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강-YouTube강의(소유와 존재)171010-이 근호 목사
204강 제목은 ‘소유와 존재’입니다. 성경 말씀 하나 읽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1장 1절에 보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앞에 뭘 깔아놓느냐 하면 사람들에게 나온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사람들에게 나온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그 다음에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닌 그리스도가 돼요. 따라서 그리스도가지고 사람에게 나갈 때는 반드시 요 규정을 가지고 나가야 돼요. “당신들이 기뻐하고 당신들이 납득이 되는 이야기는 일체 없습니다.”를 딱 전제로 하고 나가야 돼요.
자칫하면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을 여기서 마중 나오는 식의 결합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주님 나라가 아니고 사람 천국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 가려고 갔는데 가보니 지옥이라. 이 세상과 똑같아요. 그래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사람에게서 말미암아는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의 지혜나 체험이나 사람의 느낌이라든지 사람의 의지, 그리고 똑똑함, 합리적인 것. 그런데서 부터 출발하는 것도 아닌 그리스도가 돼요.
자, 이렇게 되게 되면 여기서 어떤 싸움이 벌어지는데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난 것도 아닌 그리스도는 원초적으로 믿는 게 봉쇄되어있습니다. 못 믿어요.
사람이 믿는다는 것은 파악해보고 믿는 거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보니까 낯서니까 이건 믿을 대상이 아니고 못 믿을 대상으로 따로 제켜 놔버린 거예요. 그럼 어떤 싸움이 있느냐 하면 사람에게서 난 그리스도, 사람으로 말미암아 난 그리스도를 따로 세우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뭐하고 싸우느냐 하면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그리스도와 구원자와 사람에게 나오지 않은 구원자사이 그 경계선에 투쟁에 사도바울이 그 가운데 탁 놓이게 되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무시하고 배척했던 그 고난을 똑같이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서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똑같은 상황 속에서 예수님 빠지고 사도바울 집어넣었으니까 예수님이 당했던 그 수난을 똑같이 그 다음에 성도도 똑같이 당하고,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미워했던 세상 속에서 우리가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해 안 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밉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거죠.
자, 그러면 진짜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냐 라고 했을 때 바로 사도바울이 사람에게 사람들에게 난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라는 말을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1장에서 했다면 진짜 그리스도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은 바로 사람에게서 난 것이 무엇이며, 사람하고 말미암은 것이 무엇이냐 부터 출발해야 돼요. 요게 어려워요.
우리 같으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가짜기 때문에 제켜 놓고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직접 받겠다고 이리 나오는데 우리는 별거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우리도 내가 이해되고 납득되는 그런 그리스도, 나를 잘해주는 그리스도를 찾게 되어있다 그 말이지요.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남 욕할 거 없어요. 우리도 나한테 이익주고 내 잘되게 해주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는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흠뻑 빠져 버려요. 지금도 교회가 그렇지만.
그래서 출발점을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말미암아 했을 때 내가 인간들이 원하는 메시아는 뭘까 부터 출발해야 돼요. 인간들이 원하는 메시아의 특징이 있어요. 첫째는 눈에 보이고, 눈에 실적이 있어야 되고, 둘째는 그걸 눈에 보이니까 소유대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교회라는 거예요. 일단 교회가 눈에 보이잖아요. 보인다는 말은 이게 내 것 하고 싶어요. 내 교회 되고 싶어요. 내 소유가 대상이 되는 겁니다. 자, 또 하나의 자식. 자식이 눈에 보이지요. 자식이 눈에 보이니까 그 눈에 보이는 그 자식을 내 자식이라고 자랑질하고 싶어요. 그러면 그건 사람에게서 나온 겁니다.
이제는 예수를 찾던 하나님을 찾던 주여, 뭐 자식 잘 되게 하옵소서.” 라고 철야기도를 하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을 어디에 이용한다? 내 눈에 보이는 내 자식 잘 되라고 예수님을 가져다 쓰는 것. 요거 소유입니다. 요거 소유에요.
또 한 예를 들어볼까요?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취직했는데 취직했다고 다가 아니잖아요. 승진해야 되지요. 승진했다는 그 업적. 내가 승진하고 싶은데 “예수여, 도와주소서.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그런데 승진했잖아요.
