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십자가
2018년 2월 18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3:1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는 단언합니다. 십자가가 ‘보인다’고 말입니다. 이로서 인간들이 ‘보인다’는 모든 것은 ‘십자가를 본다’ 앞에서 무의미로 드러납니다. 즉 너희들이 보고 또 보고, 그리고 그 보이는 것들로 집대성해서 구성한 그 현실이라는 것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겁니다. 정작 봐야 할 것을 못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보이는 것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두루 보는 것을 ‘시선’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집중해서 보는 것을 ‘응시’라고 합시다. 인간의 시선이 어느 특정 곳에 집중해서 의식적으로 보게 되면 이는 응시가 되는데 바로 그가 관심있게 보는 그것에 자신의 주체가 정리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들이 십자가 사건에 집중하고 본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보게 되는 십자가는 과연 올바른 십자가 참된 십자가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그런 응시로 인해 ‘자기 주체를 위한 십자가’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즉 그 십자가에는 ‘나는 지금 내가 십자가를 응시하고 있음’이 내포된 그런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말하는 십자가란 이미 살아있다고 여기는 본인들에 의해서 응시가 되는 그런 십자가 아니라 이미 죽어버려서 죽음 그 뒤로 넘어가버린 바로 그 분이 십자가 사건을 앞장 세워서 인간들을 응시하고 계시는 겁니다. 참된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주체가 살아있는 그런 십자가입니다.
진정한 기적이란 인간의 주체 넘어서 주어지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상상력은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사항들을 상상력으로 재현하게 됩니다. 그러니 엉터리입니다. 실제로 작용하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상상력을 동원해서 자기 쪽으로 수집해놓은 것들입니다.
특히 십자가 사건은 ‘죽음 너머에서 주어진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인간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적이 바로 십자가 기적입니다. 인간들이 상상하는 기적들은, 그런 자기 자신에 도움되는 그런 기적을 원합니다. 즉 ‘나는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확인해줄 수 있는 그런 기적을 기적이라고 정리합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서 날아드는 십자가 기적은, ‘모든 인간은 나 예수가 없어지기를 원했다’는 증거로 날아던 십자가입니다. 즉 ‘핍박한 증거로서의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는 말은 모든 인간들이 살아있다고 우기나 그 우김으로 예수님만이 진정 살아계신 분임을 증명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로 인하여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즉 인간들의 모든 안목과 주체라는 것은 결코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마저 죽게 하게 한 ‘죽음 그 자체’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드린다면, 인간들이 자기를 살려내기 위해 시도한 모든 것들이 도리어 자기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피하게 한 요소들이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십자가에 지셔야 하는 예수님이라면, 그리고 그것으로만 구원이 된다면 인간들이 하는 모든 짓이 헛짓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하기를 “어리석도다!”고 천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인간들은 이런 부질없는 일에 몰입할까요?
그것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자랑거리’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도 보이는 것들로 보이는 외부인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눈에 도저히 띄지 않는 ‘십자가 사건’을 보느냐고 묻는 겁니다. 즉 “너의 죽음 후가 보이느냐?”는 겁니다. 만약이 이게 보인다면 그동안 우리들은 일생동안 얼마나 큰 어리석은 자랑거리를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느냐가 드러납니다.
‘보이는 것’은 ‘말(씀)하는 것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보이는 ‘송아지 형상’을 가져다 놓았을 때에, 모세는 산 위에는 양편에 말씀(돌판)들고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깨뜨려버립니다. 즉 보이는 것은 말하는 것과 병행할 수 없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에서, 부자는 지옥에서 제안하기를, 낙원에 간 거지 나사로를 다시 살려보내어 아직 살아있는 동생들에게 이곳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본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전제로 하는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 나무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 만들었지만 정작 그런 눈에 보이는 것은 “따먹지 말라”를 말씀을 전제로 해서 제시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미 ‘보이는 것’으로 살기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그 예가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와 엘리야의 만남입니다. 선지자가 그 가정에 찾아가서 마지막 남은 떡덩어리를 강탈합니다. 그리고 난 뒤 빈 통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비워있는 통마다 밀가루가 그득하게 되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잠시 가슴을 철렁 내려 앉았겠지만 다시 밀가루 통이 가득 찼으니 만족했을 겁니다.
하지만 엘리야 선지자가 다녀간 후, 멀쩡했던 그 과부의 아들이 죽습니다. 과부는 당연히 화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여전히 그 과부가 근원적인 문제, 즉 본인이 과연 산 존재인지 죽은 존재가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엘리야가 그 가정에 가르쳐 준 것은, 인간은 이미 태어나면서 죄 속에서 저주받아야 하고 그것이 곧 ‘죽음’이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눈에 보이는 자신을 살려내기 위해 사는 게 사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용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을 증거하기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자랑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나라는 존재의 대상체가 될 수 있지만 실제로 작용하는 십자가는 나로 하여금 늘 죽게 하는 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제 남은 육으로 증거할 것은 우리의 죄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유월절날 아버지(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식이 죽습니다. 이는 자식이 영원한 우리의 우상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러한 죄 몸에 그저 엘리야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몸이 덮쳐져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기를 바랍니다. (갈 6:14)
『 하나님 아버지, 살기 위해 갖은 요령을 부릴 필요가 없음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8-02-19 09:55:41 | 조회 : 2 | 277강-갈 3장 1절(보이는 십자가)180218-이 근호 목사 | 이름 : 오용익 (IP:121.149.39.243) | | 277강-갈 3장 1절(보이는 십자가)1802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입니다. 신약성경 304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바울이,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도바울한테 말을 잘못 들은 것인지 우리쪽에 문제가 있는지 다시 점검이 되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십자가라 하는 것은 눈에 밝히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없습니다. 없는데 밝히 보인다고 이야기했거든요.
