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0613a-히7장27절(제사장) - 이 근호 목사
대제사장에 대해서 나오기 때문에 대제사장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26절에 보면,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여기서 대제사장 되시는 분은 누구냐, 예수님이거든요.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27절, 28절에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대제사장들 그 제사장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27절에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사람들로 세워진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이 하시는 대제사장과의 차이점을 이렇게 소개시켜 놨지요. 그런데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게 되면 그냥 천국으로 올라 와라, 이러면 될 문제인데 왜 대제사장을 세워 났느냐 입니다.
예를 들면, “천국에 오되 운전면허증 따고 오너라.” 라고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지시를 한다면 우리가 묻는 게 당연해요. “천국 가는데 왜 운전면허증이 필요합니까? 하나님.” 묻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러면 “니는 천국 가서 운전만 해야지.” 이렇게 되듯이 “니는 대제사장을 세우고 그 대제사장을 통해서 천국 오너라.” 라고 한다면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두 가지가 주어지게 되어있어요.
뭐냐 하면, 대제사장이 없는 천국을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여기에 있다면, 한쪽은 대제사장이 있는 걸 말하죠. 대제사장은 출애굽기 28장에 아론의 자손을 통해서 세워났어요. 대제사장이 있는 것과 다른 한쪽은 여기에 하나님 나라 그리고 인간이 있는데 여기에는 대제사장이 없어요. 대제사장이 없고 그냥 하나님 계시고 또는 하나님 나라있습니다. 자, 대제사장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상상할 수 있지요.
제가 전에 언젠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천국을 생각하고 지옥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이 세상사는 게 만족스럽지를 못한 거예요. 이 세상이 너무 살기 좋고 너무 너무 좋다. 이러면 뭐가 아까운가 하면 늙어가는 게 아까워요. “아이고, 젊어서 이 좋은 걸 즐겨야 되는데. 아! 참, 이리 좋은 세상을 내가 늙어서 죽는다 하면 너무 아깝다.” 이럴 경우에는 저 세상보다 이 세상이 더 좋은 거예요. 내 원대로 될 때, 내 뜻대로 될 때는 이 세상이 너무 좋아요. 내 뜻대로 자식들이 공부도 잘하고 내 뜻대로 내 남편도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이 다 원만하게 잘된다면 내가 이 세상 이 좋은 걸 놔두고 떠난다는 것이 오히려 아쉽지요.
그런데 이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럴 경우가 많습니까?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힘든 경우가 많아요. 피곤하지요.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행복해도 자기 몸이 늙어 아프면요, 만사가 귀찮아져요. 사람이 이빨이 아파도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적으로도 자기 뜻대로 안되고 신체적으로 자기 몸이 아파서 잠을 못 잘 정도로 고통이 팍팍 가시로 쑤시듯이 쑤신다면 농약 먹고 죽고 싶은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럴 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마 내가 죽고 난 세상은 지금 이 세상보다는 훨씬 더 좋을 것이다.’ 라는 것을 희망을 갖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방법과 기술과 거기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유명한 단체가 교회라는 겁니다. 뾰족탑 세워서 고딕체 건물에다가 십자가 걸어 놓고 천국에 보내드리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교회가 밑져야 본전 되는 거예요. 가는 게 나은 거예요. 집구석에 앉아있는 것보다도 가서 보험 들어 놓듯이 일단 교회 가서 등록해 놓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죽고 난 뒤에 그 다음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낫다면 결국은 인생 승리하게 된 셈이죠. 그야말로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하는 것처럼 시시하게 시작했지만, 끝에는 끝내 이기리라~ ‘끝내 이길 수 있다면 이 종교는 나한테는 맞는 종교고 좋은 종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기 잘 했다 말이죠. 절에 가는 것보다는, 절에 가면 “도 닦으세요. 착한일하면 복이 옵니다.” 이것보다도 노골적으로 차라리 죽어서 천국 갑니다. 이게 훨씬 더 좋고 성당에서는 그렇게 격식을 많이 갖추니까 그게 더 불편하고, 교회는 그냥 티셔츠하나 입고 가도 아무소리 않고 반겨주니까 영세니 그런 것도 절차도 간소하니까 교회가 좋은 거죠.
