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아

수련회를 다녀와서 170113 이미아

아빠와 함께 2018. 1. 16. 10:09
2017-01-13 00:47:19조회 : 539         
수련회를 다녀와서..이름 : 이미아 (IP:122.43.188.127)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조작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마치 야곱이 요셉을 사랑했다가 요셉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 죽었다가 다신 산 요셉으로 인하여 야곱 자신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내 나그네의 세월이 130년이니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다. 그 무엇을 사랑했던 간에 그 사랑이라는 것은 한낱 두려움에 불과했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어책에 불과했음을, 그 험악한 세월로 인하여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토해내게 한다.

 

대낮에 소주 됫병을 마시고 땅이 지진 난 것처럼 갈라지고, 하늘의 별들이 바로 눈앞에서 보이고, 신물이 다 넘어오도록 밤새 토했다 할지라도, 그 다음 날이면 습관처럼 일어나 해장국 챙겨먹고 또 다시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그 험악한 세월의 반복, 이것이 현실이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공포심을 이기기 위해 술을 찾고, 종교를 찾고, 사람을 찾는다. 한 번 맛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는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그 무엇에 취한 자기를 감추기 위해서 아픈 속을 채우고 성실하게 출근을 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 때문에 죽는지, 그냥 앞을 보고 달리기만 한다.

 

이 현실은 오로지 보이는 자연의 움직임뿐이다. 눈이 오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이 자연 세계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거나,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거나, 눈사태가 일어나거나,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은 겸손을 떤다. 죽을까봐서. 그냥 자연스럽게 늙어 죽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죽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죽어야 될 이유도, 죽어야 될 때가 아닌데, 생각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

 

그래서 이 세상이라는 자연에 종속되어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은 답답하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 할지라도 조용했다가도 한 번 성질부리면 겉잡을 수없이 파괴적인 그 자연을 다스릴 길이 만무하다. 결국 인간은 죽음을 유발하는 현실 앞에서 새로운 현실을 확장시킨다. 유토피아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자기의 내부에서 확장된 새로운 세계, 여전히 자신의 꿈을 바탕으로 한 내부와의 연결고리로서의 세계다. 외재성을 띤 그 세계에 입문한다. 어느 종교든 자연을 이기고 영생하는 길이 열려 있기에 귀를 세우면 들리고, 눈을 뜨면 보이고,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고, 발을 움직이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 종교의 세계. 그 세계는 천국의 지름길이고, 극락의 지름길이고, 유토피아의 지름길이다.

 

좋은 게 좋다고, 그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더라도, 이제부터가 문제다. 골로새서가 눈 앞에 마법처럼 펼쳐졌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3장 3절의 말씀을 툭하고 던지신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왠지 냉정하셨다. 살기 위해서 왔는데 죽었다고 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크게 거슬리지 않고, 세상에 맞춰서 살다가 죽음 이후를 대비하고자 교회를 찾았던 18살 고2학생은 어찌 보면, 주님이 따져보신다면 몸만 성장하고 머리만 커져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 자연스러운 단일현실 밖에는 없었다. 천국마저도 이 단일현실의 확장, 자기가 상상한 세계, 자기를 동일시한, 자기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이기에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바깥에서 뚫고 들어온 다중현실이 있으리라고는 눈치 챌 수 있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도 나를 위한 확장이었고, 죽어서 가는 천국도 나를 위한 확장이었다. 갇혀 있는 이 단일현실 속에서 바깥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고, 고작 빠져나간다고 하는 것이 오롯이 자기가 살아있는 세계를 확장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단일현실이 아니고 다중현실이라는 것이다. 장소 없는 장소다. 아토포스Atopos다. 어느 곳에 고정되지 않고 부유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우리가 알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바깥에서 뚫고 들어온 구멍이 없이는 알 수가 없는. ‘따끔!’하고 살을 뚫고 들어와서 뭔가 내부 속으로 액체의 흐름은 느꼈는데, 순간 지나고 나니 흔적이 없다. 그 구멍의 정체는 뭘까? 그 구멍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뚫고 나갔다가 성령으로 들어오신 구멍이다.

