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욥기9강

아빠와 함께 2017. 9. 2. 17:15

07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9강)


이근호 목사 강의




시간이 되었으므로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유 없는 고난은 이유 없는 축복으로만 해소가 됩니다. 이유가 없이 찾아왔기 때문에 꼭 그 이유를 밝혀서 따지려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이유를 밝히겠다는 것은 자기 선에서 이 고난과 어려움과 불행을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우기는 셈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의 자존심만 자꾸 굳어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방식에 위배되는 겁니다.




그 위배되는 걸 가지고 인간이 자기 방식으로 자기가 처리하려고 하니까 그 위배되는 것을 ‘의사소통 불가’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근본적으로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습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보면 십자가 지는 끝까지 의사소통이 안 된데서 오는 결과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 한 번 읽어볼까요.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의사소통 안 되지요? 사람들이 예수님의 하는 일을 모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나오지요. 땅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늘의 일을 아느냔 말이지요. ‘나는 하늘에서 와서 하늘 이야기를 하는데 너희들은 땅에 속했기 때문에 땅의 이야기만 하니 어떻게 그렇게 해서 의사소통이 되겠는가.’ 안 되지요?




의사소통이 안 되는데서 오는 그러한 절망감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 아버지마저 침묵해 버립니다. 그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부르짖음에 답변이 없어요. 결국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 하고 맡기는 것으로 끝내 버려요. “다 이루었다.” 하시고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데.




욥의 특징은 친구들과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 반면에 욥과 하나님과도 의사소통이 안 돼요. 그럼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해서 너희 선에서 처리하려고 하지 말란 말이지요. 이유 없는 고난은 이유 없는 채로 그냥 맡기고, 그 다음 대책에 대해서는 이유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내 맡기면서 결국은 십자가 죽음에 버림 받는데 까지 가지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가복음 23장 34절과 똑같은 말씀을 해요. ‘하나님이여, 저들이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하나님께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의사소통을 막아서, 인간의 지혜로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유명한 말씀 나오잖아요. 요한복음 12장에도 나오고, 사도행전 마지막에도 나오는 그 세 가지 공통적인 내용은? 목사님들은 아시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의도적으로 차단하면서 그들이 그들의 실력으로 못 알아먹는 식으로 한 겁니다. 그러면 지난 시간과 한 번 연결해 봅시다. 지난 시간에 제가 이런 질문을 드렸지요? ‘사단이 말씀을 사용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는 이야기를 던졌습니다. 이것은 많은 신학자들의 논쟁거리로 등장했습니다.




성경 말씀 자체가 말씀이냐, 아니면 그 말씀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말씀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느냐, 그걸 따지는 겁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를 세 종류로 나눴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보는 성경 책, 성경을 첫 번째로 하나님의 계시로 봤습니다. 둘째로 그 성경책의 핵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계시로 봤습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깨우치고 이해하도록 움직이는 말씀, 전하는 말씀, 이것을 칼 바르트는 설교라고 했는데, 이 설교를 굉장히 비중 있게 봅니다. 이 설교를 하나님의 계시로 봤습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성경만 하나님의 계시로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도 계시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나오는 설교도 하나님의 계시로 본 것은, 칼빈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칼빈이란 사람이 세웠던, 중심이 되었던 개혁주의.




사실 루터는 이상적인 교회를 따로 세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교회를 바른 교회로 전환시키는 일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나와서 독자적으로 뭘 하나 만들자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 일은 누가 관심이 있었는가 하면 칼빈이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의 강조점은 이상적인 교회상을 구성해서 거기에 합당한 교회를 꾸리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루터는 만인제사장을 말하면서 하나님안의 계시 중심은 비워놓자는 거예요. 그건 누가 잘난 체 하고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식으로 강강수월래 할 때 그 중간은 텅텅 빈 상태예요. 그건 신의 영역으로 남겨두자는 겁니다. 만인제사장이에요. 건방지게 신의 영역에 끼어들어 자기가 가르친다고 깝죽대지 말란 말이지요.




요한1서 2장 27절에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누구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성령의 기름 부음이 직접 성도 하나하나를 가르칠 것이다.’ 누구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다고 하지요. 너희 속에 성령이 너희를 가르칠 것이라고 나온단 말이지요. 그 중간 과정은 비어있어서 거룩한 영역이고 성소적 요소가 되어서 거기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본 겁니다. 루터는.




