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8강-제사장 1406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15. 08:37
2014-06-14 00:27:38조회 : 1366         
제사장 140613이름 : 이근호 (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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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218.♡.196.154)14-07-06 12:40 

안양20140613a-히7장27절(제사장) - 이 근호 목사 

대제사장에 대해서 나오기 때문에 대제사장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26절에 보면,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여기서 대제사장 되시는 분은 누구냐, 예수님이거든요.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27절, 28절에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대제사장들 그 제사장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27절에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사람들로 세워진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이 하시는 대제사장과의 차이점을 이렇게 소개시켜 놨지요. 그런데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게 되면 그냥 천국으로 올라 와라, 이러면 될 문제인데 왜 대제사장을 세워 났느냐 입니다. 

예를 들면, “천국에 오되 운전면허증 따고 오너라.” 라고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지시를 한다면 우리가 묻는 게 당연해요. “천국 가는데 왜 운전면허증이 필요합니까? 하나님.” 묻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러면 “니는 천국 가서 운전만 해야지.” 이렇게 되듯이 “니는 대제사장을 세우고 그 대제사장을 통해서 천국 오너라.” 라고 한다면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두 가지가 주어지게 되어있어요. 

뭐냐 하면, 대제사장이 없는 천국을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여기에 있다면, 한쪽은  대제사장이 있는 걸 말하죠. 대제사장은 출애굽기 28장에 아론의 자손을 통해서 세워났어요. 대제사장이 있는 것과 다른 한쪽은 여기에 하나님 나라 그리고 인간이 있는데 여기에는 대제사장이 없어요. 대제사장이 없고 그냥 하나님 계시고 또는 하나님 나라있습니다.  자, 대제사장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상상할 수 있지요. 

제가 전에 언젠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천국을 생각하고 지옥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이 세상사는 게 만족스럽지를 못한 거예요. 이 세상이 너무 살기 좋고 너무 너무 좋다. 이러면 뭐가 아까운가 하면 늙어가는 게 아까워요. “아이고, 젊어서 이 좋은 걸 즐겨야 되는데. 아! 참, 이리 좋은 세상을 내가 늙어서 죽는다 하면 너무 아깝다.” 이럴 경우에는 저 세상보다 이 세상이 더 좋은 거예요. 내 원대로 될 때, 내 뜻대로 될 때는 이 세상이 너무 좋아요. 내 뜻대로 자식들이 공부도 잘하고 내 뜻대로 내 남편도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이 다 원만하게 잘된다면 내가 이 세상 이 좋은 걸 놔두고 떠난다는 것이 오히려 아쉽지요. 

그런데 이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럴 경우가 많습니까?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힘든 경우가 많아요. 피곤하지요.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행복해도 자기 몸이 늙어 아프면요, 만사가 귀찮아져요. 사람이 이빨이 아파도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적으로도 자기 뜻대로 안되고 신체적으로 자기 몸이 아파서 잠을 못 잘 정도로 고통이 팍팍 가시로 쑤시듯이 쑤신다면 농약 먹고 죽고 싶은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럴 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마 내가 죽고 난 세상은 지금 이 세상보다는 훨씬 더 좋을 것이다.’ 라는 것을 희망을 갖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방법과 기술과 거기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유명한 단체가 교회라는 겁니다. 뾰족탑 세워서 고딕체 건물에다가 십자가 걸어 놓고 천국에 보내드리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교회가 밑져야 본전 되는 거예요. 가는 게 나은 거예요. 집구석에 앉아있는 것보다도 가서 보험 들어 놓듯이 일단 교회 가서 등록해 놓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죽고 난 뒤에 그 다음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낫다면 결국은 인생 승리하게 된 셈이죠. 그야말로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하는 것처럼 시시하게 시작했지만, 끝에는 끝내 이기리라~ ‘끝내 이길 수 있다면 이 종교는 나한테는 맞는 종교고 좋은 종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기 잘 했다 말이죠. 절에 가는 것보다는, 절에 가면 “도 닦으세요. 착한일하면 복이 옵니다.” 이것보다도 노골적으로 차라리 죽어서 천국 갑니다. 이게 훨씬 더 좋고 성당에서는 그렇게 격식을 많이 갖추니까 그게 더 불편하고, 교회는 그냥 티셔츠하나 입고 가도 아무소리 않고 반겨주니까 영세니 그런 것도 절차도 간소하니까 교회가 좋은 거죠. 

자, 그런데 결국은 제가 하는 말은 평소에 사람의 생각에 대제사장의 요소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이게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견지하고 있는 개념 속에는 이 대제사장이 있는 개념 자체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없는 상태에서 뭐만 노린다 했습니까? 방금. 죽어서 이 고생 많은 세상을 하직해도 이 세상에서 고생한 걸 충분히 보상해주고 다 위로해줄 수 있는 그 하늘나라가 있는 이상은 내가 이 생각을 견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 거예요. 나는 죽어서 천국 간다는 요 생각을 그냥 고수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뭐가 빠졌다고 했습니까? 대제사장요소는 빠져 있지요. 그 아이디어는 빠져있는 거죠.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죽어서 천국 간다. 이것만 교회에서 이야기해주면 참 교회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겠는데 만약에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오기 전부터 알고 있던 ‘내가 죽어서 천국 간다.’ 이거 말고 뭔가 대제사장의 요소를 새롭게 집어넣어버리면 그 때부터는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 하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다른 거거든요. 

대제사장이 들어가 버리면 사실은 내가 생각한 내가 죽어서 천국 간다는 이 생각은 대제사장이 없는 이 요소는 사실은 x표지요. 날아가 버립니다.  내가 죽어서 천국 간다, 이 생각을 부정하고 날아가 버린다면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나 자신이 된 통으로 얻어맞는 격이 돼요. 뒤통수 얻어맞는 게 된다 말이죠. “니가 그런 생각을 할래?” 하고 누가 뒤통수를 팍 치는 것처럼. “니가 어딜 꿈을 꿔? 니가 죽어서 어딜 천국을 가? 웃기고 있네.” 하고 누가 때릴 때에 그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럽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이 진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명예와 체면을 구겨버릴 때, 사람들은 아주 못 견뎌하거든요. 진리라 할지라도 그걸 노출시켜버리면 괴로운 법입니다. 예를 들면, 드라마에 보면 이런 게 나옵니다. 재벌집하고 결혼하면서 자기가 결혼하기 전에 애가 하나 있는데 애를 숨기고 결혼했다가 나중에 자기의 사위가 그걸 남편한테 폭로할 때, 그 여자는 경악스러워하는 거예요. 분명히 결혼하기 전에 애가 있었다는 것은 맞지만, 이걸 왜 공개하느냐 이것 때문에 사람은 못 견뎌하는 거예요. 

그 말은 그 상황은 뭐냐 하면, 사람은 진리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의 자존심이 진리에요. 그러면 이 천국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 현재 갖고 있는 자존심이 그대로 다치지 않고 그대로 아주 보존되어가지고 빛나게, 빛나게 더 영광을 받을 그 나라를 사람은 상상하고 있다 말이죠. 그걸 대제사장제도가 뒤통수를 때린다면 만약에 그 이야기를 그 교회에서 한다면 그 교회에 다닐 마음 안 나지요. 왜냐 하면, 기존 것이 무너졌으니까.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내가 이 고생 많은 세상을 떠나 천국 간다. 아주 간편하잖아요. 이게 나만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사람치고는 다 그렇게 갖고 있어요. 심지어 부자 되어도 마찬가지고 다 갖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부정한다면, 교회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사람들의 기존 견해를 잘했다고 박수쳐주고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 맞습니다.” 하고 수용해줘야 이게 손님이 오잖아요. 손님이 왕이니까. 교회는 하나의 사업이 된다고요. “그런데 그것은 틀려먹었습니다.”라고 해버리면 아까 한 것처럼 사람은 진리를 원하는 게 아니거든요. 사람은. 자기 자존심을 원하는 거예요. 

그게 진리라 할지라도 나의 갖고 있는 생각을 모독하게 되면 사람은 그 자리를 피해버립니다. 결국은 교회가 바른 진리를 외쳐버리면 올 사람이 없게 되지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가려면 가! 어줍잖게 구경하러 오지 마!” 이 말이에요. 가려면 가라, 이 말이에요. 전혀 주님은 안 답답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자기 인생을 보고 실망하거나 답답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보고 전혀 답답해하지 않는데 우리가 내 인생을 답답해한다는 것은 내 인생에 대해서 따로 끙끙이 속으로 상상을 환상을 꿈을 꾸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절대로 주님은 답답한 게 없어요. 주님이 답답한 게 없다는 말은 이미 주님의 계획대로 그냥 밀어붙인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손님들이 안 올까 싶어서 이걸 견지해요. 그냥 허락하고 여기에 옵션, 꼭 알 필요 없는데 그냥 집어넣는 식으로 대제사장을 집어넣어요. 집어넣으니까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인간의 기존 생각과 틀어지고 반대가 되는 대제사장 개념이 아니고 일반 생각에 섞어 넣어도 전혀 물의가 없는 그런 조작된 그 엉터리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겁니다. 

