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10-수시모집 17050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5. 18. 05:24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0 - 수시모집


                                                             07,05,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4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예루살렘의 왕은 인간의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통보할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스라엘을 허무한 이스라엘로 만들어버립니다. 


'언약' 이라는 브릿지 !!


전도서를 쓴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인데, 그런데 그 솔로몬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고 하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연결할 때, '언약' 이라는 것으로 연결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것을 하나의 다리라고 보면,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으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의식을 하고 그 연결을 지키려고 하는데, 물론 다 실패로 끝나지만 말이죠. 반면에 다리를 놓은 쪽이 여호와 하나님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놓은 다리를 빈 다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실천력이 그 다리에 제공이 된다는 겁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나라는 이 세상에 유일하게 이스라엘밖에 없는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유일하게 연결이 되는 고리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밖에 없는데, 다른 이방나라는 전혀 해당이 사항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스라엘은 언약이라는 다리를 통해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언약을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도 있지만,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실패로 끝나고, 그런데 그 언약이 비어있는 언약이 아닌데, 그 언약이 언약대로 실행이 되도록 하나님의 능력이 계속해서 개입이 된다는 겁니다. 


죽은 데서 살리시는 하나님 !!


그렇게 개입할 때 원칙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약속하신 원칙대로만 되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원칙이 무엇인고 하니,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경우에는 대 원칙이 주어졌는데, 그게 바로 없는 것에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없다, 죽었다" 라는 것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 사람들이 손을 댈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제가 '단절'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즉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는 것을 구약부터 설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한데, 그러니 종교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종교생활을 하려면 '나' 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니 있으면서 있으면 안 되고 없으면서 있어야 하고 죽은 데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자기가 천국에 간다고 하면 안 되는데, 그것은 아브라함 언약에 어긋난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이라는 다리를 놓았는데, 그 다리의 원칙은 이미 확정되어있다는 겁니다. 없는 것에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신다는 말이죠. 따라서 살아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칙이 아닌데, 전 세계의 모든 기독교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런 것은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어디까지나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린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의 말씀이 바로 그것인데, 즉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는 겁니다. 그 원칙이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살아있는 '나' !!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왜 아브라함의 언약과 같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고 하니, 몰라서 이야기하지 않았고, 설령 안다고 해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는 자기가 있다고, 그것도 살아있다고, 즉 살아있는 '나' 라는 말이죠. 


그렇게 살아있는 인간들이 천당에 가겠다고 교회에 나왔는데, 그런 인간들에게 "죽은 자들에게만 들립니다. 없는 자들에게만 들립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납득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살아있는 내가 얼마나 봉사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나오는데, 즉 괜찮은 살아있는 '나' 자신이 어떻게 하겠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라,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것으로,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양보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아니면 "아, 살아있네!" 라고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도 우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자기들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살아있기에, 율법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이스라엘은 분명히 잘못된 이스라엘인데, 그러면 그 다리에 무엇이 개입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언약, 이삭의 언약, 야곱의 언약대로 하시는데, 그런데 그 원칙이 뭐라고 했습니까?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것이란 말이죠. 이것이 마구 쳐들어오는데, 마치 6.25 때 인민군이 허락도 받지 않고 마구 쳐들어오듯이 말이죠.


그러니 이스라엘에게 난데없는 전쟁이 벌어지는데, 그래서 여기 교재 44페이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언약으로 통보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스라엘을 허무한 이스라엘로 만들어버립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살아있다고 하는 인간들을 죽게 만드는, 있다고 하는 것은 없애버리는 그 힘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겁니다.


즐거운 우리집 !!


이스라엘보다 더 실감나게 우리 이야기를 하면, 여기에 이렇게 '즐거운 우리집'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진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온다고 하면, 우리가 상상한 하나님이 아니고 말이죠. 진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여기에 들이닥친다고 하면 어떤 원리가 적용되겠느냐는 겁니다. 이 집은 어떤 집이라고 했습니까? '즐거운 우리집' 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모든 가정의 로망인데, 서로 싸우려고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진짜 하나님이 들이닥친다면, 마치 유월절의 밤처럼 말이죠. 그것을 '여호와의 밤'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제발 우리 가정을 살려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는데, 왜냐하면 이 가정은 이미 '살아있네' 라는 것인데, 즉 살아있다는 겁니다.


다시 하면 !!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하겠는데,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관계를 맺으신 나라가 어떤 나라인고 하니, 그게 바로 이스라엘인데, 하나님께서는 '언약' 이라는 다리를 놓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언약의 다리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투입되는데, 그게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스라엘은 그런 원리원칙도 모르고 "우리 이스라엘은 살아있다" 라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는 죽고 없는 나라를 만드시는데,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있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렇게 살아있으니 율법대로 지키면 잘 될 것이라고 하는 착각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가만히 두겠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 만들기에 몰두하시는데, 그런데 정작 그들은 착각을 하고 있으니, 약속이 그들을 가만히 두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인민군이 남조선을 쳐들어오듯이 마구 밀려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와서 무엇을 하는고 하니, '살아있다' 라는 것을, '죽어 없다' 라는 것을 바꾸어버리는데, 그런 나라로 말이죠.


그것을 여기 교재 44페이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언약으로 통보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스라엘을 허무한 이스라엘로 만들어버립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예로서 '즐거운 우리집'을 들었는데, 어느 가정이든 자기 가정은 즐겁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


그런데 거기에 진짜 하나님이 찾아오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즐거운 우리집은 그만 날아가 버리고, 그 가정을 대신해야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가정을 대신함으로서, 그 가정을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복음이라는 겁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즐거운 우리집은 그만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가정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천국백성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자기의 행복을 위한 가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가정이라는 말이죠.


