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십자가만을 말할 수 밖에 없는가?
이근호 2006-10-18 07:53:51, 조회 : 179, 추천 : 7
왜 십자가만을 말 할 수밖에 없는가?
인간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그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다. (골 1:16) 따라서 성도라면 마땅히 다음과 같은 과정을 인식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거듭난 자아→ 예수 그리스도’
이것은 로마서 11:36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원칙과도 일치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런데
만약에 ‘부족한 자아→예수 그리스도→거듭난 자아’로 진행되는 코스는 등장한다면 이것은 완연히 비복음적이다.
즉 사람이 진정 거듭나지 못했다면 ‘ 절대 자아 추구→예수 그리스도→거듭난 자아’의 코스를 밟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성령이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아직 임하지 아니해서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
즉 “나도 거듭났다 말이야. 나도 주의 종이란 말이야. 나도 구원된 자 맞단 말이야”라고 고래고래 고함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어떤 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여기서 십자가만을 말해야 될 이유가 나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죄의 지배와 악마의 지배를 받아 왜곡된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밝히는 사건이다.
인간의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 할 수 없느니라”(요 15:22)고 하셨다.
이것은 평소에 자신조차 자신의 죄를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서 죄의 권세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 권세 아래 놀아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 앞에서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죄의 지배를 발견하고 그 죄의 지배로 인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떠밀어내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한마디로 말해서, ‘행함을 의지했다’고 원인을 찾아내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2-33)
즉 메시야의 십자가가 인간들에게 배척받을 수 밖에 없는 원인은 오직 하나, 인간들이 ‘행위에 의지해서’ 모든 진리와 죄와 구원을 논하고 있는 그 점에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자기 행함에서 ‘죄의 권세’가 나온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이나 혹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함부로 대한 것이다. 그래서 터져버린 사태가 십자가 사건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을 들이대지 아니하면, 그 인간은 여전히 날 때부터 자신은 죄의 권세 아래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저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거듭난 의로움과 거듭난 양심이나 거듭난 착실함이나 거듭난 성실함이나 거듭난 자의 최선을 다하는 성의를 가지고 다가서면 죄의 권세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성격이 급한 남편에서 아내가 자꾸만 뜨거운 국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남편을 맨날 혀바닥이 데기만 한다. 화가 난 남편이 말한다. “왜 당신이 뜨거운 국물을 주느냐?”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본인이 얼마나 성격이 급한지는 알게 하는 방식은 그 방식 밖에 없어요”라고 말이다.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행위에 의지해서 죄를 이겨보려고 애쓰는가 하는 것은, 메시야마저 인간들의 본성에 의해서 떠밀려 저 멀리 지구밖에 죽음으로서 추방된 십자가 사건 외에 다른 방식으로도 밝혀낼 도리가 없다.
십자가로 메시야께서 인간에게 다가서는 방식은 하나님에 의해서 사전에 의도한 일이다.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태가 아니다. 철저하게 계획된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을 완수하면서 비로소 ‘다 이루었다“라는 선언이 성립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것은 저주였다. 하나님의 저주였다.
예수님의 저주받음은 이미 모든 인간이 저주아래 놓여 있음을 분명히 하시겠다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저주성을 거부한다. 자신이 저주성을 거부하는 그것이 바로 악마의 품성이다.
인간들은 거의 대부분 단결하여 다음과 같이 외쳐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저주할 리가 만무하다. 저주 내리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 리가 없다. 저주하신다면 무엇 때문에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독생자를 보내겠는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희생하신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저주 아래있었다. 율법의 개입이 그 사실을 분명히 하신다.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인간의 모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이미 오랫동안 지내왔음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3:13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나온다.
예수님이 받는 저주는 예수님만 받은 저주가 아니라 우리 인간도 함께 받는 저주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굳히는 말씀이다.
만약에 이 저주성으로 출발하면 이 저주로부터의 구원되는 공식은 다음과 같이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거듭난 자아 → 예수님의 십자가’
쉽게 말해서, 못이 판자에 단단히 박혔으면 자신의 박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때리는 망치 자체를 증거하라고 못이 못으로 있는 것이다.
이미 저주받아 마땅한 자는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을 증거하기 위하여 긍휼과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그런데 이 저주성으로 출발하지 아니하는 구원의 공식은
‘자아→예수님의 십자가→ 거듭난 자아’(절대적 자아)가 되어 버린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아를 절대 자아로 변모하기 위한 이용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거듭나서 구원받는데 성공했음을 증거하는 ‘자아 절대성을 위한 증거’가 되어 버린다.
이런 자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설명 못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즉 사도 바울은 십자가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온다. 계속 십자가에 못 박힘을 세상을 향해 증거하려 한다.
그것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 ‘거듭난 자아’를 증거하는 것이 구원의 목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언약의 완성을 증거하는데 자신이 동원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언약을 말씀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뿐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가 돌아가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만 긍휼을 입히시는’ 그런 독특한 하나님이시다. (출 33:19)
이 원리가 ‘언약’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전달되는데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신 9:4-6)
이 본문 말씀에 보면, 언약 과정에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구원할 자기 백성의 의롭지 않음과 교만함을 부각시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만 하나님의 언약이 달성되고, 그 목적도 오직 ‘언약 달성’에만 있음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이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은 너희 자신에게 구원될 자격이 있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거하라는 말이다.
이 언약의 관심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이고 그 행하심은 십자가 사건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 앞이 아니면 인간들이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죄와 교만과 목이 곧음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 사건이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저주받아 마땅함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거듭난 자아→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듭난 자아→거듭난 자아→거듭난 자아’를 되풀이하는 자들이 있다.
거듭난 자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올라오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것은 처음 ‘자아의 절대성(나도 구원받을 수 있음)→예수 그리스도’이라는 틀로서 시작하면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이미 구원받은 이상 도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도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다음의 성경 구절을 도저히 이해 못한다.
“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이들은 이해하기를, 이미 살게 된 자에게 ‘죽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그들 식으로 생각하기를 사도가 이렇게 말해야 옳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미 살았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들어있느니라”라고 말이다.
이제 두 번 다시 죽음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들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가 왜 ‘죽었다‘는 표현을 성도에 대해서 써야만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모든 일의 초점이 결코 우리를 ’살려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셨음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같은 취지의 말씀이 여기에도 나온다. 고린도후서 4:10-12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사도가 성령 안에서의 능력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죽음이 우리 성도 안에서 활발하게 작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아 구원 희망→예수 십자가→자아 구원 성공’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 사도의 이런 주장이 납득이 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성령의 능력이란 사도 바울의 주장과는 달리 다음과 같다.
