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11-근본 1705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6. 10. 16:33
2017-05-26 23:15:32조회 : 108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1 - 근본이름 : 구득영 (IP:203.223.97.162)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1 - 근본


                                                             07,05,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46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왕은 그 성전을 유지해야 되는 책임을 지닙니다. 성전은 '주의 이름'이 계시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


구약은 예루살렘 중심의 이야기이고, 신약은 그 예루살렘이 위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참으로 신기한데 말이죠.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 그 예루살렘 성 전체를 커다란 삽으로 퍼서 하늘로 올리든지 해야하는데 말이죠. 실제로 어떤 건물 하나를 통째로 달로 옮기는 영화도 있기는 했는데 말이죠.  


이제부터 제가 그 방법을 설명해드리겠는데, 예루살렘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면 예루살렘이 위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이 되게 한 언약이 있는데, 언약이 먼저 있고 그 언약대로 예루살렘이라는 성전이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시편 84편을 보겠는데, 1절에서 4절입니다.


(시 84:1) [고라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시 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시 84:4)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여기 1절에 보면 '주의 장막'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의해서 주의 장막을 이 땅에 마련하셨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루살렘 성전인데, 따라서 이 예루살렘 성전을 위로 올라가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루살렘 성전을 이 땅에 있게 했던 그 언약이 완성되면 이 예루살렘 성전은 위로 올라간다는 말이죠.


이 땅에 하나님의 언약이 오는데, 그게 아무 곳에나 오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장소에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지정된 장소에 만든다" 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자리를 예루살렘에 마련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있어도 그게 의미를 가지려고 하면, 언약이 그것을 지정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먼저 언약이 장소를 선택해주어야 하는데, 따라서 언약이 다녀가 버리면 예루살렘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지금 현재의 예루살렘이 의미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 예루살렘이 의미가 있게 되려고 하면 언약이 지목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만남의 장소 !!


예루살렘에 언약이 도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지상의 인간들과, 물론 모든 인간이 아니라 자기의 택한 자들과 만남의 장소로서 예루살렘을 지정했다는 말이죠. 언약이 지정하게 되면 그렇게 지정한 취지가 있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목적이 완성이 되면 예루살렘은 분리가 되어서, 예루살렘은 언약 완성의 입장에서 원래 왔던 하늘로 다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에 예루살렘 성이 만들어지는데, 그러면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성은 "언약은 완성되었다. 더 이상은 보탤 것은 없다" 라고 하는 내용을 담고서, 이 예루살렘 성이 위에서 다시 내려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성은 누가 봐도 부동산인데, 지명이름이니 말이죠. 그러면 "건축물이 어떻게 위로 올라갑니까?" 라고, 3차원에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건축물에서 인격체로, '사건' !!


그런데 그것이 이 지상에서는 예루살렘 성이지만, 언약이 완성되면 이게 건축물에서 인격체로 완성이 된다는 말이죠. 인격체이니 인물인데, 즉 하나의 인물로 바뀌는데, 그것이 바로 '메시야' 라는 겁니다. 메시야가 와서 구름을 타고 승천하게 되면 예루살렘 성은 위에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 성' 이라는 공간개념은 인물개념으로 바뀌게 되고, 그리고 예루살렘 성이 있었다고 하는 시간개념도 인물개념으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루살렘 성이 시공간이 인격으로 바뀌면 더 이상 예루살렘 성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언약이 예루살렘 성을 지목함으로서 여기서 무엇이 생기는고 하니, '사건'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사건이 생기게 되면, 그런 사건 자체가 인격화 속에 포함이 된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습니까?


예루살렘 안에 '함유' !!


쉽게 말해서, 논산 훈련소는 신병들이 훈련을 하는 장소이지 군인들이 집합하는 장소는 아니라는 겁니다. 논산 훈련소를 거쳐서 가게 되면, 그곳을 다녀간 이등병들은 더 이상 그곳을 찾지 않는데, 하지만 그것을 거쳐서 가게 되면 군인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 의미가 언약이라고 하면, 그 언약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 언약이 예루살렘을 찾아온 취지가 가득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함유' 라고 하는데, 즉 "포함이 되어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거기에 소복이 모아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믿으면 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되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미국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물론 한국교회도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유심히 살피고 있고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까, 마지막 때의 징조를 찾아내기 위해서 말이죠. 즉 "예루살렘 성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이 세상은 끝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알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겁니까? 그러면 주님은 오시고 휴거가 되는데, 그때 신부로서 단장을 하게 되면 구원을 받는데는 이상이 없다고, 그렇게 대비해서 마무리를 하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대비할 수 있는 구원은 없어 !!


하지만 대비해서 구원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시는데 무슨 구원이냐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을 때 오시는데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전혀 대비를 할 수도 없고, 또한 대비할 필요도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무리 대비해도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대비한다' 라는 것은, "예루살렘 성에서 3차대전이 있기를 기다린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달리 말하면 "전혀 믿음이 없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즉 "나는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말았는지, 그런 것은 모르겠고, 다만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가 주님이 오시면 영접하면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은 신약의 메시야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전혀 모른다는 말이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본성상 자기 구원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다시,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고 하니, 여기 교재 46페이지에 나오는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라는 것을 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것을 몇 번이나 강조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이 예루살렘 성전은 실제로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언약이 지목하는 순간 여기서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의 언약사건이 여기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 예루살렘 성전이 여부스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다윗이 돈을 주고 산 타작마당을 가지고 있던 아라우나가 여부스 사람이었기 때문에 말이죠.


아무튼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도달해서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렇게 됨으로서 이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그야말로 '만남의 광장'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만남의 장소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는 말이죠.


