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0801a-히8장1절(인간과 기계)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8장 1절에 중요한 말을 하겠다고 사도가 이야기하지요. 뭐가 중요한가 하면,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대제사장이 우리한테 있으면 도피성이 개입되어야 되지요. 도피성이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기이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도피라는 말이 뭐냐 하면, 감당 못해서 피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그걸 들으면 기분 좋습니까? 뭔가 불쾌합니까? 불쾌한 거예요.
“주여, 감당할 것만 주세요. 감당 못할 것은 주지 마시고.” 그런데 “너희가 감당 못할 일이 터질 때는 도피성으로 피하라.” 이러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고 ‘아! 또 이거 감당 못할 일이 터지는구나!’ 이렇게 자꾸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도피성이란 말은 도피가 되어야 제대로 주님을 안다는 뜻이거든요. 왜냐 하면, 도피성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고 우리가 아쉬워서 만든 게 아니고 주님이 구원을 알려주기 위해서 “니 구원 모르지?” “모릅니다.” “알려줄게. 도피성.” 이리 되거든요. 그럼 우리는 “도피성 모르면 구원 안 되는 겁니까?” 구원의 노선에는 반드시 도피성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네가 그 노선에 가게 되면 도피성도 관람하고 구경하게 되어있어요.
“그럼 도피성은 미리 하렵니다.” “미리 하지 마!” “언제 할까요?” “감당 못 할일이 터질 거야.” 그럼 우리는 우울해 지지요. 감당 못 할 일을 상상해 보는 거예요. “세월호로 그런 겁니까? 우리 아들이 세월 호에 죽는 거 그런 거 말하는 거예요? 감당 못할 일이 뭐가 있어요?” 어쨌든 감당 못 할 일이 오게 되고 우리는 감당 못 할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할 것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가 뭘 감당하는가를 아시고 감당 못할 일을 주셨잖아요. 그러면 감당 못할 일을 접하면서 우리는 뭘 느낍니까? 우리의 한계를 보여주지요. 그것이 뭐냐, 끝이에요. 끝!
이 끝이라는 용어가 사람이 열사람이 있으면 열사람 끝이 다 달라요. 각자의 끝은 따로, 따로 입니다. 다른 높이의 촛불이 있다고 한다면, 불을 붙여보면 그 꺼지는 시간은 어떻게 됩니까? 짧은 것은 빨리 꺼지고 긴 것은 오래가겠지요. 다 끝이 다르지요. 인생마다 끝이 다 달라요. 각자 본인의 끝이 따로 있습니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성경 내용이 보편적이잖아요. 보편적인데 성경내용을 적용시키면 이게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변해버려요. 그러면 남의 신앙을 흉내 내지 마세요. 그 사람 것이 따로 있고, 내 것이 따로 있어요. 그 사람이 감당 못 할일이 따로 있고 내 감당 못 할 일이 따로 있어요.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 본 적 있어요? 마지막에 트랩대령은 가족을 이끌고 나치정권을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가요. 실제로 그 가정 미국으로 망명가서 합창단 꾸려서 평생 살았는데, 미국 망명가는 마지막 장면 알프스 산을 넘어가는 거예요. 그 영화에서 수녀가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는 감당 못할 것을 주시는 게 아니고 감당 못하게 되면 피할 창문을 따로 마련해 주십니다. 하는 거예요. 수녀원 원장이 격려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그 사람이 고린도전서를 인용한 거 같아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피할 길을 주신다는 말인데, 그 수녀는 뭘 분간 못하느냐 하면, 신약과 구약을 분간 못한 거예요.
신약의 내용은 바로 접근이 안 됩니다. 반드시 구약을 통해서 접근이 되어야 돼요. 신약을 바로 접근해버리면 내가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이렇게 되어서 고 일거리가 익히 내가 아는 일거리를 내가 감당이 안 되는데, 주께서는 내가 기대하는 일거리를 내 힘으로는 안 되지만, 주께서는 도와준다.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런데 구약으로부터 출발해버리면 나라는 일거리 자체가 아예 뭉개버리고 날아가 버려요.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거리는 내 일거리가 아니고 주님이 자신의 구원 작업을 위해서 깔아놓은 일거리가 되는 겁니다. 깔아놓은 일거리.
예를 들면 이삿짐센터가 와가지고 몽땅 다 알아서 해주는 회사 있잖아요. 이사할 때, 그 포장해주는 그릇도 그들이 다 가지고 오잖아요. 그거 우리가 준비한 거 아니잖아요. 그들이 이사작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그들이 카펫까지 창문 넘어 깔아놓고 긁히지 않도록 하는 모든 장비를 그 이삿짐센터가 가지고 오잖아요.