자, 그런데 결국은 제가 하는 말은 평소에 사람의 생각에 대제사장의 요소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이게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견지하고 있는 개념 속에는 이 대제사장이 있는 개념 자체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없는 상태에서 뭐만 노린다 했습니까? 방금. 죽어서 이 고생 많은 세상을 하직해도 이 세상에서 고생한 걸 충분히 보상해주고 다 위로해줄 수 있는 그 하늘나라가 있는 이상은 내가 이 생각을 견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 거예요. 나는 죽어서 천국 간다는 요 생각을 그냥 고수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뭐가 빠졌다고 했습니까? 대제사장요소는 빠져 있지요. 그 아이디어는 빠져있는 거죠.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죽어서 천국 간다. 이것만 교회에서 이야기해주면 참 교회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겠는데 만약에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오기 전부터 알고 있던 ‘내가 죽어서 천국 간다.’ 이거 말고 뭔가 대제사장의 요소를 새롭게 집어넣어버리면 그 때부터는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 하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다른 거거든요.
대제사장이 들어가 버리면 사실은 내가 생각한 내가 죽어서 천국 간다는 이 생각은 대제사장이 없는 이 요소는 사실은 x표지요. 날아가 버립니다. 내가 죽어서 천국 간다, 이 생각을 부정하고 날아가 버린다면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나 자신이 된 통으로 얻어맞는 격이 돼요. 뒤통수 얻어맞는 게 된다 말이죠. “니가 그런 생각을 할래?” 하고 누가 뒤통수를 팍 치는 것처럼. “니가 어딜 꿈을 꿔? 니가 죽어서 어딜 천국을 가? 웃기고 있네.” 하고 누가 때릴 때에 그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럽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이 진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명예와 체면을 구겨버릴 때, 사람들은 아주 못 견뎌하거든요. 진리라 할지라도 그걸 노출시켜버리면 괴로운 법입니다. 예를 들면, 드라마에 보면 이런 게 나옵니다. 재벌집하고 결혼하면서 자기가 결혼하기 전에 애가 하나 있는데 애를 숨기고 결혼했다가 나중에 자기의 사위가 그걸 남편한테 폭로할 때, 그 여자는 경악스러워하는 거예요. 분명히 결혼하기 전에 애가 있었다는 것은 맞지만, 이걸 왜 공개하느냐 이것 때문에 사람은 못 견뎌하는 거예요.
그 말은 그 상황은 뭐냐 하면, 사람은 진리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의 자존심이 진리에요. 그러면 이 천국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 현재 갖고 있는 자존심이 그대로 다치지 않고 그대로 아주 보존되어가지고 빛나게, 빛나게 더 영광을 받을 그 나라를 사람은 상상하고 있다 말이죠. 그걸 대제사장제도가 뒤통수를 때린다면 만약에 그 이야기를 그 교회에서 한다면 그 교회에 다닐 마음 안 나지요. 왜냐 하면, 기존 것이 무너졌으니까.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내가 이 고생 많은 세상을 떠나 천국 간다. 아주 간편하잖아요. 이게 나만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사람치고는 다 그렇게 갖고 있어요. 심지어 부자 되어도 마찬가지고 다 갖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부정한다면, 교회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사람들의 기존 견해를 잘했다고 박수쳐주고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 맞습니다.” 하고 수용해줘야 이게 손님이 오잖아요. 손님이 왕이니까. 교회는 하나의 사업이 된다고요. “그런데 그것은 틀려먹었습니다.”라고 해버리면 아까 한 것처럼 사람은 진리를 원하는 게 아니거든요. 사람은. 자기 자존심을 원하는 거예요.
그게 진리라 할지라도 나의 갖고 있는 생각을 모독하게 되면 사람은 그 자리를 피해버립니다. 결국은 교회가 바른 진리를 외쳐버리면 올 사람이 없게 되지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가려면 가! 어줍잖게 구경하러 오지 마!” 이 말이에요. 가려면 가라, 이 말이에요. 전혀 주님은 안 답답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자기 인생을 보고 실망하거나 답답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보고 전혀 답답해하지 않는데 우리가 내 인생을 답답해한다는 것은 내 인생에 대해서 따로 끙끙이 속으로 상상을 환상을 꿈을 꾸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절대로 주님은 답답한 게 없어요. 주님이 답답한 게 없다는 말은 이미 주님의 계획대로 그냥 밀어붙인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손님들이 안 올까 싶어서 이걸 견지해요. 그냥 허락하고 여기에 옵션, 꼭 알 필요 없는데 그냥 집어넣는 식으로 대제사장을 집어넣어요. 집어넣으니까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인간의 기존 생각과 틀어지고 반대가 되는 대제사장 개념이 아니고 일반 생각에 섞어 넣어도 전혀 물의가 없는 그런 조작된 그 엉터리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겁니다.
