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아비멜렉(창20;1-7) 1704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14. 07:01
2017-04-12 20:35:00조회 : 57         
   아비멜렉 170412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아비멜렉(창세기 20:1-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RAZPO_S7uIw, Hit:1
 이근호17-04-12 21:06 
아비멜렉 

2017년 4월 12일                    본문 말씀; 창세기 20:1-5 

(20: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20:2)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20: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20: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20:5)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오늘 본문이 전반적으로 난해한 점은, 잘못을 저지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악을 저지르지 않고자 애쓴 아비멜렉에게 이미 저주가 주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인간이 악을 저질러서 저주받는 것도 아니요 인간이 선을 행한다고 해서 축복받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왕 사는 것, 악하게 살기보다는 선하게 사는 것이 이 땅에서 더 오래살고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크다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인 사고방식이 화근입니다. 인간들은 그저 인간들만 상대하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자기가 뭐가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문제를 뭔지를 알면 개선하기 위해서, 혹은 해결하기 위해 대책을 시도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뭐가 문제인지 조차도 모릅니다. 그 원인은 인간 세계 자체적으로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는 것이 선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는 것은 악이라고 여깁니다. 

사는 것을 선(善)으로 여기기에 누가 살아남느냐를 가지고 보다 더 착하고 선하게 살았느냐를 측정하려고 합니다. 즉 자신을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아예 단정 짓고 삽니다.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그동안 자신이 이 땅에서 살아남을 당연한 이유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만큼 선하고 착하기에 이만큼 산다고 여깁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살아온 자가 아비멜렉입니다. 그는 자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정당하게 할 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 앞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법으로 자기 정당함을 변호합니다. 하지만 7절에 나와있듯이 바로 그런 의식 자체가 이미 저주에 놓여 있기에 나올 의식이라는 겁니다. 

언약이 없이도 자체적으로 의로울 수 있고 저주를 안 받을 수 있는 입장일 수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들이 같은 인간들만 상대해서 그러합니다. 아비멜렉이 왕으로 있는 지역에 아브라함 가정이 들어오니, 아비멜렉의 눈에는 그냥 일반인 중의 하나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브라함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을 달고 들어왔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를 못했습니다. 아비말렉 뿐만아니라 모든 일반인들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우호적인 교제로 이루어진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정성’을 노출시키면서 이루어집니다. 

잘났다고 버티는 바로 그것 자체가 하나님에게 부정적 행위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나타내기 위해서 벌어진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의 언약과의 만남에서 어떤 특이성을 나타나느냐를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착하고 바르게 사는 그들이 이미 저주 안에 놓여 있기에 자체적으로 그런 긍정적 근거로 삼게된다 는 바로 그 사실이 하나님에게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현상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대목입니다. 속이는 쪽은 아브라함이지 결코 아비멜렉이 아닙니다. 

아비멜렉에게는 그 어떤 잘못이나 하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문제점은 본인이 뭔가 문제점인가를 언약의 사람인 아브라함 가정을 접하기 전에 몰랐다는 그 사실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비멜렉에 덮어씌어져 있는 저주가 거두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언약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그쪽으로부터 도리어 기도를 받게 되는 식으로 자기 집안에 저주가 풀린다는 말은 곧 언약의 등장 자체가 인간 세계에 저주로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가정으로 하여금 언약적 차원에서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즉 아브라함 인생에 있어 일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본인이 아니면 본인의 생존을 도와줄 그 어떤 위인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땅을 생존하게 되는 그 본질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비겁하게 처신하고 구차하게 삶을 도모하는
바로 그 모습이 자기 인생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맡긴 모습니다. 