승진했으니까 그 승진한 그 과장으로 부장으로 승진하게 되면 그 승진한 것은 내가 승진한 것이니까 내 소유가 되는 거죠. 이건 뭐 그 다음 예를 들 필요가 없어요. 돈은 말할 것도 없지요. 내가 평생 노력해서 벌었다는 겁니다. 전부 다 소유 대상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삼위일체를 이야기해봐야 내 소유거리 지켜주시옵소서. 라는 목적이 이미 전제가 깔린 다음에 예수 거기다가 집어넣고 하나님 거기다가 집어넣고 내거나 잘 지켜주세요. 라는 식의 바로 사람에게서 나온 그리스도입니다. 가짜입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에요. 요거 완전히 가짜입니다.
사도바울이 이거 전했으면 사도바울이 고난 받을 이유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축복받게 해드리겠다는데 누가 사도바울에게 돌을 던지고 매를 치고 미워하겠어요?
사도바울이 예수님처럼 미움을 받았다는 말은 사도바울이 전하는 예수와 사람들이 기대하는 예수가 완전히 대척관계에 있었어요. 반대의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게 아니에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지키고 싶은 그 소유를 지켜주는 메시아 아니에요. 그러면 그건 뭐냐, 그 사도바울이 전한 것은 뭐냐, 바로 존재입니다. 소유가 아니고 존재라 하는 건데 존재라는 말은 있다는 말이지만, 요걸 제가 쉽게 이야기해서 새로운 피조물.
인간이 아닌 천국 갈만한 사람은 이 땅의 인간에서 어떤 인간으로 달라지느냐 소유를 원했던 소유에 완전히 뒤덮여 살던 인간을 소유를 탈탈 털어버리면 뭐가 남느냐 하면 소유를 원했던 죄인 남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죄인이었으면 그 소유가지고 살려고 하겠어요. 그 소유 벗겨내고 그 알갱이, 벌거벗은 알맹이는 바로 죄인입니다. 아담의 죄인 모습. 그 죄인과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잖아요.
그리스도는 피 흘리는 그리스도고, 죄 사해주는 그리스도에요. 죄 사해주는 그리스도 되려면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 됩니다. 죄인이 되는 조건하에 죄 사함이 의미가 있게 마련이에요.
죄도 없는데 죄 사했다 달려들면요, 웃기는 짬뽕이지요.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주님 십자가 자아가 피 흘리면서 나 이렇게 왔다. 주님, 왜 그렇게 옵니까? 돈이나 들고 오지. 왜 그렇게 옵니까? “니 이것 필요해. 피!” “왜요?” “니 뭘해도 소유요, 뭘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이야기가 갈라디아서1장 4절에 나옵니다.
4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 죄를 위해서 자기 몸을 드렸으니, 우리 죄를 위해서 자기 몸을 드렸다는 그걸 사도바울이 앞장세우지요. 뭐 진짜 그리스도 확실하지요?
여러분을 보면서 주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니 죄인이야!” 벌써 깔고 들어가요. “니 죄인이야.” 그 다음에 주님께서 니 죄를 위해서 내가 내 몸을 바꿔치기 하겠다. 몸을 주시는 그 그리스도 외에는 다 인간의 소유용으로 인간이 조작해 낸 사기입니다.
사기에 의해서 망상으로 만든 관용으로 만든 가짜 그리스도에요. 그러면 교회에서 교회 잘되라고 하는 게 뭐냐, 교회 잘 되게 되면 눈에 보이고, 그게 커지게 되면 그 교회에 다니는 본인들이 기분 좋지요. 교회 잘되기 위해서 동원된 그리스도. 요거 100%가짜입니다. 그거 인간으로 말미암아 낳은 가짜에요.
그러면 진짜 교회는 뭐냐, 교회에 불났다. 헌금 한 이천만원, 일억 했는데 그만 홀라당 그 다음날 누전되어 불 나버렸네.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올 때는 그 사람은 비록 교회 다녀도 진짜 그리스도를 아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진짜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사람.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공은주 (IP:218.♡.196.72) | 17-10-14 09:54 | 205강-YouTube강의(남과 여)171010-이 근호 목사
205강, 제목은 ‘남과 여’입니다. 남과 여. 처음에 남자는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남자가 아니고 사람을 만들었어요.
그러면 남자라 하는 것은 언제 생기느냐 하면, 그 사람에게서 갈빗대로 여자가 나오는 순간 그 아담은 남자가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남자가 있다는 이야기하고 처음부터 남자가 없고 사람만 있다 하는 것하고 이야기가 차이점이 뭐냐, 그게 그거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에게서 갈빗대로 여자가 나오는 순간, 남자는 사람의 기능을 하면 안돼요. 무슨 기능을 해야 하느냐 하면, 남자로서만 기능을 해야 돼요. 남자로서만.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온전치 않다 이 말이에요. 온전치 않다 이 말입니다.
