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강-창 21장 1-7절(이삭의 등장)1704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1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26페이지입니다.
창 21:1-7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일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그 당시에도 나이 백 세된 남자, 그리고 아내가 구십이 된 부부가 아기를 낳았다고 하면 놀랄만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했더니만 이삭이 나온 겁니다. 그러면 신앙이라는 것이 뭐냐? 일반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기가 행동하는 것, 실천하는 것들을 주워모아서 신앙이라고 간주하는데 성경에서는 우리가 뭘 하느냐가 전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실질적인, 인간들이 예상 못한 어떤 분을 이 땅에 보내시고 이 땅에 나타나신 그분이 하는 일, 그것이 바로 신앙의 근거가 되는 겁니다. 경쟁이 되지요. 내가 하는 것이 신앙이냐, 이 땅에 오신 분이 하신 일이 신앙이냐? 이렇게 경쟁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는 것이 신앙이라 한다면 이것은 종교가 되는데 이것은 무척 쉬워요.
왜? 평소에 인간은 자기에게만 주목하기 때문에. 자기한 것을 잘했느냐, 못했느냐 자기 스스로 따져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낸 자, 그래서 이 땅에 오신 그 분이 신앙의 근거라면 진짜 성령 받지 않고 신앙 없는 사람은 난감합니다. 신앙이 있어야 천국 간다는 소리는 들은 것이 있어서 천국은 가고 싶어서 신앙은 가지려고 하는데 내가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면 천국은 가고 싶어도 갈수가 없네요.
왜냐하면 인간은 기껏 하는 것이 자기가 하는 그것만 계속 기억하고 그것만 생각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의 믿음의 계열을 만들었어요. 노선을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구원받는 모든 사람, 신앙이 있어 천국 가는 모든 사람은 그 선조, 선배가 되는,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그 정황이 동일하게 일어나야 그게 신앙인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앙은 뭐냐? 신앙은 내가 뭘 설치는 그것이 신앙이 아니고 나에게 뭔가 하나님쪽에서 손을 대고 내 안에 일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은 미리 예상한 것이 아니고 기대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뭘 해보겠다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낯선 일이 벌어질 때 그게 진짜 하나님이 생각한 신앙의 이 세상에서의 구체화, 실질적인 양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구분하니까 굉장히 쉽지요. 그래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내가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골라내고 구분하느냐? 그게 중요한 문제로 등장합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어떻게 신앙에 관한 일인지,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벌어진 일인지 내가 예상해서 은근히 기대한 일인지를 어떻게 구분해서 아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은 아브라함부부가 그 사람에게 다가옴으로 말미암아 낯선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아브라함부부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아비멜렉추장 가정에 속한 모든 여자들의 태가 닫혀버렸습니다. 임신을 못해요.
그럴 때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차이를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아비멜렉은 자식을 낳아야 되는데 자기부인부터 일가친척 여자들의 태가 닫혀서 잠시나마 임신을 못하고 불임여성이 되었다. 여기서 아비멜렉은 우리 가정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이 말을 이해하는지 모르겠어요. 믿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 가정에 문제 생겼으니 아비멜렉 본인 가정에 뭔가 아쉬움이 생겼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주니 그 집안 여자들의 태 닫힌 것이 치료가 되어서 태가 열리고 임신이 가능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아비멜렉 입장에서는 내게 속한 가정의 일이 뭔가 꼬이다가 아브라함이 기도해주니 일이 풀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비멜렉의 문제점이 뭐냐? 내것이 제대로 유지되어야 되는데 뭔가 유지가 안 되다가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주니까 다시 유지가 된 거예요. 그러면 아비멜렉의 문제점이 뭐냐? 본인에 관한 것, 본인이 소유한 것, 본인이 내 인생이고 내 것이라고여기는 것 가운데서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원래 나이 많아서 아기를 못 낳아요. 아브라함은 자기한테 문제될 것이 없어요. 자기 아내 사라가 나이 90이고 자기 나이 백세인데 애 못낳는 것이 당연하지요. 아쉬울 것이 없다 그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아쉬울 것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아비멜렉은 자기 것에서 아쉬움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어떡하지, 경상도 말로는 우짜노, 임신 못하면 안 되는데. 임신 못하면 안 된다고 안절부절하고 있다는 자체가 평소에 아비멜렉은 하나님에게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내 것 챙기는데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비멜렉이 초조하고 불안하고 때로는 화가 나고 또는 ‘문제 있어. 위기야.’라고 생각하는 모든 근거지가 내 것이라는 것, 내것이야, 내 소유야, 내 인생이야, 내 가정이야, 내 가정에서 나온 문제가 돼요.
