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아들의 영(갈4;6-7) 1805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5. 14. 18:34
2018-05-13 12:43:16조회 : 81         
   아들의 영180513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아들의 영(갈라디아서 4:6-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kEAJP0SdNPI, Hit:12
 이근호18-05-13 13:28 

아들의 영 

2018년 5월 13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4:6-7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해내는 모든 일을 다 피해가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속해 있는 세상의 성질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란 일종의 범주입니다. 곧 ‘갇힘’의 세상입니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 재미나고 행복하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들은 같은 인간들이 다들 고만고만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여기세 ‘낯선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무리 그 인물을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 나타났지만 이 세상이 아니기에 분석이나 해명이 될 리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3:16-17에 보면, 그분에게 도달한 게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아들로 인정하시어 보내는 영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신 겁니다. 그러니 성령없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이해할 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왜 그 분이 인간들의 세계에 왜 오신 겁니까? 그것은 그들이 믿는 신들이 모조리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가짜 여호와, 가짜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왜 인간들만 살고 있는 듯이 보이는 세상이 왜 가짜 신을 양산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실은 인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치하는 ‘이 세상 신’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즉 인간들은 이 세상 신과 동거중이었습니다. 이 세상 신을 따르고 경배하고 신봉하고 곧이들었던 겁니다. 

즉 세상은 나름대로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얕잡아보고 쓸데없는 것으로 돌리는 일입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늘 복음보다 중요한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 인생’입니다. ‘나 인생’은 타임Time 라인line으로 형성됩니다. '타임 라인‘이란 시간을 한 줄로 쭉 나열하는 것을 뜻입니다. 

그 라인이 계속 촘촘히 끊어짐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전개시키면 좋을까?”라는 투로 질문을 던져보는 겁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세상 모든 이들은 세상 신은 악마로부터 철저하게 조련되어 왔습니다. 그 사상이 바로 ‘돌탑쌓기 사상’입니다. 

돌 위에 또 돌을 얹어서 착실하게 자기만의 인생의 돌탑을 쌓는 겁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여기에서 ‘이어짐’ 뿐입니다. ‘끊어짐’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형성된 목숨과 생명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첫 번 유월절날, 히브리인들은 문지방과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피가 원래 담겨 있었던 그 양의 몸체를 문 안에서 뜯어먹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기존에 그들이 그들의 목숨을 연속시키기 위해 취했던 그 양식이 아닙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과연 피흘린 어린양의 목숨이 참된 목숨인가 아니면 스스로 네가 선택한 양식으로 다져진 목숨이 참된 생명인가를 견주어보라는 겁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죽기 위해 떡을 먹고 밥을 먹고 돈을 버는 자가 없음을 감안해봅시다. 인간이 자신을 촘촘히 이어나가서 어태껏 형성된 그 생명과 목숨은 모조품입니다. 

진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안 받는 목숨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생명은 ‘아드님이 생명’입니다. 즉 아버지의 영을 받아서 살게 된 그 목숨만이 진짜 생명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아들의 영’이 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존의 자신의 육의 연정을 추구했던 그 목숨이 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아브라함 때까지 줄기차게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대에 와서 ‘자식이 없이 대가 끊긴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은 ‘만민의 아버지’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여기서 그 이름에 합당하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이 보여집니다. 

하나님께서 없던 자식을 생기게 만들고, 그 자식을 하나님께서 지정한 장소에 가서 번제로 드리도록 지시합니다. 이는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진품으로 받아주는 목숨이 지상에 따로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자식이 죽습니다. 이로서 아브라함의 대 끊어짐의 취지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최초에 할례언약을 지시한 그 대상자가 곧 아브라함 가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할례언약의 의미는, 육으로 난 자식을 하늘나라에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육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 육입니다. 보면

몸의 문신은, 몸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할례라는 몸의 문신은 몸의 죽음을 통해서 취지는 도리어
비로소 사건으로 살아남아 본격적으로 영원히 활동하게 됩니다. 

‘할례’의 의미는, ‘끊어냄’ 혹은 ‘잘라냄’입니다. 이는 한 인간을 분리하되 수평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분리해서 두 개의 범주층을 아래 위를 통해 만드는 겁니다. 즉 멸망될 땅에 갇혀 사는 자가 있는 반면에 하늘 복락에 영원히 갇혀 살 자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6:25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천국을 가리는 속임수 쓰라고 만든 세상입니다. 성도는 필히 이 세상을 다녀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이 세상을 다녀갔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세상이 주는 속임수에 대해서 그 속임수를 전제로 한 속임수로 다가서는 겁니다. 세상은 늘 개별중입니다. 지표면을 갈아엎으면서 인간들의 목숨 연장책이 활발하게 드러냅니다. 하지만 지진은 바로 이런 모든 노력을 근원적으로 갈아엎어버리고 그 와중에 마그마를 토해 놓습니다. 