오늘 여기 성경의 27절에 보면,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이리 되어있지요. 자, 물어봅시다. 대제사장들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무엇이 있기에 대제사장이 있는 거죠? 백성의 죄 말고 또 누구의 죄? 자기 죄인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을 한데 연결시켜버리면 “니 죄를 알렸다?” 하기 위해서 춘향전에 보면, 춘향이 보고 변 사또가 하는 말이 “이 년, 니 죄를 알렸다?” 하잖아요. 욕을 마구 하면서. 니 죄를 알렸다? 한다 말이죠. “죄가 뭐가 있어요? 없는데.” "없으면서도 니 죄를 니가 알아라." 이런 뜻이거든요. 그 때 춘향이가 목에 맨 게 뭡니까? 형틀을 맺지요. 

그 형틀이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교회 온 사람한테 뭘 하나씩 제공하는 거예요? 형틀을 하나씩 제공해서 “니 죄를 알렸다?” 하나님이 이러고 있다 말이죠. 하나님께서. 이래가지고 교회 오겠어요? 이래가지고 교회 올 마음 납니까? 마태복음 26장 2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하지요. 제가 문제 내겠습니다. 주님을 따라 갈 때 준비물이 뭡니까? ①생수 ②모포 ③칼 ④십자가. 뭡니까? 십자가지요. 그러나 대부분 인간들은 노자 돈을 들고 갑니다. 천국 갈 때. 

천국 갈 때는 죽어서도 차비가 필요한 모양이에요. 죽고 난 뒤에 천국 가는 배 삯이 얼마가 있어야 합니까? 그리스신화에 나와요. 망각의 강을 떠날 때는 배 삯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저승사자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겁니다. 강 노 저어주고 차비 내고. 차비 없으면 망각의 강을 못 건너지요. 그 강이 교회에서는 요단강이라고 하지요. 요단강 건널 때 차비 얼마 줍니까? 요단강 건널 때 돈 필요해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건널 때, 모세가 1인당 어른 얼마, 애 얼마 받았습니까? 단체로 가니까 할인해 줬습니까? 20%. 그냥 홍해 건너고 요단강 건넜잖아요. 

홍해건널 때는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건널지를 몰랐지요. 요단강에서는 우리가 건널 수밖에 없는 그 근거를 어떤 나무 상자로 제시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언약궤를 가지고 한 겁니다. 그것이 점 점 신약으로 다가서게 되면, 천국은 값없이 가게 되는 길은 없게 돼요. 제 말을 잘 들어야 돼요. 값없이 천국에 못 갑니다. 따라서 값없이 천국에 들어가게 돼요. 값없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한 번만 하면 안돼요. 두 번 해야 돼요. 그래야 뒤 쪽의 값없이 천국에 간다는 말이 이해가 돼요. 그러나 그냥 이야기해버리면 쥐나 개나 다 가는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값을 치르지 않으면 천국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값없이 천국에 들어가게끔 하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병들게 하는 것은 이미 감추어놓은 치료제를 드러내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서 우리에게 병들게 하고 죄짓게 하는 겁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죄보다 용서가 먼저라는 말을 했지요.
용서할 게 있고
그 다음에 용서를 용서답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짧은 순간은 그게 바로 천국이에요.
세상에 어떤 것도 무섭지 않고 어떤 것에도 겁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겁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의 의로움이 훼손될까봐 겁내고 있어요. 자기의 잘남이 무너질까봐. 그래서 마귀는 항상 그 약점을 알고 그 약점을 가지고 계속 추궁해 들어오는 겁니다. “니 그렇게 하면 교인 수 하나도 없데이.” 이런 식으로. “니가 그렇게 나오면 자식이나 남편이 니를 미워한다.” 이런 식으로. 그럼 우리는 귀를 막아요. “안돼요. 안 돼! 나는 사랑 받아야 돼!” 이런 식으로. 이건 자식도 마찬가지고 남편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 다 마찬가지고.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①슬프다. ②기쁘다. 어느 게 정답입니까? 아직까지 둘 중에서 정하면 안돼요. 그 사람이 갈데없는데 직장 나왔다면 슬프잖아요.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좋은데 있어서 나왔다. 그러면 “나를 나와 주게 했으니까 너무나 고맙습니다. 사장님. 아이고, 너무 고맙습니다. 어떻게 하면 정 뗄까 싶었는데 이렇게 때 맞게 정 떼 주시니 제가 아무 부담 없이 더 나은 직장에 갈 수 있습니다. 아이고, 좋아라. 만세! 만세!” 이러는 거예요. 

이미 주어진 게 있다면,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도 상관없는 거예요. 바로 야곱이라든지 아브라함이 나그네 인생 살았던, 신앙인으로 갔던 사람의 특징이 그겁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 간에 상관없어요. 그 상관없는 그 자유함, 이 땅에서 발을 뗀 자유함을 도로 이 땅에 쏟아내기 위해서 그들은 남은 생애를 신앙인으로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있는 곳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자유함이 있다 했지요. 고린도후서3장17절 이야기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그런데 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이 말을 또 흉내 내면 안돼요. “그래, 나는 돈이 없어도 지금 죽어도 곧장 천국 가니까 참 좋아.” 라고 하는데 어떤 남자가 그런 소리할 때, 자기 부인이 “빨리 돈 가지고 오란 말이야.” 이렇게 했을 때에 뭐라고 핑계 댑니까? “나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돈은 필요 없어.” 이렇게 핑계 댈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돈 벌 데가 있어야 돈을 벌지?” 이런 식으로 뭔가 대구를 하게 돼있지요. 이건 흉내를 낼 문제가 아니고 주님께서 먼저 이런 사태를 던져주고 차후에 그걸 우리로 하여금 설명하게 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게 합니다. 

사태가 먼저 일어나버렸고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말씀을 보니까 ‘아, 이것이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구나!’ 라는 것을 그 사태 일어난 후에 우리가 그걸 확인하고 파악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 말이 뭐냐, 내가 나 된 것은 이미 과거잖아요. 그 다음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로다. 6.25사변이 일어난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일제 압제 받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문창근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해요. 욕 얻어먹고 난리나지요. 문제 있게 되어있어요. 미국을 붙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건 완전히 구약의 바벨론 의지해야 산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국무총리 누가 하라 안할 때는 사람 괜찮은 사람이에요. 국무총리 아직 되지도 않았고, “하라.” 하는 그 정도만 했는데도 난리가 났잖아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에 데려다 줄게. 라고 아무 문제  없을 때는 우리는 괜찮은 사람인데, “너는 이미 천국에 가게 돼 있어.” 라고 하는 순간, 그 다음부터 주위에 있는 귀신들이 달려들어서 “얘는요, 저렇게 못됐고요, 저렇게 나쁜 짓했고요, 되지도 않는 죄를 지었고요, 하나님 말씀대로 먹지 말아야 될 걸 먹었고요.” 온갖 고자질을 다 하는 거예요. 그렇게 고소하는 자를 마귀라고 하는 겁니다. 

마귀는 복음이 온 사람한테만 마귀의 눈에 다 띄게 되어있어요. 자꾸 우리의 의를 흔들어대는 겁니다. “니는 잘난 존재가 되고 싶잖아. 그런데 니가 그런 짓하면 잘난 존재가 못 되잖아. 무섭지? 무섭지? 행동 조심해야 돼!” 자꾸 이런 식으로 마귀가 시험해 온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뭐가 빠져버렸어요? 대제사장이 빠진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가 집어넣어준 거예요. “나 있고 하나님이 있으면 나는 죽으면 자동적으로 천국에 간다.” 이리 되는 겁니다. 그건 마귀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뭡니까? 여기에 반드시 대제사장 있습니다. 출애굽기28장이야기가 이게 박혀진 상태에서 대제사장을 경유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대제사장이 없는)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 계시는 나라라고 했지요. 그러면 이 전체가 X표가 된다면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그 나라 천국 맞습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진짜 하나님의 나라는 대제사장을 통해서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더 어려운 게 있어요. 이 쪽 전체를 X표 했다면,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아니요, 신이 그 신이 아니요, 그 천국이 그 천국 아니고, 그 다음에 뭡니까? 내가 생각했던 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걸 연동 같이 움직인다. 이 말입니다. 이쪽이 진동되면 저쪽도 같이 진동되듯이 같이 연결돼요. 아령이 볼록 볼록 튀어나왔잖아요. 손잡이 쥐면 같이 볼록, 볼록 올라오는 것처럼. 역기처럼. 