불타는 성전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만들었는데, 그러면 구약 사람들은 그 성전을 쳐다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것으로 구원이 다 되었다고 여겼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라고 해서 성전을 짓고, 하나님은 거기서 드려지는 제사를 받으시니, 더 이상 아무 다른 것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성전이 있고, 우리는 제사를 드리고, 그러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렇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마감이 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하신 그 성전이 불에 타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 땅에 교회가 있어서 내가 천당에 가려고 등록하면 되었지,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다녔던 그 교회가 가짜고 불에 탈 줄은 그야말로 몰랐다는 것이죠.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믿었던 교회가 그렇게 된다면 도대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는 말이죠. 


목사님, 카톡 카톡 !!


오늘 아침에 거제도에 계신 어떤 분에게서 10발 가까이 연속해서 질문이 들어왔는데, '카톡', '카톡' 하면서 말이죠(ㅋㅋ).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왜 성경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까?" 라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묻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었는데 말이죠.


* 거제도 : 왜 성경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까?
* 목사님 : 그리스도의 몸이 영광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 우리가 보는 것으로는 전혀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리 인간의 몸과 관련지어서, 그리스도의 몸이고 또한 지체라고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 거제도 : 그러면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 목사님 : 지금도 살아계시고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완성된 약속을 기능으로서 보여주십니다. 즉 십자가의 기능으로 결과를 만들어내시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 거제도 : 그러면 기존의 보이는 교회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 목사님 :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기능인데, 그렇게 해서 십자가를 믿게 하는 결과물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입니다. 
* 거제도 : 그러면 기존에 있는 교회는 무엇입니까? 
* 목사님 : 그것은 가짜입니다. 
* 거제도 : 그러면 진짜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 목사님 : 가짜 교회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능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기능인데, 그런데 교회는 그것을 보이는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그래서 짝퉁입니다. 
* 거제도 : 그런데 복음이 증거되는 교회도 있지 않습니까? 
* 목사님 : 그런데도 복음이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그 교회가 진짜라서 복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그 순간, 거기에서 진짜 교회를 주님께서 잠시동안만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실컷 복음을 설교해놓고는, 예배를 마치고 제직회를 하면서 과반수가 어떻고 3분의 2가 어떻고 하면서, 그런 것으로 다툰다고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은 아니기에 말이죠. 복음에 과반수가 어디에 있고 3분의 2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나오는 순간에는 대상이 있는데, 복음은 자기 백성을 자기 백성답게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수시로 애프터서비스를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혜사, 즉 '돕는 자' 라는 말이죠. 성령을 보내셔서 영생의 길로 가도록 해주신다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말이죠. 그러니 그때 그때마다 교회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카톡' 하면서 계속해서 연락이 온다는 말이죠. 


* 거제도 : 정말 그렇습니까? 
* 목사님 : 복음이 나오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 거제도 : 제가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교회에 나가는데, 계속 교회에 다닐까요?
* 목사님 : 스님의 설교에도 가끔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 거제도 : 정말 그렇습니까? 
* 목사님 : 그러니 복음이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절입니다.  
* 거제도 : 거제도에 갈 교회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 목사님 : 돈만 내지 않으면 됩니다. 
* 거제도 : (ㅋㅋㅋ)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제가 오래 다녀도 집사를 시켜주지 않습니다. 


돈을 내지 말라는 것은 일종의 간접적인 복수인데(ㅋㅋ), 그러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교회의 목사는 어떻습니까? 교인들의 믿음을 보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우리교회에 얼마나 다녔고, 헌금을 얼마나 하는가?" 라는 것만 본다는 말이죠. 돈을 좀 내면 집사나 장로를 시켜주고, 오래 다녀도 돈을 내는 것이 시원치 않으면 그런 직분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마 이분은 그런 면에서 십일조는 고사하고 주일헌금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니 목사가 집사를 시켜줄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 교회에 가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자기 부인이 그 교회에 또 놀이터를 삼아서 열심히 다니는 것 같다는 말이죠. 


눈에 보이는 성전 !!


이게 구약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성전이 눈에 보이는데, 그리고 제사장이 있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엇을 걱정하느냐는 것이죠. 교회에 가면 신부가 있고, 그 신부가 세례식을 하고 성찬식을 한다는 말이죠. 성당은 그게 곧 거룩한 공간인데, 교인들은 거기에 등록을 하게 되면 아무런 걱정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약인데, 보이는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고 하니, 이 예루살렘의 성전이 완료가 아니고, 다윗언약에 의하면 오실 분이 오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다윗은 왔고, 그리고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고, 그러면 이 예루살렘이라는 동네를 수도로 삼아서 살면 오실 분이 이곳으로 오겠지" 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새로운 언약이 오게 되면 모든 틀이 모두 바뀌는데, 시간과 공간이 다 새로워진다는 말이죠. 치매에 걸린 분을 보고, 어떤 분이 "시공간의 감각이 갇혀있다" 라고 하는데(ㅋㅋ),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대한민국이 전부라는 말이죠.


아름다운 강산 ♬


신중현 씨가 만든 '아름다운 강산' 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다들 아시죠? 그것을 '김정미' 라는 가수가 먼저 불렀는데, 그런데 그 뒤에 이선희가 불러서 노래를 그만 망쳐놓았다는 말이죠. 그 노래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이 아름다운 강산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자"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노래를 만든 신중현 씨는 눈에 보이는 것밖에 모르는데,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시공간이라는 말이죠. 이것이 구약의 다윗시대와 똑같은데, "성전이 있겠다, 제사장이 있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있겠다, 목사가 있겠다" 라는 것인데 말이죠.


