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세계, 주님이 왔다 간 세계다. 주님이 계신데 우리가 그만큼 멀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마태복음의 관점 정리를 해야 한다. 율법, 천국, 아들, 족보, 이 모든 마태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로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별은 그냥 하늘에 박혀있어야 한다. 지구 주위에서. 하늘에 사셔야 될 별이 일상적인 생활 속까지 들어오셨다는 것은 없어야 될 인물이 생긴 징조다. 그전까지 없었던 인물, 신원조회가 안 된다. 위기다. 이 땅에 없었던 분은 없어야 된다. 근데 왜 침입하셨는가, 살처분 하기 위함이다. 모든 지구상의 인간들을 살 처분 하겠다. 살처분, 가축의 전염성 질병으로 감염을 막기 위하여 감염된 동물, 접촉한 동물, 동일축사의 동물을 죽여서 처분하듯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메시아는 시간의 주기를 통해서 오게 되어 있다. 그 옛날 유대인들이 고대했고, 예측했고, 믿었던 시간방식이었다. 시간의 동질성 앞에 인간은 차별이 없다. 인간의 동질성 앞에 신을 믿는 인간들은 모두 동일하다. 현대인들은 자기가 중심이 되어 이성적으로 따지고 나 홀로 게임을 즐긴다. 옛날 사람들은 불쌍한 역사에 묻힌 희생자들이라 생각하며....., 그러나 하늘에 있어야만 했던 별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그때나 지금이나 안정된 세계는 다 틀어졌다. 별이 사람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 없었는데 발생된 분을 찾으러 왔다. 그 분이 누구냐? 아기 예수다.
별이 움직인다. 지구 중심으로? 별이 움직인다. 예수님 중심으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하고 상대한다? 다른 예수 아닌가! 예수님한테 병 낫기를 바라며 오는 자들, 철없는 자들. 예수님은 지금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잘 먹고 잘들 살아라!” 하고. 태양을 중심으로 수금지화목토천해명, 9개의 행성은 소용돌이치며 따라가듯이, 지금 예수님의 중심이 어디에 와 있느냐, 땅에 와 있기에 별이 하늘에 박혀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인간만 멀뚱멀뚱 쳐다본다. 인간만 스톱되어 있다. 내가 있는 이 세계는 영원하리라. 풍랑마저도 예수님 중심으로 일어 제키는데도. 너무 살벌한 심판이 예수님 중심으로 쏟아지는데도.
모든 인간은 남자의 출생 속에서 태어났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돕기 위한 배필자라 했지만 그러나 깽판치기 위해 있다. 여자의 후손과 남자의 후손은 짝이 아니다. 이미 남자 속에 여자가 예속되어 있고 복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싸울 상대를 찾는다. 그래서 전체성(ALL)의 자식들은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손톱만큼도 하기 싫어한다. 남자는 자기중심에서 미진한 것을 하나 남겨 둔다. 예외라는 것을. 신이다. 자기중심을 인정해주는 시다발이 신을. 여자는 남자에게 속하고 남자는 신을 만든다.
그런데 여성은 남자한테 소속될 수도 있고 발을 뺄 수도 있다. 여성적 속성 때문에. 그럼 남자는 애가 탄다. 남자에게 속해야 하는 여성이어야 하는데, 활개 치며 지 멋대로 돌아다니는 여성은 뭐지? “여성은 없다.”라고 라캉은 말한다. 이러한 지 멋대로의 여성은 신과 이미 한 패가 되어 있는 남자의 전체성을 지적해주고자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아담 전체 인류를 대표하는 전체성은 남자에게서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의 여자의 후손은 남자의 후손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남자라는 전체성을 부숴버리는 존재로 등장하는데, 낯선 분의 등장, 여자에게서 태어난 여자의 후손은 남자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4:4).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그 분의 횡포로 살처분 당한다. 이제 우리는 죽었다.
마태복음 1장부터 시작되는 족보는 수상하기 그지없다.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다윗의 아내인 밧세바를 통해서 태어난 자식이 솔로몬인데, 우리아를 집어넣은 것은 우리아의 죽음이 생명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족보에 끼어 있는 우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의 오심의 의미를 미리 던져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반발이 없었다. 각각 나름대로 우리가 사는 이게 전부였다. 조율하고 소통한다. 족보부터 시작되는 마태복음은 이미 끝난 이야기다. 예수님은 절망적인 언급을 함으로 죽임 당하신다. 그러나 신원조회가 안 된다. 메시아가 아니다. 메시아는 유대인의 주기대로 오셔야 하기 때문이다.
