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12-하나님의 내막 1706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6. 21. 16:28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2 - 하나님의 내막


                                                             07,05,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4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사람들이 자신들을 아들로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당연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이 오해로 인하여 참된 아들과 거짓된 아들인 이스라엘은 충돌을 야기하게 됩니다.


여기에 보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는데, 즉 "사람들이 자식을 낳고, 그래서 아버지가 그 자식을 보고 아들이라고 여기는 것을 두고 큰 오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과연 그것이 큰 오해인가요?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혈육적인 관계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여기는 것, 즉 "이렇게 내가 낳은 자식이 있으니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된다" 라는 것을 잘못된 생각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그것이 당연한데,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그 이유가 그 뒤에 나오는데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낯선 언약의 주입은 인간사회에서 말하는, 흔히 그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을 절단시킨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아버지가 있으면 아들을 낳게 되고, 그 낳은 남자의 자식이 곧 아들일 것이라는 오해를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단절을 시켜버립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오직 '언약'을 통해서만 !!


여기에 보면 "그 낳은 남자의 자식이 곧 아들일 것이라는 오해를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단절을 시켜버립니다" 라고 하는데, 이렇게 '언약'이 개입하게 되는데, 즉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오직 언약을 통해서만 성립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이 빠져버리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그만 단절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스마엘은 아들이 아닌데,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아들은 이삭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식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있어야 하기에 말이죠. 그런데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다는 것이죠.


그렇게 언약을 집어넣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모든 창조에 있어서 창조를 창조가 되게 했던 원리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 원리도 모르는 채로 인간들끼리 모여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내가 낳았으니 내 자식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것이 도대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만든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여긴다면, 여기에는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요소가 그만 빠져있다는 말이죠.


여기는 내 집이야 !!


예를 들어서, 술을 잔뜩 마시고 잤는데 그만 깨어보니 남의 집이라고 하면, 그런데 그 남의 집이 눈에 보이니 그것을 자기 집이라고 여기겠다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분명하게 남의 집인데, 그런데 자기가 잠을 잤다는 이유로 자기 집이라고 우기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죠.


그래서 집주인이 와서 나가라고 하면 당연히 나가야만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곳에서 60년, 80년을 살았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60년, 80년을 살면 그곳이 어디 자기 집이 되는 겁니까? 성경에서 우리는 나그네라고 하는데, 즉 떠나는 존재라는 말이죠. 


아니 60년이나 80년을 살았으면 해와 달을 자기가 만든 겁니까? 공중의 새와 들의 풀을 자기가 만들었습니까? 자기가 사는 곳의 인테리어를 자기가 했느냐는 것이죠. 그러면 자기 것이 되는 겁니까? "밤은 너무 어두우니 달을 만들어서 하늘에 달아볼까?" 라고, 그렇게 해서 자기가 만들고 했다면 자기 세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죠. 


이 세상은 내 꺼야 !!


그런데 인간은 해와 달을 자기가 만든 것이 전혀 아닌데, 바다에 있는 물고기 한 마리조차도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이 세상을 누구의 세상이라고 합니까? 우리는 우연히 나타났다가 때가 되면 사라지면 그만인 존재인데, 그런데도 이 세상을 자기 세상이라고 여기고 자부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이런 철이 없는 짓은 아이를 키워보면 아는데, 아이를 엄마가 키우는데, 그런데 아이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아이들의 마음 씀씀이가 그렇게 돌아간다는 말이죠. 밥도 주어야하고, 잠도 재워주어야 한다고 말이죠.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버릇이 어릴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한데, 하나님은 당연히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하고, 또한 당연히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 인간들이 되지도 않은 고집을 부린다는 겁니다.


형제는 '싸움'의 관계 !!


예를 들어서, 형제가 10명이라고 하면, 그게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인데 말이죠. 물론 요즘은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렇게 부모의 혜택을 입었다는 겁니다. 혼자는 그런 것이 없는데, 형제가 있으면 서로 견제를 한다는 것이죠. 즉 "아버지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가? 저 동생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형제라는 것은 성경에 보면 그 특징이 나오는데, 그게 곧 '싸움' 이라는 겁니다. 이제부터 어려지기 시작하는데 말이죠. 조금 전에 "자식이 있어도 언약이 빠진 자식은 자식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언약이 들어있는 자식은 어떤 식으로 그것을 알게 됩니까? 형제를 통해서 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형제를 통해서 압니까? 형제간은 싸움의 관계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그 싸움을 통해서 무엇이 나옵니까? 언약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 언약은 창조의 기원, 혹은 원초라고 할 수가 있는데, 해와 달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데, 목성도 그렇고 말이죠. 미국의 나사에서 우주선을 타고 거기에 간다고 해서, 그것을 우리 인간들이 만든 게 아니라는 말이죠. 이미 만들어진 것에 간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멀어지면 성도가 아니다 !!


이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것 외에 그것이 왜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즉 원천을 모른다는 말이죠.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고 있는데, 우리가 왜 봅니까? 이것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만약에 성경을 사람이 썼다고 하면 우리가 볼 필요가 없는데, 우리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원천에서 온 것인데, 우리 삶의 토대에서 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누누이 강조했는데, "성경에서 멀어지면 성도가 아니다" 라고 말이죠.


너희는 낚시에 걸린 물고기야 !!