가정이 아닌, 천국 !!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아내들이여, 남들이여!" 라고 하는 말씀의 주제인데, 즉 "아내는 남편을 주께 하듯이 하고,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주님이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 하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가정이고 교회라는 말이죠.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러니 즐거운 우리집이라고 하는, 즉 자기의 살아있음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중심이라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이 이 세상에 투입한 약속에 의해서 새로운 가정이 형성되는데, 그러니 그 가정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천국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은 살기 좋다" 라는 것이 우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누가 계시는고 하니, 주님이 계시는데, 즉 아들이 계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을 무슨 나라라고 합니까? '아들의 나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또 늦게 오시는 분이 있으면 반복을 하는데, 그렇게 3번을 하면 기억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ㅋㅋ).


허무한 이스라엘 !!


여러분의 실력을 믿기에 진도를 나가겠는데, 여기 교재 44페이지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이 허무한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은 실제로 허무함을 통보를 받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날아가 버리고 마는데, 즉 멸망을 당하고 만다는 겁니다. 


** 예루살렘의 왕은 인간의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통보할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스라엘을 허무한 이스라엘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멸망을 했다는 것은, 그동안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는고 하니, 이스라엘의 역사를 믿었다는 겁니다.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간다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바로 이것을 믿다가 그만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역사를 믿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역사를 믿지 않으면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요? 사실 우리 인간은 역사가 아니면 믿을 것이 없는데 말이죠. 역사의 반대말을 '비역사' 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묵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역사는, 메모지에 한 낙서 !!


이 묵시는 하박국서에도 나오고 여러 곳에 나오는데, 역사의 의미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말이죠. "나는 젊었을 때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지금 이렇게 되었다" 라는 것 자체를 무시하는데,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는 '메모지에 한 낙서' 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것을 묵시의 바람에 날려보내면 된다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는 것을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메모지에 써서는 공중에 날려보내라는 겁니다. 다른 길은 없는데, 그게 최적이라는 말이죠. 누가 그렇게 하셨는고 하니, 자기를 구원하신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마치 축구선수가 공을 드리블을 하듯이,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역사가 아니라 우리는 옛날부터 묵시적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역사를 생각하지만, 주님은 묵시를 생각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역사를 자랑할래? 묵시를 자랑할래?" 라고 물으시는데, 즉 "니가 애써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할래? 아니면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할래?" 라고 물으신다는 말이죠. 


신앙에는 노력이 없어 !!


신앙에는 노력한다는 것이 없는데, 오히려 그 노력을 뺀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열심을 빼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의 열심을 빼면 선물이 되는데, 오늘 날씨가 참 좋은데, 이것이 바로 선물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좋은 날이 어제 열심히 기도한 덕분인가요? 전혀 아닌데, 물론 어제 기도할 수도 있는데, "주님, 내일 놀러갑니다. 좋은 날씨를 부탁합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오늘 아침에 낙서로 날려보내라는 겁니다.


그렇게 날리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어제 기도를 열심히 해서, 그 응답으로 이렇게 날씨가 좋다" 라고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결혼식에 가서 기도를 시키면, "오늘도 좋은 날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러면 저는 약간의 짜증이 난다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고 하면, 궂은 날이든 바람이 부는 날이든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떤 여자 골프선수는 그만 미세 먼지로 인해서 눈에 알레르기가 생겨서 그만 경기를 포기했다고 하는데, '리디아 고' 라고 세계랭킹 1위 선수인데 말이죠. 한국계 호주선수인데, 그 경기를 실컷 준비해서 그만 포기하게 되면 손해가 얼마나 되겠느냐는 겁니다.


역사와 묵시의 차이점 !!


그러면 이제 역사와 묵시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는데 말이죠. 어제 오전 시간에 "경험에서 관념이 생기는 이유는?" 라고 하면서, 여기서 관념은 정신세계를 의미하는데 말이죠.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여기에 '반성'이 들어가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어제는 짧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경험한 것이 반성이 적어지게 되면 정신세계에 깊숙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죠. 왜 이공계 출신들이 시건(철?)이 없는고 하니, 반성 부분이 없다는 겁니다. 벌써 욕을 하는 소리가 드리는데 말이죠(ㅋㅋ).


숙달하게 되면 반성이 필요치 않아 !!


예를 들어서, 과수원을 한다고 하면, 그러면 나무를 잘 심어서 퇴비를 주고 약을 치는 시기를 알아서 전염병을 예방하면서 키우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농기구를 잘 다루고 말이죠. 이것은 기술인데, 그러니 그다지 자기 반성이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자기가 다루는 것이 기계이기 때문에 말이죠. 흙과 나무와 기계와 상대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과계통은 어떠한고 하니, 즉 변호사나 행정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다룬다는 겁니다. 경영학의 핵심은 인사관리인데, 능력이 있는 사람을 얼마나 적재적소에 넣느냐는 말이죠. 반면에 현장에서는 기계를 만지고 물질적인 재료를 진다는 겁니다. 그런 재료는 관행과 관습을 몸에 익히면 되는데, 그것을 '숙달'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벼농사를 지어도 숙달된 농부와 농번기에 도와주려고 온 사위가 일을 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데, 그런데 한 번 숙달이 되면 자기 몸이 자동적으로 거기에 반응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성을 한다는 것, 즉 고쳐야 한다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죠.


그러니 몸에 숙달이 되면 관념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지를 못하는데,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기게만 다루면 된다는 겁니다. 의사도 그러하고, 과학자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로케트를 발사하고 해도, 그게 첨단과학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을 다루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을 다루게 되면 !!