루터는 그냥 영적으로 맡기자. 칼빈은 영적으로 맡긴다고 일 되겠나. 누가 들어서야지. 여기에서 칼빈은 만인제사장을 깨버리고 계급제로 나온 겁니다. 목사 계급만큼은 인정해 주자. 그럼 목사가 뭐 하느냐? 교인들이 제대로 하는지 심사하는 역할로 목사직은 특별직으로 특권을 부여해 주자는 것이 칼빈의 주장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루터 식으로 했을 때 성찬식 할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어중이떠중이 다 성찬식에 참석하면 안 되고, 성찬식에 참여하려면 적어도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가려내는 그러한 심사관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사관을 사찰이 할까요? 집사님이 할까요? 아니면 돌아가면서 할까요?




루터, 칼빈 시대는 오늘날처럼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입니다. 이 말은 모두가 성경책을 집에서 읽고 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에요. 요즘 교인이야 성경이 남아돌아서 교회 한 권  두고, 집에서 읽는 것 따고 있고, 차에도 한 권 두고 이렇게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성경책을 개인이 소유하지 못했고, 또 라틴어나 이런 어려운 언어로 되어 있었고, 라틴어를 배우는 과정이 요즘 수준으로 하면 외국에 유학 가는 정도거든요. 그만큼 특수 엘리트 계층에서만 문자에 접근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식한 대로 하나님이 주신 팔자라고 여기면서 농사나 지으면서, ‘그저 시켜만 주세요.’ 하면서 말씀 듣기를 원했지, 자기가 진리인지 따져보자는 그런 생각은 아예 없었어요. 그것은 글께나 배웠던 선비들이나 하는 싸움이지 민중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처럼 성령께 맡기자고 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안 되고 개판이 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습니다.




루터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에도 나오지만, ‘자연으로 돌아가되 법이 없는 것보다는 법이 있는 것을 나는 선호한다.’ 왜? 너무 자연으로 돌아가면 개판이 되니까. 무법보다는 악법이 더 낫다는 거예요. 악법 아닌 법은 없지만 필요악이라고 악하지만 필요해서 법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너무 풀어놓으면 이건 짐승인지 사람인지 구분도 안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잡아줘야 그래야 교회가 된다는 거예요.




만인제사장 좋은데 실제로는 목사가 성찬식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중이떠중이 같은 인간들은 참석하지 말라고 해야 된다. 그래서 칼빈 위주의 개혁주의에서 놓치지 않는 중요한 법이 하나 나옵니다. 그게 뭐냐? ‘치리’입니다.




개혁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딴 것은 다 포기해도 이 ‘치리’는 포기 못합니다. ‘치리’라는 것은 재판해서 처벌하는 거예요. 처벌권이죠. 이 처벌은 교회가 집사를 처벌한다고 ‘김 집사 나와. 손들어.’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찬식 두 주간 금지, 새벽기도 연속으로 5일 나와서 회개하기.’ 이런 벌칙을 가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로 하여금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홍보 효과가 있고, 질서 잡는데 유익하다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칼빈에서 대들었지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러면 세상에 나쁜 것과 선한 것 둘밖에 없습니까?’ ‘그건 아니다.’ 아주 나쁜 것, 나쁜 것, 들 나쁜 것,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닌 것, 좋은 것, 약간 좋은 것, 아주 좋은 것. 이렇게 나누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좋고 나쁘고 하는 도덕이 시대에 따라 진화되는 것 아십니까? 문화의 차이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는 것 경험하지 못했습니까? 시대가 바뀌면 도덕도 바뀝니다. 옛날에 어디 20대 여성이 공개적으로 술을 마셔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남자의 일이지 어른 앞에서 술을 마실 때는 얼굴을 옆으로 돌려서 마셔라. 여자에게는 이런 술 먹는 법도 자체가 없었습니다. 요즘은 술 취한 여성이 길에서 오물을 토해내고 남자가 등을 두드리고 엎어서 데려가고 합니다.




옛날에 여자가 어디 밤늦게 거리를 쏘다녀요.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저녁때만 되면 꼬박꼬박 귀가하는 딸이 있다면 ‘너는 그 나이가 되도록 애인도 하나 없나? 애인 만들어서 데이트도 하고 시집도 가야지.’ 이런 식으로 일찍 들어오는 딸에게 핀잔을 줍니다.




