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신학이 이단인 이유
1. 기어이 구원시켜 주려한다.
구원될 수도 없고 구원 되어서는 아니 되는 자들까지 기어이 구원시켜 주려한다.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겔 13:19)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 28:25-27)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2. 글자(원어)에서 구원의 능력을 양생(養生)시키려한다.
원어가 번역어보다 구원의 능력이 더 많이 줄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풀어내는데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가 크게 관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글자)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글자)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 3:3,6,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19-21)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3. 역사를 통해서 구원을 확신하려 한다.
성경 전체를 그냥 영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역사로 전환시켜놓고 그 다음에 그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계시를 읽고자 한다. 즉 자신의 행함으로 지난 역사를 계속 이어나가면서 그것이 곧 구원의 반열에 참여한 것으로 간주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니 역사를 거꾸로 읽으면서 묵시사건으로 통합시켜 버리는 사도들의 해석법을 이해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살해에 적극적이었던 그 당시 신학자들의 견해가 바로 이런 역사적 이해에 토대를 둔 성경해석법이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요 1:15)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1-46)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4. 교회를 기어이 포기 못한다
성경에서 교회라고 나오면 그 교회는 인간이 가시화하거나 구체화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가 이미 완료된 교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자들은, 자기네들이 현 인간 세상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그 교회를 일치되기를 시도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두 종류의 교회가 존재하게 된다. 성경은 두 종류의 교회를 인정한 적이 없다.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성경은 나눈 적이 없다. 그저 하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교회와 다른 하나는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완료된 상태’의 교회일 뿐이다.
둘 중의 어느 것이 가짜이겠는가? 당연히 가시적인 제도와 조직으로 사람들의 움집집이 가능한 단체로서의 교회이다. 말로는 ‘성령의 공동체’라고 우기지만 실은 자꾸만 자신들의 힘들이 살아있는 그 쪽으로 교회됨을 확인하려 든다. 성경에서의 교회는 한 사람이라도 완전한 교회요 두 사람이라도 아무런 하자없는 완전한 교회다. 왜냐하면 힘하고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관계로만 교회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사정이 이러니 인류 역사를 통해서 항상 인간들이 교회(혹은 교단)라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참된 교회를 핍박하게 된다. 피 사건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만 인정하고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내기까지의 자신들의 노고와 헌신과 치밀한 교리들과 신앙고백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저주하려든다. 그러니 참된 교회는 항상 인간들의 교회로 공격받는 식으로 현실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개혁주의적 교회는 역사를 포기 못하니 역사의 결정체로서 구체적인 교회 실체를 찾고자 한다. 따라서 그런 교회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전도 실패, 목회 실패로 간주해서 불안해 한다. 노아가 자기 가족만 구원시켜도 목회를 완벽하게 성공한 일임을 그들은 믿지 못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20)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5. 성부 중심의 삼위일체 신학을 주장한다.
개혁주의신학은 ‘주권사상’을 내세운다. 주권사상이란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의 궁극적인 종교사상인 것을 그들은 감히 짐작조차 못한다. 육의 한계가 주권사상의 양상으로 나온다. 모든 세상 종교가 다 ‘주권사상’으로 일관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곧 이들은 복음을 아는 자들이 아니라 자연종교가들이다.
사도들이 순교한 것이 ‘주권사상’ 때문이 아니다. 복음 때문에 죽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주권사상을 사수하고자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신의 피’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주권사상’과 맞지 않아서 사형 당하신 것이다. 이것이 계속해서 모든 인류에게 ‘걸림돌’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0-33)
이 ‘거치는 돌’로부터 신학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월등한 존재성에서부터 출발하는 개혁주의신학은 예수님을 밀치는 유대 신학자들과 악마의 하수인들이다. 이들은 십자가로만 나타나시는 ‘주’와 ‘최고 신’의 존재를 구분 못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죽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는 신이 바로 죽음으로 말하는 신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종교 행위로 더 살고자 한다. 그렇다면 종교 행위는 자신의 저주를 재촉하는 행위에 해당된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제시된 신은 어떤 신인가? 저자는 기존의 기독교 신론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파헤친다.
