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하늘에는 뚜껑이 열렸다.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아홉수...그랬다. 십대를 보낸다는 것이 아쉽고 스무 살이라는 미지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홍역처럼 앓았던 19살. 그 19살에 맞는 첫 눈...겨울수련회가 열리기 전에 읽었던 겨울수련회 교재, 요한계시록이 주는 설렘이었다. 그러나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밖에 나가는 것은 싫어한다고.. 어떤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대전 유스호스텔에 가기 전까지가 그랬다. 집 안에서 유리 창 너머로 함박눈이 쏟아지는 것을 감상하듯이....,
하지만 1강의 요한계시록 말씀이 살아났을 때, 낭만에 젖어 감상했던 잘난 자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밖에 나가 눈에 옷을 젖게 하셨고, 미끄러운 길을 걷게 하셨고 눈이 녹아 지저분해진 거리에 불평과 짜증을 토해 내게 하셨다. 가끔은 쌓인 눈에 뽀드득 뽀드득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웃게도 하셨지만....,
수련회에 참석해서 말씀을 들었던 분들이시라면, 아니 실시간 동영상을 통해서 들었던 분 들이시라도, 왜? 저렇게 인간의 역사, 연대기를 길게 나열하실까? 하는 의문점을 가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의문조차도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론인가 보다 했으니까. 그런데 길어도 너무 길게, 처음에 잘 외우셨는데 가면 갈수록 기억을 더듬으실 때, 짧게 하시지 왜 그렇게 길게 하셔서...안타까움을 자아낼 정도로, 인간의 연대기가 필요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하셨다. 물론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들었을 테지만....,
모든 의문을 종식시키듯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 필연은 마지막 강의에 내려야 하는 결론 때문이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조금만 기다려라.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 그렇게 속으로 쾌재를 부르시면서 결론을 향하여 나아갈 때, 그 쾌감은 마이크를 쥐고 있는 그 분만이 맛 볼 수 있는 특혜다.
연대기를 그렇게 길게 나열했어도 그 중에 정말 몇 개만 기억이 날 뿐이다. 소소한 개인적인 연대기는 그만두고 1655년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을 발견한 것은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왜 중요 하냐, 과학은 기술을 개발하고 그 기술은 돈이 된다. 자본주의가 그렇듯이 종교마저도 자본주의에 편입된다. 왜, 모든 종교의 열쇠는 과학이고 돈이 없으면 종교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과학 기술이 진리가 되는 세상에서 요한계시록은 없는 세상이다.
요한계시록이 성경에는 나와 있는데 실제 우리 삶은 요한계시록이 없는 삶을 산다. 역사하고 환상이 있는데 역사 속에 살다보니까 환상은 없다. 역사하고 환상이 만나는 그 지점. 교차되는 지점(교집합)이 요한계시록이다. 환상(예수님)이 그냥 역사로 오면 되는데 흔적을 남긴다. 십자가 사건이다. 죽음으로 모든 것을 통합하신 예수님만이 주체시다. 이 접촉점으로 들어가야 환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관해서 보면 인간은 없고 죄인만 있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환상이 와서 십자가 사건을 남겨도 모른다. 전체(역사)가 부분(환상)을 아무리 끄집어 당겨도 속할 수 없는 흔적이고 역사 안에 같이 있어도 환상은 붕 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의 성도는 IS여성대원이다. 이미 주님이 눌러놓은 전기밥솥의 예약을 우리가 취소할 수 없다. 메뉴에서 백미를 선택하고 시간을 예약하고 취사를 눌러 놓으면 내일 아침 그 시간에 어김없이 하얀 쌀밥이 되어져 있다. 그렇게 성도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안목으로 주님이 갖고 있는 고유 연대기를 회고하듯이 보는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의 특징은 개인이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있었다. 하나님은 이 교회에 편지를 보내신다. 부수기 위함이다. 모든 연대기 속에서 쇠퇴한다. 예수님이 없으면 일곱 교회는 건물일 뿐이고 폐허가 될 뿐이다.
요한계시록 전체는 동결된 책이다.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는 이겼다. 누구를 위해 이겼느냐를 회고하듯이 보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한 세트가 꽁꽁 얼어버린 무대장치, 그렇게 이 세상은 꽁꽁 얼어있는 무대장치, 미장센(mise en scene)이다. 그래서 유람하듯이, 소풍가듯이, 이 세상을 거니는 곳, 그곳이 바로 성도의 삶이다. 내가 기도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동결되었기 때문에. 내가 그 안에서 죄인인 것을, 폐허를 보는 것이다. ‘아, 저렇게 해서 저렇게 망했구나! 저렇게 아등바등 해봤자 망해야하는구나!’ 돌려보면서 보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골라먹는 재미가 있듯이. 미장센 속에 동결된 숫자화. 666, 144,000, 1260일, 한 때, 두 때, 반 때....
