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마을 수련회 욥기 11강 녹취
이근호 목사 강의
1, 2분 남았는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욥기를 전체 보면서 욥기 주석가들이 당황스러워하는 대목이 뭔가하면 욥기가 1장에서 끝났으면 좋겠다, 1장 끝나고 마지막 41장 거기서 이래 했으면 좋겠다. 합니다. 뭐냐하면 1장에서 끝에 욥이 하는 말이 주신 자도 하나님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믿음 참 데낄 아닙니까? 믿음 참 좋거든요. 그래서 주신 자도 하나님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시다는 이야기에다가 42장으로 날라 가가지고 그런데 하나님께 그렇게 인내를 보여줬더니만 42장에 배나 축복했다.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면 목사들이나 주석가들이 욥 가지고 한마디 하면서 욥에 대해서 알았다 이게 되겠는데, 중간에 2장부터 41장까지 뻥~ 무용지물이예요. 소용이 없어요. 그 줄거리가.
1장 끝에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이거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걸로 드라마 끝났으면 좋겠는데, 마지막 42장 그랬더니만 하나님께서 아이고 너 착하구나 복줄게 해서 잃었던 것을 곱빼기로 되갚아 주는 것이 있다면 이게 오늘날 목사들이 욥기 가지고 거론하고 싶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말이죠.
욥처럼 믿음가지면 곱빼기 받습니다. 딱 맞잖아요. 근데 중간에 2장부터 41장까지 그건 왜 있는건데요. 차라리 그게 없었으면 오늘 날 인간들에게 아주 쉽게 욥이 다가올건데, 왜 쓸데없이 2장에서 41장까지 복잡한 논쟁이 왜 있냐 이 말이죠. 그게 뭐냐하면 딴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욥이 1장 끝에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한 그 속에는 뭐가 있냐하면, 십자가가 없어요. 십자가가. 그 어떤 낮선 고난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냥 내 잘났다. 내 잘난 내 믿음 가지고 내가 복 받는다.
1장 끝내고 41장 붕 띄어버리면 남는 것이 뭐냐, 역시 나는 잘 났어. 내 믿음 데끼리야. 이 하나님도 인정해 줬어. 그게 되어버리는거에요. 그게 문제라는거예요. 내가 하나님 믿어 나 하나님 앞에 인정 받으면 그만이지. 그러면 됬지. 교회가서 예수님 믿는 보람이 어디있는데, 내가 예수 믿어 내가 잘되면 그게 끝 아니냐? 하나님 복 주겠다. 더 이상 뭘 바래? 1장 끝내고 붕 날라 가지고 42장 골인하면 남는 것은 그것 밖에, 그게 전부라고 본 거예요.
그것은 뭐냐하면, 결국은 뭐냐하면, 고난이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도권, 내가 주도권, 내, 내가 주도권 쥐는 거예요. 내가. 이 놈은, 내가 문제라, 내가, 내가, 주체가 와해가 안 되고 있어요. 내가 안 깨지는거에요. 내가. 고난이 주도권,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가 주도권이 아니라 내가 주도권이예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자기가 믿음 생활 좋으니까 남 앞에 나설때 나를 증거해요. 나를.
지난 시간에 끝에 11장 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욥이 뭐라합니까? 나 부족하다. 나 죄 많다, 분명히 이야기했죠. 분명히 이야기해 놓고 나중에 본문에 보게되면 욥기 끝에 가서는 뭐냐 하나님 이렇게 나옵니까? 벌써 욥기 12장 13장부터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로 왜 이렇게 죄인으로 몰아넣습니까? 내가 ?적인 죄인은 안다고 하잖아. 내가 압니다. 알면 됬지. 왜 자꾸 궁지에 몰아 넣습니까? 친구들아, 너희들까지 나를 이렇게 학대하느냐?
주체가 깨지지 않았습니다. 2장에서 41장 내용을 빼 버리면 욥기가 일반 유교나 불교 경전 되어 버립니다.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 아니란 말이죠. 역시 사람은 인내하고 볼 일이야. 그렇게 끝나버려요. 주체는 고스란히 남아있고, 이게 깨져야, 주체가 깨지지 않은거예요. ? 챙기면 됬지. 뭘 더 바래. 이래 된다는 말이죠.
그 주체는 어떻게 깨지는가 지난 지난 시간에 말했습니다. 고정된 시선, 고정된 시선이 있습니다. 이건 친구들입니다. 친구들은 엘 샤다이 하나님, 온전한 하나님, 온전한 하나님이기에 온전한 하나님, 완전히 질서잡히고 완전히 완결된 안정된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신이 이미 자아가 안정되어 있어요. 변화가 없어요.
안정된 상태에서 여기에는 확고한 자기 자아상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자아가 구축되어 있으니까 이건 고정된 시선이예요. 이 고정된 시선은 뭐냐 관람자가 되고, 또 뭐가 됬습니까? 관찰자가 된다고 제가 이야기했죠. 욥도 이랬던 사람이예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둔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자기 부인이 있다가 에라 욕하고 죽어라. 욥 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얼마나 고정적, 안정되어 있어요. 신앙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 그게 아니겠어요. 욥 참 대단해. 여기서 계속 넘어가고, 마지막 42장 보자. 어 복 받네. 야, 나도 욥처럼 안정된 신앙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42장 복 받구나. 중간에 2장부터 41장 다 ??해버리고 욥 다 띴다. 그 다음 시편 넘어가자.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고정된 시선 똑같은 ?가 있는데 여기에 뭐가 들어 온다고 했습니까? 낮선 고난이 등장하면서 무엇이 생겼어요? 균열이 생겼죠. 균열이, 누구하고, 욥의 3친구하고 욥하고 균열이 생겼지요. 욥의 친구가 13장-20장까지 계속 들이 댑니다. 니가 통 뼈냐? 이 말이죠. 통뼈냐? 니가 아는 만큼 내가 모르냐? 욥이 하는 말이 니가 아는 만큼 내가 모르냐? 욥 친구가 하는 말이 니가 아는 만큼 내가 모르냐? 둘 다 하는 말이 니만 주체냐? 나도 주체다. 니만 잘 났냐? 나도 잘 났다. 나도 젠틀맨이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고정된 시선을 관찰자, 감시자, 관람자로 와가지고 니가 통뼈냐? 니가 뭔데? 우리가 모르는 것을 니가 왜 아는데, 낮선 고난이거든. 낮선 고난 같은 소리하네. 니가 죄 지어놓고 무슨 변명하느냐? 이건 변명이 아니라 솔직하다. 솔직하긴 뭐가 솔직해 니가 찾지 못한 죄가 있으니까 그렇지, 하나님 제발 ??? 좀 보내주세요. 도저히 답답해서,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욥은 지금 누구와 상대합니다. 욥은 지금 낮선 고난 때문에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하고, 하나님하고 대화를 하는데, 누가 받는 걸 흐트려됩니까? 니만 인간이가? 니만 신앙이가? 나도 신앙이다. 바지 붙들고 있는 놈, 욥의 친구들, 좀 놓아줘. 지금 나는 너희들과 상대할 상황이 아니다. 욥의 친구들이 나중에 15, 16장 계속 나옵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는 말이 욥아 니가 건방지구나 니가 아는 만큼 나도 안다. 니만 하나님 아냐? 나도 하나님 신자 아이가! 계속 말합니다. 그 뒤에, 격렬한 감정 싸움으로 몰아 넣습니다. 13장에 보면,
욥 13장 15절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자꾸 하나님과 상대하는거예요. 애들아 친구들아 지금 너희들과 상대할 잽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 한다. 이렇게 하니까 15장 데만 사람 엘리바스 하는 말이 3절에 보면 “어찌 유조치 아니한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여기서 유조라 함은 유조차, 기름 넣는 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도움이 안 되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너에게 전혀 도움, 조력이 안 되는, 조력이 없는 그런 이야기만 하느냐? 니가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니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욥의 친구가 멱살 쥐고, 니만 신앙이냐? 이 말이에요. 니만 잘 났느냐? 욥이 말하기를 그게 바로 움직임 속에서 움직임을 파악하지 말고, 나도 너희들처럼 고정된 시선을 안정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낮선 고난이 오니까 나도 왜 이런지 이유 모른단 이 말이죠. 너희들은 이유 아나? 니는 죄 지어서 그렇잖아. 이건 그것과 관계 없다니까. 고정된 주체, 안정된 주체를 가지고 관찰자, 관람자로 나의 발목을 잡고 자꾸 흔들려 되면서 니 통뼈나고 따졌는데, 지금 욥은 결국은 자기도 한 고집하거든요. 욥도 한 고집 한다고. 한 고집한 것을 주님께서 고난을 퍼 부으니까 그 주체를 와해시켜서 결국은 욥은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이런지 몰라.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로 들어갑니까? 낮선 고난이 있는 메시야의 고난으로 위치 이동을 시키는 것이 욥기 2장부터 41장까지의 주제입니다. 과정입니다. 이것을 빼 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남의 신앙이다. 그것밖에... 둘다...