사도바울의 이야기는 뭐냐 하면, 지금 너희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이유가 봐야 될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여파로 너희들이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정작 이것만 보인다면 다른 것, 골치 아픈 이야기는 없다는 거지요. 지금 밝히 보인다는 것이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이거든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대타로 해서 다른 엉뚱한 것을 가지고 구원에 이르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십자가 밝히 보이는 것을 제대로 보게 되면, 지금 사도바울이 보고 있으니까 자기가 보고 있는 것 같이 십자가를 보게 되면 내 쪽에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이 안 해도 될 일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고자 하면서 동원시키는 것이 뭐냐? 갈라디아서 1장, 2장에서 계속 이야기한 법이라는 것, 율법이라는 겁니다. 법을 가지고 실천에 옮기는 행위를 가지고 현실화시키고, 현실화시켜서 만든 그것을 내가 소지하고 획득함으로서 그것가지고 하나님의 천국, 의에 이르고자 하는 그것은 그 모든 시도가 개인적으로 성질이 더럽고, 환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성격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두 눈이 있으니까 볼 것 다 본다고 우기겠지요. “우리는 지금 볼 것 다 보고 있어요.” 그렇게 다 본다는 말이지요. 그 본다는 것이 뭐냐 하면, 열심히 율법대로 바르게 살고, 경건하게 살고, 거룩해 보이는 동료들과 신앙인들을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 그걸 따라하고 흉내 내면서 얼추 모방하게 되면 나도 얼추 구원받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가정의 부인이 교회 나온다면 뒤 늦게 교회 나온 남편은 부인이 나가는 교회의 스케줄, 행사, 이벤트를 따라서 함께 하게 되면 한 모퉁이가 되어서 천국에 들어간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십자가사건은 왜 못 보는데”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서는 답답한 거예요. “미쳤나? 십자가는 옛날 지난 이야기인데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인가? 사도바울 네가 돈 것 아니야? 너 시력 얼마야?” 어떻게 십자가가 보입니까? 신앙생활 한답시고 설쳐대는 그런 인간들만 보이지 십자가가 보입니까? 사도바울은 얼마나 자기가 전하는 이 복음에 자신감을 가졌는지 3장 1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리석도다.”라고 되어 있어요.
“바보, 등신들아” 그 말이지요. 너희들이 봐야 될 것을 안보니까 지금 한 평생 살아가는 것이 헛수고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십자가를 봐버리면 그동안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는 모든 수고를 안 해도 된다는 겁니다. 그걸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볼 것을 못보기 때문에 이것도 집적, 저것도 집적거리는 겁니다.
예수도 믿었다가, 삼위일체도 믿었다가, 시키는 것은 다 하다가, 선교헌금도 냈다가, 교회 충성했다가, 스스로 경건에 이바지하고, 거룩하게 해 봤다가, 술도 끊어봤다가, 담배도 끊어봤다가, 온갖 짓을 다 하는데 그 짓을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리석은 짓을 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내가 하는 나의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겁니다.
무용지물이라고 하면 아주 간단한 예가 구약에 나오고 있어요. 솔로몬이 재판을 합니다. 어떤 여자 둘이 왔는데 간밤에 둘 중 한 여자의 애가 죽자 살아 있는 나머지 애 하나를 두고 네 애니 내 애니 서로 우기고 있습니다. 분명히 둘 중 하나는 자기애가 맞아요. 그러나 재판하는 입장에서는 두 아주머니가운데 누가 자기애인지는 모르는 상태라는 말이지요.
솔로몬의 판결은 간단합니다. 애를 데려오라고 해서 칼 가지고 쪼개라고 합니다. 이 말은 뭐냐? 아이를 소용없는 아이로 만드는 겁니다. 아이가 소용없으면, 애가 죽어버리면 둘이 티격태격할 이유도 없지요. 그러면 아이가 살아 있을 때는 아이 엄마도 성립되는데 아이가 죽어버리면 아이가 엄마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지요.
하나님의 재판이라는 것은 인간이 내세우는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내 주장과 내 의도 이 자체가 네가 너 자신을 보고 있는 입장에서 그것을 확산시켜 나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는 나를 본다. 내가 여기 있구나. 그런데 내가 애를 낳았다. 애가 저기 있네. 왜 있느냐. 내 눈에 보이니까.
인간은 자기가 보는 것을 확대시켜 나가요. 그 보는 것을 시선이라고 합니다. 시선은 어려운 말인데 그냥 본다고 해요. 내가 보고 또 보고 이 보는 것을 확대시켜 나가는데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우리가 보는 것이 어떤 형태로 나오는가 하면 그냥 보지 않고 응시로 나가요. 이것도 어려운 말이에요.