주님께서 대제사장을 보내서 중앙을 잡고 이쪽 편에는 하나님, 이쪽 편에는 인간, 그 양쪽을 새롭게 정립해 나가시는 겁니다. 아령을 들게 되면. “니가 인간이냐?” “인간 맞습니다.” “니, 인간 맞아?” “예썰~ 저는 인간입니다.” “아이고, 니가 뭘 몰라.” “니가 생각하는 하나님 맞아?” “삼위일체 맞습니다.” “삼위일체 아니야. 그건 니가 아는 예수고. 니가 잘못된 노예에서 있었던 예수고, 복음이고, 십자가고, 전부 다 그것은 엉터리야. 니가 꿈꾸고 있는 니가 요러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은유로서, 비유로서 성경 용어들을 총동원해서 이런 걸 만들어 놓은 거야.” 그러면 내가 나답다든지 예수님이 예수님답다 하는 것은 그건 누가 날마다 보여줄 몫입니까?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보여줘야 될 주님의 솜씨고 주님의 활동성입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 항상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대목에 우리가 접어들었어요. 사실은 이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누구와 동행했어요? 이스라엘 보면 모세 있고 같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아무리 눈을 비비고 눈을 닦고 시력 좋은 안경 쓰고 봐도 그게 하나님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하나님이 안 보여요. 그러면 내린 결론은 간단해요. 하나님은 없고 우리끼리만 지금 갈 바를 모르고 가고 있다. 떼로 모여 가고 있다.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요 결론이 어떤 면에서는 인간들로서는 정직한 결론이에요. 이 정직한 결론을 근거로 해서 그들은 틈만 나면 어디로 가겠다고 하는 겁니까? 우리가 나왔던 애굽으로 가자고 10번씩이나 시험을 했어요. 그러니까 갈렙과 여호수아가 사실은 좀 부자연스러운 사람이에요. 왜? 상식적인 사람 같으면, 덩치큰사람하고 메뚜기 같은 우리하고 싸워서 누가 이깁니까? 덩치 큰 쪽이 이기지요. 메뚜기가 이길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가나안땅에 정탐해보니까 거기는 전부 다 장대같이 크다 말이죠. 그럼 게임은 끝났어요. 해보나마나 이건 게임자체가 안된다니까요. 그러니 대다수가 이건 안 됩니다, 하고 울었지요. 왜? 나와도 너무 멀리 나왔기 때문에. 그것도 나올 때 그냥 나왔습니까? 원수지간 만들어서 나왔잖아요. 도로 돌아가게 되면 전에 보다 더 고생하게 생겼어요. 

남편이 집나가서 35년 만에 집에 돌아왔다 말이죠. 받아주겠어요? 안 받아주겠어요? 누님 해장국이 맛있습니다. 받아주겠어요? 안 받아주겠어요? 안 받아줘도 아, 몸이 이제 지병이 있어서 왔습니다. 온갖 핑계대면서 기어이 들어오다가 쫓겨나고 이러잖아요. ‘참 좋은 시절’드라마 보면. 

요번에 출애굽기 하면서 할 겁니다. 출애굽기를 하면서 참 희한한 일이. 내 자신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과 십계명을 들어도 이건 소용없어요. 그러면 율법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바꿀 것 같으면 율법으로 충분했었다. 그런데 율법으로는 뭐만 확인하는가 하면, “안 바뀌어요. 16년 동안 율법 지켜도 안 바뀌어요.” 바뀌지를 않아요. 사람이. 바뀌는 것은 점점 더 곱으로, 곱으로 위선만 층이 더 쌓일 뿐이에요.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사나 교인이나 장로나 집사처럼 위선만 잔뜩 쌓여요. 위선만. 좀 때를 긁어내면 되는데. 자기의 몸 더러운 것을 감추기 위해서 옷만 자꾸 꿰어 입는 거예요. 옷만. 옷만 꿰어 입습니까? 옷에다가 훈장 달고 뭐도 달고. 주께서는 모든 것을 말씀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다 드러나는 거예요. 벌거벗은 채로 드러난다는 말은 창세기2장에서 위에서 인간을 본다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 인간으로 봤을 때, 그 인간과 지금의 인간과 비교해 보세요. 말이 안 되지요. 거기다가 더 나아가서 창세기2장이 아니고 아예 창세전에까지 더 나아간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과 오늘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마음에 닿는 방향성이 이것은 완전히 평행선도 아닙니다. 반대로 점점 더 멀어져가요. 반대로 달려가고 있어요. 만난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율법으로, 성경으로 만난다. 안 만나집니다. 점점 멀어져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대제사장을 여기에다가 집어넣는다는 말은 제가 집어넣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집어넣는다는 말은 결국은 인간이나 하나님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전체가 수정되어야 되겠지요. 어떻게 수정되느냐 하면, 죄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의 죄, 제사장 본인도 죄, 백성의 죄, 전부 다 죄로부터 출발하기! 이것을 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을 거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뭐가 된다 했습니까? 우리가 죄가 되지요. 그럼 우리가 생각하는 신도 신이 아니고 마귀지요. 그러면 대제사장제도가 쏙~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대제사장제도를 이용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야, 대제사장 참 옳은 대제사장이다. 저것만 이용하면 내가 살 수 있겠네.’라는 생각이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이런 생각이 들긴 들겠지만, 주께서는 이것을 허용하겠어요? 허용하지 않겠습니까? 이걸 허용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이나 성령이나 이런 모든 걸 언급을 해버리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이용하느냐, 지금보다 내가 더 나은 질적으로 낫고 오래 살고, 영광 얻고, 영광스럽게 되고 하는 뭔가 내가 평소에 내 자신에게 불만스러운 요소를 깔끔하게 해소하면서 나로 하여금 완성단계에 들어갈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를 하나님을 이용해서 뽑아내려고 시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성경에 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특히 갈릴리 지방 같은 경우에는 환영을 했지요. 환영한 이유가 뭡니까?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사람은 진리를 원한 게 아니에요. 자기 자존심을 원하고, 자신의 이익을 원하는 거예요. 나는 다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흠집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나는 소중하니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를 위로할 자는 누구밖에 없어요? 나밖에 없습니다. 나 이외에는 나를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힘내라, 하고 어깨 두드리는.  4:0으로 지고 난 뒤에 “어이, 힘내!” 하고 축구선수 자기들끼리 다독거려주잖아요. 자체 골 넣고 난 뒤에 월드컵 축구에서 자체 골, 수비수 맞고 자기편으로 넣었을 때, 브라질 수비수한테 “아, 힘내! 그럴 수 있어.” 용기를 줬더니만 3:1로 이겼잖아요. 세상에 아무리 가족이 다투어도 막상 사회에 나가면 최종적으로 나를 궁극적으로 나를 끝까지 밀어주고 도와주고 살게 해주고 찾아와주고 일으켜 세우는 것은 누굽니까? 가족밖에 없는 거예요. 교회? 목사? 아닙니다. 가족이에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자기의 혈육을 원수처럼 여기라 하는 말이 이게 지킬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목사나 이런 것은 돈만 빼먹어요. 목사가 제일 미워하는 교인은 돈 안내는 교인입니다. 이런 소리하면 다른 목사들은 속이 시원해요. 박하사탕 먹은 거 같아요. 진작 하고 싶은 그 말을 결국은 내가 지금 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진리를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천국은 돈으로도 안돼요. 요단강 들어갈 때, 홍해 건너갈 때, 모세가 돈 안 받았지요. 어른 개인당 천원씩, 아이들 오백원, 다섯 명 모이면 공짜 이런 거 없지요. 뭐로 가느냐 이 말이에요. 그들이 천국 갈 때, 무엇으로 갔느냐 이 말이에요. 돈으로 간 게 아니에요. 애들이 부르는 노래 있잖아요. 노래 부르면서 어른들이 부끄러워해야 돼요. 애들이 뭐를 부릅니까?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의 나라. 애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요. 커봐야 어른 되면 또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는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니 죄를 알렸다!” 주님 지셨던 그 주님의 형틀을 그대로 우리의 목에다가 해놓고 같이 죽자! 그걸 무슨 작전? 물귀신작전.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가 뭐냐 하면, 자기를 죄 있다고 몰아세운 그 무죄한 피고가 나중에 자기한테 무죄가 아니고 유죄 있다고 자기를 재판했던 판사를 도로 재판하는 피고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억울한 피고가 자기가 판사가 되어서 자기를 판정내린 판사를 도로 재판하는 요 이야기가 십자가 내용이라면 그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우리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으로 인하여 이 세상으로부터 일반적인 사람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지 않는다는 그러한 잘못된 길이라고 판정을 우리가 받아야 되는 이 모멸감, 받아야 되는 그 모욕감, 수용을 우리가 같이 견뎌내야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성경에 보면 십자가만 있는 게 아니고 지키라는 말씀도 있는 거예요. “너는 왜 이걸 균등하게 하지 않느냐, 왜 십자가만 강조하느냐. 이건 어떻게 하면 되느냐. 그러니까 니가 십자가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구원방법이고 그건 이단적이다.” 라는 이것을 우리가 감내해야 될 길이 십자가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죄를 압니까? 아니면 말씀 지키지 못한 걸 반성한다는 그 위로가 우리에게 생겨납니까? 어느 쪽이에요? 십계명 앞에서 우리가 진짜 근본적인 죄를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이렇게 핑계 댑니다. ‘지금 바빠서 못 지키지만 나중에 여유 있으면 반드시 못 본 척 하지 않고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그래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이런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십계명 앞에서 그런 생각이 드는데, 만약에 십자가에 앞에 섰을 때는, 십자가는 그야말로 끝이거든요. 최종적이에요.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 죽은 것을 우리가 흉내 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건 흉내 낼 수도 있겠지만, 흉내 낸다는 게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내가 가져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지고 올 수가 없어요. 십자가가 아무리 좋더라도 십자가 일부를 떼어서 가져올 수 없고 피의 일부를 나한테 찍어 바를 수 없습니다. 내가 그럴 수 없어요.  