옛날에는 ‘나돌아 다니지 말고 조신하게 지내다가 참한 신랑 만나면 시집가라.’ 이랬거든요. 요즘은 ‘네가 백조냐? 왜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지내냐?’ 하고 구박합니다. 요즘 시대는 집에서 신부 수업할 것도 없습니다. 미역국도 마트에 가서 포장된 것 싸와서 물만 부으면 됩니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청소는 지능 청소기가 다 알아서 해 줍니다. 그것도 귀찮아서 못하면 남편이 다 알아서 합니다. 신부 수업 할 게 없습니다.




조금 나쁘고, 많이 나쁘고 어디에 이런 기준이 있습니까?


칼 바르트는, 칼빈이 이런 식으로 목사가 처벌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인들이 신앙생활 잘 하고 못하고를 자기 속에 계신 성령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말을 듣다 보니까 교회가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아무리 교인들이 신앙 수준이 높아도 절대로 목사 수준을 추월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법칙이 생깁니다. ‘이게 어디 건방지게 목사보다 믿음이 더 좋아.’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목사님 그것은 틀렸는데요.’ ‘입 다물어!’ 




목사가 무식하면 같이 무식해야 되고, 목사가 유식하면 같이 유식해야 되고 목사 눈치 보더란 말이지요. 이렇게 되니 목사들이 권력자가 되었어요. 17세기부터 이런 분위기에 접어듭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났지만 그 전부터 뉴- 크루즈 운동이라고 해서 농토가 양 치는 곳으로 바뀌면서 산업이 번창하고, 그렇게 되니까 노동자가 필요하고, 주일도 젖 짜는 시간을 피해서 11시에 모이는데 그 시간에도 교회 갈 수가 없어요. 초창기에는 노동력이 모자라서 어린아이까지 일했기 때문에 교회 나올 시간이 없어요.




이렇게 되니까 목사 월급 주기도 곤란해집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협조하는 의미에서 복지정책에 가담해서 국가로부터 비호를 받고 권력의 보호를 받는 그런 식으로 교회가 그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탱하려는 아이디어가 번진 거예요. 마치 요즘처럼.




복지부에서 새롭게 어린이 집이라든지 노인 복지관을 지으려니까 예산이 많이 드니까 기존의 남아도는 교회 건물(교육관 등)을 활용하되 국가에서는 보조금 주고 1년에 한 차례씩 감사나 나가고 교회에서 어린이 집이나 청소년 쉼터 이런 것을 운영해서, 그러니까 사회 소외층, 부모가 이혼을 했다든지 해서 애들을 돌볼 수 없을 때 이들이 거리에 나가서 문제를 일으키면 2차, 3차로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듭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개인의 자유지만 왜 여러 장소에서 금지하는가 하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안 피우는 사람보다 훨씬 병들 확률이 많고, 이들이 병들면 의료보험 제도로 건강한 사람이 낸 돈이 그 사람 병 치료한다고 다 들어가니까 보험료가 증가합니다. 그래서 금연 운동을 해서 서로의 비용을 줄이자는 거예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손님이 안 와요. 바쁘니까. 강제로 오는 사람은 교사나 공무원들뿐입니다. 이들은 강제로 노니까. 일반회사나 중소기업은 일요일도 없고 너무너무 바빠요. 잔업 한다고 토요일 밤 늦게까지 일하면 일요일 아침에 퍼져서 못 일어납니다. 아침에 눈뜨면 12시인데 어떻게 교회 나옵니까.




그리고 일반 가게나 상점을 하는 사람은, 젊은이들의 리듬이 밤의 리듬이에요. 활동시간이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일요일 아침에 12시가 되어야 일어나는데 어떻게 교회 나옵니까.




젊은이들의 생활 패튼이 그래요. ‘죽도록 일하고 허벌나게 놀자.’ 이것 아닙니까. 죽도록 일하는 이유가 허벌나게 논다는 그 환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고, 그리고 신나게 노는 거예요. 폭탄주 마셔가면서. 이게 전부 밤 문화에요. 밤 문화가 젊은이의 문화인데 젊은이들이 소비층으로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을 잡기 위해서는 밤에도 가게 문을 열어야 되고, 특히 토요일 밤은 대목입니다.




늦게까지 일하게 되면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지치게 마련이고 아침에 일어나면 11신데, 우리교회의 경우 11시에 눈 떠서 교회 오면 11시 10분 되는데 교회 오면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할 수 있거든.




맞벌이 하는 부부들 아침에 아내 못 일어나고 남편도 못 일어나니까 아침을 누가 합니까? 아무도 안 합니다. 하지만 기쁜 소식, 복음. 교회에서 점심을 주니까, 그것도 국수나 라면이 아니고 밥을 주니까 늦지만 교회 나오면 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이지요. 복음 들어 좋지. 밥도 줘. 헌금 내란 소리 안 하지. 에어컨 잘 돌아가.