오늘 여기 성경의 27절에 보면,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이리 되어있지요. 자, 물어봅시다. 대제사장들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무엇이 있기에 대제사장이 있는 거죠? 백성의 죄 말고 또 누구의 죄? 자기 죄인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을 한데 연결시켜버리면 “니 죄를 알렸다?” 하기 위해서 춘향전에 보면, 춘향이 보고 변 사또가 하는 말이 “이 년, 니 죄를 알렸다?” 하잖아요. 욕을 마구 하면서. 니 죄를 알렸다? 한다 말이죠. “죄가 뭐가 있어요? 없는데.” "없으면서도 니 죄를 니가 알아라." 이런 뜻이거든요. 그 때 춘향이가 목에 맨 게 뭡니까? 형틀을 맺지요.
그 형틀이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교회 온 사람한테 뭘 하나씩 제공하는 거예요? 형틀을 하나씩 제공해서 “니 죄를 알렸다?” 하나님이 이러고 있다 말이죠. 하나님께서. 이래가지고 교회 오겠어요? 이래가지고 교회 올 마음 납니까? 마태복음 26장 2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하지요. 제가 문제 내겠습니다. 주님을 따라 갈 때 준비물이 뭡니까? ①생수 ②모포 ③칼 ④십자가. 뭡니까? 십자가지요. 그러나 대부분 인간들은 노자 돈을 들고 갑니다. 천국 갈 때.
천국 갈 때는 죽어서도 차비가 필요한 모양이에요. 죽고 난 뒤에 천국 가는 배 삯이 얼마가 있어야 합니까? 그리스신화에 나와요. 망각의 강을 떠날 때는 배 삯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저승사자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겁니다. 강 노 저어주고 차비 내고. 차비 없으면 망각의 강을 못 건너지요. 그 강이 교회에서는 요단강이라고 하지요. 요단강 건널 때 차비 얼마 줍니까? 요단강 건널 때 돈 필요해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건널 때, 모세가 1인당 어른 얼마, 애 얼마 받았습니까? 단체로 가니까 할인해 줬습니까? 20%. 그냥 홍해 건너고 요단강 건넜잖아요.
홍해건널 때는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건널지를 몰랐지요. 요단강에서는 우리가 건널 수밖에 없는 그 근거를 어떤 나무 상자로 제시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언약궤를 가지고 한 겁니다. 그것이 점 점 신약으로 다가서게 되면, 천국은 값없이 가게 되는 길은 없게 돼요. 제 말을 잘 들어야 돼요. 값없이 천국에 못 갑니다. 따라서 값없이 천국에 들어가게 돼요. 값없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한 번만 하면 안돼요. 두 번 해야 돼요. 그래야 뒤 쪽의 값없이 천국에 간다는 말이 이해가 돼요. 그러나 그냥 이야기해버리면 쥐나 개나 다 가는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값을 치르지 않으면 천국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값없이 천국에 들어가게끔 하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병들게 하는 것은 이미 감추어놓은 치료제를 드러내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서 우리에게 병들게 하고 죄짓게 하는 겁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죄보다 용서가 먼저라는 말을 했지요. 용서할 게 있고 그 다음에 용서를 용서답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짧은 순간은 그게 바로 천국이에요. 세상에 어떤 것도 무섭지 않고 어떤 것에도 겁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겁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의 의로움이 훼손될까봐 겁내고 있어요. 자기의 잘남이 무너질까봐. 그래서 마귀는 항상 그 약점을 알고 그 약점을 가지고 계속 추궁해 들어오는 겁니다. “니 그렇게 하면 교인 수 하나도 없데이.” 이런 식으로. “니가 그렇게 나오면 자식이나 남편이 니를 미워한다.” 이런 식으로. 그럼 우리는 귀를 막아요. “안돼요. 안 돼! 나는 사랑 받아야 돼!” 이런 식으로. 이건 자식도 마찬가지고 남편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 다 마찬가지고.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①슬프다. ②기쁘다. 어느 게 정답입니까? 아직까지 둘 중에서 정하면 안돼요. 그 사람이 갈데없는데 직장 나왔다면 슬프잖아요.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좋은데 있어서 나왔다. 그러면 “나를 나와 주게 했으니까 너무나 고맙습니다. 사장님. 아이고, 너무 고맙습니다. 어떻게 하면 정 뗄까 싶었는데 이렇게 때 맞게 정 떼 주시니 제가 아무 부담 없이 더 나은 직장에 갈 수 있습니다. 아이고, 좋아라. 만세! 만세!” 이러는 거예요.