그런데 사람을 다루게 되면 왜 반성이 되는고 하니, 자기만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도 역시 사람이고, 그래서 다들 자존심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존심과 자존심이 충돌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어느 정도는 양보를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양보한 만큼 반성이 된다는 말이죠. 즉 "이 세상은 내 고집대로 되지 않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장사를 하다가보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손님을 쥐어박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이 세상을 내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하면서 반성을 하게 되면, 그러면 정신적으로 마음을 낮출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해서,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람의 도리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랬던 그가 언제 결정적인 반성을 하게 됩니까? 누구를 만났을 때 말이죠. 예수님이라는 분을 만났을 때, 그러한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임을 말이죠. 그럴 때 사도바울은 묵시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논리가 갑자기 어려워졌는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원칙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 원칙을 우리가 알았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아하,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것이 하나님이니, 그러면 내가 나를 없게 하고 죽게 하면 되겠네" 라고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겁니다. 


'문'의 유혹 !!


불교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고통이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러니 불교는 인간의 욕심만 제거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욕심을 제거하려고 하니, 너무 많은 것이 것이 유혹이 되니, 그런 유혹거리가 없는 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산 속에는 해가 뜨지 않고 달이 뜨지 않습니까? 밤에 달만 봐도 그게 유혹인데, 서양에는 달의 신화가 많은데 말이죠.


군에 가면 밤에 보초를 서면서 달만 봐도 눈물이 나온다는 겁니다. "고향에 언제 가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가봐도 별 것이 없는데, 해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데, 눈이 부셔서 그런지 몰라도 말이죠. 그런데 달만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저 달을 어머니도 보고 계시겠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달이 반성을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마음을 낮추어도, 비록 지리산 골짜기에 가더라도, 여전히 자기를 죽은 존재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를 죽은 존재, 없는 존재로 하려고 하면, 자기 노력은 포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해보았자 그 의미를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노력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약속 안에 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으로 왔듯이 신약에서는 새언약으로 오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겁니다. 성령께서 십자가를 앞장세우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나는 여기에 있다. 이렇게 살아있다" 라고 우겨도,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없는 존재이고 죽은 존재가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생생하게 살아서 활동을 하고, 또 팔공산을 자기 집처럼 매일 같이 왔다갔다하더라도, 그러나 주님께서는 "죽은 존재가 등산은 잘하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비록 등산복을 차려입고 폼을 잡고 등산을 가더라도, 주님이 보시기에는 십자가 안에서 죽은 존재이고 없는 존재라는 말이죠. 주님께서 그렇게 간주를 해버리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약속 안에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 안 !!


몇 십년 전부터 서양에서 놀이기구를 만들었는데, 이렇게 동그란 튜브를 단단하게 만들어놓고, 그것을 타고 산에서 내려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모르는데, 왜 우리도 어릴 때 산에서 그런 경험들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때는 튜브도 없이 맨 몸으로 그렇게 하는데, 그래서 옷을 다 버려서 엄마에게 야단을 맞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그것을 놀이기구로 만들어서, 그 튜브 안에 있으면 그 안에서는 안전하게 옷도 버리지를 않고 재미있게 산을 내려오면서 놀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바로 신약에서 '예수 안' 이라고 하는데, 혹은 '성령 안'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또는 '그리스도 안'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서는 의인이 되고, 예수 안에서는 살았다는 말이죠.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 튜브를 뚫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는데, 즉 "너는 너 혼자야. 너의 곁에는 아무도 없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마귀는 예수만 없으면 되는데, 그래서 그 자리에 하나님을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기 이전에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 인간이 타고 났다는 말이죠. 유치원생들을 보고 기도를 하라고 하면 잘하는데,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신에게 대한 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속성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그러니 모든 인간은 어떻다는 겁니까? 그 명칭이 부처가 되던 브리만이 되던 간에, 전부가 다 절대적 신인데, 즉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악마가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집어넣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날아가는 역사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을 약속의 하나님으로 바꾸시는데, 그게 바로 약속이라는 브릿지인데 말이죠. 그 약속의 하나님이 성취된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가 있으면, 즉 튜브 안에 우리가 있으면, 여기에서 무엇이 날아갑니까? 그만 역사가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70까지 살았다고 하면, 그래서 "70까지 살았으니 그만 살겠습니까?" 라고 하면, 사람의 마음이 70이 아니라 80까지 살아도, 더 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70까지 산 것은 무효라는 겁니다. 이미 지나갔다는 말이죠. 70까지 살았을 때의 마음이나 12살 때의 마음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12살까지 살았으니 이제 그만 살아야지?" 라고 하면, "아저씨, 미쳤어요?" 라고 하는 것처럼, 70까지, 아니 80까지 살아도, 그런 소리를 하면 미쳤느냐고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말로는 "이제 기력도 떨어지고 앞도 잘 보이지 않고, 그만 살아야지" 라고 하지만 말이죠.


그런데 막상 집에 먹을거리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는 겁니다. "어머니, 90세까지 살았으니 많이 살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면, "그렇지. 내가 사는 것이 욕이다" 라고 하면서도, 쌀이 떨어지면 며느리를 욕하고 난리가 난다는 겁니다(ㅋㅋ). 전혀 앞뒤가 맞지 않다는 말이죠.


사람이 90까지 살았다고 해서 높은 곳에 가서 시원하게 뛰어내리지 않는데, 살려고 뒤로 물러선다는 겁니다. 말로는 무슨 소리든 다 할 수 있지만, 하지만 마음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산 것은 다 무효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아마 악마 안에서 묵시적 존재이기에 말이죠.


인간은 영적 존재 !!


그것을 두고서 "인간은 영적 존재다" 라고 하는데, 영이 좀 수상해서 그렇지만 말이죠.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그래서 가구점에 가서 침대를 보면 눕고 싶다는 겁니다. 사람은 외부의 반응에 끌리게 되어있지,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누가 시비를 걸면 짜증이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역사라는 허풍을, 그 잘못된 생각을 묵시로 바꾸어준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말이죠. 그 예가 어제 오후시간에 어떤 분이 질문했던 내용인데, 즉 "로마서 5장에 나오듯이, 죄가 아담 안에 들어와서 현재까지 이룬다" 라는 겁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 땅에서는 역사, 그 배후는 묵시 !!