예를 들어서, 낚시에 걸린 고기라고 하면 그 고기는 계속해서 바다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낚시군에 의해서 그쪽으로 당겨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낚시로 걸었다고 하면,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어디로 당겨지게 됩니까? 말씀에 이끌려서, 즉 말씀을 주신 창조주에게 이끌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엉덩이가 무거운지 모르는데, 보통 사이즈의 엉덩이가 아닌데, 꼼짝도 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ㅋㅋ). 우리는 끌려가야 하는데,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는 말이죠. 오히려 무엇이라고 합니까? "당신이 이리로 오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낚시에 걸렸으면 자기 자리를 떠나야 하는데, 어차피 이 세상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우리는 잠시 지금 이곳에 태어났는데, 그러면 머무를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낚시에 걸려서 당겨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게 이사야서 40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6절에서 8절입니다.


(사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사 40: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모든 육체는 풀이요 !!


여기 6절에 보면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라고 하는데, 물론 우리는 풀과 인간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그러나 성경은 "까불지마. 인간은 풀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김풀, 박풀, 이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아름다운 인간이라도 그게 들의 꽃과 같다고 하는데, 그리고 그것은 그냥 피어난 것이 아니라 풀에서 피어난 꽃이라는 겁니다. 또한 7절에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라고 하는데, 참으로 멋있는 시라는 말이죠. 아무리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해도, 그런 윤동주나 서정주의 시는 여기에 비교할 바가 못된다는 겁니다.


참된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은 성경말씀뿐인데, 이것이 우리의 목에 걸리고 영혼에 걸려서 우리는 잡아당겨지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바로 그것을 확인하는데, "나는 이 세상 인구가 70억인 줄 알았는데, 풀도 70포기가 있구나" 라고 말이죠.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라서 대단한 줄 알았는데, 덩치가 큰 풀이구나. 문재인이 대통령도 역시 풀이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들풀로 왔다가 그냥 들풀로 되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풀이 다시 풀로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인데, 즉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딸이 외손녀를 데리고 오면 졸지에 외할아버지가 되어서 같이 놀아주다가 그만 파김치가 되고 마는데, 아니 시들어버린 들풀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ㅋㅋ).


그리고 8절에 보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라고 하는데, 굳이 외손녀가 오지 않아도 결국은시들고 만다는 말이죠. 그런데 무엇만은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라고 하는데, 말씀은 결코 시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는 것이죠.


오늘 강의에는 원년멤버가 다 왔다고 여겼는데, 우리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 사람이 아무리 90 평생을 살아도,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것이 아무리 궁금해도, 말씀이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 궁금해해야 한다는 말이죠.


진짜 아들은 예수님뿐 !!


그러면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진짜 아들은 예수님뿐이라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예수님 중심인데,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이 모든 것은 바로 그것으로 인해서 파생된 것이라는 말이죠. 주일날에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보고 듣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끌려가는 인생인데, 지금 천사가 낚시대의 릴을 열심히 돌리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게 합니까? 자기 인생이라고 여기니, 그래서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붙잡고 버티려고 한다는 겁니다.


소유는, 처분 가능성 !!


이러한 '소유'를 두고 '처분 가능성'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냥 "가지고 있다" 라는 의미에서 더 나아갔다는 것이죠.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따라서 자기가 처분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 목숨, 자기 생명, 그렇게 자기 소유가 되어버리면, 그만 자살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자살 가능성이 무엇입니까? "내 목숨 내가 처분하겠다" 라는 것이죠. 그러나 풀이 꽃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데, 말씀이 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풀이든 꽃이든 다 말씀에 운명이 묶여있는데, 즉 말씀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너는 내 아들이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인간 창조의 원천을 경유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창조의 원천을 말이죠. 자기가 낳았다고 해서 자기 아들이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원천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그만 자기 소유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 소유가 되면서 처분 가능성을 자기가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식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식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만 자식에게 닦달을 낸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식을 힘들게 한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언약을 아는 자식이라면 다음과 같이 나와야 하는데, 즉 "아버지가 언약 안에 사신다고 하신다면, 저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으로, 즉 원천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아버지에게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말이죠.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이것이 바로 십계명의 5계명인데, 즉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냥 부모라고 하면 공경할 이유가 없는데, 중요한 것은 "부모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가?" 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이 담겨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그 언약은 어디서 배웁니까?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스라엘의 가장들은 일년에 3차례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데, 가서는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해서 배운다는 겁니다. 즉 언약 세미나에 참석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사장들은 어떻게 압니까? 이스라엘에게 과거부터 줄곧 내려왔던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가 있는데, 제사장들은 거기에 전문가가 되어서, 계속해서 그것을 전수하고 또한 전수를 받는다는 겁니다. 선지자도 그렇고 말이죠


성경에서 '장로' 라고 하는 것은, 그 지역에서 언약을 전수를 받는 자들인데, 그러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 받는고 하니, 그것을 일종의 판소리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옛날에는 글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즉 소리로 남긴다는 겁니다. 그것을 구전(口傳)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우리 집안은 보통 집안이 아니다 !!


우리나라에서 판소리가 민중들에게 지속되었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문자보다도 듣는 것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죠. 저도 어릴 때에 이씨 집안에 대해서 배웠는데, 그것을 할아버지가 책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말로서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이씨 산수공파는 보통 집안이 아니다"  라고 하시면서 시작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성경말씀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성경을 전혀 모르니 자기 자존심밖에 없는데, 그게 가문의 자존심으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죽을 때까지 자기 자존심으로 살아가는데, 그것이 바로 끝까지 자기 소유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원천을 모르면 그렇게 되는데, 물론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을 허락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지만 말이죠.