시선도 어려운 말이지만 응시라는 말도 어려운 말이에요. 시선과 응시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시선은 그냥 보는 것이지만 응시는 그걸 집중해서 보는 겁니다. 신경 써서 보고 의식해서 보는 것을 응시라고 이야기하지요. 만약 자기애가 학교 가을운동회를 하는데 학교 근처 풍경도 볼 수 있고 논밭도 볼 수 있어요. 그것은 시선입니다.
그런데 마침 초등학교 2학년 50미터 달리기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시선이 아니에요. 집중해서 한 곳만 쳐다봐요. 자기 애 뛰는 것만 봐요. 그걸 응시라 하는 겁니다. 시선과 응시, 왜 본다는 것을 이 두 가지로 분리해야 될 이유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상상해서 그림으로 그리고 그 그림을 우리는 머릿속에서 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평소에 내가 다른 것을 보듯이 상상한 것도 본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내가 보는 것을 인하여 주님 쪽에서 보는 것이 가로막혀 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보는 것을 모아서 내 인생 마련했는데 내가 내 보는 것을 저 다른 곳에서 응시하고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보는데 분주해서, 내가 내 보는 것으로 꾸며나가는 내인생사 때문에, 거기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것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지금 지켜보고 있고 응시하고 있는 분의 시선을 놓쳐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시선은 어디서 오는가? 사도바울은 놀라운 이야기를 해요. 저 지리산에 있는 분이 나를 망원경으로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저 화성인이 지구인이 어떻게 사는가를 망원경 가지고 보는 것도 아니라, 이미 우리가 사는 데 말고 우리 죽음 이후에 계신 분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고 응시하고 지켜보고 있다는 겁니다. 죽음 이후에 계신 분이.
여러분, 사람들이 기적, 기적, 하지만 그 기적들의 성격이 뭐냐? 살아 있으면서 유용한 것을 기적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죽고 난 뒤에는 이미 죽어버렸는데 무슨 기적이 필요합니까? 살아 있을 때 더 살게 하기 위해서 교회 와서 열심히 예수한테 빌고 기도하면서 빌잖아요. 살아 있게 해 달라고.
사도바울은, 진짜 기적은 십자가라는 겁니다. 죽음 이후의 소식이 우리에게 들려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우리가 정말 합류해야 될 것은, 살아 있는 것들과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는 그것이 아니고, 죽고 난 그 분과 합류해야 된다는 거예요. 죽고 난 뒤의 그 분과 합류해야 돼요.
그런데 그걸 누가 가로막는가? 나라는 주체가 가로막는 거예요. 내가 뭔가 응시하고 시선을 주는 순간 거기서 나의 주체의 성격이 발휘가 되고 증거물로 거기에 자리잡게 되는 겁니다. 시골 강원도 깊은 산골 할머니에게 이야기합니다. “할머니, 어제 쇼트스케이트에서 금메달 따는 것 보셨습니까?” “몇 신데 그때가? 한 8시가 넘었지요, 아마?” “나 그 때 잤다.”
그 할머니의 주체에는 쇼트고 스피드고 그런 것이 없어요. 내가 뭐냐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주시하느냐, 그게 나에요. 인간은 모든 것을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것, 내가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것도 나와 결부된 천국입니다. 백프로 가짜입니다. 그래놓고 “나는 예수님 보여주면 믿을게.”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을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인간이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보이는 것을 일괄 다 없애기 위해서 볼 수 없는 죽음 이후의 사건을 보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가 보이느냐고 묻는 것은, 네가 보고 있는 것을 다 놓으라는 말이에요. 예배당 큰 것도 놓아버리고, 옆 사람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기도를 어떻게 하고, 헌금을 어떻게 하는지 다 놓아버리고 더 놓을 것은 뭐냐?
내가 지난번에 헌금 얼마를 했고, 내가 교회를 얼마를 다녔고, 이것도 놓아버리라는 말이지요. 내가 이렇게 경건했고, 이렇게 착실했고, 이걸 끊고 새사람 되려고 애썼다 하는 이 모든 일기장도 불에 태워버려야 돼요. 다 놔버려야 돼요.
그런 것들을 지키고 유지하고 있으니까 정작 봐야 될 것이 안 보이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이 “목사님, 꼭 그걸 봐야 됩니까?” 이럴 거예요.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언급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사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그런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십자가사건이 계획된 거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계획되었다는 말은, 인간이 평생 하는 모든 것들은 그 계획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겁니다. 거울 보면 내가 보이고, 그래서 나는 소중하고, 소중하기에 죽어서까지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나는 무슨 짓이든 해야 되고, 이렇게 무슨 짓을 하게 되면 그 무슨 짓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내가 무슨 짓을 할 때 그 때 처음 등장하는 거예요.
내가 태어나서 몇 년 교회 다녔고, 40대에 뭘 했고, 50에 목돈을 냈고,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돼버려요. 왜냐하면 그것은 십자가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바울이, 십자가사건이 눈에 보이더냐, 라고 묻는 것은 인간이 할래야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처음부터 턱 하니 자리 잡았다는 겁니다.