도피성이라든지 신약에 나오는 감당 못할 일은 우리가 준비한 게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 쪽에서 준비해 놓은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낯설기 마련이지요. 신약에서 감당 못할 일이 뭐냐 하면, 갑자기 로또 된다든지 갑자기 땅을 사놨는데 땅이 개발되면서 10배 올랐다든지 이런 게 감당 못할 일이에요. 왜냐 하면, 공돈이 생기면 사람 정신없습니다. 정신없어요. 그런 일이 안 생겨서 그러는데 생겨버리면 진짜 신자 아닙니다. 돈이 있는데 돈으로 살지 호강해도 평생 다 못 쓸 돈 받았는데 뭣 때문에 예수한테 기도합니까? 그렇잖아도 기도 안하고 있는데. 기도할 필요 없지요. 그게 감당 못할 상황이에요.
만약에 사람이 몸이 아프고 어려워버리면 악착같이 매달리는 버릇이 있어요. 매달리면 그 일은 주의 일이 아니고 내가 해결해야 될 내가 미흡해서 내가 해결해서 내가 뭔가 보상받아야 된다는 애착이 집착이 담겨있는 나의 일임을 내 쪽에서 손을 놓지를 못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냐, 자꾸 손을 놔라 해요. 왜냐 하면, 니 일이 아니고 니 인생은 니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 해도 제가 아무리 설교해도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손을 놓지를 않아요.
그래서 요번 수련회 주제가 ‘낯선 경계선’이잖아요. 낯선 경계선이라 하는 것은 해가 지게 되면 음지와 양지가 바뀌는 선이 이동하지요. 나무 밑에 자리에 누워 있다가 뜨거워서 눈 떠보면 해는 저 쪽에 가니까 나무 밑의 그늘이 이동했잖아요. 얼른 따라가서 자리피고 누워있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는데 그런 식으로 유혹해요.
현재 니 자리는 애굽의 자리니까 그 자리에서 아무리 주님을 찬양하고 바르게 살아도 자리 자체가 주님이 만든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는 십자가 그림자를 따라서 자꾸 따라오도록 다급하게 따라가도록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아이고, 더워라.” 해놓고 “아이고, 벌써 해가 졌어.” 자리피고 한 숨 자고나면 또 뜨거우면 벌써 저리가 있고. 물론 할 일 없어서 60넘어서 공원에 가야 일어날 상황이지만. 지금은 아직 없잖아요. 아직 50대니까 비실, 비실 노는 타입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리 될 수 있거든요.
그것처럼 주님께서 신약에서의 감당하리라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감당하지 못한 일을 주신 게 아니고 이미 주님이 감당한 일에 우리를 집어넣는 일이에요. 감당 못했다, 하는 것은 구약 적 개념입니다. 구약에서는 여전히 자기가 되고 싶은 게 있는데 자기 힘은 거기에 도달되지 못해서 “하나님이여, 좀 도와주세요.” 라는 식으로서 그렇게 감당 못할 일이 구약은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그것조차 용납이 안 됩니다.
사사기의 특징이 주변에 이방인들이 포진돼 있잖아요. 노리고 있다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공격을 할 때 특징이 그들이 공격을 하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나오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안 찾아요. 왜 안 찾느냐 하면, 처음에는 자기 힘, 여력이 아직 있어요. 요거 마지막 달달 다 긁어졌을 때에 뭘 부르느냐,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사사기 특징이 그래요. 그런데 요 사사기가 왜 중요한가 하면, 점점 더 심화돼요. 심화. 더 깊이 들어가는 것.
깊이 들어가면 엘리야시대 때 가뭄 들었잖아요. 가뭄 들었을 때, 사렙다 과부 있지요. 어쨌든 과부가 있는데 밀가루고 참기름이고 마지막 그 거 달랑 먹고 자살하려고 하는 대목 나오지요. 그게 자기 여력은 다 끝나는 거예요. 사사기에는 임시적인 사사를 줬지만, 엘리야는 아예 오래가는 선지자로서 아주 상주를 해버리죠. 어떤 상황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여력이 모두가 가뭄에 의해서 다 달달 없어진 상황에서 선지자가 계속해서 복을 내려주는 상황, 시추에이션에 들어가는 겁니다.
사사기는 임시적입니다. 사사자체가 잘났다고 까불다가 넘어지기 때문에. 구약에서 요런 흐름을 잡아내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사실은 난해하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사에서 특징은 인간이 가지고 있던 모든 여력은 다 날아가 버립니다. 이제 남은 일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사에서는 그걸 외부의 침입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사사이후 엘리사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범죄 해가지고 하나님이 축복의 땅에 비가 안 와버리고 흉년이 드는, 하나님이 직접 너희를 치고 있다는 것을 티를 내는 쪽으로 그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무대가 되는 겁니다.
