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9강-모형 1407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15. 08:38
2014-07-12 00:29:19조회 : 1201         
모형 140711이름 : 이근호 (IP:119.18.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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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175.♡.147.179)14-07-30 14:16 
안양20140711a-히8장1절(모형) - 이 근호 목사 

전체내용이 제사장에 관한 이야기가 있지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지구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지구를 만들었으면 이 지구 만든 것에 대해서 단어 하나로 딱 만들어서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단어 생각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뉴욕’할 수도 있고요. 어떤 사람은 ‘사람’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땅덩어리, 땅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특히 성경 히브리서는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 세상에서 딱 한 단어를 끄집어내라면 ‘제사장’ 참 특이하지요. 

아까 뉴욕 같으면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 제일 번영한 도시잖아요. 그리고 땅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 이런 단어를 끄집어내면 이것은 관심사가 주로 어디에 있지요?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이 있지요. 그럼 한 번 적어보면,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단어 하나 이렇게 요약해서 보라고 한다면 사는 것에 주로 관심이 있지요. 아침에 딱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 단어, 오늘 할 일이 뭐지? 그 할 일이 뭐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오늘 CCTV예상도 못했잖아요. 그 CCTV설치하는 거, 그거 뭐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요. 그런데 CCTV하고 제사장하고 관련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아니다 말이죠. 혹시 또 집사님 같으면 아침에 눈을 떠보면 롯데? 롯데가 생각날 수가 있는데 그 롯데라는 생각이 결국 뭐와 관련되어 있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말이죠. 고물? 전부 다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그리 보지 말라는 말이죠. 뭐로 보라? 제사장으로 보라는 거예요. 아~ 평소에 이 세상 살아가는 거하고 우리 곁에 말씀 주신 성경책 주제가 핀트가 어긋나도 보통 어긋난 게 아닙니다. 날씨가 덥다할 때 아침에 눈을 뜨면 반바지? 이렇게. 나중에 저녁때는 콩국수? 이런 식으로.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주님께서는 제사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는 것은 나중에 뭐로 끝나느냐 하면, 점선으로 끝나요. 살자, 살자, 살자, 자, 자, 자....죽잖아요. 죽어버리지요. 그런데 제사장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제사장은 영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지구는 영생을 만들기 위해서 이 지구와 사람을 그 위에 만들어 놓으셨다. 이렇게 보라고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언급하는 겁니다. 영생을 위해서. 

우리는 영생보다는 내 사는 것 앞에 붙으면, 내가를 집어넣으면 ‘내가 사는 것’ 내가 사는 것에 사람들은 관심사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핀트가 너무 벌어졌지요. 너무 벌어진 것을 일치시키는 작업은 누가 하십니까? 성령님이 하시지요. 여러분이 아시는 것 정리해 봅시다. 

인간의 생각하고 하나님의 생각이 너무 멀리 가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치는 것은 성령님이 하신다고 했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때에,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근거, 그러한 바탕은 누구에 의해서 제공됩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제공된 거예요. 무슨 말인가 하면, 성령께서 이렇게 일치할 때, 아무나 일치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자에 한해서만 요게 일치되게 해주시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항상 누구한테 물어보는가 하면, 본인이 하시는 게 아니고 예수님한테 물어보고 하시는 거예요. 그걸 그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가 이미 오셔서 일구어낸 그 모든 업적, 그 모든 성과를 자기 택한 백성에게만 연결시켜주는 그것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방금 제가 ‘연결’이라고 말했지요. 로마서6장에서는 그걸 연결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연합’이라고 하는 겁니다. 

연합과 연결을 보니까 어느 쪽이 성경적으로 더 맞게 생각이 듭니까? 연합이에요. 연결이라 하는 것은 각자 독자적인 게 살아있으면서 그냥 가운데 이어지기만 하면 연결이 되지요. 그런데 연합은 뭐냐 하면, 딱 갔다 붙이는 거예요. 지난 주 설교에서 교회에 대해서 로마서16장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계획은 결국은 예수님의 자기의 여자를 만드는 것이다. 신부 만드는 이야기했지요. 

신랑과 신부는 그냥 연결이 아닙니다. 연합되는 거죠. 여자의 모든 것은 남편이 책임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결혼을 할 때, 남자들은 결혼하면서 오해가 뭐냐 하면, 자기의 빨래 같은 거 밥하는 거 귀찮으니까 아내가 대신 해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완전히 남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은 것에 대해서 결혼의 의미를 둡니다. 그걸 여자들은 사랑이라고 해요. 그래서 남자는 어릴 때는 엄마의 말을 듣고 결혼하면 아내의 말을 들어요. 늙으면 자식 말 듣고. 특히 딸의 말을 들어야 돼요. 왜냐 하면 마지막까지 봉양하는 것은 며느리가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딸이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죠. 목사님도 딸 있지요? 제일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 설교할 때 제가 그랬잖아요. 아내는 모든 것을 희생한다고 했지요. 남자는 아내를 이용만 하려고 하지요. 그 설교에서 연합이라는 게, 참 이상하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냥 구원하면 되는데 그냥 구원하지 않고 자기 여자로 만들어서 구원해요. 자기 신부로, 자기 색시로 만들어서 구원합니다. 하나님의 색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색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혼인잔치가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혼인잔치의 주체 자는 하나님이고 신랑은 예수님이고 신부는 누가 있어요? 바로 신부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시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서 놀라운 것이 하나님은 의외로 너무 인간적이에요. 사실은 그게 나옵니다만, 5절에 봅시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형과 그림자라 했지요. 내가 방금 하나님은 인간적이라 했는데, 사실은 그것은 약간의 어패가 있고요. 이렇게 보면 돼요. 이 세상의 인간의 모든 관계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사이에 모형과 그림자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남자, 여자로 태어났다. 그것도 모형과 그림자지요. 남자, 여자란 하나님과 인간의 혼인잔치 천국을 이루는 그런 모형으로서 이 땅에서 혼인제도가 있다, 이리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 것을 베낀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진도 나가기 전에 중요한 거 이것부터 정리하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쉽게 할게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어떻게 알지요? 상당히 난감한 질문이고 질문 자체가 굉장히 포괄적이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제가 여러분께 묻는 취지는 우리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을 어떻게 구분해 내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구분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럴 때, 그 방법을 제가 말씀드릴게요. 일단 창조된 것은 하나님이 창조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창조했으니까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너무 무책임한 답변이에요. 왜냐 하면, 불신자도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아니지요. 불신자, 하나님의 자녀 아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해서 자녀가 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자녀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 자녀가 돼요. 마귀 자식이 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요구했던 답변은 뭐냐 하면, 하나님만 등장하면 안 되고 여기에 누가 등장해야 되느냐, 예수님이 겸하여 등장해야 되는 겁니다. 

등장하게 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을 우리에게서 그걸 발취해 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어요. 하나님이 하셨다. 이러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걸 가지고 흔히 신학에서는 그걸 주권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주권사상은 모든 종교에 다 있어요. 이슬람교도 있고, 불교, 흰두교, 모든 종교 다 있거든요. 그것은 전혀 하나님께 제대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누가 만들었겠어? 신이 만들었겠지.” 이건 신앙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신앙이 되려면 누가 있어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기다가 넣어야 되는데. 어떤 일이 있다면, 여기다가 아버지 집어넣고 예수님 집어넣는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빙수 갈아 넣고 이쪽에는 옛날에는 빨간 물감 팍팍! 파란 물감 팍팍! 그 다음에 노란 물감 팍팍! 팥 한 숟가락 해가지고 미숫가루 넣고 그게 팥빙수였어요. 어릴 때. 그 물감이 상당히 별로 안 좋은 물감인데 옛날에는 얼마나 물감이 예쁜지. 여기 어떤 세상에다가 아버지 팍팍 치고 아들 팍팍 친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에요. 

정답은 뭐냐,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요 관련성을 우선시하고 요 관련성에 따라서 이 지상의 모든 것은 모형이다, 그림자다,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를 크게 생각해서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을 ‘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언약. 

아, 그럼 그게 언약이라면, 노아언약도 언약이고, 모세언약도 언약이고, 다윗언약도 언약인데 왜 이걸 언약이라고 하느냐, 모세언약, 다윗언약 이것은 장차 오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사이에 언약을 면밀히 보여주는 모형과 그림자에 해당되기에 그렇습니다. 

