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천국과 지옥101009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3. 16. 08:37

101009 대전특강 천국과 지옥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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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특강101009a천국과지옥a

20101009a 대전특강 - 천국과 지옥a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천국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천국과 지옥을 겸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논리적인 차이가 있어요. 천국은 무엇과 상대하느냐 하면,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나라, 천국의 반대말은 땅에 있는 우리 인간들 그러니까 천국에는 하나님이 계신 곳, 땅은 인간들이 사는 곳, 이것은 ①존재적인 대립이나 차이가 되겠지요.

천국과 지옥을 겸할 때는 지옥과 관련된 천국, 천국과 관련된 지옥에서는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서는 안 돼요. 논리적으로 반칙이 되는 겁니다.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안 돼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②기능적입니다. 천국은 이렇게 만들어져 가는 거고, 지옥은 이렇게 만들어져서 지옥이 되는 겁니다.

지옥이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지옥이 만들어지는데 천국 따로 만들고, 지옥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천국, 지옥이 병행해서 같이 만들어져요. 자크 할 때 왼쪽, 오른쪽 자크를 열면 한쪽만 열리는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양쪽 다 갈라지잖아요. 그것처럼 천국, 지옥은 하나의 기능이 들어가게 되면 천국, 지옥이 갈라지는 그러한 활동성, 모습에 의해서 천국, 지옥이 갈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안 되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 지옥을 보여주게 됩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기능적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보여주는 거예요. 이것은 쉬운 말로 하면, ‘있는 것’과 ‘보여주는 것’이에요. 초장부터 너무 어렵지요. 오재석 장로님 오면 다시 하겠어요.

제가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아가씨가 ‘나, 남자있어.’ 나에게 남자있다니까 존재죠. ‘나 그리운 사람이 있어.’ 같을까요, 다를까요? 남자가 있고 그리워하면 같을 텐데 남자가 있는데 ‘전에는 자주 만났는데 요새 뜸해.’ 이렇게 되면 지금의 남자는 한때 그리워했지만 지금은 안 그립지요. ‘요새는 소원하고 멀어진 것 같아.’

더 쉽게. ‘우리 집에 화장실이 있다.’는 이 말과 ‘지금 나는 용변 보고 싶다.’ 뭐가 다르지요? 화장실 있다고 시도 때도 없이 바지 내리고 화장실에서 살아야 됩니까? 그건 아니지요. 화장실이 없으면 용변이라는 의지가 일어나지 않아야 됩니까? 아니지요. 제가 이런 예를 드는 것은 분명히 비슷한 것 같은 항상 따로지요. ‘우리 집에 화장실이 있다’와 ‘내가 용변 보고 싶다’와 뭔가 연관성이 있는 것 같은데 노선은 서로 섞이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천국이 있다’만 할 때는 이것은 ‘화장실이 있다’, ‘나에게도 남자가 있다’라고 하는 존재론적 의미의 천국이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천국은 지옥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땅과 관련돼있을 때 존재론적으로 돼버립니다.

그러면 그 천국이 어딘데요? 그러면 천국을 보통 어디 있다고 이야기합니까? 천국은 보통 나라인데 그 앞에 뭘 집어넣습니까? ‘하늘’나라잖아요. 하늘나라 있다는 것은 이 지상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럼 지상에 없으면 죽어서 가는 데냐고 따지게 되면, 존재론적으로 보지 말고 기능적으로 보면, 이미 천국은 활동을 시작하고 있지요. 그러니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맞지만 천국은 기능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존재를 기능과 섞어버리면 여기서 엉터리 논리가 막 튀어나오고 혼선이 벌어지고 자기는 헷갈리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자 동창생 만나서 ‘나 요새 남자있어.’ ‘나도 남자 있어.’ ‘일주일 몇 번 만나는데?’ ‘석 달에 한 번 만나는가 몰라.’ ‘그거는 곧 헤어지겠네.’ 남자가 있고, 없고는 헤어지고, 안 헤어지고의 문제지만 그리워한다는 문제는, 과거가 어떻든 미래에 그리워할 것 조차라도 지금 그리워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오늘 주제가 천국과 땅에 관한 주제가 아닙니다. 바로 천국과 지옥에 관한 주제를 지금 시작합니다. 이런 차이점을 먼저 염두에 두시고 천국과 지옥이 어떡해서 되는가? 제가 아까 예를 들었지만 자크를 내리면 톱니바퀴가 양쪽으로 갈라지잖아요. 자크 내리는 천국의 기능이 곧 지옥이 발생되는 기능이죠. 그리고 지옥의 기능이 그 짝이 되는 천국이 발생되는 기능이 되는 겁니다.

오늘 주제가 되는 성경구절을 다같이 찾아봅시다. 성경 안 가져왔어요? 집에는 있지요. 그런데 성경이 보고 싶지는 않지요. 기능적으로. 죽어서 천국은 가고 싶은데 이 땅에서 천국 생활하기는 싫지요. 기능적으로 지옥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0절부터 32절까지 제가 읽어볼게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이 대목에서 어떻게 천국이 나오고 지옥이 나오느냐? 아무리 봐도 부활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 같은데 거기서 무슨 천국과 지옥이 나오겠느냐고 생각하시겠지만 우선 여러분들에게 하나하나 하면 시간이 많이 가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논리를 던지겠습니다.

천사가 있는데 하나님의 피조물 맞지요. 분명히 피조물 맞지요. 논리를 보다가 틀리면 틀리다고 하세요.① 모든 천사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악마가 나오고 선한 천사도 여기서 나왔지요. 그러면 악마를 악한 천사란 말이죠. ‘선함’, ‘악함’을 잠시 없애버리면 둘 다 천사죠. 그래서 천사라는 자크를 내리면 여기서 뭐가 갈라집니까?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가 갈라지겠지요. 

지옥은 어디 있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일을 맡기면 잠재돼있던 그런 구분들이 구체화되어서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우리는 알다시피 요한계시록에 보면 지옥엔 누가 가도록 돼있느냐 하면, 지옥은 악마를 가둬두기 위한 장소에요. 그러면 지옥이 있다는 말은 지옥에 들어갈 자들, 피조물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렇다면 지옥이란 지옥에 들어갈 주인공과 더불어서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는 겁니다.

안개가 자욱이 끼여 있는데 어떤 여인이 우산을 들고 온단 말이죠. 여기 있는 총각 셋이 관심을 보입니다. 보통 상식에서는 그 여인이 아름다울까, 안 아름다울까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이 세 사람은 특이해서 저 파라솔의 색깔이 뭘까에 관심을 둡니다. 드디어 가까이 오니까 이 파라솔이 노란색이었다고 등장합니다.

악마라는 것이 그 정체를 하나님께서 기능적으로 일을 하게 되면, 그 기능은 본문 읽었던 기능인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기능이니까 이것은 언약의 하나님이니까 언약적인 기능입니다. 서서히 거기서 악마의 정체가 나오는데 오늘 할 논쟁의 초점은 악마가 얼마나 나쁘냐가 아니라 아까 여인이 들고 있는 파라솔이란 엉뚱한 것에 잠시 관심을 두자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악마가 얼마나 나빠, 악마가 무슨 일을 해? 우린 그런데 관심 두는데 오늘 주제가 천국과 지옥이기 때문에 악마가 들어가야 될 그 지옥은 대체 어떤 곳이냐를 약간 엉뚱한 발상으로 찾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악마를 이야기하면서 악마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고 악마가 들어가야 될 곳이 안개 속에 있으니까 처음에는 흐릿하다가 점점 더 윤곽이 드러나는 것은, 처음에는 지옥이 흐릿하게 나타나다가 점점 더 언약적인 배경 위에서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게 되면 지옥의 정체가 점점 뚜렷하게 등장하는 여기에 초점을 두자 말이죠. 왜? 오늘 주제가 악마에 관한 것이 아니고 천국과 지옥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자 말이에요.

논리를 더 끄집어내보겠습니다. 여기서 공식을 하나 끄집어냅시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이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하나님의 언약이 가미된다. 그러면 이것은 언약이 추가될 때마다 천국의 윤곽도 뚜렷하고, 지옥의 윤곽도 뚜렷하겠지요. 그렇다면 ①언약이 추가적으로 투입될 때마다 천국과 지옥이 뚜렷하다는 이 공식 하나와 두 번째 공식이 뭐냐 하면, ②천국은 지옥을 나타내지 않고 나타내는 법은 없고, 지옥은 천국을 나타내지 않고 나타나는 법은 없다 이렇게 된 거예요. 첫 번째, 두 번째 하면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그런데 이것이 아까 화장실, 용변 이야기했죠. 이것이 존재가 아니고 기능적이라서 지옥은 어디 있느냐고 자꾸 묻지를 말란 말이죠. 사울이 지옥 갔느냐고 묻지 말란 말이죠. 광야에서 죽었던 사람이 광야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못 간 사람은 지옥 갔느냐고 묻지를 말라 말이죠. 그러면 가나안 땅에 못 간 20세 이상 된 사람들 40년 동안 완전히 뺑뺑이 치다가 다 죽였지요.