 

그래서 자연의 파동에 움직일 수밖에 없는 단일현실만이 전부인 인간 세상에서는 별미 바쳐서 얻어낸 도둑놈 야곱의 복 밖에는 없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고, 크게 번창하고, 성공하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지옥가고 있으면서도 큰소리치는 코미디 같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몰고 오신 현실, 악마의 출현,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빈 무덤, 부활, 재림...다중현실은 성령의 눈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세계다. 따라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다중현실에서의 복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1+1=2고 1+0+1=2다. 하지만 0이라는 존재의 밑, 가시적인 1밑에 0이 깔려 있음으로 처음부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그냥 살다 죽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심판이라는 것 자체도 그 기준점이 나만은 살아 있어야 된다는 선악체제의 심판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말하는 심판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전부 다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왜냐, 그 물속에 풍덩하고 뛰어 들어 가신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례요한도, 유대인들도, 그 어떤 인간도 알 수 없는 아버지와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심판이 있었다.

 

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가? 심지어 열 두 제자들도 몰랐다. 예수님은 인간의 언어, 의미, 개념, 기호를 차용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하셨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같은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늘 충돌과 대립만 할 뿐이었다.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보면 소돔, 애굽, 갈보리가 나오는데, 어떻게 한 장소를 세 장소로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은 단일현실을 못 이긴다. 인간은 그냥 자연이라는, 물질이라는, 몸이라는 단일현실 속에 갇혀 있고 끌려가야 된다. 사건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는 그 다중현실을 절대로, never! never!다. 몰라야 된다.

 

왜냐하면 알 자들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흙탕물 뒤집어 쓴 가운데서 그냥 주님이 “너! 너! 너! 나와!”라고 부르시면 나올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은 존재의 연합이고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나라는 자아가 잘했기에 이 정도 살고 대우받는다는 이 인식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 내가 잘해서 권력을 쥐고 그 권력은 이 세상 사회에서 하나의 위치를 점유한다. 그러나 수상한 권력이 나를 호명하게 되면 성도가 되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권력은 죽음의 권력으로 말미암는다.

 

주님은 이 세상을 사건으로 본다. 과학이 증명하려고 하는 입자로 보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DNA를 쪼개도 가르쳐주지 않는 고집과 반항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성장하면서 입자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도 설명할 수 없다. 진짜 과학이라면, 인간에게 과학이 전부라면, A에서 B로 가는 과정을 설명해야만 한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도 인간은 죽음을 생각한다. 겨우내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가지 속에서 초록빛 새순이 돋는 벅찬 새로운 생명을 보면서도 죽음의 그림자를 떨쳐낼 수 없다. 정말로 “인간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 참 가상하지 않습니까?”라고 신께 되묻고 싶을 정도로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죽기 위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 죽음을 생각한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어떤 소녀에게 이웃집 화가인 할아버지는 담벼락에 마지막 잎새를 그렸다. 그 소녀가 그걸 보고 다시 살 희망을 품고 일어나길 바랐기 때문이다. 인간은 각자 저마다의 마지막 잎새를 늘 현실에 염두 해두고 그 잎새가 떨어지지 않기를, 죽음이 찾아오지 않기를, 아예 죽음이 없기를, 죽어도 다시 살기를 염원하며, 바람이 불어도,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떨어지지 않는 담벼락에 그려진 마지막 잎새를 찾는다. 종교다. 종교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면 뭐하겠는가? 자기 죽음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는데. 입자가 죽지 않으면, 천국 가려는 입자가 죽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나라는 입자덩어리가 그대로 연장되어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A에서 B로 가는 과정을 설명할 수 없듯이, 나뭇잎이 변하는 그 과정을 설명할 수 없듯이, 죽음이라는 해결책은 없다. 주님은 죽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을 일으켜서 생성된 것만을 구원할 뿐이다. 인간 구원은 없다. 십자가 사건으로 죽으신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사야 37장 36절에서 185,000명을 죽였어도 하나가 죽은 것이다. 입자(존재)들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하나로 본다. 입자를 사건화 시키면 예수님만 입자가 된다. 사건이 아니면 생성될 수 없다. 예수님의 입자는 언약에 위배되면 다 죽인다는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죽인다. 양이 죽었는데 왜 사람이 사는가? 사람이 산 게 아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해 이스라엘 장자가 살았다. 그 장자 안에 어린양의 요소가 살아있기에 사는 것이다.

