 착하게 살려는 것이 덫이었습니다. 남에게 잘못해놓고 사과하면 반성했으니까 더 착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나라고 여긴 그것이 착각이었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악해지는 것이 주의 뜻일까요? 의도적으로 방종하는 것이 주의 뜻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주의 지시에 따라 살아가야 돼요. 혼자 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제가 처음에 창세기 3장을 이야기했잖아요.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과 인간만 있었던 그 동네에 뱀이 들어왔습니다. 제 3자가 개입해서 아담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아담의 마음에 ‘만족 없음’이 등장한 거예요. ‘만족 없음’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상태가 된 겁니다. 주님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어요. 그러면 세상물정 다 들어옵니다.
주님만으로 만족 안하니까 중국에 놀러가고, 계속해서 만족이 되도록 골프 치고, 전에는 오토바이 몰면서 ‘빠라빠라빠라빰’ 이거 하다가 이제는 산악자전거 타다가 꼴아 박고요. 그것도 수천만 원짜리, 3천만 원, 5천만 원. 자전거 한 대 값이요.
남자는 차 바꾸고, 여자는 보석이나 가방 바꾸고, 아파트 넓히고, 애들은 휴대폰 바꾸고. 이게 뭐냐 하면, ‘나는 만족해야 돼’라는 그것을 기본으로 하고 이 만족을 충족하기 위해서 뭘 집어넣어야 되는가, 해서 평생토록 집어넣는 거예요. 누가 뭐 했다 하면 따라하고 또 뭐 했다 하면 따라하고.
그러나 주님의 지시에 따르게 되면, 요한복음 4장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님의 지시에 따르게 되면, 남자 여섯 명 있는 여자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우물이 있어요. 단지, 어떤 단지? 사랑이 계속 퍼올려지는 우물이 생깁니다. 창의성이 있어요. 새로워요. 하루하루 사는 것이 새록새록 합니다. 만족 안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어진 모든 상황 속에서 내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아가는 새날이 되기 때문에. 익히 아는 것은 식상하잖아요. 익히 아는 것은 입맛 떨어집니다. 매일 새로운 사태, 사건이 몰려오는데 그 사건과 사태가 뭐냐 하면, 너는 세상에 속았다는 겁니다. 너는 속고 살았다.
그 점을 약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사야 42장 2절에 보면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님은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거든요. 놀랍게도 오늘날 교회하고는 정반대에요.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않는다.
전도라는 것을 왜 하느냐 하면, 숫자 적으면 외로우니까요. 외로워서 하는 것이거든요. 외롭다는 것은 내 곁에 아는 사람이 풍성해야 내가 만족하겠다는 의도가 있어요. 주님만으로 족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7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6절에는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무슨 말이냐 하면,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를 붙잡아 당기는 즐거움이 있어요.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너를 손을 잡고 계속해서 이 진흙의 늪 속에서 조금씩 빼내지는 그 즐거움. 못 빠져나오게 발목 잡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세운 법이에요.
내가 세운 법에서 홀라당 허물 벗는 그 즐거움, 그게 매일 성도에게 주어지는 행운이고 축복입니다. 내가 세운 원칙과 원리가 홀라당 껍질 채 벗겨지면서 알맹이만 빠져나오는 그 매끈한 기쁨이 있어요. 이 이야기를 해도 별로 좋아할 줄도 모르고…….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구자억이라는 목사님이 있어요. 그분이 획기적인 찬송을 불렀어요. 기존의 찬송은 가락이 클래식하고 거룩하고 가사도 거룩해야 되는데 이 사람은 친숙한 대중가요에다 가사를 개사해서 붙여서 그래도 된다는 식입니다.
예를 들어 나훈아의 <영영> 김수희의 <애모>를 개사해요. 원래 나훈아의 <영영>은 “잊으라 했는데……”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 사람은 “믿으라 했는데, 믿어볼라 했는데” 이렇게 바꾼다니까요. 교인들이 거룩한 체를 하면서 교회 왔는데 갑자기 나훈아 노래가 나오니까 전부 다 따라하고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도 아직은 주님 믿지 못하네~.” 약간의 반칙이지요. 가사를 약간 바꿨을 뿐이에요. “어찌하면 믿을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이상하게 기분이 좀 더럽기도 하고, 뭔가 그렇게 싫지도 않고. 왜 싫지 않느냐 하면, 평소에 부르고 싶었는데 교인이라서 차마 못 불렀던 거잖아요.
