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1017a-히8장10절(피의 배선)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8장8절에서 12절까지 나온 내용이 이게 구약의 예레미야31장 31절에서 34절에 있는 내용인데, 이게 구약에서 예레미야에서 언약에 대해서 그것도 새 언약에 대해서 언급한 대목이 제일 중요하게 언급을 했습니다. 얼마나 중요했으면 히브리서8장에도 나와 있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언약이야기에요. 8절에 보면,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제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조인트하는 유일한 그 연결고리는 언약이다. 이제 확정됐지요. 구약과 신약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구약을 신봉했던 이슬람이나 유대교는 왜 예수를 안 믿지요? 예레미야31장에 나와 있는데요. 그들이 구약을 믿거든요. 이슬람이나 유대인들도. 그러면 구약의 예레미야31장에 이 새 언약을 세우리라, 는 말이 분명히 그들이 알고 있을 거잖아요. 알고 있는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왜 안 믿지요? 좀 이상하지요. 그들은 아직 새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본 겁니다. 새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데 왜 그러는가 하면, 정치적으로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 중심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까지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요. 기독교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용서가 들어오면 언약이 이루어진 걸로 보잖아요. 이스라엘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거든요.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에 옛날 다윗 때에 잘나갔다 이 말이죠. 다윗 때 그들은 그야말로 그 근동지방을 지배했잖아요. 새 언약이 오게 되면 그 지배했던 다윗과 솔로몬의 화려한 영광 특히 솔로몬 같은 경우는 온 궁궐이 다 금덩어리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토가 넓었지만 얼마나 호사스럽게 살았습니까? 온 천지가 온 나라가 하나님의 축복에 완전 우박을 받은 것처럼 축복으로 뒤집어쓴 거죠. 그 때가 다시 와야 언약이 완성된다고 본 겁니다. 왜냐 하면 그 때 그렇게 좋았던 솔로몬의 부귀영화가 그 뒤에 사람들이 교만했다든지 말씀을 어겼다든지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게 도로 날아가 버렸잖아요.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그리워하겠습니까? 그 때 그 시절. 그 영화로울 때가 좋았는데. 천하 모든 것이 솔로몬에게 굴복했던 그 때가 좋았는데.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어느 누구도 갈굴 수 없는, 누가 하나님을 대적하겠습니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만약에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에 버티고 있다면 어느 누가 감히 그 가정을 무너뜨리겠습니까. 천지를 만드신 분인데. 그렇잖아요? 마귀 같은 것은 쉽게 굴복하지요.
그렇게 좋은 시절이 있었으니까 유대인들은 어서 로마에서 벗어나서 동네국가가 되면서 이제는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 중심국가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복을 받고 이스라엘을 대들면 저주받는 하나님의 문자적인 부귀영화가 확보되고 영원한 하나님이 다윗 자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볼 수 있는 그와 같은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하기 바쁘고 세계 최고의 나라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레미야의 약속은 아직도 안 이루어졌다고 보는 겁니다.
자, 우리가 만약에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어느 쪽을 믿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 그게 새 언약이라고 믿겠습니까? 아니면 글자 그대로 우리 이스라엘이 잘되는 때를 믿겠습니까? 우리가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잘되는 걸 믿겠지요. 그러니까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적인 일이겠어요. 사람이 마땅히 자기 잘되는 것, 자기가 번영되는 것, 그걸 마다할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덕을 본다는 건데, 하나님의 덕을 실컷 본다는 것을 무슨 수로 마다하고 우리는 죽을 죄인입니다, 이걸 선호할 수 있는 힘이 없어요. 지금 유대인으로서는.
자, 그럼 물어봅니다. 유대인은 그렇다 치고 우리같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세상부귀를 포기하고 주의용서만 해주신다면 거지라도 좋습니다. 창기라도 좋습니다. 강도라도 좋습니다. 이렇게 나올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역시 없지요. 그러니까 강도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기적이냐 이 말이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다 기적적인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그 기적적인 일을 이 히브리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효과라고 본 겁니다. 니 힘으로 되지 못한 일을 하나님은 하셨다는 겁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우리 힘으로 되지 못하는 것’을 누가 하셨다 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다.’ 자, 제가 이렇게 문장을 적었습니다. 이해되시지요? 여기에 숨어있는 세미한 것을 개념을 이제부터 설명합니다.
내 힘으로 되지 못한다, 는 것이 되려면 과연 인간이 뭘 안 해보고 안 된다고 하는 것보다도 뭘 해볼 대로 다해보고 안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확실하겠지요. “너, 해도 안 돼!” 이러면 기분 나쁘잖아요. “아닙니다. 할 때까지 해보고 정말 안 되네. 할 그 때서 저는 수긍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게 맞지요.