전에는 사사시대는 아직까지 그 때 시대는 뭐냐 하면, 이 땅은 내 땅이야, 이스라엘은 이제 여기서 마음 놓고 살아. 자기 땅인 줄 알고 마음껏 누리는 그런 땅이었는데 적들이 오게 되니까 처음에는 자기 힘으로 하다가 다 떨어지니까 살려 달라 하는 거예요.
그 때까지는 아직도 약속의 땅은 우리를 생존케 하는 땅이라는 오해가 허용되는 땅인데, 엘리야, 엘리사 시대가 되면 선지자 시대가 되게 되면, 선지자에게 주어진 가뭄이나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문제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아주 가뭄으로 이렇게 보여주는 겁니다. 가뭄으로.
구약은 이처럼 이렇게 단체를 움직여요. 신약에 와서는 단체로 움직이는 이스라엘은 이제는 다 깨져버렸어요. 이스라엘 자체가 의미 없이 됐으니까. 그러면 개인적으로 가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가려면 구약보다 더 난해해졌어요. 어떤 점이 난해하냐 하면, 도피성 봅시다. 도피성이라 하는 것은 감당 못할 일이 일어났었는데 그 감당 못할 일이 뭐냐, 자기가 무심코 했는데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 살인이 일어나는 사건으로 전환돼버렸지요. 그러면 본인은 살인할 의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죽었던 원인은 나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는데 내가 말려든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이 죽게 된 원인과 나는 무관한 게 아니고 말려든 거예요.
말려들었다 하면, 나라는 존재는 결국 무엇에 말려들었느냐 하면, 저 인간이 죽어야 될 이유를 무심코 한 행동에 의해서 죽게 된 그 인간을 하나님이 자기 일에 합류시켜서 저 사람이 죽게 된 이유가 사실은 하나님을 인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인으로 활용되는 겁니다. 이야기가 문장이 길었는데, 신약으로 따지고 보면 뭐냐 하면, 우리는 구원받을 생각이 없어요. 없는데 구원이 되었고 주님의 성령이 오니까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구원되는 그러한 매개체로 활용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활용되었구나! 이리 되면 안 되고 도대체 그 원인이 뭐냐, 왜 나를 여기다가 집어넣고, 왜 저 사람을 구원하고, 왜 저 사람은 구원하지 않느냐, 그 원인을 그렇게 구분하는 그 구분이 어디서 출현하느냐, 그걸 찾아가야 될 그런 일에 우리가 말려든 겁니다. 이게 감당치 못할 일이다 말이죠. 감당치 못할 일. 이거 설명하는데 참 길었어요.
예를 들면, 목이 마르다. 물을 마시면 목이 안 말라요. 아무 문제없거든요. 목이 마르다 하니까 하나님께서 “지우개 만지고 마셔.” 이리 나오는 거예요. 내 생각에는 목이 마르면 그냥 물마시면 되는데 이 지우개는 왜 만져야 되는데? 모르잖아요. 이게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천국 간다. 고맙습니다. 하고 돌아서면 되는데 천국을 간다는 게 “니가 믿어라.” “믿습니다.” “믿으면 구원받는다.” “감사합니다.” 가면 되는데 그게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도대체 이 믿음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찾아가라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믿는 믿음은 구약 적이에요. 왜?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나에게 나온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감당 못할 다른데서 나온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내 믿음은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거예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지만.
“아이고, 구원은 내가 알아서 잘하는데 니가 왜 길이라고 니가 생명이라고 우기느냐” 이 말이죠. 우리가 알아서 잘 하는데.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그것 때문에 주님을 처음에 싫어하고 나중에는 그들의 구원의 장치, 성전을 공격하니까 에이, 그럼 니가 죽어라, 하고 죽이지요.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시작된 겁니다. 안식일 어기고 성전 깰 때, 바리새인들이 회의를 했어요. 살려둘 자가 아니다, 이리 나와요.
예를 들면, 오빠 나사로 죽고 난 뒤에 살아났잖아요. 그 때 그들이 모의한 거예요. 나사로도 죽이고 예수님도 같이 죽이자. 살려줄 자가 아니다. 이렇게 했고 한 사람이 죽어서 다른 민족이 살면 그게 이익이 아니냐, 라는 식으로 요한복음11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설명하기를 그들은 그렇게 오해했지만, 한 사람이 죽어서 다른 민족이 산다는 것은 사실은 택한 이스라엘만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들이 말하는 이스라엘을 두고 유다나라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쪽으로 요한복음은 쓰고 있어요.
