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1강-구약해석 1409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15. 08:40
2014-09-13 00:25:09조회 : 998         
구약 해석 140912이름 : 이근호 (IP:119.18.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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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175.♡.147.179)14-09-27 15:10 
안양20140912a-히8장6절(구약 해석)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7장, 8장 전부 다 함축되어가지고 제가 설명을 하려고해도 함축된 것이 아코디언처럼 접혀 있잖아요. 아코디언을 연주하려하면 접혀있는 것을 펴줘야 연주가 나오지요 그것처럼 성경 속에 담겨있는 의미도 아코디언처럼 쫙 쫙 펴줘야 거기서 의미가 나와요. 그런데 펼칠 때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걸 펼치게 되면 또 모른다, 어렵다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그런 걱정도 있어요. 그러나 펼치게 되는 거예요. 그냥 이렇게 모아버리면 함축이 되어있는데 그걸 펼치기 위해서 설명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럼 펼친다면 그림으로 보면 이렇게 주름이 잡혀있다 말이죠. 이걸 펼치게 되면 주름 잡힌 것이 늘어지겠지요. 늘어지면서 여기서 안에서 펄펄 담아있는 의미가 바깥으로 풀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겹친다, 이건 신약이고 이걸 펼치게 되면 구약을 보여줄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신약 히브리서하면서 구약을 설명하려니까 구약에 대해서 정리가 되어있으면 이야기하기가 쉽겠지요. 그러면 새삼스럽게 구약 정리합시다. 이럴 수는 없는 거고 두꺼운 이 구약성경 가운데서 반복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징검다리 같은 겁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 구약이 벌판 같으면 미국의 텍사스 벌판 같으면 큰 벌판이라면 요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에 대해서 B라는 지점으로 가는데 이렇게 갈 수도 있고 저렇게 갈 수도 있고 돌아갈 수도 있고 지 맘 대로지요. 

구약은 마치 레슬링 하는 것처럼 그냥 평평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여기에 어떠한 노선으로 가던지 간에 일단 길이 없으니까 그야말로 중구나방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구약 나 열독했다. 백독했다. 이런 다 말이지요. 백독 열독하면 뭐합니까? 구약 전체를 다 섭렵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제가 구약의 징검다리를 놔드린다 했잖아요. 징검다리 끄집어낸 것이 아코디언의 안에 숨어있는 구약의 의미를 풀풀 드러내기 위해서 구약을 해야 된다는 이야기 했고, 그 구약 이야기하려면 징검다리 같은 것이 필요하다 말이죠. 

이렇게 징검다리를 놓는 거예요. 징검다리를 놓는데 이 징검다리가 동그라미를 그냥 무심코 그린 게 아니고 사실은 좀 더 갈수록 좀 더 크게 그린 거예요. B가 신약이고 A가 창세기라면. 갈수록 핵심부분이 뚜렷해지고 그리고 높이가 점점 더 높아지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깊이가 더 있어지고. 요 깊이가 시추를 많이 하게 되지요. 많이 하게 되면  이 깊이를 죄라고 합니다. 신약에 가까울수록 죄가 더 깊어지는 겁니다. 

어린아이, 중학교 애들한테 설교할 때, 여러 가지 애로사항들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그들이 죄라는 것이 인식이 얕다는 겁니다. 어린애의 도덕성에 의하면 죄라는 것이 눈앞에 코앞에 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죄라는 것도 넓은 의미의 죄를 다 알지를 못해요. 어린아이들이. 따지고 보면 어른들도 마찬가지거든요. 

제가 주일 낮 설교 때 그런 설교를 한 기억이 나는데, 사람이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준다, 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모르잖아요. 다 모르면서 자기는 여기에 살고자하고 다 모르면서 살고자 하니까 결국은 내 사는데 있어서 내가 모르는 분야 때문에 남한테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안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희생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이건 갑작스럽게 생각나는 예인데, 엄마가 뒤늦게 남자를 알았다. 그럼 여기 법적인 처리 문제에 대해서 셋째가 하는 말이 나는 모르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법적인 처리 문제를 누가 합니까? 첫 째, 둘째가 다 나서서해야 돼요. 셋째는 귀찮아가지고 나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겠다고 하면서 자기는 지금 존재하고 있어요. 방금 이야기했지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존재한다. 그러면 모르는 상태에서 존재했을 때, 내가 해야 될 일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못했을 때, 아는 사람이 희생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함축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주는 거예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딸이 남자친구를 오래간만에 부모한테 인사 치르기 위해서 데려왔다. 하는 말이 “엄마, 우리 남자친구가 닭갈비 좋아하는데 나는 모르겠다.” 하는 거예요. 어쩌란 말이에요. 그러면 엄마가 해달라는 거죠. 자기 존재함을 위해서 엄마가 피해를 보고 희생을 해야 되는 거예요. 왜? 단지 닭갈비 할 줄 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이래도 죄 안 지었어요? 나로 인하여 남한테 피해를 주고 희생을 하는데 이래도 죄 안 짓는 겁니까? 

또 이런 게 있어요. 오늘 예를 2시간 다해도 모자라요. 미장원에 갔는데 어느 탤런트처럼 머리를 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미용사는 어느 탤런트처럼 머리를 해줬습니다. 나중에 끝나고 난 뒤에 안 어울린다는 거예요. 사진대로 해 달라 해서 해줬는데 자기하고 안 어울린다는 겁니다. 미용사는 알지요. 이미 하기 전에 알았지요. 분명히 이 사람이 안 어울린다는 걸 알아요. 왜냐, 하도 머리를 많이 다뤄봐서. 그런데 손님은 그저 미용에 대해서 모르고 자기 코앞의 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고집부리다가 결국 머리카락은 이미 잘라졌고 3개월 뒤에야 자기 머리 찾는 거예요. 괜히 깎아달라느니 다음부터는 이 미장원에 두 번 다시 안 온다느니 이러면 그 실랑이와 비난의 아픔은 누가 지고 희생하느냐, 그 미용사가 다 짊어지는 겁니다. 그런 경우 참 많잖아요. 분명히 중국산 아닌데 국산인데 괜히 시비 걸어서 중국산인데 싸게 해달라고 아침 새벽시간부터 할머니 닦달내서 하는 경우가 많고. 도대체 사람이 산다는 게 나도 남 때문에 피해를 볼뿐더러 그 사람도 나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돼버리면 죄용서 받아서 구원받으려하면 자기 죄를 알아야 될 텐데 내가 어느 정도의 깊이 있는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용서받는다는 것도 이게 의미가 없이 돼버렸어요. 왜냐 하면, 자기가 “이건 죄 맞습니다.” 하고 할 때에 용서를 해주게 되면 감사가 나오게 돼 있어요. 이런 뜻입니다. 내가 남한테 피해를 줬는데 아이구 세상에, 피해 입은 그 당사자가 피해 입힌 것에 대해서 용서를 해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연적으로 뭐가 되겠어요? 감사가 나오겠지요. 분명히 내 잘못이 이건데 용서 안 해도 되는데 상대방이 거기에 대해서 용서를 해준다고 하니까 나는 웬 횡재인가 해가지고 너무 너무 고마운 거예요. 이 경우 전제가 뭡니까? 내 죄를 내가 알아요? 몰라요? 내 죄를 내가 알 경우에는 나라도 내가 용서가 안 되는 것을 놀랍게도 피해 입은 당사자가 “아이고 뭐, 모르고 그냥 넘어갑시다. 이거 뭐 살다보면 그런 일이 있지요.” 라고 해주니 이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말이죠.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까? 

이야기계속 하겠습니다. 지금 구약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만큼의 죄를 알게 되면 그 죄를 묻거나 따지지 않고 용서를 해줄 때만 감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가 뭐냐 하면, 내가 아는 죄만 용서하는 게 아니고 내가 모르는 죄까지 이미 용서가 된 상태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뭐예요? 간단하지요. 죄를 발굴해야지요. 만약에 죄를 발굴하지 아니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이번 일은 내 잘못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라고 하나님께 원망이 가버려요. 원망이 간다고요. 

어려우니까 추상적이니까 자꾸 예를 들어야 돼요. 뭐냐 하면, 새 엄마가 어떤 남의 새색시인데 굉장히 예뻐하는 거예요. 식사 시간에 그 새색시 이야기하고 성질이 좋더라, 어떻더라, 이렇게 하니까 그걸 듣고 있던 자기 진짜 딸이 화를 내는 거예요. 심지어 그 딸하고 새색시하고 싸운 적이 있었는데 새 엄마는 자기편을 들지 않고 남의 여자 편을 드니까 그 딸이 굉장히 또 화를 내는 겁니다. 그럴 때 하는 말이 “엄마는 왜 자꾸 내 앞에서 그 여자 편을 드느냐” 하니까 그 새 엄마가 하는 말이 “지금 누가 편드는 것이 아니고 니가 행동을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렇게 나왔다 말이죠. 그러니까 그 딸이 하는 말이 “내 행동이 어때서?” 적어볼게요. '내가 어때서?‘ 이게 지금 우리들의 일상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응답이 되어야 되고 살아가면서 뜻대로 되어야 될 텐데 내 뜻대로 내 응답대로 안 되니까 하나님보고 하는 말이 “하나님, 제가 무슨 문제가 돼가지고 힘들게 하십니까?”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그런데 엄마 입장에서는 그 딸이 자기 잘못을 자기가 모르는 거예요. 청담동 스캔들 이야기입니다. 하는 이야기가. 청담들 스캔들 모르지요? MBC에서 하는 아침 드라마. 

