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5강)
지금부터 두 번째 저녁 마지막 시간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첫 번째 시간에 ‘운동이란 차이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바람 부는 것도 물이 떨어지는 것도 차이에 의해서, 높은데서 낮은 데로 혹은 낮은데서 높은 데로 갈 수도 있고, 하여튼 여기에서 인간의 육의 운동이 일어나지요.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을 소망해서 내 몸을 여기다 밀어 넣는 거예요. 지금은 A라는 수준이지만 B라는 수준까지 높여야겠다.
안 오신 분이 있네요. 오시면 다시 설명하면 되니까 --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월급을 100만원 받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200만원 받는다. 그러면 이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지요. 한 사람은 일반 직원이고 한 사람은 계장이다. ‘사장님, 나는 평생 직원으로 살렵니다. 100원짜리로 살렵니다.’ 이런 사람 없어요. 이번 승진 심사에서 계장되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 속에 하나의 운동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100만원 월급에서 200만원 으로. 이게 바로 자극 받아서 우리 몸이 운동하는 거예요.
저쪽 자리에 누가 앉아 계셨더라? 아, 예. 오시면 다시 하면 되니까.
돈 문제도 그렇고, 또 외모도 그렇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키가 150Cm인데 옆에 있는 친구는 160Cm란 말이지요. 그러면 주사를 맞든 키 커는 운동을 하든 굽 높은 신발을 신는다든지 해서 여기에 또 소망이 생기잖아요. 동생은 쌍꺼풀이 있는데 나는 없어서 수술을 하려고 운동, 소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움직이라는 것은 자극을 받아서 그 차이를 알고 그 차이 폭을 메우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교회에서 어떤 신자가 성경을 하루 2장 읽는데 목사님은 하루에 10장 읽더란 말이지요. 그 폭만큼 더 나아가야 이것이 성화되고, 이것이 하나님께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것으로 봅니다.
기도를 하루에 1시간 하는데 김 집사님은 하루 10시간 하더란 말이지요. 우리교회와는 상관없으니까 편하게 들으세요. 1시간 하는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이만큼 높아져야, 자극 받아서 높아져야 된다. 어떤 사람은 미국에 목회하러 가는데, 어떤 사람은 아프가니스탄에 가더라. 미국에 가면 태평인데 선교를 가려고 하면 나이지리아라든지 아프가니스탄이라든지 위험한 지역에 가야지-- 여기에서 뭐가 생깁니까? 저렇게 해야 더 훌륭한 인격체가 되는 어떤 자극을 받아서 여기에서 운동이 생기는 겁니다.
제가 다시 물어볼게요. 운동이란 어디서 생겨난다? 차이에서 생긴다. 그런데 우리가 차이라는 것은 현재 한 달 수입의 차이일 수도 있고, 키가 작다든지 쌍꺼풀이 있다든지 얼굴이 예쁘다든지 이런 외모의 차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성격 -나는 성격이 굉장히 급한데 저 사람 성격은 얼마나 좋은지 나도 저 사람처럼 기도 많이 해서 화도 안 내고 느긋하게 되어 볼까. 자꾸 어떤 나보다 더 차이나는 높은 목표에 대해서 자극을 받아서 여기에서 사람은 운동을, 노력을 시도하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것이 교회 내에서도 나는 성경을 2장 읽는데 어떤 사람은 5장 읽는다. 그러면 3장만큼 더 소망해서 자극 받아서 키우려 하고, 나는 하루에 기도 5분 하는데 어떤 사람은 1시간동안 하더라. 1시간동안 하니까 인품이 저렇게 달라졌구나. 하고 더 나아가고. 자꾸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것, 저나 여러분이나 뭔가 생각한다는 것, 움직인다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도록 자극 받는 것이 외부에서 올 수도 있고 내가 찾아갈 수도 있어요. 그것이 우리의 모든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이렇게 일 할까요, 안 할까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도 이렇게 일을 해요. 이거 전체가, 예를 들어서 현재 나는 월급이 100만원인데 200만원 받고 싶다고 할 때, 200만원 받는 것도 나고 100만원 받는 것도 나니까 내가 그대로 나에게 옮기지요. 내가 쌍꺼풀이 없는데 쌍꺼풀을 한다. 현재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나고 쌍꺼풀 한 것도 나지요. 내가 돈 주고 남 쌍꺼풀 할 일은 없는 것 아닙니까. ‘너 쌍꺼풀 하니까 기분 좋다.’ 이런 것은 없단 말이지요.
