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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위상(창20;13-18) 1704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21. 07:31
2017-04-19 20:35:56조회 : 56         
   아브라함의 위상 170419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아브라함의 위상(창세기 20:13-18)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KLBEkD5yLkI, Hit:2
 이근호17-04-19 21:11 
아브라함의 위상 

2017년 4월 19일                   본문 말씀: 창세기 20:13-18 

(20:13)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20:14)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20:15)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 

(20:16)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20: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20:18)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오늘 본문을 보면 범죄와 징벌 사이에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저지른 일에 비해서 징벌이 과도하고 징벌의 형태도 이상합니다. 징벌이 일어나게 된 원인대목을 보게 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아비멜렉이란 그 지역의 추장의 동침 문제입니다. 

사실 아비멜렉은 사라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윤리적으로 나쁜 짓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데없이 아비멜렉 집안에 속한 여인들이 태가 닫혀서 임신이 되지 않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사라’라는 여인의 태가 지닌 위상과 가치는 아비멜렉 집안의 일반 여성들과는 다른 레벨을 보여주는 태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아비멜렉 집안의 여인들의 닫힌 태를 통해서 유일무이한 독보적 가치를 지닌 특수한 태를 가진 여인이 지금 아비멜렉 지역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리고 있는 바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라와 아브라함, 그리고 아비멜렉과 그 집안에 속한 가임여성들의 존재는 모두 ‘아브라함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 설치된 세트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쪽과 아비멜렉 쪽과의 차이가 있다면, 이는 아브라함 쪽은 이미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 프로그램화 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그저 아비멜렉의 가정과 아브라함 가정, 두 인간적인 가정이 만난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은 여기에 제 3자가 관여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아브라함을 데리시고 이 지상에 언약을 발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움직여서 이 지상을 통해 언약을 진행시켜 나가시는 겁니다. 이 ‘언약 진행’은 인간들의 실패를 바탕으로 해서 성사됩니다. 무엇으로 인하여 아비멜렉과 그리고 아브라함은 언약 달성에 실패할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이 지닌 ‘윤리적 한계’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이 실제로 사라와 동침한 것이 아니라 ‘동침할 뻔’ 했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악행과 악행 아님을 내부적으로 구분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그 안목이 바로 ‘윤리적 한계’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죄인 것과 죄 아닌 것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윤리적 행함으로 구분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윤리적 안목에 의해서 내부적으로 구분 짓는 바로 그 자체가 ‘언약 달성’에 있어 한계로 작용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윤리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한,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언약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1:8,16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옆 동네에서 옆 동네로 돌아다가 그냥 이 세상에서 인생 끝낼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비록 땅에서 출생했지만 도착지점은 하늘에 있는 한 성(城)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 방법을 아브라함 당사자에게 물어도 아브라함은 알 수가 없습니다. 본인도 그저 이 땅의 생애를 그냥 살 뿐입니다. 아비멜렉과 만나고 또 다음에는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되는데 아브라함을 포함해서 자신들이 만나는 모든 인간들이 아비멜렉처럼 ‘윤리적 한계’를 지닌 자들입니다. 

이들은 서로 만나도 “내가 저 사람을 만나면서 그다지 악을 저지르거나 실례되는 짓은 아니했지. 그렇지?”라는 식으로 윤리적 반성이 본성으로 발산하게 됩니다. 즉 윤리적으로 그다지 하자없는 행동을 했지만 과도한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이유가 없고, 나름대로 내 인생에 윤리적 실패가 없다고 여긴 바로 그 일반적 삶의 태도 앞에 언약을 몰고 아브라함 가정이 등장한 겁니다. 

아비멜렉 가정이 징벌을 받는 것은 아브라함의 윤리적 탁월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신비로운 언약적 관계성 때문입니다. 이는 곧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관계에서 언약이 지상에서 펼쳐놓은 그 내막이 공개되는 겁니다. 즉

‘언약이란 지상의 자기 사람을 하늘로 올려보낸다.
그리고 이것이 성사되기 위해 누군가 값을 치러야 한다’
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가정에 네 가지나 선물을 줍니다. 재산과 노비와 땅과 돈입니다. 이 네 가지 선물로 인하여 아비멜렉은, 이로서 사라가 지닌 특수한 위상에 손상 간 것이 다 보존되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잘못한 적도 없는 아비멜렉이, 자기에게 거짓말을 한 아브라함 가정에게 값을 치르고 있는 겁니다. 