이미 주어진 게 있다면,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도 상관없는 거예요. 바로 야곱이라든지 아브라함이 나그네 인생 살았던, 신앙인으로 갔던 사람의 특징이 그겁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 간에 상관없어요. 그 상관없는 그 자유함, 이 땅에서 발을 뗀 자유함을 도로 이 땅에 쏟아내기 위해서 그들은 남은 생애를 신앙인으로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있는 곳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자유함이 있다 했지요. 고린도후서3장17절 이야기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그런데 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이 말을 또 흉내 내면 안돼요. “그래, 나는 돈이 없어도 지금 죽어도 곧장 천국 가니까 참 좋아.” 라고 하는데 어떤 남자가 그런 소리할 때, 자기 부인이 “빨리 돈 가지고 오란 말이야.” 이렇게 했을 때에 뭐라고 핑계 댑니까? “나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돈은 필요 없어.” 이렇게 핑계 댈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돈 벌 데가 있어야 돈을 벌지?” 이런 식으로 뭔가 대구를 하게 돼있지요. 이건 흉내를 낼 문제가 아니고 주님께서 먼저 이런 사태를 던져주고 차후에 그걸 우리로 하여금 설명하게 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게 합니다.
사태가 먼저 일어나버렸고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말씀을 보니까 ‘아, 이것이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구나!’ 라는 것을 그 사태 일어난 후에 우리가 그걸 확인하고 파악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 말이 뭐냐, 내가 나 된 것은 이미 과거잖아요. 그 다음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로다. 6.25사변이 일어난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일제 압제 받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문창근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해요. 욕 얻어먹고 난리나지요. 문제 있게 되어있어요. 미국을 붙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건 완전히 구약의 바벨론 의지해야 산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국무총리 누가 하라 안할 때는 사람 괜찮은 사람이에요. 국무총리 아직 되지도 않았고, “하라.” 하는 그 정도만 했는데도 난리가 났잖아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에 데려다 줄게. 라고 아무 문제 없을 때는 우리는 괜찮은 사람인데, “너는 이미 천국에 가게 돼 있어.” 라고 하는 순간, 그 다음부터 주위에 있는 귀신들이 달려들어서 “얘는요, 저렇게 못됐고요, 저렇게 나쁜 짓했고요, 되지도 않는 죄를 지었고요, 하나님 말씀대로 먹지 말아야 될 걸 먹었고요.” 온갖 고자질을 다 하는 거예요. 그렇게 고소하는 자를 마귀라고 하는 겁니다.
마귀는 복음이 온 사람한테만 마귀의 눈에 다 띄게 되어있어요. 자꾸 우리의 의를 흔들어대는 겁니다. “니는 잘난 존재가 되고 싶잖아. 그런데 니가 그런 짓하면 잘난 존재가 못 되잖아. 무섭지? 무섭지? 행동 조심해야 돼!” 자꾸 이런 식으로 마귀가 시험해 온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뭐가 빠져버렸어요? 대제사장이 빠진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가 집어넣어준 거예요. “나 있고 하나님이 있으면 나는 죽으면 자동적으로 천국에 간다.” 이리 되는 겁니다. 그건 마귀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뭡니까? 여기에 반드시 대제사장 있습니다. 출애굽기28장이야기가 이게 박혀진 상태에서 대제사장을 경유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대제사장이 없는)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 계시는 나라라고 했지요. 그러면 이 전체가 X표가 된다면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그 나라 천국 맞습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진짜 하나님의 나라는 대제사장을 통해서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더 어려운 게 있어요. 이 쪽 전체를 X표 했다면,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아니요, 신이 그 신이 아니요, 그 천국이 그 천국 아니고, 그 다음에 뭡니까? 내가 생각했던 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걸 연동 같이 움직인다. 이 말입니다. 이쪽이 진동되면 저쪽도 같이 진동되듯이 같이 연결돼요. 아령이 볼록 볼록 튀어나왔잖아요. 손잡이 쥐면 같이 볼록, 볼록 올라오는 것처럼. 역기처럼.