요새는 목사님들도 바빠요. 아르바이트 한다고 바빠서 수련회도 참석 못하고. 목사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참석해야 되는데, 참석을 안 하니까 헌금도 줄고 이렇게 되니 목사나 장로에 입장에서는 심각해요. 그래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대책을 세우는데 그것이 뭐냐? 국가 보조금 타내는 일에 뛰어들어요. 노인 복지나 어린이 집 이런 쪽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19세기 영국의 국민소득 5,000불 10,000불 될 때의 현상입니다.




이럴 때 독일의 히틀러 정권이 등장하면서 대다수가 히틀러의 나치당에 투표를 했거든요.  그리고 히틀러 정권에 동조했어요. 천주교든 개신교든 살아남기 위해서. 교인들은 몰라요. 목사들은 나치에 동조합니다. 왜? 교회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이때 등장한 것이 칼 바라트인데 고백교회가 나옵니다. 그 때 [로마서 강해]를 집필하면서 ‘이것은 도대체 교회가 아니고 악마의 집단이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 칼빈주의 너희들 엉터리야. 성경만 계시가 아니야. 직접 살아있는 성경이 되려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해주면 이것도 계시야. 이 시대를 초월하는 묵시가 역사를 뚫고 들어오는 수직적인 계시가 진짜 계시야.’ 라고 이야기 한 겁니다. 이런 주장 때문에 세 가지 계시를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지금 살아계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이런 주장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칼 바르트 망했어요. 교회에서 쫓겨나고 도망 다니기 바빴어요. 약삭빠른 사람들은 정권에 동조했고, 일반 교인들을 돈벌이하기 바빴고.




‘우리나라(독일)가 잘 되려고 하는데 어디 쓸데없는 재야세력이 까불어?’ 하고 묵살했고, 그러니까 나치 핍박 때문에 다 도망가서 칼 바르트 신학은 다른 쪽(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가버려서 다른 것으로 변형이 돼요. 묵시를 강조했던 칼 바르트 신학은 나중에 묵시가 시들해 지면서 역사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묵시와 역사의 대립 관계가 아니라 역사 중에서 좋은 역사와 나쁜 역사로 나눠요. 이것이 라인홀드 리버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역사가 다 나쁜 것이 아니고 나쁘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가 좋은 역사 만들면 될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그리고 진리라는 것은 현재로 완결된 것이 아니고 날이 갈수록 개선하고 개선하면 그것이 기대할 만한 것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나아지면 그것이 진리에 가깝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들이 주장하는 ‘미완료된 진리’ 아닙니까.




복음이 미완료된 진리래요. 그래서 날마다 발전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주장을 하니까 십자가가 진리가 아니고 예수님 마지막 재림 골인 지점에서 진리가 완료된다. 이게 판넨베르그와 몰트만이라는 신학자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직은 우리가 안다고 하지 말자. 모른다. 예수님 재림 하시면 그 때 알거다.’




그 때까지 어떻게 삽니까?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해야 해요. ‘여러분, 계시는 나도 모릅니다. 갈 때까지 가 봅시다.’ 이렇게 해야 돼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역사를 밟아서 계시를 찾자는 것은 내가 가는 거예요. 내 신앙은 내가 알아서 관리하고 처리해야 한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욥의 친구들 이야기입니다. 욥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고.




찾아오시는 거예요. 어떻게? 우리의 교만을 극대화시켜서 ‘이 교만이 주님을 더욱더 힘들게 했구나! 나는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를 핍박하는 일이었구나.’ 라고 이야기하는 그러한 부딪힘. 이런 자기 죄를 아는 이것을 통해서 이미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가 무슨 발전이 있습니까? 그저 그분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더 알 뿐이지요. 우리는 날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문제는 이렇게 되면, 묵시가 되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칼 바르트가 강조했어요. 선지자들이 남을 설득시키려고 한 적이 있냐는 것이지요. 선지자가 남에게 인기 얻으려는 자가 어디 있느냔 말이지요. 인기를 얻으려면 그들이 납득 될 만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런 권한조차 박탈당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 전할 뿐이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선지자가 책임이 없습니다. 에스겔 보세요.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가라고 하면 가되 네 말을 안 듣는 것은 네 책임이 아니지만 만일 네가 가기 싫다고 안 가면 그 책임은 네게 묻겠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너무 답답해서 ‘하나님, 이 일 때려치우렵니다.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더욱 더 하나님이 압박하니까 할 수 없이 ‘그러면 제가 미친 놈 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가서 전한 겁니다.