이건 폭력성을 말합니다. 즉 성령을 통해서 등장하는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은 물러설 수 없는 이질적 안목을 가지고 폭력 안에서 서로의 정체를 노출시키기 됩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1-4) 

이 이야기는 아들 등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시 2:7) 평소에 인간들은 악마의 동거하면서 악마와 같이 사는데 필요한 인품과 성격과 의식과 습관들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몸의 활동들이 전부 세상 신에게 복종해서 용서를 구하는 그런 자세로 나타나게 됩니다. “제가 악마를 몰라보고 복음믿고 함부로 대든 무례함을 용서해주옵소서”하는 식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성도를 통해서 강제로 아들됨을 임신시키고 출산시킵니다. 이 출산의 고통이 대단합니다. 건드릴 수없는 가장 내부적인 것을 밖으로 끄집어낼 때에 다음과 같이 고함치게 됩니다.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마 27:46) 자신이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을 쓸모 없는 인간임으로 변모하는 일은 곧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동 중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일이 항상 우리 인간의 일보다 더 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이근호18-05-14 16:44 

288강-갈 4장 6-7절(아들의 영)1805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4장 6-7절입니다. 신약성경 306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4:6-7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사도바울이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데 개인적인 의견이냐? 그게 아니고 예수님의 보내신 사도로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이야기를 할 때 그 현장에 있었는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 사도바울을 보냈던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우리 눈앞에 나타나 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수긍하지 않습니다.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만드는 그 구조,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아들만 덜렁 나와 가지고 ‘하나님은 내 아버지’라는 식으로 이 땅에 오셨거든요. 그 구조를 그대로 이어갑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 하면,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오게 되어 있어요. 

왔지요. 비둘기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리고 예수님 사이의 관계는 아들의 영이 임함으로, 성령이 임함으로, 그 때는 아버지의 영이지요, 아버지의 영이 임함으로 아들 됨을 이 땅에 보여준 겁니다. 그 구조를 하나님은 양보하지 않아요. 그걸 그대로 추진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영을 받았다는 그 점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이 말은 이 땅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설명할 길도 없고 해명할 방법도 전혀 없어요. 예수님은 존재하는 어떤 인간과도 다른 존재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해석한다, 분석한다고 하면 나라는 존재로부터 출발하거든요. 나라는 존재가 예수님의 존재를 분석할 수 있는 자질이, 능력이 있느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떤 누구와도 다른 겁니다. 같은 인간인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에요. 그런데 그 작용을 반복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도가 미칠 노릇이에요. 말이 되는 이야기를 했을 때는 우리가 희망이라도 있지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사도가 계속 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이 사실이라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아마 미칠 지경일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놓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는 나는 도대체 뭐냐는 그 말입니다. 사람들이 멋 모르고 복음을 받아들여요. 복음을 받아들여놓고 거기에 부수되는 모든 성경적인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그걸로 완전무장되었다고 좋다고 했는데 실제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이렇습니다. 

내가 멋 모르고 복음 믿고 세상 신에게 덤벼든 이 무례함을 용서해 주옵소서. 회사 입사할 때는 ‘기독교’라고 자신만만하게 쓰고 ‘사탄아, 기다려라. 내가 승리하리라.’ 이렇게 까불다가 막상 현장에서 바이어를 만난다든지 업무추진에 있어서는 그저 비는 것밖에 없어요. ‘세상 힘을 내가 너무 얕잡아 봤구나. 아무짝도 소용없는 복음을 가지고. 복음이 도와줄 줄 알았는데.’ 

복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는 분인데요. 설명이 되지 않는 분인데요. 우리는 세상을 닮아가려고 하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금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줍지 않게 교회라고 하는 유사품, 또는 모조품들은 가라는 그 말입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얻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복음 믿고 까불다가 세상 신에게, 악마에게 호되게 당했습니다.’라고 패잔병의 모습으로 와야 돼요. 우리 힘으로 세상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못 이깁니다. 

제가 아침에 운동하는 길에 보면 돌을 쌓아놓았습니다. 돌탑을 보게 되면 돌 하나 그 위에 돌을 얹고 그 위에 또 얹어서 정성에 정성을 모아놓은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겁니다. 이 정신이 무슨 정신이냐 하면, 악마와 동거하는 정신입니다. 세상정신이에요. 열심에 열심, 선한 것 착한 것을 모으면 뭐라도 되고 돌탑이라도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예수님을 모르지요. 예수님을 알 길이 없지요.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모릅니다. 그 점을 분명히 해야 돼요. 돌 위에 돌 하나를 쌓는다는 말은 내 인생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거예요. 끊어짐이 없이 계속 이어나가는 겁니다. 중단없이, 절단되는 법이 없이. 그걸 타임라인이라 해요. 

시간을 하나라 죽 펼쳐놓은 것을 타임라인이라 하거든요. 타임라인이 죽 펼쳐져 있으면 7월 14일은 7월 13일을 기준으로 해서 노력한 것이 7월 14일을 밀어내고, 7월 14일에 노력한 것이 쌓여서 7월 15일을 살게 만들었고, 7월 15일이 있기 때문에 7월 16일이 있고, 이렇게 죽 이어져 있어요. 

