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특강101009b천국과지옥b
20101009b 대전특강 - 천국과 지옥b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해서 제가 쓸 테니 보세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죠. 이것을 다 더하면 ‘산 자의 하나님’이 돼요. 그러면 여기 산 자란 항목에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니까 지워버리면 남는 것은 야곱도, 이삭도, 아브라함도 살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개입 안 했으면 아브라함도 죽었고, 이삭도 죽었고, 야곱도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죽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개입되니까 아브라함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고, 이삭은 산 자가 되고, 야곱도 산 자가 되겠지요. 그러면 죽은 야곱, 죽은 아브라함, 죽은 이삭을 죽은 자에서 산 자로 완전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완벽하게 두 번 다시 실패가 없는 죽은 자를 산 자로 되게 하려면 여기에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죽은 자, 인간들끼리 의논할 수가 있다 했습니까, 없다 했습니까? 없지요. 죽은 자에게 끄집어내는 자기를 더욱더 죽이는 아이디어만 나오죠. 왜? 자기에게 주어진 사건은 없고 자기가 사건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에 자기가 살았다고 여기는 그것이 죽은 것인데 그 죽은 것을 모르고 자꾸 살고자 하니까 죽은 자에게는 자기를 더욱더 죽게 만드는 그것밖에 안 나온다.
죄가 어디서 나옵니까? 죄인에게서 나오잖아요. 죄인에게서 죄가 나오면 그 죄 때문에 더욱더 죄인 중의 괴수가 되게 하겠지요.
이러한 일밖에 되지 않는 자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쭉 배열해보니까 산 자의 하나님이죠. 그렇다면 죽은 아브라함과, 죽은 이삭을, 죽은 야곱을, 죽은 자를 산 자로 하려면 하나님이 개입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해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근호, 김을수 있더라도 이것을 하나의 개개체 이름으로 간주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죽은 자라고 명칭을 붙일 수 있는 분이 등장해야 되죠. 그것이 마지막 사건이어야 되죠. 최종적으로 판정을 내려버리는 사건이 등장해야 되죠. 그렇게 판정내리고 두 번 다시 그걸 뒤엎는 언약은 와선 됩니까, 안 됩니까? 두 번 다시 없어야 되겠죠.
그리고 재림이나 부활은 이렇게 죽은 자로 죽은 자로 하고, 산 자는 산 자로 결정짓는 확인 차원에서 벌어진 사건이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쪽의 사건을 무효화하거나 취소할 수 없지요. 죽은 예수님이 살아났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는 너는 죽고 부활의 주님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를 주께서는 죽음에서 건져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본체는 계속 끌고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들을 어떤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더라도 몽땅 죽은 자로 간주할 수 있는 분이 등장해야 되는데 그분이 ‘너희들은 죽은 자야.’라고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론적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너희들은 죽은 자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한 사람이 죽은 즉 그 다음에 뒤에 붙는 말이 한 사람의 반대말로 ‘모든’ 자가 죽었느니라. ‘죽었는데 어떻게 삽니까?’라는 말을 예수님은 아버지한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죽어야 될 우리는 ‘죽은 건 마땅한데 어떻게 하면 저는 살 수 있습니까?’라는 말을 하게 되면 우린 이걸(입) 쳐야 돼요. 아직도 죽은 척을 하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관의 못을 빼서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는지 살피는 사람들이에요. 아주 얍삽한 사람들이에요. 이게 개혁주의에요.
‘난 믿습니다. 죄인 맞습니다.’ 죄인 맞으면 죄인으로 지옥 가면 되지 ‘어떻게 하면 내가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어디 죄인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성폭행범이 ‘난 성폭행범 맞는데 어떻게 하면 다시 사회에 나가서 살 수 있습니까?’ 그걸 어떻게 묻습니까? 이미 끝난 거예요.
지금 삼성과 두산이 플레이오프하고 있는데 롯데 팀이 와서 우리는 안 끼어주느냐고 하면 그건 안 되는 거예요. 3▪4위전에서 이미 탈락했잖아요. 탈락했으면 구경만 하면 되지 ‘한 번만 더 붙읍시다.’ 이럴 수는 없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는 이유는, 우리가 미처 착각해서 모르는 우리는 우리 주체밖에 모르는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 된다는 그 오기로 똘똘 뭉친 이 개체들을 한꺼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죽은 자 맞다.’라고 확정지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율법에 의해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디에 소속된 겁니까? 율법이란 하나님의 선한 것, 율법은 선한 거니까 선한 율법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나머지 모든 뒤에 있는 사람들도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아야 마땅한 겁니다.