보통 설계사무소에서 모형과 그림자는 뭐로 만듭니까? 나뭇가지나 이런 것으로 만들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모형과 그림자는 직접 사람을 가지고 만들어요. 사람을 가지고. 히브리서3장5절에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모세는 종이고 모세가 종일 때, 사람들의 눈에는 종만 보이고 주인인 아들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종이 죽고 아들이 그 현장에 들어납니다. 모세가 했던 그 일을 가지고 아들이 하는 거예요. 이게 요번 수련회에 중심 모티브가 되는 겁니다. 모세가 했던 일이 모세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예수님 일이에요. 제목도 출애굽속의 그리스도에요. 

사실은 출애굽기에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누가 있어요? 모세가 있어요. 그런데 모세는 지팡이 들고 있었잖아요. 모세가 지팡이 들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바로 지팡이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 아니고 지팡이와 모세와의 관계, 연합된 관계 그것이 바로 장차 오실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 주님이 일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 모세가 했던 일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부 따로 일이 없어요. 이 세상이야 뭐 신부가 머리하면 신랑은 집에서 TV보고 있지요. 따라오질 않잖아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신부가 파마해도 주님이 파마한 거예요. 내가 운동하면 주님이 운동한 게 돼요. 신부는 항상 신랑과 함께 가요. 함께 있어요. 

신랑과 더불어 일하지 않는 신부는 없습니다. 신랑 따로 신부 따로 하는 그런 부부관계는 없거든요. 그러니 모세보다 더 확실하지요. 모세는 종이지만, 우리는 신부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더 착실하다는 뜻이에요? 그만큼 우리는 주님에 대하여 잘 섬긴다는 뜻이에요? 그런 뜻입니까? 아니지요. 그만큼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일방적으로 질질 끌려가야 될 무 대포, 아무것도 모르는 치매환자 같은 존재다 이 말이에요. 요양병원에 가보면 치매환자에 대해서 간호사들이 어떤 것에 묻고 의논하고 그런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저 잠만 자면 주사 놓던지 약 먹여 놓으면 정신 놓고 완전히 개처럼 잘뿐이에요. 

그런데 그 치매환자의 약은 간호사가 준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로 우리가 신약시대 때 우리가 엉망이라 하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강제로 주사 놓고 약 먹여 가지고 강제로 그리스도의 일을 하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력으로 신랑 품에서 내뺄 수가 없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행복해요. 우리는 정말 다행스러워요. 

모세 같으면 우리는 또 지팡이 치고 난리고 이럴 거예요. 모세 같으면. 두 번씩 치고 화낼 거다 말이죠. “하나님, 이 백성 못 합니다.” 하는데 신약에는 모세만도 못한 인간들이 대부분입니다. 완전히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로 들어났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몰아내십니다. 몰아내시는데 어디로 몰아내시는가, 지금까지 이야기는 이해되겠지요?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관계.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일방적으로 몰아내시는데, 지금 제가 하는 것은 모형과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모형과 그림자. 어디로 몰아내시는가 하면, ‘경계선’쪽으로 몰아내시는 거예요. 20년 전인가 채시라하고 최민 수가 나왔던 드라마에 ‘사랑과 야망’이라는 게 있었지요. 그 드라마의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항상 철조망이 나와요. 국경을 넘고 지금 국경이라는 것이 뭐죠? 저것만 넘으면 이쪽과는 딴 세계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국경이라는 게. 

그 국경에 철조망을 쳐놓게 되면 철조망을 쳐놨다는 것은 못 넘어간다는 뜻이고 못 넘어가기 때문에 더욱 더 그리워지지요. 못 넘어가기 때문에. 애들은 가정에 살지요. 그런데 그 애가 나중에 사춘기가 들어가지고 친구하고 놀러간다 해가지고 지 맘대로 행동하게 되면 애가 가정이라는 경계선 바깥에서 심지어 외박까지 할 때, 엄마가 얼마나 걱정됩니까? 같은 여자 친구하고 한다고 해놓고 나중에 남자친구인지 어떻게 아느냐 온갖 걱정이 다 되잖아요. 그럴 때 엄마는 결국 뭘 느낍니까? 경계선 바깥에 있다는 것을 느끼죠. 

애가 경계선 안에서 띄어야 안심이 되는 겁니다. 다 컸다는 말이 뭐냐 하면, 우리 가정의 경계선과 그 안과 밖을 자기는 이제는 파악을 했다는 겁니다. 요거 안에 있으면 엄마 잔소리 영역 내에 있고, 요 바깥에 나가면 잔소리가 안 들리는 곳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의 잔소리나 간섭이 없는 곳에 가려면 그 경계선을 살짝 이탈해버리죠. 이탈한 것에 대해서 부모는 탈선이라 하고 자기는 잠시 바람 쐬었다고 하고 그렇게 보는 겁니다. 

주님께서 자기 신부를 어디다 몰아넣는가 하면, 경계선 쪽으로 몰아붙여요. 최 민수하고 채시라하고 서로 사랑하면서도 건너갈 수 없는 철조망 앞에 두고 서로 애타 하는 것. 그 장면이 생각나는데. 우리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나지? 하면서 국경선을 못 넘어와서 안타가워 하는 거예요. 그런 대목. 그러니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항상 경계선이 나옵니다. 경계선이 나와 가지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깝게 만들지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봐도 탈출하잖아요. 나치에 협조하지 않는 트랩대령이 오스트리아를 벗어나서 나중에 실제로는 미국으로 망명했어요. 실제 인물들이. 2차 대전 때 나치를 피해서 망명할 때 산을 탈출하잖아요. 수도원으로 피했는데 독일 병이 와서 숨어서 경계하는데, 항상 경계선이 있어요. 경계선. 이것만 넘으면 자유고 그렇지 않으면 걸리면 죽음이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항상 그 경계선. 

강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봅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눈만 뜨면 뭘 생각한다 했지요? ‘사는 것’이지요. 우리는 요 안에 있으면 산다는 거죠. 주님의 성경책에서는 주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장’이라고 했지요. 제사장은 영생을 주고 결국 제사장이 영생을 준다는 말은 우리가 산다고 우기면서 사는 이것은 영생일까요? 아닐까요? 영생이 아니면서도 우리는 기껏 배운 가락이 영생 아닌 것만 배운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지옥 가는 법만 우리 몸에 익히고 사는 셈입니다. 지옥 가는 법. 그게 탐욕의 바다인데. 이 성경을 왜 줬습니까? 이 성경은 너희로 하여금 영생으로 이르게 하리라, 되어있지요. 이 성경은 너희에게 영생을 준다 말이죠. 참 중요한 말씀인데. 영생을 준다는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제가 성경이라는 ‘경’자가 이게 ‘거울 경’자가 아니고 사실은 ‘말 경’자에요. 그런데 설명할 때, 거울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의미 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착각을 많이 하고 전에도 이야기할 때 착각을 했어요. 사실은 ‘말 경’자에요. 어쨌든 성경에 보니까 성경을 들여다보고 하고 있으니까 그냥 거울처럼 늘 생각하는 게 좋지요. 

이렇게 영생을 줬는데, 안 보는 이유가 뭐죠? 무엇에 바빠서? 혼자서 죽는 데 바빠서, 신부로서 사는 데는 관심이 없었잖아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사는 데는. 사실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혼자 있으면 죽어요. 이래 하나 저래 하나 혼자는 무조건 죽어요. 

다시 해봅시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이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창세기3장 22,23절에 의해서 우리는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무슨 종교나 아무리 기독교를 가져도 영생 없습니다. 성경공부해도 소용없어요. 데리러 와야 돼요. 데리러 오되 그냥 데려가면 안 되고 우리의 신분 자체가 바꿔져야 돼요. 

어제 뉴스에 보니까 젊은 아가씨들이 53%가 결혼할 필요 없다고 이리 나왔다 말이죠. 왜 그럴까요? 혼자 살아도 괜찮다는 거예요. 천국에서는 혼자 살면, 혼자 영생 얻으면, 그 영생은 영생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한테 남편 영생을 아내가 연합해서, 남편의 영생을 아내가 공유할 때만, 우리가 영생을 얻습니다. 정말 이거 중요한 말입니다. 

집사님, 차 있지요? 차 누구 이름으로 되어있어요? 남편이 집사님 차를 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탈 수 있는 거예요. 왜? 부부기 때문에 탈 수가 있는 겁니다. 남편 명의의 차에 우리가 신부로서 조수석에 타가지고 남편의 나라에 가요. 그게 아들의 나라인데. 내 나라 가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면, 내가 잘되는 나라거든요. 내가 이뻐지고 내가 하늘나라가도 원피스입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비교해서 우위에 있고. 매일같이 상상하는 게 내가 잘되는 나라인데. 그 나라는 조수석에서 상상만 하세요. 조수석에서 상상만 하고, 진짜 가는 차는 예수님 나라에요. 내 나라가 아니고. 자기 차로 상상하다가는 쥐어 박힙니다. 