고난이 주도권을 쥐어야지 십자가를 믿는 내가 주도권을 쥐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정답이 뭡니까? 예수님이 고난 받아서 그 앞에 죄인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삶을 증거해요. 나를 증거해요. 자기의 과거의 신앙 이력을 증거합니다. 자기 실력을 증거해요.
히브리서 5장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 이 욥이, 제가 첫 시간에 이야기했어요. 욥은 예언서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감정을 따지지 말고, 예언된 대로 이루어지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언책이고, 그 욥 안에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욥이 담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욥의 고난은 우리 이야기와 관련 없는 것도 아니고, 주님과 무관한 것도 아니고 다 장차 오실 메시야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첫 시간에 신신당부를 했어요.
욥을 1장만 띠고 42장 띠가지고 그거 두 장만 덮고 달랑 버리지 마세요. 중간에 과정이 우리들의 주체 분열, 우리 주체 나 중심이 와해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5:7-8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딱 나오잖아요. 육체를 가진 것이 예수님만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가졌다 이 말이죠. 욥도 가지고, 육체로 계실 때에, 육체는 천사가 아닙니다. 날라 다니는 것이 아니에요. 천사에게 총 쏴도 소용없습니다. 탈레반이 천사보고 겁주면 천사가 웃습니다. 이 것이 미쳤냐? 천사도 못 알아보고, 니가 죽는다고 내가 죽나? 이 바보야. 그런 것은 육체를 가진 자에게 협박해라. 육체도 없는 나에게 왜 협박하냐? 이 말이죠.
근데 우리는 육체를 가졌거든요. 예수님도 육체를 가지니까 그는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능히 구워하실 이에게, 보세요. 이거 얼마나 재밌는 겁니까?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 사흘만에 부활할 것을 능히 알고 있으면서도 뭐라고 했어요? 육체 때문에 가진 육체 때문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왜? 자기 육체는 욥이 욥이 이미 체험한 것이 그대로 전달된 이전된 육체다 이 말이죠.
우리가 ?? 속도 높여가지고 천당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가졌으면 육체 값을 해야되요. 육체 값을 욥이 먼저 경험합니다. 욥의 경험이 없으면, 2장부터 41장까지의 경험이 없으면 우리 주체는 하나님, 예수님 하지만 사실은 내가 잘 나서 내가 예수 믿고 내가 구원받는 것이 되요. 그런데 2장부터 41장까지 내용을 보면 육체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박살나야 되는구나. 작살나야 되는구나, 작살.
그 주석가들이 본문을 몰라요. 본문을 몰라가지고 주석하는 것을 보면 성경 읽기 수준이예요. 자, 13장 내용 봅시다. 그 다음에 14장 봅시다. 15장 봅시다. 쓸데 없는 쓸데 없는 주석들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 욥이 2장부터 41장까지 욥 자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추적하지 모르고, 여러분 욥의 친구들의 말도 맞습니다. 주석책에 나와요.
자, 그러면 마지막에 41장에 하나님께서 욥아, 니 친구들이 왔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줘라.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다. 라는 말을 안 했더라면 빼 먹고, 그것이 없다고 치고, 3장부터 40장까지 욥의 충고를 다 모아놓고 보면 그렇게 어리석어 보여요. 야, 참 한국 교회 목사 이상으로 진짜 참 상담 잘하구나. 세상에 욥의 친구들이 이렇게 훌륭한 신학자고 목회자고 위로 잘 하기를, 야, 나는 욥도 은혜되지만 욥의 친구들이 더 은혜스럽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네가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러면 .... 세상의 어느 부흥사가 어느 목사가 이렇게 친근하게 복음적 이야기를 하느냐? 이건 복음이 아닙니다. 뭡니까? 주체가 안 깨어져서 그럽니다. 주체가 안 깨지면.
욥위 뒷말을 모른다치고 욥의 친구들 이야기 다 모아 놓고, 이 쪽의 욥의 이야기를 보면, 제 3자가 보면 둘 다 똑같은 소리하고 있네. 둘 다 맞는거예요. 자 판단합니다. 양손 들고, 무승부, 무승부.
41장에 하나님께서 욥의 손을 들기 전에는 무승부에요. 왜? 둘 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부족하다, 죄인이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욥의 친구들도 그런 소리하고, 욥도 그런 소리 하니까 ... 어떤 문제점을 찾아 낼 수가 없어요. 문제점을, 복음적이다. 너무나 하나님의 주권밖에 몰라요. 완전 칼빈주의라. 칼빈주의. 신학을 주체가 살아있는 이상, 십자가 뒤집어 쓰고, 칼빈주의를 배워도 주체가 안 깨어지면 그건 이단입니다. 이단되요. 자기 자아를 믿은거예요. 자기 자아라고, 자기 번트내기 해서 밀은거에요.
주체라는 것은 고정되어버리면 객체가 ?되고, 그러면 객체와 주체 사이에는 대결, 경쟁 관계가 성립됩니다. 이것은 모든 철학에서 이야기 한 거예요. 주체라는 것은 객체 없이는 주체 없고, 주체 없이는 객체 없다고 헤겔이 이야기한 겁니다. 그 무슨 말인가 하면 이미 객체와 주체가 결합되어 있으면, 아무리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해도 그 사람 이해 못합니다. 왜? 이미 주체와 함께 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냐면 이게 깨져야, 주체가 깨져야 객체 속에 들어갑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혼자 죽은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 이미 주체 주도권이 우리는 탈락되고 그리스도가 주도권이... 그래서 푹 쑤셔가지고 당신이 믿는 것이 뭐요? 예수님 십자가입니다. 끝납니다. 당신은? 나도 죄인이지. 설교한다며? 강의를 잘 하데. 그 강의 잘 하는 것은 죄인으로 강의한 겁니다. 사람들이 감동 받는데? 감동 받는 것은 성령의 몫이지, 내 몫은 아닙니다.