그 중에 모세도 포함도 돼 있잖아요. 그럼 모세 지옥 갔습니까? 변화산에 보세요. 엘리야와 주님하고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약속의 땅에 가지도 못했는데 왜 천국 가 있어요? 무슨 빽으로. 주님께서 지팡이로 지시하라 했는데 무슨 오기로 지팡이로 쳐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킨 못 된 모세가 왜 천국에 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교회에서 강의할 때 천국은 그렇게 못 된 자들만 모이는 거예요. 못 돼야 자기 의를 두 번 다시 안 내세울 것 아닙니까. ‘항상 나는 하여튼 주의 말씀을 지킨 적이 없어.’라고 자인하는 사람만 천국 갑니다. 그걸 회개라고 하는데. 갈라디아서 3장을 지켰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 다음에 에베소서 2장에 비춰보니까 또 틀렸고, 에베소서 2장, 3장 지켰다고 장담해보니까 디모데전서 1장 보니 하나님의 양에 미치지 않고 그런 겁니다.

원칙이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의 언약이 가미되면 여기서 반드시 계속해서 윤곽이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원칙은 천국 없이 지옥 없고, 지옥 없이 천국 없다 했지요.

이걸 더 노골적으로 쉽게 말하면 누구 하나 천국 가기로 확정돼있으면 누구 하나 지옥 가기로 확정이 돼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카드로 주유소에서 결제하게 되면 뒤에 붙은 종이에 석 장, 넉 장 붙어있지요. 그 종이는 어디에 붙어있는 겁니까? 원래 제일 위에 사인하는 종이에 붙어 있잖아요. 앞의 종이는 천국 가면 뒤의 종이는 지옥 가는 거예요.

‘목사님. 제 자식 천국 가게 됐어요.’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걔 때문에 이웃 집 얘 지옥가게 됐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걸 추적해보자 말이죠. 왜 천국, 지옥 따로 따로 놀지 않고 병행해서 등장해야 되는가?

그 이유는 바로 생명책과 관련돼있어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뭘 봤느냐 하면, 생명책의 존재를 봤습니다. 그리고 생명책의 명단에 있는 사람에게 한해서만 언약의 대상이 돼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또 기능이 아니고 존재로 묻죠. ‘목사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다 구원받죠?’ 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천국 가지요.’라고 존재로 하는 게 아니고 방금 첫 번째 원칙 이야기했죠. 뭡니까?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했잖아요.

하나님의 첫 번째 원칙은 언약이 가미되면 안개 속에 있던 그 여인의 우산이 색깔이 드러나는 것처럼 서서히 생명책의 실체가 드러나는 거예요. 강의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처음부터 새로 합시다.

천사가 있다 했지요. 천사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면 천사가 갑자기 갈라지죠.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로 갈라지잖아요. 가만있으면 그렇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면 하나님 일에 반발하면 악마고, 거기에 순종하면 선한 천사되죠. 그러니까 선한 천사, 악한 천사 오기 전까지는 그냥 천사란 말이죠.

마찬가지로 생명책이란 게 그냥 있으면 우린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천사가 있네.’ 존재 아닙니까. ‘난 천사가 있는 걸 믿습니다.’ 존재론적으로 믿다가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해버리면 존재가 기능으로 변하면서 천사라도 다 좋은 천사가 아니라는 새로운 윤곽이 밝혀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성경 개념이 다 그래요. 생명책이라는 게 있다. ‘있으면 구원받겠네. 명단에 있으면 좋겠다.’ 이게 뭐예요? 존재잖아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에게만 그 다음에 언약이 주어지는데 그 언약이 모세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모세언약이라 하는 거예요. 모세언약이 주어져버리면 여기서 생명책 자체가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명단이 지워져야 될 둘로 나눠져버립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남아 있는 사람은 진짜 구원받겠네요.’라고 생각하겠지요. 스톱, 스톱. 진정하세요. 그 다음 언약이 주어져버리면 남아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또 갈라져요. 그래서 이스라엘 되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없어져요.

그래서 신약성경에 오면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다. 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값은 저주잖아요. 어디가야 됩니까? 다 지옥가야 됩니다. 그러면 소급해서 이야기하면, 지옥 갈 사람이 성경책에 모세가 봤다는 생명책에 명단이 있다는 걸 알고서 자기 주제가 지옥 갈 인간이 자기 주제 파악도 안 하고 성급하게 명단에 내 이름 있으니까 잘만 버티면 나는 구원될 수 있다는 그런 오해를 유발시키게 되는 겁니다.

지금도 그런 오해를 가지고 신학을 하는 것이 또 가만있는 아주 점잖고 착한 개혁주의가 욕 얻어먹게 돼요. 개혁주의는 기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봉사하려 합니까? 이렇게 하시면 존재론적으로 당신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구원받는다고 다 해주는 거예요.

사람은 기능으로 보지 못하고, 갈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왜 자꾸 존재로 나가려는 이유가 뭐냐 하면, 벌써 신약을 볼 때 맹탕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성경 볼 때 장난삼아 보는 것이 아니고 ‘이 질곡과 고난과 저주 받은 세상에서 고생했는데 죽어선 좋은데 가야지.’ 토정비결 보듯이 또는 점치듯이 ‘목사님. 제 운명 나아지겠습니까?’라는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거예요. 내가 필히 구원받는다는 대목이 어디 적혀있는가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출발점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해당되지 않는 누구로부터? 나를 아는 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데. 여러분, 아브람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아브람의 하나님은 상상도 못한 분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앞에 누가 깨져야 합니까? 아브람의 하나님은 이단입니다.

아브람의 하나님은 혈육에서부터 출발해요. 혈육이야기는 의존교회에서 했네. 의존교회에서 학생에게 ‘너 몇 살 때 태어났지?’ 그러니까 그 애가 말 못했죠. 왜 말 못합니까? 몇 살이라는 것은 시간이잖아요. 시간은 그 앞에 사건이 있어줘야 그 사건부터 흘러가는 게 시간입니다. 태어남의 사건이 있고, 그 태어남을 잡아당길 때 이게 시간이 돼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 사건을 뭐로 대체하느냐 하면, 이걸 경주 이씨로 대체해버리면 사건이 있고, 그 다음에 사건에 합당한 시간이 시작될 걸 사건을 흐지부지하게 만들어버리고 여기다가 우리 조상님은 옛날부터 있었다고 우리 아버지 태어난 것부터 계산하게 되면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탄생했다는 새로운 사건에 속하지 않고 경주 이씨라는 가문에 속한 게 되죠.

여러분 이해를 구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과 함께 이해할 생각 없거든요. 그냥 막 나갑니다.

아브람은 혈육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은 거예요. 내 아들 됨의 사건은 아브라함부터 출발돼야 된다는 것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람은 죽고 아브라함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돼야 새롭게 발생되는 존재 그러니까 아브라함이란 존재로부터 출발할 것과 연관된 이삭이 돼야 돼요. 그래서 이스마엘은 안 되고 이삭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노선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삭은 누구한테 바쳐라? 내게 바치란 말은 주인한테 돌려주란 말이거든요. 어디 남의 것을 자기 아들이라고 해. 내 아들인데. 약속의 자식이지 혈육의 자식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잖아요. 약속의 노선과 혈육의 노선, 율법의 노선 있잖아요. 또 이걸 보고 가만있는 공부하는 애 붙들고 교회 가려하지 마세요.

사건이라 하는 것은 그 전과 후에 인과관계가 없어야 사건이에요. 예상하면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기존의 역사에 포함돼버려요. 이 중에 누가 방구 뀌어야 되는데 이런 방구는 사건이 아니에요. 난데없이 지붕이 무너질 때 이건 사건이에요. 왜? 아무도 지붕 무너지리라 생각 못 했기 때문에. 그래서 911은 사건이잖아요. 이걸 만약 알았으면 미국 제트기가 방어할 거잖아요.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언약에 개입할 때는 생각지도 못한 걸 개입하는 겁니다. 만약에 악마가 하나님이 일을 시킬 때 자기가 악마라는 걸 들통 내기 위한 사건을 준다는 걸 사전에 알았더라면 악마는 그때 순종했을 겁니다. 악마로 안 들키려고. 악마는 누구처럼 아주 점잖은 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욥에게 믿음을 줘버리니까 악마는 예상치도 못한 문제가 왔을 때 ‘어이. 욥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간치고 믿음 있는 놈 누가 있습니까?’ 갑자기 악마가 자기 본색을 드러내는 거예요. 좋다고 들켰지롱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악마의 일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욥과 욥의 세 친구가 자크 열리듯이 한쪽은 이단이었고, 한쪽은 정통이었죠. 그런데 그것은 사건이 우선돼야 돼요. 사건이 우선되면 욥의 친구들이 이단의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이 들통 나는 그 역사는 어느 역사 때문입니까? 욥에게 고난 떨어진 사건에 준해서 사건에 포함되는 사건에 대해서 합류되는 욥의 역사 속에 욥의 세 친구가 있기 때문에 욥의 마지막에 보면, ‘욥아. 네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욥의 친구들 너희는 욥을 위해서 욥에게 기도해달라고 하나님께 예물을 바쳐서 잘못됐다고 해라.’