이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너희들이 자력으로 나에게 접근할까 싶어서 내가 그렇게 했다.’ 왜 우리가 주님께 접근하면 안 됩니까? 그것은 접근하는 자체가 자아가 자기를 대단한 존재로 간주하고 죄인 의식, 십자가 정신이 그 안에는 들어있지 않아요. 영웅적인 의식이 점점 가미될 뿐입니다.




쁘로쁘라는 러시아의 기호학자의 이야기를 보면, 세상에 있는 20,000가지의 전설과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까 공통점이 있더라. 그게 뭐냐? 영웅 신화입니다. 영웅 신화가 뭔가 하면, 처음부터 괜찮은 사람(꽃 미남)인데 세상이 더러워서 안 맞는 거예요. 고난이 와요. 하지만 여기서 다시 고난을 스스로 딛고 나중에 성공하는 영광에 이르더라. 이것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 춘향전, 심청전 등 모든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마법의 성]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가사를 여러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 내용을 보면,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언제나 너를 향한 몸짓엔 수많은 어려움뿐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굳은 다짐뿐이죠. 다시 너를 구하고 말거라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죠.


끝없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마법이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제 나의 손을 잡아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이 너무나 소중해 함께라면)




결국은 공주를 구하잖아요. 얼마나 희망적이에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얼마나 산뜻합니까? 깔끔하고. 이런 사고방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 안 되는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를 주십니다.




이 [마법의 성]같은 그런 사고방식이 여기 욥기의 1번 타자 엘리바스죠. 1번 타자를 한 번 봅시다. 4장 12-17절입니다.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 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이보다 성결하겠느냐”




욥이 뻑 갈 줄 알았지요. 6장 1-2절을 봅시다.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한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달 수 있으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방금 엘리바스가 하는 이 모든 이야기가 다 조작된 계시, 엘리바스가 조작한 것은 아니에요.




어쨌든 십자가 복음을 가로막기 위한 조작된 계시가 욥의 고난이 더욱 더 심화되면 심화 될수록 점점 더 병행해서 같이 동반해서 아주 괜찮아 보이는, ‘뭔가 쓸모 있네.’라고 ‘뿅 가겠네.’ 하는 간증 집회 같은 것이 증가되는 겁니다. 그 간증 집회의 내용을 뜯어보면 영웅 설화입니다.




모든 것은 영웅이 없으면 드라마가 안 됩니다. 장사가 안 돼요. 항상 주인공은 영웅이어야 합니다. 그냥 영웅이 아니지요. 고난이 덮쳐야 해요. 그런데 고난마저 이기고 드디어 사랑도 얻고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 ‘삼순아! 삼순아!’ 하고 한라산에서 외치지 않습니까. 기어이 올라가서 자기 사랑 얻잖아요.




[백설 공주]보세요. 백설 공주가 기어이 왕자의 뽀뽀를 받아내지 않습니까. 얼마나 시련이 많았습니까? 못 된 계모 만나서 억울하게 쫓겨나고, 이게 피해자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을 보면 가해자입니다. 왜? 십자가 이후기 때문에 영웅 설화의 주인공 되었다는 자체가 가해자예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계시를 모르기 때문에, 로마서 3장에 의하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어떤 행동도 어떤 찬양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은 율법으로 가능치 않아요. 오직 율법 말고 다른 노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을 이뤄야 그게 영광이지 우리가 영광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응답받지 우리 이름으로 기도응답 안 됩니다. 중보기도는 주님밖에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인간이 어떻게 중보기도를 합니까? 기도하는 것마다 엉터린데. 기도하는 것마다 자기 영웅 만들기인데. 여기서 나온 영화가 [영웅 본색]입니다. 주윤발 나오는 영화인데. 이건 농담입니다.




하여튼 영웅 설화에서 우리는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고, 애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교육 시킬 때 영웅처럼,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너는 마법의 성에서 공주를 구해야 해.’ 라는 이런 영웅 되기를 가르치는 것이 교육입니다. 돌에 맞아죽는 것 말고,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 말고 번듯한 업적이 있어야 이 사회에서 사람 구실한단 말이지요.