어쨌든 도피성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는데, 내가 결과가 그냥 아무 연고 없이 붙잡혀 온 거예요.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은 그냥 구경하러 왔다가 지나가다가 주님 십자가 지다가 자빠지고 엎어지니까 그 사람을 데려다가 지우니까 그 사람은 아무 재수 없이 말려든 거예요. 우리의 구원은 재수 없이 말려든 거예요. 재수 없이 말려들어서 재수 있게 구원받은 거예요. 그리고 말합니다. 이 구원은 우리가 감당할 것이 아닙니다. 라고 남들에게 증거 하게 돼요. 성령이 임하면. “천국 가는 이거 우리가 감당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해낼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세운 기준이 아니고 성경 로마서8장에 나오는 확고한 기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 안 받으면 그리스도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구원파 아니다, 신천지 아니다, 해도 소용없어요. 정통이라고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성령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교회 다 떠나도 할 수 없어요. 이게 정답입니다.
그러면 성령 받으면 될 게 아니냐, 성령 받을 방법이 없는데요. 성령 받는 방법이 없어요. 기도해도 안 줘요. 왜냐 하면, 성령은 예수님이 자기 원하는 자에게만 줍니다. 주시고 우리는 그냥 받고. 그냥 성령이 원하는 자만 준 거예요. 그럼 누가 성령 받았어? 물으면 원하는 자만 줬다는 것이 믿어지면 그게 성령 받은 거예요. 우리가 감당하는 게 아닙니다.
도피성에 가니까 이 도피성에서 빠져 나오면 죽는 거예요. 그런데 언제는 살 수 있느냐 하면, 그 도피성에 함께 있었던 제사장이 함께 죽고 난 뒤에 너는 이제 이 성 밖에 나가서 마음대로 활개 쳐라. 결국 도피성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자유, 니가 아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이 아니에요. 왜 인간이 아니냐, 인간이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은 본인이 기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기계인 이유가 숙달되면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합니다. 운전도 그렇고, 자전거도 그렇고. 아무 생각 없이 한다는 그걸 가지고 저는 기계입니다. 이게 기계예요. 예수 믿는 것도 완전 기계예요. 뜯어보면 부속품이 들어있어요. 피부는 곱지만, 껍질을 벗겨보면 세포라는 이름의 기계가 들어있고 세포를 분해하게 되면 DNA가 들어있고 DNA가 뭐냐 하면, 탄수복합체에요. 기계에요. 그걸 핵산이라 하는데. 핵산이 뭐냐, 기계지 뭐예요.
여러분, 시계 안에 뭐가 들었어요? 시계 안에 부속 들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안에 예쁜 것으로 덮어놔도 전체가 시계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 용어자체는 말이 안돼요. 시계나 선풍기나 공통점이 있다. 기계라는 점이에요. 카메라도 기계에요. 우리도 기계입니다. 심지어 다람쥐도 기계고 귀뚜라미도 기계고 코스모스도 기계에요. 왜냐 하면, 기계인 인간이 그 사물을 세포 화시켜서 보기 때문에 기계인 인간이 기계를 보니까 기계로만 보여줄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은 내 기계인 내가 기계로서 천국에 살기를 원해요.
그러면 그 천국은 뭐냐, 천국이 아니고 공장입니다. 기계가 상상한 기계적 메카닉 월드기 때문에. 세계기 때문에. 그게 메트릭 세계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사람이 되고 싶어도 사람이 뭔지를 인간은 모르게 돼있어요. 기껏 나와 봐야 정교한 기계뿐이지 생각하는 기계일 뿐이지 한 번도 사람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되려면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야 사람이 돼요. 그러나 이미 죄 짓고 난 뒤에 형상은 이미 죽었어요. 그러면 남은 것은 뭐냐, 기계적 작동만 남아있는 거예요. 기계보고 양심을 논하고 기계보고 뭔가 사랑을 달라고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욕구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욕구라는 것은 하나의 기계적 욕구에요.
보통 남자가 여자한테 반해서 결혼하잖아요. 여자들은 남자의 마음을 모르지요. 저는 남자니까 남자의 마음을 약간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남자가 여자를 알게 되면 자기의 물질적인 즐거움 거기에 부합되는 그것이 계속 우러나올 때뿐이에요. 그래서 그 사랑스러움이 계속 안 나와 버리면 남자는 딴 데 찾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남자를 자기 안에 집어넣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남자가 자기를 죽을 때까지 계속 사랑해주기를 바래요. 여자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나는 모든 걸 줬기 때문에 니도 니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바쳐라, 이게 여자들의 본능입니다. 처음부터 맞을 리가 없어요. 처음부터 안 맞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둘 다 기계인데,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어요. 왜냐 하면, 여자는 뭐가 아직도 남아 있느냐 하면, 희생이 남아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이 뭐냐 하면, 니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니는 희생하는 피조물이 되어라, 이게 형상이거든요. 그 대표적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뜻을 위해서 아낌없이, 나는 아버지 뜻 이외에는 이루지 않는다 해서 자기 몸을 바쳤잖아요. 그게 형상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라는 그 말씀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놔야 되는 겁니다. 내 놓기는커녕 그걸 못 따먹어서 환장하다가 결국 마귀한테 유혹받아서 부축을 받고 따먹었지요. 제가 언제 강의했지요. 선악과를 따 먹은 게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를 따먹었다고요. 선악과에 뭐가 독약이 들어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선악과라는 그 말씀 체제를 삼킴으로 말미암아 이제 신은 나에게 어떤 명령도 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선언해 버린 거예요. 요게 마귀에요. 니는 니고 나는 나다, 라는 거예요. 특히 여자가 임신하고 난 뒤 애 낳았을 때에 귀엽지만, 애가 크면서 나타나는 속성이 뭡니까?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다, 이거 아닙니까? 처음에 오빠나 누나가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다, 할 때 누가 화내는 줄 알아요? 동생이 화내요. “누나가 엄마한테 그러면 안 되지. 오빠가 그렇게 나오면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라고 했던 그가 나중에는 똑같이 가요. 그러니 엄마 편드는 것은 “엄마, 걱정하지 마! 엄마 편은 나밖에 없으니까 엄마 나만 사랑해야 돼!” 라는 이기적 속성 때문에 엄마 편 들어주는 척 하고 있는 거예요. 나중에 애들이 40대 돼가지고 커보면 돈뿐이다. 돈 있는 부모만이 부모고 돈 없는 부모는 뒷방에서 쓰레기 처리해야 될 대상이지, 귀찮은 대상이지, 나의 인생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한 거예요.