그 딸은 너무나 철이 없어놓으니까 귀하게 자라가지고 무조건 자기만 오냐, 오냐 해야 되지 조금도 자기 앞에서 누구를 자랑하게 되면 라이벌에게 자랑하면 화를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가 한심스러워서 니는 니 잘못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꼭 우리가 주님 앞에서 모습이 이래요. 우리는 우리 잘못한 것에 대해서 용서해준 것은 굉장히 고마워하는데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절대로 우리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일에 대해서 힘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뭔가 처리를 잘못 했다고 자꾸 하나님께 닦달내고 원망을 한다 말이죠. 그래서 구약이 필요한 겁니다. 구약이.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구약 이야기입니다. 구약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행동들을 다 모아요. 다 모아서 유도장이나 레슬링 장처럼 사각형을 만들어요.  만들어놓고 거기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죄는 전부 다 품어져 나오도록 그렇게 구약을 한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요. 접으면 아코디언 된다 했지요. 접으면.  

그 아코디언이 뭐냐, 신약성경이 되는 거예요. 그냥 펼치면 구약이지만, 그걸 접어버리면 죄가 안 보이죠. 안 보이지만, 신약에 와서 그걸 조금씩 보여주되 그냥 보여주지 않고 예수님의 용서와 연류 되어서 조금 씩 조금 씩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은 누구의 이야기냐, 구약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구약이 이해되어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안하고 구약과 예수님이 연관됐다고 하니까 억지를 쓰는 거예요. 예수님이 은 30냥에 팔렸다. 그러면 요셉은 몇 냥에 팔렸지요? 20냥에 팔렸잖아요. 그러니까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다. 이런 식을 엮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엮으니까 그게 해석입니까? 말장난이지요. 그게 말장난 되는 거예요. “와! 용하다. 구약을 저렇게 풀다니?” 뭐가 용해? 억지죠. 예를 들어서 요한계시록 13장18절에 보면 666나오잖아요. “그래, 666은 기분 나쁜 숫자다.” 그런데 솔로몬의 세입금의 중수가 육백 육십 육 금 달란트에요. 솔로몬이 나쁜 숫자를 품고 있으니 망해야지. 이런 식으로 완전히 무당 사주팔자 보는 것도 아니고 토정비결로 푸는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구약을 해석하면 안돼요.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을 이참에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할 때는 반드시 그냥 우리한테 다이렉트로 직접 주어지는 게 아니고 우리와 우리의 그림자를 분리시켜요. 우리가 아는 우리는 착한 우리니까 하얗게 하겠습니다. 주님이 보는 그림자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날 때부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지요. 죄인 아닙니까? 새까맣게 그리겠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굉장히 착하게 봐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쁜 짓을 안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완전하다는 말이 아니고 나쁜 짓도 하지만, 나쁜 짓을 나쁜 짓이라고 이해할 정도로 착하다고 하는 것이 내가 보는 근사한 내 모습이에요. 남은 용서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항상 나를 관대하게 용서할 만반의 준비로 갖추어서 살아가고 있어요. 이 세상에서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하겠어요? 그걸 철학적으로 표현하게 되면 이게 ‘자아상’이에요. 자아상 또는 자아주체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근사한 자아주체성을 동조하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따로 떼어 봅니다. 계시는 바로 이것을 경유해요. 경유해서 이렇게 오는 겁니다. 이렇게 경유하게 되면 갑자기 우리는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본모습을 접하게 되어있어요.  내가 미처 모르는 나의 본모습을 접하게 되는 겁니다. 항상 이럴 땐 예를 들어야 돼요. 그냥 이야기해서는 무슨 말인지 몰라요. 예를 들어야 돼요. 

만약에 집을 이사를 가는데 하나님께서 계시를 약속하기를 어떤 새 아파트인데 평수가 70평 고급 아파트를 준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것도 5월 15일날 준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래서 이 집을 팔고 이 집에서 벗어나서 5월 15일날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니까 딩동! 하고 초인종을 누르니까 원래 주인이 나타나가지고 “왜요? 왜 눌렀지요?” “이게 내 집인데.” “돌았어요. 미쳤어요?” “경비원, 여기 미친 사람 왔는데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자기 집이래. 빨리 와서 이 미친 사람 쫓아내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 그 집을 들어가야 되나요? 아니면 울면서 실망하면서 나와야 될까요? 비어있는 집이 아니고 멀쩡히 그 집이 살고 있는 집이었으니까 울면서 나와야겠지요. 그게 신명기 1장이야기입니다. 

주께서 약속의 땅을 준다고 했잖아요. 텅텅 비어있어요? 아니면 거기에 건장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있었잖아요. 그 사람들이 있는 입장에서 우리는 메뚜기 같으니까 못 들어가잖아요. 그럼 울면서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하나님이 생각한 나와 우리가 생각한 나와 오해가 생긴 겁니다. 주님께서는 니가 죄인이기 때문에 니가 못 들어가는데 나와 함께하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고 거기에 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는 근사한 존재인데 내 지혜와 내 신념과 내 열심으로서는 열심을 하나님께서는 기특하게 봐가지고 그 땅에 살도록 조치해주셨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나를 괜찮게 보는 내 모습인데, 그 모습을 향하여 계시가 온 게 아니고 주께서는 우리를 전적으로 ‘우리는 불신앙인데 들어가게 해주신다.’ 라는 쪽으로 계시해준 거예요. 

따라서 요 자리 시커먼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두 사람이에요.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는 말이 “못 들어간다. 맞다. 저 땅은 있다 할지라도 심지어 그 땅에 건장한 사람이 산다 할지라도 심지어 그 땅이 비어있다 할지라도 심지어 그 땅이 우리보다 더 숫자가 모자라고 허약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은 주님의 힘으로 들어가지 절대로 우리 힘으로 못 들어간다.” 이게 천국입니다. 천국은 그런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가는 거예요. 의인들, 어른들, 지혜로운 자는 가지 않고 어리석고 어린애한테만 그 땅에 가는 겁니다.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보면서 분명히 보여줬어요. 니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멋있다, 근사하다, 훌륭하다, 이 정도 신앙 생활했으면 대단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절대로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걸 미리 구약을 통해서 보여줬지요. 왜냐 하면 거기에 우리가 똑같은 사람이 등장하고 그들은 못 들어간다는 이유 때문에 대성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신명기1장에 보면 그들이 못 들어가니까 그들은 꾸중 듣고 자기들의 단결심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완전히 쫓겨났어요. 전쟁에서 패배해서 그들은 대성통곡한 겁니다. 차라리 우리 살던 곳이 좋겠다. 여러분들의 생각에 구약 자체가 애굽에서의 탈출기라 보시면 정확합니다. 구약의 핵심은 애굽에서의 탈출입니다. 그런데 그 애굽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이냐 하면, 우리한테 딱 맞는 나라에요. 

애굽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유행하는 유명한 노래로 표현하면 이렇게 표현하면 맞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에 뭡니까? 사랑하기에 딱 좋은 나이죠. 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요, 이 세상이 어때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기에 아주 딱 적합한 세상이 현재 있는 이 애굽같은 대한민국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떠난다 했어요? 우리가 떠나기 싫어요. 우리가. 왜? 십자가마을에 어느 분이 글 올렸지요. 12년 동안 노예 생활했다고. 내가 답글을 달았잖아요. 노예가 아닌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노예된 상태에서 다시 노예 없는 세상으로 출애굽을 하려고 시도를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되는데 우리 같은 경우에는 딱 좋은 세상에 살기 때문에 출애굽 의식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야 될 이유가 없다니까요. 한 번 저 쪽에 살다왔으면 아이고, 못 살겠다!가 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이 땅에 적합한 몸으로 신체로 우리는 이미 거기에 대해서 적합하게 양육이 된 상태기 때문에 우리는 죽기 살기로 이것만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출애굽사건이고 그게 바로 구약입니다. 

구약을 믿는다고 하면 나는 다시 봐요. ‘아이고, 진짜 믿음 좋은 사람이다.’ 구약을 안 믿어요. 왜냐 하면, 구약은 탈출인데 우리는 평소에 탈출할 의사 없습니다. 아침에 자식들한테 남편하고 식사하면서 “오늘도 맛있게 먹고 일 잘하고 공부 잘해라.” 이렇게 하지 “여보! 탈출합시다. 이거 먹고 탈출합시다!” 이런 아침 기도합니까? “여보, 이거 마지막 한 끼라 생각하고 다 털어먹고 우리 이 땅을 탈출해야 돼.” “이거 미쳤나? 왜 갑자기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나.” 이리 되잖아요. 

요번 수련회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출애굽기 했잖아요. 그 수련회 내용이 나와 있어요. 출애굽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에 살아본 사람 같으면 출애굽이 이해되는데 우리는 본 게 다에요. 이 세상이 다기 때문에 이 세상 밖이란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이 세상 다음에 죽음의 세상이 끝이다. 그것은 어디서 만들었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제조한 거예요. 

지난 수요일날 제가 이집트 미술 언급했잖아요. 이집트 그 예술을 보게 되면 지금 보면 이상해요. 구조 같은 거 보면. 발을 앞에 대면 몸은 옆면만 보여야 되잖아요. 발은 이런데 몸은 다 보여요. 이집트 스핑크스 구조 보세요. 조각 보세요. 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 그 미술그릴 때 의미가 있어요. 우리의 몸이 온전한 것을 항상 새겨줘야 내세에 가서 이 몸 그대로 가져가기 때문에 잘 보전하는 의미입니다. 이집트는 항상 내세중심이에요. 현세중심이 아니고. 무게 중심은 어디 가 있는가 하면 내세에서 끌어당기는 쪽으로 현세를 잠시잠간 꿈같은 세계로 보는 것이 이집트의 사상입니다. 종교입니다. 기독교 같지요? 아닙니다. 이게 이방종교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기독교라는 것이 이집트종교와 닮아있으면서 그걸 마치 복음인양 그동안 그렇게 알아왔잖아요.
복음은 죽고 난 뒤에 주님 만난다가 아니라
이 땅에 낯선 천국이 이 땅에 이미 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죽고 난 뒤에 가는 것은 이집트 종교뿐만 아니라 불교도 있고 유교도 있고 다 있어요. 특히 캄보디아에 가면 앙코르와트 유적지 있지요. 그 탑은 흰두교입니다. 그 곳에 안 가봤지만, 하도 거기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많고 찍어온 여행지를 많이 보니까 지금도 그 그림자 연극하거든요. 그림자 연극. 앞에는 그림자만 보이고 뒤에는 기능인들이 전통 예술가들이 인형가지고 놀면 그림자에서 옛날 흰두교 신하들이 연출이 돼요. 

