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우리교회 여름수련회(6강)
마지막 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11절 봅시다. 신약성경 249페이지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아멘.
주의 영이 거한다고 되어 있지요.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성도는 혼자 사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누가 붙어사는데 붙는 분이 어떤 분인가 하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신 분입니다. 이분은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분의 영이 임해야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혼자 똑똑하고 혼자 잘났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 사람 속에 누가 있어야 돼요. 그 사람 속에 누가 들어와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게 되면, 우리가 평생 동안 어떤 짓을 했느냐를 묻지 않고, 우리 속에 박혀 있는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너희 몸도, 11절 마지막에 “살리시리라.” 이 살리시리라는 말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당연히 죽어야 돼.’ 가 붙거든요. 당연히 죽어야 되는데, 이상하게 ‘살리시리라.’ 산다는 희망, 소망이 여기에 붙습니다. ‘살리시리라.’ 죽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살리신단 말이지요.
여름 휴가철이 되어서 가야산 계곡에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살리시리라’에 해당되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 혜택 보는 사람이 누구인가?
요새 건강보험 많이 들잖아요. 어떤 사람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계곡에 차가 쳐 박혀서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다치고 했는데, 만약 이 차에 50명이 탔다면 다 보험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고 보험 들어 놓은 사람만 여기서 혜택을 보지요.
다 혜택 보는 것 아니듯이, 여기 로마서 8장 11절에 나오는 ‘살리시리라’의 혜택을 보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혼자 똑똑하다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10절에 보세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 영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살리시리라’의 대상이 됩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리자’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마라톤 선수가 1등으로 달리고 있는데, 어떤 치마 입은 미친 남자 하나가 달리는 선수에게 달려들어서 혼란을 겪는 순간 다른 선수들이 앞질러 가서 결국은 3등을 했습니다. 브라질 마라톤 경기에서 이런 일이 있었지요.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죽고 살아있으면 그냥 살면 되는데, 주님에 의해서 난데없이 성령이 찾아와서 꽂힌 사람은 마라톤 끝까지 ‘살리시리라’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늙어 죽기 이전부터 느긋하지요. 기분 좋지요. 왜냐하면, 딴 사람은 ‘아이고 이이고 죽었다.’ 이렇게 끝나는데, 성령이 임한 사람은 ‘아이고 아이고’ 할 것도 없고 ‘살리시리라’가 있으니까 죽는 것이 인생의 종착점이 아니란 말이지요. 로마서 8장 11절에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임한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과는 스스로 좀 달리 보는 그런 마음을 가져달라는 겁니다. 똑같이 놀게 아니라 ‘나는 너와는 다르다.’는 그런 의식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리시리라’고 하면, “이제 살았으니까 수련회 끝냅시다.” 이렇게 나오겠는데 뭘 알아야 되는가 하면, 어떻게 해서 죽을 우리가 마지막 날에 ‘살리시리라’의 대상체가 되었는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왜 알아야 되는가 하면, “나는 살았다. 살았다!”고 하면, 왜 갑자기 그러냐고 이유를 물으면 ‘몰라, 그냥 살았데.’ 이래서는 안 되거든요.
‘이런 논리와 이런 하나님의 방식에 의해서 나는 살리심의 대상이 되었다.’ 라고 남에게 예수님 하신 일을, 하나님 하신 일을 증거할 수 있는 그런 내용물을 우리가 갖고 있어야 됩니다.
처음에 교회 오는 사람들(남자들)은 이유가 있지요. 까닭이 있어요. 그게 뭐냐? ‘이번 참에 담배도 좀 끊고, 술도 좀 작작 먹고 사람답게 한 번 살아봐야겠다.’ 이런 노림수를 가지고 교회 오는데, 술 끊고 담배 끊는 것이 자기에게 도움 되지 싶지만 그게 인생의 다가 아니거든요. 교회 안 나오고 술 끊은 사람이 천당 가는 것 아니잖아요.