그런데 고마운 게 있어요. 제가 처음에 원칙을 이야기했어요. 지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등장하죠. 천국 없는 지옥 없고, 지옥 없는 천국 없다. 병행해서 같이 등장하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모든 걸 했다는 말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언약에 의하면, 이렇게 해서 지옥으로 확답시켜 놓은 기능적, 존재론적으로 확답이 아닙니다. 기능적으로 우리는 지옥 가야 마땅한 사람이에요. 여기에 기능적으로 천국이 등장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기능적으로 지옥 간다면 천국은 몇 명 갑니까? 한 사람도 없지요. 예수님마저 저주받아버리니까. 그 다음 몫은 하나님 아버지께 예수님을 살려주니까 예수님은 지옥과 천국을 다 경험하시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율법에 의하면 세상 죄를 진 어린양이잖아요.
그러면 십자가에 율법대로 다 이뤘고 돌아가셨다면, 그 [다 이루었다]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어린양 때문에 공로로 죄인이면서도 용서받을 일단의 무리가 예수님 살아날 때 같이 살아나는 겁니다. 같이 살아나줘야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웃사랑의 결정이 여기서 등장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이 하신 그 근거에 의하면 하나님이 용서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반드시 용서해야 될 일단의 무리가 있는 겁니다. 그걸 요한복음 5장에서는 아들의 뜻대로 구원을 받는 사람이 등장해요.
요한복음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이 일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요)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그렇다면 죽은 자 중에서 나중에 천국 가야 될 사람은 무슨 코스를 밟느냐 하면, 예수님이 갔던 그 코스를 비켜가서 독자적으로 천국 가는 길은 완전히 막혔어요. 처음으로 죽은 자에서 살아난 사람은 에녹이 아닙니다. 엘리야도 아니고. 처음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은 놀랍게도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갔던 그 코스가 첫 번째 부활이었습니다. 에녹이 첫 번째 부활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두 번째 부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시간은 인간적인 시간이지 쳐주질 않습니다.
예수님이 갔던 코스를 밟아야 돼요. 예수님의 코스가 뭡니까? 저주받아야 할 분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가 풀려서 영생에 들어갔잖아요. 그러면 이것을 그대로 적용시키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걸 예수님에게 맡겨놨어요. 여기서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드디어 [기능=존재]가 돼버려요. 누구한테만? 예수님에게만.
그런데 기능에서 존재로 간 건 예수님이지만 우리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항상 남의 주체가 아니고 ‘나’잖아요. 나는 항상 뭐부터 출발해야 돼요? 어떤 행함을 해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전체로 했을 때 행함이 나와요. ‘이 컵 누가 먹었어요?’ 하면 ‘컵이 저절로 날아와서 내 입에 물을 넣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마시게 했습니다.’라고 주체를 주님께 돌려버리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보통 사람은 내 지정의를 동원해서 ‘독약이 아니고 물인 줄 믿습니다.’ 하는 내 믿음으로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것은 어디로 쏠리게 돼있어요? 나라는 기능이 아니고 존재죠. 그러니까
주체는 존재에서부터 기능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존재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 기능은 전부다 이 기능을 예수님을 새로운 주라는 존재로 만들어버렸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하면, 그 다음부터 이 기능에서 존재로 된 여기의 영,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져버리면
우리는 그때부터 존재에서 기능으로 출발했던 성도가 그때부터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기능입니다. 다른 말로 은혜입니다.
그 다음부터 우리는 뭘 해도 범사가 감사가 되죠. 소급해서 모든 일이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발걸음도 세십니다. 주님께서 내 발걸음 세기 참 힘들어요. 왜냐하면 나는 내 마음대로 걷고 하니까. 힘들긴 힘들어도 다 세세요. 머리카락 세기도 참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어요. 어쨌든 세십니다. 심지어 참새도 기르시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오늘까지 기르시고요.
이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존재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찾는다는 모든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존재가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나라는 인간, 존재가 있더라도 그 존재를 무시하고 주님의 존재가 내 속에 들어와서 나를 데리고, 주님은 원래 목적이 기능에서 주라는 존재죠. 여기 주의 나라에 우리를 집어넣는 기능을 이제부터 내가 한다, 누가 한다? 주님이 하시죠.
왜 전에는 회덕분기점에서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했습니까? 그것은 갈라지면 또 거기서 기능이 아니고 ‘나는 구원받지롱. 나는 경상도로 가지.’ 또 자기 존재로 했잖아요. 그게 옛 언약 가운데서는 그랬어요. 은혜 받았다고, 구원받았다고 까불다가 또 뭐 해놓고 ‘나 지옥 가야 돼.’ 혼자 좌절하고 하던 것이 성령을 받게 되면 관심사가 내 행동, 치매 걸렸느냐, 거기에 관심이 없고 주께서 이미 보장했다는 십자가를 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존재에서 기능 가는 우리를 기능에서 주님의 존재로 변하게 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음을 성령께서는 믿게 하시는 겁니다. 믿게 하게 되면 자기 자신의 어설픔에 대해서 지극히 당연하게 보죠. 자기의 실수를 당연하게 되면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늘 어설프니까. 어설픈 존재가 구원받는 것은 기능자가 대단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천국 보내는 게 아닙니다. ‘죄인 이리 와. 천국 가.’ 이게 아니라 누굴 거쳐야 돼요, 누구 노선을 거쳐야 돼요? ‘너 죄인이야?’ ‘죄인입니다.’ ‘바로 가. 바로 가.’ 이런 것은 없습니다. 반드시 누굴 거쳐야 돼요? 예수님이 변압기에요. 여기에 와서 이걸 바꾸어 버립니다. 존재에서 기능하는 걸, 기능에서 존재로 바꿔버리죠.
