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스크랩] 구약의 율법과 서신서의 명령어

아빠와 함께 2017. 9. 2. 09:43

아래의 글은 손무성목사가 이근호목사에게 질문한 내용과 그에대한 답변내용 그리고 질문과 답변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자의 질문내용이 함축되어 있고 아울러 답변도 함축되어 있어서 그 내용을 읽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어려움을 어느 성도님에게 부탁을 드렸었는데... 그 분께서 시원하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아래의 질문과 답변 그리고 설명을 읽을 때마다 성경이 십자가의 비밀만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과 또한 십자가안에서 성령님의 책망하심을 함께 경험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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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래    -

 

질문(손무성 목사) 목사님께 질문 드립니다. 바울의 서신서에 '하라, 하지 말라' 라는 명령어들은 '율법의 행위' 즉, 율법과 동일한 것으로 가르친 것인가요? 명확한 답변바랍니다.

 

답변(이근호 목사) 당연히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새언약 시절에 인간 주체를 공격하고 겨냥하는 방식은 주님에 의해서 성취는 말씀 이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구약의 말씀은 신약에 와서 더 이상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복음적 말씀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몽학선생으로 인간을 공격했지만, 신약에 오면, 구약부터 신약 전체가 율법적인 양상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성취된 말씀'이라는 입장에서(즉 십자가 사건 안에 포함된 성취된 율법으로서) 인간의 죽음을 규정짓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의 정죄에서 '죽어야 될 자'에서 이제는 '당연히 죽은 자'가 되어야 됨을 복음의 기쁨 속에서 파악하게 됩니다.

늘 죽는다는 환희와 기쁨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말씀이 아니면 어떻게 죽음이 주는 기쁨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임을 알게 하는 기쁨은 이미 구원받는 자들이 대하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십자가의 정죄 하는 능력과 거기서 구원해주시는 용서의 능력 듬뿍 담겨 있음을 오직 그들만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 설명(어느 성도님)

 

목사님께 질문 드립니다. ->그동안 논쟁 과정을 통해 손목사님의 입장이 '성도를 살았다(살아 있는 존재)'라고 규정함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이장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울러, '살아 있다'는 식의 명제에 성경적인 알맹이가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을 저의 글을 통해 충분히 논증해왔음도 아울러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살아 있다'고 말할 때, 그 '살아 있음'이라는 말에 들어 있는 의미를 성경적으로 제대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점 말입니다. 성경에서 성도더러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에 대하여 죽임 당했다는 의미입니다(롬 7:4).

이러한 성도의 처지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가운데 하나는 '단회적 십자가 사건의 지속적인 효력의 적용대상이 되었다'는 것임을 저는 저의 다른 글들을 통해 누누이 말씀 올렸습니다.

흔히들 회자되는 '십자가'라는 말 자체만 보더라도 그것은 살리는 도구가 아니라 죽이는 도구입니다.그렇다면, 성도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기존의 뭔가(아담 안에서 받은 성도의 전인격적 타락성으로서의 인간 본성)가 부족하여 보충하거나 부실하여 완성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기존의 그 뭔가를 죽여 나가는 방향으로 다루시는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이 곧 오직 십자가의 죽으심의 공로만이 구원의 근거가 됨을 천명하는 것이고 말입니다.성경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부족함'이 아닌, '죽어 있음'으로 규정하고 봅니다. 구원 대상인 인간의 본질이 '부족함'이라면 구원은 그 부족함을 보충하는 차원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보충적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죽이시는 능력'입니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즉,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자들을 살리셨다'는 말씀은 허물과 죄로 물들어 있는 본성을 십자가의 죽이시는 능력으로 죽여나가시는 것을 뜻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딱 한번 발생했던 것, 즉 단회적 사건이지만, 그 능력은 성도들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발휘하십니다. 이것이 '단회적 십자가 사건의 지속적인 효력의 적용하심'입니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말입니다(갈 2:20).