주님께서 대제사장을 보내서 중앙을 잡고 이쪽 편에는 하나님, 이쪽 편에는 인간, 그 양쪽을 새롭게 정립해 나가시는 겁니다. 아령을 들게 되면. “니가 인간이냐?” “인간 맞습니다.” “니, 인간 맞아?” “예썰~ 저는 인간입니다.” “아이고, 니가 뭘 몰라.” “니가 생각하는 하나님 맞아?” “삼위일체 맞습니다.” “삼위일체 아니야. 그건 니가 아는 예수고. 니가 잘못된 노예에서 있었던 예수고, 복음이고, 십자가고, 전부 다 그것은 엉터리야. 니가 꿈꾸고 있는 니가 요러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은유로서, 비유로서 성경 용어들을 총동원해서 이런 걸 만들어 놓은 거야.” 그러면 내가 나답다든지 예수님이 예수님답다 하는 것은 그건 누가 날마다 보여줄 몫입니까?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보여줘야 될 주님의 솜씨고 주님의 활동성입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 항상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대목에 우리가 접어들었어요. 사실은 이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누구와 동행했어요? 이스라엘 보면 모세 있고 같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아무리 눈을 비비고 눈을 닦고 시력 좋은 안경 쓰고 봐도 그게 하나님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하나님이 안 보여요. 그러면 내린 결론은 간단해요. 하나님은 없고 우리끼리만 지금 갈 바를 모르고 가고 있다. 떼로 모여 가고 있다.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요 결론이 어떤 면에서는 인간들로서는 정직한 결론이에요. 이 정직한 결론을 근거로 해서 그들은 틈만 나면 어디로 가겠다고 하는 겁니까? 우리가 나왔던 애굽으로 가자고 10번씩이나 시험을 했어요. 그러니까 갈렙과 여호수아가 사실은 좀 부자연스러운 사람이에요. 왜? 상식적인 사람 같으면, 덩치큰사람하고 메뚜기 같은 우리하고 싸워서 누가 이깁니까? 덩치 큰 쪽이 이기지요. 메뚜기가 이길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가나안땅에 정탐해보니까 거기는 전부 다 장대같이 크다 말이죠. 그럼 게임은 끝났어요. 해보나마나 이건 게임자체가 안된다니까요. 그러니 대다수가 이건 안 됩니다, 하고 울었지요. 왜? 나와도 너무 멀리 나왔기 때문에. 그것도 나올 때 그냥 나왔습니까? 원수지간 만들어서 나왔잖아요. 도로 돌아가게 되면 전에 보다 더 고생하게 생겼어요.
남편이 집나가서 35년 만에 집에 돌아왔다 말이죠. 받아주겠어요? 안 받아주겠어요? 누님 해장국이 맛있습니다. 받아주겠어요? 안 받아주겠어요? 안 받아줘도 아, 몸이 이제 지병이 있어서 왔습니다. 온갖 핑계대면서 기어이 들어오다가 쫓겨나고 이러잖아요. ‘참 좋은 시절’드라마 보면.