그렇게 일년에 3번씩 정기적으로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데, 물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도 가고 말이죠. 그렇게 가서 죄를 용서받는데, 자기가 알고 지은 것, 모르고 지은 것, 그 모든 것을 다 용서함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전에 양을 가지고 가면 제사장이 안수를 하고 잡는데, 자기가 안수를 하는 경우도 있고 말이죠. 그렇게 제사장이 양을 잡아서 제단에 태워서 연기가 올라가면, 하나님께서는 "흠, 맛있다" 라고 흠냥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죄를 용서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된 것인데, 그런 장치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장치가 어디까지인고 하니,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라는 겁니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했다는 말이죠. 너무나 편리하고, 그리고 너무나 익숙해졌기에, 더 이상은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뭐라고 하십니까? "이제 그런 것은 끝났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판을 디비는 예수님 !!


경상도 식으로 하면 상을 완전히 디비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가서 상을 엎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노? 하나님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구나"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당신은 뭐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막 11:15)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막 11: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막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막 11: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성전의 인격화, 시공간의 인격화 !!


그들은 양을 잡았는데,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조금 전에 이야기한 '성전의 인격화' 라는 것인데, 혹은 '시공간의 인격화'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모든 새로운 시간과 공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완성이 되어서 들어가 버린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우리가 보는 이 3차원의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됩니까? 그만 불에 타서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죠.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심한 저주를 받을 줄 알고 까부는 것이니, 너무 신경을 쓰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마 1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 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
(마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을 많이 만나고 또한 그들의 행동을 보게 되는데, 그것을 보면서 너무 안타깝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에 가야만 할 수밖에 없는 행동들을 우리 앞에서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살아서 이미 언약을 알고 복음을 아는 사람에게는 굳이 지옥에 가지 않아도, 그리고 천국에 가지 않아도, 이미 두 부류의 사람을 다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두 가지의 행태를 말이죠. 지옥에 가는 사람은 지옥에 가는 행태를 보이고, 천국에 가는 사람은 천국에 가는 행태를 보인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 4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여러분의 신체를 보세요. 손톱을 향해서 '자라나라' 라고 명령한 적이 있습니까? 하지만 손톱이 그냥 자라지요. 머리카락도 자라는 겁니다. 학생들의 키도 자라고 말이죠.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이 세상은 단일체제 !!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이가 있는데, 여기서 이사야서 47장을 보겠는데, 지금 제가 예루살렘 성과 연계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말이죠. 여기 1절에 바벨론이 나오는데, 이 바벨론은 하나님의 최후의 적으로서, 그 대표적인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이 바벨론은 하나의 국가체제인데, 즉 짐승이라는 말이죠.


(사 47:1)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칭함을 받지 못할 것임이니라


느부갓네살 왕이 신상을 만들 때 금에 해당하는 것이 바벨론이고, 금에 해당되니 그게 하나의 몸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지체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세상도 그와 딱 대조가 되도록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지체가 한 몸이 되는 것처럼, 이 세상도 한 몸 덩어리로 만들어지게 되는데, 그게 바로 바벨론이라는 우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두 개의 세상이 아니라 단일한 세상인데, 그것을 지난 시간에는 '이념', 즉 '이데올로기' 라고 했는데 말이죠. 무슨 의미입니까?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묶는 것이 머리부분인데, 짐승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죠. 즉 바벨론라는 겁니다.


예언, 역사의 지평 위에 떠오른다 !!


그래서 이사야가 예언을 하는데, 그런데 예언이 무엇입니까? "예언이란, 역사의 지평 위에 떠오른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언이라는 것은, 역사밖에 없다고 여기는 이 세상의 지평선 위에 떠오르는 것인데, 그러면 사람들은 "어, 저게 뭐지?" 라고 하는데, 그게 곧 '예언'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역사를 믿는 게 아니라, 그 역사에서 떠오르는 예언을 믿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예언은 기존의 시공간 개념이 아닌 새로운 시공간을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잠시 어제 설교를 !!


어제 낮 시간에 거룩을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거룩은 사람을 가려가면서 사귀는 것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역사를 보는 사람과 역사의 지평에 떠오르는 예언을 보는 사람이, 서로 어떻게 사귐이 가능하냐는 것이죠. 어제 낮 설교의 내용이 굉장히 어려웠는데 말이죠.


하나의 인간이 자라게 되면 마치 훌라후프처럼 경계선이 점점 더 넓어지는데, 그러면 그만큼 자기가 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도 넓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10대, 20대, 30대, 그렇게 점점 더 역사의 지평이 넓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젊은 사람들은 나이가 든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훌라후프처럼 자기 몸에 감긴 경계선을 '생명의 활동' 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성경적으로 보면 그것을 '죽음의 활동'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생명이 아니라 오히려 죽어있는 현상인데, 그것이 이렇게 테두리가 있고, 그 테두리는 갇혀있고, 그렇게 갇혀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삼켜져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것이 어제 낮 설교의 내용이었는데, 많이 어려웠는데 말이죠. 만약에 제대로 풀이를 한다면 3시간은 족히 걸리지 싶다는 겁니다. 삼킴을 당한 사람은 갇혀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갇혀있다는 것은 자기가 설정한 경계선 바깥으로는 전혀 나갈 수 없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돈이 많은 집의 20대 아이들을 보면 자동차 경주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60대가 되면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20대에 놀던 그 경계선이 유치하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그게 뭐라고 법을 어기면서 몰래 하다가 경찰에게 잡혀가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20대가 요즘 10대가 노는 것을 보면, 역시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지금 초등학생들은 화장을 한다고 정신이 없는데, 그리고 화장품 회사에서는 그런 초등학생들을 겨냥해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말이죠. 그것은 바로 악마에게 삼킴을 당했기 때문인데, 우리 인간은 그런 경계선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 경계선 안에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게, 결국은 갇혀서 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여기에, 즉 20대에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역사의 지평 속에 하나님의 예언이 들어온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20대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헛되고 헛되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천 날보다도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박 마담, 여기 쌍화차 두 잔 !!