‘내 힘으로 되지 못한다.’ 할 때, 이 문장을 확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뭐냐,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할 수 있는 걸 다 해봤어요. 우리가 이스라엘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이스라엘 돼도 우리가 할 때로 다 해보지만, 우리는 실패로 끝납니다. 전화 받는다고 못 했으니까 다시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는 그걸 친절한 금자씨!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 이 문장을 보세요. ‘내 힘으로 하지 못하는 걸 하나님이 하신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에요. 누구나 공감한다고 자부하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정말 니 힘으로 되지 못하는 것에 우리들이 동의합니까? 우리는 이 문장을 수용하면서도 “하나님이여, 제가 아직도 안 해본 게 많은데 함부로 단정하지 마시옵소서.” 라는 것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더라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내 힘으로 되지 못하는 것을 개개인이 다 실험해 보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이미 이 문장은 이미 확정되어서 이미 다 해봤어! 라고 하는 제시한 증거가 뭐냐,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걸 다 해봤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지키기, 하나님 섬기기 다 해봤어요. 성공이었습니까? 실패였습니까? 실패로 끝났어요. “아이고, 이스라엘 사람은 이상해. 우리 같으면 될 건데” 아닙니다. 우리가 마찬가지 돼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 멸망으로 확정되었지요. 이게 구약입니다. 구약 성경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도 그들은 메시아 오기를 기다립니다. 자기들 할 수 있는 건 다해봤으니까 이제 오는 것은 메시아의 은총만 기다려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왜 예수를 안 믿지요? 그건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번영이다. “솔로몬처럼 되게 해주세요.” “다윗처럼 되게 해주세요.”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소개한 것은 “니 죄를 알렸다!” 이거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솔로몬 때처럼 번영하고 온천지가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그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그것을 유대인들이 문자적으로 그걸 기다린다면 그들은 헛수고한 겁니다. 히브리서1장10절에서 그 헛수고에 대해서 미리 다짐을 해놓은 게 있어요.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여기서 주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십니다. 신약에서는 주님이,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바꿔줘야 돼요. 왜, 인간이 생각하는 신은 인간을 구약이 다 실험을 해보니까 인간이 만든 하나님은 상상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에요.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되 그 품속에 든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니 그 분이 누구시다?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항상 하나님한테 가까이 할 때는 하나님부터 출발하지 말고 어디부터 출발해야 돼요?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돼요. 제가 당부를 해도 돌아서면 또 하나님부터 출발해요.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14장,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자꾸 니가 하는 하나님은 상상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건 접어라. 그건 마귀가 니한테 뒤집어씌운 것이고 그렇게 한 거예요.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 하나님을 자꾸 언급한 거예요. 구체적인 하나님은 땅에서 찾아야 되는데 땅에 오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누구예요?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주께서 예수님께서 태초에 땅에 기초를 두셨으면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라는 히브리서1장 10절 요까지만 딱 보게 되면 ‘아, 우리 주님이 또 하나님과 더불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 만들어진 것을 자기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뭉개버리거나 부셔버리거나 파괴시킬 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안심들을 하시잖아요.
그런데 11절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그것들은 뭐할 것이요? 멸망할 것이요. 여기서 우리가 납득이 안 됩니다. 아이 하나님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멸망시킨다? 뭐 그런 횡포가 다 있어요. 그런 횡포가? 마치 이런 것은 뭐와 같은가 하면요, 목수가 주문받아서 집을 지어놓고 집지었다고 박수치고 테이프 끊고 “자, 집 다 지었습니다. 멋지십니까?” “야호, 멋지다.” 전부 다 박수치는 순간 하나, 둘, 셋 하고 완전 다 무너뜨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세상의 완성은 파괴하면서 완성의 묘를 보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할 아이디어입니다. 세상의 완성은 멋있게 등장한다, 이게 상식인데 이게 아니고 세상의 완성은 그것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 우리는 짝! 짝! 짝! 박수치면서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하고 악수해야 돼요. 무너져가지고 먼지가 펍석 일어나면서 주님하고 하나님하고 악수하고 짝짝짝! 됐어! 됐어! 그러니 이러한 아이디어를 인간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요? 인간은 이왕 태어난 거 부수지 말지. 이왕 만든 거 부수지 말지. 이사 간다고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고 이사 가는 거 버릴 거 책상도 내거 주지, 걸상도 내거 주지. 매트릭스도 내거 주지. 방석도 줘서 강아지 앉히게. 이리 나오지 세상에 무너지라고 만든 세상의 창조주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있거든요.