그러니, 위와 같이 '(성도를) 살리신다, (성도가) 살아 있다'라는 식의 말 표현의 내막은, 십자가의 공로의 효력으로 인간의 전인격적 타락성을 겨냥하시고, 다루시고, 죽이시고, 지배하시고...라는 뜻임에도 손목사님은 그러한 의미적 내막을 도외시한 채, "살아 있다", "말씀 실천, 율법적 정신이 깃든 온갖 권면들을 실천할 수 있는 능동적 존재가 되었다"...등등의 긍정적 표현들을 일삼으며 정작 성경이 말씀하시는 중생의 의미를 도외시했던 것입니다.'(성도를) 살리신다'는 말 표현은 십자가의 효력으로 다루어나가신다, 즉 죄성을 죽이신다는 뜻이요, '(성도가)살아 있다'는 말 표현은 바로 그러한 십자가의 효력의 적용 대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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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서신서에 '하라,하지 말라'라는 명령어들은 '율법의 행위'즉, 율법과 동일한 것으로 가르친 것인가요? 명확한 답변바랍니다. ->성도더러 "살았다(살아 있는 존재)"고 규정한다는 말을 두고서 달리 표현하자면, 다름아닌 (그동안 손목사님 스스로 표현해오신 것처럼) "능동적 주체"라는 말입니다.이 능동적 주체라는 말이 바로 바로 앞의 이메일을 통해 말씀드렸던 바, 율법의 제3용도(규범적 용법)을 스스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주체자라는 뜻입니다.

손목사님 자신은 분명히 그러한 입장이 맞다고 보는데 이근호 목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인 것입니다.즉, 서신서 속에 있는 온갖 권면들(명령법적 표현들, 곧 "성도들이여, -는 하라, -는 하지 말라" 라는 식의 온갖 표현들)의 표현을 놓고 보면 분명히 지키라는 식으로 주어진 것인데, 왜 이근호 목사 당신은 그러한 표현들을 구약의 율법과 똑같이 놓고 보느냐 라는 겁니다.

구약의 율법들은 유태인들도 지키지 못했고, 애당초 지켜서 구원받는 용도로 주어진 것이 아닌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약 아닌) 신약의 성도들에게 권면 형식으로 제시된 그러한 온갖 명령법적 표현들까지 구약의 그러한 율법들과 똑같은 것으로 치부해서 되겠느냐 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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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설명

 

당연히 동일합니다. ->위와 같은 사안에 있어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권면들은 동일한 성격을 띤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지켜 구원받았거나, 혹은 받은 구원 안에서 구약의 율법을 열심히 지켜 나가야 함의 당위성 - 받은 구원의 유지 따위 - 이 성경적 근거가 없듯이, 신약의 권면들(명령법적 표현들)을 지켜 구원받았거나, 혹은 받은 구원 안에서 명령법들을 지킴으로써 구원이 유지되어감(갈수 있음)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선택하신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이요, 부르신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 섭리요, 구원을 실시하고 완성해 나가시는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도하심일진대, 인간의 자율성, 능동성, 주체성, 실천 의지, 실천 능력...따위를 활용한다거나 그러한 것들의 일부라도 참조 한다 혹은 예정에 포함시키셨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 구절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독자적인 사역입니다. 그 과정에서 율법을 사용하시고 권면들을 사용하시고...하는 것입니다. 왜, 무엇을 위해서냐 하면, 오직 하나님의 독자적인 은혜, 즉 십자가의 공로만을 증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누구도 율법이나 권면의 수행, 실천 정도의 측면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서나 혹은 받은 구원을 유지해나가거나, 받은 구원의 내용물로서 그런 것들로 채워나가거나 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자는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손목사님과 존 번연의 대화 "중 일부 구절들이 간명하게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구원과 관련된 모든 국면에서 인간 쪽에서의 그 어떤 것들도 일체 배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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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새언약 시절에 인간 주체를 공격하고 겨냥하는 방식은 주님에 의해서 성취 되는 말씀 이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손목사님과는 달리 인간(성도 포함)의 본질, 본성은 아담 안에서 부여받은 이래 늘 변함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는 그러한 본성을 공격하고 겨냥하는 식으로 중생(영적 부활, 구원 받은 상태요 처지)시키시고 중생된 성도들을 관리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도의 구원을 주도하시고 관여하시는 성령님의 주체적 사역은 손목사님이나 칼빈주의의 주장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후자들의 경우,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것(중생한 것)은 맞는데, 구약의 율법(의 정신)이 신약성경에 사도들을 통해 주어진 온갖 권면들 속에 고스란히 담겨 면면이 이어지고 있으며, 중생한 성도들은 바로 그러한 성격을 띤 권면들을 실천하고 준수하고 지켜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실천적 삶이 가능한 이유인즉, (손목사님의 표현에 따르면) 성도를 두고서 "살아 있는, 즉 능동적인 존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글들을 통해 능동적이고도 주체적인 존재는 성도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이심을 피력해 왔습니다.