신은 숨어있는 신이다. 따라서 아무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모른다. 아니, 신은 없다. 신에 대한 인간적인 인식을 발동시키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궁금하고 찾고자 하는 가운데 신은 그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들이 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알고자 하면 할수록 인간은 사실 신으로부터 고립되고 동시에 신 자신도 신에 대해서 고립되어진다.
예수는 가룟 유다에게 지시하기를 자신을 배반하라고 했다.(마 26:25) 이 세상에 온갖 신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를 배반할 것을 요구하는 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로 이루어진 최초의 기독교 동아리와 보편 교회의 창시자인 사도 바울 사이를 연결하는 ‘소실되는 매개자’이다. 즉 사도 바울은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들어가서는 그 역시 스스로를 배반해야만 하는 신인 예수를 소개하게 된다.
진정한 예수에 대한 신뢰와 신앙은, 추종자로 하여금 예수에 대해서 배신케 함을 유발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숨어있는 X를 이해하는 것은, X로 인하여 주어지는 자신의 배신을 수긍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예수 앞에 서면 예수로 인하여 모든 것이 노출되어진다. 예수는 곧 ‘타인’으로서의 시선이며 그 타인으로 인해 ‘나’가 규정된다. (불교의 허점은 그 타인의 시선을 삭제하는데 있다. 즉 타인이 없는 가운데 자아마저 없애려고 한다)
그런데 이 타자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타자성이 문제가 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타자성이란 지루한 동일성을 지닌 타자다)
예수라는 타자는 예수라는 존재의 일관성에서 주어지는 타자성이 아니라 그의 명령을 통해서 그 명령에 호출되는 인간의 태도와 반응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의 명령을 접하게 되면 모든 인간의 자아가 분열을 일으키게 되고 그 분열과 벌어짐 속에서 비로소 비쳐 나오는 타자성이 예수로 인한 타자성이요 신성이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이 명령을 받은 인간은 “하지말라!…살인하라!”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 로마서 7장에서의 사도 바울이 전한 계시다. 즉 “살인해야만 해!”가 “하지 말라!”라는 명령의 본 내용에 해당되도록 인간 내부에서 유발된다는 것이다.
이 “네 속에서 넘쳐나는 것을 거세하라”는 곧 불가능한 명령이 되고 만다. 만약 제 때 거세 못하면 처벌이 따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 처벌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욕망이란 넘쳐 남을 향유하는 그것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처벌의 저주스러움이란 인간이 끊임없이 쾌락 너머의 것을 계속 집착하는데 있다. 현 쾌락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즉 얻어진 행복이 곧 저주스러운 상태가 된다. 결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으로 쾌락을 얻게 되지만 그것이 저주스러운 처벌이요 대가가 된다. 그래서 인간은 법을 제공한 타인을 속이려든다. 이것이 바로 희생이다. 예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뭔가 얻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속이기 위함이다.
이로서 예수는 인간과 멀찍이 떨어지게 된다. 법을 제공하므로 서 신은 최고의 위반을 저지르고 만다. 범죄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응당한 처벌을 원한다. 하지만 신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범죄자로 유발시킨 법 자체가 곧 정의라는 이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위반이기 때문이다. 신은 이로서 모든 원인을 제거한다. 신 자신의 죽었다는 그 죽음이라는 ‘결과’로서 모든 원인되게 하는 ‘원인’들을 삭제시켜 버린다.
