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우리교회여름수련회-하나님의 창조(4)
(강의:이근호 목사)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은 우리의 근본이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세 시간이나 공부하셨던 분, 우리의 근본이 뭐였습니까? 바로 내 몸이죠. 나의 몸. 나의 몸이 우리의 근본이었습니다. 순서가 몇 개 있었습니까? 열 개 있었죠. 열 계단 있었죠.
첫 번째, 층계는 뭐냐 하면, 바깥에 온 근본, 우리 몸 말고 다른 근본은 어떻게 됐어요? ‘모른다’에요. 우리 몸, 내 몸이 근본이에요. 그 외에 다른 근본은 모른다에요. 두 번째 뭐였습니까? 알고 싶지 않다. 상당히 이것도 참 중요하다 했지요. 알고 싶지 않아요. 왜 알고 싶지 않느냐 하면, 내 몸이 그런 거 몰라도 된다고 자꾸 이야기해요. 내 몸이. 니 몸 편하면 되지, 뭐 때문에 그런 거 알려고. 알고 싶지 않다.
세 번째 단계가 뭐였습니까? 사람은 뭐에 따라 산다? 외롭다. 이상하게 근본은 모르면서 혼자 살면 되는데, 외로움을 못 견딘다. 뭔가 옆에 있어야 돼요. 외로움을 못 견디니까 이건 뭐냐 하면, 정이 그립지요. 인정, 애정, 우정. 인정, 애정, 사랑이죠. 우정. 이렇게 정, 쵸코파이 있지요. 정이 그립다. 근본은 내 몸 이외의 다른 근본은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혼자 있으면 내 몸이 혼자 있으면 내가 근본인데도 외로워요. 외롭기 때문에 그 다음에 찾는 것은 뭐냐 하면, 정이 메말라요. 누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없는가? 누가 내 친구 될 수는 없는가? 내 말동무 될 사람 없는가? 인정스러운 이웃이 안 찾아오나. 못된 이웃 말고. 이렇게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한 이웃이 없는가? 정을 그립습니다.
정을 그리려면 서로 의사소통이 돼야 되니까 그 다음에 다섯 번째는 뭐냐 하면, 같은 신을 믿는다. 신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불교 같으면 같이 불교라도 괜찮고. 그 사람과 자꾸 친해져야 쉽게 말해서 친하게 산다 이거에요. 친하게 사는 거예요. 나의 몸의 근본이기 때문에 외로움을 못 견디고, 인정이 그립고, 같은 무조건 생각을 같이 하는 거죠.
여섯 번째 뭡니까? 그러면 어떻게 돼요. 한 마음 되죠. 한 마음 될 때 인정이 된다는 거예요. 한 마음 되니까 그 다음에 뭡니까? 여섯 번째가 한 마음이고, 일곱 번째가 뭐예요? 이것이 한 마음 되는 거, 한 마음으로 화목 하는 거, 이것이 뭐냐 하면, 화목이 곧 진리죠. 진리가 될 때 이건 뭐가 돼요? 진리가 곧 뭐가 돼요? 나의 절대 종교가 되고, 종교가 딱 보장되면 그 다음부터 종교에 의해서 내 미래 보장 받죠. 이것이 나의 My way. 나의 운명이다. 나의 길. 나의 운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몸이 근본이 될 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거 세 시간 동안 한 거예요. 다른 근본은 모른다. 내 몸 밖에 모르죠. 알고 싶지도 않아요. 외로움을 탄다. 혹시 나한테 정 붙일 사람 없는가? 정이 그립다. 교회 가면 교회 나와 주고, 성당가면 성당 나와 주고, 절에 가면 절에 나와 주고. 왜냐하면 정에 목말라 하니까. 같은 식구끼리 종교로 찢어지고 이런 것도 싫고. 한 식구는 같은 종교를 가져야 한 마음이 화목 되니까. 이렇게 안 싸우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 안 싸우고 친하게 지내면 내 몸이 외롭지 않고 친하게 지내면, 이것이 내가 기대했던 내가 원했던 이게 바로 진리다 이 말이죠.
그러면 구원이라든지, 뭐 천국이라든지, 지옥이라든지 종교에 관한 용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이게 전부다 뭡니까? 화목케 하면 이것이 나에게 선이 되고, 이러한 한 마음을 화목을 깨면 이게 뭐가 돼요? 악이 돼요. 선한테는 복을 받고 악인은 저주 받죠. 그래서 어떤 이웃이 와서 우리 가정을 더욱더 화목케 하면, 아이고, 천사 양반. 복 받겠네. 이카지요. 그런데 이웃이 왔는데 맨 날 우리 부부 사이를 갈라놓게 하면, 아이고, 이 못된 것. 갖다 저주나 지옥에나 가라. 이런 마음이 든다 이 말이죠.
