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0711a-히8장1절(모형) - 이 근호 목사
전체내용이 제사장에 관한 이야기가 있지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지구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지구를 만들었으면 이 지구 만든 것에 대해서 단어 하나로 딱 만들어서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단어 생각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뉴욕’할 수도 있고요. 어떤 사람은 ‘사람’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땅덩어리, 땅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특히 성경 히브리서는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 세상에서 딱 한 단어를 끄집어내라면 ‘제사장’ 참 특이하지요.
아까 뉴욕 같으면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 제일 번영한 도시잖아요. 그리고 땅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 이런 단어를 끄집어내면 이것은 관심사가 주로 어디에 있지요?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이 있지요. 그럼 한 번 적어보면,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단어 하나 이렇게 요약해서 보라고 한다면 사는 것에 주로 관심이 있지요. 아침에 딱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 단어, 오늘 할 일이 뭐지? 그 할 일이 뭐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오늘 CCTV예상도 못했잖아요. 그 CCTV설치하는 거, 그거 뭐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요. 그런데 CCTV하고 제사장하고 관련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아니다 말이죠. 혹시 또 집사님 같으면 아침에 눈을 떠보면 롯데? 롯데가 생각날 수가 있는데 그 롯데라는 생각이 결국 뭐와 관련되어 있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말이죠. 고물? 전부 다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그리 보지 말라는 말이죠. 뭐로 보라? 제사장으로 보라는 거예요. 아~ 평소에 이 세상 살아가는 거하고 우리 곁에 말씀 주신 성경책 주제가 핀트가 어긋나도 보통 어긋난 게 아닙니다. 날씨가 덥다할 때 아침에 눈을 뜨면 반바지? 이렇게. 나중에 저녁때는 콩국수? 이런 식으로.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주님께서는 제사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는 것은 나중에 뭐로 끝나느냐 하면, 점선으로 끝나요. 살자, 살자, 살자, 자, 자, 자....죽잖아요. 죽어버리지요. 그런데 제사장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제사장은 영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지구는 영생을 만들기 위해서 이 지구와 사람을 그 위에 만들어 놓으셨다. 이렇게 보라고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언급하는 겁니다. 영생을 위해서.
우리는 영생보다는 내 사는 것 앞에 붙으면, 내가를 집어넣으면 ‘내가 사는 것’ 내가 사는 것에 사람들은 관심사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핀트가 너무 벌어졌지요. 너무 벌어진 것을 일치시키는 작업은 누가 하십니까? 성령님이 하시지요. 여러분이 아시는 것 정리해 봅시다.
인간의 생각하고 하나님의 생각이 너무 멀리 가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치는 것은 성령님이 하신다고 했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때에,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근거, 그러한 바탕은 누구에 의해서 제공됩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제공된 거예요. 무슨 말인가 하면, 성령께서 이렇게 일치할 때, 아무나 일치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자에 한해서만 요게 일치되게 해주시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항상 누구한테 물어보는가 하면, 본인이 하시는 게 아니고 예수님한테 물어보고 하시는 거예요. 그걸 그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가 이미 오셔서 일구어낸 그 모든 업적, 그 모든 성과를 자기 택한 백성에게만 연결시켜주는 그것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방금 제가 ‘연결’이라고 말했지요. 로마서6장에서는 그걸 연결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연합’이라고 하는 겁니다.
연합과 연결을 보니까 어느 쪽이 성경적으로 더 맞게 생각이 듭니까? 연합이에요. 연결이라 하는 것은 각자 독자적인 게 살아있으면서 그냥 가운데 이어지기만 하면 연결이 되지요. 그런데 연합은 뭐냐 하면, 딱 갔다 붙이는 거예요. 지난 주 설교에서 교회에 대해서 로마서16장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계획은 결국은 예수님의 자기의 여자를 만드는 것이다. 신부 만드는 이야기했지요.