다시 할게요. 여자가 없이 아담이 있을 때는 아담 자체가 온전해요. 아담 자체로 온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갈빗대로 여자로 만드는 순간 이제는 여자 없이는 일이 안돼요.
여자 없이는 안 되는 남자는 사람의 기능을 하면 안 되고 남자의 기능을 해야 돼요. 남자의 기능. 여자는 뭐냐 하면 사람의 기능을 하면 안돼요. 여자의 기능을 해야 돼요.
그리고 남자의 기능과 여자의 기능이 합체될 때 비로소 사람의 기능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아담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창세기2장에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겁니다.
굉장히 난해한 이야기에요.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은 이건 인간에게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백날 부부 결혼식 해봐야 둘은 둘이에요. 같이 이불 덮고 자봐야 아침에 깨서 꿈 이야기하면 두 가지 꿈이 나옵니다.
절대로 한 가지 꿈이 안 나오지요. 끝가지 그래요. 끝까지. 끝까지 인간은 결혼을 하던 뭘 하던 한 몸이 아니고 두 몸으로 줄곧 갑니다. 그러면 여긴 두 사람이 한 몸 됐다 했잖아요. 요거는 범죄 하기 이전이에요.
범죄하고 이후에 창세기3장에 보면 그걸 뭐냐 하면 개성이 드디어 자아의 발생이라고 하는데요. 나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게 되어있어요. 범죄하고 난 뒤에는 이제는 내 혼자 있어도 나는 한 몸이라고 우기는 그러한 일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는 “나는 여자 없으면 한 몸 안 돼!” 여자는 “나는 저 남자 없으면 한 몸이 안 돼!” 라고 했던 그들이 끝났습니다. 끝나고 사탄에게 꼬임을 받아서 이제는 범죄하고 난 뒤에는 “그까짓 거 나 여자 있으면 좋겠지만, 여자 없어도 내 몸은 요걸로 족해. 나는 나 혼자 살 수 있어!” 모든 가치와 의미는 다 저 여자한테 돌아갈 게 아니고 나한테 돌아와. 또 여자는 내 남편이지만 남자에게 돌아갈 게 아니고 나는 나를 위해서 남편이 있는 거야.
모든 인간이 자식을 낳았다. 아버지 왜 있느냐? 나를 위해서 있지. 아버지에게 자식은 저 자식은 왜 있는가? 나 좋아라고 저 자식이 내 기쁨이라고 자식이 있는 거라고. 모든 게 그렇습니다. 모든 게. 성경말씀이 전설 아니지요. 신화 아니지요. 얼마나 현실을 대변해 줍니까? 실제적이에요. 실제적.
성경만큼 실제적인 게 없어요.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목사님, 나는 왜 내 욕심만 챙깁니까?” 그게 성경에 보면 창세기2장하고 3장하고 달라서 그래요. 그렇게 묻는 사람도 참 기특한 사람이지요. 어떤 사람은 그리 묻지도 않지요. 당연하지 뭐. 나 누굴 위해 사느냐고? 나를 위해 살아. 평생 어떻게 살았냐고? 내 힘으로 내가 살았다. 왜? 누가 죽으면 가슴이 아프지? 아프지. 하지만 나는 아직 안 죽었잖아.
왜 모든 말이라든지 행동이라든지 이 모든 말이 나만 있으면 되고 나만 잘되면 되는 쪽으로 왜 그렇게 쏠리느냐 이 말이지요. 심지어 교회 가서 예수 믿어도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 믿고. 하나님 믿어도 나 잘되기 위해서 믿는 거하고 우리는 그걸 정상이라고 착각했잖아요. 이게 옳은 거라고.
하나님 믿어주자. 믿어주면 하나님이 나 기특하다고 나 천국 넣어주겠지. 누굴? 나를. 모든 것이 바로 나 중심으로 된 이것을 이게 본능인데 세상에 본능을 어떻게 고칩니까? 죽을 때까지 안 고쳐집니다. 죽을 때까지 안 고쳐져요.