왜냐하면 산다는 것은, 자기를 위한 삶으로 사는 것이 아님이
언약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으로 사는 사람들은, 언약을 모르는 사람들과 확연하게 달리 삽니다.
언약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의 당연함을 위한 법들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자기 생존의 정신적 울타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에 합당한 방식으로 내용들을 채워나가는 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꾸려나갑니다.
반면에 언약에 속한 사람은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습니다.
인간들이 각자 쳐 두른 그 법 밖에는 말씀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 말씀의 세계의 중심지에는 한 남자의 처참한 살해의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로만 엮여져 있는 것이 말씀의 세계이기에
성도는 자기 고유의 스토리나 역사를 가지고 내용으로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기 인생이란 실은 자기를 위한 소설이요 드라마입니다.
즉 “한평생 바르게 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주었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모두 변명이요 핑계일 뿐입니다.
인간들이 쳐놓은 법 밖에 둘러쳐져 있는 말씀의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예수님의 하실 일만 담을 그릇이요 형식이요 요건에 불과합니다.
빌립보서 3:8에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채워지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훼방하고 가리는 쓰레기더미 같은 것들입니다.
늘 예수님의 억울한 죽음에 관심을 돌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쓰레기를 뚫어 들어오는 용서의 피에 온몸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죽어도 사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차하게 살지 않기에
그 어떤 구차한 모습도 마다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4-13 18:59 
83강-창 20장 1-7절(아비멜렉)1704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0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24페이지입니다. 

  

창 20:1-7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줄 알찌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빼놓고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봐버리면 어느 쪽이 잘못했느냐? 분명 아브라함 쪽이 잘못했습니다. 잘못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해서 성상납 하는 조치를 취했고 또 문제가 뭐냐?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이 땅에서 살아남아야 그 다음에 일이 되지 않겠는가? 일단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아브라함이 가졌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아브라함은 홀로 방치되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내가 나를 살리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살려줄 사람이 없다는 것. 아브라함을 통해서 흔한 미신,

하나님이 나를 살려줄 것이라는 그것이 얼마나 큰 미신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것, 하나님이 내 뜻대로 이루어줄 것이라는 것,
그것은 자기가 누군지를 전혀 알지를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이 땅에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심지어 하나님도 도와주지 않는 방식으로 살게 하십니다. 네 인생 네가 한 번 살아봐라. 누구 도움 받지 말고. 은근히 기대하지 말고. 얼마나 냉혹하고 냉정한 세상인지. 이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미신은 교회에서 유포한 미신이고 악마가 유포한 미신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님도 안 도와줬습니다. 이 땅에서 버림받게 했어요.
예수님을 버림받게 했다는 것은 끝까지 예수님에게서 떠나지 않는 최후까지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의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은 예수님이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유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마 나를 도와줄 걸. 왜? 하나님을 믿으니까.
끝까지 따라붙는, 끝까지 들러붙어 있는 악마의 유혹의 목소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성도도 자기를 부인하고 그 십자가에 죽어야 돼요.
그런데 하나님 믿고 자진해서 죽으려는 사람이 없어요. 

  

하나님 믿는 이유가 있어요.
혼자 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 힘을 빌려서 좀더 오래 이 땅에 버티고 싶은 겁니다.
그게 종교고, 기독교고, 천주교고, 불교고 그런 거거든요.
그게 마지막 떨쳐내야 될 유혹인 것을,
악마의 외투고 점퍼인 것을.
그것을 떨어내야 되는 거예요. 

  

오늘 설교 초반에 주제를 말씀드린다면 아무도 안도와줍니다. 왜냐하면 주님 가신 길을 가야 하기에. 어떻게 사느냐는 전혀 하나님의 고려대상이 아니고 어떻게 죽느냐고 하나님이 고려대상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섭섭해 하실 거예요. 방송 듣다가 끄고 나가버릴 수도 있는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성도를 죽이려고 할 것 같으면 태어나기는 왜 태어나게 했느냐? 이것은 수십번 이야기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언약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만드는데 있어서 그 시작은 인간은 인간만 쳐다본다는 이 부정성, 잘못된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은 사람이 눈에 보이기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서 그런 식으로 세상에서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어요. 그 사람에게 밉보인다든지 그 사람에게 잘못보이면 내가 죽어요. 따라서 육신의 인간의 본능상 적을 만들어서는 안 되거든요. 친하게 지내야 되고 좀 강하다 싶으면 뇌물을 상납한다든지 해서 내 몸 하나 건사해야 돼요. 