요번에 출애굽기 하면서 할 겁니다. 출애굽기를 하면서 참 희한한 일이. 내 자신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과 십계명을 들어도 이건 소용없어요. 그러면 율법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바꿀 것 같으면 율법으로 충분했었다. 그런데 율법으로는 뭐만 확인하는가 하면, “안 바뀌어요. 16년 동안 율법 지켜도 안 바뀌어요.” 바뀌지를 않아요. 사람이. 바뀌는 것은 점점 더 곱으로, 곱으로 위선만 층이 더 쌓일 뿐이에요.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사나 교인이나 장로나 집사처럼 위선만 잔뜩 쌓여요. 위선만. 좀 때를 긁어내면 되는데. 자기의 몸 더러운 것을 감추기 위해서 옷만 자꾸 꿰어 입는 거예요. 옷만. 옷만 꿰어 입습니까? 옷에다가 훈장 달고 뭐도 달고. 주께서는 모든 것을 말씀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다 드러나는 거예요. 벌거벗은 채로 드러난다는 말은 창세기2장에서 위에서 인간을 본다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 인간으로 봤을 때, 그 인간과 지금의 인간과 비교해 보세요. 말이 안 되지요. 거기다가 더 나아가서 창세기2장이 아니고 아예 창세전에까지 더 나아간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과 오늘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마음에 닿는 방향성이 이것은 완전히 평행선도 아닙니다. 반대로 점점 더 멀어져가요. 반대로 달려가고 있어요. 만난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율법으로, 성경으로 만난다. 안 만나집니다. 점점 멀어져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대제사장을 여기에다가 집어넣는다는 말은 제가 집어넣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집어넣는다는 말은 결국은 인간이나 하나님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전체가 수정되어야 되겠지요. 어떻게 수정되느냐 하면, 죄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의 죄, 제사장 본인도 죄, 백성의 죄, 전부 다 죄로부터 출발하기! 이것을 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을 거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뭐가 된다 했습니까? 우리가 죄가 되지요. 그럼 우리가 생각하는 신도 신이 아니고 마귀지요. 그러면 대제사장제도가 쏙~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대제사장제도를 이용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야, 대제사장 참 옳은 대제사장이다. 저것만 이용하면 내가 살 수 있겠네.’라는 생각이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이런 생각이 들긴 들겠지만, 주께서는 이것을 허용하겠어요? 허용하지 않겠습니까? 이걸 허용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이나 성령이나 이런 모든 걸 언급을 해버리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이용하느냐, 지금보다 내가 더 나은 질적으로 낫고 오래 살고, 영광 얻고, 영광스럽게 되고 하는 뭔가 내가 평소에 내 자신에게 불만스러운 요소를 깔끔하게 해소하면서 나로 하여금 완성단계에 들어갈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를 하나님을 이용해서 뽑아내려고 시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성경에 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특히 갈릴리 지방 같은 경우에는 환영을 했지요. 환영한 이유가 뭡니까?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사람은 진리를 원한 게 아니에요. 자기 자존심을 원하고, 자신의 이익을 원하는 거예요. 나는 다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흠집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나는 소중하니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를 위로할 자는 누구밖에 없어요? 나밖에 없습니다. 나 이외에는 나를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힘내라, 하고 어깨 두드리는. 4:0으로 지고 난 뒤에 “어이, 힘내!” 하고 축구선수 자기들끼리 다독거려주잖아요. 자체 골 넣고 난 뒤에 월드컵 축구에서 자체 골, 수비수 맞고 자기편으로 넣었을 때, 브라질 수비수한테 “아, 힘내! 그럴 수 있어.” 용기를 줬더니만 3:1로 이겼잖아요. 세상에 아무리 가족이 다투어도 막상 사회에 나가면 최종적으로 나를 궁극적으로 나를 끝까지 밀어주고 도와주고 살게 해주고 찾아와주고 일으켜 세우는 것은 누굽니까? 가족밖에 없는 거예요. 교회? 목사? 아닙니다. 가족이에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자기의 혈육을 원수처럼 여기라 하는 말이 이게 지킬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목사나 이런 것은 돈만 빼먹어요. 목사가 제일 미워하는 교인은 돈 안내는 교인입니다. 이런 소리하면 다른 목사들은 속이 시원해요. 박하사탕 먹은 거 같아요. 진작 하고 싶은 그 말을 결국은 내가 지금 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진리를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천국은 돈으로도 안돼요. 요단강 들어갈 때, 홍해 건너갈 때, 모세가 돈 안 받았지요. 어른 개인당 천원씩, 아이들 오백원, 다섯 명 모이면 공짜 이런 거 없지요. 뭐로 가느냐 이 말이에요. 그들이 천국 갈 때, 무엇으로 갔느냐 이 말이에요. 돈으로 간 게 아니에요. 애들이 부르는 노래 있잖아요. 노래 부르면서 어른들이 부끄러워해야 돼요. 애들이 뭐를 부릅니까?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의 나라. 애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요. 