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아브라함의 뒷면(창21;13-21) 1705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5. 11. 21:30
2017-05-10 20:33:15조회 : 48         
   아브라함의 뒷면170510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아브라함의 뒷면(창세기 21:13-21)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nMto0TM7GXg, Hit:3

 이근호17-05-10 21:40 
아브라함의 뒷면 

2017년 5월 10일                           본문 말씀: 창세기 21: 13-21 

(21: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21:15)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21:16)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21:17)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21: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21: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21: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방법 중의 하나는,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안되고 패가망신하면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단정하고, 반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적적으로 보호를 받게 되면 ‘신에게 복받은 자’라고 여기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대하게 되면 상당히 당황스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갈 가족에 천사까지 보내셔서 관심을 보이시고,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가족을 복된 가정이라고 여기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저주받은 가정으로 단정 짓습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일관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갈 가정을 애살을 가지고 알뜰살뜰 살필 것 같으면 애초부터 아브라함 가정에서 분리시키지 말아야 했다는 겁니다. ‘내어쫓으라’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정만 돌보고 하갈 가정을 어떻게 살든지 방치하시겠다는 취지로 여겼는데 실은 그게 아니니까 인간들은 혼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러한 이해 혼란은 인간들은 자기 자리를 따로 고수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즉 자기 자신도 현실의 일부라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잘 하시는 일 속에는 나를 잊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갈을 자신을 잊지를 못하고 더 생생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도 그녀가 그동안 아브라함 가정에서 함께 살면서도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이해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이란 ‘내가 어떻게 하면 사느냐’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과연 누구냐’를 알려주는 것이 언약입니다.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범주도 같이 넓어지는데, 아무리 세상을 넓고 깊고 구체적으로 안다 할지라도 그렇게 해서 구성하는 세계는 모두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야지’라는 의지와 연관이 있는 일방적 세계관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언약에 있어 세상관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중심부를 만드는가?’와 관련 있습니다. 

즉 언약은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중심부’;를 건설하는 원리입니다. 아브라함은 중심부로 이끌리게 되어 있고 반대로 아브라함에서 분리된 하갈은 중심부에서 멀어져 주변부로 밀리게 됩니다. 마치 집중 홍수로 인하여 뒷산에서 흘려 내린 흙더미가 물과 섞여 마을을 덮치게 되면, 아무리 마을 주민들이 집 중심으로 살아가고 그 집 자체가 토사물에 밀려서 아래로 이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삶의 중심 자체가 주변부로 같이 실려내려 가는 꼴입니다. 어느 인간이든 자아 중심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자아 중심성에서는 결코 ‘내가 진정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기껏 해야 잡다한 것들만 관심사가 될 뿐입니다. 그 잡다한 것들에 대한 집념들이 각자 나름대로의 세상관, 현실관을 조성하게 만듭니다. 

그 가운데는 ‘살고보자’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갈의 처지와 동일합니다. 그녀가 평소에 여겼던 삶의 중심이란 곧 ‘살아남기 위한 성질’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이 존재 이유를 모릅니다. 달리 말해서, 언약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나는 그 언약과의 연관성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느냐가 없습니다. 

하갈은 언약 중심이 자기 중심입니다. 바로 이런 인간 본성을 가지고 성경에서 ‘저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문제는 이 저주받은 자들이 아무리 강력하게 자기 중심성을 채택하고 있다할지라도 날이갈수록 중심부에서 계속 밀침을 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중심부를 잊어버리고 그 대신 자신이 구축한 현실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갈을 찾아오신 것은, 언약 중심성을 부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언약의 가정에서 추방시켜놓고서는 끝까지 하갈의 성질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그 저주성마저 언약 적업의 일부로 그 범주를 계속 확대되어 가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이 점을 알기 위해 아브라함 언약 구조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이삭의 등장으로 내용의 깊이를 더하게 됩니다. 즉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 사라의 자식입니다. 하갈과 사라가 한 집에 그냥 살게 되면 언약의 주도권은 아브라함에게 있습니다. 곧 남자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삭의 출현은 그 동일한 아버지의 육적인 한계를 말해줍니다. 