그 쥐어 박히는 방법이 뭐냐, 우리로 하여금 경계선에 가까이 하는 거예요. 포근하게 그냥 우리끼리 사는 게 정상인데, 때로는 우리가 이 경계선에 가게 합니다. 죽음의 경계선에 가게 해요. 죽음의 경계선에 갈 때는 경계선만 보이게 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이 실망스러운 사태가 일어납니다. ‘내가 평소에 뭐하고 살았지?’ 대표적인 것이 사업하다 부도났을 때. ‘뭐야? 빚만 지고.’ 평생 동안 청춘을 다 바쳤는데 돌아온 보상이 완전히 빚더미에 앉았다 말이죠. ‘나, 그러면 어떻게 되지? 나 이제 죽을 수밖에 없네.’ 라고 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경계선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 강도 같은 경우에요. 평생 동안 그 강도가 강도를 왜  했는지 알아요? 평소에 사는 것에 관심 있었거든요. 평소에 사는 것에 관심 있다가 마지막 자기 인생에 경계선에 주께서 경계선으로 몰아넣으니까 비로소 그 때 누가 보이는가 하면, 예수님이 보이는 거예요. 무임승차해서 오늘밤에 낙원에 가는 겁니다. 강도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그럼 우리가 강도질 할까요? 아니에요. 우리로 하여금 평소에 생활하면서도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내가 이리 살긴 사는데 백날 살아봐야 죄만 생산될 뿐.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점점 더 죄를 짓고 주위사람들에게 피해만 입히는 사람. 제가 지난 설교에 그랬지요. 남한테 책임지지 말라, 했지요. 책임지게 되면 자기가 의인이라고 착각될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니가 내 딸로서 니가 애를 먹여도 나는 니 부모로서 니한테 해줄 것 다해줬다.” 하거든요.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따지고 보면 아무리 해줘도 만족스럽지 못해요. 엄마로서의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닙니다. “차라리 내가 니한테 해준 것이 별로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딸에게 감동될 수가 있어요. 딸이 담배피우고 들어와 가지고 유치장에 갈 때, 내가 니한테 해줄 거 다해줬는데 왜 옆길로 나가느냐, 짜증내지 마시고 차라리 내가 니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구나! 미안하다 딸아! 니 담배 더 피워라. 재벌3세만큼 못해줘서 미안하구나! 그야말로 다이아몬드 반지 생일선물로 안 줘서 미안하다. 이런 거. 

경계선에서 경계선으로 몰아넣습니다. 경계선으로 몰아넣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 경계선을 타넘고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에요. 태어나서 나중에 죽을 때 십자가가 아니라 이미 오실 때부터 십자가에 깔린 그 길을 따라서 십자가로만 갈 수밖에 없는 그 길 따라 노선 따라 온 거예요. 내 맘에 주단을 깔고, 하는 게 있지요.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의 길을 깔고.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의 길을 깔았어요. 주님만 십자가가 아니라 주 옆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다 주님 여파 때문에 전부다 십자가의 고난을 겪어야 했었습니다. 배가 바다에 지나가게 되면 배가는 길에 있던 낙지 던지 애매한 갈치라도 이것도 배에 부딪혀서 죽을 수 있어요. 가만히 있는데 배가 자기 목 타고 지나가니까 상어가 죽을 수 있다 말이죠. 

예수님 태어날 때, 베들레헴 애들 어떻게 됐어요? 죽었잖아요. 동방박사가 어떻게 됐습니까? 목숨이 위태로울 뻔 했잖아요. 정말 천사가 아니었으면 그 사람들 조선총잡이한테 다 총 맞아 죽었어요. 자객한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게 위험해요. 예수님과 붙어있으면 위험해요. 외국에 만약에 여행갈 때, 노르웨이 같은데 보면, 가본적은 없습니다만,  TV에 보면 빙하의 깎인 절벽이 멋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면 보통 사람들은 무서워서 절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건데, 꼭 호기심 많은 애들은 빙하 절벽 끝에 와가지고 무슨 담력 실험하는 것도 아니고 앉아있던지 물구나무 서는 사람도 있어요.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위태로운 요 경계선에 딱 서게 해요. 경계선에. 그리스도의 영께서 항상 그렇게 해가지고 일반사람은 그냥 눈만 뜨면 사는 것(실은 지옥 가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지옥가기! 매일 지옥가기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눈만 뜨면 매일 지옥가기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죄만 짓는. 탐내지 마라, 이런 말씀에 위반했다는 자체가 그건 지옥 가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거예요. 

마음속으로 미워해도 살인죄다, 이 말은 지옥가도 할 말이 없다는 거예요. 니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처음부터 우리는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가락강의에서 그랬잖아요. 처음부터 우리는 어두움이었다. 그러면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경계선에 놓아두게 되면 이 절벽 경계선에서 이쪽에서 우리보기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죽음의 세계로 갔잖아요. 십자가에 죽었으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때, 죽인 그 인간들은 본인은 살았다고 여기고 죽임을 당한 피를 흘린 주님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죽음의 세계로 밀어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 예수님의 죽음의 세계가 주님이 부활함으로서 죽음의 세계의 자체가 부활된 거예요. 예수님 계신 그곳이 천국이에요. 예수님 살았니? 죽었니? 그건 의미 없고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에요. 

하늘나라는 나와 함께 있는 거예요.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넘김으로서 죽음 그 세계가 천국세계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천국에 못가지요.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오히려 천국 가자! 하면 겁을 낸다니까요. 성경공부 한 번 참석하자, 하면 겁을 내잖아요. 겁을 낸다니까요. 

설교시간은 우리 다 같이 죽읍시다! 하는 시간이에요. 왜? “죽어도 좋을 사람만 남으시고 나머지는 다 가세요.” 하는 그런 시간이 설교시간이에요. 주님께서 죽음으로 가서 천국으로 왔다는 것은 처음부터 주님께서 이쪽에서(절벽에서)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절벽에서 우쭐 우쭐 하지요. 그럼 주님은 “뛰어내려라, 내가 받아줄게. 뛰어내려!” 내가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은 뭐냐, 사도바울이 뛰어내린 거예요. 사실은 사도바울이 뛰어내린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와서 사도바울이 야호! 하고 뛰어내릴 때, 사도바울이 그냥 뛰어내리면 안돼요. 코만 아파요. 납작 다 나갑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캡슐이 있어요. 캡슐이 뭐냐 하면, 성령입니다. 성령 캡슐 안에 사도바울이 왜 안 죽느냐 하면, 성령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영이 왔거든요. 십자가의 영이 뭐냐 하면, 죽은데서 사흘 만에 부활한 아우라의 능력이 휘말려있는 거예요. 공처럼. 

공처럼 휘말려 있으면요, 사도바울이 요리 있는데 요 힘이 뭐냐 하면, 죽어도 살고가 들어가요. 요한복음11장에25절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게 작용하는 거예요. 작용하는데 사람들은 뭐냐 하면, 나사로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 그런데 나흘 만에 살려냈잖아요. 

죽었다고 봤던 그 사람들이 실은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죽은 세상에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아침에 눈만 뜨면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하는 요 세계가 뭐냐, 갇힌 세계에요. 저주에 포위된 세계. 너희는 포위됐다. 완전히 포위된 세계, 저주의 세계에 있어요. 죄 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면 이리 되는 겁니다. 절벽을 그렸는데 이렇게 해도 되고, 동그라미가 두 개 있는데, 큰 비누방울에서 또 따로 비누방울 격리시켰다고 보면 됩니다. 통! 하고 튀어나온 거예요. 늘어지면서, 늘어지면서 톡! 하고 떨어지면 되는 겁니다.  비누방울 안을 예수 안이라고 하고, 밖을 세상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 죽음에 오셔서 이 땅에 잠시 살다가 인간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본성만 발취하면서 도로 죽음의 세계로 갔는데 사흘 만에 부활시켜 놔서 요게 부활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 이 사이는 건널 수가 없지요. 거지 나사로 옆집 부자 있잖아요. 부자는 어느 세계밖에 몰랐습니까?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상 이 세계밖에 모른 거예요. 이 세계에서 부자다! 라고 한 거예요. 