그러니 우리의 출발점부터가 이미 교회에 들어올 때부터 우리는 잘못된 선입관부터 출발한 거예요. 마귀 적 안목가지고 우리는 천당 가겠다고 교회 온 거예요. 왜 무너지는가? 주님 안에 세상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주님 안에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여자가 결혼을 했는데 10년이 되어도 임신이 안 되고 도저히 임신이 안 되니까 그 여자가 부부가 상의해서 어떤 애를 입양을 해가지고 입양 오는 날 그동안 마지막인데 검사해 볼까 해서 봤더니 임신이 되었어요. 어떻게 합니까? 입양하는 날 애한테 솜사탕하나 쥐어주고 다시 돌려보내야 되지요. 참, 가혹하지요.
우리로 하여금 만드신 우리를 하나님이 키워줄 것이다. 천국 갈 것이다, 했는데 만들어서 주님 보니까 주님 안에 딴 세상이 따로 임신되어 있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 하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대구 같은 세상에서 내가 잘되는 것이 주의 축복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축복이 아니고 그것은 저주였고 축복은 따로 마련되어 있었어요. 어디에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마련되면서 예수님의 부활로 그것이 만개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이기는 세상으로서 우리에게 덮치면 우리는 백날 살아봐야 늙어죽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이 새 생명에 의해서 덮쳐질 때, 그게 교체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기다린 것은 눈에 보이는 소망은 not hope.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원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이런 것 저런 것 필요한 것 주시옵소서.” 그럴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 기도는 하지 마라. 내가 니한테 있어야 할 것은 내가 아니까 니가 닦달 낸다고 내가 주는 게 아니고 니가 기도 안한다고 안 주는 게 아니에요.” 또 갑자기 복음이 들려왔지요. 한 번 적어볼까요.
‘기도 안한다고 안 주는 것이 아니다.’ 참,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복음이죠. 그러면 이 기도를 안 해도 주시는 것은 누구 이름으로 주시는 겁니까? 이것은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주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다른 게 아니고 만나처럼 아침에 가보니까 내가 심지도 경작하지도 않은 그 어떤 똘망 똘망한 그런 작은 그런 것들을 그냥 어떻게 줘요? 감사함으로 바구니에 담지요. 마치 12광주리에 차고 넘치는 것처럼. 12광주리에 차고 넘치는 것이 그게 낭비의 철학이라 했잖아요.
어제 가락교회에서 했거든요. 뭐 와야 알지. 뭔가 강물이 범람하는 것. 뭔가 태양 열에너지가 낭비되는 것. 왜 하나님은 낭비가 그렇게 심하지요? 그 넘쳐흐름이 우리의 죄도 거뜬하게 우리 죄를 무죄상태로 바꾸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의인으로 바꾸는 그것이 주님의 낭비처럼 보이는 주님의 무한한 은혜의 왕 노릇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더라도 주신 것을 보면서 우리는 내 기도덕분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주님이 하시는 기도 덕분에 우리가 매일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주워 모아야 돼요. 제가 미국에서 설교할 때 이렇게 했어요. 뜯지도 않은 택배라 했습니다. 뜯지도 않은 보따리를 뜯어보면 전부 다 내 이름으로 원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은혜들이 사방에 널려있어요. 그거 뜯으면서 감사하기도 바쁜 생활이 우리의 생활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애굽같은 세상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그런 걸 탑재하고 그런 것을 저축하고 그걸 내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쉬운 영어 있지요. have, 해브지요. 소유지요. 소유. 내 영역 소유하기 위해서 기도하잖아요. 내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 해놓고 뒤에 변명하기를 비겁하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끝내고 하는데 사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놓고, 이게 이방인들의 기도다 말이죠.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참새도 친히 기르시고 들풀도 기르시나니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참새가 하루에 기도 몇 번합니까? 들풀이 기도합니까? 들풀은 아궁이에 불쏘시개 넣을 때까지 주님께서 친히 기르십니다. 내일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들어간다 할지라도 들어갈 때, 들어갈 때까지 주께서 친히 기르십니다. 