신랑과 신부는 그냥 연결이 아닙니다. 연합되는 거죠. 여자의 모든 것은 남편이 책임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결혼을 할 때, 남자들은 결혼하면서 오해가 뭐냐 하면, 자기의 빨래 같은 거 밥하는 거 귀찮으니까 아내가 대신 해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완전히 남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은 것에 대해서 결혼의 의미를 둡니다. 그걸 여자들은 사랑이라고 해요. 그래서 남자는 어릴 때는 엄마의 말을 듣고 결혼하면 아내의 말을 들어요. 늙으면 자식 말 듣고. 특히 딸의 말을 들어야 돼요. 왜냐 하면 마지막까지 봉양하는 것은 며느리가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딸이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죠. 목사님도 딸 있지요? 제일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 설교할 때 제가 그랬잖아요. 아내는 모든 것을 희생한다고 했지요. 남자는 아내를 이용만 하려고 하지요. 그 설교에서 연합이라는 게, 참 이상하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냥 구원하면 되는데 그냥 구원하지 않고 자기 여자로 만들어서 구원해요. 자기 신부로, 자기 색시로 만들어서 구원합니다. 하나님의 색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색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혼인잔치가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혼인잔치의 주체 자는 하나님이고 신랑은 예수님이고 신부는 누가 있어요? 바로 신부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시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서 놀라운 것이 하나님은 의외로 너무 인간적이에요. 사실은 그게 나옵니다만, 5절에 봅시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형과 그림자라 했지요. 내가 방금 하나님은 인간적이라 했는데, 사실은 그것은 약간의 어패가 있고요. 이렇게 보면 돼요. 이 세상의 인간의 모든 관계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사이에 모형과 그림자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남자, 여자로 태어났다. 그것도 모형과 그림자지요. 남자, 여자란 하나님과 인간의 혼인잔치 천국을 이루는 그런 모형으로서 이 땅에서 혼인제도가 있다, 이리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 것을 베낀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진도 나가기 전에 중요한 거 이것부터 정리하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쉽게 할게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어떻게 알지요? 상당히 난감한 질문이고 질문 자체가 굉장히 포괄적이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제가 여러분께 묻는 취지는 우리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을 어떻게 구분해 내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구분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럴 때, 그 방법을 제가 말씀드릴게요. 일단 창조된 것은 하나님이 창조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창조했으니까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너무 무책임한 답변이에요. 왜냐 하면, 불신자도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아니지요. 불신자, 하나님의 자녀 아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해서 자녀가 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자녀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 자녀가 돼요. 마귀 자식이 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요구했던 답변은 뭐냐 하면, 하나님만 등장하면 안 되고 여기에 누가 등장해야 되느냐, 예수님이 겸하여 등장해야 되는 겁니다.
등장하게 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을 우리에게서 그걸 발취해 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어요. 하나님이 하셨다. 이러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걸 가지고 흔히 신학에서는 그걸 주권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주권사상은 모든 종교에 다 있어요. 이슬람교도 있고, 불교, 흰두교, 모든 종교 다 있거든요. 그것은 전혀 하나님께 제대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누가 만들었겠어? 신이 만들었겠지.” 이건 신앙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신앙이 되려면 누가 있어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기다가 넣어야 되는데. 어떤 일이 있다면, 여기다가 아버지 집어넣고 예수님 집어넣는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빙수 갈아 넣고 이쪽에는 옛날에는 빨간 물감 팍팍! 파란 물감 팍팍! 그 다음에 노란 물감 팍팍! 팥 한 숟가락 해가지고 미숫가루 넣고 그게 팥빙수였어요. 어릴 때. 그 물감이 상당히 별로 안 좋은 물감인데 옛날에는 얼마나 물감이 예쁜지. 여기 어떤 세상에다가 아버지 팍팍 치고 아들 팍팍 친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에요.
정답은 뭐냐,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요 관련성을 우선시하고 요 관련성에 따라서 이 지상의 모든 것은 모형이다, 그림자다,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를 크게 생각해서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을 ‘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언약.
아, 그럼 그게 언약이라면, 노아언약도 언약이고, 모세언약도 언약이고, 다윗언약도 언약인데 왜 이걸 언약이라고 하느냐, 모세언약, 다윗언약 이것은 장차 오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사이에 언약을 면밀히 보여주는 모형과 그림자에 해당되기에 그렇습니다.