결국 대제사장은 뭐냐 하면, 이게 고정적이 되어야 되는데, 고정적이라는 말은 이 자체가 확정적이라는 말입니다. 확정적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나오지 않는 견해와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대제사장을 우리 손에 의해서 다룰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 손에 의해서. “예수님, 자고 있을 테니까  꿈에 십자가 나타나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있다? 없다? 이게 없는 거예요. “제 동생 예수님 안 믿으니까 십자가 영이 찾아오세요.” 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주의 말씀이라는 것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미 말씀을 지키게 되었는가를 후차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말씀인 겁니다. 내가 못한 것을 주께서 지금도 차근, 차근 밟아오시는구나! 를 확인하는 가운데서 우리가 이미 예수 안에 소속돼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구원이 되는 거예요.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해야 되고 더 큰 범주에요. 확고한 영역입니다. 자, 대제사장 있고 없고 참 중요하지요.  

정리해 봅시다. 제사장이 가미됐다는 것은 무엇을 노리고 우리가 평소에 내가 천국 가겠다고 하는 자체가, 이 구원받겠다는 자체가, 이것이 죄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다 말이죠. 이제 그거 아셨지요? 그 이유가 근거가 뭐냐, 제사장 드리는 제사장 본인도 제사하기 전에 먼저 자기 죄부터 용서를 구해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제사장이 자기 죄를 위해서 용서를 구하는 제사를 먼저 드려도 자기 구원에 소용없고 자기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내가 제사장이라면 나 말고 다른 제사장이 또 내 죄를 짓는 그 죄의 부실함을 위해서 또 제사를 드려야 되잖아요. 그게 만약에 내가 A고 그 사람이 B라면 B가 있어서 내가 미처 못 한 그 제사를 B가 해야 되는데 그렇게 B가 나를 위해서 해줬다는 그것조차도 부실하기 때문에 C가 또 와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숫자가 많고 반복적이면서 그렇게 전개를 밟아가게 되면 마지막 최종적으로 누가 옵니까? 예수님이 오시지요. 

예수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여기 27절에 보면, ‘단번’이에요. 단번. 단번에 다 되는 거예요. A, B, C, D, E....계속해서 무한으로 지연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끊어버린 거예요. 끊어버리면 예를 들면, 비닐 끝을 잡고 이불 호청 끝을 잡고 흔들어버리면 파장이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저기까지 가겠지요. 내가 흔들기 때문에 파장이 난 쪽부터 생기고 나중에 파장이 끝까지 나가잖아요. 

그러니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가만히 있는데 누가 와서 나의 죄를 용서한다면 파장을 누가 흔들었어요? 주님께서 흔들어서 여기까지 왔지요. 흔드는 과정이 바로 구약의 제사장 제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이. 주님께서 시작한 일이 파장이 나한테 도달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흔들어 놓으니까 누구도 같이 흔들어요? 나도 같이 흔들리는데 흔들리면서 내게 오기까지 무수하게 많이 있었던 대제사장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어설프고 같은 인간이 온전치 못한 제사장들의 많은 흔들거림을 보면서 나도 같이 주님에 의해서 진동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뭐가 되느냐, 졸지에 죄인이 되어버립니다. 내 죄를 씻기 위해서 내가 시도하는 모든 것도 죄가 되고 그걸 씻어주기 위해서 제3자를 개입해도 그것도 부실하고 온전치 못하고 결국은 따져보게 되면, 온전한 분이 따로 계셔서 그 분에 의해서만 온전해지는 그 이외에는 어떻게든 온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에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주님만 온전했고 우리는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고백을 내어놔야겠지요. “주님은 참 훌륭하십니다.” 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주님이 훌륭한데 나도 훌륭한데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주님입니다.” 이러면 안 된다 말이죠.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고생하셨습니다.” 이리 돼야 된다 말이죠.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죄가 내 죄입니까? 주님이 알고 있는 죄가 더 기본적이고 제대로 아는 죄입니까? 주님이 알고 있는 죄지요. 그러면 내가 아는 죄보다 지금보다 더 죄의 범위가 더 넓어져야 돼요. 평생을 살면서 깊어져야 되겠지요. 그 죄의 끝이 뭐냐,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가 저를 버렸잖아요. 제가 뭘 해도 버렸잖아요. 제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해도 주님은 나를 버렸잖아요.” 이 고백. 

“제 뜻은 주님을 섬기는 건데 하나님의 뜻은 그 섬긴다는 나, 제대로 섬긴다는 나를 주께서 버리시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제가 주의 뜻을 감당케 하옵소서.” 라는 것이 주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를 피해갈 수 없어요. 우리가 소원대로 다하세요. 내가 늘 기도할 때마다 하는 건데, 욕구대로 욕망대로 하세요. 그리고 이렇게 붙이지지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것이 내 뜻인데, 절대로 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암~ 그래, 니 소원대로 해줄게.” ‘아이고, 말을 잘못했다. 실은 그 뜻이 아닌데. 이렇게 겸손하게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 내 뜻도 아울러 다 이루어져야 그래야 이야기가 통하는데. 진짜 매몰차게 암! 해버리시면 곤란한데요.’ 이렇게 우리가 당황스럽게 되겠지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기도의 응답일수도 있고 또 우리가 평소에 하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주님의 기도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우리의 기도도 안 되는 기도를 했던 그 안 되는 기도의 응답으로 안 되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이 복잡합니다만, 알아서 들으세요. 

늘 평소에 우리는 소망을 만들어내게 되어있어요. 우리는 소망을 안 만들어내면 한시도 지나가는 법이 없어요. 늘 어디가게 되면 집에 오면, 오늘은 뭐부터 하지? 항상 뭘 기대해야 돼요. 가기 전에 집에 가면 청소해야지, 뭘 해야지, 이렇게 마음먹고 집에 딱 오게 되면 동사무소에서 오라고 또는 과속위반 딱지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생각했던 그것이 밀리고 급하게 이것부터 처리하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합니까? “신이시여, 왜 인생을 내 뜻대로 왜 안 되게 해주십니까? 이런 건 없었잖아요.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은 사전에 기도할 때 미리 알려주지 기도할 때는 잘 듣는 것처럼 하고서는 이제 와서는 난데없는 이런 사태를 벌어지게 합니까? 제가 어떻게 처리하라고요?” 이렇게 불평하잖아요. 

세월 호에 자기애가 죽어보세요. 제주도 잘 다녀오라고 했는데 아침에 이야기했는데 오후에 죽어보세요. “내가 어떻게 처리하라고?” 이렇게 나오겠지요. 기도하게 되면. 신자 같으면.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평소에 니가 하루, 하루 생활이 니가 알아서 처리해서 생긴 게 아니고 니가 어떻게 처리할 줄 모르는 인생을 저쪽에서 주님께서 흔들어서 주님의 진동으로 파생된 여파가 지금 니가 살고 있는 니 인생이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218.♡.196.154)14-07-06 12:41 
안양20140613b-히7장27절(제사장) - 이 근호 목사 

아까 단번에 드린다고 이야기 했지요. 단번에 드린다는 것이 예수님 때에 와서 단번에 드린 것이고, 그러면 그 전의 제사장들은 단번에 드린다고 생각했을까요? 내 제사는 온전치 않다고 생각했을까요? 다 자기 딴아 단번에 드린다고 생각했겠지요. 이러지는 않았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서 “백성 여러분, 저한테 제물가지고 오시면 제가 여러분의 죄를 단번에 씻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드려도 소용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백성들에게 하지는 않은 거죠. 그 당시에. 