이게 다 어디입니까? 근본이 뭐예요? 내 몸이 근본이죠. 외로움을 잘 타는 내 몸이 근본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것, 이것은 내 몸 위주로 그렇게 진리가 구축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곧장 어디 이어져요. 이 진리가 나의 절대적인 종교로, 인생관, 뭐 세상관 절대적인 종교로 이어집니다. 그 사람이 교회 가든, 절에 가든, 성당에 가든 진리라 하는 것은, 자기가 따로 꼬불쳐 논 거예요. 목사가 신부가 중이 무슨 소리 하든지 관계없어요. 이미 내 진리는 우리 집 화목을 깨는 것은 무조건 나쁜 악마고, 우리 집 화목을 편하게 하면 이것은 천사다. 이래 확정돼있어요.
이것이 교회로 이동하면 마찬가지에요. 교회라 하는 것은 인정이 넘치고, 서로 우정이 넘치는 곳인데 어느 나쁜 놈이 와서 이 교회 이단이라 하면, 이놈은 우리 화목을 깨는 거니까 그놈은 악마고, 아이고, 이 교회부흥발전 되세요. 하면 갑자기 화목을 북돋워주니까 그 사람은 천사가 되고. 그러니까 내 몸 위주로 내가 소속된 내 몸 위주로 절대종교가 되고.
그 종교가 이거는 실제생활로 좋은 거, 나쁜 거 확인하면서 지금 내가 확인하면서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지금 2007년도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을 2005년도부터 2007년도, 2008년도 쭉 이렇게 점검을 해보는 거예요. 이 종교가 맞는가? 점검을 해보니까 대충 맞더라 이 말이에요. 맞으니까 내 죽고 난 뒤에 내 천당 갈 거 이것은 진리에요. 내가 해놓은 이런 절대 진리의 교리에 근거해서 내 미래를 보장 받는 거예요. 난 죽어도 좋아. 왜? 천국가니까.
어째서? 하나님께서 마음을 선하게 먹으니까 우리 가정도 잘 되고, 우리 교회도 화목하고 다 이렇게 잘 되고. 내가 마음을 나쁘게 먹으니까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려서 우리 가정도 분란이 일어나고 우리 교회도 분란 일어나니까. 됐어. 이젠 알았어. 뭐냐? 항상 뭔가 반듯하게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니까 그 종교에 내 미래를 맡기면, 나는 영원히 구원 받는다.
이게 뭡니까? 이것이 뭡니까? 나의 운명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나’죠. 나의 운명이죠. 결국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돌아온다 이 말이죠. 이게 첫째 시간, 두 번째, 셋째 시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동그라미를 한번 쳐 볼게요. 이 전체를. 이 동그라미를 한번 쳐보면 이것은 다 누구 안에 들어 있느냐 하면, 이 ‘나’라고 하는 이 안에, 우람이처럼 파마했다. 전부다 풀렸다. 약을 이상한 거 써서.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담겨 있어. 이 전체가. 이게 나이가 먹어도 커서 스무 살 되고, 서른 살 되도, 오십 되도 마찬가지에요. 내 안에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강의 처음 할 때 근본은 어디 있다 했습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 우리가 일찍 온 사람 봤지요. 근본은 세상 모든 것은 내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누구 위주로 돼 있어요? 모든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우리보다 먼저 계셔서 우리의 근본이 되시고, 우리의 원천이 되셔서 모든 것은 그분을 바라보면서 창조 되게 돼있다. 이래 돼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둘째 날 저녁 시간에는 뭘 하느냐 하면, 이건 이미 아니까. 이 외부에 있는 근본이 이 내부까지 어떻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어떻게, How? 어떻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외부에 있는 근본이. 내가 근본 아닙니까. 내 몸이라는 근본이 나한테 꽉 차 있는데. 외부에 있는 근본이 창조의 원인, 근본이 어떤 식으로 우리한테 접근해 오는가? 그것을 이번 시간에 지금 강의를 하겠습니다. 이번 시간부터 약간 길게 하든지, 모자라면 내일 예배시간도 강의시간이에요. 티 입고 무슨 예배드리겠습니까?
강의식으로 낼 하겠는데, 외부 근본이 이렇게 나로 꽉 차있는 나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가?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필기할 준비를 해야 되겠지요. 먼저 온 사람들은 벌써 필기 다 했어요. 늦게 온 사람 이거 안 적어도 되는 모양인데, 나중에 또 여러 번 하겠습니다. 지워버려요. 모르면 옆에 사람 컨닝하세요.
여름밤이 되면 섬뜩한 일이 있어요. 비가 쫙 오는데 바깥에 소나기 치는데 창가에 책상 앞에 있으면 창가에 뭔가 획 누가 지나간 것 같아. 창문 열고 거기 누구 있어요? 없는데. 또 창가에 있다가 뭔가 이번에 이쪽에서 획 지나가요. 뭐 이런 게 다 있나. 뭐야? 이거.