교회도 안 나오는데 술, 담배, 커피까지 끊은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 천당 갑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인생의 마라톤에서 뭘 끊고, 뭘 안 끊고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살리시리라’가 보장이 되어야 됩니다. 이게 보장 되어야지 ‘살리시리라’가 없는 이상은 ‘나, 인간 되었지. 짠!’ 하고 자랑만 하면 안 되거든요.
자랑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살리시리라’가 되려면, 진짜 영을 받았는지 스스로 확인도 해보고, ‘아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기에 내가 공짜로 그냥 살림을 받았구나. 아 기분 좋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입장에서 우리가 ‘살리시리라’의 대상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그림으로 한 번 그려 보겠습니다. 말로 하면 아침에 잠이 오니까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덤프트럭을 그려보겠습니다. 덤프트럭은 덤프가 있어야 되니까 그리고, 이 앞에 덤프트럭은 짐칸이 휙 들려서 짐을 내려야하니까 이것도 있고, 앞에 창문이 있고 범퍼도 있고, 바퀴가 8개가 있고, 운전석이 있고 이것이 덤프트럭인데.
이 덤프트럭이 뭐하는 거냐 하면 쓰레기 치우는 차입니다. 여기에 2층 빌라도 있고, 여기는 차도 있고, 자기의 학력이라든지 자식이라든지 자기의 장기라든지 자기 가게, 사업채, 직장 이런 것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귀하게 보는데 이것은 전부 다 쓰레기입니다.
이 쓰레기가 냄새를 팍팍 피우면서 우리를 ‘너는 죽으리라’ 쪽으로 몰고 가요. 그런데 고맙게도 무거운 덤프트럭이 이것을 싣고, 이 분이 누구냐 하면 의인입니다. 의인. 우리는 뭐냐 하면 죽을 죄인입니다. 나는 내 가게가 중요하고, 내 차가 중요하고, 내 아파트가 중요하고 이런 것들이 우리 보기에는 평생 동안 힘쓰고 애쓰고 땀 흘려 모은 돈으로 구입한 것이고 하겠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냄새나고 더러운 쓰레기에요.
이 쓰레기만 쥐고 있다가는 그냥 ‘죽으리라’로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성령이 오셔서 이런 것들을 덤프트럭에 실어서 가는데, 이 덤프트럭이 의인입니다. 죄인이 의인 속에서 구원을 받는 거예요.
이것 쓰레기라고 해서 속상해 하거나 기분 나빠 하지 마세요. 이것 보고 기분 좋아야 돼요. 이 쓰레기를 담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이 덤프트럭보고 우리는 ‘고맙습니다.’라고 해야 되지, ‘내가 고생해서 번 돈을 왜 쓰레기라 하느냐?’ 이렇게 기분 나빠 하시면 안 됩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이게 왜 쓰레기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평생 동안 힘들여 모은 재산과 자식, ‘자식까지 그렇습니까?’ 하는데 욥기 1장에 보면, 욥이 아들 7명에 딸 3명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이상적인 가족을 구성했어요. 남이 부러워했습니다. 요즘은 사는 게 힘들어서 애를 하나 낳고 둘 낳고 하지만, 만약에 재산이 수백억 되면요 여자들의 재미가 애 낳고 또 낳고 하는 것이 재미지요. 사는 재미에요.
어느 누가 그런 얘기 했다고 해요. ‘아르바이트 해보면 공부하는 게 제일 쉽다’고. 그만큼 세상에서 돈 버는 일이 힘들거든요. 여자도 벌고 남자도 벌고 다 힘 드는데, 남자 혼자 벌어도 적당히 버는 것이 아니고 엄청나게 벌어서 여자는 그냥 집에서 애나 낳고 키우는 게 그게 사는 재미잖아요. 장난감이 따고 있습니까? 애 같은 장난감이 어디 있습니까? 까불면 까분다고 예쁘고, 재롱부리는 것도 예쁘고, 커가는 것도 예쁘고. 재미없으면 또 낳으면 되거든요. 그러면 재미있는 것이 또 커잖아요.