‘죄 때문에 나에게 죽음이 왔음→예수님의 생명→성령 안에서 활동→죽음이 관여하지 않는 상태로서 성경 말씀을 본격적으로 제대로 지키기 시작함→이로서 나는 구원된 것이 확실함’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의 생각은 이렇다.
‘새언약→ 성도에게 찾아듬 →새언약(십자가 완성)만 증거됨’이다.
이 과정에서 성도는 ‘일 한 것도 없이 죄만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언약(예수님의 살과 피)의 능력으로만 구원받았기에 날마다 십자가 안에서 죽고 또 죽는 것이 참으로 당연한 조치임을 증거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날마다 죽이시는 이유가 어디있는가?
그것은 날마다 주님께서 분주하게 일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말씀이 성도 안에서 살아나게 위하여 늘 성도를 죽이시면서 말씀 자체의 능력은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만이 증거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9-10)
이 말씀이 바로 사도가 성도들을 권면하는 취지이다. 회개와 회개의 연속이다. 권면하는 말씀이 없으면 어떻게 성도들이 자신의 구원에 이르는 근심을 할 것이며, 구원에 이르는 근심이 없으면 어떻게 회개를 할 것이며, 이 회개가 없이는 어떻게 인간들이, 값없이 주신 십자가 공로를 쳐다 볼 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나는 아무 것도 안한다. 왜냐하면 뭘 해봤자 죄로 규정받고 드러나고 회개할 꺼리 밖에 안 되는데 무엇 때문에 구태여 일은 일대로 실컷하고 욕은 욕대로 실컷 먹을 짓는 왜 하겠는가?”라고 타고난 자존심에 준해서 요령을 부린다.
이 사람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틀이 붙박혀 있는 자이다.
‘자아가 구원받기를 소망→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았음→이제 나의 의로움이나 자존심이 훼손되지 않는 방향으로 몸조심이 하자’라는 식이다.
이것도 역시 줄이면 다음과 같다.
‘절대 자아 추구→예수 그리스도→절대 자아 달성’이다.
시간론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역사→묵시→역사’
심지어 이런 자도 있다.
‘절대 자아 추구→예수 십자가 공로( 예수님 영광→거듭난 자아→예수님 영광) →절대 자아추구’
하나님이 일하시는 예수님도 일하신다.(요 5:17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이 일하시니 성령도 일하신다. 성령님도 일하시니 성도도 복음을 위하여 일하게 되어 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어찌 전파하리요” 로마서 10:14) 먹든지 마시든지 모두 다 주님을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게 되어 있다.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그 사람을 나태나 방종에 빠지지 않게 하신다. 이렇게 쉬지 않고 일하는 자의 입에서 쏟아지고 쏟아지는 말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주여,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형제를 위해서 지옥에 가라하면 가겠습니다”고! (롬 9:3)
이것이 언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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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왜 십자가만을 말할 수 밖에 없는가?
신직수 2006-10-19 08:07:46, 조회 : 96, 추천 : 0
십자가의 피의 철퇴로 세상은 다 부서져 온데 간데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눈 앞에 보이는 정확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십자가 피의 능력만이 눈 앞에 보일 뿐이다.
세상은 없고 십자가 주님만이 온 우주에 까득 차 서 계시니
어떻게 하겠는가?
십자가 주님만을 증거할 수 밖에 없다.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다.
십자가 주님의 피는 모두 죽이심이기에
세상은 이미 모두 죽어 피 범벅된 시체들뿐이다.
그 적용에 의해
성도는 그 피와 살을 마시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과 자기 행위를 날마다 죽이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에 의해 죽어가는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불신자는 자기 행위가 살아있다는 거~~
이 모두가 십자가 영광의 효과라는 거~~ 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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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심판의 개시를 말하는 겁니다.
이근호 2006-10-19 09:12:08, 조회 : 104, 추천 : 1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십자가 기준의 적용은 곧 심판의 시작을 말합니다.
심판의 기준을 심판 할 때가서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저주받는다' 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공식도 이 십자가 안에 담겨 있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그것은 십자가 사건이 이미 모든 인간이 '저주받아 죽어야 당연한 죄인임'을 알리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피해버리면 '자기 사랑'이 그냥 그대로 남게 되고 ,
십자가를 정면으로 바라보면, 거기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하나하나가 용서와 자비의 핏방울이요 살점인 것을 압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이런 자만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새언약 속에 담겨있는 뜻입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믿음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0-31)
그래서 성도는 늘 십자가를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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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사 운전해~
손무성 (Homepage) 2006-10-18 17:01:00, 조회 : 202, 추천 : 2
김기사: 사모님 어디로 모실 까요?
사모님: '나이트'로...
김기사: 왜 나이트로...
사모님: 은혜 받으러...
김기사: 교회로 안가시고....
사모님: 꼭 교회 가야만 은혜가 떨어지는것은 아니라면서....
김기사: 안됩니다.
사모님:김기사 일 고따우로 할꺼야! 운전해~
김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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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김기사 운전해~
이준 2006-10-18 18:29:41, 조회 : 191, 추천 : 0
김기사: 사모님, 어디로 모실까요?
사모님: '알파코스'하는 데로...
김기사: 왜 '알파코스'로...
사모님: '기적' 체험하러...
김기사: 왜 복음 전하는 교회로 안가시고....
사모님: 꼭 복음만 들어야 돼? 은니가 금니 된다잖아!
김기사: 안됩니다.
사모님: 김기사! 일 고따구로 할 거야? 운전해~
김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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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가 사는 고장에서 가장 오래 된 교회(제가 출석하는 교회는 아니고)가
알파코스를 도입한 후 온갖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위와 같은 기적도 자신들에게 실제로 일어났다면서
안면 있는 세 사람(한 사람은 안수집사, 또 한 사람은 권사, 다른 한 사람은 여전도사)이 말해 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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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김기사 운전해~
김헌식 2006-10-19 03:11:47, 조회 : 185, 추천 : 0
A : 믿는자는 프리메이슨에 대해 이야기 한다든지, 다빈치코드 같은 책을 읽으면 않되 !
B : 왜 그렇지요 ? 그것에 대해 알고 이야기하고, 또 그러한 책을 읽는다고 복음이 홰손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이 세상 ( 아담세계 ) 의 모든 사단적 사상을 아는 것도 복음이라 보는데요.
A : 아냐! 믿는자는 오직 예수만을 생각하게 되어있어 !