흰두교 신하들이 연출하는 게 뭐냐 하면, 항상 내세위주에요. 지금 이렇게 사시면 내세에 복 받습니다 하는 거. 보세요. 그걸 보게 되면 진짜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은 흔들리기 쉬워요. ‘아! 진리는 전부 다 하나구나!’ 다만 가는 길이 산은 요리 정상인데 흰두교로 가나 티벳 불교로 가나 이집트교로 가나 뭐로 가나 만나기는 하나로 만나는구나!  신은 사랑이다. 그래, 사랑에서 만나는 거야. 전부 그런 사상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천주교와 기독교와 전부다 손잡고 있지요. 불교하고 손잡는 이유가. 공부 깨나했던  사람이 손잡는 이유가. 

결국은 신이라 하는 것은 사람의 이상형도 사람의 가장 순수한 면의 액기스를 모아서 순수한 그 핵심부분이 모아지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신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속에 있는 고상하고 거룩함을 발휘하세요. 그게 곧 진리입니다.” 이게 바로 보편적 계시로 통용되는 겁니다. 이 전 세계에. 주님은 그런 자에게서 죽임을 당했잖아요. 그게 복음이 돼요. 내 창 자국 못 자국이 복음인데, 인간들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바리새인 이야기하면 참 강의하는데 자꾸만 이야기하면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나온 사상이 있어요. 그 사상의 출처가 뭐냐 하면, 유대인의 묵시문학이라는 겁니다. 

유대인의 묵시문학이라는 게 뭐냐 하면, 나라 잃은 설움을 저는 안 태어나서 모르겠습니다마는 일제시대 때, 윤봉길의사나 안중근의사 유관순언니, 누나 그 어릴 때 전기 같은 거 부산에서 보잖아요. 부산에서 학교에 보면 나오는데. 청춘을 나라 살리는데 청춘을 다 바쳤어요. 나라 없기 때문에 재산 뺏기고 유안부로 끌려가고 그 이야기 들으면 지금 우리가 살면서 울분이 솟구쳐 나와요. 이번에 중국 갔는데 중국 사람이 일본사람들 굉장히 미워해요. 너무나 악한 짓을 많이 해서. 그게 다 어디서 나오는가, 나라 없는 설움이에요. 유대인도 마찬가지에요. 나라 없는 설움에서 우리 민족이 하나로 응집을 갖추려면 믿을 것은 하나님의 영속적인 손길 외에는 붙잡을 길이 없어요. 왜? 땅도 없다. 왕도 없다. 성전도 불타버렸다. 제사장도 다 흩어져버렸다. 정신적인 지주 구심점으로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남아있는 것은 열강에 대한 강한 분노와 복수심 밖에 없지요. 

그럴 때, 흩어져있는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들 12지파의 자손들을 하나로 비록 흩어져서 각자 그 흩어진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살지만 대대로 자기 자식들에게 아들에게, 딸들에게 우리 민족은 이렇게 당할 민족이 아니야. 우리는 죄를 지어서 이렇게 당한 거야. 우리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돼. 절대로 원망해서는 안 돼 언젠가는 우리를 같이 하나로 만들어서 솔로몬과 다윗의 나라가 될 것이야. 라는 그런 계시를 가만 숨어서라도 또는 절기 때마다 자기 가정에서 또는 여러 집단에서 회당 만들어서 계속해서 가르쳤습니다. 

그 가르친 내용의 집대성이 뭐냐 하면, 묵시문학이에요. 문학하니까 소설 생각하는데 문학 떼어버립시다. 그냥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을 모아놓은 책이라고 보면 돼요. 그 내용은 뭐냐, 우리 힘으로 안 되는 복수를 하나님 메시아가 오셔서 복수해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라. 고난과 환란 속에서도 이긴다 말이죠. 그 묵시문학의 요소들과 파편들이 이사야에도 들어있고 예레미야에도 들어있고 다 들어있다는 거예요. 

이사야에 들어있는 대목을 한 번 찾아봅시다. 진도 많이 나간다고 훌륭한 사람 되는 거 아니니까 천천히 가더라도 설명하겠습니다. 묵시문학 설명하겠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말씀인데 이사야53장 1절부터 3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절에 보면 그는 징벌을 받고 고난을 당한다 되어있지요.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라 되어있지요. 그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이 분이 바로 장차 자기 흩어진 자기 백성을 모을 왕으로 오실 메시아가 되는 거예요. 이걸 유대인들이 믿었어요. 정답입니까? 정답 아닙니까? 정답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민족적 수구적이기 때문에. 자기 민족 중심의 사고방식이 전제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분명히 시커멓게 칠했지요. 이걸 여러분들이 잊어버린 거예요. 우리는 평소에 뭡니까? 시커먼 게 아니고 하얀데, 가끔 죄지을 때마다 점박이 있을 뿐이지 대부분의 영토는 99%는 하야요. 착해도 너무 착해. 완전하지는 않지만 착해. 시커멓지는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자기 자신을 까맣게 보지 않고 하얗게 본 거예요. “하나님, 다른 민족은 기다리지 않지만 우리는 기다립니다. 타락한 유대인들은 있지만 대부분 유대인들은 지금도 외지에서 고생하면서 주의 약속, 이사야의 약속을 우리는 절대로 잊지를 않았습니다. 대대로 우리는 가정교육을 시키면서 우리 자식들에게도 그걸 가르칩니다. 그러니 우리를 위하여 메시아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다렸습니다. 

정작 온 건 누구냐, 그들이 기다린 사람이 온 게 아니고 누가 왔느냐, 목수의 아들이 온 거예요. 목수의 아들. 이런 것은 그들이 아무리 해석해도 나올 수 없는 해석이에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옵니까? 나사렛 청년이에요. 분명히 예루살렘의 출신이어야 되는데 이것은 남의 동네, 서울 출신이 아니고 강원도 출신이다 말이죠. 이것은 촌놈은 말이 안돼요. 요리 조리 따져도 자기가 아는 메시아하고 맞는 구석이 없어요. 놀라운 사실은 메시아를 기다린 그들이 진짜 메시아를 때리는 가해자가 등장한다는 쪽으로 이 이사야53장이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무리 봐도 성경을 봐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는 하얗기 때문에. 

설마 메시아를 우리 손으로 처단할 줄이야. 아니, 아니야,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그들은 자부했습니다. 왜? 자기들은 메시아 편에 있고 여호와 편에 있고 자기는 하나님 편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손에 맞아죽을 줄이야. 이건 반전도 그런 반전이 없어요. 세계 최고의 반전이에요. 메시아 기다린 자에 의해서 메시아가 죽었다는 사실 신문에 날 사실입니다. 노루표 페인트 가스노출이 신문에 날 게 아니고 정말 신문에 날 이야기에요. 

구약을 볼 때에 구약은 죄의 깊이를 더해주는 겁니다. 구약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요. 모르는데 특별히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 신이 임한 그 사람도 하나님을 몰라요. 신이 임해놓고도 몰라요. 나중에 알아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하나님이 특별히 찾아오게 되면 남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찾아와 주신 그 하나님과 둘만의 싸움이 계속 돼요.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야곱이 누구하고 싸웠습니까? 하나님하고 싸웠잖아요. 그러니 어떤 인간도 하나님하고 싸우지 않은 경로를 밟아서 구원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구원될 사람도 정작 하나님이 구원할 나와 싸워서 나로 인하여 아픔과 피해를 보신 분이 오히려 싸웠던 나를 건져주는 방식으로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이게 구약입니다. 신약도 마찬가지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생각하기를 “목사님, 저는 주님과 싸운 적이 없는데요. 나는 처음부터 주님 좋아했는데. 너무나 감사했고, 주님하고 싸우다니? 아, 그럴 리 없습니다.” 그게 야곱이고 그게 바로 사도바울 되기 전에 사울이었던 겁니다. 주님은 니가 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고 잘못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언제 우리가 그걸 들통 나게 하는가 하면,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가질 때. 행위의 의미를 둘 때. 내가 40일 금식기도 방금 끝났다. 내가 나의 재산 반을 교회에 갔다 냈다. 뭔가 자기 행위에 대해서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 아들, 우리 딸, 우리 남편 내가 다 전도해서 다 구원했다. 이렇게 될 때, 그 자체로 인하여 주님이 피해자로서 나로 인한 피해자로서 등장됩니다. 