그 말은 죄라는 것이 내가 뭔가 행동을 잘못했다가 아니라 내 행동으로 인하여 주의 뜻이 완료된다는 생각을 본인이 갖게 되면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면, 단번에 모든 것을 완성하는 분이 따로 존재한다면, 그 앞에서 알랑거리면서 잘난체하는 자체가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촌에서 자기 동네에서 좀 미남이라고 우쭐대고 아가씨 눈물깨나 흘리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의 동네에 우연히 배우가 영화촬영을 왔는데 장동건이 오고 현빈이 같이 영화 촬영으로 왔다면 그 동네의 방앗간 딸이나 양조장, 과수원 딸이 보게 되면, 그 영화배우 없을 때 잘났다고 우겼던 그 남자의 인물이 어떻겠습니까? 상대가 안 되지요. 인물이. 

따라서 잘난 체한 거, 그래도 이 동네에서는 내가 이쁘다 하는 잘난 체한 자체가 도토리 키 재기란 말이죠. 하지만 구약의 단계에 있어서는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은 단계에서는 자체적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있는 사람과 그 하나님의 편에 서있는 사람의 혜택을 입어야 될 사람 간에 단호하게 위계질서가 성립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첫 째, 제사장 제도가 왜 있느냐 하는 거예요. 제사장 제도가 무엇 때문에 있다? 첫 째 시간에 무엇 때문에 있다?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제사장 제도가 왜 있는가? 단번에 해결한다. ‘내가 지난번에 절기 때, 제사장에게 양을 드렸으니까 이제는 나는 더 이상 죄 지은 게 없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전에 했던 것 가지고 대충 카바가 될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단번에’ 라는 말은 우리 쪽에서 단번에 드리는 게 아니고 “제사장님, 제가 단번에 양을 드렸지요?” 우리 쪽에서 제시한 한 번에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대제사장이 했던 그 단번이 우리한테 혜택을 주는 겁니다. 7월10일날 대속죄일날 제사장은 홀로 아무도 갈 수 없는 그 무서운 지성소에 가서 하나님과 독대하면서 거기서 뭘 내어놓느냐 하면, 약속된 피를 내어놔요. “피 가지고 왔나?” “가져왔습니다.” “뿌려라!” “예” 언약궤 뚜껑에다가 뿌렸더니만 바깥의 사람들이 용서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1년치로 보면 그 7월10일에 한 것이 단번이 되는 거예요. 단번. 

옛날부터 단번이 있었어요. 그런데 단번이 너무 많아. 그 다음에 그 제사장 늙어죽고 또 다음에 단번이라. 또 다음에 단번이라. 거기서 공통요소를 뽑아낸다면 ‘단번에’를 뽑아내지요. 결국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보게 되면 그 앞에 있던 제사장들은 예수님 쪽에서 흔들어내던 하나의 진동의 여파라고 보면 되지요. 

주님이 단번이기 때문에 그런 단번, 단번, 단번을 먼저 주님보다 역사 속으로 앞서서 미리 깔아놓은 거예요. 단번의 효과를 깔아놓은 거예요. 그러면 미리 깔아놓았다면 오늘날 시대의 십자가는 무슨 뜻입니까? 그 단번은? 지금 우리에게 단번을 매일같이 적용시켜야 되겠지요. 이걸 영어로 리셋하는 거예요. 다시 되돌리고 시동하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죽었다가 살고 살았던 인생가지고 하루를 살아보면서 또 죽고 그 다음날 또 살고 또 살아본 인생, 또 죽고 또 살고 그래서 리셋하는 거예요. 날마다 주 안에서 죽고 날마다 주께서 사는 거예요. 그 리셋하는 능력은 바로 부활의 능력에서 주어진 겁니다. 

그 부활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단번이니까 단일 생명체, 예수 안이라는 하나밖에 없는 생명체 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리셋되는 거예요. 다시 셋팅되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사는 이유가 매일 죽기 위해서 반복해서 죽기 위해서 하루를 또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럼 언제 죽는가,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의식을 할 때는 살아있다고 볼 수 있어요. ‘지금 살아있지. 살아있지.’ 그런데 언제 우리가 살아있다는 의식이 날아갑니까? 

프로포필 맞을 때. 수면 내시경 할 때. 수면내시경이거든요. 그러면 수면 내시경 마취제 안 맞고 수면에 빠지는 게 언제지요? 보통 밤 11시 넘어서 잘 때. 꿈속에 헤맬 때. 꿈속에서 나 말고 다른 존재가 나의 행세를 하면서 꿈에서 설쳐대지요. 꿈속에서는 온갖 것이 다 용납이 되고 마음껏하고 분명히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툴툴 털고 일어나고. 그리고 꿈에 보면 영화본 거, 경험한 거, 짜깁기가 되지요. 거기서 나오는 나는 전부다 조작된 내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28장 한 번 보겠습니다. 왜 다시 한 번 살고 또 죽고 또 살고 하느냐, 28장1절에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라고 되어있어요. 지금 이것은 누구보고 하는 이야기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보고 지시하는데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입어, 성신 받은 사람에게 아론의 옷을 지어서 아론 자체를 뭐합니까? 거룩하게 만들지요. 복장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제복, 유니폼, 제사장 유니폼은 이것은 모세의 아이디어도 아니고 백성들의 아이디어도 아니지요. 이것은 누가 지시한 겁니까? 하나님이 지시한 거죠. 그러면 옷이 있다는 말은 옷을 입어야 될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 옷을 입어야 될 합법화된 어떤 인물이 있다는 걸 말하지요. 그런데 이 아론 같은 경우는 늙어죽으면 그 옷은 어떻게 됩니까? 그 옷을 없애버립니까? 아니면 옷을 벗어서 다음의 제사장에게 물려주지요. 

갈라디아서3장2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 받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옷을 입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은 제사장이라는 것은 이리 보면 돼요. 제사장이라는 것은 율법의 완성이 될 때나 나타나는 어떤 인간적인 모양새 그렇게 보시면 돼요. 

율법이 완성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모든 구원계획이 완료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등장하는 그 인물이 거룩한 제사장이라 보면 됩니다. 방금 제사장 앞에 뭘 붙였지요? 거룩이란 말을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다. 거룩하신 분인데 하늘나라에 합류하려면 우리가 뭐해야 된다? 거룩해야 된다. 그런데 아까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은 뭘 생각하시겠습니까? 첫 째 시간에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자기 몸이 죽어서 좋은 나라 가고 싶어 하지요. 거기에는 뭐가 빠져있는 상태입니까? 제사장이라는 것이 빠져있는 상태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사장제도를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집어넣었다는 말은 거룩하지 않는 이상은 하늘나라에, 하늘나라가 없어서 못가는 게 아니고 있어요. 있는데, 안 넣어줘요. 거룩한 하나님이 요구하는 거룩이 되지를 않으면 하늘나라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하는데 거룩하지 않으면 안 넣어주겠다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은 오라는 말이에요? 뒤로돌아 갓! 가라는 말입니까? 가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거룩하면 되잖아요.” 하는데 인간이 거룩할 수 있는 아이디어나 방식 이런 것이 인간에게 나온 것은 일체 거부해 버립니다. 

출애굽 할 때, 모세가 가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어요? 이건 사람에게서 나온 아이디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이 모여가지고 “야~ 우리 너무 힘들다. 채찍 맞으면서 벽돌 굽는데 너무 힘들다. 어디 우리 가운데 국무총리 좋은 사람 없나? 돈도 안 밝히고 망언도 안하고 그런 사람 없나? 옳지! 모세가 있구나.” 해서 모세를 초빙했습니까? 

