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강-창 19장 30-38절(세상의 도리)1704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9장 30-38절입니다. 구약성경 24페이지입니다.
창 19:30-38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지난 시간에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일어났고 거기서 구원받은 사람은 단 세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롯과 그의 두 딸이었습니다. 나오기는 네명이 나왔는데 한 사람은 탈락했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뒤돌아 봤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건질 자는 건져서 세 명을 건졌으니까 이야기가 아름답게 마무리 되면 참 좋을 뻔했는데 왜 그 뒤에 상당히 추접하게 보이는 이야기가 여기에 나타나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찬란한 승리처럼 느껴지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 생각이고 하나님의 구원은 그 끝이 인간들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살아왔기에 하나님의 긍휼 아니면 안 되는가를 다 보여줘야 구원이 마무리가 되는 겁니다.
구원의 마무리에서 평소에 인간들이 계속 추구하면서 살아왔던 그 바닥에 깔려 있는 인간성, 그것은 구원이 마감되고 난 뒤에 계속 흘러나와야 되고 터져 나와야 돼요. 만약 그것이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마치 이런 오해를 할 수가 있어요. 소돔과 고모라 심판받는데 거기서 세 사람 나왔으니까 그 사람들은 얼마나 건전하고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가, 이런 조로 정리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무엇이 죽는가? 하나님께서 긍휼로 불쌍히 여겨서 건진다는 것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고 역시 하나님이 건질만한 가치가 있어서 건졌다는 자기자랑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이에요. 인간들의 구원은 자기만 살아나면 오케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마무리는, 구원받는 자도 추접했다, 어떤 인간도 구원될 역량이나 자질은 전혀 없었다, 가 다 드러나야 구원이 마무리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얼마나 인간들이 성급하게 롯에게 박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는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박수치고 축하할만한 집안이 엉망진창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여기서 뭘 하는가? 과연 롯의 두 딸은 구원된 사람이 맞느냐는 질문을 해 봐야 돼요. 두 딸은 구원된 것이 맞는가? 아니면 그냥 육신만 소돔과 고모라에서 일시적심판에서 면제된 것뿐, 과연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인가, 라는 것을 생각해 봐야 돼요.
한 때 심판에서 어떻게 피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고 난 뒤까지 영생의 나라에 간다는 보장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구약인데 그 사람이 영생 받을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그 방법을 이렇게 찾아낼 수 있어요. 구원되고 난 뒤에 그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느냐를 살펴보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지난 낮 설교에 이미 굉장히 많이 이야기한 거예요. 구원은 누구나 좋아하는데 구원받고 난 뒤에 우리 자신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굉장히 거북하게 느낍니다. 죽어서 지옥갈래, 천당 갈래, 하면 천당! 그것은 되게 좋아하는데 그러면 구원시켜 줄게, 고맙습니다! 이것까지는 참 좋아해요.
그래서 구원된 자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심이라, 거기에 대해서는 굉장히 거부반응을 나타냅니다. 구원은 갖고 싶은데 구원이 내가 갖는 것이 아니고 도로 주님의 구원의 원칙, 구원된 자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못한다는 원칙에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몽땅 그 안에 빼앗기고 강탈당하고 납치를 당해도 좋습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그래도 좋습니까, 를 묻는 거예요. 그것은 싫은데요, 저음 쫙 깔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구원이 뭔지도 모르고, 천국이 뭔지도 모르고, 영생이 뭔지도 모르고, 좋다 하니까 다 받아 챙기려고 설치는 거지요. 그러한 경우를 구약의 오늘 본문에서 구체적인 예를 미리 우리한테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두 딸을 봐라. 두 딸의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구원의 취지, 심판의 취지,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게 해서 심판받았는가, 그 안에 있는 내용, 과연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존재인가를 보라는 말이지요. 그런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왔다, 성공했다, 구원이 다 되었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뒷부분이 길게 성경에 박혀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이 네가 원했던 구원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실시한 구원이냐의 차이를 네가 아느냐? 하나님의 구원의 마무리가, 내 구원의 마무리와 확연하게 차이난다는 것을 각오해야 돼요. 그러면 오늘 본문을 설명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어떤 차원에서 심판했는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고 롯을 건져냈는가,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일단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왜 일으켰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을 소개하기 위해서 일으켰습니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이말 하면 무슨 뜻인지를 알아요. 그런데 다른 동네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나만 예수 믿고 천당 가면 그만이지, 이렇게 돼요. 여전히 아까 말씀드린 자기위주입니다.