부부사이를 보게 되면, 물론 나이 60이 된다고 해서 철이 드는 것은 아닌데, 그 안에 보면 또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감들이 다방에 앉아서 박 마담의 손이라도 어떻게 한 번 잡아보려고 쌍화차를 시키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이것이 다 갇혀있어서 그러한데, 역사의 지평선에 있는 예언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는 것이죠. 자기가 인생을 살아보니 그렇더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갇혀있어서, 즉 마귀가 그렇게 덮어버리는데, 삼키고 말았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사야서 47장 10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사 47: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사 47:11)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라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


이게 바로 바벨론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의 사고방식이 오늘날 현대인들과 똑같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게 같은 바벨론이라는 줄기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즉 머리는 느부갓네살이고, 그 바닥이 오늘날 현대인들이라는 말이죠.


여기 7절 처음에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게 왜 악입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결과적으로 그게 악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악하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 7절에서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그만큼 알고, 그 경계선 안에서 즐겨왔던 것, 그러한 꿈과 이상과 비전을, 그게 바로 '나' 자신 밖에 모르면서 살아왔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최고다" 라는 겁니다. 자기를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다는 말이죠.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


그래서 11절에 보면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뒤에 보면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예루살렘이고, 이스라엘 존재의 의의라는 겁니다. 성전의 의미라는 말이죠. 즉 '근본'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렇게 근본을 모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그렇게 타고 났다는 겁니다. 인간은 바뀌지 않는데, 그런데 예외가 있다는 말이죠. 그게 무엇이라는 겁니까? 역사의 지평에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제가 '예언' 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 내용이 들어가 보면, 그게 바로 '근본' 이라는 겁니다.


이 근본이라는 용어가 막장 드라마에 보면 종종 나오는데 말이죠. 어떤 남과 여자가 사귀고 있는데, 그런데 남자의 엄마가 여자를 보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것이 우리 집에 감히 들어오려고 해?"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말이죠. 


성도와 세상 사람들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근본을 아는 것인데,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역사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역사의 지평선에 떠오르는 예언을 아는 것이 바로 근본을 아는 것인데, 이 근본을 알면 북한이 핵실험을 하든 무엇은 하든 괜찮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근본이 옛날에 어디에 있었는고 하니,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언약이라고 하면 추상적인데, 그러면 실체적으로 어디에 있는고 하니, 언약이 남긴 것이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의 성전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근본된 분을 만나지만, 그런데 그게 왜 중요한지를 모른다는 말이죠.


그들은 성전이 눈에 보이니, 그래서 거기서 제사를 드리면 구원을 받는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예루살렘에 주어진 언약이 완성되는 그날, 그게 마지막 날인데 말이죠. 즉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등장하는 순간, 모든 근본의 근본은 다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다 이루었다는 말이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는 것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나타나셨는데, 

그분이 새로운 창조를 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가는데, 

그런데 죄 때문에 그냥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어떻게 하십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그렇게 해서 제사를 완성함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흐뭇해하는 가운데 "오너라. 다 받아줄 게!"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니 죄인도 합격해서 천국에 가는데,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세리를 보고, "내가 너를 의인이라고 하면, 그것 자체로 이미 합격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전부 근본에서 나온다는 말이죠.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자의식의 강화 !!


그러면 사람이 근본을 모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근본을 모르게 되면 자기 테두리를 강화시키는데, 이사야서 47장 10절 말씀처럼 말이죠.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아, 혹은 자의식이 점점 더 강화가 된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조금 전에 이야기한 지옥에 가는 자들의 행태인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린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 아무리 착한 일을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곧 '자의식의 강화' 라는 말이죠. 즉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바벨론과 그야말로 똑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젊은 아이들을 보면 자기 밖에 모르는데, 물론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자식이 아무리 "엄마,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효도를 할 게" 라고 해도, 그것은 자기 부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자기 긍적인데, 즉 "내가 엄마 앞에서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도록 호강을 드리겠습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부모가 되어서 좋아할 것이 아니라, 자식 입에서 그렇게 호강이라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점점 더 자아가 강화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자식이 "엄마, 나는 죄인이야"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만약에 그런 소리가 나오면 겁이 덜컹 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회사가 부도가 나던지 무슨 일이 있어야 그런 소리가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니 말이죠(ㅋㅋ).


아무튼 이 세상에 나가서 출세를 하고 돈을 잘 벌면 점점 더 자아는 강화될 수밖에 없는데, 자기의 자의식이 말이죠.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하겠지만, 하지만 그것이 곧 지옥에 가는 행태라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이지 근본을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근본을 모른다고 그렇게 말로만 하지 말고, 근본을 알려주던지 하는 조치가 있어야하지 않느냐고 하신다면, 그게 바로 이사야서 48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바벨론은 근본을 모르는데, 그런데 이제 드디어 근본을 아는 곳이 나타난다는 말이죠. 여기서 1절을 보겠습니다.


(사 48:1)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들을지어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너희들이 어느 정도로 고귀한 위치에 있는지, 너희들은 그것을 잊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는데, 1절과 2절입니다. 


(사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사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스라엘은 왜 '근본'을 모르는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다 일러주었는데, 그런데 왜 너희들은 그것을 모르는가?"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작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모를까요? 정녕 그들이 바보라서 그런가요?