나라는 존재가 있어요. 그것이 존재에서 존재로 나 된 것이 아니고, 앞 서 주님의 기능이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나 됐다는 존재로 하는 거죠. 그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채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내가 산 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는 죽은 채로 들어가는데 그냥 죽어버리면 소용없어요. 누구와 함께 합류가 돼야 돼요.
누구와 합류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승천? 아니에요. 그것은 코스를 밟아야 돼요. 어딥니까? 주님의 십자가에 합류가 되죠. 부활에 합류되는 게 아니고. 부활에 합류되는 것은 역시 개혁주의. 여기 또 개혁주의라. 주님의 십자가에 합류돼버리면 그때부터는 존재에서 기능이 아니라 기능에서 존재가 되기 때문에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란 존재가 사신다.
그래서 상당히 어려운 건데 하나교회에서 하면서도 하나교회 전도사님이 이해했을까 내가 걱정돼서 하는 건데. 구약과 십자가와 신약의 흐름에서 기존의 신학자는 어떻게 봤느냐 하면, 김희보 교수 같은 경우엔 이렇게 봤어요. ‘다수’가 왔다가 중간쯤에 ‘남은 자’가 되고 그 남은 자가 오직 한 사람의 남은 자, 예수님이 되어서 그 예수님이 우리의 교회라는 오순절에 성령 받게 되면 여기서 다수가 된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합니다만 이것 잘못 된 거예요.
다수에서 하나, 예수님 될 때 여기서 다수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반복이에요. 하나의 반복이기 때문에 하나교회는 늘 하나에요. 어떻게 하나의 반복이 되느냐? 보통 이 다수는 개혁주의에서는 우리 힘으로 안 됐는데 성령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서 주의 뜻대로 한다. 다수가 돼버리는데 그건 거짓말이고 십자가 후에는 우리 존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들어와 버려요.
‘주님. 제가 할게요. 은혜 받았어요.’ ‘까불지 마.’ 이제는 배 째고 주님이 우리 속에 직접 들어와 버리면 나는 나가 아니고 또 누가 돼버려요? 주님이 돼버리죠. 나는 껍데기로 돼있고. 죄인의 모습으로 껍데기로 되니까.
그러니까 너도 주님이고, 나도 주님이 안에 들어있으니까 그것이 손이 되던, 발이 되던, 눈이 되던 어느 것이 귀한 것이 없이 결국은 모든 사람이 성령 받게 되면, ‘나는 성령 받았다 씨.’ 다수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모입니까? 하나, ‘성령이 어디서 왔지?’ 하고 한 성령을 받게 되면 주님한테 보게 된다 말이죠.
성령 받아서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 없다고 해요. 사도 바울이 말할 때 아주 재미있게 하잖아요. 하도 사람들이 자기 존재에 관심 있으니까. 저기 존재에 관심 있으면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나는 죽어서 좋은 나라 가는 것 맞지요?’ 만날 자기 존재, 옆 사람 귀찮아. 나만 천당 가면 최고라. 다 된 거예요.
이러한 사고방식에 철퇴를 가하죠.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그게 바로 바리새인이고, 그게 바로 개혁주의란 말이죠. 이단이다. 그런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각기 들어가셔서 어느 누구도 내가 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께서 하셨다고 고백하는 그것, 예수님 피의 공로에 의해서. 그럴 때 그게 교회가 되고 멀리 있더라도 한 형제가 되고 결국은 몸이 되면서 그 사지는 하나밖에 없는 머리로부터 힘을 받고 그 기능이 돌아가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좀 어려운 것 해봅시다. 그러면
왜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어야 하느냐 하면, 인간의 존재는 두 가지 저촉을 받습니다. 하나는 공간의 저촉을 받고 하나는 시간의 저촉을 받아요. 그런데 만약에 기능이 돼버리면 이 기능은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님의 존재기 때문에 공간의 제한을 안 받고 시간의 제한을 안 받죠.
세례 요한이 뭐라 했습니까?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 선 것은”
여러분 사람 이름을 지을 때 태어나서 짓는 것이 그 사람의 성격에 잘 부합됩니까? 태어나기 전에 짓는 것이 잘 부합됩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너는 이센돌이라 하라.’ 센돌 되기를 기대하고 지었는데 태어나고 하는 게 전부 허약해. 이름을 잘못 지은 거잖아요. 실패한 거잖아요. 그런데 이름을 보류하는 거예요. 보니까 그 얘가 얼마나 센지. 그때 힘이 센 것 보니 이름을 센돌이라 하자. 항상 커서도 세질 거야. 하는 것이 정답에 가깝죠.