 

사건이 아니라 입자(존재)였을 때는 곤고한 몸이었지만 예수님의 사건의 몸은 물질성인 몸에서 벗어나니 지금 죽어도 좋은 몸이다. 아니 이미 죽은 몸이기에 입자 자체를 양도하고 날마다 죽고 사는 사건의 반복이다. 성도는 자기에 대해서 손대면 안 된다. 멀리서 보면 다 신앙인이고 다 똑똑하고 다 믿음 좋고 다 복음적이다. 그러나 10미터, 8미터, 5미터, 3미터, 가까이 오면 올수록 조작된 자신을 감추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우리라는 입자가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일을 하시는 형식으로 삼으신다. 죄가 재료가 되고 거기서 의를 생산하시니, 자기가 자기를 손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손대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손대주는, 이미 자체발광하고 있는 선악과가 있다.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간 얄미운 악마! 자기를 사랑하는 선, 자기를 사랑하는 악, 선과 악은 통합될 수 없다. 자기 사랑이라는 악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악마는 선과 악을 통합시켜 버리고 사라졌다. 유령처럼. 선악체제를 심어놓고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로마서 7장 25절에서 사도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통합될 수 없는 이 사망이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다. 욥 또한 자기 자신이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왜 몰랐는가? 선악체제를 심어놓고 간 악마를 놓쳤기 때문이다. 자기는 고난받을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선악체제의 의식으로 살고 있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의 일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죄를 유발시키시는데, 거기에 꼭 필요한 조력자, 뱀의 후손, 악마다. 악마는 예수님께 대드는 일을 꾸준히 해야 한다. 주님은 악마를 잘 조련된 셰퍼드로 만들어서 물어! 물어! 물라고 하신다. 우리는 단일현실 속에서 꾸준히 입자로 버티려고 하지만, 예수님의 일은 장소를 지운다. 단일현실 속의 장소를 지우고 사건화 시킨다. 따라서 물질이나 물성에 현혹될 필요가 없다. 사건이기 때문에.

 

악마는 욥의 멀쩡한 피부를 종교(종기)덩어리로 만들어 놓고 사라졌다. 신에게 다가서야 하는데 물체화된 매개물을 가지고 나갈 수밖에 없다. 자연에서 자연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은 자연의 확대일 뿐. 선과 악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연에 속하지 않았는데 뭔가 빠져버린 그 무엇, 악마는 그렇게 하나님 보좌 앞으로 도망쳤다가 필요조치에 따라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주부는 살림 잘하고 남편은 돈 잘 벌어다주고 자식은 공부 잘하고...아무 문제없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이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문제없다. 그저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나만을 위한 삶을 절대로 놓치지 않기 위해서 수축하고 또 수축한다. 단편적일 뿐이다. 그게 단편적일 뿐이고 전체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행복한 가정은 아마도 지옥의 아랫목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성경만이 전체적이다. 주님은 A에서 B로 달라지는 이 과정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고자 하시는데, 입자라고, 존재라고 우기는 인간들은 여기에는 관심이 없다. A에서 B로 간 것으로 끝났다. 악마가 심어준 원인결과에 정신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없는 존재다. 없음에서 사건으로 말미암아 없음으로 끝난다. 없음에서 사건이 투입되었다고 있음으로 끝나면 안 된다. 그래서 1+0+1=2, 이 0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성된 것이므로 그리스도만이 입자가 될 수 있다. 성도는 불러주신 주님의 주체로, 주님의 권력으로 위치의 역할만 할 뿐이다. 손이면 손으로, 발이면 발로, 귀면 귀로...각각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어릴 때, 가장 갖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앞에 공주그림이 그려진 자석필통이었다. 남자는 로봇 그림이 그려진 자석필통이었고. 앞뒤로 열려지는 자석필통 안에 연필이 뾰족하게 깎여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그 연필들을 보면서, 어떤 연필을 쓸까 고민하다 맘에 드는 색깔로 한 자루의 연필을 꺼내는 짝꿍을 본다. 짝꿍의 자석필통 안에 들어있는 뾰족하게 깎여진 연필심. 그 연필심을 이번 강의에서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버티기 위해 똘똘 뭉쳐져 수축된 자아로 표현했다. 세상은 변함없이, 설명할 길이 없는 구조를, 예를 들면 왜 사람의 키는 4미터가 되면 안 되고 8미터가 되면 안 되는가?라고 했을 때 평균적으로 1미터 70센티미터가 자연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합리화시키고, 정당성으로 몰아세운다. 독자적인 방어기술만이 발달되어 수축되고 응축되어 천상천하유아독존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를 않는다. 십계명의 말씀에 순종이라도 하듯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나에게 두지 않는다. 뾰족한 연필심에 찔려본 적이 없다. 너무 뾰족해서 연필심 끝이 살에 박혀 본 적이 없다. 남만 찌르기에 바쁘다.

