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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갈3;2-5) 1802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2. 26. 16:57
2018-02-25 12:35:05조회 : 66         
   인간의 본성180225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인간의 본성(갈라디아서 3:2-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t23eIPzlVXg, Hit:6

 이근호18-02-25 13:31 
인간의 본성 

2018년 2월 25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3:2-5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사도는 계속 묻고 있습니다. 세상을 만만하게 보지 않겠다는 겁니다. 가짜들이 진짜 행세하는 것을 끝까지 추궁하겠다는 겁니다. 그 기준에 대해서 이미 사도 본인은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십자가’입니다. 즉 세상은 온통 십자가를 반대하는 분위기로 들썩이고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현재적으로 진행되는 그 이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무산하기 위해서랍니다. 따라서 참으로 성령 받은 자들이 있다면 이러한 사도 본인의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성령 받음’의 반대말이 ‘율법 행함’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추방’이었습니다. 이로서 예수님편과 예수님 외의 편이 명백하게 양분됩니다. 양쪽 다 걸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냥 예수님의 존재 인간 존재 사이의 대비가 아니라 ‘죽음 사건’으로 양분되기 때문입니다. 있음과 있음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격으로 인한 양분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하는 성격이 예수님쪽이요, 예수님을 버려야 하는 성격이 세상쪽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을 버린 세상은 그다지 십자가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 외에 다른 일에 신경쓰는데 그 신경쓰는 일이 곧 십자가 사건을 야기시켰다는 겁니다. 

이는 십자가쪽, 즉 예수님쪽에서 세상을 평하면서 ‘율법의 행위’라는 식으로 일괄해서 다룰 수 있는 요소가 세상쪽에 상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갈라디아서 3:1에 보면, “누가 꿰더냐?”라고 사도가 언급합니다. 그것은 세상쪽으로 장악하는 실세가 그의 모든 활동이 십자가 복음을 가리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4에 보면,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해서 ‘이 세상 신’ 곧 세상을 이미 장악한 사단이 인간세계를 경영하면서 십자가 복음이 알려지지 않도록 철저히 방어하는 자세를 취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어책이 놀랍게도 ‘율법의 행위’입니다. 즉 하나님의 법에 철저하게 복종하고 복종하고, 위반한 사항은 철저하게 그때마다 반성하고 반성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 반성의 끝에는 사단이 보좌 앞입니다. 즉 인간은 반성을 거듭해서 도달한 바로 그것이 사단이 있는 곳입니다. 

그 이유는,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인간에게 선악과 나무열매를 따먹게 해서, 그 법을 가지고 인간들이 자신들의 태도를 되비치게 하는 최종적 거울로 사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법의 현실화는 필히 인간이 주체가 되어 행함을 투여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로 나온 결과를 가지고 투여된 행함의 질을 따질 수밖에 없는 체제 안에 인간을 가두게 했습니다. 

이는 곧 인간이 아무리 궁리하고 연구해도 법 뒤에 사단이라는 악한 영적 존재가 있음을 간파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잘못해도 인간 본인이 잘못해서 잘못한 것으로 자기 탓을 하게 마련이고, 이런 형편에서 인간은 자신이 두드리고 반성해서 다음번에서 보다 나은 선한 것을 내놓도록 자신을 제촉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다. 

즉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와 소중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부추기는 겁니다. 법으로 법의 굴레에서 해방되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이러한 사단의 속삭임에 대해서 인간은 그런 요구가 자기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현상이라고만 알고 있지 십자가 복음을 가리기 위한 사단의 꼬임이라는 사실을 죽어도 모릅니다. 

인간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자신이 보기에도 자신이 너무너무 거룩하고, 너무너무 착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함부로 멸절시키거나 저주하기에 너무 아까운 존재로 변모시키는데 주력하겠다는 겁니다. 즉 “나를 치면 하나님께서 실수하시는 것”이라는 결과를 낳게 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이 일방적으로 오시게 되면 될까요? 아무런 율법의 행함과 상관을 두지 않고 오시는 겁니다. 착한 일을 해놓고, “제가 특별난 것이 아니라 누가라도 그런 착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 선한 일을 잊었습니다.”라고 겸손을 떨 수 있지만, 악행을 해놓고서, “나는 그런 악행을 벌써 잊었습니다”고 왜 인간은 자신 있게 말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은 은연중에 사단의 추동을 받은 자꾸만 자신을 선한 존재로 변모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 안에 법이 있고 그 법 안에 사단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단은 인간으로부터 법을 통해 ‘자기 의’를 누적시켜 나가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 악한 일을 선한 일로 치환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십자가를 훼방짓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사단이 인간들을 몰고 가는 그 현장에, “이미 인간은 죄인이며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맞불 작전으로 나서십니다. 맞불 작전이란 산불이 난 현장에서, 더 태울 것이 남아 있지 않도록 자기쪽에서 불을 질러 자기가 재가 되는 방식입니다. 