언약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언약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안 되고, "언약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라고 해야하는데, 언약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는 무엇을 입어야 합니까? 옛날에는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있는 언약을 믿도록 되어있는데,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믿었습니까? 전혀 믿지를 못했는데, 자기들이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있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을까요? 언약이 스스로 사태와 사건을 유발시켰다는 겁니다. 즉 주님께서 동행을 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그들 속에 언약을 집어넣어 주셨다는 말이죠.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것, 무사 안일한 것, 그리고 조용히 탈도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을 언약에서는 두 글자로 '저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인간은 왜 평화를 원하는가?


옛날의 역사를 보게 되면 사람들이 평화를 갈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는 것은 본능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의문점을 가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 평화를 원합니까?" 라는 질문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조용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지, 전쟁이 나고 난리가 나는 것이 뭐가 좋으냐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해보니, 인간들이 평화를 원하는 이유가 다 따로 있더라는 말이죠. 역사적으로 평화로울 때 무역을 하는데 있어서 유리하다고 하는, 즉 평화로울 때 장사가 잘 되더라는 겁니다. 반면에 농사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지어도 별로 수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겨우 먹고 살아가는 정도라는 겁니다.


요즘과 같이 가뭄이라도 들던지 하면 큰일이라는 말이죠. 얼마 전에는 그만 커다란 우박이 떨어져서 서산에 사시는 분은 3년 농사를 다 버려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농사를 짓는 사람은 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데, "올해 농사가 잘 되게 해주세요" 라고 하면서 빌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떠돌아다니는데, 그러니 이럴 때는 국가간에 서로 전쟁이 없고 평화로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각자의 서로 영토개념이 없기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고, 그러면 많은 수익을 남길 수가 있다는 것이죠. 평화로울 때 그렇다는 말이죠.


잠시 현대사를 !!


여기서 평화로운 것과 평화를 원하는 것은 다른데, 평화로운 것은 그냥 평화로운 것이고, 그런데 평화를 원하는 것은 주로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고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들이 세계평화를 원했는데, 결국 그들이 승리했다는 말이죠. 무역을 하는 자들이 농사를 짓는 자들을 이겼는데, 여기서 무역은 서양이고 농사는 동양이라는 겁니다. 즉 서양이 동양을 접수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현재 우리나라의 인구가 도시가 많습니까? 농촌이 많습니까? 당연히 도시의 인구가 많은데,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고 장사를 하지만 농촌에서는 농사를 짓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근대화라고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장사를 하는 도시로 집중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어떻게 보면 당연한 현상이라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그러했고, 물론 지금도 그러하지만, 이런 것은 주로 후진국에서 일어나는데, 도시집중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지중해에 있는 아프리카의 카이로는 인구가 무려 1,600만이 넘는다고 하는데, 베이루트와 아테네는 각각 400만이 넘고 말이죠. 그리고 프랑스의 남부도시는 300만이라고 하는데, 프랑스는 출산율이 그렇게 높지를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구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농사를 짓는 시대가 아니라 장사를 하는 시대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이 평화롭다는 것이죠.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평화를 얻기 위해서 전쟁도 불사하게 되는데, 장사를 하기 위해서 벌이는 전쟁, 이렇게 현대사를 정리하면 된다는 겁니다. 장사하기에 좋은 것이 곧 현대사인데, 그게 농사를 짓는 것보다 수익이 좋다는 말이죠.


그런데 옛날의 전쟁은 무역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장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서 잠시 벌이는 것인데, 소금이나 철을 얻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계 17: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계 17: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계 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계 17:18) 또 내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왜 북쪽 이스라엘이 먼저 망했는가?


그리고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졌을 때, 어느 나라가 먼저 망했습니까? 북쪽 이스라엘이 먼저 망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북쪽 이스라엘이 농사짓는 것을, 즉 목축하는 것을 포기하고 장사를 하는 쪽으로 머리를 굴렸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그랬을까요? 그 북쪽 이스라엘이 있는 주변의 나라들이 다들 잘 살았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니까, 무역을 해서 잘 살았다는 말이죠. 그것을 알고서 이사야 선지자는 말렸는데, "무역을 해서 잘 사는 인간들은 마음이 교만해서 그것이 하늘에 미친다. 그러니 그렇게 살면 망한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즉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사 47: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사 47:11)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라


미가 선지자도 역시 그러한데, 북쪽을 담당하는 선지자들은 무역에 대한 위험성을 언급한다는 말이죠. 무역은 무엇인고 하니, 주신 땅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으로 보다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이 지적하고 있다는 말이죠. 


지금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가 다 장사를 하고 있는데, 그러니 농사를 짓는 것조차도 그냥 농사가 아니라 사업이라는 겁니다. 텃밭을 가꾸는 수준이 아니라는 말이죠.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귀농을 해서 무엇을 합니까? 그냥 고구마를 심고 감자를 심는 것이 아닌데, 몇 억씩 투자를 해서 모두들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처분 가능성'과 '창조의 원천' !!


따라서 전 세계의 모든 것은 '처분 가능성' 인데, 어떤 경우에 그렇게 됩니까? 자기 소유일 때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처분 가능성과 무엇이 대비가 됩니까? 그것은 곧 창조의 원천인데, 즉 처분 가능성은 인간위주이고, 창조의 원천은 언약위주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 언약은 무엇입니까? 아니 언약은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지목하고 있는데, 즉 "예수님만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아버지는 누구이다. 나는 누구누구의 아들이다" 라고, 그렇게 우기면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언약을 믿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전혀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행을 하시면서 그때그때마다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을 믿는 자들이 생겨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사건 중에서 마지막을 알리는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와 재림 !!