내가 살아오는 것도 고맙고, 그래서 내가 그것을 성도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의도적으로 운신의 폭을 좁혀줘요. 운신의 폭을 넗혀버리면 정명석이 됩니다. 대순진리회 되요. 왜? 나에게 오라. 나에게 챙길 것이 많으니까 나에게 오라. 주체가 넓어져요. 강렬해지고, 그 강렬한 주체가 약한 주체를 종으로 삼고, 팬 클럽이에요. 팬 클럽, 그런데 하나님께서 쓰시는 주님은, 예수님은 ???... 완전 성령님께 맡깁니다.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도 성령의 몫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아났다고 고후 13장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진짜 좋은 것은 갈수록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나중에는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 더 이상 계속해서 가치가 없다가 마침까지 가치 없습니다. 쓰시는 관계 속에서 가치있지. 나 자신에서 자체적인 능력은 없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고요. 도와 줄 것이 많으니까 저에게 오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이 없어요. 그것은 노림수가 있었어요. 지난 시간에 뭐라했습니까? 사람이 주체가 되면 뭐가 생긴다. 방향성있죠? 방향성을 뭘 가지고 있다? 방향성은 목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벡타에서 물리의 벡타에서 아무리 벡타를 해도 벡타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아무리 양방향이 바뀌어도 결국 마지막에 최종 꼬리와 마지막 방향을 ?? 이것이 최적의 가장 ?? 직선 거리로 달리게 되어 있어요. 물리학 선생님 계시잖아요. 맞지요? 맞다해야되요.
태양광선이 지 마음대로 날라가는 것이 아니라 최적 거리로 가는데, 그것을 관찰할 때는 최적 거리를 모르니까 관찰을 해 보니까 마지막 꼬리와 꼬리를 이어보니까 그것이 45도 각도로 완전히 ??되요. 참 신기하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모든 꼬리는 방향 벡타는 뭡니까? 남을 구제하고, 탈레반 가고, 했지만 모든 벡타의 꼬리를 뽑아보면 누가 누구에게? 내가 나에게 화살이 꼽히는 거에요. 그건 왜냐? 그건 주님께서 육체가 아담의 육체를 지은 한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것입니다.
나는 나 밖에 몰라요. 그리고 그 육체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든, 하나님 믿든, 내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 믿은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만들고, 성령이 나를 용납하지 않고, 니는 니 죽음은 내 안에 역사하고 예수님의 생명, 나 말고, 제 3자인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 때문에 능력 때문에 내가 구원받습니다. 그렇게 될 때, 다른 사람이 푹 쑤시면서 당신이 알고 있는 주체가 뭡니까? 나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지.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자기 부인이 거기서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나올 수밖에 없죠. 그냥 자기 부인이 나오면 불교되니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의미에서 자기 부인이 됩니다.
욥기... 그래서 제가 욥에서 1장만 알고, 주신자도, 거두신 자도,...그것만 알고, 마지막 42장만 떼서 다니지 말라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 중간에 십자가 고난의 위치도 자아를 붕괴시키면서 우리가 움직일수가 없어요. 그래서 뭐라했습니까? 저는 다시 한 번 쓰겠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썼는데, 별 반응이 없어요. 뭐냐하면, ‘매일 같이 나는 늘 가짜다.’ 가짜가 가짜인 것을 모르게 되면 진짜처럼 환상을 유발합니다. 십자가 마을 사람들은 다 가짭니다. 십자가 마을 다 가짜라는 말은 다 더하기해 보면 십자가 마을 자체가 가짭니다. 허굽니다. 그래서 십자가 마을 사람들은 항상 십자가 마을을 날려 버릴 폭발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근데, 십자가 마을에 뭐 있다하면, 가짜가 무슨 행세를 합니까? 마치 진짜처럼 행세할 수 있어요. 이것은 남들에게 십자가 마을이 십자가를 독점하는 오해하게 할 수 있어요. 그것은 십자가 마을 집단적 주체가 붕괴되지 않았어요. 끝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네.
이건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그것을 우발성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우발성이어야 하지, 우리에게는 이래야 되 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가짜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가짜가 아니면 그것은 관찰자가 되고, 고정된 주체가 되고, 그 사람은 예수님, 안정된 예수님 대신 안정된 자아를 대신해서 증거하게 됩니다. 나를 통하면 예수님을 믿는다. 나를 통할 수 있으면 구원간다. 예수님이 저리로 가야 하는데, 나에게 와서 예수님 가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한국 교회는 이것을 유행시키기 위해서 뭐냐? 중보기도가 등장하는 겁니다. 중보기도는 예수님만 할 수 있는데, 나를 통해서도 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가짜이지만 나는 진짜라는거예요. 그게 욥에서 2장부터, 3장부터 42장 다 부숴올라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게.
부부가 처음에 결혼식을 할 때 감동적입니다. 축가 부르고,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병들 때나 사랑하겠느뇨? 예! 여자는 좀 ... 예. 다 가짭니다. 찢어지는 것은 한 순간이에요. ... 너 가정에서 친정에서 이렇게 배웠냐? 하면서 갈라섭니다.
가정이라는 것은 허상이에요. 서로 좋아할 때만 잠시 머물다가 찢어지면 그만. 남에서 점하나 빼면 님... 아니... 님에서 점하나 붙이면 남이 되잖아요. 유명한 가수가 부른 노래 있잖아요.
육신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육신 자체가 어떤 것이 들어 있기에 예수님은 잔소리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병이어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 피로 구원받게 하느냐 이 말이죠. 우리 육신에 무슨 문제점이 있기에. 우리 육체의 행함에 기대를 걸지 않고 자기 육신을 대속물로 줘야 우리 육신이 구원받는다는 그 내막을 밝히기 위해 우리 육신 해부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해부가 3장에서 41장까지입니다.
1장 21절에서 이미 욥은 마귀를 이겼습니다. 주신 자도 하니님이시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 이겼어요. 이겼으면 욥이 메시야입니까? 욥을 믿으면 구원얻으리라 이렇게 되야 해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으니 욥의 이름으로 구원받으리라 이렇게 되야해요. 욥은 장차오실 메시야의 하나의 허접 투성이의 그런게 되기 때문에 욥 자체도 깨져서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도체 칩을 우리가 찾아내야 합니다.
그 안에 미리 들어가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반도체. 그런데, 욥과 ?에 있는 그리스도와의 갈등을 생각해, 그 갈등이 오늘 날 우리들이 육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갈등이라고 믿어야 해요. 그것 때문에 욥은 복음으로써 제 역할을 하는 겁니다.
욥기 13장 23절 봅시다. “나의 불법과 지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24절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제가 뭘 잘못했는데, 하나님은 저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이 말이거든요. 아직도 욥의 주체는 아주 강렬합니다. 하나님을 하나의 객체로 보고, 우리 좋은 관계 했잖아요. 좋은 관계 맺었잖아요. 주께서 내 기도응답대로 복 줬잖아요. 내 기도 응답대로 아이들 죄 없이 살았잖아요. 그런데 아무 죄 없는 자를 징벌하는 세상에 그 따위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이죠. 지금. 죄 있는 자를 죽여야지. 죄 없는, 의인 죽여서 뭐 할겁니까? 의인이 죽어야 죄인인 우리가 살아요. 욥은 아직 몰라요. 그걸. 욥은 그걸 모른다고요. 욥은 지금 ?온 예수 그리스도예요. 본인은 인정하지 않죠. 사람이 예수님 되기를 누가 좋아합니까? 평범한 보통 사람 되기를 바라죠. 이제부터 이근호를 예수님으로 인정합니다. 저는 부담되죠.