즉 이미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만 가능하기에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반복시키시는 겁니다. 구약에서 선지자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면서 동승했던 사람들을 만나지만 결국 폭풍 속에서 그들과 헤어지게 됩니다. 요나보다 물 속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요나 선지자에게 약간의 미안한 감을 갖고 있지만 실은 그들은 요나가 경험한 생명을 진혀 이해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죽음 안에서만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 곧 죽음 안에서 그는 살아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죽음을 벗어나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 안’의 생명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십자가 이후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의 부활입니다. 곧 ‘죽음 이후의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의 부활’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날마다 성도를 십자가로 죽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추방시킨 이 세상에 얼마나 확실한 사단의 세계며 지옥인가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켜 주는 곳, 흔한 이 세상의 교회들이지요. 바로 그곳이 사단의 정수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을 버리신 그 아버지의 마음에 성령을 통해서 같이 참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8-02-26 16:44:37조회 : 2         
278강-갈 3장 2-5절(인간의 본성)180215-이 근호 목사이름 : 오용익 (IP:121.149.39.243)
278강-갈 3장 2-5절(인간의 본성)1802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2-5절입니다. 신약성경 304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2-5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사도바울이 계속 묻습니다. 계속 질문을 자꾸 해요. 사람이 누구한테 계속 질문을 한다는 것은 심하게 밀어붙이려고 하는 겁니다. 어디까지 밀어붙이느냐 하면, “너 가짜지? 너 성령 안 받은 것 맞잖아. 왜 자꾸 우겨? 성령 받았어? 그러면 내가 질문을 계속 할테니까 그 질문에 끝까지 대답해볼래?”라고 하면서 가슴팍을 미는 것처럼 계속해서 그 사람을 몰아세웁니다. 

이렇게 몰아세운다는 것은, 사도바울은 이미 천국에 대해서 알아요. 천국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유사 신자, 유사 성도를 도저히 그냥 못 넘어가겠다는 것, 용납지 아니하겠다는 겁니다. 그냥 사도바울 존경하고 교회 오게 되면 대환영해줘야 교회가 부흥될 텐데 사도에게는 그런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어차피 지옥에 떨어질 거 괜히 착각을 유도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닌데 형제라고 한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의 미래를 더욱더 당황하게 만들지요. 가짜인데 가짜를 가짜라고 해주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고 대우고 배려해주는 거예요. 가짜인데 진짜라고 해버리면 그 사람은 착각 속에 빠져서 가보니까 지옥에 왔다 이 말이지요.

내가 가짜인 것을 진즉 이야기해주지 왜 주위에서 으쌰, 으쌰, 해가지고 기분 좋게 해준다고, 나에게 예의 갖춘다고 왜 그런 부질없는 짓을 했느냐, 라고 후회가 막급할 겁니다. 사도바울은 두 번 다시 그런 후회할 짓을 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지난 시간도 마찬가지지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여기까지 보면, 아,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셨구나.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그 다음 말이 갑자기 이론에서 현실로 확 돌아서게 만듭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것이 하나의 명제고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실제 일어난 일, “그것은 한낱 이론에 지나지 않는 거야, 이 바보야. 십자가진 그것은 현실 아니야. 그런 설이 있다는 그 말이지.”라고 정작 현실이 중요하다고 우기는, 십자가를 지워버리려고 애를 쓰는 그러한 운동, 그러한 분위기를 사도바울은 실제 현실의 핵심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현실을 볼 때에 컬링에서 누가 금메달을 따는가, 이게 현실이 아니에요. 스웨덴이 이기는가, 한국이 이기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든 현실은 누가 획책하는가? 십자가복음에서 눈 돌리도록 하는 작업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이것을 우리는 사도가 생각하는 유일한 현실의 핵심으로 보는 겁니다.