육으로 난 육, 성령으로 난 육, 육으로 난 육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인간의 전체성에서 살면 된다. 그러나 성령으로 난 육은 육적인 본색을 다 드러내야 한다. 마태복음을 복음이라고 하는 이유는 전도, 설교, 예배, 헌금, 기도, 구제를 하지 말고 할 필요도 없다고 하니 복음이 아닌가? 오시는 분이 우리와 상대 안 하시기 때문이다. 울산의 태화강 대나무 숲에 까마귀들이 머물렀다 떠나는 것처럼 내 백성,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떠나겠다는 것이다. “너희는 절대 안 돼! 하지만 안 되는 걸 되게 할게.” 언약이다.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고 밖에 있는 것을 안으로 집어넣는, 마치 트랜스가 하는 일처럼, 의가 죄가 되고 죄가 의가 된다.
18장에서 “천국에서 누가 높습니까?”라고 제자들이 물어보면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세우신다. 어린아이는 몸은 있으나 자아가 없다. 그냥 맡기면 된다. 인간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선택 항목에서 골라잡았을 뿐이다. 그러니 죄인된 것은 어쩔 수 없다. 자학하지 말라. 자아가 아픈 것은 가짜 자아이기 때문이다. 진짜 자아는 하늘나라에 이미 뽑아놓았다(골3:3). 내가 가짜면 다 가짜다. 주께서 그렇게 유발시켰다. 이미 끝장난 마태복음을 가지고 마지막 때를 유발시켰듯이. 흠 없는 어린양이 왜 피 흘리며 죽었나? 우리에게 흠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 자신이 움직이면서 색깔들이 드러난다. 도미노게임처럼 하나가 쓰러지면 전체가 쓰러지는데 쓰러지면서 색깔로 어떤 메시지를 남긴다. 1장은 족보를 통한 육과 영의 색깔, 2장은 지역적인 색깔, 3장, 하나님 나라가 왔느냐, 4장, 권력을 누가 쥐고 있느냐, 5-7장, 예수님의 말을 통해서 다시 제자리를 잡음. 고맙게도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말을 다해놓으셨다. 우린 맞장구를 쳐주면 될 뿐이다. 8장, 누가 이스라엘이냐, 이방인인 백부장은 천국가고 나라의 본 자손들은 쫓겨나리라. 9장, 중심 되는 예수님이 어느 쪽에 붙는가. 10장, 새로운 이스라엘, 12제자를 뽑음. 11장, 세례요한의 역할. 12장 율법이라는 새로운 해석,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13장, 하나님의 나라는 말로 할 수 없음. 비유로 소개. 하나님의 나라는 없는 나라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출몰. 14장, 새로운 구원받는 자의 등장......,
잘 살고 있는데 주께서 오셨다. 이것이 잘못됐다. 배후에 있는 악마가 사주하는 대로 “천국까지 그냥 가는 거야.”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신원조회 할 수 없는 그 분으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었다. 엉망진창을 개선하지 말라. 앞으로 살면 살수록 엉망, 더 엉망, 더 엉망이 될 거니까. 사람 아닌데, 치매까지 걸리면 진짜로 사람 아니다. 마태복음이라는 소용돌이에 말려들었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고민, 어차피 가짜다. 진짜는 예수님께서 다 준비하셨다. 이스라엘로 인해 잃어버린 양이 되었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태어나면 안 되잖아. 족보나열을 보라.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예수님이 정지되어 있고 우리가 도는 것이다.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나머지기 모든 인간은 전체성에 속한다. 전체성은 가짜가 되고, 남성의 세계에 속했던 그것은 뱀의 후손에 합치가 된다. 천사도 동방박사도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의 등장 때문이다. 정혼한 상태에 있던 마리아와 요셉사이에 동거하기 전에 하나님은 남자의 세계에 개입하신다. 다윗도 두 인물의 역할을 해야 한다. 왕의 자격인 다윗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다윗으로. 영적인 우리야는 육적인 다윗에게 노선변경을 위해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예수님의 족보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다.