다시 말해서, '역사' 라는 말이죠. 즉 "과거에서 현재까지 왕노릇을 한다" 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라고 하는데, 그것을 연결시켜보면 어떻게 됩니까? 제가 어제 답변을 하면서 예를 들었는데, 바늘에 실을 꿰어서 아담 안에 집어넣게 되면, 이 땅에서는 역사가 형성되지만, 그 배후는 묵시가 된다는 겁니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니 아담에게 죄를 집어넣어서, 그 아담의 모든 자손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끌고 오시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이죠. 바늘에 실을 꿰는 것이 끝이 아닌데, 바늘을 가지고 제대로 꿰매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바늘을 가지고 역사 전체를 관통하게 된다는 말이죠.


무엇이 말인가요? 예수님이 집어넣으신 죄가, 즉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신 그 상황이 역사를 관통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생성되고 이끌어져 왔는데, 즉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다 끓어 앉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심판주가 심판주가 되기 위해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몰려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묵시적 관점이라는 말이죠.


이미 형벌을 받고 있는 인간 !!


그래서 어제 낮 설교시간에, "모든 인간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미 형벌을 받고 있다" 라고 했는데, 인간은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유일하게 아시는 분이 예수님인데,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가 만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을 누가 알겠느냐는 겁니다.


인간에 있어서 죄라는 것을 누가 판단을 합니까? 우리 인간이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 "이것은 선이다. 악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즉 우리 인간이 판단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이죠. 묵시적인 안목에서는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경험에서 나온 것을 더 깊은 정신세계라고 했을 때 무엇이 이루어졌는고 하니, 그런 질문자체가 반성작업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반성이 없다고 하면, 더 깊이 우리에게 실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유구무언입니다 !!


제가 오후시간에 기도순서를 맡은 분에게, "오후에 기도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하니까, "제가 할 말이 무엇이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그만 정답을 이야기하더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인데 말이죠. 물론 우리는 유구무언인데, 그러니 기도를 할 때는 성경말씀을 가지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성경말씀대로 되게 해달라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인 동시에, 튜브 안에 있는 우리의 소원이기도 하다는 말이죠. 새로운 환경, 즉 묵시적 환경에서는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전환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주님의 원하시는 것이 성경전체의 내용이니, "좁은 길로 가게 해주세요" 라고 하던지, 차마 입은 떨어지지 않지만 그런 기도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솔로몬은, 예수님의 아바타 !!


이제 교재 45페이지를 보겠는데, 그러니 "이스라엘 왕이 허무케 했다"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솔로몬인데, 그 배후에는 누가 있다는 겁니까? 언약의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것을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솔로몬 왕의 개인적인 의견이 전혀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신 대로 이끄신다는 것이 내용 속에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솔로몬은 아바타인데, 시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말이죠. 솔로몬은 일종의 스피커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전도서라는 겁니다.


우리가 전도서를 보면서 솔로몬을 비난하면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 다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사도들도 마찬가지인데, 사도들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들도 스피커에 불과한데, 말씀은 주님이 하시는데 그들은 일종의 스피커라는 말이죠.


내가, 이 세상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 !!


그러므로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이 세상이 헛되다고 하는 그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반드시 헛된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 라고 하는, 그런 주님의 강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이 전도서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켜야하는 말씀이 아니라, "반드시 이렇게 된다" 라고 하는 정보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다는 겁니다. 즉 "어리석은 자나 뛰어난 지혜로운 자나 결국은 똑같다" 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똑같이 되도록 내가 만들고 말겠다" 라고 하시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서민들이 부자를 보고 "저런 사람의 가정은 참 행복할 것이다" 라고 여기는데, 물론 오해라는 말이죠. 마음을 낮추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면, 그러면 그 집안에는 행복이 오지 말라고 해도 들끓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마음을 높이게 되면, 일곱 귀신이 다 들어온다는 말이죠.


부부싸움은 언제 하는가?


언제 부부싸움을 합니까? 마음을 높이면 싸움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대 있으매 나는 행복합니다" 라고 한다면, 행복은 저절로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니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지?" 라고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집에 기본적인 것은 다 있는데, 냉장고가 있고 세탁기가 있고 TV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살려고 하면 그만 헤어지자" 라고 한다면, 그것은 둘이 다 높든지, 적어도 둘 중의 하나가 마음이 높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둘 다 마음을 높을 때는 그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는데, 아래층에서 와서 조용히 해달라고 문을 두드리게 되면, 그때는 둘이 적이 아니라 연합군이 되어서 "당신이 뭔데 우리 일을 간섭하지?" 라고 하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행복하다는 겁니다(ㅋㅋ).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방법인데, 즉 외부의 적인 악마가 찾아오도록 주님이 부추긴다는 말이죠. 내부에서 주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할 때는 외부적인 환경이 찾아와서 들쑤시게 되는데, 그렇게 마주치는 가운데, 자기의 처지가 예수 안에 처지임을 알게 되면서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것을 두고 '반성' 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마음은 경험에서 나오기에, 다 달라요 !!


어제 낮 설교를 하면서 질문을 두 개나 던졌는데, 처음에는 "모든 인간은 왜 자아가 모두 다른가? 왜 그렇게 다양한가?" 라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왜 자아 앞에 '나' 라는 것이, 즉 마음 앞에 '나' 라는 것이 붙어있는가?" 라는 것인데, 어제는 하다가보니 2번만 설명을 했는데 말이죠.


마음 앞에 '나' 라는 것이 붙어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이 그만 악마의 마음이 되어서 신처럼 되려고 하니, 그래서 '나' 라는 것이 붙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라는 것이 왜 다양한고 하니, 그것은 답변을 하지 않았지만 쉽다는 말이죠. 마음이란 것이 경험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살아온 경험이 다 다르기 때문에 마음도 역시 다르다는 겁니다.