그런것을 읽고 싶다든지 알고자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관심사" 가 딴데 가 있다는 증거야 !
B : 그럼 이근호 목사님이 그동안 읽은 책들은 모두 성경적인 내용의 책입니까 ?
A : ................................
십자가마을을 사랑하는 ( 아니 이곳에서는 이리 말하면 혼나겠지요 -_- ) 사람이 이곳에서 일어나는
최근의 일련의 흐름을 보고 느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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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김기사 운전해~
이근호 2006-10-19 07:05:35, 조회 : 205, 추천 : 2
크게 오해하셨습니다.
믿는 자든 안 믿는 자든 안 봐야 될 책이란 없습니다.
도리어 안 보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런 이단 책이나 저런 이단 책을 안 보았기 때문에 진짜 정통 복음주의 맞아"라는 생각은 제가 생각해도 화가 날 생각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항상 제한적이라서 누가 뭐라고 평가하고, 소문에 누가 나쁘다고 말한다고해서 아예 상종도 안 해야 될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남들이 욕하고 나도 욕하는 그 사람의 모든 자질이 항상 내 안에도 들어있고 나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프리메이슨이든, 여호와 증인이든, 순복음이든 다빈치 코드든지 간에 늘 알아봐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다시금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만, 그런 세계에 관심을 안 가진다는 것이 곧 ,
"나는 이미 구원받은 자 맞는데 무엇 때문에 새삼스럽게 그런 이단들에게 신경 써"라는 교만일 수가 있고 이 교만의 수위가 높아지면, 교주 수준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더이상 공부를 안해도 돼.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하는 수준에 도달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적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 세계를 접하고 난 뒤에 나온 비평이나 평가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나올 고백이 아니라 , 소위 한국 정통 교회 교계들의 호응을 기대한 고백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1.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나올 고백이라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저 프리메이슨들의 주장들이 결국 '땅의 것'에 관한 탐심들이기에 우상숭배(골 3:5) 에 불과함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속성이 저에게는 항상 튀어나올 수 있으니 항상 특정 교단이나 종교를 소유하거나 그것을 사수하려고 하지 말고 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 생각해 주옵소서"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2. 그런데 소위 정통 기독교 교계의 호응을 기대한 고백이라면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옵니다.
"프리메이슨이 이단, 이단들이라고 하더니만 과연 이단 맞군요. 그런 집단을 이단이라고 지목해 내는 놀라운 지혜를 기존 교단들이 갖고 있으니 나는 기존 정통 기독교 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무한한 영광이요 다행이요 기쁨으로 여깁니다. 오 하나님이여, 우리나라의 참된 정통 교단을 저는 프리메시슨 같은 악마의 집단에서 지켜서 계속해서 바른 정통 교단이 되게 해주옵소서"라는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결코 이들을 공부하지 말라 가 아닙니다.
단지 '2 번' 고백도 프리메시슨 집단에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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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김기사 운전해~
김헌식 2006-10-20 02:31:21, 조회 : 108, 추천 : 0
목사님 감사합니다.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찾는 모든분들이 목사님과 같은 생각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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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김기사 운전해~
곽진계 2006-10-19 16:17:01, 조회 : 119, 추천 : 1
김기사: 사모님, 어디로 모실까요?
사모님: 지옥으로.
김기사: 왜 지옥으로?
사모님: 요즘 찜질방은 영 시원치 않단 말이야...
김기사: 그래도 지옥은 너무 뜨겁지 않은가요?
사모님: 그 정도는 되어야 몸도 풀리고 시원하지 않겠어?
김기사: 그런데 지옥은 아십니까?
사모님: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아! 시원하기만 하면 돼.
김기사: 그래도 안 됩니다.
사모님: 김기사! 일 고따구로 할 거야? 운전해~
김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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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와 기도하는 가벼움
이근호 2006-10-18 18:28:49, 조회 : 115, 추천 : 1
성경에 보면 무수한 신앙의 선배들이 나온다.
스데반, 욥, 사도 바울, 사도 요한, 사도 베드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거지 나사로, 특히 예수님
그들은 어떻게 인생을 보내었는가?
그들은 무슨 즐거움과 기쁨으로 일관했을까?
이런 관심사를 가지고 성경에 보면, 기도가 절로 나온다.
"주여, 저도 저들을 본받게 하옵소서"
기도가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실은 관심사가 엉뚱한 곳에 가 있기 때문에 응답이 안되다니 기도가 어렵다고 말한다.
기도하는 즐거움은, 본받아야 될 신앙의 선배들과 주님이 계시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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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결혼식에서 실제 있었던 일
이근호 2006-10-19 11:11:51, 조회 : 138, 추천 : 5
저의 사촌 동생의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결혼이벤트 회사에다 모든 절차를 맡겨나 봅니다.
정면 오른편에 커다란 케이크가 놓여 있었습니다. 높이가 1m 30cm 정도가 충분히 되었습니다.
시작 시간이 조금 남은 시점에
그런데 신부측 하객으로 온 손님 가운데 9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 그 커다란 케이크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몹시 먹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급기에 그 여자애가 아직 결혼식이 시작도 되지도 않았는데 그 케이크에 손가락에 꽂고서는 흰 크림을 푹 찍어 자기 압속으로 쏙 집어넣고서는 부리나케 뒷쪽 인파 속으로 숨어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신랑측 하객인 우리 삼촌이 보고 말았습니다.
애를 단속을 제대로 안 한 것이지요.
그 애는, 그 케이크가 누구를 위한 케이크 인지 감은 잡지만 지금 그 애의 머리속에는 온통 그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느낌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먹고 싶은 본능을 감출 길이 없었던 것이지요. (점심 때가 훨씬 지났으니까)
그러나 실은 그 거대란 케이크는 그날 결혼하는 신랑, 신부를 위한 케이크입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피조물일 뿐입니다.(골 1:16)
그런데 인간이 이성적으로 그것을 안다 할지라도, 죄된 본성상, 저주받아야 될 죄인이라는 신분은 망각하고 영생을 얻고 싶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거대한 케이크)를 자기의 구원을 위해 손가락으로 꽂어 찍어먹고서는 "영생을 얻었다!"라고 소리치고 인파 속으로 숨어들어가면 그것이 곧 성도로서 얻을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즉 나는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 더 이상 십자가나 죄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케이크에 먼저 손을 댄 그 꼬마 여자애의 부모가 제대로 된 부모라면, 그 애를 인파 속에서 찾아내고 뒷퉁수를 후려치면서 "이 못된 계집애야, 이 케이크는 너를 위한 케이크가 아니라 신랑, 신부의 혼인을 위한 케이크야. 아무리 어린애이지만 어떻게 네 밖에 몰라. 누굴 닮아 이렇지"라고 분노의 호통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애는 영원히 그 케이크를 먹지 못합니까? 아닙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 거대한 케이크가 누구를 위한 케이크인지 온 천하에 밝혀진 후에, 그 여자애를 불러서,
"얘야, 이 케이크 조각은 너의 배고픔이란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용도로 세워져 있었던 것이 아니란다. 이 케이크는 신랑, 신부가 기쁘게 그냥 공짜로 은총을 베풀어서 그래서 먹게 되는 케이크란다"라고 설명하면서 그 여자애에게 주게 됩니다.