언약의 현실 등장은 참으로 황당하고 이상해보입니다. 이는 아비멜렉이나 아브라함이나 인간의 윤리적 움직임으로 인하여 언약을 건드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아비멜렉 여인들의 태가 ‘닫혔다가 다시 열린’ 현상을 보였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의 윤리와 언약 달성 사이의 단절성을 말해줍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는 언약적 내용을, 아비멜렉 가정의 변화를 통해서 그 내막이 설명되고 있는 겁니다. 즉 아브라함은 죽지 않고 하늘의 본향에 가는 법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태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야 하늘에 있는 성(城)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구원을 위한 대가는 어디에서 마련됩니까? 

바로 아내 사라를 통해서 태어날 이삭을 대가로 하여 아브라함의 윤리적 한계로서 나타나는 그 죄에서 사함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 가정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 기도 속에는 ‘언약 성취자’로서의 하나님의 기도만이 모든 일이 언약중심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위상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프로그램화된 인물입니다.
본인들이 이 지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가정을 통해서 언약을 실현시키는데
그 방식은 바로 아브라함과 접하게 되는 자들의 ‘윤리적 한계’와
그 ‘한계’에 주눅들어서 살기에 급급하는 아브라함의 나약함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 당사자만이 언약 성취자’가 됨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누구를 만나고 헤어져도 항상 자신의 윤리적 정당함을 챙기는 바로 우리 자신이 아비멜렉의 한 류에 속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4-20 16:39 
84강-창 20장 13-18절(아브라함의 위상)1704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0장 13-18절입니다. 구약성경 25페이지입니다. 

  

창 20:13-18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본문 누가 봐도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두 가정의 문제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면 둘로 봐서는 안 되고 셋으로 봐야 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과 하나님.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어떻게 했는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했는가? 

  

그보다 더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두 사람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어렵게 이야기해서 아브라함은 프로그램 된 인생이라. 그 인생이 프로그램화 되었어요. 그 인생이 짜여있어요. 아브라함 본인은 몰라요. 

  

하나님께서 프로그램해서 너는 이런 쪽으로 가라고 지정해 줬지만 그 지정된 내용에 대해서는 아브라함은 앞으로 본인이 살아가면서, 한 꺼풀 두 꺼풀 접혀진 것이 펼쳐지면서 노출될 뿐이지 아브라함도 미리는 알지를 못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의해서 프로그램화된 인생이라면 그 맞은편에 있는 아비멜렉은 전혀 하나님의 프로그램화 되지 않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 입장에서는 그게 눈에 안 보이는 거예요. 나도 인간이고 너도 인간이라는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안보이니까 우리 둘이 만나는 거지요. 성경에서는 제 3자가 개입되지만 아비멜렉 입장에서는 제 3자가 개입되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나 둘이 개입되는 겁니다. 물론 프로그램 되었다든지 하나님의 정보 이런 것은 전혀 못 느끼고요. 

  

그러면 사람 둘이 만날때는 어떻게 만나느냐 하면, 각자 갖고 있던 어떤 법적체계가 있어요. 살아오면서 그 사람이 이런 식으로 나름 반듯하게 살아왔다는 법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법에 준해서 지금껏 인간답게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나는 크면서 이런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이런 윤리체계를 가지고 그것에 준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두 개의 서로 가지고 있는 법적체계가 만나게 되는 겁니다. 이 만남은 윤리적 만남이지요. 양쪽 다 법이 있으니 윤리적 만남이에요. 그런데 그 윤리적 만남이, 만났는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결과가 전혀 윤리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비멜렉에게 너무 과도한 징벌이 주어지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건드릴 뻔 했지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자들은 아기를 못 낳게 되었습니다. 태가 다 닫혀버렸어요. 두 사람이 부딪혔는데 한쪽은 조금 다쳤는데, 사실은 아브라함은 조금 다치지도 않았지요. 똑같이 부딪혔는데 저쪽은 뻥 하고 차이는 것처럼 큰 화를 당한 겁니다. 