신명기9장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했지요. 못 살 때가 아니고 집이 있고 또 집이 살아도 너무 잘살고 사업을 해도 너무 사업이 잘될 때, 그 때가 바로 주님을 잊어버릴 때입니다. 슬슬 그 때가 모든 일이 잘되고 잘 풀리고 몸도 건강하고 애가 공부도 잘하고 스위스에 유학가고 잘 될 때 주의하세요. 주님 모를 가능성이 점점 게이지가 높아지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주님께서는 지금보다 낮아지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뭐 이 정도해도 제가 많이 아니까 더 이상 저를 심하게 몰아넣지 마세요. 그럼 제가 힘드니까. 주여, 요 정도로 해서 주님사이에 좋은 관계로 유지합시다.” 이렇게 타협조로 나올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주님을 온전히 아는가 하면, 지금 내가 잘 됐다. 넉넉하다. 행복하다. 이게 천국 가는데 무슨 소용 있느냐, 이게 출애굽에 오히려 이게 전혀 보탬이 안 되고 훼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될 때 집안에 아무 변화가 없다 할지라도 주님에 대해서 감사하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꼭 뭔가 상처가 나야 되고 아파야 되고 집안에 불이 나야 되고 자식 거덜 나야 되고 그런 일이 안 벌어져도 고요한 가운데 지금 나의 행복 모든 것보다도 주님 아는 그 자체가 행복으로 바뀌어 질 때가 있어요. 

일부러 나를 찢고 이리 안 해도 금식기도 안 해도 교회 3번 나가다가 4번, 5번 안 나가도 철야 안 나가도 그냥 평소에 자전거 타고 가면서도 그걸 느낄 때가 온다고요. 내가 이 땅에 사는 게 애굽 속에 살고 있는 것 그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내게 맞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느껴질 때가 온다고요. 그걸 알고 있는데 굳이 오버하지 마세요. 알고 있는데 특별히 더 기도하겠다느니 금식하겠다느니 그런 짓은 하지 마세요. 알게 하신 것은 주께서 성령께서 알게 하셨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여기서 구약을 좀 더 해봅시다. 첫 시간은 구약으로 하는 걸로 마감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3장 요거 꼭 설명하고 싶은데요. 이건 피곤하더라도 보셔야 돼요. 모세가 산에 갔는데 모세는 몰랐지요. 자기는 그 몸이 하나님과 독대하고 내려올 때, 자기는 그냥 옛날 산 밑에 살던 몸인 줄 알고 그냥 왔는데 백성들이 감당이 안 되고 못 견뎌하는 거예요. 보니까 눈이 부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모세 잘못이에요? 누구 잘못입니까? 모세가 뭔가 푹 젖어온 거죠. 하나님의 영광을 푹 젖어 왔는데 모세는 특히 잘못한 게 없지요. 산 밑에 있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요. 막상 따로 분리되어서 천국 갔다 와보니까 더러워도 너무 더러워요. 매일같이 샤워를 해도 더러워. 명품을 걸쳐도 더러워. 하늘나라는 족히 비교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의 비밀을 전달될 수가 없지요. 왜? 더러움과 거룩은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때 모세가 한 게 뭐냐,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수건을 머리에 덮어버린 거예요. 수건을. 이게 의미 있는 거예요. 수건에 발에 덮은 게 아니고 무릎이 시리다고 덮은 게 아니고 엉덩이에 두른 게 아니고 얼굴을 덮은 거죠. 

그게 뭐냐, 영광은 얼굴에서 나오거든요. 얼굴을 덮은 겁니다. 얼굴을 덮고 수건을 덮었으니까 영광은 수건 앞에 새어나오지 않고 목소리는 새어나오니까 수건 앞에 듣는 백성들은 지금 얼굴은 아니지만, 목소리는 들리니까 그 쪽 세계에 대해서 소식을 들을 수가 있지요. 구약을 설명하면서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 수건에 해당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죠. 

이 말은 모세가 수건을 덮어쓰고라도 시내산에 있었던 이야기를 지금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렬하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수건 같은 성령을 보내줬다는 이 말은 지금은 너희들 니 몸을 가지고서는 영광된 몸을 눈으로 목격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게 눈에 안 보인다 할지라도 들리는 소리는 어디서 나오는 소리냐, 수건 뒤에서 나오는 소리, 예수님 가셔서 계신 소리로 들릴 수가 있다는 겁니다. 요게 중요해요. ‘아, 저거는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사견이야.’ ‘아, 저건 베드로가 자기 경험한 거야.’ ‘저거는 요한이 자기 느낌 바야.’ 이걸로 듣지 아니하고 베드로, 요한, 바울은 하나의 수건에 있다는 거예요. 수건. 

수건을 보지 않고 수건 뒤에서 우리가 꼭 들어야 될 사항이 흘러나오는 그 정보를 계속 듣는 연결된 관계, 이것이 바로 같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보이는 것으로 믿지 않고 들리는 것으로 믿어지는 사람. 이게 구약부터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대목에서 고린도후서에서 하는 대목이 너희들이 이제부터 구약을 보던 신약을 보던 문자로 보지 말고 영으로 봐라,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수건으로 봐라. 다시 말해서 수건에 있다는 이유는 많이 봐줘서 있는 거예요. 그냥 수건을 떼어버리면 너는 타죽어 버려요. 그 거룩한 영광에 감당이 안 됩니다. 

얼마나 니가 못났으면 수건을 걸치겠는가, 니가 얼마나 못났는데도 불구하고 구원받아야 하기에 성령께서 오셨겠는가, 그러니까 자꾸 눈에 보이는 거룩 쪽으로 붙잡지 마라, 눈에 보이는 스텐글라스, 파이프 오르간, 은혜 받았다고 거기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정말 믿어지는 그 말씀이 수건 뒤에서 새어나오는 천국의 소리다. 그게 성령의 소리입니다. 

성령을 받은 특징이 뭐냐, 나는 들려서 믿는 것도 아니고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그냥 믿어진다. 그냥 믿어진다는 거예요. 사도요한이 이야기했다. “사도요한의 개인 의견?” “아,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건 신학이에요. 사도요한의 신학은 어떻고 사도바울의 신학은 어떻고 베드로의 신학은 어떻고 그건 신학교에 가면 다 배우거든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걸 신학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그런 것은 다 무시해버립니다. 다 주의 복음입니다. 성령으로 받은 겁니다. 신학적으로 따지지를 않아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낮 설교할 때, 철학도 신학도 인간의 지혜와 결탁된 것이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십자가의 능력은 절대로 철학과 신학으로 전달되지 않는 겁니다. 그걸 부정하면서 곧 바로 오는 거예요. 수건을 통해서. 수건을 통해서 받는 게 뭐냐 하면, 니가 얼마나 못났으면 십자가에 죽어야 했는가, 니가 알지 못하는 죄까지 이미 십자가에서 값을 다 치뤘다는 소식을 수건을 통해서 배후에서 이야기가 들려올 때, 놀라운 사실은 그게 믿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죄를 덜 지었는데 아직 사는 게 남아서 내 지은 죄가 이 정도로 심하냐를 체험을 들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가 하지도 않은 것까지 믿어진다는 거예요. 좀 더 살아보세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존재한다는 자체는 남한테 뭘 준다? 피해를 주고 그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왜? 무지하기 때문에. 인물이 안 되면서 탤런트 머리 해 달라 해가지고 괜히 가만히 있는 미용사보고 닦달내고 그 미용원 안 간다 하고 남한테 아픔을 주잖아요. 왜? 본인이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래서 첫 째 시간 정리해 봅시다.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리고 세상은 이상한 세상이에요. 세상은 이상한 나라고 그리고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내가 누군지를 하나로 규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걸 두 개로 종합해버리면 나는 흘러가는 대로 흘러간다. 그걸 가지고 무슨 존재라 하는가 하면, 필연적 존재가 아니고 우연적 존재. 

우리는 매일 맞닥뜨리는 것이 우연과 우연의 물결과 파도 속에서 우리는 그 가운데 샤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원인을 규명할 것 같지만, 해보면 정작 원인은 나타나지 않아요. “당신 차가 왜 박았습니까?” “나는 가만히 있는데 차가 와서 박았다.” 그게 원인인 줄 알았더니만 그 사람이 늘 박는 성질이 아니고 그 전날 저녁에 부부싸움해서 성질나가지고 박았다. 부부싸움을 왜 했느냐, 왜 했는가 따져보니까 그걸 따져보니까 부부싸움 할 만큼 다했는데 왜 했을까. 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내가 왜 많은 차 중에 하필이면 내 차가 니한테 바쳐야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요. 

인간은 전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본인도 모르는 알 수 없는 내가
지금 알 수 없는 물결에 휩쓸려가지고
오늘도 알 수 없는 채로
앞으로 어떻게 될 줄 모르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175.♡.147.179)14-10-11 15:24 

안양20140912b-히8장6절(구약 해석)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8장5절에 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요 본문이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실체 있고 모형과 그림자가 있으면 우리가 연관을 지을 수가 있는데, 실체가 없는데 모형과 그림자라고 한다면 실체를 알아먹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잖아요. 실제 다 지은 아파트보고 그 설계도를 보면 이해가 되는데 실제 아파트가 없는 상태에서 모형만 보고 하면 우리의 상상력이 동원되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인간세계의 모형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인정을 해줍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는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돌아가게 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상상한 것은 그 천국도 왜곡될 수밖에 없지요. 모형은 줬는데 모형을 주고 이 모형에 부합되는 합당한 실체를 그리라 하면 전부다 엉터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지요. 왜냐 하면, 우리가 시커멓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모형 중에서 최고의 모형이 뭐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만들어낸 천국의 모형입니다. 다시 한 번 보게 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인데, 이들의 사상 가운데에서 일부가 그 대표 중에 하나가 바로 사울이란 사람이 사도되기 전에 사울이란 사람이 갖고 있던 구약해석법이죠. 왜냐, 이 사람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했거든요. 빌립보서 3장8절. 내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 가말리엘문하 가운데서 내가 최고의 고수다. 구약해석에서 3파가 있습니다. 삼마이파, 힐렐파, 가말리엘파, 이 삼두마차가 구약 전체를 해석해 왔었습니다. 유대교에. 

