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쫓겨난 하갈(창21;8-13) 1705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5. 6. 16:32
2017-05-03 20:35:14조회 : 66         
   쫓겨난 하갈 170503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쫓겨난 하갈(창세기 21:8-1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JgQ_fI232mw, Hit:2
 이근호17-05-03 21:16 
쫓겨난 하갈 

2017년 5월 3일                      본문 말씀: 창세기 21:8-13 

(21: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21: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21: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21: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21: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21: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간단한 가정사 문제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지만 실은 창세기 3장에 언급된 인류의 운명과 연관있는 문제입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전 인류가 두 부류로 구분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를 유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대표자에서 ‘남자’는 빠져 있습니다. ‘여자’와 ‘뱀’이 최종적으로 대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 아브라함 가정이지만 아브라함이 주도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여자인 ‘사라’의 의지가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독한 여인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남편의 자식을 낳은 첩에 대해 과도한 질투와 매정한 처우를 내리고 있습니다. 다같이 자식 키우는 여인네로서 시기의 화신이 되어 한 집에서 14년이나 함께 살았던 첩과 첩의 자식을 단숨에 내어쫓으라고 남편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인정사정도 보지 않고 일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당황한 쪽은 가장인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결정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 아내의 과도한 질투심으로 내린 결정을 어떻게 보실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의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사라의 편을 전적으로 옹호한 듯한 지시가 내려집니다. 

“내어 쫓아라!” 그렇다면 과연 사라의 매정한 심보가 진리에 가까웠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에 가정이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된 가정인 것을 압니다. 그런데 언약의 개입이 가져다주는 의미란 바로 온 세상의 중심처 역할을 말합니다. 즉 사람들은 각자 자기를 위한 중심처를 마련하고 마음의 안식을 거기서 얻으려 합니다.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세상 사는 이유를 자신의 고향같은 마음의 중심처에서 해답을 얻으려 합니다. 즉 자신의 본질을 그런 시도로 확정지을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습니다. 영원한 중심처는 하나님의 창조와 더불어 같이 흘러들어왔습니다. 

그곳은 바로 ‘언약 안’입니다. 그곳에 도달할 때만 비로소, ‘하나님의 원칙, 하나님이 약속’을 압니다. 그 약속은 다름 아닌 누가 ‘여자의 후손’인지 누가 ‘뱀의 후손’인지가 확정되는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즉 인류는 본인들이 정한대로 살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은 겁니다. 창조의 원래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두 패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이 중심처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전은 이 두 노선 사이에 ‘핍박’이 발생토록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29-31에 보면,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갈라서야 될 두 노선에 대해서 같지 않는 원칙을 따로 적용시키십니다. 그것은 바로 유독 ‘여자의 후손’의 노선에 대해서만 ‘뱀의 후손’ 측에서 조그마한 행동으로 거스리게 해도 하나님께서 과도한 징벌과 처벌을 취해버리십니다. 이삭을 건드리는 자는 지옥보낸다는 원칙을 작렬시키시는 겁니다. 

비록 뱀의 노선에 속한 자들에게 매정하게 내어쫓는다고 하더라도 ‘여자의 노선’ 쪽으로 아무런 징벌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서 편들어 버립니다. 마치 사라의 질투성 행위에 대해서 동조하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1.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둘(2)이 되면 아니되는가? 2. 왜 상속자가 아닌 자를 먼저 낳게 해서 상속전달에 혼선을 야기시키시는가?입니다. 

첫 번째 질문의 답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투쟁의 장이 곧 인류의 역사라는 점이 그러합니다. 둘 다 좋아지는 결과를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2의 질문의 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범죄한 인간 세계에서 ‘자기네들을 사랑해주시는’ 가짜 하나님을 벌써부터 생산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을 권리를 지닌 분이라는 점을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핍박’을 야기도록 합니다. 이 ‘핍박’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뱀의 노선’에 대해서 복수를 감행하시려는 식으로 원칙을 정해놓으신 겁니다. 