세례요한 이름 지을 때 어떻게 지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 이름 지을 때 어떻게 지었습니까? 우리 보기에는 태어나기 전에 지었지요. 그런데 기능적으로 보면 이미 다 주께서 어떤 일을 하실지 안 상태에서 이름을 지어버리죠. 세례요한도 마찬가지로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을 석판에 쓰니까 요한이 나왔지요. 자기 아버지 사가랴 이름으로 하지 않고 요한으로 하잖아요. 우리 보기에는 신기하지만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전혀 신기할 게 없다 이 말이죠.
이것도 의존교회에서 강의했는데 더 해봅시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라는 노래를 혹시 아십니까?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 보일런지’ 그런데 만약에 그 이등병이 나중에 제트비행사가 되면 뒷동산이 하나의 평지로 보이겠죠. 시공간의 한계, 여기서 보면 뒷동산이 한계지만 뒷동산 올라가봐야 자기 집 안 보이는지 알지요.
하나님께서 이름 지을 때는 무엇까지 지어버려요? ‘우리는 안 돼.’ 이렇게 하지만 주께서는 이미 시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세례요한이라 지어버린 겁니다. 세례요한이 이걸 알았을 거예요. 만약에 이걸 안다면 세례요한이 죽을 때 어떻게 죽습니까? 쟁반에 처참하게 죽지요.
우리 같으면, 세상에 저렇게 성령의 예언대로 태어나서 인물 나는 줄 알았더니만 기껏 여자아이의 말 한 마디에 쟁반에 목 달아나는. 쟁반에 목 달아나는 건 고사지낼 때 돼지 잡을 때나 일어날 일이지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잡습니까? 기껏 성령의 예언대로 정말 신기하게 동장, 이장 다 불러서 다 놀랄 일이에요. 얘는 분명히 뜬다. 뭘 하든지 할 거다. 대통령 아니면 국무총리할 거다. 능지처참 당했어요.
그러면 세례요한 당사자가 그걸 슬프게 여기겠습니까, 아니면 당연히 가야 할 코스로 보겠습니까? 그렇게 순교해야 예수님 말씀에 아벨과 사가랴와 세례요한의 그 코스가 어떤 코스입니까? 그 선지자가 죽음을 통해서 아까 회덕분기점, 저쪽 분기점과 이쪽 분기점이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갈라졌음, 그것도 완벽하게 마지막 언약으로 이미 고정돼버렸음을 보여주는 역할이 선지자 역할이에요. 그냥 기능적 역할이에요. 존재가 문제 아닙니다.
엘리야가 불수레를 탈 때 사람들이 굉장히 부러워해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여기서 저쪽 갈 때 버스타고 가나, 택시타고 가나 도착해보면 뭘 타고 갔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 베어 죽으나, 폼 나게 불수레 타도 내려야 돼요. 엘리야는 불수레 탔지요. 엘리사는 그냥 죽었어요. 에녹은 죽음 보지 않고 올라갔지만 다른 선지자는 능지처참 됐습니다. 그런데 운송수단이 뭐 중요합니까? 문지방 넘어서 죽으나, 문지방 안 넘어 죽으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어떤 분이 말하기를 죽으려고 수면제 40알 먹었답니다. 내가 옆에서 그랬어요. 40알 먹으니 안 죽지. 250알 먹었으면 죽었을 것 아니냐 말이죠. 왜 좀 넉넉하게 먹지 않고 뭔가 죽는 순간에도 혹시나 하는 이런 식으로. 한강에서 춥다고 안 뛰어내리고. 인심이 후하게 넉넉하게 죽으면.
불수레 타는 것까지 자기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발걸음 세시는 것, 태어나고 죽고 하는 모든 과정에서 전부다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니면 너는 죽은 자로 머물러 있을 거라는 그런 존재가 아니고 그런 기능들로 우리는 지금 코일에 전선 감기듯이 칭칭 감겨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님. 혹시 미리 알 수 있습니까?’ 미리 안 알려줘요. 미리 알려주면 그게 주체가 돼서 또 밀가루에 면도날 날아갑니다. 그냥 내버려둬요. 내 몸도 아닌, 내 인생도 아닌 것을 니 마음대로 사세요. 마음대로 산다고 방치는 하지 마시고 어떻게 되는지 팔짱 끼고 보시면 됩니다. 주께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세요.
공부하기 싫은 애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머니. 책 사 주세요.’ 해서 사법고시 합격해버리고. 그리고 어디서 인터넷 채팅해서 만난 여자와 사귀다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어머님. 정식으로 선보겠습니다.’ 해서 재벌 이세하고 결혼하고. 고현정하고 결혼하고 이런 식으로. 그게 정신 차린 것인지 아닌지 그건 모르지만 그것조차도 그냥 내비둬요. 그걸 중간에 끊어서 성공 했니, 실패 했니 하면서 운송수단에 연연하지 마세요.