하나님께서 성전을 만들어주고, 예루살렘 성이 귀하다고 알려주고, 선지자를 보내주고, 약속에 땅에 넣어주고, 그러면서 온갖 기적을 다 베풀어주셨는데,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왜 모르느냐는 겁니다. 그 정도로 정보를 주면 "정말 여호와 하나님이 근본이구나" 라고 하면서 알아차려야 하는데, 그런데 왜 엉뚱하게도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를 섬기고 했느냐는 말이죠.


인간은 머물지 않는다 !!


그러면 왜 그렇게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의 것에 대해서 호감을 느끼면서 살았을까요?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변하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인간은 그렇게 변하고 달라진다는 겁니다.


혹은 "어디로 떠나는 중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달리 말하면, "인간은 머물지 않는다" 라는 것이죠. 실제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런 것을 많이 느끼지 싶은데, 분명히 2주일 전에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가 어디로 갔는지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키우시는 인생 !!


이것을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의 키를 누가 키우더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모두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겁니다. 아무리 염려해도 우리는 키를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물론 요즘은 호르몬 주사를 사용하기는 하는데 말이죠.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손대기 이전부터, 근원이 되고 근본이 되시는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손대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그것이 자기가 가꾼 모습일까요? 주님이 가꾼 모습일까요? 우리가 거울을 보는 순간까지 주님께서는 꾸준히 가꾸어 오셨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런 주님의 기능 덩어리를 보고 있다는 겁니다.


거울 앞에서 아무리 닦아도 불교는 자기가 본 것밖에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역사의 지평에서 예언이 떠올랐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거울 앞에서도 자기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변화자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다는 겁니다. 변화되고 있는 그 모습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과연 변화자체를 볼 수 있는가?


이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인데, 이 세상의 모든 과학자들이 변화자체를 그렇게 보려고 했지만, 모두가 실패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지금도 실패하고 있고, 그들은 앞으로도 전혀 성공할 수 없는데, 영원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변화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된 것만 본다는 겁니다.


우리가 여름은 보는데, 또한 가을도 본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름에서 가을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물론 단풍이 노랗게 물이 드는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겠는데, 그것은 노랗게 물든 것을 보는 것이지, 물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제 아무리 고성능 카메라를 가지고 연속촬영을 해도, 그것을 보는 우리 눈의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보다도 더 잘 보는 동물들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고 우리 인간은 자기 눈에 빛에 의해서 비치는 것을 대상으로 해서 볼 때는, 많은 빛을 삭제하고 보는데, 즉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이 보여준 것만 볼 수 있는데, 그 자체로서 인간은 분명 한계가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우리의 키를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즉 몸이라는 이 물체조차도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면, 그 물체를 가지고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자기 것으로 다룰 수 없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 4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예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우리네 소관이 아니라는 말이죠. 즉 "네 소관도 아닌데 왜 네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하는가?" 라는 겁니다. 우리는 제3자입니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염려하여 이르기를 !!


그러니 자기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그런 것을 염려하는 것은, 그것은 역사의 지평에서 떠오르는 예언을 모르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즉 지옥에 가는 자들이 하는 행세라는 말이죠. 지옥에 가는 자들은 그렇게 매일같이 염려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염려를 하다가, 또 지옥에 가서도 염려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노선이 다른데, 그쪽이 호남선이라고 하면 여기는 경부선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또 지방색이 드러나는데(ㅋㅋ), 대전에서 갈라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에 간다면 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않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카톡' 하면서 "목사님, 어떻게 하면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고 분명히 연락이 오는데 말이죠. 그것은 자기 몸을 자기가 다루는 것이 아니듯이, 그 모든 것을 주께서 기르신다는 겁니다. 천국에 가는 쪽으로, 그렇게 친히 기르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하는 염려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염려가 되지 않는 것만 주세요" 라는 식인데, 그게 우리가 우리의 염려를 다루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할 것들을 잔뜩 주신 다음에,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게 하십니까? "염려가 안 되네. 이상하게 염려가 안 돼" 라고, 그렇게 되게 하신다는 말이죠.


분명히 염려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염려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이 그 순간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잠시동안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느끼게 하신다는 겁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3초인데, 그 나머지 23시간 59분 57초는 모두 염려의 시간이란 말이죠(ㅋㅋ). 누가 봐도 염려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순간적으로 염려가 되지 않으면서 "주님의 뜻이 있겠지"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망대가 무너져서 무려 18명이나 죽었는데, 그러자 제자들이 속으로 고소하게 여겼는데, "그것 봐라. 우리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않다가 잘 됐다" 라는 식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망대 사건들이 !!


지금 우리 주위에 이런 망대사건들이 많이 있는데, 세월호 사건도 역시 그렇다는 말이죠. 거기에 자기 자식이 없었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은 바로 "천국과 지옥은 이렇다" 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과 사건들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건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책임을 지지 않게 되면 염려와 걱정도 같이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죠. 바로 그런 방법을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겁니다. 우리의 아이디어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성도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


그러면 주님이 일으킨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어제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니가 의인가? 죄인인가?" 라는 겁니다. 의인과 죄인, 즉 정죄함을 입지 않을 자와 입을 자가 새언약인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것을 증명하는 용도로서 성도를 성도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일밖에 모르는데, 주님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완성한 자기일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자랑하고 증거하기 위해서 거기에 필요한 일군들을 뽑아내는데, 그들이 곧 성도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의 증인인데, 즉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증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성도의 기능이라는 것이죠.