그 원칙은 신명기 19:21에 나와 있습니다.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저말고 복수를 하여라입니다.’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두 노선에 대해서 차등적인 원리를 적용시키기기 때문입니다. 

“어딜 감히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자를 건드려!”라는 식으로 나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비록 사라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질투심으로 과도한 반응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그런 성질을 통해서 하나님의 원칙을 적용시켜 버리시는 겁니다. 이러한 적용은 극단은 마태복음 5:38-40에 나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 같지도 않는 자를 갈구거나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무시무시한 하나님께서 지옥불로 친히 복수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잘못 건드린 대가를 영원토록 치르도록 다 조치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아무렇게나 사면 그만일까요? 아닙니다. 성도 자체가 언약의 개입으로 분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 자신이 곧 주님을 핍박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제 3자의 입장에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구원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기로 인해 핍박받으신 바로 그 분의 대속과 용서로 인하여 구원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오는 사랑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도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별세하기를 고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자신들의 과거는 본인들이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핍박했던 사울에게도 찾아오신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심이 곧 긍휼이요 사랑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5-04 05:57 
86강-창 21장 8-13절(쫓겨난 하갈)1705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1장 8-13절입니다. 구약성경 26페이지입니다. 

  

창 21:8-13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한 가정에서 아내가 두명이 되었을 경우에 반드시 여기서 시기와 질투가 발생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한쪽이 자식이 없으면 기가 죽기 마련인데 드디어 본처에서 자식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먼저 난 자식이 있고 뒤늦게 낳은 본처의 자식이 있을 때에 이것은 독보적으로 아버지의 유산, 지분을 누가 이을 것인가의 경쟁자가 생긴 셈이지요. 

  

비율은 2 대 1입니다. 둘 중 하나가 되는데 여기서 본처 되는 사라가 자기 여종의 소생과 더불어서 그 여종, 남편의 첩을 내어 쫓으라고 남편에게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쉽게 말해서 기분 더럽다는 그 말입니다. 거추장스럽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아브라함이 잠시 근심을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기를, “근심할 일이 아니다. 네 아내 말대로 내어쫒으라.” 이렇게 된 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정의 가장이지만 주도권이 가장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여자 사라에게 주어졌다는 인상을 강하게 느끼게 되지요.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게 된 마당에서 그 여자의 후손은 반드시 그냥 여자의 후손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짝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뱀의 후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약속을 이야기할 때는 그런 구체적인 현상은 차후로 계속 미뤄지는 거예요. 

  

먼저 선언부터 해놓고 그 하나님의 선언에 맞춰지는 역사가 펼쳐지는 겁니다. 그 맞춰지는 역사, 구체화되는 역사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사이의 연결고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그렇다면 이 역사에 흐르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대로만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관계. 더 쉽게 말해서 여자의 후손은 누구며 뱀의 후손은 누구냐? 이 세상은 양편으로 구분되어 있고 나눠지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운명입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것이니 운명이지요. 

  

두 패로 나눠졌을 때에 한패는 무엇이며 다른 한패는 무엇인지 우리가 뚜렷이 알아야 되는데 그 아는 그 방법, 알 수 있는 그 계기는 본 중심처로 올 때 두 개가 뚜렷하게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 중심처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과 함께 있던, 언약에 의해서 주도당하고 있는 아브라함가정이 이 우주, 지구의 중심처가 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세요. 세상 사람들이 연휴라고 놀러갑니다. 놀러갔다가 연휴 끝나면 다시 어디로 가느냐는 거지요. 자기고향으로 돌아오지요. 자기직장이 있는 곳이나.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중심처로 보는 겁니다. 원상 복귀할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얻고 나는 이런 인간이라는 자기의 아이덴티티, 자기정체성을 확정해주는 그 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세상 사람이 중심처라 여겼던 것은 어디냐 이 말입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중심처가 서울이에요. 왜? 거기에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몰려 있기 때문에. 서울서 직장생활 하다가 연휴 맞아서 경남 고성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고, 목포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고. 나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중심처는 항상 지금 나의 직장이 있는 곳이고 나의 가정이 있는 곳이에요. 