지난 금요일에 명절이라 처갓집을 갔지요. 이야기하는 가운데, 일이 잘 안되니까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은혜롭게 넘어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라 하는 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내가 눈에 보이는 일을 추진하다가, 상상하다가 눈에 보이는 일이 잘 안되니까 ‘내가 눈에 보이는 일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일이 있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내가 미처 모르는 상태에서 섞여있는데 내가 눈에 보이는 일만 열중하다 보니까 눈에 보이지는 않는 섞여 있는 다른 뜻, 하나님의 뜻이 나를 인도하는구나.’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그 사람들이 이슬람을 몰라서 그래요. 이슬람에 ‘인샬라’ 하는 것이 있어요. 그 뜻이, 모든 것이 알라의 뜻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알라의 뜻이다.’라는 이슬람과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모든 것이 주의 뜻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의 뜻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개혁주의라고 합니다. 주권사상이 바로 그런 거거든요. 주권사상하고 알라의 뜻하고 똑같아요. 그러니 이것은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고 알라신전에 가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주권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정작 알아야 될 것은 주권을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뭐냐? 네가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의 구원에 하등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실없는 소리라는 거예요.
구체적인 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죽음이에요. 이 예수님의 십자가죽음과 가장 예리하게 구분하게 될 것이 뭐냐?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가의 그 둘을 구분해야 돼요. 사도바울은 놀랍게도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존재가 되고 존재는 사건이 아니에요. 예수라는 존재는, 내가 나를 봤을 때 존재로 느끼는 것처럼 상상할 가능성이 있어요. 예수님의 존재는 저렇게 하나님 우편에 계실 것이라고 상상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상상할 수 있어요.
나를 닮은 그 무엇. 십자가사건이 보이느냐 하는 것은요, 그 때에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있고 양쪽에 강도가 십자가에 달려 있고, 그렇게 십자가를 상상하는 그것은 근처도 못 갔어요. 그것은 제대로 십자가사건을 상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에요. 존재가 되면 나의 대상화가 되어버립니다. 내가 나를 거울로 보면 나의 대상인 것처럼 예수도 나의 대상화가 되어서 그 대상화의 중간을 메우기 위해서 정성과 사랑으로, 열심히 헌신해서, 마음을 낮춰서 저 내 앞에 있는 대상화에게 접근하고 더 가까이 가기를 시도하는 시도꺼리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사건은 접근불가입니다. 할 수가 없어요. 왜? 우리가 죽고 난 뒤의 죽음이후의 기적이기 때문에. 내가 없을 때, 내가 죽었을 때에도 그 때에도 있었던 계획된 사건이 십자가사건이에요. 십자가사건이라 하는 것은 분명히 이 땅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마주친 적이 있다는 겁니다. 마주쳤을 때에 인간 쪽에서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일괄적으로 확정이 되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핍박이에요.
회개가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을 핍박했습니다, 하는 그 증거를 내가 수용하는 것이 회개에요. 울고불고 반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나는 늘 주님을 핍박했습니다. 왜? 내가 보는 것으로 나의 현실을 따로 구성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바울에게 주님이 찾아왔을 때 “주여, 누구십니까?” 했을 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했어요.
그냥 예수가 아니고 핍박하는 예수로 말미암아 십자가사건은 항상 옛날부터 고정적이고 지금도 고정적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고정적인 거예요. 무슨 말이냐? 아무리 변하고 변하고 변해도 그대로 있는 것, 그게 십자가사건입니다. 끝없는 변형을 오히려 유발하지요. 왜 예수님 죽으심 그것으로 모든 구원이 끝났느냐 하면, 그 십자가사건이 핍박사건이기 때문에 핍박사건을 계속 확산시킬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그 핍박의 원인이 뭐냐 하면, 인간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따로 마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자랑거리, 유대인 같으면 자기 의라고 하지요. 만약에 내가 십자가를 믿는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하니까 “십자가 믿어줄게.” 이렇게 되어버리면, 왜 십자가 믿었어도 구원 못 받느냐 하면, 십자가를 믿어주게 되면 믿는 주체가 내가 되고 나는 그것을 믿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을 상상하게 돼요.
천주교신자 집에 가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벌거벗고 뭐 하나 걸치고 매달려 있지요. 그거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상상이 더 깊어지지 않습니까? 그것을 믿어버리면 그 예수 십자가 믿는 것이 또 하나의 자랑거리로 나한테 장착이 돼요. 그러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이 성립이 안돼요.
십자가 믿는 나를 자랑거리로 삼아버리니까. 십자가만 자랑거리가 안 되고 옆에 뭐가 서 있느냐 하면, ‘그 십자가 내가 믿어줬다.’ 십자기 믿은 자신이 그 옆에 서 있다니까요. 이것은 죽음 이후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데서 오는 기적이 아니고 상상하는 끝자락에서 내가 만든 십자가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꼼수에요.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눈에 보이는 것이 문제가 되거든요. 눈에 보이는 것,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 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그런 것들을 주님께서 뭘 로 바꾸느냐 하면, 선악과를 심어놓고 따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뭐냐? 말하기에요.
보이는 것들은 말하기로 교체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는 말, 십자가는 시력 1.5, 이런 식의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사건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보이는 것은 아닌데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 그 보인다는 말을 집어넣은 것은 모든 보이는 것은 복음의 말하기와 교체하라는 뜻이에요.