  

그러면 큰 화를 입은 사람이 “누구야 너!”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당신 뭐야! 당신의 정체를 밝혀라.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이 아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기는 아브라함 쪽도 마찬가지에요. 아브라함이 사전에 ‘네가 나를 건드리면 네 집안 여자들 다 임신 못할 건데. 아마 시험관시술 해야 될 걸? 나를 못 알아보고.’ 

  

이런 식으로 미리 예상한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입장에서도 ‘잘 보여야 돼. 저 사람 건드리면 이 동네에서 못살아.’ 이렇게 아브라함도 비겁하게 혹은 추하게 굽신 거리면서 힘 빼고, ‘남의 동네니까 내가 알아서 처신 잘해야 돼.’라고 했을 뿐이에요. ‘네가 나와 함께 있는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지?’ 그런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뭐냐 하면, 언약이라는 것이 인간레벨에서 실패를 통해서 비로소 구체화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지켜야지, 해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을 마주친 그 모든 만남을 통해서 어느 누구도 언약에 대해서 진지하게 지킬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언약은 거기서 생산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약을 인간이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사람을 만나든 하나님을 만나든 홀로 나서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법적체제를 배후에 동반해서 나오거든요. 그것을 아까 제가 윤리적한계라 했습니다. 윤리적한계라는 것은 뭐냐?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자기의 정당함을 유지를 해줘야 쓸데없는 저주나 징계를 안 받아요. 

  

나쁜 짓 하면 매 맞고 착한 일을 하면 복 받는다, 이것은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후손들은 다 알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쓸데없이 나쁜 짓을 해서 자기 장래가 고생스럽게 될 하등의 필요가 없거든요. 착하고 바르게 항상 바르고 착하게 살자, 그겁니다. 제가 윤리적한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윤리가 아무리 완벽에 철저를 기해도 거기서는 언약준수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성도라 합시다. 성도라 하면 기본적으로 자기가 아는 지식이 뭐냐 하면, 누굴봐도 하나님의 십자가와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한다. 이게 머릿속에 꽉 들어박혔어요. 마치 애들이 자율학습할 때 막 외우듯이. 이거 시험에 꼭 나온다. 밑줄 치듯이. 누굴 봐도 복음을 외쳐야 되고 복음적인 삶이 나와야 된다. 

  

이렇게 백날 외워봤자 딱 누굴 맞닥뜨리면 윤리가 나와요. ‘혹시 저 사람 만나서 내 행동이 잘못된 것이 없을까?’ 이게 윤리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언약도 날라 가버렸어요. ‘내가 자칫하면 남의 동네에서 죽는 수가 있어. 조심해야 돼.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살아남아야 해.’ 

  

이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겁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동네의 터줏대감들이 겁이 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다녀도 막상 예수님이 체포당하니까 그 땅을 통치하고 있는 어두움의 권세가 더 무서운 겁니다. 

  

따라서 언약을 지켜서 구원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언약대로 구원되어야 될 프로그램화된 자기백성이라 할지라도 언약 지켜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언약은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 언약이 스스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기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교회 몇 년 다닌 사람은 다 아는 것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은 지상에서 살면서도 결국 그 사람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한 성에 들어가야 될 사람이에요. 

  

이것은 공중부양 되어야 될 문제에요. 계속 땅에서 땅으로 수평이동한 자가 하늘에 올라간다?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요. 공중부양이라니 자기가 허경영입니까? 자기 눈만 바라보면 공중부양이 되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에서 이 지상에 있는 고향이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으려니와 아브라함은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갈 인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로 가는데? 하늘로 올라간답니다. 그 이야기를 아브라함에게 물어보세요. “아브라함 당신이 하늘로 올라간다면서? 어떻게 할 건데?” 이렇게 물으면 아브라함 본인도 몰라요. “그것은 내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 방식과 방법은 내가 모르지.” 