이렇게 이어져 있는 이것, 끊어지는 것을 제일 무서워하는 그것, 그런 사람들이 내놓을 것이 뭐냐 하면, 나는 내 인생을 이렇게 꾸려 나왔는데 앞으로 내 인생을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 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어요. 끊어졌어요. 끊어지라고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이 땅의 삶은 하늘과 무관함을 알리기 위해서 성령으로 오신 거예요. 교회에 나왔으니까 어떻게 하면 내 인생 곱게 이어져 나가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안 되고 “주여, 언제 작살낼 거예요? 언제 내 인생 끊을 겁니까? 이대로, 이 타임라인 가지고는 안 됩니다. 다른 층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교회에 찾아나와야 됩니다. 

한 이틀 동안에 정말 설교에 도움 되는 이야기들이 저에게 막 수입이 되었어요. 뉴질랜드에서 목회하시는 분인데 늘 복음만 생각하고 복음만 연구하는 분인데 뉴질랜드의 교회 부목사로 있어요. 아주 큰 교회, 천명이 넘는 아주 큰 교회 부목사로 있는데 한인교회 중에서는 제일 큰 교회지요. 그 교회 담임목사가 호주의 큰 교회 담임목사로 스카웃되어서 가버렸어요. 

좋다고 가버리니까 당회장이 빈 상태에서 부목사 때는 가끔 설교하다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설교를 하게 된 겁니다. 그 때부터 이 분이 근심과 고민에 빠진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이야기할 것은 복음밖에 없어요. 복음만 전해야 되거든요. 복음만 전해야 되는데 기존의 교인들이 수십 년 동안 복음 아닌 것에 동조하고 아멘하면서 살아왔다는 말이지요. 

이제 빈 강단에 서서 자기가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 복음을 사람들이 못알아 봐야 되는데 알아보더라는 말이지요. 예상 밖에 어떤 교인이 “목사님, 설교 너무 좋아요. 그 복음 널리 전파하면 좋겠어요. 목사님, 설교자료 좀 주세요. 남들에게 전해주게.” 이게 고민이 되어서 그 비싼 국제전화료 써가면서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복음을 아예 몰라야, ‘그 소리나 이 소리나 똑같네.’ 해야 좋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는 조금만 더 있으면 그 나라 영주권을 받게 되어 있어요. 영주권 받는 것이 목표에요. 목회고 뭐고 영주권을 받아야 취직이 되니 그게 중요한 거지요. 영주권을 받을 때까지는 그 교회에 취업이 되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 교회에서 안 쫓겨나야 되거든요. 물론 다른 목사들은 복음 모르지요. 

그런데 복음 아는 자기가 복음을 전해버리면 사람들이 ‘어? 전임목사하고 다른 설교 하네?’ 이러면 주목을 받게 되고 주목을 받는 중에 새로운 담임목사가 오게 되면 쳐낼 가능성이 높아져요. 쳐내버리면 자기는 직업이 없으니까 영주권을 받지를 못해요. 그러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는데 어떡하면 좋아요, 라고 전화한 거예요. 

그래서 남태평양에 빠져죽으라고 했어요. 복음을 전하면서 무슨 기대를 하느냐 그 말이지요.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은 일종의 수수료, 또는 수단이 되면서 노리는 것은 영주권이에요. 자기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또 한 예가 있는데, 엄마가 암에 걸려서 다 돌아가시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주 애살이 많은 따님이 미국 LA근처 살다가 엄마 소식 듣고 왔어요. 그분은 오직 복음밖에는 모르는 분이에요. 그런데 와 보니 엄마가 평소에 기존 교회 다니면서 복음은 전혀 안 들었는데 죽어가면서 마구마구 복음적인 내용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나는 죄인이고, 살아온 것이 다 헛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만이 소중하고, 예수님만이 나의 기쁨이고, 나는 모든 것이 가볍고, 더 이상 욕심이 없다. 나는 죄인이라서 후딱 죽어야 해. 나는 정말 늘 기뻐.” 그렇게 나온 거예요. 

그 따님이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굉장히 속이 상한 거예요. 그동안 정 많은 이 딸이 미국에 살면서 효도를 제대로 못했는데, 이제 죽기 전에 바짝 효도하겠다고 왔는데, 그것도 복음으로 효도하겠다고 왔는데 효도도 하기 전에 엄마 입에서 복음이 다 튀어나와버리니까 자기가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은 거예요. 

30분 동안 전화를 하는데 엄마가 복음을 아는 것 같다면서 자랑질 하는 듯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목소리가 슬퍼요. 같이 복음으로 기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들리는 음성은 전혀 기뻐하는 음성이 아니에요. 복음도 모르는 자식들은 “엄마가 이렇게 된 것이 내 탓이오, 내 탓이다.” 이러는데 맨 날 술 처먹고 오는 거예요. 엄마한테 마지막 효도한다고. 