여성의 몸 구조는 애 낳기 전문가로 만들어졌어요. 근육은 남자에게 있지만 여자는 근육보다 지방이 많아서 애 양육하는데 적당하게 되어 있어요. 여자가 아기도 낳고 해야지 아기도 못 낳고 크레인 운전사가 되어서 놓은 곳에 올라가서 일하고 하는 것을 장한 여인이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애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참 아름답단 말이지요.
그런데 욥기에 보면 아들 7명, 딸 3명이 하루아침에 다 죽습니다. 기가 막히죠. 마귀가 와서 다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마귀가 와서 다 죽이고, 막대한 재산 다 사라집니다. 쓰레기 비운 거예요. 그러니까 욥이 뭐라고 합니까?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제가 어제 생생하게 우석이 가지고 보여줬지요. 내 품의 자식일 때는 자식을 위해 기도가 잘 되다가 만약에 우석이가 주님 품으로 가면 ‘내 것 아닌데 뭣 하러 기도하나.’ 당장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우리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쓰레기인 것을 모르고 자꾸 내 품에 내 안에서 내 것으로 처리하려고 하지 마시고 이미 천국에서 날아온 커다란 덤프트럭이 쓰레기인 것을 아시고 그냥 뚝 던져 뒤에 실으세요.
나중에 수련회 끝나고 난 뒤 집에 갈 때, 여러분의 짐을 차 트렁크에 싣지, 여기 가야산에서 하나 둘 이고 지고 들어서 집까지 가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냥 싣고 가는 거잖아요. 우리 인생을 로마서 11장에다 그냥 실으세요. 내가 훌륭한 교훈 지어내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진리에다 내 인생의 짐을 그냥 실으세요. 싣는 것도 못합니까? 그냥 싣게 되면 운전사가 알아서 쓰레기는 비우고 미리 준비하신 것을 다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왜 쓰레기인지 여기에 대해서 지금부터 설명을 하는데, 약간 어려워요. 약간 어려우니까 덤프트럭은 기억해 놓으시고, 이제 이것은 지웁니다.
로마서 8장 3절을 봅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하나님께서 이 인간 세계에 누굴 보내시는데, 어떤 분을 보내시는데 이 분을 인간세계에, 우리의 진 명목, 우리는 우리가 어떻다는 것을 잘 모르거든요. 잘 모르는데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포함시키는 분을 무슨 몸, 우리가 무슨 몸으로 되어 있습니까? 8장 3절 읽었는데, 어떤 육신의 모양?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간 세계 전체가 죄 있는 육신인 것을 아예 기정사실로 간주하시고 우리 속에 그분을 합류시켰습니다.
성경 그 많은 구절에서 이것보다 중요한 구절이 몇 개 안 돼요. 정말 중요한 대목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를 볼 때 장점을 오래 기억하고 단점은 지우려고 애를 쓰거든요. 우리는 우리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지 않아요. 그나마 가능성 있고 훌륭하고 좋게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 시각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볼 때는 ‘너에게 적합한 육신의 모습은 바로 죄 있는 육신의 모습’ 이외에는 없어요.
로마서 8장 3절은 이상한 거울입니다. 보통의 경우 거울을 보게 되면 빛에 반사되는 내 모습이 그대로 좌우로 바뀐 채로 그대로 보여지는 그런 식인데, 이 성경이란 거울은 ‘오늘도 한 번 다듬어 볼까?’ 하고 거울을 보면 ‘으악!’ 하고 놀래요. 내 모습이 내가 예상한 모습이 아니고 죄인 된 육신의 모습이 그 앞에 해골로 등장하는 거예요. 참 희한한 거울이에요. 집에 이런 거울 하나씩 걸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습입니다. ‘이상하다. 내가 저렇게 죄 있는 모습이 아닌데. 안 되겠다. 거울이 이상하나. 여보, 당신도 한 번 비춰봐라.’ ‘거울이 뭐 별 것 있나. 내 모습 그대로 보여주지.’ 하고 아내가 거울을 보는데 갑자기 ‘으악!’ 하고 괴성을 지릅니다. ‘이상한 거울이 다 있네. 어떻게 내 모습이 ---’ 이게 죄 있는 육신의 모습이에요.