보통 설계사무소에서 모형과 그림자는 뭐로 만듭니까? 나뭇가지나 이런 것으로 만들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모형과 그림자는 직접 사람을 가지고 만들어요. 사람을 가지고. 히브리서3장5절에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모세는 종이고 모세가 종일 때, 사람들의 눈에는 종만 보이고 주인인 아들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종이 죽고 아들이 그 현장에 들어납니다. 모세가 했던 그 일을 가지고 아들이 하는 거예요. 이게 요번 수련회에 중심 모티브가 되는 겁니다. 모세가 했던 일이 모세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예수님 일이에요. 제목도 출애굽속의 그리스도에요.
사실은 출애굽기에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누가 있어요? 모세가 있어요. 그런데 모세는 지팡이 들고 있었잖아요. 모세가 지팡이 들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바로 지팡이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 아니고 지팡이와 모세와의 관계, 연합된 관계 그것이 바로 장차 오실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 주님이 일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 모세가 했던 일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부 따로 일이 없어요. 이 세상이야 뭐 신부가 머리하면 신랑은 집에서 TV보고 있지요. 따라오질 않잖아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신부가 파마해도 주님이 파마한 거예요. 내가 운동하면 주님이 운동한 게 돼요. 신부는 항상 신랑과 함께 가요. 함께 있어요.
신랑과 더불어 일하지 않는 신부는 없습니다. 신랑 따로 신부 따로 하는 그런 부부관계는 없거든요. 그러니 모세보다 더 확실하지요. 모세는 종이지만, 우리는 신부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더 착실하다는 뜻이에요? 그만큼 우리는 주님에 대하여 잘 섬긴다는 뜻이에요? 그런 뜻입니까? 아니지요. 그만큼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일방적으로 질질 끌려가야 될 무 대포, 아무것도 모르는 치매환자 같은 존재다 이 말이에요. 요양병원에 가보면 치매환자에 대해서 간호사들이 어떤 것에 묻고 의논하고 그런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저 잠만 자면 주사 놓던지 약 먹여 놓으면 정신 놓고 완전히 개처럼 잘뿐이에요.
그런데 그 치매환자의 약은 간호사가 준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로 우리가 신약시대 때 우리가 엉망이라 하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강제로 주사 놓고 약 먹여 가지고 강제로 그리스도의 일을 하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력으로 신랑 품에서 내뺄 수가 없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행복해요. 우리는 정말 다행스러워요.
모세 같으면 우리는 또 지팡이 치고 난리고 이럴 거예요. 모세 같으면. 두 번씩 치고 화낼 거다 말이죠. “하나님, 이 백성 못 합니다.” 하는데 신약에는 모세만도 못한 인간들이 대부분입니다. 완전히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로 들어났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몰아내십니다. 몰아내시는데 어디로 몰아내시는가, 지금까지 이야기는 이해되겠지요?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관계.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일방적으로 몰아내시는데, 지금 제가 하는 것은 모형과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모형과 그림자. 어디로 몰아내시는가 하면, ‘경계선’쪽으로 몰아내시는 거예요. 20년 전인가 채시라하고 최민 수가 나왔던 드라마에 ‘사랑과 야망’이라는 게 있었지요. 그 드라마의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항상 철조망이 나와요. 국경을 넘고 지금 국경이라는 것이 뭐죠? 저것만 넘으면 이쪽과는 딴 세계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국경이라는 게.
그 국경에 철조망을 쳐놓게 되면 철조망을 쳐놨다는 것은 못 넘어간다는 뜻이고 못 넘어가기 때문에 더욱 더 그리워지지요. 못 넘어가기 때문에. 애들은 가정에 살지요. 그런데 그 애가 나중에 사춘기가 들어가지고 친구하고 놀러간다 해가지고 지 맘대로 행동하게 되면 애가 가정이라는 경계선 바깥에서 심지어 외박까지 할 때, 엄마가 얼마나 걱정됩니까? 같은 여자 친구하고 한다고 해놓고 나중에 남자친구인지 어떻게 아느냐 온갖 걱정이 다 되잖아요. 그럴 때 엄마는 결국 뭘 느낍니까? 경계선 바깥에 있다는 것을 느끼죠.