참, 중요한 문제인데요. 하나님이 일을 할 때, 나서면 안 해줘요.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초빙이 되어야 돼요. 이걸 제가 지난 겨울수련회 때 대전에서 창세기할 때 했는데 결혼할 때나 취직할 때 했어요. 자기가 일하고 싶고 결혼하고 싶어도 왜 안 되는가, 누가 호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제일 서러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자기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 때, 제일 그게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의 관계망 속에서 자기가 누가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사거리가 형성돼가지고 동서남북 양쪽에서 다 불러줘 가지고 내가 이 거리에서 놀고 있구나! 알아야 되는데 집구석 앉아있어도 아무리 전화 한 통화 안 오고 찾는 사람 없을 때, 이래서 내면 퇴짜 맞고 저래서 내면 퇴짜 맞고 나이가 많아서 안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할 때,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뭐냐 이 말이죠. 참, 서글프지요.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지 않으면 천국을 못 간다는 거예요. 문제가. 모세가 알아서 간 게 아니고 하나님이 모세를 호명해 줬잖아요. 모세는 땡잡은 거예요. 사실은. 누가 호명하겠어요? 누가?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호출 받겠습니까? 니를 택하여 하나님의 종이기에 호출한 거예요.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주님을 만났잖아요. 비로소 알았지요. 예수님이 호출한 줄 알았지요. 호출할 때, 그냥 호출합니까? 호명할 때. 일거리 주고 하는 거예요. 애굽에 있는 내 백성에게 가거라. 뭘 가지고 가요? 뭐가 있어야 가지고 가지. 지팡이 들고 가거라. 지팡이와 모세를 분리시킵니다. 니가 지팡이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지팡이가 지팡이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팡이한테 니가 쥐게 될 것이다. 

지팡이 든 손과 지팡이와 관계가 있어요. 지팡이를 던지니까 뱀이 되었고 뱀을 회수하니까 다시 지팡이가 된 거예요. 던지고 회수하는 과정, 이 과정 속에서 뱀 같은 애굽나라, 하나님의 원수 애굽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가 거기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쥐는 그 손 자체를 가슴에 품고 끄집어내어 보니까 문둥병 되고 다시 집어넣으니까 회복이 되지요.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모세는 그냥 하나님의 일에 그냥 호출되어서 자기가 계획하지도 않은 자기가 생각지도 않은 일에 그냥 다루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문제는 모든 성도가 다 그런 식으로 구원된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하나님을 호출하고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쪼르르 달려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자체가 상당히 어떤 면에서는 죄송스러운 면이 있지만, 진리는 진리니까 어쩔 수 없어요. 로마서8장보세요. 미리 아신 자를 그 다음 뭐라 합니까?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유 병언이가 불러도 소용없습니다. 이 만희가 불러도 소용없어요. 유 병언이나 이 만희가 부르면 우리 조직하자, 라고 나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조직이라는 게 없어요. 새롭게 조직하는 게 없습니다. 이미 용서가 먼저 있고 불러줬기 때문에 교회가 먼저 있고 불러줬기 때문에 부름 자체가 교회지, 교회 만들어라, 교회 되라, 하는 건 없어요. 

교회의 머리되는 반석 할 때, 이 교회를 생각하고 교회가 먼저 있고 베드로를 거기다가 집어넣은 거예요. 이름도 누가 짓는가, 주님이 지은 거예요. 예수님이 지은 겁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를 때는 우리 개인의 이름을 부르지를 않아요. 주님의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준 겁니다. 그 이름 속에는 주님이 하실 사명이 들어있고 그 사명으로 불러주면 우리의 일은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 우리한테 완전히 흘러넘치고 덮쳐지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를 부를 때, 세트로 불렀거든요. 누굴 불렀습니까? 모세 옆에 누가 있었어요? 아론이 있었어요. 아론이 처음부터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모세가 말을 잘 못한다고 하니까 그럼 형이 있잖아, 데려가라 말이죠. 아론은 덤이라니까요. 덤으로 가는데 출애굽기28장에 보니까 뭐가 됐어요? 제사장이 된 거예요. 그 제사장도 뭡니까? 덤이지요. 제사장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거룩하지 아니하면 내가 일부러 만들어놓은 아론처럼 되지 아니하면 나와 합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 같으면 아예 복장을 한 벌만 하지 말고 한 50만 대구인 들에게 옷을 다 입히지 왜 한 벌만 입혔을까요? 다 거룩한 백성이라면. 하나님과 인간에서 바로 쏟아지는 소낙비 오듯이 바로 쏟아지는 게 아니고 매듭을 지어서 매듭이 풀리면서 오게 돼있어요. 아까 아령이나 역기에 대해서 다시 봅시다. 

역기가 이리 있으면 이쪽이 인간이고 이쪽이 하나님이 있다면, 여기 중간에 등장할 때, 양쪽이 자동적으로 같이 등장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내가 끝머리에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중간 부분을 떼어 놓고 내가 원하는 신하고 맺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가짜입니다. 중간이 등장하면서 같이 등장하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로서 새롭게 맺어지는 관계가 우리에게 새로운 피조물에게 형성되는 하나의 내용물이 들어가야 돼요. 

백성들이 제사장을 뽑는 게 아닙니다. 아론에게 제사장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졸지에 그 제사장 앞에서 자기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하게 된다? 안 된다? 될 수 없음을 그 당시에 있는 제사장 앞에서 자기들은 온 몸으로 그걸 만끽하고 인정을 해야 돼요. 그리고 모든 말씀의 구현 점, 목적은 바로 저 제사장처럼 되는 저걸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감을 잡아야 돼요. 

하나님은 자기가 정해준 제사장들을 끌고 감으로 말미암아 뒤에 떼로 같이 모이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단강 건너갈 때, 언약궤를 누가 들고  들어갔지요? 제사장들이죠. 그리고 여리고성 점령할 때, 누가 갑니까? 제사장들이죠. 제사장들이 태권도 8단이고, 유도, 합기도 5단이고, 다들 총 들고 있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들은 뭐가 있었습니까? 그들이 의롭습니까? 아니지요. 착합니까? 아니지요.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레위언약, 제사장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소리 했잖아요. 존재도 아니고 소유도 아니고 오직 약속이라 했잖아요. 기억이 안 나지요? 제가 이야기했어요. 오 목사님 녹취한 거 보세요. 나올 거예요. 존재도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세대의 선풍기도 아니고. 구원은 돈도 아니요, 돈 있음도 아니고 돈 없음도 아니요, 내 잘남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이 반복될 때, 거룩이 반복될 때마다 발동기처럼 거기서 쉭쉭 할 때마다 거룩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거룩이. 거룩이 백성들에게 확대가 되고 확산이 되는 겁니다. 아령 같은 경우에는 중간에 손잡이 부분이 있잖아요. 양쪽에 앞뒤가 박혀있지요. 고정돼 있잖아요. 중간에 있으면 같이 등장하잖아요. 그러면 현재 우리는 제사장이 없는데 제사장제도 주세요, 이렇게 하게 되면 우리밖에 없는데 제사장이 있더라. 그러면 있음에다가 없다가 생겨버린 제사장들을 억지로 이걸 같이 끼어 넣어야 되겠지요. 이건 조립품이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끊어지지 않고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그러한 원판, 원래의 구조가 내려와야 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성부와 성자사이의 영원한 언약입니다. 왜 유 병언이도 구원 못 받고, 왜 이 만희도 구원 못 받는 줄 아세요? 이들은 창세전에 언약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격이 박탈됩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왜 모세 이름으로 구원이 안 되지요? 왜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구원이 안 됩니까? 그들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체결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바칠 정도로 대단했고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잖아요. 물 12통을 부었어요. 물 천지인데 기도하니까 불이 와서 물을 핥아 내잖아요. 다.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불을 타고 올라갔어요. 불이라 하는 것은 산소가 산화하는 현상이거든요. 화학적으로 말하면. 공기 중에 산소가 타면 불이 돼요. 그러면 그 불속에 우리가 단백질로 되어있는 단백질이라는 구조, 이것은 불에 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어떻게 올라갔습니까? 불 수레 탔는데 안탔지요. 모르지요. 또 불이 있고 그 안에는 대리석으로 해서 불연재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불 속에서 안탔다는 말입니다. 그게 약속의 세계거든요. 

약속이 아닌 세계에서의 사람은 불에 타게 되어있는데, 엘리야, 다니엘 세친구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어야 돼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걱정되는 게 내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 성경공부 해가지고 이거 해서 천국 가는 게 이게 중국산 조립품이거든요. 조립품 된다고요. 내가. 그럼 완제품이 와야 되잖아요. 완제품이 안 오면 어떻게 되느냐 와야 되는데. 완제품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궁금하잖아요. 

이미 우리가 완제품에 달려있는 한쪽 면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미 달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절대로 자기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하게 되지요. 가짜와 진짜가 이렇게 판정 났어요. 주님은 가짜를 넣어주지 않기 위해서 지금도 계속해서 사태를 일으킵니다. 본인이 가짜인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짜 맞구나! 로 가짜로 분류하는 작업을 지금도 쉬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그게 영적전쟁이에요. 지금 전쟁터에 와있어요. 우리가. 계속 가짜는 저 쪽에. 양은 이쪽에, 염소는 저쪽에 N극과 S극 각각 자기 극성을 가지고 극성을 발휘해서 분류가 착착 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게 영적전쟁이에요. 