우리 동네에 두 종류의 택시가 있습니다. 운불련이 있고, 천불련이 있어요. 천불련은 천주교 믿는 운전사들, 운불련은 불교 믿는 운전사들이에요. 그걸 어느 택시 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느 게 빨리 가는 게 중요하지. 똑같은 가격에 그냥 가는 겁니다.
여러분 보기에 얼굴 색깔 다르고 다 다르지만 인생 달라 보이죠? 아닙니다. 주님이 여러분 속에 들어왔다는 점에서는 우리는 다같이 하나입니다. 하나는 잘못됐고, 하나의 반복이에요. 하나같으면 내가 예수라는 이상한 도사가 등장하니까 하나의 반복이죠.
그래서 세례요한이 그 당시 왕을 부러워하지 않듯이 남의 인생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오늘 주례 하는데 준비한 걸 잊어버렸어요. 너무 시간 때문에 닦달내서. 뭐냐 하면, 자기 집의 기쁨을 놔두고 왜 남의 집의 기쁨을 탐을 내는지 몰라. 이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조명도 어두컴컴하고 빨리 끝내라고 신호는 보내고 편집당한다고 해서 허둥지둥 끝냈는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자체를 이 뭉치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규정을 해버리면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믿고 타락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타락할 수가 없죠. 왜냐하면 아브라함한테 혼자 맡긴 것이 아니고 그 뒤에 하나님이 있잖아요. 아브라함은 만날 자기 구원받아도 자기 존재만 생각하겠지만 존재보다 더 센 하나님의 기능이 존재를 기능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게 문제가 아니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너 같은 죄인도 하나님께서 능히 기능을 기능답게 행사할 수 있다. 그 기능이 모아지면 그게 바로 언약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소모품으로 사용한 거예요. 소모품보다 더 재미있는 말이 공구. 드라이버, 레지마시^^ 뺀찌, 망치. 레지마시 모릅니까? 나사를 조이거나 푸는 공구(드라이버). 주님의 공구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를 이 부분에서 반밖에 안 했어요. 뭐냐 하면, 아까 회덕분기점이 있다고 했지요. 회덕분기점이 구약의 때는 무리로 집단해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로 갈라지는데 신약에 오면 우리 코앞에 있는 게 아니에요. 코앞에 있어도 낚아챌 수가 없어요. 십계명이 바로 코앞에 있어도 우린 못 지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의 특징이 뭐냐 하면, 코앞에 있지 않고 허락도 받지 않고 아예 배를 째서 성령에 의해서 들어와 버려요. 들어와 버리면 무리 지어서 둘로 갈라지는 이러한 모습이 신약에 오면 나라는 한 인간에서 둘로 갈라져요. 둘로 갈라진 게 육신에 속한 것과 영에 속한 걸로 갈라집니다.
육신에 속한 담당은 우리의 신체, 우리의 몸에 관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아무리 은혜 받아도 우리의 몸은 몸대로 따로 놀아요. 그래서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해야 돼요. 후패하는 것을 서울강의에서는 무너져 내린다. 우리는 매일같이 지금도 무너집니다. 남극이나 북극의 빙하 봤지요. 쉴 새 없이 빙하가 녹아서 바다로 무너져 내리죠. 그냥 조용히 녹는 것이 아니고 절벽이 깎이듯이 저절로 무너져 내리죠.
우리는 하루를 살면 그만큼 하루치가 허물어지는 겁니다. 허물어지면 여기 육신 앞에 관성이 붙어있어요. 옛날 놀던 가락이 있어요. 뭐냐 하면 오른팔이 잘렸는데 머리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오른팔이 없어서 없는 부분인데 누가 없는 공간, 진공 부분에 침을 찌르면 몸은 안 아파도 머리가 아프니까 아픔을 느끼는 거예요. ‘너, 왜 내 오른팔 찌르는데?’ ‘네 오른팔이 어디 있는데?’ 그걸 비슷한 말로 기시감이라 하죠. 프랑스어로 뭐라 하죠? 데자뷰. 뭔가 온 듯한 곳인데 말로 설명할 수는 없고. 뭔가 내가 해 본 건데.