그래서 기도해주니까 아이고 다행이다, 내게서 나온 문제가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주니 도로 쏙 내 것으로 돌아온 거예요. 아비멜렉이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것이라는 그 범주 안에서 멈추고 있는 겁니다. ‘큰일 날 뻔 했다. 낯선 사람이 등장해서 우리 집안 임신이 안 되면 대를 못 잇잖아. 큰일 날 뻔 했네.’
아비멜렉이 걱정하는 것은 자기 집안의 대를 못 잇는 겁니다. 자기집안의 대를 잇지 못하면, 자기자식을 낳지 못하면 자기집안의 대가 끊어지는 거지요. 자기집안의 대 끊어지면 그게 하나님 앞에 큰 문제입니까? 본인한테 문제지요. 경주이씨 집안의 대가 끊겼다. 그런다고 하나님이 걱정하십니까?
그게 신앙의 근거예요? 인간의 모든 문제점은 아비멜렉이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것은 문제야, 큰일 났어.” 뭐가 큰일 났는데요? “큰일 났어. 집에 불났어.” 집에 불나면 하늘나라가 불납니까? 아니잖아요. 큰일 났다, 문제다, 걱정이다, 초조하다, 불안하다, 나는 더는 못산다, 죽어버릴까, 이 모든 문제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도 문제거리냐,
라고 다그치는 겁니다.
너는 그것을 문제로 보느냐고. 인생의 문제는 내 것이라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 있고 그 내 것이 이상하게 꼬일 때에 우리는 문제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 문제라고 끄집어내는 것은 뭐냐, 먼저 내 것은 내가 챙겨야 된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죽어서 천국가야 해. 못가면 큰 문제야.”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천국 못가는 그것이 왜 문제인데?” 앞에서 아비멜렉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겠어요. 21장의 아브라함가정과 비교해 보라는 거예요.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이 없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언약이라는 것이 있어요. 아브라함언약과 관련된 가정이 아브라함가정입니다.
결코 아비멜렉은 복의 근원이 아니에요. 저주와 복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20장의 아비멜렉은 혼자 고민하고 걱정하고 애쓰고 살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혼자 노는 동네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지요.
신앙이라는 것이 뭐냐? 내 것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니에요. 내 것 어려울 때 문제 생겼으니 도와주세요, 이게 신앙이 아닙니다.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그거 왜 도와줘야 되는데?” “문제 일어났습니다.” “뭐가 문젠데? 그게 왜 문제인데?”
결혼식을 하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어요. “예수여, 포도주가 떨어졌네.” 예수님 하신 말씀이 간단합니다. “포도주 떨어진 것과 내가 이 땅에 와야 될 이유하고 무슨 관계 있습니까?” 주님이 양조장 사장하려고 이 땅에 왔어요? 성경에서 아비멜렉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는지를 한번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을.
지난시간에 했지만 중요한 것은 뭐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동침할 뻔 했지요. 그렇게 원인을 제공한 것은 누구냐? 아브라함이 제공했어요. 자기 아내라 했으면 그렇게 하지 않지요.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했으니까 아내삼고 동침하려고 한 겁니다. 잘못은 누가 했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했어요. 동침할 뻔 한 것은 인간적으로 봐서는 죄가 아니지요.
블랙박스변호사에게 물어보세요. 백대 빵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이고 상대는 제로에요. 전적으로 아브라함 잘못입니다. 어떤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뭐가 잘못됐어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아비멜렉 가정에 벌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모든 인간들아, 네 존재바닥에 하나님의 처벌이 놓여있다.” 하나님의 형벌이 놓여 있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걸 몰라요. 인간은 태어나서 살아온 자기이력과 경력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태어나서 잘 살면 처벌이 없고 못살면 처벌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아비멜렉이 사고방식이었어요.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자기가 살아 있는 이유가 왜 살아있는지, 왜 이 땅에 태어냐야 했는지 그 존재의 이유를 몰라요.
‘일단 태어났으니 바르게 살면 앞으로 내가 살만하고 복 받을 만한 자격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아브라함이 왔거든요. 아브라함은 언약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인간이 왜 태어났느냐의 그 밑에 있는 근원적인 것, 바탕, 깔려 있는 창세전 근거와 관련된 내용이 하나님의 약속, 언약의 주 내용이 되는 거예요.