말씀이 우리를 건지는 것이지 보이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상상한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선악과 심어놓고 더 중요한 것은 따먹지 말라는 겁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보암직, 보고 있잖아요. 탐스럽기도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보이는 것으로 유도해서 보이는 것을 밟아버리고 말하는 것으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음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보인다는 것을 왜 우리가 거부해야 되느냐 하면, 이 보이는 것은 ‘나’라는 주체를 포기를 못하게 만들어요. 나라는 주체를 포기를 못하면 나에게 십자가만 자랑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외의 것이 자랑거리가 돼요. 저에게 은밀하고 상당히 민망한 질문들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자위행위를 어떻게 끊을 수 있습니까, 음란비디오를 언제 끊을 수 있습니까, 동성애를 하는데 어떻게 해결이 안 됩니까, 그런 질문들을 본인들도 하고 또 타인과 관련되어서도 해요. 그런데 왜 젊은 사람들이 그런 일탈이라든지 그런 것을 하느냐 하면, 나만의 자랑거리를 따로 갖고 싶어서 그래요.
중이 머리 깎는 것이 자기자랑거리입니다. 신부가 유니폼 입는 것이 자기 자랑거리에요. 수녀가 더운데도 머리에 뭘 걸치고 다니는 그것도 자랑거리에요. 우리는 끊임없이 나만의 자랑거리를 못 뽑아내서 환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하는 이유가 뭡니까? 나만의 자랑거리가 허물어진다는 위기를 느끼고 차라리 내 자랑거리가 없는 한 나는 자살해서 죽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교회 와서 기적을 바래요? 그 기적은 뭐냐? 내 자랑거리를 만들어주시고 그것을 키워달라는 거예요. 그게 자기 의잖아요. 그 자랑거리로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법이라는 것을 가져와서 내가 이 법을 지켰으니까 이것을 내 자랑이라고 해주세요, 라고 남들 앞에서 그것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동창회 잘 나오다가 이혼하고 나서는 안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자랑거리가 쑥 들어갔으니까. 친구들 모임에 잘 나가다가 자기 아들 대학 떨어지면 그 다음부터 잘 안 나가요. 자랑거리가 훅 떨어져 버렸으니까. 자기 자식 장애자 되면 안 나와요. 자랑거리가 없으니까. 이거에요. 자기자식이 장애자라서 못나온다는 말은 그 전에는 뭣 때문에 그들 앞에 자기 얼굴을 보였습니까?
나 이 정도야, 하는 자랑거리 때문이었던 거예요. 올해 경북사대부고 의예과에 14명이 들어갔어요. 수성구도 아닌데. 자랑거리가 대단하지요? 요새는 서울대학에 몇 명 들어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의예과에 몇 명 들어갔는가가 중요해요. 그럴 때 만약에 그 이야기, 경북사대부고에서 의예과에 14명이 들어갔다.
평준화된 고등학교에서 잘했다는 그것, 십자가만 자랑하는 모임에서 그 소리를 하게 되면 “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우우~! 여기 지옥 갈사람 또 등장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이라든지, 자신의 일탈, 남에게 ‘나 이정도로 자유로워. 이정도 해도 나는 감당할 수 있어.’ 이걸 하나의 새로운 자랑거리로 몸부림치면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전부 다 박살냅니다.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말씀으로 그렇게 해요. 그러한 예가 누가복음 16장 31절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은 나사로가 천국 간다는 유명한 이야기에요. 거지 나사로가 천국 가거든요. 여기에 반전이 있어요.
사람들은 어디에서 스톱하느냐 하면, 나사로는 가난했지만 천국가고 부자는 잘난 체하다가 지옥 갔다. 그것으로 스톱이 되는데 그 뒤의 2부 순서가 아주 재미있어요. 부자가 지옥 가니까 뜨겁거든요. 조금만 뜨거우면 말을 안 하지만 많이 뜨겁고 더 문제는 여기에 희망이 없다는 거예요. 10년 살다가 나오면 되는데 한 번 가면 못 빠져나오는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동생들 걱정하는 거예요. 동생들 다섯 명이 있는데 제발 형 따라서 이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하면서 무슨 방식을 이야기했느냐? “이미 천국 간 그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식으로 나타내주시면 그 동생들이 눈에 보이는 식으로 그 나사로의 모습을 보고서 ‘아, 나도 죽으면 저렇게 부활되겠구나.’ 하는 식으로 하게 되면 아마도 그들이 이 지옥에 안 오고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부자가 제안했어요.
그것을 제안한 이 부자의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 평소에 얼마나 보이는 것으로 승부를 끝내고자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티낸 거예요. 교인들이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대서 예배당 크게 지어놓으면 폼 나지요. 폼은 나는데 그 예배당의 냄새, 향나무 냄새부터 해서 새 건물의 냄새가 좋잖아요.
하지만 6개월만 지나보세요. 6개월만 지나면 다 식상합니다. 마태복음 8장 22절에서 누가 들었다면 섭섭할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지요. 제자 중에 방금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람이 있어요. 아버지 장례 치르고 주를 따르겠다고 하니까 마태복음 8장 22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여러분, 죽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체는 보이지만 죽음은 보이지 않거든요. 누가복음 16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었던 나사로 말고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말씀이 굉장히 어려운 말씀이에요.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비록 죽은 자 가운에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되면 그 사람은 한 사람이에요. 거지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거지 나사로 한 사람이 살아난 겁니다. 보편적이 아니에요. 일반적일 수가 없어요. 그 나사로를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살았다고 이야기해요.
