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피의 배선(히8;10) 1410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22. 12:30
2014-10-18 00:41:56조회 : 1035         
피의 배선 141017이름 : 이근호 (IP:119.18.9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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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41017a-히8장10절(피의 배선)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8장8절에서 12절까지 나온 내용이 이게 구약의 예레미야31장 31절에서 34절에 있는 내용인데, 이게 구약에서 예레미야에서 언약에 대해서 그것도 새 언약에 대해서 언급한 대목이 제일 중요하게 언급을 했습니다. 얼마나 중요했으면 히브리서8장에도 나와 있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언약이야기에요. 8절에 보면,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제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조인트하는 유일한 그 연결고리는 언약이다. 이제 확정됐지요. 구약과 신약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구약을 신봉했던 이슬람이나 유대교는 왜 예수를 안 믿지요? 예레미야31장에 나와 있는데요. 그들이 구약을 믿거든요. 이슬람이나 유대인들도. 그러면 구약의 예레미야31장에 이 새 언약을 세우리라, 는 말이 분명히 그들이 알고 있을 거잖아요. 알고 있는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왜 안 믿지요? 좀 이상하지요. 그들은 아직 새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본 겁니다. 새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데 왜 그러는가 하면, 정치적으로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 중심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까지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요. 기독교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용서가 들어오면 언약이 이루어진 걸로 보잖아요. 이스라엘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거든요.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에 옛날 다윗 때에 잘나갔다 이 말이죠. 다윗 때 그들은 그야말로 그 근동지방을 지배했잖아요. 새 언약이 오게 되면 그 지배했던 다윗과 솔로몬의 화려한 영광 특히 솔로몬 같은 경우는 온 궁궐이 다 금덩어리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토가 넓었지만 얼마나 호사스럽게 살았습니까? 온 천지가 온 나라가 하나님의 축복에 완전 우박을 받은 것처럼 축복으로 뒤집어쓴 거죠. 그 때가 다시 와야 언약이 완성된다고 본 겁니다. 왜냐 하면 그 때 그렇게 좋았던 솔로몬의 부귀영화가 그 뒤에 사람들이 교만했다든지 말씀을 어겼다든지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게 도로 날아가 버렸잖아요.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그리워하겠습니까? 그 때 그 시절. 그 영화로울 때가 좋았는데. 천하 모든 것이 솔로몬에게 굴복했던 그 때가 좋았는데.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어느 누구도 갈굴 수 없는, 누가 하나님을 대적하겠습니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만약에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에 버티고 있다면 어느 누가 감히 그 가정을 무너뜨리겠습니까. 천지를 만드신 분인데. 그렇잖아요? 마귀 같은 것은 쉽게 굴복하지요. 

그렇게 좋은 시절이 있었으니까 유대인들은 어서 로마에서 벗어나서 동네국가가 되면서 이제는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 중심국가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복을 받고 이스라엘을 대들면 저주받는 하나님의 문자적인 부귀영화가 확보되고 영원한 하나님이 다윗 자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볼 수 있는 그와 같은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하기 바쁘고 세계 최고의 나라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레미야의 약속은 아직도 안 이루어졌다고 보는 겁니다. 

자, 우리가 만약에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어느 쪽을 믿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 그게 새 언약이라고 믿겠습니까? 아니면 글자 그대로 우리 이스라엘이 잘되는 때를 믿겠습니까? 우리가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잘되는 걸 믿겠지요. 그러니까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적인 일이겠어요. 사람이 마땅히 자기 잘되는 것, 자기가 번영되는 것, 그걸 마다할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덕을 본다는 건데, 하나님의 덕을 실컷 본다는 것을 무슨 수로 마다하고 우리는 죽을 죄인입니다, 이걸 선호할 수 있는 힘이 없어요. 지금 유대인으로서는. 

자, 그럼 물어봅니다. 유대인은 그렇다 치고 우리같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세상부귀를 포기하고 주의용서만 해주신다면 거지라도 좋습니다. 창기라도 좋습니다. 강도라도 좋습니다. 이렇게 나올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역시 없지요. 그러니까 강도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기적이냐 이 말이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다 기적적인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그 기적적인 일을 이 히브리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효과라고 본 겁니다. 니 힘으로 되지 못한 일을 하나님은 하셨다는 겁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우리 힘으로 되지 못하는 것’을 누가 하셨다 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다.’ 자, 제가 이렇게 문장을 적었습니다. 이해되시지요? 여기에 숨어있는 세미한 것을 개념을 이제부터 설명합니다. 

내 힘으로 되지 못한다, 는 것이 되려면 과연 인간이 뭘 안 해보고 안 된다고 하는 것보다도 뭘 해볼 대로 다해보고 안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확실하겠지요. “너, 해도 안 돼!” 이러면 기분 나쁘잖아요. “아닙니다. 할 때까지 해보고 정말 안 되네. 할 그 때서 저는 수긍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게 맞지요. 

‘내 힘으로 되지 못한다.’ 할 때, 이 문장을 확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뭐냐,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할 수 있는 걸 다 해봤어요. 우리가 이스라엘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이스라엘 돼도 우리가 할 때로 다 해보지만, 우리는 실패로 끝납니다. 전화 받는다고 못 했으니까 다시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는 그걸 친절한 금자씨!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 이 문장을 보세요. ‘내 힘으로 하지 못하는 걸 하나님이 하신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에요. 누구나 공감한다고 자부하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정말 니 힘으로 되지 못하는 것에 우리들이 동의합니까? 우리는 이 문장을 수용하면서도 “하나님이여, 제가 아직도 안 해본 게 많은데 함부로 단정하지 마시옵소서.” 라는 것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더라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내 힘으로 되지 못하는 것을 개개인이 다 실험해 보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이미 이 문장은 이미 확정되어서 이미 다 해봤어! 라고 하는 제시한 증거가 뭐냐,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걸 다 해봤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지키기, 하나님 섬기기 다 해봤어요. 성공이었습니까? 실패였습니까? 실패로 끝났어요. “아이고, 이스라엘 사람은 이상해. 우리 같으면 될 건데” 아닙니다. 우리가 마찬가지 돼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 멸망으로 확정되었지요. 이게 구약입니다. 구약 성경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도 그들은 메시아 오기를 기다립니다. 자기들 할 수 있는 건 다해봤으니까 이제 오는 것은 메시아의 은총만 기다려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왜 예수를 안 믿지요? 그건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번영이다. “솔로몬처럼 되게 해주세요.” “다윗처럼 되게 해주세요.”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소개한 것은 “니 죄를 알렸다!” 이거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솔로몬 때처럼 번영하고 온천지가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그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그것을 유대인들이 문자적으로 그걸 기다린다면 그들은 헛수고한 겁니다. 히브리서1장10절에서 그 헛수고에 대해서 미리 다짐을 해놓은 게 있어요.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여기서 주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십니다. 신약에서는 주님이,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바꿔줘야 돼요. 왜, 인간이 생각하는 신은 인간을 구약이 다 실험을 해보니까 인간이 만든 하나님은 상상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에요.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되 그 품속에 든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니 그 분이 누구시다?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항상 하나님한테 가까이 할 때는 하나님부터 출발하지 말고 어디부터 출발해야 돼요?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돼요. 제가 당부를 해도 돌아서면 또 하나님부터 출발해요.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14장,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자꾸 니가 하는 하나님은 상상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건 접어라. 그건 마귀가 니한테 뒤집어씌운 것이고 그렇게 한 거예요.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 하나님을 자꾸 언급한 거예요. 구체적인 하나님은 땅에서 찾아야 되는데 땅에 오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누구예요?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주께서 예수님께서 태초에 땅에 기초를 두셨으면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라는 히브리서1장 10절 요까지만 딱 보게 되면 ‘아, 우리 주님이 또 하나님과 더불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 만들어진 것을 자기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뭉개버리거나 부셔버리거나 파괴시킬 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안심들을 하시잖아요. 

그런데 11절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그것들은 뭐할 것이요? 멸망할 것이요. 여기서 우리가 납득이 안 됩니다. 아이 하나님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멸망시킨다? 뭐 그런 횡포가 다 있어요. 그런 횡포가? 마치 이런 것은 뭐와 같은가 하면요, 목수가 주문받아서 집을 지어놓고 집지었다고 박수치고 테이프 끊고 “자, 집 다 지었습니다. 멋지십니까?” “야호, 멋지다.” 전부 다 박수치는 순간 하나, 둘, 셋 하고 완전 다 무너뜨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세상의 완성은 파괴하면서 완성의 묘를 보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할 아이디어입니다. 세상의 완성은 멋있게 등장한다, 이게 상식인데 이게 아니고 세상의 완성은 그것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 우리는 짝! 짝! 짝! 박수치면서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하고 악수해야 돼요. 무너져가지고 먼지가 펍석 일어나면서 주님하고 하나님하고 악수하고 짝짝짝! 됐어! 됐어! 그러니 이러한 아이디어를 인간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요? 인간은 이왕 태어난 거 부수지 말지. 이왕 만든 거 부수지 말지. 이사 간다고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고 이사 가는 거 버릴 거 책상도 내거 주지, 걸상도 내거 주지. 매트릭스도 내거 주지. 방석도 줘서 강아지 앉히게. 이리 나오지 세상에 무너지라고 만든 세상의 창조주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있거든요. 