애들이 공부할 때 제일 놀라는 것은 자기가, 창이 이렇게 있고 여기 책상이 이래 있고 공부를 하는데 뭔가 웬 아저씨가 시커멓게 해서 턱 해서 니, 잡으러 왔다. 이런 거. 다가왔을 때 화들짝 놀래죠. 밖에 누구요? 밖에 서 계신 분 누구요? 라고 놀라듯이 외치겠죠. 밖에 계신 분 누굽니까? 낯설게.
바로 지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외부에 계신 분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어떤 인물로, 어떤 사람으로 마치 홀연히 불연 듯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근본이라 해서 뭐 깔개를 들고 오는 게 아니고, 그냥 어떤 사람이 와요. 하나님이 날개 짓해서 와서 나 하나님인데, 나 천산데 이래 오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이한 사람이 우리한테 와요. 그 근본이. 나는 널 창조한 자다. 이래 다가온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깜짝 놀랍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몸이 근본이기 때문에 이 근본을 대체할 딴 인간, 딴 사람이 오게 되면 우리는 그걸 공격하게 돼있어요. 공격합니다. 저리 가! 귀신아, 저리 가! 귀신아, 저리 가! 어린 학생이 공부하고 있으면 어떤 아저씨가 비가 줄줄 맞고 하는 말이 애야, 니 책상 내가 대신 앉았다다다다. 저리가, 저리가, 저리가. 내 책상이야. 저리가. 니 책상 되게 편하게 생겼는데. 내가 한번 앉아 볼까. 이래 오면 저리가, 저리가. 하잖아요.
현재 우리가 깔고 앉아있는 이 내 몸의 근본 자리는 내 몸인데, 아까 했지요. 외로워서 못 살겠다. 정이 그립다. 그래서 하나의 화목한 가정과 화목한 식구 있으면 좋겠다. 그게 나의 전부고 나의 운명이다. 이래 생각하는데 갑자기 니 자리에 내가 한번 앉아 볼까? 하고 대체할 딴 인간이 비 오는 날 밤에 창가에 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목사님, 창가에 괴물 등장하는 게 성경 어디 나옵니까? 창세기 22장에 나와요. 함 봅시다. 그전에 창세기 21장에 2절에 한번 봅시다. 제가 읽습니다. 참, 읽기 전에 이야기 하나 더 빠졌는데. 비가 줄줄 떨어지는데 비 맞고 니가 앉아 있는 의자, 근본 의자 내가 한번 앉아 볼까? 눈 내리깔고 이렇게 해서 나는 왔다. 이러고 왔을 때 놀라지요. 이걸 알아야 돼요. 뒤에 기다란 쥐꼬리처럼 꼬리가 달려 있어요. 꼬리가 어디까지 연결 돼있는지, 하늘까지 꼬리가 좀 길어요. 나는 근본에서 왔거든. 이래서 꼬리가 길다고요. 길어서 네가 앉는 근분이라는 자리에 내가 너 대신 대체 인물로 좀 앉아야겠다고 찾아오는 겁니다.
그러면 안 돼. 이건 평생 동안 이것이 나의 운명이고, 열 단계를 통해서 나는 내 몸이 최고야. 내 몸 편하면 행복이고, 내 몸 불편하면 불행이야. 아는 건 그것 밖에 없어. 아이, 저리가, 저리가, 저리가. 싫어, 싫어. 내 자리 안 뺏겨.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찾아온다고요. 특이한 사건인데 그게 창세기 21장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이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뭐라고 하죠? ‘이삭’이라 하죠.
이게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데 여러분 잘 아시죠.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마태복음 1장에 이래 돼있죠. 처녀가 잉태하여 뭘 낳습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지요. 여기는 창세기 21장에 보면, 이미 태가 죽어서 아기를 못 낳는 그 여인에게 난데없이 아들이 생깁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근본이 우리가 근본인데, 이번 시간에는 외부 근본이 나라는 인간이 꽉 차고 있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어떻게 접근해 들어오는가? 그걸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명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냐 하면, 만약에 예를 들면, 어떤 애가 비 오는 날 공부하고 있는데 어떤 사나이가 등장해서 그 사나이 뒤에는 어떤 고무줄로 해서 하늘나라에 연결돼있는 이 사나이가 니가 앉은 그 자리를 내가 대신해서 들어가겠다. 이런 특이한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특이한 사건인데 제가 특이한 사건 하나를 뭘 이야기했습니까? 창세기 21장에 아기를 늙어서 아기를 못 낳는 사라라는 할머니에게 뭐가 생깁니까? 아기가 생기는 이야기했고, 두 번째 방금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이야기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뭘 낳습니까? 아기를 낳지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으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하고 예수라고 정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처음부터 우리 자신이 우리가 근본이라고 여겼는데, 성령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메시지가 왔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거. 해봐야 계속해서 연결할까요? 하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 뒤에는 외부 근본과 내부 근본 사이를 영생으로 연결시키는 줄이 있어요. 