  

그렇다면 서울이라는 중심처가 북한의 핵에 박살나고 다 죽는다면 어디로 가야 되지요? 불안불안한데 사드로 막아낼 수 있습니까? 국군장병여러분, 답변해 보세요. 사드가 막아낼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그러니 인간은 평생을 살아도 자기 하나 지킬 수 있는 중심처가 없는 거예요. 여기 의존했다가 저기 기댔다가. 

  

안철수 찍으려고 하다가 홍준표 찍으려고 하다가, 문재인 찍으려고 하다가. 심상정은 별로 없습니다만. 자꾸 이렇게 마음을 영원까지 다 던져도 푹 안심할 수 있는 그 중심처를 찾지를 못해서 근원적으로 걱정하고 힘들어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에 빠져 있습니다. 

  

서울에 있다가 고향에 가 보세요. 옛날의 고향은 부모가 젊었어요. 온다면 맛있는 것 다 해줘요. 그런데 자기 나이 한 60되어서 가보세요. 가지 말라고 손 붙들면 늙은 부모 놔두고 도망치는 불효자식 같기도 하고. 가면서 ‘우리 아버지는 왜 저리 오래 사는지 모르겠다.’ 하는 거예요. 

  

이런 푸념이나 내놓을 수밖에 없고. 세상 모든 것이 산다고 해서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산다고 하면 짜증낼 일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겁니다. 첫째는 나의 고향, 다복한 고향, 안정성 있는 그곳, 나의 보금자리를 보장해주던 그 부모님들이 이미 쇠퇴했다는 것, 믿을만한 분들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본인의 육신의 건강, 머리는 희어지지요. 관절은 다 아프지요. 자기한테 도움 요청하는 자식은 있지요. 자기 몸은 피곤해지지요. 우루사! 그걸로 될 문제 같으면 걱정도 안합니다. 아로나민골드 백날 먹어봐야 그것도 젊을 때지 나이 들어서 그런 거 백날 먹어봐야 되지도 않아요. 

  

몸은 망가지지요. 자기 쳐다보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니지요. 모든 것이 짜증이 나지요. 세월 가면 갈수록. 내가 그동안 왜 살았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달려왔는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 없어요. 중심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언약이 아브라함언약이 인간의 영원한 중심처가 된다는 겁니다. 결국은 나 하나 설명해주기 위해서 온 우주가 다 동원된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언약이 네가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고 네 마음이 갈 곳이 없는 이유가 중심처를 놓쳤기 때문에 갈 곳이 없다는 거예요. 

  

네가 원하는 중심처는 전부 다 폭격을 해서 부숴버리는 거예요. 그것은 가짜였던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중심처에 돌아와야 아는 것이 뭐냐? 그 중심처에서 주께서 실시하시는 원칙을 알게 돼요. 그 원칙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갈등이에요. 

  

그런데 중심처에 오지 아니하면, 나 행복하냐, 나 행복하면 이게 뱀의 후손이든 악마든 상관없이 무조건 나 예뻐하고 나 사랑하고 나 도와주고 경제적으로 후원해주면 그것으로 한편이 되어서 그게 영원한 세상의 중심처라고, 옴팔로스, 세상의 중심이라고 착각을 하기 마련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머리가 좋은 사람은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아브라함언약의 상속자, 아브라함언약의 축복을 받으니까 아브라함언약의 상속자인데 왜 언약의 상속자가 두 명이나 되느냐 이 말입니다. 헷갈리게. 