그러니 우리의 출발점부터가 이미 교회에 들어올 때부터 우리는 잘못된 선입관부터 출발한 거예요. 마귀 적 안목가지고 우리는 천당 가겠다고 교회 온 거예요. 왜 무너지는가? 주님 안에 세상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주님 안에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여자가 결혼을 했는데 10년이 되어도 임신이 안 되고 도저히 임신이 안 되니까 그 여자가 부부가 상의해서 어떤 애를 입양을 해가지고 입양 오는 날 그동안 마지막인데 검사해 볼까 해서 봤더니 임신이 되었어요. 어떻게 합니까? 입양하는 날 애한테 솜사탕하나 쥐어주고 다시 돌려보내야 되지요. 참, 가혹하지요. 

우리로 하여금 만드신 우리를 하나님이 키워줄 것이다. 천국 갈 것이다, 했는데 만들어서 주님 보니까 주님 안에 딴 세상이 따로 임신되어 있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 하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대구 같은 세상에서 내가 잘되는 것이 주의 축복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축복이 아니고 그것은 저주였고 축복은 따로 마련되어 있었어요. 어디에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마련되면서 예수님의 부활로 그것이 만개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이기는 세상으로서 우리에게 덮치면 우리는 백날 살아봐야 늙어죽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이 새 생명에 의해서 덮쳐질 때, 그게 교체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기다린 것은 눈에 보이는 소망은 not hope.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원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이런 것 저런 것 필요한 것 주시옵소서.” 그럴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 기도는 하지 마라. 내가 니한테 있어야 할 것은 내가 아니까 니가 닦달 낸다고 내가 주는 게 아니고 니가 기도 안한다고 안 주는 게 아니에요.” 또 갑자기 복음이 들려왔지요. 한 번 적어볼까요. 

‘기도 안한다고 안 주는 것이 아니다.’ 참,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복음이죠. 그러면 이 기도를 안 해도 주시는 것은 누구 이름으로 주시는 겁니까? 이것은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주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다른 게 아니고 만나처럼 아침에 가보니까 내가 심지도 경작하지도 않은 그 어떤 똘망 똘망한 그런 작은 그런 것들을 그냥 어떻게 줘요? 감사함으로 바구니에 담지요. 마치 12광주리에 차고 넘치는 것처럼. 12광주리에 차고 넘치는 것이 그게 낭비의 철학이라 했잖아요. 

어제 가락교회에서 했거든요. 뭐 와야 알지. 뭔가 강물이 범람하는 것. 뭔가 태양 열에너지가 낭비되는 것. 왜 하나님은 낭비가 그렇게 심하지요? 그 넘쳐흐름이 우리의 죄도 거뜬하게 우리 죄를 무죄상태로 바꾸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의인으로 바꾸는 그것이 주님의 낭비처럼 보이는 주님의 무한한 은혜의 왕 노릇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더라도 주신 것을 보면서 우리는 내 기도덕분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주님이 하시는 기도 덕분에 우리가 매일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주워 모아야 돼요. 제가 미국에서 설교할 때 이렇게 했어요. 뜯지도 않은 택배라 했습니다. 뜯지도 않은 보따리를 뜯어보면 전부 다 내 이름으로 원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은혜들이 사방에 널려있어요. 그거 뜯으면서 감사하기도 바쁜 생활이 우리의 생활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애굽같은 세상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그런 걸 탑재하고 그런 것을 저축하고 그걸 내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쉬운 영어 있지요. have, 해브지요. 소유지요. 소유. 내 영역 소유하기 위해서 기도하잖아요. 내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 해놓고 뒤에 변명하기를 비겁하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끝내고 하는데 사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놓고, 이게 이방인들의 기도다 말이죠.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참새도 친히 기르시고 들풀도 기르시나니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참새가 하루에 기도 몇 번합니까? 들풀이 기도합니까? 들풀은 아궁이에 불쏘시개 넣을 때까지 주님께서 친히 기르십니다. 내일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들어간다 할지라도 들어갈 때, 들어갈 때까지 주께서 친히 기르십니다. 우리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안개거든요. 주께서 우리를 다 쓰실 때까지 곧 죽기 직전까지 우리를 친히 주께서 쓰십니다. 숨을 헉! 헉! 하는 것도 주께서 그렇게 헉! 헉! 하셔서 하는 거고 이혼할 때도 큰 아들은 부동산가지고 가고 둘째 아들은 내 빚이나 물려받아라, 이런 식으로 유언하는 그 순간도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는 주님인데 세상만사 내 것은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주께서 다 힘주셔서 움직이고 있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내 것이 없다는 것부터 출발해야 돼요. 내 것이 없다고 해야 우리가 망해도 섭섭지 않잖아요. 내 것도 아닌데 주님 거 주님이 구겨본다는데 내가 왜 화를 냅니까? 내가 성질부릴 이유가 없지요. 성질부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전부 다 내거라고 여기는 거예요. 실제로는 내 것 인 듯 내 것 아닌 것 같은 너, 우리는 뭔가 모호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강의에서 어려운 대목이 나오는데 어려운 대목을 미리 당겨서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본래성입니다. 본래성. 오리지널이에요. 오리지널. 이 본래성이 인간은 비본래성이거든요. 인간은 종잡을 수 없는 존재잖아요. 하나님의 본래 진짜 언약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왔다, 갔다 해요. 아침 기분 다르고 오후 기분 다르고 왔다, 갔다 한다고요. 여자들은 모르겠는데, 남자 같은 경우에는 제가 남자기 때문에 아는데 남자들은요, 회사에서 짜증나고 불평스럽고 짜증 덩어리로 퇴근하더라도 TV에 프로야구에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잖아요. 그럼 그 순간에 졸지에 기분이 확 펴가지고 오늘 내가 치킨 쏜다! 해서 아주 객기를 부려요. 치킨 시키고 맥주 디를 시켜서 기분 혼자 즐기는 겁니다. 그 프로야구 게임이 뭔데? 그거 이겼다고. 기분이 갑자기 업 그래요.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게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왜냐 하면, 인간의 감정은 하나의 이성이 조절이 안 됩니다. 아내만을 사랑해야 한다, 이거 누가 모릅니까? 다 알지요. 결혼할 때, 만세, 만세 나는 김경희를 죽도록 사랑한다. 만세, 만세, 조금 전까지 외치다가 신부 친구에게 눈 돌아가는 거 보세요. 신부 친구에게 눈 돌아가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이게 이성으로 안 되는 줄 알지만, 이성보다 더 힘 센 게 있어요. 그게 emotion, 감정이에요. 감정. 끓어오르는 감정.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니가 속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나오는 게 더럽다는 거예요. 그걸 무슨 수로 관리합니까? 남자는 그냥 이쁜 거 최고지요. 

만약에 어떤 총각이 있는데 얼굴은 좀 못 생겼지만, 집안에는 돈이 있고 믿음 좋고 성격 좋아서 남자에게 순종 잘한다. 그런 신부감있고 또 하나는 이쁘기만 한 여자가 있다. 그럼 내가 어느 아가씨하고 결혼하면 되느냐, 누구한테 물어봐요. 믿음 좋고 순복 잘하고 돈이 있어가지고 사업할 때 처갓집에서 돈 잘 빌릴 수 있고 그런 집하고 결혼하라 하지요. 물론 이성적으로 그게 옳으니까 결혼을 하잖아요. 여자는 이쁘기만 했지 믿음도 없고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성질도 더럽고 그래요. 하지만 그 남자가 그 못생긴 여자와 결혼생활 30년 40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빈 구석이 뭐냐 하면, ‘그래도 이쁜 거와 한 번 살아봤으면.’ 그 빈자리는 갈수록 커지기만 하는데. 갈수록 커지기만 해요. 

여성은 어떠냐 하면, 여성은 결혼하는 순간부터 남자의 혼속에다가 토굴을 파가지고 그 안에 들어가 있어요. 수요일에 이야기했잖아요. 남자는 1+1이라고. 완전히 마트 세일하듯이 세일을 해요. 세제하나 더 붙여주는 것처럼. 내가 여기 있는데 여자 하나 더 추가하는 것처럼. 국밥하나 더 추가하는 것뿐인데 여자는 남자와 결혼하는 순간부터 남자의 심장 속에 들어가서 토굴을 해서 아지트를 만들어가지고 이제는 로봇 태권V를 안에 사람을 들여 움직이듯이. 여자가 남자를 창으로 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리로 가! 운전 이렇게 해! 여자는 자기는 없어요. 남자를 껍데기로 사용하고 그 안에 자기가 들어있어요.    