총, 균, 쇠 !!


모두가 살아온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특히 문명이라는 것은 기후가 99퍼센트를 좌우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문명이 망하는 것도 기후 때문이라는 겁니다. '총, 균, 쇠' 라는 책을 보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죠. '재레드 다이아몬드' 라는 유명한 사람이 지었는데 말이죠. 멕시코의 그 아즈텍 문화가 멸망을 당한 것은 병균 때문이라고 하는데, 즉 전염병으로 말이죠. 그러니 기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야생 밀이 먹을 수 있는 밀이 되는 것도 기후 때문인데, 그리고 가축을 키울 수 있는 것도 역시 기후의 변화 때문이란 것이죠. 야생 말이 말이 되고, 야생 양이 양이 되고 하는 것도 역시 그렇고 말이죠. BC 5,000년경에 이런 현상들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에스키모 출신이라고 하면 에스키모처럼 마음이 느긋하다는 말이죠. 환경이 새로운 공간지각과 시간감각을 허용하는데, 에스키모인들은 느릿느릿하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삼성에서 에스키모들에게 냉장고를 팔아먹었다고 하는데, 아마 그들은 서랍장으로 사용했지 싶은데, 나름 편리하다는 겁니다(ㅋㅋ).


추운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간과 공간이 느리게 가는데, 그래서 옛날에는 유럽만 바쁘게 돌아간다는 겁니다. 기차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시간이 유럽의 각 나라마다 다들 다른데, 그런데 그 유럽 전체의 시간을 통일한 것은 기차시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것이 19세기 말 무렵의 일인데, 유럽은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면서 기술이 발달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기술이 그만 동양을 점령했다는 것이죠. 그러니 왜 동양이 서양에게 그만 잡아먹혔는고 하니, 시간과 공간의 과학적인 인식이 서양이 먼저 발달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에스키모들은 무엇입니까? 느린 곰탱이들인데, 특히 미국의 인디언들은 유럽에서 청교도들이 건너오니 어떻게 했는고 하니, 외부에서 손님들이 왔다고 하면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고 하다가 그만 다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남은 사람들은 인디안 보호구역에 갇혀서 대마초나 피우면서 살게 되었는데, 뉴질랜드의 원주민들도 그렇고 말이죠. 


왜 그렇게 되었는고 하니, 시간과 공간에 자기에게 맞는 시간과 공간으로, 그게 새로운 다양성 가운데 하나의 마음으로 굳혀졌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빨리, 빨리!" 라는 것인데, 그게 히딩크가 아는 유일한 한국말이라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그것이 이 땅에서 제법 산다는 사람들의 특징인데,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세월아, 네월아!" 라는 겁니다. 돈이고 뭐고 자기는 밥만 먹으면 되는데, 아쉬운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누가 더 행복한가?" 라는 문제가 아니고, 이쪽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죠.


제주도에 사는 해녀들과 사람들이 중국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이전까지는 행복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마구 몰려와서는 그만 다 버려놓았다는 겁니다. 땅값도 여기 저기 쑤시고 다녀서 마구 올려놓고 말이죠. 옛날의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인격이 다 다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사람의 인간성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 달라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이 그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형성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각자 사람 마음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문제를 삼으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어떻게 너의 마음인가?" 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그 마음을 '내 마음' 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언약적으로 시비를 거신다는 말이죠.


성령, 하나님의 깊은 마음 !!


무슨 말인고 하니까, "니가 느려터진 것도 좋아. 그리고 바쁜 것도 좋아. 그것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그 마음이 왜 주의 마음으로 전환되지 않았는가?" 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문제로 삼으신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두고서 성령이라고 하는데,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이죠.  


정말 그러한지 찾아보겠는데, 2장 10절과 11절입니다.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니 성령이 왔다는 것은 "아하,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었구나" 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데, 그 하나님의 마음이 8절에 보면 '십자가' 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속속들이 다 알았다는 말이죠.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그 십자가의 의미가 바로,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자이고 없는 존재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시는데, 그래야만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마음, 즉 없는 자를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데, 그런데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리고 예수님이 살아난 그 부활의 영에 의해서 함께 산 자들이 되어야 하는데, 그들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은혜로 주신 것들 !!


그러니 이것을 우리보고 하라고 하면 우리는 안 되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원칙이, 아까 이야기한 아브라함의 언약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바뀌어지는데, 그것을 여기 12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 즉 '하나님의 은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영은 악마의 영인데, 그러니 그런 악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영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행한 것을 자기가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선물로 공짜로 주신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것을 깨닫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


그게 바로 성도의 모습인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래서 여기 4절과 5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 전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데, 성령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말이죠.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예를 들어서, 무더운 날 택배기사가 물건을 가져다주면 정말로 고마운데, 그런데 그렇게 택배물건이 오기까지, 물론 택배기사가 고생한 것은 인정해주지만, 하지만 그게 그 택배기사의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그런 택배기사의 역할을 누가 했는고 하니, 사도가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도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계신다는 겁니다.


사도를 말로 보면, 성령은 말을 탄 기수가 되는데, 즉 "이랴, 가자. 오늘은 누구의 집에 가서 선물을 주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말로 사용하신다는 것이죠. 여기서 기수라고 하니까 또 최순실의 딸인 정유라가 생각나는데 말이죠(ㅋㅋ). 


주가 쓰시겠다 하라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이전에 나귀를 타셔야 하는데, 그래서 제자들이 나귀를 구하려고 하니,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다 준비를 해놓았다. 그러니 너희들은 가서 가지고 오면 된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만약에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 라고 하면, 즉시 보내준다는 말이죠.