목사가 선창해서 불러주니까 ‘교인이라면 뽕짝은 안 돼. 트로트는 안 돼’라는 자기가 만든 올무에서 참기름 발라서 빠져나오는 그 기쁨이 있잖아요. ‘아, 목사가 저렇게 부르니까 다른 사람도 불러도 되네.’ 이렇게 빠져나오는 기쁨, 그런 것이 있는 거예요.
김수희의 <애모>는 <애주>로 바꿨습니다. 술이 아니고 주님 좋아한다는 말이지요. “주님 앞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이렇게 나와요. “2천년의 시간을 넘어 주님사랑은 오늘날도 변함없는데” 가락은 그대로 똑같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속았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마귀한테 속아서 죄를 지었다, 가 아니라 죄도 아닌 것을 죄라고 여겼던 죄, 그게 속은 거예요. 그래서 주님 방법은 뭐냐? 시험에 대해서는 시험으로 공략합니다. 거짓말에는 거짓말로 공략해요.
예수님 말이 다 거짓말이잖아요. 십자가 지면 죄 용서한다는 것도 거짓말이지요. 세상 사람들한테는. 죄 지은 것이 있다면 그만큼 착해져야 용서받는 것으로 알고 있잖아요. 내가 만든 법에서는. 나쁜 일을 한 것보다 더 착한 일을 해야, 나쁜 일 49퍼센트, 착한 일 51퍼센트, 그래서 빼기를 하면 나중에 심판받을 때 51- 49=2, 2프로 남잖아요. 2프로 남으니 지옥이 아니고 천국 쪽이다. 이것이 우리 계산이에요. 우리 양심의 계산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내 피로 모든 죄를 다 용서했다, 하니까 이 거짓말을 사람들은 웃기네, 하고 안 믿는 거예요. 또 주님께서 하늘나라 가시고, 다시 재림하신다는 이것도 거짓말로 보이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익히 우리가 안다는 것을 다 아세요. 안다는 것을 다 아시고, 우리가 예상 못할 다른 것을 제공해 버립니다. 그것이 못 빠져나오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 중 하나를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그 대목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야고보서 1장 13, 14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창세기 22장 1절의 말씀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두 말씀이 모순되지요. 창세기 22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다고 되어있고 야고보서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 때는 구약이거든요. 주님께서 십자가 지기 이전입니다. 구약에서는 모든 것을 법 안에서 취급해요. 그런데 신약은 이미 자기백성을 법에서 빼냈습니다. 성도를 죄인으로 몰아세울 법은 더는 없습니다. 성도를 ‘너 지옥 간다’ 할 수 있는 근거는 전무합니다. 전혀 없어요. 교도소 들락거리고 아무리 사람을 패 죽여도 지옥 못갑니다. 지옥 못 가게 만들었어요. 그것마저 천국 가는 절차와 과정으로 이끄십니다. 남에게 그렇게도 피해를 주고도. 음주운전으로 신혼부부를 죽여도 지옥가지 않아요.
신약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구약이 필요합니다. 그냥 바로 뛰어서 신약으로 가게 되면 반칙이 돼요. “주께서 시험하시고”를 경유해야 신약에서 “더 이상 너를 시험할 수 있는 것은 없다.”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해놓고 사랑하는 독자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지시만으로 족하냐를 묻는 테스트에요. 하나님의 지시만으로. 더 어렵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서 나라는 인간이 과연 순종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대해서 만약에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서 내가 순종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위반이 되어버려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서 나는 나를 그동안 몰랐었는데 너 자신이 누군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테스트를 해버려요. 테스트를 하는 가운데서 나는 나 자신을 그동안 몰랐어도 한참 몰랐었다는 것을 들춰내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아들을 바치게 하고 그래서 죽이는 것이 결말이에요.
아들을 제물로 바침으로서 죽이는 그것이 결말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죽이라, 하는 하나님 자신이 낸 테스트를 하나님 자신이 중지를 시켜버려요. 마치 수능시험을 치게 한 교육부가 수능시험을 치고 있는데 “스톱! 오늘 시험 무효” 하고 교육부가 스스로 수능시험을 철회하는 것과 동일한 거예요.
시험을 하시되 너는 시험의 대상이 안 된다는 것을 그동안 네가 몰랐었는데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기 테스트에 가담하게 만들어서 그 가담한 시험자체에서 빼돌리는 작전을 벌리는 겁니다. 그것이 외재성이에요. 외부적인 요인이 와서 나로 하여금 그동안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을 새롭게 규정하는 방식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이 어려운 이야기가 로마서 4장 18절부터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못 낳게 해놓고 자식을 주게 됩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식 바치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눈을 어디까지 돌리게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네가 자식이 원래 없었잖아.”까지 돌려요.