그러니 남자는 결혼하고 난 뒤에 여자를 못 떼어내서 환장하는 거예요. 안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있는데 어떻게 떼어냅니까? 들어온 병을 무슨 수를 떼어냅니까? 나가라면 더 붙어있는데. 거기다가 애까지 낳아보세요. 이건 끝났어. 애 낳고 난 다음에 남자는 흑! 담배 피우고 휴~ 혼자 있을 때는 헤어질 가능성이 있지만 이제는 자식 때문에 죽으나 사나 돈 버는 기계가 되어가지고 내 팔자야, 남자가 딴 짓하면 마치 꿈속에서 아빠! 하는 것 같아. 아이고, 그래 버려야지.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애 하나 더 낳아버리면 큰 문제에요. 그 마지막 입가심으로 하나 더 낳아버리면 완전히 애피타이저로 끝내 버려요. 완전히 디저트로 끝내버려요. 애 셋 낳으면 이제는. 그 때부터 여자는 슬슬 명품에 눈 돌아가요. 좋은 옷에 눈 돌아가요. 백화점에. 

인간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어요. 마귀가 완전히 죽을 만들어놨어요. 그러니 보세요. 하나님의 언약이 백날 언약을 해줘도, 언약은 쉽게 말하면 말씀이거든요. 말씀이 계속해서 주어줘도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네. 죽이거든요. 죽은 액체잖아요. 언약이 와가지고 뭔가 딱딱해서 언약 온다 해서 딱 받아가지고 언약대로 살면 되는데 인간 자체가 물렁 물렁해져가지고 언약이 떨어지면 풍덩해가지고 방금 뭔가 돌이 떨어졌나? 어디로 튕겼지? 이런 식이라. 교회 갈 때만 잠시 은혜 받고 교회 문 열고 나오면 은혜고 나발이고 다 떨어지고 다시 흔들리는 또 다시 세상의 욕정에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믿음이고 뭐고 다 까먹고 다 날아갔어요. 이제는. 똑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남한테 안 지려하는 것, 이 애굽 세상에서 기어이 버티려는 것. 망하는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는 거예요. 

언약 안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성공과 실패가 없어요. 언약 안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고 그 대신 뭐가 있느냐 하면, 축복과 저주가 있어요. 여러분, 복 받으렵니까? 성공하렵니까? 어느 쪽입니까? 성공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축하해주는 박수 소리가 들리는 곳이 성공이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축하해주려면 친구와 더불어 있어야지 내가 빠져나와버리면 축하 줄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성공도 의미 없이 돼버리는 거예요. 누가 부러워하고 박수를 쳐줄 때 우리는 성공한 보람을 느끼는데, 자기는 백날 성공했는데 아무도 관심두지 않을 때, 자기는 그걸 성공의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못 누리겠습니까? 못 누리지요. 기쁨 없는 성공은 의미 없는 성공이에요. 

예를 들어서 애가 둘이 있는데, 밑에 애가 평소에 수학을 못했어요. 늘 20점, 30점. 그래서 엄마가 “니가 50점 맞으면 자장면 사줄게.” 이랬단 말이에요. 50점 맞으면.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자기가 뭘 내려썼는지 50점을 맞았어요. 잘못 썼는데 우연히 행운이 되어서 50점 맞았다. 성공했지요. 엄마 나 50점하고 들고 오는데 형은 그날 100점, 100점 올 100점. 그럼 축하를 받을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받지요. 지 성공이 에이 씨! 하고 50점 구겨서 던져버리는 거예요. 자기 딴에는 성공했지만, 자기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없을 때, 그건 성공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세상은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가 이 세상입니다. 

나를 누가 알아주던지 그러니 인간은 결국 타인의 시선에 노예로 살아가는 거예요. 남의 시선에 종이 되어서 살아가는 거예요. 매일 큰 소리 치지요. 나는 내가 주인이다. 말만 큰 소리 치지요. 그렇게 외치는 것이 남이 없으면 외치는 것도 의미가 없어요. 얼마나 의미 없었으면 홀로 새벽에 산에 올라가가지고 “사장 니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소리하겠어요. 그것도 회사에서 이야기 안하고. 꼭 노는 날 일요일 날 청계산에 올라가가지고 사장이름 부르면서 니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런 식으로. 내려와서는 “아이고, 사장님...”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 한 맺혔으면 그런 소리하겠어요. 또 여자 같으면 “시누이  니 죽었다. 죽어라.” 내려와서는 “시누 오셨습니까?” 시가 쪽 관계가 그렇습니다. 

그런데서 싹트는 것이 뭐냐, 기어이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에게 스트레스를 가증시키는 겁니까. 제가 주일 낮에 설교한 게 기억나는데요. 이런 대목을 했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짐은 가볍다.” 했지요. 우리는 끝에 가볍다는 것만 알고 중간에 뭘 빼먹는 수가 있어요. 뭘 빼먹었다 했지요? 편히 쉬게 하겠다는데 편히 쉬는 것만 좋아하지 말고 뭔가 하나 중간에 있지요? 중간에 뭐지요? 내게 배워라. 내게 배울 경우에는 편히 쉰다는 거예요. 내게 배울 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모든 모욕과 모멸은 다 오너라. 왜? 그 모욕과 모멸은 지금 만인 직전에 하는 모욕과 모멸이에요.  

그들은 지금 지옥으로 꺼지면서 큰 소리치고 있는 거예요. “야, 니 나하고 한판 붙자.” 그러면서도 점점 더 지하 15층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내려가고 있으면서도 “야, 니 나하고 한 번 내가 니 보다 성공했어. 나는 이건희야.” 이건희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니 재산 얼마야?” “니 이천만원?” “나는 15조야.” 15조 되면 뭐합니까? 이 건방떠는 버릇이요, 부자와 나사로의 이 버릇이 지옥가도 안 고쳐져요. “어이, 나사로, 오랜만이다. 아브라함님, 저 나사로한테 시켜가지고 저한테 물 한 방울 손가락 찍어가지고 좀 주면 좋겠습니다.” 물의 시가가 얼마입니까? 이 땅에서. 물 한 방울? 물 한 방울 얼마지요? 돈 거의 가치 없지요. 그런데 지옥에서 물 한 방울 얼마입니까? 지옥 다 털어도 못 사요. 우리는 물 받을 때, 마태복음6장에 선인과 악인에게 단비를 주시지요.
우리는 거의 가치 없다고 여겼잖아요. 비는 위에서 공짜로 주니까.
 
그런데 그 가치가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가치입니다.
앞으로 비 맞을 때는 피 받는 걸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주의 피가
. 지옥 가보세요. 그게 얼마나 비싼 물인지. 그런데 요한계시록22장에 천국가보세요. 물이 있어요? 없어요? 물에 헤엄친다니까요. 자유형에. 왜? 생명수 강가에 물이 흘러요.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자신이 우물이에요. 생수가 막 나와요. 

이 땅에서 흔하디 흔한 물이 지옥에서는 물도 없고 모든 물은 천국가가지고 생수가 되어 영생의 물이 되어있고 이 땅에서 반지하에 살고 고생 좀 하는 그거 지금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가 안 됩니다. 그렇게 하거든 차라리 신앙 반납하고 이건희처럼 병원에 누워있던지. 눈만 뻐금하면서 누워있던지. 삼성그룹하고 있던지. 아니면 삼성그룹포기하고 차라리 “거지 나사로 되어도 좋습니다.” 하던지 언제까지 머뭇 머뭇거릴 겁니까? 

둘 중에 하나만 하세요. 둘 중에 하나만 하란 말이죠. 다 이 세상에 밟히는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너무 흔하기 때문에 감사치 못하고 내 고집만 내세우면서 상대적으로 결국은 예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우리 자신의 욕망이 욕심이 주님의 은혜를 그렇게 모독했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인간이 주의 기도를 모독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또 뭐 이 근호목사는 기도하지 말라, 이런 소리 하는 거 아닙니다. 기도를 하세요. 하되 그것은 기도 안하면 안 되게 주께서 또 조치를 해요. 기도 안하면 안 되게. 답답하면 기도하게 돼있는 게 당연하니까 기도하면서 고 기도내용은 기도하는 가운데 주께서 친히 응답으로 친히 바꾸어주십니다. 주님은 살아계시니까. 

두 번째 봅시다. 내 힘으로 되지 못하지요. 우리 힘으로 왜 되지 못합니까? 우리는 이 애굽에서 뭘 원하기 때문에? 성공을 원하기 때문에. 그런데 성공이라 하는 것이 결국 내가 원하는 성공은 남들이 기대하는 성공을 뒤따라가서 우리가 바보처럼 뒤따라가면서 이거 어디로 가는 성공인지도 몰라요. 하여튼 성공이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남자들 한 30, 40대 되면요, 로망이 희망이 뭐냐 하면, 필드에 가서 골프 치는 거거든요. 덩달아서 여자들도 그렇게 보지만. 저 골프 못 쳐요. 미련 없습니다. LA가니까 우리 처남이 골프장에 구경시켜 줄 테니 가자고 하는 거예요. 안 간다고 했어요. 골프는 게임이거든요. 그 게임이 이 세상에서 하나의 성공한 사람의 대표적인 놀이라고 본다면 이 세상 자체가 우리 인생 자체가 헛되고 헛된 게임에 불과한 겁니다. 그렇지요? 

결국 어떤 골프라는 게임이 우리를 대표한다는 말은 평소에 우리도 뭔가 게임에 말려들고 있다는 겁니다. 게임이라 하는 것은 게임으로 끝나거든요. 그렇잖아요. 게임에 울고불고 하는 것은 도박하는 사람밖에 없어요. 그러니 얼마나 헛된 거예요. 화투에 인생을 거는 게. 바보 아니에요? 어떻게 48장 화투에 인생을 겁니까? 그 귀한 목숨을. 48패에 목숨 건다는 게 말이 돼요? 그게 정신병자들이에요. 얼마나 걸게 없으면 화투에 포카에다 다 걸어요? 이 세상은 자본주의라는 게임입니다. 돈 버는 게임이에요. 