갈 2:19은 성도("나"라 언급된 사도 바울 포함)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존재이며(그렇기에 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더 이상 율법 및 율법의 정신이 담긴 그 어떤 형태의 규범에도 얽매어 살아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갈 2:20을 보면 분명히 성도의 입장(처지)란 "(더 이상)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저의 다른 글들에서 누누이 밝혔습니다.

한편, 바로 위에서 "더 이상 율법 및 율법의 정신이 담긴 그 어떤 형태의 규범에도 얽매어 살아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는 저의 언급은 율법의 규범적 용도가 비성경적이라는 뜻이지, 율법 자체가 성령의 사역에서 더 이상 활용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율법을 활용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공로(십자가의 능력)만이 성도의 구원의 실체라는 점을 증거하시는 차원에서 말입니다.(저는 율법무용론자(율법폐기론자)가 아닙니다. 만약 이러한 저의 입장이 율법폐기론으로 간주된다면 루터 또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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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율법은 몽학선생으로 인간을 공격했지만, 신약에 오면, 구약부터 신약 전체가 율법적인 양상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성취된 말씀'이라는 입장에서(즉 십자가 사건 안에 포함된 성취된 율법으로서) 인간의 죽음을 규정짓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죽음이 요청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님의 생명 이외에 그 어떠한 인간의 생명도 생명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십자가 사건이 온 우주에 천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양심에게 죄를 지적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신약 구절들이 그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구약 시대에 비해 신약은 성취된 말씀, 곧 예수님 자신을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성경은 언급합니다(히 1:1-2).따라서, 이 과정에서 율법 또는 명령법적 표현들은 성취된 말씀 안, 곧 예수님 안에서 그 안에 놓여 있는 인간 존재들을 향해서 늘 회개의 심령을 부어주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동원되는 겁니다.

성령님께서는 왜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되는 지를 성도에게 끊임없이 인식시키시는데 그 과정에 인간 자신을 출처로 하여 산출되는 것은 아담의 속성, 곧 전인격적 타락성에서 비롯되는 것들밖에 없음을 율법 또는 그와 동일한 여러 명령법적 표현들을 통하여 지적하시고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삼엄한 법이 시민법으로서 온 인류를 겨냥하여 죽음과 심판으로 몰고 가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율법을 이용하시는 성령님의 구속 사역은 성도에게 있어 은혜성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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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곧, 구약의 말씀은 신약에 와서 더 이상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복음적 말씀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적으로 재해석됨'의 요지를 바로 위에서 제 나름대로 설명해 드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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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되면 율법의 정죄에서 '죽어야 될 자'에서 이제는 '당연히 죽은 자'가 되어야 됨을 복음의 기쁨 속에서 파악하게 됩니다. ->죽은 자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동참된 존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더 이상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 생명으로 내세워질 수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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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죽는다는 환희와 기쁨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말씀이 아니면 어떻게 죽음이 주는 기쁨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죽음' - 세상에 대해, 자신(의 죄성)에 대해, 기존의 생명...에 대한 죽음- 이 주는 기쁨이야말로 그러한 참된 생명과 직결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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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임을 알게 하는 기쁨은 ->(첫째) 아담 안에서 난 모든 자들이 그러한 자들이나, 둘째 아담(그리스도) 안에 놓인 자들만이 자신의 그러함을 일깨우심을 받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율법과 온갖 권면들 앞에 설 때에 말입니다. 즉, 자신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자가 아니라 '죽은 자'임을 고백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직 살아 계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는 분은 그리스도(의 영) 자신이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갈 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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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구원받는 자들이 대하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십자가의 정죄 하는 능력과 거기서 구원해주시는 용서의 능력 듬뿍 담겨 있음을 ->죄가 없으면 은혜도 없습니다. 정죄, 심판이 없으면 구속의 용서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대조 없이 성립되는 것은 없습니다. 절대적 의미를 띤 것들이든, 상대적 의미를 띤 것들이든 간에 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온갖 개념과 그 개념에서 비롯되는 온갖 실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의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곧 기존의 세계에 대해, 기존 세계에 속했던 자신에 대해 죽은 자들에게만 발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만이 더 이상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만 대체된 자들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이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대체된 것을 의미하지, 기존의 인간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하게 연장(확장)됨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첫 아담 안에서 난)의 생명은 원판이요, 그리스도(둘째 아담)의 생명은 확장팩(업그레이드 차원)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첫 아담 안에서 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 율법의 정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대체된 자들, 곧 그리스도의 생명 안으로 감추어진 자들만이 지옥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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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들만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로 성령 받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사안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들 밖에는 없습니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출처 : 화평교회
글쓴이 : 이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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