그러면 그 여자애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아, 이 결혼식 장에 있는 모든 것이 나를 위한 화려함이나 풍성함이 아니었구나, 이 결혼식의 주인공은 꼬마인 내가 아니라 따로 계시구나"라고 느끼면서 은총의 케이크 조각을 먹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이나 영생을 주 실 때에도 , 뒤퉁수를 후려쳐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자기 구원'을 마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해석할 위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아담의 죄악된 품성 때문에 '자기 존재 사랑'이 우선이 됩니다.)
"이 나쁜 놈아, 이 피를 너를 구원하라고 흘린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만이 온 세계에 전파되라고 흘린 피이니라"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뒤퉁수를 맞은 성도는 그 어떤 상황이든지(심지어 굶어죽는 상황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 상황마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의 은총을 감사하면서 증거하라는 선물로 받은 인생으로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나 만의 구원'이라든지, '나 만의 영생'이라는 개념은 용납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런 자들의 모임이 '그리스도 몸'으로 형성됩니다.
서로 받은 케이크를 내보이면서 "이 모든 흰 크림의 케이크는 모두 우리의 죄를 위한 십자가 사건에서만 제공된 것이기에 '나는 이래서 얻어 맞았다', 혹은 '나는 저래서 얻어맞았다'를 나눈는 장소가 되며 그런 일은 성령에 의해서 생성되어지는 유기체적 교회입니다.
만약에 그 유기체적 교회를 '내 소유의 교회'로 의식하면 결과가 등장될까요?
이렇게 되면
'이제 먹을 것 먹었으니 인파 속으로 숨어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다'라는 못된 계집애의 재판이 되는 겁니다.
어느 누가 천국 못가고 지옥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이 있다고해서 천국 가는 자가 아니라 그런 구원의 욕심마저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난 그저 욕심에 일종임을 아는 것은 오직 십자가 앞에서 뿐입니다.
그런데 그 욕심을 계속 정당화하면서
영생을 얻기 위한 잠시 자신을 죄인으로 간주했었던 적인 있지만 이제 더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챙길 것 챙겼다는 겁니다. 그것을 내 소유를 전환하면 그만이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교회는 돈을 만들어내는 영업을 하는 '업소'가 되는 겁니다.
교회의 생성론은 이럴 때 필요합니다.
자신의 몸(그리스도 몸)을 그 누구의 소유로 하청해서 넘겨준 적이 없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십자가 진 적이 없고, (고전 1:13) 십자가 진 적이 없다는 말은 새언약의 표준적 모델 인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들마다 생각하는 '나의 교회'를 인정한 적이 없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교회 관리자나 책임자가 아니라 여전히 주님이 주신 십자가 용서만 붙들고 살 죄인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눈 돌리게 되면, 자신의 고유 영역이 눈에 들어오고, 그렇게 되면, 그 때부터 적과 동지, 원수와 형제가 십자가 복음 앞에서가 아니라 '나의 것'을 '나의 것'으로 인정해 줄래 안해줄래로 판정나게 됩니다.
즉 십자가 복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화제에서 벗어나, "글세 내가 내 소유의 교회를 가겠다는데 그런 자격이 있다는 말이야 없다는 말이야 분명히 말해"라는 식으로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곧 "글세 내가 배고프고 사는게 고달파서 케이크를 내 소유로 삼아서 먹겠다는데 자격이 된다는 말이야 아니된다는 말이야 분명히 말해 봐"라고 식으로 억박지르는 밖에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세울 기준을 잃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 안에서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체들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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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150년 역사가 한국 교회에 남긴 것
이근호 2006-10-19 15:55:34, 조회 : 105, 추천 : 2
일반인들이 교회에 당부하고 싶은 것들
1. 노인네들
젊을 때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나이 먹으면 누구나 장애자가 된다. 계단 올라가는데도 양 무릎에 20kg의 하중을 갖고 올라갈 지경이다. 교회에서 육체야 어떻게 하겠냐마는 말 벗이라도 되어서 무료한 세월을 잊은 듯 잊고 싶어 한다.
즉 죽을 때 죽더라도 허무의 상흔을 줄이면서 죽음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2. 장년들
아이들이 혼인이나 취업 준비로 인해 한참 돈 들어갈 나이에 직장에서나 사업체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 직장에서는 나가라고 말을 노골적으로 듣고, 사업체에서는 새로운 투자로 중무장한 경쟁 동종업체로 인해 단골 손님 마저 자꾸만 끊어진다.
아내는 남편보고 하는 말이, “평생 동안 당신한테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 남는 것은 ‘대형 쓰레기’에 불과한 당신까지 떠맡으려고 하니 내 장래가 암담하다”라고 넋두리를 늘어놓고,
남편은 아내보고, “평생을 옆에서 징징대다가 이제 좀 가정에서 안식을 누리고자 하니 날 빈데 취급하는구나. 처 자식 위해서 수 십년 동안 기계처럼 돈 번다고 이 머리카락은 빠질대로 빠지고, 허리는 허리대로 나갔다. 지금 이 나이에 내가 무슨 수로 당신의 그 높아진 생활 수준을 맞출 만큼 돈을 벌어 오냐? 나도 좀 쉬자. 살림이나 하면서 조용히 옆에 있을께”라고 말한다.
따라서 장년들이 교회에다 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힘들지 않으면서도 따문따문 쉬어가면서도 푼돈이나 벌 수 있는 요긴한 취업 정보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짐스러운 남편을 낮에는 얼굴 안 맞댈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3,40 연령대
자식에다 혼신의 정성을 다 쏟아붓는다. 남편을 직장에서 승진하는데 혼신을 다하는데 이는 수입이나 소득보다 자신의 가치를 주위로부터 인정받는데서 노동의 보람을 얻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자식을 천재로 만드는데 눈에 불을 켠다. 남편은 안중에도 없다. 돈벌어다주는 기계일 뿐이다. 남편 벌이가 시시하다고 감 잡히면 본인이 직접 돈 벌이에 나설 수 밖에 없다. 다 자식을 위한 희생이며 자식의 위대함이 곧 자신의 위대함이다.