제가 만난 사람 중에서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공장가서 돈 번 게 아니고 펀드로 돈 벌었어요. 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루, 하루 개미처럼 일한다고 해서 큰 돈 만지는 게 아니에요. 큰 돈 만지는 세계에 게임에 들어가야 큰돈을 만져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무의미한 세상입니까? 이 세상 자체가. 두 번째 내 힘으로 되지 못하는 걸 알겠지요? 또 이야기할까요. 우리는 성공만 원하기 때문에. 

성공이라 하는 것은 게임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망하는 세상에 속하기 때문에 주님하고는 아무 관계없어요. 우리는 성공 실패 자체가 없습니다. 오늘부로 성공 실패라는 게 우리에게 없다고 아예 못을 박으세요. 성공 실패 대신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복 받았느냐, 아니면 저주 받았느냐, 양이야, 아니면 염소야, 니 천국 갈 사람이야, 아니면 지옥 갈 사람이야, 그겁니다. 청국장 먹을래? 그거 아닙니다. 천국 갈 사람이냐, 그래도 자주 청국장 먹으시기 바랍니다. 먹으면서 천국도 생각하면서. 선량한 개그지만 할 수 없다. 이거. 중요한 거. 천국 갈 사람이냐, 지옥 갈 사람이냐, 그게 중요하지 직업이고 뭐고 안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하셨다.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이걸 몰라요. 왜냐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데 왜 주님이 또 하지? 우리가 못할 것 같으면 주님이 하시면 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하셨다, 를 믿지요. 그 말은 달리 말하면, 내가 할 수 있다? 없다? 나는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빠져라, 라고 미국 맨하탄 마지막 예배 때 했거든요. 바쁘시더라도 미국강의 올려놨으니까 전부 다 한 번 보세요. 보게 되면 제일 마지막 강의가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뉴욕에서 떠나기 직전에 한 거예요. 다음날 새벽 3시에 일어나야 되는데 그 전날 11시까지 있으면서 했던 그 예배, 인간은 빠져라, 니 운명에 대해서 니는 빼버려라, 그게 믿음이에요. 왜,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왜 그러느냐 이게 언약입니다. 내가 한다는 거예요. 

자, 물어보겠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자, 누가 했습니까? ①번 가룟유다가 했다. ②번 마귀가 했다. 누가 했습니까? 마귀가 했지요. 그 마귀는 누가 시킨 겁니까? 주께서. 그러니까 주께서 하신 거예요. 어제 가락교회에서도 강의했습니다. 추수할 자와 추수되지 못할 자 가라지는 없는데서 만들어서라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구분하신다 했습니다. 

추수라는 것은 창세 이전에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추수되기 때문에 “저 추수되게 알곡 되게 해 달라.”고 손들어도 “니 손 내려라.” 이리 되는 겁니다. 손들고 설치지 마세요. 주께서 알곡 되게 하시는 사람 따로 있고 나머지는 전부다 가라지에요.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이 알곡입니까?” 궁금하겠지요. 어떤 사람이 알곡이겠어요? 방금 전까지 이야기했어요. 뭐를 빼는 사람? 자기 인생에서 자기 손을 늘 빼는 사람. 뺄 줄 아는 사람이 그게 알곡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것을 안 믿기 때문에 기어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성공해보겠다 하는 그 성공이라는 그 신화에 매달려 있는 사람, 성공이라는 그 귀신에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 그게 마귀 들린 사람이에요. 그게 안 되니까 자살하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협박을 한다. 협박해서 자살했다는 논리가 있으니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협박을 받는 거예요. “니 돈 밝혔지?” “예” 또는 “니 여자하고 놀아났잖아.” 했을 때, “에이 씨~ 들켰구나!” 해서 자살한다. 이게 신앙이에요? 우리가 믿음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집사님께서 무릎에 두 손 모으고 있잖아요. 누가 요렇게 했습니까? 주께서 요렇게 한 거예요. 이게 믿음이에요. 그런 협박을 하게 하신 분이 누굽니까? 살아계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환란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위험이나 협박이나 어떤 거라도 무엇에 끊어지지 않는다?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우리는 어떻게 돼요? 이왕 들킨 거 더 해보자. 이러면 남편이 다섯 명이 되는 거예요. 남편 다섯 명과 다 헤어지고 여섯 번째 사귀는 거예요.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나 당당해요. 우리가 왜 자살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았을 경우에는 자살이 성립되는데 죽은 자는 자살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죽었은즉 모든 인간이 죽음을 아는 사람한테는 자살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사는 것 자체가 죽음인데. 거기서 자살해봐야 자살도 주께서 살려주시는 삶의 일부에요. 지가 죽어도 안 죽는다니까요. 사람은 안 죽어요. 이게 환장하고 미칠 이야기입니다. 

이 괴로운 세상 차라리 밟아서 죽으면 좋겠는데, 이게 안 죽으니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안 죽으니 이게 미치겠어요. 김일성이 안 죽으니 문제인 거예요. 김일성이도 죽으면 나중에 주께서 무덤에서 호출해버립니다. 부처도 안 죽으니 문제에요. 부처가 죽어서 “나는 천상천하유아독존, 내가 부처다.” 죽으면 좋겠는데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야, 석가모니야” “누구십니까?” “니가 핍박하던 예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뭐고 지옥가거라.” 이리 되는 거예요. 지가 백날 깨달았다, 도 닦았다 해서 불교라는 사기 집단을 만들어놨지만, 정작 본인은 뭡니까? 주님의 호출을 받고 있는데. 

지금은 예수 안 믿고 뺀질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뺀질이들. “나중에 아플 때 갈게요.” “나중에 한가할 때 갈게요.” “지금은 좀 놀고 갈게요.” 뺀질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뺀질, 뺀질 노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주신 힘으로 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지 않는다, 했지요. 주께서 내어 버려두사 끝까지 가보자. 결국은 어떤 이 세상의 모든 것도 주께서 친히 만드시고 친히 망하게 하시는 주님의 손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셨다, 를 새삼스럽게 믿지 마세요. 믿는 것도 이상해. 뭘 믿어요? 확인할 뿐이지. 우리가 믿는다고 주께서 일하고 안 믿는다고 내가 일하고 그런 게 아니잖아요. 공기를 들이마시자, 이래서 우리가 삽니까? 살아있을 때는 오늘도 1분분의 공기를! 흠~ 마셨다. 공기야 고맙다! 다시 아이구 떨어진다. 공기를 또 마시자. 이러지만, 잠 잘 때는 어떻게 해요? 자면 그 때는 숨 막혀 죽습니까? 잘 때도 누가 주십니까? 공기, 호흡 주시는 거 누가하십니까?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주여, 믿습니다.” 하는 게 이상해. 믿습니다, 한다고 주님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나 우리는 주님을 믿게 돼있는 것으로 주께서 작용합니다. 기어이 우리가 십자가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 만들어 냈다는 증거 하나가 뭐냐, 십자가를 내가 인식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주께서 믿게 하셨기 때문에 선물로 믿음을 줬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새 십자가 피가 내 죄를 다 씻어내는 하나님의 새 언약인 것을 압니다. 

그 때 우리는 본래적인 것이 이 땅에 본래적인 인간으로 굳히게 만든 그런 순간입니다. 언약이 본래적이죠. 이 떡은 내 살이요, 이 잔은 내 피요, 그게 새 언약이잖아요. 내가 세상을 연구한 것과 성공을 위해서 부단히 움직이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본래적인 것. 그 오리지널이 나에게 딱 포착되는 순간 그 때부터 우리는 뭘 느낍니까? 짜릿하면서 ‘아, 내가 성도 맞구나!’ 라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본래적인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자태와 모양새를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새 언약의 증인으로서의 이 땅을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가 소급해서 우리가 확인될 수가 있지요.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 용서까지 주께서 다 하신 거예요. 이렇게 놓고 9절 봅시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요겁니다. 십계명이 뭐냐, 우리 안에 들어오지를 않고 바깥에 스톱되어 있지요. 요게 십계명, 율법이에요. 

그러면 율법에 있는 것은 우리 앞에 스톱됐다는 말은 우리보고 지켜보려면 한 번 지켜봐라, 그런 뜻이지요. 그거 지키는데 몇 년 걸렸습니까? 이스라엘 역사 다 소비됐지요. 결과는 뭐였습니까? 성공이었습니까? 실패였습니까? 실패였지요. 

이스라엘이 실패한다는 말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실패해요. 그것은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우리가 비 본래적이에요. 율법을 반길만한 그러한 존재가 못 됩니다. 우리는 마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키고 싶어도 또 다른 죄가 있어서 악이 있어서 탐내지 마라, 하는 순간 우리가 탐내고 싶은데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이성적으로 관리가 안돼요. 백화점에 원피스 걸린 거 보고 “저것은 내가 입을만한 게 아니야.” 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언젠가는 내가 돈을 모아서 3년 후 내 생일날은 저거 사 입고 말리라, 3년 뒤에 사봐야 유행 바뀌었는데. 더 좋은 게 나오는데. 

