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가격] 마르셀 에나프 저 김혁 역 (눌민 출판사:2018)
가격이란 돈으로 가치를 매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에게도 과연 가격을 매길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돈으로 가치를 매기는 이 현 시대에 오기 전에 인류사에서는 진리에 대해서 가격을 매기는 것을 ‘타락’이라고 여기는 강력하게 반대하는 자들이 있어 왔다. 왜 그들은 돈과 진리를 연결시킬 수 없다고 여긴 것인가?
철학자는 ‘가격을 넘어선’ 위치를 가장 잘 대표하는 자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개인의 가치를 높이는 자들이 아니라 공동체 공동의 진리를 사수하는 것을 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진리는 공동체를 유지하기에 참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공동체를 해치는 그런 지식을 팔아먹는 자들에게 대해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사기꾼들이라고 저주했다.
인류의 문명은 구성원 상호간의 유대를 무엇보다도 우선시했다. 소위 ‘공적(公的)’이라고 불리는 가치다. 마을 구성원들이 재화를 교환하는 것도 재화를 획득하거나 축적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재화를 이용하여 사람들이나 집단들 간에 상호 인정의 유대를 확립하는데 있다. 한마디로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다. 이는 물질 대신 생명을 중요시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에 있어 진리 개념은 예언자, 마술사, 특히 시인의 지혜를 담은 고문헌들로 종종 나타났다. 그들은 단순한 기억력에 의존해서 진리를 전하기보다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찰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축복받은 신들과 영웅들이 함께 거주하는 계시(啓示)의 평원 같은 것이 이 같은 통찰에 의해 펼쳐진 광경이다. 영감과 통찰로 가득 찬 시인의 노래가 낭송됨으로써만 신들과 더불어 신의 영역에서 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이 쏟아내는 언어의 능력이 단지 찬양의 노래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능력은 다른 영역에서도 증명되는데, 점술의 영역(신탁으로 알리고자 하는 바를 이룬다)과 법의 영역(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사람 예컨대)은 판결을 내림으로써 판결의 정당성을 실현한다. 말의 세계는 실재하는 현실이며 자연이 행사하는 힘의 일부이다. 시이면서도 예언이면서 법의 힘을 동시에 갖는 말, 이것이 계시의 세계다.
그런데 도시국가의 출현으로 이런 고대 지형은 해체되어 변화한다. 폴리스(도시국가)는 전사들 간의 평등을 제도화한 중장보병의 개혁과 함께 정비되었다. 추첨으로 분배될 공동의 전리품을 쌓아놓기 위해 중간의 원으로 중립지대를 지정했는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이 있으며 여기서 말하게 했다. 이곳은 논쟁의 공간이자 공적 공간이 시작된 곳이다. 말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영험한 말로 주술을 걸던 것이 대화와 반론으로 대체되었다.
이전의 신명(神明)재판은 조사와 증거를 요구하는 재판으로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권위에 기댄 연설 대신에 의견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말은 완전한 실체로서의 다시 말해 영험한 힘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그 효력과 분리되어 자율의 형식을 가진 도구가 되었다. 이제 신성한 입으로 말해지던 계시에 맞서 토론에 의한 ‘합의 본 지식’이 생겨났다. 계시의 시대에서 지식의 시대로 달라진 것이다.
자연철학의 부흥과 수학의 출현으로 진리에 대해 새로운 개념이 널리 유포되었다. 바로 사물들 자체에 내재하는 객관성이라는 관념이다. 객관성에 도달하기 위한 학문은 태곳적 지혜를 얻기 위한 영혼의 고생이나 자기 수양의 학문과 더는 혼돈되지 않았다. 이제 앓은 입교의 비밀스러운 절차를 거쳐 전수되기보다는 공적인 교육을 통해 전수될 수 있다고 여겨졌는데 여기서 앎은 다양한 전문가들의 기술에 비견될 수 있는 교육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대중화 혹은 통속화되었다.
이제 진리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소피스트들(진리를 전하는 자들이 아닌, 지식판매자들)이 달려든 것이다. 지식을 팔아먹고 자기 명예와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장사꾼과 같아서 지식의 본질을 알 필요 없이 성품으로 구매하도록 고객을 설득하기만 하는 된다는 자들이다. 진리 자체를 위해 목숨 거는 일은 없다. 이게 바로 진리에 대한 날조와 거짓을 유도한다. 이 지식 상거래는 도시 중심으로 흘러들어오는 물자의 상거래와 진배없다고 진리를 찾는 자들은 개탄한 것이다.