“얼마 전에 죽었는데 어, 살았네. 어디 갔다 왔어? 천국 갔다 왔어? 와, 천국이 있네. 믿을게.” 이렇게 믿더라도 지옥가요 그 사람들은.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 ‘살았다.’를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엮여지기 때문에 그 사람은 천국에 못갑니다. 말씀은 살아 있는 인간이 같이 살아 있는 인간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가 말해야 그게 영생에 이르는 말씀이에요.
죽은 자가 이야기를 해야 된다니까요. 같이 살아 있는 인간이 해봐야 안 먹힙니다. 여러분이 남편보고 교회 나가자고 한다고 교회 나오던가요? 안 나오지요. 왜냐하면 안 나오는 사람은 본인이 아직 안 죽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내가 살아있는 쪽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 쪽에 속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것들, 교회 다니고 헌금하는 이 모든 것들이 내 구원에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을 기쁨으로 수용하게 되는 겁니다.
차후적으로 기쁨으로. 왜? 죽은 놈이 뭘 해요. 헌금해도 죽은 놈이 하는 것이고 예배 참석해도 죽은 놈이 하는 것이고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죽은 사람이 왜 움직이지요?” 죽은 사람이 죽은 분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저쪽 그리스도에 의해서 움직인다고요. 그걸 지난 시간에 존재가 능력으로 바뀐다고 했잖아요.
주의 능력으로 죽은 인간이지만 계속 죽은 채로, 죽음 자체로 움직이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는 말이지요. 죽은 놈이 뭘 내일을 걱정해요. 죽은 놈에게 무슨 내일이 있어요. 우리에게는 내일이 없어요. 무슨 영화제목 같다만. 그것을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 안에서’라고 이야기해요.
주 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일주일 전에 이야기했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은 죽음에서 넘어온 기적이 소위 살았다고 우기는 나를 이미 죽은 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볼 때에, 어떤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저건 아직도 자기가 죽은지도 모르고 살아 있는 줄로 착각해서 산 사람이 하는 일은 맨 날 자기 자랑거리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에게 다 들키는 겁니다. 어떤 교회 목사가 “제가 와서 교회가 이렇게 부흥되었고, 예배당과 교육관을 새로 지었습니다.” 하면 이것이 일반 교인들에게는 안 들키고 대단한 주의 사자로 보이지만 성도가 보면 ‘죽었네. 지옥 갈 놈이 참 지옥 갈 소리 하고 있네.’ 소용없는 짓을, 쓸데없는 것을 왜 하느냐는 거지요. 구원에 보탬이 안되는 것.
그래서 자기 때문에 하늘나라가 확장되고, 선교헌금 팍팍 내서 이제는 14개국을 선교해야 된다고, 그게 우리의 사명이고 우리가 빨리 하늘나라 선교해야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재림이 자기가 하는 대로 따라옵니까? 그런 말에 먹혀 들어가는 사람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나의 자랑거리로 여기는 사람한테나 먹혀 들어가는데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이 어리석은 인간들아.”
어리석다는 말은, 십자가가 눈에 보이기 전에 했던 그 짓을 반복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거예요. 십자가가 눈에 보이기 전에 했던 행동은 뭐냐? 보이는 대로 행동했던 그 모든 게 어리석음이에요. 보이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런 행동 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 남이라는 말을 한자로 축소하면 ‘법’이 돼요.
이 세상에 통용되는 법에 의해서 내가 걸리면 내가 남에게 어떻게 욕 얻어먹을까,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욕을 얻어먹을까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것은, 나는 지금 안 죽고 싶어요, 라는 이야기에요. 안 죽고 싶다는 말은 죽음 이후에서 온 기적이 없다는 말밖에 안돼요. 성령을 안 받았다는 말밖에 안됩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율법에서 자유롭습니다.
이것은 흔히 듣는 이론이에요. 하나의 이론이지요. 맞는 말이기도 하고. 자, 잠시 한 번 걱정을 해 봅시다. 십자가가 눈에 보인다고 하는데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지를 않아요. 보이지 않을 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보고 어리석다고 이야기했고, 그러면 어리석음을 탈피하려면 보이지도 않는 십자가를 보인다고 해야 되는데 상상해도 안 된다고 하니까 그러면 어떤 조치가 있어야 되는가, 슬그머니 걱정이 되지 않습니까?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거기에 엘리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엘리야 이야기에서 사르밧 과부가 나와요. 그 과부는 자기가 살고 죽는 것에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냥 가뭄 속에서 자기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들하고 둘이 ‘아들아, 그냥 살만큼 살자.’ 하는 일반인, 극히 생존에 급급한, 하루하루 살아 있기에 살아있다고 우기는 그 일에 급급한 일반인이 등장해요.
여기에 누가 매치되는가? 여기에 엘리야가 찾아갑니다. 이야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돼요. 엘리야가 찾아가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지막 남은 그 빵 나에게 줘.” 하고 가져가 버려요. 강탈하지요. 엘리야가 와서 그 빵을 가져가버리면 남는 것이 뭐냐? 죽음만 남아요.