그렇다면 이 십자가 사건과 역사 속에서 일어난 획기적인 사건인 재림, 그렇게 십자가와 재림이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하면, 더 이상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주는 사건은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다시 오겠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제자들은 마치 닭 쫓던 개처럼 "우리를 이렇게 남겨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걱정하지 마라. 십자가와 재림 사건 사이에 성령이 오시는데, 내가 재림할 때까지 성령이 너희들을 붙잡아 주신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원천, 즉 언약과 관련된 것인데, 이게 내용이 만만치 않지만 언약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극복해야한다는 말이죠.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언약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언약을 아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언약사건을 우리에게 주입을 시키면 비로소 알게 된다. 그렇다면 마지막 언약사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 사건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알다시피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죽는 사건인데,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자격으로 죽으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누가 죽였습니까?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아들이 두 종류가 되었는데,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긴다는 말이죠. 같은 하나님인데 자식이 둘이 되고 말았다는 말이죠. 


아까 언약은 어디서 생긴다고 했습니까? 형제간의 다툼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했는데, 가인과 아벨이 그러하고, 에서와 야곱이 그렇다는 겁니다. 아버지에게서 같이 태어났는데, 그런데 그만 싸움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싸움이 일어나야 분류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그러면 그 창조된 것이 아들입니까?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만들어놓고, 진짜 아들과 마귀의 자식을 구분하신다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구분하시듯이 말이죠. 그러니 한 쪽은 언약을 알고 한 쪽은 언약을 모르는데, 물론 처음에는 둘 다 언약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이 될 자에게는 언약을 가르쳐주신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가르쳐주지 않는데, 아무리 귀가 달려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보는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어야 하는데, 그들에게 그런 눈과 귀는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언약을 이야기해봐야 세밀한 잡음과 소음 사이에서 다 묻히고 만다는 말이죠.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낙담을 하는데, 지레짐작으로 포기를 하고 만다는 겁니다. 명절 때 이야기를 해봐야 본전도 찾지를 못하니, 그 다음부터는 입을 다물고 만다는 것이죠. "오랜만에 모였는데, 분위기 깨지 마라. 우리 고스톱이나 치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위로하는데,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만약에 성경을 보지 않는다면 !!


그러니 성경을 보지 않게 되면 우리가 너무나 유별나다는 느낌을 받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드는데, 하지만 평범한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저주라는 겁니다. 그런데 남들이 우리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고, 또한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자제를 한다는 말이죠.


여기에는 복음을 아는 목사라도 예외가 아닌데, 물론 사모가 많이 주입을 시킨다는 겁니다. "당신이 아니면 어디 천국에 일할 사람이 없어요? 왜 당신만이 그렇게 설칩니까? 그냥 노후대책이나 세우고 자식들이나 잘 키우면서 삽시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사모도 있고, 돌려서 부드럽게 말하는 사모도 있다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조용하게 살다가 나이 70이 되면 은퇴하면 된다고 하는데, 아니 성경에 70이 되면 은퇴하라는 것이 나옵니까? 그런 것이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170까지라도 하고 싶은데 말이죠. 아무튼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설치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물론 성경을 보지 않으면 이러한 말이 맞는데,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에서와 야곱이 싸우고, 또한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서 죽고, 그리고 사도바울은 매일같이 죽는다고 하고,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괜히 성경을 보았는데, 성경을 보지 않으면 조용하게 살 것인데, 그런데 성경을 보니 자기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 그만 티가 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성도는, 마우스 인생 !!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성경을 보고 열심을 내자" 라고 하면 가짜라는 겁니다. 조금 전에 이야기를 했는데, 언약이라는 것은 언약의 힘으로 하는 것이지, 자기가 정신을 차려서 성경을 본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합니까? "제발 좀 나대지 마시고, 평소에 하던 대로 사세요" 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교회 교인들이 너무나도 말을 잘 듣는데 말이죠(ㅋㅋ).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한데, 즉 "그러나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특별한 일을 일으키실 겁니다" 라는 겁니다. 때가 되면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전도하고,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데리고 사시는데, 지난 주일에 그런 사람을 '마우스' 라고 했는데 말이죠. 미키마우스가 아니고, 컴퓨터의 마우스라는 겁니다. 즉 주님이 자기 마음대로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이 자기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야 전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나는 이것을 안다. 나처럼 믿어라" 라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은 자기 명령에 따르는 자기 부하를 만드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살아계시니 주님이 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언약의 특이성인데, 그것을 지금부터 해보자는 겁니다.


언약의 특이성 !!


지금 제가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십자가로 끝을 내야하는데, 그런데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고 승천이 있고 재림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십자가로 다 끝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겁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면 십자가만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 남아있다고 하면, 그러면 일이 다 마무리가 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무려 4가지나 믿어야 하는데, 십자가를 믿고,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균형을 맞추기가 매우 힘들지 싶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부활과 승천과 재림도 있는데, 왜 십자가만 강조하는가?