착한 일 해봐야 내가 했다. 라고 남한테 떠벌일 마음준비가 되어있어요. 내가 했다고. 만약에 교회에 피아노를 누가 하나 기증했습니다. 어떤 자가 지나가다가 몰라가지고 누가 피아노를 기증했지? 하면 입이 근질근질해요. 속으로 ‘이 바보야. 내가 했어. 내가.’ 따라서 다른 애가 피아노를 어지르면 가만히 있는데 기증자가 그걸 보면 “아이고, 가까이 하지 마!” 말리지요.
사람은 자기 한 것에 대해서 기억을 하고 자기 한 것에 대해서 끝까지 애착하는 겁니다. 그래서 헌금은 없습니다. 투자한 거예요. 헌금을 하나님께 드렸다고요? 천만에요. 자기 마음한테 헌금한 거예요. 내 마음에 헌금한 것이 장부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죽을 때 그 장부 들고 하나님 앞에 나섭니다. “주님, 2017년도 7월 6일날 제가 이거했잖아요. 이 착한 일했으니까 상급주세요.” 이거 정상 아닙니다. 마귀 들린 거예요. 그런데 다 같이 마귀 들리다 보니까 서로가 정상이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정상인 분은 누구 밖에 없느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남자라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은 그 자체가 아담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뭐라고 되어있는가 하면 마지막 남자라 하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아담. 마지막 하와가 아니에요. 마지막 아담이에요.
마지막 아담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미 하나가 되어있어요. 그 자체가. 그래서 예수님 몸에 지체가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남자로도 괜찮고 여자로도 괜찮고 부부해도 괜찮고 홀로 해도 괜찮아요.
그리스도와 영원한 한 몸이 되고 마는 겁니다. 창세기 2장의 완성이 되고 말아요. 창세기2장에. 그래서 성경의 완성은 인간이 못해요. 주님이 완성된 채로 우리에게 뒤집어 씌워버립니다.
연세 많은 분은 알지요. 여름에 등목 하는 거 알지요. 상의 옷을 벗고 더울 때 옛날에 마당 있는 집에서는 하거든요. 큰놈부터 한 바가지 붓고 시원하지요. 주께서 자기의 한 몸 됨을 우리에게 뒤집어 씌워버려요. 그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라 합니다.
왕 노릇이란 말이 쉽게 말하면 어~푸 에요. 어~푸! 내 몸통은 이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내 몸통보다 차고 넘쳐. 줘도 너무 줬어 은혜를. 의를. 죄를 씻을 만큼만 의를 준 게 아니고 죄를 씻을 만큼만 용서한 게 아니고, 이건 앞으로 무슨 죄를 지어도 그 의에 가려가지고 티도 안 나. 죄 진 게 티가 안 날 정도로 어~푸 어~푸! 하는 식으로 완전히 파묻히도록 폭설 내리듯이 의를 줘버렸어요.
왜냐하면 또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여 은혜 받았습니다. 또 돌아서가지고 또 음란 간음에다가 살인, 마음속에 간음하고 이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예 일괄적으로 죽을 때까지 아무리 죄 지어도 그 의에서 못 빠져나오도록 주께서 일괄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줘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님의 공로가 그 정도로 수준이에요.
그저 깔짝 깔짝 그냥 죄 지은 거 용서하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니고 어떤 죄를 지어도 묻거나 따지지 않는 기억치 아니하리라. 했잖아요. 니 기억하나? 나 기억 안 했는데. 기억치 아니할 정도로 퍼부어 버립니다.
남자, 여자는 뭐냐, 남자는 남자하면서, 남자하면서는 다른 말로 하면 죄를 지으면서 이 죄와 한 몸 되신 완성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비교해보라고 남자는 남자로 살고, 여자는 여자로 살면서 두 죄인이 만나서 부부되게 한 겁니다. 실컷 싸우라고. 원 없이 한 번 싸워보라고. 얼마나 이기주의자인 것을 티 팍 나. 티를 마음껏 내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보고 이기주의래요. 둘 다 이기주의면서. “니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리 나오느냐?” “니는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평생 70넘고 80넘어 죽을 때까지 하나 없어질 때까지 싸워버려요. 심지어 하나 없어지면 초상화 걸어놓고 싸워요. 죽은 마누라 사진 걸어놓고 싸우잖아요. 왜? 싸워야 지 자아의식이 생기니까. 옛날 하던 버릇대로.
그 정도로 우리는 싸움의 대상으로 죄지은 대상으로 부부 만들 게 해주신 겁니다. 왜? 그리스도 바라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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