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우리교회여름수련회-하나님의 창조(3강)
(강의:이근호 목사)
강의 시작합시다.
제가 일 번부터 십 번 할 때 처음에 모른다 했지요. 처음에 근본에 대해서 모른다 했는데요. 모를 수밖에 없는 게 왜 모를 수밖에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안 가르쳐줬어요. 제가 이번 시간 강의하는 게 뭐냐 하면, 아까 내 몸 위주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새 창조, 사명. 사명하고 차이난다 이렇게 했습니다. 사명에서는 새로운 창조고, 내 몸 위주는 보수주의죠. 지키려고 한다 말이죠.
보수주의 지키려고 할 때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첫 번째가 모른다 했거든요. 모를 수밖에 없는 게 모른다는 게 정상인 게, 이게 남한테는 안 알려주고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주어집니다. ‘모른다’에서 ‘안다’가 되려면 중간에 뭐가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언약 백성, 하나님의 언약이 어려우면 약속으로 고칩시다. 약속된 백성에게만 ‘모른다’에서 ‘안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내산 꼭대기 구름 위에서 누굴 만납니까? 모세가 올라가서 누구와 만나요? 진짜 여호와 하나님하고 만나잖아요. 다른 민족, 단군의 자손한테는 알려주지 않았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기까지 단계에서 첫 번째 ‘모른다’죠. 두 번째가 뭐였습니까? ‘모른다’ 그 다음에 뭡니까? ‘알고 싶지 않다’에요. 사람이 자기가 모르는 게 있으면 피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약점을 스스로 제거하려는 본성이 있어요. 저거 내 모른다. 하면 그 자리를 피하면 모르는 무식하다는 아픔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근본에 대해서 모르면 그냥 기피하는 거죠. 그냥 알고 싶지 않다. 기피죠. 그냥 모른다. 두 번째 자동적으로 알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언약백성,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모르겠다? 도망치고 싶어요. 도망치는 걸 어디다 도망쳐. 이게 어디다 도망쳐. 하고 도망 못 치게 꽉 잡아서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 꼭대기에서 진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때 그때는 그들은 모른다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하면, ‘모른다’에서 ‘안다’로 바뀌어요.
다시 합니다. 지난번에 제가 여러분 10분간 쉬면서 새로운 창조가 여러분 속에 나왔는가 검토하라 하니까 갑자기 간식이 새로운 게 들어와 버려요. 간식이 새로운 게 아니고, 새로운 창조가 여러분 속에서 나왔습니까? 이래 이야기했다 말이죠. 제가 이렇게 물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 만약에 공부를 하는데 새로운 수학공식을 몰랐었는데 새로 안다.
이런 걸 아는 게 아니고, 이것은 뭐냐 하면, 기존의 열 가지 내용에서 없었던 것이 새로운 게 나온 거예요. 기존의 열 가지에서 안 들어있는 새로운 거. 이것은 바로 신학적으로 언약내용인데. 하나님이 알려줬고 성령으로 알려줬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새롭게 하는 것이 여러분께 있습니까? 라는 투로 제가 질문하는 겁니다.
내가 알려고 애썼더니만 아는 게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두 번째, 알고 싶지도 않은데 기피하고 싶었는데 뭔가 알게 된 것. 그것이 여러분이 어떤 직장에 있던지 간에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그것이 여러분에게 튀어나와야 돼요. 그게 뭐냐? 아하, 세상만사는 예수님 지 마음대로 하는구나. 그런 언약, 새 언약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 짧은 수련회기간에 언약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다 할 수는 없지만 제가 군데군데 그 알맹이 같은 것, 핵심만 이야기합니다. 언약이란 뭐냐? 기존의 열 가지 내용 속에 포함되지 않는 외부에서 주는 건데, 이스라엘 백성들만 알고 있는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서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해줍니다. 그래 되면 우리는 ‘모른다’에서 ‘안다’가 되고.
두 번째 봅시다. ‘모른다’에서 ‘안다’로 바뀌고, 두 번째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여러분 말 좀 해보세요. 내가 여러분 축 처져 앉아 있으니까 힘든데. 두 번째 뭐라고 했어요. ‘알고 싶지 않다’였지요. 우리 권사님 수고해주세요.
그 다음에 하나님이 뭐냐? 억지로 알게 해 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자꾸 오해하기를 나는 안다. 이제부터 즐겁게 하나님 알아 가야지. 이런 인간 없습니다. 알아도, 알긴 알겠는데요. 저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또 도망칩니다. 도망치면 억지로 알게 해 줄 게가 나옵니다. 억지로 알게 해 주시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개시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어디로 갑니까? 내 몸은 보수주의지만 하나님은 보수주의 같은 내 몸을 통해서 언약 내용에 대해서 새로운 차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사명으로써 그게 튀어나오도록 해주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몫이 아니고, 처음부터 근본 되신 주님의 뜻이 강제로 우리를 사용해서 우리를 활용해서 자신의 뽑아낼 것은 자기가 뽑아내는 식으로 우리를 평생 동안 다루어나가시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가만있으면 돼요. 가만있으면 얻어터지게 돼있습니다. 내가 나를 얻어터지게 때리지 마시고. 내가 날 때리지 마세요. 가만있으면 우리는 모른다. 두 번째, 알고 싶지 않다. 세 번째 뭡니까? 다른 분 이야기하세요. 세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김경숙 권사님, 세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정 그리워죠. 간단하게 정이 그립지요.