  

그 자리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요. 하나님은 나중이고 우선 살아남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언약적으로 봐서 아브라함이 언약에 합당한 인간이에요. 그러나 언약을 모르고 이미 살아 있기 때문에 당연히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이 땅에 줄곧 살아왔기 때문에 신이 있다면 나 같은 인간은 계속 살려내야 되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이 제대로 하나님이 나를 평가한 거야. 

  

살아 있기에 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사람, 이 사람이 아비멜렉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가 당당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살아 있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자기를 정당화하는 법을 만들어요. 스스로 법을 만듭니다. 나는 이 법, 이 경계선 너머로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 안에서 하자가 없고 잘못이 없으니까, 바르게 사니까 신이 있다면 나에게 복을 줘도 합당하다. 이것이 아비멜렉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내용을 보면 이래요. 희한하게도 하나님은 잘못한 아브라함을 닦달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 해석이 어려운 거예요. 분명히 잘못한 것은, 거짓말을 한 쪽은 아브라함 쪽인데 지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우대하고 있습니다. 높이고 있는 거예요. 

  

광고에 그런 것이 있지요. “네가 게맛을 알아?” 그것처럼 네가 아브라함의 언약을 알아? 하는 식으로 접근해가는 겁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그 정당함 때문에 나는 살 권한이 있고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뭐냐? 나는 계속 살아야 돼, 라는 것에 대한 구차한 변명과 핑계를 계속 자기영역에다 쌓고 또 쌓고 있는 겁니다. 

  

아비멜렉이라는 뜻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이에요. 이 땅에서 왕으로서 계속 살 권한이 있고 너희는 나에게 통치를 받아야 돼. 왜? 태초부터 나는 왕이니까. 그런 뜻이거든요. 그만큼 자기 정당성이 있다는 것은, 이 사람이 아브라함이 그랄 지방에 오기 전까지는 자기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랄이라는 지역은 지금의 팔레스타인지역이에요. 사해가 아라비아 쪽이라면 지중해 쪽이 팔레스타인 쪽입니다. 남쪽은 남쪽인데 서남쪽에 해당돼요. 현재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 아래쪽에 그랄이라는 곳이 있어요. 지금 아브라함이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내려갔으니까요. 

  

자신의 왕으로서의 통치는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 나는 착하니까. 그러나 자기가 스스로 살고자 하는 핑계로서, 근거로서 법을 만들었는데 아브라함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 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와서 바른 소리만 하고, “사실은 제 아내인데 살려만 주세요.” 이렇게 나왔더라면 아비멜렉이 언약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접선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놓쳐버려요. 

  

아브라함이 가장 인간적이고 솔직한 것, 다시 말해서 ‘살고보자. 거짓말을 해서라도 살고보자.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거짓말을 해서라도, 남의 땅이니 강자에게 고개를 숙여서라도 일단 살고보자.’라고 아주 지저분하게, 추잡스럽게 살고자 하는 그 본심을 가지고 거짓말로서 그대로 아비멜렉에게 접촉했지요. 

  

하나님께서 꿈에 아비멜렉에게 찾아오기 전까지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는 그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 일반적인 사회생활과 똑같이 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늘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뭐냐? 지금 아브라함을 탓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비멜렉과 하나님과 관계를 하는데 아비멜렉은 이런 식으로 신을 대합니다. 

  

‘내가 착하면 우호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관계가 하나님관계다. 내가 나쁜 짓을 했을 때는 벌도 주고 하겠지만 내가 착하고 정상적으로 남에게 양심에 거리낌 없이 바르게 살게 되면 나에게 줄 복을 주시고 그 복에 의해서 살게 하실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접근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언약이 다가왔다는 것은
내가 잘났다는 그 자체가 허점을 도려내고 노출시키고 그것을 부정적인 평가로 보시는 그 기회,
그걸 징후라고 하고 증상이라고 하는데,

내가 구축하는 나의 세계 자체가 저주받을 짓이라는 것을 노출시키는 방법으로 뭔가 느껴진다면
하나님의 언약이 가까이 있는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신약으로 한다면 성령이 가까이 오신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자체적으로 아무 하자 없어요. 아무 문제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어려운 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4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자기를 의롭다고 간주하고요. 