그것을 어렵게 말해서 자기존재증명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나 잘났다, 나 여기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차원으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나 어때, 나 멋있지, 나 괜찮은 존재잖아, 그거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로빈슨 크루소 무인도소설의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 과연 거기서 사는 목적이 뭐냐, 그걸 이야기하는 소설이에요. 그 말을 왜 하는가 하면, 전부 다 남보란 듯이 살았는데 그 보란 듯이 산 그것이 하나의 인간의 주체가 되어서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라는 말이지요. 이걸 하나의 바구니라고 한다면 우리 속에 담겨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 봅시다.
다 끄집어내보면 전부 다 내 바깥에 날아다니는 것을 내가 주워모은 거예요. 이미 내 것 이전에 남의 것이었던 겁니다. 남들이 좋아하고, 남들이 귀하게 여기고, 남들이 재미있게 즐기던 것들인데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러면 나도 같이 즐길게, 하고 집어넣은 그 쓰레기 같은 바구니가 우리의 자아에요.
그게 오늘 본문에 적절해요.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 다시 하게 되면, 우리는 왜 사는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거예요. 대학교수 하면서 옥수수나 연구하고 있지 대선에 왜 나옵니까? 밤이라서 잘 안보이지 낮에 보면 붙어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라고 붙어 있어요. 갈 때 한 번 보세요. 뭐가 붙어 있는지.
사람의 윤리도덕이라는 것은 자기 내면의 소리가 아니에요. 이미 자기 안에 들어 있는 타인의 음성을 의식해서 나오는 것이 윤리도덕입니다. 내게 내면화된 타인의 음성. 그러니 이 내면이 내가 주인이 아니에요. 내 속도 남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기도제목 드리면서, 과도한 책임을 지지 말라고 했지요.
과도한 책임을 지지 말라는 말이지요. 책임자가 따로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냐? 구원된 성도는 뭐냐 하면, 남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필요한 것만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집어넣으니까 빠져나온 것이 있어요. 필요하기에 집어넣고 필요 없기에 빠져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세상의 안면과 눈치 보면서 살아왔던 것이 빠져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슬슬 빠져나오거든, 내 인생 내 것이 아니구나, 아시면 돼요. 그런데 그 빠져나오는 것이 굉장히 가슴 아파요. 왜? 자기의 추억이거든요. 그것도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오늘 제목이 ‘세상의 도리’니까 본문의 두 딸과 관련되어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사는 도리가 뭐냐 하면, 마치 자수 놓는 것 같아요. 실을 가지고 자수를 할 때는 어지러워요. 온갖 것을 다 집어넣어 놓았어요. 그런데 끝나고 나면 대충 패턴이 보이거든요. 하나하나 버릴 것이 없어요. 이게 돼야 구성이 되니까. 레고장난감처럼. 그러나 주님께서는 뭘 깔아놓았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과 하나님의 저주를 밑에 깔아버렸습니다.
패턴은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까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목적이 패턴을 깔았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저주받는다. 이미 끝나버렸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지 진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돼요.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딱 나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는지 누가 물으면 딱 이것만 이야기하면 돼요.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보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의논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나는 네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네 기도에 응답할 책임이 없다.
나는 네가 어떻게 기도하든 내가 네 기도에 꼬박꼬박 응답할 어떤 책임도 의무도 나 하나님한테는 없다. 왜? 나는 고집이 있기에. 어떤 고집? 내가 은혜 주고자 작심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주고 나머지는 국물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라는 이 하나님의 철칙에 대해서 우리 내부에서 강력하게 반발하는 요소가 있어요.