이미 우리 조상 아담은 범죄 했잖아요.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요. 그렇다면 인생이란 뭐냐? 인생이라는 것은 네 인생 내 인생 할 것 없이 전부다 벌 받는 세월이 인생이에요. 벌 받는다는 것은 네가 잘못을 알고 모르던 간에, 착한 일을 얼마나 했느냐에 관계없이 지금 처벌받고 있는 중입니다. 형벌 받고 있어요. 우리의 타고난 죄 때문에.
아비멜렉이 뭘 잘못했습니까?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잖아요. 백대 빵, 아브라함이 잘못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가정의 여자들의 태가 닫혔다는 그 말은 태가 열린 것이 정상이 아니고 닫힌 것이 우리의 인생 살아가는 하나님의 합당한 조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태가 계속 열렸다는 말은, 닫혀도 되는데 그동안 열려 왔다는 것은 누구의 희생과 은혜가 우리의 존재 바닥에 끼어들고 있는 거예요.
죽어도 마땅한데 살고 있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잘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취지와 의미와 희생의 은혜가 우리의 존재를 받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몰고 온 언약은 그 내막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2, 30대 젊은 애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되면 자기 존재바닥에 자기는 처벌받고 있다는 의식을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노고만 생각하고,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지금 죽는다 해도 하나님은 정당하다는 이런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2, 30대 선교단체 간사들 기도하는 것 보세요.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하지 않지요.
비전과 꿈을 주옵소서, 아, 아, 입을 크게 벌리면 채우리라는 시편의 그거 나오잖아요. 그 벌리는 아가리는 누가 벌리게 하시는 겁니까? 이거 안 벌려도 돼요. 벌리게 하는 그 힘도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벌어지는 거예요. 점잖은 사람들이 왜 지옥 갑니까? 십자가 피를 몰라서 지옥 가는 거예요.
십자가 희생을 몰라서 지옥 가는 겁니다. 노력을 안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 복음은 근원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서 뭘 배우는가? 노고, 자기가 노력하는 것만 자꾸 가르쳐요. 노력하는 것만 가르치니 노력 많이 하면 보상 많이 받고 적게 하면 적게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표면에서 움직이는 것인데 바닥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교회에서 언약과 약속을 이야기 안하기 때문에 일단 채워놨으니까 누가누가 잘하나 시합을 붙이는 거예요. 애들 동요대회 하듯이.
그러니 이 일을 어떡하면 좋아요? 신앙생활 전부 다 다시해야 돼요. 지금 내가 앞으로 얼마나 향상되느냐 하는 것은 아무 관계도 없어요. 왜 그것이 신앙과 관계없느냐 하면, 그것은 내 문제거든요. 그게 약속과 언약의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라, 내 문제. 하나님은 자기 문제를 이 땅에 심어놨지 내 문제 들어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잖아요.
아브라함은 난데없이 이삭을 낳았어요. 여기 아비멜렉은 임신을 못하다가 임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지만 그것도 아브라함의 기도덕분에 그렇게 된 거예요. 아브라함이 아기를 달라과 했습니까? 이미 포기했어요. 이 나이에 무슨 아기입니까? 7절에 보면,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노경에 아들을 낳았다.”
난데없이 아들이 생겼어요. 이게 신앙이에요. 이게 신앙이라고! 천당 가야지, 천당 가야지, 노력해서 천당가는 것이 아닙니다. 난데없이 내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우리 가정에 새로운 문제점으로 우리에게 스며든 겁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라는 것은 밑바닥에 뭐가 있는지, 자기존재의 근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모르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괜찮은 것을 기억으로 해서 자꾸 덮는 거예요. 해외에 놀러가는 사람들 보세요. 지식을 더하기 위해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인생 경험 쌓기 위해서 간다고 하거든요. 자, 스페인 갔다, 독일 갔다, 일본 갔다, 돌아다녀 봅시다. 남보다 좀 더 많은 경험을 했을 거예요.
그걸 가지고 자기인생을 덮습니다. 그걸 연결을 시켜요. 그걸 퀼트라고 하는 겁니다. 조각난 헝겊쪼가리 가지고 작품 만들 듯이 이음새를 연결시키는 거예요. 그것은 내부에서 올라오는 단절을 억지로 덮는 거예요. 이음새를 덮어버린다니까요. 퀼트, 헝겊조각 연결시켜 놓고 그걸 하나로 간주해서 이게 내인생이래요.