  

그것은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너는 지상에서 태어났으나 하늘에 도착할 인생이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자기로서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추진을 시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이 말도 안 되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프로그램화된 이 과업은 아브라함 본인이 생각해도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잖아요. 믿는 자의 앞선 믿는 자자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신앙이 뭐냐를 생각해 봐야 돼요. 우리의 신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신앙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비멜렉 수준밖에는 안돼요. 윤리적 한계성만 드러낼 뿐입니다. 바르게 살자, 착하게 살자. 성경은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살아서 영광 돌리자. 그것 때문에 말씀이 주어졌다.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윤리적으로 그냥 윤리적으로 사는 거예요. 

  

그리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바르게 살 수 있는데도 바르게 안사는 사람이 아니고 남의 동네에 가서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네가 어떤 어려운 곳에 가거든 네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하면 목숨이 부지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그냥 인간일 뿐이고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익히 아시고 주께서 하나의 팁을 준 거예요. 

  

이 땅에서 사는 요령. 아브라함이 연약하다는 것. 연약하다는 말은 뭐냐? 언약 지킨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고요, 기껏해야 자기생존과 관련된 자기윤리성과 최선을 다함, 그런 것 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이나 아비멜렉이나 둘 다 비슷한 사람끼리 만났는데 그래서 두 차가 박치기 했는데 한쪽 차는 범퍼만 약간 긁혔어요. 

  

저쪽은 폐차 당했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네 정체를 밝혀라. 너는 도대체 뭐야?” 아브라함도 굉장히 난처해져 버려요. 자기가 아비멜렉에게 “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한 번 당해봐라.” 이렇게 사전에 그런 생각을 먹은 적이 없다니까요. 아브라함입장이 난처해져 버렸어요. 

  

만약에 제가 아브라함이라면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했을 거예요. “글쎄요. 저보고 닦달내지 마시고 하나님이 나보고 하늘에서 살 사람이래요.” 나도 이상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에서 옆에서 옆으로 옮겨 다니는 그것을 끝나는 거예요. 하늘의 본향에 간다는 것은 방법도 모르고,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손 쓸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당신 집안 모든 여자가 태가 닫히는 것은 나도 모르는 문제입니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기는 나와 함께 계시는 그 하나님의 프로그램,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차원에서 우리 둘이 호출을 당했다는 것은 제가 감안할 수 있습니다.” 호출 당한 이유는 그겁니다. 아브라함 안에는 약속의 자식을 낳아야지 아비멜렉의 자식을 낳으면 안 됩니다. 

  

그 뒷부분에 이삭이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의하면 네 눈에 일반 여자로 보이냐? 너희 집안 여자하고 저 아브라함 여자하고 네 눈에는 같이 보이지? 아니야. 아브라함의 아내는 약속의 자식을 낳을 유일무이한 여성이에요. 여자의 후손이라는 그 법칙에 의해서 유일한.” 유일자, 안양 공부에 나오시는 유일자도 있지요. 

  

유일한 거예요. 유일무이, 딱 하나밖에 없는 독보적인 여인,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여인, 그 여인은 네가 지금 보기에는 일반여인이지만 만역에 나중에 그 여인에게 어떠한 자식이 나온다면 그 자식이 갖고 있는 위상, 오늘 제목이 아브라함위상인데, 그 이삭이라는 자식의 위상에 격에 맞도록 그 자식을 낳는 어머니를 같이 미리 앞당겨서 높여주는 거예요.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여인이 아닌 겁니다. 아브라함이 프로그램화 되었다면 그 여인도 프로그램화 되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사라도 모르고 아브라함도 몰라요. 결국 모른다는 말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언약백성이라 하지만 언약을 이루는 실무자는 따로 있어요. 언약을 주신 분이 언약을 이룹니다. 

  

그러나 그 과정의 방법에 있어서 인간들을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둘 다 언약을 이룰 수 없는, 언약을 성취할 수 없는 무능력자라는 것을 밝히 보이면서
그 과정 속에서 언약이 생산됩니다.