도시가 번성하면 생산물을 외국에 팔고자하는 유혹이 생기고 그 결과 돈이라는 독이 도시로 흘러 들어온다. 항구는 상인들에 의해 감염된 장소다. 플라톤은 상인들이 항구를 선점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바다의 전 공간이 오염된다고 평가했다.
항구를 도망하도록 유혹하는 장소로만 본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덜 과격하다. 항구의 경제적 유용성을 인정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산하지 않는 물건들을 수입해야 하고 남아도는 생산물은 수출해야 한다. 따라서 자급자족의 관점을 굳이 고수해서 교역을 끊고 폐쇄에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교역의 목적은 재물을 불리는 데 두어서는 아니 된다. 보다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도시를 ‘우정(友情)’으로 넘치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업 활동은 ‘우정’이 아니라 사적 욕망에 기인했기에 정식 도시국가의 시민이 할 활동이 아니라 공동체 밖의 사람, 곧 외국인이나 해방노예들이 할 일이다고 여겼다. 전문적 상인이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고파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매우 바빠서 그래서 상류계층에서 고상한 활동이나 진정한 시민 의식을 함양할 만한 여지가 없거나 허용되지 않는 사람이다, 곧 선함과 거리가 먼 천박한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상거래에 의해서 초래된 질서는 상업적 교환과 이윤의 지평에서는 탐욕, 매수, 사기와 배신이 출현했다. 속임수를 부르는 기술이나 천재적인 솜씨는 자기네들끼리는 감탄사를 낳지만 이윤 추구에 관한 기술들은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이념을 모독하고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멸망시키는 원인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전통 사회의 열매라고 여겨지는 공동체는 자체적인 선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동안 어떤 식으로 경제활동을 해왔는가?
전통사회에서는 ‘상호 되갚음’으로 유지되던 사회였다. 증여를 거부하고 초대하지 않는 것은 받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그러하듯이 전쟁의 선포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동맹과 공동성의 연대를 거부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특히 결혼 동맹은, 인간 사회가 동물 사회에 구분되면서도 인간 사회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상호 되갚음’의 차원에서 혼인이 성사된 것이다. 오누이 사이, 혹은 누나와 남동생 사이에는 단순히 성적인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도적인 결합으로서 금지하는 것이다.
근친상간의 금지는 그것의 넓은 사회적 표현인 족외혼과 마찬가지로 상호 대갚음의 규칙에 의거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도 차지하지 않고 차지해서도 안 되는 여자를 증여할 수 있다.
상호 되갚음의 요청은 족외혼적인 동맹의 중심에 있으면서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필수적인 이유가 된다. 이는 자가 자신이 잡은 사냥감을 먹는 일을 금지하거나 때로는 자신이 키우는 가축을 먹는 것을 금지하는 것 같은 일련의 관습에서도 발견된다.
선물을 주는 것이 더 이상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자를 조상이나 신이 주시는 선물로 보았다. 여성은 일종의 선물인 것이다. 의례적 선물교환은 물건으로 매개된 사람들 간의 관계라기보다는 상징물에 의해 새로이 맺어진 사람들 간의 새로운 연대이다. 감히 시장에서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다.
의례적 선물교환은 중앙정부가 없는 사회에서 사회 신분에 따라 집단들과 개인들 간에 드러나는 공적으로 인정받는 연대들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일부를 상대의 공간에 감히 줄 수 있는 사회 유다가 없거나 이것에 바탕을 둔 관계나 상호 인정이 부재하다면 이 세상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수렵시대가 지나고 목축시대가 오면 선물은 더는 자연에서 오지 않고 조상들로부터 온다. 가축이라는 선물은 상속자의 손에 들어간다. 그리고 아들들만 상속을 받게 되면서 여자를 데려가는 쪽은 여자를 주는 쪽보다 우위에 선한다. 친족체계 전체가 변화하며 우리는 실로 위계와 채무의 세계로 들어간다. 바로 희생의 세계이다.
가축의 소유는 초자연에게 먹고살 것을 마련해준 보답으로 돌려주어야 할 것을 바꾸어놓았다. 가축은 그것을 기른 사람을 대신해 바쳐지는 것이다.
사냥꾼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으면서도 가장 먼저 가져간 사람이었다면 가축 떼를 물려받은 목자는 무리 중 몇 마리를 급히 희생시켜서 조상신들이 나머지 가축을 위해 비를 내려주고 풀이 나게 해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투자를 해야 한다.