사람이 꿈을 꾸게 되면 그 꿈을 현실로 생각해서 5개월 전의 꿈을 그때 마치 현실처럼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이게 육신의 관성이에요. 육신의 관성의 특징은 행함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하지 않았는데 언놈이 도와줬나? 내가 손 붙잡고 노는데 뭘 도와줘?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습니다. 이력서 안 넣었는데 취직되는 법은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이력서 내면 취직됩니까? 아니잖아요. 한 명 뽑는데 천 명 와보세요.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데 그걸 뭐로 번역하느냐 하면, 내가 이력서를 꼼꼼하게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됐다는 거예요. 천 명 중에 한 명. 이력서 한 번 보지. 자기보다 이력서 잘 쓴 사람 많아요. 모든 게 운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운이에요. 실제로 운으로 살아가면서도 그걸 소급해서 누가 했다? 그런 운이 되게끔 내가 철야 기도했다. 반드시 자기 행함을 밑에 깝니다. 깔아줘야 목사가 하는 말이 교인들이 알아먹어요. 둘 다 육신이니까. ‘여러분 나처럼 하시면 여러분도 나처럼 복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체험에서 우러나온 설교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 말이 맞는데 문제는 그 말이 회덕분기점 거쳐서 옛날 육신의 관성, 지옥으로 가고 있다니까요. 지옥으로 간다는 점에서는 인간의 행함으로 행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 말은 개혁주의 말이 전부다 맞습니다. 이건 분명히 맞아요. 그렇게 하게 되면 반드시 지옥에 가야 돼요. 왜 흥분하는지 모르겠습니까?
그 목사들이 하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고 다 맞는 말인데 결과는 어디에 도착 돼있다? 지옥에 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 갈 때는 뭐 했나? 분명히 자기가 이력서 쓰고 애써도, 운불련, 운전자불교연합회 분명히 해도 ‘내가 그 시간에 도착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이걸 존재로 출발하지 않고 뭐로 바꾼다? 기능으로 바꿀 수 있는 성령이 오게 되면 똑같이 가도 우리는 그것이 천국 가는 증거가 돼요. 저쪽은 지옥 가는 증거가 되고.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고,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고. 둘 다 햇빛은 똑같이 받고, 공기는 똑같이 마시면서 한쪽은 계속 지옥 가는 거예요.
그쪽에서 사람이 행하지 않는데 어떻게 착한 일 있나? 맞지요. 그건 맞는데 그렇게 해서 연결돼서 어디 간다? 지옥 간다. 왜 그걸 자꾸 놓치느냐 이 말이죠. 그럼 일은 해서 뭐합니까? 지옥 가든 뭐하든 교회 부흥되면 됐지 뭐. 진작 그런 소리해야지. 교인들 지옥 가든 관심 없어요. 자기 밥 먹고 살고 노후대책 되면 끝나는 거예요. 목사 배운 게 가락이 신학밖에 없는데 그것으로 자식들 먹고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럼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그럼 당신같이 손놓고 놀까?’ 놀면 안 되지. ‘그럼 우리말이 맞잖아.’ 맞고요. 맞습니다. 그게 하나의 증거가 된다니까. 이래서 지옥 간다는 증거가 된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왜 동조합니까? 끝이 좀 이상하다.
그래서 광주의 어떤 집사님께서 자기 교회에 문제 일어날 때 듣고 난 뒤에 한 마디만 던졌어요. ‘어쨌든 저쨌든 돈만 내지 마세요.’ 광주중앙교회가 삼천 명 모인다 했습니까? 삼천 명 모이는 교회가 다 나가고 이쪽에 소위 정의파 천백 명 그리고 교회를 쥐려고 하는 나쁜 파 삼백 명 모였단 말이죠. 문제는 나쁜 파 삼백 명이 문제가 아니고 정의파가 천백 명이 문제에요. 우리는 이렇게 정의롭게 나쁜 목사와 거짓 사도와 싸우기 때문에 여기에 실탄이 있어야 합니다. 실탄이 뭡니까? 우리가 이럴수록 더욱더 돈을 모아서 저쪽을 몰아내야 하니까 돈 주세요. 이게 바로 악마의 회덕분기점
그러니까 집사님은 어느 쪽에 가도 그거는 심심하니까 놀러가도 좋은데 절대로 돈은 내지 마세요. 왜냐? 어차피 정의롭다는 말이 결국 숨겨진 말은 뭡니까? 돈이란 얘기에요. 이쪽은 목사를 대적하면 저주받는다. 다른 말로 우리 쪽에 돈 내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쪽에선 용접을 했어요. 그래서 내가 설교시간에 했잖아요. 사우디에 가서 용접해야 할 것을 두바이 원자력발전소 용접해야 될 용접 일꾼을 교회 문에다 하느냐 말이에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래도 나는 행함으로 선악 쪽에 돕는 것이 하나님 일을 돕는 거란 생각이 아직도 육신의 관성은 남아있어요. 육신은 뭐가 통하느냐? 나라는 존재거든요. 그런데 이 존재는 허물어지죠. 다른 말로 후패하잖아요. 후패할 때는 후패하도록 내버려둬요. 제발. 후패하는데 좀 아프거든 그때는 진통제 먹고, 주사 맞고, 링거 맞고 해서 후패 속도는 좀 줄이겠지만 후패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내시경 해봐야 헬리코박터 만날 싸워봐야 또 생기거든요. 왜냐하면 지금 온 세포벽이 무너지는데 거기다 약 줘도 일시적으로 작아지고 또 무너진다 말이죠. 후패할 때 제발 존재론적 다가가서 후패를 미리 당기진 마세요. 알약 250알 먹지 말란 말이죠. 최윤희가 아프다고 뭐 했습니까? 루프스(전신성 홍반성 낭창)란 병에 걸려서 동반 자살했잖아요. 주께서 주체가 되셔야지 왜 자기가 주체가 됩니까? 그렇게 죽지 말고 차라리 죽여 달라고 기도나 하지.