누가 너를 꾀더냐. 누가 너를 유혹하더냐. 누가 너의 복음을 안보이도록 훼방 놓고 있느냐. 그런 이야기지요. 사도바울의 다른 편지에 보면, 세상신이 복음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서, 그렇게 나와요. 사탄이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 현실 자체를, 십자가로 시작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반대세력이 지금 이 현실을 장악하고 있고 현실에서의 모든 움직임은 십자가복음을 보지 못하게 하는 쪽으로 간다고 이야기하는 것,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동의하느냐, 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다음 질문들이 마구마구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1절에서 이야기한 것, 십자가가 있었고, 십자가가 너무나 엄청난 일이기에 세상은 가만있지 않고 그걸 가리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구성되어 가는 것이 세상인데,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이미 십자가중심으로 동원된 상태인데, 그것을 흐릿하게 만들기 위해서 벌어지는 것이 이 세상이다, 라는 이 사도바울의 견해, 사도바울의 믿음, 유일하게 천국을 아는 이 사람, 사도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여기에 대해서 너희들이 동의를 하고 인정을 하느냐고 그 다음차례에 계속 묻는 겁니다.

계속해서 묻고 있는 그 질문자체가 세상은 지금 십자가를 보지 못하도록 꾀고 있는 분위기에 있고 그런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고 살아가느냐, 라고 묻는 거예요. 1절에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렇게 나온 것처럼 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렇게 나왔을 때에 1절에서 2절로 넘어가면서 뭔가 보충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보충을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성령 받은 자만이 지금 십자가가 중심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걸 개무시하니까,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십자가를 생각 안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될 수 있는 겁니다.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살아갈 때 그들은 어떤 형식으로 살아가느냐, 라고 했을 때 2절에서 성령 받은 것과 율법의 행위를 대조시키는 겁니다. 성령을 안 받은 상태에서 컬링하는 그것을 율법의 행위로 보자는 겁니다. 북한에서 김영철이 대표로 내려오는 것을 율법의 행위로 보자 그 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연관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왜 율법의 행위로 보느냐 하면,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가 빠진 상태에서 십자가를 보지 말라고 유혹하는 입장에서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가 그들의 행위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여기에 율법으로 되어 있지만 한 글자를 빼버리면 ‘법’의 행위에서 나와요.

법의 행위라 하는 것은 자신의 행함의 정당성과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일괄해서 율법의 행위로 가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가는 것이 세상에서 추방된 죽음, 추방된 사건이잖아요. 예수님이 추방됨으로서 ‘세상 대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세계와 세상과 딱 분리가 되면서 대조가 되어버려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모든 세상은 율법의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 율법행위의 목적은 바로 십자가를 가리는 거예요. 관심사를 십자가 없는데 두는 거예요. 매스스타트, 이런 것 있잖아요. 모든 것을 십자가 없는 데로 관심을 돌려버리는 겁니다. 

교회부흥, 이런 거요. 만약에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뭐가 밝히 보이느냐 하면, 십자가만 밝히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 십자가의 복음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얼마나 이 세상이 사람들을 꾀이고 있다는 그 정경, 그러한 노력도 훤히 다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말에 동의가 되는 것이고 사도바울은 그런 진짜배기 성령 받은 사람이 있는지 내가 끝까지 몰아붙이겠다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새로운 변화를 주는 것이 아니고 좌표를 변경시키는 겁니다. 시각의 좌표를 변경시키는 거예요. 어떤 좌표를 변경시키는가? 예수님은 죄인 중에 한 사람으로 오셨거든요. 이 세상에 죄인 중에 한 사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굉장히 심도 있게 봐야 돼요.

예수님을 볼 때 키가 몇 센티, 그렇게 온 것이 아니에요. 남자로 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죄인 중에 한 사람으로 오셨어요.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히브리서 2장 7절에 나오는데요. 죄인 중에 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말은 세상을 볼 때 하나님이 보는 관점이 “너는 죄야, 의야.” 그 관점으로 보겠다는 겁니다.