  

처음부터 이스마엘을 낳겠다, 할 때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저지해서 못 낳게 하고 그냥 처음부터 이삭을 낳아서 이삭에게 아브라함약속을 물려주면 일은 깔끔하게, 상큼하게 처리되거든요. ‘이삭이 중심처구나. 하나님의 복이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구나. 그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여자의 후손이 되고 뱀의 후손이 아니구나.’ 모든 것이 정리가 되는데 왜 두 명이냐 그 말입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왜 둘이 되면 안 되느냐 하는 거예요. 이게 어려워요. 왜 둘이 되면 안 되는가? 이스마엘과 이삭 둘 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식이에요. 오늘 본문에 보면 그것 때문에 아브라함이 갈등하고 있거든요. 자기가 낳은 자식을 내가 차버린다는 것은 부모 된 도리로서, 윤리도덕으로서 용납이 안 되잖아요. 

  

비록 하녀라 하지만 그 하녀가 그냥 하녀입니까? 자기자식을 낳아준 하녀인데 그걸 내치면 인간된 도리로서 말이 안 되지요. 죽으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결국 이용해먹는 것이 되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얍삽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지요. “아이고, 귀한 내 자식 이스마엘을 낳아줘서 고맙다.”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너는 상속자 아니니 내치겠다.” 

  

그러면 이스마엘과 하갈 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같이 옆에 있으면 왜 안 되는데요?” 분명히 이렇게 나온다고요. “같이 옆에 붙어 있겠습니다. 내가 상속자로 처신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권세에서 본처한테 밀렸으니까 우리는 갑이 아닌 을로서 붙어서 살게만 해주면 고맙겠습니다.”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함께 있으면 안 된다. 함께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 문제를 설명하기가 참 난처하고 어려워요. 하지만 해야 되잖아요. 이게 굉장히 복잡하더라도 해야 돼요. 문제 던진 것을 제가 다시 한 번 상기시키겠습니다. 왜 둘 다 상속자가 되면 안 되는가? 왜 꼭 하나이어야만 하는가? 

  

그렇게 하나를 고집했으면 처음부터 문제가 일어날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이스마엘을 못낳게 하고 이삭만 낳았으면 간단하게 풀릴 문제를 왜 하나님께서 복잡하게 몰고 가 놓고 나중에는 한쪽을 매정하게 내쳐버리면 내쳐진 입장에서는 너무 서럽지 아니하냐, 하는 겁니다. 

  

이런 문제를 논리적으로 풀 때는 진짜 어렵습니다. 어려울 때는 방법이 뭐냐? 결론을 먼저 제시하는 거예요. 결론을 먼저 내면, 누구든지 복에 속한 사람 건드리면 지옥 보낸다, 이게 결론입니다. 인간들 보기에는 이스마엘도 상속자요 이삭도 상속자, 두 사람이 상속자로 보일 때에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상속자에게 원칙을 달리 적용해버립니다. 

  

한쪽 이스마엘은 얻어터져도 “맞아도 싸다.” 해버리고 한쪽 아들은 털끝 하나만 건드려도 지옥 보내버립니다. 불공평하기 이를 데 없어요. 동일한 원칙을 둘 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고 달리 다른 적용을 시키는 거예요. 다른 원칙을 적용시킨다는 그 말입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출애굽기 21장 24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네가 남에게 얻어맞아서 이가 한 대 부러졌다면 반드시 그 사람을 찾아내서 그 사람 이도 두 대도 아니고 딱 피해 본 만큼 한 대 부러뜨리라는 겁니다. 

  

참지 말아라. 반드시 복수해야 된다. 맞은 너는 네 몸이 아니고 하나님 몸이기 때문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 출애굽기 21장 24절의 내용 가지고는 담겨 있는 깊이 있는 내용을 몰라요. 똑같은 말씀인데 신명기 19장 21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누군가로 인해서 발을 다쳤다면 그의 발도 다치게 만들어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앞에 전제가 있어요.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불쌍히 보지 말라는 겁니다. 이게 2천년 교회 모든 신학을 무너뜨립니다. 2천년 모든 신학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이에요. 불쌍히 여기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인간은 범죄하고 난 뒤에 자기가 범죄한 것은 생각 안하고 범죄를 했든 안했든 간에 무조건 우리는 긍휼이 여김 받아야 되고 무조건 우리를 사랑해줘야 되는 하나님을 자체적으로 생산해냈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감히, 어느 누구도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제가 보기에는 신학자 중에 없어요. 지옥 불 백날 이야기해도 그 사람들 안 믿습니다. 천국부터 먼저 계산하고 있어요.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사랑으로 들어간다. 