신이 죽으므로 서 신은 내부적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신과 신 사이에 간격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러한 간격은 더 이상 신이 인간의 신 인식에 의해서 포착되지 않기 위함이다. 인간들이 신을 포착하고자 한다면 예수는 가룟 유다처럼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어 우리들의 신앙을 ‘배신한 신앙’으로 만들어버리는 위치로 만들어버린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타락을 반복시키는데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선택은 실은 강요된 죄의 선택이었다. 따라서 아담의 죄성을 눈여겨 볼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강요함’ 자체가 구원임을 알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타락이 자체로 타락이 아니라 타락이 자체로 구원이 된다. ‘타락으로 오인하는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보는 악이란 ‘악이 악을 보는 시선’에 불과하다. 타락조차도 구원으로 이해하는데서 비로소 ‘사랑으로 인한 자유’가 발생한다. 악은 실질적으로 선과 동일하다. 악은 생성 중인 선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처해서 악인으로 행세한다. “그래, 거짓 사도들아, 내가 어리석은 자다. 하지만 나의 어리석음이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진정한 그리스도 닮기란 그리스도의 회의와 불신에 동참하는 것이다. 죄를 부인하는 것 자체가 죄의 궁극적 증거가 된다. 신을 법을 주면서도 항상 그 법에 대해서 창조적으로 해석하며 법을 곡해한다. 이로서 인간들이 주어진 법해석으로 신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뿌리친다.
왜 개혁주의자들은 신의 주권에 최종 관심이 가져갈까? 그것은 자기 존재 구원에 최종 관심이 가 있기 때문에 신의 모든 것을 파악하게 된 그 주인공으로 자기 존재 채우기 위함이다.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39-43)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경유하고 우회해서 최종 ‘자기 영광’에 귀착하려고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 피를 보고서도 곧장 시선 돌리고 신의 최고 자리를 쳐다보려고 한다. 거기가 곧 그들의 숨어있는 욕망의 최종 도달점이 되기 때문이다.
6. 개혁주의자들은 자신이 하나의 우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모른다.
개혁주의신학을 신봉하는 자들은 말씀을 실천하는데 급급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 자신이 그토록 다듬어 보려는 본인 존재를 한 순간의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전환시킨다는 사실을 모른다. 인간은 안개다. 한 순간의 안개에 불과하다. 단지 사건으로만 족하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천국이란 사건화된 존재만 필요한 것을 개혁주의신학 신봉자들은 모른다. 마태복음 20장 포도원을 통한 천국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4명의 사건화된 인물을 제시했다. 포도원에서 와서 단지 1시간만 일한 사람은 자기에게 돌아온 품삯의 의미가 은혜 사건임을 안다. 하지만 아침 10시에 와서 7시간 일한 맨 처음 온 일꾼을 자신을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고 ‘존재’라는 넓은 면적 속에 자신의 노동을 담아 두었다. 즉 자기 역사(歷史)를 따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막상 자기에게 돌아온 ‘은혜의 품삯’ 때문에 기분 나빠한다. 그 ‘은혜의 품삯’은 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노동으로만 제공된 것이다. 즉 품꾼에게 있어 타인의 노동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 내리면서 천국을 이 어두운 세상에서 드러내신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5-16)
7. 행함을 믿음으로 위장한다
개혁주의자들에게는 도무지 믿음이란 것은 나올 수가 없다. 그저 ‘예수 믿는 행함’, ‘이웃을 사랑하는 행함’, ‘복음을 받아들이는 행함’, ‘전도하는 행함’, ‘성령 충만하게 해달라고 비는 행함’ ‘회개하는 행함’, 등등의 행함 이외는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만 짓는다는 사실이 믿지 않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 안에서 모든 인간의 행함이 죄가 되어 나온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령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성령과 협상과 타협에 나선다. 하지만 성령님은 인간과 협상할 마음이 없으시다. 오직 말씀에 준해서 인간의 모든 것을 지적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는 이미 완료된 예수님의 행함만이 적용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인간의 잘못된 죄관념과 의관념과 심판관념을 문제 삼으신다. 왜냐하면 그것들로 인하여 메시아가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6:8-12)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성령님께서 구원하시는 자도 구원받을 자와 협상이나 의논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에 근거해서만 적용시킨 결과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2, 9-11)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따라서 성도는 성령님에게 최종 공로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에게만 돌린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5:24/6:14)