이삭은 ‘없는데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언약의 본질은 남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설명되어 집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흙’이지만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그 ‘여자의 후손’의 노선에 따른 자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삭이 아브라함보다 메시야에 더 가까운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즉 언약이란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의 위상보다 ‘이삭’이라는 인물의 위상으로 전개되면서 이삭의 근원인 사라와 그 이삭으로부터 내어쫓김을 받아야 하는 ‘하갈’이라는 근원을 대조되게 됩니다. 사라는 언약의 중심부에 해당되지만, 하갈을 그 중심부됨을 부각하기 위해 보조적인 위치에서 더욱 확장되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을 죽인 가인을 죽이지 않고 더욱 번창하고 이 지상에서 세력을 키우도록 유도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느냐’라는 저주의 본성들을 더욱 키우나가되 결국 세상 끝까지 범람하도록 조치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중심부로 이끌림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중심부가 저주의 세계에서 돌출하는 식이 됩니다. 

마치 애굽 나라에서는 모든 백성들이 바로의 힘 앞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돌출시켜 분리시키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살고자’하는 저주성 대신에 ‘죽어야 함’을 드러나는 식으로 언약의 축복을 분출을 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로 하여금 그동안 자식을 키워온 그 중심성에서 손 놓게 하십니다. 

자식과 마주보면서 대성통곡을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느냐’와 관련되어서 자기 중심성을 고수해 왔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바로 삶의 자세 자체가 중심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그 어느 인간도 언약 아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7강-창 21장 13-21절(아브라함의 뒷면)1705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1장 13-21절입니다. 구약성경 26페이지입니다.

 

창 21:13-21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오늘 설교 제목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이면, 뒤쪽이라는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방금 읽었던 내용을 보게 되면, 하갈은 저주받은 여인이고 이스마엘도 저주받은 민족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게 되면 이게 아브라함에게 준 혜택인데 아니면 저주받은 하갈에게 준 혜택인지 분간이 안 되지요.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굶어죽지 않게 보호하시고 심지어 20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의인 노아와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처럼 함께 계시고, 의도적으로 지켜주시고 보호하신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이 저주받은 것이 아니고 복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브라함과 하갈의 차이성이 모호해져버리는 겁니다.

 

하갈이……, 하갈이……, 하갈이…, 이런 식으로 집중되어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이런 식으로 되어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어려울 때 도와주고, 아브라함이 방성대곡할 때 찾아와주고, 천사 보내주고, 기적적으로 물주시고, 함께 해서 그 자손을 번창 하게 하시고.

 

이것은 저주받은 대상에게 하나님이 하는 조치가 아니고 복 받은 자의 조치라면 우리가 오늘날 이 본문 보면서 도대체 하나님이 하는 일의 일관성이 없게 되어버려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채는 방법은 이 땅에서 지질이 궁상, 뭘 해도 안 될 때 저주받았다, 이렇게 되겠지요. 혹은 기도해서 응답받았다, 이렇게 할 때 응답받은 쪽은 축복이 되겠지요.

 

기도해도 응답이 안되고 뭘 해도 뜻대로 안된다면 이것은 저주받은 것으로 우리는 쉽게 판정을 내려서 나의 판정이 곧 하나님의 판정이라고 마음정리를 했는데 저주받은 하갈과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도움은 독차지 하듯이 받고 있으니 도대체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일을 하시는 그 취지가 뭔지에 대해서 혼동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저주받았으면 저주답게 좀 때려주고 벌을 주는 맛이 있어야 되는데 보호를 해버리면 어느 대목에서 저주받았다는 내용을 찾아야 될지 헷갈리게 되는 겁니다. 보호받은 자인데 저주받았다. 보호하려면 복된 자녀가 되게 해서 복을 주든지, 복된 자녀가 아니라면 벌을 주시든지.

 

저주받았다고 해놓고 보호를 해줘버리면, 이 본문을 근거로 해서 세상에서 저주받은 사람을 찾아볼까, 보자, 보자, 하게 되면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본문자체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상당히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본문내용은 이겁니다. 중심부와 주변부가 나눠진다는 겁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중심부가 없어요. 삶의 중앙부가 없습니다. 센터가 없어요. 우왕좌왕합니다. 중심부를 놓쳐버린 거예요. 중심부가 있다면 그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계속 밀리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산사태가 홍수가 나서 마을을 덮치게 될 때가 있지요. 쓰나미가 밀려오기 전에 집들이 있었거든요.