오늘 아침에 제 아내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청와대에 무슨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대통령, 비서실장, 기사, 가사 도우미, 그 정도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러니까 제 아내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교회도 목사와 반주자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아무튼 그들이 왜 있는고 하니, 대통령을 보좌하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즉 천국에 갈 자들과 지옥에 갈 자들을 결정지었던 근거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천국에 보내고, 무엇을 좀 했다는 자들을 지옥에 보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미 주도권은 주님에게 있는데, 그러니 무엇을 염려하고 걱정하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돈을 벌기 위해서 걱정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성도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이 세상이 있는 게 아닌데, 태어날 때부터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에게 환난과 핍박과 고통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니가 이런 환난 가운서도 주님의 하신 일을 보여줄 수 있는가?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는가" 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몸이 우리 몸이 아니라는 것이죠.


목자만 쳐다봐라 !!


그런데 문제는 그게 불과 몇 초를 가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 성도도 어디론가 떠나는 중이라는 겁니다. 자꾸만 어디론가 가는데, 즉 이끌림을 받고 있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을 시편 23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시 23: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자가 앞서서 가게 되면, 여기서 양들은 서로 비교할 필요가 없는데, 흰 양이든 노란 양이든 상관이 없는데, 그 목자 하나만 쳐다보고 가면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기준을 제시했으면, 거기에 따르는 자들은, 그들이 비록 탕자라고 해도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고백만 하면서 따라가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하루일과에서 불과 3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1초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아멘!" 이라고 하면, 그 순간 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끌림을 받으면 받을수록 주님의 테두리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데, 자기가 결정해놓은 훌라후프보다 말이죠. 그렇게 가면 갈수록 더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찢어지면서 '예언'이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데, 평생을 가도 자기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을 '바벨론' 이라고 했는데, 즉 "나를 건드리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나는 내가 최고다" 라는 겁니다. 이게 테두리인데, 우리는 여기에 갇혀있다는 말이죠.


그런 가운데 여기에 중간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나왔는데, 그게 바로 역사 위에 떠오르는 예언이라는 겁니다. 이제는 이게 예언 정도가 아니라 예언의 완성이고 완료인데, 그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화산이 찢어진다고 했다는 말이죠. '나' 밖에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여기서 뭔가가 '푹' 하고 찢어지면서 솟아올라오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마치 마그마처럼 말이죠.


"너 같은 인간을 위해서 내가 희생했다" 라고 하는 십자가의 희생과 그 완료가 올라오게 되면, 우리는 그동안 익숙했던, 즉 자기밖에 모르고 눈에 보이던 역사만 챙기던 시공간에서, 이제는 낯선 시공간, 즉 새로운 하늘과 땅, 그 묵시의 세계가 이제는 자기 것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 소중하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상대적으로 자기는 죄인임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는 죄인 중의 괴수이고, 날마다 죽는다고 하는데,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은 기준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의 근본은 악랄하고 악독해 !!


이것을 빼고 자기를 부인하면 불교가 되고 마는데, 왜 흔히 목사들이 "저는 부족합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불교라는 것이죠. 물론 스님들이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말이죠.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현재 자기의 육적인 속성과 비교해보니, 자기의 근본은 참으로 악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정말로 우리의 근본은 악랄하고 악독하다는 겁니다.


평생을 남들에게 욕을 한 번 하지도 않았는데, 그게 천심이었는데, 그런데 올해에 들어와서는 이상하게도 욕이 마구 나온다는 겁니다. 천심이라는 것은 천사의 마음인데, 그런데 생전에 들어보지도 못한 말들이 입에서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좋을 때는 좋은 말이 나오지만, 건드리면서 후벼파고 또 후벼파면 악랄한 것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기억나는 영화가 '친절한 금자씨' 라는 것인데, 이영애가 주연을 했는데 말이죠. "니나 잘하세요!" 라는 하는데, 그 순진한 여자가 그야말로 악랄하게 복수를 한다는 말이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말이죠.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의 내부에는 그 마지막에 항상 악랄함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 누구든지 자기 것을 건드리면 폭발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어디 약하다고 해서 복수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겁니다. 요즘은 여자천하가 되어서 항상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죠(ㅋㅋ).


예루살렘의 특징 !!


그렇다면 이제 예루살렘의 특징을 설명할 차례인데,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섬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예루살렘을 망치게 한 장본인들이 누구인고 하니,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구원을 받는다고 자부했던 바로 그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만 성전이 견디지를 못하고 떠나버리는데, 그런데 여기서 성전이 떠난다는 것은 건물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에 함께 있었던 성신이 떠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게 에스겔서에 나오는데, 성신이 그들을 그만 떠나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떠나서 어디로 갑니까? 포로로 잡힌 곳으로 가는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우상을 섬겼다는 죄목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그 공동체에 성신이 임하고 만다는 겁니다. 아니 성심이 임하겠다고 약속을 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새언약인데, 그러니 새언약은 무엇인고 하니까, "성신이 임한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요엘서를 보겠는데, 알다시피 선지자들이 많이 있는데, 이 요엘 선지자가 문서 선지자들 중에서는 첫 번째 선지자라는 겁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에는 문서를 기록하지 않은 선지자, 그래서 이적 선지자라고 하는데, 그 이후에는 이 요엘이 제일 빠르다는 말이죠.


요엘서 2장 28절에서 32절입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욜 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욜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성신이 와야한다 !!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성전이 건물 형태의 성전이 아니라, 아예 너희 몸을 내가 성전으로 만들어내겠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성신이 와야한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신구약 성경말씀이 뚫리게 되는데 말이죠.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하늘에서 무엇이 내려옵니까? 성령이 내려오시는데, 그러자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요엘서의 이 대목을 가지고서 그 당시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봐라. 하나님의 약속은 일관성이 있잖아" 라고 말이죠. 즉 "역사의 지평에 떠오르는 예언은 일관성이 있다" 라는 겁니다.