예를 들면, 전목사님 바로 뒤에 지옥불이라고 생각하고 죄송합니다. 잠시만 그렇게 상상만 하겠습니다. 지옥불이라 생각하고 전목사님이 점점 더 지옥불로 후진하는 거예요. 후진하면서 큰소리치는 거예요. “오늘 나는 한 건수 했어! 나는 50억짜리 부자 되었어!” 큰소리치면서 점점 더 뒷걸음질 치면서 어디로 갑니까? 지옥불로 가거든요. 그런데 내가 보니까 보이더란 말이죠. 보일 때, 그 큰소리가 부럽습니까? “아이고, 좋겠다.” 이리 됩니까? “아이고, 저거 우쨀꼬! 아이고, 저거 우쨀꼬!” 손바닥 치면서 아이구~ 우쨀꼬?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지만, 서초수사과장이 사표내고 광주지역에 공천 받아가지고 국회의원 나올 때, 다른 사람은 “야, 수사반장 해봐야 한 달에 500만원, 600만원 버는데 국회의원 되면 1억 5천만원 받는데, 되기만 되면 떼돈 벌겠다. 부러워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쨀꼬? 우쨀꼬? 그게 이 땅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건희가 무슨 의미 있어요? 바로 지옥불인데. 

그래서 집사님이 롯데에서 일하실 때, 늘 우짜꼬? 우짜꼬? 그런 마음을 품고 일하세요. “이거 얼마입니까?” “5만원이에요.” “3만원에 주세요.” “가져가세요.” 3만원 줘봐야 지옥 가는 거 마찬가지인데. 에라, 기분이다. 주인한테는 손해 보겠지만. 그런 마음이 사도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모든 세상에 내가 복음에 빚진 자라, 하는 것은 그런 뜻이에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전체 원형을 아는 겁니다. 전체를 다보는 마음을 말합니다. 전체를 다보고 큰 전체 속에서 내 위치를 발견하는 겁니다. 내가 뭘 얻어먹고 어떻게 이 땅에서 사느냐는 그건 신앙도 아니에요. 마귀에게 그렇게 길들여진 겁니다. 마귀의 자식들이 하는 거예요. 

인도에 갔던 교회 다니는 청년들이 절에서 찬송가를 불렀다는 거예요. 아주 싸가지 없는 짓을 했어요. 왜냐 하면, 절은 누구 돈으로 만든 거예요? 불교에서 만들었잖아요. 왜 남의 가게에 들어가서 횡포를 부립니까? 지 가게 지 교회당에서 하지 왜 남의 가게에 가서 그런 횡포를 부렸어요? 땅 밟기 하는 겁니까? 밟으면 여리고성처럼 지 거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건 정복욕이고 탐욕입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그것 보고 거기에 있는 어떤 스님이 말 안하는 기도를 그만뒀다는 거예요. 이건 또 뭐예요? 그거 보고 화가 나가지고 묵은 수행을 그만뒀다는 거예요. 한국 중이. 

여러분, 불교는 오락이에요. 그걸 오락 아닌 척하는 것이 더 나빠. 교회 다니는 애들이나 싸가지 없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철없어요. 그거 했다고 자기가 하던 수행도 금지했다는 거예요. 같은 싸가지를 부리면서 지는 무슨 고상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지 묵은 기도하면 주님 재림하시는 겁니까? 그리 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히브리서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현실은요, 주님 손에서 현재 계속해서 변천하고 계속 키워지는 겁니다. 마치 콩에다가 물을 부우면 뭐가 되지요? 콩나물 되지요. 이 세상은요, 주님 손에 의해서 자라지 우리 인간 손에서 묵은 수행한다고 변화되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 주님의 변화되는 그 원리 원칙에 우리가 그걸 간파해야 돼요. 그게 언약입니다. 

그 언약을 위해서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의 모형이고 그림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 경계선을 늘 체험하도록 조치를 당해 보게 되면, 이 경계선에서 다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이 제대로 보이고 내가 평소에 봤던, 내 살기 중심으로 봤던 것이 정녕 다른 양식으로 전체가 파악이 되는 겁니다. 

누가 만약에 이혼했다면, “이혼했습니다. 어떻게 살까요?” 하는데 정말 이런 걸 안다면 “이혼했어요? 어쩌라고? 무슨 큰일 났어? 이혼이 무슨 큰일인가요? 큰일 난 거예요?” 이혼 어쩌고 하는 것도 다 사는 것의 문제거든요. 살고자 하는 것이지. 제사장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히브리서8장 시작을 서론을 길게 했는데요.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제사장을 구약 때부터 모형과 그림자 쪽의 제사장을, 신약 때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어떻게 키워내는가를 보자는 겁니다. 보시는데, 왜 서론을 길게 하는가, 우리 평소의 관심사가 사는 것에 관심 두다보니까 이것은 저뿐만 아니고 성령께서 사는 것에 두는 이 사람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제사장을 돌리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경계선을 다녀가야될 절벽이 있는 곳으로 몰아세울 수밖에 없는 그 사정을 제가 미리 서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히브리서7장27절 봅시다. 끝에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예수님이 뭘 드렸다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을 드렸다, 되어있지요. 

보세요. 구약의 제사장들은 자기 몸을 드리는 겁니까? 제물을 드리는 겁니까? 제물을 드리는 일을 하면서 그들은 뭐다? 자기는 제사장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신약에 오신 제사장도 구약의 제사장처럼 뭔가 줄게 있어야 된다 말이죠. 하나님께. 줄게 있는데 뭘 줍니까? 자기 몸을 주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모형과 그림자가 되지요? 자기 빼놓고 자기 바깥에 있는 것 주는 거하고, 자기 몸 자체를 주는 거하고 이게 어떻게 모형과 그림자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만 하고 10분간 쉽시다. 어떤 사람이 제물을 드립니다. 어떤 제사장이.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립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드릴 때, 제물이 죽고 제사장은 살지요. 이 말은 뭐냐, 죽은 제물 덕분으로 살기는 누가 살았다? 제사장이 살았다, 이리 되는 겁니다. 문제는 이것이 모형이라는 거예요. 모형이라는 겁니다. 오늘 강의 중 제일 중요한 겁니다. 바짝 들어야 됩니다. 

한 번 보세요. 제사장의 모형이 예수님이 아니고 제사장이 제물 드리는 것, 이 전체가 모형이란 뜻이에요. 이 전체가. 예수님은 이 둘의 내용을 포함한 행위를 하시는 점에서 원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제사장 안의 원형이 아니고 ‘제사장 제물 드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옛날 제사장은 제물을 바치고 자기는 살았다, 이 말 이거든요. 죄 값을 드리고 죄 값의 덕분으로 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전체의 원형이라면, 본인자체가 제물이 되어버린 거예요. 본인 자체가 제물이 된다면, 이 제물 덕분에 산사람이 새로 발생되어야 비로소 이 자체의 원형으로서 완성됐다 할 수 있거든요. 예수님의 제물로 산 사람이 누구죠? 첫 째는 누굽니까? 예수님 본인이잖아요.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죠. 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붙어있기 위해서 될 사람이 살지요. 그러면 그들이 사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 살았다는 증거를 위함입니까? 예수님이 제사장이다. 예수님이 진정 원형이고,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가 예수님뿐이었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증거 해야 될 사람이 그리스도 덕분에 산 사람이죠. 

그러면 이 살아있는 성도는 뭐냐 하면, 세상사는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겠지요. 성령께서 사는 것도 관심두지만, 사는 것이 아니다. X다. 아니다. 진짜 내가 사는 것은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콩에다가 물을 줘서 콩나물을 키우듯이 제사장을 제사장 됨에,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동원되었고 참여되었고, 증인으로서 뽑혔다는 것을 증거 할 때, 그 사람이 바로 성도가 된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175.♡.147.179)14-07-30 14:18 
안양20140711b-히8장1절(모형) - 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 강의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모형과 그림자다. 그리고 이 세상이 움직이는 것은, 이렇게 다듬는 것은 예수님이 다듬지요. 석수가 맨 돌을 가지고 작품을 할 때, 깎아내잖아요. 그 깎아내시는 분, 예수님이 깎아내시고 인간들은 그냥 깎이지요. 깎아낼 때, 깎아내는 기준은 뭐냐, 하나님의 언약이 되겠지요. 언약의 중심은 사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이다. 제사장 중심으로 그렇게 했다 이야기했습니다. 

자, 두 번째 시간에는 왜 하필이면 제사장일까요? 아까 주님의 관심사가 영생이라고 했지요. 우리는 그냥 사는 것입니다. 영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거예요. 외부에서. 영생이라고 할 때, 창세기 3장23절에 보면, 사람들은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그 기회조차도 차갑게 배척당하고 저주스러운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요. 