죄 있는 육신의 모습은 그냥 약간 일그러진 정도가 아닙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습은 그 마지막은 뭐냐? 십자가에서 저주 받는 모습. 손발에 못 박히고 창에 찔리고 가시 면류관 써서 피가 범벅이 되어서 흘러내리고, 얼굴은 총체적으로 일그러졌고,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께 심판 받고, 저주 받고, 버림받는 그 자태가 죄 있는 육신의 모습의 진면목입니다. 다른 모습 찾지 마세요. 화장을 아무리 해도 화장발 안 받습니다. 창에 찔려 피가 흐르고,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는데 화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진짜 아파요.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은 모독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러나?’ 우리 죄를 가져갔더니만 저 양반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저렇게 얻어터지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 말입니다. 누구든지 죄 있는 자들은 저렇게 얻어터져야 된다는 것을 대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에서 일그러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입니다.
그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현재 우리 자신이 우리를 쓰레기로 안 보는 것에 대해서 진짜 우리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금요일 시작부터 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늦게 오신 분들은 못 들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번 정리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창조의 하나님, 근본에 대해서, 우리가 과연 근본이 뭐냐? 이 문제부터 이야기했습니다. 어제 제가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마리아가 아기를 임신했을 때, 처녀인데 어느 날 배가 불러와요. 마리아가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이런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이지요. “너 누구야? 나는 남자도 모르는데 왜 네가 뱃속에 있어?” 아기가 하는 말이 “내가 너의 근본이거든. 너는 너 자신이 근본인 줄 알지. 아니야. 근본은 너 외각에 있었어. 너 바깥에 있었던 거야.”
근본이 마리아 몸에서 잉태해서 자라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근본도 모르는 채 살아가기 때문에 무엇에만 관심이 있는가 하면 자기 몸밖에 몰라요. 자기 몸이 전부에요. 그래서 여기서 제가 10단계를 이야기하는데 처음부터 참석한 사람은 ‘그만 해라 이제. 많이 먹었다. 한 두 번 하는 소리도 아니고 이제 식상하다.’고 하지만, 가야산 밑에 내려가면 또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평생토록 우리가 이렇게 살 테니까 두고두고 다시 한 번 검토해 봅시다.
첫 번째, 근본에 대해서 우리는 뭐로 일관합니까? ‘모른다.’ 내 몸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면 되지 내 몸은 어디서 왔고 그것 알아서 뭐하는데. 모르겠다.
두 번째, 이게 중요해요. 중요하다고 여러 번 얘기해도 여러분은 안 중요하다고 여기는데, 두 번째가 중요해요. 따라해 보세요. ‘알고 싶지 않다.’ 90평생을 살면서 내 근본에 대해서,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그 자체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아요. 알고 싶어 하면 궁금할 텐데, 아예 알고 싶지 않아요. 알고 싶은데 모르겠다는 것이 아니고 아예 알고 싶지 않아요. 왜냐? 이 몸을 추스르기도 분주하니까. 60개 조의 세포가 밥 달라고 난리를 치는데, 집에 가면 애들이 밥 달라고 난리를 치는데 지금 그것이 더 문제지 언제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런 한가한 소리, 시간이 남아돌아 처치 못할 경우에 잠시 상상해 보는 그런 것을 지금 바쁜 시간에 어떻게 할 수 있냐는 것이지요. 그런 것은 아예 알고 싶지 않아요.
세 번째가 뭐냐? 인간은 자기 몸이 전부인데, 이상하게 자기 몸은 외로움을 타요. 곁에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분명히 이상해요. 이것이 철학적으로는 규명이 되지만 이걸 이야기하려면 말이 길어지니까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사람들은 분명히 자기가 최고예요. 자기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기 밖에 몰라요. 그런데 이상스럽게 자기 밖에 모르면 끝까지 자기 밖에 모르는 쪽으로 가야할 텐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외로움을 타요.