  

마치 자기세상인 것처럼. 당연히 따 놓은 당상인 것처럼. 교회 등록하면 천당 가는 것처럼. 성만찬 하면 오늘 죽어도 천당 가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호객행위를 해온 거예요. 예배당 지어놓고 꽉꽉 채운 겁니다. 성도는 절대로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에요.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왜 불쌍히 여기지 않아야 되느냐 하면, 네가 너를 볼 때의 원칙과 네가 남을 볼 때의 원칙은 달라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도달된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것이 특별히 너에게 갔기 때문에 너에게 간 것을 남에게 인심 쓰듯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줬는데, 그래서 자기가 받은 것을 가지고 자기가 마치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남에게 나눠줄 수 있는 권한도 위임받은 듯이 착각을 해서 중보기도 한다고 난리에요. 불쌍히 여긴다고 난리에요. “네가 제대로 사랑을 받았으면 절대로 남을 불쌍히 여기거나 남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 사랑의 질,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네가 안다면, 그걸 안다면 너는 남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하나님은 숨어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체적으로 생산해 낸 하나님이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나를 사랑해주는 하나님을 나는 선호하고 있고 따라서 내가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여기기에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구원을 하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핍박을 받아야 돼요. 누구한테? 내가 사랑했던 자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됩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에 의해서 나오는 유명한,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9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핍박없는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핍박 받음이 경계선이 되고 구분점이 된다는, 두 계열을 가르는 가름점이 된다는 거예요. 그 핍박이라는 것이. 핍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했기에 비로소 벌어지는 거예요. 

  

핍박이 없으면 누가 성령을 받은 사람인지, 누가 성령 받지 못해서 육체로 해서 지옥 갈 사람인지를 핍박이 없는 상태에서는 알 도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핍박이 일어나기 이 전에는 핍박이 일어날 이유에 대해서 당사자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좋은 것이 좋기에. 

  

이스마엘도 내 자식, 이삭도 내 자식.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아브라함이 기분 좋아서 잔치를 열었는데 거기에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했다 하잖아요. 한참 까불 나이 아닙니까? 그리고 어린 이삭이 핍박을 알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그런데 무슨 핍박과 핍박받음이 성립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대목을 인류가 두 조각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기준점 개입으로 보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기준점 개입을 함으로서 누가 놀라는가 하면, 오히려 주변에 있는 점잖은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놀라버려요. 

  

아브라함이 당황하게 됩니다. 좋은 게 좋잖아요. 가정의 평화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본문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라한테 있지요. 사라가 희롱한 사실이 있다고 해서 ‘잘됐다. 빌미가 없나 했는데 열 네 살씩이나 먹은 형이 동생을 갖고 노는구나. 이참에 내 쫓자.’ 

  

나이 90이 넘은 인간 같으면 그렇게 심하게 굴면 안돼요. 열댓 살 먹은 애가 무슨 철이 있습니까? 잘 타이르면서 “앞으로 그러지 마라. 동생 귀여워해줘라.” 이렇게 좋게 지내면 될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독해요. 아주 마음씨가 독하기 짝이 없어요. 질투의 화신이에요. 아주 노렸어. 한번 보자, 하고 노렸던 거예요. 

  

열 넷 먹은 애가 무슨 철이 있습니까? 어린 동생 놀렸다고 그걸 빌미로 해서 그 애만이 아니고 “그 어미도 같이 나가!” 이런 식으로 자기 남편에게 억압을 하면서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것, 이것은 같은 인간 입장에서 좀 과하다, 심하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드디어 윤곽을 드러내는 결정적 순간으로 잡아버립니다. 