왜 같은 정신연령이 3살인데, 왜 어릴 때 3살은 귀여운데, 왜 치매 걸린 3살은 왜 그렇게 안 귀엽냐, 희생이 남아있으면 자기 생각 안하고 상대가 원하는 쪽으로 하잖아요. 그런데 크면서 기계는 희생요소가 엷어져서 없어요. 결혼 초반에서 남편한테 잘해줘요. 그런데 언젠가 남편이 나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그 다음부터는 니는 니고 나는 나다가 되는 거예요.
희생이 끝나버리면 남는 관계는 돈의 관계밖에 없어요. 내 아들 키우는데 더 벌어와! 니는 비둘기야. 비둘기 아빠가 되든 말든 나는 애 안고 미국 갈 거야. 돈 벌어와! 이리 되거든요. 남자는 돈 벌고 여자는 애 키우면 되지, 돈도 못 버는 게. 남자 주제에. 남자는 음메 기죽어! 하고. 그게 뭐냐, 양쪽 다 상대를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하겠습니다. 하는 형상적 요소, 하나님의 형상의 요소가 다 날아가 버린 거예요. 형상이 뭐냐 희생하는 겁니다.
도피성에는 그 희생을 가르치는 곳이에요. 구원? 니가 있는 니 자리에서 현재 니 자리에서 도피성에 들어와야 구원이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현재 있는 내 자리는 뭐냐 하면, 내가 꿈을 실현하는 자리에요. 안양에 박달동 알지요? 광명역에서 12번 버스타고 오는데 보면, 교회 이름이 ‘더 많은 교회’에요. 주일날 써먹을까 싶어서 적어왔는데. ‘더 있는 교회’ 거기서 100m떨어진 그 옆에 ‘다 꾼 교회’ 꿈을 다 꾼 교회에요. 뭐가 빠졌어요? 희생이 빠졌지요. 쟁취와 소유욕만 남아있어요. 이 작은 교회가 안양의 큰 교회 성결교회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있어요. 왜 교회이름이 ‘다 꾼’ 또는 ‘더 있는’ 이건 누가 봐도 뭡니까? 여러분의 욕심은 신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채워질 수 있습니다. 라는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상품화시켜서 교회되어 보겠다는 겁니다. 꿈을 잊지 마세요. 희망을 가지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편입니다. 이걸 간판으로 구호 화시킨 교회에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복음을 안다고 해서 반대로 하시는 분이 있어요. 예를 들면 작은 교회, 망하자 교회, 진리가 자유케 하는 교회 있지요. 사실은 교회 자체가 이름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성경에서 이름이라 하는 것은 그냥 명칭만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름에서 계속해서 이름에 합당한 상황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어요. 상황들이. 이스라엘 이름이 뭡니까? 그냥 이스라엘이잖아요. 이스라엘의 내용 뜻은 잡신들과 인간을 이긴 거잖아요. 그러면 이름 자체에서 이스라엘 보고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 이름 주신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게 되면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지고 잡신들과 인간들을 이기도록 해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할 일은 뭐냐 하면, 지가 이스라엘에서 손을 떼면 되는 거예요. “나, 이스라엘 될 래” 이런 짓만 안하면 돼요.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의 결론은 아주 간단합니다. “기계 되세요.” “사람 되려고 하지 마세요.” “기계면 기계로 기계 값을 하세요.” 그럴 때 주께서 이 기계를 사람 되게 하시는 것이 느껴질 겁니다.