미술 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다. 어제 잠시 TV를 보니까 학력 위조한 사람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사람 이름이 뭐예요? 신정아. 예, 신정아 그 사람이 미국 예일대학교 박사학위 땄다고 자기 엄마가 마을에 플랜카드 걸라고 해서 걸었어요. “우리 신정아 예일대학 박사”라고 해서.
그런데 그 엄마에게 제일 섭섭한 경우가 뭔가 하면, 자기 이웃이 다 죽었을 때. 왜 그런가 하면 자랑할 데가 없거든요. 플랜카드 걸면 뭐합니까. 자기만 보는데. 사람은 이상스럽게 뭔가 잘 한 게 있으면 꼭 나팔을 불어야 돼. 참지 못해요. 노래 잘하는 아줌마에게 노래방에 가지 말라고 하면 그건 고문입니다. 노래 잘하는 아줌마는 하여튼 1년 내내 노래방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려요. 명절날 친척들과 노래방에 가서 칭찬 받기를 원하는 ---
이 세상에서 제 혼자 살면 자랑할 것도 없고 재미없어서 못 살아요. 이상스럽게 사람은 외로움을 타요. 그 이유를 철학자들은 이제 알아요. 그러나 옛날엔 몰랐어요. 사람이 왜 외로움을 타는지. 그걸 좀 설명해 드릴까요?
사람이 왜 외로움을 타느냐 하면 타인을 위하여 내가 살기 때문에. 자기가 이만큼 성과를 이룬 것을 남한테 보고를 해야 돼요. 사람이 집에 혼자 있으면 발가벗어도 괜찮아요. 지가 혼자 사는데 명품 내복 입어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밖에 나가면 옷을 입어야 돼요. 여름인데 겨울옷 입는다던지 거건 미친년 되죠. 철 지난 것 입어서 월남바지 입고 돌아다니면 그건 진짜 신고감이란 말이죠. 파티에 청바지 입고 나온다던지 이건 안 좋다 이 말입니다. 결혼식에 드레스 입어야지 추리닝 입고 있으면 그건 말도 안 되잖아요.
사람은 남의 욕망, 현재 철학가들이 여기까지 알아요, 내가 어떤 인간이 돼야 하는 것은 남이 내게 어떤 것을 기대하느냐가 결정하는 겁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말은 나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이 뭘 요구하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맞춤인생이 내 인생입니다.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나, 남이 요구하는 인생 = 내 인생입니다.
남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인생은, 마음 맞는 자기들끼리만 어울리지, 사람들에게 안 옵니다. 특히 노처녀들. ‘너 올해 시집갈래, 안 갈래?’ 이런 소리 들으면 다음부터는 추석이나 설날은 배낭 지고 여행이나 가지 같이 안 어울립니다. 아예 친척들 잔소리 듣기 싫어서 가버려요.
부모님은 ‘왜 부모 말 안 듣냐?’고 하고, 자녀는 ‘내가 부모 말 들어야 할 이유가 뭐 있어요.’ 하고.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고 하면, ‘엄마는 내게 해 준 것이 뭐 있는데?’하고 대꾸합니다. ‘공부할 때 나는 아르바이트 하면서 학비 벌었다. 엄마가 내게 해 준 것 뭐 있는데?’
현대 젊은 사람들은 외로운 것을 알아요. 알아서 그 옆에 누가 붙어야 돼요. 귀찮아요. 이제는. 싱글이 되어서 철저히 혼자 살기 훈련에 연연합니다. 그래서 외롭지만 안 외로운 것처럼 폼을 내면서 살아요. 그래서 집에 개나 고양이 또는 금붕어, 좀 특별한 사람은 파충류 종류, 악어 비슷한 그런 것도 키우고. 외로움을 달래려고.
외로울 때는 뭐가 필요하냐? 사람의 정이 그리워요. 나를 비판하는 사람 말고, 잔소리 하는 부모 말고, 그냥 따뜻한 정, 뭘 해도 용납해 주는 애정, 우정, 인정. 이것이 전부 정(情) 아닙니까. 이 정으로 사는 거예요.
이것까지 정리해 봅시다.