  

사라가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어떤 계기가 되었든, 인간성에 푹 젖은, 더러운 인간적인 본성에 푹 젖어 있든 아니든 간에 하나님의 언약의 원칙, 따로 적용한다는 그 원칙은 이 가정에 어떤 사건을 통해서 확정짓고 마는 겁니다. 열네 살 먹은 형이 막 태어난 이삭을 해코지 했다 칩시다. 

  

우리 같으면 해코지 당한 이삭을 나중에 한 열 아홉 살 먹도록 키워서 혈기왕성할 때 서른 몇 살 되어 있는 형 보고 “힝아(형아)! 내가 아무것도 모를 어릴 때 나 희롱했지? 이것은 하나님의 복수다.” 해서 칼 가지고 죽일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렇게 하지 않아요. 

  

두 가지 원칙을 달리 적용하기 때문에, 네가 나를 희롱한 만큼만 희롱하는 것이 아니고 조금 희롱했는데 “형 지옥 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과하지요. 정말 과한 거예요. “네가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왜 함부로 건드렸어? 건드린 그것이 너의 본색이고 정체성, 너의 태어난 본질”이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길에서 누구를 만나든 만나는 순간 그 사람의 과거가 다 튀어나옵니다. 누굴 만나든. 서울 가락교회 공부 참석하는 어떤 청년이 계신데 한 때 그분이 홍준표 밑에서 놀았답니다. 어떻게 놀았는지 하여간 함께 있었답니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의 과거가 나와요. 

  

홍준표 그 사람이 욕 잘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이미 방송에 나왔지요. 방송에는 ⅩⅩ로 나왔지만. 처음에는 전부 위장을 하고 메이크업을 하기 때문에 몰라요. 그런데 만나고서 조금씩 섞이게 되면 그동안 몰랐던 과거가 다 나옵니다. 참 결혼이라는 것이 미쳐야만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몰라야 결혼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살아보고 알아요. 처음 만날 때는 모른다니까요. 자기가 일방적으로 원했던 것만 알아요. 이삭의 과거는 뭐냐? 이삭은 살아본 적도 없어요. 이삭이 몇 살 먹었다고요. 이삭의 과거는 누가 쥐고 있는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쥐고 있는 거예요. 이삭이 얼마나 대단한 아이인지는 이삭을 희롱만 해도 지옥가게 만듭니다. 오늘날 성도 건드리면 지옥 가는 것처럼. 

  

성도라는 것이 그 배후에 하나님의 과거와 하나님의 미래, 예수님 자신이 과거고 예수님 자신이 창세 그 이후의 모든 미래가 성도라는 존재로 구체화되고 집대성 되어 있다는 그것을 마태복음 5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에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상종할 대상도 아니라는 그런 뜻이에요. 

  

이걸 2천년 교회 역사는 어떻게 설명했느냐 하면, 당신이 성령 받고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된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착함의 극치를 달려야 된다고 이렇게 가르쳤어요. 누가 왼뺨 치거든 복수하지 말고 더 때려, 더 때려, 해서 주님의 낮아진 사랑을 보이는 것이 이 말씀의 성취라고 본 거예요. 

  

그게 아니에요.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어제 가락강의 끝부분에서 했는데, 사람이 사람이라야 대화가 되지요. 사람도 아닌 경직된 나무하고 대화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 사람 같아야 대화를 하지요. 여자의 후손만 천국 간다면 그 사람만 인간이에요. 주님의 형상이 있으니까. 천지창조 할 때 주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외에는 사람이 아니무니다! 따라서 사람이 아닌 인간이 나에게 욕을 했다고 해서 그걸 갚을 가치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락강의 하면서 갚을 가치도 없는 네 사람을 인용했잖아요. 문재인, 홍준표, 안철수, 심상정, 그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이 오게 되면, 복음을 들으면 사람 같으면 반응을 나타내고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사람이 아니면 복음을 전하면 멀뚱하니 있어요. ‘뭐지 이거? 무슨 소리지?’ 교회 보면 다 그래요. 복음 전하면 못 알아듣는다고요. 