우리는 숙달과 반복밖에 할 줄 몰라요. 반복을 하게 되면 애들도 잔소리도 나중에는 지겨워요. 심지어 애들이 엄마가 잔소리하게 되면 잔소리할 때 그 다음 멘트까지 애들이 재미있어서 미리 이야기해요. “아이고, 저래가지고 나중에 어떻게 되겠노?” 그 다음 멘트까지 다 이야기한다니까요. 하도 들었으니까. 그러니 그 관계가 기계의 만남이니까 그게 무슨 먹히는 게 있겠습니까? 안 먹히죠. 그러니까 말을 안 하니까 속 터지고. 말 안 하니까 직무유기처럼 느껴지고. 나중에 그 잔소리 안하면 엄마가 잔소리 안 해서 성적 내려갔다고 또 엄마 핑계 댈 게 뻔하고. 하여튼 패는 게 제일 좋은데. 패게 되면 인간의 죽음의 충동까지 거론되기 때문에 곤란해요.
도피성 이야기해봅시다. 대제사장이 죽을 때 비로소 자유를 느낍니다. 그럼 자유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죄가 없어지는 게 자유가 아니고 내가 죄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죄로 판명 나는데 판명 난 그 죄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굉장히 복잡한 게 뭔가 하나 더 들어갔지요? 나는 이런 죄를 지었다. 이런 실수를 했다가 아니고, ‘내가 술을 먹고 오버를 해가지고 왜 이런 나쁜 짓을 했을까? 주여, 이런 나쁜 짓을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생각한 그 틀 자체로부터 죄인 줄 알고 벗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벗어나면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전에는 경건한 나, 훌륭한 나, 진실한 나, 주 앞에 영광 돌리는 나, 나 자신을 위한 나였는데 이렇게 자유를 얻게 되면 복음을 위한 나로 탈바꿈되는 거예요.
착해야 돼! 나는 반듯하게 살아야 돼! 그래야 영광 돌려. 왜? 나는 성도니까. 이런 식으로 살던 데서 벗어나서 복음을 위해서 그런 실수조차도 느껴지는 실수 아닌 실수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주의 뜻이었다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그게 자유입니다. 참~ 이런 자유 성령이 와야 돼요.
사도바울은 성령 받고 난 뒤에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나는 하는 일에 흠이 없다 해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한다고요. 나는 내게 주신 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했거든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굶고 다닙니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39대 매를 3번 맞아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바가지 틀고 이고니아에서 성 밖으로 도망칩니까?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면 날개 생겨라, 해가지고 팔팔 날아야지. 사도바울이 왜 앞뒤가 안 맞느냐, 앞뒤가 안 맞는 것은 자유 안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자유 한 사람은 그게 맞는 말이에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내가 하는 어떤 실수나 후회할 만한 짓이나 내가 어떻게 바람을 피웠는데 죄를 지어 살인을 했다, 어떤 것도 주께서는 문제 삼지 않는 다른 판으로 옮긴 거예요. 다른 판으로 옮겨 놓은 거예요. 그 판은 뭐냐 하면, 희생이 보여요. 무슨 희생? 대제사장의 희생이 보여요. 그 대제사장을 히브리서8장에서는 누구라고 합니까?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은 구약을 통해서 봐야 돼요. 도피성을 통해서 봐야 돼요. “예수님은 대제사장입니다.” “뭐지? 뭐지 이거?” “응 예수님은 구원자입니다.” “아, 그것은 알아듣겠구먼.” “예수님은 제사장입니다.” “그 제사장 왜 나오지?” 그 제사장 왜 나온 줄 모르면 구원자나 그 말도 사실은 모르고 있다고 봐야 돼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구원한다고 하니까 지가 생각한 구원, 천당 가는구나! 생각하고 “예, 믿습니다.” 하는데 그런 식으로는 신앙이라 할 수가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는 감당 못할 일들이 터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 갈 때, 광야에 가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라도 감당 할 수 있는 일을 일으켰던가요? 감당 못할 일입니까? 매일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가면서 감당 못할 일이 일어났지요. 제가 수요일 날 이스라엘을 소개하면서 뭐라고 소개했던가요? 벌판이 있다면 산에서 볼 때, 저 벌판 끝에 하나의 철로에 어떤 기차가 달리면 여기서 연기가 일어나지요.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이스라엘만큼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보이지요. 저 산위에서 보면 넓은 벌판에 외롭게 연기 품으면서 가고 있지요.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연기 왜 나옵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그럼 다른 민족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믿는 하나님은 우상이란 말을 한 거예요. 그래서 장안교회 교사들이 그런 강사 초빙하지 말라 해가지고 내가 못한 거예요.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파토 났어요. 제1복음 퍼포런스가 불판이 돼서 다 깨져버린 거예요. 어떻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가짜냐, 원래 가짜에요. 원래. “그럼 하나님 안 믿어야 되겠네.” “믿지 마! 예수 믿어야지.” 요한복음 내용이 그거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에요. 예수님만이 하나님이고 다른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니까요. 하나님 하려면 예수님만이 아는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니까요.