  

내가 사전에 남의 여자인 것을 알지 못했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자기 아내면 아내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누이동생이라고 했기에 그 누이동생과 혼사를 하는 것은 자기 법에 의해서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지요. 자기가 평소에도 문제가 없는 의로운 자고, 그리고 아브라함과의 만남에서도 하등 잘못한 것도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7절에 보면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찌니라.” 했어요. 7절 끝부분 말씀에 의하면 자칭 네가 잘났다고 우기는데 사람보기에는 잘난 것 맞는데 하나님이 준비한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너는 잘났든 못났든 저주받을 백성이고 저주받을 가문이고 가정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너는 저주받을 이유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저주받으면서도 자기한계 안에서, 자기가 쳐놓은 그 울타리 안에서는 나름 의롭게 산거예요. 나름 바르게 산겁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바르게 살고 있는 사람에게 “너는 바르게 살아도 저주받아야 돼. 지옥가야 돼.”라는 말을 어떤 근거에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본인이 죄를 느꼈을 때, “죄지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지옥 가!” 이것은 앞뒤가 맞는 이야기인데 전혀 본인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너는 앞으로 지금보다 더 바르게 산다고 할지라도 지옥 가는 네 신세는 변하지 않아. 너는 바르게 살면서 저주받아라. 인간아!” 이 말이 논리적으로 도저히 같은 인간들 세계에서는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은 한마디로 이렇게 됩니다. 인간은 도무지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몰라요. 부산강의에서 지젝을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람의 가장 근본 문제가, 문제가 뭔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나에게 뭐가 문제인지를 몰라서 문제가 된 거예요. 나에게 뭐가 문제인지를 알려면 근원적으로 내가 이미 문제 있음을 한아름 내용을 안고 누가 찾아와 줘야 돼요. 

  

누가 찾아오지 않는 한 나는 열심히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아비멜렉같이. 교회에서 목회라는 것은 사실은 성립이 안돼요.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그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사람들 각자 자기 법이 있어요. 그 법은 자기가 조금 더 정당성 있게, 다시 말해서 벌 안 받고, 하나님에게 징계 안 받는 쪽으로 그저 바르게 살아서 바르게 산 그 보상만큼 더 부자 되고 오래살고, 이미 그것이 인간들이 법을 만들어내는 근거로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게 아무 문제가 없는 거지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그것은 어디서 알게 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한계를 자기가 날마다 만들어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한계지요. 그런데

그 한계밖에 어떤 세계가 있느냐 하면, 말씀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세계는 중심점이, 구심점 있어요. 
그 구심점은 뭐냐 하면, 신약적으로 말씀드려서 어떤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그 사건이 구심점이 되어서 말씀세계가 구성되어 있는데
그 말씀세계는 인간이 한계를 지어서 내 세계라고 울타리지은 그 바깥에 있어요.
울타리 바깥에 있는 그 말씀의 세계에 안 들어갔으니까
그 울타리 안에서는 어떤 일을 해도 그 구심점, 그 안에서의 중심점은
항상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쪽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성도라는 것, 교인 말고, 자칭 신자라는 것 말고,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세례 받은 성도라는 것은 말씀의 세계에 놓인 사람입니다. 말씀의 세계에 놓인 사람은 무엇이 없어지느냐 하면, 내가 살아야 된다, 죽어야 된다는 그 자체가 말씀의 세계에서는 무의미해지는 거예요. 나라는 그 주체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말씀의 세계에서, 언약의 세계에서, 또는 주님이 중심 되는 세계에서 인간만 있는 인간끼리의 세계에 넘어오게 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용은 전혀 없고 형식만 있는 세계입니다. 지금껏 설교 중에서 제일 어려운 문장을 방금 이야기했어요. 