(마 2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마 21: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마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것을 보고 소위 신학자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미리 예수님이 가계약을 했다는 겁니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데, 주님은 직접 돈 관리를 하지 않는데, 그런 것은 가룟 유다에게 맡겼다는 말이죠. 그런데 신학자들이 하는 말이, 제자들 몰래 미리 가서 돈을 주고는, "제자들이 오면 나귀를 주세요"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학자와 불신자는 동일한 단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여기 3절에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우리가 천당에 가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렇게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쓰려고 합니다!" 라고 하는, 이게 성도라는 말이죠. 주님은 기수이고 우리는 말인데, 즉 주도권이 주님에게 있는데, 그래서 '주' 라고 한다는 것이죠. 


만약에 이게 역사적 관점이라고 하면, "내가 이렇게 해서 이런 결과를 낳을 것이다" 라고 하겠지만,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 묵시적 관점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다 준비를 하셔서, 그렇게 타이밍을 맞추어서 주님이 불러서 사용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그 말이 맞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튜브 안에 놓여있는 인생이라는 말이죠.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어머니, 죄송합니다 !!


우리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니 어떤 손님이 오게 되면 주님이 보내셨다고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왔다가 삐치는 것도 역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고 말이죠. 어버이날에 어머니에게 간다고 약속을 해놓고, 그만 회사 일로 바빠서 가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주님이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어머니는 자식이 온다고 집안 청소까지 다 해놓았는데 말이죠.


그러니 모든 상황자체가, 그것이 옛날에는 자기의 시간과 공간개념이었다고 하면, 그러나 이제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은 주님을 위해서 쓰임을 당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말이죠. 돈이 좀 있는 사람은 슬슬 이민을 갈 준비를 하면 되는데, 물론 돈이 없으면 그냥 있고 말이죠.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만 남으면 된다는 겁니다. 마음도 맞지 않으면서 억지로 같이 살 필요가 없는데, 그러면 남아있는 사람들도 너무 좋고 말이죠. 


십자가 마을 수련회도 저기 멀리 제주도에서 했으면 좋겠는데, 억지로 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오고 싶은 사람만 오라는 겁니다. 그냥 열 명 정도만 모여서 조용하게 했으면 참 좋겠는데, 과거에는 수련회를 그 정도만 모여서 했다는 것이죠. 물론 그때는 목사님들만 모였는데 말이죠.


이것이 묵시인데, 이제 교재 45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잔잔한 호수 위에 독수리가 날아와서 물고기 하나를 채서 올라갑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만약에 독수리가 예수님이고 우리는 호수에 갇혀있는 물고기라면, 그것은 하나의 돌발 사건입니다.


독수리 날개 !!


이 독수리 이야기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왜 독수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희들은 애굽의 얽히고 얽힌 그 권세에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는 입장인데, 그것을 너희들은 결코 잊으면 안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용서하셨다고 하면 우리는 덜렁 어떻게 생각합니까? 유치원 아이들이 과자를 따먹듯이 그렇게 덜렁 먹으면 자기 소유가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독수리가 낚아챈다는 의미는 없어지는데, 자기가 잘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지금 독수리가 하늘을 날고 있고, 그리고 호수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히브리인들은 인간인고로 이 세상의 속에서 좋다고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살면서 힘이 들 때도 있지만, 달리 갈 곳도 없고 해서 그렇게 살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호수에서 살고 있는데, 독수리가 와서 날개로 업고 가지 않으면 약속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느냐는 겁니다. 물론 상상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물론 엉터리이지만 말이죠. 하지만 실제로 그 나라에 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아말렉과 전설의 고향 !!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업고 가면서 조용하게 가는 것이 아니라, 고생을 시키면서 데리고 가시는데, 그런데 그들을 따라오는 민족이 있었는데, 그들이 곧 '아말렉' 이라는 겁니다. 이 아말렉을 이해하려고 하면 먼저 '전설의 고향'을 알아야 하는데, 과거에 무서워하면서도 많이 보았는데 말이죠.


특히 그 드라마 중에서 "내 다리 내놔라" 라는 것이 있는데, 일명 '덕대골' 이야기인데 말이죠. 어느 아내가 신랑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고심을 하고 있는데, 마치 지나가던 중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공동묘지에 가서 방금 묻은 싱싱한 시체의 다리를 잘라서 삶아 먹으면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겁이 나지만 시키는 대로 해서 집으로 오는데, 그런데 그 시체가 따라오면서 "내 다리 내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그 아내는 그것을 뿌리치고 남편에게 삶아서 먹였는데, 그것이 하늘에서 내린 천년 묵은 동자삼이라는 것이죠. 요즘은 이런 아내를 구하기가 그 동자삼보다 더 어렵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내 다리 내놔라 !!


아말렉이 바로 애굽과 같은 속성인데, 약속의 땅에 가는데도, "어디로 가지? 내 다리를 내놔라" 라는 식이란 말이죠. "너희들이 감히 살던 동네를 떠나서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절대로 도망가지 못한다" 라고 하면서 따라온다는 겁니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우리를 평생 따라오는데, "내 다리를 내놔라" 라는 식으로 말이죠. 구약에서 아말렉 민족이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아말렉 민족과 싸울 때, 옛날에는 힘이 있어야 적을 격퇴할 수 있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아말렉이 따라왔을 때, 그것을 힘으로 이기려고 했다고 하면, 아직 약속의 땅의 의미를 모르는 과거의 사람인데,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말렉 민족을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지팡이로 이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과거의 전쟁방식으로는 약속의 땅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 교회와도 똑같다는 말이죠. 처음에 우리가 교회에 왔을 때는 기도를 해야 응답을 받고, 또한 열심히 바쳐야 그만큼 보상을 되는데, 그게 '애굽' 이라는 이 세상의 종교라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로 주님이 찾아오셔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만 기억하면 된다는 말이죠. 자기 행함이 아닌 주님의 행하심 문제인데, 그것으로 구원의 힘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완전히 '꽝' 이라는 말이죠.