희생은 생산의 안티테제이다. 생산은 미래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지만 기르는 일은 (사냥의 경우처럼) 정령들이 주는 것을 그저 받는 게 아니라 이미 얻은 것이 끝없이 재생산되도록 통제하고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위험을 무릅쓰면서 얻는 새로운 권력이다. 이로서 야생동물은 통상 희생에서 제외되었다.
인신공양이 동물의 희생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풍속의 잔인함을 완화하려는 의도보다는 생명의 지배에 대한 새로운 관념에서 비롯되었다.
야생동물은 신 또는 정령의 선물이기 때문에 제물로 적합하지 않다. 그 일부를 보답으로 바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희생에 적합하려면 인간이 돌본 대상, 애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산된 것이어야 한다.
마치 희생물이 인간 세상에서 생명의 원천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려내져야 하듯이, 그리하여 종속된 존재의 생명, 가축 또는 농작물이나 (매우 드문 경우지만) 귀중한 공예품같이 인간이 생산한 무언가가 바쳐진다. 이러한 양상은 놀랄 만큼 보편적이며 희생이 있는 곳이며 어디서나 희생하는 사람과 희생된 것 사이에 이러한 근접성, 소유 그리고 종속성이 관찰된다.
희생은 인간이 산 것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신으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무엇보다 인간이 전유한 생명의 부분에 대한 최종적인 통제력을 회복하게 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그들의 권력을 증여체계 안에 묶어둔다. 가져간 게 많다면 돌아오는 것도 많은 법이다. 희생은 죽음을 통해, 약화되고 사라지는 것 같았던 선물교환 관계를 복원한다.
희생물을 파괴하면서 피를 내는 것은 그 가시성을 비가시성으로 옮겨 가게 하며 조상 곁으로 보내 순환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신은 자기 것을 내어 놓는다. 제물의 파괴는 가시적인 것을 비가시적인 것 쪽으로 움직이게 하며 반대의 운동이 일어나도록 응답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희생은 식물과 동물의 사육이 정착농업의 출현, 때로는 ‘정치권력’의 출현과 더불어 가져온 인간사회의 전반에 걸친 변동을 책임지고자 한다. 이것이 그저 사회변동이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총체로서의 세계관념 자체에 생겨난 변화이다.
그렇다면 ‘시대가 다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전통사회에서 하는 일들은 거의 비슷하다. 전문화된 직업이 있는 복잡한 사회에서의 삶과는 다르다. 만일 공적 생활, 다시 말해 정치 영역만이 공동체의 삶으로서 정당화된다면, 같은 이유로 재화를 교환하는 활동은 사적 영역으로 전락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시민들의 물질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해 희생되는 비즈니스 영역이 된다. 경제 영역과 관련된 정치 영역의 자율성은 고전적인 사상에 의해 너무나 확고해졌기 때문에, 그에 맞서 정치 영역과 관련된 경제 영역의 자율성 또한 점진적으로 출현한다. 하지만 이 자율성에는 진정한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부차적인 신분으로 배제 또는 격화된 자율성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백년간 서구 사회에서는 이러한 관습적인 분리나 차별에 의해 발전한 경제 활동이 공적 생활의 영역 자체를 침범했다.
쉽게 말해 세계와의 관계 및 인간 상호 간의 관계를 가시적이고 수량화된 재화들의 경영으로 바꾸거나 계산된 가격과 시장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생산하고 교환하고 소비한다면 그 결과 가격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라는 관념은 끝내 사라질지 모르고 그렇게 되면 시장의 울타리 바깥에는 마침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며 그 결과 물질적인 순수성이 완성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거기에는 과오도 죄도 증오도 용서도 남아 있지 않으며 단지 크고 작은 오류, 적자와 흑자, 기한 내 지불 같은 것만 남을 것이다.
고대인들의 입장에서 증여관계가 상업관계로 변형되는 것을 생각할 없는 일이다. 선물은 오직 대갚음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선물은 쓸모 있는 재화라기보다는 관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랑도 결혼도 마찬가지다.
수직적인 선물은 수평적 선물교환의 복잡한 운동을 대체하고 수평적인 선물교환은 친밀한 관계에만 남게 된다. 경제 영역이 사회 영역을 침범할수록 선물교환 관계는 사적 영역으로 물러나고 일방적인 증여가 새로운 영역으로 등장한다. 거기서 어떠한 보답도 불가능해지만 (그러한 통약 불가능한 선물에 대한 어떠한 응대로 충분치 않을 것이기에) 사회관계는 상업적 교환에 의해 공개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증여가 내면화되고 사적인 일이 될 때 시장은 사회에서 사회로 관계 영역을 확장한다. 욕망의 저축되는 것이다.