그러면 이걸 강제로 뭐 하겠어요. 정 그립다. 하는 보수주의적 경향을 버리고, 나에게도 새로운 게 있네. 라는 기쁨을 줍니다. 여러분들이 새 차 바꿀 때 기쁘고, 새 집 바꿀 때 기쁘고, 새 티비 바꿀 때 기쁘고, 애들 새 자전거 바꿀 때 기쁘고, 새 신발 바꿀 때 기쁘죠. 신발 새로 살 때. 강아지도 새로 살 때 기뻐요. 수련회장도 새로 바꾸니까 좋잖아요. 내년 또 하고 내년 또 하고 오년 하면 이것도 지겨워요. 또 딴 데 가야 돼.
새로운 게 나오면 기쁜데 사람은 정 그리워하고 있다가 내가 원하는 정, 내가 원하는 사람과 살고 싶다 하다가 갑자기 열 가지 단계에 포함하지 않는 낯선 단계가 새로운 게 발생되면, 우리는 그 순간 큰 기쁨이 몰려옵니다. 야, 내가 성도 맞구나! 내가 오늘밤 죽어도 낙원에 가겠네. 왜?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기쁨이 등장하니까.
그 기쁨이 뭐냐?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그 기쁨이 언약 내용이에요. 그 언약 내용이 뭐냐 하면, 그겁니다. 세상만사는 예수님 마음대로 되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이걸 적어서 여러분 기쁜지 한번 시험해 보세요. 세상만사는, 우리 미래 것입니다. 우리 미래를 보장, 우리 세상만사, 미래. 다 예수님 마음대로. 이래 적었다 합시다. 같이 읽었다 합시다. 기쁩니까? 안 기뻐요. 안 기뻐요. 안 기쁘지요.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그래 예수님, 니 마음대로해라. 그래, 니 잘났다. 나도 잘났다. 이래 된다 말이죠. 안 기쁜데 언제 이것이 기뻐지냐 하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그래서 절망하고 낙심될 때, 그때 야, 세상만사는 내가 공연히 걱정했구나.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걸 내가 왜 부질없이 그렇게 고집을 부렸지. 난 기도하면 되는 줄 알았고, 금식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말짱 소용없구나. 세상만사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다 되게 돼있는 걸 왜 내가 그걸 몰랐을까. 라는 새로운 것에 창조되는 기쁨이 주어지는 겁니다.
제가 십자가마을 수련회 하면서 마지막 날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제발 자기의 구원의 근거를 자기의 손에서 찾지 마세요. 이거는 시험 듭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우리 바깥에 있어요. 십자가가 구원의 근거지, 내가 무슨 짓을 했는가와 상관없이 구원은 내 안에서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을 전에는 그걸 몰랐었는데 내 바깥에서 이미 내 구원이 확정됐다는 그걸 알았단 말이죠. 알지만 우리의 내 몸 중심은 고집이 세서 돌아서서 별로 알고 싶지 않네요. 수련회 때만 알고 그 다음부터 잊을 랍니다. 그런데 내 하는 일이 가다가 난데없이 나에게 새로운 일이 하나님이 날 통해서 일한다는 걸 깨달을 때 난데없는 큰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뭐라고요? 역시 나는 착해. 이게 아니고, 역시 나는 열심히 기도한 보람이 있어. 이게 아니라 기도하든 착한 것 관계없이 뭔가 주님께서 나를 주무르는구나. 나를 놓지 않는구나. 이걸 깨닫는 새로운 것이 나온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거예요.
이게 문제 들어갑니다. 제가 쉬는 시간에 여러분 하는 일 중에서 새로운 것이 뭐가 있습니까? 물으라고 여러분한테 점검해보라고 했는데, 그 새로운 게 뭐였습니까? 자, 지금까지 강의 내용이 그 새로운 게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약속하심이죠. 이제 이해되십니까?
그 새로운 것이라는 것이 뭐, 사명 감당한다고 두 명 전도한 걸 열 명 늘이는 게 그게 새로운 게 아니고, 나와 상관없이 누가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 이게 새로운 겁니다. 나와 상관없이 누군가 내 허락도 없이 내 몸이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이 새로운 겁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하나 예를 들게요. 탕자가 집 나갔습니다. 재산 날렸습니다. 몽둥이 들고 기다릴 줄 알았지요. 몽둥이 들고 자기를 기다릴 줄 알았더니만, 세상에 새 옷에다가 새 가락지에다가 소를 잡고 잔치를 나를 기다릴 줄이야! 이것은 예상 못한 새로운 현실이죠. 그 새로움이 탕자를 기쁘게 한 겁니다. 그런 새로움. 내가 무슨 짓을 했는가 묻지도 않고, 주님께서 창세전부터 미리 장만한 것을 놀랍게도 새롭게 느껴지도록 하는 새로움.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부모공경, 이웃사랑,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그런 걸로 등장해요. 욕심내지 않고 그런 걸로 등장한다 이 말이죠. 이게 수련회에요. 여러분들 절에 가면, 이래 못합니다. 지금 불상에다 탑돌이하고 있다고. 여기 탑 있데요. 거북이 탑. 앞에서 빙 돌고 돈이나 툭 던지고. 십 원짜리 동전이나 백 원짜리 동전 하나 던지고. 그저 재수 좋으라고.