그 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따라 해보세요. ‘약속’ 이 하나님의 약속이 줄을 타고 와서 내 속까지 파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 약속 뭐였던가요? 이야기하지 말고. 그 약속이 뭐였던가요? 아, 첫 번째, 첫 번째 이야기 한건데. 그 약속이 뭐였습니까? 등산 갔다 오고 나니 다 잊어버렸나.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짓거리를 하더라도 우리 운명은 내가 한 짓거리하고 상관없이 누구 마음대로? 예수님 자기 마음대로다. 하는 것이 약속이라고 했지요. 아, 기억나나. 골로새서 1장에 17절은 그걸 말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짓거리를 하던지, 평생 동안 교회 한번도 안 나오든지, 십자가 강도처럼 나쁜 짓 하던지 간에 그 사람의 운명은 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결정 난다는 것이 약속입니다. 그게 약속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새삼스럽게 경쟁해서 이길 필요 없어요. 이길 필요 없고 반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나는 왜 경쟁에서 져도 괜찮은 존재냐? 그걸 알아야 돼요. 그걸 알기 위해서는 나는 왜 어째서 죄인의 괴순가? 그걸 알아가는 평생을 살아가야 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얼마나 의를 모아야 마일리지처럼 얼마나 착한 일을 모아야 모아놓은 착한 일 가지고 착한 사람 모인다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렇게 자꾸 힘들 게 경쟁하면서 너는 얼마치 모았는데? 나는 오천 원어치 착한 일 모았다. 아이고, 나는 삼천 원어치 밖에 못 모았는데, 지금 죽으면 안 돼. 이천어치 더 모아야 돼. 이런 식으로 남하고 착한 일, 자기의 의 경쟁하지 마시고 반대로 사시면 돼요. 너 얼마나 나쁜 짓 했나? 나는 육천 원어치 나쁜 짓 했다. 아이고, 나는 육천 원 안 된다. 팔천 원어치 더 해야 된다.
내가 얼마나 내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기에 이미 내 선에서 관계없이 이미 나는 합격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물인가를 알기 위해서 왜 내 힘으로는 그걸 통과할 수 없는 존재인가를 자기 자신이 왜 죄인의 괴수인가를 알게 하는 식으로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오후 한 세 시쯤 되서 네 시쯤 되서 우리 십자가마을에 누가 글을 올렸기에 제가 리플 하나 달았어요. 제가 이랬습니다. ‘어떤 신학이 나를 죄인 중에 괴수되도록 확인하지 않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만약에 어떤 훌륭한 사람이 있다. 그럼 내가 그 사람한테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이래 돼버리면 훌륭한 사람이 있고, 나는 그 사람을 존경하고 그럼 존경할만한 사람을 존경하는 나는 얼마나 2% 착한 일이 남아 있잖아요.
그러면 그 존경할만한 사람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근본, 약속에서부터 멀어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저 사람을 존경스러운 걸 내가 아니까 역시 내 속에는 착한 모습이 남아있구나. 이래 되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니고, 그래도 2% 정도는 남아 있어.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3% 남아 있는 사람하고 경쟁, 게임에 해서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시합에 나가죠. 그런데 세상에 뭐 순교자니 어떠니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딱 들어서면 어떻게 됩니까? 이유 없이 우리는 죄인 되죠. 왜냐하면 그분은 비 맞고 있는 우리 창문가에 서 있는 그분이거든요. 니 자리 내 놔라 하는 거죠. 내 뒤에는 약속의 끈이 있다 이 말이죠. 약속의 끈이 있으니까.
잠간만 기다려 봐요. 한번 보고요. 수련회 중인데 아이고, 죄송합니다.
약속의 끈이 내 자리를 이 약속이 주르륵 쏟아지면서 덮쳐요. 그러니까 끈이라 생각하지 말고 파이프라. 이만한 파이프가 있고, 이 파이프를 통해서 구제품, 밀가루나 설탕이나 강냉이가루나 이것이 내 앉은 자리에서 막 밀려온다 이 말이죠. 그 밀려오는 것을 밀가루나 강냉이나 우유가루, 분유 그런 걸로 보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라고 보자 이 말이죠. 우리.
나는 지금 공부하고, 나는 오늘도 착하게 오늘도 반듯하게 살게 하는데, 여기 비가 줄줄 오는데 바깥에 와서 니 자리 내 놔라. 하더라고요. 뭐야 당신! 하니까 나는 근본이거든. 뒤에 줄이 있는데 뭡니까? 줄이 아니고, 파이프다. 그 무슨 파이픕니까? 너 자리를 차지할 나의 의와 나의 공로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자비가 막 뒤의 약속이라는 파이프를 통해서 우리한테 쏟아지고, 쏟아지니까 더 이상 너의 몸의 너의 근본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더 이상 너의 몸이 근본일 수 없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거는 누구의 작품이냐 하면, 아브라함 몸의 작품이에요.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있습니다. 누구냐? 이삭이 생겼어요. 창세기 21장 2절에 보면. 아들이 이삭이 생겼는데 그 이삭은 누구 작품이 아니냐 하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두 부부의 작품이 아니에요. 얼마나 특이합니까? 이것은 비 오는 날 창문가에 서 있는 어떤 아저씨에요. 이삭이라는 게.