그럼 욥의 세 친구의 사건은 결국 자기 사건은 날아가고, 욥에게 일어난 사건이 욥의 사건으로 국한 되는 게 아니고 주변에 구원받고자 하는 사건으로 퍼지게 되죠. 마치 화산 터지면 마그마가 퍼지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주민들 다 대피하듯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돼버리면 우리는 농사짓고, 교사 일 하다가 갑자기 무슨 사건이 덮칩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사건으로 덮쳐버리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걸 소급해서 보면 결국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에요.

어떤 사람이 자살하려다가 붙잡혀서 자살을 못한 게 있더라도 소급해보면 결국 그것은 내 사건이 아니고 주님의 사건이었는데 그 사건의 기능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저 사람하고 나하고 분명히 천국 갈 것이라고 여겼는데 주님의 사건으로 인하여 그 다음부터 그 사람하고 같은 교회 친구고 같은 집사인데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은 자크를 열어보니까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이 갈라지는 거예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면 사건이 오더라도 피하면 될 것 아닙니까? 사건이 우리의 인과관련 없기 때문에 번개가 오는 게 보입니까? ‘번개 도착 2초전’ 이러면 피하죠. ‘번개 도착 지금 50미터 전, 번개가 푸르지오까지 왔습니다.’ 이러면 피하죠. 그게 아니잖아요.

이준 씨가 인용한 제 [피]라는 책에 보면, 1945년 8월 6일 초등학교 학생이 등교 길에 갑자기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지죠. 왜 그 학생의 담임선생님은 전날에 ‘내일 아침에 조심해라. 히로시마에 폭탄 터진다.’ 그 이야기를 왜 하지 않습니까? 그 선생님은 자기 역사밖에 모르죠. 맥아더 역사를 몰라요. 미국군대 최고사령부의 역사를 모른다니까요. 초등학생도 몰랐고. 그래서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걸 소급해서 예수님의 역사로 전환시켜야 돼요.

지금 이 이야기 중에서 가장 핵심 된 부분에 접근하고 있는데 그거는 상당히 어렵습니까? 마태복음 22장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면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그럼 여기서 뭘 찾아야 합니까? 죽은 자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하나님이냐를 필히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자크 열려서 천국 쪽으로 떨어진 사람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랬잖아요. 이삭이 그랬죠. 야곱이 그랬죠.

하나님의 사건이 터져서 본의 아니게 떨어져보니까 천국이라. 모세에게 사건 떨어지니까 모세는 천국이고, 엘리야에게 사건 떨어지니까 엘리야는 구원받았잖아요. 하나교회에서 강의하면서 했잖아요. 엘리야가 얼마나 성경말씀을 오해했던지 자기만 남았데. 그런 인간이 천국을 다 갑니까? 남은 칠천 명은 모르고. 성경해석 또 잘못한 거예요. 자기 경험에 의존해서, 자기 존재에 의존해서 생각한 거예요. ‘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뭐 나밖에? 칠천 명 남겨놨는데.

그러면 우리가 엘리야 같으면 뭐라고 따지겠습니까? 그러면 진작 그 사실을 나한테 알려주지. 선지자의 자존심도 있는데. 만약에 그렇게 나오면 선지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여러분 저만 남았습니다. 저만 따라오세요.’ 하는데 칠천 명이 있다가 ‘어? 아닌데.’ 그러면 선지자의 설교가 먹어줍니까? 안 먹어주잖아요. 하나님은 쪼다 만들기에요. 하나님은 실수와 쪼다, 바보. 바보들의 행진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건입니다. 사건이란 말은 다른 사건에 의해서 자크 열리듯이 이렇게 마주보는 이루어질 천국이 아닌 지옥 갈 사람들을 비로소 훤히 보이게 하는 어떤 갈라짐의 코스를 보여주는 겁니다.

말로 하면 더 어려우니까 그림으로 해봅시다. 도로로 가는데 여기 [회덕분기점]이에요. 회덕분기점, 전에 설교한 적 있지요. 이름은 있는데 실체는 없는 것. 회덕분기점에서 누구 기다려보세요. 아무도 안 만나지. 그런데 이쪽에서는 회덕분기점을 올 때 분명히 차와 같이 간다고 생각했는데 이쪽은 전라도, 이쪽은 경상도로 대전에서 갈라져버리죠.

이렇게 훤히 갈라질 때 편애하는 것 아닙니다. 편의상 경상도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합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봤을 때 반드시 여기 접어든 사람은 뭘 알고 있어야 돼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닌 것, 이삭의 하나님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멀찍이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노선에 서 있는 겁니다.

이것은 약간 어려운 내용인데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사울이 왕 될 때 겸손해서 산당 속에 들어갔지요. 나 같은 인간은 왕이 될 수 없다고 겸손했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임해서 왕이 됐는데 그때 그 당시의 사울의 눈에는 뭐가 보여야 됩니까? 왕이 되려는 인간들과 자기 자신의 노선과 회덕분기점은 보이겠지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하면, ‘그래도 사울은 진짜 구원받았습니까?’ 기능적으로 이야기하다가 또 존재론 나오죠. 그러면 사울은 나중에 어떻게 돼요? 분기점 또 나옵니다. 분명히 자기는 저건 아니라고 했는데 오백 킬로 쯤 가다가 또 갈라지네. 이쪽은 부산으로 저쪽은 남해로.

그러면 사울은 어느 쪽으로 갑니까? 사울은 안 좋은 쪽으로, 이쪽으로 가는 사람은 다윗이 등장하죠. 이렇게 갈라질 때 사건이 개입되게 되면 지금까지 분명히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서 왔던 사건이라도 이 사건이 인간의 주체를 만나면 이것이 우상이 돼버려요. ‘나는 구원받았어. 나는 얼마나 겸손한지 왕 되기 싫은데 하나님이 왕 되게 했기 때문에 이건 누가 뭐래도 나는 왕이야.’

부흥사들 그러잖아요. 육이오 때 폭탄 맞았는데 다른 사람은 죽었는데 자기는 살았을 때 ‘아무개 목사야. 너는 나가 복음을 전하라.’ ‘나는 부흥사 맞아.’ 그게 아직 회덕분기점 안 지나서 그래요.

이건 안산강의에서 했는데 해봅시다. 주체가 사건을 만나게 되면 주체는 거기서 진리를 끄집어내요. 진리는 유동성이 아닙니다. ‘두 번 다시 사랑 안 해. 애인 따윈 필요 없어.’ 노래 있지요. 이건 뭐냐? 고정성이에요. ‘두 번 다시 사랑 안 해. 애인 따윈 필요 없어.’ 왜냐? 애인한테 치었거든요. 그때 그 순간에 더 이상 나는 절대로 누구를 사귀지 않겠다. 이게 고정성이에요. 고정돼야 이게 진리답죠.

그래서 사건을 만나게 되면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자극을 받아서 이 진리를 찾아서 진리를 품으면서 여기서 주체가 주체성으로 확립합니다. 한 고집하죠. ‘이래 봐도 나는 옛날에 기도해서 교육관 진 사람이야.’ 그 사람은 뭐가 진리입니까? 기도해서 교육관 진 게 진리죠.

재건파 목사님들의 진리가 뭡니까? 성경도 아니고 뭐가 계시에요? 우리는 신사참배하지 않은 목사들로부터 안수 받았다는 그 사건을 집단적인 주체로 만들어버리면 거기서 주체성이 형성되죠. 그 사람들에겐 성경이고 뭐고 재건파는 성경이 없어요. 뭐가 계시입니까? 현재 재건파가 진리가 돼버려요.

우리 십자가마을은 분기점 지나왔습니다. 손무성 목사라는 분기점 지나왔는데 분기점 지나왔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이렇게 해서 복음으로만 사수했습니다.’라고 우기게 되면 여기서 주체를 찾아버리면 십자가마을은 뭐가 돼요? 주체성을 갖고 있는 순간 십자가마을은 우상 돼요. 십자가마을이 우상이라는 걸 아는 우리는 얼마나 즐거우냐? 왜? 천국에는 못난 사람, 오해한 사람이 간다는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에.

그러면 이렇게 해서 주체성 세우는 것이 뭐가 나쁘냐? 모든 인간이 다 그런데. 사건은 이렇게 주체가 있으면 이걸 찢어버립니다. 사건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입니까? 존재론적 하나님이 아니고 기능적 하나님 앞에 뭐가 붙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죠. 풀잎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풀잎을 안 만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난 믿습니다. 태양을 만든.’ 태양을 만든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오해할 소지를 갖고 있어요.

다시 돌아갑시다. 생명책 봤지요. 생명책에 이스라엘 명단이 있지요. 그걸 본 순간 무슨 오해를 합니까? 생명책에 우리 명단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줬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우리는 이방인 같이 개가 아니고 택한 백성, 언약의 백성이라고 장담했지요. 다 망했잖아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망했잖아요.

아브람의 하나님이란 말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라 했지요. 아브람의 하나님은 혈육에 속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약속에 속했죠. 약속은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기능으로 나타날 때는 이게 사건 되죠.