우리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안개거든요. 주께서 우리를 다 쓰실 때까지 곧 죽기 직전까지 우리를 친히 주께서 쓰십니다. 숨을 헉! 헉! 하는 것도 주께서 그렇게 헉! 헉! 하셔서 하는 거고 이혼할 때도 큰 아들은 부동산가지고 가고 둘째 아들은 내 빚이나 물려받아라, 이런 식으로 유언하는 그 순간도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는 주님인데 세상만사 내 것은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주께서 다 힘주셔서 움직이고 있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내 것이 없다는 것부터 출발해야 돼요. 내 것이 없다고 해야 우리가 망해도 섭섭지 않잖아요. 내 것도 아닌데 주님 거 주님이 구겨본다는데 내가 왜 화를 냅니까? 내가 성질부릴 이유가 없지요. 성질부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전부 다 내거라고 여기는 거예요. 실제로는 내 것 인 듯 내 것 아닌 것 같은 너, 우리는 뭔가 모호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강의에서 어려운 대목이 나오는데 어려운 대목을 미리 당겨서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본래성입니다. 본래성. 오리지널이에요. 오리지널. 이 본래성이 인간은 비본래성이거든요. 인간은 종잡을 수 없는 존재잖아요. 하나님의 본래 진짜 언약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왔다, 갔다 해요. 아침 기분 다르고 오후 기분 다르고 왔다, 갔다 한다고요. 여자들은 모르겠는데, 남자 같은 경우에는 제가 남자기 때문에 아는데 남자들은요, 회사에서 짜증나고 불평스럽고 짜증 덩어리로 퇴근하더라도 TV에 프로야구에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잖아요. 그럼 그 순간에 졸지에 기분이 확 펴가지고 오늘 내가 치킨 쏜다! 해서 아주 객기를 부려요. 치킨 시키고 맥주 디를 시켜서 기분 혼자 즐기는 겁니다. 그 프로야구 게임이 뭔데? 그거 이겼다고. 기분이 갑자기 업 그래요.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게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왜냐 하면, 인간의 감정은 하나의 이성이 조절이 안 됩니다. 아내만을 사랑해야 한다, 이거 누가 모릅니까? 다 알지요. 결혼할 때, 만세, 만세 나는 김경희를 죽도록 사랑한다. 만세, 만세, 조금 전까지 외치다가 신부 친구에게 눈 돌아가는 거 보세요. 신부 친구에게 눈 돌아가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이게 이성으로 안 되는 줄 알지만, 이성보다 더 힘 센 게 있어요. 그게 emotion, 감정이에요. 감정. 끓어오르는 감정.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니가 속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나오는 게 더럽다는 거예요. 그걸 무슨 수로 관리합니까? 남자는 그냥 이쁜 거 최고지요.
만약에 어떤 총각이 있는데 얼굴은 좀 못 생겼지만, 집안에는 돈이 있고 믿음 좋고 성격 좋아서 남자에게 순종 잘한다. 그런 신부감있고 또 하나는 이쁘기만 한 여자가 있다. 그럼 내가 어느 아가씨하고 결혼하면 되느냐, 누구한테 물어봐요. 믿음 좋고 순복 잘하고 돈이 있어가지고 사업할 때 처갓집에서 돈 잘 빌릴 수 있고 그런 집하고 결혼하라 하지요. 물론 이성적으로 그게 옳으니까 결혼을 하잖아요. 여자는 이쁘기만 했지 믿음도 없고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성질도 더럽고 그래요. 하지만 그 남자가 그 못생긴 여자와 결혼생활 30년 40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빈 구석이 뭐냐 하면, ‘그래도 이쁜 거와 한 번 살아봤으면.’ 그 빈자리는 갈수록 커지기만 하는데. 갈수록 커지기만 해요.
여성은 어떠냐 하면, 여성은 결혼하는 순간부터 남자의 혼속에다가 토굴을 파가지고 그 안에 들어가 있어요. 수요일에 이야기했잖아요. 남자는 1+1이라고. 완전히 마트 세일하듯이 세일을 해요. 세제하나 더 붙여주는 것처럼. 내가 여기 있는데 여자 하나 더 추가하는 것처럼. 국밥하나 더 추가하는 것뿐인데 여자는 남자와 결혼하는 순간부터 남자의 심장 속에 들어가서 토굴을 해서 아지트를 만들어가지고 이제는 로봇 태권V를 안에 사람을 들여 움직이듯이. 여자가 남자를 창으로 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리로 가! 운전 이렇게 해! 여자는 자기는 없어요. 남자를 껍데기로 사용하고 그 안에 자기가 들어있어요.
그러니 남자는 결혼하고 난 뒤에 여자를 못 떼어내서 환장하는 거예요. 안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있는데 어떻게 떼어냅니까? 들어온 병을 무슨 수를 떼어냅니까? 나가라면 더 붙어있는데. 거기다가 애까지 낳아보세요. 이건 끝났어. 애 낳고 난 다음에 남자는 흑! 담배 피우고 휴~ 혼자 있을 때는 헤어질 가능성이 있지만 이제는 자식 때문에 죽으나 사나 돈 버는 기계가 되어가지고 내 팔자야, 남자가 딴 짓하면 마치 꿈속에서 아빠! 하는 것 같아. 아이고, 그래 버려야지.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애 하나 더 낳아버리면 큰 문제에요. 그 마지막 입가심으로 하나 더 낳아버리면 완전히 애피타이저로 끝내 버려요. 완전히 디저트로 끝내버려요. 애 셋 낳으면 이제는. 그 때부터 여자는 슬슬 명품에 눈 돌아가요. 좋은 옷에 눈 돌아가요. 백화점에.