아버지. 너 누구야? 니 누구야? 너 누군데 웬 애가 내 배에서 태어났어. 그러니까 사라가 배가 불룩해지면 사라 자기애한테 태교시키고 모차르트 음악 듣고 이러면 안 돼요. 물어야 돼요. 니 누구야? 내 배를 차는 니는 누구야? 이거는 내 남편 아브라함과 아무 상관없이 태어나는 너는 누구란 말인가? 이 수상한 놈. 니 누구야? 그게 이삭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도 그래요. 나는 남자를 몰라요. 그런데 배가 불러와요. 발로 팍팍 찹니다. 니는 누구니? 너는 누구야? 내 허락도 없이 내 배에서 자라나고 있는 넌 누구야? 애가 하나님의 약속인데요.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뭔가 문자로 되서 우리보고 믿으라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서 잉태합니다. 그게 신약에 보면 성령이 와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 있고,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는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 임신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관계가 된다 이 말이죠.
이것은 근본적으로 지금까지 일 단계부터 십 단계까지 첫째, 둘째, 세 번째 시간에 이야기했던 것, 내 몸이 나의 근본이다. 나는 신이고, 예수고 다 치우고 나는 외로워 못 살겠다. 내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만 있으면 그게 종교를 관계없이 나는 붙어살란다. 내 몸 편하면 행복이고 그게 선이고, 내 몸 불편하면 그게 악이고, 불행이고. 사람 사는 게 그거지 딴 게 뭐 있노? 그저 몸 편하고 내 하고 싶은 거 다하고 그게 사는 보람이지. 무슨 종교라는 게 내 몸뚱아리 좋아라 하는 게 종교지.
근본 누구 아는 놈 있나? 알고 싶지도 않고. 그게 일 단계, 이 단계잖아요. 근본이 있더라도 알고 싶지도 않고. 내가 아는 것은 내 몸이 지금 불편한가, 내 몸이 지금 행복한가? 그것만 하면 돼요. 그걸로 족하다 말이죠.
그런데 특이한 사건. 누군가 방문해요. 약속이라 해서 글자 ‘약속’이란 한글이 막 머리띠 해서 떡 보니까 ‘ㅇ’ 또 보니까 ‘ㅑ’ 그리고 ‘ㄱ’ 뭐고? 이거. 보니까 ‘약’ 하나, 좀 있으니까 ‘ㅅ’ 뭐야? ‘ㅗ’ 뭐? ‘ㄱ’ ‘약속’ 문자를 나무로 만들어서 뒤통수 때리는 식이 아니고, 약속으로 하는 것은 어떤 분으로 어떤 어르신네로 오는 거예요.
신이시여, 저 황혼을 지으신 신이시여. 신께서는 너무나 장엄하시고 위대하십니다. 하는데 뒤에서 톡톡 아저씨. 제가 약속이거든요. 치우고. 니는 인간 아닌가. 오, 신이시여. 내 영광을 받으소서. 내 기도를 받으소서. 어허, 아저씨. 내가 약속이거든요. 내가 하나님이 보내준 약속이거든요. 니는 인간이야. 저리 가고. 나는 내가 상상한 신을 믿고 있어. 아주 나는 신앙심이 나는 좋아. 아주 좋은 거야. 신이시여, 자비로우신 신이시여. 이래 나와요.
이슬람교의 문제가 뭐냐 하면, 중보자가 없어요. 마호메트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일 뿐이지 중보자가 아니에요. 사람이 하나님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보통 사람이에요. 부처도 마차가지에요. 하나님은 결국 저기 있어요. 우리 상상력으로 통해서 관념상으로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가까이 와버렸단 말이죠. 아주 특이하게 와버렸어요. 그게 하나의 약속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 한번 아시는가 질문 하나 들어갑니다. 질문 하나 해 볼게요. 사라가 아기를 낳아서 이름이 이삭인데, 그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 두 부부가 의논해서 예상한 아이입니까, 아니면 그냥 하나님의 약속으로 들이 밀은 겁니까? 밀은 거죠. 그때부터 그 가정은 하나님의 약속이 주도권을 쥐는 하나님이 약속이 거기서 주인 행세하는 아주 특이한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아빠 말을 잘 들을까요, 안 들을까요? 사라가. 사라가 아니지 참, 죄송합니다. 이삭이, 아들이 부모 말을 잘 들을까요, 안 들을까요? 안 듣지. 왜냐하면 이삭의 끈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삭의 운명은 그 부모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뒤에 매달려 있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 이삭의 운명은 결정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보려고 하는 것은 그거에요. 성경책 안 가져왔나? 창세기 22장, 우리교회라 하면 남는 책 많아서 볼 건데.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어떻게 합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제사 드리고 죽이려고 데리고 가지요. 세상에 어느 부모가 지 자식, 귀엽게 자란 자식을 왜 죽이려고 합니까? 그게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놈의 자식은 내 말 들어야 될 자식이 아니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줄 그러한 자식으로써 이 아브라함 가정에 파견근무하고 있는 겁니다. 아주 특이해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한국교회 기존교회한테 배운 건 뭐냐 하면, 내가 알아서 열심히 신앙 생활해야 그래야 내 구원은 내가 챙긴다. 내가 구원되고 안 되고는 내가 하기 나름이다. 전부다 자기, 나에게 달려있다. 