애가 경계선 안에서 띄어야 안심이 되는 겁니다. 다 컸다는 말이 뭐냐 하면, 우리 가정의 경계선과 그 안과 밖을 자기는 이제는 파악을 했다는 겁니다. 요거 안에 있으면 엄마 잔소리 영역 내에 있고, 요 바깥에 나가면 잔소리가 안 들리는 곳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의 잔소리나 간섭이 없는 곳에 가려면 그 경계선을 살짝 이탈해버리죠. 이탈한 것에 대해서 부모는 탈선이라 하고 자기는 잠시 바람 쐬었다고 하고 그렇게 보는 겁니다.
주님께서 자기 신부를 어디다 몰아넣는가 하면, 경계선 쪽으로 몰아붙여요. 최 민수하고 채시라하고 서로 사랑하면서도 건너갈 수 없는 철조망 앞에 두고 서로 애타 하는 것. 그 장면이 생각나는데. 우리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나지? 하면서 국경선을 못 넘어와서 안타가워 하는 거예요. 그런 대목. 그러니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항상 경계선이 나옵니다. 경계선이 나와 가지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깝게 만들지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봐도 탈출하잖아요. 나치에 협조하지 않는 트랩대령이 오스트리아를 벗어나서 나중에 실제로는 미국으로 망명했어요. 실제 인물들이. 2차 대전 때 나치를 피해서 망명할 때 산을 탈출하잖아요. 수도원으로 피했는데 독일 병이 와서 숨어서 경계하는데, 항상 경계선이 있어요. 경계선. 이것만 넘으면 자유고 그렇지 않으면 걸리면 죽음이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항상 그 경계선.
강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봅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눈만 뜨면 뭘 생각한다 했지요? ‘사는 것’이지요. 우리는 요 안에 있으면 산다는 거죠. 주님의 성경책에서는 주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장’이라고 했지요. 제사장은 영생을 주고 결국 제사장이 영생을 준다는 말은 우리가 산다고 우기면서 사는 이것은 영생일까요? 아닐까요? 영생이 아니면서도 우리는 기껏 배운 가락이 영생 아닌 것만 배운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지옥 가는 법만 우리 몸에 익히고 사는 셈입니다. 지옥 가는 법. 그게 탐욕의 바다인데. 이 성경을 왜 줬습니까? 이 성경은 너희로 하여금 영생으로 이르게 하리라, 되어있지요. 이 성경은 너희에게 영생을 준다 말이죠. 참 중요한 말씀인데. 영생을 준다는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제가 성경이라는 ‘경’자가 이게 ‘거울 경’자가 아니고 사실은 ‘말 경’자에요. 그런데 설명할 때, 거울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의미 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착각을 많이 하고 전에도 이야기할 때 착각을 했어요. 사실은 ‘말 경’자에요. 어쨌든 성경에 보니까 성경을 들여다보고 하고 있으니까 그냥 거울처럼 늘 생각하는 게 좋지요.
이렇게 영생을 줬는데, 안 보는 이유가 뭐죠? 무엇에 바빠서? 혼자서 죽는 데 바빠서, 신부로서 사는 데는 관심이 없었잖아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사는 데는. 사실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혼자 있으면 죽어요. 이래 하나 저래 하나 혼자는 무조건 죽어요.
다시 해봅시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이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창세기3장 22,23절에 의해서 우리는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무슨 종교나 아무리 기독교를 가져도 영생 없습니다. 성경공부해도 소용없어요. 데리러 와야 돼요. 데리러 오되 그냥 데려가면 안 되고 우리의 신분 자체가 바꿔져야 돼요.
어제 뉴스에 보니까 젊은 아가씨들이 53%가 결혼할 필요 없다고 이리 나왔다 말이죠. 왜 그럴까요? 혼자 살아도 괜찮다는 거예요. 천국에서는 혼자 살면, 혼자 영생 얻으면, 그 영생은 영생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한테 남편 영생을 아내가 연합해서, 남편의 영생을 아내가 공유할 때만, 우리가 영생을 얻습니다. 정말 이거 중요한 말입니다.