이런 연령대가 교회에 당부하는 것은, 제발 교회에서 자꾸 불러내지 말고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먹는 점심값 정도는 성의로 헌금할 용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 내에 돌아가는 비용은 여유롭게 잘 사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충당하라고 한다. 자신들이 아직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입장에 있음을 교회 당국자가 충분히 이해달라고 한다.
4. 20대
취업과 결혼에 미쳤다. 내가 하나님에게 기도해서 취업과 결혼을 성사시키겠다는 누가 말릴 것인가! 과연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는지 없는지가 판가름 되는 경우는,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과연 기도 내용대로 응답되느냐 아니 되느냐에 달려있다.
신을 품안에 넣으려고 한다. 신을 개인용 보디가드로 여긴다. 교회라는 작은 집단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대단한 일꾼으로 인정받는다면 앞으로 창창대해처럼 넓디 넓은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점을 아예 젊은 날에 확정 짓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돈 많이 벌려면 교회 봉사에 소홀히 되게 마련이니 그 때를 대비하여 미리 시간 남을 때 충성을 많이해서. 나중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빼먹을 때 다소나마 양심이 가책이 안되도록 해 볼 요량이다.
이들이 교회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것이다. 제발 목사님들이 교회 봉사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서 저희 젊은이들을 투입시켜, 비록 헌금은 많이 못하더라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하나님 나라 확장’ 시업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곧 세상에서도 인정받을 인물이 된다는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훌륭하게 쓸 자질이 있음을 교회 내의 활동에서 확인받겠다는 것이다.
이상이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15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일반인들의 머리 속에 담겨 있는 교회관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존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들의 요구사항을 모두 다 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어느 사업체든 고객들의 명확한 요구를 외면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식으로 교회를 운명하기만 하면 된다.
교회가 이런 식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대단한 무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구원’과 ‘영생’이다. 그 누구도 실제로 천국 가본 자도 없고 지옥에 가 본 자도 없다. 하지만 지옥이 있다고 가정해 볼 때, 교회는 초권력적인 카리스마로 마구 대중들을 향하여 대범하게 휘두를 수 있다.
여차하면, 지옥 간다고 소리치기만 하면 학력과 부유층과 사회적 교양과 무식을 막론하고 꿈쩍 못하게 된다는 점을 파고드는 방식이다.
천국 가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대신 자기 백성에게는 필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했다고 하나님의 거래내역을 소개하면 된다. 그 거래내역은 주일성수요 십일조이다. 이것을 거부하려거든 신의 저주가 평생 그 사람을 따라다니고 결국에는 지옥으로 빠 질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성경보고 약간 의심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 된다.
“교회 없이 천국없다! 주님께서 지상 천국을 통해서 내세 천국을 입성케 하신다. 지상 천국인 교회 유지를 힘들게 하면서 무슨 천국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호통친다.
교회가 교회답게 유지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사항 중의 하나가 주일성수이다. 주일성수는 교회의 단합을 일주일 단위에 증강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 날에 교회에게 각종 광고가 알려지고, 비록 교인들이 주간에 자기 사업에 매달려도 교회 광고 시간에 날린 광고의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강제로라도 정기적으로 광고를 들을 수 있는 집회가 중요시된다.
둘째는, 십일조 강제 수납이다. 수입의 10%는 하나님이 요구한 헌금의 최소 비율이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도보다 더 큰 희생을 요구하셨다. 따라서 신약의 십자가를 진정 안다면 일단 십일조의 문턱은 넘어선 헌금을 교회에 바쳐야 한다. 그것을 근간으로해서 더 바치고 더 바쳐야 한다. 믿음이 없는 이는 십일조에만 그치지만 그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하다. 하지만 그 어떤 성과급도 받지 못한채 불 구덩이에서 구원받은 것처럼 영원토록 천국에서도 칭피 당하고 왕따 당한다.
이왕 천국 갈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남자답게 공로 세우면서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십일조에 머물지 말고 십의 2조, 십의 3조를 바쳐야 한다. 과연 이것이 주님의 뜻인가 의심되는 자는 일단 바쳐보고, 사회에 나가서 사업하면서 그 이상으로 보상 받는지 아니받는지 본인이 직접 시험해 보면 되질 않는가!
이렇게 해서 주일성수에 최선을 다하고 십일조를 양심에 어긋남이 없이 바친 교인들은 일단 자신이 ‘천국 보험’ 속으로 이미 들어와 있음에 상당히 안심을 하게 된다. 즉 죽고 난 뒤의 일은 이제 걱정 안해도 되는 것이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로서 등록을 마친 상태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막대한 정기 수입으로서 20대 청년들을 양성하여 교회의 미래 일군을 맡길 조직 구성에 나선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네들 끼리 결혼하고 아이들 낳게 되면 저절로 주일학교 학생들은 확보되고, 그들의 교회 다닌 햇수에 비례해서 제 때에 직분 승진시켜 주면, 승진 할 때부터 교회 비품 하나 줄 씩 생기고, 또한 인간에게는 뭔가 맡겨놓으면 자신의 위신과 체면과 자존심에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죽을똥 살똥 봉사하기 때문에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젊은 연령대에 막대한 자금을 대면서 양성하는 것이다.
어린 사람은 몇 푼 안 주어도 큰 자비를 베푼 것처럼 교회에 초반 호감이 깊이 뇌리에 새겨지기 마련이다.
“네가 계속 신앙 양심 있다면, 먹었거든 배나 갚으면 돼”라는 식이다.
이것이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남긴 교회 내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죽으심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런 쪽으로 나가면 전문 성직자로서 노후 대책까지 보장된다.