8. 날마다 새로운 창조보다 늘 복귀(회복)하는 것을 선호하고 추구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일을 잘못하면 다시 죄 없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면 그만이라고 여긴다. 개혁주의신학에서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은 과거 복귀 사상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사실은 ‘아들의 나라’(골 1:13)가 아니라 ‘인간들의 나라’ 곧 지옥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있어 과거란 실은 사후(事後)적으로 처리된 지금의 현재 욕망의 일부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즉 지금 자신이 ‘반성하고 있음’ 자체를 긍정해서 자아를 긍정을 쥐고 싶어 하는 수법의 일종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짜 성도 다루심은 과거로 회귀하는 방식이 아니라 날마다 죽이신다. 그리고 날마다 살리심으로서 존재를 사건으로 바꿔버린다. 오직 십자가 사건이 날마다 터지는 그런 성전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0-12)
십자가 사건이 바로 ‘새언약의 완성’이다. 그런데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날마다 개선하는 것으로서 구원됨을 설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육의 반대도 또한 육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아무리 수정하고 개선하고 개혁하고 고쳐보아도 거짓된 것은 다른 거짓됨으로 자리만 바꿔질 뿐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3:4)
9. ‘저주’ 말하기를 머뭇거린다.
복음은 저주를 말하는 것을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수 11:20)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렘 10:25)
하지만 개혁주의자들은 저주와 심판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그것은 ‘저주받기로 예정된 자’가 확정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전도 철학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3-16)
저주받기로 작정되었다면 자신들의 전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항변한다. 바로 이러한 반발이 평소의 그들의 심보를 드러내어준다. 즉 그들은 십자가 죽으심 자체를 증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교회’라는 권력단체를 만들어내는 이익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권력단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고 존재의 이유와 보람과 자기 영광을 챙기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자들이 악마의 직원들이다. 복음 밖에서 자기 존재를 세워놓고 밖에서 복음의 유효성을 관찰하겠다는 자들이다. 자기에게 힘이 되는지 아니되는지를 놓고서…“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4, 13-15)
10. ‘인간은 구원되지 않을 정도의 전적 죄인이 아니다!’를 주장함
결국 출발 자체가 ‘나도 구원받을 자격 있음’에서 비롯된다. 개혁주의자들은 창세기 3:24에서는 생명나무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차단시킨 취지를 모른다. 아무리 해도 설명해도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인 것을 믿지 않으려 한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가혹할 수가 없다고 저항하고 반발한다. 이 저항과 반발은 예수님의 공로를 훼손하겠다는 악마의 본래 성질이 내부에서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이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3-5)
이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주되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예수를 믿어 구원 얻게 된 자기 자신이 더 중요시된다. 이처럼 인간들의 신이란 인간을 구원해주는 쪽으로 마음을 바꾼 그런 신을 이미지화 한 것이다. 예수를 믿던, 삼위일체를 믿던, 성부를 믿던 무슨 신을 믿어도 달라질 것이 없다. 이런 상상의 신은 곧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그냥 곱게 추방된 것이 아니라 “나도 언젠가를 구원될 날이 있을 것이다”는 포부를 내부에 삼키면서 조작해내는 그런 신이다.
이것은 곧 자기가 자신을 믿는 것이다. 개혁주의신학이란 곧 “자기 자신을 믿는 것 외에 달리 믿을만한 것을 결국 남아 있지 않습니다”를 확인시켜주는 신학이다. 성령을 받지 않았기에 십자가 속까지 들어올 수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부활이 신난다. 왜냐하면 평소에 자신이 사라지는 죽음보다 그 죽음을 딛고 자신이 다시 살아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구원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며 그 예수님의 구원만을 온전히 찬미하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만이 구원에 참여 할 수 있다고! 이것이 곧 ‘예수 안’에서의 구원이다.(결코 창세전에 우리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 아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