그 분류하는 방법이 뭐냐, 이미 완제품이 먼저 있고 용서가 먼저 있고, 내가 완제품의 부속품으로 이미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게 디모데전서에 보면 내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나를 아셨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창세전에 이미 나를 아셨다 하셨어요. 아, 이게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지만, 대범한 발언이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어요? “니가 창세전에 가봤어?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궁금해 하겠지요.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았지? 니가 태어나기 전에 어떻게 알았지?” 사도바울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주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성령께서 그걸 알려줬다는 거예요. 성령께서. 

왜냐 하면, 내가 하루, 하루가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 뜻이니까. 날마다 리셋되니까. 리셋 될 때마다 창세전의 내용이 다시 한 번 자기한테 새겨지고 확인되고 수긍이 되는 겁니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산다. 어떤 경우에는 꼭 잠을 자야 죽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낮이든 밤이든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자에요. 왜냐 하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 생각이 나지를 않아요.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나니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성령 받는 그 순간 다시 한 번 그 말씀이 다시 기억나게 하지요. 말씀이 기억나면서 알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사는 모습은 굉장히 너무나도 평범해요. 평범해도 너~무 평범해요. 제가 주일날 설교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도 닦으면 100% 이단이라 했지요. 도 닦는 사람을. 도 닦는다는 말이 뭡니까? 튀려고 하지요.  평범은 가라, 이제부터는 좀 뭐가 신자다운 면모를 보이겠다고 하잖아요. 신자다운 면모가 뭐예요? 수염 기르고 하얀 옷 입고 복장도 이상한 것이 한복도 아닌 것도 개량한복 입고 이러면 또 개량한복 입은 사람이 또 욕하겠다. 뭔가 도인 흉내 내는 거잖아요. 도인 흉내 내던지 아니면 신부처럼 유니폼을 입던지 아니면 목사처럼 빼지를 달던지. 십자가 가지고 빼지를 다는 것 보면 참 희한해요. 십자가가 빼지용입니까? 십자가가 그런 용도에요? 십자가 하나마다 주님이 하나 달려있어요. 지금. 그런 거예요? 

사람이 평범하다는 것은 뭘 포기한 경우냐 하면, 내가 종교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음을 아는 사람에게 비로소 평범이 무엇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평범 중에 어떤 종류의 평범이 있느냐 하면, 평범스럽지 않게 하는 방식은 뭐냐 하면, 인위적으로 하는 모든 평범은 평범이 아니에요. 인위적으로 평범하게 사는 것도 평범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막 살아라, 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조절을 하게 되고 관리를 하게 되면 인위적인 강압을 주는 게 돼요. 인위적으로. 

그러면 아령 원판이 아니고 매일 조립해요. 잘 맞나 틀어볼까? 매일 자기 조립한다고요. 그 조립한 그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겁니까? 예를 들면, 제사장이 있는데 이 제사장이 “내가 제사장답게 살아야지.” 이게 제사장다운 겁니까? “제사장 할 일이 뭐지?” 이게 제사장다운 거예요. “내가 이렇게 되어야지.” 내가 앞에 들어가 버리면 모든 것이 인위적이 되어버려요. “주께서 오늘 할 일이 뭐지?” 이것은 내가 있을 자리에 누가 차지합니까? 주님이 차지하고 그 자리를 주체의 자리를 주님이 차지하는 거예요. 시킨 대로 살면 되는 거예요. 이게 평범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도 주께서 일어나게 하셨구나! 주여, 오늘 제가 스케줄이 어떻게 됩니까?” 비록 그 스케줄이 안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주님 소관이기 때문에 내가 안 되면 뭐하지?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오늘 이거 해야 되겠구나, 그냥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위적이지 않은 경우는 타인의 공격을 받을 건덕지가 아예 없지요. “너, 말이야! 너 말이야!” 한다면 “나? 나 없는데. 지금 누구보고 하는 거야?” 없는 나를 자꾸 공격을 해대는 거예요. 사람이 이론은 이렇지만, 실제로 살아보면요, “니는?” 대번에 이리 나와요. 그 다음에는 나는 하며, 싸움 들어갑니다. 이건 뭐 인간은 육신이기 때문에 이건 어쩔 수 없어요. 다만 지금 진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면 나보고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화를 낼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주님 증거 하는 기계라고 생각하고 주님 이야기를 해버릴 경우가 있어요. “엄마, 주님이 어떤 분인데 왜 십자가 졌지?” 이런 질문이 들어올 때, “시끄럽다.  귀찮아 죽겠다.” 이럴 게 아니라 ‘아, 애가 그런 질문하는 기적이 일어났구나!’ 이리 보면 되지요. 

그런데 자기를 변호한답시고 예수님을 자기 일에 잡아 집어던져버리게 되면 이건 자기 증거가 되지, 주님의 증거가 될 수가 없지요. 주님 증거라 하는 것은 항상 자기가 못났고 부정되는 사항과 동반시켜서 우리에게 주님을 증거 하게 하지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같이 병행해서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우리가 교회가거나 뭐할 때는 오늘 갈까? 말까? 갈까? 말까? 늘 판단과 선택을 누가 합니까? 내가 내리고 내가 결정하지요. 그러니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하기 때문에 나는 죽으면 안 되지요. 나는 계속 살아있어야 되지요. 내가 살아있으면 결과가 어떻습니까? 내 뜻대로 돼요? 안 돼요? 내 뜻대로 안되지요.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뭔가 내 뜻을 은근히 기대하고 붙잡으려고 했다는 자체를 하는 순간 그 자체를 몰랐는데 내 뜻대로 안 될 때를 통해서 제대로 보니까 내가 헛된 망상을 했다는 것이 뒤늦게 내가 발각되지요. 

그래서 내가 내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순간, 순간 우리를 깨닫게 하는 방식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제사장으로 세운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제사장이에요.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출애굽기19장에 봐도 너희 전체를 제사장나라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제사장이 자기가 자기 관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고 있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렇게 거룩하게 사는 것은, 아! 남들이 이 소리 들으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니가 거룩해? 개가 웃겠다. 개가.” 내가 이렇게 거룩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피로 거룩합니다. 이야기를 마저 들어야지. 단번에 들어야지 이야기를. 마저 들어야지. 내가 이렇게 거룩한 것은, 그럼 사람들이 얼마나 욕 하겠어요. 

자, 28절에 봅시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라고 되어있지요. 예수님이 제사장이라고 언급하기 위해서 구약 때, 먼저 세워진 제사장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특징이 뭡니까? 한결같이 뭐를 가졌다? 약점을 가졌다. 말이 어려워요. 약점을 가진 제사장은 온전하게 죄용서가 될까요? 안 될까요? 안되지요. 

그러면 말을 이어봅시다. 그럼 약점을 가진 제사장을 누가 세웠습니까? 여기 본문에 보면, 율법이 세웠지요. 자, 그럼 묻습니다. 약점을 가진 제사장을 세운 율법은 약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야 되지요. 왜? 율법은 선하니까. 로마서7장에 보니까. 선한 율법이 온전하지 않은, 약점이 있는, 흠이 있는 제사장을 세운 이유가 뭐냐 이 말이에요. 온전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악마가 설치는 것을 허용한 이유가 뭐냐, 같은 이야기에요. 왜 선한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 악이 왜 활개를 치느냐, 같은 질문을 하는 겁니다. 악 자체가 온전해야 되기 때문에. 악이 있어야 온전하기 때문에. 누가 온전한 겁니까? 악이 없는 분. 온전한 분이 따로 계심을 증거 하는 용도로서 악마마저 총동원시키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사도바울이 말했듯이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 노우(NO)가 아니고 전부 다 예스(YES)가 된다. 이것은 결코 자기가 완벽하다. 나는 약점이 없다는 말이 아니지요. 도리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렇게 약점이 많습니다, 를 계속해서 지금 고백하고 있는 중이에요. 뭐든지 나는 약점이 많습니다. 안경이 두 개네요. 안경 써도 구원 받는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문제는 그 말은 안경 쓴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약점이 있는 세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약점 없는 분을 약점 있는 사람이 찾아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약하니까 온전하신 분이 있을 거야.” 그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유한은 무한을 찾게 되어있어요. 유한은. 유한은 무한을 그리워하고 시도하고 계속 그걸 찾아가게 마련입니다. 구원받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의에요? 아닙니다. 유한이 무한을 사모하는 것 이 자체가 인간의 약점입니다.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죄에서 벗어날 길은 망막합니다. 없습니다. “나는 부족하오니 거룩한 분이 오셔서 나를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게 죄에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보세요. 반대잖아요. “저, 약점 많거든요. 저, 부족하거든요. 주님 저 살려주세요.” 이건 바리새인들이 고난 주일날 했던 소리에요. 