첫 번째, 근본은 모른다. 두 번째, 알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외롭다. 정으로 살고 싶다. 그런 사람끼리 모여서 같이 만나려면 상대방의 정신세계, 종교영역, 그들의 세계관에 무조건 동의해야 돼요. 이것을 수용해야 됩니다. 동의하면 그 때부터는 “우리는 친구다.”고 해서 친구가 되는 겁니다.
남편도 친구처럼, 아내도 친구처럼, 심지어 며느리도 친구처럼, 시아버지도 친구처럼. 위아래도 없고 전부 친구로 변하는 거예요. 한마음이죠.
친구가 되면 이것이 진리가 되고, 8번에 이 진리가 뭡니까? 종교가 되고, 9번이 뭐예요? 이 종교에 의해서 죽고 난 뒤에 구원 받을 걸. 이렇게 미래까지 보장 받고, 10번에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이게 나의 확정된 운명이다.
이 전체를 한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을 “육”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기억나십니까? 이게 육이란 말이지요. 자기 몸이 근본이에요. 자기 몸이 근본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자기 몸이 신이기 때문에 자기 몸을 죄 있다고 간주하면 안 돼요. 만약에 자기 몸을 죄 있다고 하면 1단계부터 전부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쓰레기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간에 자기 몸만큼은 완전하니 손대지 마라.
밤 12시에 비가 추적추적 오는데 우란이가 혼자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창가에 어떤 아저씨가 나타나서 쓱 지나가더란 말이지요. “밖에 그 누구세요?” “나 근본이거든.” 갑자기 들이닥쳐서 내 이런 세계, 사람은 80, 90이 되어도 이것밖에 몰라요. 예수 믿고 안 믿고 관계없이 평생 이 조시로 가요. 그냥 계속 가는 거예요. 그냥 가는데, 바깥에 뭔가 어른거리면서 난데없이 누가 찾아온 거예요. “그 누구십니까?” 할 때 그분이 “나는 너의 대체인물이다. 네 자리를 내가 차지해서 앉아야 돼. 너의 몸을 근본이라고 여기는 그 자리에 바깥에서 온 내가 차지해야 된다.” “당신이 뭔데?” “내가 너의 진짜배기 근본이다.”
이것이 골로새서 1장 16-17절입니다. 그 내용이 뭐였습니까? 세상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만들어 졌다. 이분이 우리의 근본 맞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내 몸밖에 모르기 때문에 내 몸을 근본으로 삼고 이런 열 가지 삶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근본을 몰라서, 심지어는 알고 싶지도 않고, 외롭다는 식으로 정으로 살고 정으로 죽고 이런 쪽으로 가는 거예요.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이웃집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전부 4, 5번 아닙니까. ‘내 인생 깨뜨리지 마라. 우리 가정은 보통 가정 아니다. 이것 깨면 안 돼.’ 그리고 ‘친구를 잊어버리면 안 돼.’ 이런 것은 전부 내 몸 위주거든요.
그런데 바깥에서 어떤 낯선 인물이 찾아왔는데, 그 인물 뒤에 줄이 있었지요. 그 줄이 어디까지 이어졌습니까? 하나님까지 이어져 있지요. 이 줄을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그 하나님의 약속을 달고 우리에게 쳐들어 온 겁니다. 그 약속 중 하나가 아까 보았던 로마서 8장 10-11절. 그 약속이 뭐였습니까? ‘살리시리라.’ 그리고 약속에 투입된 게 뭐예요?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속에 임하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이 성경 말씀이 근본입니다. 알아도 우리는 버릇을 못 버립니다. 내 몸 위주로 가는 것. 내 가정 위주로 가는 것. 내 친한 친구 많은 것.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것밖에 몰라요. 나에게 잘 해주면 천사고 나에게 못하면 악마고. 모든 것이 내 기준이에요. 어디 나를 건드려.
욥처럼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다.” 이런 말 잘 안 나옵니다. ‘하나님이 죽였구나. 이제 하나님 안 믿는다. 어디 감히 내 식구를 건드려.’ 이렇게 되지,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다.” 이런 말이 잘 안 나온다고. 왜? 내가 근본이니까. 내 몸이 근본이니까.