제가 아까 했지요. ‘재수 좋으라고’에 뭐가 포함되어 있다? 가정, 열 가지 다 포함되어 있죠. 그저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저 가정 화평하고. 해돋이 가서 뭐 빌었습니까? 우리 남편 사업 잘되고, 몸 튼튼하고, 술 좀 줄이고 그저 그거 비는 겁니다. 보름달 뜰 때 빌고, 해 뜰 때 빌고, 틈만 나면 빌미 대고 다 빌고. 그 비는 거, 우리는 욕하지요. 그럼 우리는 그럼 거 안 빌고 집구석에 앉아 있어도 뭐 빕니까? 맨 똑같은 것 빌어요. 교회 가도 그거 비는데.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까닭 있는 이유 있는 하나님 섬기기 아닙니까.
욥은 까닭이 없는데 이유도 없는데.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는 이도 하나님인데 우리는 교회 나갈 때마다 까닭을 가지고 들어가요. 뭔가 이것만큼은 이번에 이루고 말리라. 뭔가 이것만큼은 금식해서 성취하리라. 뭔 까닭이 있어요. 그것은 결국은 아까 열 가지 단계에 해당된다 말이죠.
이쯤에서 열 가지 단계 다시 한번 또 갑니다. 여러분 지겹다고 욕해도 할 수 없어. 다 외울 때까지다, 씨. 다 외울 때까지. 나도 못 외우는데 자꾸 외워야 돼. 일 번. 이거 빨간 걸로 합시다.
1번, 근본을 모른다. 2번, 알고 싶지 않다. 3번, 정 그리워. 네 번째 뭐였습니까? 아, 3번 틀렸다. 3번이 외로움. 외로움을 이길 수 없어. 너무 외로워. 네 번째, 정 그리워. 다섯 번째, 종교로 하나로 만드는 것. 여섯 번째, 그래서 뭐가 됩니까? 화목 됐죠. 한 마음. 일곱 번째, 그 하나 마음된 걸 가지고 이걸 종교고. 여덟 번째, 그것이 뭡니까? 한 마음 이것이 진리고, 진리라 하는 것은 확고부동한 거죠. 이 진리가 뭐가 됩니까? 종교가 되고. 아홉 번째는 쉽지요. 종교로써 나 죽고 난 뒤에 미래보장. 나 죽으면 천당 갈 거야. 아마. 왜? 나는 행복했으니까. 열 번째, 그것이 나의 운명이다.
이것 전체가 예수쟁이든 예수쟁이 아니든 다 갖고 있어요. 이걸. 전부다 이거 안에서만 움직여요. 이게 ‘아이 엠 어 나’에요. 내가 이거라고. 내가 이거에요. 이것뿐이에요. 여기서 이래 되면 뭐가 되냐 하면, 내가 나 지키기에요. 이게 종교를 통하든 신을 빌려오든 예수를 빌려오든 성령, 삼위일체 다 해도 결국 남는 것은 내가 나지키기입니다. 화살표가 나한테 와요. 이걸 철학에서 뭐라고 하느냐? 이걸 주체라 하지요. 이걸 주체라 하거든요.
이것을 누가 다루신다? 이것을 외부에서 이게 난데 나. 이게 나다 말이죠. 전체를. 난데 이것을 누가? 외부에서 가지고 노는 거예요, 이걸. 다루시는 가지고 노는 거예요. 그 가지고 노는 분을 우리는 뭐냐? 이게 바로 근본입니다. 근본,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새로운 창조가 나와요. 여기까지 아시겠지요.
자, 이거 안다고 하고 다 지웁니다. 새로운 창조만 놔두고 다 지웁니다. 다 지우고 새로운 창조가 그림으로 그리면, 새로운 창조가 나, 나를 다룹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창조는 뭘 갖고 있느냐 하면, 목적을 갖고 있어요.
그러면 나는 케이블카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이게 스무 살 때, 서른 살 때, 사십 살 때, 이거 열 살 때, 이거 오십, 이거 구십, 이거 백 살. 백 살까지 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있다 하면, 이게 케이블카에 대롱대롱 스키장에 리프트카 달리듯이 리프트카에 타서 십대,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쭉 가면서 이게 어디로 갑니까? 이게 하나의 목적이 있는 거예요. 그 목적이 뭐냐 하면,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17절. 뭐였습니까? 세상만물은 누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거 목적이 뭐냐? 똑같이 살아도 한쪽은 어떤 사람은 천국에 한데 모아놓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한데 모아놓습니다. 그런데 천국 모아놓고, 지옥 모아놓는데 이거 누가 결정하는 겁니까? 살아오면서 우리가 하는 겁니까, 우리 행함입니까? 아니죠. 외부 아닙니까. 외부니까 외부는 우리가 마음대로 조종 못하잖아요. 외부에서 맛보기 식으로 십대, 이십대, 삼십대 맛보기 식으로 장차 천국과 지옥을 조금씩 조금씩 보여준 거예요.