묵시문학으로 흩어진 사람의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할 때, 그 때 유대인의 해석 중에서 세 개의 해석이 힐렐, 삼마이 그리고 가말리엘, 요 3파에서 전부다 해석을 다 한 거예요. 이 해석은 정통적인 해석인데요, 특별히 천재가 나온 게 아니고 누적된 거예요. 해석 중에서 안 맞는 건 빼고 옳은 것만 하고 그야말로 개혁주의 학자들이 주장한 게 뭐냐 하면, 칼빈, 루터시대부터 해서 진짜 액기스만 진리만 뽑아서 지금까지 유지된 것이 오늘날 한국의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전통과 똑같은 전통이에요. 

내가 가말리엘 문하가운데서 거기서 최고로 있었다. 이 말은 모든 구약 해석에 대해서 이게 정답이라고 이미 내렸다는 거죠. 그게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해석을 할 때 어떻게 해석을 했는가,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일 때, 그건 어떤 관점에서 잡아 죽였는가, 그걸 알면 되지요.  그럼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나와 있지요.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거기에 보면 구약해석을 어떻게 해왔는가가 나와 있어요. 구약 율법은 열심히 지킴으로서 무엇을 얻는다? 의를 얻는다

현재 모형과 그림자만 있고 실체는 모르는 상태에서 제가 지금 설명하는 것이 인간이 인간의 모든 지혜를 집대성할 때 이 모형과 그림자에서 실체를 어떻게 뽑아내서 천국은 이렇다고 어떻게 정립 되는가 그걸 설명하는 겁니다. 그걸 설명하면서 사울이란 사람이 가말리엘 문하에 있으면서 그들은 어떻게 천국을 구성 했는가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보고 너희는 악마의 아들이다, 하고 너희들의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을 때, 주님은 뭘 보고 그들이 잘못이라고 했는가를 이걸 알아야 돼요. 왜? 그들은 우리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들은 이미 다 도달해있거든요. 그 수위에 도달해 있어요. 성경해석은 어떻게 하느냐, 문자적 해석이냐, 문맥적 해석이냐, 어떤 해석이던 간에 이미 그들은 우리가 도달하는 그 해석을 다 이미 도달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말씀에 대해서 말씀을 지키면 의가 나온다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면 의가 나오는데 말씀에 의가 나오는 경로가 두 가지 경로에요. 하나는 신비주의적 경로가 있고 다른 하나는 형식적 경로가 있습니다. 형식적 경로는 사두개인이에요. 신비주의적 경로는 바리새인 경향입니다. 지금도 나와 있어요. 현재 유대교 있잖아요. 유대교가 전통적으로 구약을 해석할 때, 잠언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전도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해석법이 나와 있어요. 

그 해석법에 보면 신비주의 해석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잠언서에 보면 꿀을 탐하지 마라, 그러면 그 꿀이 너로 하여금 탐욕을 일으켜서 너를 망한다.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걸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빵은 말씀이고 꿀은 그 말씀에 들어있는 악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볼 때, 악한 것을 살펴서 악한 것은 버리고 진짜 빵만 먹어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해석이 다 그래요. 

유대교 해석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 중심이 아니고 말씀 중심입니다. 처음 듣지요?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대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말씀이 먼저고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힘들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말씀만 지켜야 돼요. 그래야 돼요. 힘들더라도. 안식일에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안식일 지켜야 돼요. 왜? 지더라도 안식일 지키라는 말씀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교 마카비 전쟁이 있었어요. 나라 잃고 그 주변에 아람나라가 통치할 때 셀레쿠스 왕국이죠. 전쟁을 했는데 고지 곧 대로 안식일 날 전쟁을 안 해버렸어요. 그러니까 셀레쿠스 왕들이 그걸 이용해서 안식일 날 공격해왔습니다. 이스라엘 6년 전쟁도 처음에 그랬어요. 그래서 나중에 법을 바꿨어요. 하나님을 위한 전쟁은 전쟁해도 괜찮다고 자기 마음대로 법을 바꿨습니다. 내가 안식일날 전쟁하는 것도 안식일을 위해서 하는 거라면 그 전쟁해도 상관없다. 다만 전쟁이 끝났을 때는 다시 전쟁해서는 안 된다. 임시적으로 임시변통으로 바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마카비 왕조가 만들어진 거예요.  

유대교해석법을 지금 모형과 그림자가 나오기 때문에 설명해 드리며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모세한테 계시를 줬잖아요. 이 계시라 하는 것은 우리와 계시사이에서 뭘 만들어내는 책임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의를 만들어내면 살고 못 만들어내면 죽는 거예요. 벌 받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과 계시를 준다는 말은 우리에게는 무슨 능력이 있다?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다는 거예요. 그 있는 능력을 발휘하라는 겁니다. 있을 때 뭐를 발휘하느냐, 하나님의 신이 주어져요. 하나님의 신이 주어지게 되면 성령을 주게 되면, 성령에 의해서 신에 의해서 우리가 지키지 못한 말씀도 지켜서 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겁니다. 들어보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니에요? 천주교, 개신교, 모든 교회가 이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들은 이것이 바리새인 해석인지를 몰라요. 

그들은 바리새인 해석인지를 알려줘도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돈을 빼먹고 봉사와 충성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데 안했으니까 벌 받아도 싸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부흥사들이. “지금도 늦지 않았어. 지금도 개과천선해서 이제는 주를 섬기면 당신은 잃어버렸던 돈과 사업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가정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리 되는 겁니다. 그 말 듣고 안 찝집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찝집해요. “아이고, 더러워서 한 번 준다.” 

아, 진짜 뜻이 뭐냐, 그것이 알고 싶다! 이제는 알려줍니다. 바울은 바로 뭘 거론하느냐 하면, 아까 제가 인간이 누구냐 모른다 했지요. 인간은 아무도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의를 해서 구원받는다 생각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는 무엇부터 출발하는가 하면, 우리가 과연 구원받을 대상이 되느냐 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내가 죽어서도 천국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것은 인정하는데 과연 그럴 자격이 있다 없다, 를 우리는 어느 대목을 가지고 “나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하고 외칠 수 있느냐를 따지고 묻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구원되고 싶지요? 그러면 구원될 자격이 있다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근거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보세요. 반칙이잖아요. 마귀가 집어넣은 거예요. 비록 너의 조상은 따먹었더라도 니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도 말씀을 지키면 너는 죽어서 천국갈 수 있다. 이거 하나님의 뜻이니까. 이건 종교적인 본성이에요. 본성이지 주의 뜻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세리와 창기를 거론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강도가 낙원에 간다고 했을까요?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미 그 전에 분위기가 바리새인의 사두개인의 신학에 이미 꽉 장악된 분위기에요. 

세리와 창기는 세상에서 먹고 산다고 해서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계급적으로 7단계 제일 처진 단계에 속한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7단계 가운데 제일 못한 단계가 백정 같은 그런 단계에요. 마치 인도에서 층이 4가지 있잖아요. 수드라단계, 제일 천민 단계. 브라만 계급은 종교적인 제일 높은 단계. 신에 그만큼 가까이 있는 곳. 신과 멀어지게 되면 멀어진 만큼 빛이 덜 스며오기 때문에 지하실에 있기 때문에 시커먼 더러운 인간들,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 그런 존재 하지만, 빛과 마주대한 쪽은 그 표면이 빛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굉장히 고상하고 거룩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특징은. 일종의 계급사다리를 만든 겁니다.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처럼 인간의 모든 그런 계층화시키는 그런 것이 있었다 말이죠. 

그 강도 세리, 창기들은 왜 그 당시에 천대 받았느냐 하면, 이들은 말씀과 너무나 거리가 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어요. 말씀과. 그리고 말씀에 의하면 이들은 저주받아야 되고요,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죽어야 돼요. 강도, 돈 받는 세리 삭개오는 돌로 쳐 죽여야 됩니다. 다만 로마가 그걸 봐주고 있으니까 로마의 하청업체니까 못 죽여서 그렇지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세리를 쳐 죽여야 돼요. 주님이 하시는 말이 나는 죄인을 부르러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하면 그 당시에 마치 의인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의인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문자대로. 문자대로 보면 안돼요. 십자가로 보게 되면 의인도 없으면서 의인이라고 하니까 죄인 중에 더욱 더 죄인이다. 이런 뜻이에요. 없는 죄인을. 

인간은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왜? 처음부터 인간은 죄인 중에 괴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인간은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다. 그러면 그 다음 문제에요. 그러면 말씀 지킬 능력이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말씀을 줬는가,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로 저주아래 있게 하심이라, 저주아래 있다는 말은 어떤 사람도 입을 막아버리고 아무도 구원 받을래요, 할 사람을 조용히 해! 조용히 해! 전부다 잠잠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묻기를 “왜 하나님이 그렇게 했는가?” 하나님이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구원될 수도 없는 사람에게 구원되는 양 지키면 복 받는다.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이렇게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런 트집을 썼는가 할 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것은 우리한테 준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한테 줬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거예요. 아주 사도바울은 정말 사람으로서는 특이한 사람은 나올 수 없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사람 같으면 누구나 남은 욕해도 누구는 부정 못합니까? 자기 자신만큼은 어떻게 살아보려고 하잖아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뭐냐,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의 형제가 구원된다면 나는 밀려서 저주받기를 원한다고 했지요. 그게 사람으로서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것도 이것은 창세전에 하나님이 택했는데 어떻게 택했는가, 죄인 중에 괴수로 택했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했었고 그런 포학자요, 폭행자요, 그런 인간을 구원한 것은 창세전에 이미 예언됐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그런 이야기를 해버려요. 