 

갑자기 저쪽에서 댐이 터진다든지, 홍수가 일어난다든지, 해변 쪽에서 물이 넘쳐들면 가만히 있던 집들이 점점 더 주변으로 떠밀리게 되지요. 떠밀리게 되면서 그곳에는 토사가 밀려들게 되고 자기는 점점 떠밀려가지요. 현대인들은 중심부에서 날이 갈수록 멀어져요. 한 때 유럽이 예수 믿는다는 기독교 국가였거든요.

 

영국, 네덜란드, 독일이고 다 그랬지요. 독일교회 겉모습만 보고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유럽의 국가에서 영국총리도 이슬람신자라고 하고, 평등법을 제정해서 이제는 길거리에서 예수 소리 하면 잡아가고, 미국의 경우에 교사가 공개적으로 동성애에 대해서 반대하면 잡혀가고, 이런 식으로 인권이 우선되다 보니까 중심이 없는 거예요.

 

중심이 없으면 회개해야 될 텐데 회개는커녕 중심이 원래부터 없었다, 이렇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겁니다. 불교 하는 소리대로, 네가 주인이고 따로 주인은 없다. 이 땅에 주가 없다는 거예요. 주 예수도 없고 주도 없고 네가 스스로 주가 되면 된다. 따라서 너는 네 권리를 주로서 주장하면 된다. 그것을 법으로 보장해줄게. 그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그것이 현대사회거든요. 동성애를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내 마음이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내 마음이다, 이러고 끝나는데 이게 어떤 현상이냐 하면,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고 주변부에서, 변두리에서 점점 밀리면서 나오는 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 특징이 뭐냐? 모든 인간은 불안합니다. 사는 목적이 없습니다. 목표가 없어요.

 

목적과 목표가 없으니까 찾는 것은 게임밖에 없어요. 맨날 게임거리 찾습니다. 태극기가 이기나 촛불이 이기나 붙어보자. 이번에는 촛불이 이겼구나. 다음에는 태극기가 이기겠지. 스포츠, 유럽은 축구, 미국은 미식축구, 야구, 농구, 일본은 야구, 한국도 야구, 남자들 거기 다 가 있어요.

 

돈 없는 사람들이나 노인들은 케이블tv 정치이야기, 시사이야기에 다 가 있어요. 누가 이기느냐? 중심부가 없으면, 중심부에서 밀려버리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전부 다 잡다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잡다한 일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중심부에서 넓게넓게 떠밀려 가는 거예요.

 

중심부에서 밀어내는 힘이 있어요. 너는 저쪽 가 놀아라. 그게 바로 저주입니다. 저주라 하는 것은 중심부로 끌어당김이 되지 못한 것이 저주에요. 복이라 하는 것은 어느 지점에 있든지 간에 십자가중심, 십자가복음으로 늘 눈이 맞춰지는 것, 십자가지신 주님과 늘 눈동자를 같이 하면서 인도함을 받는 것, 이끌림을 받는 거예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중심부를 향하여 인도함을 받고 이끌리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고, 그리고 중심부를 날마다 놓치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에요. 성경에는 이 축복의 대표도 여자고 저주의 대표도 여자에요. 지금 약속의 씨, 장차 올 메시아는 남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에 의해서 결정돼요.

 

저주받은 여성이냐, 아니면 복 받은 여성이냐, 여성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은 흙이지만 하와의 이름은 생명입니다. 생명의 시작은 남자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부터 시작돼요. 그 여자 안에서 중심부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 중심부에 이끌리는 사람의 성향과 주변부로 떠밀리는, 방향이 반대인 거지요, 주변부로 점점 잡다한 것으로 가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차이점이 뭐냐? 중심부로 이끌리는 사람은 내가 누구냐, 자기본성, 주님은 나를 어떤 인간으로 만들었지, 자기본성에 대해서 관심 있는 사람은 중심부로 끌려가는 사람이에요. ‘아, 십자가의 주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구나.’ 이렇게 되지만 그렇지 않고 주변부로 나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지?’ 나는 누구냐가 아니라, 살고 보자는 겁니다. 어떻게 살지?

 

오늘 나온 이 하갈, 저주받은 여성의 특징이 뭐냐? 나는 누구냐가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살지, 라는 그런 의문점이 내부에서 올라와서 그걸 외부로 장식할 때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지난 낮 설교에서 그걸 두고 흔한 현실이라고 했는데, 자기는 아는 만큼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 그런 뜻입니다.