보여주다가 그때는 희미하게 보이지만 나중에 죽고 난 뒤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때는 실제로 보고 예수님의 창자국을 실제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창자국의 의미는 뭐냐 하면, 이 철딱서니 없는 매달려 있는, 매달리면서 오직 나.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오직 나만 생각하면서 나를 위하여 대신 나만 챙기면서 평생 동안 나밖에 모르는 나의 행복, 나를 위해서 이 외부에 있는 케이블카에서 대신하여 대신, 대신, 대신. 대구신학교 말하는 거 아닙니다. 대신, 대신, 대신하여 다 십자가에 피 흘렸다는 것을 마지막 가서 천국 가서 가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우리의 면류관을 누구한테 반납합니까? 주님한테 던지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주님의 덕분입니다. 그게 천국이에요.
내가 한 것 없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은 주님께서 내 대신 기도해서 이루어진 성과입니다. 이래 나오는 겁니다. 그걸 우리는 이십대, 삼십대 살아오면서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맛보기 식으로 딱딱 보여준 거예요.
자식이 아프다든지, 남편이 사업이 잘 안 된다.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 교회가 문제가 있다든지 이런 걸 통해서 내가 행복을 위해서 붙잡고자 했던 모든 것이 나의 행복을 위해서 아하, 이게 바로 내 중심의 엉터리 같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고, 보수주의의, 밑에는 보수주의입니다. 이 밑에 나나나 이거는 보수주의, 위에는 새로운 창조, 목적을 향한 새로운 창조죠.
그 목적이 뭐냐?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인데 그 성경구절 한번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324페이지. 이건 죄송합니다. 16절, 17절이 아니고, 14절부터 17절까지. 길게 한번 해봅시다. 골로새서 1장 14절부에서 17절. 아하, 죄송합니다. 13절부터. 자꾸 죄송하네요. 13절부터.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아멘. 17절 계속. 14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대신 죄 사함 얻고. 그 다음에 계속.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예. 보이지 않는, 형상의 목적이고, 그 다음에.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먼저 나신 자, 우리는 모를 때부터 먼저 계신 자, 그 다음에.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분은 케이블카잖아요. 벌써. 그 다음에.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먼저 계시잖아요. 우리보다 먼저 계시잖아요. 그 다음에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함께 연결했잖아요. 함께 연결돼서 맺어졌잖아요. 그래서 성공한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담는 긍휼의 그릇이고, 이쪽은 진노의 그릇이고.
이걸 지금 이 강의를 우리교회 교인들 앞에 하는데, 만약에 동화사 주지들 모아놓고 한다 합시다. 동화사 주지하고 그 다음에 보현사 주지하고 주지들, 불자들 모아놓고 이 강의를 고대로 했다. 불자들 쭉 모아놓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들이 여기에 대해서 분명히 반발하겠지요. 왜? 성령 안 받았으니까. 그 반발하는 것을 우리가 모르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런 반발이 우리 속에서도 매일같이 나오기 때문에. 그럴싸한데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하고 대번 나올 거란 말이죠.
그럼 불자들, 대순진리회나 이런 불자들, 원불교 이런 사람들이 또는 불신자 철학가들이 이 강의를 들었다 할 때 나올 수 있는 제일 큰 질문을 제가 스스로 여러분 앞에서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이제 답변할 차례에요. 아까 우리 김대식 선생이 강의했기 때문에 답변해야 돼요.
이 케이블카는 안 지우겠습니다. 그림은 딱 있으니까. 강의의 첫 번째 반발이 이겁니다. 아까 이 목사님께서 1번 ‘모른다’에서 '안다‘로 바뀔 때 이 목사님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거는 세상 사람에게는 모르고, 오직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에게만 안다고 했는데, 이 목사 당신 답변 해보세요. 왜 하나님은 이 세상사람 다 만들어놓고, 왜 택한 예정된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알게 하는 이유를 대 보세요. 대식 씨 한번 이야기해보세요.
-예수님 마음대로.
정답 나왔습니다. ‘예수님 마음대로’라 하죠. 그때 김대식 성도의 얼굴에 겁 두 잔 날아갑니다. 에라이, 씨. 그리고 간식 복숭아 두 개 더 날아옵니다. 스데반 집사 돼버립니다. 그것 가지고 죽진 않지만. 사도 바울이 뭐라고 욕 얻어먹었느냐 하면, 예수님한테 미친놈이란 소릴 들어버렸어요. 사도 바울이. 당신이 일을 다 듣고, 다 듣고, 다 들어보니까 남는 건 딱 한 개야. 이유 없이 무조건 예수님은 뭐다? 하나님이다. 딱 그거 하나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에 하나님을 다 믿었어요.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딴 하나님은 누가 만들어내고? 내가 열 가지 담겨서 내가 지어낸 내 몸 위주로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은 주여, 누구십니까?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진짜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흔히 진짜 하나님이다. 이러한 전제, 인식의 전제가 깔려 있는 상태에서 나온 거예요.
그걸 방금 김대식 선생은 예수님이라 하지만 구약적으로 보면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 마음대로라. 그러니까 김도올, 김용옥 교수. 김용옥 교수가 신학대학 나왔잖아요. 이것을 알아요. 그래서 얘기합니다. 기독교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토속민족이 주장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란 신을 믿는 그 사람들이 조작해낸 것이 기독교다 했어요. 그 기독교 안에는 오직 선택사상과 메시아사상으로 중무장돼있다고 김용옥이 욕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맞지요. 김용옥, 그 사람이 바보가 아니에요. 한국 목사들보다 더 똑똑해요. 다만 문제는 그게 그 사람이 안 믿어진다는 거예요. 왜 모든 민족마다 신이 있는데 그 많은 신들이 있는데 하필이면 남의 나라 이스라엘이라는 어떤 소수민족의 여호와가 유일하게 어떻게 참된 신이고, 나머지는 전부다 우상이 되느냐 이 말이죠.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예요.