 

이 단일현실 속에 다중현실로 오신 예수님은 맞아 죽었다. 예수님의 입자가 십자가 사건으로 개입되면 그 안에서 생성된 우리는 흩어진 총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된다. 창세전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코스대로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거물로, 대리물로 산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골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랭 바디우’라는 철학자는 예술, 종교, 과학, 정치, 이 모든 것이 파도처럼 흘러 신과 연결된다고 했다. 그 무엇을 해도 신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악마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신처럼 된다고 하고 떠났고. 이 둘을 연결시킬 수 있다면 남은 것은 악마처럼 살면 된다. 신을 찾아 신에게 힘을 차용해서 마귀가 저질러놓은 그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럼 끝난 것인가? 이 문제의 해결책을 위해서 주님은 자리를 마련하셨다. 빛이 오매 더 어두워지는, 실컷 어둡게 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드셨다. 또 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에 비해 폐쇄적 원칙이 주어진다. 이방나라는 혈통과 자손으로 이어지고, 약속도 없다. 언약도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면 안 된다. 이 땅에 언약을 펼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안 되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킴으로 언약을 증거 하는데 성공하셨다. 아이러니다. 언약의 자리는 인간이 만들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시기 위함이다. 주님은 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새로운 나를 원하신다. 아브람 안에 아브라함을 뽑아내셨듯이. 욥 안에 욥을 구원하셨듯이. 이스라엘 안에 참 이스라엘을 만드시기 위해서 멸망시키신 것이다. 새로 생성된 새 사람은 옛 사람에 담긴다.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시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우린 은유고 비유다. 지정해준 위치고, 역할이다. 2000년 기독교 역사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사람이라고, 인간의 자존심을 추켜 세우고 건방떨게 만들었다. 얼마나 다들 잘 속아 넘어갔는지, 여전히 인간은 교만하다.

 