키가 작고 큰 것도 마찬가지고, 교회에서 기도 많이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헌금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이 모든 것이 나는 그대로 있는 채 나의 품위만 더 향상될 때 이 차이가 뭘 만들어 내는가 하면 나의 모든 움직임, 운동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일합니다. 이것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한 자로 “육” 따라해 봅시다. “육” 신약 성경에 나와요. 이것 전체를 육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지요. 하나님은 육 밖의 세계, 무슨 세계입니까? 영의 세계죠. 영과 육이 차이가 납니까, 안 납니까? 차이 나지요.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요? 영에서부터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육이 천국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영에 계신 분이 육의 몸을 입으사(로마서 8장 3절), 육신의 몸이 되사, 우리 육 속에 운동을 일으키면서, 바람을 일으키면서 찾아오는 겁니다.
우리는 교회 가서 내가 하나님 찾아 가겠다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해서 찾아 가겠다고 시도하지만 그렇게 찾아가 봐야 이 아래쪽에 있는 육은 육일 수밖에 없어요. 뭘 해도 이건 육이에요. 이 육의 경계선을 못 벗어나는데 고맙게도 육이 되실 필요도 없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영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육을 입으시고 친히 육으로 오시면서 “나는 영이다.”고 이야기해요.
육으로 오시면서 자기는 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을 ‘영적 육’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최초의 ‘영적 육’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흙에 속한 사람은 육이지만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은 사람은 영이 되는 거예요. 지금은 우리가 육에 속했지만 나중에 우리가 부활할 때는 영의 몸,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몸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좋아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성령이 잉태하여 마리아의 몸에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제가 아까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마리아가 자기 아기보고 뭐라고 한다고요? “너 누구야! 너. 내가 의도하지도 않게 임신을 한 너는 누구야?” “나, 영인데요.” “영이십니까?” “왜 오셨는데요?” “육을 영으로 바꿔치기하기 위해서 왔는데.” “아이고 그렇습니까.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이런 짓거리는 결국은 육이 영 되는 것이 아니고 육이 육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기도 하지 말란 말입니까?’ 기도를 한 번 해 보세요. 해 보면, 기도를 한 2시간 하면 3시간 기도하는 사람이 등장할 걸요. 또 약을 올립니다. ‘2시간도 기도한 거라고. 아이고 참.’
다음은 금식이다. 한 10일 해 보세요. 40일 금식하는 사람 나옵니다. 백날 해도 육의 약만 살살 오를 뿐이지 여러분들이 구원 받는데 별 도움이 안 돼요. 그저 자기 오기 부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이번 시간에 이야기할 것은 영이 육으로 올 때 어떻게 오시느냐? 이걸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 말씀드리고 편히 같이 주무시기 바랍니다.
영이 육으로 올 때 어떻게 오는가 하면, 창세기 4장을 봅시다. 8절을 누가 한 번 읽어 보실까요?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육이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람을 쳐 죽일 때, 예수님은 ‘내가 오는 것은 아벨과 같은 계열로 온다.’ 아벨과 사가랴의 피. 같은 계열로 온다 이 말이죠.
영이 이 땅에 와서 ‘나는 영이다.’ 이렇게 하면 참 좋겠는데, 그분이 오실 때는 우리 육의 노력에 의해서 억울한 죽음을 당해요. ‘나는 말씀대로 살았다. 나는 율법 지켰다.’ 이거 누가 이야기 했습니까? “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며 율법에는 험이 없는 자라.” 누가 이야기한 겁니까? 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사울이란 이름을 가졌을 때에 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율법 다 지켰다. 날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놈은 내가 용서할 수 없다.” 이 사울이란 사람이 가는 곳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우리가 육적인 자극을 받아서 지금보다 더 한 급수 높은, 더 훌륭한 인격자가 되려고 애쓰고 힘쓰는 그런 짓 할 때마다 누가 점점 더 모독을 받고 무시당하냐 하면, 공짜로 영생을 주신 분이 우리한테 무시를 당해요.
신판 21세기 어머니는 이렇습니다.
“석봉아!” “네, 어머니.” “불을 꺼라.” “아니 어머니 왜요?” “너는 글씨를 쓰고 나는 떡을 썰게.” “알겠습니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불을 켜라.” “글씨가 그 따위가 뭐냐? 내 떡을 봐라.”