어떤 주석자는 5장을 분석하면서 “꿈과 광기”라고 했습니다. 정말 잘 표현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엘리바스는 조작하는데 꿈과 광기(광기는 미친 짓)로 만들어서 그것을 가지고 욥에게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내가 실제로 봤다. 이런 내 말 안 들을래?’ 이렇게 나오거든요.




여러분,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악마의 계시입니다. 모든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한 예를 들면, 예수님에 체포될 때 꿈에 계시를 받은 사람이 있어요. 자기가 조작한 게 아닙니다. 빌라도의 아내입니다. 꿈이 굉장히 번잡스러워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 빌라도가 하는 짓이 뭔 줄 압니까? 아내의 꿈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체포하라고 넘겨주고 난 뒤에 세수대아에 손을 씻었습니다. 이거 계시입니까? 참 편리하네요. 우리도 죄 짓고 세수대아만 옆에 있으면 돼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정안수만 떠 놓으면 됩니다. 절에 다니던 옛날 우리 할머니들은 1년에 한 번 석가탄신일 갓바위만 올라가면 돼요. 가서 온 가족, 친척 이름 다 거론하면서 등만 하나 달아주면 1년 동안의 모든 죄가 다 용서 받습니다. 대속죄일입니다. 아주 편리해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더 편리하게 했습니다. 그런 짓 하지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너는 이미 의인이라는 보증서가 있는데 무슨 짓을 더 해서 보증서에 낙서를 하려고. 그렇게 하지 마세요. 우리가 해결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다 해결했습니다. 믿어주세요.




그리고 우리가 만약에 1년에 한 차례씩 제사 드린다면 그 다음부터는 세칙이 많이 들어가요. 부활절 날 교회 헌금이라도 한다면 첫째 조건이 돈이 신권이냐 구권이냐가 문제 되고요, 빳빳하기가 다림질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도 문제고, 봉투가 새 봉투냐 헌 봉투도 되느냐 이것도 문제가 되고, 1인당 얼마를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고, 헌금할 때 마음가짐이 억지로 내느냐 안 그러면 즐겁게 내느냐도 문제인데, 이것도 문제가 돼요. 억지로 내는 타임이 2.5초라면 그러면 기꺼이 내는 것은 0.5초도 안 되거든요. 만약 억지로 내는 것이 2시간이라면 기꺼이 내는 것은 0.5초라고. 그러면 그냥 헌금 내지 말고 때를 잘 기다렸다가 기쁜 마음이 생길 때 내야지요. 그 0.5초를 놓치면 억지로 내는 것이 됩니다. 미쳤지. 세상이 이런 미친 짓이 어디 있습니까.




고린도후서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헌금할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고 억지로 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억지로 안 하려면 기쁜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느냐? 최면을 걸어야지요. ‘억지로 하면 안 돼. 억지로 하면 안 돼.’ 무슨 이런 짓이 다 있습니까.




그래서 요즘 교회는 편리를 위해서 자원할 마음이 생길 때 은행에서 온-라인으로 보내지요. 공연히 교회 와서 연기하지 말고.




믿음은 집념의 산물이 아닙니다. 정신 흐려질 때 불신앙이고, 정신 집중하면 신앙이 아니에요. 믿음은 내가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이 주셨습니다. 하는 것까지 믿어져야 그것이 믿음이에요. 주님께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는 것도 이상하게 믿어질 때,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라고 믿어질 때 그것까지가 믿음이란 말이죠. 이게 새언약입니다.




새언약에 보면, 새언약의 구심이 되는 십자가가 우리의 저항을 뿌리치고 강제로 집어넣는 이것까지 합쳐서 새언약이에요. 예레미야 31장이 이뤄지려면 문자가 우리 앞에 스톱하는 것이 아니고 그 문자가, 다 이루심이 우리 허락도 없이 우리 내부 영혼까지 들어가서 아예 반도체 칩처럼 우리 안에 다 이루었다가 새겨질 때까지 책임지고 보장합니다. 누가? 하이카가 다 보장을 해요. 우리는 ‘미안합니다.’만 하면 돼요. 하이카가 다 알아서 해요.




죄 문제는 전담반이 따로 있어요. 우리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요. 이러한 귀한 기쁨을 누가 방해하느냐? 우리가 방해해요. 우리의 자존심이 죽을 때까지 안 죽잖아요. 우리가 자존심을 뿔뚝뿔뚝 세우면서 ‘주님, 이건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주님 귀찮게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자꾸 자기 의를 내세우다 보니까 나중에 깨지고 잘못했다고 하는 거예요.