없었던 자식인 이삭이 생겨서 아브라함 눈앞을 지나갑니다. 없던 자식 생겼고 그 자식이 모리아산에서 제물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어린양을 준비하셔서 죽어야 될 그 자식이 다시 부활해서 살아난 그 과정을 아브라함 눈앞에 목격하도록 만들어버려요.
그렇게 될 경우에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태어난 그 자체로 이미 천국백성이고 어떤 시험의 대상도 안 된다는 것을 파악하는 프로그램을, 영화필름을 아브라함 앞에 좍 돌려버린 겁니다. 그 돌린 주인공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에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은 외재적존재에요. 우리 인간이 아니고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시죠. 인간세계에 속하지 않은 분이 인간 속에 투입되어서 우리 눈앞에 펼쳐지면서 “너 그동안 함정에 빠졌어. 너 덫에 빠진 거야.” 교회라는 덫에 빠진 거예요. 기독교라는 덫에 빠진 겁니다. 내가 뭔가 행함으로 복을 받는다는 그 덫에 빠진 거예요.
그게 마귀가 뒤에서 사주한 것인데 우리는 평소에 내 인생 내가 관리한다는 철저한 악마적인 그것이 나 자신인줄 알고 거기에 몰입하다 보니까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어요. 왜? 내가 손해되면 안 되니까. 내 인생, 내 가정이 파괴되면 안 되니까. 쉽게 말해서, 나는 죽으면 안 되니까. 더 나아가서 나는 없어지면 안 되니까.
악마가 그렇게 우리를 싸잡은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없는 자를 있게 했잖아요. 벌써부터 이상하잖아요. 없는 자를 있게 했잖아요. 그리고 그분은 이 땅에서 죽었다 그 말이지요. 죽음에서 끝난 줄 알았는데 죽음에서 끝이 아니었어요. 주께서 그 죽음자리에서 부활했어요. 3일 만에 부활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생이에요. 우리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자는 이런 혜택을 입는다는 겁니다.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해? 미쳤나?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게.”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목회하려고 목사된 것이 아니라는 그 말과 똑같은 거예요. 교회 해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지금 이렇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그냥 그 현실성을 드러낼 뿐이에요.
사람들이 인생 살면서 흔히 무심코 내뱉은 말이 얼마나 악마적인지를 드러내는 말 중 하나가 이런 거거든요. 바둑 두는 사람들은 알아요. 바둑을 두는데 ‘아, 다 이긴 바둑 역전 당했다.’ 이러거든요. 프로 야구가 가을야구를 하려면 5등까지는 되어야 하는데 기아가 8등까지 내려갔다가 5등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만, 기아가 최근 10게임 가운데 9게임을 역전승으로 이긴 거예요. 역전이라는 말이 뭡니까? 다른 팀은 역전을 당한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역전 당했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내가 좋았고, 잘나갔다는 겁니다.
그러나 진짜 70이나 80의 노인이 되어보면 어떤 지혜가 있느냐 하면, 인생은 애초부터 역전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게 노인의 지혜에요. 인간자체가 역전을 요구할 권한 자체가 없이 태어난 겁니다. 인생에 역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 역전이라는 것을 자꾸 고집하느냐 하면, 잘나갔을 때, 내가 괜찮았을 때, 내 인생이 좋았을 때를 마치 자기 자신의 본질인양 일방적으로 우쭐대면서 자기를 부추긴 겁니다. ‘하, 그 때 내 수입이 한 달에 천만 원이었는데. 궁중족발 할 때 잘 벌었는데 건물 주인이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도끼 들고 설치다가 인생 이렇게 되었다.’ 인생역전 없습니다.
처음부터 너는 도끼로 매 맞아도 싼 거예요. 자기가 좋았을 때를 자신의 본모습으로 여기는 겁니다. 꿈속에 나타난 여러분의 모습을 모세요. 어떤 모습입니까? 제일 좋았을 때, 괜찮았을 때, 나이가 60이 넘어서도 여전히 30대 얼굴로 꿈에 등장해요.
그러다보니 꿈에 등장한 일가친척들이 다 젊어요. 꿈은 항상 좋았던 기억, 잘나갔던 기억을 다시 재편집해서 꿈으로 보여주거든요. 그 때 등장했던 인물들이 다 젊었잖아요. 나 자신이 나의 맞춤 환상과 가상을 조작해내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나는 나를 조작해요.