그러니까 엄마 혼자 기뻐요, 지금. 죽는다고. 엄마 혼자 기쁜데, 다른 자식들은 마지막 효도를 만끽하고 싶은데, 나 때문에 엄마가 구원받았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이건 내가 집어넣은 이야기고요……, 이 설교를 지금 그분이 다 듣고 있어요. 지금 내가 오버하고 있는 거고요. 그래서 ‘내가 복음 전하는데 아무짝도 소용이 없네.’ 이렇게 된 거예요. 

우리가 복음, 복음, 안다, 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타임라인을 내 것으로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그것이 오히려 복음을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우리는, 복음 전파하는데 있어서. 왜냐하면 우리는 가던 스타일 그대로 죽 가거든요. 성향이 내 것 차곡차곡 채우는 식으로 간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아들이 아닙니다. 아들은 성령을 받아야 돼요. 끊어져야 된다는 말이지요. 또 한가지 예는 뭐냐 하면, 제 아내 이야기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 아내의 기도 제목이 뭐냐 하면, “주여, 제발 동영상 안 끊어지게 하옵소서.” 이게 기도 제목이에요. 굉장히 순수하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가 누구하고 전화하던 순간이 갑자기 떠올랐어요. 제가 누구하고 전화하면서 설교하기 굉장히 힘들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분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설교 안하게 되면 안하면 되지요. 굉장히 싸가지 없이 이야기를 했어요. “설교 안하면 되잖아요.” 

무슨 의미일까요? 목사가 설교해서 남들에게 의미를 준다면 그 목사는 주님을 안 바라봅니다. 남 보고 망하라고 해놓고는 본인은 더 살겠다는 심보를 여지없이 드러낸 거예요. 그분이 그렇게 전화한 것은 물귀신 작전이에요. 남만 망하라고 하지 말고 너도 망해라고. 같이 망해버리자고.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다른 사람 같으면요. “목사님,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제가 기도해 드릴까요? 목사님 같은 분은 살아서 복음을 전해야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의 타임라인이 차곡차곡 이어져요. 책 몇 권을 내고, 이런 저런 강의를 하고, 이런 내 타임라인이 이어진다고요. 

과연 오늘날 통용되는 이 원칙이 복음이냐, 아니면 악마와 동거하는 중이냐?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에 갔더니 온 천지가 성당이고 교회였습니다. 나중에 공부를 해보니 성 프란체스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청빈의 사도라 해서 청빈의 대표자에요.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술탄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점령당했을 때 그분이 거지같은 옷을 입고 단독으로 술탄과 담판을 지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이어서 다른 곳은 다 건드려도 좋지만 여기 있는 성도와 그들의 집만은 훼손하지 말라. 내가 지금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거지꼴로 왔다. 그러니 내 말을 들어주든지 나를 죽이든지 맘대로 해라.” 그래서 술탄이 감동한 나머지 “좋다. 예루살렘과 그들의 집을 보호할게.”라고 했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일 중요한 곳이 예수님 십자가 지신 갈보리언덕이거든요. 거기 있는 교회가 성묘교회입니다. 성 프란체스카 수도원에서 성묘교회를 비롯해서 성당이 140개, 수도원이 78개, 본당 58개 지었습니다. 그거 주의 일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 됨에 있어서는 다 기피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성 프란체스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극단을 보여줬어요. 모든 것을 피해갑니다. 왜? 끊어져야 되니까. 타임라인이 끊어져야 되니까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끊어버려요. 

그 증거가 유월절에서 나옵니다. 좀 더 어려운 이야기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할례언약이라고 있습니다. 

보통 문신은 육체가 날라 가면 문신도 같이 날라 가요. 

그런데 할례언약은 몸은 죽이게 만들고 문신된 할례는 살게 만드는 것이 할례언약입니다. 

왜냐하면 사건이 존재보다 우선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몸의 연속을 끊어내는 사건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집어넣어지고 그렇게 되면 인간은 그 몸이 사라지게 되어 있고 쓸모 짝이 없어져야 돼요. 없어진다면 그 사람이 갖고 있던 모든 타임라인이 없어져요. “앞으로 내 인생 어떻게 이어져 나갈 겁니까, 하나님?”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을 언제 끊어낼 거예요?”라고 기도가 나오도록 할례언약이 개입됩니다. 

할례언약이 개입된 사건이 유월절사건이에요. 유월절사건은 여러분이 다 아시니까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유월절사건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생명이 그 피가 원래 있던 피의 몸체, 피를 냈던 어린양의 몸체가 하나님의 원하는 생명이냐, 아니면 집안에 있는 인간들의 목숨이 목숨, 곧 생명이냐, 를 분명히 한 사건이 유월절사건입니다. 

네가 그동안 네 목숨 연장하기 위해서 뭘 먹고 살았느냐, 를 물으시는 거예요. 그러면 폭신폭신한 빵 먹지요. 양고기 뜯어먹지요. 여러 가지 맛있는 것 먹지요. 그렇게 해서 타임라인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지는 그 목숨, 그거 진품 아닙니다. 그거 가짜입니다. 그 목숨을 받지를 않아요. 부모로부터 받은 이 목숨을 안 받는다니까요. 