인간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어요. 마귀가 완전히 죽을 만들어놨어요. 그러니 보세요. 하나님의 언약이 백날 언약을 해줘도, 언약은 쉽게 말하면 말씀이거든요. 말씀이 계속해서 주어줘도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네. 죽이거든요. 죽은 액체잖아요. 언약이 와가지고 뭔가 딱딱해서 언약 온다 해서 딱 받아가지고 언약대로 살면 되는데 인간 자체가 물렁 물렁해져가지고 언약이 떨어지면 풍덩해가지고 방금 뭔가 돌이 떨어졌나? 어디로 튕겼지? 이런 식이라. 교회 갈 때만 잠시 은혜 받고 교회 문 열고 나오면 은혜고 나발이고 다 떨어지고 다시 흔들리는 또 다시 세상의 욕정에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믿음이고 뭐고 다 까먹고 다 날아갔어요. 이제는. 똑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남한테 안 지려하는 것, 이 애굽 세상에서 기어이 버티려는 것. 망하는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는 거예요.
언약 안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성공과 실패가 없어요. 언약 안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고 그 대신 뭐가 있느냐 하면, 축복과 저주가 있어요. 여러분, 복 받으렵니까? 성공하렵니까? 어느 쪽입니까? 성공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축하해주는 박수 소리가 들리는 곳이 성공이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축하해주려면 친구와 더불어 있어야지 내가 빠져나와버리면 축하 줄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성공도 의미 없이 돼버리는 거예요. 누가 부러워하고 박수를 쳐줄 때 우리는 성공한 보람을 느끼는데, 자기는 백날 성공했는데 아무도 관심두지 않을 때, 자기는 그걸 성공의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못 누리겠습니까? 못 누리지요. 기쁨 없는 성공은 의미 없는 성공이에요.
예를 들어서 애가 둘이 있는데, 밑에 애가 평소에 수학을 못했어요. 늘 20점, 30점. 그래서 엄마가 “니가 50점 맞으면 자장면 사줄게.” 이랬단 말이에요. 50점 맞으면.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자기가 뭘 내려썼는지 50점을 맞았어요. 잘못 썼는데 우연히 행운이 되어서 50점 맞았다. 성공했지요. 엄마 나 50점하고 들고 오는데 형은 그날 100점, 100점 올 100점. 그럼 축하를 받을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받지요. 지 성공이 에이 씨! 하고 50점 구겨서 던져버리는 거예요. 자기 딴에는 성공했지만, 자기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없을 때, 그건 성공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세상은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가 이 세상입니다.
나를 누가 알아주던지 그러니 인간은 결국 타인의 시선에 노예로 살아가는 거예요. 남의 시선에 종이 되어서 살아가는 거예요. 매일 큰 소리 치지요. 나는 내가 주인이다. 말만 큰 소리 치지요. 그렇게 외치는 것이 남이 없으면 외치는 것도 의미가 없어요. 얼마나 의미 없었으면 홀로 새벽에 산에 올라가가지고 “사장 니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소리하겠어요. 그것도 회사에서 이야기 안하고. 꼭 노는 날 일요일 날 청계산에 올라가가지고 사장이름 부르면서 니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런 식으로. 내려와서는 “아이고, 사장님...”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 한 맺혔으면 그런 소리하겠어요. 또 여자 같으면 “시누이 니 죽었다. 죽어라.” 내려와서는 “시누 오셨습니까?” 시가 쪽 관계가 그렇습니다.
그런데서 싹트는 것이 뭐냐, 기어이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에게 스트레스를 가증시키는 겁니까. 제가 주일 낮에 설교한 게 기억나는데요. 이런 대목을 했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짐은 가볍다.” 했지요. 우리는 끝에 가볍다는 것만 알고 중간에 뭘 빼먹는 수가 있어요. 뭘 빼먹었다 했지요? 편히 쉬게 하겠다는데 편히 쉬는 것만 좋아하지 말고 뭔가 하나 중간에 있지요? 중간에 뭐지요? 내게 배워라. 내게 배울 경우에는 편히 쉰다는 거예요. 내게 배울 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모든 모욕과 모멸은 다 오너라. 왜? 그 모욕과 모멸은 지금 만인 직전에 하는 모욕과 모멸이에요.