사람이 존재로 출발하기 때문에 자기 몸이 있는 이상은 다섯 가지 기능이 있죠. 제일 먼저 기본적으로 건강이죠. 결국은 몸에 의한 자아실현인데, 자아실현은 타인과의 차별적 우열을 말합니다. 남이 없으며 자아실현이 심심해요. 뭔가 내가 자아실현하는 걸 보여주는 게 있어야 돼. 거울아, 거울아 하지만 거울도 나중엔 재미없어. 사람이 뭔가 설쳐도 남이 알아주는 재미가 있어야 설칠 것 아닙니까.
왜 사람들이 큰 교회 가고자 하는지 작은 교회 안 가고.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자기는 감리교교단에 십 년 있었지만 정목사 받을 수 있는 일급 연수까지 다 받아놓고 이 노회 도저히 못 있겠다. 이거는 교회가 아니라고 떠날 때 자기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담임목사 십년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큰 교회 가렵니다.
큰 교회 가려는 이유가 자기를 볼 수 있는 눈들이 많잖아요. 자기가 조금만 잘 해도 박수 소리가 울리잖아요. 가수 되고 제일 서글픈 게 뭐예요? 마이크 쥐고 노래 부르는데 앞에서 ‘톡톡톡’ 그것도 치매 걸린 할머니 하나가 치는데 얼마나 자괴감 느끼겠어요. 그런데 수천 관중이 조용필이 ‘기도하는~’ 하면, ‘와~’ 킬리만자로 노래 부르면, ‘와~’ 육십 대 아줌마들.
그래서 큰 교회 가려하는 거예요. 집중력 할 때 큰 교회가 나의 작은 주체를 대체하기 때문에 큰 교회 가는 거예요. 작은 교회에서 머리 돼봐야 큰 교회 꼬리가 더 나은 겁니다. 그게 뭐냐? 아까 이야기한 육신의 관성의 법칙, 한 번 해왔던 속도를 줄일 수 없어서 계속 그쪽으로 할 수밖에 없는.
고맙게도 그 육신이 있는 이상은 뭐가 발생됩니까? 죽을 때까지 육신의 관성이 있어줘야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의의, 십자가의 기능이 날이 갈수록 우리에게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겁니다. 다가올 때 그냥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다가와 버리면 육신 속에 있기 때문에 육신의 배를 짼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하나가 다 사건이에요.
그러면 사건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성경 하나 봅시다. 창세기 24장 60절.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 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덕담하고 있지요.
지금 곧 시집을 가는 누이동생한테 사촌 오빠가 가서 시어머니 잘 모시고 말 잘 듣고, ‘고추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만 못하더라’란 말도 있듯이 꾹 참고 순풍, 순풍 아들 많이 낳고 해서 귀염 받고 살면 내 짐이 다 덜겠다. 이렇게 해야 그게 결혼하는 사람에게 하는 덕담인데.
여기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완전히 여전사라. 싸워라. 지가 졸라입니까? 안젤리나 졸리. 싸우란 말이에요. 왜 싸워야 될까요? 사람이 싸움을 통해서 어느 싸움으로 번지느냐 하면, 이 싸움이 나와 너의 싸움이라 했지요. 가만 보면 누구 싸움입니까? 나와 나의 싸움, 나에게 새롭게 투입된 사건과 내가 갖고 있는 육신이 갖고 있는 관성의 싸움이에요.
이 싸움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번지죠. 결국은 신약에 와서 싸움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는 것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거고, 기어이 정과 욕심을 존재론적으로 갖추겠다고 버티는 것은 육신의 싸움인데 누가 더 셉니까? 당연히 성령이 더 세죠.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 앞에서 ‘내 고집과 내 기도응답 모든 것도 죄였군요.’라고 거꾸로 질 때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가 되는 거예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가.
주위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 봤다고 난리를 치는데 나는 완전히 쪼다 다 돼버린 거예요. 내 강조하는 것 다 사기로 드러났고, 내 기도 응답했다는 것 거짓말로 다 드러났고 고개 들 수가 없어. 부끄러워서. 부끄러워서 고개 숙이고 있는데 옆에 사람이 보니, ‘온유하십니다. 화평하십니다. 할렐루야. 겸손하십니다.’