인식론은 진리가 아니다. 시작부터가 내가 아니기에. 우리가 말로 성경을 아무리 설명해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이 대신 해주신다(10:20). 인생이란, 이미 끝 지점에서 폐허된 세상을 되돌아보는 식으로 산다. 흙을 혼돈 속에 집어넣으면 의미가 생긴다. 법은 혼돈에서 질서로 잡힌다. 자아 존재의 의미가 생긴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윤리 도덕이라는 억압으로 자아의 존재의미를 찾고, 대화할 상대를 찾음으로 자기존재의 확장에 나서고, 그러다 어느 순간에 인간은 DNA의 운반체, 그냥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런 의미들이 환경을 만나면 권력을 낳는다. 권력은 늘 두려움을 동반한다. 끝없는 전쟁의 연속이다. 권력이 높을수록 더하다. 없음이 있음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이 계속해서 있음을 욕망한다.
권력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시당하는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보는, 눈에 보이는 권력체의 투쟁, 대기업이 그러하고 북한체제가 그러하고 신천지가 그러하고 병영이 그러하며 병원, 학교... 말할 것 없이 교회가 그러하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나라 자체가 권력체가 되어 있었다. 과거의 누적된 역사는 또 하나의 법을 만든다. ‘아, 그때의 그런 경험들은 내가 이렇게 되기 위한 합리적인 행동이었어. 그런 경험들을 해야 옳았어.’라고 소급해서 자기행동을 합리화시킨다. 그러나 또 다른 응시는 결코 우리 스스로 지울 수 없다. 내가 나를 찾을 수 없는데 다른 분이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 내가 왜 불안한지, 아무리 완벽한 것을 갖추어도 응시를 지을 수 없다. 인간의 씻을 수 없는 상처, 트라우마다. 원인도 결과도 알 수 없는 낯선 눈의 봄(Seeing).
모든 세상은 법으로 만들었다.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야 완전체가 된다. 온전한 의에는 심판이 따른다(마10:15). 처벌 자체가 법의 완전성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법의 완전성은 다 죽이시고자 하시는 살처분의 말씀이시다. 인자의 오심이 그러하다. 사람으로 올 수 있는 사람으로 오셨다. 그렇다면 기존의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았던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징일 뿐이었다. 이 상징은 실체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상징계는 실체계에 넘어갈 수 없다. 이 땅에서 주님 믿어서 천국 가고자 하나 십자가로 막아버린다. 천국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분, 인자다. 우리는 예수님의 작업의 원인이 되고 거기서 나오는 결실물로서 갈 수 있다. 갈 수 없는 곳에 가기 때문에 면류관도 반납하고 영원토록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이름이 아니고, 이미 우리는 죽었기에 산 사람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가는 것이다. 진정 살아 있는 주님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물로 있다. 주님께서 하신 것을 돌아보면서, “주께서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성전이라는 법을 건드셨기에 예수님을 죽인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법은 죽음을 유발하고 내부 고발자 가룟 유다를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민족이 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고 하신다(요12:24).
기존 자아는 권력에서 나왔기에 권력을 공격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높이뛰기에서 훈련과 훈련을 거듭해 바(bar)를 계속해서 높이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까지. 그렇게 해서 존재의미의 강도가 더 세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법 체제를 갈아버리신다. 존재의미가 무너지면 권력이 무너지기에 바리새인은 대든다(마8:11-12). 문둥병이나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이나 모든 병은 존재의 원인이 아니었다. 원인 없는 결과가 되어야 한다. 모든 원인과 결과는 예수님의 죄 사함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8:17).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나열해 놓고 회수해나가시는 식이다. 예수님은 그때하신 일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마12:16). 왜 그러셨을까? 이 세상은 마귀의 세상이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왜곡된 해석이 범람하는 세계. 예수님은 점점 더 위험한 세계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안다고 까불대지 말자. 어떤 일을 해도 먹히지 않는 세계. 주의 말씀대로 너무 일이 잘되고 있으니 그냥 웃자. 진짜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6-17). 내 뜻대로 구원되는 것이 아닌데,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에 다 들어있다(마11:25-27). 원인과 결과가 주님에게 있기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다(마11:28-30).