빌라도의 아내가 꿈을 꾸고 ‘여보 그 사람 때문인지 몰라도 꿈이 좋지 않으니까 좀 조심해라.’ ‘알았다.’ 세수대아에 손 씻는 게 뭐예요? 나는 이 일에 죄 없다. 나는 무관하다. 이렇게 해서 빌라도가 천당 갔습니까?




꿈으로 계시하는 경우가 구약 성경에는 참 많은데, 꿈으로 오든 뭐로 오든 간에 그것이 십자가 복음을 증거해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복음이란 것은 나에 관한 사항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고난, 주님께서 내 대신 돌아가셨다는 것과 연관된 그러한 계시여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의 아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달달 외우고 완벽히 해석해도 거기에서 자기의 실천력만 나오지 ‘우리는 못 났고, 어떤 분이 대신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것은 그들은 꿈에도 그런 아이디어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 안 나오느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강제로 막은 거예요. 차단시킨 겁니다. 계시를 차단시킨 겁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고 있어요. 그 의사소통이 안 되는 그 경향성이 계속해서 나란히 1회전 끝나고 2회전 3회전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지지 의사소통에 접근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기를 보면서 양쪽 말을 다 들으면서 어느 쪽이 십자가 고난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여러분들이 친히 들여다봐야 돼요. 들여다보고, 이게 인간의 행함이냐 아니면 십자가 고난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보셔야 됩니다.




5장을 봅시다. 1번 타자 엘리바스가 길게 이야기를 많이 해요. 두 장까지 넘어가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그 다음 부터는 짧게 이야기합니다.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 자식들은 평안한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그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1-5절)




이 말은 뭐냐 하면, 현재 네 범죄한 것의 격에 맞는 그러한 벌을 받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잘못해서 이런 징벌을 받고 있다가 아니라, 네가 징벌 받는 것 보니까 징벌 받을 죄는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만약에 엘리바스가 이런 이야기를 안 하게 되면 졸지에 엘리바스 본인이 뭐가 되어 버립니까? 죄인 돼 버리죠. 왜? 자기하고 욥이 똑같은 수준이라면 자기는 욥처럼 받을 벌을 다음 차례로 받아야 될 대기 상태에 놓여 있는 겁니다. 은행에서 번호표 빼고(76번) 차례를 기다리는 거예요. ‘네 앞에 75번 벌 받는 것 봤지.’ ‘예, 알았습니다.’ ‘욥이 그 정도 나쁜 짓해서 이런 벌 받았는데 너는 알아서 해라.’ ‘아이고 죽었다.’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내가 그런 일을 안 당하려면 앞에 있는 인간이 나는 모르지만 분명히 10년 형, 그 정도로 심한 고난을 받을 죄가 있을 것이라는 거예요. 그럼 그것을 이제 소설을 쓰는 거예요. 네가 악한 자를 꺾어 버리고 나쁜 짓을 이렇게 했을 것이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왜냐 그게 욥을 위한 것이 아니고 누구 변호하기 위한 것입니까? 자기 방어하기 위해, 자기 의로움을 따로 챙기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목사님들이 개혁주의 교회에서 목사 중심이 되다 보니까 신앙을 목사를 추월할 수가 없습니다. 이걸 [두사부일체]라 하지요. 스승과 부모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 이 말이죠. 거기다 목사 하나 더 집어넣는 거죠. 그 뒤따라가야지 목사보다 더 뛰어난 신앙을 가져서는 안돼요. 그건 예의에 어긋나지요. 그건 다른 교회 가야됩니다. 이 교회 있으면 자꾸 누를 끼치니까.




그런데 재미난 실험을 해봅시다. 이 목사를 일반 교인들이 직장생활 하도록 집어넣어 버립시다. 그러면 성경 왜 안 읽느냐? 기도 왜 안 하느냐? 헌금은 왜 안 하느냐? 그러면 일반 교회 다니는 가정 형편에 한 번 들어 가보자. 맞벌이 하는 부부, 자기가 맞벌이 한번 해보지. 해보면, 이건 뭐 구원받는데 헌금도 안낸다고 이렇게 닦달 했던 것이 자기가 직접 힘들어 일해 보니까, 돈 10원 내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팔뚝을 자르는 게 더 낫지. 돈 10원 내는 것이 그렇게 아깝다는 것을 알아요. 야! 이 돈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이게.




사람이 돈 버는 공식은 이겁니다. 죄가 변해서 돈이 돼요. 돈은 죄의 뭉칩니다. 애들 노래 이런 게 있잖아요. 뭐 뭐가 변해서 뭐가 됐다는 거 있죠? 바다가 변해서 육지가 되고 ---  이런 노래 있잖아요.