그런데 십계명에 뭐라고 돼있어요? 그걸 하나님이 아시고 뭐라고 합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면, 신을 몇 가지 알아야 돼요. 우선 여호와를 알아야 되고, 두 번째는 뭡니까? 다른 신이 어떤 신인지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다른 신이 어떤 신인지를 모르고 있으면, 지는 여호와, 여호와 하지만 그 여호와가 알맹이 빼보면 전부다 다른 신이에요. 자기 욕심이 들어있는 신이에요. 그래서 여호와라 하는 것은 다른 신에 의해서만 알아지는 게 여호와입니다.
자, 그것이 어떻게 알아지는지 제가 지금부터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 신, 참 신이죠. ‘나’와 다른 신의 차이점은 다른 신이 이 땅에서 승리자가 되고, ‘나’ 신은 이 땅에서 뭐냐? 패배자가 되는 거예요. 이쪽은 가해자, 이건 피해자. 이렇게 나타나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왔을 때 그분은 승리자로 오신 게 아니고, 사람들에게 몰매 맞고, 사람에게 뺨 맞고, 사람한테 놀림 받고, 결국에는 사람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신, 그런 메시아, 그런 메시아로써 오신 분이 참 신이고, 그것을 그렇게 학대하게끔 우리 마음속에 작열하는 신이 이게 다른 신, 가짜 신, 우상인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내시가 마차 타고 가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빌립 집사란 사람이 등장했어요. 그때 에티오피아 내시가 책을 봅니다. 성경책, 이 두꺼운 책을 봐요. 이 두꺼운 책을 보는데 성경책을 보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그런 대목 보고,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엔 창대하리라. 이런 거 볼 줄 아는데, 그 하필이면 내시가 본 책이 이사야 53장을 봤습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평안을 누리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 하는 그 대목이 나왔을 때 그 에티오피아 내시가 질문을 합니다. 저, 집사님. 여기서 ‘그’가 누굽니까? 라고 했을 때 그분이 바로 얼마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 아닙니까? 그 소리 듣고 빌립, 내시가 가던 마치를 멈추고 물이 있는 곳에 가서 즉시로 이제부터 내가 새 사람입니다. 세례 받았다는 거 아닙니까.
이것은 기존에 내 중심으로 살다가 내가 바보 중에 바보다. 왜? 이 세상에 근본이 계신데 내가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걸로 살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분이 내가 지금 빌립, 내시를 만난 것은 케이블카처럼 외부에서 나를 지금 구원시키려고 미리 다루고 있다는 것을 그때 에티오피아 내시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는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이 신과 신의 싸움이다 이렇게 생각되는데 의외로 하나님께서는 신과 신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하나님과 신의 싸움으로 어떤 특정 사람과 인간들이 신의 싸움으로 이렇게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한번 봅시다. 사도행전 17장 31절.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사도행전 17장 31절. 30절, 31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됐습니다. 거기에 뭡니까? 정하신 뭐가 나와요? 뒤에. 야~ 이것이 얼마나 좋은지. 정하신 사람이에요. 신을 논하는 것이 아니에요. 정하신 사람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서 사람을 확인해요. 그런데 보통 사람은 누굴 무시합니까? 사람을 무시하잖아요. 하나님이라 하면 우리는 누구라도 약간 겁을 냅니다. 안 믿는 사람도. 아이고, 하나님 뜻 아이가. 이렇게 겁을 내는데, 같은 사람이라면 지나 개나 똑같은 인간인데 니가 뭐 별나나. 무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무시할 만큼 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보내셨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뭐 별다른 사람은 아니에요. 다만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미움 받아서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그 사람, 그 정하신 사람을 보내서 옛날에는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허물치 않았습니다.
별로 신경 안 썼는데, 마지막 때에 이 사람을 보내셔서 이 사람을 믿지 않는 자는 한 날을 정하사 모든 인류를 이유 없이, 이유 있죠. 그때는. 예수 안 믿었다고 다 심판해버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그 날이 온다는 겁니다. 사람입니다, 사람. 정하신 사람이에요. 정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정하신 사람이라고요.
사람 같으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이 정하신 사람과 ‘나’라는 사람과 늘 비교하면서 연결지우면서 살아가야 되겠지요.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했겠는가?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했겠는가? 이렇게 연결지우면서 살아야겠지요. 나는 하나님 안다. 자꾸 나하고 신하고 연결시키지 마세요. 그 신은 내 행복을 위한 신이고, 나 말고 사람하고 연결시켜야 돼요.
얼마 전에 배형규 씨가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배형규 씨를 순교자로 만들었습니다. 위대하다, 대단하다. 제가 이야기해봐야 알아주지도 않지만 저는 초를 쳤습니다. 차라리 십자가에 배형규 목 달아라. 십자가에 배형규 달아서 흔들어대라. 사람들이 얼마나 정하신 사람하고 비교할 줄 모르고, 자기가 알고 있는 신과 자기와 자꾸 연결시키니까 내가 지금 배형규 목사를 높이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을 비교해야 할 것인데 누구 말입니까? 예수님하고 배형규 하고 비교해 보면, 누가 의인이에요? 배형규 믿어서 구원받습니까?