따라서 나를 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예수님을 결합시킬 수 없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결합시킬 필요도 없어요. 이미 예수 안에서 아버지와 우리가 하나가 되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하나님을 거기다가 겹 붙일 필요가 없어요. 겹 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예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속에 이미 다 해결된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 아버지, +아버지 할 필요도 없어요. 예수님 계신 곳에 아버지도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저 예수만 믿으면 된다니까요. 쉽게 한 가지만 하라고 했는데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는 어떻게 될까? 여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8장 5절에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형과 그림자지요.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말려든 거예요. 여러분이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에 공작시간에 했던 거 있잖아요. 이차원 면이 삼차원으로 바뀌는 방법은 도화지로 인형놀이 할 때 나오지요. 도화지에 집도 그리고 나무도 그려놓고 칼로 밑에는 자르면 안 되고 위만 잘라내 가지고 세워요. 수직적으로 세우면 입체가 되지요. 우리는 이 땅에서 이차원인생이거든요.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같은 인간만 상대하는 거예요. 우리는 영적 전쟁은 몰라요. 우리의 전쟁은 인간 대 인간 전쟁이고, 남편과 아내 가족들 우리의 만나는 싸움이고 보이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싸움을 하라고 우리가 성도 된 게 아니고 우리는 입체적인 영적 싸움하라고 한 거예요. 요 모형 보세요. 집 모형이 있으면 요걸 칼로 위에를 오려버리면 밑은 오리면 안 되지요. 떨어져 나가니까. 이건 점선으로 하고 바짝 세워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바닥은 그림자고 세워진 부분은 모형이 되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오림을 당하게 되면 다른 사람은 그림자거든요. 전부 다 엎어서 살고 있다고요. 인간들은 기어 다니는 거예요. 유 병언이가 1m59Cm라도 내가 보기에는 기어 다니는 거예요. 영적 싸움하는 게 아니고 기존의 교회를 우리교회로 만드는 그냥 같은 그림자와 그림자 딱 붙어있는 싸움이라. 그래서 그들의 영토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들의 영토는 이렇게 실선으로 나타낼 수 있어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거,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한나라, 진나라 나오듯이. 땅따먹기 하는 거예요.
영적싸움은 땅 따먹기 아니에요. 땅 따먹기는 너희들이나 많이 해라 말이죠. 인류의 역사라 하는 것은 뭐냐, 인간 대 인간의 투쟁이었습니다. 지금도 학교에서는 다 그렇게 알려 주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싸움은 그런 인간 대 싸움이 아니고 마귀와의 싸움이라고 로마서5장에 나와 있습니다. 뜯겨져 나와야 돼요.
그럼 마귀와의 싸움은 결국 누구와의 싸움입니까? 내가 내 자신과의 싸움이죠. 내가 사람하고 싸울 것이냐 아니면 마귀하고 싸울 것이냐 하는 싸움을 늘 내부적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일날 고린도전서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내용을 제가 미리 알거든요. 거기에 보면, 교회에 대해서 사기 당하거든 고소하지 말라,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도대체 얼마나 자유로워요. 그게 됩니까? 교회가 가정집에서 두 세 사람이 모이면 괜찮은데 가정집에서 말고 예배당 지은 곳으로 가게 되면 인간 대 인간의 지체 싸움에 다 와요. 그러면 목사가 그들의 비유를 맞추려면 그들이 못 알아듣는 영적 이야기해서는 있는 사람들 다 나가 버리는 거예요. 예배당 지을 때 빚내서 했는데 돈 누가 갚습니까?
예배당 지을 때 빚내서 했으면 그 빚을 갚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되고 그러려면 사람들은 평소에 하는 것이 영적 싸움이 아니고 누구와 싸운다? 자기 경쟁들과 라이벌들과 싸우거든요. 치킨 집하면 앞의 치킨 집하고, 시계 집 내면 시계 집과 싸우고 교회하면 앞에 교회 있고 잡아당기고 밀고 어린이집하면 어린이집해서 우리 애다, 해서 잡아당기고. 그 때는 칼 가지고 애를 둘로 잘라야 되는지. 솔로몬의 지혜에서는 모르지만. 순 이런 식이다 말이죠.
학교에 애를 보내보세요. 자율학습하는 이유가 뭡니까? 마귀하고 싸우려고 공부합니까? 인간 대 인간 아닙니까? 내가 들어가면 적이 못 들어가고 취직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혼담도 마찬가지고요. 인물 좋고 인간성은 좋은데 집안에 돈이 없어도 할 것이냐, 돈은 있는데 인간성은 더럽다, 할 거냐 말 거냐, 모든 드라마며 모든 게 그렇다 말이죠.