왜 사건이냐? 사건이 일어나야 우리 주제, 천국 쪽과 지옥 쪽이 자크 열리면 양쪽으로 갈라지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 간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도대체 어떤 자가 지옥 가느냐를 동시에 발견케 하는 계기를 주는데 사람들은 자기 좋은 쪽으로 붙어서 자기 구원에 성급하다보니까 어떤 자기 지옥 가느냐에 대해서는 순전히 자기 존재론 입장에서 평가하는 거예요.

저쪽에 봐라. 우리 사이트 욕하더니 망했잖아요. 항상 주님이 보낼 지옥을 누가 보냅니까? 나에게 험담했고, 나 죽으라고 저주했기 때문에 네가 저주받으라고 욕하는 식으로 ‘저거는 지옥 가야 돼.’라고 우리는 분통을 터뜨리는 거예요.

그런데 ‘너는 저주받아야 돼. 지옥 가야 돼.’라는 말을 누가 할 수 있느냐 하면, 새로운 사건이 덮친 사람 그러니까 새로운 언약자가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시편에 보면 다윗이 ‘저들은 저주받아야 돼.’라는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다윗의 자리에 가지 않은 사람은 그 저주를 못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자리에 가면 될 것 아니냐? 죄송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만 준 거예요. 다윗 아들도 아니고, 다윗 처조카도 아니고, 다윗 동서도 아닙니다. 오직 다윗이에요. 다윗 처조카가 만약에 같이 은혜 받으면 다윗과 다윗 처조카의 언약이 나올 거예요.

다윗에게 줄 때 이 다윗은, 다윗이 알고 있던 다윗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알고 있던 다윗은 혈육에 속하고, 어떤 진리를 내 것으로 삼아서 내가 스스로 우상화 되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적인 시간의 한계를 갖고 있는 다윗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언약을 통해서 다윗을 인간 만들고,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인간 만들고, 이삭을 통해서 인간 만들 때 무슨 인간을 만드느냐 하면, 죄인이라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려요.

야곱이란 인간을 죄인이란 인간 만들잖아요. 처음에 야곱은 둘 다 잘났다고 누구와 싸웁니까? 에서와 붙들고 싸우잖아요. 싸우는데 나 죄인 맞다한 사람이 승리잖아요. 누굽니까? 죄인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대해야 되는데 에서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얍복 강에서 누가 만납니까? 야곱이 하나님 만나죠.

그때 야곱은 형은 상대할 가치가 없어서 형한테 절한 거예요. 누가 와서 여러분에게 절할 때 생각 똑바로 먹어야 됩니다. 좋아서 절한 게 아니에요. ‘저 인간은 저 좋은 대로 해줘라.’ 하는 식으로 절할 수 있습니다. 논쟁할 때 감정싸움 들어가면 먼저 꼬리 내리는 쪽이 승리자에요. ‘알았다. 그래 잘났다. 잘났어. 그런다고 십자가 피가 효능이 사라지나.’

천국과 고자의 관계는 제가 분명히 했다고요. 십자가의 완료성이 어디로 가버렸느냐 말이죠. 왜 자꾸 고자를 논하느냐? 십자가를 바라봐야지 ‘우리가 고자 되면 구원받습니다.’ 하는 존재론적으로 가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모든 기능은 마지막 언약이 뭐예요? 예수님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새 언약은 뭐로 구성돼있다? 십자가 사건. 그 십자가 사건은 아무도 세상의 지혜와 똑똑함으로 그걸 알 자가 없어요. 왜? 세상의 지혜는 그걸 어리석게 보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의 진짜 제대로 된 깊이 있는 알맹이는 십자가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하노라.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은 사건을 주는데 우리는 기능을 모르죠. 우리는 항상 주체가 있기 때문에 주체는 뭐가 있어야 주체가 됩니까? 내 존재, ‘나는 구원받습니까?’ 만날 자기 존재로부터 시작하는 게 주체의 특징이에요.

이 존재를 기능으로 치기 때문에 존재가 알아서 기능을 마중 나가는 법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니까 기도원에 가서 도 닦고 있고. 그게 뭡니까? 도 닦는 나의 존재로 또 돌아오잖아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가만있으란 말이에요. 가만있으면 주께서 알아서 말씀이 덮치면 뭔가 터지면서 이게 부인하는 거구나라고 소급해서 생각하면 돼요.

사건이 기능으로 와서 주체를 존재로 하게 되면 우리가 여기서 오해했었던 나는 정상적인 노선을 기능을 오해하게 되면 여기서 갈라짐이 있죠. 나도 전에 저렇게 생각했었는데 주님의 새로운 사건이 덮치니까 그것이 ‘내가 하나의 우상을 만들고 있었어.’라고 폭로시키는 사건으로 회덕분기점 이쪽 노선으로 가버려요.

그러면 여기 궁금한 게 뭡니까? 안 좋은 쪽을 편의상 전라도라 한 이쪽에 서 있는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경상도 사는 사람보고 ‘당신은 왜 자꾸 하나님만 바라보느냐? 왜 네 할 일 안 하느냐? 왜 자꾸 네 자신에 대해서 믿음이 없느냐? 착한 일 하라고 성령 줬는데 왜 그것으로 착한 일 안 하고 자꾸 나는 부족하다, 죄인이라고 그 소리만 하는 거야.’라고 이단 쪽에서 하겠지요.

저쪽은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하면, ‘십자가 알지.’ 십자가 안다 해놓고 그 십자가가 자기 주체에 대한 어떠한 깨어짐이 없지요. 그래서 제가 최근 쓴 글에 이랬어요. 팽팽한 밀가루 포대를 하나님이 사건으로 면도칼로 찢어버리면 허연 가루가 쏟아지죠. 주님께서 주체 한 복판을 째고 찌릅니다. 골수와 관절을 말씀으로 찔러요. 로마서 2장 5절 같으면 똑같은 말씀을 백 번 볼 때마다 성령이 임하면 99번 봤을 때 주체를 백 번째 주체가 그것마저 또 찢어버리죠.

내가 몇 번 용서해야 합니까? 베드로가 했을 때 몇 번 용서하라 합니까? 490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490번 합니다. 일곱 번까지 했는데 490번 못 합니까? 490번 하면 그 다음에 주님의 말씀은 뻔해요. 490번씩 일곱 번 하라 해요. 왜냐하면 사건이 없기 때문에 그 사건이 없는 이상은 초창기 사건, 그 사건에서 발생된 것은 이미 주체화 된 나의 역사죠. 나의 역사 속에 일곱 번 용서했기 때문에 일곱 번 용서한 업적, 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것 포기하면 나의 주체는 어디서 찾습니까? 그러니까 말씀대로 살아서 이 주체를 계속 끌고 가잖아요. 끌고 가면 그 다음에 세리와 창녀가 구원받고 천국 가고 이 사람들은 어디 갑니까? 잘난 사람끼리 지옥가고 못난 사람끼리 천국 가고.


10분 쉽시다.
 관리자 (IP:124.♡.87.52) 10-10-12 19:12 

대전특강101009b천국과지옥b

20101009b 대전특강 - 천국과 지옥b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해서 제가 쓸 테니 보세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죠. 이것을 다 더하면 ‘산 자의 하나님’이 돼요. 그러면 여기 산 자란 항목에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니까 지워버리면 남는 것은 야곱도, 이삭도, 아브라함도 살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개입 안 했으면 아브라함도 죽었고, 이삭도 죽었고, 야곱도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죽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개입되니까 아브라함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고, 이삭은 산 자가 되고, 야곱도 산 자가 되겠지요. 그러면 죽은 야곱, 죽은 아브라함, 죽은 이삭을 죽은 자에서 산 자로 완전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완벽하게 두 번 다시 실패가 없는 죽은 자를 산 자로 되게 하려면 여기에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죽은 자, 인간들끼리 의논할 수가 있다 했습니까, 없다 했습니까? 없지요. 죽은 자에게 끄집어내는 자기를 더욱더 죽이는 아이디어만 나오죠. 왜? 자기에게 주어진 사건은 없고 자기가 사건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에 자기가 살았다고 여기는 그것이 죽은 것인데 그 죽은 것을 모르고 자꾸 살고자 하니까 죽은 자에게는 자기를 더욱더 죽게 만드는 그것밖에 안 나온다.

죄가 어디서 나옵니까? 죄인에게서 나오잖아요. 죄인에게서 죄가 나오면 그 죄 때문에 더욱더 죄인 중의 괴수가 되게 하겠지요.

이러한 일밖에 되지 않는 자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쭉 배열해보니까 산 자의 하나님이죠. 그렇다면 죽은 아브라함과, 죽은 이삭을, 죽은 야곱을, 죽은 자를 산 자로 하려면 하나님이 개입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해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근호, 김을수 있더라도 이것을 하나의 개개체 이름으로 간주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죽은 자라고 명칭을 붙일 수 있는 분이 등장해야 되죠. 그것이 마지막 사건이어야 되죠. 최종적으로 판정을 내려버리는 사건이 등장해야 되죠. 그렇게 판정내리고 두 번 다시 그걸 뒤엎는 언약은 와선 됩니까, 안 됩니까? 두 번 다시 없어야 되겠죠.