커봐야 어른 되면 또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는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니 죄를 알렸다!” 주님 지셨던 그 주님의 형틀을 그대로 우리의 목에다가 해놓고 같이 죽자! 그걸 무슨 작전? 물귀신작전.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가 뭐냐 하면, 자기를 죄 있다고 몰아세운 그 무죄한 피고가 나중에 자기한테 무죄가 아니고 유죄 있다고 자기를 재판했던 판사를 도로 재판하는 피고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억울한 피고가 자기가 판사가 되어서 자기를 판정내린 판사를 도로 재판하는 요 이야기가 십자가 내용이라면 그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우리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으로 인하여 이 세상으로부터 일반적인 사람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지 않는다는 그러한 잘못된 길이라고 판정을 우리가 받아야 되는 이 모멸감, 받아야 되는 그 모욕감, 수용을 우리가 같이 견뎌내야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성경에 보면 십자가만 있는 게 아니고 지키라는 말씀도 있는 거예요. “너는 왜 이걸 균등하게 하지 않느냐, 왜 십자가만 강조하느냐. 이건 어떻게 하면 되느냐. 그러니까 니가 십자가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구원방법이고 그건 이단적이다.” 라는 이것을 우리가 감내해야 될 길이 십자가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죄를 압니까? 아니면 말씀 지키지 못한 걸 반성한다는 그 위로가 우리에게 생겨납니까? 어느 쪽이에요? 십계명 앞에서 우리가 진짜 근본적인 죄를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이렇게 핑계 댑니다. ‘지금 바빠서 못 지키지만 나중에 여유 있으면 반드시 못 본 척 하지 않고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그래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이런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십계명 앞에서 그런 생각이 드는데, 만약에 십자가에 앞에 섰을 때는, 십자가는 그야말로 끝이거든요. 최종적이에요.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 죽은 것을 우리가 흉내 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건 흉내 낼 수도 있겠지만, 흉내 낸다는 게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내가 가져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지고 올 수가 없어요. 십자가가 아무리 좋더라도 십자가 일부를 떼어서 가져올 수 없고 피의 일부를 나한테 찍어 바를 수 없습니다. 내가 그럴 수 없어요.
결국 대제사장은 뭐냐 하면, 이게 고정적이 되어야 되는데, 고정적이라는 말은 이 자체가 확정적이라는 말입니다. 확정적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나오지 않는 견해와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대제사장을 우리 손에 의해서 다룰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 손에 의해서. “예수님, 자고 있을 테니까 꿈에 십자가 나타나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있다? 없다? 이게 없는 거예요. “제 동생 예수님 안 믿으니까 십자가 영이 찾아오세요.” 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주의 말씀이라는 것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미 말씀을 지키게 되었는가를 후차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말씀인 겁니다. 내가 못한 것을 주께서 지금도 차근, 차근 밟아오시는구나! 를 확인하는 가운데서 우리가 이미 예수 안에 소속돼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구원이 되는 거예요.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해야 되고 더 큰 범주에요. 확고한 영역입니다. 자, 대제사장 있고 없고 참 중요하지요.
정리해 봅시다. 제사장이 가미됐다는 것은 무엇을 노리고 우리가 평소에 내가 천국 가겠다고 하는 자체가, 이 구원받겠다는 자체가, 이것이 죄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다 말이죠. 이제 그거 아셨지요? 그 이유가 근거가 뭐냐, 제사장 드리는 제사장 본인도 제사하기 전에 먼저 자기 죄부터 용서를 구해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제사장이 자기 죄를 위해서 용서를 구하는 제사를 먼저 드려도 자기 구원에 소용없고 자기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내가 제사장이라면 나 말고 다른 제사장이 또 내 죄를 짓는 그 죄의 부실함을 위해서 또 제사를 드려야 되잖아요. 그게 만약에 내가 A고 그 사람이 B라면 B가 있어서 내가 미처 못 한 그 제사를 B가 해야 되는데 그렇게 B가 나를 위해서 해줬다는 그것조차도 부실하기 때문에 C가 또 와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숫자가 많고 반복적이면서 그렇게 전개를 밟아가게 되면 마지막 최종적으로 누가 옵니까? 예수님이 오시지요.
예수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여기 27절에 보면, ‘단번’이에요. 단번. 단번에 다 되는 거예요. A, B, C, D, E....계속해서 무한으로 지연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끊어버린 거예요. 끊어버리면 예를 들면, 비닐 끝을 잡고 이불 호청 끝을 잡고 흔들어버리면 파장이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저기까지 가겠지요. 내가 흔들기 때문에 파장이 난 쪽부터 생기고 나중에 파장이 끝까지 나가잖아요.