그러니까 요거 집어넣는데 안 들어가니까 주께서 요 율법을 사랑으로 바꾸어서 그 피와 살로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린 겁니다. 그러면 졸지에 우리는 뭘 아느냐, “저는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못 지켰으니까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죄인 맞습니다.”라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이미 주님께서 새 언약이 우리 안에 완성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175.♡.147.179)14-11-05 16:19 
안양20141017b-히8장10절(피의 배선) - 이 근호 목사 

오늘 아침 방송을 듣고 오는데 아주 인상 깊은 제목이 떴어요. 뭐냐 하면, ‘귀농 이렇게 하면 망한다.’ 보통 제목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귀농에 성공하시려면,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귀농을 이렇게 하시면 성공합니다, 라는 말  보다도 귀농 이렇게 하시면 필히 망합니다. 망한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서 오히려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겁니다. 

성경이 있다는 것은 곧 지옥이 있다는 거거든요.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중립적인 것에 있으면서 내가 천국을 고를까, 지옥을 고를까 하지만 사실은 지옥을 자진해서 고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좋은 게 좋다고 다 천국가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중립적인 것을 염두에 둘 때 가능한데, 이 세상자체가 망하는 곳입니다. 중립이 아니에요. 자기 망함을 모르면서 천국을 갈까, 지옥을 갈까, 그런 선택권을 발휘하겠다는 것은 그건 어불성설이에요. 처음부터 잘못된 거예요. 

창세기3장에서 인간은 이미 쫓겨날 때부터 이미 저주의 대상이 된 겁니다. 에덴동산에 생명나무 없는 곳에 산다는 자체가 인간은 망한 거예요. 그럼 무엇부터 출발해야 돼요? “왜 망했지?” “어떻게 망했지?” “앞으로 영원히 망하는 것은 뭐지?” 요렇게 생각을 해줘야 돼요. 제가 이런 이야기한다고 이 근호목사는 부정적인 관점을 가졌다. 그런 소리를 엄청 많이 들었어요. 부정적인 관점을. 

그런데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십자가 지고 왔습니다. 그것보다 더 부정적인 것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유대인들은 구름타고 오는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다니엘을 알고 있으니까. 다니엘9장에 보면 구름타고 오잖아요. “너 왜 구름타고 안 왔어?” 이렇게 예수님한테 추궁을 했어요. 주님께서는 “장차 온다.” 이리 했거든요. “그 사람을 죽여라. 가짜다.” 이리 됐어요. 메시아가 구름타고 오게 되는데 예수님은 구름타고 온 게 아니고 이 땅에 비리비리하게 오셨잖아요. 천하게 오셨잖아요. 약하게 오셨지요. 뺨까지 얻어맞았지요. 무슨 그런 하나님이 다 있습니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피조물 손에 뺨을 얻어맞다니? 이게 인간의 상상력으로 나올 있을 문제입니까. 상상 못하지요. 주님께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를 못하게 만드신 겁니다. 

주님 자체가 낮아졌다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자기 아이디어와 자기 지혜와 자기 능력으로 구원 받았다,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제시한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가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 진 거예요. 인간의 지혜로서는 십자가를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인간보다 강하다는 말씀이 나왔지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은 어리석게 된 거예요.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들이 똑똑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은 결국 뭡니까? 자칭 똑똑하다와 그걸 어리석다 하는 대결상태에서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잖아요. 따라서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뭘 의미하는가 하면, “나는 이 십자가 능력을 아는데 있어서 기껏 어리석음밖에 동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게 했다는 것은 나의 지혜가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이고 긍휼입니다.” 그걸 자인하면서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돼요. 그걸 자인하면서. 

따라서 십자가 믿는 순간부터 더 이상 십자가에다가 뭘 보탠다. 이게 성립이 됩니까? 성립이 안 됩니까? 성립이 될 수가 없지요. 십자가는 털끝만큼도 손을 대서는 안돼요. 그냥 그 가치가 고스란히 남기 위해서는 우리의 어떤 행위, 성경읽기, 전도하기 어떤 것도 내 구원에 섞여 넣어서는 그건 반칙이 되는 겁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강의도 “귀농, 이렇게 하면 망한다.” 하는 것처럼 “성경해석 이렇게 하면 망합니다.” 제가 이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게 제 이야기가 아니고 여기에 10절에 나오는 이야기죠.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성경을 지킬 때에 자기가 율법을 지켜버리면 자기가 자기 마음에다가 자기의 성경 지킨 업적을 기록한 셈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나 말고 외부에서 나를 글자판으로 여겨서 글자를 새긴다면 원래 돌판은 그대로 있는데 주께서 돌판을 새겼잖아요. 이것은 내 글씨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장 못 하지요. 지는 돌판인데 활용당한 거죠. 돌판이 우리 앞에 있다고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돌판으로 변해 버리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맨들 한 돌판인데 주께서 친히 여기에 뭘 쓰신다? 글씨를 써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움직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돼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체가 말씀이 적힌 공책이 되지요. 노트. 

그러면 왜 주께서 친히 우리를 썼다고 되어있습니까? 옛 언약에 의하면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키는 거죠. 못 지키면 우리는 저주 받는 자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한 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쓰신 돌판의 성질은 죄인이고, 저주받을 자의 심령에다가 주께서 친히 글씨를 남긴 거예요. 그 글씨를 남길 때, 글씨가 뭐로 되어있는가 하면, 피로 쓴 글씨가 되지요. 피로 쓴 글씨. 

왜 피냐, 피가 모든 걸 다 이루었으니까. 그러면 우리 몸에는 주의 피가 마치 보일러 밑의 배선 깔아 놓듯이 골고루 깔아놔야 골고루 따뜻하듯이 주님의 피가 골고루 빙빙 돌면서 순회하는 겁니다. 온돌이 순회하듯이. 피가 돌고 있는 거예요. 피가 돌고 있다는 것은 사실 주일 낮에 설교할 건데 미리 당겨서 해도 되지요? 반칙 아니죠? 

보일러를 깔아놓으니까 그 보일러에서 피의 은혜가 나타나려면 우리는 보일러 배선을 이루는 그 기반은 항상 말씀에 의해서 죄인으로 드러나야 되지요. 죄가 더한 곳에 그 다음에 은혜가 넘치듯이. 그러면 사도바울의 권면 같은 것은 뭡니까? 예를 들어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그 말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그 말씀이 옴으로서 우리 속에는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깨닫는 순간, 주의 피로 묻힌 그 말씀이 우리에게 배선으로 깔려서 우리는 누구만 자랑합니까? 예수님의 돌아가심만, 십자가만 공로만 자랑하는 그런 셈이 되는 겁니다. 

그걸 언젠가 가야산 수련회할 때 했는데 기억납니까? 요번에 미국에서 강의하니까 뉴저지 교인들이 수요일 강의하면서 굉장히 인상 깊은 단어를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예상도 못했는데. 그게 뭐냐, 망사스타킹을 굉장히 좋아해요. 망사스타킹 예를 들었는데 사람들이 “오늘 강의 중에서 기억이 나는 게 뭐지요?” 하니까 “망사스타킹이요.” 하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왜 그걸 기억하지? 상당히 애로틱하나 전부 다. 이게 헐거워져서 찢어진다는 겁니다. 주의 말씀이 들어오면 이 간단한 주체가 찢어지는 거예요. 

제가 옛날에 수련회할 때는 누비이불을 했어요. 이번 미국 강의에서는 망사스타킹을 했지만. 제가 어릴 때 기억이 누비이불이 얼마나 따신지. 누비이불이 뭐냐 하면, 보통이불 가운데에서 홀치는 겁니다. 바늘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촘촘히 실로 꿰어서 솜이 딱 결합되어가지고 찬바람을 효과 있게 막아주는 이불이 누비이불이에요. 얇아도 누비이불하면 따시잖아요. 갑자기 옛날 생각나네. 누비이불이 바늘이 들어가면 홀치기 해가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거예요. 

제가 이 대목을 왜 설명했느냐 하면, 우리의 인생은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누비이불로 홀치기 하듯이 바늘에다가 피를 묻혀서 바늘로 찔러서 온 천지에 피가 지나가는 흔적을 남기는 식으로 우리 인생을 살게 만든다 했습니다. 그게 뭐냐, 새 언약의 증거물이에요. 새 언약의 효과를 받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히브리서8장8절에서 12절까지가. 훅 지나갔지요. 누비이불만 아시고 그냥 다 지나간 겁니다. 

12절 봅시다. 12절 다 같이 읽어볼까요.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가 잘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해하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왜 힘드냐 하면,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는다, 는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우리가 전제로 우리의 불의와 우리의 죄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우리의 불의와 죄에 대해서 우리가 모릅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평생 살아도 죄를 다 짓지를 못해요. 안타까운 일이죠. 죄라는 죄는 다 지을 수가 없어요. 워낙 우리가 바빠서. 죄를 다 지을 수가 없어요. 죄를 다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약간이나마 착한 일을 한 적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어요. ‘전적으로 나쁜 건 아닙니다.’ 라는 생각. ‘그래서 착한 구석은 어느 구석에라도 있습니다.’ 라는 생각. 그게 마지막 나의 가치는 꼬깃꼬깃 숨겨서 정말 안 들키는 제일 내부에 가장 깊숙한 정신적인 내부에 가장 깊숙한 곳에다가 보물처럼 단지에 딱 숨겨가지고 나의 가치를 거기다가 모셔둡니다. 내가 만든 지성소지요. 