 

인간이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현실이나 세계관이 있는데요.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 살 수 있느냐, 에요. 어떻게 하면 더 살 수 있느냐, 내게 사는데 보탬이 되는 그러한 구조를 머릿속에 조성해놓으면 그게 그 사람의 현실입니다. 자기가 사는 것이 자기의 구심점이 되니까 그 현실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은 돌아볼 수가 없지요.

 

자기만 잘되면 되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걸 가지고 자꾸 현실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자기가 구축해 놓은 일방적인 자기 현실인데 ‘일방적인 자기’ 현실에서 앞엣것은 다 떼놓고 그냥 그것이 현실이래요. 십대의 현실 다르고 2십대의 현실 다르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현실이 변조되고 변화가 되는데 어쨌든 저주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자기 현실의 범위가 넓어지든 좁아지든 관계없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 그것이 충만한 의미의 전부입니다. 내가 누구냐를 몰라요. 어떻게 살 수 있는가? 더 보탠다면 이왕 사는 것 어떻게 더 재미있게 살 수 있는가? 무슨 게임하면서 사는가? 그게 바로 잡다한 거예요.

 

그 잡다한 것을 몇 가지 항목으로 추려보면, 정치라는 잡다한 것, 경제, 문화, 군사, 외교, 이런 잡다한 것,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종교, 그리고 경제 밑바닥에는 과학이 있어요. 정치, 경제, 즐기는 문화가 있고, 자기 종교가 있고. 그게 잡다한 겁니다. 우리는 요 며칠 잡다한 것에 신경을 썼어요.

 

누구 뽑아야 잘 먹고 사느냐? 내가 누구냐를 보여주는 대통령을 뽑은 적이 없어요. 표는 홍준표를 찍으면서 문재인이 노인에게 준다는 4십 만원에 신경 쓰는 이것, 잡다한 거예요. 하갈입니다. 저주받은 쪽이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이미 구축한 이 잡다한 현실, 토사물, 토사물로 되어 있는 그 현실 속에 4십 만원 준다는 것이 들어 있으니까.

 

줄지 안줄지는 모르겠어요. 돈이 있어야 주는데 무슨 돈이 있습니까? 하여튼 문재인이 되면 4십 만원 준다고 한 그 잡다한 것. 표는 홍준표 찍어놓고 미국 가버리고. 그 잡다한 그것에 신경 썼습니다. 하갈입니다. 토사에 밀립니다. 점점 더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를 모르고 그것에 관심도 없어요. 이왕 살아 있는 것 더 살아볼까? 그것뿐이에요.

 

아직 부르지 말라는 거예요. 아직 살 일이 남았으니까, 백세 되어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부르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대세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현실, 그런 현실도 아니 현실, 잡다한 주변부가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중심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센터가 따로 있습니다. 거기에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나를 왜 이렇게 태어나게 하고 도대체 나로 하여금 잡다한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신경 쓰게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설명하라면 이것은 분리성입니다. 분리가 된 거예요. 하갈이 전에는 물이 떨어져서 대성통곡하는 일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전에는 중심부가 있었습니다. 누구냐 하면 자기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중심부였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중심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아브라함에게 그냥 기대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을 낳는 것을 계기로 해서 이스마엘만 쫓아내면 될 것을 하갈도 같이 쫓아내 버렸습니다. 이것은 가정이 둘로 찢어지는 겁니다. 만약 그 집안에 여자가 둘이 함께 있어버리면 주도권이 여자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남자에게 주도권이 있고 여자 둘이는 그 남자에게 예속된 존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셔서 여자 둘과 자식들과 종들까지 먹여 살리도록 했다. 그렇게 되어버리거든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분리성이 상당히 희박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자를 둘로 쪼개서 분리함으로 말미암아 이 중심부가 아브라함 쪽에서 어디로 가는가? 사라, 너의 정체를 밝혀라. 사라 쪽으로 가버려요.

 

여자의 후손 쪽으로 중심이 이동해 버립니다. 여자의 후손 쪽으로 이동해 버리면 이삭이 누구 자식이 되느냐 하면,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 되어버려요. 다른 말로 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도권이 이삭에게 넘어가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오히려 예속이 되고 을이 되는 겁니다.