그러니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가만히 있는데 누가 와서 나의 죄를 용서한다면 파장을 누가 흔들었어요? 주님께서 흔들어서 여기까지 왔지요. 흔드는 과정이 바로 구약의 제사장 제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이. 주님께서 시작한 일이 파장이 나한테 도달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흔들어 놓으니까 누구도 같이 흔들어요? 나도 같이 흔들리는데 흔들리면서 내게 오기까지 무수하게 많이 있었던 대제사장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어설프고 같은 인간이 온전치 못한 제사장들의 많은 흔들거림을 보면서 나도 같이 주님에 의해서 진동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뭐가 되느냐, 졸지에 죄인이 되어버립니다. 내 죄를 씻기 위해서 내가 시도하는 모든 것도 죄가 되고 그걸 씻어주기 위해서 제3자를 개입해도 그것도 부실하고 온전치 못하고 결국은 따져보게 되면, 온전한 분이 따로 계셔서 그 분에 의해서만 온전해지는 그 이외에는 어떻게든 온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에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주님만 온전했고 우리는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고백을 내어놔야겠지요. “주님은 참 훌륭하십니다.” 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주님이 훌륭한데 나도 훌륭한데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주님입니다.” 이러면 안 된다 말이죠.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고생하셨습니다.” 이리 돼야 된다 말이죠.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죄가 내 죄입니까? 주님이 알고 있는 죄가 더 기본적이고 제대로 아는 죄입니까? 주님이 알고 있는 죄지요. 그러면 내가 아는 죄보다 지금보다 더 죄의 범위가 더 넓어져야 돼요. 평생을 살면서 깊어져야 되겠지요. 그 죄의 끝이 뭐냐,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가 저를 버렸잖아요. 제가 뭘 해도 버렸잖아요. 제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해도 주님은 나를 버렸잖아요.” 이 고백.
“제 뜻은 주님을 섬기는 건데 하나님의 뜻은 그 섬긴다는 나, 제대로 섬긴다는 나를 주께서 버리시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제가 주의 뜻을 감당케 하옵소서.” 라는 것이 주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를 피해갈 수 없어요. 우리가 소원대로 다하세요. 내가 늘 기도할 때마다 하는 건데, 욕구대로 욕망대로 하세요. 그리고 이렇게 붙이지지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것이 내 뜻인데, 절대로 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암~ 그래, 니 소원대로 해줄게.” ‘아이고, 말을 잘못했다. 실은 그 뜻이 아닌데. 이렇게 겸손하게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 내 뜻도 아울러 다 이루어져야 그래야 이야기가 통하는데. 진짜 매몰차게 암! 해버리시면 곤란한데요.’ 이렇게 우리가 당황스럽게 되겠지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기도의 응답일수도 있고 또 우리가 평소에 하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주님의 기도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우리의 기도도 안 되는 기도를 했던 그 안 되는 기도의 응답으로 안 되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이 복잡합니다만, 알아서 들으세요.
늘 평소에 우리는 소망을 만들어내게 되어있어요. 우리는 소망을 안 만들어내면 한시도 지나가는 법이 없어요. 늘 어디가게 되면 집에 오면, 오늘은 뭐부터 하지? 항상 뭘 기대해야 돼요. 가기 전에 집에 가면 청소해야지, 뭘 해야지, 이렇게 마음먹고 집에 딱 오게 되면 동사무소에서 오라고 또는 과속위반 딱지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생각했던 그것이 밀리고 급하게 이것부터 처리하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합니까? “신이시여, 왜 인생을 내 뜻대로 왜 안 되게 해주십니까? 이런 건 없었잖아요.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은 사전에 기도할 때 미리 알려주지 기도할 때는 잘 듣는 것처럼 하고서는 이제 와서는 난데없는 이런 사태를 벌어지게 합니까? 제가 어떻게 처리하라고요?” 이렇게 불평하잖아요.
세월 호에 자기애가 죽어보세요. 제주도 잘 다녀오라고 했는데 아침에 이야기했는데 오후에 죽어보세요. “내가 어떻게 처리하라고?” 이렇게 나오겠지요. 기도하게 되면. 신자 같으면.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평소에 니가 하루, 하루 생활이 니가 알아서 처리해서 생긴 게 아니고 니가 어떻게 처리할 줄 모르는 인생을 저쪽에서 주님께서 흔들어서 주님의 진동으로 파생된 여파가 지금 니가 살고 있는 니 인생이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