내가 만든 지성소로 우리는 가끔은 혼자서 지성소를 방문하곤 합니다. 특히 가을되면 남자들은 낙엽 밟으면서 코트를 세워가면서 두두두두~ 두두두두~~ 음악 들어가면서 후~후~후~ 들어가면서 혼자서 낭만을 즐기면서 때론 부둣가에 가가지고 도라지 도라지위스키 시켜놓고 화장 짙은 마담 이야기 들어가면서 색스폰 소리 들어가면서 하는, 마지막 남은 것이 뭐냐 하면, 그래도 나는 참 잘 살아왔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렀던 유명한 노래있지요. 마이웨이, 마지막 커튼이 닫히는 날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니까 친구들과 더불어서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게 나의 가치에요. 그건 꼬불쳐놔요. 마지막은 그걸 안 다치게 있다 말이죠. 

그러나 십자가의 영은 그걸 관통해 버려요. 관통해서 망사스타킹처럼 찢어버립니다. 그걸. 그래서 제가 육과 혼과 영이라는 글의 결론부위 마지막에 이렇게 했지요. 십자가가 온다는 것은 기관차 앞에서 우리가 까불다가 기관차하고 충돌했을 때, 내가 갈기, 갈기 다 찢어지면 찢어진 것을 다시 주워서 조립할 수 있는 주체가 없어요. 코는 코대로 팔은 팔대로 다 떨어졌으니까 그거 누가 와서 줍습니까? 내가 줍는 게 아니거든요. “나 돌아갈래!” 하다가 기차에 바쳐가지고 박하사탕 마지막 장면에 나오잖아요. 태백 산골 기차에서 운동권 조사하는 형사가 주인공인데 마지막 후회스러운 자기 인생을 걸면서 “나, 돌아갈래!” 하면서 자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처럼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자아를 주재할 수 없어요. 들이 박아버리니까 산산조각 나버린다고요.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는 한 분이 죽음으로 모든 인간이 죽은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전부 다 박살나버린 겁니다. 바퀴벌레를 보면 바퀴벌레 인기를 봐서 차분, 차분히 잘라냅니까? 아니면 콱 밟아버립니까? 발로 팍 밟아 터져버리죠. 

죄를 몰라요. 따라서 분명히 전합니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순간부터 흩어진 죄를 모으게 하십니다. 어떻게? 남이 지은 죄가 내가 미처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 죄도 누구 죄다? 나의 죄에 포함되어 있고 내 잠재성 속에 포함된 죄가 되는 겁니다. 유형철이라고 있지요. 그야말로 최고의 나쁜 놈이잖아요. 성폭행하고 살인한 인간. 우리는 전 국민이 분노합니다. 그런데 그 죄가 그 사건이 벌어지게 하신 이유가 뭐냐, “바로 그게 나쁘지? 못됐지? 그게 바로 니가 손가락질 하지만, 죄 없는 자가 돌을 치라.” 말이죠. 그나 니나 다 같이 아담의 죄 속에 있는 거예요. 

죄의 다양한 면을 나는 이런 식으로 나는 저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우리는 평소에 포도 먹고 이리 있으면요, 어떤 사람이 와가지고 우리보고 “지독한 죄인! 나쁜 사람들!” 이렇게 욕하고 갑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45일 동안 금식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저 인간들은 우리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 짓고 있고 그들을 위해서 금식, 단식을 해도 시원찮을 너희들이 감히 성경공부를 하면서 포도를 먹다니! 그게 성경 공부하는 자세야!” 하고 이런 미친 인간들이 있어요. 

자기가 도를 닦으니까 자기만큼 도를 안 닦으면 전부 다 자기보다 죄인으로 간주되게 돼 있어요. 교회에서 성화론이 그게 문제 아닙니까? 자기처럼 기도 오래 안하면 기도한 게 아니고 자기처럼 헌금 많이 하지 않으면 헌금하지 안한 거고 자기처럼 교회오지 않으면 그건 하나님에 태만한 인간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가 교회에서 큰 소리 치는 이유가 지는 할 짓이 없으니까 맨 날 새벽기도하고 맨 날 기도하는 척하고 십일조 꼬박 꼬박 내고 십일조 안하면 쫓겨나니까 하고 지가 예배를 인도하니까 예배참석 꼭 하는 셈이 되니까. 그 교회에서 누가 믿음 제일 좋은 사람이 돼요? 자동적으로 직업상 누가 믿음이 제일 좋아요? 본인이 제일 믿음이 좋은 사람이에요. 심방 때 심방 다하고. 그래놓고 하는 말이 믿음 없다고 닦달내고. 니가 페인트가게 점원 해봐라. 성경 볼 시간 있는가. 컴퓨터 틀어도 게임할 거예요. 목사가 할 짓이 없으니까 그 짓하는데 만약에 목사가 돼지 키워보세요. 소 키워보세요. 어디 예배드립니까? 돼지 새끼 낳는다는데. 예배를 드려요? 지금 새끼 낳고 있는데. 한 마리가 얼마인데. 어미죽고 새끼 죽으면 돈이 얼마인데. 

세상 전부에 대해서 설명할 때, 주님께서 아주 간단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라이벌을 제시함으로서 세상은 이런 세상이라고 단적으로 이야기했어요. 단적으로. 그게 뭐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한 쪽을 사랑하게 되면 한쪽을 반드시 필히 미워하게 돼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뭐가 지배한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 만약에 유형철 인간이 재벌 집 같으면 그리 했겠습니까? 안했지요. 가난한 집안이기 때문에 할 짓이 없어서 나쁜 짓만 배웠고 결국원인을 추적해보면 결국은 원래 집안이 돈이 재벌 집안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 이유가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아담이 범죄 할  때, 먹을 게 없어서 선악과 따먹었습니까? “휴, 휴, 먹을 게 없구나! 먹을 게 저것 밖에 없네.” 그래서 선악과 따먹었습니까? 호강이 늘어 터졌어. 다 먹어라 했는데. 다 먹어라 하는 것은 귀에 안 들어오고 요것만 먹지 말라, 하니까 꼭 이것만 따먹어요. 인간은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어느 소설책 제목이름 아닙니까. 인간은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금지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첫 번째 대상이 돼요. 소망의 대상이 된다고요. 하지마라하면 더 하고 싶은 거예요.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잠언서에 나오잖아요. 그냥 먹으라 하면 안 먹어요. 먹지 마라, 하면 애가 뒤집어지고 먹다가 자빠지고 다 합니다. 애들. 공부하지 마라하면 더하고 하라하면 안하고. 아예 청개구리 심보에요. 인간은. 

인간의 모든 죄는 하나님에 의하면 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돈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것이 광야에서는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시험 받은 게 뭐냐,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사람은 떡 없이는 못 산다. 참, 이거 정답이죠. 떡을 먹어야 밥을 먹어야 교회당 갈 힘이 나지요. 밥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예배당을 가요? 그 시간에 돈 벌어야지.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했는데 물 없는 곳으로 인도했고 의도적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어쩌라고? 당연히 원망하지요. 

원망하니까 주께서 그게 바로 애굽이었다. 너희들은 애굽을 탈출한 적이 없다. 니들 자체가 애굽이에요. 어딜 탈출해? 지리적으로, 공간적으로 탈출해서? 너희들이 애굽인데, 너 자신이 애굽이라는 것에서부터 탈출해야 돼요. 탈출 불과합니다. 안됩니다. 안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 자체를 애굽으로 굳히는 방법밖에 없지요. 애굽으로 굳히게 하고 그 애굽을 구원하기 위해서 외부인사가 애굽으로 굳혀진 그 사람과 마주쳐야 되지요. 그 외부인이 주 하나님 이름이고 그 대상이 되는 자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17장 8절 한 번 봅시다.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광야시절에 이스라엘이 난데없이 전쟁이 일어난 상황이 됐습니다. 누가 쳐들어왔느냐 하면 아말렉이 쳐들어왔지요. 자, 제가 설명하는 게 난해해 싶으니까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동그라미 안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놓여있습니다. 여기에 누가 쳐들어왔어요? 아말렉이 쳐들어왔지요. 출애굽기17장8절 보면 누구나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망합니다. 이렇게 귀농하면 망한다, 하는 것처럼 이렇게 해석하면 망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있는데 아말렉이 쳐들어왔다. 이건 문자 그대로 틀린 게 아니고 맞지요. 하지만, 이렇게 보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성경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말렉이 쳐들어왔을 때, 그 때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은 요 공간 안에 영역이 두 충이 있는 거예요. 두 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 층을 만들었어요. 아말렉은 돈키호테에요. 풍차가 어떤 기사인 줄 알고 풍차가 어떤 적인 줄 알고 공격한 것처럼 남들이 보면 얼마나 웃겠어요? “돈키호테님, 기사님, 저 거 풍차입니다. 네덜란드 풍차입니다. 왜 저걸 공격합니까?” “아니야, 내 눈에는 나를 공격하는 적이야.” 완전히 미친 사람이잖아요. 풍차 돌아가는 것을 보고 칼질한다고 보는 것처럼. 