그리고 재림이나 부활은 이렇게 죽은 자로 죽은 자로 하고, 산 자는 산 자로 결정짓는 확인 차원에서 벌어진 사건이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쪽의 사건을 무효화하거나 취소할 수 없지요. 죽은 예수님이 살아났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는 너는 죽고 부활의 주님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를 주께서는 죽음에서 건져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본체는 계속 끌고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들을 어떤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더라도 몽땅 죽은 자로 간주할 수 있는 분이 등장해야 되는데 그분이 ‘너희들은 죽은 자야.’라고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론적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너희들은 죽은 자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한 사람이 죽은 즉 그 다음에 뒤에 붙는 말이 한 사람의 반대말로 ‘모든’ 자가 죽었느니라. ‘죽었는데 어떻게 삽니까?’라는 말을 예수님은 아버지한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죽어야 될 우리는 ‘죽은 건 마땅한데 어떻게 하면 저는 살 수 있습니까?’라는 말을 하게 되면 우린 이걸(입) 쳐야 돼요. 아직도 죽은 척을 하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관의 못을 빼서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는지 살피는 사람들이에요. 아주 얍삽한 사람들이에요. 이게 개혁주의에요.

‘난 믿습니다. 죄인 맞습니다.’ 죄인 맞으면 죄인으로 지옥 가면 되지 ‘어떻게 하면 내가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어디 죄인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성폭행범이 ‘난 성폭행범 맞는데 어떻게 하면 다시 사회에 나가서 살 수 있습니까?’ 그걸 어떻게 묻습니까? 이미 끝난 거예요.

지금 삼성과 두산이 플레이오프하고 있는데 롯데 팀이 와서 우리는 안 끼어주느냐고 하면 그건 안 되는 거예요. 3▪4위전에서 이미 탈락했잖아요. 탈락했으면 구경만 하면 되지 ‘한 번만 더 붙읍시다.’ 이럴 수는 없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는 이유는, 우리가 미처 착각해서 모르는 우리는 우리 주체밖에 모르는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 된다는 그 오기로 똘똘 뭉친 이 개체들을 한꺼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죽은 자 맞다.’라고 확정지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율법에 의해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디에 소속된 겁니까? 율법이란 하나님의 선한 것, 율법은 선한 거니까 선한 율법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나머지 모든 뒤에 있는 사람들도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아야 마땅한 겁니다.

그런데 고마운 게 있어요. 제가 처음에 원칙을 이야기했어요. 지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등장하죠. 천국 없는 지옥 없고, 지옥 없는 천국 없다. 병행해서 같이 등장하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모든 걸 했다는 말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언약에 의하면, 이렇게 해서 지옥으로 확답시켜 놓은 기능적, 존재론적으로 확답이 아닙니다. 기능적으로 우리는 지옥 가야 마땅한 사람이에요. 여기에 기능적으로 천국이 등장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기능적으로 지옥 간다면 천국은 몇 명 갑니까? 한 사람도 없지요. 예수님마저 저주받아버리니까. 그 다음 몫은 하나님 아버지께 예수님을 살려주니까 예수님은 지옥과 천국을 다 경험하시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율법에 의하면 세상 죄를 진 어린양이잖아요.

그러면 십자가에 율법대로 다 이뤘고 돌아가셨다면, 그 [다 이루었다]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어린양 때문에 공로로 죄인이면서도 용서받을 일단의 무리가 예수님 살아날 때 같이 살아나는 겁니다. 같이 살아나줘야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웃사랑의 결정이 여기서 등장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이 하신 그 근거에 의하면 하나님이 용서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반드시 용서해야 될 일단의 무리가 있는 겁니다. 그걸 요한복음 5장에서는 아들의 뜻대로 구원을 받는 사람이 등장해요.

요한복음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이 일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요)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그렇다면 죽은 자 중에서 나중에 천국 가야 될 사람은 무슨 코스를 밟느냐 하면, 예수님이 갔던 그 코스를 비켜가서 독자적으로 천국 가는 길은 완전히 막혔어요. 처음으로 죽은 자에서 살아난 사람은 에녹이 아닙니다. 엘리야도 아니고. 처음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은 놀랍게도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갔던 그 코스가 첫 번째 부활이었습니다. 에녹이 첫 번째 부활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두 번째 부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시간은 인간적인 시간이지 쳐주질 않습니다.

예수님이 갔던 코스를 밟아야 돼요. 예수님의 코스가 뭡니까? 저주받아야 할 분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가 풀려서 영생에 들어갔잖아요. 그러면 이것을 그대로 적용시키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걸 예수님에게 맡겨놨어요. 여기서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드디어 [기능=존재]가 돼버려요. 누구한테만? 예수님에게만.

그런데 기능에서 존재로 간 건 예수님이지만 우리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항상 남의 주체가 아니고 ‘나’잖아요. 나는 항상 뭐부터 출발해야 돼요? 어떤 행함을 해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전체로 했을 때 행함이 나와요. ‘이 컵 누가 먹었어요?’ 하면 ‘컵이 저절로 날아와서 내 입에 물을 넣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마시게 했습니다.’라고 주체를 주님께 돌려버리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보통 사람은 내 지정의를 동원해서 ‘독약이 아니고 물인 줄 믿습니다.’ 하는 내 믿음으로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것은 어디로 쏠리게 돼있어요? 나라는 기능이 아니고 존재죠. 그러니까

 

 주체는 존재에서부터 기능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존재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 기능은 전부다 이 기능을 예수님을 새로운 주라는 존재로 만들어버렸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하면, 그 다음부터 이 기능에서 존재로 된 여기의 영,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져버리면

우리는 그때부터 존재에서 기능으로 출발했던 성도가 그때부터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기능입니다. 다른 말로 은혜입니다.

그 다음부터 우리는 뭘 해도 범사가 감사가 되죠. 소급해서 모든 일이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발걸음도 세십니다. 주님께서 내 발걸음 세기 참 힘들어요. 왜냐하면 나는 내 마음대로 걷고 하니까. 힘들긴 힘들어도 다 세세요. 머리카락 세기도 참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어요. 어쨌든 세십니다. 심지어 참새도 기르시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오늘까지 기르시고요.

이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존재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찾는다는 모든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존재가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나라는 인간, 존재가 있더라도 그 존재를 무시하고 주님의 존재가 내 속에 들어와서 나를 데리고, 주님은 원래 목적이 기능에서 주라는 존재죠. 여기 주의 나라에 우리를 집어넣는 기능을 이제부터 내가 한다, 누가 한다? 주님이 하시죠.

왜 전에는 회덕분기점에서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했습니까? 그것은 갈라지면 또 거기서 기능이 아니고 ‘나는 구원받지롱. 나는 경상도로 가지.’ 또 자기 존재로 했잖아요. 그게 옛 언약 가운데서는 그랬어요. 은혜 받았다고, 구원받았다고 까불다가 또 뭐 해놓고 ‘나 지옥 가야 돼.’ 혼자 좌절하고 하던 것이 성령을 받게 되면 관심사가 내 행동, 치매 걸렸느냐, 거기에 관심이 없고 주께서 이미 보장했다는 십자가를 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존재에서 기능 가는 우리를 기능에서 주님의 존재로 변하게 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음을 성령께서는 믿게 하시는 겁니다. 믿게 하게 되면 자기 자신의 어설픔에 대해서 지극히 당연하게 보죠. 자기의 실수를 당연하게 되면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늘 어설프니까. 어설픈 존재가 구원받는 것은 기능자가 대단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천국 보내는 게 아닙니다. ‘죄인 이리 와. 천국 가.’ 이게 아니라 누굴 거쳐야 돼요, 누구 노선을 거쳐야 돼요? ‘너 죄인이야?’ ‘죄인입니다.’ ‘바로 가. 바로 가.’ 이런 것은 없습니다. 반드시 누굴 거쳐야 돼요? 예수님이 변압기에요. 여기에 와서 이걸 바꾸어 버립니다. 존재에서 기능하는 걸, 기능에서 존재로 바꿔버리죠.

나라는 존재가 있어요. 그것이 존재에서 존재로 나 된 것이 아니고, 앞 서 주님의 기능이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나 됐다는 존재로 하는 거죠. 그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채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내가 산 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는 죽은 채로 들어가는데 그냥 죽어버리면 소용없어요. 누구와 함께 합류가 돼야 돼요.

누구와 합류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승천? 아니에요. 그것은 코스를 밟아야 돼요. 어딥니까? 주님의 십자가에 합류가 되죠. 부활에 합류되는 게 아니고. 부활에 합류되는 것은 역시 개혁주의. 여기 또 개혁주의라. 주님의 십자가에 합류돼버리면 그때부터는 존재에서 기능이 아니라 기능에서 존재가 되기 때문에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란 존재가 사신다.

그래서 상당히 어려운 건데 하나교회에서 하면서도 하나교회 전도사님이 이해했을까 내가 걱정돼서 하는 건데. 구약과 십자가와 신약의 흐름에서 기존의 신학자는 어떻게 봤느냐 하면, 김희보 교수 같은 경우엔 이렇게 봤어요. ‘다수’가 왔다가 중간쯤에 ‘남은 자’가 되고 그 남은 자가 오직 한 사람의 남은 자, 예수님이 되어서 그 예수님이 우리의 교회라는 오순절에 성령 받게 되면 여기서 다수가 된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합니다만 이것 잘못 된 거예요.