미래가 팽창된다.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비유에 대응되는 구체적인 인물이 없다. 시간 층의 배치로 천국을 설명하신다. 현재에서 점점 미래라는 시간 층과 미래가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과거를 공격하시는 미래의 횡포, 미래의 폭주라는 시간 층, 두 개의 시간 층을 배치하셨다. 두 개의 시간 층에 인간을 대입하면 인간은 감당할 수가 없다. 과거의 데이터가 층층이 쌓여 영향을 주니, 온 몸이 습관화되고 몸에 각인되어 있기에, 세포껍질에 불과한 껍데기지만 기억의 순차적인 것이 들어 있다. 오로지 과거에 연연해서 울고불고 할 뿐.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는 불확실성이지만 심판이 완료된 상태에서 일은 이미 벌어졌다.(마12:18-21).
과거에서 현재로 가는 시간 층에서 미래에서 현재로, 과거를 갉아먹는 시간 층으로 갈아타지 못하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온 몸으로 와 닿는 현실, 생활공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 이것마저 주님이 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주님마저 미래의 시간 층을 깔아놓으시고 일을 하셨다(마12:28). 돈 주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생활공간, 못 사는 것이다. 아무소용도 없이 세월만 갉아먹고 있다. 이미 기차를 갈아타고 노선 변경이 일어난 사람은 지금 어느 다리를 건너왔는지, 요나의 표적만을 확인하며 살 뿐이다.
수동적인 결과물로 받아들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증인밖에 안 된다. 능동적으로 자기의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방도가 있을까? 그냥 들이닥치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즐기라. 비유를 하신 분이 미래에서 오신 열차로 과거를 다 처리하시게 되어 있다. 능동적으로 사수하겠다고 하는 것, 가라지다. 대응할 수 있는 인물이 없는 비유, 시간의 연결고리뿐. “누구십니까?”라고 묻지 말라. 기차를 바꿔 타게 되면 내 자리는 없고 오직 주님이 넣어주는 자리를 배당받을 뿐이다. 할당받은 자리마저 내 자리가 아니라 주님의 자리다. 인간의 모든 기대성은 함몰되고 죽어버렸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는 선지자로 말씀 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전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5).
확실성 앞에서 성도는 수동적이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다. 예수님이 웃으시면 우리도 웃는다. 세상을 즐기면 된다. 말씀의 현실화를 목도하면 주님의 세세한 손길 앞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다. 과거의 시간에 미래의 시간을 투입하시기 위해 가져오신 겨자씨 한 알을 보라. 창세전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기 위한 말씀하심 앞에 우리는 개입할 것이 없으니 해석할 것도 없다.
마태복음 14장에서 다른 제자들은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했지만, 베드로의 순간적인 수동성은 나는 없고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되었다. 그러다 물 아래를 보고 무서워하는, 자기고유의 단독적인 생활공간으로 들어갔다.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수동성에서 자기를 사수하는 자기중심의 능동성으로. 예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 잠시 역할을 했을 뿐이다. 흉내 내지 말라. 신 스틸러 [Scene Stealer], 장면을 훔치는 사람일 뿐이다.
“다만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마14:36). 출애굽기의 접촉은 더럽다고 했는데, 기존의 세계를 부정하고 신뢰하지 않는 공백, 구멍이 생겨버린다. 다른 세계에서 통로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 낫는다. 이 땅과 저 땅의 통로다. 그 바람으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병 낫는다고 죄사함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대리변호로 죄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결별과정이 그려지는 경계선이 전진하고 있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새롭게 등장시킨다(마15:21-28). 16장에서 베드로를 반석이라 하셨다. 17장, 변화산 이야기. 점점 더 제자들과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다. 믿음이란 주님께서 갖다 줘야 한다. 다 차려놓으셨다. 그냥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마17:20).
그러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주님 소관임을 믿을 때 믿음인데 제자들은 믿지를 못했다. 세상 자체가 주님의 자작극이다.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 것도 달란트를 통해서 남겨야 하는 것도 양과 염소로 나눠져야 하는 것도 모든 것이 그렇다. 예수님 혼자서 설쳐대시므로 발생되는 요소들이다. 그것은 곧 주님의 활동의 열매와 혜택을 자기 백성에게 넘겨주는 혜택이시다. 내 쪽에서 나서서 뭘 준비해야 하는 것은 다 종교적인 것에 불과하다.
제자들과의 결별 수순을 밟으신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왜 주시지 않습니까? 니가 원하는 것도, 니가 원치 않는 것도 모른다. 이미 우리를 그 분위기 속에 집어넣었다. 그럼에도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는가? 예수님의 단독적인 돌파행위로 이루신 공생애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목자를 치니 양떼가 흩어진다는 그것을 우리 삶에 적용시켜버린다. 그 코스를 걸어가는, 동참하게 하는 주님의 반복적인 동행, 우리의 소소한 것을 제켜버리신다. 우리는 겁나는 것들을 피하는데 주님은 단독적인 거사를 다 이루시고 성사시켰다.