(행 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도는 이것을 보는데, 그런데 지옥에 갈 성도가 아닌 자들은 역사만 바라보는데, 눈에 보이는 것만 말이죠. 그러니 근본을 모르는데,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남녀노소가 다 그렇다는 겁니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예쁘게 해주세요" 라고 하지, 근본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 아무리 헤어스타일이 좋아도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성경자체가 근본을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올 때 곱게 오겠습니까? 방해물이 있겠습니까? 방해물이 있는데, 그게 바로 바벨론이라는 겁니다. 즉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잔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죠. 누구에게 간섭을 받으면서 인생을 살기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연히 복음도 싫은데, 즉 "나는 내 노력으로 열심히 살아왔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만 근본이 아니라 바벨론도 근본인데, 왜냐하면 근본이 되는 예언에 의해서 "너희는 어디로 가고, 너희는 어디로 간다" 라고 되기에 말이죠. 그것은 근본을 아는 자들에게만 보이게 되어있는데, 복음의 안경을 쓴 자들에게만 말이죠. "아하, 너는 지옥으로 가는구나" 라고, 그것이 보인다는 겁니다. 도깨비 신부도 아닌데 다 보인다는 말이죠(ㅋㅋ). 어차피 인간은 어디론가 가게 되어있는데, 그것이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재 47페이지에 전도서 3장 말씀이 나오는데, 살펴보겠습니다.


** 세상에 살 동안에는 인간도 보이고 코끼리도 보이지만, 허무한 무게로 인해서 모든 것이 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전 3: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전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전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우리 인생은 '헛되다' 라는 기다란 꼬리를 남기는데, 그런 흔적을 남기면서 어디론가 질질 끌려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전도서 마지막에 보면,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로 다 끌려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나온 자리는 허무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허무만 남긴다는 겁니다.


(전 12: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너희들이 근본을 아느냐?


그리고 여기 3장 20절에 보면,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근본이고 말이죠. 주님께서 흙으로 그렇게 만들어놓으니, 우리는 그게 인간인 줄로 알았는데,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양새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근본을 보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어이 흙아, 너무 나대지 마라. 어차피 흙으로 돌아간다" 라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임한 사람은, 그 언약에 의해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면서, 흙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가고, 반면에 언약에 의해서 악마의 형상을 닮아야하는 자들은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생은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이것을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오른쪽의 양과 왼쪽의 염소라고 하고 말이죠. 예수님의 이런 맨트 자체가 다 근본이라는 겁니다.


(마 13: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마 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왕은 허무가 방출되는 허무에 주목합니다.


(전 5: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전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네 발을 삼갈지어다 !!


여기 1절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전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근본'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전도는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솔로몬 시대이니 성전이 있을 때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전에 들어갈 때 주의하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취지로 지목하신 공간이니 말이죠. 그래서 성전에 들어갈 때는 촐랑거리지 말고 근본을 대하는 자세를 취하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배당에 갈 때는 어떻습니까? 어제 오후시간에 잠시 언급했는데 말이죠. 예배당, 즉 성당인데,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건축물 안에 과거의 거룩을 가두어놓았다는 겁니다. 즉 잠금 상태로 만들어놓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과거의 거룩을 건축물 안에 가두어놓게 되면, 거기에 가서는 빼먹는데, 이것을 반복한다는 겁니다.


레코드 원칙, '거룩의 반복' !!


이것이 바로 '레코드 원칙' 이라는 것인데, 처음 듣습니까?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 동그란 레코드 판 위에 바늘을 올려놓게 되면 똑같은 노래가 반복되어서 나온다는 겁니다. 즉 성당에서 제사장 복장을 걸치고 똑같은 예배와 제사를 드리게 되면, 그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이 계속해서 나온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물론 성당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면 거룩이 나오지 않는데, 그러니 계속해서 성당에 다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여기에 물던 사람은 심지어 이런 말도 하는데, "복음이 없어도 가던 행세가 있어서 가지 않으면 찜찜하다" 라고 말이죠. 그 공간에 가야 거룩을 마치 샤워를 하듯이 맛을 본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우리동네 목욕탕이 가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등을 밀어주는 기계가 있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배든 팔이든 다리든 다 밀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목욕탕 주인이 보다가 못해서 "여기는 등만 미세요" 라고 적어놓았는데(ㅋㅋ), 우리가 목욕탕이 왜 갑니까? 물론 피로를 풀려고 가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은 때를 밀려고 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욕탕에는 그런 장치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예배당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사람들이 복음이 나오지도 않는데 계속해서 간다는 것이 정말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서, 자기 구원에 필요한 것들을 행함으로 취득할 수 있다고 여겨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생산 공장인 교회의 입장에서는 그런 자들이 고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그럴 줄을 알고 미리 구비를 다 해놓는데, 그래서 오면 만족해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준다는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거룩을 준비해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종교라는 것이 장사가 되는데, 즉 '거룩의 반복' 이라는 겁니다.


바알 종교, 아세라 종교 !!


이것이 바로 구약의 바알 종교이고 아세라 종교인데, 그것을 잠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종교의식에 왕은 당연히 일년에 두 번씩 참석을 해야하고, 백성들도 수시로 참석을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바알의 부인이 아세라인데, 그래서 그녀는 가정의 축복을 담당한다는 말이죠.


그 당시에 신의 저주로 인해서 가장이 일찍 죽으면 대를 잇지 못하니, 무조건 자식을 많이 생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커다가 몇 명이 죽어도 괜찮다는 말이죠. 그러기 위해서 아세라 신전에 가장인 남자가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런데 거기에는 여자 성직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녀들은 무엇을 할까요? 남자들이 제사를 드리려고 가면, 거기에서 그녀들은 성적인 관계를 맺어준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말만 들어도 남자들은 신이 나는데,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신전에 가는 날을 손꼽아서 기다린다는 겁니다(ㅋㅋ). 즉 종교라는 이름으로 바람을 피우는 것이 정당화가 된다는 말이죠. 