아마 여러분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지 싶은데, 즉 "십자가 마을을 왜 십자가만 이야기하고 부활은 이야기하지 않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성경에는 십자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도 있는데, 그런데 왜 십자가만을 강조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신천지나 조용기 같은 이단들은 "왜 재림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안상홍 집단에서는 "주님이 오시면 휴거를 하게 되는데, 그러니 모든 재산을 공동체에 바쳐라" 라고 하는데,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대비해야 더욱 안정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이죠. 안식교도 그러한데, 그래서 그들의 공식명칭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라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놓치면 안 되는데, 이런 것들이 설명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는 겁니다. 이 4가지, 즉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고, 승천을 믿고, 재림을 믿어야 한다" 라고 하면, 여기서 무엇이 잘못인고 하니까, 우리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고, 그렇게 살아있는 우리 자신이 지식적인 정보로서 이 4가지를 소유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아까 언약의 반대를 소유라고 했는데, 이 소유의 특징은 처분 가능성이라는 말이죠. 즉 "이것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있는 처분의 가능성은 나에게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의 특징은 찾아오는 것이기에, 찾아온 주님이 우리를 처분하는 것이지, 이미 자기에게 들어온 주님을 나가달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의 경우에, 그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했습니까?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자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나는 예수를 믿을 의사가 전혀 없다" 라고 하면, 그것은 누구 중심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의 처분 가능성, 즉 자기 중심인데, 즉 "나는 나를 너무나도 잘 안다. 나는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전혀 없다. 나는 예수를 믿을 사람이 아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한 자가 바로 사도바울인데, 아니 그가 바로 사울이었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죽을 때, 그것이 옳은 처신이라고 여기면서 동조하고 거기에 옷을 맡은 사람이 사울인데, 마치 그 현장을 주동하는 사람처럼 현장에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는 스데반 집사님의 죽음에 대해서, 당연히 죽을 자가 죽었고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자부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자에게 언약이 찾아오면, 즉 예수님이 찾아오니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얼싸 앉으면서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언약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고 하니, 오히려 예수님을 반기지 않는 사람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저는 어둠입니다 !!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주님이 빛이라고 할 때는 먼저 우리는 어둠이라는 것을, 즉 예수님이 진리라고 하면 우리는 가짜라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하나의 정보로서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부활을 받아들이고, 승천을 받아들이고, 재림을 받아들인다는 말이죠.


그래서 재림에 대해서 기다리겠다고 나오는데, 누가 말인가요? 자기가 기다리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기다리는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인간들이 기다리기 때문에 오지 않는 주님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도적같이 오신다" 라고 하는데, 도적이 어디 기다린다고 옵니까? 오히려 방심하고 있을 때, 마음을 놓고 푹 자고 있을 때 온다는 말이죠.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렇다면 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숨을 쉬면서 살아있지만, 그것은 도적 앞에서는 산 것이 아니라 죽은 존재라는 겁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재림은 이미 죽은 자에게 찾아오시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아는 자에게 말이죠.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면 우리는 잠을 잘 수가 없는데, 각성제라도 먹으면서 계속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주여, 언제 오십니까?" 라고 하면서 또 날짜를 계산하고 말이죠. 그렇게 계산해서 그 날에 오지 않으면 다시 계산을 한다는 겁니다.


1992년 10월 18일 !!


혹시 1992년 10월 18일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이장림 때문에 한 바탕 소동이 일어났는데, 그에 의하면 예수님이 그날에 오시기로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그에게 맡기기도 했는데, 그런데 정작 그는 1994년도에 찾는 적금을 들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을 정작 자기 자신은 믿지 않았는데, 완전히 사기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교인들의 돈을 빼먹는 것이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자기 소유가 중요한데, 즉 처분 가능한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이장림을 욕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왜 그렇습니까?


또 다시 '처분 가능성' !!


오늘날 교인들을 한 번 보세요. 정작 누가 중요합니까? 자기가 중요하지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혹시 예수님이 오시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다" 라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과연 믿음이냐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처분이 가능하다" 라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든지 혹은 믿지 않는 것이 누구에 달렸다는 겁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에 달렸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사울이라는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습이고, 또한 우리 인간들의 태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 언제든지 믿지. 그런데 지금은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않는 것이야. 왜냐하면 나는 나의 처분을 언제든지 믿으니 말이야"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겁니다. 즉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으면 자기주제를 파악하게 되는데, 그런데 "내 앞가림은 내가 합니다"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에 가고 싶으면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 그러니 내가 믿어줄게" 라고 나온다면, 도대체 그게 무슨 믿음이냐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물론 다들 자기가 제일 똑똑한데, 그들이 바로 철학자들이고 과학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자기가 자기를 처분할 줄 아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신에 대해서도 굉장히 연구를 많이 했던 자들이라는 것이죠.


80여명의 신학자들 !!


지난주에 부산강의 '80여명의 신학자들'을 마쳤는데, 2013년도 3월부터 했으니, 무려 4년을 넘게 했다는 겁니다. 그들을 그렇게 살펴보니 신을 믿지 않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신을 믿으니까, "도대체 저들이 무엇을 믿지?" 라고 해서, 궁금한 것은 참지를 못하니 말이죠. 그래서 신에 대해서 조사를 한 자들인데,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역시 신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러니 신을 아무리 연구해도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만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그러한데, 죽으면 천당에 간다고 하니, 교회에 등록해서 다니고 하는데, 하지만 영 시덥지 않다는 말이죠. 그래서 발을 빼려고 하니, 30년 동안 다닌 것이 아깝고 해서, 가끔은 자기도 모르는 정보를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주고 하니 다닌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교회에 다니고 말고 하는 그 처분 가능성은 누가 가지고 있다는 겁니까? 주도권은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교회에 올 때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내셨다" 라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처분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누구에게 달렸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언약에 달려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부활, 승천, 재림은 언약이 아니기에 !!