제가 오늘까지 책을 하나 본 것이 있어요. 촘스키라는 세계적인 언어학자, 문법은 타고날 때부터 생성된다는 그 촘스키의 책입니다. 출판사에 책 읽은 소감 보내주면 추첨해서 상품 준다는 거기에 혹해서 오랜만에 책 뒤에 붙어 있는 엽서를 떼어서 써 보냈어요.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이 뭡니까, 라는 항목이 있었어요. 촘스키 이 사람은 과학이 다가 아니고 뭔가 과학 말고 신비로운 것이 있다고 주장했거든요. 쉽게 말해서, 자연과학아, 까불지 말라. 너희가 아무리해도 인문과학 못 이긴다는 그런 뜻이에요. 과학이 진리처럼 하는데 아니야, 인문과학도 해야 돼, 그런 뜻인데 제가 거기에 평을 해놓았어요.
바깥에 신비가 있다는 것을 알면, 이걸 어렵게 말해서 신비의 외연, 외삽이라 하는데 그 범위가 더 넓은 범위를 바깥이 차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뭐가? 신비가. 촘스키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면 제 생각에는 관점을 이동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안다고 하지 말고 신비로운 관점에서 다시 내부를 봐야 되는데 인문학하는 사람들이 그걸 생각을 안해요.
우리가 뭘 알겠어, 세상 다 몰라, 이걸로 끝이에요. 모르면 그 쪽 신비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우리가 뭔가 잘못되었다, 이렇게 해야 되는데 어떤 여지는 남겨두고서 입을 다물어요. 그 이유를 이야기했어요.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외부의 신비에 반항하는 내부적신비가 있는데 당신은 왜 그걸 관찰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지적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당신속에 괴물이 있다, 그 말이에요. 당신 속에 당신이 설명할 수 없는 괴물, 마귀 들었다는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고 할 때 누가 반발하고 누가 반항하겠습니까? 그 반항과 반발에 오늘 본문에 두 딸이 여지없이 그대로 노출 시킨 거예요.
그것도 구원 그 이후에.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서, 이미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도, 더 이상 유황불이 떨어지지 않는 공간에서, 마음 푹 놓고 그냥 살면 되는 그 지점에서, 혼났다, 큰일 날 뻔 했네, 이런 지점에서 잠시 유보되었던, 잠잠했던 인간성, 소돔과 고모라의 행세가 그대로 노출됩니다.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주신다. 거기에 대해서 무엇이 반발하느냐? 우리 집안은요, 우리가족은요, 이렇게 반발해요. 우리의 세상사는 도리는요, 그걸 왜 하나님은 부정하십니까, 아, 기분 나쁘다, 이렇게 돼요. 유황불로 말미암아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는데, 심지어 돌아봤다는 그것 때문에 소금기둥 될 정도로 그렇게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 이제 한 숨 돌리고 하는 말이, 그러면 우리 가족은요, 앞으로 우리 삶은 어떻게 됩니까, 라고 일종의 반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반발이라고 하니까 잘 이해가 안 되시는데 29절에 봅시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했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아브라함의 두 딸과 사위를 분리시켜 봅시다.
그러면 롯은 두 딸과 달리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잘나서, 우리에게 행운이 와서 구원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구원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천당하기 위해서, 내가 영생 얻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주께서는 구원해준 적이 없는 거예요.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그런 구원을 안 해줍니다.
하나님이 은혜줄 때도, 긍휼히 여길 때에도 다 우리로 하여금, 은혜 받았지, 긍휼 받았지, 이제 볼일 봐,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와 긍휼을 잡아당겨요. 어디로 잡아당기는가? 도대체 어디서 이 은혜가 나오고 어디서 긍휼이 나왔는지 그 원천, 핵심지점으로 찾아가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겁니다.
그게, 이미 구원된 자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라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신약에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특정 분,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증인은 여호와의 증인이고 하나님의 교회도 아니에요. 순복음을 하나님의 성회라, 교회라고 해요. 예수교에요, 예수, 구체적인 예수님을 증거 한다니까요. 하나님이나 예수나 같지 않느냐, 이렇게 반발하기 쉬운데 하나님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이 모든 진리기 때문에 어떤 종교라도 결국 한 자리에서 만나게 돼요.