예수님이 죽으심을 잊는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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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 손성식 목사님 글
이근호 2006-10-19 18:41:54, 조회 : 129, 추천 : 2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난 이 땅에서 솟구쳐 오르는 천의 담론들을 믿지 않는다. 난 그것들을 정수기의 필터 없이 무작정 사실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난 누에고치처럼 천의 겹으로 싸인 천의 베일을 벗기려는 작업을 한다. 그래서 난 먼저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난 역사를 밋밋하게 보지 않는다. 진흙구덩이에서 뒹군 것 같은 흔적들이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 겉으로 포장된 것은 단지 권력현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얼마나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나사렛 출신이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젊은이의 처형사건이 왜 아담역사 전역을 문제시 하는 것일까? 무슨 근거로 역사를 뒤엎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일까? 로마 변방의 한 식민지에서 일어난 정치적이면서 또한 종교적인 이 처형은 단지 한 “해프닝”이었으며, 그와 친했던 몇몇 사람들의 기억으로 남을 사건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의 죽음을 전 역사의 문제로 몰아간 것일까? 역사책은 입을 다물고 있다. 왜?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기에.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전지구적, 아니 전우주적 사건으로 와 닿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래서 난 “우발적”이라는 나만의 언어를 사용한다. 어떤 이들에겐 이 “우발적”이라는 말이 기존의 표현양식인 “섭리적”이라는 말과 배치된다는 느낌을 가져다줄지 모르겠다. 이에 대해서 난 “우발적”이라는 표현양식에 대해서 좀 보충을 해야겠다. 즉, 우발성은 그 기저에 “언약의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 방 한 편으로 흐르고 있는 “수맥”같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우발적 사건이란 언약의 흐름 속에서 튀어나오는 현실이다. 마치 흐르는 강물 속에서 고기가 종잡을 수 없이 튀어 오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 나사렛 출신으로 골고다에서 처형당한 예수의 죽음은 언약사건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역사의 한 가운데서 펼쳐진 하늘세계의 지진과 같다. 즉, 역사 안에 펼쳐진 묵시적 현실이다. 난 “묵시적”이란 말을 매우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은폐성 때문이다. 그렇다고 땅에 묻어두었다는 말이 아니라, 아담세계가 도무지 알아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동작중이기 때문이다. 아담세계의 지혜나 능력으로 가두어 둘 수 없다. 왜? 주도권 문제에서 아담세계는 “관계자외 출입금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제시하려는 문제는 복음의 우발성과 묵시성이 아담역사의 한 가운데서 “도그마틱”으로 변질되는 현실을 경험하더라는 것이다. 그것도 “정통과 이단”이라는 딜레마로써. 가둬지지 않는 흐름을 사람들은 가두어서 썩은 물, 깨끗한 물로 나누어서 자기네들끼리 편가르기를 할 뿐만 아니라, 심판까지도 서슴치 않았다는 얘기다. “정통이란”이름으로. 그렇다고 내가 이단을 편들자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난 오늘날 “또 아니면 모”라는 식의 대중들의 무지를 항상 통감한다. “정통 아니면 이단”이라는 극단적인 편가르기는 그 내막의 핵심을 항상 감춰버린다. 왜? 열린 역사의 중심엔 항상 “정통”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난 한국이란 땅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목사가 됐다. 나의 경험에서 한국의 신학교는 “정통”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강하다. 한편으론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신학의 정통성이 보장되지 못한 신학교나 교단은 생존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일까? 보다 더 큰 문제는 장로교단 내에서 정통성 문제가 아니라,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정통성 문제이다. 내 경험에서 신학이란 3세기-15세기가 소각된 종교개혁신학으로 점철되었다. 어떤이들은 나에게 대들지도 모르겠다. 종교개혁신학의 중요성을 왜 저해시키느냐고. 하지만 그런 얘기가 아니다. 도대체 아담세계가 생산한 내용이 무엇이기에 종교개혁까지 왔느냐는 것이다. 즉, 복음이 아담세계 안에서 구박받고 있었느냐는 문제의식이다. 사람들의 잔머리 때문에. 도대체 괜찮은 역사는 없다. 역사란 구역질이 난다. 언제 한 번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했는가? 이것은 미시적으로 나의 인생을 통해 확인된다. 구역질난다. 그렇다고 반성하자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왜? 아담세계의 죄의 욕망은 습관적이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
하여튼 오늘은 [영지주의]를 문제 삼고자 한다. 사실 “영지주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더 문제이긴 하지만. 하지만 더 한심 한 것은 개판 같은 한국 상황을 염두에 두면 도대체 “영지주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지주의 보다 훨씬 못한 “성공을 생산해내는 기업”으로 전락해버린 현실교회의 모습에서 어느 누가 영지주의를 나무랄 수 있을까? 물론 관심도 없겠지만. 자본이 모든 것을 장악해 버린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문제 삼고 있는 저자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박수만 치고 있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저자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파헤치고 싶어서. 저자의 주장에서 신선한 점은 “영지주의”이단성 시비가 내용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라는 주장이다. 난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점이다. 물론 영지주의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사실 저자도 얘기하고 있는 것이지만 “영지주의”란 일관되고 잘 정리된 사상체계가 아니라서 종잡을 수 없는 점이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중요한 점은 “영지주의”가 조직화 되어가는 기존의 “주교-사제-부제-평신도”라는 체제를 거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영지주의”이단성 판정이 바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 경험하는 “교권”, “총회장”, “목사-장로-집사-평신도”, “교황-추기경-주교-사제-부제-평신도”, “목사-강도사-전도사-신학생”등 어느 것 하나 권력관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왜? 이유는 아담세계가 “힘 있음”이라는 죄-관계아래 있기 때문이다. 힘에 의한 우열관계가 아담세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라는 종교현상 아래서도 부각된다. 이것은 복음으로부터 솟아나는 은혜관계를 내쫓는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 권력관계가 은혜관계를 몰아내는 것이다. “힘 있음”이 “힘 없음”을 쫓아내고 있다. 교회 아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 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아님에 경악했듯이 나도 교회 한 가운데서 교회 아님에 깜짝 놀란다. 물론 미시적으로는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저자의 글이 편파적이라는 소감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옳다. 모든 글들은 편파적이다. 하지만 이런 편파성에서 이전에 발견하지 못한 기존의 편파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그 또한 중요한 일이 아니던가.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 이후에 십자가의 증거가 시야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토착화되고 말았다. 십자가라는 걸림돌은 제거대상 1호가 되었다.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는다. 왜? 어떤 이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납득되지 않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자, 십자가가 외면된 교회사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의 배설물로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거짓말로 위장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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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 ,신학의 위기, 목회의 위기
최종운 2006-10-19 23:37:24, 조회 : 122, 추천 : 0
인문학의 위기, 신학의 위기, 목회의 위기
인문학적 소양 대신 돈 잘 버는 기술이 최고인 사회와 교회는 무너진다
인문학의 위기 : 대학은 취업 준비 학교로 전락한 지 오래