그러니 이것은 창세전에 나를 구원했다가가 아니라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구원했다는 거예요. 결국은 사도바울의 모든 계시의 요점은 뭐냐, 모든 계시는 예수님을 주되심으로 증거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냥 거기에 필요한 촉수들, 하나의 문어의 발정도, 하나의 가지 곁가지에 불과하다. 중심된 가지는 주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특히 사도요한 같은 경우에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지만, 유대인들이 뭘 이해 못하는가 하면, 아들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아들을 자기들로 아들을 본 거예요. 출애굽기4장25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 했으니까 자기들을 아들로 본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아들들이 되어야 돼요. 아들이 아니고 아들들이 되어야 돼요. 사십만 이니까. 사도바울은 아들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그렇게 했느냐 물으니까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아담도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아담을 죄에 왕 노릇하게 만든 것은 장차 의의 왕 노릇하기 위한 하나의 모형자체로서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사람은 뭐냐, 모형이라는 겁니다. 있다가도 없어질 모형이라는 겁니다. 누구만 보여주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의로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죄인으로 살아야 될 모형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새까맣게 칠한 것. 그 정도만 하면 OK. 됐어! 평생 동안 우리는 죄만 지으면 되는 겁니다. 구원 문제는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주께서 구원하게 되면 “주님께서 구원했습니다.”라는 고백만 남기고 천국에 합류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내가 어떻게 나한테 달음박질 했습니다. 애썼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구원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할 것 없고 주께서 다 하셨고 주께서 다하셨다는 것을 증거 하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되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뭐가 빠집니까? 종교가 빠져버리고 모든 제도 형식도 다 날아 가버리지요. 

그럼 제도, 형식이 없느냐 장로, 집사가 없느냐, 주면서 그걸 반복해서 주게 돼요. 아~ 참, 이게 어려운데요. 형식과 제도를 그냥 주는 게 아니고 뭘 주느냐 반복해서 줘요. 반복해서. 반복해서 준다는 말은 한 번 준 것은 어떻게 된다? 날아가 버리고  새롭게 주어지는 거예요. 일곱 교회도 마찬가지고 지금 일곱 교회 다 없습니다. 다른 교회 또 있잖아요? 반복해서 준다는 것은 날마다 없어지고 날마다 새롭게 살게 해 주신다는 뜻이에요. 날마다. 

형식이 없다가 아니라 무형식주의가 아니라 형식을 주되 형식에 얽매이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하는 거예요.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는다. 물론 은혜 받았지요. 하지만 그 다음에 앉아보세요. 은혜 오지를 않아요. 이게 뭐냐, 우리는 우연성으로 족해야 돼요. 그러면 앞자리에 앉으니까 그럼 중간 자리에 앉으면 되겠네. 중간 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지요. 그 다음에 보니까 중간 자리에 은혜가 안 되는데. 그럼 앞자리에 은혜 돼요? 

그럼 도대체 우리는 뭐냐, 그럼 어느 걸 붙잡아야 됩니까? 붙들지 마라. 어디 있든 간에 그 때 은혜 준 것은 니가 무슨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준 것이 아니고 헌금했기 때문에 준 게 아니고 그런 흥정 타협 안 합니다. 우연히 준 거예요. 우리의 구원은 우연입니다. 우연히.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 우연히 만났네. 그런 노래 있잖아요. 왜 우연히 되느냐, 필연은 한 분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일은 오직 예수님이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 끝내기 위해서 어느 것이라도 먹는 거, 마시는 거 어느 것 하나라도 주님에 의해서 안 되는 일이 없어요. 다 주께서 발걸음 세시고 주께서 머리카락 자르게 하시고 전부다 다 주께서 하신 거예요. 나이 60에 벌써 머리카락 이만큼 남은 것도 주께서 남게 하신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 먹든지 마시던지 주님을 위해서 값으로 사서 이제는 너희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다? 내 것이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내 것이라고 여겼을 때 니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 그 행동 그대로 주께서 하실 것이다. 단,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걸로 해요. 나는 내 것이다, 라는 것과 주님이 내 것이다, 라는 것과 차이는 전혀 없어요. 바뀐 것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내 주인이었을 때는 내가 마신다, 내가 포도주를 마신다, 내가 뭘 한다, 내가 했는데, 바뀌고 난 뒤에는 누가 했다? 주께서 하게 하셨다. 수동으로 바뀌어요. 피 동력으로 바뀌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한테 피 동력으로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뭘 주느냐, 놀랍게도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토록 그리웠던 자유! 내가 나한테 억매이지 않는 자유! 팔고 받고 누리는 자유! 그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여기서 손을 대게 되면, 우리는 피 동력에서 적극형으로 바뀌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날아가 버려요. 감사가 날아가 버립니다. 잠언서 말씀대로 맡겨라, 주께서 너의 길을 이루리라, 그러나 너의 길은 니가 뭔 줄 몰라요. 어쨌든 이루십니다. 여호와는 목자시니 우리는 부족함이 없게 하실 거예요. 그 가운데 자유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자유적인 요소 중에 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발람이 길을 가는데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존재가 하나 등장하지요. 누구냐 하면, 당나귀입니다. 당나귀는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습니다. 예속되어있는데 그 때 어떤 한 순간만큼은 예속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얻었어요. 뭐냐 하면, “어이 이랴!”하니까 가지를 않아요. 버티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하게 때렸어요. 때리니까 나귀가 갑자기 입이 터지면서 “왜 때리십니까?” 이리 나온 거예요. 우리 같으면 놀랬을 거예요. 집에 있는 강아지 때리다가 강아지가 경상도 말로 “와 때리는데에?” 정말 충격 받았을 거예요. 기절초풍할 겁니다. 

그 당나귀는 자유를 얻은 거예요. 요한복음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 있지요. 그 여인은 자기 자신한테 매였어요. 물을 자기가 떠준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시작해서 자기가 시작한 물을 주님한테 떠주려고 했어요.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 만나 바뀌었습니다. 자기 살아온 모든 인생, 다섯 명의 남자와 남편과 여섯 번째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자유였습니다. 우리도 그런 자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ㅎ 세상에 한 남자와 사는 게 아니고 여러 남자와 사귀어보고 그런 자유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ㅎ 누~려 

그 여자 하나는 “나 이렇게 자유롭다가  주님 만났다!” 딱 그 한소리만 하면 돼요. “살아온 모든 것이 내 인생이 아니었다. 주의 것 이었다!” 주께서 자기 자신을 펼치고 자기 자신을 증거 하라고 나로 하여금 그 길을 안 가면 안 되도록 그렇게 몰아세운 거예요. 그걸 사마리아 여인은 알았던 거예요.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버려두고 갔습니다. 물동이가 문제입니까? 지금. 메시아 만났는데. 물동이 있으나 없으나 천국 가는데. 주님이 하신 말씀이 추수가 이런 식이다 말이죠. 이렇게 된 자라야 알곡이라 할 수 있고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알곡이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뭔가 자기 인생에게 자기가 파묻혀 사는 것, 숨이 막혀 사는 것, 거기서 뭔가 벗어나야 돼요. 벗어나는데 자기 힘으로 벗어나게 되면 자살이 돼요. 거울에다가 마누라 욕하고 죽는 그런 것처럼 자살이 되지만, 주님께서 성령을 주신 자는 자살 안 해도 돼요. 어차피 늙어 죽을 걸 미리 당겨서 할 거 없잖아요. 마음껏 주께서 펼치는 그런 파티장소를 마음껏 구경하는 거예요. 내 자식은 어떻게 가고 공부는 어떻게 하고 외국 가서 어떻게 하는가 한 번 보자, 구경하면서 나는 서서히 96살 돼서 자살하던지 간에 되고. 내 인생 아니니까 주님께서 마련한 파티장이니까 그걸 미리 천국잔치를 맛보고 되는 거예요. 요렇게 바뀔 때에 사도바울은 뭘 보는가 하면 십자가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일체 니가 너 자신에 대해서 요만큼도 어떤 기여나 보탬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 십자가에요.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왜 자꾸 마귀로 하여금 내 다시 내 행동으로 가도록 그렇게 자꾸 유인 받느냐 이 말이죠. 옛날에 그만큼 당했으면 됐지. 지금껏 당했으면 되는데 왜 자꾸 ‘그래, 내가 이 정도 더 하게 되면 형편이 더 나아지겠지.’ 자꾸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을 내가 스스로 사슬을 가지고 자기를 얽고 조아 매고 숨 막히도록 자기 인생을 얽어매느냐 말이죠.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니가 구원받는 것이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율법의 행함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은 것이 헛된 죽음이다. 십자가의 헛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면 니가 니 손에서 손 떼라는 말입니다. 율법의 행함에서 손 떼라는 말이죠. 율법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건 맞는데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보라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비춰보면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비춰보면서 보라고 있는 건데 그래서 제가 중국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그 다음에 뭡니까? 지키지 마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은 이래요. 아예 안 보고 안 지키면 되지, 그러면 그것은 안돼요. 그것은 하나의 요령 부리는 것밖에 안돼요. 

말씀을 보시고 주께서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하시고 내 쪽에서 이룰 게 없음을 기쁘게 하면서 지금 누리는 것이 주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그냥 공짜로 얻어 받은 그런 인생인 것을 감사하라 이 말이죠. 그래야 모든 게 감사하지요. 

여기 6절에 봅시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그 다음이 뭡니까? 중보시라. 이 아들이라는 게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뭐는 아니다. 존재는 아니고 기능이에요. 왜 이 땅에서 존재가 아니냐 하면 이 땅에는 존재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내가 있지요. 내 자식이 있지요. 내 남편이 있고 친정 부모 있고 전부 다 심지어 개도 있어요. 전부 다 존재에요. 