 

시간이 역으로 바뀌게 되는 거예요. 이삭과 아브라함 사이에 점점 더 구체화 되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어느 특정중심부에, 진짜 핵심부에 가까이 간다고 되는 겁니다. 이삭이 중심부에 더 가깝고 아브라함은 아버지니까 약간 더 멀고, 그렇게 돼요. 중심부에 더 가까운 쪽이 하나님의 계시에 주도권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겁니다.

 

하갈을 하나님께서 내어 쫓으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잘 들으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할 때 우리가 들으면 ‘쫓아낸다고 했으니 보호할 턱이 없어.’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호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헷갈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무슨 취지로 쫓아낼 때는 언제고 보호해주는 것은 뭔지. 쫓아내려면 아예 쫓아내지 왜 보호는 해주시는가? 아브라함언약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현실이 있어서 나눠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든 그 현실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갈은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쫓아내면서도 보호하는 이것은 아브라람 언약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현실에 있어서 자기는 부정적 배역, 저주의 역할로서 그 현실에 충실하게 복속되고 역할을 충실하게 다 해야 되는 겁니다. 어렵지요? 저주라는 것은 단독적으로 저주가 아니고 복 받은 사람이 따로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저주역할이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단독적으로 지옥이 있으면 안 되고 “너 지옥 가서 고생이 많데?” “고생 많습니다.” “이 고생 많은 지옥에 안가고 천국 갈 사람은 따로 있지롱!” 천국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쪽은 혹독한 지옥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개인적인 권한이나 권리를 위해서 주께서 현실을 이끄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다 합류시켜 버리는 거예요.

 

개인의 현실은 의미 없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밥 먹고 살기 위한 내 집이다. 내 가정이고 내 자식이다. 이것은 의미 없는 거예요. 전체현실에서 나는 저주성향이냐, 아니면 복의 성향이냐, 그것만 의미 있는 것이지 내 중심의 나 살기 위해서 따로 구축한 현실은 의미 없는 겁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실습이 되는데요. 가끔은 학창시절을 보냈던, 성장과정을 지냈던 고향을 우연한 기회에 방문했다 합시다. 가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지금 한 50대가 되어서 10대 때를 보냈던 고향에 가게 되면 동네 어귀 느티나무에서 놀던 친구들이 갑자기 생각이 나고, 순간적으로나마 몸은 오십인데 다시 마음은 십대로 돌아간 느낌을 받게 될 겁니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요. 그게 오래 안가요. 돌아오게 되면 다시 50대로 돌아오거든요. 그 사이, 어떤 간격이 있느냐 하면, 10대때 내가 세상보기, 세상구축하기가 얼마나 협소했느냐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덟, 아홉 살 때는 골목에만 나와도 안 되는 줄 알고 길 잃어버리는 줄 알지요.

 

심지어 10대 때도 저는 집에서 멀리 나가면 안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라에서 영장을 보내서 군에 가게 했어요. 강원도 저 산골짜기로 보냈거든요. 대구에서 강원도까지. 고향생각이 안 나겠어요? 뒷산에 올라 보초만 서도 막 고향이 보일 것 같은, 김광석이 부른 <이등병의 편지>에 나오는 그 내용이 나온다니까요.

 

저 고개만 넘으면 마치 고향이 보일 것처럼. 군대에서는 그렇게 느꼈는데 만약에 제 직업이 해외출장이 잦은 직장이라면, 한 주에 한 번씩 비행기 타고 외국에 나갔다 온다면 고향생각은 다 깨지겠지요. 그렇게 되면 범세계적으로 세상이 넓혀진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하갈의 역할이 있어요. 하갈은 이 세상의 수평적인 범위를 넓혀야 돼요. 그게 여기 나와요. 하나님이 함께 해서 그 가문을 땅 끝까지 확대를 시킵니다. 21장 9절에 보면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그 다음에 “애굽 여인 하갈”이라고 나와요. 그리고 21절에 보면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라고 합니다.

 

애굽이라는 이 땅에다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의미표층을 여기에 덮는 거예요. 하갈이 덮여지는 것이 아니고 하갈은 어디에 종속되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에 종속되거든요. 아브라함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위해서 애굽이라는 나라가 이제는 들썩들썩 해야 돼요.