이걸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역사 속에 빠트린 역사가 있었다. 이스라엘 역사다. '찐빵 쪼개기' 라고 예를 드셨는데 개인적으로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찐빵을 너무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서 찐빵을 반으로 나누면 달콤한 단팥이 흘러나온다는 것도 안다. 역사 속에 환상이 숨어들어 갔다. 이스라엘 역사라는 찐빵을 쪼개면 선지자가 나온다. 엘리야, 엘리사 같은 기적선지자가 등장하고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호세아, 요엘 하박국....문서선지자가 등장한다. 이스라엘 역사는 망해야 한다. 하지만 시범조다. 이방나라 너희들 다 죽었다는 경고다. 자연세계도 망한다. 이스라엘 역사가 둘로 갈라질 때 선지자의 희생은 단팥처럼 흘러 나왔다.
버리기 위해 꼬깃꼬깃 뭉쳐놓은 종이짝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나뒹굴 때, 그것을 펼쳐보면 구원받고 싶다는 욕망이 적혀있었다. 그래서 환상의 세계, 성경마저도 내 역사로 잠식시켜버리는 초인적인 힘, 권력을 발산하는 인간은 괴물이다. 환상의 세계가 전부고 정상인데, 인간의 역사로 똘똘 뭉쳐진 세계만이 눈에 보일 때 창세전에 하나님과 아들과 약속한, 그 언약을 침투시키기 위해 없는데서 만든 이스라엘 역사가 개입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모든 인간의 역사는 망해야 된다는 것이다.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만드시고 망하게 하신다. 저주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창조를 하기 위해서다.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이 있고 교회 속에 교회가 있었다. 환상이 전부인 세계에 의도적으로 인간의 역사를 깔았다. 두바이에 세워진 163최고층 빌딩, 부르즈 할리파처럼- 곧 사우디아라비아에 200층짜리 킹덤파워가 세워진다고 한다.- 위대하고 견고하게 쌓여진 역사의 밑바탕 없이는 환상의 세계를 설명할 길이 없기에. 그런 용도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역사만이 전부인 줄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책갈피를 꽂듯이 꽂아 둔 이스라엘 역사로 인하여 모든 인간의 역사를 생매장시키는 것이다.
동결된 시간, 잡곡강정이다. 뭉쳐진 잡곡들과 함께 천사들은 얼음, 땡 놀이를 한다. 천사가 탁 치면 얼음이 되고 또 천사가 탁 치면 땡이 된다. 구약의 문서 선지자들을 사용하여 기록된 말씀은 신약의 요한계시록에서 살아난다. 가만히 동결된 채로 얼음하고 있었던 선지자들이 땡과 동시에 살아나는 것이다. 세상은 고요한데, 관심도 없는데, 파 들어간 우물 속은 엄청나게 시끄럽다. 그러나 성도는 고요함 속에 속해있으면서도 주님의 안목으로 시끄러운 우물 안을 들여다보며 요한계시록이라는 일상을 사는 것이다.
구원 없다. 없는 세계다.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없는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없는 나라다. 이스라엘이라는 역사가 쌓아놓은 역사적인 용어들을 묵시적인 용어로 바꾸시기 위해서 역사로 오신 예수님은 살해당하셔야 했다. 그것도 주님이 만드신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언약이 있는 언약 백성이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있는 언약 백성이 언약의 당사자인 예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도 오해했던 666의 실체는 바로 나였다. 왜? 예수님이 내 죄로 인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또 그렇게도 오해했던 144,000의 실체 또한 바로 나였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백성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악마와 한 통속이 되어 예수님을 죽이는데 다 가담되어 있다는 것을 까발리시기 위해서 7인을 떼었고, 7대접을 쏟았으며, 7나팔을 불었다. 중첩(둘 이상의 것이 거듭해서 겹쳐짐)되어 있는 7은 세상이 이런 질서로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묵시적 존재, 곧 창조된 7로 사는 것이 아니라 12라는 언약으로 사는 자들만이 알 수 있다. 진짜 배후자를 막간에서 뽑아내시기 위해 이질적인 시간, 이미 동결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70이레, 1260일, 3년 반, 한 때, 두 때, 반 때를.....,주님이 이런 전쟁을 벌이셨구나! 를 회고하듯이 보내는 시간이다.