아브람이라는 자리가 꼭 필요했다. 아브라함은 아브람을 회고한다. 아브람이라는 죄책감이 없다. 아브라함을 만들기 위해서 아브람이 재료로 사용되어진 것이니까. 언약의 자리는 영원한 자리다. 할례 언약의 연속선상의 제사법, “화목제물”이 되는 것이다. 나는 죽어도 자리는 계속 남고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또 구원 받는다. 언약을 완성하신 토대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남.”(골1:18)이다. 죄 많은 이 세상을 다 모아서 주님의 자기 터전으로 삼으신다. “너희들은 나를 죽여라!” 죽으면 끝나는 이 세상에서 구멍 뚫고 들어와서 다시 산다. 악마마저 이겼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제사를 시켜서 했는데 실패했다. 소제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실컷 드렸는데 그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신다. 시켜서 했을 뿐인데 왜 실패했는가?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나간다는 것이 실패였다. 이미 모든 것을 주님이 주신 것인데 그걸 몰랐다.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이 마련해주신 제물을 드려서, 그 제물이 내 대신에 죽어가고 있음에도, 상한 심령은커녕 내가 제물을 바쳤다는 그 행위에만 마음이 가 있었다. 태우고(화제), 흔들고(요제), 높이 들고(거제), 붓고(전제), 아무리 해도 이미 주님이 주신 것을 믿지 못하고 자기 쪽에서 뭔가 바친다고 오해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실패가 왜 성공인지를 밝혀야 한다. 출애굽기 24장 6-8절에 보면,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율법을 주셨다. 율법을 위반하면 제사를 드린다. 제사가 끝나고 난 뒤에는 백성에게 피를 뿌린다. 이 피는 율법과 제사의 완성이다. 이 피 뿌림에 백성들을 합류시킴으로 율법을 인격화시키고 제사를 인격화시켰다.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의 차이점은 거룩함에 있다.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거룩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언약은 이미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맺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과 언약했다는 것은, 언약은 더러움을 확장시켜서 무엇이 더러운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시는데 그 취지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율법도 지키고 제사도 드리면 한 거룩 하는 줄로 착각했다. 어쩔 수 없다. 언약 대상자요, 언약 완성자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은 언약 계약자인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아시는 일이심으로. 이스라엘은 들러리였다. 이스라엘이 들러리였다면 모든 인간도 들러리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자기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17:10).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시고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신다. 찬양할 자들이 필요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그러나 하나님 쪽에서 화평을 내밀어도 인간 쪽에서 거부한다. 왜냐하면 주도권을 빼앗기기 싫다는 것이다. 인간은 갑질을 원하지 화평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화목제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 시대에 우리 자체가 화목제물이 되도록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도바울처럼 화목제물 자체로 무빙moving,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 완성된 입장에서 십자가는 무한반복이다. 우리가 행할 세례는 없다. 물세례-불세례-성령세례. 우리가 하지 못한 것을 예수님이 다 하셨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하신 일이다.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노리고 침투시킨 새 언약이다. 예수님의 현재성은 성령이시다.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셨다(렘31:31). 전에는 문자로 왔던 것이 이제는 내부 안에서 발길질을 해댄다. 말씀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기에 본인이 만들어가는 인생이 아니었다. 복음을 생산하시고, 성도를 생산하신다. 한 번의 세례에 다 포함되었고 종결되었다. 시간 자체가 날아갔다. 세례의 성질과 성격을 무한리필해서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연합이다. 시간개념이 없다. 저주와 축복, 지옥과 천국이 무한반복 된다. 인간이 죽고 난 후에는 무한시간을 정지시킬 수 없다. 시간을 걷어치우면 성질만 남는다. 불멸이다. 저주와 축복, 지옥과 천국이 무한반복 된다.

 