추억쪼가리를 모아놓고 그게 내 인생이랍니다. 그런데 실제 인생가운데는 자기 자신이 처벌받고 형벌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언제 했습니까? 그것이 퀼트의 이음새를 째고 올라와야 돼요.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차이점. 아비멜렉은 내 가문 대 끊기겠다, 하다가 나중에 임신해서 ‘휴 살았다. 드디어 내 자식 생겼구나.’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는 ‘이게 누구자식이야? 내 자식은 아니고 이게 누구 자식이야?’ 하나님의 자식을 맡아 키우는 보모역할을 하는겁니다. 본인의 육에서 나온 자식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영에서 나온 자식을 맡아 키우는 그것이 성도입니다. 그게 믿음의 조상이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이 그 말이잖아요.
울산의 전도사님이 전에 특식으로 만들었던 밥이 있어요. 연꽃잎으로 싼 밥, 연밥이죠. 연밥이 정성스레 쌓여 있잖아요. 그걸 하나하나 벗기면 거기서 찰밥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껍질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내용물, 그걸 언약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언약이 천국이고 영생이에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영생이라는 말이지요.
그 생명을 우리는 바깥으로 둘러싸는 겁니다. 그걸 예수의 증인이라고 이야기해요.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너무나 쉬운 이야기입니다. 이것처럼 쉬운 것이 없어요. 연밥. 쌈밥. 상추잎사귀에 삼겹살 얹어서 된장 얹고 그렇게 먹잖아요. 하나님은 아기 못낳는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하나의 상추쌈으로 여기고 그 안에 자신의 약속을 담는 겁니다.
그게 신앙이에요. 신앙은 자기의 노고를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니에요.
자기의 신앙노력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낯선 현상이고 낯선 체험이에요. 남의 자식을 위탁받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아비멜렉은 뭐냐하면, “내 자식, 내 자식, 드디어 임신했구나! 감사합니다, 기도해주셔서.” 이게 신앙이 아니에요. 아비멜렉은 믿음의 조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비멜렉 이야기를 왜 했느냐? 우리보고 이야기하기를 “너는 어떤 식으로 신앙생활 하느냐?” 우리한테 묻는 겁니다. 우리에게 문제라는 것이 뭐냐는 말이지요. 예수님을 싸지 못해서 문제입니까, 내 것 못 지킨다고 안달 나서 불안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교회 봉사하고 말씀보고, 이렇게 하는 겁니까?
아브라함이에요, 아비멜렉이에요, 어느 집 가문입니까? 핵심은, 우리가 지은 죄는 아니지만 아담에서 내려오는 그 아담의 죄로 인하여 태어난 것 자체가 형벌입니다. 처벌받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이 아브라함언약이 주어진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 소속된 그 모든 주변의 인간들은 비언약, 또는 반언약, 다른 말로 반복음, 복음에 반대하는 세력,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 죄악 된 세계, 그 세계가 포진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혈연관계에 있습니다. 자기의 연장, 연속. 내가 죽으면 내 자식이 살고 그 자식이 죽으면 또 살고.
그저 현재에 있는 나는 무조건 이유 없이 정당하게 계속 살고 그리고 죽어서도 영생을 얻어야 된다는 막무가내, 자기영생, 자기불멸, 신처럼 영원해야 된다는 그 고집밖에 아무것도 없어요. 이유도 묻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겠다는데 나한테 이유 따지지 말라는 거예요. 나니까 무조건 구원받아야 돼요. 나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지요. 이러한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차이점이 뭐냐? 4절에 나옵니다. “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그냥 아무 때나, 나자마자 할례 행해도 되고, 8년 지나서 해도 되고, 심심하면 해도 되는데 왜 하필 팔일 만이냐는 말이지요.
이것은 이삭 안에 창세기 1장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거든요.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8일째 할례를 행한다는 말은 그 천지창조를 하게 된 진짜 본래 당사자, 창조의 내막은 이 원치 않는 아들의 출생과 그 진행과정 속에 내용이 담겨 있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아비멜렉은 나로부터 해서 나까지, 문제의 시작도 나, 해결도 나로 귀결되는데 아브라함가정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이어지느냐 하면, 나가 아니라 이삭으로 이어져요. 그러면 자기는 부인하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이삭한테 모든 축복이 전수됩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전수되고. 그래서 마지막에 오실 분, 그것은 이사야 9장 6절에 나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하게 짝이 없어요.
모사라, 기묘자라. 기묘하다. 낯설다. 같은 인간류가 아니라는 그 말이거든요. 결국 신앙의 대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상하는 그 분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점이 참 어려워요. 우리가 뭔가 기대하고 기도하고 예상한다는 것은 이미 나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내가 상상하고 짐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나 여기는 기묘자요 모사라는 것은 나의 욕구와 욕망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아비멜렉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내 것이 아쉬우면 기도하고 안절부절하고 어쩔 줄 모른다는 것은 이미 아비멜렉과 동일성을 느낍니다. 죽어서 지옥가면 안되는데. 이게 아비멜렉이에요.