그러면 마지막 때는 어떻게 결정하는고 하니, 그 이상 언약이 없이 마지막 언약이 오게 되면 그것이 곧 마지막 때라는 말이죠. 그러니 부활, 승천, 재림은 언약이 아닌데, 무엇이 언약이라는 겁니까? 오직 예수님의 피와 살, 그것이 바로 마지막에 주어지는 마지막 언약, 즉 새 언약이라는 겁니다.


(눅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러니 진짜 아들이 아버지와 계약을 하게 되면 그것이 마지막 언약이고, 그 다음은 언약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부활, 승천, 재림은 언약이 아니기에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믿어야지 그런 것을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만약에 우리가 처분할 수 있는 자기의 자신을 믿게 되면, "부활을 믿습니다" 라는 자기 자신을 믿게 되고, "승천을 인정합니다" 라고 하는 자기 자신을 믿게 된다는 겁니다. 즉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자기 자신을 소환해서 믿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님과 계약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계약한 것이 되고 마는데,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고 믿는 것과, 성령을 받고 믿는 것이 다르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지 않아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또한 부활과 승천을 믿을 수 있는데, 그런데 누구 좋아라고 그렇게 믿습니까? '나' 좋아라고 믿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가 처분해야하는 제일 소중한 존재이고 대상이기 때문에 말이죠. 쉽게 말해서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빠트리지 않고 다 믿겠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 !!


이런 것을 주장하는 신학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인데, 그러니 개혁주의 신학은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믿어주는 신학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면, 자기가 자기를 처분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니 "살다가 주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이지" 라고 하는 자들만이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가 소중하니 말이죠. 그래서 남들은 천국에 다들 가는데 자기는 가지 못한다고 하면 그만 초조해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물론 그 반대로 되면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이고 말이죠. 그러니 좋다는 말, 사랑이라는 말, 전능하다는 말, 그것을 쪼개보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그것은 인정해주는 자기가 잘되는 조건이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마구 하니, 성령을 받지 않으면 십자가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성경에 있는 좋은 온갖 이야기를 다 다하더라도, 그것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말이죠.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자살한 목사도 있는데, 그렇게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엉거주춤하게 있다는 겁니다.


개혁주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는 아는데, 그래서 발을 빼려고 하면 교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이죠. "목사님, 이렇게 수 천명이 모여있는데, 우리 괜찮은 교회를 만듭시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게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겁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교회중심인데, 그런데 그 교회에는 누가 들어있습니까? 자기가 들어있는데, 그러니 자기 중심이라는 말이죠. 이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뿐만이 아니라 온 세계를 다 덮쳤는데, 그 안에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처분한다" 라고 하는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아주 고상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말이죠.


십자가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부활과 승천과 재림은 언약이 아니고, 예수님의 살과 피, 즉 십자가가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십자가 사건이 무엇인지 조사해보아야 하는데, 십자가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를 말이죠.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신성하고 존엄하다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발생되었다는 것이죠. 인간에 대한 그런 사상이 우리나라 헌법의 기본 모토이기도 한데, 물론 다른 나라도 그러하고 말이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겁니다. 즉 "모든 인민들의 생명은 소중하고 고귀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존 로커에 의해서 구체화가 되었는데, 그의 사상에 근거해서 미국의 독립정신이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천부인권설, 즉 모든 인간에게는 각자의 권리가 있다는 말이죠. 이전에는 그게 왕으로부터 온다고 했는데, 이제는 하늘에서 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 위에 인간이 없고, 인간 밑에 인간이 없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생명은 고귀하고 신성하고 존엄하다는 것이죠.


잠시 주일오후 설교를 !!


지금 제가 하는 말의 취지를 알려고 하면, 어제 오후에 한 설교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말이죠.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그런 말을 함으로서 자기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제가 어떻게 수정하라고 했습니까?


"나는 어둠이고 주님은 빛입니다" 라고, "나는 죽음이고 주님은 생명입니다" 하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살아도 그만이고 죽어도 그만입니다" 라는 것이 깔려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에 머리카락 하나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유교사상인데,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상투를 틀고 살았다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기는 짓인데, 그런데 그때는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머리카락을 자르니 차라리 내 목을 쳐라" 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 일본은 쳐들어오려고 노리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박경리의 '토지'와 생명사상 !!


박경리의 '토지' 라는 소설에 보면, 그 소설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신성한 토지에서 신성한 생명이 나온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토지는 신성한데, 거기에 사는 인간들은 그렇지를 못하고 서로 싸우고 하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괜찮은 인간, 더러운 인간 등등, 온갖 인간들이 다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토지, 즉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신성한 자연으로 말이죠.


하나님과 한 편이 된 땅 !!


그런데 제가 어제 창세기 3장을 설교하면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땅이 누구와 한 편이 되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과 한 편이 되었는데, 그래서 거기서 무엇을 생산한다고 했습니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그만 토지로 쫓겨났는데, 그러면 에덴동산과 토지는 같이 있는 겁니까? 구분이 되는 겁니까? 구분이 된다는 말이죠.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니 토지가 토지가 되는 것은 저주를 받기 위해서 그런 것인데, 그리고 에덴동산이 생명이 되는 것은 거기에 생명나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이 땅에서 저주를 받는 것은 너무나 마땅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박경리는 그것을 모르는데, 이 땅에서 우리가 더럽게 살다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들의 풀과 꽃처럼 살다가 결국은 다 시들어버린다는 것을 말이죠. 그녀는 언약을 모르는 자연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 작가이기 때문에, "인간들끼리 서로 잘해보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말이죠. 토지가 평화로운 것처럼 우리도 평화롭게 살아보자고 한다는 겁니다. 너무 자기 것만 챙기지 말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서로 도와가면서 말이죠.