집사님, 차 있지요? 차 누구 이름으로 되어있어요? 남편이 집사님 차를 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탈 수 있는 거예요. 왜? 부부기 때문에 탈 수가 있는 겁니다. 남편 명의의 차에 우리가 신부로서 조수석에 타가지고 남편의 나라에 가요. 그게 아들의 나라인데. 내 나라 가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면, 내가 잘되는 나라거든요. 내가 이뻐지고 내가 하늘나라가도 원피스입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비교해서 우위에 있고. 매일같이 상상하는 게 내가 잘되는 나라인데. 그 나라는 조수석에서 상상만 하세요. 조수석에서 상상만 하고, 진짜 가는 차는 예수님 나라에요. 내 나라가 아니고. 자기 차로 상상하다가는 쥐어 박힙니다.
그 쥐어 박히는 방법이 뭐냐, 우리로 하여금 경계선에 가까이 하는 거예요. 포근하게 그냥 우리끼리 사는 게 정상인데, 때로는 우리가 이 경계선에 가게 합니다. 죽음의 경계선에 가게 해요. 죽음의 경계선에 갈 때는 경계선만 보이게 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이 실망스러운 사태가 일어납니다. ‘내가 평소에 뭐하고 살았지?’ 대표적인 것이 사업하다 부도났을 때. ‘뭐야? 빚만 지고.’ 평생 동안 청춘을 다 바쳤는데 돌아온 보상이 완전히 빚더미에 앉았다 말이죠. ‘나, 그러면 어떻게 되지? 나 이제 죽을 수밖에 없네.’ 라고 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경계선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 강도 같은 경우에요. 평생 동안 그 강도가 강도를 왜 했는지 알아요? 평소에 사는 것에 관심 있었거든요. 평소에 사는 것에 관심 있다가 마지막 자기 인생에 경계선에 주께서 경계선으로 몰아넣으니까 비로소 그 때 누가 보이는가 하면, 예수님이 보이는 거예요. 무임승차해서 오늘밤에 낙원에 가는 겁니다. 강도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그럼 우리가 강도질 할까요? 아니에요. 우리로 하여금 평소에 생활하면서도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내가 이리 살긴 사는데 백날 살아봐야 죄만 생산될 뿐.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점점 더 죄를 짓고 주위사람들에게 피해만 입히는 사람. 제가 지난 설교에 그랬지요. 남한테 책임지지 말라, 했지요. 책임지게 되면 자기가 의인이라고 착각될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니가 내 딸로서 니가 애를 먹여도 나는 니 부모로서 니한테 해줄 것 다해줬다.” 하거든요.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따지고 보면 아무리 해줘도 만족스럽지 못해요. 엄마로서의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닙니다. “차라리 내가 니한테 해준 것이 별로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딸에게 감동될 수가 있어요. 딸이 담배피우고 들어와 가지고 유치장에 갈 때, 내가 니한테 해줄 거 다해줬는데 왜 옆길로 나가느냐, 짜증내지 마시고 차라리 내가 니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구나! 미안하다 딸아! 니 담배 더 피워라. 재벌3세만큼 못해줘서 미안하구나! 그야말로 다이아몬드 반지 생일선물로 안 줘서 미안하다. 이런 거.
경계선에서 경계선으로 몰아넣습니다. 경계선으로 몰아넣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 경계선을 타넘고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에요. 태어나서 나중에 죽을 때 십자가가 아니라 이미 오실 때부터 십자가에 깔린 그 길을 따라서 십자가로만 갈 수밖에 없는 그 길 따라 노선 따라 온 거예요. 내 맘에 주단을 깔고, 하는 게 있지요.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의 길을 깔고.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의 길을 깔았어요. 주님만 십자가가 아니라 주 옆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다 주님 여파 때문에 전부다 십자가의 고난을 겪어야 했었습니다. 배가 바다에 지나가게 되면 배가는 길에 있던 낙지 던지 애매한 갈치라도 이것도 배에 부딪혀서 죽을 수 있어요. 가만히 있는데 배가 자기 목 타고 지나가니까 상어가 죽을 수 있다 말이죠.