죽어서 좋은데 가야 되는데. 이게 아비멜렉이라고요. 우리교회 부흥되어야 되는데. 이게 아비멜렉이에요. 이미 우리가 기대하고 짐작하는 그것을 계속해서 요구하고 요청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사야 9장에 보면,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우리는 내 것이 아쉬운 것을 달라고 했는데 막상 우리에게 찾아오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찾아와 버려요.
마치 목마를 때 물을 달라고 했는데 주께서 물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오신다니까요. “너는 물 먹을 자격도 안 돼. 죽어.” 이런 식으로 오셔서 일 하신다 하면 우리는 그걸 수용해야 됩니다. 왜? 우리는 쌈밥이니까. 하나님의 뜻을 담아야 될 것이지 내 뜻을 요청해서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것은 아비멜렉입장이라니까요.
신앙이란 주도권이 바뀐 거예요. 할례행한 아들, 그것도 최초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한 아들이 등장했어요. 이스마엘도 14살에 할례 했는데 그것 말고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한 것은 이삭이 최초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창조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시작해서는 어떤 것도 새로운 창조가 없습니다.
인간이 내민 믿음, 그런 것은 새로운 창조가 되지를 못해요. 새로운 창조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것이 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아까 연밥, 쌈밥이라고 했지요. 우리가 쌈밥이라면 우리는 그저 둘러싸 있는 거지요. 그 안에서 주님의 약속이 피어난다면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상추나 연잎에서 피어나는 것은 아비멜렉적인 욕구에요.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내가 이것이 아쉽습니다, 이거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주님 뭐하십니까, 도와 주세요, 중보기도 하오니 ……,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 것과, 그 안의 내용에서 예수님만이 아는 새로운 기도응답과 둘이 내부에서 부딪히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기도는 뭐냐 하면, 말씀대로 기도하는 거예요. 우리의 기도는 내 욕망대로, 결핍을 느낄 때 그 결핍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내것 유지하기 위해서 기도하게 되어 있어요. 대전에서 강의하는데 그런 질문이 있었어요. “목사님 강의 듣고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수천 번 들은 이야기를 또 들었는데, “요새는 기도 안합니다.” “기도를 하세요.” “목사님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기도할 것이 성경에 많네요.” 성경말씀이 줄줄이 다 기도할 것이 아닙니까. 말씀대로 되라고. 눈감고 성경 아무데나 펴도 돼요. 아까 본 이사야 9장 같으면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라고 하면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난 것을 성도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얼마든지 기도가 되잖아요. 딴 거 해볼까요? 예레미야가 애가 할까요? 예레미야가 가슴 아파 하지요. 자기백성들의 멸망을 보고. “우리도 우리 백성의 멸망을 보고 아파하게 하옵소서.” 기도할 것이 왜 없습니까? 이상하네요. 예수가 다른가? 좁은 길로 가라고 했잖아요. 좁은 길로 가게 해달라고 왜 기도 안합니까?
또 오른 뺨 때리거든 왼 뺨 내놓아라. “오른 뺨 때리거든 왼 뺨 내놓게 하옵소서.” 왜 기도 안합니까? 자기에게 손해날 것 같아서, 실제로 그렇게 응답될까 겁이 나서 그렇습니까? 사람이 항상 자기 것이 붙들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내 것에 흠집이 있고 문제가 있을 때만 기도하게 되어 있어요.
아비멜렉적인 그 기도, 자기집안 여자가 임신이 안 되니까 그 때 그거 풀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내 것 그대로 지키겠다고.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것이 아니고 난데없이, ‘내가 왜 그런 것을 기도해? 어? 좁은 길라고 가라고? 이런 기도가 내 입에서 나오다니.’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사 주의 말씀대로 되게 하옵소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취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가 되게 한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의 솜씨입니다. 바로 그것이 창조의 원리에요. 난지 팔일 만에 할례 받은, 구약은 할례지만 신약은 성령세례거든요,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이미 새로운 창조의 관여하고 있습니다.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이 땅에 약속하신 그 약속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 그 사람이 바로 성도라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열심히 자기가 설치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얼마나 스스로 자기를 거짓되게 억지를 부리면서 우겼습니까? 이제는 그 억지와 우김을 포기케 하시고, 그것이 아니라고 해주시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스스로 일으키는 그 모든 낯선 말씀의 열매들이 줄곧 주님이 함께 있음의 증거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