내가 내 구원의 근본처럼 여겨지고 나한테 달렸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성경에 보면 정반대입니다. 니는 손떼도 너 구원은 너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너에게 안 달려있다는 겁니다. 너를 찾아오신 분에 의해서 달려있지, 내가 얼마나 봉사하는가 거기에 달려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이 우리에게 무슨 약속을 약속했는가? 무슨 약속을 가지고 우리에게 새끼손가락 걸어서 약속했는가? 그게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겁니다. 아까 열 단계에서 마지막에 십 번째가 뭐라 했어요.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옳지.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이 말이죠. 내가 근본일 때는. 가끔 천재적인 게 있어요. 가끔은 종종 가끔 그래요. 늘 그러면 좋겠는데. 내가 근본 같으면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겁니다. 나의 운명은 나한테 달린 거예요. 그런데 나에게 누가 들이닥치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분은 나의 대체물이에요. 나는 내 근본의 자리를 그 사람한테 비어주고 그 사람에게 뒤에 쏟아지는 약속에 의해서 우리는 종속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운명이 그 사람에게 달려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을 관찰해야 돼요. 이삭이 어디로 가지, 이삭이 어디로 가는지, 이삭이 어디로 가는지 따라가야 된다 말이죠.
이거 십자가마을에서 한 연극인데 도저히 오늘도 한번 해야 되겠어요. 우리 똑똑한 우석이 나와 봐라. 이거는 말로 하는 것 보다 행동 보여주는 것이 훨씬 여러분에게 잘 새겨들을 겁니다.
자, 우석이가 내 아들이라 하고 김대식 성도님이 하나님이라 합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 내 자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서울대학 법대 수석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그저 색시 하나 잘 만나게 하시고 훌륭한 색시 만나서 나중에 국가와 교회를 위해서 일등 되게 해 달라. 이렇게 기도하거든요. 항상 기도의 근거는 뭡니까? 내 몸에 낳은 내 자식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면, 일단 내 자식을 뺏어버려요. 하나님한테 가게 해요. 저 가서 붙어봐라. 붙었죠. 이래 놓고 하나님이 내 보고 이야기합니다. 어이, 니 쟤를 위해서 기도해라. 이미 내 자식은 아닌데. 내 자식이 아닌 자식을 위해 기도하라. 이 말이죠.
그럼 우리는 뭐냐? 이근호 목사 강의하고 난 뒤에 반응이 뭐냐 하면, 그럼 목사님, 기도할 것 없겠네요. 맨 날 반응이 이거야. 하나님은 기도하라는 거예요. 근데 내게 아닌데 왜 기도합니까? 내게 아닌데 왜 기도합니까? 목사가, 조금 더 있어라. 내 보내줄게. 목사가 자기 교회 교인 같으면 기도하는데, 그 교인이 다른 교회 갔는데 그거 왜 기도합니까? 나의 자존심과 관련 없는데. 그 교인이 있으면 나한테 헌금 할 거고 내가 수입이 더 보장되고, 내 장래가 보장되는데. 가버리면 돈 몇 푼 안 되는 사람이지만 가버리면 내 돈 뺏기는데. 장사 안 되는데. 내가 미쳤다고 기도해줍니까? 기도한 값을 어디 나올 게 있어야지.
하나님은 가게 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우석이가 간 곳을 가서 아하, 내가 얘를 당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얘를 보냄으로써 바로 그 자리에 내가 가야 될 천국이 거기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겁니다. 들어가.
하나님께서는 내 위치를 이동하게 만들어요. 나는 내 몸이 근본이라 하는 근본 자체를 위치 이동시켜서 나를 찾아오신 분이 어디로 가서 사흘 만에 부활했는가 보란 말이죠. 어느 지점에서 사흘 만에 부활했는가 보란 말이죠.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이 들썩들썩 거립니다. 하나님께서 어이, 아브라함아 이삭은 지 갈 길을 가야지. 어떻게요? 니가 잡아라. 누굴 말입니까? 이삭을 잡아야지. 아니 사람을, 생사람을 죽입니까? 내 명령이다. 이삭은 죽도록 돼있는 거예요. 원래 이삭이 태어날 때부터 뒤에 약속이라는 이 줄이 있어요. 이것은 하늘나라의 근본입니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운명 길을 가는가? 미리 앞당겨 맛보기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삭을 보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이거 내 자식이다. 하나님, 안 됩니다. 이거 내 자식입니다. 내가 얼마나 과외 시키고, 영어시키고, 캠프 보내고 얼마나 애썼는데 안 됩니다. 내 자식입니다. 빨리 안 죽이나? 니가 니 육체로 태어난 자식이가? 아닙니다. 그럼 니가 의논해서 태어났나? 아닙니다. 그럼 그 자식 내꺼 맞네. 맞습니다. 그 자식은 니 말 듣는 게 아니고, 그 뒤에 약속이 깔려 있다. 그러니까 빨리 내 시키는 대로 해!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데리고 죽이려 갑니다. 아빠 어디로 가는데? 모리아 산에 간다. 왜 가는데? 하나님께 제사하러 간다. 그런데 제사하는데 그 나무는 뭐고? 뭔데? 불쏘시개 할 거. 칼도 있고. 아빠 하나 빠졌네? 뭐가 빠졌는데? 제물이 빠졌네. 그건 말이야. 별들에게 물어 봐. 그건 약속된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시겠지. 하고 데려갑니다.