이창섭 목사님 예수님 한 번 해 볼랍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으로 나사렛 예수님으로 족합니다. 다른 사람은 하지 마세요. 괜히 예수님, 예수님 혼자 하라고 하시고, 그 분은 지뢰 철거 전담반입니다. 어설픈 아마츄어가 나서면 안되요. 그것은 그래서 우리는 믿기만 합니다. 까라면 까고 ... 그것만 하면 되지. 쓸데 없이 자기를 믿음의 중심에 놓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데만 사람 이 사람은 관찰자, 관람자, 비평자란 이 말이죠. 욥기 15장 6-7절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너를 쳐서 증거하느니라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라고 완벽한 엘 샤다이 하나님, 완벽한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완전한 틀을 가지고 욥의 부족함을 들이댈려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물론 거기에는 복음도 없고, 낮선 고난도 이해 못하지요.
그러니까 15장에서 그렇게 하니까 16장에서 욥이 대답하되 욥이 아주 격렬해집니다. 16: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4절에 “나도 말을 지어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머리를 흔든다는 말은 뭐냐하면, 우리가 손가락 흔드는 것과 똑같습니다. 안돼 안돼. 이런 뜻이에요. 우리는 손가락 흔들지만은 거기에는 크게 흔들었어요. 머리를 흔들었어요. 안 돼. 넌 끝났어. 이런 뜻입니다.
7절에 “이제 주께서 나를 곤고케 하시고 나의 무리를 패괴케 하셨나이다” 패괴라는 뜻은 멸망이라는 뜻입니다. 8절-10절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양이 일어나서 내면하여 나의 죄를 증거하시나이다.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군박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대적이 되어 뽀족한 눈으로 나를 보시고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나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이것은 시편 3편 1절을 봅시다. 시편 3편 1절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보세요. 다윗 언약에도, 다윗도 똑같은 경험을 해요. 욥과 같은 똑같은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다윗이 자기가 되고 싶어서 됬습니까? 하나님의 이유에서 대통령이 되었놓고, 엉뚱하게 대통령이 되었다고 그렇게 적들이 덤벼들어서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선택하고 지목했던 그 하나님을 공격하는 식으로 하더란 말이죠.
이것이 그대로 공관복음까지 이어지죠. 하늘에서 예수님이 아들로 오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왜 우리 허락도 안 맞고 전도하느냐? 해가지고 그렇게 구박이 심했다 이 말이죠. 그러한 상황은 욥이나 시편이나 예수님이나 동일하게 동일하게 오늘 날 우리까지 적용됩니다.
예수 믿자고 하는데 니 잘났냐는 식으로 나온다면 할 말이 있어야지. 누가 내가 잘났데? 하면 봐라 저 겸손한 거 티를 내는 것 봐라. 그러면 말을 어떻게 하란 말이고? 어떻게 하란 말이고? 우리는 죄인이고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습니다. 하니까 저 봐 겸손의 ?을 찌르는거 봐. 그럼 뭐 어쩔란 말입니까?
여기 16장 13절 “그 살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 인정없이(인정머리 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그래야, 전에 친구였잖아요. 1번 타자, 2번 타자, 3번, 4번 타자 그 친구가 이젠 나를 공격하는 하나의 적들로 변했습니다. 이젠 그 책임은 하나님 니가 지이소. 이 말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지야지. 죄가 의도적으로 배반하려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황당하게 당하기만 하니까 그 책임을 하나님이 지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엘샤다이 온전한 하나님의 법칙에 준해서 맞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아직 여호와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온전한 하나님에... 틈이 생긴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욥이.
욥기 17장 1절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 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 이 말은 뭐냐하면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 좀 알고 죽읍시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는 이유 좀 알고 죽읍시다. 그 이유는 예수님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요. 왜? 대신 죽어야 하니까. 안 죽어도 되는데 대신 죽는다 이 말이죠.
이러한 욥의 고난은 오늘 날 성도에게 적용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로마서 7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이것을 건져내라 그리고 그 뒤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사하노라. 육체의 법칙이 아니라 내 육체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법이 나를 구원했으니 그 이유가 성령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죄의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성령의 법이 적용하는거예요. 우리가 구원될 수 있는 근거를 우리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근거를 찾지 않아요. 이것만 알아가도 괜찮은 거예요. 내 신앙을 내가 관리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우리가 구원받는 근거는 내 속에서 찾을 생각 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성령께서 나를 비켜 지나가는 거예요. 헌금 십일조해도 보지도 않고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어디 가노 보니까 십자가에 가 가지고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씻어서 구원 받는 겁니다. 어느 인간이 의와 신과 인을 다하여 십일조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의와 인과 사랑을 보태서 십일조하는 것이 어디있어요?
십일조는 돈 10%하는 것이 십일조 아닙니다. 의와 인과 신이 담겨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왜, 우리는 육체이기 때문에. 주님을 몰라서? 아니에요. 주님을 알아요. 말씀을 압니다. ?은 가라 있는 것 없는 것 족한 줄로 알라. 압니다. 알지만 또 다른 법이 뭡니까? 어기고 싶어서 환장하는 것,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또 다른 육체의 법이, 누가 이깁니까? 나의 더러운 주체가 주님이 주시는 그것을 이기죠. 내 옆에서 더러운 것이 이겨요. 그래서 우리는 공허한 삶이죠. 내 힘으로 구원받으려고 시도해 봐라. 그것이 안 되는 겁니다.
루터도 안 되었어요. 그래서 루터도 십자가만 외치는 겁니다. 심지어 루터는 심한 말을 했어요. 하나님은 십자가 안에만 들어있다고 심한 말을 해 버렸어요. 다른 사람은 못 알아 들었어요. 하나님이 저 바깥에 있다고 하니까 바깥에 없어. 어딨어? 십자가 안에 있다. 그러면 바깥에 뭐냐? 그것은 물질 체계에요.
저 하늘 것도 영이에요. 영은 없어요. 영은 십자가 안에서만 나오고 영은 십자가만, 바깥에 우리를 계시하기 때문에 십자가 안이 아니에요. 그건 영의 세계가 아니단 말이죠. 그럼 저 세계는 주체가 만들어 낸 환상의 엘 샤다이, 신의 세계다. 그건 우리에게 하나의 우상이 되죠.
17장 14절에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할찐대” 내가 실제는 소망이, 내가 실제는 죽는 것 밖에 없구나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빌닷이 또 쓸데 없는 자존심을 또 건드리죠. 18장 5절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다 욥을 겨냥한 겁니다. 친구로 와가지고 완전 작살을 내요.
욥 18장 15-16절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아래서는 그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 가지가 찍힐 것이며” 그렇게 하니까 욥이 19장에서 하는 말이, 19장 20절에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 뿐이로구나” 과장이 좀 심했죠. 과장이 심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지만. 그저 남은 것은 잇거풀 밖에 없죠. 그거라도 남아야 계속 말을 해야 되니까, 마치 예수님 십자가 지신 그 몰골 같아요.