저쪽에서 받지를 않아요, 저쪽에서. 교회는 교인들을 받는데 하늘나라에서는 그 목숨을 받지를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예수님이 흘린 피의 몸체를 먹되 누룩이 없는 고기를 먹어야 돼요. 고난의 떡을 먹어야 돼요. 그리고 할례를 행해야 되고요.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할례를 행하고 고난의 떡을 먹어야 돼요. 그게 유월절이에요. 

눈에 보인다고 같은 몸이 아니고 눈에 보인다고 해서 같은 목숨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악마한테 용서를 구하고 사과하고 비는 이유는 뭘 노리고 하는 것이냐 하면, 남태평양에 안 빠져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영주권을 얻겠다는 말은 “악마님! 살려주세요.”라는 거예요. 

그동안 철이 없어서 교회 나와서 복음 알면 악마도 물러가겠지, 라고 착각한 겁니다. 악마의 역할은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악마는 주님의 종이에요. 우리를 절단 내는 거예요. 잘라버리는 겁니다. 참 악마가 얼마나 고마운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더는 살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재료가 무엇인가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를 이어왔던 그 재료가 무엇이냐? 무엇이 너로 하여금 계속 살게 했던가? “그거야 뭐 떡이지요.” “그러니까 너는 가짜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누굴 만나는가 하면, 인간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악마를 만나요.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성경이 친절하고 고마운 점이 우리가 모르는 악마의 본뜻을 친절하게 알려준다는 것이 그렇게도 고마워요. 그래서 제가 언급한 구절이 욥기 1장입니다. 

악마가 인간을 너무 잘 알아요. 악마가 하는 말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길 위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목적으로 이끄는 사람이에요. 그게 악마의 전당입니다. 인간은 악마 외에 다른 신을 선택하지 않아요. 신을 선택하게 되면 꼭 나 잘되는 것과 연관해서 나를 이어주고, 이어주고, 나의 타임라인을 이어주는 그런 하나님만 선택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말하는 이 성경이 있어도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마태복음 4장에서 감사하게도 사탄이 우리의 자기 속에 들어 있는 말을 해요. 사람은 떡으로 산다. 요즘 말로 번역하면 사람은 돈으로 산다. 광야라는 장소, 예수님이 사탄을 만났다, 그런 요건을 다 떼고 “역시 사람의 평생 체험은 돈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평생 체험이 그 체험이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렇지, 그렇고말고!” 우리는 거기에 동조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한 수 배웠답시고 “아니야, 사탄아! 물러가라.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그렇게 객기부리지 마세요. 그런 사람은 성령 없이 살 사람이에요. 성령 없이 산다는 것은 곧 지옥으로 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누가복음 16장 25절, 누가복음 16장 하면 딱 떠오르는 거지와 나사로 이야기거든요. 16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천국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지옥에서)고민을 받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세상은 천국을 가리는 속임수로서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이 세상을 지배하라고 권한을 잠시 넘겨준 거예요. 우리는 그 아래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거 몰랐어요? 우리는 이 속임수를 거치지 않는 한 성령의 고마움을 모르고 십자가의 고마움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거 모르면 천국에서 못살아요. 가지도 못할뿐더러 못살아요. 이 땅에서 우리가 악마에게 배운 것은 뭐냐? 티끌모아 태산이에요. 타임라인이 이어지는 거예요. 지금껏 내 힘으로 살아왔듯이 앞으로 내 힘으로 어떻게 살까? 내가 내 생명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거라도 쥐고 있어야지, 라는 것이 우리가 악마에게 배운 거예요. 

그런데 유월절사건에서 그게 진품이 아니고 가짜라니까요. 쥐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낭패를 가져다주는 겁니다. 세상이 거두어지는 것을 재림이라고 해요. 참 어려운 이야기지만, 이 세상이, 커튼이 걷어지는 거예요. 주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속살을 보여줬습니다, 그거예요. 

세상의 커튼이 걷어지고 이처럼 우리의 속살이 보이는 이것은 성령, 아버지의 영을 받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만 남이 보지 못하는 다른 눈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아야 그것이 보여요. 성령 받아야 차곡차곡 이어진 이것의 중간을 쪼개고 쪼개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매일 나누어지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개발과 지진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요? 개발은 표면 위만 갈아엎는 것을 개발이라고 해요. 하와이 지진, 요새 난리도 아니지요. 마그마는 근원적으로 밑에서부터 쫙 갈라집니다. 근원적으로 갈라지면서 이 세상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안목을 우리가 부여받게 됩니다. 

갈라지게 하는 것,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 할례, 또는 세례언약, 십자가언약의 완성체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주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발의 뒤축입니다. 매일같이 갈라져야 돼요. 쭉쭉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갈라지게 되면 얼마나 아픈지. 깊숙한데 서부터 갈라지니까 피가 나면서 굉장히 아파요. 