그러나 예수님이 되어버리면 이미 그 자체가 배타적입니다. 예수를,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저주받아요. 이것은 인간이 끊을 수 없는 핏줄이라는 것, 혈연관계, 가족의 끊을 수 없는 그것, 주께서는 혈연적인 집착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두 딸에 대한 심판은 이제부터 본격적이에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와서 본격적이에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올 때는 아버지를 따라 덩달아 나온 겁니다. 아버지가 하도 오지랖 떨고 난리치니 아빠 없이는 못사니까 그냥 나온 거예요. 뒤돌아보지 말라는 주의사항도 있었으니까 되돌아보지 않고 그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나오는 데만 허겁지겁 바빴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모른 거예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의 재탕이에요. 파괴된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나의 일부가 뚝 떨어져 나와서 지금 자기 아버지 롯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에게 개인구원이라는 것은 없어요. 개인구원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고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 백날 믿어보세요, 구원받나. 구원 못 받아요. 예수님의 구원, 예수님이 구원의 주가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구원되었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이 생각하는 이 구원은요, 어떤 인간도 이 구원을 자기 마음의 희망과 소원으로 생각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예 그들의 희망과 기대 속에 진짜 하나님이 생각하는 구원은 1퍼센트라도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자기존재증명이기 때문에 자기구원이에요. 그리도 더 확대하면 자기 집안의 구원이고. 오늘 본문에서 이 집안 거덜 납니다. 롯 집안 거덜 납니다. 식구들끼리 주의해야 돼요. 누가 거덜 날지. 집안이 거덜 납니다.
목사님 때문에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구원에 그런 것 없고요, 엄마 때문에 구원받은 그것도 하늘나라구원에 없습니다. 오늘 설교 어렵게 이야기할까요? 구원자 없습니다. 그걸 롯이 아는 거예요. 롯이 그걸 알아요.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이 세상에 없는 분이 날 구원했어요. 미쳤거나 아니면 진짜 신자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미쳤거나 안 그러면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어느 목사도 구원 못하고 어느 아빠나 엄마도 자식을 구원 못합니다. 그걸 알고 있어야 아브라함언약,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긍휼을 주든지 은혜를 주든지 그것은 이 땅에 언약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조치로서 거기서 긍휼이 나왔고 은혜가 나온 거예요.
그렇게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도달된 긍휼과 은혜는 어디서 나왔는지가 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끌리게 되면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억울하게 죽었던 희생물이 나와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걸 어제 가락에서는 예수님이 뒤집어 쓴 누명이라 했습니다. 누명쓰신 거예요.
교회 나왔으니 보험들 듯이 죽어서 천국가야지, 라는 문장만 생각하는 그것은 누가 그렇게 생각하는가?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난데없는 이야기를 해요. 바로 예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의 소박한 꿈같은 것은 완전히 폐기처분해버려요. 따라서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나 예수 믿고 구원받으려는 헛짓을 했다는 이런 고백이 나올 때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기도해서 우리 집안 다 천당 가려고 얼마나 노력했다고, 이게 나와 줘야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나 우리교회 가서 구원받으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더라, 이게 나와 줘야 그게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면 두 딸이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본색을 드러내는데 어떤 본색이냐? 31절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지금 이 두 딸은 세상을 단일세상으로 봐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본 겁니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몰라요. 다른 세상이 있으면 다른 세상을 이루기 위한 원리가 따로 있을 거예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언약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두 딸은 이 심판이 왜 온지를 모르고, 아브라함언약을 살리기 위해서 심판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에 여전히 속하면서 할 도리는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할 도리가 뭐냐 하면, 계속해서 자기의 핏줄을 이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막혀버렸어요. 이게 오늘 설교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막혔다는 겁니다. 누가 막히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막히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이 패턴으로 온 세상에 다 깔려 있는 입장이라면 우리는 십년 살아도 더 살 이유 없고 20년 살아도 더 살 이유 없고 60을 살아도 더 살 이유 없습니다.
아직 30 살았으니 아직 적어도 40년, 50년, 더 살아야지, 백 살 채워야지,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바닥은 이 벌어진 심판이 깔려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세 자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의 성경은 이미 규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이 땅에 죽으심으로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구석인가는 이미 다 드러났습니다.