그래서 너무너무 답답해서 유행가 가사를 하나 적어놨어요. 마리~아, 아베마리~아. 하는 노래 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에요. 천주교가 사람들을 모집하기 위해서 예수 빼놓고 그 자리에다 뭘 집어넣었느냐 하면, 가장 모범적이고 신앙적으로 댓길이라고 여기는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여인을 하나 집어넣습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집어넣어버려요. 마리가 그냥 마리아가 아니에요. 아베 마리아. 아베마리아, 아베마리아. 아베마리아가 뭐냐 하면, 거룩한, 이거는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집어넣을 때 천주교 신자들이 성당에 들어가면서 먼저 뭐 합니까? 이거부터 먼저 하지요. 그거 누구 상입니까? 예수 상입니까, 누굽니까? 마리아 상, 그거 하지요.
정하신 사람이 마리아가 아닙니다. 마리아가 심판을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누구에요? 나사렛 예수에요. 마리아하고 나사렛 예수 차이점은 마리아는 모범적인 사람이고, 예수님은 우리한테 얻어터진 사람이에요. 내 죄 때문에 내 고집 때문에 얻어터진 분이고, 피 흘린 분이고. 마리아는 면사포 쓰고 곱상한 사람이에요. 마리아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고, 예수님은 내가 기피하고 싶은 인물이에요.
지금 만약에 이근호 목사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총 맞아 죽었다. 우리교회 앞에 플랑카드 붙이시지. 이근호 목사 드디어 순교하다. 자기 소원대로. 일찍 천당 가고 하더니만 드디어 이근호 목사 먼저 갔다. 우리는 그 뒤를 본받자. 우리교회 그거 붙이면 우리교회 이단입니다. 갑자기 뭐가 날아가 버렸어요. 십자가 이근호 되고 흔들어 대고 사모 우는 거 YTN에서 찍고 난리에요. 여보~. 진주, 진주는 아빠. 돌발 영상 다 하는 거예요.
예수 어디 날아가 버렸어요? 없어요. 예수 안 믿어요. 우리는 그분을 본받아야 돼. 갑자기 예수 본받는 거 그거 믿어야 돼. 예수님을 우리는 본받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 되거든요. 평소부터 평소에 우리는 예수 싫어한 사람입니다.
아베마리아 이제 치웁시다. 천주교만 아베마리아가 아니고, 개신교도 아베마리아에요. 주기철, 손양원 전부다 아베마리아 역할 다 해버려요. 배형규 이런 사람들. 그래서 배형규 그 사람은 개죽음 당했다 이 말이에요. 미쳤다고 가나? 왜 가는데? 왜 갑니까? 정이 그리워서. 자기 교인 없으니까 거기 가는 거예요. 자기 존재 의미를 하기 위해서.
그래서 지금부터 이번 시간 몇 분 안 남았지만 할 때까지 인간의 존재의미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걸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상당히 심사숙고한 사람이 있었어요. 누구냐 하면, 김종환. 김종환이란 사람은 가순데 그 사람이 부른 노래, [존재의 의미]란 게 있습니다.
기다려. 내 달려 갈 테니. 참, 그 노래 들으며 저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 백수의 한. 취직은 안 되지, 결혼은 해야 되겠지. 그 사람은 취직 안 됐다고 딴 남자하고 지금 결혼하려고 하지, 미치는 기라. 조금만 기다려. 내 달려갈 테니까. 실직자의 서러움, 백수의 서러움을 달래는데.
그 김종환의 존재의 의미는 반드시 자기가 욕망하는 것이 있어야 여기서 존재의 의미가 발생돼요. 아, 이게 약점이야. 인간은. 어떤 의미라 하는 것은 내 욕망과 연결고리가 가질 때 비로소 그쪽은 나에게 의미가 되는 거죠. 어디 자장면 먹고 싶다. 할 때 스파게티 집 많이 있어도 나한테 의미 없어요. 자장면 먹고 싶다. 싶은데 어디서 자장면 굽는 냄새 풍기면, 아하, 그때 중국집이구나. 존재의 의미가 중국집에 나는 자장면 먹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존재의 의미가 되려면, 먼저 내 욕망이 어디서 생기는가 알아야 돼요. 내 욕망이. 이거 또 설명해야 되는데 이건 내 쉽게 하겠습니다. 이건 어렵게 하면 힘드니까. 욕망이 먼접니까, 따지는 게 먼저겠어요? 어느 게 먼저겠어요? 내 욕망이 내 감정의 분출이 항상 먼접니다. 따지는 것은 나중이에요. 이웃 사랑을 해야 된다. 따지지요. 하지만 미울 때는 미움이 나오게 마련이에요. 아, 밉지만 성경 보니까 이웃 사랑해야 돼. 하고 억지로 웃으면 상대방이 눈치 챕니다. 그거 아주 추합니다. 상당히 추해요.
욕망의 특징은 이것이 나를 지키기 위한 욕망이기 때문에 보수적입니다. 보수적 경향이 있어요. 내 욕망은 나의 하인인데 뭐냐 하면, 나를 지키기 위한 욕망이에요.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욕망이다. 나를 위한 욕망이기 때문에 내가 시장 가서 물건을 고를 때 시장 몽땅 내 것, 이러진 않아요. 나한테 의미가 되는 것만 고릅니다.