욥 19: 23-26절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나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라고 이야기해놓고 그 뒤에 가면요 죽는 것이 ??보다 가볍고, 거서 보자 음부에 가면 내가 무슨 수로 되살아나지. 또 걱정되요. 또. 그래서 이젠 나 안 죽을랍니다. 욥이 자꾸 변해요. 여기서 이런 소리하고 저기서 딴 소리합니다. 있는대로 다 쏟아 내는데 그게 나중에 뭐가 되느냐? 나중에 그것이 다 예수님의 성취가 되기 위한 예행이 되는 겁니다.
여기 구속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25절에 “나의 구속자” 이게 바로 고리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가 와서 대신 갚아주는 것. 민수기 35장에 나오거든요. 사무엘하 14장 11절, 신명기 25장 이런데 보면 그게 나와요. 그게 뭐냐하면, 특히 고아와 과부에게는 반드시 ??자가 필요합니다. 안그러면 돈, 재산, 땅 다 날려요. 그래서 고엘이 있다는 것. 억울한 것을 갚아주고 고엘 제도가 만들어 진 자체를 그것은 정의로운, 공의로운 하나님이라. 네가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고엘이 되셔가지고 메니져가 되셔가지고 그렇게 했던 너를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말이죠. 출애굽기 22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사상이 뭡니까? 고엘. 보복자. 복수자가 택한 백성이라는 이름 때문에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자기가 보디가드 해 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대로 은혜대로 순수 증여를 해 줘야지 자기 자신의 주체를 강요하기 위해서 타인을 압제하는 것은 그것은 이웃을 학대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에서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 된다. 이것을 이웃 환대법이라고 신명기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장 나아만 사람 소발, 3번 타자 양준혁입니다. 그가 와가지고 뭐라 하는가 하면, 니는 똥이라 했습니다. 너무 심한 말을 했죠. 니는 똥 같은 놈이다. 그리고 16절에 “그가 독사의 독을 빨며” 이건 전부다 욥에게 하는 말입니다. 니는 니는, 개미 퍼 먹어. 니는 독사의 독이나 빨아 먹어라.
20절에 보면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그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 못하겠고 남긴 것이 없이 몰수히 먹으니 그런즉 그 형통함이 오래지 못할 것이라 풍족할 때에도 곤액이 이르리니” 곤액, 곤액을 재앙이라고 합니다. 재앙이 들어닥칠 것이라. 그리고 24-25절 “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활이 소아 꿸 것이요 몸에서 그 살을 빼어 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느니라” 이것은 뭐냐하면, 죽어라 이말이에요. 죽어라. 죽어라 이말이에요. 내가 성경을 쓰면 이렇게 복잡하게 안 씁니다. 간단하게 씁니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죽으라고 하겠어요. 그 이유는 뭐겠어요. 니가 통뼈냐? 그거 하나에요. 니가 통뼈냐? 하나님, 우리 여호와가 우리에게는 계시를 안 해주고 너희에게만 독점적으로 계시를 준다. 어디 이게 캬... 요거 죽이뿔라. 어떻게 그동안 여호와를 철저하게 섬겼는데, 우리를 비켜서 지나갈 수 있는냐? 하나님의 계시가 말이죠. 우리는 율법이 있고, 쉐마, 너희는 들어라. 주여 듣겠나이다. 지금 잘 하고 있잖아요. 보소. 아이들 보충수업 잘 하고 있는데, 치어라. 이게 뭐야. 노는 것도 아니고. 치어라. 이거 시험에 안 나온다.
욥이 21장에서 22절- 25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평강하며 안일하고 그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 골수는 윤택하였고 어떤 사람은 죽도록 마음에 고통하고 복을 맛보지 못하였어도” 이것은 누구를 보고 합니까? 이것은 바로 친구들에게 드디어 17절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나오는데 욥이 하는 말이 21장을 쓰면 그러면 막가자는 이야기냐?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막가자는 이야기지. 좋다. 막가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제발 잘 난척하지 마라. 둘 다 똑같다는 거예요. 모두 구더기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이말이죠. 27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궤휼도 아노라” 궤휼이라는 말은 간사하게 속이는 것을 궤휼이라고 합니다. 28-30절 “너희의 말이 왕후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의 거하던 장막이 어디 있느뇨 하는구나 너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악인은 남기워서 멸망의 날을 기다리움이 되고 멸망의 날을 맞으러 끌려 나감이 된다 하느니라” 욥은 너희들은 아예 엉뚱한 것을 붙들고 지금 치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너희들은 저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3회전이 나오죠. 22장.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가로되 2절 “사람이 어찌 유익하게 하겠느냐?” 이렇게 해 놓고, 그 욥에게 하는 겁니다. 6-7절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갈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지금 이게 욥보고 하는 말이에요.
욥아 정신 차려라. 니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해 놓고 12-13절에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별의 높음이 얼마나 높은가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이렇게 건방 떨지 말라는 말입니다. 41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의 편을 든다는 것을 빼어버리면 엘리바스와 3친구의 이야기가 은혜스럽고 감동적인 연설이다 이 말이에요. 하지만 이것은 주체가 ?? 깨어진 자기 정당성이 보장된 한도 내에서 하나님의 계시란 말이죠. 그게. 욥은 뭐라고 합니까? 나도 다 안다. 고만 해라. 마이 뭇다. 고만 찔러라.
21절에 보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이게 뭐냐하면 십자가 복음이 필요없는 거에요. 하나님과 화목하면 복 받는데 뭐하려고 십자가 믿습니까? 나라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주체를 상대해요. 하나님 저 자복합니다. 화목의 악수를 내 밀어 화목합시다. 복 받았다. 이것은 욥기 1장과 42장을 알면 다 되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자아가 깨지고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지 않습니까? 욥의 주석가들이 이런 말을 감당하지 못하는 거예요. 맞다. 맞다. 맞다 하는 말은 욥의 친구들의 말을 옹호한다는 말이고, 욥기를 보는 주석 신학자들도 속으로 그 정도는 욥의 친구들 정도는 얼마든지 나도 이미 알고 있었지롱. 메롱. 그 정도는 나도 잘 알지롱. 이거요.
불교에서 공부 좀 한 중들도 이정도 하고, 대순진리회 도사들도 알고, 학교 교장 선생님도 이 정도는 압니다. 하늘은 높으고, 물론 철학자들은 다 알고, 뭐가 빠졌다고 했어요? 말씀, 그리스도의 고난이 빠진 거예요. 이게 빠지니까 내 육신이 아주 건전한 줄 알고 건전한 육신가지고 건전한 정신에 건전한 뭐... 건강, 육신을 가지고 아주 자기를 잘 ??처럼 보존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칭찬 받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깨어져야 할 것을,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늘 가짜니까.
23장 1절에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아픈 것보다 너희들의 공격에 더 아프구나. 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 이야기는 이미 욥의 친구들이 이미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욥의 친구들이 욥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거 내가 했는거 커닝하네. 욥의 친구들이 이 이야기 이미 했어요. 그렇게 은혜스럽다는 23장 10절의 이야기를 욥의 이야기 안 해도 욥의 친구들이 충고삼아 이미 그 전에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 네가 징계 받으면 나중에 다 잘 되라고 하는 것이다. 자식이 밉다고 때리나 잘 되라고 때리지.