다수에서 하나, 예수님 될 때 여기서 다수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반복이에요. 하나의 반복이기 때문에 하나교회는 늘 하나에요. 어떻게 하나의 반복이 되느냐? 보통 이 다수는 개혁주의에서는 우리 힘으로 안 됐는데 성령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서 주의 뜻대로 한다. 다수가 돼버리는데 그건 거짓말이고 십자가 후에는 우리 존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들어와 버려요.

‘주님. 제가 할게요. 은혜 받았어요.’ ‘까불지 마.’ 이제는 배 째고 주님이 우리 속에 직접 들어와 버리면 나는 나가 아니고 또 누가 돼버려요? 주님이 돼버리죠. 나는 껍데기로 돼있고. 죄인의 모습으로 껍데기로 되니까.

그러니까 너도 주님이고, 나도 주님이 안에 들어있으니까 그것이 손이 되던, 발이 되던, 눈이 되던 어느 것이 귀한 것이 없이 결국은 모든 사람이 성령 받게 되면, ‘나는 성령 받았다 씨.’ 다수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모입니까? 하나, ‘성령이 어디서 왔지?’ 하고 한 성령을 받게 되면 주님한테 보게 된다 말이죠.

성령 받아서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 없다고 해요. 사도 바울이 말할 때 아주 재미있게 하잖아요. 하도 사람들이 자기 존재에 관심 있으니까. 저기 존재에 관심 있으면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나는 죽어서 좋은 나라 가는 것 맞지요?’ 만날 자기 존재, 옆 사람 귀찮아. 나만 천당 가면 최고라. 다 된 거예요.

이러한 사고방식에 철퇴를 가하죠.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그게 바로 바리새인이고, 그게 바로 개혁주의란 말이죠. 이단이다. 그런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각기 들어가셔서 어느 누구도 내가 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께서 하셨다고 고백하는 그것, 예수님 피의 공로에 의해서. 그럴 때 그게 교회가 되고 멀리 있더라도 한 형제가 되고 결국은 몸이 되면서 그 사지는 하나밖에 없는 머리로부터 힘을 받고 그 기능이 돌아가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좀 어려운 것 해봅시다. 그러면

 

왜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어야 하느냐 하면, 인간의 존재는 두 가지 저촉을 받습니다. 하나는 공간의 저촉을 받고 하나는 시간의 저촉을 받아요. 그런데 만약에 기능이 돼버리면 이 기능은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님의 존재기 때문에 공간의 제한을 안 받고 시간의 제한을 안 받죠.

세례 요한이 뭐라 했습니까?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 선 것은”

여러분 사람 이름을 지을 때 태어나서 짓는 것이 그 사람의 성격에 잘 부합됩니까? 태어나기 전에 짓는 것이 잘 부합됩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너는 이센돌이라 하라.’ 센돌 되기를 기대하고 지었는데 태어나고 하는 게 전부 허약해. 이름을 잘못 지은 거잖아요. 실패한 거잖아요. 그런데 이름을 보류하는 거예요. 보니까 그 얘가 얼마나 센지. 그때 힘이 센 것 보니 이름을 센돌이라 하자. 항상 커서도 세질 거야. 하는 것이 정답에 가깝죠.

세례요한 이름 지을 때 어떻게 지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 이름 지을 때 어떻게 지었습니까? 우리 보기에는 태어나기 전에 지었지요. 그런데 기능적으로 보면 이미 다 주께서 어떤 일을 하실지 안 상태에서 이름을 지어버리죠. 세례요한도 마찬가지로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을 석판에 쓰니까 요한이 나왔지요. 자기 아버지 사가랴 이름으로 하지 않고 요한으로 하잖아요. 우리 보기에는 신기하지만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전혀 신기할 게 없다 이 말이죠.

이것도 의존교회에서 강의했는데 더 해봅시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라는 노래를 혹시 아십니까?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 보일런지’ 그런데 만약에 그 이등병이 나중에 제트비행사가 되면 뒷동산이 하나의 평지로 보이겠죠. 시공간의 한계, 여기서 보면 뒷동산이 한계지만 뒷동산 올라가봐야 자기 집 안 보이는지 알지요.

하나님께서 이름 지을 때는 무엇까지 지어버려요? ‘우리는 안 돼.’ 이렇게 하지만 주께서는 이미 시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세례요한이라 지어버린 겁니다. 세례요한이 이걸 알았을 거예요. 만약에 이걸 안다면 세례요한이 죽을 때 어떻게 죽습니까? 쟁반에 처참하게 죽지요.

우리 같으면, 세상에 저렇게 성령의 예언대로 태어나서 인물 나는 줄 알았더니만 기껏 여자아이의 말 한 마디에 쟁반에 목 달아나는. 쟁반에 목 달아나는 건 고사지낼 때 돼지 잡을 때나 일어날 일이지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잡습니까? 기껏 성령의 예언대로 정말 신기하게 동장, 이장 다 불러서 다 놀랄 일이에요. 얘는 분명히 뜬다. 뭘 하든지 할 거다. 대통령 아니면 국무총리할 거다. 능지처참 당했어요.

그러면 세례요한 당사자가 그걸 슬프게 여기겠습니까, 아니면 당연히 가야 할 코스로 보겠습니까? 그렇게 순교해야 예수님 말씀에 아벨과 사가랴와 세례요한의 그 코스가 어떤 코스입니까? 그 선지자가 죽음을 통해서 아까 회덕분기점, 저쪽 분기점과 이쪽 분기점이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갈라졌음, 그것도 완벽하게 마지막 언약으로 이미 고정돼버렸음을 보여주는 역할이 선지자 역할이에요. 그냥 기능적 역할이에요. 존재가 문제 아닙니다.

엘리야가 불수레를 탈 때 사람들이 굉장히 부러워해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여기서 저쪽 갈 때 버스타고 가나, 택시타고 가나 도착해보면 뭘 타고 갔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 베어 죽으나, 폼 나게 불수레 타도 내려야 돼요. 엘리야는 불수레 탔지요. 엘리사는 그냥 죽었어요. 에녹은 죽음 보지 않고 올라갔지만 다른 선지자는 능지처참 됐습니다. 그런데 운송수단이 뭐 중요합니까? 문지방 넘어서 죽으나, 문지방 안 넘어 죽으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어떤 분이 말하기를 죽으려고 수면제 40알 먹었답니다. 내가 옆에서 그랬어요. 40알 먹으니 안 죽지. 250알 먹었으면 죽었을 것 아니냐 말이죠. 왜 좀 넉넉하게 먹지 않고 뭔가 죽는 순간에도 혹시나 하는 이런 식으로. 한강에서 춥다고 안 뛰어내리고. 인심이 후하게 넉넉하게 죽으면.

불수레 타는 것까지 자기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발걸음 세시는 것, 태어나고 죽고 하는 모든 과정에서 전부다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니면 너는 죽은 자로 머물러 있을 거라는 그런 존재가 아니고 그런 기능들로 우리는 지금 코일에 전선 감기듯이 칭칭 감겨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님. 혹시 미리 알 수 있습니까?’ 미리 안 알려줘요. 미리 알려주면 그게 주체가 돼서 또 밀가루에 면도날 날아갑니다. 그냥 내버려둬요. 내 몸도 아닌, 내 인생도 아닌 것을 니 마음대로 사세요. 마음대로 산다고 방치는 하지 마시고 어떻게 되는지 팔짱 끼고 보시면 됩니다. 주께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세요.

공부하기 싫은 애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머니. 책 사 주세요.’ 해서 사법고시 합격해버리고. 그리고 어디서 인터넷 채팅해서 만난 여자와 사귀다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어머님. 정식으로 선보겠습니다.’ 해서 재벌 이세하고 결혼하고. 고현정하고 결혼하고 이런 식으로. 그게 정신 차린 것인지 아닌지 그건 모르지만 그것조차도 그냥 내비둬요. 그걸 중간에 끊어서 성공 했니, 실패 했니 하면서 운송수단에 연연하지 마세요.

우리 동네에 두 종류의 택시가 있습니다. 운불련이 있고, 천불련이 있어요. 천불련은 천주교 믿는 운전사들, 운불련은 불교 믿는 운전사들이에요. 그걸 어느 택시 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느 게 빨리 가는 게 중요하지. 똑같은 가격에 그냥 가는 겁니다.

여러분 보기에 얼굴 색깔 다르고 다 다르지만 인생 달라 보이죠? 아닙니다. 주님이 여러분 속에 들어왔다는 점에서는 우리는 다같이 하나입니다. 하나는 잘못됐고, 하나의 반복이에요. 하나같으면 내가 예수라는 이상한 도사가 등장하니까 하나의 반복이죠.