저녁에 잡채를 해 먹는데 뭘 사야 되지? 옳지, 당면을 사야 되지. 국수? 의미 없어요. 칼국수? 의미 없어요. 어, 당면? 그건 나한테 의미 있다고. 그래서 나한테 의미라 하는 것은 반드시 취사선택이라. 취사 다음에 뭐가 나오죠? 선택. 선택권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에게 있어요. 그러니까 선택은 내가 나를 선택해요. 왜? 그래야 나한테 의미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선택이 나가보면 신이죠, 신. 예수, 성령 이것도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해요, 내가. 하나님의 계시, 이건 내가 선택해요, 내가. 야, 어제 꿈에 예수님 나타나는데 아아, 인물 좋데. 키가 훤칠하니. 허연 도포 휘날리면서. 자나? 누구십니까? 나는 나사렛 예수다. 아이고, 주여. 니가 나의 충성됨을 내가 보았다. 얼마 수명을 몇 년 더 연장해 줄꼬? 25년, 30년 골라잡아라. 내가 니 원하는 대로 수명 연장해 줄게. 제가 욕심 없습니다. 주여, 50년만. 알았다. 50년 더. 이런 거.
히스기야가 재미있는 건 히스기야가 15년을 더 보너스 받은 줄 알지요. 히스기야, 이 바보라.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갔어요. 뭐냐 하면, 15년 더 살은 게 아니고, 15년 원상복귀, 뒤로 되감기 한 거예요. 그래서 수요일 날 그 설교하면서 했지요. 오 목사님 찾아서 오 목사님, 다시 군에 갈래요. 지금 제가 30년 만약에 주님 앞에 더 보너스 받는다면, 지금부터 30년 더 사는 게 아니고, 다시 이 나이로 군에 가 있습니다. 나 죽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손해 보는 장사 안 해요. 되감기해서 다시 살게 하는 거예요.
인간의 기도나 이 모든 것이 자기 욕망이 우선입니다.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우선이며, 그 욕망에서 취사선택을 하는데 누구 좋으라고? 내 몸 지키기 위한 쪽으로 선택해요. 취사선택하는데 거기에 하나님, 예수, 어떤 용어도 좋습니다. 그것도 내게 맞는 나한테 의미 있는 예수가 돼요. 남의 예수 말고, 내 욕망을 채워주는 나의 예수로서 지가 임의로 우상으로 만들어내요. 매일같이. 내일 되면 또 딴 걸 원하니까.
그러니 난 날마다 가짜지요. 진짜는? 진짜는 없지요. 평생 가도 가짜밖에 없지요. 맨 날 내 몸, 내 욕망이 맞는 욕망이 끌리는 대로 나는 거기에다가 취사선택해서 내 의미 찾기 바쁜 거예요. 의미 찾기.
그러데 여러분 성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성경이나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보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기도한 것은 다 피해가요. 근데 감사한 것은 내가 기도하지 않은 것만 다 주세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면서 더욱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아하, 기도도 하지 않는데 주시는구나. 그렇게 내 욕망을 다 피해가.
그래 되면 나의 존재를 위한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예수 되라고 우리를 이렇게 케이블카처럼 계속해서 지금도 관계를 엮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지요. 아,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새로운 창조물로써 팍팍 새 창조가 나오라고 그렇게 한다는 걸 안다 말이죠.
자, 그러면 이래 놓고 의미에 대해서 좀 더 가봅시다. 의미는 어디서 생기는가? 조금 참으세요. 지금 한 10분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5분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5분하고 마치겠습니다. 밥 먹으러 가면 됩니다. 참, 적어 놓으면 좋은데. 의미란, 좀 적어놓으세요. 차이에서 나는 거예요. 여러분, 이거 하나 이번에 꼭 알아야 돼요. 의미는 차이에서 나는 거예요.
백화점에 갔다. 이거는 늘 써 먹었던 거지만 식상하지만 한 번 더 들어주세요. 50만 원 들고 50만 원 옷 사기 위해서 백화점에 갔다. 목표는 내 현재 욕망은 50만 원짜리에요. 돈 50만 원 마련됐어요. 50만 원짜리 봐 놨던 원피스 하나 사면 돼요. 그러면 내 욕망은 달성된다. 내 뜻입니다.
갔는데 50만 원 딱 했는데 50만 원짜리 원피스 있기는 있는데 뒤로 밀리고 앞에 새로 나온 신제품 150만 원짜리 딱 걸려있을 때 안 삽니다. 왜? 내 존재의 의미가 이동해요. 어디로? 그전까지는 주여, 50만 원짜리 하면 더 이상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다가 150만 원짜리 보고, 50만 원짜리 저건 옷도 아니다. 아이고, 사고 후회하겠다. 사고 후회하는 건 솔직해요. 왜냐하면, 이미 150만 원짜리 봐 놨기 때문에 사도 뭐가 뱅뱅 돕니까? 150만 원, 150만 원 돕니다.