누가 장악했어요? 성령님이 나를 폭로시켰다? 너는 육신이 있는 한 죄가 나올 수밖에 없음을 폭로시킬 때 그 주변에서 악취가 나는 것이 아니고 놀랍게도 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향기다. 왜? 그 앞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폭로되었기 때문에. 쟁반에 목 베인 세례요한이 어떻게 자기 인생을 원망합니까? ‘안 아프게 째주세요.’ 이것 안 된다 말이죠. 스데반 집사 돌에 맞을 때 ‘너무 큰 돌 말고 골라 던져 주세요. 예쁘장한 돌로.’ 이게 안 돼요. 왜냐하면 육신은 후패하는데 이렇게 후패하나 저렇게 후패하나 허물어져야 되는 겁니다.
저희 어머니가 치매 걸려서 며칠 아니지만 옆에서 거들어보니까 내가 치매 걸렸어. 같이 허물어져가는 동기생이라는 걸 발견했어요. 왜냐하면 어머니도 육신을 갖고 있고, 나도 육신을 갖고 있는데 지금 허물어지는 속도를 못 느끼고 있고, 어머니도 전혀 못 느끼고 있고.
그런데 나보다 나이 적은 사람은 날 볼 때 ‘목사님. 끝났어. 치매야. 안젤리나 졸리도 모르고 졸라라 하고. 끝났어.’라고 볼 것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젊은 사람한테는 ‘역시 세대 차 나. 늙었어. 벌써 40도 안 되서 저렇게 늙으면 돼?’ 또 할 것이고. 다같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려야 돼요.
한번 정리하면 육신의 특징은 바로 존재 위주라고 이 존재는 누구를 보이길 원한다? 타인 앞에서 우위를 뭔가 왕초가 되려는 시도.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고 섬기기 위한 것이다. 육신의 존재 문제는 이미 어디에 휩싸였습니까? 십자가에서 나오는 기능에 휩싸여있는 거예요. 그리고 육신을 버리지 말라. 뭘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이 하는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한 대목 보고 마치겠습니다. 대충했는데 맞아야 될 건데. 마태복음 25장 14절.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으니” 이 대목입니다.
주인이 타국에 안 갔으면 세 직원들은 한 식구죠. 그 주인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는 한 식구죠. 그런데 주인이 타국에 가는 사건이 벌어지죠. 가는 사건이 벌어져버리면 그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는 액수와 양에 상관없이 그 사람들의 주체는 누굽니까? 타국에 가 있는 그쪽이죠. 주인이 갔더라도 그쪽에서 지시와 명령은 기능적으로 받고 있습니까, 안 받고 있습니까? 받고 있죠.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 받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섯 달란트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독자적으로 자기 존재로부터 자기가 자기 스스로 판단하죠. 그러면 그에게 주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만세! 해방이죠. 이게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니까. 액수가 문제가 아닌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뭐라고 핑계되느냐 하면, 내가 한 달란트를 받았기 때문에 묻었다는 거예요. 왜? 형들은 다섯 개나 받았는데 나는 이것밖에. 그러니까 주님 쪽에서 차별했기 때문에 나도 성질나서 차별했습니다.
한 달란트로 뭘 남기겠나? 남겨 봐야 한 달란트. 다섯 달란트 남겨봐야 다섯 달란트. 돈 있는 사람이 더 번다고. 주식 오백 원짜리 하나 사봐야 얼마나 벌겠어요? 적어도 오십 억 해야 좀 번다하지 오백 원 해봐야 뭘 벌겠어요? 바로 그걸 의도적으로 예수님은 노리는 겁니다. 양적으로 세계는 따지지만 나는 양을 주면서도 그걸 양으로 보지 않고 질적으로 본다.
그러면 양에서 질적으로 바뀌려면 뭐가 허물어져야 돼요? 나는 주체는 없고 멀리가신 진짜 나의 주인은 주님이시라고 자기가 갖고 있는 양을 따지지 않고 그의 관계성, 그 관계성을 질이라 해요. 주님과 나의 관계성,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그 사랑의 질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두 달란트를 받았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양적이라면, ‘형님. 몇 달란트 받았습니까?’ ‘다섯 달란트.’ ‘나는 두 달란트. 에이 기분 나쁘다. 안 한다.’ 이럴 것 아니냐. 그러니까 액수가 적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적인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액수가 차이 나는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는 아무 문제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에요.
결국 주님의 모든 뜻은 갈라짐이에요. 아무리 숨겨도 결국은 택한 자는 따로 있고, 택하지 않은 자는 따로 있는 거예요. 택한 자를 택했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남겨진 사람은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자격은 예수님께 모든 심판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심판을 했기 때문에 진짜 믿는 사람은, 그 기준은 내가 아니고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기준 맞습니다.’ 하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모여서 주의 말씀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존재론적으로 천국에 가기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겠으며 존재론적으로 지옥 좋아하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 십자가 들이댈 때 주님이 원하는 사람과 주님이 싫어하는 사람이 등장했다는 놀라운 기적을 저희들은 주변에서 찾게 하여 주시고 우리 자신을 되짚어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0-10-12 09:35:19 녹취 : 한윤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