메달을 몇 개 땄나, 로 보는 것이 아니에요. 메달을 몇 개 땄나, 로 보는 것이 아니고 ‘네가 죄인이야 의인이야’ 그 관점 외에 다른 관점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뭐냐? 아버지가 아들을 죽여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인간에게 버림받고, 그 버림받는 좌표를 새롭게 만들었어요. 죄인이기 때문에 위로는 아버지한테 버림받는 그 심정에 들어오지 않으면 구원 없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을 작살내는, 죽이는 그 심정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심정 같으면 구원 없습니다. 그 심정에 들어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이 죄인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한테 버림받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나 자신을 바라볼 때 내가 어떻게 해서 궁극적으로 죄인인가를 알 수 있는 식으로 자기를 다시 한 번 비춰봐야 하는 겁니다. 내가 어떤 점에서 죄인인가. 지금 이 세상이 ‘미 투’ 운동하고 난리 났지요. 교회도 그렇고 카톨릭, 연극계, 영화계, 종교계, 국악계, 음악계, 정치계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분위기는 뭐와 같으냐 하면, 옥죈다는 말이 있지요. 네가 지난 여름밤에 한 일을 내가 안다는 식으로 뭔가 세상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벌벌 떨게 만들고 궁지로 몰아넣어요. 20년 전에, 10년 전에, 5년 전에, 지난해에 한 일이 시빗거리로 나에게 다가오게 되면 나는 어째……? 나는 어떻게 되지? 

사탄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사탄은 인간의 법 안에 들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는 처음부터 하나님과 인간을 마주치게 만드는 거울 같은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악적인 정신이 인간에게 들어와 버리면 어떤 현상이 나오는가 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마지막으로 되비치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선악이 구체화 되려면 인간의 행동으로 투사가 되어야 되고, 그 투여된 행동이 결과적으로 선일까 악일까를 판정을 하면서 뭐가 가려지는가 하면, 선악 뒤에 있는 사탄의 존재가 완전하게 차단되고 마는 거예요. 가려지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사탄이 없어요. 책임을 자기가 지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도달지점은 법이에요. 법에서 그만 인간은 돌아서야 돼요. 법에서 더 나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계속해서 반성하고,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반성하는데, 심지어 자기를 학대까지 하면서 반성하는 그 반성의 마지막 지점에 누가 기다리고 있었느냐 하면, 사탄이 기다리고 있어요.

반성하고, 교회 와서 회개하고,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차 뒷유리에 ‘내 탓이오’라고 붙여놓고 다니는 천주교교인들, 전부 다 내 탓이라고 하면서 “나는 금식했습니다. 나의 과거의 죄, 지난 여름밤에 지은 죄 대신 지금의 착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5년 전에 있었던 그 사건이 나를 인간 말종, 개도 아닌 인간으로 만들면 나는 어째~? 나는 어떻게 해~?”

선을 통해서 악을 보상하고 거기서 어떻게 해보려고 할 때 법안에 들어 있는 그 사탄이 “그러니까 너는 어차피 내 편”이라는 거예요. 반성에 반성을 하고, 금식에 금식을 하고, 교회 5십년 6십년 다니고, 선교한다고 자기 몸을 불사를지라도, 방언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자기 몸을 불사를지라도, 구제에 나서고, 목사를 섬기고, 교회 헌신하고, 그 모든 끝자락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십자가 없이 네가 너를 구원해야 된다는, 그리고 십자가 없이 구원되어야 된다는 우리의 타고난 본래의 악마의 속성을 악마에게 그대로 고백하는 거예요.

반성한다는 것, 회개한다는 것, 이것이 타고난 악마의 속성입니다. 궁지에 몰리지요.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는 목적으로 만든 게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조건이에요. 인간은 조건입니다. 목적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탄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조건에서 선악과를 철회시킴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스스로 목적이 되고 말았어요.

내가 얼마나 의로워질 수 있을까, 얼마나 거룩하게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될 수 있을까, 신처럼 될까? 그걸 누가 서비스해 주는가 하면, 교회가 그걸 해줘요. 교회라 하는 것은 인간의 법의 행함의 극치를 다 모아놓은 거예요. 그걸 집결한 곳이 교회입니다. 선하다는 선은 모조리 거기서 다 가르쳐요.

그러면 교회 안다니는 사람은 뭐냐?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직장에 다니면 직장이 그 사람의 교회에요. 자기의 존엄성과 가치를 계속 지켜주고 유지하는 곳. 만약 등산하는 사람이라면 산정상이 그 사람의 교회입니다. 낚시터가 그 사람의 교회에요. 자기의 존엄성이 계속 유지되고 있으니까.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법을 다 지켜요. 자기를 학대까지 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처단까지 하면서.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 산불이 났을 때 이미 일어난 산불을 끄는 것은 소용이 없어요. 산불이 더 퍼집니다. 바람은 불지요. 태풍 수준으로 바람이 불면 누가 산불을 꺼요? 못 끕니다.

그것은 위기지요. 위기를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미 투’, 난 당신이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고 할 때 내가 여기에서 불을 질러버려요. 맞불을 놓는 겁니다. 다 태워버리면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을 정도로. 아주 방법이 괜찮지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면 됩니다. 지키고자 하는 것을 불에 태워버리세요. 저주의 불에 태워버리세요. 