그래서 세례요한이 그 당시 왕을 부러워하지 않듯이 남의 인생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오늘 주례 하는데 준비한 걸 잊어버렸어요. 너무 시간 때문에 닦달내서. 뭐냐 하면, 자기 집의 기쁨을 놔두고 왜 남의 집의 기쁨을 탐을 내는지 몰라. 이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조명도 어두컴컴하고 빨리 끝내라고 신호는 보내고 편집당한다고 해서 허둥지둥 끝냈는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자체를 이 뭉치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규정을 해버리면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믿고 타락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타락할 수가 없죠. 왜냐하면 아브라함한테 혼자 맡긴 것이 아니고 그 뒤에 하나님이 있잖아요. 아브라함은 만날 자기 구원받아도 자기 존재만 생각하겠지만 존재보다 더 센 하나님의 기능이 존재를 기능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게 문제가 아니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너 같은 죄인도 하나님께서 능히 기능을 기능답게 행사할 수 있다. 그 기능이 모아지면 그게 바로 언약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소모품으로 사용한 거예요. 소모품보다 더 재미있는 말이 공구. 드라이버, 레지마시^^ 뺀찌, 망치. 레지마시 모릅니까? 나사를 조이거나 푸는 공구(드라이버). 주님의 공구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를 이 부분에서 반밖에 안 했어요. 뭐냐 하면, 아까 회덕분기점이 있다고 했지요. 회덕분기점이 구약의 때는 무리로 집단해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로 갈라지는데 신약에 오면 우리 코앞에 있는 게 아니에요. 코앞에 있어도 낚아챌 수가 없어요. 십계명이 바로 코앞에 있어도 우린 못 지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의 특징이 뭐냐 하면, 코앞에 있지 않고 허락도 받지 않고 아예 배를 째서 성령에 의해서 들어와 버려요. 들어와 버리면 무리 지어서 둘로 갈라지는 이러한 모습이 신약에 오면 나라는 한 인간에서 둘로 갈라져요. 둘로 갈라진 게 육신에 속한 것과 영에 속한 걸로 갈라집니다.

육신에 속한 담당은 우리의 신체, 우리의 몸에 관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아무리 은혜 받아도 우리의 몸은 몸대로 따로 놀아요. 그래서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해야 돼요. 후패하는 것을 서울강의에서는 무너져 내린다. 우리는 매일같이 지금도 무너집니다. 남극이나 북극의 빙하 봤지요. 쉴 새 없이 빙하가 녹아서 바다로 무너져 내리죠. 그냥 조용히 녹는 것이 아니고 절벽이 깎이듯이 저절로 무너져 내리죠.

우리는 하루를 살면 그만큼 하루치가 허물어지는 겁니다. 허물어지면 여기 육신 앞에 관성이 붙어있어요. 옛날 놀던 가락이 있어요. 뭐냐 하면 오른팔이 잘렸는데 머리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오른팔이 없어서 없는 부분인데 누가 없는 공간, 진공 부분에 침을 찌르면 몸은 안 아파도 머리가 아프니까 아픔을 느끼는 거예요. ‘너, 왜 내 오른팔 찌르는데?’ ‘네 오른팔이 어디 있는데?’ 그걸 비슷한 말로 기시감이라 하죠. 프랑스어로 뭐라 하죠? 데자뷰. 뭔가 온 듯한 곳인데 말로 설명할 수는 없고. 뭔가 내가 해 본 건데.

사람이 꿈을 꾸게 되면 그 꿈을 현실로 생각해서 5개월 전의 꿈을 그때 마치 현실처럼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이게 육신의 관성이에요. 육신의 관성의 특징은 행함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하지 않았는데 언놈이 도와줬나? 내가 손 붙잡고 노는데 뭘 도와줘?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습니다. 이력서 안 넣었는데 취직되는 법은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이력서 내면 취직됩니까? 아니잖아요. 한 명 뽑는데 천 명 와보세요.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데 그걸 뭐로 번역하느냐 하면, 내가 이력서를 꼼꼼하게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됐다는 거예요. 천 명 중에 한 명. 이력서 한 번 보지. 자기보다 이력서 잘 쓴 사람 많아요. 모든 게 운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운이에요. 실제로 운으로 살아가면서도 그걸 소급해서 누가 했다? 그런 운이 되게끔 내가 철야 기도했다. 반드시 자기 행함을 밑에 깝니다. 깔아줘야 목사가 하는 말이 교인들이 알아먹어요. 둘 다 육신이니까. ‘여러분 나처럼 하시면 여러분도 나처럼 복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체험에서 우러나온 설교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 말이 맞는데 문제는 그 말이 회덕분기점 거쳐서 옛날 육신의 관성, 지옥으로 가고 있다니까요. 지옥으로 간다는 점에서는 인간의 행함으로 행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 말은 개혁주의 말이 전부다 맞습니다. 이건 분명히 맞아요. 그렇게 하게 되면 반드시 지옥에 가야 돼요. 왜 흥분하는지 모르겠습니까?

그 목사들이 하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고 다 맞는 말인데 결과는 어디에 도착 돼있다? 지옥에 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 갈 때는 뭐 했나? 분명히 자기가 이력서 쓰고 애써도, 운불련, 운전자불교연합회 분명히 해도 ‘내가 그 시간에 도착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이걸 존재로 출발하지 않고 뭐로 바꾼다? 기능으로 바꿀 수 있는 성령이 오게 되면 똑같이 가도 우리는 그것이 천국 가는 증거가 돼요. 저쪽은 지옥 가는 증거가 되고.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고,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고. 둘 다 햇빛은 똑같이 받고, 공기는 똑같이 마시면서 한쪽은 계속 지옥 가는 거예요.

그쪽에서 사람이 행하지 않는데 어떻게 착한 일 있나? 맞지요. 그건 맞는데 그렇게 해서 연결돼서 어디 간다? 지옥 간다. 왜 그걸 자꾸 놓치느냐 이 말이죠. 그럼 일은 해서 뭐합니까? 지옥 가든 뭐하든 교회 부흥되면 됐지 뭐. 진작 그런 소리해야지. 교인들 지옥 가든 관심 없어요. 자기 밥 먹고 살고 노후대책 되면 끝나는 거예요. 목사 배운 게 가락이 신학밖에 없는데 그것으로 자식들 먹고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럼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그럼 당신같이 손놓고 놀까?’ 놀면 안 되지. ‘그럼 우리말이 맞잖아.’ 맞고요. 맞습니다. 그게 하나의 증거가 된다니까. 이래서 지옥 간다는 증거가 된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왜 동조합니까? 끝이 좀 이상하다.

그래서 광주의 어떤 집사님께서 자기 교회에 문제 일어날 때 듣고 난 뒤에 한 마디만 던졌어요. ‘어쨌든 저쨌든 돈만 내지 마세요.’ 광주중앙교회가 삼천 명 모인다 했습니까? 삼천 명 모이는 교회가 다 나가고 이쪽에 소위 정의파 천백 명 그리고 교회를 쥐려고 하는 나쁜 파 삼백 명 모였단 말이죠. 문제는 나쁜 파 삼백 명이 문제가 아니고 정의파가 천백 명이 문제에요. 우리는 이렇게 정의롭게 나쁜 목사와 거짓 사도와 싸우기 때문에 여기에 실탄이 있어야 합니다. 실탄이 뭡니까? 우리가 이럴수록 더욱더 돈을 모아서 저쪽을 몰아내야 하니까 돈 주세요. 이게 바로 악마의 회덕분기점

그러니까 집사님은 어느 쪽에 가도 그거는 심심하니까 놀러가도 좋은데 절대로 돈은 내지 마세요. 왜냐? 어차피 정의롭다는 말이 결국 숨겨진 말은 뭡니까? 돈이란 얘기에요. 이쪽은 목사를 대적하면 저주받는다. 다른 말로 우리 쪽에 돈 내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쪽에선 용접을 했어요. 그래서 내가 설교시간에 했잖아요. 사우디에 가서 용접해야 할 것을 두바이 원자력발전소 용접해야 될 용접 일꾼을 교회 문에다 하느냐 말이에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래도 나는 행함으로 선악 쪽에 돕는 것이 하나님 일을 돕는 거란 생각이 아직도 육신의 관성은 남아있어요. 육신은 뭐가 통하느냐? 나라는 존재거든요. 그런데 이 존재는 허물어지죠. 다른 말로 후패하잖아요. 후패할 때는 후패하도록 내버려둬요. 제발. 후패하는데 좀 아프거든 그때는 진통제 먹고, 주사 맞고, 링거 맞고 해서 후패 속도는 좀 줄이겠지만 후패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내시경 해봐야 헬리코박터 만날 싸워봐야 또 생기거든요. 왜냐하면 지금 온 세포벽이 무너지는데 거기다 약 줘도 일시적으로 작아지고 또 무너진다 말이죠. 후패할 때 제발 존재론적 다가가서 후패를 미리 당기진 마세요. 알약 250알 먹지 말란 말이죠. 최윤희가 아프다고 뭐 했습니까? 루프스(전신성 홍반성 낭창)란 병에 걸려서 동반 자살했잖아요. 주께서 주체가 되셔야지 왜 자기가 주체가 됩니까? 그렇게 죽지 말고 차라리 죽여 달라고 기도나 하지.