데려가고 꽁꽁 묶어 놓습니다. 얘가 어린아이기 때문에 칼 보면 도망칠 가능성이 많아요. 꽁꽁 묶어서 칼을 들고 단숨에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단숨에 죽입니다. 그때 멈춰! 멈춰! 중간 쯤 와서 코 15센티지 그건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14센티? 그건 내 안 재봐서 모르는데. 죽이는데 멈춰! 이미 죽은 걸로 간주하고 대신 수양을 잡아서 하고 그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그 자리에서 살아납니다.
아브라함아, 진짜 이제 니는 니 근본을 이삭한테 양도하고, 이삭이 하나님 뜻인 줄 니가 믿는구나. 그때부터 아브라함을 자기를 믿는 게 아니고, 자기에게 찾아온 이삭, 하나님께서 집어넣어준 침투시킨 이삭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되었습니다. 그분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앞으로 믿어야 될 사람들은 똑같은 식으로 믿지 아니하면 믿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럼 이 시대는 뭐냐? 누가 죽었다가 살아났는가를 조사해 보세요. 누굽니까? 이 세상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누구에요? 누구지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그렇지.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신이 내 몸이 근본이라는 것을 예수님한테 양도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습니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라 그분이 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주신 그 약속된 분이라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분 따라 그분을 믿게 되면 그분이 가신 길 가게 되기 때문에 우린 이미 죽어도 다시 주님과 천국의 부활의 몸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근본이.
이제 우리의 근본은 내 몸이 아니고, 우리의 근본은 하늘나라에 있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무슨 자냐 하면, 승리자가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승리자가 됐다면 쓸데없는 경쟁에 휘말려 들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게임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만약에 근본이 내 몸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걸 잠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안다 하시고. 외부에서 올 때는 낯설게 낯선 인물로 와서 내 자리를 대체할 대체 인물로 오시는데, 그 뒤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끈이 있어서 우리 자리에 앉자마자 그분 뒤에서 약속이 쏟아져서 그분의 의, 그분의 승리, 그분의 마귀 이기심, 그분의 자비, 용서가 와르르 쏟아져요. 우당탕탕 소리 내면서 쏟아져서 내 자리를 덮치면, 우리는 거기서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고, 부활이 되고, 우리는 천국의 백성이 된다하는 이야기를 방금 했습니다.
밖에 계신 분 누구십니까? 특이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오는 거예요. 외부에서 우릴 구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게임이나 경쟁 같은데 그것 가지고 인생 걸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증거하면 되지, 내가 상대방을 이길 필요는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것만 하고 첫째 시간 쉬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전히 내 몸이 나의 근본이다. 이렇게 나오면 여기서 우리는 뭐가 생기느냐 하면, 경쟁이 생기는데 이게 상당히 피곤해. 피곤한 경쟁이에요. 왜 피곤한 경쟁이냐 하면, 내 속에 내 몸이 있다고 생각하면 내 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 욕망이 있거든요. 쉽게 말해서 욕심이죠.
이 욕망은 자극, 새로운 자극에 대해서 목말라 해요. 날마다 새로운 자극에 대해서.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면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차이가 생겨요. 나는 이래 사는데 저 사람은 양반 저래 사는구나. 그만큼 차이가 생기죠. 그 차이를 겨냥해서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 여기서 뭐가 발생된다 했습니까? 지난 시간에. 다 잊어버렸죠.
그게 뭐라 했습니까? 운동. 뭔가 삶의 목표, 또는 삶의 동기 또는 비전, 희망, 소망. 이런 게 차이가 지게 되면 거기서 운동이 생겨요. 여러분들 바람이 부는 이유를 아느냐? 바람은 기압의 차이에 의해서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불지요. 여러분, 물이 왜 떨어집니까? 높은 위치에서 낮은 위치로 떨어지게 돼있어요. 거기서 에너지가 나오는데, 에너지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거기다가 팔랑개비 같은 걸 돌려서 전류를 통해서 보면, 우리가 있는 에어컨이라든지 전기가 발생되잖아요. 희한하죠.