  

내용은 전혀 없고 형식만 있는 세계. 인간이라는 요건, 조건만 구비되고 내용은 전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세계가 말씀의 세계에서 주님이 보는 인간세계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인간인 요건은 누가 정했는가 하면, 인간 본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하여 피조물이라는 요건을 하나님 쪽에서 만들었거든요. 

  

만들었는데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그 울타리가 한계가 있기에 그 한계 안에서 저쪽 말씀의 세계는 전혀 모르고 자체적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자체적으로 돌아가니까 인간들은 어디에 신경 쓰느냐 하면, 내가 스스로 어떻게 인생을 살더라도, 누가 보더라도 나는 칭찬받을 만하고, 복 받을 만하고, 정말 잘 살았다 하는 그 내용은 내가 채우지 않으면 아무도 채울 수 없다는 식으로 자기 안에 내용을 채우는 거예요. 

  

형식은 누가 만들었는지 전혀 모르고 내용만 채우는데 그 내용이 소설입니다. 그 내용이 소설이에요. 그걸 어려운 말로 서사적이라 하는데 하나의 자기 스토리, 자기가 주인공이 된 자기드라마를 매일같이 만들어냅니다. 물론 내일이 되면 또 과거의 소설을 수정해요. 때가 되면 또 1년 전의 것을 수정하고. 

  

그래서 이 세상은 외칩니다. 세상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네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모든 교회가 그렇게 외칩니다.
여러분이 40을 살고 50을 살고 백 살을 살더라도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악마의 목소리입니다.
그것은 사기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은 개판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기 아내가 애굽에서도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었고 또 이 낯선 지역에서도 자기 아내덕분에 자기를 살리고자 하는 버릇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나름 착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이 아내가 없었을까요? 어쨌든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은 사랑했다는 뜻이잖아요. 아무리 정략결혼이라 할지라도 못생긴 것은 용서가 안 되잖아요. 이 세상에서 못난 것은 용서가 안 됩니다. 학교에서 남자들은 공부 못하는 것은 용서가 안 되고 여자는 못생기면 용서가 안돼요. 

  

여자로서 제일 용서가 안 되는 경우는 공부도 못하고 못생긴 겁니다. 요새는 남자도 예쁘고 공부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답니다. 아비멜렉이 자기한계에 놓여 있다는 그것은 어떤 근거에서 그런가? 아비멜렉은 왕입니다. 정치가지요. 정치란 전문분야입니다. 이 사람이 왕이고 정치가기 때문에 통치하는 것이 전문분야인데 그 전문분야로 세상의 모든 일어나는 현상이 커버가 안돼요. 

  

이게 인간이 갇혀 있다는 뜻입니다. 의사다. 수술 잘하면 되지요. 수술 잘하지만 어떤 여인을 취할 때 자기가 그 여인이 취할 여인인지 아닌지는 의료기술이 좋은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직업들은 그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려면 모든 것을 끊어버려야 돼요. 

  

고등학교 때부터 벌써 자연계하면 인문계는 모르고 인문계 하면 자연계 모르잖아요. 문과 하면 이과 모르고. 대학 들어가면 자기전공분야 외에는 의도적으로 다른 것은 끊어야 돼요. 사람은 두 가지를 다 못합니다. 부전공을 해도 그것은 시원찮게 공부해요. 충실하게 공부 못합니다. 

  

어떤 자기전공분야가 되어버리면 나머지 분야에서는 바보가 되어버린다고요. 그 전문분야는 자기생계수단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하고 납득하려 하니 이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는 돈 벌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과연 돈 버는 세상이냐, 아니면 그것 외에 돈 말고 다른 중요한 의미가 또 있느냐? 