아말렉들은 이스라엘을 보고 공격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헛개비에요. 이스라엘이 헛개비인 걸 가지고 진짜 이스라엘은 하나님 이름 안에 있는데, 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인줄 아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실을 이스라엘이 아말렉 관점이냐, 아니면 하나님 관점이냐를 묻는 겁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 제 말이 어렵지요.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광야에서 만나게 해줬잖아요. 지금 물, 떡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쟁이 일어난 거예요. 이스라엘은 자기 몸도 못 추스르는 입장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전쟁을 하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물과 떡 그리고 반석 치는 물이 나오는 이 모든 것이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가 하면, 어떤 전쟁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 전쟁이 뭐냐, 그동안 이스라엘은 헛개비하고 싸워왔다는 거예요. 그 헛개비하고 사는 모양새를 아말렉을 동원시켜서 전쟁을 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전쟁에서 여기 여호수아가 나서잖아요. 하지만 여호수아의 칼질은 위층에 누가 있습니까? 모세가 지팡이 들고 있지요. 그럼 아말렉은 바보들이에요. 전쟁의 승리는 어디서 결정됩니까? 돈키호테가 풍차보고 공격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거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문제는 아말렉이 헛짓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문제는 이스라엘 당사자들이 아말렉이 헛짓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과연 수용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아말렉이 헛짓하는 게 맞는데 막상 공격당하는 우리는 ‘너희들이 백날 해봐야 너희들은 내 헛개비, 내 그림자 찢는 거야.’ 라는 마음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우리의 운명은 성공, 실패가 아니고 축복과 저주 이미 축복받은 사람 같으면 이건 우리 가운데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가운데 누가 있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 주님의 것이에요. 

주님의 것이면 주님께서 보호해 주는 거예요. 주님의 소관인 겁니다. 아말렉이 아니라 북한이 러시아가 쳐들어와도 성도를 이길 수가 없어요. 왜냐, 그들은 저주받은 자고 저주는 축복을 못 이깁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말이 이상하지요. 죽었는데 그게 승리라 하는 겁니다. 그들은 헛된 목숨가지고 칼로 찌른 거예요. 진짜 목숨은 영생인데 영생은 못 찌르고 우리가 남아있는 기껏 있는 숨 쉬는 요 목숨 찔렀다고 나는 성도를 죽였다. 기독교인을 죽였다고 자랑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주께서 비웃습니다. 우리도 같이 비웃을 줄을 알아야 돼요. 우리도. 

내가 비웃을 줄을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이 세상은 아말렉 같이 되지도 않는 것 가지고 기죽이고 협박하고 공갈치는 그 세계에 우리가 지금 놓여있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협박 공갈에 얼마나 졸았습니까? 얼마나 그동안 기죽었습니까? 목사가 “십일조 안하면 저주받습니다.”할 때, 그 저주에 얼마나 졸았습니까? 자, 그러면 십일조 안 해서 받는 저주가 어떤 거예요? 지옥 가는 겁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되는 겁니까?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되는 거죠. 

그 중에서 많은 협박과 공갈 중에서 가난하게 되고 병들지요. 가난하고 병  든다는 것은 결국은 뭡니까? 일찍 이 세상을 제대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이건 성공이네. 십일조 안 해서 성공되네. 일찍 구원받네요. 사도바울처럼 죽는 게 소원이라는데. 일찍 구원받게 되네요. 그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아이고, 감사합니다. 목사님.” 이리 악수해야 돼요. “니가 노는 층하고 내가 속해있는 층이 이중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목사 니는 모른다. 협박하면 돈 나올 줄 알지.” 그 협박 공갈에 졸지 마세요. 기죽지 마세요. 

거지 나사로 생각해서 졸지 마세요. 거지 나사로 죽을 때까지 거지였습니다. 거지였답니다! 거지 나사로 죽을 때까지 병자였답니다! 의료보험도 안 되는데. 병원 한 번 가 본적 없습니다. 개들이 핥고 있고. 개들이 와서. 그 개가 아마 부자가 키우는 개인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출애굽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니가 과연 다른 층에 더 높은 층에 있다는 사실을 니가 인정하느냐?” 를 묻습니다. 그 층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장악하고 지배하고, 이 세상에서는 뭘 해도 졸고 기죽고 위협 느끼고 협박당하는 그런 식으로 하루, 하루, 턱! 턱! 숨 막힌 채 살아가는 그러한 군상들의 집합체가 이 세상입니다. 

여러분들이 한평생 돌아보세요. 어느 쪽이었습니까? 바로 우리는 이스라엘 욕할 것 없이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던 거죠. 그래서 성경은 마귀한테 졸았던 그 죄, 그리고 돈 있고 힘 있는 자에게 기죽었던 그 불의함에 대해서 주께서 뭐하신다? 불의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 다음에 죄를 다시 어떻게 합니까? 기억하지 아니한다. 주님은 기억하지 않지만 우리는 기억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기가 힘든 겁니다. 

주님은 용서했다는데 내가 나를 용서가 안 돼. 내가 용서가 안 돼. 그래서 여자 분들은 성질나면 머리하지 않습니까. 에이씨~ 머리나 하자. 기분 쇄신. 쇼핑을 하면서. 리모콘 들고 케이블TV 찾아다니면서 물건 사가지고 스트레스 풀잖아요. 너무 기죽어서 화가 나가지고. 왜 졸았느냐, 왜 협박받았느냐 말이죠. 협박 받을 것도 아닌데 자신의 헛개비 공격했다고 그림자 공격했다고 기분 나빠서 그럼 그림자는 아니지, 실체지요. 

주께서 우리의 본체를 용서했습니다. 본체를 긍휼히 여겼지 우리의 그림자를 용서한 게 아니에요. 따라서 우리는 그들 말대로 가난하게 된다 해도 우리하고 상관없는 일이고 그들 말대로 우리가 병든다 할지라도 사실은 우리하고 관계없습니다. 고린도전서3장에 보면 “너희는 이미 이 땅에서 죽었고” 너희의 생명은 안전한 곳에 따로 보관돼 있어요. 하늘나라의 격납고, 하늘나라의 그 은행에 삼중 사중의 그 은혜의 비밀번호 786차4756번 그거 천사도 못 풀어. 온갖 동원해도 못 푸는 주께서 푸시는 그 번호 열어야 그 안에 들어있는 고이, 고이 마귀로부터도 안전한 곳에 생명이 그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보관돼 있어요. 

스가랴4장에 보면 나오지요. 우리 주님께서 사탄이 보는 앞에서 여호수아를 부릅니다. 여호수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옷이 시커멓게 와가지고 부끄러워가지고 “주여, 죽여주옵소서.”하고 앉아있더라 말이죠. 사탄이 보는 앞에서. 옷 벗기고 새 옷 입혀주고. 그게 바로 구원이에요. 사탄이 보는 가운데서. 사탄은 옷 입을 생각은 안하고 놀리기만 하지요. 얼레리 꼴레리. 교도소 몇 번 갔다 왔니? 뭐가 어떠니, 어떤 남자와 바람났느니, 사실은 부럽지요. 백날해도 우리는 뭡니까? 판정은 주님이 하시지 사탄이 하는 게 아니에요. 세상이 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심판주가 되지를 못해요. 삼성그룹은 우리의 심판주가 아닙니다. 그것에 쫄고 기죽을 필요 없어요. 우리나라 대통령이 심판관 아닙니다. 재판관은 오직 한 분밖에 없어요. 주의 이름밖에 없어요. 그 분이 의롭다고 한다면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그 정죄함에 쫄지 말고 거다가 정신 빼앗기지 마세요. 숨 크게 들이 쉬시고요, 12절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끝! 

당황하지 마시고 히브리서8장12절 읽으시면서 끝! 자, 그 다음의 문제가 뭐냐 하면, 그렇다면 무엇에 근거해서 일방적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는가, 무엇에 근거해서? 그냥 말로 용서한 것이냐, 무슨 근거 있어서 용서한 것이냐, 요거 설명 들어갑니다. 이제부터 요거 설명 들어가는데 요거 약간 난해합니다. 

왜 난해한가 하면, 어제 우리 집사님이 질문한 거 있지요. 우리 오 용익 목사님이 제가 없는 사이에 주일날 설교를 했었어요. 할 때, 오 용익 목사님이 이런 취지로 이야기 했거든요. “지옥 갈 사람인지 천국 갈 사람인지 결정하는 필살기가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필살기가 있습니다, 하고 오 용익 목사님의 설교를 그 때 생중계로 들었거든요. 약간 뜸을 들였어요. 대부분 사람들은 그 뜸 들이는 동안에 뭘 생각했습니까? 뭐야? 피! 아니면, 언약! 아니면, 십자가! 다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오 용익 목사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이 근호 목사님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거는 정말 엉뚱한 거예요. 잘못 생각하면 이 근호 목사가 마치 심판자같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할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집사님이 오지랖 넓게 직접 오 용익 목사님에게 오지랖 넓게 질문했던 모양이지요. “목사님, 내가 알고 있는 피가 기준이 되어야 되는데 왜 이 근호 목사가 죄인인 이 근호 목사의 설교가 왜 들어갑니까?” 라고 질문을 했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실제로 경험해보니까 피 이야기하니까 전부 다 안다는 거예요. “아이구, 그거 다 아는 이야기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근호 목사님 설교 들어보라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관계가 끊어졌다는 거예요. 