그들은 지금 지옥으로 꺼지면서 큰 소리치고 있는 거예요. “야, 니 나하고 한판 붙자.” 그러면서도 점점 더 지하 15층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내려가고 있으면서도 “야, 니 나하고 한 번 내가 니 보다 성공했어. 나는 이건희야.” 이건희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니 재산 얼마야?” “니 이천만원?” “나는 15조야.” 15조 되면 뭐합니까? 이 건방떠는 버릇이요, 부자와 나사로의 이 버릇이 지옥가도 안 고쳐져요. “어이, 나사로, 오랜만이다. 아브라함님, 저 나사로한테 시켜가지고 저한테 물 한 방울 손가락 찍어가지고 좀 주면 좋겠습니다.” 물의 시가가 얼마입니까? 이 땅에서. 물 한 방울? 물 한 방울 얼마지요? 돈 거의 가치 없지요. 그런데 지옥에서 물 한 방울 얼마입니까? 지옥 다 털어도 못 사요. 우리는 물 받을 때, 마태복음6장에 선인과 악인에게 단비를 주시지요. 우리는 거의 가치 없다고 여겼잖아요. 비는 위에서 공짜로 주니까. 그런데 그 가치가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가치입니다. 앞으로 비 맞을 때는 피 받는 걸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주의 피가. 지옥 가보세요. 그게 얼마나 비싼 물인지. 그런데 요한계시록22장에 천국가보세요. 물이 있어요? 없어요? 물에 헤엄친다니까요. 자유형에. 왜? 생명수 강가에 물이 흘러요.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자신이 우물이에요. 생수가 막 나와요.
이 땅에서 흔하디 흔한 물이 지옥에서는 물도 없고 모든 물은 천국가가지고 생수가 되어 영생의 물이 되어있고 이 땅에서 반지하에 살고 고생 좀 하는 그거 지금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가 안 됩니다. 그렇게 하거든 차라리 신앙 반납하고 이건희처럼 병원에 누워있던지. 눈만 뻐금하면서 누워있던지. 삼성그룹하고 있던지. 아니면 삼성그룹포기하고 차라리 “거지 나사로 되어도 좋습니다.” 하던지 언제까지 머뭇 머뭇거릴 겁니까?
둘 중에 하나만 하세요. 둘 중에 하나만 하란 말이죠. 다 이 세상에 밟히는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너무 흔하기 때문에 감사치 못하고 내 고집만 내세우면서 상대적으로 결국은 예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우리 자신의 욕망이 욕심이 주님의 은혜를 그렇게 모독했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인간이 주의 기도를 모독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또 뭐 이 근호목사는 기도하지 말라, 이런 소리 하는 거 아닙니다. 기도를 하세요. 하되 그것은 기도 안하면 안 되게 주께서 또 조치를 해요. 기도 안하면 안 되게. 답답하면 기도하게 돼있는 게 당연하니까 기도하면서 고 기도내용은 기도하는 가운데 주께서 친히 응답으로 친히 바꾸어주십니다. 주님은 살아계시니까.
두 번째 봅시다. 내 힘으로 되지 못하지요. 우리 힘으로 왜 되지 못합니까? 우리는 이 애굽에서 뭘 원하기 때문에? 성공을 원하기 때문에. 그런데 성공이라 하는 것이 결국 내가 원하는 성공은 남들이 기대하는 성공을 뒤따라가서 우리가 바보처럼 뒤따라가면서 이거 어디로 가는 성공인지도 몰라요. 하여튼 성공이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남자들 한 30, 40대 되면요, 로망이 희망이 뭐냐 하면, 필드에 가서 골프 치는 거거든요. 덩달아서 여자들도 그렇게 보지만. 저 골프 못 쳐요. 미련 없습니다. LA가니까 우리 처남이 골프장에 구경시켜 줄 테니 가자고 하는 거예요. 안 간다고 했어요. 골프는 게임이거든요. 그 게임이 이 세상에서 하나의 성공한 사람의 대표적인 놀이라고 본다면 이 세상 자체가 우리 인생 자체가 헛되고 헛된 게임에 불과한 겁니다. 그렇지요?
결국 어떤 골프라는 게임이 우리를 대표한다는 말은 평소에 우리도 뭔가 게임에 말려들고 있다는 겁니다. 게임이라 하는 것은 게임으로 끝나거든요. 그렇잖아요. 게임에 울고불고 하는 것은 도박하는 사람밖에 없어요. 그러니 얼마나 헛된 거예요. 화투에 인생을 거는 게. 바보 아니에요? 어떻게 48장 화투에 인생을 겁니까? 그 귀한 목숨을. 48패에 목숨 건다는 게 말이 돼요? 그게 정신병자들이에요. 얼마나 걸게 없으면 화투에 포카에다 다 걸어요? 이 세상은 자본주의라는 게임입니다. 돈 버는 게임이에요.