자기의 경건, 자기의 열심, 자기의 노력 등등, 이런 것들은 일체 자기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미래만이 자기의 미래를 보장해주는데,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시간이 자기의 미래를 보장해준다는 말이죠. 그것을 조금 이전에 이야기한 '묵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시간에는 자기 노력이 들어가기에 이것은 역사가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런데 구원을 받는 사람은 역사는 포기하고 묵시로 가게 되는데, 하지만 역사도 살아서 계속해서 따라온다는 겁니다. "옛날에 니가 신앙생활을 잘했잖아. 기도생활을 그렇게 열심히 했잖아. 입만 벌리면 두 시간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왜 아무런 할 말이 없다고 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계속해서 시체가 "내 다리를 내놔라" 라고 하는 식으로 따라오는데, 그러면 계속해서 도망을 쳐야 합니까? 아니면 싸워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싸우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성령이 오게 되면 마귀에 속한 종교인들과 성령에 속한 성도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미처 구별이 되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이미 구원을 받은 쪽과, 구원을 받으려고 안달이 난 쪽과는 서로 게임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이미 전쟁이 끝나서 구원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말이죠. 이미 이 쪽은 결승선을 넘어섰는데, 그러니 게임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작과 끝 !!


이것을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는데, 그것을 '시작과 끝'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강의 제목으로 하면 좋겠는데 말이죠. 끝을 다른 말로 하면 종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끝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여기 중간에 놓여있기 때문에, 끝이라는 것은 가봐야 안다는 겁니다.


알다시피 우리 인간은 기껏해야 백살인데, 그러니 그 뒤의 모습은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다는 말이죠. 물론 후손들이 알겠지만, 하지만 그 후손들도 백살을 살고 죽으면 역시나 그 뒤는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끝은 어떻게 결정이 되는고 하니, 우리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마무리를 지을 분이 오시면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오시면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언제 오셨습니까?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이 오셨는데, 즉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죠. 그것이 종말인데, 그런 종말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 있는데, 즉 '심판완료' 라는 겁니다. 혹은 분류완료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을 심판으로 결정을 내린다는 말이죠.


심판완료 !!


예수님이 성전에 계시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너는 의롭다" 라고 하시면서 판결을 내리셨는데, 그러니 그 사람에게는 이미 심판이 완료가 되었는데, 시험에 합격을 했다는 겁니다. 이미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통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을 보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말이죠. 용서를 받았으면 이미 합격이라는 겁니다.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수시모집 !!


이것을 두고서 '수시모집' 이라고 하는데, 갑자기 이것으로 강의제목을 바꾸고 싶은데 말이죠. 그렇게 수시모집이 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해야하는고 하니까, "이 바보들아, 이미 세상을 끝났어.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고 계시는데, 그러면 이미 끝이야!" 라고, 그러한 말을 이 세상을 향해서 마치 싸움을 하듯이 전파해야 하는데, 그게 곧 전도라는 겁니다. 


그러니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붙여주시는데, 사회생활을 하다가보면 종교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특히 교회 이야기가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웃는데, 저쪽에서 이야기하기 전에는 미리 이야기하지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하면, 그러면 찬스가 왔다는 말이죠.


어제 오후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주님께서는 은혜를 입을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는 베푸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완벽하게 모두 알아서 하시는데, 그것으로 '끝!' 이라는 말이죠. 그게 바로 종말이라는 것이죠.


이 종말은 묵시적 개념이기에, 시간이 지체되고 말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어차피 '나' 라는 인간도 60세에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 이상을 더 산다고 해서, 백살을 산다고 해도, 그것은 전도할 기회를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시간을 연장시켰다는 말이죠. 


보자, 보자, 어디 보자 !!


이미 끝났는데, 그러면 성도는 무엇을 하면 되는고 하니, 그 사람 꼬시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붙여주시면 "보자, 보자, 이 사람이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인가 보자" 라고 하면 되는데, 물론 마음속으로 말이죠(ㅋㅋ). 그렇게 해서 서로 통하게 되면, "어머나, 웬일이야? 나와 같이 기적을 받은 사람도 있네" 라고 하면서 주님께 감사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돌아서면 되고 말이죠.


어차피 사도바울도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즉 주님께서 자기처럼 구원을 시킨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라는 말이죠. 그러니 전도는 주님이 하시고 우리는 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저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닐까?" 라고 하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그러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라는 것이죠.


잔잔한 호숫가에 독수리가 와서 물고기를 낚아챈다는 것이 그런 의미인데, 물고기는 물을 벗어날 수 없는데, 왜냐하 그러면 죽으니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죽은 자는 낚아채어서 살리시고, 없는 자를 있게 하신다는 겁니다. 천국에 말이죠. 그게 바로 '사건' 이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 4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그런데 잠시 후 그 호숫가에 큰 나무가 하나 있고, 그 밑에 30대로 보이는 여인이 시체로 발견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면, 호수에서 물고기가 독수리에 잡혀버린 그 사건은 묻히게 마련입니다.