예수님 태어날 때, 베들레헴 애들 어떻게 됐어요? 죽었잖아요. 동방박사가 어떻게 됐습니까? 목숨이 위태로울 뻔 했잖아요. 정말 천사가 아니었으면 그 사람들 조선총잡이한테 다 총 맞아 죽었어요. 자객한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게 위험해요. 예수님과 붙어있으면 위험해요. 외국에 만약에 여행갈 때, 노르웨이 같은데 보면, 가본적은 없습니다만, TV에 보면 빙하의 깎인 절벽이 멋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면 보통 사람들은 무서워서 절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건데, 꼭 호기심 많은 애들은 빙하 절벽 끝에 와가지고 무슨 담력 실험하는 것도 아니고 앉아있던지 물구나무 서는 사람도 있어요.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위태로운 요 경계선에 딱 서게 해요. 경계선에. 그리스도의 영께서 항상 그렇게 해가지고 일반사람은 그냥 눈만 뜨면 사는 것(실은 지옥 가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지옥가기! 매일 지옥가기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눈만 뜨면 매일 지옥가기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죄만 짓는. 탐내지 마라, 이런 말씀에 위반했다는 자체가 그건 지옥 가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거예요.
마음속으로 미워해도 살인죄다, 이 말은 지옥가도 할 말이 없다는 거예요. 니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처음부터 우리는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가락강의에서 그랬잖아요. 처음부터 우리는 어두움이었다. 그러면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경계선에 놓아두게 되면 이 절벽 경계선에서 이쪽에서 우리보기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죽음의 세계로 갔잖아요. 십자가에 죽었으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때, 죽인 그 인간들은 본인은 살았다고 여기고 죽임을 당한 피를 흘린 주님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죽음의 세계로 밀어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 예수님의 죽음의 세계가 주님이 부활함으로서 죽음의 세계의 자체가 부활된 거예요. 예수님 계신 그곳이 천국이에요. 예수님 살았니? 죽었니? 그건 의미 없고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에요.
하늘나라는 나와 함께 있는 거예요.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넘김으로서 죽음 그 세계가 천국세계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천국에 못가지요.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오히려 천국 가자! 하면 겁을 낸다니까요. 성경공부 한 번 참석하자, 하면 겁을 내잖아요. 겁을 낸다니까요.
설교시간은 우리 다 같이 죽읍시다! 하는 시간이에요. 왜? “죽어도 좋을 사람만 남으시고 나머지는 다 가세요.” 하는 그런 시간이 설교시간이에요. 주님께서 죽음으로 가서 천국으로 왔다는 것은 처음부터 주님께서 이쪽에서(절벽에서)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절벽에서 우쭐 우쭐 하지요. 그럼 주님은 “뛰어내려라, 내가 받아줄게. 뛰어내려!” 내가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은 뭐냐, 사도바울이 뛰어내린 거예요. 사실은 사도바울이 뛰어내린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와서 사도바울이 야호! 하고 뛰어내릴 때, 사도바울이 그냥 뛰어내리면 안돼요. 코만 아파요. 납작 다 나갑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캡슐이 있어요. 캡슐이 뭐냐 하면, 성령입니다. 성령 캡슐 안에 사도바울이 왜 안 죽느냐 하면, 성령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영이 왔거든요. 십자가의 영이 뭐냐 하면, 죽은데서 사흘 만에 부활한 아우라의 능력이 휘말려있는 거예요. 공처럼.
공처럼 휘말려 있으면요, 사도바울이 요리 있는데 요 힘이 뭐냐 하면, 죽어도 살고가 들어가요. 요한복음11장에25절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게 작용하는 거예요. 작용하는데 사람들은 뭐냐 하면, 나사로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 그런데 나흘 만에 살려냈잖아요.
죽었다고 봤던 그 사람들이 실은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죽은 세상에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아침에 눈만 뜨면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하는 요 세계가 뭐냐, 갇힌 세계에요. 저주에 포위된 세계. 너희는 포위됐다. 완전히 포위된 세계, 저주의 세계에 있어요. 죄 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면 이리 되는 겁니다. 절벽을 그렸는데 이렇게 해도 되고, 동그라미가 두 개 있는데, 큰 비누방울에서 또 따로 비누방울 격리시켰다고 보면 됩니다. 통! 하고 튀어나온 거예요. 늘어지면서, 늘어지면서 톡! 하고 떨어지면 되는 겁니다. 비누방울 안을 예수 안이라고 하고, 밖을 세상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 죽음에 오셔서 이 땅에 잠시 살다가 인간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본성만 발취하면서 도로 죽음의 세계로 갔는데 사흘 만에 부활시켜 놔서 요게 부활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 이 사이는 건널 수가 없지요. 거지 나사로 옆집 부자 있잖아요. 부자는 어느 세계밖에 몰랐습니까?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상 이 세계밖에 모른 거예요. 이 세계에서 부자다! 라고 한 거예요.