이 말은 뭐냐? 주님이 우리를 살리는 기적은 반드시 내가 살 이유 없음을 알려주는 죽음이 선행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너 그 따위 식으로 살래?”라는 식으로 찾아와요. “너 그런 식으로 70, 80, 90 살아도 소용없어. 지금 죽어도 지옥이고 백 살 넘어도 지옥이야.”라는 식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엘리야가 찾아오지요. 그냥 강제로 빼앗긴 거지요. 강탈당한 겁니다. 그 다음에는 엘리야의 말대로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그대로 되었어요. 그 사르밧 과부는 땡잡은 거예요. 처음에는 섭섭했지요. 자기 것을 빼앗아가니까. 자, 여기서 한 번 봅시다.
과부 가족은 살고자 했고 선지자가 찾아와서 그 살고자 한 의도자체를 강탈해버렸어요. 강탈하고 강탈한 쪽에서 밀가루와 기름을 채워줬어요. 그렇게 되면 그 과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을 뻔 했는데 이제 살았다, 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뭐가 문제냐? “얘야, 이 마지막 빵 먹고 밀가루 떨어지면 우리는 이제 죽는 거야.” 할 그 때 그 살았다는 개념, 그 의미, 죽었다는 그 의미, 그렇게 있다가 진짜 빼앗아버리면 ‘이제 죽겠네.’ 하다가 양식 주니까 ‘살겠네.’가 되어버려요.
그런데 그 살았다는 것이 선지자가 오기 전에 살았다는 의미와 선지자가 찾아오고 나서 밀가루 통에 가득 밀가루가 가득 차서 살았다는 의미가 똑같은 의미로 고정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영생이 아니에요. 그러면 이것은 그야말로 일반적인 기적을 받은 거예요. 죽을 뻔 했는데 ‘휴, 한숨 놨다.’ 이렇게 돼버려요.
이것은 죽음 뒤에서 오는 기적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엘리야가 가고 난 뒤에 과부의 아들이 죽었어요. 과부가 화를 냈어요. 이럴 것 같으면 왜 왔느냐는 말이지요. 내 아들 죽일 것 같으면 왜 왔느냐. 그런데 죽고 난 뒤에 엘리야가 다시 그 집에 가서 몸 위에 자기 몸을 세 번 엎드려서 덮으니까 엘리야의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그것이 진정 산 것이 아니고 이제 원천으로 가야 돼요. 내가, 이 존재가 어디서부터 나왔는가? 없는데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십자가만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처음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그 십자가 앞에서 저주받아야 마땅하고, 심판받아야 마땅하고, 태어난 것 자체가, 태어나서 죄짓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태어나고 하나님의 의에 부합되지 않은 채로 태어나는 거예요.
출생 자체가 죄를 품고 태어나는데 그 품은 것이 예수님 앞에서 핍박이라는 것으로 관계 맺어진 겁니다. 그리고 태어났기 때문에, 죄지었기 때문에 기껏 평생 동안 하는 것은 자기자랑 만들기, 그 외에는 한 것이 없어요.
십자가는 바로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랑해서는 안 되고 예수님의 죽으심, 그것으로 자랑해야 될 이유가, 내가 몰랐던, 내가 없이할 수 없는, 네가 제거할 수 없는 나의 근원부터 나를 처벌해주니, 나를 죽여 버리니, 그러니 영원무궁토록 있는 것은 뭐밖에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는 거예요. 오직 그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엘리야가 찾아왔을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찾아와야 되는가?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찾아와요.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모세만 아무 소식도 없는 채로 40일 동안이나 시내산에 올라가버렸습니다. 아론과 백성들이 산 밑에 다 남아 있어요. 산 중간에 여호수아도 남아 있지요.
모세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산 밑에 대기상태에 있습니다. 40일이 지나도록 모세가 내려오지 않았어요. 보통 사람이 3일이 지나면 죽은 것으로 치고 지진이 일어났을 때 1주일이 넘으면 가망 없는 겁니다. 그런데 40일이나 지났으니 가망이 없어요. 이것은 죽은 겁니다. 짐승에 물렸겠지요. 썩은 고기를 찾아 해매는 하이에나한테든지 물려 죽은 거예요.
그래서 어쨌든 간에 여호와로 인하여 이렇게 나왔기 때문에 그 여호와를 만들기 위해서, 여호와를 보이는 형상화한 것이 송아지형상이었습니다. 금으로 송아지형상을 만들었어요. 보이는 겁니다. 보이는 것을 다 완성을 시켜놓고 여호와의 축제, 여호와의 절기, 주일이죠, 주일을 지킨 거지요.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이런 것을 지키듯이 여호와를 위한 축제를 즐기는 그 시점에 모세가 들고 온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양편에 말씀을 들고 옵니다. 말씀이냐, 보이는 것이냐. 이 세상은 말씀으로, 십자가사건에서 유발된 말씀으로 구성되어야 돼요. 왜? 예수님만 주가 되시기 위해서 세상은 있기 때문에. 말씀이냐, 그렇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구성되느냐.
그래서 그 돌판을 깨버리지요. 둘이 다 용납되지 않는다. 말씀이냐 보이는 것이냐, 둘 중 하나 해야지 말씀, 복음 이용해서 괜찮은 교회 만들겠다고? 어디서 되도 않는 속임수를 써요. 말씀은 말씀을 통해서 말씀으로 끝내야 돼요. 그 말씀은 이미 우리가 살아있으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매료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씀은 항상 ~아니다, 로 끝나버려요.
