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아

의심의 시절을 보내면서 150805 이미아

아빠와 함께 2018. 1. 16. 10:16
2015-08-05 00:54:34조회 : 964         
의심의 시절을 보내면서.....이름 : 이미아 (IP:180.231.90.76)

허무하다. 수련회를 가기 전까지도 허무했고 수련회 시간을 보내면서도 허무했고 수련회를 다녀와서도 허무하다. 우리 서로 이야기해도.... 우리 서로 아는 척 해도.... 우리 서로 인사 나눠도....허무한 것을.....,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허무의 깊이다. 어차피 인간은 허무함 그 자체이면서도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아등바등 애쓰는 모든 것이 허무함을 나타내는 시추에이션이었던 것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그것을 감추기 위한 허무를 계속해서 만들 판이다. 그 판을 채우기 위해서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한다. 스톱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말이란 정말 의미 없음을. 허공 속에 내뱉어버리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이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인간은 착각하고 있다. 언어가 현 사실을 표현할 수 없는 중지된 언어임을 말이다. 예를 들면 내가 예수 믿고 있다고 말한다 해서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언어의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똑똑한 존재요, 인격적인 존재요, 뭔가 아는 존재요, 신조차도 능가할 존재임을 천명한다. 그래서 인간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행할 수밖에 없다.


마귀는 끝없이 한 번 만들어진 창조의 원칙을 계속해서 고수하려고 하고 하나님은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해서 창조를 파괴하는 식으로 일을 벌이시기로 작정하셨다. 마귀 자식들인 우리는 모든 것이 나의 구원과 관계된 것으로 어겼기에, 그렇기에 이유 있는 구원을 내세우지만 주님의 구원에는 이유가 없다. 혼돈 그 자체다. 질서정연한 인생, 그것이 모두가 꿈꾸는 인생이지 않는가. 그 누가 혼돈된 인생을 꿈꾸며 그렇게 살기를 바라겠는가. 자연스러움을 버리고 억지를 부리는 자기사랑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억지를 부리는, 혼돈인데 혼돈이 아닌 척 하는 모든 것을 혼돈된 인생으로 바꾸셨다. 악을 구체화시키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신 약속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약속이란 반드시 약속한 분이 실현하신다는 하나님의 자기존재 증명을 위해서 사사를 세우시고 구멍을 내셨다. 구멍 난 자아, 바로 약속하신 분이 올라오는 유일한 구멍이다.


소견대로 행하는 그들에게 전쟁을 일으키시고, 그들은 부르짖고, 구원해주시고 하는 일련의 방식은 지루함이었을까? 그렇기에 사사를 통해서 구원하시는 구원이 오히려 그들에게 숨겨있는 욕망을 들추어내신다. 우리도 이방나라처럼 왕이란 제도에 속해 잘 살고 싶고, 자기 영역을 확장하고 싶고, 자기 존재를 지키고 싶은, 곧 자기 안에 있는 이 우상을 왕이라는 대체물로 대체하고 싶은, 인간이 왕을 구한다는 것이 자기 소견의 극대화임을, 그래서 왕을 세우고 싶다는 본심을 주님은 부추기신다. 언약을 진행시키기 위해서이다. 왕을 구하고 왕을 주시고 결국 왕과 함께 망하게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무지막지하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들을 진멸하신다. 전쟁을 통해서 소견대로 행하는 자기 우상 만들기와 주님의 언약중의 어느 것이 현실인가를 알게 하심이다. 우상은 진멸당할 것이지만 언약은 주님이 자기실현으로서 완성하실 숙제인 것이다. 결국 약속의 땅에서 악을 배양시키고 약속의 땅에서 악을 숙성시키는, 약속의 땅은 약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온전히 해결되지 않는 구원자를 보내신다. 그 누구를 보내도 구원 안 된다. 나를 위한 구원, 우상은 죽음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불가능성이다.