어제 수요설교 할 때, 이 땅 자체가 저주스럽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그러면 왜 제사장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것 이것이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음의 세계거든요. 그러면 영생은 문자 그대로 생명의 세계고. 그렇다면 제사장은 뭐냐 하면, 죽음의 세계에 있는 자를 영생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장치, 이게 제사제도입니다. 바꿔지는 것. 

그러면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목사님, 바꾸는데 왜 하필 제사제도입니까?” 물으면 저는 이렇게 반대로 묻고 싶어요. “그러면 다른 방식으로 죽은 자를 사는 방식으로 한 번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어 보세요.” 다른 방식으로. 어떤 게 있을까요? 

자, 제사제도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이라면, 그게 마음에 영 들지 않는다면, 그러면 인간들이 아이디어를 한 번 끄집어내 보세요. 죽은 내가 사는 방식, 어떤 게 있을까요? 아마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그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부활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리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것은 죽은 당사자가 다시 사는 게 되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지금 기독교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복음이 아닌 거예요. 

사람이 죽은 자인데, 다시 부활되어서 살았다, 하면 지금 관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죽었다가 요 내가 다시 사는 게 돼요. 그러면 내가 냉동됐다가 풀린 거예요. 명태 냉동했는데 나중에 풀어보니까 오징어 되던가요? 그럴 수 있던가요? 없지요. 명태를 냉동시키면 동태가 되고 동태로 국을 끓이면 동태국이 되고 명태국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천국을 만들지 않았어요. 천국은 아들의 나라거든요. 우리 인간의 나라가 아니에요. 아들의 나라에요. 

그래서 이 인간을 뭐로 바꾸느냐,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바꿔지지 아니하면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 자격으로 못 들어가요. 내 이름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내 이름을 살려주는 곳이 아니라니까요. 나라는 것을 살려주는 곳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것에 합류될 수가 없습니다. 

그 임금님 혼인잔치에 예를 들면서 임금님이 누굴 초청했느냐 하면, 마을사람들을 초청했잖아요. 사람들이 참석을 한 명도 안했어요. 참석 안한 이유가 뭐냐 하면, 소사고 밭 갈고 장사한다는 거예요. 심지어 자기 결혼한다고 참석 못했다 말이죠. 자기 결혼식 한다고 참석 못한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당연한데 임금님이 노한다는 게 임금님이 더 이상하잖아요. “니가 니 결혼식 포기하고 내 아들 결혼식에 와야지.” 이게 임금님 주장이고, 참석 못한 사람은 “아이고, 내 장가 놔두고 왜 남의 장가에 갑니까?” 이 주장이고, 그래서 임금님이 참석 안하니까 길에서 노는 사람들 불러다가 했잖아요. 참석시켰잖아요. 그 사람들은 반드시 뭘 입어야 돼요? 예복을 입어야 돼요. 

예복을 입지 아니하면, 어두운데 쫓겨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 했다 말이죠. 이를 갈며 어두운데 쫓겨나서 그러면 놀던 대로 가만히 놔두지 괜히 놀던 사람 불러가지고 예복 안 입었다고 다구쳐 버리면 그 노는 노숙자 억울하잖아요. 그냥 길가에서 장기 두고 있는데 잔치 집에 오라해서 갔는데, 갔으면 도로 예복 안 입었다고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도로 문을 잠그면 되는데, 예복 안 입은 것 때문에 교도소 들어간 셈이 된 거예요. 

이런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어떻게 구원받느냐에 관심 없어요. 제사제도 자체가 얼마나 대단하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인간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혼인잔치를 벌여놓고 관심사는 혼인잔치에 왔던 사람들의 예복이 얼마나 대단한 효과가 있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예복과 아들의 혼인잔치를 벌인 임금님의 그 취지와 이게 부합이 되고 합치가 되는 거예요. 예복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 없거든요. 결국은 누구 혼인잔치에요? 임금님의 자기 아들 혼인잔치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사가 우리한테 있습니까? 아드님한테 있습니까? 아드님한테 있는 거예요. 8장1절 끝에 봅시다.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되어있지요. 하나님의 관심사는요, 인간이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박수를 치고 있는 거예요. 

마귀는 사탄은 항상 뭘 해야 된다는 거예요. 다음 설교에도 사탄 나오겠지만, 로마서 전체에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우리가 뭘 하면 우리를 구원하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뭘 하면 할 때, 관심사도 우리고요, 구원하는 것도 누구 관심사에요? 내가 구원받는 거잖아요. 이것은 애초에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있지 않은 생각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종교지, 현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실제 뜻하고는 전혀 다른 동네의 이야기에요. 다른 동네. 참 기독교가 위험한 거예요. 기독교가 우리를 유혹하고 가서는 안 될 곳이에요. 교회라는 게. 관심사를 자꾸 우리 인간에게 두는 거예요. 인간에게. 인간에게 관심 두든지 아니면 교회에 관심 두든지. 우리 자신에게 관심 두든지. 

그런데 여기 2절 끝에 보면,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집사님 집 표어에 보면, 다 이루었다. 끝!  요것도 한 번 써 붙이면 어때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를 큰 벽에 써 붙였을 때, 어떤 낯선 사람이 이 방에 들어와 가지고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를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공집사님이 이한례집사님 냉장고를 탁 열었는데, 열자마자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가 들어있다면, 이 냉장고 안에 있는 모든 음식은 뭐가 아니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예요. 믿음 댓길(좋다)! 믿음 최고! 

이걸 믿는 사람 같으면 “오! 형제여, 자매여” 이렇게 나오는데 만약에 예수님의 성령을 못 받아서 믿는 사람 같으면 “이런 황당무계!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백이면 다 그럴 거예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면 이 냉장고 누가 채웠는데? 누가 썼는데?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니? 그들은 못 믿겠다! 그러니 믿음 없는 거죠. 주께서 믿으라고 하는 게 우리로서는 도저히 못 믿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는 걸 가지고 믿으라고 해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도저히 못 믿겠다고 하는 걸 가지고 믿으라고 해요. 

열 처녀가 다 잠자고 있었습니다.  기름 준비한 다섯 처녀만 데려가고 그 나머지는 다섯 처녀는 지옥 보냈습니다. 그것에 대한 불신자 반응은 못 믿겠다는 거예요. 두 사람이 쟁기를 가지고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그냥 남겨둘 때, 제일 기본적인 반응은 하나밖에 없어요. 못 믿겠다는 거예요.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홍해가 갈라져서 벽이 되었다. 못 믿겠다는 겁니다. 그냥 신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갈대바다에 찰랑 찰랑 요거 건너가는 게 훨씬 납득이 된다는 거예요. 둘이 벽이 되어가지고 있는 걸 성경에 나온 내용이지만, 못 믿겠다는 겁니다. 홍해 바다를 못 믿겠다, 이상으로 못 믿을 일이,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예수 믿은 것은 내가 한 짓이 아닙니다. 아! 이걸 어떻게 설명이 됩니까? 무슨 언어를 동원해야 설명이 돼요? 원어 분석하면 이게 설명됩니까? 이게. 믿거나, 말거나. 아! 이거 남자한테 참 좋은 건데. 말로 할 수가 없고. 진짜 몸에 좋은 긴데 말로 할 수 없고.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따라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꾸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사람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한 시간짜리라면 5분 시작했다, 10분 시작했다, 15분, 20분될 때, 어떤 순간에도 반드시 누가 들어가는가 하면, 내가 지금 일을 하고 있다가 반드시 삽입되어 들어가게 되어있어요. 내가 반드시. 

도둑질도요, 하면서도 항상 벌벌 떠는 이유가 본인이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병원에서 수면내시경해보세요. 분명히 마취주사 맞았다. 뭔가 간호사가 보인다. 간호사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벌써 이야기하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까 벌써 끝났어요. 벌써 30분 지났다 말이죠. 그럼 그 30분은 잃어버린 시간이죠. 로스트타임. 그동안 내가 뭘 했지?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그 시간에 뭐했지요?” “내가 한 것이 아니오.” 한 게 돼요. 본인이 의아해 해요. “내가 한 짓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잠재웠어?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할 때, “에이, 거짓말 하지 마!” “진짜 야, 내가 한 것이 아니야.”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성령 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이렇게 내가 성도된 것은 주님의 신부가 된 것은 주님의 여자가 된 것은 이건 내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주 설교 때 했잖아요. 

다이어트 방법 중에 하나가 후식부터 먹고 난 뒤에 반찬 먹고, 밥 먹는다 했지요. 이미 우리는 구원부터 챙겨놓고 그 다음부터 성경공부, 기도하면서 뭐냐, 이런 것도 성경공부도 기도도 내가 한 게 아닙니다. 라고 그걸 반복적으로 고백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이게 성도에요. 그럴 때, 자기 앞뒤로 완전히 ‘내가 한 것이 아니오.’ 라는 게 온 몸 천지에 글자로 다 새겨지는 그런 삶을 바깥에 표출하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오. 