이제 결론이다. 왜 그렇게 길게 연대기를 준비하셨을까? 연대기 속에서 자기 자아가 규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연대기를 길게 나열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할 뿐이다. 무심코 나는 그냥 사는 것 같았는데 내 자아를 규정 짓고 내 자아를 다지고 내 자아를 높이기 위해 끝없이 나의 역사, 나의 연대기를 만들고 추억하며 잊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밥 먹고 사는 것, 그것은 역사가 아닌 줄 알았다. 뭔가 해서 이름이나 날리고 세계 인류에 남길 기록이나 갱신할 때 그것만이 인간의 역사요, 연대기라고 착각하며, 나라는 인간은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빠져나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십자가 앞에서...예수님만이 주체이신 것을 모독하며 내가 주체가 되고 싶어서 환장했던 역사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나 부르면서 굳어진 나의 자화상으로 늘 돌아가고 싶었다.
요한계시록 20장 7절에 보면 ‘곡’과 ‘마곡’이 나오는데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은 전부다 곡과 마곡이다. 이스라엘을 개 무시하는 곡과 마곡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는 것이다. 연대기라는 나만의 주체는 어디서부터 생성되었는가, 그것은 나를 둘러 싼 혈연이고, 나아가서 사회고, 나아가서 국가고, 나아가서 전 세계다. 결국 도도하게 흐르는 인류 역사를 모방하고 욕망한 것이 나의 연대기였다. 누가 쫓아오지 않는데도 나는 쫓김을 당하듯이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인간이 아니라 죄인의 역사가 들어있다. 인간의 역사, 연대기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나만의 연대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요한계시록은 없었다. 역사의 수레바퀴 밖에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하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방인이 되었다는 것, 인간의 역사만이 있는 동네에서 갑자기 이방인이 되어서 자기를 변두리로 몰아내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시간 밖으로 쫓겨나서 우리는 죽은 자다. 죽은 자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다시 시간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첫째 부활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시간 밖에 나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 이루어진 이야기다. 과거 이야기다. 지키는 자가 아니라 지키게 된 자들. 내가 전에 어떤 자였는가를 관람하며, 회고하듯이 보면 되는 것이다.
주님이 여행용가방을 들고 여행을 하신다. 그러다 주님은 고요한 거리에 여행용가방을 열고 환등기를 설치하신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이 그 환등기를 통과해서 요한계시록이 세상에 퍼진다. 우리의 위치? 환등기다. 죽은 자인데 마치 죽은 자처럼(as~if) 살아간다. 죽여서, 다시 살게 해서, 다시 재편성해서 다시 집어넣는 것이다.
샤르트르는 말하기를 “우리는 이미 던져진 자다. 우리가 원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모든 인간은 죄 안에 갇혀 저주받기로 던져진 자들이다. 과연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인가, 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율법을 재편성해서 모든 것을 예수그리스도의 중심으로 구조조정하시겠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있으니까.
맨날 가위, 바위, 보만 하면 졌다. 세상은 동시에 가위 바위 보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늦게 내는 꼼수를 써서 당하게 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를 이겼다 하시려고 주님은 미리 내놓고 기다리신다. 그걸 보고 우리는 이기는 것을 내면 된다. 더 이상 이기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용쓰지 않아도 된다. 성도는 예수님의 증인, 환상에 매여 있으면서 역사 속에서 살아야 하는 팔자다.
우연찮게 서울에 도착해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을 타고 내려오는 계단에서 역시나 지하철에서 전도한답시고 설치는 자들이 있었는데, 요한계시록 강해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미래에 대비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환상의 세계에서 역사로 타임머신을 타고 왔구나! 라는 생각이. 물론 거기에는 보지 않았어도 숫자에 대한 것만 나열되어 있을 것이다. 666이 어떻고 144,000이 어떻고 천년 왕국이 어떻고 한 때 두 때 반 때가 어떻고 일곱 인, 일곱 대접, 일곱 나팔이 어떻고..웃기고 있네! 지금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관람하고 왔지롱~ 메롱~하면서 약 올리고 싶다. 다 돈 벌기 위한 수작이고 미끼다.
이미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을 하면서 어떤 무기를 가지고 싸웠는가? 를 봐야 한다. 마귀의 행함이라는 무기인가? 아니면 주님의 행함이라는 무기인가? 결국 마귀의 행함을 따라 나의 증인이 되든지, 주님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증인이 되든지.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들었다고 한다.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증인은 주님이 만드시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주님을 향한 이 그지 같은 사랑, 이 바람 같은 사랑, 이 바보 같은 사랑을 계속해도 될지..주님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면서 내가 한 발 다가서면 주님은 두 발 멀리 가신다.
“제발! 그냥 살아!!”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는지 온 몸이 아프다. 몸살이다. 주님의 환란에 성도를 동참시키시는 요한계시록의 환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