  

나중에 얼추 돈 좀 벌고 하게 되면 알지요. 돈밖에 모르는 인간들은 재벌 되고 부자가 되어도 드라마에 나오듯이 여자문제나 부정부패문제나 돈만 주면 다 돼요. 특히 법률회사 같은 곳은 장차관부터 해서 대법원장 했던 사람들까지 돈으로 다 해요. 양아치들 쓰는 것도 다 돈으로 해요. 

  

지금 아비멜렉은 정치인입니다. 낯선 나그네인 아브라함이 자기땅에 왔을 때 자신은 왕이고 통치자거든요. “네가 내 땅에서 곱게 살려면 뭔가 내놔라.” 이거예요. 이걸 사전에 아브라함이 감을 잡지요. 세상 살만큼 살았으니 뭘 좋아하는지를 알아요. “제게 누이동생이 있습니다.” “예쁘네. 괜찮네.” 그래서 한 거예요. 

  

정치인은 자기가 좋아하는 예쁜 여자를 가질 수가 있다. 이게 뭐가 문제냐 그 말입니다. 왕이기에 왕은 최정점에 있으니까 왕으로서는 모든 것의 정답을 내릴 수 있고 그럴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할 줄은 몰랐어요. 아비멜렉이나 아브라함이나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 배후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상상도 못했지요. 왜냐하면 정치꾼은 인간들을 통치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대상으로 정치한다면 정치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해서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배후의 세상 전체를 언약으로, 십자가언약으로 다 해명이 가능한 성령이 주신 지혜가 있는 성도는 구차하게 살기 위해서 자기전공분야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고개 숙일 필요가 없어요. 

  

고개 숙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아낌없이 아첨할 필요가 있어요. 앞뒤가 맞는 이야기인지 안 맞는 이야기인지 알아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완벽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차피 이 땅은 하나님이 해결할 문제지 내가 해결할 문제 아니라는 것을 아브라함은 알았고 아비멜렉은 정당함을 유지해서라도, 의로움을 유지해서라도 모든 문제는 자기전공분야에 한해서 자기가 해결해야 돼요. 

  

누가 저주받느냐? 자기 손으로 해결하는 저쪽이 지옥가고 나 몰라, 하고 자기 자신을 내팽개치고, 자기인생을 내팽개치고, 인생을 자기가 굴릴 수 없는 입장인 것을 벌써 아는 이쪽이 이미 천국 가도록 예약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걸 경상도 말로 봇짱 편하다고 해요. 배짱이 크다는 그런 뜻이지요. 뱃속이, 맘이 편안하다는 그 말입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딱 등장하니까 자기는 도망칠 수 없는 어떤 울타리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을 고려 못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저 아브라함이라는 가정의 그 배후의 전능하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날 정도로, 꿈에 나타나서 저 사람은 내 사람이라고, 내 선지자라고 강력한 빽을 후광에 업고 등장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비멜렉은 나름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편에 서 있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동안 왕으로 잘 살아왔기 때문에. 하지만 거짓말 하는 저쪽 편에 진짜 하나님이 있는 줄은 몰랐지요. 자기한테 넙죽 절하고 성상납을 아낌없이 하는 저 약하디약한, 스스로 남을 공격할 여력이 없는 저쪽이 하나님과 한패 먹고 있는 줄을 몰랐던 거예요. 

  

쥐어박기로 하면 언제든지 쥐어박을 수 있고 밀면 금새 엎어질 수 있는 약하디약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스스로 방비할 수 있는 어떤 체제가 없는, 그래서 내 밑에 기어 들어와서 그저 밥이나 먹고 살려고 하는 그 나그네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올 줄을 몰랐던 겁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모습으로 인간 속에 들어오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만 상대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체적인 내용을 자기가 채우지 않기 때문에, “내 인생 이렇게 바르게 살래.”라는 것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습니다. 