세상은 그 자체가 이미 위기로 종료되었습니다. 끝난 거예요. 오늘 어떤 분이 저에게 전화로 상담 중에 이런 고백을 해요. 제가 감격스러웠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날 안 찾아왔으면 내가 지옥 불에 간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아찔하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날 찾아오지 않았으면 지옥 갈 것인데, 그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는 겁니다.
제가 어디서 감동을 받았는가 하면, ‘주께서 찾아오지 아니하면’이라는 이 대목입니다. 보통 교회는 뭐냐? 내가 교회 안 갔으면 지옥 갈 뻔 했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렇게 하지 않고, 주께서 찾아오지 아니하면. 자기를 수동태로 봅니다. 자신을 수동적으로 보는 거예요.
그리고 덧붙여서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찾아오지 않으면 나는 지옥갈 수밖에 없었고 아찔하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도 주께서 이끄시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내가 차마 말은 안했지만 그 뒤에 울컥 나오는 말이, 제가 그 이야기를 했네요. 인생은 방향이 중요하지요. 몇 굽이를 돌았는가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뺑뺑이를 돌아도 가는 방향이 좁은 길이고 영생이라 한다면 그까짓 거 몇 굽이를 돌아도 그거 신경 쓰지 마세요. 주께서 굽이굽이 한다면 할 수 없지요. 주일 오후에도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젓가락 가지고 조기를 뒤집는다고요. 지금 이 두 딸은 막혀 있다는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구원받지 못할 자도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되면 뭘 느끼는가?
평소에 사는 것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면서 굉장히 그것을 실망감으로 나타내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거예요. 일종의 반발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 지옥 갈 사람들은 굉장히 기분 나쁜 거예요. 기분 더럽다고 하지요. 굉장히 기분 더러운 거예요.
하나님이면 다인가, 이런 거지요. 그러면 그렇게 막혔다, 기분 더럽다, 라고 그저 주저앉을 위인들이 아니거든요. 평소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면서 했던 그 행태들이 있어요. 하던 행세가 뭐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핏줄을 이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가 두 딸의 아이디어지 아버지 롯의 아이디어는 아니에요.
롯고 상담할 이유도 없고 롯과 상담했다는 이유도 없어요. 상담이 되어서 의견이 하나가 되었다면 아버지 롯이 술 먹고 퍼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네 뜻에 협조 하마, 이렇게 나왔을 거예요. 분명히 두 딸이 보기에는 아버지는 딴 생각을 하고 있어요. 세상의 도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브라함언약을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같이 소돔과 고모라를 나왔어도 여전히 심판받을 자와 구원받을 자는 구분되어 있습니다. 딸은 나왔어도 두 개의 생각을 못하고 롯의 나와서 두 개의 생각을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언약이 완성되는 그 천국과 지금 우리가 당했던 소돔과 고모라.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와서 소알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 소알은 뭐냐?
사해 제일 끝에 있는 마을이에요. 그 마을에 있다가 어디로 갔느냐? 동굴로 갔습니다. 해발 121미터쯤 되는 동굴. 사해가 있다면 서쪽은 지중해 쪽이고 동쪽은 사우디아라비아 쪽인데 그쪽에 동굴이 있었어요. 그쪽에 모압이 있고 그 위쪽이 암몬이라는 족속이 옛날에 자리 잡았다가 다윗 때 다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더 큰 제국이 다 멸망하지만.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남자가, 배필자가 우리 아버지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냥 새끼 낳는 남자가 돼요. 그러면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 두 딸에게는 아무리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벗어나도 전혀 달라질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아버지고 뭐고 자기중심이에요.
세상의 도리라고 하는 것이 딴 것이 아니고 이거예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자식 없이 그냥 살게 되면 허무를 느끼거든요. 그러나 자식을 낳게 되면 뭘 느끼는가? 불멸성을 느낍니다. 나중에 이것이 도킨스에 의해서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어요. 자식은 부모 각자의 50퍼센트의 dna를 가지게 돼요. 그리고 손자가 되면 16.5퍼센트의 dna를 갖습니다.