“어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떡을 가지런히 썰 수 있습니까?” “내가 집 앞 떡집에서 떡을 주문했다.”
그 후 5년 뒤에 다시 어머니와 석봉이는 만나서 재대결을 합니다. 이번에는 역전이 되었습니다.
“석봉아,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게 쓸 수 있느냐?” “컴퓨터로 뽑았습니다.”
“그렇구나.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그저 주시는 은혜구나.” 이게 모이면 교회입니다. 이게 교인들입니다.
끼리끼리 경쟁을 할 이유가 없어요. 봉사 경쟁, 헌금 경쟁, 전도 경쟁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다 예수님 덕분으로 구원 받는 거예요. 이제 여러분 편히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오늘 밤에.
그런데 놀랍게도 평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평등하게 만들어요. 이게 무슨 엉뚱한 논리를 끄집어내십니까? 이러는데. 하나님은 너무나 공평하시기 때문에, 어떻게 공평한가? 그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떡 집에서 떡이 와요. 불 끄고 난 뒤에 주문을 한 거라. “떡집이죠? 빨리 좀 보내주세요. 아들 글쓰기 전에 빨리 오세요.” 불을 켜 보니까 떡이 너무 잘 썰어진 거예요.
이처럼 외부의 근본 되시는 분이 우리의 모든 책임을 다 해결하시고 그냥 영생을 주신다는 점에서 공평합니다. 제 말 잘 들으세요. 그런 점에서 공평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많은 불공평을 주시고 이 불공평 속에서 하늘나라의 공평을 믿을 사람이 누구냐를 찾습니다. 이거 이해되십니까?
많은 불공평을 주셔서 그 불공평 가운데, 이게 불공평이 아니라 ‘너무나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라고 그걸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대표적 인물은 거지 나사로. 나사로가 천국 가면서 연금을 받았습니까, 보험을 든 게 있습니까? 유산을 남겼습니까? 죽을 때도 밖에서 개들이 와서 핥고, 앞에는 부잣집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고 죽을 때도 아파서 죽었어요. 건강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불공평합니까?
나사로가 가난해서 구원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떡집에서 떡을 주문해서 구원 받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 이름이 뭐냐? ‘나는 하나님만 바란다.’ 그런 뜻이거든요.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하나님만 바라면 거지 나사로처럼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을 가지고 있지요. 이 몸에 뭐가 부글부글 끓는다고 했습니까? 다 잊었나? 이야기해 보세요. “욕망” 이 욕망은 무엇에 환장한다? 새로운 자극에 환장하지요. 이것은 내가 말려도 안 됩니다. 못 말립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백날 담배 끊으라고 해도 냄새만 맡아도 피우고 싶어서 환장을 합니다. 술 마시는 사람은 어떤 위협을 하고, 술 마시고 들어오면 아파트 문 안 열어준다고 해도 드라마에서 술 먹는 장면만 나오면 ‘딱 한잔만 먹고 끊을게.’ 하고 백날 해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술 끊으나 안 끊으나, 담배 피우나 안 피우나 천당 가는데 아무 지장 없다. 괜히 나의 차이, 나의 욕망의 운동 때문에 그렇다면 이것 뭐 안 피워도 되겠네. 피우나 안 피우나 마찬가지면 안 피워도 되겠네. 이런 생각이 들면 안 피우게 되고, 술 안 마셔도 되겠네. 이러면 또 안마시게 되는 거예요. 안 마시다가 15년 뒤에 마실 수도 있고. 안 피우다가 26년 뒤에 피울 수도 있고.