언제나 베풂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 어째서 이제는 멀어져 버렸는가? 그 과정은 노예제에서 농노제로, 농노제에서 자유민으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노예는 그의 인격, 노동, 그리고 주인이 전유한 재화로서의 그의 생산물을 남김없이 더한 총합이다. 노예제의 진정한 제약은 아무리 고되다 해도 복종의 의무에 놓여 있다기보다는 노예가 자신의 노동과 산물을 어떤 등가물과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 바로 이 불가능성 안에 있다. 이 등가물(돈)은 그에게 다름 아닌 자기 존재를 단순한 사물들의 회로 바깥으로 꺼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농노가 제공하는 노동을 노예제에서처럼 그의 인격과 결합된 봉사와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농노는 자기 자신을 빚지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빚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에게 빚지고 있다. 사랑해야만 하기에 사랑한다.
노예가 하듯이 단순히 생산하고 소비하는 게 아니라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은 생산자의 몸이 더는 다른 사람의 신체의 일부가 아님을 증명한다. 사고팔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의 소유권을 나아가 소유자로서의 인정된 지위를 전제하는 것이다. 독자적인 자유인은 자기 몸이 자기에게 속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가 이익공동체(코이노니아)를 구성하며 그것 없이는 정치 영역(폴리스)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다. 고전시대에서는 생산과 교환의 질서보다 정치질서가 우선이었다. 전통사회에서 모든 생계 활동과 그 잉여는(선물, 축제 때로는 희생을 통해) 호혜적 유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그 목표는 경제적 힘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는 사람의 위엄을 높이고 신들을 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교환할 수 있는 권리 자체가 거래의 양보다 더 우선되었다. 주조된 화폐는 가진 자에게 공적으로 신용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해방의 힘’이다. 그 화폐 안에 계약이 들어 있다. 그 누구나 돈만을 교환하지 결코 인격적 예속을 넘보지 않겠다는 언약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정치보다 경제가 우선이 되는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임금(賃金)제도는 고용자와 피용자 사이의 인격적 단결을 가져왔다. 상호 돈만 쳐다보자는 것이다. 양(量)으로만 따지자는 것이다. 질(質)은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사회는 유기적 모델에서 기계적 모델로 이행되었다.
돈벌이는 누구에게도 당당하다. 이 사회는 더 이상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정의(正義), 곧 정당한 보복을 돈으로 환산해서 요구할 수 있 관계망으로 구성되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상호 선물교환으로 유지되지 않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신성함이나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사회라고! 인격성이 빠진 합의는 합의가 아니라고! 기계들의 등가물(等價物)로 넘쳐나는 사회, 이게 바로 오늘날이라고!
(평)
1930년, 대공황 시기의 미국 남부의 한 촌락.
마을 자체는 황량하다. 방적공장과 노동들이 사는 방 두 개짜리 주택들, 한 그루의 봉숭아나무, 색유리 창을 단 교회, 그리고 고작 100미터도 안 되는 초라한 중심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 마을에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연과 사랑과 상처가 있다.
한 여인이 읍내에 나타난다. 그녀는 미스 아멜라. 부지런하고 과묵하다. 그녀는 카페를 연다. 그리고 어떤 변화를 생겨난다. 밤이 되면 모든 불빛이 꺼지고 집들이 차갑게 변하지만, 카페의 불은 커져 잇고 따뜻하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카페 안에 다른 이들도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더불어 모이고, 음료수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경솔하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쉽게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단 한 사람으로 새로 중심 잡혀지는 세계상이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희생적인 영웅 앞에서는 돈을 아끼지 않고 쓴다. 나의 정신적 공허감을 메워준다는 조건하에 이 정신적 공허감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세월과 시간 속에 아무런 내용물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돈의 ‘비워 있는 요소’의 효능성 이전에 시간의 ‘비워 있는 의미’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즉 세월이 주는 결핍성을 늘 쫓기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돈이 마술이 아니라 시간이 마술이다. 시간이 지속되는 한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 시간은 선물이 아니라 형벌이었던 것이다.
대안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세워주는 것이다. 과연 나란 죄인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의 형벌마저 나에게 합당한 하나님의 선물(膳物)이 된다. 울적함 대신 감사가 터져 나온다. 주님 자체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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