지금 우리사회와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위기에 봉착했다고 위기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한마디로 자본주의 시장 경제 질서에 따라 인문학이 돈이 되지 않아서 철저히 외면당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학문의 기초가 인문학인데 기초를 외면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자원 낭비를 부추기는 과학기술과 소모적인 사치 산업과 잔머리를 잘 굴리게 하는 서비스 분야만 가르치다 보니 사회는 점점 물질화되고 따라서 몰인정해지고 흉폭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경제 성장과 선진국 진입의 국가적 기초가 인문학인데 이를 기초로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문학이 괄시를 받고 천시를 받고 있는 것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공계열 학과 이외의 인문학과 학생들은 졸업을 유보하고 취업 준비를 한다고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답니다. 인문학도들은 졸업을 앞두고 현실과 괴리된 전공 탓에 취업 문제로 대부분 비슷한 딜레마에 빠져 고시 공부는 소수의 수재들만 신분 상승 수단으로 하지만 이외의 학생들은 호구지책으로 공무원 시험에 전력을 다 하고 있는 풍경이 오늘날의 우리나라 대학교의 모습입니다. 어떤 대학은 공무원 특성화 대학으로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홍보하는 것을 보면 대학이 취업 현실과 연계되지 못한 인문계 학문을 계속 하기란 어려운 가 봅니다. 이제 대학은 진리와 지성과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호구지책과 신분 상승의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업이 요구하는 연수원과 직업훈련원으로 격하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무조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교육입니다. 학생들은 입시 전에 자신의 적성을 고려해 진로를 결정하고 그에 부합되는 대학의 학과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적성보다는 부모의 뜻에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의 장래가 걱정되기 때문이지요. 인문학 전공하여 빈들빈들 놀면 부모로서 속이 터지기 때문에 이공계열 졸업해서 졸업하자마자 취직하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적성과는 상관없이 모조리 의과대학이나 한의대를 지원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신분 상승과 돈을 잘 벌기 때문입니다. 수능 성적 상위권의 대학 진학 분포도를 보면 돈 잘 버는 학과로 몰리는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기능의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원래 대학은 학문 연구와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나갈 소수 엘리트를 키우는 곳이었습니다. 변질된 자본주의는 그러한 기능을. 바꿔 놓았습니다. 오늘날의 대학은 지식을 돈으로 교환하는 교환가치가 얼마나 크게 포장할 것인가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은 돈을 잘 버는 학과 위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산업 인력과 직업 전문 인력의 양성소로 전락한 것입니다. 과학·기술 교육이 대학에 도입되었고, 이렇게 도입된 과학·기술 교육과 연구는 인문학을 밀어내고 대학의 중심으로 양적 팽창과 함께 정착한 것 같습니다. 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문학은 어렵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골치가 아프다는 거지요. 생각을 하기가 싫고 철학적 사유는 현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인문학이 위기라면 그건 대학의 위기이고, 대학의 위기는 곧 대한민국의 위기가 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가 주는 타락한 정신적 진흙탕에 온몸을 담구고 희희낙락한 돈의 맛을 탐닉하고 있어 돈이 되지 않은 헛소리는 개소리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몸부림치는 인문학의 위기는 극복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학의 위기는 극복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의 위기도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에 심각한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제도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기본적인 생존조건으로 세계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들조차도 그들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시장경제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없이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말도 합니다. 오늘날 지구촌 세계는 무조건적인 동물적 경쟁과 결과적인 효율성만을 강조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와 윤리의식이 실종되고 있으며 절차적인 정당성도 상실되었습니다. 오로지 약육강식의 동물적인 생존경쟁만 있습니다.
신학의 위기 : 신학대도 돈 되는 학과만 개설
우리나라의 대학이 이렇게 실용주의적 학문과 돈이 되는 학문 위주로 되어간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현상으로 어찌 할 방도가 없는 지구촌의 현상입니다. 인문학이 추락했다면 신학은 어떻습니까? 그 거대한 사탄적 자본주의가 맹열한 돈의 위력으로 인문학을 점령하고 있는데 신학이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신학은 교회가 있게 한 모태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현상을 보면 신학도 위기란 것을 관찰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학의 위기는 교회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심각하게 인식해야 하는 한국교회의 위기는 대형교회의 브랜드목사들에게 대부분의 원인이 있습니다. 타락한 시장경제의 원리로 복음을 전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복음을 추락하게 만들고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서 세련된 상품으로 팔아 보겠다는 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복음을 포장하는 테크닉만 발달하게 한 신학적 결과이므로 신학의 위기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단순히 교인 감소 등 외적 성장의 정체만이 문제가 아니고 신학의 전반적 정체성이 위기로 인해 목회 위기로 치닫고 있는 것이지요. 신학자라 하더라도 교회 현장에서 신학적 사고와 실험은 없고 실용적 목회 마케팅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인지 부흥사인지 의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문학의 위기가 신학으로까지 넘어오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신학대학은 과거의 신학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한마디로 돈이 되는 실용적인 학과를 개설하여 종합대학교로 전환한 대학들이 유행했습니다. 각 교단의 신학대학도 그러했고 무소속 신학대학도 '짬뽕' 대학교로 전환하여 신입생을 마구잡이로 선발하여 일반대학교와 경쟁하고 있습니다. 돈이 되지 않은 신학대학은 구석에 밀쳐놓은 채 학교 구색으로 존재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아들을 보면 그 아버지를 알 수 있고 제자를 보면 그 스승을 압니다. 현재 한국교회 목사를 보면 신학대학교의 교수들을 보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물량위주의 교회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논리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은 신학대학에서 잘못 가르쳤거나 아니면 목사 자기 마음대로 신학을 변질시킨 것 중에 둘 중의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실용주의적인 과학은 가시적으로는 우리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고는 있지만 비가시적인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잠재적인 피해와 손해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용주의적인 과학은 우리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더우기 신학조차도 실용적인 신학이 목회 성공이란 빌미로 성장신학, 번영신학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대부분 그 본래적 기능에서부터 벗어나서 세상을 구원하는 그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실하고 우리들만의 예수굿판축제로 복음을 즐기고 있는데 이는 건전한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분명히 예수님이시지만 그분의 의도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머슴(종)들이 자기 명예와 목회 성공을 위해서 돈 더 많이 벌기 위해서 기독교 시장거리에서 복음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머슴들이 파는 싸구려의 복음이 진짜 복음인냥 오해하고 있습니다. 짝퉁 복음이 진짜로 오인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인들은 짝퉁 복음에 대한 매력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이런 복음이라면 별것 아니구나 하면서 진짜 복음에 대한 무관심과 세상 가치관과 다를 바가 없는 식상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는 이미 사회에서 가장 낙후된 집단 중 하나로 인식된 지 오래입니다. 그 흔한 상가 교회가 이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왜냐하면 장사가 되지 않아 문을 닫았거나 부도가 나서 정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의식있는 교인들은 개척 교회로 가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인 헌금 강요가 정도가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짐이 너무나도 무겁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은 불신자들도 잘 압니다. 교회의 권위와 목사의 권위도 추락한 지 오래입니다. 이런 교회의 위기는 곧 목회의 위기로 다가 옵니다. 이것은 사회적 공신력 추락으로 이어집니다. 목사가 살인, 사기, 간음과 같은 범죄로 매스컴을 타게 되고, 무인가 신학교에서 무자격 목사를 양산하게 되니 목사의 사회적 공신력은 점점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교회가 사회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게 되는 요인은 교회의 물량주의, 지나친 독선과 배타주의, 교파 분열, 교세확장, 지나친 헌금 강요, 품위를 상실한 성직자, 사회 구제와 봉사에 인색함 등입니다.