백성은 없다. 언약이 백성을 생산해낸다. 다윗언약을 보면 왕이 먼저 등장하고, 왕을 보고 계약하고, 죽은 백성에서 백성을 끄집어낸다. 바짝 마른 뼈가 살이 붙듯이. 천국 한 사람을 보고 계약하고 직접 주님이 칩을 장착시킨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0-31). 예수님이 살다 가신 그 동일한 단일현실에서 사도바울도 똑같이 가게 하시고 오늘날 성도도 그렇게 하신다. 미움과 핍박과 고난...세상의 전체성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이 말씀의 정당성을 이해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팽창되고, 모든 것을 성육신으로 수축시키고, 다시 성령으로 팽창되고, 주를 고백하는 교회, 성령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본다. 그렇다면 뭘 전달했고 뭘 집어넣고, 실내용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피, 피 안에서 완성, 왜 피냐, 그 피는 어디서 구하느냐? 구약이 있고 골로새서가 있고 요한계시록이 있다.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이 나온다(계11:19).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실패다. 우리를 참여시키는 식으로 하나님이 드리는 제사만 남는다. 성전 완성에 꼭 필요한 것이 십자가 피로 완성 되었다. 모세는 성전 운용방식을 피 뿌림으로 하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에게 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제사를 드린다. 이 제사의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들을 중보자로 내세우신다. 중보자를 잊어버렸을 때 죄가 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그래, 이제 교회되었으니 골로새서에 나오는 것들을 지키면 되겠네?” 조작한 윤리도덕, 빵꾸난 스타킹으로 지키는 것, 지키지 말라. 율법의 완성에서 와야 한다. “예수님이 다 줬습니다.” 일체 사랑이라는 것을 인간은 할 수 없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최고다. 성령이 주인공이 되어서 나를 매일같이 죽인다.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라면 율법의 기준은 예수님의 공생애다. 우리는 안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우리에게 적용시키신다. 애굽에서 자기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처럼, 소몰이하듯이 인도하시면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이 죄로 튀어나온다. 그래서 사도의 모든 권면은 사랑을 위하여 율법적 기능이 된다. 죄인이라는 최고의 사랑을 위하여.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2:8). 매일같이 조작된 단편적인, 전체를 커버할 수 없는 구멍 난 스타킹. 그냥 있으면 모른다. 스타킹에 구멍이 났는지, 안 났는지. 신어봐야 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문안한다. 개개인의 역량을 따지지 않고 주님이 주신 한 장의 담요를 덮고 있는지를. 못 먹고 못 살았던 그 시대에는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이불 한 장으로 온 식구가 다 덮었다. 그 이불은 말 그대로 덮기 위한 이불일 뿐이었지만, 주님의 담요는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담요다. 사도바울, 두기고, 오네시모, 마가, 아리스다고, 유스도, 마가, 에바브라,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 누가, 데마, 아킵보.. 함께 덮고 있다. “우리 같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맞죠?” “사도바울과 같은 담요를 덮고 있는 것 맞죠?” 이들은 그냥 사람들이 아니다. 주님의 주체가, 주님의 권력이 정해준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소개한다고 해서 이 사람들을 본받으려고 하지 말라.

 

멈춰버린 시간 속으로 시간이 흘렀다. 어쩌면 시간이 흐른 것이 아니라 무한반복이 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중현실에만 초점 맞추고-골1,2,3장-마치 단일현실에서 빠져나온 듯이 생각되었건만, 역시나 사도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해서 우리의 쓰레기 같은 본성을 알아차리기도 한 것처럼 4장에 와서 우리의 관심사인 부부관계, 자녀관계, 종과하인관계를 언급함으로 다시 우리를 실체로, 단일현실로, 자연계로, 신체로 돌려보낸다. 그럼에도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좌석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주님의 주체, 주님의 권력으로 형성된 위치를 지정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은 다시 실체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세상 살면서 관계가 어려울 것이 없다. 죄인 값을 하라는 것이고, 단일현실에서 죽으라는 것이다. 인간은 살 가치가 없다. 우리가 죄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잊고 불평한다. 왜 이렇게 춥냐고? 그러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골로새서를 본다면 십자가의 능력이요, 복음의 능력이다. 마지막 당부도 하신다. 죄인이라고 한다고 해서 믿지 말라는 것이다. 죄인이라고 하는 그녀를 믿지 말고,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그를 믿지 말라고.....,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사랑한 적 없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외에는....“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그러나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1:2-3).

 

 이근호 (IP:119.♡.94.40)17-01-13 07:19 
수학 참고서를 사게 되면 제일 뒷면에 정답지가 들어있다. 드디어 정답지가 나왔다. 이 정답지 들고 수련회 강의를 다시 보게 된다. 강의자도 제대로 구성하는 못한 전체 연결을 (피곤해서?) 정답지 들고 판을 맞춰 본다. 
학급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는 어떤 자리에 앉아도 티 안 나게 성적 나오게 마련이다. 이처럼 성령님은 늘 ‘장소없는 장소’를 유발한다.  

송민선 성도님에게 전화로 물어봤다. “이번 수련회 내용이 어땠나요?” 송민선 성도님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매 순간 깨어지기 바빠서 내용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 정답지는 진정 손에 잡을 수 없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