고함지른다고 이해될 문제는 아니고요.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뭘 주느냐 하면, 네 가지를 줘요. 처음에 양과 소, 그 당시가 목축시대니까 재산이지요. 양과 소라는 재산을 주고 두 번째는 노비를 줘요. 15절에 아브라함에게 땅을 줍니다. 네 번째 은 천개를 줘요.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까불고 있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았지.” 전혀 이게 아닙니다.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아내 건드리면 너희 집구석 여자들 임신 못한다, 라는 것을 미리 마음속으로라도 먹은 적이 없어요. 그저 살려만 주이소, 이런 식이라니까요. 

  

아브라함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을 뿐인데 그 아브라함과 만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그 결과의 조성은 아브라함 본인의 기대와 관계없이 제 3자로 여겨지는 하나님이 언약을 가지고 그 현장에 주도적으로 장악해버리는 겁니다. 장악해 버리면 거기서 언약의 실내용, 언약의 본질적인 내용이 둘 다 멍청이 같은 인간들을 만나서 스며 나오는 거예요. 

  

역사 속에서 언약의 구체화는 이렇게 진행되는 겁니다. 언약 지키라, 지킬게, 이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지난 시간도 했지만 도대체 아비멜렉이 나쁜 짓 한 것이 뭐가 있어요?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양과 소 재산 바치고, 노비 바치고, 땅 바치고, 돈 바치고. 식겁했다니까요. 

  

아브라함은 네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몰라,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여기서 언약의 발생, 출현가운데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등장합니다. 속죄함의 배상이 없으면, 값을 치름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용서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배상은 뇌물이 아닙니다. 아비멜렉 입장에서 있는 대로 다 저 양반에게 주지 아니하면 내 앞에 나타난 저 분에게 주지 아니하면 우리 가정에 임한 하나님의 이 저주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 그걸 알았어요. 

  

아브라함은 눈만 멀뚱멀뚱하지요. ‘저 사람이 왜 저렇게 하지? 왜 저렇게 혼이 나갔지? 나는 아무 짓도 안했는데?’ 아무 짓도 안했어요. 하늘에 갈 사람과 지상에 남아야 될 사람을 하나님은 달리 다루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지상에서 지상으로 옮길 사람이 아니고 하늘의 본향에 들어갈 사람이에요. 

  

그 본향에 들어갈 방법을 아브라함 본인도 몰라요. 어떻게 들어가는지. 따라서 오늘 풀어야 될 문제가 정말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늘로 올라가는지 그 문제 지금 안 풀었지요. 그 다음에 아비멜렉은 무엇에 그렇게 놀라서 있는 재산 다 털어 넣는지.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건드리고 그랬으면 후회나 없지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다니까. 건드릴 뻔 했지요. 우리 생각에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건드릴 뻔 했으면, 법적균형을 맞추려면 아비멜렉의 여자들이 태를 닫힐 뻔 해야돼요. 그래야 균형이 맞잖아요. 

  

건드렸는데 닫혔더라, 그러면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지?” 그렇게 되는데 건드릴 뻔 했는데 다 닫혀버렸어요. 오버도 이런 오버가 없다니까요. 우리가 여기서 질문 던지는 것은, 지금 사라 아내를 건드릴 뻔 한자가 아비멜렉이에요. 그 집 여자가 아니라니까요. 그 지역 추장 아비멜렉이 건드릴 뻔 했지 그 집 여자가 건드리라고 하지도 안했다는 말이지요. 

  

사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요. 말을 조심해야 돼요. 잘못할 뻔 했는데 당하기는 누가 당하느냐 하면, 아비멜렉의 여자들이 전부 다 임신을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아비멜렉, 남자의 그 잘못할 뻔 한 이야기와 여자의 태가 닫히는 것과 왜 하필 그런 내용을 가지고 징벌을 내리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풀어야 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면, 해답을 미리 드리면 돼요. 해답을 어떻게 드리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지상의 사람인데 하늘의 본향에 갈 수 있느냐? 죽으면 돼요. 죽으면 된다고요. 