여기에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독수리가 물고기를 낚아챈 사건이 큰 사건입니까? 여인이 죽은 것이 큰 사건입니까? 정답은 둘 중이 하나인데 말이죠. 물고기를 낚아챈 것이 더 큰 사건인데,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찬송을 하다가도, 갑자기 자기 집에 보일러가 터졌다고 하면, 그게 더 큰 사건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언제나 중요한 사건이지만,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것이 그만 습관화가 되어서 그다지 십자가가 좋아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살아가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에 되어있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것이 서러운데, 우리 자신의 구원이 사람들에게는 이슈가 되지 못하는 것이 말이죠.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고 해도,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러 가고 만다는 겁니다. 각자가 자기의 살 궁리를 찾아서 말이죠.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도 해도 믿지를 않았는데,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체가 없다고 해도,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갔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보니 거기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것이죠. "내가 여기에 있잖아"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엄연한 실제상황 !!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의 무덤에서만 있었던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이게 실제상황입니까? 주님의 살아계신 것이 말이죠. 엄연히 실제상황인데, 그러면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중요합니까? 주님이 살아계신 것이 중요합니까? 주님이 중요한데,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기도는 어떻게 해야하고, 헌금은 어떻게 해야하고, 일주일에 교회에는 몇 번을 나가야하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주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면, 교회가 가게 해주시고 헌금을 하게 해주시고 기도하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도권이 주님에게 있는데, 그래서 마치 기수가 말을 다루듯이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인데,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어떤 상황도 주님의 허가가 없이는 되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물결이라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 4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젊었을 때 그토록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는 나중에 자기 개인사업을 하면, 그 사람의 입에서는 자기 업체선전만 튀어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그토록 감사하고 감격한 목사가 개척교회를 하면, 그동안 자기 교회를 다녀간 교인들과 다니는 교인들의 인적관리에 몰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허무의 커튼에 그려진 "Y=X" 라는 그래프는 천이 찢어지면서 더불어 헛되이 찢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허무의 커튼에 그려진 'Y=X' !!


여기서 "Y=X" 라는 그래프 이야기가 왜 나오는고 하니, 그 앞에 이런 수학공식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잠시 이야기해보면, "Y=X" 라는 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X에 1을 더하면 Y도 1이 된다" 라는 것이죠. X에 2를 더하면 Y도 2가 되고 말이죠.


이런 원리를 따르는 일률적 사항의 모음, 그것이 바로 "Y=X" 라는 말이죠. X가 100이라면 Y도 100이 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이만큼 원인으로 투입하게 되면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 "Y=X" 라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생이라는 내려진 커튼에 "Y=X" 라는 사고방식으로 50년, 60년, 혹은 70년을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커튼이 어떻게 됩니까? 그만 찢어지고 마는데, 그러면 우리 인생도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Y=X" 라고 하는 인생여정도 그만 같이 찢어지고 마는데, 그것을 전도서에는 '허무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커튼에 그려진 "Y=X" 라는 인생이 사라지고 마는데, 이 커튼의 우리의 일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기를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죠. 그런 자기의 일기장이 묵시세계 앞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허무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허무하다는 것을 아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허무해서 행복해요!"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가훈은 이미 정해졌는데, '허무하자!' 라고 말이죠.


그 허무에 자기 자신이 끼어들어야 하는데, 환경만 허무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허무해져야 한다는 겁니다. 어디서 허무합니까? 천국입니까? 애굽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 허무해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서 허무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사서 고생을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허무해지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르는데, 그 모든 것들이 다 헛되고 헛되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알아서 그렇게 인도를 하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 노력으로 이렇게 왔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Y=X" 라는 그래프의 사고방식이라는 말이죠.


이렇게 하다가도 내일이 되면 "그래도 내가 이렇게 콩나물이라도 무치고 하니 밥이라도 먹는 것이지, 이것도 없으면 어떻게 밥을 먹겠노?" 라고 하지 말고, "주님께서 콩나물을 팍팍 무치게 해주셨구나"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사랑이 가득 담긴 콩나물을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랑이 어디서 오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사랑인데, 아내의 경우에는 그게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예쁜 여자를 보고 따라가고 싶고, 멋있는 남자를 보면 따라가고 싶다" 라고 말이죠. 그게 설교시간에 해도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렇게 따라가서 결혼을 했다고 하면, 예쁘고 멋진 모습은 그대로인데, 그런데 왜 결혼만 하면 그런 마음이 없어지고 마느냐는 겁니다. 왜 그 얼굴이 그 얼굴이냐는 말이죠.


그것은 그런 허무 속에서 자기가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어설픈지, 그것을 결혼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몰랐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낮추어지면서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왕은 그 성전을 유지해야 되는 책임을 지닙니다. 성전은 '주의 이름'이 계시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예루살렘 성전' !!


여기에 보면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비록 이 세상은 허무하지만 예루살렘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허무에서 탈출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이 일종의 탈출기지라는 말이죠.


그것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는데, 이스라엘에게만 예루살렘 성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이 예루살렘 성전은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한 한 성이라고 하는데, 즉 하늘에 예루살렘 성이 마련되어있다는 겁니다.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 21장에도 보면 그 성이 나오는데 말이죠. 성도가 휴거를 당하면 어디로 갑니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늘에 있는 성이 내려온다고 하는데, 기존의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내려온다는 말이죠.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교회' 라는 집단구원 !!


여기 12절에서 '새 예루살렘'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개인구원이 아니라 집단구원이란 겁니다. 예루살렘 성 자체가 집합체라는 말이죠. 이것을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해도 잘 이해를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여기 요한계시록 21장을 생각하면 된다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이 집단이기 때문에, 그래서 개인의 노력으로는 자기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예루살렘 성의 주인이 있을 것이란 말이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우리의 신랑이죠. 그래서 우리는 신랑의 이름으로 단체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의미를 꽉꽉 채워야 하는데, 주님하고 개인적으로 상대하려고 하지 말고 말이죠. 단체로 구원을 받도록 조치하신 예수님께서, 즉 예수님께서는 단체로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단체에 끼어들었다고 하는 조건하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 단체를 두 글자로 '교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에 다니면서도 정작 교회가 무엇인지 오락가락합니다. 이제부터는 단체개념으로서의 교회개념을 깔끔하게 정리하게 해주시고, 그렇게 주님이 불러주신 무리가 바로 교회이기에, 교회에서는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을 자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5,17 오전11시에 마침.
                                                         개인구원이 아닌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