갈라지게 되면 마그마, 용암이 나오잖아요. 그 용암을 내 비치라고 우리로 하여금 계속 살게 하시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폭력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아들이 갖고 있는 이 폭력성은 그냥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폭력성이 있는 이유는 이 세상 신이 아들 되는 것을 자꾸 방해 놓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 악마가 하는 일이 있어요. 복음을 얕잡아 보도록 사람들을 독려하는 겁니다. 복음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이런 식으로. 복음 별로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돈이지 복음이 아니야, 네 인생이 중요하지 주님의 인생은 안 중요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각성시키고 복음 알고 돌아서면 어느새 그게 와 하고 밀려와서 우리를 덮어씌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휩쓸려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고맙게도 어느 날 성령께서 뒤축의 각질처럼 갈라지게 하십니다. 

쫙쫙 갈라질 때 옆에서 옆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고 밑과 위로 갈라져요. 신분적으로 보게 되면 다 보이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갈라지는 원리가 언약의 원리인데 이 언약의 원리가 구약에 죽 이어집니다. 수요설교내용에서 그게 계속 진행되고 있어요. 

아담에서 노아까지는 대가 끊어지지 않아요. 창세기 5장 안 찾아봐도 여러분이 아시겠지요? 지루한 이야기가 거기 나오잖아요.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이런 식으로 낳고 죽고, 계속 나오잖아요. 

이게 노아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어디서 그것이 끊어지느냐 하면, 아브라함에 와서 대가 끊어져요. 옆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위로 벌어져요. 아브라함에 와서는 자식이 없어요. 왜 그런가? 아브라함은 최초로 할례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처음 할례 받은 당사자입니다. 이게 위층에 있다 보니까 지상에서 육으로 난 것은 계속 육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언약에서는 육에 속하지 않는 자만 천국가요. 다시 말해서 천국 가는 사람은 없어요. 천국 갈 사람이 없어요. 자기를 신자로 보지 마세요. 이 땅에 신자라는 것이 없고 성도라는 것이 없어요. 당연히 교회도 없고요. 그냥 놀이터지요. 아무도 없어요. 없어도 괜찮아요. 왜?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지옥가야 마땅하기 때문에. 

다만 있는 것은 육과 더불어 악마가 있을 뿐이에요. 주께서 악마와 더불어 싸워서 승리의 효과로서 못가는 인간을, 없는 인간을 성도되게 하는 겁니다. 그 언약적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율법 아래 두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특징이 뭐냐?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그 특징은, 뭔가 이야기하면 법이 나와요. 법아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 따라서 법에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법이 저 아래 보여요

비행기 타면 구름 위로 가는 경우 있잖아요. 구름 밑에는 경운기 다니고요. 매일같이 법에 시달리는 거예요. 그런데 비행기는 법에서 벗어났어요. 어떤 율법도 사랑을 이길 수가 없어요. 비행기 타고 가는 그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새는 이미지 안 좋지만 전에 나오던 광고 배경음악 있잖아요. Welcome to My World~. 

밑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있는데 위는 눈부신 햇빛이 비치고요. 교인들 보게 한답시고 무슨 오지랖인지 모르지만 비행기 타고 가면서 옆 사람들 눈치 봐가면서 동영상 촬영했어요. 편집할 때 배경음악 집어넣었다가 빼라고 해서 또 빼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하여튼 아들 됨의 특징은 뭐냐 하면, 세상 보는 눈이 달라요. 어떤 법도 자기랑 상관이 없습니다. 법하고 이혼했어요. 로마서 7장. 법? 남의 이야기입니다. 양심의 가책? 남의 이야기에요. 이게 뻔뻔한 것인지 미친 것인지 모르겠지만 본인도 미치겠어요. 내가 왜 이렇게 달라졌는지. 

경운기나 타고 다녀야 할 인간이 왜 비행기, 뱅기, 비행기를 타고 율법을 내려다보면서, 인간의 실정을 내려다보면서, 인간의 촘촘한 타임라인을 내려다보면서 ‘아, 저게 지옥이구나. 저게 속임수에 빠진 거구나.’ 하는 그런 눈을 왜 가졌는지. 그걸 남에게 설명하려니까 설명이 안돼요. 납득이 안 되니까, 소통이 안 되니까.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교회 나왔습니다. 내 아들 곧 시험 치는데 잘 되게 하옵소서.”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렵지만 참아내야 돼요. 아브라함에서 대가 끊어져요. 아브라함은 이름뿐이에요. 만인의 아버지? 개뿔, 소용없어요. 자식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없는데서 자식을 만들어요. 이삭. 자식이 나오는 순간 그 때 비로소 아버지가 아버지 값을 하는 거예요. 이 지상에서는 아버지가 먼저 있고 아버지가 자식을 낳을 때 그 때 자식이 되는데 하늘나라 갈 자식은 이 땅 어느 누구도 나의 아버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다윗은 밧세바 남편 우리아를 죽인 것에 대해서 어떤 양심의 가책이 없다는 것이 특이해요. 왜냐하면 다윗이 회개하는 것은 내가 나쁜 짓을 해서 회개한 것이 아니고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것을 내가 왜 진즉에 몰랐었나, 그것 때문에 회개해요