태울 때 마귀도 같이 타버리니까. 나에 대해서 구시렁거리고,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네가 7년 전에 어겼잖아. 그리고 8년 전에도 위법했잖아.” 그렇게 몰아넣는 그 대상은 바로 나를 겨냥하잖아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오는데 율법이 쏘는 것이 우리에게 올 때는 화살에 죄를 묻혀서 우리에게 날라 와요. 저주를 묻혀서 우리에게 날라 온다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를 죽여 버리면 돼요. 그것도 그냥 죽이면 안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저주케 하고 죽이게 했던 그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죽으면 되니까요.

상대방이 나를 때리면 그 사탄의 주먹을 가지고 “쳐라, 쳐! 안쳐? 그러면 내가 칠게.”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질 권한도 없고 더 이상 살 자격도 없습니다, 라고 매일같이 자기를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형체가 없고 재만 남지요.

예수님의 성령이 찾아온다는 말은 이런 뜻인데요. 성령이 온다는 것은 죽고 난 뒤에 부활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죽음자체가 부활한다는 말이에요. 죽고 난 뒤에 내가 또 부활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던 그 죽음 자체를 반복적으로 나한테 반복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아, 나 죽은 것 맞잖아. 내가 귀신이면서 왜 산사람으로 생각했지?’ 이런 식으로 확인해 주는 거예요.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 그리스도가 사는 조건이 뭐냐 하면, 우리는 항상 조건이에요, 그 조건이 뭐냐 하면, 내가 죄로 죽는다는 것, 늘 죽어 있음을 조건으로 했을 때만 주님이 나의 목적이 되는 겁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거예요. 주님이 계속해서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내가 나의 증인이 되지 아니하면 주의 증인이 될 수가 없어요. 나는 어떤 증인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나는 살 가치도 없는 증인으로 살 때 그 현장은 비로소 주님의 증인으로 주께 쓰이는 겁니다. 그렇게 사용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 지은 것 가지고 사방에서 몰려올 때가 주님이 주신 아주 멋진 사랑의 기회라고 여기세요.

그것을 통해서 지금 사탄이 십자가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 훼방하고 차단시키고자 설치고 있는가를 눈으로 확인이 되는 겁니다. 아하, 평소에 모든 인간들이 저런 것을 무서워하고 저런 것을 가지고 벌벌 떨었구나. 그 벌벌 떠는 그것을 가지고 교회 나왔으니까 그들이 얼마나 십일조를 바치면서 교회에 헌신할 수밖에 없는지, 그런 식으로 계속 사탄이 농락을 해온 겁니다. 

교회라는 것이 사탄이 당회장이 되어가지고 얼마나 농락했으면 그들이 거침없이 목돈을 내겠어요. 무슨 꿍꿍이가 뒤에 그렇게 많아가지고, 범죄 한 것이 뭐가 그리 많기에 그 불안감, 들킬까 하는, 노출될 까 하는 그 두려움, 쫓김이 얼마나 많았으면 아낌없이 목돈을 내서 천국가려고 그 짓하고 있느냐 이 말이지요.

그러니 교회에 나와야 돼요. 교회에 나와서 공포에 쫓겨봐야 됩니다. 기도도 못하는 게, 이런 소리를 들으세요. 그리고는 맞불을 놓으세요. “그래. 나, 기도도 못한다.” 맞불 작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분이 가져야 돼요. 내 쪽에서 재가 되어야 된다니까요. 성령은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이야기해요.

부활이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탄은 절대로 부활을 시비 걸지 않아요. 왜냐하면 부활이라는 것은 다시 한 번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성과, 네 착함의 성과를 어떤 상품, 경품처럼 삼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가 교회에서 그렇게 충성하더니만 봐라. 주께서 네게 부활의 축복을 주잖아. 그러니까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사탄이 설교단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여러분이 주께 죽음으로서 기여하고 헌신하게 되면 부활이라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희망을 가지세요.” 이게 설교단에서 이야기하는 사탄의 음성이에요. 사탄의 목소리입니다. 여러분의 행함에 따라서, 여러분이 얼마나 법을 지키는가에 따라서 여러분이 상급 받고 거기에 대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런 이야기할 때 그 목사나 교인들이 한통속이 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착하고 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고, 경건하고 경건하게 된 이유가 뭐냐? 너무나 내가 착하고 너무나 내가 훌륭하기 때문에 차마 하나님이 나를 못 죽이도록, 나의 이 가치가 아까워서라도 주께서 함부로 홀대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고 나를 좀 아껴서 ‘너 같은 인간 천국에 안 넣어주면 누굴 넣어주겠는가’ 이런 식으로 주님도 나를 함부로 못하도록 사전조치를 우리쪽에서 마련하는 거예요.