19장의 부자청년은 우리의 평소 속마음을 대신 다 드러내준다. 이 사건으로 우리가 심히 놀라고 근심했던 것처럼 제자들도 심히 놀라고 근심했다(마19:25). 3년 동안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가면 갈수록 모르겠다. 예수를 믿는지, 모르겠다. 주님의 거사만 뚜렷하게 보인다. “정말 주님 홀로 무엇을 하셨는가?” 주님께서는 다 떨쳐내신다. 부자청년은 재물이 심히 많으므로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가슴에 구멍(공백)을 내버리셨다. 십계명을 지켰다. 무엇이 부족한가?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다. 그럼 진즉에 11계명이 이 말씀을 넣었더라면 지켰을 것이다. 그럼 주님은 12계명을 내셨을 것이고. 그것마저 지키면 또 다른 것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아무리 한다고 한들 부자 청년 스스로 구멍을 낼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러하다. 결국 응시다. 미진한 것에 미친 듯이 쫓길 뿐이다. 미지의X, 어떤 초월적인 타자 앞에 미흡한 자들일 뿐이다. 우리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영생을 예수님이 대신 얻게 해주셨는데......,
부자 청년이나 제자들이나 우리나 매한가지로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과 “구원”을 동일시했다. 그러나 구원과 천국 가는 것은 다르다. 나만 천국 가는 것을 상정하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천국은 개인적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구원을 포기해야 들어가는 곳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해서 천국에 넣어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예정했다. 칼빈의 예정론은 상업적으로 이용했고 엄청난 오류를 범했다. 지체가 아니면 못 들어가는 곳, 아들의 나라다.
인간의 종교는 총 맞아야 된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못한다. 인간이 시도해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천국문제는 주님한테 맡겨라. 그래서 주님의 단독 범행이어야만 했다. 성령이 오시면 ‘아, 이래서 우리와 합세하지 못했구나?’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소유에는 자기의 자존심이 들어있고 미래까지 포함되어 있다. 결국 사람은 할 수 없으되(19:26). 주님의 재산이다. 주님은 진정한 자격자를 만드시는데 제자들을 실패자로, 못난 자들로 만드신다.
천국이란 자본주의 세상과 대척지점에 있다. 자본주의는 노동한 대가만큼 얻는다. 그러나 천국은 피로만의 구원이다. 그 피, 예수님의 노동이다. 그 노동으로만 되기에 개인의 노동은 탈색이 되어야 한다.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는 포도원에 몇 시에 와서 몇 시간을 일했든지, 대가는 주인 맘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일을 하든지 안 하든지 상관없다. 불러주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먼저 된 자가 되기 위해서 나중 되려고 꼼수를 쓰지 말아야 된다(마20:16).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아는가?(마21장). 때가 안 됐는데 열매를 찾으시는 일방적인 주님의 선포를. 주님의 횡포를.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은 주님 맘대로다. 그냥 가면 가는대로 가는 것이다. 무화과나무가 우리라면 무화과나무는 억울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린 억울해 했을 것이다. 그만큼 멸망의 문턱에서 살면서도 오늘 먹고 마시는 일에, 한 달 동안 일해서 버는 돈에 목숨 걸고 있으니까. 주님이 주님을 위해 저주하시고자 하시면 무화과나무는 주님을 위해 저주받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위해 멸망당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우리라고 제외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미래의 완료에서 말씀하시고 사람들은 과거를 바탕으로 해서 현재를 이루며 미래를 염두에 두고 있다. 두 개의 시간 층에서 발생된 갭은 미래에서 미사일을 쏘아대는 이스라엘의 심판의 정당성으로 말미암아 입을 다문다(21:43-44). 이스라엘이 왜 멸망해야 하는가? 이스라엘은 인간을 대표해서 인간이 구원될 수 없는 유일성을 보여줘야 한다. 또 하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속에 잠입하신 인자되신 분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다윗에게 언약하신 것을 이루시는 여호와의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언약을 포장하기 위해서 역사를 전진시키고 언약 포장이 다 되면 역사는 없애버리시는 것이다. 그것이 언약의 하나님의 주특기다. 툭 던져놓고 회수하신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구약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을 끄집어낼 수 있다. 미래의 긴 그림자다. 시간이 인간을 잡아먹을 때, 인간의 모든 아름다움은 시든다(사40:6-8). 이것을 구체화시켜서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포장지를 벗기면 새로운 이스라엘, 십사만사천이, 남은 자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신 것처럼 동일하게 성령을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왜 있습니까?” “주의 그림자입니다.” 미래에서 과거를 보는 안목,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이 오시면 그 날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교회가 등장한다. 이스라엘 속에 교회가 있었다. 십자가로 하나 되는 교회를 등장 시기키 위해 이스라엘은 철저히 무너져야 한다. 그 예수님의 단독 범행을 제자들은 몰랐다.