하지만 자연은 고자질쟁이 !!


그야말로 민중들이 잘사는 사회, 그것이 바로 촛불집회가 아니냐는 겁니다. 이 박경리의 사위가 바로 김지하인데, 그는 생명운동을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자연은 고자질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기에 그런 주장을 한다는 말이죠. 자연은 하나님에게 고자질을 하면서 우리를 저주케 하는 조건들만 내뱉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한 평생을 살아도, 제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결국은 이런 박경리의 토지사상으로 흘러가고 만다는 것이죠. 언약을 모르고 원천을 모르니 그러한데, 그러니 결국 인간은 자기에로 돌아오고 만다는 겁니다. "내 인생은 존엄하고 고귀하고 소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런 소리를 누구인들 못하겠느냐는 말이죠.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그 정도는 다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데,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우리는 마귀로부터 왔다는 겁니다. 즉 아담의 죄로부터 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저주를 받아도 너무나 당연한 존재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면 안 된다는 말이죠.


젊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좀 알아야 하는데, 돈을 번다고 정신이 없어서 모른다는 것이죠. 자기가 몸이 불편하면 짜증을 내고, 그래서 아이를 낳아서 불편하다고 난리라는 겁니다. 모든 동물들 중에서 우리 인간만큼은 해산하는 고통이 엄청 심하게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만 개혁주의 신학이 그런 기회를 다 막아버린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라고 하면서,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그렇다면 솔직하게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지옥을 없애라는 겁니다. 불교도 그러한데, 불교도 결국은 지옥이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중심이 아니라 언약중심인데, 그러니 우리는 아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아들인데, 즉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이란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 언약이고, 또한 그것이 창조의 원천이고 본질이라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


십자가가 언약이고, 그렇다면 부활과 승천과 재림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을 설명하기 이전에 다음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그게 창세기 2장에 나오는데, 이 법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일단 아담이 요구한 것은 아닌데, 즉 아담이 "우리에게 법을 주세요. 잘 지키겠습니다" 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이것은 인간과 의논된 사항이 전혀 아닌데, 그러면 인간 위주로 산다고 여기는 이 세상에서 인간과 상의한 적도 없이 법이 주어졌다고 하면, 도대체 그 법은 누구와 이야기한 것이냐는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어진 법인데, 그렇다면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취지를 알았습니까? 전혀 몰랐는데, 그런데 따먹고 난 뒤에 느끼고 체험한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저주이고 죽음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아담과 의논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니 말이죠.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것은 인간과 의논한 것도 아니면서 그 효과는 주어졌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법을 주셨느냐는 겁니다. 인간은 따먹고서 그 법에 당하기만 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것은 누구에게 이야기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한 것인데, 

그러면 그 선악과 법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우리 인간은 빠져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너희 인간들은 좀 빠져라 !!


여기서 '빠져준다' 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소유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니 "죽었다가 부활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하면서, 그런 것을 기대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우리 인간의 위치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즉 십자가에 죽었던 그분을 겨냥해서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 온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이 가지려고 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즉 성도는 어디에 끼어듭니까? 십자가의 죽음에 끼어드는데,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라고 한다는 말이죠.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러면 십자가 안에 들어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나는 십자가 안에서 죽고, 이제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게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하는, 그 요구사항이라는 말이죠.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해서 그냥 우리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처럼 "나는 죽고 그 안에서 주님께서 사신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게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


그렇게 이미 십자가 안에 들어오게 되면, 여기에서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주인공은 누구인고 하니까, 그 주인공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인데, 즉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이죠.


재림이라는 이벤트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이 재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즉 "내가 지금 재림하려고 하는데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 있다가 가야되겠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라는 겁니다. 흰옷을 입은 구경꾼이 있던 없던 간에 말이죠. 주님께서 알아서 재림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따로 나와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재림과 상관이 없는데, 그렇게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재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오는데,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겁니까? "나는 날마다 죽고, 주께서 사신다" 라고 하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렇다고 하면, 자기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자기는 죽고 주님께서 사신다는 것을 새로운 피조물로서 알게 되는데, 그것을 어제의 일이라고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제의 그런 자기를 주님은 죽이시는데,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알아서 오신다고 하는 것이 새롭게 주어진다는 말이죠.   


재림은 기다릴 문제가 아니라 !!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아하, 재림이라는 것은 주님의 뜻이라고 하면 언제든지 오시게 되는 사건이구나. 그게 바로 재림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러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도적같이 오시는 주님을 어떻게 맞을 준비를 합니까? 도적은 아무도 몰래오는 것이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시험을 치는데, 그런데 그 당사자가 그 시험문제를 만드는데 가담했다고 하면, 그것은 제대로 시험을 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미 시험문제를 모두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치는 시험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너는 지금 십자가 안에 있는가?


그러니까 재림이라는 것은, "니가 지금 십자가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꼭 십자가 안에 있지도 않은 인간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하면서 흰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더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제 정신이 아닌데, "주여, 저는 십자가도 챙겼고, 부활도 챙기고, 승천도 챙겼고, 재림도 챙겼습니다. 그렇게 다 챙겼으니 저를 어떻게 구원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냐, 알겠다. 내가 구원시켜줄게" 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 !!