마귀 들려도 아주 철저하게 마귀 들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시험을 빠져나가는 방식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 넣어놨습니다. 레위기 25장 8절에서 10절인데 듣기만 해 보세요. 무슨 뜻인지 감 안 올 거예요.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찌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라고 되어있어요.
대한민국 사람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요. 레위기 25장의 이 말씀이 왜 있는지. 나팔을 불라고 했거든요. 지난 주 오후 설교 들어본 사람은 압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모든 일이 다 파장, 완료되었다, 마감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동안 노예로 팔려간 이유가 짊어진 빚 때문이에요. 채무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면서 이렇게 봅니다. “너 나에게 채무 있어. 아담과 한통속이 되어서 나에게 죄지었잖아. 그 죄지은 거 나에게 갚아야 해. 갚지 않으면 나는 너를 그 지옥에서 빼낼 생각이 없어.” 이게 하나님의 원래 취지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율법에 의해서 짊어지게 된 채무, 그 빚을 탕감하는 방식을 또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집어넣어 준 것이 뭐냐 하면, 나팔 부는 날 칠칠의 사십구, 7년 곱하기 7년, 49년 더하기 1, 모든 빚이 탕감되고 그 다음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10절에 보니까,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자유입니다. 해방입니다. 어디서 해방이냐 하면, 그동안 양심의 가책, 이 세상 모든 윤리도덕의 법에 시달렸던 모든 무거운 죄 짐에서부터, 저주라는 공포심에서부터. ‘지난여름 네가 한 일을 안다’고 하는 촉구 받는 자아, 재촉 받는 인생. 뭔가 넉넉해도 자꾸 쫓겨요.
꿈이라 하는 것은 쫓기는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 꿈이에요. 자기방어메커니즘이 꿈입니다. 자꾸 뭔가 쫓기고 있어요. 뭔가 일이 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쫓겨요. 한 번 아프고 난 뒤에 또 아플까봐서 벌벌 떨어요. 실패하면 안 되는데, 지면 안 되는데, 우세스러우면 안 되는데, 인간 망가지면 안 되는데, 내가 인생 이만큼 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거 마귀가 지워준 무거운 쇳덩어리 같은 짐입니다. 장미란이도 그거 못 들어요. 이러면 안 돼, 이래야 돼. ‘이래야 돼’에 쫓기고 ‘이러면 안 돼’에 또 쫓기고. 나이 많아도 쫓기고 젊어도 쫓기고. 시험에 쫓기고 성적에 쫓기고. 취직에 쫓기고 결혼에 쫓기고. 승진에 쫓기고.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에 쫓기고. ‘성경 봐야 된다’에 쫓기고, ‘기도해야 된다’에 쫓기고, ‘선교해야 된다’에 쫓기고.
따라오는 사람도 없는데 자기가 자기를 재촉하는 그러한 시험. 주께서는 해방의 날을 준비했습니다. 희년입니다. 날짜, 그 시간 49 더하기 1, 그 희년은 누가복음 4장에서 주님이 ‘내가 바로 그 날짜’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바로 움직이는 희년이라는 거예요. 나를 믿는 자는 모든 죄 짐에서 벗어나리라.
이걸 가지고 기쁜 소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복음인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교회 법이든지, 양심법, 어떤 법도 나를 더 이상 협박 공갈할 수가 없습니다. 망가진다고, 너 실패한다고 협박 공갈, 너 교도소간다고 협박 공갈 할 수 없어요. 왜? 우리는 이미 화장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가루로 되어서 떠나야 할 이 세상에서 안 떠나도 그냥 뿌리는 세월 보내기 위해서 70, 80까지 계속 살고 있습니다.
‘오늘 어디 가서 뿌려볼까? 오늘은 중국 장가계에 가서 뿌려볼까? 그랜드 캐년에 가서 뿌려볼까? 그리스 산토리니 섬에 가서 뿌려볼까? 라라라라라라라~, 거기서 경치구경 하면서 뿌려볼까?’ 이 세상은 악마의 덫인 것을, 시험의 장소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오늘도 우리를 살게 하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속고 또 속고, 남이 속고 내가 속았습니다. 속고 사는 것이 진실인 줄 아는 우리에게 주께서 속임수에는 속임수로 대응하여 예상치도 못한 엄청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내 피를 믿는 자는 모든 죄가 없어진다는, 천국 간다는, 해방된다는 이 기쁜 소식, 이 소식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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