천국의 기능은 참석 못할 자를 넣어준다(마22:1-14). 예수님이 찾아서 그 사람이 포섭되면 그게 천국이다. 미래에서 바라보면 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이 얼마나 고귀하고 귀한 보석 같은지를 바쁜 일상 땜에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이 멸망해야 될 정당성을 마련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면서 노골적으로 혼인잔치에 참석할 사람을 채운다.
천국의 기능은 뉘우침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21:31-32). 이스라엘을 가리는 이스라엘이 빠지면 이스라엘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 천국 만들기 프로젝트에 엉겁결에 남아 있는 십자가마을......,
세금문제도, 부활문제도, 혼인문제도, 미래의 관점에서 본다(마22:15-33). 니 맘대로 하세요. 그것들이 주님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관심사를 하나님한테 두라. 고민, 걱정거리, 천국을 가리는 스크린이요, 가짜 이스라엘밖에는 안 된다. 7명의 남편이 있어도 재미없는 천국! 그래, 니체처럼 재미없어서 천국 안 갈 것이다. 세상의 재미는 누적된 체험담일 뿐. 한 때의 기분으로 날아가 버린다. 우리의 일상은 주님의 고난으로 다 채워진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힘든 것임을 보여주는 재료거리다. “연극이 끝난 뒤에” 한때였다. 연극무대장치였다.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없는, 쓸데없는 짓들은 외식으로 끝난다(마23장). 죄라는 것도 모르고 죄를 지을 수도 없고, 지옥 가는 이유도 모르고. 지옥 가서야 주님의 보내심을 안다. 신원조회 안 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다. 억울한 피가 있을까? 형 가인에게 돌로 맞아 죽은 아벨의 피조차 억울하지 않다. 아벨은 죽고 가인이 번창한다고 해서 아벨만 손해라고 하는 생각은, 인간 스스로 자기만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는 관점에서 봤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의 목 베임도, 아벨의 피 흘림도, 사가랴의 피 흘림도, 모두 예수님이 피로써 오심을 증거 하는 예수님의 긴 그림자다(마23:35). 자기밖에 모르는 세계에서 팍팍 티가 나도록 주께서 일을 하신다. 우린 그 세계 안에서 외로울 이유가 없다. 주님의 지시받기에 바쁘니까.
상징은 실체가 아니고 실체는 따로 계신다. 그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상징관계로 만나신다. 믿음이 아닌 것을 통해서 믿음을 확인한다. 우리가 믿지 말아야 될 것을 주님 쪽에서 친절을 베푸셔서 무너뜨려주신다(마24장). 성전을 믿지 말라. 성전을 믿는 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니었음을. 성전에 종사하는 자들은 직업꾼들이다. 그러기에 목사, 장로, 집사.. 교인들 믿지 말자. 사기꾼들이다. 사람을 믿지 말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기대하거나 믿어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은 집단 무덤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로 시신이 있는 무덤이다. 큰 성 바벨론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 무덤이셨다. 파르테논신전의 기둥 같은 종교적인 습관과 관행을 믿지 말라. 구원자를 믿지 말라. 과학적인 대상을 믿지 말라. 과학은 발전된 것이 없다. 단지 기술만 발전했을 뿐이다. 천하에 무너지지 않은 것 같은 해, 달, 별도 무너진다. 결국 우리가 믿었던 마지막이 다 무너질 것이다. 시간을 믿지 말라. 특정 시간에 믿으면 이거는 믿음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확장일 뿐이다. 자아를 믿지 말라. “죄였습니다. 구원을 틀어막고 예수님을 죽인 공모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내가 복음을 믿었다는 그것이 안치되어 있다. 자기를 짓밟는 나, 짓밟히는 나, 이 두 개의 자아가 생생히 살아있다. 아무리 50년 믿었다 할지라도 결국 내가 신이었다는 것은 폭파될 수 없다.