반복적인 사사기의 흐름은 사사의 외부적인 문제를 내부적인 문제로 응축시킨다. 기드온 가정에서 일어난 일, 입다의 영웅심, 그리고 여성편력자 삼손, 레위인 첩의 죽음, 베냐민 지파의 소멸 등등....희생이고 죽음이다. 그러므로 해서 그 희생과 죽음이 품고 있는 의미, 진정한 구원자, 예수님만이 구원자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특히 삼손의 죽음은 나실인, 곧 레위언약이 근거가 된다. 장차오실 메시아를 율법의 인격화로 장착하셨다. 허무한 사람을 허무로 돌리는 수수께끼.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 허무로 돌리시는 하나님이시다. 보통의 시간은 해, 달, 별이지만 나실인의 머리카락은 고유시간으로 하나님이 자기존재 증명을 위한 예정된 시간이다. 삼손의 욕망과 나실인의 사명, 그 혼돈 속에서 머리카락은 잘려나가고 블레셋에게 두 눈이 뽑히지만 나실인의 사명은 끝장을 보게 된다. 블레셋 신인 다곤 신전에서 두 기둥을 뽑고 죽는 힘이 나실인의 힘이다. 나실인의 사명의 마감은 죽음이었다. 그의 수수께끼는 죽음에서 풀 수 있는 것임을.....,이처럼 나실인이라는 율법의 인격은 곧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이고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아들을 저주받은 자로 죽이셨다. 그 죽음에 우리도 동참시키시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제로가 되어야 하는 이스라엘(12+0=12 B층). 12지파로 만들려는 이스라엘(11+1=12 A층). 이 두 개의 층은 숨겨있는 B층으로 말미암아 A층은 갉아 먹히는 것이다. 늘 우리는 제로가 되게 하시는 주님의 자기존재 증명의 현장인데, 늘 우리의 일상적인 현장은 내 힘을 믿고 돈으로 자기존재 증명을 하고자 한다. 이러한 A층과 B층의 충돌, 주님의 죽음 때문에 우리는 웃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하면 모든 행위가 주님의 행위가 되기에 더 이상 우리는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단지 법으로 말미암아 죄인 되는 절차를 거칠 뿐이다. 주님의 세계고 주님의 천국인데, 주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가리고 주님의 일하심을 훼손하는 것은 바다에서 올라오지만 스멀스멀하게 짐승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장은 애굽이요, 소돔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다. 사랑 안 하고 사랑 안 받기, 남을 위해서 사는 것도 안 되고 나 자신을 위해서 살지도 못하고 자기한테 갇혀있는 자폐증 증세를 보이며 사는 곳이 사사기의 현장, 우리가 사는 땅의 현장이다. 애굽에서 나온 것이 구원이 아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우리의 껍질이 더 벗겨진다고 한다. 억지로 하는 사랑이란 체재에서 벗어나 허무하게 살자 하신다.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고 허무하게 물으신다.


옛날이 그리워 잘 듣지도 못하고 졸면서 들었던 강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미친 짓 하고 있다. <수련회를 다녀와서>는 오용익 목사님께 제발 써주시기를 강요하듯이 부탁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곧 올라올 것이니 기대하시기를....., 의심의 시절은 허무한 시절이다. 의심의 시절을 보내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시절인 것을 주님은 알게 하셨다. 사후적 소급을 통해서 말이다. 다만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하는 법을 잊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의심의 시절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것마저도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동안 준비해주시고 열강을 해주신 이근호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며,  제대로 듣지 않음 조차도 주께서 하신 일이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하신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근호 (IP:119.♡.86.67)15-08-05 07:48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박종은 (IP:118.♡.228.126)15-08-05 08:04 
내내 살아온 내 인생 너무 황당하고 허무합니다. 
무얼해도 징벌이요, 
무얼해도 저주이요, 
무얼해도 우상숭배하니, 
정말 황당하고 허무합니다.
 박상도 (IP:1.♡.65.204)15-08-05 09:19 
예수님께서 전도서 1장2절 말씀을 체험케 하셨네요.

 우인숙 (IP:1.♡.133.164)15-08-06 14:53 
로그인 안할수가 없네그려~~난 전혀 안졸았는데도 눈만 깜짝해도 고개만 한번 돌려도 까마귀가 되어버리는 ~~~극렬한 허무속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