사람이 존재로 출발하기 때문에 자기 몸이 있는 이상은 다섯 가지 기능이 있죠. 제일 먼저 기본적으로 건강이죠. 결국은 몸에 의한 자아실현인데, 자아실현은 타인과의 차별적 우열을 말합니다. 남이 없으며 자아실현이 심심해요. 뭔가 내가 자아실현하는 걸 보여주는 게 있어야 돼. 거울아, 거울아 하지만 거울도 나중엔 재미없어. 사람이 뭔가 설쳐도 남이 알아주는 재미가 있어야 설칠 것 아닙니까.

왜 사람들이 큰 교회 가고자 하는지 작은 교회 안 가고.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자기는 감리교교단에 십 년 있었지만 정목사 받을 수 있는 일급 연수까지 다 받아놓고 이 노회 도저히 못 있겠다. 이거는 교회가 아니라고 떠날 때 자기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담임목사 십년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큰 교회 가렵니다.

큰 교회 가려는 이유가 자기를 볼 수 있는 눈들이 많잖아요. 자기가 조금만 잘 해도 박수 소리가 울리잖아요. 가수 되고 제일 서글픈 게 뭐예요? 마이크 쥐고 노래 부르는데 앞에서 ‘톡톡톡’ 그것도 치매 걸린 할머니 하나가 치는데 얼마나 자괴감 느끼겠어요. 그런데 수천 관중이 조용필이 ‘기도하는~’ 하면, ‘와~’ 킬리만자로 노래 부르면, ‘와~’ 육십 대 아줌마들.

그래서 큰 교회 가려하는 거예요. 집중력 할 때 큰 교회가 나의 작은 주체를 대체하기 때문에 큰 교회 가는 거예요. 작은 교회에서 머리 돼봐야 큰 교회 꼬리가 더 나은 겁니다. 그게 뭐냐? 아까 이야기한 육신의 관성의 법칙, 한 번 해왔던 속도를 줄일 수 없어서 계속 그쪽으로 할 수밖에 없는.

고맙게도 그 육신이 있는 이상은 뭐가 발생됩니까? 죽을 때까지 육신의 관성이 있어줘야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의의, 십자가의 기능이 날이 갈수록 우리에게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겁니다. 다가올 때 그냥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다가와 버리면 육신 속에 있기 때문에 육신의 배를 짼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하나가 다 사건이에요.

그러면 사건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성경 하나 봅시다. 창세기 24장 60절.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 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덕담하고 있지요.

지금 곧 시집을 가는 누이동생한테 사촌 오빠가 가서 시어머니 잘 모시고 말 잘 듣고, ‘고추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만 못하더라’란 말도 있듯이 꾹 참고 순풍, 순풍 아들 많이 낳고 해서 귀염 받고 살면 내 짐이 다 덜겠다. 이렇게 해야 그게 결혼하는 사람에게 하는 덕담인데.

여기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완전히 여전사라. 싸워라. 지가 졸라입니까? 안젤리나 졸리. 싸우란 말이에요. 왜 싸워야 될까요? 사람이 싸움을 통해서 어느 싸움으로 번지느냐 하면, 이 싸움이 나와 너의 싸움이라 했지요. 가만 보면 누구 싸움입니까? 나와 나의 싸움, 나에게 새롭게 투입된 사건과 내가 갖고 있는 육신이 갖고 있는 관성의 싸움이에요.

이 싸움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번지죠. 결국은 신약에 와서 싸움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는 것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거고, 기어이 정과 욕심을 존재론적으로 갖추겠다고 버티는 것은 육신의 싸움인데 누가 더 셉니까? 당연히 성령이 더 세죠.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 앞에서 ‘내 고집과 내 기도응답 모든 것도 죄였군요.’라고 거꾸로 질 때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가 되는 거예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가.

주위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 봤다고 난리를 치는데 나는 완전히 쪼다 다 돼버린 거예요. 내 강조하는 것 다 사기로 드러났고, 내 기도 응답했다는 것 거짓말로 다 드러났고 고개 들 수가 없어. 부끄러워서. 부끄러워서 고개 숙이고 있는데 옆에 사람이 보니, ‘온유하십니다. 화평하십니다. 할렐루야. 겸손하십니다.’

누가 장악했어요? 성령님이 나를 폭로시켰다? 너는 육신이 있는 한 죄가 나올 수밖에 없음을 폭로시킬 때 그 주변에서 악취가 나는 것이 아니고 놀랍게도 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향기다. 왜? 그 앞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폭로되었기 때문에. 쟁반에 목 베인 세례요한이 어떻게 자기 인생을 원망합니까? ‘안 아프게 째주세요.’ 이것 안 된다 말이죠. 스데반 집사 돌에 맞을 때 ‘너무 큰 돌 말고 골라 던져 주세요. 예쁘장한 돌로.’ 이게 안 돼요. 왜냐하면 육신은 후패하는데 이렇게 후패하나 저렇게 후패하나 허물어져야 되는 겁니다.

저희 어머니가 치매 걸려서 며칠 아니지만 옆에서 거들어보니까 내가 치매 걸렸어. 같이 허물어져가는 동기생이라는 걸 발견했어요. 왜냐하면 어머니도 육신을 갖고 있고, 나도 육신을 갖고 있는데 지금 허물어지는 속도를 못 느끼고 있고, 어머니도 전혀 못 느끼고 있고.

그런데 나보다 나이 적은 사람은 날 볼 때 ‘목사님. 끝났어. 치매야. 안젤리나 졸리도 모르고 졸라라 하고. 끝났어.’라고 볼 것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젊은 사람한테는 ‘역시 세대 차 나. 늙었어. 벌써 40도 안 되서 저렇게 늙으면 돼?’ 또 할 것이고. 다같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려야 돼요.

한번 정리하면 육신의 특징은 바로 존재 위주라고 이 존재는 누구를 보이길 원한다? 타인 앞에서 우위를 뭔가 왕초가 되려는 시도.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고 섬기기 위한 것이다. 육신의 존재 문제는 이미 어디에 휩싸였습니까? 십자가에서 나오는 기능에 휩싸여있는 거예요. 그리고 육신을 버리지 말라. 뭘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이 하는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한 대목 보고 마치겠습니다. 대충했는데 맞아야 될 건데. 마태복음 25장 14절.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으니” 이 대목입니다.

주인이 타국에 안 갔으면 세 직원들은 한 식구죠. 그 주인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는 한 식구죠. 그런데 주인이 타국에 가는 사건이 벌어지죠. 가는 사건이 벌어져버리면 그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는 액수와 양에 상관없이 그 사람들의 주체는 누굽니까? 타국에 가 있는 그쪽이죠. 주인이 갔더라도 그쪽에서 지시와 명령은 기능적으로 받고 있습니까, 안 받고 있습니까? 받고 있죠.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 받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섯 달란트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독자적으로 자기 존재로부터 자기가 자기 스스로 판단하죠. 그러면 그에게 주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만세! 해방이죠. 이게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니까. 액수가 문제가 아닌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뭐라고 핑계되느냐 하면, 내가 한 달란트를 받았기 때문에 묻었다는 거예요. 왜? 형들은 다섯 개나 받았는데 나는 이것밖에. 그러니까 주님 쪽에서 차별했기 때문에 나도 성질나서 차별했습니다.

한 달란트로 뭘 남기겠나? 남겨 봐야 한 달란트. 다섯 달란트 남겨봐야 다섯 달란트. 돈 있는 사람이 더 번다고. 주식 오백 원짜리 하나 사봐야 얼마나 벌겠어요? 적어도 오십 억 해야 좀 번다하지 오백 원 해봐야 뭘 벌겠어요? 바로 그걸 의도적으로 예수님은 노리는 겁니다. 양적으로 세계는 따지지만 나는 양을 주면서도 그걸 양으로 보지 않고 질적으로 본다.

그러면 양에서 질적으로 바뀌려면 뭐가 허물어져야 돼요? 나는 주체는 없고 멀리가신 진짜 나의 주인은 주님이시라고 자기가 갖고 있는 양을 따지지 않고 그의 관계성, 그 관계성을 질이라 해요. 주님과 나의 관계성,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그 사랑의 질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두 달란트를 받았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양적이라면, ‘형님. 몇 달란트 받았습니까?’ ‘다섯 달란트.’ ‘나는 두 달란트. 에이 기분 나쁘다. 안 한다.’ 이럴 것 아니냐. 그러니까 액수가 적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적인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액수가 차이 나는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는 아무 문제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에요.

결국 주님의 모든 뜻은 갈라짐이에요. 아무리 숨겨도 결국은 택한 자는 따로 있고, 택하지 않은 자는 따로 있는 거예요. 택한 자를 택했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남겨진 사람은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자격은 예수님께 모든 심판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심판을 했기 때문에 진짜 믿는 사람은, 그 기준은 내가 아니고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기준 맞습니다.’ 하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모여서 주의 말씀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존재론적으로 천국에 가기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겠으며 존재론적으로 지옥 좋아하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 십자가 들이댈 때 주님이 원하는 사람과 주님이 싫어하는 사람이 등장했다는 놀라운 기적을 저희들은 주변에서 찾게 하여 주시고 우리 자신을 되짚어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0-10-12 09:35:19  녹취 : 한윤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