그렇다면 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무너뜨리고 남는 것은 없는가? 마지막 남은 것이 있다. 지극히 작은 권력이. 없는 권력인데 주님의 발굴과 노력과 애씀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구원은 누가 받는가? 지극히 작은 자가 받는다. 나 스스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새로운 피조물. ‘나’가 있어도 ‘나’를 부정하는. 주님이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주님은 우리보고 했다고 하지만, 우린 어느 때에 했나이까? 할 뿐이다(마25:33-46). 유일한 권세는 영생을 주시기로 하신 자들을 죄의 권세에서 뽑아내시려고 거기에 힘을 다 쓰신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작품으로, 주님의 결과물에게는 막 사는 것 외에는 달리 없다. 권세는 딴 데서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훌륭한 사람이다(요8:1-11). 나와 남들만 있는 시선 속에서 제 3의 시선이 있었다. 여인은 너와 나로 판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제 3의 트라이앵글판정을 받아야 한다. “없나이다.” 그들은 없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서, 살처분 되어야 할 자들이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라!” 십자가의 의를 위해 너는 재료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를 구원할 수 없도다”(마27:42). 침착하게,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명석한 판단으로, 아무리 따져 봐도 예수님은 실패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봐도 그냥 죽은 것이다. 뭐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나는 안 죽어. 부활될 거야”라고 하는 신천지나 안산홍이나 이런 집단에 우리 또한 동조하며 묻혀서 산다. 보고 믿겠다는 소비자를 위해서 체험마케팅도 불사한다. 주님은 죽으셨는데....., 희롱과 조롱을 우리 주변에서 매일같이 쏟아지게 하시고 시냇물 속 바위에 붙어 있는 다슬기 같은 자기 백성을 권세로 다스리시며 주워내신다.
부활의 의미는?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러워하면 범사에 감사가 날아간다. 왜? 우리는 죽음마저 이겨서 생명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든지..그 어떤 잘난 자를 봐도 느긋한 심정. 공동묘지를 돌아다니면서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말자. 파마머리 잘나왔다고 해서 영생 얻는 것이 아니다. 요새 사람들이 환장하는 것을 구경이나 하자. 주님은 주님의 권세로 우리를 옴팡 뒤집어 씌우셨다. 나에게 다시 되돌아 올 것이 없는 한없이 작은 권력이다. 그러나 천국의 능력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밤하늘에 붙어 있는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거렸다. 별들이 쏟아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그렇게 마당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진정 만남이 이별보다 쉬운 것이었나? 마태복음을 열면서부터 예수님과 우린 이별을 한다. 긴 그림자를 따라 가다보면 이별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와서 자리 잡고 동행하고 계셨음에 눈물 난다. 요한계시록이 그랬던 것처럼 마태복음 또한 다 이루신 말씀을 가지고 일하시는 주님의 작전에 말려들었음에도, 기필코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주님께 사랑받아 보겠다고, 구원되어보겠다고, 천국에 가겠다고,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으니 주님이라도 알아달라고, 세상에서 힘들게 살았으니 저 세상에서는 부귀영광을 누리며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창녀 짓을 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창녀의 낯을 가지고서.
돈 있는 것만이 권력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가난도 권력이었다. 가난이라는 권력에 굴복하여 아부하고 쪼그라들고 포기하고 벌벌 떨었다. 평생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생활환경 속에서 갑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해서는 안 될 질문이었다. 눈을 떠보니 오직 주님만이 갑이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갑 같은 인생이 펼쳐진다. 관점의 문제다. 그 누가 새로운 관점으로 세계를 볼 수 있을까?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이는 소용돌이를....., 주님에 의해서 한없이 작은 자가 된 자에게만이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세계가 열린다. 한없이 작은 권력, 그것은 주님의 권력이다. 내가 잘났네, 니가 잘났네, 하고 싸움질하는 정당, 분파, 혈육적인 싸움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권력이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마태복음을 준비하시고 전해주신 이근호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번에도, 만나면 잠 안 자고 늦게까지 수다 떠느라 강의 시간에 졸았다고 핑계를 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