도대체 뭐가 문제지요? 무엇에서 문제가 되는 겁니까? 내가 피를 안다, 할 때에 ‘나는 멀쩡하고 피라는 그 정보를 하나 추가하게 되면 구원받는다.’ 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의 근거가 피에 있는 게 아니고 그 피가 구원의 근거라 할지라도 내가 그걸 수용하는 여분에 따라서 내 구원이 결정되니까 나의 의지가 나의 자유의지가 나의 구원에 최종근거가 자리 잡습니다. 이게 바로 성령 안 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성령 안 받은 특징이 그겁니다. 

그럼 성경은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까? 피 흘렸으니까 이제는 믿고 안 믿고는 니가 선택하라, 이리 나옵니까? 그게 성경이에요? 그렇다면 새 언약이 뭐예요? 새 언약이 우리의 허락도 없이 그냥 파고 들어오잖아요. 이것과 충돌을 일으키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나의 의지로 구원받습니다, 하는 자체는 이것은 거짓말이고 그래서 구원 받은 경우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진도 나가기 전에 이 이야기 먼저 해야 돼요. 창세기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했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걸 믿는 사람이 이 사람도 믿고 유대교도 믿고 심지어 흰두교도 믿고 심지어 종교도 없는 우리 조선시대 사람들이 조물주라 해서 그 사람도 믿는데 천지는 신이 만들었다고 다 믿는데 그들이 다 구원받습니까? 어떻습니까? 구원 못 받지요. 

그렇다면 구원의 근거는 뭐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쓸데없는 이야기를 왜 썼을까요? 제가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에 거기에 그 안에 뭐가 품어있어요. 만두를 보게 되면 밀가루만 보이게 되지요. 앙꼬는 안 보이지요. 그 말씀 안에 무얼 앙꼬처럼 품고 있어요. 그게 뭐냐, 신약성경에 나와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 그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버리면 구원이 안돼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구원의 근거는 뭐다? 예수 그리스도가 포함된 피조물인 것을 수용을 해야 되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피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들어온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 예수님 자신이 흘린 피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김으로서 우리가 믿는 자가 되는 겁니다. 

오 목사님께서 필살기라고 한 것은 이 목사의 설교에서 피를 이야기하면서 동반해서 뭐냐,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이야기하죠. 따라서 우리가 죄인이 되어버리면 어떤 능력이 없습니까? 그 피가 아무리 코앞에 있더라도 그걸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야기 하는 것은 피를 우리 속에 집어넣기 위한 사전 장치가 주께서 우리에게 피 이야기와 동반해서 “니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는 것을 동반해서 이야기하는 거죠. 

복음을 전할 때는 “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라는 말만 해서는 안 되고 “우리는 피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죄인입니다.”를 같이 동반시켜서 결부시켜서 증거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오 목사님이 “이 근호 목사님의 설교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하면, 제 설교를 들어보라고 하는 순간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 자기 잘난 맛에 살면서 더 잘나서 더 천국가기 위해서 내 잘난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천국 가는 방법이 예수의 피를 믿는 거라 해서 피를 자기 것으로 추가시킨 거예요. 피 믿는 당기는 능력이 자기 여지의 능력으로 간 겁니다. 

그러니까 그 피는 가짜지요. 그것은 마귀가 그런 짓을 한 거죠. 피 이야기할 때는 “나는 피 앞에서 나는 갈기, 갈기 찢어져야 될 죄인 맞습니다. 저주 받아도 마땅합니다.” 이것이 같이 되어야 돼요. 그걸 같이 한다면 나의 어떤 행함도 헌금이나 전도나 어떤 행함도 피를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줘야 돼요. 분명하게.  “15년 새벽 기도했다. 30년 동안 늘 금식하면서 살아왔다.” 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절대로 섞이면 안돼요. 나는 교회에서 꽃꽂이로 봉사한다. 피아노로 봉사한다. 그것이 자기 구원의 능력에 섞이면 안 됩니다. 섞일 수가 없어요. 

바로 그 작업을 위하여 주께서는 9장이 준비되어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다 깎아서 없애버리고 죄로 정죄하는 기능 그게 무슨 기능이냐, 율법기능입니다. 율법 기능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제거하고 하나는 그 제거된 가운데서 세우는 거예요. 

제가 어제 잠자는 숙소에서 가락강의에 오신 저를 초청했던 이 효숙 집사님께서 저한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어요. QT하면서 깨달은 기분인데, 한 번 찾아봅시다. 오늘 강의에도 이렇게 등장케 되어서 기쁜데요. 열왕기상14장 11절,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자, 여기까지 봅시다. 여기서 여로보암을 저주하지요. 여로보암 누군 줄 아십니까. 북쪽의 최초의 왕. 남북 갈리고 난 뒤에 북쪽의, 북한의 초대 김일성이에요. 거기에는 김일성의 왕국이 됐잖아요. 여러보암에 속한 자는 다 저주받아서 어떻게 된다? 다 죽지요. 모든 사내는 다 죽잖아요. 자, 이효숙 집사님께서 질문이 아니고 자기가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저한테 질문한 거예요. 

Q.T를 하면서 여기서 놀라움을 느꼈다는 거예요. 생전에 성경을 봤지만, 이런 놀라움은 처음이었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모든 여로보암에 속한 사내는 다 죽지요. 왜 죽습니까? 그 가문이 저주 받았으니 죽을 수밖에 없지요. 놀라움은 그 뒤에 있습니다. 말갛게 쓸어버린다. 말갛게 했지요. 했는데 어떻게 됩니까? 12절에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찌라” 여러보암 집이 죽는데 온 이스라엘이 저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리니와 여로보암에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간다. 여기서 집사님이 놀란 것이 싹쓸이하면 싹쓸이해야 되는데 왜 그 아이만 마치 구원받은 아이처럼 정실 묘실에 다른 애들은 개가 먹는데, 바깥에서. 왜 그 아이만 정식으로 보호한 것처럼 마치 구원받은 것처럼 그 아이만 보호하느냐, 왜 저주 같으면 싹쓸이 저주할 것이지 왜 싹쓸이 저주하지 않고 하나만 남겨두고 그 아이만큼은 죽기는 죽지만, 그 죽음은 의미 있는 죽음으로 만드느냐 그 이유가 뭡니까? 라고 저한테 질문한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설명했어요.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달리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세운 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세운 나라는 언약의 정보가 남아 있어야 돼요? 안 남아 있어야 돼요? 당연히 남아있어야 되지요. 비록 멸망했더라도 구원이라는 정보는 남아있어야 되지요. 그렇다면 그 아이는 무엇을 보여주는 정보가 있어야 됩니까? 우리는 이 따위로 살다가 이렇게 망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캡슐, 타임캡슐 알지요? 영원히 그 정보를 대대로 이어줘야 될 캡슐로서 “이스라엘은 이래서 망했습니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애는 특별한 조치가 취해줘야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성도는 반드시 멸망가운데서 구원되어야 돼요. 그래야 우리는 “나 같은 이런 죄인도 십자가의 일방적인 용서로서 구원되었습니다.”를 온 천하에 퍼트릴 때 그것이 하나님이 생각했던 구원입니다. 집사님은 그것을 성경 가운데 발견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지요. 

‘아하, 이렇게 되어버리면 내가 전도한 효과, 성공한 효과, 내가 목회한 효과를 눈으로 목격하려는 자체가 얼마나 이게 엉터리 같은 것이냐.’ 차라리 목격하려면 그런 것에서 목격하지 말고 교인수가 불었다, 부흥되었다, 이걸 증거로 하지 마시고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나는 죄인인데 오직 십자가만으로 용서받는다.” 한 사람만 있다면 충분합니다. 그 한사람만이라도 세상은 왜 멸망되어야 될 이유가 충분히 노출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게 속한 소자에게 주목하는, 크게 된 것, 이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사람 찾지 말고 십자가만 생각하며 십자가 은혜만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 만난다면 그에게 해주는 것이 곧 나한테 해준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음 시간부터 히브리서9장을 하는데요, 이 9장에서 미리 당겨서 이야기하면 히브리서9장의 결국은 여기에 나온 모든 제사법과 이런 게 죽 있잖아요. 이것은 하나의 기능은 뭐다? 인간은 죄인이다. 또 하나의 기능은 죄 속에서 방금 뭐가 나옵니까? 죄 속에서 구원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죄인 속에 들어 오셔가지고 같이 죄인 되시면서 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으로 죽어야 마땅한데 내가 구원했기에 나에게는 이제 뭐가 있다? 나에게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사람만 따로 구원받아서 천국 간다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또는 우주가 보기에 너무나 정당한 일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저주받아 지옥가야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 십자가 씨앗을 남겨주셨기에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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