‘이렇게 정성들이는데 감히 나를 지옥 보내?’ 사탄은 아주 좋아하면서 “그래. 네 모든 행동의 목적은 너 자신뿐이야. 믿을 것은 너밖에 없어. 네가 잘돼야지 다른 누가 잘되면 안 되잖아.” 계속해서 몰아세우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인데, 이미 사탄에게 장악된 인간인데 그렇다면 무슨 수로 성령 받은 사람으로 전환될 있느냐. 그게 진짜 궁금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세상과 결별했잖아요. 끊었잖아요. 끊었다는 말은 단절되었다는 말이고 단절되어 있다는 말은 성령께서 저쪽으로 넘어와 준 사람에게만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누가 성령 받은 사람이냐 하면, 내가 성령 받고 구원된 것에 대해서 자기의 행함으로 설명할 것이 없는 사람, 이게 구원된 사람입니다.

여기서 광주강의 한 것을 잠시 언급할게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돈 2500만원을 주웠어요. 여권과 함께. 실제로 인천공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아줌마가 가방을 주워서 열어보니 2500만원이 들어 있었는데 그걸 그대로 분실물신고를 했더니 가방 주인이 깜작 놀라면서 감사하다고 했어요.

2천 5백만 원을 길에서 주워서 분실물신고해서 주인 찾아줬다. 착한 일이지요. 그러면 그 아주머니가 이야기하지요. “내가 착해서 한 것이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라고 겸손했다 칩시다. 그러면 자기 행함, 자기 선행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저 아줌마 자칫하면, 자칫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성령 받은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칫하면’ 이지요. 자칫하면 성령 받은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예를 들어서 만약 그 아주머니가 십년 전에 유부남과 바람을 피웠다 합시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세요. 착한 일은 곧장 잊어버리는데 왜 악한 일은 안 잊어버립니까?

이게 바로 성령 안 받은 증거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결별된 상태에서 저쪽 예수님 세계에서 주님의 영이 온 상태거든요. 그러면 이쪽에서는, 내가 성령받기 전에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받은 것도 아니에요. 이게 오늘 본문이야기에요. ‘율법의 행위로냐.’ 어떤 행위를 해서 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악한 일을 행했다고 안 오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이지요. 그렇다면, 성령을 받았으면 선한 일도 잊어버리는 동시에 뭐도, ‘선악’이니까 악한 일도 내가 개무시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뻔뻔스럽지요. 뻔뻔스러워야 돼요. 왜? 우리는 내가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살아계심, 십자가 살아 있음, 성령의 살아있음의 하나의 조건으로 사니까. 그것이 예수의 증인입니다.

왜 선한 일에는 겸손 떤답시고 “아무나 하는 일인데요 뭐.” 하면서 왜 지난밤에 한 일은 못 잊어버립니까? 그것은 아직도 사탄의 존재는 알지 못하고 선악이라는 거울 앞에서……,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자체가 저주가 풍겨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놈의 선악을 거울 보듯이 봐가지고, ‘오늘도 내가 나를 돌아볼 때 내가 착한 일을 했을까?’ 계속 거울 보듯이 보니까 거기서 자기 행함이 반사되어서 자기 것으로 미래를 보장하듯이 선행은 받아내고 악행은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는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미친 짓을!

여러분, 교회는 정신병동이에요. 이 세상전체가 정신병동입니다. 전부가 다 미쳤어요. 빗자루로 쓸면서 “영미! 영미!” 이게 뭐가 중요하다고……. 물론 금메달을 따면 보상금은 나오겠지만. 졌답니다. 영적인 사탄과 십자가를 잊어버리니까, 사탄이 그것을 잊어버리게 하니까 남는 것은 금메달 따는 것밖에 안 남아요. 핵개발, 그런 문제. 우리나라 지켜 달라고 금식 기도하는 그런 것.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멋진 대책이 요나서에 나옵니다. 구약에 보면 요나 선지자가 나오는데 요나 선지자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선원들과 승객들에 섞여서 같이 갔어요. 하나님께서 풍랑을 일으켜서 배를 흔들어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요나를 지목하게 만들었지요. 위기가 왔습니다. 그래서 잠자는 요나가 포착되어서 “네가 하나님을 버리고 왔기 때문에 미안하다만 당신이 우리대신 죽어줘.”