물이 그냥 흐르는 줄 알았더니 거기 힘이 생겼단 말이죠. 떨어지는데 앉아 있으면 이게 마사지 되잖아요. 폭포. 폭포 떨어지는데 있으면 마사지 되잖아요. 에너지가 있잖아요. 현재 욕망은 에너지에요. 프로이드에 의해서 욕망은 에너지인데, 이 에너지가 막 치게 하고, 에너지가 발생되니까 남을 때리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에너지가 새로운 자극을 향하여 운동하는 에너지에요. 이게 내 몸이 내 몸 위주로 간다는 게 아니고, 내 몸 자체가 그래요. 아, 이해를 잘 못하시는데 쉽게 들어가겠습니다.
방금 제가 어떤 낯선 분이 와서 우리를 그냥 공짜로 구원한다 하지요. 우리는 구원 문제에 이미 승리자기 때문에 세상에 가서 경쟁할 필요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 있잖아요. 구원받고자 하는 내 몸. 이 내 몸은 가만있는 게 아니고, 새로운 자극을 향하여 소망을 가지고 운동하려 하고 진보하고 발전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실패한 것을 빨리 보상하려고 한다 이 말이죠.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점을 익히 아신다는 점을 우리가 같이 좀 알아주세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시니까 쓸데없이 욕망을 줄인다든지 나는 욕심내면 안 돼. 나는 세상 사람과 달라야 돼. 이런 식으로 자기 조절에 나서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또또또 슬슬 흥분하는 타이밍이 됐다. 내가 흥분하는 거 보니까. 원래 흥분 좀 하면 쉬면되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이루는데 그러니까 예수님이 다 이룬 걸 아는데 왜 우리가 욕심을 내지.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몸이. 예수님은 다 이루었더라도 내 몸이 내 욕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내 욕망은.
여러분,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감정을 어떤 성경말씀 전체를 달달달 외운다고 욕심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거는 한국교회가 사기를 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든 말든 내 몸의 욕망은 중구난방 지 마음대로 로켓처럼, 얼마 전에 포항에서 불꽃놀이 했답니다. 한 50분 간 했다며 유리가 이야기했던가. 이야기했지요. 그렇게 재미있었다면서 50분 동안. 운전하면서 좀 들었는데, 하여튼 들었는데.
내 몸의 불꽃놀이에요. 불꽃놀이. 어디로 튈지 몰라요. 예수님을 본받아서 나는 아주 겸손하게 살아야지. 나는 욕심도 내지 않아야지. 하면서 가다가 백화점에 옷보고 어머나, 미치겠다. 저거 사고 싶은데. 사고 싶은 데가 아니라 사고 싶은 것이, 내가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내 몸이 갖고 있는 주특기에요. 이걸 어떻게 절제하고 조절하고 죄 안 져야지, 이렇게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 보고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흥분하지 말고 찬찬히 이야기해 보세요. 내 몸이 어떻게 해서 죄인이냐를 알아야 돼요. 목표를 정해서 하면 된다. 마시고, 왜 나는 죄인인가? 왜 나는 죄인인가? 그리고 남편 보고, 왜 내 남편은 죄인인가? 아들 둘이지만, 내 아들 둘 다는 왜 아주 곱빼기로 죄인인가?
이미 구원받았기에 이미 구원받은 입장이기 때문에 이미 천국 가는 것이 예약된 입장이기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내 몸이 어디로 튄다는 것을 아주 흥미롭게 재미나게 보는 거예요. 어, 내 몸이 오늘은 나이트클럽으로 튀는구먼. 그거 재미있드나? 한 두 번 가보고 재미없으면 그만 가지. 그만 가고 그 다음에는 저 경마 쪽으로, 거기 가도 재미없을 걸.
도대체 이 몸은 뭐, 잠간 새롭다 하면 몰두하다가 두세 번 해보면 에이, 이것도 흥미 없고. 주여, 내 몸이 재미없습니까? 차라리 나이 많은 사람 죽는 게 낫지. 내 살면 뭐 합니까? 하는 그 순간 강도가 와서 죽인다 하면, 어머, 살려주세요. 아저씨. 이래 된다 말이죠. 방금 죽어야 마땅하지. 하면 그러다 막상 또 하면, 아니야 살아야 돼. 갑자기 그 어떤 사람이
그러니까 내 몸은 내가 표현이 안 돼요. 내가 종잡을 수 없어요. 용수철처럼 여기 하면 여기 툭 튀어나오고, 저기 하면 저기 툭 튀어나와요. 뭐,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요? 어느 세월에 안 미워해. 언제 우리가 한 순간도 안 미워해본 적 있습니까?
형제를 사랑하란 말은 아하, 내가 이 정도로 사랑할 줄 모르는 죄인 중에 괴수이구나. 그러니까 어떤 낯선 분이 찾아왔지. 특이하게. 날 따라와요. 해서 가 보니까 십자가 통과해서 사흘 만에 부활한 코스로 가는구나. 야, 저것이 내가 근본이 아니고, 저분이 나의 근본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거 특이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