제가 만난 사람 중에서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공장가서 돈 번 게 아니고 펀드로 돈 벌었어요. 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루, 하루 개미처럼 일한다고 해서 큰 돈 만지는 게 아니에요. 큰 돈 만지는 세계에 게임에 들어가야 큰돈을 만져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무의미한 세상입니까? 이 세상 자체가. 두 번째 내 힘으로 되지 못하는 걸 알겠지요? 또 이야기할까요. 우리는 성공만 원하기 때문에.
성공이라 하는 것은 게임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망하는 세상에 속하기 때문에 주님하고는 아무 관계없어요. 우리는 성공 실패 자체가 없습니다. 오늘부로 성공 실패라는 게 우리에게 없다고 아예 못을 박으세요. 성공 실패 대신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복 받았느냐, 아니면 저주 받았느냐, 양이야, 아니면 염소야, 니 천국 갈 사람이야, 아니면 지옥 갈 사람이야, 그겁니다. 청국장 먹을래? 그거 아닙니다. 천국 갈 사람이냐, 그래도 자주 청국장 먹으시기 바랍니다. 먹으면서 천국도 생각하면서. 선량한 개그지만 할 수 없다. 이거. 중요한 거. 천국 갈 사람이냐, 지옥 갈 사람이냐, 그게 중요하지 직업이고 뭐고 안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하셨다.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이걸 몰라요. 왜냐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데 왜 주님이 또 하지? 우리가 못할 것 같으면 주님이 하시면 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하셨다, 를 믿지요. 그 말은 달리 말하면, 내가 할 수 있다? 없다? 나는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빠져라, 라고 미국 맨하탄 마지막 예배 때 했거든요. 바쁘시더라도 미국강의 올려놨으니까 전부 다 한 번 보세요. 보게 되면 제일 마지막 강의가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뉴욕에서 떠나기 직전에 한 거예요. 다음날 새벽 3시에 일어나야 되는데 그 전날 11시까지 있으면서 했던 그 예배, 인간은 빠져라, 니 운명에 대해서 니는 빼버려라, 그게 믿음이에요. 왜,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왜 그러느냐 이게 언약입니다. 내가 한다는 거예요.
자, 물어보겠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자, 누가 했습니까? ①번 가룟유다가 했다. ②번 마귀가 했다. 누가 했습니까? 마귀가 했지요. 그 마귀는 누가 시킨 겁니까? 주께서. 그러니까 주께서 하신 거예요. 어제 가락교회에서도 강의했습니다. 추수할 자와 추수되지 못할 자 가라지는 없는데서 만들어서라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구분하신다 했습니다.
추수라는 것은 창세 이전에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추수되기 때문에 “저 추수되게 알곡 되게 해 달라.”고 손들어도 “니 손 내려라.” 이리 되는 겁니다. 손들고 설치지 마세요. 주께서 알곡 되게 하시는 사람 따로 있고 나머지는 전부다 가라지에요.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이 알곡입니까?” 궁금하겠지요. 어떤 사람이 알곡이겠어요? 방금 전까지 이야기했어요. 뭐를 빼는 사람? 자기 인생에서 자기 손을 늘 빼는 사람. 뺄 줄 아는 사람이 그게 알곡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것을 안 믿기 때문에 기어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성공해보겠다 하는 그 성공이라는 그 신화에 매달려 있는 사람, 성공이라는 그 귀신에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 그게 마귀 들린 사람이에요. 그게 안 되니까 자살하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협박을 한다. 협박해서 자살했다는 논리가 있으니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협박을 받는 거예요. “니 돈 밝혔지?” “예” 또는 “니 여자하고 놀아났잖아.” 했을 때, “에이 씨~ 들켰구나!” 해서 자살한다. 이게 신앙이에요? 우리가 믿음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집사님께서 무릎에 두 손 모으고 있잖아요. 누가 요렇게 했습니까? 주께서 요렇게 한 거예요. 이게 믿음이에요. 그런 협박을 하게 하신 분이 누굽니까? 살아계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환란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위험이나 협박이나 어떤 거라도 무엇에 끊어지지 않는다?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우리는 어떻게 돼요? 이왕 들킨 거 더 해보자. 이러면 남편이 다섯 명이 되는 거예요. 남편 다섯 명과 다 헤어지고 여섯 번째 사귀는 거예요.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나 당당해요. 우리가 왜 자살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았을 경우에는 자살이 성립되는데 죽은 자는 자살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죽었은즉 모든 인간이 죽음을 아는 사람한테는 자살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사는 것 자체가 죽음인데. 거기서 자살해봐야 자살도 주께서 살려주시는 삶의 일부에요. 지가 죽어도 안 죽는다니까요. 사람은 안 죽어요. 이게 환장하고 미칠 이야기입니다.