그렇게 해서 요나를 바닷물 속으로 뛰어내리도록 뒤에서 추동했지요. 기존의 선원들과 승객들은 굉장히 요나에게 미안해했어요. 미안하다. 미안하지만 하나가 죽어서 다수가 살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거든요. 그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다수가 살기 위해서 하나가 희생하는 이것이 인간의 합리적 효율성, 경제적 효율성이거든요.

중요한 것은 그 때부터 요나와 그 배에 동승했던 승객들과 결별했다는 사실이에요. 결별했어요. 요나는 다른 세계로 접어들어 갑니다. 그 세계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성전에 있다는 새로운 영적경우를 체험하게 돼요. 요나가 살아있는 곳은 죽음 안에 살아 있어요. 죽음 안에 폭 싸였다고 되어 있어요. 사방을 둘러봐도 죽음 안에 요나가 있어요.

문제는 결별했던 저 선원들과 승객들은, 죽음 안에서는 인간이 못산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평생 교육받은 것은 죽으면 끝이고 죽음 안에는 생명이 없다고 하는 것이고, 요나는 죽음 안에서야 비로소 생명이 있는 거예요. 죽어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고 죽음 안에서 생명을 얻는 거예요.

이것을 사탄이 가로막고자 하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있을 때만, 십자가 죽음 안에 갇혀 있을 때만 그게 생명이지 십자가 끝나고 난 뒤에 생명은 없어요. 십자가 철회하면 생명이 없어요. 십자가 바깥에 나오면 영생은 없습니다. 부활이 생명이 아니에요. 십자가 안이 생명이에요. 그 십자가를 확장시키는 영역이 바로 부활이고요.

아직도 요나는 정신을 못 차렸어요. ‘살았구나.’ 해서 물고기가 잠수함 역할을 해서 가야 될 니느웨 그 목적지에 도착했지요. 요나는 조건이고 수단에 불과하고.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성이 멸망한다고 이야기하고 자기는 산 위에 올라가서 턱 괴고 관람하고 있는 거예요. 자, 망하는가 한 번 보자. 

반드시 망한다고 되어 있는 그들이 갑자기 소, 돼지, 강아지, 고양이까지 다 금식하고 회개하니까 그들의 심판이 철회되고 말았어요. 그렇다면 니느웨가 이스라엘이냐 아니면 요나의 나라가 이스라엘이냐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만 남겨야 나라에요. 한 때 은혜 받았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꾸준히 은혜가 되어야 돼요. 나중에는 니느웨도 망하지만 어쨌든 그 순간 니느웨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들은 갑자기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나는 삐져서 자살을 시도했고 이왕 자살하는데 시원하게 자살하려고 했는데 뜨거워서 자살 못하겠다고 불평을 하네요.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요나야. 저 많은 사람들을 내가 살려낼 권한이 있잖아. 그런데 너는 그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네가 무슨 권한으로 죽기를 바라느냐. 네가 그럴 자격이 있느냐?” 다시 말해서 어드벤티지를 네가 갖지 말라는 말이지요. 네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구원에 유리한 조건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진짜 성전은 너의 착함과 너의 악함과 상관없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그것으로 인하여 이미 하나님의 성전이 된 거예요. 요나가 가고 싶은 곳은 다시스지만 주께서 있고 싶은 곳은 죄인들과 함께 있고 죄를 아는 사람과 함께 있는 곳, 그곳이 주께서 원하는 장소인 성소, 전입니다.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왜 주셨는가? 우리로 하여금 이미 모든 세상일이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고 십자가를 위해서 총동원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안목을 성령을 통해서 주신 사람에게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너 고유의 가치나 중요성 같은 것은 이 땅에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사람이 법을 지킨다는 것, 율법을 행한다는 것, 사탄에 쫓기면서 그런 식으로 기댈 것은 내 행함밖에 없으니까, 그 율법을 지키는 내 행함, 그 행함의 일종이 뭐냐 하면 믿음이고, 행함의 일종이 소망이고, 행함의 일종이 사랑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어버리면 진짜 믿음인지 아니면 율법의 행함에서의 믿음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 행위를 하고 돌아오는 결과가 누구 좋으라고, 누굴 목적으로 해서 되돌아오느냐 하면, 믿었던 내가 목적이 된다면 이것은 사탄이 시킨 일이지요. 이것은 성령을 안 받은 거예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됐어! 나는 이제 믿었으니 구원받았어. 예수 십자가 믿었으니 구원받았어.’ 이렇게 도로 나에게 오는 거예요.