  

사랑의 하나님 가지고 노닥거리는 동네거든요.
교회는 신자 아닌 자를 신자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신자 아닌 자가 신자인체 하는 곳이 교회에요.
신자는 교회 오나 안 오나 신자에요.

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으면 고향에 와 있는 겁니다. 중심처에 와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의 과거는 본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은 주님께서 언약을 역사 속에 구체화했기 때문에 언약의 후손에 속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이끌어 온 겁니다. 이게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요.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같은 한국말을 해도. 지금 안 그래도 영어설교를 해 볼까 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구글번역기에 들어가면 일단 한글로 다 치면 영어로 다 번역됩니다. 그 영어문장을 다 외워버리면 영어로 설교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습니다. 지금 그런 기회는 아직 없어요. 

  

그렇다면 두 번째 해봅시다. 달리 적용시켜서 네가 잘못 건드렸다는 것, 여호와가 배후에 계시는 그 언약의 사람을 네가 잘못 건드렸다는 거예요. 어린애를 건드린 것이 아니에요. 장차오실 메시아를 건드린 겁니다. 누가? 이스마엘이, 하갈이. 그러면 진즉에 건드릴 필요도 없이 상속자를 하나만 주면 되는데 왜 둘을 낳게 했는가? 

  

이게 마지막 중요한 거예요. 아브라함이 제 3자기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을 내쫓아야 돼요. 사람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면 자기는 자동적으로 하나님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구원했기 때문에, 내가 언약의 사람이기 때문에. 

  

언약의 사람은 나인 줄 착각하게 만들어놓고 나를 쏙 빠져나가서 어디로 달아나느냐?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은 한분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로 달려갑니다. 그러면 나는 저 사람에 비해서 성도라고 우겼던 나 자신에서 둘로 분리가, 분열이 되어야 됩니다. 

  

주님을 건드리고 주님을 핍박했던 자가 저쪽이 아니고 구원받은 내가 주님을 건드리고 핍박했다는 겁니다. 마치 내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주님은, 이미 구원받을 사람을 내 쪽에서 제 3자로 여기게 만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님을 핍박했던 그 당사자를 주님께서 긍휼로서 용서하시고 아들 아닌 자를 아들 되게 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공로만 드러내는 증거로서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찾아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하나님하고 일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를 기다린 거예요. 피 흘리기를 기다린 겁니다. 그 피가 없으면 천하의 엘리야, 천하의 모세도 구원받지 못해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할수록 그들이 느낀 점은, 다른 분이 오셔야 된다는 겁니다. 나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예수님하고 상대해서 나를 구원해줄지 아닐지는 예수님 소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 때 주어질 때 우리는 내 자랑을 할 것이 아니고 “주여, 내 모든 일들이 주를 핍박하게 만든 요인이었습니다.” 하는 거예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일 때 이것은 누가 봐도 이스마엘이에요. 왜? 성령 받은 자를 핍박하니까 누가 봐도 이스마엘이고 누가 봐도 하갈 쪽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니까 세상에, 그 조건마저 예수 그리스도 사람 되기 위한 조건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천하의 이단도 마지막 죽을 때 성령이 임하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통해서 ‘아, 내가 중심체가 아니고 나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어떤 분이 중심체이고 나는 그 분에게 소속되어 있어서 나에게 이런 희한한 일을 느끼게 하는구나.’ 알게 하는 겁니다. 

  

성도의 가정이라는 것은 자기 믿음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털려야 돼요. 예수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믿는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다 이루었기에 이 못난 우리도, 주를 핍박했던 우리도, 주의 사랑으로 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자동적으로 긍휼 받을 자격이 없음을 또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