우리교회가 ‘이건 교회도 아니다.’ 할 때 그 때만 교회에요. 나는 성도도 아니다, 할 때 성도입니다. 나는 신자가 아니다, 할 때 신자에요. 일체의 우리의 모든 자랑거리, 경건해 보이는 모든 자랑거리를 전부 다 주님한테 양도해야 됩니다. 다 넘겨줘버려야 돼요. 장혜리 권사님이 젊을 때 부른 노래가 있어요. 잘 모르지요? 그런 가수가 있어요.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게 남아 있는 자랑거리를 다 주님이 가져가세요. 이것은 저주받을 인간이 만든 소꿉놀이 같은 겁니다. 이것 다 가져가세요. 이게 바로 애굽에서 가져온 우상입니다.” 자, 마지막으로 자랑거리, 자랑거리, 하지만 진짜 최후의 자랑거리는 뭐냐? 그것은 유월절에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12장 1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유월절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버지 죽기 전에 자식부터 먼저 죽이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도 마찬가지에요.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는 거예요.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식 이삭을 죽이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에게 마지막 남은 최후의 자랑거리는 뭐냐? 자기자식이에요. 자식 욕 하면서도 평생 벌어놓은 것을 전부 다 자식에게 못줘서 환장을 하지요. 효도를 해요? 효도는 없습니다. 내리사랑밖에 없어요. 저는 이번에 어린 친척들에게 세배를 받으면서 우리가 언제 봤다고 세배를 하느냐는 말이지요. 참 기가차서.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진해서 자발적으로 백번이라도 세배합니다. 그런데 언제 봤다고 사랑해요? 사랑 안하거든요. 억지라. 왜? 이게 법이거든요. 십자가가 눈에 보이기전에 했던 행세에요. 십자가가 눈에 밝히 보이기 전에 했던 행세. 내가 세배 안하면 남에게 욕 얻어먹겠지, 하는 그것. 나는 그래도 괜찮은 인간이야, 라는 그 나의 괜찮음을 자랑거리로 계속 유지하려는 그 심리가 계속해서 법을 양산하고 거기에 얽매이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에요.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거예요. 우리가 진짜 인생을 살면서 자랑거리를 따로 만들지 말아야 될 이유가 자발적으로 굴복하게 되면 그게 자유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면 되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용도에요.
이번에 처갓집에 가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연세 많은 처형께서 옛날이야기를 해요. 옛날에 자기가 젊을 때 진돗개가 있었는데 그 개가 그렇게 똑똑하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때 연세 많은 처남이 하는 말이 “진돗개 참 맛있대이.” 하는 거예요. 용도가 달라요, 용도가. 같은 진돗개인데 처형은 참 똑똑하다고 보고 처남은 참 그 고깃살이 맛있다는 거예요.
우리의 용도는 나에게는 일체 나의 의가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용도, 주님의 사랑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그 용도 외에는 다른 용도 없습니다. 죄를 지었기에, 죄가 있기에, 그리고 죽은 자이기에 오직 죽은 자로 간주하시고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이 내가 나를 지키려는, 안죽으려는 이것을 덮어버리는 거예요. 엘리야처럼.
덮치는 거예요. 덮치면 햄버거처럼 안에는 죄가 깔리고 위에는 하나님의 의가 깔리고, 그러니까 자랑할 것은……, 자기 죄를 왜 자랑합니까? 오직 자랑할 것은 나를 누르고 있는, 육적인 나를 누르고 있는 하나님의 의만 자랑하는 것.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 변형들, 다양체들이 오직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쏟아져 나온 겁니다.
이제 마지막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옛날로 도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면 뭐냐? 옛날에는 이렇게 살았다, 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이미 돌아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육이 있잖아요.
그러면 육으로 할 것이 뭐냐? ‘나 이렇게 살았다’를 보여주고, 그게 죄고, 그게 십자가를 유발하고 예수님을 핍박한 원인자였고, 그래서 이게 죄라는 것을 책망 받고 죽게 된 것을 오히려 감사해야 되죠. 그 일이 뭐냐 하면, “하나님, 이제 제가 다짐합니다. 다시는 내가 나쁜 짓 안하겠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주님을 힘들게 하고 주님을 모독하게 된 나쁜 짓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정신의 반대말이 청교도정신입니다. 십자가정신의 반대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그 정신, 그게 바로 십자가를 엿 먹이는 정신입니다. 그렇게 살면 그것을 잊지를 못하고 그것을 기억하거든요. 그것을 주시하고 응시하게 되고, 그것을 내 소유화시키고, 나는 너보다 더 착하고 믿음 좋다는 것을 남에게 과시하고, 그렇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왜? 그게 바로 죄니까요. 이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특별히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여러분 자식을 위해서 몸 바쳐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왜? 그게 우리들의 우상이기 때문에 절대로 거기서 못 벗어나고, 그 못 벗어남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그 못 벗어남을 통해서 십자가에 깔리시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던 대로 살면 그것이 죄가 되는 줄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그것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짓이고 피 흘리게 하는 일인 것을 저희들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십자가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 범사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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