성령이 하시는 일은 내가 있는 자리, 내가 있는 장소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자기가 있고 싶어 하는 그 성전, 장소를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았다는 사실로 주객이 바뀌면 돼요. 쉬게 말해서 내가 있는 이 내 자리, 내 가정, 내 아파트, 빌라, 나의 아이들과 함께 있는 이 자리가 곧 성전인 거예요.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성전이고.

거기는 주께서 있고 싶어 하는 곳이에요. 내가 있고 싶어 하는 곳이 아니고. 대한민국 복잡하다고 해서 이민들 가고 하는데 이민 가봐야 거기도 다시스고 거기도 내가 가는 이상은 지옥입니다. 악마가 거기까지 따라와요. “바르게 살아야 네가 여기서 건강하게 사는 것이지 독감 걸린 것도 다 네가 죄지어서 걸렸잖아.” 또 궁지에 몰아넣고.

또 ‘미 투’ 들어오지요. ‘미 넥스트’가 또 들어와요. ‘다음에는 나’ 총기사건 비슷한 것이 또 들어온다고요. 죽으면 안 돼. 어떤 분의 개인 사이트에 보면 제목이 ‘위험하지 아니한가.’ 그런 게 있어요. 얼마나 죽는 것이 무서웠으면. 지금은 그 사람이 좀 바뀌었다고 하는데.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주님의 일의 연속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개인의 사정은 전혀 고려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네가 어디 있든지 간에 성령 받은 사람은 네가 있는 곳이, 바로 성령 받은 그곳이 성전이기 때문에. 네 주변에서 ‘누가 십자가를 꾀더냐.’를 몸소 체험하라는 겁니다. 

주님의 체험은 우리의 욕심 없이는 주님의 체험이 아니에요. 반드시 우리가 하는 하나님의 체험 속에우리의 욕심이 거기서 튀어나와야 돼요. 아, 내가 나를 꾀이고, 내가 나에게 협박했고, 내가 나에게 공갈쳤고. 물론 우리는 사탄의 앞잡이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그걸 알겠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로 우리를 잠 못들 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살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고 지키고자 하는 것이 뭔가 있어요.

여러분, 그만 삽시다. 그만 살고, 살려 줄 때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십자가의 조건에 맞을 경우에만 내일이 보장되지 오늘로서 십자가 조건 다 된다면 그것으로서 그냥 데려가십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 때문에 계속 우리를 살려주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떵떵거리면서 우리가 큰소리칩시다. 그리고 뱃사람과 결별합시다. 뱃사람들이나 요나와 함께 탔던 승객들은 요나를 보고 얼마나 미안해한지 몰라요. “우리 살려고 요나를 죽였는데 어쩔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사람에게는 너무 불행스럽다.” 요나가 이야기할 거예요. “너나 잘하세요, 너나!”

네가 평생이 다가도 경험하지 못한 성령의 체험. 성령의 체험은 뭐냐 하면,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고, 이미 영생의 사람이고, 더 이상 쫓길 것이 없는 것. ‘미 투’ 마음대로 하라고 해요. 뭘 쫓겨요? 손가락질도 마음대로 하라고 해요. “저 사람이 나를 놀려요.” 

손가락 스물 댓 개 와서 많이 놀리라고 하세요. 놀리면 놀릴수록 그게 바로 십자가를 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체험입니다. 그것도 감당 안 되면서 무슨 신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겁니다. 내가 착해서 믿음 받은 것이 아니고 내가 착해서 성령 받은 것이 아니에요. 교회 열심내서 성령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왔어요. 그냥 왔기 때문에 성령과 관계없는 것은 남의 일로 여기고 이렇게 쫓는 이 악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는데 주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걸 끊어버리게 했던 거예요. 이 쫓김을 청산케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의 효과, 십자가의 효과를 드러내기 위해서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게 만드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 없음을 감사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이미 세상은 십자가 앞에서 주님과 관계가, 연결이 끊어진 세상인 것을 우리가 너무 자주 잊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 속에 우리가 함께 있으면서도 연결점이 없음을, 우리가 우리 옛사람과 새사람의 연결점이 없음을 십자가를 통해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