그런데 주님은 어떻습니까?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세상에 지금 약속이 틀어졌어요? 성부하고 성자하고 일이 잘 안됩니까? 서로 싸우고 있는 거예요? 그 말씀이 아버지여, 왜 이리 나오십니까? 그 말 같아요. 기독교 2000년 신학이 이 문제를 풀어내지를 못하고 있어요. 왜? 신학이라 하는 것은 교회의 사람 끌어 모으기 위함이고, 사람은 유한한 자기를 자기 유한성, 한계성을 느끼고 무한한 신을 찾음으로서 유한한 내가 신과 합류가 되고 내가 구원을 받는다는 그러한 죄악의 상투적인 죄를 이런 식으로 거룩한 종교의 이름으로 껍데기를 걸치고 지금도 그걸 외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성도는요, 성도가 만든 죄 있잖아요. 세리가 성전에서 뭐라고 합니까?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그걸 흉내 내면 안돼요. 그걸 니가 의인이라고 방금 세리보고 주께서 판정 내렸잖아요. 간이재판 내려가지고 즉석재판 내려가지고 했다고요.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바리새인이 “나도 그래야지.” 저도 “주여, 저도 죄인입니다.” 용서받습니까? 아니지요. 그걸 사건이라 합니다. 사건. 

사건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사건은 주체가 따로 있기 때문에 모방할 수가 없습니다. 유발 주체가 따로 있기 때문에. 사건 당한 사람이 사건을 일으킨 주체가 될 수 없어요. 자기가 시작한 일이 아니다 말이죠. 될 수가 없다 말이죠. 그러면 그 세리는 뭐냐, 주님의 하신 십자가 외침을 미리 깔아 놓은 거예요. 미리 던져놓은 거예요. 마치 구약의 제사장을 세워놓은 것처럼. 

마치 엘리야가 또는 예레미야가 묻듯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어떻게 저한테 이런 제가 선지자 노릇 안하려고 했는데 왜 자꾸 선지자 노릇하게 하십니까? 주님이여, 주께서 세우신 자기 백성 이 이스라엘을 아름다운 예루살렘을 불태우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자기가 소속했던 영역 속에서 그것이 주님한테 받아들이지를 않는다는 말은 우리는 그 영역 안에 못 빠져나오고 갇혀있다는 겁니다. 

갇힌 자를 건져내는 게 아니고 이미 건진 자를 갇힌 자 속에 살도록 셋트하는 거예요. 다시 이 세상에 또 들어가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면에서 또 갇혀있다는 것을 또 느껴요. 복음 듣고 성경 보고 은혜 받는데 30분도 안돼서 아들한테서 전화 받고 화나고. 왜 우리가 우리 육신이라는 한계를 못 벗어나고 갇혀있는 한 다시 리셋,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그것을 반복해서 반추하듯이 계속해서 일구어내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태를 일으킨 분은 바로 단번에 모든 것을 완료시키고 우리의 영원한 주체 자, 주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요 방금한 말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죄인인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죄를 깨닫게 하신 이 주님을 바라보자, 하고 우리가 요청하면 우리가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요게 바로 참 어려운 거예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과 내가 그 고백을 해야 구원받는 게 다 튀어낸다는 나에 대한 어떤 훈련된 학습된 것을 내논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 관리하는 이미지인 것이고 그것은 구원을 흉내 내는 거예요. 그것은 구원 받은 게 아니지요. 

그러니까 살되 그냥 살지 않고 막국수, 막 칼국수, 막 살아야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러니까 막 산다는 말이 일부러 나쁜 짓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코 자기가 막 살도록 자기를 용서하지 않아요. 자기를 방치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막 살도록. “안 돼! 안 돼! 스톱해야 돼!” 누구나 그렇게 한다 말이에요. 그걸 전제로 깔고 봤을 때, 뒤돌아보면 내가 스스로 관리한 것조차도 결국은 주님 안에서 보시기에 막 사는 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바로 세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주여, 내가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냥 죄인입니다.”라는 주님을 증거 하라고 미리 던져진 주님의 완제품 속에 포함돼 있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 이 말입니다. 

이제 제사장 요거하고 마감하겠습니다. 다시 봅시다. 율법이 약점이 있는 제사장을 세웠다. 율법이 제사장을 그렇게 했다, 라는 말은 그동안 사람들은 율법을 어디에 활용하고 이용했다는 말입니까? 율법이 약한 제사장을 세웠다고 했을 때는 사람들은 생각 안하고 나는 제사장. 율법 줬다. 율법에 보면 제사장은 이렇게 살고 죽~ 나오잖아요. 제사장은 과부하고 결혼해서는 안 되고 창녀와 결혼해서도 안 되고 오직 순결한 처녀와 해야 된다. 이런 게 있어요. 율법에 나와 있다고요. 그러면 그들은 했습니다. 그들은 했을 때, 내가 제사장이다. 얼마나 큰 자부심을 느끼겠습니까? 

“주여, 율법은 하나님 당신은 나를 약점 있는 제사장을 세웠지만, 제가 율법을 지킴으로서 내가 알아서 스스로 약점을 지워버렸습니다.” 라는 자부심이 나올 수 있잖아요. 있지요? 오늘날 십자가 안다는 우리가 여전히 되풀이하고 반복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과거 선배들이 이미 계속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 내가 이 말씀을 다 지키다니’ 이렇게 하거든요. 그것은 자기가 요것만큼은 누구한테 빼앗기고 싶지 않고 요만큼은 자랑질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세요. 그 순간 본인은 그 순간만큼은 잘한 게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실패하거나 망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왜? 이만큼 잘났는데. 예를 들어봅시다. 부모한테 효도하면 니하는 일이 잘된다. 부모한테 효도하게 되면 니가 만사가 잘된다. 그런 말씀이 있다고 칩시다. 그럼 말씀이 성경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잠언서에 나오는지 에베소서에 나오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분명한 말씀은 안 나오고. 부모한테 잘했더니만 이상하게 하는 일이 잘돼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본인이 약점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다고 생각합니까? 왜 없다고 생각합니까? 말씀대로 잘 살고 있으니까. 어떻게 하는데? 하는 일마다 잘되니.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되니 이것은 하나님이 니는 지금 잘하고 있는 기야, 잘하고 있는 기야, 라는 하나의 신호로 보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의리가 잘 유지되고 있다는 뜻으로 평가받는 셈이 되는 거예요. 

약점 있습니까? 내 약점은 보이지를 않지요. 상당히 위험한 순간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인간도 의리, 의리가 아니라 잘난 인생이 아니라
약점이 있는 인간으로 이 땅에 세워주셨다는 사실,
그럼 이 말씀이 말씀대로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모르는 나의 약점을 그걸 발굴하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를 죽이지 않고 평생을 살게 하신다, 이리 보시면 돼요.


그것이 바로 이미 아령 속에 이미 포함이 된 사람들의 이 땅에 사는 특징입니다. 

막 사세요! 할 때 우리가 아멘 해야 됩니다. 막 사세요! 안 그래도 막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막 살면서도 어떤 때는 스스로 막 안 살겠다고 느낄 때 그 때가 그게 약점이에요. 그게 바로 내가 미처 몰랐던 약점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이만하면 내가 참 말씀대로 순수하게 살고 있지. 나는 지금 성령에 입각해서 성령의 뜨거움으로 사는 거야.’라고 느껴질 때가 있을 거예요. “잘났다. 그래. 잘났어.”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 하게 돼있고 그 안에서 내가 이래나 저래나 죄인임을 죄인 됨을 기쁨으로 수용하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죄인 된 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온데간데없어졌어요. 죄인인데. 망가져도 죄인이잖아요. 죄인인데 망가지면 어때요. 그거하고 “주여, 지금 저는 너무 잘났는데 망가지면 안돼요. 안돼요. 더 이상 망가지면 안돼요.” 이러면 마귀가 얼마나 박수치면서 깔깔대면서 기뻐하겠습니까? 

참, 이론상 우리가 뻔히 아는데 막상 등반하다가 암벽 타다가 밧줄 놔보세요. 그 순간은 성경공부 히브리서 7장이고 뭐고 단번에 약점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리고 나오는 말은 help me. “주여, 자식 있습니다. 살려주세요. 여기서 죽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았다 합시다. “아휴, 큰일 날 뻔했네. 큰일 날 뻔했네.” 이게 바로 리셋입니다. 

우리는 매일 가슴 쓸어내리면서 “오늘도 주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아차, 오늘밤에 낙원에 데려가도 감사해야 되는데 내가 왜 이러지.” 이 쪼개짐, 요거 주님의 의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통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니라고 여기고 아닌 사람 되고자 그 시도가 그 심보가 약점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