이 괴로운 세상 차라리 밟아서 죽으면 좋겠는데, 이게 안 죽으니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안 죽으니 이게 미치겠어요. 김일성이 안 죽으니 문제인 거예요. 김일성이도 죽으면 나중에 주께서 무덤에서 호출해버립니다. 부처도 안 죽으니 문제에요. 부처가 죽어서 “나는 천상천하유아독존, 내가 부처다.” 죽으면 좋겠는데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야, 석가모니야” “누구십니까?” “니가 핍박하던 예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뭐고 지옥가거라.” 이리 되는 거예요. 지가 백날 깨달았다, 도 닦았다 해서 불교라는 사기 집단을 만들어놨지만, 정작 본인은 뭡니까? 주님의 호출을 받고 있는데.
지금은 예수 안 믿고 뺀질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뺀질이들. “나중에 아플 때 갈게요.” “나중에 한가할 때 갈게요.” “지금은 좀 놀고 갈게요.” 뺀질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뺀질, 뺀질 노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주신 힘으로 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지 않는다, 했지요. 주께서 내어 버려두사 끝까지 가보자. 결국은 어떤 이 세상의 모든 것도 주께서 친히 만드시고 친히 망하게 하시는 주님의 손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셨다, 를 새삼스럽게 믿지 마세요. 믿는 것도 이상해. 뭘 믿어요? 확인할 뿐이지. 우리가 믿는다고 주께서 일하고 안 믿는다고 내가 일하고 그런 게 아니잖아요. 공기를 들이마시자, 이래서 우리가 삽니까? 살아있을 때는 오늘도 1분분의 공기를! 흠~ 마셨다. 공기야 고맙다! 다시 아이구 떨어진다. 공기를 또 마시자. 이러지만, 잠 잘 때는 어떻게 해요? 자면 그 때는 숨 막혀 죽습니까? 잘 때도 누가 주십니까? 공기, 호흡 주시는 거 누가하십니까?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주여, 믿습니다.” 하는 게 이상해. 믿습니다, 한다고 주님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나 우리는 주님을 믿게 돼있는 것으로 주께서 작용합니다. 기어이 우리가 십자가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 만들어 냈다는 증거 하나가 뭐냐, 십자가를 내가 인식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주께서 믿게 하셨기 때문에 선물로 믿음을 줬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새 십자가 피가 내 죄를 다 씻어내는 하나님의 새 언약인 것을 압니다.
그 때 우리는 본래적인 것이 이 땅에 본래적인 인간으로 굳히게 만든 그런 순간입니다. 언약이 본래적이죠. 이 떡은 내 살이요, 이 잔은 내 피요, 그게 새 언약이잖아요. 내가 세상을 연구한 것과 성공을 위해서 부단히 움직이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본래적인 것. 그 오리지널이 나에게 딱 포착되는 순간 그 때부터 우리는 뭘 느낍니까? 짜릿하면서 ‘아, 내가 성도 맞구나!’ 라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본래적인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자태와 모양새를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새 언약의 증인으로서의 이 땅을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가 소급해서 우리가 확인될 수가 있지요.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 용서까지 주께서 다 하신 거예요. 이렇게 놓고 9절 봅시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요겁니다. 십계명이 뭐냐, 우리 안에 들어오지를 않고 바깥에 스톱되어 있지요. 요게 십계명, 율법이에요.
그러면 율법에 있는 것은 우리 앞에 스톱됐다는 말은 우리보고 지켜보려면 한 번 지켜봐라, 그런 뜻이지요. 그거 지키는데 몇 년 걸렸습니까? 이스라엘 역사 다 소비됐지요. 결과는 뭐였습니까? 성공이었습니까? 실패였습니까? 실패였지요.
이스라엘이 실패한다는 말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실패해요. 그것은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우리가 비 본래적이에요. 율법을 반길만한 그러한 존재가 못 됩니다. 우리는 마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키고 싶어도 또 다른 죄가 있어서 악이 있어서 탐내지 마라, 하는 순간 우리가 탐내고 싶은데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이성적으로 관리가 안돼요. 백화점에 원피스 걸린 거 보고 “저것은 내가 입을만한 게 아니야.” 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언젠가는 내가 돈을 모아서 3년 후 내 생일날은 저거 사 입고 말리라, 3년 뒤에 사봐야 유행 바뀌었는데. 더 좋은 게 나오는데.
그러니까 요거 집어넣는데 안 들어가니까 주께서 요 율법을 사랑으로 바꾸어서 그 피와 살로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린 겁니다. 그러면 졸지에 우리는 뭘 아느냐, “저는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못 지켰으니까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죄인 맞습니다.”라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이미 주님께서 새 언약이 우리 안에 완성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