 

결국 4백년 후에 애굽이라는 나라가 하나의 지상적인 의미에서의 중심부역할을 해요. 중심부역할을 하는데 여기서 상당히 심사숙고해야 될 것이 있어요. 아까 중심부로 이끌림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사실은 이끌림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중심부가 솟아나요. 그 증거가 애굽입니다.

 

애굽은 전부 다 저주받은 나라에요. 애굽 자체가. 그 저주받은 나라, 거기에 살던 히브리인들도 같이 저주받아요. 힘들게 살고 고생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 살기 위한 욕망이 표출이 되어서 20대에는 20대의 좁은 시야, 30대는 30대 때의 좁은 시야, 그것이 자기가 살 수 있는 환경의 전부인데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야 돼요.

 

이제는 그 잡다한 변두리가 점점 넓혀지는 겁니다. 삼각주처럼, 여자의 긴 치마폭처럼 넓어지는 거예요. 다 넓어져 버리면 사람들은 그것을 현실이라고 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은 뭐냐? 각자가 자기가 먹고 사는 그것이다. 각자가 자기 먹을 것 먹고 사는 그것이 현실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언약은 그게 아니에요. 현실은 네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네가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네가 누구냐는 거예요. 네가 누구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나중문제에요. 일단 배불리고 난 뒤에 그 다음문제라 하는 거예요. 어떻게 밥먹고 사느냐, 이것이 중요하지 내가 누구냐는 다 뒷전인 겁니다.

 

그런데 그 애굽에서, 외부에서 와버리지요. 내부의 인간인 자기의 저주성이 확대된 그것을 인간은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아브라함언약은 외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집어넣어 버려요. 그것도 밤에, 죽음의 사자가 와서 다 죽여 버립니다. 맏이는 다 죽이잖아요. 외부에서, 내가 어떻게 사느냐의 속성과는 정반대되는 식으로, “너 죽인다.”이렇게 와요.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 하면 “너 죽인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라가 낳은 이삭의 특징은 죽음을 묘사한다면 이 이스마엘의 특징은 어떻게 삽니까, 하고 못살아서 대성통곡하고 있는 거예요. 그 전에 하갈은 아브라함이 책임을 졌는데 이제 이삭이 태어나고 난 뒤에는 하갈이 자기가 중심부역할을 더 이상 못하니까 뚝 떼어놨어요.

 

16절에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살 한 바탕 쯤, 이라는 것은 화살을 쏘아서 날아가는 그 거리에서 마주보는 거예요. “나는 내 중심부역할을 더는 못합니다.” 하고 둘 다 마주보고 우는 겁니다.

 

옛날에는 남편 되는 아브라함이 다 해줬는데 이제는 중심부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갈이 원하는 그 중심부라는 것은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 하는 그 저주받을 속성을 보다 넓혀 세상 끝까지 확장해야 돼요. 이스마엘과 애굽 여인과의 혼혈이 아라비아인이에요. 18절에 보면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이 큰 민족이 직접적으로는 아라비아고 사실은 온 세상 다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 어디에 여행 가보세요. 관심사가 뭐냐?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느냐, 잘 즐기느냐, 그거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유럽에 기독교가 없다고 했지요. 십자가 앞에서 내가 누구냐, 나는 십자가 앞에서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다, 그런 것에 관심 없어요.

 

잘 먹고 잘살고, 취미는 축구관람이고, 그것뿐이에요. 미국도 마찬가지고. 제가 뉴저지에 두 번씩이나 가봤지만 삶에 찌들었다 할까, 딱 첫 인상이 하루 일하고 하루 먹고 사는 그것, 온정신이 밥 먹고 사는데 다 가 있어요. 그 동네는 아마 하루를 쉬었다 하면 못 먹고 살 것 같아요.

 

‘이게 바로 지옥이구나. 맨해튼 그 고층건물이 지옥이구나.’ 내가 누구냐, 에는 관심이 없어요. 말씀이 뭐라고 하는지 관심이 없어요. 꼭 하갈 같아요. 대성통곡하면서 “하나님이여, 죽겠나이다.” 물론 하나님이 도와줍니다. 도와주는데 그것은 언약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비언약적으로 도와주지요.