거기에 비해서 여호와 종교는 재미가 하나도 없는데, 매일같이 회개만 강요하니까 말이죠. 제사장도 제사를 지내다가 죽고 하니 말이죠. 그러니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를 못하는데, 그런데 거기에 반해서 이 아세라 종교는 쾌락을 제공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너희들이 어떻게 창기를 그렇게 좋아하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여자들을 위해서는 '남창(男娼)'이 있는데, 고객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제공해준다는 겁니다. 여자들에게는 남창, 남자들에게는 성녀, 그렇게 되니 자식의 복을 받지 않으려고 해도 받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마구 생산이 되니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합니까?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이죠. 그것은 바로 역사 위에 떠오르는 예언은 모르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자기 가정이 잘 되면 그게 바로 축복인 줄로 아는데, 그러니 자기 자식이 잘 되면 그것이 최고라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보면서도 이런 내용을 모르니, 매일같이 이스라엘만 탓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으로 바보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매를 맞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말이야. 그들은 너무 믿음이 없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인간은 이성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본능으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로만 가지고 "여호와여!" 라고 하는 것보다도, 실제적으로 쾌락이 주어진다고 하면, 그날을 학수고대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가서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겁니다. 빌고 관계하고, 그렇게 풀고 온다는 말이죠.


그곳이 곧 '산당(山堂)' !!


그러니 남자와 여자가 다 가는데, 그러면 손님들이 많이 붐비면 장소가 비좁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장사가 잘 되니 프랜차이즈로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각 지역의 높은 곳에는 지점을 차리는데, 그것을 '산당(山堂)'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산당에는 아세라의 제사장들이 있어서 매일같이 똑같은 형식을 취하게 되는데,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찾아주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일년에 세 번씩을 가야하는 예루살렘은 너무나 멀다는 겁니다. 그래서 왕들이 예루살렘은 정화를 시키지만 산당은 손을 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그 다음 대선에 표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떻게 함부로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 당시에 왕이 전쟁을 하려고 하면, 그런데 그때는 정규군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 가운데서 군인들을 차출해야만 하는데, 농사를 짓다가도 왕이 부르면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개혁을 한답시고 폼을 잡다가 그만 그 왕이 인기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백성들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렇게 국가에서 벌금을 매겨도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이데올로기가 왕과 결합이 되지 않는데, 즉 백성들과 소통이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왕은 "좋다. 산당은 손대지 않겠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백성들은 "우리 임금님이 최고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렇게 되어야지 나라꼴이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SELF ASSEMBLY !!


그러니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SELF ASSEMBLY' 라고, 되지도 않는 영어를 사용해 보았는데 말이죠. 즉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개인의 고집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정신세계에 눌려서 산다는 겁니다. 즉 삼킴을 당한다는 말이죠.


지금은 대선이 끝났는데, 아마도 대구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홍준표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어차피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으니까, 약속한 대로 한 달에 40만원씩만 따박 따박 통장에 넣어다오" 라고 하지 싶은데 말이죠. 이처럼 민중들은 예언적이 아니라 역사적인데, 즉 자기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인데, 사람들은 성경말씀이고 뭐고 간에 관심도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몸인 우리의 이 성전에 주의 말씀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것은 곱게 지켜서 순종할 입장이 아니라, 그야말로 찢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완전히 부서지고 박살이 나야한다는 말이죠.


전쟁을 할 때 사용하는 '포탄' 이라는 것은 화학적 폭발력과 강한 금속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그러면 왜 폭발력만 가지고는 포탄이 되지 않습니까? 그냥 폭발만 해버리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그러니 여기서 강한 금속조각은 무엇인고 하니, 저항선을 뜻한다는 겁니다. 강하게 둘러싸고 있다가 터지게 되면, 그 조각 조각들이 사람들의 몸 속에 박힌다는 말이죠. 그래서 포탄이 살상무기라는 겁니다. 


나와 함께 폭발한 십자가 !!


그처럼 언약이라는 것은 폭발을 해버리면, 그냥 폭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성, 즉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는 눈에 보이는 역사가 전부이고, 나는 내가 즐겁고 행복하면 그만이다" 라고 하는, 바로 거기에 십자가가 꼽혀서 터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언약이고,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냥 "십자가가 펑 터진 것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 성도가 아닌데, 십자가의 파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꽂혀야 한다는 겁니다. 가려가면서 사람을 사귀는 것이 거룩의 실천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알고 난 뒤에 이 세상 사람들을 사귀어보라는 겁니다. 사귈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예언이 나옵니까? 새언약이 나옵니까? 자기 자랑 이외에 다른 것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만나서 전혀 예상도 하지 않았는데 복음이 나오면서, "저는 저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그만 십자가로 인해서 완전히 찢어졌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 속에 성전이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다룰 때는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여겨서 귀하게 여겨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끼리는 소중하게 여겨주어야 하는데, 주님이 직접 다루실 때는 목사라고 해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너무 귀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 사람의 생김새가 어떠하든지 간에 주님이 친히 가꾸어 가시는데, 마치 구약 때 성전에 들어갈 때 발을 삼가는 것처럼 성도에게는 그렇게 해야한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교회는 너무 삼가서 문제인데, 너무 조심조심한다는 겁니다(ㅋㅋ).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전이고 주님께서 친히 이끄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5,23 오전11시에 마침.
                                                          찬란히 떠오르는 예언을 바라보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