히브리서 12장인가 1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녀가 징계받는다는 말은 너가 주체로써 아버지께 달려가려면 이런 혹독한 징계를 받아야 되.. 아참 그런 뜻이 아니라, 그것은 천로역정이나 하는 말입니다. 천로역정에서 우리는 나그네고... 히브리서 성경에서 나오는 신약에서 나오는 징계는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가 마치 가짜인 것은 진짜인 것처럼 환각 속에 있을 때 그것을 징계를 하면 껍질이 깨지면서 이미 구원받았지. 쓸데없이 나에게 신경을 썼구나. 내가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저분이 계속해서 그동안 그분이 다 받아서 구원 받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로역정 같은 경우에는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불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고 이건 완전 같기도에요. 같기도. 철학에서 이것을 플라톤 주의라고 합니다. 피타고라스주의도 그런 주의인데, 이 세상은 더러운 세상이고, 차근차근 등을 ? 싸우면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월등하게 천국에서 상급 보나스 받을 것이다. 이것이 보나스 제도 아닙니까? 상급 차등론, 성과급. 경영학에 나오죠.
욥기 23장 14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라고 친구야 이 정도는 나도 안다. 내가 영광되어 나올 것이고, 내가 하는 것은 다 작정된 것이다. 이건 뭐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안정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이 반칙 쓰실 일은 없다. 그런데, 그런데 이 왠 고난입니까? 하나님 제발 직접 나타나셔서 해명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이 너무 간절해서 약 올릴 수는 없고, 마지막 ??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욥이 계속 의인이에요. 끝까지 의인인데, 그것은 하나님도 인정하고, 마귀도 인정했어요. 의인인데. 친구들은 자꾸 죄인이라고 몰아 넣는거에요. 단 낮선고난을 인정못하고. 그런데 갑자기 죄인으로 오인받은 의인이라고 여겼던 욥이 갑자기 뭐냐 무조건 죄인되어버렸어요. 42장에서. 왠 일이 벌어져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고집쎄던 욥이 왜 이렇게 됬어요? 거기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42장에 보면, 내가 하나님을 대면해서 보니까 그 자체가 이유없이 죄인인 줄 알았습니다. 다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죄인으로써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거에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사야가 성전에 들락거리면서 .... 직접 성전에 여호와가 나타나고 천사가 날개짓 할 때 ... 나타날 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사울이라는 사람이 잘 나갔죠. 직접 나사렛 예수님 영광을 보니까 완전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아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물위까지 걸었던 베드로가 십자가 달릴 때 3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육의 한계에요. 베드로가 어떻게 맹세한지 압니까? 제 목숨 버리고 주님 따라가겠습니다. 이랬습니다. 주께서는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니 객기 아니까 오지 마라. 이것은 네 육이 할 일이 아니고 마귀하고 계산할 문제이니까 너는 좀 빠져라.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과 관계가 있지. 그 중간에 인간이 끼어 들어서 인간 문제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소가 마련되면 내가 다시 올께. 다신 온다니까. 다시 온다, 니가 나서지 마라. 니는 닭이 3번 울기 전에 나를 부인한다. 제가 그럴 일이 있습니까? 니는 마귀가 너를 삼키려해도 내가 안지키면 내 기도 아니면, 너는 마귀에게 이미 잡힌 놈이야. 수련회 온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에게 잡힌 주제에 무슨 주체를 강조합니까? 하나님이 안 도와주면 안 되는건데요. 결국 베드로가 기껏 울면서, 울어도 그거 눈물 뿐이죠. 지나가면 그만인데. 고기 잡은데 와가지고 고기 잡으러 돌아다니까,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니까 미안스러워서, 사랑합니다.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사랑하느냐? 와 자꾸 묻습니까? 미안스럽게도. 그러니까 니 맘대로 안 되지 세상 니 맘대로 안 되지. 니가 원치 않은 죽음으로 갈 것이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옆에 쟤는요? 이 목사님은, 욥 목사님은요? 욥 목사님은 죽든지 살든지 니하고 무슨 상관이냐? 니는 니 할일 하면 되지. 왜 저걸 하느냐? 이 말이죠.
모든 것이 이미 주체를 와해시키고 주님의 주체가 그 안에 담겨버리면,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늘 ?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죠. 하지만 가끔은 내가 가짜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진짜인 척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있을 때, 그 사람들이, 친구들이 무슨 잔소리를 하고, 옆에서 무슨 고상한 논리를 해도,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니까 이유 막론하고 죄인이에요. 왜? 나는 모친의 태중에서 태어나서, 그게 다윗에 가면 아예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살면서 죄 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죄 지었다고 시편 50편에 나오잖아요.
이유 없이 나는 죄인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자꾸 진짜 흉내내는 가짜고,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원했던 반도체 칩이 그리스도 덕에 넣었기 때문에 4번째 사나이 엘리후가, 엘리후가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너를 통해서 친구 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부여하는 겁니다.
저들의 죄를 위해서 네가 대신 기도해줘야 된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누구를 위해 기도합니까?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자기 조카를 위해 기도해 주니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출 해냈다고 창세기 19장 20절에 나옵니다. 롯이 착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배후에 후견자 고엘이 있어요. 매니저가 있다고. 매니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에게 천사가 찾아와서 롯으로 하여금 ??게 해가지고 그래서 구출하는 겁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살아갑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그만큼 하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 먼저 하신 일이 있어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다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 그거 손해본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교회 헌금하고, 귀한 생업까지 접고 오는거. 뭐, 기름값 계산하고, 너무 따지지 마시고, 순수 증여. 그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24장 1절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그러니까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언제 죽습니까? 언제 죽이십니까? 그렇게 한단 말이죠.
9절에 보면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10절 하반부부터 12절 “곡식단을 메며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이 말은 내가 하나님이 불의를 보지 않는 그것 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책임을 전가해서 하나님이 안 도와주고 내가 가서 도와주도록 일을 시켰잖아요. 이런 뜻이에요. 계속해서 욥은 뭐냐, 자기가 그동안 잘한 짓, 옳게 했는 짓, 그것만 자꾸 모아서, 그것만 모아서 하나님께 결재 서류를 받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착한데, 왜 저를 죽이려고 덤벼듭니까? 그 이유나 알고 죽읍시다. 하고 덤벼드는거에요.
25장에 보면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욥 25:4-5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욥이 말하기를 26장 2절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 도왔구나” 이렇게 읽으면 안 돼요.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자~~알~~ 돕는구나” 꼬고 꼬고 또 꼬아야 되요. 여기는. 참 잘 났다. 이렇게 되는거에요.
지금 그 따위 소리 한다고 내 고난의 이유가 되냐? 이 말이에요. 낮선 고난의 이유가 되냐 이 말이에요. 그 따위 소리 한다고, 그 정도는 그 전에 이야기 했잖아요. 욥이. 내가 인간의 힘으로 이 세상에 의인이 있을 수 없어. 나는 죄인 맞습니다. 다 이야기했는데, 이미. 이것은 초등학교 산수 시간에 이미 띤 거 아닙니까. 다 띤(끝난 것)것 이죠. 3단 다 알지요. 어떤 사람은 잊어지만 다 알잖아요. 3X1=3, 3X2=6. 다 알잖아요. 그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왜 하냐 이 말이죠. 지금 초점이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전능하심,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내가 왜?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왜 십자가의 피를 흘려야 되냐고, 내 앞에서.