  

어떻게 죽느냐? 자기가 태어난 그 태가 닫히고 하늘의 준비된 태가 열리면 아브라함은 하늘의 준비된 태의 열림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인정받게 되면 그 사람은 하늘의 사람으로서 땅을 어슬렁거리는 나그네로서 이 세상 삶을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이거 결론 부분입니다. 

  

머리 좋으니 다 알았지요, 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머리 좋아도 모를 이야기에요. 아까 질문이 뭐였는가 하면, 지금 이 땅을 배회하고 있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늘로 올라가느냐는 그 질문을 던졌잖아요. 그 질문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있어요. 아브라함이 하늘나라 간다는 인식하에서는 그 질문이 성립되는데 그 질문에 빠진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산채로 가지는 않아요. 아브라함이 죽어야 돼요. 아비멜렉을 죽이는 것은 육으로 왔으니까 육으로 죽는 것 밖에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육으로 와서 육으로 죽어버리면 백날 깨어나도 하늘나라 못갑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육으로 죽고 영으로 다시 살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이 바뀌는, 같은 아브라함이지만 육에 속했는데 하늘에 속한 아브라함으로 바뀔 수 있는 그 경로를 인생에 담아주는 자가 아브라함을 대신해야 돼요. 그 자는 사라의 몸에서 태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현재 움직이고 있는 이 아브라함은 어디에 소속되어야 되느냐 하면, 아비멜렉에 소속되어야 돼요. 목사가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는지. 아비멜렉에 소속이 되어버리면 아비멜렉의 여자의 태가 닫힌다는 것은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인간의 혈육도 하나님께서는 안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계기를, 언약가운데 있는 아브라함과의 만남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녹취되니까 녹취 다시 찬찬히 보세요. 아브라함의 신상변화는 아브라함 본인의 신상변화를 예상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접촉된 저쪽에서, 저쪽 집안의 여자의 태가 닫힘으로 말미암아 나 아브라함 이 몸은 결국 천국에,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는 존재인 것이 또 다시 확인되는 겁니다. 

  

그런데 태가 닫힌 아비멜렉집을 위해서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줍니다. 기도를 하니까 닫힌 적이 있던 그 아비멜렉의 모든 여자의 태가 열려버렸어요. 처음부터 닫힌 적도 없이 정상적인 태가 아니고 닫혔는데 열린 거예요. 그러면 닫힌 태가 열렸다는 말은, 여자들이 건강하구먼, 건강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만난 증상이 그렇게 이어진 겁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어떤 낯선 분을 만났더니 태가 닫혔다가 열린 거예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나에게 어떤 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슬그머니 아비멜렉가정에 붙이도록 한 프로그램을 진행시킨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략에 의해서 우리 집안이 닫혔다가 열린 겁니다. 

  

태가 닫혔다가 열렸다는 말은 그 닫혀야 마땅한데 열리게 하신 여호와의 언약적 요소가 담긴 내용이 저 아브라함가정에 앞으로 일어나고 진행될 언약적 프로그램 속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는 뜻이에요. 이 문제가 참 어려워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막 사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막 사는 겁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막 부려요. 

  

왜? 그래야 언약이 이루어지니까. 하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막 부려요. 막 살게 만듭니다. 예수님 잡히니까 베드로부터 해서 열 두 제자가 도망갑니다. 그래야 돼요. 택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신 때려야 돼요. 그래야 돼요. 그래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 땅에서 자기가 이루어서 의인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됩니다. 

  

언약의 성취자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예수님이 주의 이름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밖에 없습니다. 이제 더 들어가면 복잡하니까 끝으로, 기도가 뭐냐 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뒤에서 구시렁구시렁해요. “이 근호 목사는 복음 전하면서 기도하라는 이야기를 안 하더라. 기도하라는 소리를 왜 안하는지 모르겠다.” 이래요. 

  

신앙생활의 균형을 맞춰야 되는데 두 바퀴가 있다면 하나는 말씀, 하나는 기도, 균형을 맞춰야 된다는 거예요. 어제 가락교회에서 균형 맞는 신앙이란 없다고 했지요? 바퀴를 빼버려야 되겠어요. 기도의 응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의 응답을 아는 것이 응답이에요. 