 

잘 먹고 잘 살자, 그것을 확대시키고 전도하고 선교합니다. 그것을 퍼트리는 거예요. 온 세상에, 인간의 내부적인 저주가 외부로 꾸역꾸역 토사물 나오듯이 계속 토해서 온 천지가 저주의 바다를 이룹니다. 저주의 바다를 이룰 때 마지막에 메시아가 오십니다. 아브라함 자손으로 오지요.

 

여자의 후손으로, 사라의 후손으로 와요. 모든 것을 토해낼 때 그것이 뭐냐? 잡다한 것, 경제, 정치, 문화, 게임, 그리고 과학, 종교, 그 외에는 없어요. 내가 누구냐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 종교, 과학, 정치, 경제, 이런 것이 어떻게 나를 지켜줄 것인가. “네가 뭔데?” 그것은 몰라요.

 

왜? 환경은 내가 있고 환경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성경은, 모든 환경은 아브라함언약을 위해서 있고, 너 따로 환경 따로가 아니라, 너는 그 언약을 증거 하는 저주받은 역할로서의 환경의 일부가 되고 이 세상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비신자는, 저주받은 사람은 그 사실을 몰라요.

 

자기가 현실에서 따로 나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선택하고 골라잡은 현실이 곧 나의 현실이 된다고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결심하고 내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내 인생이 풀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갈은 그럴 줄 알았지요. 하지만 천사가 와서 하갈을 보호하는 것은 네 저주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돼요.

 

하기 싫더라도 해야 돼요. 잘 먹고 잘 살자는 그 역할을 세상 끝 날까지 전도해야 됩니다. 지금도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전도하잖아요. 기도하면 복 받는다고. 이것은 아벨 죽인 가인을 안 죽이고 그 가인으로 하여금 더욱더 확장시키고 문명의 시조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취지하고 동일한 취지에요.

 

그것은 주변부로 밀려가고 센터는 뭐냐? 센터는 아브라함언약, 사라의 없는데서 생기는 새로운 자식, 여자의 후손이 이 세상의 진정한 센터입니다. 교회든 불교든 세상의 문제점은 뭐냐? 왜 사람은 불안합니까? 교회 수십년 다녀도 불안해요. 그저 여행이나 가려고 하고, 놀러나 가려고 하고.

 

왜 불안한데요? 가봤자 또 딴 데 가고 싶어요. 왜?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었기 때문에. 최백호가 결론이에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 죽음이 주류가 되어야 돼요. 이미 우리는 십자가에 죽은 자입니다. 죽음이 나의 본성이에요. 살아 있는 내가 어떻게 행복하냐, 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주께서 매일 같이 죽이고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매일같이 우리를 중심부에 해당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안에서 불쑥 올라오는 겁니다. <에일리언ⅴ> 다음날에 나올지 알았는데 벌써 하고 있어요. <에일리언 : 커버넌트> 언약 영화가 나왔어요.

 

언약 이야기가 나왔다니까요. 벌써 개봉을 해가지고. 지금 예매율 1등이에요. 인간 몸에서 외계인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 첫장면이 뭐냐 하면, 인공지능에게 말합니다. “나는 모르는데 우리 둘이 협력해서 창조주 발견하자.” 인공지능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만들었다.” 인공지능이 이야기합니다. “아버지여, 그러면 아버지는 누가 만들었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하는 말이 “그러니 우리 둘이 협력해서 한 번 찾아보자.” 나중에 그 인공지능이 바로 신인 것을. 이 말은, 인간 속에 창조주역할을 하는 악마가 들어 있다는 것. 인간 안에 인간이 원하는 창조주를 따로 악마가 만들어놓고, “이게 창조주야.”라고 내세우는 그 결과물이 뭐냐? 그게 인공지능으로 점점 더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중심을 잃어버렸어요. 잡다한 것 가지고, 과학 가지고, 세상을 설명하려고 백날 해보세요. 그 자체가 저주고 그게 불안이고 고통이고 초조함입니다. 이게 징벌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만화책으로 여기고 집어던지고 인간의 이성과 과학으로 진리를 얻고자 하는 이 부질없는 것이 온 땅을 점령했습니다. 날마다 십자가가 불쑥 올라오는 것처럼, 모세가 애굽에 파견근무한 것처럼, 이 땅에 속하지 않는 저희들을 이 땅에 속하게 두심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유감없이 발산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