성경에 보면, 제일 마지막에 뭐라고 합니까?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라고 하시는데, 제일 처음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하고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재림으로 끝나는데,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그러면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겁니다. 저는 야자수를 먹어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옛날에 타잔과 같은 영화를 보면, 타잔이 야자열매에서 나오는 물을 마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쪼개야 한다는 말이죠.


스스로 쪼개지신 하나님 !!


그러니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쪼개신다는 겁니다. 오늘의 강의제목은 '쪼갠다' 라고 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쪼개면 그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아들의 나라인데, 즉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그 아들을 주로 믿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데,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이란 말이죠.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성령도 받지 않은 인간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삼위일체를 주장하는데, 모든 것을 챙긴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참으로 바쁜데, 삼위일체를 챙기고, 십자가를 챙기고, 부활을 챙기고, 승천을 챙기고, 그리고 재림도 챙겨야하니 말이죠.


그런데 그게 다 한꺼번에 챙겨집니까?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는데, 십자가도 챙기고 부활도 챙기고, 그렇게 한꺼번에 안 된다는 겁니다. 부활을 믿고 있을 때는 십자가를 믿지 않는다고 닦달을 내면서 당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짜인지 모르는데, 믿지 말고 주님이 살려주고 있음이 후차적으로 믿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믿는 게 아니고 말이죠.   


예수님 안에 죄가 들어있어 !!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쪼개셨는데, 십자가에서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예수님 안에 저주가 들어있었고, 예수님 안에 선악과를 따먹은 벌이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아담의 죄를 짊어지셨는데, 거룩한 예수님 안에 죄가 들어있을 줄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아들마저 죄인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버렸고, 그리고 간격을 두고 사흘만에 다시 살려내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인데, 우리가 끼어들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예수님을 살려주세요" 라고, 그렇게 기도로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말이죠. 


일방적인 사랑으로 건져내시기에 !!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양이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의 갈 길로 갔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데, 그런 무지 목매한 우리에게 주님은 일방적으로 다가오셔서 건져내신다는 것이죠. 마치 일방적으로 야곱을 사랑하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냥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그 근거를 아들인 예수님 쪽에서 이미 다 마련해놓았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 쪽에서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하는 조건을 다 만들어놓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려면 아들이 죄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죄 속으로 들어가면 아버지가 아들을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고 하니, "제발 저를 구원해주세요" 라고 하면서 손을 들 자격이 전혀 없는데,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도 버렸는데, 그 아들보다도 더 못한 우리가 건방지게 어떻게 감히 손을 들고 구원해달라고 하느냐는 것이죠. 아담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데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말씀의 낚시에 걸리지 않으면 전혀 느낄 수가 없는데, 낚시를 점점 당기면 그때야 비로소 느껴진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남들처럼 살면 전혀 모르는 내용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말씀에 가까이 갈 때만 성도라는 겁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으면 교회에 와서 교회놀이를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그것은 성도가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죽음을 경험하심으로 !!


계속해서 해보면,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 인간 정녕 죽을 수밖에는 없는데, 그런데 그 죽음의 모든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경험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경험하시고, 그것이 십자가 언약으로 이미 완료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누가 오시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들을 홀로 두지 않고 성령을 보내겠다" 라고 하셨는데 말이죠. 그러면 성령은 어디서 옵니까? 십자가에서 와서, 십자가 안에 들어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바로 성령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십자가부터 재림까지는 시간이 소용되어서 흘러가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성령 안에 있으면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 나라는 천년이 하루 같고 천년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안에서는 '죽은 자' 라고 이미 라벨을 붙여놓았다는 겁니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예를 들어서, 우리 장로님이 사업을 하다가 세금을 내지 못해서 25억이나 체납이 되었다고 하면, 너무 많습니까? 그러면 20억으로 하고(ㅋㅋ), 그래서 국세청에서 기동대가 출동해서 집안의 가구나 물건에 빨간딱지를 다 붙여놓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팔리지 않아도 이미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소유권이 주님에게로 !!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의 이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박아놓았는데, 이미 하늘나라의 기동대에서 출동해서 말이죠. 그래서 자기 소유가 아니라 소유권이 넘겨졌는데, 그러면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말이죠.  


(계 1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그렇게 주인이 바뀌게 되면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고 해도 소유권은 변하지를 않는데, 그러니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는 성령은 이미 하나님 안에 들어있는데, 즉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님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죠. 언약이 그 안에 들어있으니 성령도 들어있다는 겁니다.


성도는, 이미 '죽은 자'이기에 !!


그러면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러니 성도에게 있어서 재림이 와서 휴거가 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는 겁니다. 당연한 순서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몸을 자기가 처분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처분을 하신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라는 말이죠.


그렇게 이미 죽은 자는 천당에 가서 더 살려고 할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사나 죽으나 이미 주의 것이니 말이죠. 그렇게 주의 것이 되었다고 하면, 이제 남은 일은 무엇인고 하니까, 어떻게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천국에 가게 되었는지, 그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미처 경험하지를 못한, 즉 주님만이 경험하셨던 죄에서 빠져나간 그 절차를, 그것을 우리의 남은 인생을 통해서 체험토록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하루하루의 삶이, 자기 고집, 자기 주장, 그런 이기주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데, 즉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그것을 분명히 하면서, 그리고 마지막 사건인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주어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이상 자기 목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지금 이 땅에 목숨을 가지고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음을, 그것을 우리는 차후적으로 늘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주어진 모든 말씀과 법을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었다고 하셨으니, 그러한 이루어짐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항상 되풀이하면서 느끼고 체험하고 또 체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