이건 애들도 마찬가지에요. 애들도 배고플 때 된장에 고추 찍어 먹으면 맛있다 해요. 그런데 뷔페 가서 음식 쭉 깔아 놓으면 야, 고추 찍어 먹으라 하면, 엄마 미쳤나. 고추 찍어 먹게. 여기 와서 고추 찍어 먹나. 딴 것도 있는데. 이미 내 존재의 의미는 이 차이에 의해서 새롭게 업그레이드, 이미 발전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면 처음에 알았던 50만 원짜리로 내 치장하면 나는 그걸로 만족하겠다는 나와 150만 원짜리 원피스의 나와 이만큼 차이가 질 때 이 차이가 지는 것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것도 알아야 돼요. 여기서 운동이 나와요. 아, 앞으로 내가 300만 원짜리 할 거야. 라고 사람이 목적하는 바가 생기죠. 하면 된다, 하면 된다. 할 수 있거든이 뭐냐. 이게 나로 하여금 사람 살아가는 보람을 줍니다. 그 차이가 지니까.
지금 과장이니까, 과장이 제일 높은 게 아니죠. 차장 있고, 부장 있고, 상무 있죠. 이 차이가 나로 하여금 버텨야 돼. 저 차장, 부장 될 때까지. 새로운 나에게 운동의 힘을 나에게 지어줍니다. 요것이 뭐냐? 이 운동 있을 때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이걸 존재의 뭐라? 존재의 내가 생존하는 의미다. 존재의 의미입니다. 존재의 의미에요.
누가 만들어냈어요? 내 욕망이. 욕망의 끝은 없지요. 욕심이 잉태하여 욕망이 잉태하여 뭘 낳고?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하여 뭘 낳는다? 사망을 낳는다. 결국은 이 차이 지지요. 그러면 이건 우리 운동이고.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거 하고 이번 강의.
이건 우리 운동이고, 그럼 주님은 운동합니까, 운동 안 합니까? 새 창조 하지요. 그럼 새 창조하면 주님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주의 의미 있잖아요. 의미 있으니까 운동할 거 아닙니까? 그럼 주님의 의미는 뭡니까? 처음에 근본이 뭐예요? 천국 갈 사람은 천국 보내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지요.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고,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고. 토기장이가 그릇 만들 때 지 마음대로 만들어요.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의 의미지요. 의미에서 뭐가 생긴다 했어요? 차이에서 뭐가 생겨요? 운동이 생기지요. 맞지요. 답변도 안 하니까 이상하다. 나 혼자 사기 치는 것 같다. 지금 예수님이 활동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활동합니까, 활동 안 합니까? 우리도 활동하지요. 우리는 무슨 중심으로? 내 욕망 중심으로. 욕망은 뭘 낳는다? 차이를 낳지요. 차이를 따라 잡는 게 우리의 사는 보람이잖아요. 이건 우리의 운동이죠.
그럼 주님의 운동 있잖아요. 주님의 운동은 뭡니까? 천국 갈 사람은 천국 보내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죠. 이 운동하고 우리하고 같이 섞여 있는 것이 이게 바로 우리네 인생이라 말이죠. 우리는 내 욕망대로 살아요. 이것이 우리는 못 벗어납니다. 내 욕망을 내가 못 벗어나요. 기도 백날 하고 절제해도 안 돼요. 우리는 나의 욕망을 못 벗어납니다.
예수한테 빌어도 주여, 150만 원짜리. 뭘 해도 전도 많이 했으니까 이젠 150만 원짜리 줄 때도 됐지요. 헌금을 해도 하나님 이젠 복 줄 때도 안 됐습니까? 내 자식 서울대학 가는데. 뭘 해도 차이지는 만큼 내가 150만 원짜리 몰랐더라면 그래 안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그 목표를 향하여 나는 갑니다.
그런데 군데군데 뭡니까? 야야, 니가 그런 거 안 해도 이미 자리 다 예약돼있다. 니는 천국 가는 사람이야. 주여, 누구 마음대로? 이거는 예수님이 널 위해 대신 죽었던 예수님 내 마음대로 널 해서 네게 차후 통보하는 중이다. 라는 주님의 운동이 내 속에 들어옵니다.
나는 지금 150만 원짜리를 얻고자 하는 그 운동에다가 갑자기 주님께서 야야, 그런 거 하나 안 하나 상관없는데 어쨌든 간에 니 운명은 내가 결정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다 이루었어. 라고 운동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 순간 뭘 느끼느냐? 제일 중요합니다. 아하, 내가 죄인이구나. 이게 새로운 창조입니다.
내가 뭘 해도 착한 일 해도 내 중심이고, 바른 일 해도 내 중심. 이게 내가 죄인이고 죄인인 내가 주님한테 뭘 한다는 것도 뭐가 됩니까? 이것도 죄였구나. 나는 내 일하면 죄고, 주의 일하면 의로운 줄 알았더니만 세상에, 주의 일 한다는 그것조차도 주님의 운동하고는 상관없는 그저 내 몸부림치는 것에 해당되는구나.
그때 뭐냐 하면, 주여 주의 뜻대로 마음껏 사용해 주시옵소서. 이거 2.5초갑니다. 이거 2.5초가요. 나머지 스물 세 시간 오십구 분 동안 그런 생각 안 합니다. 가끔씩 나요. 어떤 사람 한 달 만에 2.5초 나온 사람 있고, 2년 만에 나오는 사람 있는데 어쨌든 주여, 주의 뜻대로 하이소. 나는 내 뜻대로 밀어붙일 테니까. 나는 내 뜻대로 강냉이 먹든 감자 먹든 뭐든 먹을 테니까 주여, 이거 상관없이 주의 뜻대로 하실 줄로 제가 믿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믿음으로.
예. 끝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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