그래서 욥이 꼽니다. 꼬고 나서 잇꺼풀이 남아 있으니까 있는 힘을 다해 죽을 때까지 다 이야기하는거에요. 욥기 27장에 보면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의를 빼앗다. 왜냐면, 왜 이렇게 하는가 하면, 뭔가 해명이 되야된다, 해명. 합리적으로 해명이 되야되니까, 이런 수 외에는 다른 수가 없어요. 다른 수가 없어요. 나의 의를 빼앗아 갔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잘못이다 이 말이죠. 왜, 주신 은혜 빼앗아 가느냐?
28장에 보면(1절) “은은 나는 광이 있고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취하고” 이건 왜 이리 하는가 하면, 지금 욥의 친구나 나나, 다 매장물을 다 끍어 냈어요. 이젠 없어요. 인간으로서 이유를 알려고 시도했지만, 이젠 더 이상 나올게 없습니다. 박박 끍었어요. 비빔밥 이젠 다 끍었다고. 그런데 그 속에는 지혜가 없다고요. 지혜가. 지혜를 왜 찾느냐?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사람의 지혜로써 무엇을 알지 못한다? 어리석은 십자가의 구원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사람은 성공해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인간의 모든 철학은 오히려 철학은 하나님, 그리스도 앞에서 폐기 처분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철학과 학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는 폐기 처분되어야 할 것이다. 폐기 처분되어서 아예 안 본 사람도 있는데, 뭐 알아야, 철학이 뭔지 알아야 폐기 처분 할건데, 모르고 하니까 폐기 된 것을 복음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처음 공부하면 ‘아, 철학에 해당하는 거구나’ 갈라서 할건데, 개혁주의신학은 폐기 처분 해야되요. 그건 철학이에요. 그건 플라톤 주의라고. 나는 목사데 철학을 뭐하러 해, 하면서 신학을 하는데, 그 신학이 그게 철학이에요. 복음이 아니에요. 삼위일체도 마찬가지고. 그게 헬라철학에서 나온 거거든요.
29장에 보면 드디어 욥이 자포자기에 들어갑니다. 차라리 3절 “그 때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취었고” 다 지나갔나니 기억이 없구나. 17절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하리라” 나쁜 놈들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선종하리라. 선하게 살다가 임종을 맞을 것이다,는 말입니다. 선종한다.
나는 누가 뭐라고해도 착했기 때문에 ‘나는 착한 나를 나는 어쩔수가 없어. 나 미치겠어. 너무 착해서.’ 이런 뜻이다 말이죠. 안 착하면 안 착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불의한 자를 포기했는데, 내가 나서서 도와줬거든요. 하나님이 쓰레기 줍습니까? 하나님이 구름 사이로 손가락 쭉 내서 쓰레기 줍습니까? 우리가 줍잖아요. 얼마나 착합니까? ‘어이 베란다 담배 피우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십니까? 여기는 하늘 나라, 여기는 하늘 나라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베란다에서 담배 피웠나? 고발한다. 이래 합니까? 안 하잖아요. 경찰이 있고, 옆에 있는 사람이 담배 피우지 마소 아저씨 하잖아요. 착하잖아요. 근데 뭐가 빠졌다. 낮선 고난이 빠진 거에요. 착한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30장에 보면, 30, 31, 32, 33, 34, 35, 36장 엘리후 이 인간은요. 그 동안 못했던 것을 다 토해내요. 근데, 주석가들이 엘리후를 욕을 많이 합니다. 본론부터 말하지 쓸데 없는 소리를 많이 해 놨어요. 내가 참다 참다 못 참아서 이야기 한다. 너희들은 나이 많다고 해서 봐 주니까 나이 많은 거 별것 아니네. 아, 내가 못 참겠구나. 쓸데 없는 소리가 많이 들어가요. 이것도 똑같은 마찬가지에요. 욥의 발목 잡는 인간이에요.
32장 보면, 1절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엘리후가 노를 발하면서 가로되 6절부터 보면,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년소하고 당신들은 년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11절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13절에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오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찌니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욥은 하나님이 나서야지 우리가 안 되겠구나 포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있잖아. 내가 왔잖아. 이 말이죠.
19절을 보면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터질거에요. 나 미치겠다. 말 하고 싶어가지고. 미치겠다 이 말이죠. 답답해서 못 보겠단 말이에요. 마이크가 하나 있는데, 2-3개 되면 개판됩니다. 서로 왕왕 울려서... 마이크가 하나 되어서 한 사람 이야기하고, 한 사람 또 하고 이래 되어야되요. 욥 당시에는 마이크가 하나밖에...
욥아 들어라. 처음에는 좋게 나와요. 니가 깨끗한 것은 맞다. 깨끗한 것은 맞지만, 너의 깨끗함을 인하여 10-12절에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크신 이유를 쭈욱 이야기 합니다.
23-24절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찐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하면, 일단 욥의 의가 침범하지 않는 상태에서 욥은 자꾸 자기 의가 하나님의 의라고 생각해서 자꾸 섞어 넣으려고 하는데, 일단 욥의 주체를 배제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욥에게 전달되느냐 쪽으로 엘리후는 이야기합니다.
34장에 보면 그 때부터, 34장 7절-9절 “어느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훼방하기를 물 마시듯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엘리후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거 주석가들이 한결같이 엘리후가 오바하고 있다고 보는거에요.
엘리후가 4번 타자 심정수가 욥에 대해서 과도하게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이미 욥을 산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욥이 처한 모든 상황을 동일하게 인간 욥도 함께 자기 자신도 포함시키고 친구도 포함시키고 전부 다를 한 그룹으로 몰아 넣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이런 가능성이 하나님 편에서는 있다는 거에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이렇게 될 가능성이 많은 똥 같은 존재다 말이죠.
다시 말해서, 엘리후가 보기에는 욥이나 욥의 친구나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라고 인간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지금 인간 쪽에서 와글와글 소리 난다 말이죠. 하나님이 인간에게 뭘 해줬는가 생각안 하고 인간들끼리 니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그럴 필요없다는 것이 엘리후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아주 강력하게 이야기하는거죠. 그러고 난 뒤에, 엘리후가 그 다음에, 34, 35, 36장 쭈욱 나오는데,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자연세계, 엘 샤다이, 하나님의 모든 자연이 안정되어 있는데, 모든 것도 만물도 심지어 동물들과 식물들도 모든 것도 그분의 안정성 속에 있다. 우리는 그 혜택을 받고 있다.
37장 21-23절에 보면 “사람이 어떤 때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북방에서는 금 빛이 나오나니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안정된 하나님의 모든 자연세계가 안정된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도 안정되어 있다는 것이죠. 안정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똑같이 욥이나 나나 욥의 친구 3명이나 우리 인간 자리에 돌아가서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기다리자 이 말이죠. 저쪽 자연 세계를 대 자연세계를 운영하는 그 분이 어떤 말씀을 주실른지 기다리는 쪽으로 하자 이렇게 나옵니다.
둘 다 잘했다고 하면 둘 다 나쁜 놈 되니까, 둘 다 한꺼번에 묶어 버리자, 묶어 버리고, 하나님이 뭘 주시는지 기다리면 된다는 거에요. 욥의 친구들은 뭐냐? 욥에게 지적하는거고, 욥은 거기에 대해서 내가 뭘 잘못했나. 이렇게 나오고, 욥의 4번째 친구는 에라이 이놈들 다 묶어가지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기다리자 하는거에요.