대제사장이 이 땅을 다녀갔어요. 누구냐, 예수님이 다녀갔습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디 있느냐,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감당 못할 상황이 있다. 그 감당 못할 상황이 뭐냐, 예상 못할 상황입니다. 뭘 예상 못했는가, 내가 영적 군사인줄 미처 예상 못했지요. 이 땅에서 돈이나 벌고 밥이나 먹고 살면 그걸로 승리하면 천당 가는 줄 알았는데 천국은 그래서는 못 들어가고 이 땅에서부터 이미 이 땅에 오신 제사장 되신 예수님과 뭔가 연관이 있어야 돼요. 아는 사이가 되어야 돼요. 니가 알고 내가 알고 서로가 아는 사이가 되어야 돼요.
아는 사이가 된다는 말은 주님의 일에 걸려들고 말려든 사람이 되어야 돼요. “주여, 저를 이렇게 다루시면 안 되지요.” 라는 고백이 나와야 돼요. “주여, 저는 이웃집과 다투는데 제가 마귀하고 싸운다 하는 것은 저는 그런 거 안 됩니다. 영적 싸움은 주님이 알아서 하시고 저는 그냥 이웃집 사람과 싸워가지고 돈 받아낼 거 받아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고린도전서에 뭡니까? 니한테 사기 치거든 고소하지 말라, 이렇게 나오니까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렇게 살면 됩니다. 머리를 커트하기 위해서 미용실에 갔는데 분명히 내가 예상한 커트로 갔는데 하고 난 뒤에 머리카락이 잘린 후에 거울을 보니까 아? 마음에 안 드네. 이거 3개월 기다려야 돼! 2개월 기다려야 돼! 다시 잘라야 돼! 그 때 고소해야 될까요? 참아야 될까요? 참는 거. 고게 영적 싸움이에요. 참을 때 어떻게 참는 줄 압니까? ‘그래, 내 주제에 홀라당 안 깎인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지.’ 하고 자기 싸움에서 자기가 늘 패배자가 되어야 돼요. 그걸 가지고 희생자, 대제사장이 보여줬던 희생의 모델이다, 이리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지만, 당황하지 않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모든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분명히 자기를 비난하는 죄인을 위하여 그 죄인을 자기 영역으로 끌어당겨서 이런 죄도 용서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냥 이 땅에서 희생하신 우리는 예상치도 못한 감당 못 할 일이고 지금도 우리가 감당 못 할 일이고 우리는 그 희생이 보이는 자리를 원치 않고 내가 승자되는, 누구한테 진적이 없는 대단한 존재인 것을 나타내는 그 전쟁에 우리는 매진하고 싶어 하는데 주께서는 우리를 희생이 보이는 자리에 우리를 거기다가 데려갑니다. 감당 안 되지요. 하지만, 감당안하지만, 주께서는 감당케 하시는 그런 일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물으신다면, 우리는 모형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림자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발을 못 빼면 죽을 때까지 이 땅에 있어야 돼요. 우리는 우리가 만든 기계적 상황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상상해도 상상의 끝도 기계로 되어있습니다. 내가 기계고 기계는 요렇게 하면 요렇게 됩니다. 이게 기계에요. 이렇게 해봐라~ 요렇게! 요렇게 되거든요. “박수치며 은혜 받습니다. 주기도문 1000번 외우면 방언 터집니다.” 이게 스스로 자기들을 기계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뭘 해도 안 됩니다. 이것이 뭐냐, 우리는 주님의 일에 말려들어서 희생당할 뿐입니다. 항상 희생할 준비가 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당하는 것, 이것이 사람입니다. 자식에 대해서 사실은 엄마로서 희생을 했습니다. 희생을 했는데 어떻게 희생 했는가, 엄마 고집 부려가면서 희생한 거예요. “너는 이렇게 되어야 엄마가 자식 잘 키웠다는 칭찬을 듣는 엄마가 되는 거야.”라는 내심의 강력함 속에 자식들을 그렇게 길러냈는데 그게 어떤 의미에서는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 때문에 엄마가 자기 일을 못하고 그 자식에다가 몸 달아 하는 희생을 한 셈이 되지요.
“아이고, 니가 아들만 돼도 이런 걱정 안한다.” 이런 식으로. “조금 일찍 들어온 나. 니가 아들 같으면 10시까지 들어오라고 안하는데 딸이니까” 못 들어오다가 새벽에 들어오다가 울산에서 묻지 마 살인 당했잖아요. 밤에 택시 무섭다고 택시 피하고 버스 타다가 죽었잖아요. 사실은 너무나 우리가 기계적으로 내 요망과 내 희망만 고집하다 보면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 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손들어 버리는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절로 나오는 그런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 사태가 바로 거룩한 주님이 동행하고 있음이 감지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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