목회의 위기 : 실용적인 축복으로 연명하는 교회
우리 한국교회에 복음을 전해 준 미국 교회는 쇠퇴하는 단계를 지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에도 부흥하는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교회는 자본주의적 마케팅 기법과 경영학적 테크닉으로 사람들의 관심사를 집중시키고 스트레스 해소 욕구를 적절히 복음으로 포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의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보다 문 닫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미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는 오순절 계통의 순복음 교회와 기복 신앙과 축복을 강조하는 교회들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성장 콤플렉스입니다. 빠른 시간 안에 교회 성장을 위해서 목회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런 콤플렉스는 경제 성장을 이룩한 한국 경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한국 경제는 그동안이 성장 이면에 감추어진 부작용들이 이제야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도층의 부정부패, 귀족 노조들의 파업, 공무원 사회의 부정부패 구조화, 각종 개발로 인한 부동산 투기의 일상화, 반공이데올로기의 기계적 세뇌화로 우민화된 계층의 양산화, 부익부 빈익빈의 급속화, 등등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까지 부패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한국교회의 위기적인 국면은 성장해 오던 한국 교회의 성장률 둔화와 교회안의 여러 가지 잡음으로 인해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크게 추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목회의 위기는 신학과 목회 현장의 괴리에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목회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의 요구는 신학적인 요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샤마니즘적인 기복제화 수준의 실용적인 축복을 요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런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 때문에 신학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이로 인해 신학적 가치와 세속적 가치 사이의 갈등은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유물론적 물질주의, 성공출세주의, 업적주의, 명예, 감투지향주의, 촌지, 로비 뇌물, 황금만능주의, 사치, 과소비 풍조 등과 같은 세속적 가치가 그대로 교회에 유입되어 목회의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주도권은 지본의 규모에 있습니다. 즉 자본금이 많은 회사는 작은 규모의 자본금을 가진 회사를 흡수하는 현상이 교회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형 교회 등장은 주변의 작은 교회의 교인감소로 영향이 미칩니다. 마치 대형 쇼핑 마트 등장으로 주변의 작은 슈퍼와 소매점의 매출 감소로 이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성장이 급속하게 된 대형 교회의 공통점은 물량주의와 편의 시설 극대화, 기복적인 마케팅을 잘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대형 교회는 무당 종교로서의 기능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고 복채를 많이 헌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당 종교의 특징은 역사 의식과 윤리 의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무당종교화되면 자연히 기독교도 역사 의식이 없어지고, 윤리 의식도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꿩 잡는 게 메”식의 결과주의적 무당 목회 철학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의 우수한 점은 종교의 오락성에 있습니다. 무당이 하는 굿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는 재미있는 날입니다. 지금과 같은 오락이 별로 없을 때는 굿판이 스트레스 해소의 재미를 주었습니다. 그런 굿판의 오락성이 지금은 부흥회가 그 재미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한판의 굿판을 벌인 것만 보아도 굿판의 오락성은 무시할 수 없는 이방 종교의 타락된 죄성의 원초적 모습입니다. 목회를 성경과 개혁적인 모습으로 하지 않고 교인들을 현실 감각을 마비시켜 잠시 위안과 기쁨을 주는 공간 종교로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불교와도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대양 육대주에 제각각 다른 생태적 환경과 경제, 사회, 문화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각각 다른 문화를 미국의 주도 하에 단일 경제권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화하여 각민족의 생태적 환경을 파괴시킴은 물론 고유한 민족과 사회 구조를 분열시키고 모든 인문학적 가치관을 파괴시켜 오로지 돈이 최고의 기치로 받아들이도록 무역 전쟁을 하서라고 미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글로벌 무역 정책의 실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런 글로벌 경제로 인한 세계화로 우리 생활이 편리함과 문화의 수준은 나아질지 모르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유대감은 상실되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가 해체되고 교회와 목회에도 영향이 끼칠 것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곧 신학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총체적인 학문의 위기는 사회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사회의 위기는 곧 신학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신학의 위기는 결국 목회의 위기로 우리앞에 섭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착한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고 기능적으로 법과 제도를 이용하는 나쁜 사람들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사회적 풍토를 보면 총체적 위기라고 할 만합니다. 진짜 하나님의 종들은 작은 교회와 농촌 교회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고생하고 있는데 기능적, 신학적 지식을 소유한 박사학위 브랜드의 덕택으로 호의호식(好衣好食), 호거호차(好居好車)하는 것은 교회의 위기이자 목회의 위기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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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근호 2006-10-20 09:45:52, 조회 : 116, 추천 : 0
우리 나라에서 1년에 3000(삼 천)개의 개척교회가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매일 80개 교회가 문닫는 겁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갯수의 교회가 문을 열겠지요.
교회를 무당과 오락과 연관시킨 것은 참으로 잘 보셨습니다.
오락을 즐기면서도 '거룩'의 티로 가장하고 싶어 중장년층은 교회를 아직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의 성스러운 교제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면서 실은 온통 여가 활동에 관심이 가 있습니다.
말씀에 관심 없기는 이래나 저래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말씀없이 신앙생활하기로 아예 작심을 하고 교회 다니는 것 같습니다.
목사도 목회 그만두고 생업에 뛰어들면 얼시구나 하고 말씀부터 포기하고 스트레스 푸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바꿀 것이 틀림없습니다.
중이 고기맛을 알고부터 벽에 파리가 남지 않는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복음적인 개그가 하나 나왔습니다.
"꼬봉아, 꼬봉아, 죽어라!"
그저 우리 성도는 조용히 죽기만 해도 수지 맞는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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