죄가 변해서 돈이 돼요. 결국 헌금을 한다는 것은 창기의 돈을 내는 거예요. 더러운 돈을 내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헌금 받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받고 구원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공정하게 노동해서 공정하게 돈 벌어서 헌금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창기의 돈이라고 폄하할 수 있습니까? 라고 우기신다면 그 사람들은 자본론에 있어서 사용가치와 가치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가치가 뭔 줄 알아요? ‘가치 있다.’ 이(매직 펜) 가치는 무슨 가치냐? 글 쓰는데 필요한 가치다. 맞아요. 이건 사용 가치에요. 사용 가치는 시장에서 상품화 시킬 수 없습니다. ‘자, 중국산 골라 골라 ---’ 이렇게 할 때 가치가 되는 거예요. 내가 이것 만드는데 5,000원 들었다. 5,000원은 받아야 돼. 이거 사용가치를 우기는 사람인데 바보입니다. 안 팔립니다. 내가 5,000원 들여 만들었나. 중국산 수입하니까 2,000원만 하면 돼. 그러면 이것 안 만들고 수입하면 돼요.




가치라는 것은 노동하는 그 사람의 피와 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비층에서 어느 정도 필요로 하냐에 따라서 가치가 되는 거예요. 중소기업에서 밤을 새워서 제품을 만들어 놓아도 그 상품이 유행을 지났다. 땡처리 합니다. 아울렛으로 가요. 땡처리해서 넘어가는 거예요. 유행 지난 옷은 무게 달아서 팝니다.




그런데 이것은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손, 시장이 가치를 결정하는 거예요. ‘그럼 나의 가치는 뭡니까?’ 나의 가치는 시장에서, 소비층에서 결정하는 거예요. ‘나 공부 많이 했는데. 이런 기술 있는데.’ 이것이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 같은 기술 가진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러면 별 가치 없는 거예요.




과거 복덕방 시절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운영 할 때 집 소개하고 용돈 받아 챙겼습니다. 그러던 것이 공인중개사로 처음 자격시험 만들고, 돈 된다고 너도나도 자격을 획득해서 50대 직장에서 퇴직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공인중개사 시험 쳤습니다.




퇴직자들 두 가지 밖에 할 게 없었어요. 공인중개사 자격 취득하든지 아니면 제과점 차리든지. 공부 좀 한 사람은 공인중개사. 그것 아니면 빵집 차려서 하도 빵집이 많이 생기니까 값 싼 밀가루 수입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지요.




‘나는 공 들였는데.’ 그럼 다른 사람은 공 안 드렸습니까? 그런데 이걸 내 노동의 가치로 결정된다. 아니에요. 시장에서 형성된 겁니다.




올 여름에 유행했던 게 뭐냐 하면, 3,000원 짜리 누른 황토 파자마 유행했어요. 촌에 가도 없는 데가 없어요. 처음 나올 때 5,000원 했습니다. 5,000원 받을 때 ‘목사님, 저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3,000원 합니다. 그러면 갑자기 노동의 가치가 2,000원 깎였습니까? 그 2,000원 어디로 날아갔어요?




그래서 헌금을 할 때는 ‘그저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식으로 헌금을 해야 한단 말이지요. 그리고 목사님도 월급 받을 때 ‘죄인인데 참 뻔뻔스럽다.’는 마음으로 받아야지, ‘겨우 이거냐?’ 이런 식이 되면 곤란해요. 그러면 교인들이 ‘그럼 네가 한 번 일해 봐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 막대한 국가 복지 자금을 지원 받기 위해서 어린이 놀이방이나 청소년 쉼터를 운영해서 지원 받는 자금으로 교인들에게 헌금 부담도 줄이고, 목사도 먹고 살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필요한 교회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단 말이지요.




이렇게 되면 자기 정당화가 생기고, 자기 정당화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가 성립됩니다.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자기 정당화가 품어진 계시를 원하겠습니까, 아니면 나 죄인 만드는 계시 원하겠습니까?




욥이 바로 주님의 낯선 고난 때문에 친구들에게 덤터기로 욕을 얻어먹고, 욕을 먹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욥의 친구들은 ‘나는 이렇게 신앙생활 잘 하는데 너는 쪼다같이 하니까 그런 벌을 받지.’ 하고 자기 정당성이 내포된 계시를 가지고 욥을 지금 공격하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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