타인이 있고 기차간에서 고함지르면 시끄럽다 하지요. 누가 있습니까? 타인 존재가 있잖아요. 그래서 존재를 따지게 되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주님이여, 어떤 분입니까? 제발 존재로 나타나 주시옵소서.’ 주님은 존재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존재기 때문에. 주님이 존재로 나타나버리면 주님에 의해서 믿어지는 게 아니고 내가 알아서 골라잡아서 주님 곁에 서서 “아무래도 주님 같아.” 내 결심과 선택에 의해서 주님을 채택하는 셈으로 믿게 돼요. 

그러니까 주님 쪽에서 존재를 어떻게 합니까? 존재로 나타나시되 늘 존재의 모양새를 바꿔버려요. 성경에 보면. 부활하고 난 뒤에 주님의 얼굴이 하나 같이 하나의 얼굴이 아닙니다. 나타나도 못 알아봐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못 알아본다고요. 심지어 요한복음 마지막에도 못 알아봤어요. 물고기 잡아주고 니 오른편에 던지라 하니까 그 소리 듣고 알았지 못 알아봤어요. 얼굴이 달라요. 그리고 구약의 천사들이 얼굴이 다 달라요. 같은 얼굴로 두 번 다시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영의 존재는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고정된 존재가 고정되지 않은 것을 고정된 존재에 담을 수가 없어요. 차라리 바람을 그릇에 담는 정도로 무지막지한 인간이에요. “바람아, 내 그릇에 담겨다오.” 바람을 어떻게 그릇에 담습니까? 공기의 흐름을. 기능은 존재를 지배하게 되지요. 존재가 버티려고 해도 갑자기 기능이 오게 되면 우리는 어쩔 줄을 모르고 두려워하게 되는 겁니다. 

아들은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뭐로 나타난다? 기능으로 나타나지요. 그 기능이 뭐냐, 바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는 기능으로 옵니다. 히브리서12장6절에 보면,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되어있어요. 먼저 채찍질 받은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 다음에 받는 사람이 누구냐,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 다 채찍 받습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고 아들이기 때문에 때린다는 거예요. 

때린다는 말은 뭐냐, 우리 몸은 항상 주의 뜻과는 반대되는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얻어맞아야 정신을 차려요. 따라서 징계가 되도록 살아야지 내 쪽에서 착하게 살아서 징계 안 받는 쪽으로 가게 되면 이건 또 하나의 독자적인 노선이 돼버려요. 자기 존재가 돼버려요. 하나의 기능에 맡겨야 되는데 내가 기능이 아니고 존재로 정립해버리면 주님은 나에게 타인이 돼버립니다. 

주님이 타인이 돼버리면 기도해도 주님 상대로 기도하게 되지 주님 안에서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나를 다루는 게 아니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주님 가만히 계셔보세요. 30분 뒤에 하겠습니다. 빨리 화장실에 갔다가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마치 타인을 다루듯이 주님을 그렇게 다뤄버려요. 화장실에서 안 나오면 계속 기도 못하겠네. 주께서 인도하시는데, 나는 내가 인도하고 “주님께서는 내 인도하는 것을 그냥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되어버려요. 

연세 많은 시어머니나 시아버지를 뒷방에 해놓고 그냥 밥이나 갔다가 대고 음식이나 갔다 대면서 아침 문안 인사하게 되면 그건 어른을 모시는 것이지요. 어른에 의해서 사는 게 아니고 어른을 모시는 게 되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어른이 매일같이 일어나서 아침에 명령 지시한다면 이것은 어른에 의해서 내가 사는 게 되잖아요. 그래서 디모데전서에 뭐냐, 하나님께 사로 잡힌 자가 되어야지 내가 독자적으로 근사한 나를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주님하고 근사한 나로 따로 협상을 타협을 나서게 되면 이것은 제대로 된 게 아닙니다. 

그러면 뭐가 빠지는가 하면, 중보가 빠져요. 자, 이야기 계속해 봅시다. 아들은 존재가 아니고 뭐다? 기능이다. 그러면 아들은 중보자이지요. 중보자가 나와 함께 있다는 말은 매일같이 아들의 기능이 내 안에서 작용 한다 그런 뜻이에요. 자, 히브리서를 방금 이렇게 설명했는데 잘못된 설명이 뭔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잘못된 설명이 뭐냐,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중보자임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예수님께 바르게 사세요.” “알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똑바로 살아야 주님 앞에 바르게 살게 아닙니까? 여러분이 잘못 살면 주님께서 섭섭해 하십니다.” 굉장히, 굉장히 대단히, 대단히 성경적으로 보이는데 예수님을 내 밖에 세워두는 타인처럼 다루지요. 타인처럼 다루어지는 거예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주님 어때요?” “주님 이 모습 어때요?” 기도해놓고 “주님, 멋있지요. 복 주세요.” 또는 지가 잘못해놓고는 실수해서 잘못하니까 “이번 주는 벌 내리시면 안 됩니다. 이번 주 중요한 사업 건이 있는데 교회 늦게 왔다고 그것 가지고 삐져가지고 또 사업 안 되면 나 그것가지고 정말 괴롭습니다.” 이리 되어버리면 이건 뭡니까? 주님을 완전히 타인으로 세워놓고 내가 알아서 맺을 때, 내가 관계 맺은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건 중보가 아닙니다. 그건 상대방을 이용하는 거지 중보는 아니에요. 

중보라 하는 것은 덮어씌우는 겁니다. 마치 커다란 고깔처럼. 또는 어린애가 놀고 있는데 여기 큰 깡통하나가 덮쳐버리면 애는 깜깜해지지요. 완전히 덥혀 지지요. 이게 바로 중보자의 기능이라 말이죠. 우리의 하는 모든 것을 이 안에서 중보자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아주 간단해요. 예수 안에서 인사하고 예수 안에서 존경하고 예수 안에서 사랑하라. 그냥 사랑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사랑하라. 그럼 예수 안에서 사랑하게 되면 이걸 보신각종이라 봅시다. 보신각종이 우리 하나 들어갈 만하겠지요. 보신각종에 우리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간 겁니다. 보신각종이 울리지요. 중보자에 의해서 울리는데 그 울림이 뭐냐 하면, 사랑이잖아요. 사랑, 사랑, 사랑, 랑, 랑, 랑..., 하고 울리겠지요.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 이 말입니다. 용서, 용서, 용서, 서, 서, 서..., 그 용서로서 서로 용서하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성령 안에서 사랑과 용서가 되면 참 좋겠는데, 또 이 육적인 몸이 살아있어 가지고 갑자기 보신각종이 날아가 버리고 맨몸이 되어버리면 ‘내가 제한테 사랑해주면 제는 나한테 뭘 해줄까?’ 되면 또 이해타산으로 서게 마련이에요. 그럴 때 또 뭡니까? 다시 종이 떼찌해 버리면 그걸 징계라 합니다. 니 지금 누구 안에 있는 거야? 하고 떼찌, 떼찌해주게 되면 왕, 왕, 왕... 다시 울리지요. 

이거하는데 재산 교회에 돈 바칠 필요 없어요. 지하철 전도 안 해도 돼요. 가만히 앉아있어도 돼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될 문제에요. 왜? 가만히 앉아있어도 보신각종 안에 들어있으니까. 꼭 1월 1일, 8월 15일 날 종칠 때 기다릴 필요 없어요. 매일같이 우리는 이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이게 중보자에요. 그게 어디 나오는가, 히브리서7장25절 나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보세요. 보신각종이 기능으로 하잖아요. 

늘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잖아요.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존재가 아니니까.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안 보이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갈 때, 자기 존재를 잃어버렸어요. 그러니까 보이는 거예요. 주님이. 그 때 그가 누군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긴 왜? 자기가 자기 자신인데. 나중에 다시 오게 되면 자기 자신은 돌아왔지만 자기는 그냥 돌아왔어도 자기 자신을 기능 속에 주 안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바라보지요. 내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약한데서 강함이라. 내가 어떤 수모를 당해도 주께서 주신 은혜라서 나는 감사한다. 이러한 정말 놀라운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환란에 처하거나 곤고에 처해도 그것 때문에 내가 미치지 않는다. 이것마저도 내가 가난한 것도 부한 것도 주의 일로 보는 거예요. 부자도 주의 일이에요. 가난을 너무 자랑하지 마세요. 부자인 것도 주의 일이라니까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부자 될 때, 그게 참 위험한 일이죠. 부자 되게 되면 기능에서 뭐로 바뀝니까? 나는 부자라는 존재로 바뀔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그것 때문에 주의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중보시라, 중보신데 그 다음 7절에 봅시다. 7절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언급하고 모형과 그림자가 이러한 실체를 알아낸 게 아니고 실체가 이미 왔으니까 우리가 모형과 그림자가 어떤 기능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내가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으니까 하나님도 나처럼 인간의 형상이다. 이렇게 하면 안 되고요, 내가 지금 그리스도만 인정하니까 이런 기능이 있으니까 내가 모형이고 실체는 주님이다. 이러면 맞는다 말이죠. 실체와 모형을 존재와 존재로 보지 마시고 기능으로 보시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걸 지금 설명하는 거예요. 기능으로 보셔야 돼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내 게 한 것이다. 소자를 아무리 봐도 예수님이 안 보여요. “소자 이리 와 봐, 예수님 한 번 보자!” “없네.” 이러면 안 된다 말이죠. 

7절 봅시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첫 언약이 흠이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첫 언약이 흠이 있지요. 아하, 이게 설명이 꼭 필요한데요. 로마서7장에 보면, 율법은 선한 것이에요. 선하다는 말은 흠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이에요. 율법은 선한 거예요. 로마서 끝에 디모데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이거 다 사도바울이 썼다고 보거든요. 다른 사람은 그걸 반대하더라도 나는 이거 사도바울이 썼다고 봐요. 그럼 같은 사도바울이 쓴 책에서 왜 율법은 선하다고 이야기하고 이쪽에서는 왜 흠이 있다고 하느냐, 이 이유를 설명해 드립니다. 