  

내 인생 반듯하게 살겠다는 그 어떤 내용도 이것은 하나님이 채울 것이지 본인이 채우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런데 반면에 아비멜렉은 자기 인생 내용은 자기가 채워야 되는데 채우면 채울수록 하나님께서 저주로 가라고 재촉을 하고 있으니 이거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되는가? 7절에 보면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고 했어요.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지금껏 아비멜렉은 스스로 본인 힘으로, 본인 능력으로, 본인선행으로 본인이 죽어도 살 수 있는 식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내가 어떻게 구축했느냐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평소에 내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자기관리해가면서 착하게 살면서 매일같이 일기 쓰면서, 오늘도 깨끗하게, 오늘도 바르게살기, 바른 생각, 바른 행동, 바른 말, 착한 아이처럼, 착한 사람처럼, 양심대로, 그게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점점 더 콘크리트처럼 타설을 해서 점점 더 두껍게 주님의 오시는 길을 본인의 선행, 착함이 틀어막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 문제가 없는데, 착하기만 했는데 그러면서도 뭔가 해결되지 않는 미진한 것이 남아 있는 것, 도대체 내가 뭐가 문제지? 착한 것은 나도 알겠는데 그걸로 인생의 문제가 해결이 안돼요. 시원하게 탁 하고 하늘나라하고 뭔가 시원하게 구멍이 뚫리지를 않는 거예요. 꽉 막혀 있는 거예요. 

  

사이다를 먹든지 콜라를 마시든지 뭔가 펑 하고 하늘하고 확 좀 트였으면 좋겠어요. 현대인들이 꽉 막혀 있어요. 불쌍해 죽겠어요. 선지자가 없고, 구원자가 없고, 구세주를 무시하는 겁니다. 만약에 선지자를 찾고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그냥 찾으면 안돼요. 

  

자기가 그동안 자기 잘남의 자랑거리로 만들었던 모든 그 더러운 내용을 빌립보서 2장의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배설물로 여겨야 돼요. 그걸 두자로 변비라고 하지요. 꽉 막혀서 변비에요. 뚫어야 돼요. 누가 오셨어. 사람들은 어떤 남자가 비참하게 살해당한 거기에 관심사가 점점 더 엷어집니다. 

  

심지어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누가 억울하게 죽은 것은 관심이 없고 자기 천당 가는 것만 관심이 있어요. 바르게 살래, 이렇고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 어머니 집 하수구가 쓰레기로 꽉 막혔어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집에 화학제품이 있는데 그걸 붓고 한두 시간 뒤에 가보니까 물 잘 내려가는 거예요. 

  

그 화학제품이 안에 있는 찌꺼기를 녹여버렸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이미 용서했다는 거예요. 선을 쌓지 말라는 겁니다. 덕을 쌓지 말고 선을 누적하지 말고, 착한 일을 누적하지 말고 그 때 그 때마다 십자가피로 주님의, 예수님의 복음을 가로막는 나의 착함을 그 화학작용으로 녹아내려서 배설물로 다 떠내려 보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의 피는 바로 말씀세계에서 일체 어떤 우리의 내용 같은 것이 없어야 돼요. 형식만, 예수님을 위한 사람이라는 그 형식, 요건, 조건만 남기는, 껍질만 남는 가벼운 성도, 그게 바로 성도의 삶 아닙니까? 남들이 보고 아브라함 욕하는데 주님은 오히려 욕먹는 아브라함을 앞장세워서 이 세상은 언약중심이라는 것을 이 못난 아브라함 통해서, 정말 못난 아브라함을 통해서, 비겁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 세상에 알립니다. 

  

이제 성도로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밖에 안 남았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비겁하시기 바랍니다. 비겁하게 사세요. 돈 한 푼 가지고 벌벌 떠는 그렇게 비겁하게 사는 것, 비겁하게 살도록 주께서 그런 상황을 주신 것에 대해서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못나고 못났다는 것, 진작 알았기에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땅에서 남이 누릴 수 없는 자유를 마음껏 누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둘러볼 때에 그들 눈에 선지자 안보이고, 구원자 안보이고, 하나님 안보이고, 말씀 안 보입니다. 그저 인간만 상대하면 될 줄 아는 그들, 주여, 구원된 자에게, 구원될 자에게 저희들을 보내서 우리가 다 같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함께 공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