내가 남자 돼가지고 여자 된 것도 내 뜻이 아니고 요번에 머리 잘 나온 것도 내 뜻이 아닙니다. 모든 게. 문신 밀어놓고 눈썹 밀고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누가 믿겠어요? “당신이 미안해서 밀어놓고” “내가 한 게 아닙니다.”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입니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요 오늘 강의에서 두 번째 시간, 두 번째로 중요한 대목에 들어섰습니다. 이 이야기하려고 뜸 들였습니다. 자, 첫 째 시간에 이야기한 게 캡슐 2개를 그렸습니다. 한 쪽은 큰 것은 세상 안이라고 했고 작은 것은 주 안이라고 했지요.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주 안에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도 주 안에서. 내가 믿는 신랑하고 만나서 결혼한 것도 주 안에서 결혼한 겁니다. 자식이 복음 안에서 나에게 효도하는 것도 에베소서6장 말씀처럼 니가 주 안에서 공경하라. 주 안에서. 이 캡슐 안에서 다 흡수하고 있습니다. 12제자도 예수님 계실 때는 이 캡슐 안에 있지 않았어요. 그들은 같이 동행했지만, 주 안에 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3번씩이나 부인했지요. 주 안에는 성령 안에 들어와요. 성령은 비누방울이에요. 비누방울 안에 들어있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서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요 세상에서 이쪽으로 건너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건널 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건너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참, 안타까워요. 어떡하면 좋지? 건너갈 수 없어요. 아무리 자식 사랑하고 남편사랑해도 요 세상에서 펄쩍 뛸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주 안에 있는 자가 발휘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주 안에 있는 자는 주님이 살아있지 본인이 살아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가 주님 앞에 압력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 “주님, 내 남편인데 살려주세요.” 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안돼요. 그럴 것 같으면 중보기도해서 주님한테 전부 다 백 써서 건져내지요. 그렇게 되지를 않아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신약에서 기도할 때는 주 안에서 기도해야 되거든요. 주 안에서 기도하게 되면 이게 우리의 뜻과 주님의 뜻이 같이 대결상태가 돼요. 로마서8장에 보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이 기도하는 거예요. 

이 말은 성도는 주님께서 하시는 기도소리가 들려야 되는 거예요. 기도소리가 들리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이 하신 기도와 들리는 거예요. 그리고 들리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 기도와 주님의 기도가 서로 서로 주고받고 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하시는 것이 푹푹 한숨 쉬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아이고, 인간아! 인간아! 니기 그 기도하는 거 뭘 노리고 하는 짓거리인지 알고 있다. 아이고, 인간아!” 우리는 상투적인 언어들이기 때문에 상투적으로 한다고요. 어린아이부터 당회장까지 축복해주시옵소서. 어쩌고 저쩌고 나오면, 성령께서 안에서 “인간아, 그 기도해서 뭘 노리는데? 노리는 거 있잖아. 노리는 거.” “차 바꿔주시고.” 진작 그런 이야기해야지. 당회장부터 어린아이까지 믿음 주시고, 되는 소리를 해야지. 결국 니 사는 것. 결국 내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관심 있지 경계선에 관심 없다 말이죠. 이건 나이 50, 60, 70, 80돼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어쩔 수 없어요. 

성령께서 아버지 뜻대로 기도해 주셔서 매일 우리 뜻만 찾고 있는 우리를 질질 끌면서 되려가는 겁니다. 데려가면서 우리는 화들짝 놀라는 것은 어찌 이런 일이? 매일 나만 생각하고 내 욕심만 챙기는 내가 어떻게 해서 이미 주 안에서 이미 구원받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마지막 대목에서 터져 나오면서 기도는 끝나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죽이던지 살리던지 주님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내 딸 죽이던지 살리던지, 내 남편 죽이던지 살리던지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주께서 나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지금이라도 내 딸, 내 자식 마음대로 하실 수 있음을 제가 믿나이다. 다만 주께 영광 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그 일이 하늘에서 이룸과 같이 땅에서 이루어주시옵소서. 결국은 주기도문으로 마치는 거예요. 결국은. 

그동안 내가 잘못 기도한 것은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내가 잘못된 마음가지고 남에게 해 입힌 것에 대해서 또 남이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내가 용서함같이 내가 남한테 한 것이나 주님한테 한 것에 대해서 제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결국 주기도문 안에 기도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오신 것이 결국 주기도문이라는 마태복음6장을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오셨다 말이죠. 

이 세상 안에서 주 안으로 폴짝 뛰거나 건너갈 수 있는 어떤 것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없습니다. 없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모형과 그림자’라고 해요. 모형과 그림자인데, 유식한 말로 ‘상징’이라고 해요. 상징.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여기에 하늘의 달이 떠있는 것이 어떻게 떨어졌지 알 수도 없는데 따로 분리된 이쪽을 볼 때, 그들은 이걸 상징이라고 봐요. 상징하니까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 할 때 많이 배웠지요? 요한계시록 뭐로 푼다? 상징으로 푼다. 그 때 상징, 심볼, 상징이라는 말 어디서 많이 배웠잖아요. 상징은 실체가 아니고 겉모습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실체는 안보이고 껍데기만 보이는 거예요. 껍데기만. 

그런데 주 안에서 보게 되면 이 세상은 뭡니까? 상징이 되는 거예요. 껍데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세상도 우리도 죽었고 세상이 보기에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고 우리가 보기에 세상은 저들은 살았다고 우기는데 내가 보기에는 좀비, 주일날 설교 마지막 대목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염병이 돌아가지고 사람을 집어넣었는데 그 중에 전염될까봐 산채로 집어넣으니까 산 사람들이 뒤가 무겁더란 말이죠. 시체를 헤치고 나와 가지고 걸어 나오니까 그게 드라큐라가 되는 거예요. 드라큐라 소설이 그걸 보고 한 거예요. 얼마나 무섭겠어요? 시커메 가지고. 피는 묻어가지고. 방금 무덤에서 튀어나와가지고 한 둘이 아니고 기어 나와 가지고 죽지도 않았는데 왜 묻었습니까? 엄마 아들인데 배고픈데... 이리 나오면 얼마나 기절하겠어요? 

죽은 존재에요. 제 책 제목에 ‘죽은 세상 산 성도’라는 말이 있어요. 할 수가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죽은 자는 죽어있는 본인이 본인한테 일을 시행해서 죽은 자기를 자기가 살릴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죽은 자가 하는 모든 짓거리는 죽음을 더욱 더 유발시킬 뿐이지 죽은 나를 살게 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제사장도 우리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4절 봅시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결국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은 땅에 있는 사람이다? 아니다? 땅에 계신 분이 아니고 하늘에서 계셨는데 잠시 땅으로 사람이 되신 분이죠. 하늘에서 땅에 계신 분이라면 하늘에 있다는 말인데 외부에서 지상으로 와가지고 기어이 주 안에 있는 자기 백성을 살려냈잖아요. 

그렇다면 기존에 땅에 있는 제사장은 뭡니까? 그들이 어떤 제사를 드려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없다? 살려내지 못한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사람을 살려내지 못한다면 제사장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제사장외에 어떤 인간도 자기를 살릴 수 있다? 없다? 없다. 이 말을 줄여보면, 어떤 인간도 살 수 없다. 어떤 인간도 죽어라. 그냥 살다가 그냥 지옥 가버려라, 이런 뜻이에요. 하늘에서 누가 너를 찾아주지 않거든 그냥 둬져라. 잘 먹고 잘살다가 유황불에 빠져 죽어라. 이 이야기다 말이죠. 이제 아시겠죠? 

그럼 이 지상에서 제사장 폼 내는 것들, 교회나 천주교, 그들은 그 폼이 소용 있습니까? 소용없습니까? 소용없는 거죠. 왜 폼을 재는가? 워낙 믿음이 없어서. 믿음이 없으니까 계속해서 그들은 상징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만든 상징은 땅에 있는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상징을 만들어내요. “아이고, 신부님 거룩한 것을 봐라. 그러니까 하늘나라는 거룩해.” 본인들이 거룩한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그 기대치에 맞추어서 신부들이 거룩한 옷을 걸치고 거룩한 행동을 하고 향을 뿌리면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둘 다 가짜라. 서로가 서로를 가짜를 유발시켜야 돼요. 그나마도 가짜 없이는 너무 배고프니까. 