잠이 오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여기서 설명해야 돼요. 율법이 이리 있다면, 율법 책이 있다면, 율법 자체적으로서는 흠이 없어요. 그런데 율법 자체가 인간이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 욕구와 결부할 때 율법에서는 반드시 흠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니까 율법 안에서는 율법이 그냥 단독적으로는 흠이 없는데 율법으로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기능 안에서 율법은 흠이 있어야 되고 반드시 있어야 돼요. 율법은 흠이 있어야 돼요. 왜냐 하면, 인간이 흠이 있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에. 율법은 흠이 있는 인간을 무시하지 않고 율법 자체가 인간에 의해서 다루어지다 보니까 율법은 흠이 있는 율법이라고 그렇게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겸손함을 지니고 있어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법이라면 우리를 구원해야 되지 않겠느냐, 구원해야 되는데 율법 가지고라도 구원이 안 된다면 결국은 율법가지고 구원이 안 된다. 율법으로 못 한다. 그러니까 율법은 무능하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흠이 있다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그 인간들이 그렇게 규정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서 그걸 그대로 받아주는 거예요. “너희들이 구원받고 싶나?” “예, 구원받고 싶습니다.” “그럼, 율법 줄게.” “아, 율법 가지고는 안 됩니다. 율법가지고 구원 안 되는 이건 문제가 있습니다.”라는 인간들의 현실 상태에 대해서 주께서 그대로 용납을 하는 거예요. 옳다고 동의를 해주는 게 아니고 그걸 용납을 해주는 거예요. 

왜 용납을 해주느냐, 그걸 용납을 해줌으로서 두 번째 오시는 그 계시 안에는 인간들이 흠이 있더라도 이게 구원에 성사가 되기 때문에 첫 번째 율법과 대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첫 번째 율법과. 첫 번째 율법은 인간이 흠이 있으니까 구원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안되는데 두 번째 주의 계시는 인간이 비록 죄가 있더라도 이게 가뿐하게 성사를 시키니까 그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비교해 보니까 첫 번째 가지고는 안 되고 두 번째는 능히 되는 겁니다. 두 번째를 높이기 위해서 증거 되기 위해서 첫 번째를 흠이 있다는 걸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것을 그대로 수용해 준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예로 들 수 있지요. 애가 생일인데 아빠가 바쁘다보니까 애가 뭘 좋아하는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애가 좋아한다고 인형을 사왔다 말이죠. 인형 자체가 아빠의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에 흠이 없어요. 그런데 애가 받자마자 앙~ 우는 거예요. 인형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거예요. 인형에 놀다가 맞아가지고. 인형보다도 햄버거, 피자 먹는 걸 좋아하는데 케이크를 좋아하는데 아빠는 왜 그걸 몰랐느냐, 아빠가 “그래, 그래” 하고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고 해서 아이스크림을 줬어요. 주니까 애가 방긋이 웃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아빠가 “니는 인형이 좋으냐? 아이스크림이 좋으냐?” 하니까 “아이스크림이 좋아요.” 이미 그것은 애를 기쁘게 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 되지요. 그러면 아빠 좋으냐고 하니까 “아빠 좋아요.” 이리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첫 번째, 두 번째를 따로 분리해서 한 것은 궁극적으로 율법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 그 하나님의 전략에 맞아떨어진 겁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선악과를 심어놓은 이유도 여기에서 해답이 풀려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어놓고 인간을 따먹게 함으로 말미암아 왜 했는가, 인간을 죽게 하신 이유가 뭐냐,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해답 간단하지요. 

선악과의 존재, 생명나무의 존재, 인간의 존재, 에덴동산의 존재, 전부다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략이었어요. 마귀는 그 전략에 말려든 거예요. 마귀가 따먹도록 허용한 것도 그걸 따먹어야 예수님이 높아지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 뒤에 본문 8절에 보면,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이리 나오지요. 주께서 가라사대, 모든 것이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는 주께서 하는 거예요. 

9절에 보게 되면,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요 대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 십계명을 줬습니다. 법을 줬는데 그들이 그 법을 듣기는 들었는데 어디가지 파고들어가지 못했는가 하면, 마음까지는 들어오지를 못해요. 마음까지는. 그들의 마음까지는 말씀이 들어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 율법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이냐, 아니냐, 인간의 마음은 절대로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율법은 마음 앞까지만 스톱이 되고 마음 안에 못 들어와요. 율법은 그렇게 못 들어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율법은 원래 누구의 마음이냐 하면, 함께 동행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거든요. 동행하시는 하나님과 백성이 같이 한 마음이 될 것 같으면 율법도 쏙 쏙 들어오는데 이미 틀어졌다 말이죠. 모세와 백성들이 마음이 틀어졌어요.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가자, 하고 백성들은 틈만 나면 애굽으로 가자, 하고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의 몸이 어떤 몸입니까? 천국을 못 봤어요. 따라서 우리의 몸은 어디에 적합한가 하면, 이 안양 땅에 이 세상에 살기에 딱 좋은 적합한 나에요. 우리 몸이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몸인데. 흥! 우리 나이가 어때서? 우리는 모든 걸 딱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게 되어있어요. 

따라서 절대로 주의 법은 우리 안에 들어올 수도 없고 들어올 리도 없고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다른 애굽의 마음이 꽉 차있기 때문에. 그 마음 추방하고 주님의 마음이 들어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주님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그들을 구원해야 되잖아요.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들 입장을 방치해서는 안 되고 너희들 마음은 이 정도밖에 안 돼! 라는 것을 분명히 언지를 해줘야 되겠지요. 그런 언지를 주기 위해서 마음에 안 들것을 알면서도 마음에 안 들어오는 율법을 십계명을 그들에게 먼저 던져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율법 없이 예수를 믿어버리면 내 힘으로 믿는 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 율법을 먼저 주게 되면 율법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요? 안 들어와요? 안 들어오지요. 그러면 예수님 주면 예수님이 마음에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안 들어오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았다면 어떻게 돼요? 내 마음에 들어올 수 없는 분인데 내 마음에 아주 후벼 파가지고 아예 거기에다가 어떤 주님의 자기 자리를 따로 만들어서 그 만든 자리에 허락도 없이 내 허락 없이 턱하니 들어와 가지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한 거예요. 

그 후벼 팔 때, 후벼 파야 될 정당성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니가 죄인이라는 거예요. 저주받아야 마땅하고 죽어도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안에 율법을 율법이 사라진 게 아니고 율법이 도리어 다 담겨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 모든 율법이 다 담겨 있는 거예요. 모든 율법을 지켜도 십자가 믿지 않으면 저주받는 거예요. 사실 모든 율법을 못 지키지만. 그런데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마음에 율법을 줘도 안 들어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다. 백날 해봐야 해라, 니 혼자 많이 해라, 우리는 안 듣습니다.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들어와 버리면 뭐도 함께 들어왔다? 그 사도바울의 모든 명령과 지시도 함께 들어온 게 되지요. 그 들어온 그것을 율법 완성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해서 결혼생활 유지되는 게 아니고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사랑하게 되면 이건 이혼이 안돼요. 만약에 법으로 따져버리게 되면 10년 동안 법 지키다가 11년에 못 지키면 그게 이혼이 돼버려요. 설거지도 못 하는 게 나가! 이게 이혼이 되지만, 처음부터 사랑하게 되면 이혼이 안 됩니다. 

보통 여자들은요, 살다보면 행복하게 살겠지, 해서 결혼하거든요. 보통 그렇잖아요. 그런데 참으로 사랑한 사람은요, 니가 없으면 죽을 것 같아서 사랑하는 사람들, 정말 내가 다른 여자하고 결혼하게 되면 니가 보고 싶어서 신혼여행 가지도 않고 뛰쳐나오는데 뒤에서 자기 사랑하는 여자가 달려와 가지고 둘이 도망치는 졸업이라는 영화에 나오지요. 결혼이라 하는 것은 니가 없이는 못 살기 때문에 해야 되는 것이지, “아이고, 이왕 부모들이 맺어준 거 억지로 살면 정으로 우정으로 살겠지.” 이러면 한 번도 결혼생활 해본 적이 없어요. 

니가 없이는 내가 못 살 것 같아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너를 헤어질 수 없어. 니가 만약에 다른 남자와 결혼 했으면 내가 결혼 안하고 매일같이 밤마다 니 창가에 가가지고 “내 여인아, 창문을 열어다오!” 노래를 부르면서 니가 살 동안은 내가 매일 같이 출근하듯이 밤에 가가지고 너를 사모하면서 나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겠다. 그런 남자 없다 칩시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아가서 말씀대로 여자 쪽에서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남자 네가 없이는 못 살겠다 한 거예요. 창세전에 택한 백성은 주님 쪽에서 못 살겠다고 우리를 찾아오신 거예요.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매일같이 결혼하면서도 주 안에 있으면서도 주께서 매일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니가 나를 사랑 안 했다. 니 마음속에 내가 없었다. 하지만, 니 마음속에 내가 들어있게 했다. 니는 지금도 틈만 있으면 눈 돌려가지고 누구를 바라보지만, 그럴 때마다 떼치! 떼치!” 해가지고 징계를 해가지고 다시 “이리 와! 이리 와! 니 남편. 니 피 흘린 남편 봐! 다 끝났어. 니 죄 없어. 용서한 거야.” 보게 하시는 겁니다. 이 주님의 영이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 내십니다. 이게 바로 중보자고 이게 바로 율법과 언약의 관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인데 우리가 어떻게 토를 달겠습니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고 살아온 이스라엘 역사가 이러하고 사도바울이 생애가 이러한데 우리가 어떻게 부정하겠습니까. 확실한 진리 가운데서 더욱 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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