쉽게 말해서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할 기도는 “하나님, 앞으로는 잘할게요.”가 아니고 “앞으로는 내가 착하게 살게요.”가 아니라 “주여, 앞으로는 내게서 일어나는 내 죄를 수용하겠습니다.” 하는 기도를 해야 돼요. “앞으로 이것보다 더 지저분한 일이 있더라도 주여, 이것을 마음껏 발산하겠습니다. 그런 자유를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해야 돼요. 

주저 없이 막 살겠습니다. 막국수 또 나온다. 주저 없이 막 살겠습니다. 거리낌 없이 살겠습니다. 그게 자유입니다. 그런데 악마가 교회를 붙들고 있거든요. 악마가 교회를 만들었어요. 왜? 손님이 있으니까, 장사가 되니까 악마가 붙들고 있는데 교회에서 뭐라고 이야기해요? 예수를 믿었으니까, 성령을 믿었으니까 이제 성령의 법을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로마서 8장을 인용하면서 율법을 이제는 완성해야 된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자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는 순간 그동안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 믿었던 모든 아버지는 전부 다 가짜였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예수님의 아버지만이 아버지에요. 아들이 먼저 등장해야 아버지가 그 뒤에 등장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한……, 요한복음 5장에도 나옵니다만, 아들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한 아버지의 영화로움은 없다, 가 됩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이 그거예요.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그 다음에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그 다음에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만 영화롭게 한다면 그 자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아들을 못 알아봐요. 자기 타임라인 채우기 바빠 가지고. 나 쓸모 있다는 거예요. 나 막바지 효도 하겠다는 겁니다. 엄마 구원받는데 기여하겠다는 거예요. 마지막 전도하는 이 소원을 들어달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숨겨놓은 죄입니다. 내가 미처 몰랐던 죄. 주의 일에 기여할 수 있는 목사. 나 없이는 복음 못 전한다는 그러한 의식. 그게 바로 목사를 해야 알 수 있는 죄잖아요. 좀 목사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장로님도 많이 되시고. 장로 돼야 장로 죄를 알고 목사 돼야 목사 죄를 알고. 교회 와야 죄를 알지 교회 안 나오면 죄 몰라요. 그건 도 닦는 거지요. 

이삭이 등장하고 난 뒤에 비로소 아브라함은 아들 덕분에, 다시 말해서 이삭이 죽어요, 그 죽음 덕분에 나의 육적인 아버지덕분에 같이 죽고 그 죽은 이삭이 다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 덕분에, 그 아들의 아버지덕분에 내가 신앙인이 되었다는 그 원칙이 로마서 4장에서는 앞으로 모든 구원받는 사람의 확정된 원칙으로만 개입되는 겁니다. 

확정된 원칙, 그 구조에서 벗어나게 되면 아들 아니에요. 그런데 그 아들이 이 땅에 와서는 뭘 드러내는가? 사탄 때문에 폭력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폭력성은 시편 2편 7절에 나옵니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이 직접 아들을 낳으시는데 9절에 그 하는 일이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아느냐? 사탄의 세력이 알아요. 알아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라고 덤벼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실습재료가 돼요. 매일같이 우리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도살할 양같이 던져집니다. 던져지면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던 그 악마가 역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복음이라는 것, 십자가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것은 아무 힘이 없어.”라고 우리를 자꾸 설득시키지요. 

복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 모든 교회가 교인들을 설득시켜 나갑니다. “복음 알면 뭐합니까? 돈을 내야지.” 이거거든요. 돈 없으면 교회도 없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요. 

“여러분이 아무리 하나님이 보고 싶고 예수를 보고 싶어 해도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가 폐허가 되어버린다면, 교회가 시들해지면 여러분은 신앙이 없는 겁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이해하시지요? 여러분이 믿음이 있다면 믿음의 값을 하라고요. 형광등도 좀 제때 갈고 교회에 협조가 있게 되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섭섭하지 않게 해줄 겁니다. 여러분의 인생, 타임라인은 차곡차곡 채워질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거기에 수긍 안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다 수긍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교회 나오는 목적은, 하나님은 내 것 건드리지 말라고 교회 나오거든요. 사전에 커버하기 위해서 나오는 거예요. “내 것, 내 가족, 내 남편, 내 아내, 내 새끼들, 현재 내 재산, 제발 건드리지 마세요. 대신 교회 와서 드릴 것 드릴 테니까. 교회 충성한 것으로 내 죄지은 것 퉁치고 제발 내 인생, 내 타임라인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이거 아니면 절에 갈 이유 없고, 성당에 갈 이유 없고, 교회 나올 이유 없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제가 또 설득 당했습니다. 내가 믿음 있다고 했는데 그 믿음 개코나 아무짝도 소용없었습니다.” 