그러니까 내 말은 뭐냐? 네 마음대로 사세요. 어차피 떡집에서 주문해서 그것으로 구원 받는데, 그게 무슨 떡입니까? 요한복음 6장에 “나는 하늘에서 온 떡이다.”고 했습니다. 이걸 두 자로 ‘약속’
낯설게 등장한 예수님 뒤에는 뭐가 있더라? 하나님의 약속이 있더란 말이지요. 그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한테 들어오게 되면, 우리 현재의 몸을 내가 주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욕망을 누른다고 됩니까? 세상 전부가 자극인데. 마귀는 뭐라고 합니까? 돌이 떡 되게 해라. 예수님은 지금 굶어서 먹을 것을 찾아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돌이 떡 되게 해라.’고 약 올리고, 메시야가 지금 자기 사람 만들기 위해 설치고 있는데 ‘뛰어내려 봐라. 네 따르는 사람 많을 건데. 하루아침에 스타 되는 거야’ 또 ‘내게 절하면 세상 영광을 다 줄게’
이 욕망을 어느 인간이 이겨냅니까? 못 이깁니다. 이길 생각 하지 마세요. 아 내 욕망이 그러려니 하고 따라가면 돼요. 그러면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지금까지 목사님 강의대로 하면 네 마음대로 살면 구원은 이미 주문해서 온 것이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잘 하는 짓이란 말입니까?’ 이렇게 질문 하고 싶어서, 여러분 가운데는 없는데, 이 방송 듣는 사람 가운데서 노리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무엇을 오해했는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안 들어오고 우리 바깥에서 잔소리만 늘어놓는 분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예수님은 아벨처럼 뭐가 돼요? 피해자의 모습으로 온다. 피해자의 모습으로.
이제 이것만 하고 진짜 마치겠습니다.
아벨은 졸지에 얻어맞았지요. 예수님도 사람들의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지신 몸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그래 내 마음대로 살자. 내 마음대로 살아도 천당 가는데.’ 라고 하는 순간 이러한 나도 주체 못하는 내 욕망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죽었던 그분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요.
예수님이 내 바깥에서 잔소리만 하시는 분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내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미안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야, 참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는데 내가 쓸데없이 왜 욕심을 부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은혜 받아놓고 내가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되지.’ 그것이 바깥으로 삐져 나가면 그것이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온유가 나오고, 화평이 나오고, 자비가 나오고, 형제 우애가 나오고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아이고, 남한테 사기 좀 당해도 할 수 없지 뭐. 주님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그까짓 돈 몇 푼 잊어버리지 뭐.’ 이런 온유가 막 나오는 거예요. ‘저놈을 이겨야지’ 하는 것은 내 욕망이에요. ‘예수님 오늘은 좀 참으세요. 저놈은 내가 꼭 꺾어야 합니다.’ 이러다가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때문에 피를 흘렸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갉아서 뭐하노. 이미 나는 구원 받았는데’ 하면서 난데없이 용서하는 마음이 듭니다.
내 욕망은 ‘목 졸라 죽여야 돼.’ 이것이 내 욕망인데, 이 욕망마저 잠재우시는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이 승리자로 들어왔기 때문에,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 마음이 생겨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지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경쟁할 필요 없다.’ 그 다음에 ‘증거하면 된다.’ 이게 성도의 삶이에요. 경쟁할 필요 없어요. 그런데 내 속의 욕망이 경쟁을 부추기죠. ‘이겨라! 너는 언제까지 100만 원짜리야, 200만원 되어야지. 차이를 향하여 달려가야 해. 그래야 네 인생이 보람이 있어.’ 라고 자꾸 경쟁을 부추겨요.
경쟁할 마음이 있는데, 또 다른 마음이 있어요. 그게 무슨 마음인가? ‘그런 것 할 필요 없이 너는 거지가 되어도 구원 받았어.’ 라는 이미 승리했다는 승리의 기쁜 소식이 내 안에 있어서 ‘구태여 경쟁할 필요 뭐있어! 어느 자리에 있던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음을 증거하면 돼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교회에서 권사 투표 두 번 떨어지고, 남편 장로 투표에서 세 번 떨어질 때 ‘더러워서 이 교회 안 다닌다.’ 이러지 마시고. 그것도 하나의 경쟁이거든요. 집사보다 장로가 높다고 생각하는 그 차이만큼 욕망이 발생해서 따라가는데, 이렇게 되면, 내가 미워하는 최 집사가 최 장로 되거든요. 그러면 장로로 올라가지 못한 집사는 부끄러워서 교회 못 다닌다. 이렇게 하시는데, 그런 경쟁하면 몸만 피곤해요.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것은 내 욕망의 소리인데, 그 욕망 때문에 예수님께서 억울하게 내 욕망의 힘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내 때문에 죽은 것임을 알아서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이 자체가 이미 우리는 승리자입니다. 남하고 붙어서 져도 괜찮고 이기면 더 좋고. 아무 상관없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우리는 부활되기로 예약된 사람이란 것을 생각하시고 오늘 밤도 평안히 잘 주무시기 바랍니다.
그럼 내일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