고객들이 사기꾼을 원하고 있고 사기꾼들은 고객들의 맞춤에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기를 쳐주는 거예요. 진짜 참 장막 되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그분을 예수님을 아예 죽여 버렸지요. 바나바라고 해서 밀란을 일으켰다가 사람을 죽인 인간이 있어요. 죄인. 그 인간은 살려주고 예수님은 죽여 버렸어요. 그 죽은 예수를 우리가 믿는다는 말은 이쪽 인간 쪽을 믿는다? 안 믿는다? 내가 인간을 믿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믿을 걸 믿어야지 인간을 믿어? 같은 좀비끼리. 좀비가 예배당 세우면 구원받습니까? 좀비 중에서 하나는 신부하고 하나는 집사하면 그게 예배당이고 교회고 성당입니까? 특히 여자 좀비들, 하얀 복 입고 2층 베란다에서 찬송하면 그게 찬양일까요? 좀비의 노래일까요? 송 오브 좀비. 

“그럼 목사님,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사람은 못한다니까요. 사람은 못하는데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합니까?”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아, 나도 같은 생각인데. 이러면 될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간단해요. 

사도바울이나 주님이 전도하는 것은요, 아무나 쥐나 개나 오라고 모집하는 게 아니고 택한 백성만 오라고, 성령 받은 사람만 오라고 거기에 관한 말만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세상은 그걸 상징으로 보는 거예요. 상징으로. “아, 저 사람이 또 상징으로 이야기하는구나!” 우리는 상징이 아니고 실제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상징으로 보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아, 저 사람 이순신 같다.” 하면 그건 상징입니까? 진짜 이순신입니까? 이순신 같잖아요. 그런데 성도가 “이번 일은 주님이 하셨어.” 이건 상징이에요? 아니면 뭐예요? 실제라니까요. “주여, 누구십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남들 보기에는 “천둥이 울었나? 하늘에서 무슨 소리 들렸다고? 웃기는데.” “누구 들은 사람 있나? 니는?” “안 들었어.” “혼자 들었네.” “일방적이지.” 혼자 들었지요. “주여, 누구십니까?”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혼자 들었지요. “방금 뭐라고 중얼 중얼 거렸어?” 혼자 이야기라니까요. 

하지만 사도바울은 자기에게는 이것이 주 안에 있는 자만이 공유할 수 있는 실제인 거예요. 남들은 그게 헛소리지요. 헛소리지만, 사도바울은 그걸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나처럼 주 안에 있는 사람을 주께서 만들어났다, 이 말이거든요. 정말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니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건 나도 지어내겠다. 주여, 누구십니까? 니가 대구에 살던 누구지. 이렇게 지어낼 수 있다 말이죠. 지어낼 수 있지만, 사도바울은 분명히 헛소리 맞아요. 이것은 본인만 알지만, 같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이걸 “야, 이게 그동안 수십 년 찾던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었네.” “성령께서 찾아와야만 구원받네.” 라고 동감하는 사람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인들인데, 그 사람들은 하늘의 성령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받는데 아무것도 필요 없는 거예요. 준비물? 갖고 오지 마세요. 크레파스 갖고 오지 마세요. 도화지 갖고 오지 마시고 김밥에다가 말표 사이다 그런 거 가지고 오지 마세요. 계란, 물고구마 삶은 거 가지고 오지 마시고 도시락 필요 없습니다. 김밥, 도시락은 소풍갈 때나 가져가지고 애들 소풍에나 싸주시고 하늘나라 소풍가는데 필요 없습니다. 

노자 돈도 필요 없습니다. 달러는 미국 갈 때 필요 있어도 하늘나라 필요 없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데 뭐가 필요합니까? 헌금? 전도? 왜 필요한데요? 이러니까 내가 욕을 얻어먹는 거예요. 이러니까 계룡산에서 내려왔다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사람이 할 수 없다는 소리를 하니까 욕을 얻어먹는 거예요. 

자, 그 다음에 봅시다. 지금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상징과 모형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상징과 모형, 그림자이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 그림자 속에 들어가는 사람 봤습니까? 못 봤지요. 상징과 그림자 속에, 자기 그림자 속에, 자기가 못 들어갑니다. 이건 SF영화에서나 나올 이야기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그 애나 있을 일이지, 이 지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4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되어있지요. 그 다음 진도 나갑시다. 그 다음에 이거 하나 봅시다. 

무엇을 좇아 했습니까? 율법을 좇아. 그러니까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람들 눈에는 이것이 법을 집행하는 것으로 보이죠. 그게 모형과 그림자로서 일을 해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기들이 받았기 때문에 천상 율법을 그냥 쥐고 그 안에서 구원을 획득하려는 모든 노력을 시도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 있는 족속과 율법 없는 족속으로 나누지요. 월드컵 결승전 누구하고 하지요? 아르헨티나하고 독일하고 하잖아요. 다른 나라들은 다 구경꾼들이잖아요. 둘만 남았지요. 유대인들은 자기가 월드컵 대표 선수에요. 율법이 있느냐, 없느냐, 둘 중에 하나에요. 율법이 있는 자기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그 율법이 소용없다는 날이 오게 될 때에 그 유대인들의 느낌은 반응은 어떻게 끝나겠습니까? 그들은 율법에서 모든 해결점을 율법에서 해결하려고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가는 것도 율법으로 해결한다고 철석같이 율법을 쥐고 있는데 그 율법이 시효가 끝나버렸어요. 건전지 약이 다 됐어요. 율법이 없어져버리면 그럴 경우에 그들은 뭘 품고 뭘 쥐고 있어야 되겠어요? 

옛날에 이런 무서운 영화가 있었어요. 아이고, 내 아이라고 안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보리짚단을 안고 있는 거예요. 전설의 고향. 충남 보령군에서 있었던 일. 아이를 쥐고 있는데 엉뚱한 걸 쥐고 있는 거예요. 썩어빠진 것을 쥐고 있더라 말이죠. 구원될 수도 없는 걸 쥐고 있는 거예요. 십계명을 지켜가지고 천당 가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에게 잠시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셨으니까 알지만,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다 지키면 어떻게 착한 사람처럼 보일까요? 나쁜 사람처럼 보일까요? 성경에 있는 말씀을 지키면.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면 착한 사람일까요? 나쁜 사람일까요? 착한 사람처럼 보이지요. 뭔가 착한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그렇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강제로 사랑하기 할까요? 아니면 양심에 호소해서 사랑하기 할까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이 성경에 여러 곳 나오니까. 사랑하는 것은 좋은 거니까. 미워하는 것보다 좋잖아요.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했잖아요. 좋잖아요. 자, 이제 좋은 걸 하는 겁니다. 강제로 시킬까요? 양심에 호소할까요? 둘 중에 어느 방법하면 좋을까요? 

강제로 시키는 것이 벤덤의 실용주의 철학자에요. 양심에 호소하는 것은 존 스튜어드 밀이라는 영국의 사회주의 학자입니다. 19세기 주장입니다. 국가는 하나님의 법을 이루는 것이 구체화하여 영광 돌리는 것이 합당하다. 국가 위에 신이 있고 신의 법을 우리에게 줬기 때문에 국가는 신의 법을 따를 때, 국가는 영원한 거예요. 영국이여, 여왕이여, 영원하라. 영국 노래 아닙니까? 영국 국가나 독일 국가 보면 찬송가되어 있지요. 따라서 유럽에서의 사회학이나 철학에 있어서 국가는 신의 보호 하에 있어야 된다. 그러면 국가는 신의 법에 따라서 국가가 정의로워야 된다. 정의로우려면 구체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공의로워야 된다. 그러면 사랑하고 공의로우려면 사람들을 그냥 방치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방치하면 안 되니까 국가의 지도체제에 의해서 국민들에게 강제로 서로 사랑함을 하는 게 좋다. 벤덤의 주장이고. 

양심에 호소하는 게 좋다. 라고 하는 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입니다. 강제로 한다는 것은 뭐냐, 법을 계속 만드는 거예요. 1789년 프랑스혁명이후에 법이 열 번이나 바뀌었어요. 헌법이 바뀌었어요. 모든 귀족 계급이 왕이 있을 때는 그 법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왕의 말이 곧 법이 되고 또는 왕족에서 했던 그 관습법이 법이 됐는데, 이제는 민주제도 현대국가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법에 의해서 법아래 인간 없고 법 위에 인간 없고 모든 법의 저촉을 받게 되어있어요. 모든 귀족이든 왕이든 다 법에 의해서 하게 되어있어요. 이게 명예혁명이후에 조항입니다. 법대로 합시다. 왕이라고 니 맘대로 하지 말고 법대로 합시다. 이리 된 거예요. 