예를 들면, 전목사님 바로 뒤에 지옥불이라고 생각하고 죄송합니다. 잠시만 그렇게 상상만 하겠습니다. 지옥불이라 생각하고 전목사님이 점점 더 지옥불로 후진하는 거예요. 후진하면서 큰소리치는 거예요. “오늘 나는 한 건수 했어! 나는 50억짜리 부자 되었어!” 큰소리치면서 점점 더 뒷걸음질 치면서 어디로 갑니까? 지옥불로 가거든요. 그런데 내가 보니까 보이더란 말이죠. 보일 때, 그 큰소리가 부럽습니까? “아이고, 좋겠다.” 이리 됩니까? “아이고, 저거 우쨀꼬! 아이고, 저거 우쨀꼬!” 손바닥 치면서 아이구~ 우쨀꼬?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지만, 서초수사과장이 사표내고 광주지역에 공천 받아가지고 국회의원 나올 때, 다른 사람은 “야, 수사반장 해봐야 한 달에 500만원, 600만원 버는데 국회의원 되면 1억 5천만원 받는데, 되기만 되면 떼돈 벌겠다. 부러워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쨀꼬? 우쨀꼬? 그게 이 땅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건희가 무슨 의미 있어요? 바로 지옥불인데.
그래서 집사님이 롯데에서 일하실 때, 늘 우짜꼬? 우짜꼬? 그런 마음을 품고 일하세요. “이거 얼마입니까?” “5만원이에요.” “3만원에 주세요.” “가져가세요.” 3만원 줘봐야 지옥 가는 거 마찬가지인데. 에라, 기분이다. 주인한테는 손해 보겠지만. 그런 마음이 사도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모든 세상에 내가 복음에 빚진 자라, 하는 것은 그런 뜻이에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전체 원형을 아는 겁니다. 전체를 다보는 마음을 말합니다. 전체를 다보고 큰 전체 속에서 내 위치를 발견하는 겁니다. 내가 뭘 얻어먹고 어떻게 이 땅에서 사느냐는 그건 신앙도 아니에요. 마귀에게 그렇게 길들여진 겁니다. 마귀의 자식들이 하는 거예요.
인도에 갔던 교회 다니는 청년들이 절에서 찬송가를 불렀다는 거예요. 아주 싸가지 없는 짓을 했어요. 왜냐 하면, 절은 누구 돈으로 만든 거예요? 불교에서 만들었잖아요. 왜 남의 가게에 들어가서 횡포를 부립니까? 지 가게 지 교회당에서 하지 왜 남의 가게에 가서 그런 횡포를 부렸어요? 땅 밟기 하는 겁니까? 밟으면 여리고성처럼 지 거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건 정복욕이고 탐욕입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그것 보고 거기에 있는 어떤 스님이 말 안하는 기도를 그만뒀다는 거예요. 이건 또 뭐예요? 그거 보고 화가 나가지고 묵은 수행을 그만뒀다는 거예요. 한국 중이.
여러분, 불교는 오락이에요. 그걸 오락 아닌 척하는 것이 더 나빠. 교회 다니는 애들이나 싸가지 없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철없어요. 그거 했다고 자기가 하던 수행도 금지했다는 거예요. 같은 싸가지를 부리면서 지는 무슨 고상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지 묵은 기도하면 주님 재림하시는 겁니까? 그리 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히브리서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현실은요, 주님 손에서 현재 계속해서 변천하고 계속 키워지는 겁니다. 마치 콩에다가 물을 부우면 뭐가 되지요? 콩나물 되지요. 이 세상은요, 주님 손에 의해서 자라지 우리 인간 손에서 묵은 수행한다고 변화되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 주님의 변화되는 그 원리 원칙에 우리가 그걸 간파해야 돼요. 그게 언약입니다.