복음 안다고 ‘나는 경운기 안타고 비행기 타고 다닐거야.’라고 했는데 막상 세상에 나가니까 “제발 경운기라도 태워주세요.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경운기 제가 알아서 탈게요. 제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주일날 들었던 것 다 까먹어버리고 다시 육이 가져다주는 이 강한 본성을 이기지 못합니다. 

왜 이기지 못하는가? 살아온 모든 경력이 악마와의 동거거든요. 모든 배운 정신 상태와 사고방식이 악마한테 다 배우고 익혀 온 것이기 때문에 배운 가락, 기술이 그 기술밖에 없어요. 비비면 산다는 것, 돈이 최고라는 것, 복음이라는 것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계속 숙지해 왔었고 반복해서 온 몸으로 체험해 온 입장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주의 말씀을 지킨다든지, 주의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설교 이걸로 끝낼까요? 누가복음 16장 2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제가 여기서 무슨 부연설명을 했느냐 하면, 이 세상은 속임수라 했지요. 속임수세상에서 그들을 따르고 싶어요. 그게 몸이 편하니까. 

사람이 행복 빼놓고 뭐 있습니까? 행복 하는 방법은 악마와 동행, 동거하는 겁니다.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말씀 걷어치우고 떡으로 사는 거예요. 인기로 사는 것이고 세상 부귀영화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만두지를 않아요.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동하려면 해산의 고통을 해야 됩니다. 

해산의 고통이라 하는 것은 뜯어내는 거예요. 목욕탕 가서 때 미는 그것도 귀찮잖아요. 젊었거나 늙었거나 목욕탕 가는 것을 귀찮아해요. 남자 여자나. 물론 시원한 것도 있지만. 피부의 때 벗겨내는 것 하고 심장을 바꾸는 것과 달라요. 때 미는 것은 시원하기나 하지요. 배우자가 있는 이유는 등의 때 밀어주고 등 긁어주는 용도밖에 없어요. 자기 손이 안 닿으니까. 그래서 꼭 필요해요. 

때 미는 것은 그저 밀면 되지만 심장을 교체하거나 이빨을 뽑는 것은, 이것은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 하는 일에 죽으라고 반항해요. 이미 우리가 성령을 받고 이미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내가 방해해요. 아파도 너무 아파요. 

그런데 해산의 고통이라고 주께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애 고집이 엄마 고집보다 더 세서 자기가 자궁에 안 있겠대요. 기어이 기어 나오겠대요. 아파도 아픔의 그 환경을 어쩔 수 없이 제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꼭 <에일리언> 영화 같아요. 괴물이 여자의 몸을 통해서 나오는 것처럼 이 땅에서 해명될 수 없는, 설명될 수 없는 낯선 분이 나를 통해서 비집고 나오겠다는데 나는 악마와 동거했던 그 성품, 성격, 정신상태 밖에 모르고 주님은 그걸 반대하면서 튀어나오니까 여기서 폭력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계속 해산하는데, 아프기는 아픈데 이건 살점 떨어지는 것보다, 이 뽑는 것보다 더 아프다는 거예요. 여자들이 남자들 기죽일 때 그렇게 하잖아요. “네가 애 낳아봤어? 그건 아픈 것도 아니야.” 그러잖아요. 남자 그 자체가 죄인 것 같아요. 아픔도 모르고. 어쨌든 간에 성령께서 해산의 고통으로 하면서 성령이 고집을 부리거든요. 

너는 신분이 아래쪽이 아니고 위쪽이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 가는 길을 가야 된다는 겁니다. 남들이 이해 못하는 길을 네가 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미치지요. 남들에게 이해를 구해야 되는데, 설명을 해야 되는데 설명이 안돼요, 이게. 목사도 설명을 좀 해야 교인들이 모일 것인데 설명이 안돼. 

교회 가봐야 못 알아듣는 이야기. 맨 날 이런 식이에요. 빌면 복 받습니다. 이건 얼마나 좋은 이야기인데요. 여러분 인생이 촘촘하게 이어질 겁니다. 이건 얼마나 좋은 이야기에요. 아픔, 심장 뜯어내고, 쓸개 뜯어내는 그 아픔, 그것을 극구 방해하는 당사자가 나고, 주님은 그 고집을 이기는데 그 고집을 이길 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버지” 경상도 말로 아부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요. 

어찌하여 저를 이렇게 버리시나이까.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 방식이, 우리와 똑같은 성령을 받은 예수님의 그 코스가 바로 그 코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에게 설명하려고 믿었습니다. 나 이렇게 많이 안다고, 남에게 자랑질 하려고 교회 나왔습니다. 주여, 성령께서 그것마저 중지시키고, 그것마저 포기하게 만드니 참으로 외롭고 쓸쓸합니다. 하지만 시작한 분이 주님이기에 끝까지 주님 위상에 걸맞게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오늘도 촉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