법대로 하겠다는 말은 결국 사랑하지 않을 경우에는 매를 대겠다는 거예요. 교도소에 넣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사랑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처벌규정이 있다면, 법에는 반드시 처벌규정이 있어야 돼요. 처벌규정이 없는 그 법은 있으나 마나에요. 아니 학교에서 시험 안치면 공부하겠어요? 애들 시험 안치면 공부합니까? 안합니까? 미쳤다고 공부합니까? 노는 게 인간의 본성인데요. 인간의 본성은 대자연과 함께 즐기는 거예요. 향유하는 거예요. 즐기고 싶은데 돈 떨어지고 양식이 없어서 일하지, 일하면서도 항상 희망은 뭐냐, 요거해서 돈벌어가지고 대만에 놀러가야지. 장강에 놀러가야지. 매일 이 생각하면서 가거든요. 곗돈 부어가지고. 스페인 놀러가야지. 

이것은 항상 목적이 뭐냐, 잘 노는데 목적이 있고 그 다음에 일하는 것은 억지로 참는 거예요. 이것은 뭡니까? 억지로라도 해야 사랑이 나오고 사랑 나오면 신으로부터 보호받아가지고 우리나라 번영한다는 게 벤덤의 주장인 겁니다. 강제로 법을 계속 만들어요. 법을. 

지금 우리나라도 계속 법이 만들잖아요. 유 병언 법 만들잖아요. 만들고 공원에서 담배피우면 안됩니다. 법 만들고 PC방의 10시 넘는 청소년에게 법 계속 만들지요. 양심에 호소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군에 안 가는 것도 나라는 있어야 됩니다. 젊은이들이여, 양심에 호소하니까 가고 싶은 사람 오세요. 훈련 받으세요. 누가 갑니까? 본인이 안 가는 것보다도 부모들이 말려요. 군에 가서 미친 놈 만나가지고 총 맞아 죽으면 누구 손해인데. 자식이 희망인데 자식이 군에 가서 죽어오면 부모가 살 희망이 없는데. 

그런데 밀은 말하기를 이렇게 들어가게 되면 그게 사랑이냐, 이 말입니다. 여러분, 법으로 하는 사랑이 사랑이겠어요? 강제지요. 남편이 채찍 들고 니  나 사랑하라 하면 그건 변태에요. 변태. 이건 변태지요. 박 변태, 최 변태. 사랑 안 해? 이게 뭐예요? 늦게 변태들 있어요. 어떻게 하느냐, 양심에 호소해야 된다. 그래야 여기서 질적으로 완성된 사랑이 나온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둘 다 마귀적입니다. 둘 다 마귀적이에요. 왜? 둘 다 사람이 어떤 예상된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이 모든 예상된 결과를 내가 이야기하면서도 왜 하느냐 하면, 전부 다 결국은 양심에 호소하던, 법에 하던 뭐다? 법이고 앞에 뭐하나 붙이면 뭐가 돼요? 율법이 되는 거예요. 율법을 사람들은 좋아한다? 싫어한다? 아주 좋아하지요. 율법이 있음으로서 “내가 할 수 있습니다.” 하는 여지가 마련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설교하는데 설교에서 목사가 법이 몇 개 나옵니까? 보통 목사들. 수십 개 나올걸요. 성경에 보세요. 사랑하라. 사랑하세요. 서로 사랑하세요. 성경대로 합니다. 만날 하는 소리가 성경대로 합니다. 법대로 하세요. 법대로 해야 복 받고 법대로 안하면 저주받습니다. 이건 뭐예요? 양심에 호소하는 거예요? 강제에요? 둘 다 마찬가지에요. 죄 지었거든 성만찬 참석 못합니다. 이건 완전 강제조항이에요. 

법을 유대인들이 쥐고 있음으로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던 이유를 알겠지요. 예수님이 죽었던 이유는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따라서 주님은 어디가 있느냐, 경계선. 사람이 할 수 있다. 있다. 있다. 하는 동네에서 주께서는 떠나버려야 돼요. 떠난 그 분께서 우리보고 너 오너라, 하게 되면 우리도 주님과 같이 내가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를 그 동네를 떠나서 주께서 하셨습니다. 하는 그 동네로 합류될 때, 그것이 바로 주 안에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율법이 율법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율법이 반드시 폐기하기 위해서 우리의 평생과 더불어서 함께 있어야 될 이유가 있어요. 왜? 율법이 폐기된 이유는 바로 우리 몸이 폐기되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퇴비 만들 때, 칼날가지고 쫙 쪼개잖아요. 그 날카로운 칼날가지고 우리는 머리부터 집어넣고 선반에 같이 들어갑시다. 머리카락부터 쪼갤 때. 

007 영화를 보면, 점점 칼날이 움직일 때 007이 죽는 줄 알았어요. 닥터노한테 걸려서 잡혀가지고 칼날이 가는데 죽는 거예요. 스톱되어서 결국은 살아나지요. 범죄를 물리쳤지만. 007 주인공이 죽으면 안 되지요. 이 세상은 우리를 주님처럼 그렇게 우리를 처분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를 밀어내요. 밀려난 사람들이 십자가 마을 사람 같으면 얼마나 감사한지. 만약 진짜 그렇다면 행함 주장 안하다가 밀려났다면 정말 감사할 일이고 다른 돈 문제나 삐져가지고 밀렸다면 그건 문제 큰 거고. 

“양심을 왜 무시합니까?” 이리 나오면 그건 사탄의 자식이에요. “니 양심이 무슨 양심인데?” “내 양심은 신앙적인 양심이다.” “신앙적인 양심은 쓸데가 있는데.” 신앙적인 양심은 어떤 양심인 줄 알아요? 주님의 사랑이 머무는 양심이에요. 주님의 사랑이 머물렀다 하는 것은 나는 용서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이런 뜻이라는 말이죠. 

율법대로 하는 그 세상에서 예수님은 제사장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에 대한 제사장이 있어야 돼요. 왜? 있어야 그것들이 그리스도 앞에 나타날 때, 그들은 전부 다 죄인이며 그들의 어떤 제사행위도 본인들을 구원할 수 있다? 없다? 할 수 없었다, 를 그리스도 앞당겨서 그림자와 모형으로 그들은 등장했어야 하는 거예요. 율법 따라서. 

따라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고 율법을 반대로 폐기시켜도 될 만한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그런 상항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 율법 폐기를 우리 스스로가 율법 폐기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법 폐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걱정합니다. 법이 없으면 자기 정당화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 법이 있어야 나는 이 법을 지켰습니다. 나는 착합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요것은 지켰습니다. 요런 게 있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지켰다 하는 그게 사실은 내가 신주단지 모시던 그 법은 내 육신과 더불어서 법이 완전히 같이 법이 폐기되는 돼요. 나중에 보니 쓰레기만 안고 있는데. 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법을 끌어안고 있는 우리가 법을 통해서 정당화된 우리가 썩었기 때문에 법은 우리와 더불어서 폐기되어야 되는 거예요. 

율법이 주어진 이유가 뭐냐, 우리 몸이 폐기처분되어야 마땅한 처음부터 불타는 흙이고 재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흙으로 돌아갈 인간이 율법 쥐고 있는 건강한 자태를 보여 봐야 나이 90넘으면 그것도 다 흙으로 지옥 갑니다. 

장례식에 가면 영정사진 있지요. 영정사진은 그 말로가 어떻습니까? 갔다가 버리지요. 이게 말로에요. 앞에 갈 때는 딱 쥐고 제일 어린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쥐고 가고. 우리는 결국 육신은 죽고 남는 것은 영정사진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영정사진은 죽을 때 사진이 아니고 꼭 죽기 전에 수십년 전에 사진, 이뻤을 때, 방금 성장 판이 끝났을 때, 쌍커플 잘 나왔을 때, 제일 잘 나왔을 때. 가장 만족할 때 그거 딱 해가지고. 

이미 과거에 영정사진의 그 인물은 과거에 사라졌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에요. 주님과 함께 죽으면 그 자체가 바로 이 경계선에서 뛰어내려라! 성령 안에서 이미 주 안에서 이미 포함이 된 사람이에요. 그럴 때, 우리의 고백은 “제가 한 게 아닙니데이” “구원 받은 거 제가 한 게 아닙니데이” “주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성령이 오셔서 한 겁니다.” 하는 고백을 할 때, 성령 세례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 폐기와 더불어서 상징도 사라지고 그림자도 사라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다 실체를 드러나게 하셨사오니 우리는 이 세상을 전체를 아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