그래서 생식본능은 dna가 지시해서 그러한데 왜 그런가? dna만 퍼트리면 그것이 다기 때문에, 그게 전부기 때문에. 어쨌든 인간의 모든 욕구의 기본은 생식본능, 내 것의 복제, 내 것의 확장의 본능이 인간의 모든 윤리와 도덕을 결정합니다. 정신분석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의 성적인 본능이 인간의 모든 행동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그게 낮에는 억누르고 밤에 꿈으로 돌출되고. 그리고 그것이 원활하게 잘 되지 아니하면 각양 정신병이 생기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정신병이라 하는 것은 하던 행세대로 못할 때 정신병이 생겨요. 하던 행세가 뭐냐?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영원불멸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수시로 심판을 해버리니까, 심판하고 못하게 만들어버리니까 하나님 앞에 반항조로 반발하니 예수님 보시기에 귀신이 나에게 대드는 거예요.
게거품물고, 엎어지고, 화병이지요. 자기 분을 자기가 못 삭여 가지고. 이게 나쁜 말이 아니에요. 그걸 지랄한다 하거든요. 이게 표준말인데 이상하게 욕이 되었는데. 진짜 지랄을 하는 거예요. 발광을 하고. 이 지랄발광을 순화시키면서 나온 것이 뭐냐? 대선후보 나오는 거예요.
지나 개나 다 나오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인간의 행동은 억누르는 욕정을 그 때 그 때 순화시키는 용도로 해석하면 해석이 다 돼요. 아가씨들 유럽에 여행가는 것, 마찬가지라니까요. 프로이트는 말하기를 여자들이 뜨개질하는 것도 그렇고. 자기의 욕구를 못이겨서 억지로 잠재우는 거라는 거예요.
농사꾼이 농사짓는 것, 얼마나 건전합니까? 건전한 것이 아니에요. 화병 못이겨서 뭐라도 해야 되기에 텃밭 가꾸는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 바탕에 뭐가 있느냐?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와 심판이 이미 타일처럼 깔려 있어요. 자기가 어떤 식으로 그걸 변형하든 상관없이 주께서는 인간존재의 밑에 심판을 깔아놓고,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그것을 시범조로 보이고 마지막 때 그것을 확 뒤집어 엎어 버리면, 네 안에 마귀 들었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네 안에 귀신 있었어. 너는 일곱 귀신이 노는 장소였어. 일곱 귀신은 적은 편이에요. 어떤 경우에는 귀신이 군대라고 되어 있어요. 귀신이 노닥거리는 장소로서 세상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술을 먹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담배를 피우겠어요. 술 담배 하는 사람들 가만있다가 욕 얻어먹네요.
그걸 해소하는 것이 결혼이고 결혼으로 끝납니까? 새끼 낳는 거예요. 뭔가 자꾸 내 것을 복제를 해서 내 것 비슷한 것을 자꾸 까는 겁니다. 하나 낳고, 둘 낳고, 셋 낳고, 더 낳고, 여섯도 낳고. 우리나라가 열 다섯 명이 신기록인가, 계속해서 낳고. 애가 얼마나 예쁩니까? 잠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거예요.
이 두 딸이 어디서 나왔는가? 롯의 dna를 받았어요. 두 딸을 탓할 것이 아니고 맨 롯에서 그 두 딸이 나온 겁니다. 그 애비의 그 딸이에요. 그런데 롯은 훌륭하냐?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한 거예요. 주께서 못난 인간이 못나게 살아가는 그것도 이유가 있다. 뭐냐?
모든 것을 순종치 아니함에 가두어두심은 오직 긍휼, 은혜를 입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주시는 그 바탕을, 흑색바탕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 땅은 이미 심판받기로 작정한 세상위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출세니, 성공이니, 취직 했니, 이렇게 남이 원하는 자랑질을 해가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까요? 천 번이나 나온 질문이고 답변을 또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맘대로 못살고 여러분 인생에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하심이 어디에 흘렀는가를 찾아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변에 용서가 어디에 떨어져 있고 우리 안에 주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작동하고 작용하고 있는지, 매일 죄지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용서하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를 늘 점검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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