계속해서 38장에 보면 그렇게 놓고, 일종의 4번째 사나이는 일종의 인간 편에서 나온 중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시되” 이것은 뭐냐? 4명의 친구를 배제하고 오직 욥에게만 나타나요. 여러분,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날 때, 똑같은 말씀이 들려도 다른 사람은 뭘 들었습니까? 뭐, 우뢰가 쳤나? 갑자기 꽝하는 소리가 났는데. 사울에게만 그 음성이 들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꽝 하는 소리만 들렸어요. 못 들었어요. 마찬가지로 여기서 폭풍가운데서 오직 욥에게만 알려줍니다. 왜? 4번째 사나이가 구속자가 아니에요. 4번째 사나이가 메시야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역시 낮선 고난이 온 사람은 욥이기 때문에 욥에게만 장차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도록 하나님의 대속자의 역할을 하도록 합니다.
38, 39, 40, 41장 그 이야기는 뭐냐하면, 제가 여러번 이야기했습니다만, 38장 25절을 봅시다.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아~ 말 재밌죠. 욥과 욥 친구들이 회의 해가지고 우리 폭우 쏟아지는데 길 내야되지 않나? 길 없어서 못 나올건데. 이렇게 회의 한 적이 누가 있어요. 동일하게 서로 육에 속했기 때문에, 같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그것은 밀어 붙여야 해요. 그것은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죠.
26-28절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비가 아비가 있느냐?” 멋진 말 아닙니까? 비가, 비를 내리게 하시는 아비의 영이 육신 가운데 있는냐? 이 말이죠. 사람이 경작할 때 비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 의미를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서 내가 열심히 수고 했는데,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는 건데, 그것은 자기 존재의 의미이고, 아무도 경작하지 않는 땅에 비가 왜 옵니까? 올 이유가 없잖아요. 그 이유 압니까? 모르지? 모르는 게 무슨 말이 많냐 이 말이죠.
광야에 비 내리듯이 욥아 이유없는, 이유없는 고난을 줬는데, 네가 왜 거기서 대드느냐? 이 말이죠. 광야에 경작, 채소밭이 없는데, 비 오듯이 이유 없이 오듯이 우리와 관계없이 오듯이, 너에게 고난이 주어진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구원 받는 거에요. 선택에는 이유가 없어요. 창세 전부터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되었다는 거에요. 선택에는 예수님의 의지만 담겨있지, 나의 의지가 포함되면 안 됩니다. 창세 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되었고, 예수는 창세 전부터 미움 받기로 작정되어 있어요. 미안하지만.
그 언약 안에 미움 받아야 돼. 가는 곳마다 꿀밤 얻어 터지고, 가는 곳마다 꿀밤 얻어 터지고, 가는데 얻어 터지고, 왜 때리냐고 하면, 이유 없거든. 계속 때리는 거에요. 진노의 그릇입니다. 진노의 그릇.
주체가 중심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이유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이유가 없어요. 그냥 선택뿐입니다. 나중에 그 이유가 있죠.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예수님이 구원자고, 심판자인 것을 속성을 반드시 칩처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영광 돌리는 사람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렇게 뽑힌 겁니다.
그 사전에 하나님의 속성이 이유 없이, 난데 없이 우리에게 박히죠. 창세전에 이미 계획 잡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취소가 안 됩니다. 미리 아시 자를,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예약 손님 외에는 안 받습니다. 미리 예약된 사람만 부르시고, 부르신 자만을 의롭다 하시고, 불러놓고 의롭다 하지 않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풀코스에요. 불러놓고 하는 꼬라지 보니까, 치우겠다 그런 일 없습니다. 부르시면 코스가 마무리 코스까지 쫙쫙 쫙쫙 무정차로 그냥 달립니다.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것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러면 하늘 나라 가면 우리 면류관 반납하면서, 이렇게 된 것은 다 주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제가 잘 나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 잘 나서? 주신 자도 하나님,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간다,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있는 겁니다.
38, 39, 40, 41장은 뭔가 하면, 이 세상은 인간 관리 하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인간이 관리할 수 없는 악마, ??? 같은 그러한 신화적인 괴물 같은 것도 하나님 관리 하에 다 붙들 듯이 너의 고난도 똑같은 차원에서 내가 알아서 고난을 줬기 때문에 네가 신경 쓸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지만 신경 쓸 일이 아니라, 아픈데 어떡 합니까? 아픈데. 관절인데.
그렇게 하고 42장에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을 구속자로 삼는 것도 욥의 요구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끝까지 운신의 폭이 좁지요. 너희들은 나 아니면 죽었어.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기도하라 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지. 이리 와, 이리 와, 바라, 하나님 내 편 아이가? 어디서 나에게 까불었어. 다 물어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 뒤에 욥이 어떻게 합니까? 욥이 뭘 합니까?
아들 일곱을 얻었고, 딸 셋을 얻었는데, 문제는 욥 자기가 무정생산 한 것도 아니고, 분명히 여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여자가 전에 여하튼 그 여자냐? 새 장가 갔느냐? 그 문제는 계시 밖의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모르겠어요.
옛날에는 여자를 남자 흉내내는 것으로 봐서 남자의 복속시켜서 여자의 형질을 없애버렸어요. 창세기를 보면, 여자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남자부터 있다는 말은, 남자의 모방품, 모조품으로 유사품으로, 명품이 아니라 유사품으로 짝퉁이죠. 짝퉁으로 여자로 태어나서 결국 여자는 하는 행세가 남자를 따라가고, 모방한다고 해서 남자 여자가 아니라, 여자를 남자에게 복속시켜서 독자적인 존재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첫째 딸 이름은 여미마라 비둘기라는 뜻이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것은 향나무. 셋째 딸은 게렌합북, 이름 참 어렵게 지었어요. 게렌합북, 게렌합북, 이름이 어려워서... 아름다운 뿔이다. 미스코리아, 우스 땅이니까, 미스 우스, 진선미 다 차지했어요. 얼마나 아리따운지 전국, 전국 중에서 미스 코리아 대회에서. 욥기 42:15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여자에게는 원래 산업을 안 줍니다. 모세언약에 들어가면 여자는 자기 본분이 없어요. 모세 언약 전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시대이기 때문에.
욥기 42:16-17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욥이 ??되고 일백 사십년 동안 무슨 짓을 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욥이 중요한 것은 욥이 낮선 고난이 있던 그 시절에 욥이 존재해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십자가를 알 때, 그 때 비로소 십자가 때에 우리가 있지, 십자가 없는 독자적인 나는 그게 국회의원되든, 대통령이 되든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몇 년 살았다가 몇 년에 죽었더라 그 뿐이에요.
고난, 하나님께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칩을, 십자가 복음을 욥에게 집어 넣었다는 점에서 욥기는 구약 성경에 들어와서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책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펼쳐져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욥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자랑하다가 얻어 터지고, 내 잘난 척하다가 매 맞고, 욕 얻어 먹고, 주님으로부터 바를 깨닫고 내 속에 꿈틀 거리는 진동을 느끼게 하시면서 내 행함이 아니라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유 없이 구원 되었음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구원되었음을 날이 갈수록 더욱 깊이를 알 수 있는 저희를 삼아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