그 언약을 위해서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의 모형이고 그림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 경계선을 늘 체험하도록 조치를 당해 보게 되면, 이 경계선에서 다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이 제대로 보이고 내가 평소에 봤던, 내 살기 중심으로 봤던 것이 정녕 다른 양식으로 전체가 파악이 되는 겁니다.
누가 만약에 이혼했다면, “이혼했습니다. 어떻게 살까요?” 하는데 정말 이런 걸 안다면 “이혼했어요? 어쩌라고? 무슨 큰일 났어? 이혼이 무슨 큰일인가요? 큰일 난 거예요?” 이혼 어쩌고 하는 것도 다 사는 것의 문제거든요. 살고자 하는 것이지. 제사장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히브리서8장 시작을 서론을 길게 했는데요.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제사장을 구약 때부터 모형과 그림자 쪽의 제사장을, 신약 때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어떻게 키워내는가를 보자는 겁니다. 보시는데, 왜 서론을 길게 하는가, 우리 평소의 관심사가 사는 것에 관심 두다보니까 이것은 저뿐만 아니고 성령께서 사는 것에 두는 이 사람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제사장을 돌리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경계선을 다녀가야될 절벽이 있는 곳으로 몰아세울 수밖에 없는 그 사정을 제가 미리 서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히브리서7장27절 봅시다. 끝에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예수님이 뭘 드렸다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을 드렸다, 되어있지요.
보세요. 구약의 제사장들은 자기 몸을 드리는 겁니까? 제물을 드리는 겁니까? 제물을 드리는 일을 하면서 그들은 뭐다? 자기는 제사장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신약에 오신 제사장도 구약의 제사장처럼 뭔가 줄게 있어야 된다 말이죠. 하나님께. 줄게 있는데 뭘 줍니까? 자기 몸을 주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모형과 그림자가 되지요? 자기 빼놓고 자기 바깥에 있는 것 주는 거하고, 자기 몸 자체를 주는 거하고 이게 어떻게 모형과 그림자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만 하고 10분간 쉽시다. 어떤 사람이 제물을 드립니다. 어떤 제사장이.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립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드릴 때, 제물이 죽고 제사장은 살지요. 이 말은 뭐냐, 죽은 제물 덕분으로 살기는 누가 살았다? 제사장이 살았다, 이리 되는 겁니다. 문제는 이것이 모형이라는 거예요. 모형이라는 겁니다. 오늘 강의 중 제일 중요한 겁니다. 바짝 들어야 됩니다.
한 번 보세요. 제사장의 모형이 예수님이 아니고 제사장이 제물 드리는 것, 이 전체가 모형이란 뜻이에요. 이 전체가. 예수님은 이 둘의 내용을 포함한 행위를 하시는 점에서 원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제사장 안의 원형이 아니고 ‘제사장 제물 드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옛날 제사장은 제물을 바치고 자기는 살았다, 이 말 이거든요. 죄 값을 드리고 죄 값의 덕분으로 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전체의 원형이라면, 본인자체가 제물이 되어버린 거예요. 본인 자체가 제물이 된다면, 이 제물 덕분에 산사람이 새로 발생되어야 비로소 이 자체의 원형으로서 완성됐다 할 수 있거든요. 예수님의 제물로 산 사람이 누구죠? 첫 째는 누굽니까? 예수님 본인이잖아요.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죠. 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붙어있기 위해서 될 사람이 살지요. 그러면 그들이 사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 살았다는 증거를 위함입니까? 예수님이 제사장이다. 예수님이 진정 원형이고,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가 예수님뿐이었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증거 해야 될 사람이 그리스도 덕분에 산 사람이죠.
그러면 이 살아있는 성도는 뭐냐 하면, 세상사는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겠지요. 성령께서 사는 것도 관심두지만, 사는 것이 아니다. X다. 아니다. 진짜 내가 사는 것은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콩에다가 물을 줘서 콩나물을 키우듯이 제사장을 제사장 됨에,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동원되었고 참여되었고, 증인으로서 뽑혔다는 것을 증거 할 때, 그 사람이 바로 성도가 된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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