그런데 외부에서 낯선 약속이 와서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단 말이지요. 그러면 어째서?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왜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느냐? 그것은 외부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투입되는가를 아셔야 됩니다.
그걸 아는데 이번 시간에 누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을 보냈는데 그것이 어떤 몸이라고요? ‘죄 있는 육신의 몸’을 보내서, 내가 스스로 위장하고 있는 나의 정체를 폭로하게 됩니다. ‘야, 내가 쓰레기였구나! 죄 있는 육신의 몸이 가장 적합한 내 모습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안 오고 천사의 모습으로 왔다면 우리는 천사되려고 애를 썼을 거예요. ‘예수님, 당신이 천사입니까? 나도 한 천사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기 위해서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니까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괴물이에요. 십자가 진 모습을 우리는 피하고 싶어요.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십자가에서 주님이 보여주시는 내 모습과는 너무 격차가 심해요. 그래서 내 쪽에서 회피해요.
내가 생각하는 이상형은 따로 있는데, 타인의 욕망은 따로 있는데, 남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 ‘야, 넌 참 그림을 잘 그려. 너는 예일대학교 박사야.’ 이런 걸 위해서 나는 정신 우울증까지 걸려가면서 박사학위 사기 친다고 애를 먹었는데, 실제의 신정아는 예일대학 박사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저주 받아야 될 자가 바로 신정아입니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자기를 속일 필요도 없고 남을 속일 필요도 없지요. 혼자 있으니까. 그런데 남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끊임없이 거짓말해야 되고 속이는 짓을 평생 동안 해야 됩니다.
연세 많은 아버지께 ‘아버지, 많이 편찮지요?’ ‘애들아, 내가 늙어서 빨리 안 죽어서 너희들이 고생한다. 아이고, 늙으면 죽어야지.’ 이런 소리 다 거짓말입니다. 추석되기 전에 전화를 하면 ‘애야, 내려오지 마라. 차 막히고 복잡한데.’ 해서 추석에 안 내려가면 삐쳐서 전화하면 말도 안 해요.
앞으로 저나 여러분이나 어른 되거든 애들한테 솔직하게 합시다. ‘와라, 바쁘더라도.’ 이래 이야기해야지 ‘안 와도 된다. 길 복잡한데.’ 이러면 진짜 안 오고 스키장에 가버립니다. 그러면 자기만 손해라니까. ‘아버지는 아버지밖에 모릅니까?’ 하거든 그 때는 이렇게 대답하세요. ‘나는 죄 있는 육신의 몸이거든. 그러니까 아버지한테 좋은 것 기대하지 말고 내려와라.’
죄 있는 육신의 몸은 이렇게 사는 게 편해요. ‘너는 설거지도 못하나?’ ‘나는 죄 있는 육신의 몸이거든.’ 이렇게 사는 게 편하다고. ‘그러면 아까는 왜 잘 했나?’ ‘잘 해줄 때는 고마운 줄 알아라. 원래 나는 그런 인간 아니거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보내 십자가에 못 박게 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쓰레기 아닌 인간이 없다는 것을 완전히 폭로시키고 말았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시선에서 우리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어요. ‘거울아, 거울아 누가 가장 예쁘니’ 이런 가상적인 자기 거울을 보지 마시고 십자가를 보게 되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신 거예요.
우리는 천사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나타난 모습은 죄수복을 입고 왔어요. ‘아니, 메시아인데 왜 죄수복을 입었습니까?’ ‘너희들이 죄수거든.’ ‘그러면 이 세상은?’ ‘교수도거든.’ ‘우리는 몰랐는데요.’ ‘당연히 몰랐지. 너는 너밖에 모르는데 알 수가 있나.’
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는가 하면, 자기 몸에서는 자기 의가 나와요. 이것이 로마서에서 주제가 되는데,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요. 이것은 마귀가 그렇게 집어넣어서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잘난 맛으로 안 살기.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5분만 더 하고 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뭘 안 했기 때문에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