  

기도를 하면서, ‘아, 진짜 내 기도, 내 기도 정말 이것은 죄 그대로다. 제대로 죄다.’라는 것은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은 자기언약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는가를 깨닫게 되면 내 기도하는 행위자체가 죄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기도하면서 누구 말대로 “에이 씨” 이래야 돼요. 

  

우리 외손주 이야기입니다. 기도응답은 응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의 기도응답을 위해서 내가 엉망진창으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게 내 인생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 기도응답이에요. 주님의 기도가 있는데 뭣 때문에 내가 또 따로 주님 앞에 대들 듯이 내 기도 했으니 응답은 나에게만 주세요, 라는 식으로 주님을 함부로 다루려고 합니까? 

  

주님에게 명령하고 갑질 하고 지시하고 요구하고, 하나님은 내가 시키는 대로 이렇게 응답해달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이런 식으로 건방떠는 이게 뭐냐? 우리의 윤리적한계입니다. 벌 받은 아비멜렉하고 똑같아요. 결국 아비멜렉이 벌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쁜 짓을 해서 벌받은 것이 아니고 “나쁜 짓을 할 뻔 했습니다.”라는 그 자체가 프로그램화 되지 않는 윤리적 한계에 불과한 거예요. 

  

‘자칫하면 큰일 날 뻔 했네. 나쁜 짓을 할 뻔 했네.’ 그게 나쁜 짓이고 그게 바로 비언약적생각이에요. ‘나쁜 짓 할 뻔 했다. 휴, 큰일 날 뻔 했네.’ 그 생각 가지면 그것이 언약입니까? 그러면 새 사람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땅에 살다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쓸데없는 소리에요. 아무도 못 들어가요. 

  

그냥 바르게 살다가 지옥가는 거예요. 나쁜 짓을 할 뻔 하다가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니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아무리 복음을 기억하고 공부를 많이 해도 막상 이 세상에 나가서 누구를 만나게 되면 항상 먼저 성질 급하게 툭 나오는 것은, 내가 저 사람에게 나쁜 짓 안했지, 라는 윤리적인 것이 앞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만나고 헤어지고 난 뒤에 내가 실례되는 말은 안했겠지, 복음대로 온갖 이야기를 다 해놓고는 막상 실제 삶에서는 “주님, 주님 보시기에 그다지 경솔한 짓은 안했지요?”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주님께서는 “네가 그런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너를 위해서 기도하는거야.” 

  

“제가 경솔한 짓,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짓은 안했지요?”라는 그 스스럼없다는 윤리적 한계, 그 죄를 못 벗어나기에 우리로 하여금 이삭,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 죄를 내가 용서하노라 하는 겁니다. 아비멜렉의 네 가지를 준 것은 이 값을 치르고 우리 관계는 이것으로 해결합시다, 하는 자기도 모르게 언약적해결책을 내놓은 거예요. 

  

언약의 완성은 반드시 속죄의 값이 있어야 돼요. 속죄를 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대신 값을 치러서 구원받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값을 내놓습니다. 아브라함이 달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겁이 나서 내주는 거예요.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 언약적 하나님이 배후에서 작용을 하는 겁니다. 

  

값을 치렀더니만 다시 그 집안에 태가 원상회복되었습니다. 값을 치렀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태를 열었다. 새로운 태가 열렸다. 값을 치렀다. 이 두 개를 합쳐서, “아브라함아, 네가 하늘나라 성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이삭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구원받고, 이삭은 야곱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예수 믿어서 값을 다 치렀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값을 더 이상 치를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을 우리가 이 땅에 맞닥뜨리는 모든 사람을 통해서 우리의 윤리적 한계, 윤리적 무장의 어설픔과 우리가 죄인인 것을, 다시 한 번 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지옥 가는 사람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 구원해주신 주께 감사하게 되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프로그램화 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도 못한 새로운 경험, 주께서 우리를 다루고 있다는 신기하고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돌아서면 “주님, 제가 별로 잘못한 것이 없지요.” 또 자기정당성으로 돌아오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윤리적 한계, 죽을 때까지 생기더라도 그 때마다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